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예배(2024/3/1, 마24:35-40), '故 권성조(權聖祚, 1923생 - 2015졸, 향 91세) 9주기 추모(追慕) 예배'
즐겨찾기/한결같은교회.예배 2024. 2. 29. 10:41
시작
지금부터 작년 11월 5일, 포천 황동묘원에서 이곳 파주 크리스찬 메모리얼 파크로 새롭게 모신 故 권성조(權聖祚, 1923생 - 2015졸, 향 91세) 아버지, 할아버지 추모(追慕) 예배를 드리겠습니다.
찬송
28장, ‘복의 근원 강림하사’
설교
다들 오늘 특별히 삼일절(105주년) 아침, 원근 각처에서 서둘러 오시느라고들 수고 많으셨습니다. 주께서 그 귀한 걸음들 위에 복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은 민족의 아주 특별한 날인 삼일절이면서, 한편으론 고 권성조 우리의 아버지, 할아버지 9주기 되는 기일이기도 합니다.
이 ‘기일’(忌日)이라는 표현은 다른 말로는 제삿날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아니면, 우리는 이런 예배가 아닌, 제사를 드리기 위해 모였을 것입니다.
원래 조선 말, 이 땅에 처음 기독교가 전파된 건 가톨릭(Catholic, 公, 보편적, 일반적), 그러니까 천주(天主)교를 통해서입니다.
※ 참고로, ‘기독교’라 하면 천주교를 포함, 개신(改新)교 전체를 통칭하는 말입니다. ‘기독’(基督, 중국어로는 ‘기두’로 발음)이라는 표현은, ‘그리스도’에 대한 한자 표기인 ‘基利斯督’(중국어로는 ‘기리스두’로 발음)를 음역(音譯), 그러니까 우리식대로 축약해서 읽은 건데요, 가령, 프랑스를 ‘佛蘭西’(중국어 발음은 포란시), 즉 우리말 불란서로 읽는 것과 같은 겁니다. 개신교와 천주교는 둘 다 그 뿌리가 ‘기독’, 곧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타 종교 입장에서 봤을 땐 다 기독교인 것이지요. 이 외에도 사실 ‘예수 그리스도’를 뿌리로 하는 다양한 종파, 예를 들면, 정교회라든지, 콥트라든지 등등 모두 무슨 세계 종교 분포도 같은 통계를 낼 때는 다 합쳐서 기독교로 분류합니다. 설교 준비를 하면서 잠깐 위키백과를 보니 세계 종교에서 기독교가 25억이며, 그 안에서 가톨릭이 12억, 개신교가 6억, 정교회 3억 등으로 나오며, 현 전 세계 인구가 대략 80억으로 나오는 걸 보면, 기독교는 30프로 좀 넘네요. 주님의 시야엔 이 나머지 70프로, 55억의 인구 역시 천국으로 인도해야 할 자녀라는 사실과, 만일 개신교만 놓고 볼 때, 주님의 구원은 나머지 74억한테도 중요하여, 그래서 주님은 모두를 아우르는 어떤 공정한 ‘구원 시스템’을 구비하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이 땅에 개신교(1879)가 들어오기 백 년 전 천주교(1784)가 들어왔는데요, 공식적으로는 그렇습니다. 처음 들어온 천주교는 처음에는 서양 기독교 입장에서 당시 조선에 만연, 큰 폐단을 낳고 있던 조상 제사를 금했는데, 이게 나중에 수많은 구한말 천주교 박해의 빌미가 되었습니다. 그중 가장 많은 피를 흘린 것이 바로 흥선 대원군 때 있었던 병인박해(1866-1872)입니다. 당시 심화되던 민심 이반을 달래느라 안 그래도 조상 제사를 금하던 천주교를 향해 가진 백성들의 반감을 이용했던 건데요, 전국적으로 이 기간 팔천 명이 참수(斬首)된, 조선 말기 천주교 박해 중에서도 가장 혹독한 박해였습니다.
