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마대 요셉, 세마포, 무덤, 향품과 향유’의 속뜻
50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51(그들의 결의와 행사에 찬성하지 아니한 자라) 그는 유대인의 동네 아리마대 사람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52그가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여 53이를 내려 세마포로 싸고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판 무덤에 넣어 두니 54이날은 준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되었더라 55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이 뒤를 따라 그 무덤과 그의 시체를 어떻게 두었는지를 보고 56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준비하더라 계명을 따라 안식일에 쉬더라 (눅23:50-56)
주님이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신 후, 주님의 시신을 거두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주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요? 스승의 참혹한 죽음을 보고 놀라 어딘가에 숨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때 공회의 의원이었던 요셉이란 사람이 나타나 빌라도에게 주님의 시신을 달라 요청했습니다. 요셉에 대해 본문 50절과 5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50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51(그들의 결의와 행사에 찬성하지 아니한 자라) 그는 유대인의 동네 아리마대 사람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주님이 계시던 시대는 로마가 세계를 지배하던 때였습니다. 로마인들은 점령지마다 자치정부를 두고, 그들로 하여금 본국에서 보낸 총독의 감독을 받게 하는 방법으로 세상을 지배했습니다. 그러니까 요셉이 의원으로 있는 산헤드린이라 하는 공회는 이를테면 유대의 자치정부 같은 것이었습니다. 당시 공회의 의장은 대제사장 가야바였고, 그 아래 바리새인과 서기관 같은 율법에 밝은 엘리트들 70명이 회원으로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요셉이었습니다.
※ ‘산헤드린’(‘סַנְהֶדְרִין’)이라는 말은 헬라어 ‘수네드리온’(συνέδριον, 모여 앉다)에서 나온 히브리 차용어(loan word)입니다.
※ 산헤드린의 의장은 대제사장이 맡습니다. 대제사장은 종신직이며, 유고 시 그의 직계가 직무를 자동 승계하는데, 이들의 권력이 너무 커지는 걸 막기 위해 로마는 대제사장의 임면(任免)권을 파견된 총독에게 주었습니다. 복음서에 ‘대제사장들’이라는 표현이 나오는 것은,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이 직이 종신직이어서 한번 대제사장 된 사람을 그가 살아있는 동안은 물릴 수가 없었던 반면, 로마는 저들을 통제하느라 그때그때 파면 및 임명을 새로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 즉 오늘 본문의 배경 된 당시는 로마가 임명한 대제사장 가야바와 유대인들이 인정하는 종신직 대제사장 안나스가 함께 있었습니다. 가야바는 안나스의 사위입니다. 가야바는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볼 때는 일종의 허수아비였던 것이지요.
요셉 말고도 공회 의원 중에서 주님을 지지했던 사람은 저 유명한 니고데모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니고데모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 않으나 복음서의 다른 곳에는 주님의 장례를 위해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준비한 사람이 바로 니고데모였다고 전합니다.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 (요19:39)
본문에는 공회에서 주님을 죽이기로 결의했을 때, 요셉은 찬성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요셉이란 이름은 속뜻으로는 영적인 사람, 즉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을 뜻하는데, 그것이 바로 요셉의 성품이었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에 의해 영의 눈이 열려 진리와 거짓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요셉은 일찍부터 주님이 선과 진리이신 분이라는 걸 알고 흠모했던 것 같습니다. 요셉을 가리켜 선하고 의로운 자,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선과 진리이신 주님이 다스리시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린다는 것은 주님이 온전히 자기 자신을 다스리길 바란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통치를 바라는 것처럼 선하고 의로운 바람, 사모함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요셉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주님을 반대할 때도 두려움 없이 주님 편에 섰고, 주님이 운명하신 후에는 용감하게 빌라도에게 가서 주님의 시신을 달라한 것입니다. 52절과 53절에는 요셉이 주님의 시신을 수습하여 매장하는 모습을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습니다.
52그가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여 53이를 내려 세마포로 싸고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판 무덤에 넣어 두니
말씀에서 무덤이나 매장은 속뜻으로는 부활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요셉이 주님의 시신을 세마포로 싸서 무덤에 안치하는 모든 과정은 주님의 편에서는 부활의 마지막 과정, 즉 어머니로부터 받은 인성(human), 유전 악이 묻어 있는 인성을 완전히 벗고, 아버지가 주시는 신성한 인성(Divine Human)으로 갈아입는 마지막 과정을 의미합니다.
