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을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

 

 

25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26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27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28그들이 가는 마을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 하는 것 같이 하시니 29그들이 강권하여 이르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그들과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 30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31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32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33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34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 35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눅24:25-35)

 

 

※ 무척 당혹스럽고 혼란한 아침입니다. 간밤, 그러니까 새벽 4시쯤 서부지법 차은경 부장판사가 윤석열 대통령의 구속 영장을 발부했고, 이에 따라 구치소에서 대기 중이던 대통령은 수형복, 그러니까 죄수복으로 갈아입고 독방에 수감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이재명 같은 저 파렴치범은 버젓이 저러고 다니는데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헌법에 명시된 당연한 권리인 계엄을, 그것도 두 시간짜리, 국민에게 아무 위해도 가하지 않은 계엄을 시행했다 하여 국회를 통해 대통령 탄핵 소추되어 현재 헌재에서 심리 중, 그것도 아주 속전속결로 진행 중이고, 그와는 별도로 권한도 없는 공수처에 의해, 그리고 거기에 부화뇌동한 경찰에 의해 한남동 대통령 관저에서 체포, 결국 오늘 구속되었습니다. 아... 마음 같아선 지금이라도 집회 현장에 나가 저들과 함께해야 할 것 같은데... 아, 어쩌면 좋을까요? 멀쩡한 나라가 한순간에 송두리째 저 반국가 국가 전복 세력에 의해 두 눈 뜨고 넘어갈 것만 같습니다. 이토록 치밀하게 오랜 세월 저들은 한 나라 전 분야에 걸쳐 비밀하고 의뭉스럽게 몰래 준비해 왔군요! 내일은 미 트럼프가 두 번째로 미국 대통령에 취임하는 날인데요, 주님이 트럼프를 통해 우리 대한민국을 돕게 하실까요? 정말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저의 대에 또다시 이런 과거 3.1 운동 같은 날이 올 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만일 정말 이 나라가 그런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면 저는 미련 없이 나라를 위해 이 한 몸 던질 생각입니다. 살아서 자기의 조국을 사랑하지 못한 사람이 무슨 죽어서 새로운 조국인 천국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 그리고 또 하나, 어제는 지난날 우리 교회를 크게 도우시던 귀한 권사님의 발인이 있었습니다. 바로 지구촌교회 고 안정희 권사님이신데, 그 인연은 과거 서울침례교회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지요. 우리가 개척 후 7년 차 되던, 재정적으로 크게 어렵던 지난 2020년부터 여러 차례 그때마다 크게 우리를 재정적으로 도우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 시기를 무사히 건널 수 있도록 주님께 쓰임 받으신 분입니다. 권사님은 우리 외에도 여러 개척 교회를 물질로 돕던 분이셨습니다. 권사님의 모친 나이 사십에 태어났으나 재가하시는 바람에 어린 시절을 배다른 형제들과 보내셨고, 남편과 결혼, 자녀 넷을 두었으나 남편이 가정을 버리고 나가 두 여자 데리고 살다 죽을병 걸려 연락오더니, 중환자실 4개월 만에 별세, 남편을 용서하고 한 달을 우셨다는 권사님, 향년 82세를 일기로 그토록 소망하시던 천국으로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올라가셨습니다. 권사님, 정말 고맙고 감사합니다. 권사님이 보이신 그 사랑과 돌봄,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저희를 도우신 그 마음과 취지를 기억, 온몸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맡기신 소명 감당 후 천국에서 뵙겠습니다. 이제 천국에서 편히 쉬시며, 영원한 행복 누리시기 바랍니다.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셨다는, 지난주에 이은 두 번째 이야기입니다. 사실 주님은 벌써 나타나셔서 그들과 함께 걸어가고 계십니다. 다만 그들이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을 뿐이지요. 주님께서 그들에게 서로 주고받는 이야기가 무엇이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그들 중 하나가 이르기를, ‘우리가 선지자로 믿고 따르던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지 사흘째입니다. 아침에 무덤을 찾았던 여인들 말이 천사들이 나타나 예수가 살아나셨다고 했다는데, 우리는 아직 그를 만나지 못했습니다’라며 슬퍼합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엠마오는 영적으로 진리를 뜻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간절히 만나기를 원하는 주님 또한 진리 그 자체이신 분입니다. 따라서 두 사람이 엠마오를 향해 걸어가는 것이나, 주님을 만나지 못해 슬퍼하는 것은 모두 진리를 향한 구도의 길을 걷는 신앙인들의 모습이지요. 그들은 살아있는 진리, 즉 선이 있는 진리가 그들을 다스리길 원하지만, 자신들의 말과 행위에서 그걸 느끼지 못합니다. 오히려 자신들에게 선과 진리가 전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슬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그런 상태가 나쁜 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해 뜨기 직전 깊은 어둠과 같은 상태이고, 진리가 살아난 자리에 남은 빈 무덤 같은 상태일 수 있기 때문이지요.