이런 시행착오, 단순히 시행착오라기엔 그 흘린 피가 너무 진한 아픈 역사를 거쳐 천주교에서는 제사 허용으로 입장을 바꿨고, 그걸 미사 형태로 오늘날 드리고 있으며, 개신교는 교단마다 좀 다르지만 어디는 ‘추모’(追慕) 예배, 어디는 ‘추도’(追悼) 예배, 또는 편의상 기일 예배 등으로 부르면서 지금처럼 예배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놀라운 사실은 성경 어디에서도 죽은 자를 해마다 기억하여 무슨 의식을 진행하는 장면이 한 군데도 안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누가 죽었을 때, 그와 관련된 장례 이야기는 많이 나오지만 말입니다. 성경에도 이 ‘제사’ 이야기는 많이 나옵니다만, 우리말 번역 표현이 그저 ‘제사’일 뿐, 원어는 영어로 ‘worship’, 즉 예배하다, 경배하다입니다. 즉,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성경에 나오는 제사 정신인 것이지요. 성경의 유일한 예배 대상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시기 때문이며, 이를 하나님은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실 때, 아래와 같이 아예 돌판에 새겨주셨습니다.
3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4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5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6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출20:3-6)
그러므로 오늘 우리도 명목상으로는 추모예배로 모였지만, 사실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모인 것임을 하나님이 보시고, 이 예배를 기쁘게 받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만약 지상의 이 부모-자식, 남편과 아내 등의 혈연관계가 사후(死後) 천국에까지 영원히 이어진다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좀 엉뚱해 보이기도 하는 이런 질문을 저 자신에게 해본 적이 있는데요, 만일 사후 내가 천국에 가면, 나는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또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의... 그리고 제 아들의 아들의 아들의 아들의.. 등 끝없이 이어지는 위아래 관계 속에서 아마도 머리가 돌아버릴 지경이 되지 않을까 한 적이 있습니다. 천국 전체가 아마 혼란도 그런 혼란이 없지 싶었는데요, 지상 혈연관계가 천국까지 이어진다면 말입니다.
신약 성경의 대부분을 썼던 사도 바울이 있습니다. 사실은 그는 그 시절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대부분 자기가 개척한 교회들에게 신앙적 권면을 위한 편지, 서신들을 썼을 뿐인데, 그 서신들의 내용이 예사롭지 않아서인지 후대에 이르러 몇 차례 공의회를 거치며, 그 서신들이 성경에 포함된 것입니다. 어쨌든 주님은 그의 생전에 그를 한번 천국, 그것도 삼층천을 다녀와 보게 하셨는데요(고후12:2), 이런 일을 세월이 흘러 지금으로부터 250여 년 전, 주님은 또 한 사람, 그의 나이 57세에 찾아오셔서 천국을, 이번에는 그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무려 27년 동안 구석구석 경험하여 글로 남기게 하셨습니다. 천국을 한 번만 다녀왔던 사도 바울의 글도 성경이 되었거든, 하물며 27년간을 다니며 라틴어로 수만 장의 기록을 남긴 사람의 글은 더 말할 게 없겠지요?
지금부터 드리는 말씀은 그가 남긴 기록을 참고한 건데요, 그의 글을 가급적 제가 소화한 걸로 말씀드립니다. 그의 기록을 이런 예배에서까지 인용할 정도로 제가 신뢰하는 이유는, 그 역시 참으로 주님의 신실한 종으로서 남은 삶을 오직 주의 쓰임새의 삶을 살면서 지상 그 어느 누구보다도 더 주님을 사랑하며 높였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한 추모예배 관련, 사후의 일, 곧 천국의 실상을 논할 때, 이보다 더 생생한 기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의 이름은 에마누엘 스베덴보리(Emanuel Swendenborg, 1688-1772, 스웨덴)이며, 만유인력을 발견한 아이작 뉴톤(1643-1727, 영국)과 40년 정도 겹치는 시대를 산, 역량으로는 거의 동급의 천재였습니다. 그가 주님의 부르심을 통한 이 영계 체험을 시작하기 전 이룩한 과학적 성취는 당시 유럽의 학자들을 놀라게 했는데, 그가 나중에 과학계를 은퇴, 오직 주님 부르신 일에만 전념하자 당대 학자들이 다 만류했습니다. 다음은 그가 그때 한 대답입니다.
