2024-02-18(D1)-주일예배(2530, 눅16,26-31), '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속뜻 (2).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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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속뜻 (2)

 

 

26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27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28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29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30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31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눅16:26-31)

 

 

악 안에 있는 사람들은 주님으로부터 모든 사람에게 끊임없이 흘러들어오는 선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뿐만 아니라 그것을 멀리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악을 끊기 전에는 천국의 선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천국의 비밀 9346, 이순철 역) ...those who are in evils not only do not receive the goods which continually flow into everyone from the Lord; but also absolutely turn them away. And therefore a man cannot possibly receive the good of heaven until he abstains from evils. (AC.9346)

 

 

여러 해 전에 우울증을 앓던 어떤 배우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데 그가 지옥에서 고통 가운데 부르짖는 소리라며 음성파일이 인터넷에 떠돈 적이 있습니다.

 

※ 지난 2008년, 스스로 생을 마감한 배우 최진실씨 말씀인 듯합니다. 저 역시 이 음성파일을 들어본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음성파일 속에서 그 배우는 지옥은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운 곳이며, 그러므로 세상에 사는 동안 생명을 소중히 여겨 지옥에 오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했다고 합니다. 저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그 녹음파일은 의도를 가지고 조작한 것이 분명합니다.

 

※ 아니면, 누군가 무슨 집회 중에 잠시 그 배우의 영에 빙의(憑依)되어 부르짖는 걸 녹음한 것일 수도 있는데요, 저는 그때 들으며, 이렇게 느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빙의는 일종의 신접(神接)으로, 주님이 금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이 금하셨어도 사람들 중에는 기어코 범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지요...

 

천국이나 지옥은 주님의 특별한 섭리가 아니면 아무나 접근할 수 있는 곳이 아니며, 녹음기를 가지고 갈 수 있는 곳은 더욱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이 그 일로 충격을 받았고, 그러나 잠시 그때뿐, 그리고는 곧 다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잊혔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증언에 의하면, 천국의 천사나 지옥의 영들은 그들의 생각을 사람들의 마음속에 불어넣을 수는 있지만 직접 말을 걸 수는 없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그런 것을 조작해 퍼뜨렸을까요? 어쩌면 그들은 천국의 천사나 지옥의 영들로부터 사후의 이야기를 직접 듣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세상에 사는 동안 좀 더 진지하게 사후의 삶을 대비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겠지요. 오늘 말씀에서 지옥에 떨어진 부자도 비슷한 생각을 합니다. 세상의 형제들이 지옥에서 고통받는 자신의 처지에 대해 알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에게 뭐라고 하셨을까요? 본문의 말씀을 통해 그 내용이 어떤 것인지 알아보겠습니다. 먼저 26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26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주님께서 부자가 있는 지옥과 거지가 있는 천국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있다고 하십니다. 천국과 지옥 사이에 있는 큰 구렁텅이란 어떤 것일까요? 천국이나 지옥을 이루는 것은 사람들 마음속에 있는 사랑인데 두 사랑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큰 간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천국 천사들의 사랑은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며, 또는 선과 진리에 대한 사랑입니다. 반대로 지옥 악마들의 사랑은 자아와 세상에 대한 사랑이며, 또는 악과 거짓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천국의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주님을 사랑하고 반대로 자아는 미워하지만, 지옥의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자아를 사랑하는 대신 주님을 미워합니다. 이와 같이 천국과 지옥에 사는 사람들의 사랑은 정반대여서 영원히 상종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둘 사이에 건널 수 없는 큰 구렁텅이입니다. 그런가 하면 “큰 구렁텅이”는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 사후에 잠시 머문다는, 이른바 ‘영들의 세계’라고도 하는 ‘중간 영계’를 뜻하기도 합니다. 중간 영계에 머물던 사람이 그곳을 떠나 천국, 또는 지옥으로 가면 그 후에는 영원히 다시 돌아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중간 영계, 또는 영들의 세계에 대해 “천국과 지옥” 421항은 이렇게 말합니다.

 

영인들의 세계는 천국도 아니고 지옥도 아니며, 둘 사이의 중간 지역이다. 왜냐하면 그곳은 사람이 사후에 처음 들어가는 곳이고, 그 후 때가 되면 세상에서의 삶에 따라 그곳으로부터 천국으로 들어 올려지거나 또는 지옥으로 던져지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순철 역) The world of spirits is not heaven, nor is it hell, but it is the intermediate place or state between the two; for it is the place that man first enters after death; and from which after a suitable time he is either raised up into heaven or cast down into hell in accord with his life in the world. (HH.421)

 

주님께서 부자에게 천국과 지옥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있어 영원히 오고 갈 수 없다고 말씀하시자, 부자가 절망하며 말합니다.

 

27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28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부자는 세상 살 때 말씀에 대해 많이 안다 자부했지만, 그러나 말씀을 따라 살지는 않았습니다. 말씀에서 ‘부자’의 속뜻은 진리에 관한 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결국 지옥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후회가 되겠습니까? 아마 지옥의 실상을 미리 알았더라면 결코 위선자로 살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의 상황을 세상의 가족들에게 알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천국에 계신 주님께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으로 보내 증언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간곡히 말씀드렸습니다. 말씀에서 내 아버지의 집은 세상에 있는 교회를 뜻합니다. 아버지는 주님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형제는 누굴까요? ‘형제’는 보통 말씀에 따라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뜻하지만, 여기서는 부자와 같은 교회 안의 사람들, 즉 말씀에 대해 알면서도 지키지 않는 위선자들을 뜻합니다. 형제가 다섯이라고 할 때 ‘다섯’ 역시 보통은 작은 것을 뜻하지만, 여기서는 모든 사람을 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형제 다섯에게 증언하게 하라는 것은 교회 안의 모든 위선자들에게 지옥의 실상을 그대로 알려달라는 뜻입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부자에게 말씀하십니다. 29절 말씀입니다.