 

※ 여기서 잠깐, 이 ‘(善, good)이 있는 진리’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하는데요, 설명이 좀 필요할 것 같아 말씀드리면, 이 표현과 동일한 ‘선을 동반한 진리’라는 표현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진리는 진리인데 선 없는 진리, 선을 동반하지 않는 진리도 있다는 말이지요. 이걸 잠깐 설명드리자면, 하늘의 해, 태양에 비유할 수 있겠습니다. 즉 햇볕은 선, 햇빛은 진리로 말이지요. 햇볕, 즉 열은 없고, 햇빛, 즉 빛만 있으면, 아무리 그 빛이 강렬해도 마치 겨울철 햇빛과 같아 만물이 절대 생장하지 못합니다. 만물의 생장엔 햇볕, 곧 열이 있어야 하지요. 그러니까 볕 없는 빛, 곧 선 없는 진리만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사람이 거듭나려면 반드시 ‘선 있는 진리’라야만 한다는 것이고, 여기서 ‘’은 곧 주님이십니다. ‘선 없는 진리’, 즉 볕 없는 빛으로는 거듭남이 불가능한데, 당연한 말씀이지만, 그것은 알고는 있지만 실천하지는 않는 것이기 때문이며, 그것은 아무리 교리적으로 많이 알아도 주님하고는, 즉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하고는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저들 대제사장들과 당시 종교 리더십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를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 이 ‘(善, good)이 있는 진리’에 대한 더욱 깊은 설명은 제 블로그 오늘 주일설교 게시글 하단에 pdf로 첨부하겠습니다. 출애굽기 18장,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모세에게 조언하는 장면인데, 이에 대해 주님이 스베덴보리를 통해 풀어 주신 내용을 지난날 청주 새 교회 시절, 이순철 목사님이 설교하신 설교 원고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을까요? 그 이유에 대해 새 교회 가르침, 스베덴보리 저,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3863번 글 14번 항은,

 

진리를 보는 것은 진리에 대한 믿음인데, 이때 믿음은 인간의 자아에서 나오는 믿음이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믿음이다. (이순철 역) seeing,” in the internal sense, signifies faith from the Lord, for there is no other faith which is faith than that which comes from the Lord. This also enables man to “see,” that is, to believe; but faith from self, or from what is man’s own, is not faith, for it causes him to see falsities as truths, and truths as falsities; and if he sees truths as truths, still he does not see, because he does not believe, for he sees himself in them, and not the Lord.

 

라고 합니다. 밑에 영어 원문이 좀 더 정확한 이해를 돕는 것 같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믿음, 곧 주님으로 말미암는 신앙으로라야 진리를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자아에서 나오는 믿음과 주님이 주시는 신앙은 어떻게 다릅니까? 인간의 자아에서 나오는 믿음, 즉 인간의 자아 및 고유 본성 안에는 이기심과 세상, 세속적 욕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시는 신앙, 주님으로 말미암는 신앙 안에는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있지요. 한마디로 말해, 인간으로 말미암는 믿음은 주님을 믿되 자기 자신을 위해 믿는 것이고, 주님으로 말미암는 신앙은 주님과 이웃을 위해 주님을 신앙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둘은 본질적으로 서로 다릅니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그들이 왜 진리이신 주님을 보고도 알아보지 못했는지를 알 수 있는데요, 그들의 믿음 가운데 아직 인간적인 것이 있어 그들의 눈을 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 이 설교 원 저자이신 이순철 목사님은 ‘faith’와 ‘to believe’를 구분하지 않고 그냥 둘 다 ‘믿음’으로 푸시는데요, 저는 ‘오직 믿음’의 뉘앙스가 느껴져 가급적 스베덴보리 원문을 따라 귀찮지만 좀 엄격하게 구분, ‘faith’에 해당하는 부분은 ‘신앙’, ‘to believe’에 해당하는 부분은 ‘믿음’으로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이 둘의 차이는 저한테는 뭐랄까... 전자는 주님으로 말미암음을 더 분명히 하는 것 같고, 후자는 인간의 어떤 자의적 접근 같이 느껴집니다.