“저와 같은 과학자는 얼마든지 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일, 곧 영계에 관한 진리를 남기는 일은 인류 전체의 생명이 걸린 중요한 문제입니다. 주님께 받은 이 특별한 소명은 제가 과학자로 공헌하는 것보다 수천수만 배 더 중요합니다...”
그의 이름은 우리한테는 무척 생소하지만, 그는 서양 문화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람으로서 서양에서는 유명하며, 심지어 그의 모든 영적 저작은 인류 문화유산으로 등재까지 된, 그런 사람입니다.
자, 그럼 다시, 이 지상 혈연이 천국까지 이어지는가 하는 건데요, 그를 통해 주님이 계시하신 천국 실상에 의하면, 지상의 혈연관계는 지상 생활로 그치고, 천국에서는 모든 게 전혀 새롭게 시작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지상에서 부모-자식, 부부 등의 관계가 사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뭐랄까... 초기화가 된다고 해야 할까요? 네, 기존 지상의 모든 것, 곧 지상에서 익힌 모든 학문과 지식, 인맥, 경력, 경험 등은 다 휴면 상태로 들어가고, 이후 모든 걸 전혀 새롭게 시작한다고 합니다. 정말 놀라운 진술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러면 한 가지, 아주 근본적인 게 궁금해집니다. 사후 어차피 초기화가 될 거라면, 굳이 생전에 효도다 뭐다, 부부 사랑이니 자식 사랑이니 애쓸 필요가 없지 않을까 말이지요. 네, 그런 생각이 당연히 들지요. 저도 처음엔 그랬습니다. 그러나 창조주이신 주님이 그런 걸 모르고 우리가 누구의 자식으로, 누구를 우리의 부모로 세상에서 이렇게 연결시켜 주셨겠습니까? 거기엔 주님의 깊으신 섭리, 신적(神的) 섭리와 목적이 있으신데요, 그건 바로 우리가, 그리고 온 인류가 지상 생활을 마치고 천국에 가서 주님과 함께 영원히 행복한 삶을 누리게 하시기 위해, 먼저 천국에 합당한 주님의 신적 성품을 지상에서 함양케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에게 있어 지상은 천국을 위한 일종의 모종밭인데요, 지상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주님이 맺어주신 혈연관계를 통해 주님을 닮도록 연습하고 훈련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신 것이지요. 아버지를 아버지의 모습으로 계신 주님으로, 어머니를 어머니의 모습으로 계신 주님으로, 형, 누나, 동생을, 남편 혹은 아내, 그리고 자녀를 각각 그 모습으로 내 곁에 계신 주님으로 인식, 마치 주께 하듯 하여 어떤 인간관계에서든지 주님의 성품을 갖추어 나갈 수 있게 말입니다.
천국은 속 사람으로 가는 나라인데, 그 속 사람이 천국의 주(主)이신 주님을 닮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속 사람은 무슨 교리에 밝다고, 교회를 오래 다녔다고, 무슨 신학적 입장에 목숨을 걸 정도로 단호하다고 저절로 형성되는 게 아니고, 오직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 오직 주님의 진리를 실천, 선한 삶을 살아야만 형성되는 겁니다.
다음은 톨스토이의 단편, ‘사랑이 있는 곳에 신이 있다’를 요약한 내용입니다.
주인공 마르틴은 구두를 만들고 고치는 제화공입니다.
착하고 성실한 그가 절망에 빠졌습니다. 5년 전에 자식 둘과 아내를 하늘나라로 보냈는데, 근래 하나 남은 막내아들까지 병으로 죽었습니다. 그는 매일 술로 시간을 보내며, 자신도 빨리 죽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성경을 읽고픈 마음이 들어 그날부터 성경을 읽다가 그리스도의 삶에 감동을 받고는 자신의 삶을 반성하게 되었고, 계속해서 더욱 성경 읽기에 열중했습니다.
하루는 성경을 읽다가 잠깐 잠이 들었는데, 하나님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마르틴, 내가 내일 찾아갈 테니 창밖을 보아라.”
마르틴은 다음날 하루 종일 일 끝날 때마다 창밖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이 언제쯤 오시려나...”