 

29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말씀에서 ‘모세’는 좁은 의미로는 모세가 기록한 다섯 권의 말씀을 뜻하지만, 넓은 의미로는 구약의 모든 역사적인 말씀을 뜻합니다. 그리고 ‘선지자’는 구약의 예언의 말씀을 뜻합니다. 따라서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하시는 것은 세상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구약의 말씀이 있기 때문에 굳이 천국의 천사들을 보내지 않더라도 말씀에 순종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듣는 것’은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지옥의 부자는 또 한 번 간청합니다.

 

30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부자는 왜 그렇게 말했을까요? 세상 사람들은 감각적인 사람들이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눈에 보이는 기적, 즉 죽은 자가 살아 돌아오는 기적이 더 설득력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주님도 세상에 계실 때 병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시며, 많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주님을 그렇게 따라다녔던 사람들은 오히려 주님을 비난하고 욕하기 바빴습니다. 심지어 주님의 제자들도 다 흩어져 버리고, 주님 곁에 남은 사람은 사랑하는 제자 하나와 몇 명의 여인들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기적의 설득력은 일시적인 것일 뿐 영원할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 “하나님의 섭리” 134항은,

 

기적은 사람들을 설득해 일시적으로 예배 가운데로 이끌 수 있지만 동시에 그들에게서 합리성을 빼앗고, 악을 가두는 일을 한다. 그래서 기적의 주문이 풀리면 오히려 갇혔던 악이 튀어나와 불경한 짓을 하고, 신성을 모독한다. (이순철 역) Communication with the dead would have the same result as miracles (of which just above), namely, that a man would be influenced and driven into worship for a short time. But as this deprives a man of rationality and at the same time shuts his evils in, as was said above, the captivation or the inward bond is undone, and the imprisoned evils break out, with blasphemy and profanation; (DP.134r)

 

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기적의 설득력은 주문과 같아서 일시적으로 악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지만 시간이 지나 효과가 느슨해지면 사람들을 이전보다 더 악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자가 “만일 죽은 자들 중에서 내 가족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그들이 회개하리이다”라고 말했을 때, 주님께서는

 

31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설사 죽은 자가 살아 돌아오더라도 결코 주님을 따르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기적은 사람들에게서 자유를 빼앗고, 합리적 사고를 빼앗으며, 그렇게 해서 영적으로 더 나빠지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자유가 없는 상태에서 선택한 모든 행위는 사람의 생명이 되지 못합니다. 오직 자유의지로 선택한 것만이 생명이 되어 그 사람 안에 영원히 남습니다. 그것을 분명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 거지 나사로와 부자에 대한 두 번째 말씀을 나눴습니다. 새 교회 가르침에서는

 

세상에서 악을 행하면 마음속에 지옥이 생기고, 그러므로 그 사람은 가장 작은 형태의 지옥으로 변하고, 반대로 선을 행하게 되면 마음속에 천국이 생겨 가장 작은 형태의 천국이 된다.

 

고 합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매 순간의 선택에 따라 천국 형상이 되기도 하고, 지옥 형상이 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사는 동안 사람들은 이렇게 천국과 지옥의 중간에서 균형을 이루며 살아갑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그 중간 지대를 큰 구렁텅이에 비유합니다. 큰 구렁텅이는 사후에는 건널 수 없는 곳이지만,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각자의 자유로운 선택에 따라 오고 갈 수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큰 구렁텅이’는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의지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지금이라도 주님을 사랑하고, 자아와 세상을 미워하는 사람은 구렁텅이 위에 있는 천국의 문이 열리고, 그곳으로부터 천국의 거룩한 것들이 그에게로 넘치게 흘러들어오지만, 반대로 자아와 세상을 사랑하고, 주님과 이웃을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천국의 문이 닫히고 구렁텅이 아래 쪽의 지옥의 문이 열리면서 지옥의 온갖 더러운 욕망들이 흘러들어옵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의 누적들이 사후에 우리들을 천국 또는 지옥으로 이끕니다. 주님께서는 에덴동산 한 가운데 생명나무를 두시고, 그 옆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심으로써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인간은 그 자유를 통해 스스로 하나님의 생명을 취하여 자신의 생명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든 강요에 의한 것은 인간의 생명이 될 수가 없습니다. 기적도 일종의 강요이기 때문에 기적을 통해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세상에 사는 동안 각자의 자유의지를 소중히 생각하고, 바르게 사용해야 합니다. 부자는 세상에 살 때 주님이 끊임없이 초대하시는 잔치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일들에 바빴고, 그것들이 너무 재미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그는 스스로 자유를 버리고, 욕망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 사후에는 지옥으로 떨어졌습니다. 자유를 버린 대가가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세상의 가족들에게 나사로를 보내 증언하게 해달라고 했겠습니까? 자유가 있는 동안 자유를 선용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이 진리를 사랑하시는 모든 분과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둠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곳을 알지 못하느니라 (요12:35)

 

아멘

 

원본

2021-07-18(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4-02-18(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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