 

두 사람이 주님을 만나지 못해 슬퍼하는 것을 보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25절과 26절 말씀입니다.

 

25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26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주님께서 그들에게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라고 나무라십니다. 선지자는 보통 말씀을 뜻하거나 말씀을 통해 배우는 교리를 뜻하는데요, 그렇다면 선지자가 말한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다는 건 무슨 뜻일까요? 말씀에서 가르치는 진리를 머리로만 믿고, 의지를 가지고 실천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마음은 사람의 의지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처음 진리를 배울 때는 마음이 그렇게 순수하지 않습니다. 그의 마음 가운데 세상에서 오는 욕망과 그로 인한 거짓들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보통 처음에는 진리를 따라 살려는 의지는 별로 없고, 그냥 배우는 걸로 만족합니다. 스스로 양심적인 사람이라고 자부하기도 하지요. 이때가 믿음만 있고, 사랑은 없는 때입니다. 그러나 진리에 대한 배움이 깊어질수록 마음이 낮아지고, 그때 주님으로부터 조금씩 선한 마음이 흘러들어옵니다. 주님이 주시는 선한 마음이란 어떤 걸까요? 진리 그 자체를 위해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이 마음이 생길 때, 우리는 진리를 가지고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주님과 이웃의 유익을 구하게 됩니다. 그러고 나면 시험이 찾아오는데요, 시험은 진리를 삶에 적용하려 할 때 생깁니다. 그동안 우리의 삶을 주도하던 옛 주인인 자아와 새로운 주인인 진리 사이에 싸움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시험에서 이길 때마다 진리에 붙어 있던 거짓들이 하나둘씩 떨어져 나가고, 그 빈 자리로 선이 있는 진리가 흘러들어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가진 진리는 점점 순수하고 힘 있는 진리로 변합니다. 그것은 마치 주님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즉 고난을 통해서 당신의 인성을 거룩하게 만드시는 과정과도 같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신 말씀은 그리스도가 고난을 통해 거룩하게 되신 것처럼 우리에게 있는 진리도 고난을 통해 더 굳건하고 거룩한 진리로 변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주님을 위해 고난을 받아야 우리에게 있는 죽은 진리가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마치 주님이 시험을 딛고 살아나신 것처럼 말입니다.

 

주님의 일행이 엠마오에 가까이 갔을 때 날이 어두워졌습니다. 그때의 상황을 본문 28절과 29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습니다.

 

28그들이 가는 마을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 하는 것 같이 하시니 29그들이 강권하여 이르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그들과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

 