※ 유대 산지는 대부분 화강암 지대라 조금만 파도 바로 암석이 나와 우리나라처럼 봉분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굴을 파 시신을 보관하는 형태로 매장을 하는데, 부자들은 그 규모가 커 바위 안에 생전에 살던 집 모양을 그대로 구현, 방을 여러 개 만들 정도였습니다. 이런 방식의 매장은 시간도 오래 걸리고, 무엇보다도 큰돈이 들어 일반 백성은 주로 평토장을 해야 했습니다. 평토장(平土葬)이란 한 30센티 정도만 파 관도 없이 시신을 묻고는 대충 흙으로 메워 평평하게 하는 매장을 말합니다. ‘바위에 판 무덤’이라는 낯선 표현엔 이런 배경이 있습니다.
그러면 요셉과 같은 신앙인의 편에서는 어떤 의미일까요? 신앙인들이 생명 없는 말씀, 즉 지식으로만 받아들인 말씀을 살아있는 진리, 또는 살아있는 신앙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볼 때, 요셉이 빌라도에게 주님의 시신을 달라 하는 건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 참된 진리의 지식을 구하는 모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요셉이 달라 하는 주님의 시신은 신앙인들이 처음 진리를 배울 때의 아직 생명 없는 말씀 지식, 즉 말씀을 일단 지식으로 받아들이는 걸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말씀 자체이신 반면, 주님의 몸은 말씀의 외관인 문자적 의미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말씀으로부터 진리를 처음 배울 때, 그것들은 일단 기억이라는 창고에 보관됩니다. 그때의 진리의 지식은 마치 서가에 꽂힌 책처럼 아직 생명 없는 상태입니다. 그러다가 그것을 꺼내 읽으며, 말씀의 의미를 깨닫고, 깨달은 그것을 실천, 삶으로 옮기려 할 때, 그때 그 지식은 비로소 살아나기 시작합니다. 비로소 생기가 돈다 할까요? 우리 삶에 영향을 주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좋지 않은 버릇을 끊으려 할 때, 또는 하기 어려운 선한 일을 하려 할 때, 말씀의 능력이 우리를 돕는 것입니다. 나는 그 악습, 그 버릇을 계속하고 싶은데 주님은 그걸 원치 않으심을 알고는, 사랑하는 주님을 위하여 기꺼이 그걸 포기하는 것, 그것이 죽었던 말씀이 살아나는 것이고, 오늘 말씀에서는 요셉의 무덤에서 주님의 시신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요14:21)
그렇다면 요셉은 왜 이방인인 빌라도에게서 말씀의 지식을 얻으려 했을까요? 교회의 마지막 때는 부패한 교회의 눈으로는 진리를 볼 수 없고, 교회 밖 사람의 단순한 눈을 통해서만 참된 진리가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와 관련해 말씀에는 교회 밖의 사람인 빌라도가 주님을 보고 바로 진리로 인정한 것을 여러 곳에서 증언합니다.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무리에게 이르되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하니 (눅23:4)
19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20예수께서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 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되었더라 21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라 쓰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 하니 22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쓸 것을 썼다 하니라 (요19:19-22)
이 역시 주님이 진정한 진리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진리는 스스로 많이 안다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습니다. 진리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이방인들처럼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봐야 보입니다. 그런 까닭에 교회 안의 사람인 요셉은 교회 밖의 사람인 빌라도에게 가서 말씀의 지식을 구한 것입니다.
요셉이 주님의 시신을 세마포로 싸서 바위에 판 자기 무덤에 넣었습니다. 세마포는 주님에게서 오는 내적 진리를 뜻합니다. 그것은 사랑이 있는 진리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몸을 세마포로 쌌다는 건 신앙인들이 내적 진리를 가지고 말씀을 이해하는 것이고, 그렇게 해서 말씀을 조금씩 살리는 행위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시신을 바위에 판 자기 무덤에 넣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여기서 바위는 진리를 뜻하고, 팠다는 것은 가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무덤은 죽은 진리가 살아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진리를 처음 배울 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자기 나름대로 이해한 어떤 모양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다 보면 인간의 생각이 섞일 때가 있고, 때로는 본래의 의미를 앞질러 가기도 합니다. 처음에는 모두 그렇게 진리를 받아들입니다. 그것이 돌을 파낸 자기의 무덤에 주님의 시신을 모시는 것입니다. 요셉은 그런 방법으로 참된 말씀을 받아들여 자신의 신앙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요셉 말고도 주님을 받아들인 사람이 또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에 대해 본문 55절은,
55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이 뒤를 따라 그 무덤과 그의 시체를 어떻게 두었는지를 보고
말씀에서 갈릴리는 이방인을 뜻합니다. 그리고 여자들은 교회를 뜻하지만, 여기서는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갈릴리에서 주님을 따라온 여자들은 교회 밖의 이방인들 가운데 특히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고, 그러므로 참된 진리를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무덤과 주님의 시신을 어떻게 두었는지 보았다고 합니다. 그것은 참된 진리를 받아들인 요셉의 삶에서 죽은 말씀이 어떻게 살아있는 말씀으로 변하는지를 지켜봤다는 뜻입니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들 안에서 진리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나는지 서로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아름다운 꽃이 피어나는 모습과 같은 것이고, 바람이 불 때마다 코끝을 스치는 향기와 같은 것입니다. 갈릴리에서 온 여자들은 요셉에게서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56절에서는 여자들의 그 후의 모습을 이렇게 말합니다.