하며, 하나님을 기다렸습니다만,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오신다던 하나님은 오시지 않고, 마침 창밖엔 늙은 청소부가 눈을 맞으며, 청소를 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마르틴은 그를 가게 안으로 들어오시게 한 뒤, 따뜻한 차를 대접하며 몸을 좀 녹이시게 하였습니다.
청소부가 나간 후, 두어 시간이 지나 창밖을 보니, 이번엔 아기를 안은 여인이 눈보라 속에서 떨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여인을 가게 안으로 맞아들여 먹을 걸 대접하고, 그 사이 얼른 엄마와 아이를 위한 따뜻한 옷을 장만해 주었습니다.
또 시간이 흘러 거의 해가 질 무렵, 역시 창밖을 보니 이번엔 사과를 파는 노파가 사과를 훔친 소년을 붙잡고 야단을 치고 있었습니다.
마르틴은 밖으로 나가 소년의 죄를 뉘우치게 하고, 사과값을 대신 갚아주며, 노파가 소년을 용서하시도록 권유, 원만하게 해결해 주었습니다.
마르틴은 날이 어두워지자, 가게 문을 닫고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날 밤 마르틴은 성경을 읽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그때 어둠 속에서 자신이 낮에 대접했던 늙은 청소부와 아기 안은 여인, 노파와 소년이 나타나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마르틴, 네가 오늘 만난 사람들이 바로 나다. 너는 나를 대접한 것이다.”
이후 마르틴은 꿈에서 깨어나 마침 펼쳐져 있는 성경을 보니, 거기에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35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37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39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40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마24:35-40)
이 단편의 핵심은 바로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신 말씀입니다. 곧 “마르틴, 네가 오늘 만난 사람들이 바로 나다. 너는 나를 대접한 것이다.” 하신 대목이지요. 즉 주님은 나이 많은 청소부의 모습으로, 아이를 안은 아이 엄마의 모습으로, 그리고 사과를 훔친 소년과 그 소년을 야단치는 노파의 모습으로 마르틴을 만나러 오셨고, 마르틴은 그 사실을 까맣게도 모르고 단지 그들을 주께 하듯 자신이 할 수 있는 선을 베풀었을 뿐인데,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너는 나를 대접한 것이다’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이웃 사랑이 곧 주님 사랑이 되는 이유이며, 주님을 섬기고, 기쁘시게 하는, 그래서 모든 인간관계를 통해 내 안, 내 속 사람으로 하여금 주님을 닮게 하는, 주님의 신성(神性, The Divine)이 내 안에 차곡차곡 쌓이게 하는 단 하나의 유일한 방법입니다.
누구나 다 아는 유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바로 ‘원수를 사랑하라’(마5:44)인데요, 이 말씀의 속뜻은, 비록 나를 힘들게 하고, 원한이 있어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원수라 할지라도 그 역시 주님이 지으신 사람이므로 그의 안에도 역시 주님의 형상, 곧 주님의 신성이 깃들어 있으니, 비록 그는 미울지라도 그의 안에 깃든 주님의 신성에 대해서는 예를 갖추고, 함부로 하지 말라는, 주께 하듯 하라는 말씀입니다. 정말 쉽지 않은 말씀인데요, 그러니까, 원수일지라도 그저 하나님 앞에 네 할 도리만 다하라는 말씀입니다. 선을 넘지 말라는 말씀이지요. 이것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19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20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21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롬12:19-21)
사후 속 사람의 겉은 휴면 상태에 들어가고, 속 사람의 속이 드러나 그걸로 천국, 또는 지옥을 가게 된다는, 이것 때문에 지상 혈연관계가 천국까지 이어질 수 없는 것이라는 내용은 아래 소개하는 책자인,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끝으로, 그러나 오히려 이런 사실, 이런 영적 실상에 대한 지식이 우리에게 끼치는 유익은 참 큰데요, 가장 큰 유익은, 우리가 이렇게 모든 관계가 지상 생활로 끝난다는 걸 알면, 더 이상, 무슨 자기 이름 석 자를 남기기 위해, 또는 가문의 이름을 빛나게 하기 위해, 아니면 재물을 쌓기 위해, 권력과 명예를 얻기 위해, 자녀에게 지나친 기대를 걸거나 큰 부담을 지우는 그런 무리수를 두는 인생을 살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건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든 아니든 거진 다 공통인데요, 이런 건 어떤 말로 포장하든 사실은 자기 사랑, 세상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얼른 돌이키지 않으면, 그 속 사람이 지옥에게 먹히게 되어 살아서도 지옥에 연결되어 살게 됩니다. 그 끝이 비참하며, 사후 운명이 매우 안타깝게 되지요. 아주아주 극도로 조심해야 합니다.