날이 저물어 주님이 그들과 함께 유(留, 머무르다)하셨다고 합니다. 말씀에서 날이 밝을 때는 주님이 우리의 삶을 주도하실 때입니다. 반대로 날이 저물 때는 인간의 자아가 삶을 주도할 때이며, 그러므로 시험의 때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다스리실 때는 감히 지옥이 우리를 어떻게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거듭나는 동안은 수시로 빛과 어둠이 교차합니다. 한동안 주님께 모든 걸 맡기는 것 같다가도 어느 순간 자아가 고개를 쳐듭니다. 그때 시험에 들고 실패를 경험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상황은 그것과는 다릅니다. 살아있는 진리이신 주님이 그들과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30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31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주님께서 떡을 가지고 축복하신 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 떡을 주신 이가 바로 주님이시라는 걸 알았습니다. 말씀에서 떡은 사랑과 선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떡을 떼어 나누어 주시는 것은 주님께서 사랑과 선에 대해 가르쳐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 성찬 때 사용하는 빵과 포도주의 의미 또한 이와 같습니다. 빵(우리말 번역으로는 떡)은 선과, 포도주는 진리와 상응하며, 그래서 함께 주님의 신성(神性, Divine)을 상응, 표상, 상징합니다. 천국은 주님의 신성의 나라로, 우리 안에 이 신성이 있어야 천국의 일원이 될 수 있음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진리만 있고 선은 없는 사람, 또는 믿음만 있고 삶은 없는 사람에게 주님께서 사랑과 선을 주시는 것이지요. 그때 그들에게 있는 자아에 속한 믿음이 주님이 주시는 거룩한 신앙으로 바뀌고, 그 신앙으로 참된 진리이신 주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에는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았다’고 합니다. 그런 상태에서 우리는 주님과 함께 시험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그들과 함께 시험을 이기신 후, 다시 눈앞에서 사라지셨습니다. 그러자 32절에서 두 사람이 주님과 함께 있었던 때를 생각하며 서로 이야기합니다.

 

32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진리이신 주님은 늘 우리 곁에 계시지만 매 순간 그걸 느낄 수는 없습니다. 두 사람의 말처럼 말씀을 읽을 때 특별한 깨달음으로 오시거나, 또는 이웃과의 관계에서 뜨거운 사랑으로 오십니다. 또 시험을 이겼을 때는 큰 위로와 평화로 오십니다. 그때 우리는 주님을 보고 만지며 느낄 수 있습니다.

 

끝으로 33절로 35절까지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33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34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 35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그들이 일어났다는 것은 그렇게 해서 영적으로 한 단계 올라선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과 함께 시험에서 이길 때, 우리는 영적으로 한 단계 성장합니다. 그리고 그때부터는 세상에 대한 잡다한 관심과 욕망 속에 거하지 않고, 내면에 있는 예루살렘, 즉 주님의 교회 안에 거하게 됩니다. 말씀에는 그곳에 주님의 제자들과 다른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주님의 제자들은 행동하는 진리를 뜻합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있는 자들은 선에 대한 애정들을 뜻합니다. 교회는 그 둘, 즉 진리와 선에 대한 애정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이르기를 살아나신 주님께서 시몬에게 모습을 나타내셨다고 합니다. 시몬은 베드로의 다른 이름으로 순종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진리에 순종하는 사람, 즉 의지를 가지고 진리를 행동으로 실천하는 사람에게 나타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들 내면의 교회가 전하는 메시지입니다. 그러자 두 사람이 그 말에 화답하듯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합니다. 이 말은 주님이 주시는 사랑과 선으로 그들의 믿음이 순종하는 신앙으로 변하고, 그 신앙으로 살아계신 주님을 보았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만난 살아계신 주님은 어떤 분입니까? 우리의 삶의 전반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살아있는 진리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엠마오로 가는 사람들을 통해 우리 자신의 모습을 봅니다. 우리는 언제나 자신이 아니라 진리이신 주님이 오셔서 다스리시길 원합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좀처럼 모습을 보여주시지 않았고, 그때마다 우리는 깊은 슬픔을 느꼈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주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깊은 슬픔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시는 떡을 먹은 후, 눈이 밝아져 주님을 볼 수 있게 되었고, 주님과 함께 동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밝아진 눈, 곧 그렇게 눈이 밝아지는 것이 바로 주님이 주시는 신앙입니다. 이제부터는 그 신앙을 가지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일을 할 것입니다. 그 신앙으로 이웃과 사귀고 사랑할 것입니다. 그 신앙으로 세상에서 오는 유혹들과 싸워 이길 것입니다. 그 신앙으로 살아계신 주님의 통치에 모든 걸 맡길 것입니다. 아멘!