56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준비하더라 계명을 따라 안식일에 쉬더라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삶 가운데서 나타나는 영적인 변화들을 서로 느끼고, 또 자극을 받습니다. 그런 의미에 여자들이 돌아갔다는 것은 요셉에게서 진리가 살아나는 모습을 보고, 여자들이 자신을 돌아봤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여자들은 왜 향품과 향유를 준비했을까요? 그들도 무덤을 찾아가 주님의 시신에 향품과 향유를 바르기 위해서입니다. 향품과 향유를 죽은 자의 시신에 바르는 것은 고대로부터의 관습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향품과 향유는 진리의 가장 바깥에 있는 자연적 진리를 뜻하는데 그것은 그 안쪽에 있는 내적 진리를 마치 방부제처럼 보호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고대인들은 사람이 죽었을 때, 향품과 향유를 시신에 바름으로써 그가 생전에 획득한 선과 진리를 훼손됨 없이 영계에까지 가지고 가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래야 천국에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자들이 주님의 시신에 향품을 바르려 했던 이유는 뭘까요? 말씀의 지식을 살리기 위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말씀에서 배운 진리를 가지고 자연적이고 감각적인 욕구들을 다스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향품과 향유는 신앙인의 삶과 가장 맞닿아 있는 자연적 진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인들은 향품과 향유를 준비해 다시 주님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 갈 생각을 합니다.
※ 현실적으로 유대인의 유월절은 안식일 전날 해질녘인 오후 5시부터 시작됩니다. 주님은 오후 3시에 운명하셨으므로 두 시간 만에 모든 장례를 마치느라 다들 경황이 없었을 것입니다. 빌라도에게 시신 처리에 대한 승낙도 받아야지, 사람들을 시켜 나무에서 내려 시신 수습, 곧 세마포로 싸야지, 얼른 무덤에 넣어 두어야지... 무슨 제대로 된 염할 시간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전통적으로 시신에 대한 염, 즉 시신에 향품과 향유 바르는 일은 여자들이 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여자들은 무덤의 위치와 시신 상태를 봐두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안식일 후 새벽같이 와서 오늘 미처 하지 못한 이 일을 그 어두운 무덤 안에서 더듬거려가면서라도 할 수 있으려면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새 교회 가르침 ‘천국의 비밀’ 10252:7항은 주님의 부활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은 여느 사람과는 달리 세상에서 입으셨던 몸 그대로 부활하셨다. 왜냐하면 무덤에 아무 것도 남기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은 당신을 보고 영을 본 것으로 생각한 제자들에게 이르시길, ‘어찌하여 두려워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 (천국의 비밀 10252:7, 이순철 역) It is known that the Lord rose again with the whole body which he had in the world, differently from other men, for he left nothing in the sepulcher; and therefore he also said to the disciples, who when they saw the Lord supposed that they saw a spirit, “Why are ye troubled? Behold my hands and my feet, touch me and see; for a spirit hath not flesh and bones as ye see me have” (Luke 24:38, 39). (AC.10251:7)
주님은 보이지 않는 영으로 살아나신 것이 아니라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 볼 수 있는 신성한 인간으로 살아나셨습니다. 그 살아나신 주님, 살아있는 말씀이 거듭나는 사람들의 삶 가운데 매일 나타나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서로의 모습을 보며, 더 많은 사랑과 기쁨을 느낄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요셉이 세마포로 주님의 시신을 싸는 것처럼, 또는 여인들이 향품과 향유를 준비해 주님의 시신에 바르는 것과 같은 노력과 정성을 기울여야 합니다. 세마포로 주님의 시신을 싸는 것은 내적 진리를 가지고 말씀을 이해하고 그것을 삶에 적용함으로써 말씀을 살려내는 것입니다. 향품과 향유를 주님의 시신에 바르는 것은 자연적 진리를 가지고 육신의 욕구들을 다스림으로써 말씀을 살려내는 것입니다. 그런 노력이 없다면 우리에게 있는 말씀은 살아나지 못하고 언제까지나 무덤 속에 갇혀 있을 것입니다.
요셉과 갈릴리에서부터 주님을 따라온 여인들에게 내려졌던 은혜가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과 함께 하시길 기도합니다.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신대 (요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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