물론, 세상을 열심히 사는 게 무조건 나쁘다거나 죄가 된다는 건 아닙니다. 다만, 그 모든 노력과 방향, 초점이 주님이 원하시는 어떤 쓰임새에 맞춰진 게 아닌, 자기 사랑, 세상 사랑에 맞춰지는 경우를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알면, 우리는 단 한 번뿐인 인생을 아주 깔끔하게 살 수 있습니다. 부모-자식, 남편과 아내, 그리고 교회 교인들과 회사 동료들, 이웃들 등 모든 인간관계에서 마르틴처럼 주님을 대접하게 됩니다. 주님을 사랑해도 정말 순수하게, 자식을 사랑해도 정말 순수하게 사랑하게 됩니다. 지상의 모든 관계는 지상 생활로 마감한다는 이 계시는 정말 정말 귀한 계시이며, 그래서 아마도 주님은 스베덴보리를 통해 새롭게 여신 많은 계시 중 하나로 이것을 허락하신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시작하면서 던진 일종의 화두지요. 성경엔 장례 관련 사례는 많으나 죽은 자를 기억하여 해마다 무슨 의전을 행한 기록은 전혀 없다는... 이 놀라운 사실에 대한 답이라고 할까요? 지금까지 살핀 바에 따른 당연한 결론인데요, 그것은 지상 모든 혈연은 지상 생활로 그치고, 천국에서는 전혀 새로운 관계가 시작되기 때문이라는, 즉 지상 모든 혈연은 속 사람의 겉과 함께 영원히 휴면 상태로 가라앉는 대신, 속 사람의 속으로 천국의 새 삶을 시작하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겠습니다. 한편으론, 이것이 너무나 당연한 이유는, 영계인 천국에서는 자연계에서 습득한, 자연적이기만 한 모든 것은 재생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러나 주님이 원하시면 언제든지 가능하지만 말입니다.
말씀을 마치며, 소개하고픈 책 두 권이 있는데요, 이는 주님의 신성, 곧 선(善, Divine Good)과 진리(眞理, Divine Truth)에 관계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진리와 관련된 책으로, 중간에 잠깐 언급한,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입니다. 바로 이 책입니다.
다른 하나는 ‘성 프란치스코’라는 이 책입니다.
프란치스코는 800년 전 사람으로서, 인류 역사상 거의 유일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현현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복음의 정신 그대로를 산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를 통해 주님의 신성 중 진리를 접한다면, 프란치스코를 통해 주님의 신성 중 선을 접할 수 있습니다. ‘아, 주님의 진리를 일상 가운데 저렇게 실천하는 것이 바로 주님의 선이구나!’ 깨달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두 권의 책이야말로 지상에서 주님의 신성을 연습하고 훈련하는데 결정적인 가이드요, 등불이 될 줄 믿습니다. 물론 주님의 말씀, 성경이 그 첫 자리임은 기본 중의 기본이고 말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찬송
301장, ‘지금까지 지내온 것’
축도
이제는 우리 주 여호와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빛과 도우심의 그 은혜와 사랑이 작년 이장 후, 오늘 이곳에서 처음 드리는 이 추모 형태의 예배를 통해 진정한 추모의 의미에 대해 듣고, 앞으로 더욱 서로를 주께 하듯 그렇게 사랑해야지 마음에 굳게 결심하고 돌아가는 모든 심령 가운데, 그리고 생활과 삶 가운데 이제부터 영원토록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2024-03-01(D6)
삼일절
파주 크리스찬 메모리얼 파크
변일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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