 

주님의 그런 은혜가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과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3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5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사40:3, 5)

 

아멘

 

 

2023-05-21(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5-01-19(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01-19(D1)-주일예배(2580, 눅24,25-35), '떡을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pdf
0.45MB
2016-10-30(D1)-주일예배(이순철 목사, 출18,19-22), '이드로가 모세에게 방침을 주다'.pdf
0.39MB
축도.2025-01-19(D1)-주일예배(2580, 눅24,25-35), '떡을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pdf
0.21MB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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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13그 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14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15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16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17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18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거기서 된 일을 혼자만 알지 못하느냐 19이르시되 무슨 일이냐 이르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거늘 20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 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1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일어난 지가 사흘째요 22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23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24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이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눅24:13-24)

 

 

기억의 지식이 신앙은 아니다. 신앙은 신앙에 관한 것들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 인정은 결코 외적인 것이 아니라 내적인 것이며, 사람 안에 있는 인애를 통해 주님 홀로 하시는 일이다. (천국의 비밀 1162, 이순철 역) It may be seen from this that memory-knowledge is not faith. But faith is the acknowledgment of the things which are of faith; and this acknowledgment is by no means external, but internal, and is the working of the Lord alone through the charity in a man. (AC.1162)

 

 

새 교회 가르침인 스베덴보리 저,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라틴, 天界秘義)에서는, 천국은 주님의 신성인 선(good)과 진리(truth)로 이루어지며, 종류별로는 천적(天的, celestial), 영적(靈的, spiritual), 자연적(自然的, natural)인 세 천국이 있고, 일반적으로는 천적 천국과 영적 천국이 있다고 합니다. 이 말은 천국 모든 사회는 천적 천사와 영적 천사로 이루어짐을 의미하는데요, 이때 천적 천사와 영적 천사 간 차이는, 천적 천사는 진리보다는 선을 더 사랑하는 천사이고, 영적 천사는 선보다는 상대적으로 진리를 더 사랑하는 천사라는 데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의 신성 중 선에 더 반응하는 천사는 천적 천사, 진리에 더 반응하는 천사는 영적 천사라는 것입니다. 천국이 그렇게 두 가지 성향의 천사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천국과 통하는 지상의 교회도 두 가지 성향의 사람들로 되어 있습니다. 즉 어떤 사람은 선에 대한 애정이 더 많고, 어떤 사람은 진리에 대한 애정이 더 많은 것입니다. 이 차이, 이 비밀을 잘 아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인간과 목회, 사회 전반을 이해하는 데도 말이지요.

 

주님이 부활하셨을 때, 처음 주님을 만난 사람들은 제자들이 아니라 새벽 미명에 주님의 무덤을 찾았던 여자들이었습니다. 여자들은 놀라움 반, 기쁨 반으로 제자들에게 달려가 주님의 부활을 알렸습니다. 다음은 그 관련 본문입니다.

 

1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2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보고 3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하더라 4이로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5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6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7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 8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9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에게 알리니 10(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그들과 함께 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알리니라) (눅24:1-10)

 

주님은 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지 않고 여자들에게 먼저 나타나셨을까요? 여자는 보통 진리보다는 선에 대한 애정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사람 안의 선과 진리 중, 진리가 아니라 선이나 인애(仁愛, charity) 안으로 오시는 것과 관련, ‘천국의 비밀’ 1162번 글은, ‘주님은 각 사람 안에 있는 인애 가운데로 오셔서 그의 신앙을 내적으로 만드신다’(and this acknowledgment is by no means external, but internal, and is the working of the Lord alone through the charity in a man.)고 합니다. 또 1226번 글은, ‘참된 지성과 지식은 사람의 인애를 통해 주님이 생산하는 자식이다’(Hence comes true intelligence, and hence comes true memory-knowledge, and hence comes true knowledge, which are all sons of charity, that is, sons of the Lord through charity.)라고 합니다. 이 같은 사실로부터 주님이 왜 여자들에게 먼저 나타나셨는지 알 수 있지요. 여자들은 진리를 생각하기보다 바로 행동으로 옮겼던 사람들, 즉 체어리티를 소중히 여겼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누구보다 그들에게 먼저 오셔서 그들 안의 죽은 지식 속으로 생명을 불어넣으셨습니다. 그렇게 그들 안에서 살아난 진리의 지식이 바로 무덤에서 살아나신 주님이십니다.

 

※ 그러니까 신앙 지식을 갖고만 있던 우리가 드디어 실천에 옮기고, 이후 실천하는 신앙인, 선을 행하는 신앙인으로 사는 모습, 이것이 바로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모습이며, 이것이 바로 부활의 능력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엠마오로 가는 사람들은, 제자들은 그들 내면의, 생명 없는 진리들이 살아나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입니다. 히브리어로 엠마오는 샘(spring)이라는 뜻이고, 샘의 영적 의미는 참된 진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생명 없는 진리란 어떤 걸까요? 진리를 입으로만 말하고, 행동하지는 않는, 그걸 실천하지는 않는, 실행에 옮기지는 않는 진리를 말합니다. 진리를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겁니다. 진리로 자신을 포장하기를 즐기는 사람, 즉 박학다식하고 달변 및 글재주도 있어 청중의 마음과 귀를 즐겁게는 하지만 정작 본인은 그 속 사람이, 정작 본인은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진리를 행하려 해도 뜻대로 잘 안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경우는 후자입니다. 그들에 대해 본문 13절과 14절입니다.

 

13그 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14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한글 성경에는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를 걸어갔다고 번역했는데, 영어 성경에는 three score, 즉 이십 리를 세 번 갔다고 되어 있습니다. 스코어(score)는 스물, 이십이라는 뜻도 있는데요, 여기 이 숫자 2는 진리와 선의 결합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십 리를 세 번 걸어 엠마오로 가는 건 신앙인들이 한편으로는 진리를 배우고 한편으로는 실천하려고 애쓰면서 점차 진정한 지혜에 이르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왜냐하면 엠마오는 참된 진리를 뜻하고, 숫자 3은 완성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15절과 16절에는,

 

15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16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앞 절의 말씀에서 짐작하셨을 터이지만 엠마오로 가는 두 사람은 문자적으로는 두 사람이지만, 내적으로는 신앙인에게 있는 두 가지 생명, 즉 이해하는 능력(understanding)과 의지(will)를 의미합니다. 사실 이 둘은 신앙인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있지요. 거듭나는 동안 이 이해하는 능력과 의지는 끊임없이 서로 대화하고 협력하면서 우리로 하여금 주님께로 나아가도록 만듭니다.

 

우리 주변에도 여인들과 같이 진리를 배우기보다 행하는 데 열심인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경우 살아있는 진리의 인도를 받습니다. 반면에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만약 후자의 사람이 우리라면 우리는 얼마나 답답하고 슬프겠습니까? 나름 노력한다고 하는데 왜 나는 변하지 않는가? 진정한 지혜는 언제쯤 얻을 수 있을까 하고 한탄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스스로 지혜 없음을 인정하고 진정한 지혜를 갈구할 때 어느 날 불쑥 지혜의 근원이신 주님께서 오셔서 함께 걸어가십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잘 느끼지 못합니다. 그것에 대해 본문에는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이라고 말합니다. 신앙인의 눈을 가리어 주님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 뭘까요? 자기도 모르는 열등감이나 교만, 분노 같은 것일 수 있습니다. 생활고나 질병의 고통 같은 것일 수도 있겠지요. 그런 것들이 우리를 짓누르고 있을 때, 주님이 동행하신다는 것을 좀처럼 느끼지 못합니다.

 

※ 서두에 세 천국이 있다 말씀드렸습니다. 이 세 천국은 그 지혜와 영광 등 모든 것에 있어 서로 아주 큰 차이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지혜입니다. 즉 천적 천국은 영적 천국에 비해 그 지혜가 수천수만 배 뛰어나고, 영적 천국은 자연적 천국에 비해 또한 그렇습니다. 그래서 가령 예를 들면, 자연적 천국에 있는 천사가 마음에 원해서 영적 천국을 가보고 싶어 하면 주님의 허락으로 잠시 가볼 수 있게 되는데, 정작 가보면 이상한 게, 분명 거기엔 말할 수 없이 놀라운 것들과 사람들, 곧 천사들이 가득함에도 정작 본인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본인의 내면이 영적 천국을 볼 수 있게 열리지를 않았기 때문이지요. 이런 비슷한 게 아닐까, 정작 이 엠마오 두 제자의 내면이 곁에 계신 주님을 볼 수 없는 그런 상태였던 게 아닐까 합니다.

 

그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17절 말씀입니다.

 

17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말씀에서 ‘걷는 것’은 진리에 따라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슬퍼하는 것’은 자기 안에 진리와 선이 없음을 느끼는 것입니다. 거듭남이 진행될수록 우리는 자기에게 진정한 지혜가 없음을 절감합니다. 그때 우리는 깊은 공허함과 슬픔에 빠집니다. 그것은 그동안 옳다고 믿었던 생각이나 자존심, 오랜 습관 같은 것, 마치 분신과 같은 것을 떠나보내야 하는 슬픔입니다. 그런가 하면 한편으로는 그것을 떠나보낸 자리에 지혜의 근원이신 주님이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슬픔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라고 물으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생각이나 마음을 몰라서 그렇게 물으시는 게 아닙니다. 스스로 지혜 없음을 깨닫고 슬퍼하는 게 바로 지혜를 향한 출발점이라는 걸 가르쳐 주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여전히 주님의 말씀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슬퍼하며 대답합니다. 18절로 24절입니다.

 

18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거기서 된 일을 혼자만 알지 못하느냐 19이르시되 무슨 일이냐 이르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거늘 20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 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1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일어난 지가 사흘째요 22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23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24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이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두 사람 중 글로바라 하는 사람이 ‘당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거기서 된 일을 혼자만 알지 못하느냐’라고 운을 뗀 후 고민을 털어놓습니다. 글로바는, 요즘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엄청난 일, 곧 나사렛 예수,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 자기들은 이분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분으로 알았는데, 이분을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주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일, 그리고 자기들과 함께한 여자들이 새벽에 무덤에 가보았더니 천사들이 나타나 주님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 하더라는 것, 그리고 그 말을 듣고 자기들 중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보았더니 과연 여자들이 말한 바와 같으나 다시 살아나셨다는 그 예수는 못 보았다는, 그런 말들이었습니다. 글로바가 하는 말은 엠마오로 가는 모든 신앙인의 고백이라고 볼 수 있는데요, 그가 한 말을 그 속뜻으로 풀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그동안 믿었던 예수는 그 본질에 있어서는 선이 있는 진리이며, 그러므로 능력 있는 진리입니다. 그런데 내 속에 있는 악과 거짓들이 한창 자라나고 있는 그 진리를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불완전한 진리가 죽고 완전한 진리로 다시 살아나는 것과 그때 영원한 구원이 있음을 믿습니다. 이제 그 진리가 죽은 지 사흘이 되어 살아날 때가 되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아직 내 안에서 진리이신 그 예수를 볼 수 없습니다...

 

즉, 본문에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은 우리 안에서 진리를 대적하는 악과 거짓을 뜻하고, 주님이 죽은 지 사흘이 되었다는 것은 구원자이며 지혜 그 자체이신 주님이 나타나실 때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늘 자신이 진실하지도 선하지도 않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리고 언제쯤이면 지혜로워질 수 있을지 그날만을 고대합니다. 주님이 이루시는 일에는 때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지요. 오늘 말씀을 읽으면서 주님은 어쩌면 지금 우리 가까이 계실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만 눈이 가리어져 주님을 볼 수 없을 뿐입니다.

 

※ 이 엠마오 두 제자 에피소드는 35절까지 이어집니다. 이 뒷이야기는 다음 주에 이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류의 역사 속에서 많은 교회들이 명멸했듯이 우리 안에서도 그동안 많은 교회가 생겼다 사라졌습니다. 새 교회의 진리를 처음 알았을 때는 태고교회처럼 순진한 교회가 내 안에 있었습니다. 그 후에는 고대교회와 같이 진리에 밝은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 점점 싸움이 치열해졌습니다. 싸움에서 넘어져 일어설 힘이 없을 때는 주님을 죽인 유대의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웃고 있었습니다. 그때 우리 안에 있는 악과 거짓이 얼마나 뿌리 깊은 것인지를 깨닫고 절망했습니다. 이제 죽었다 다시 살아나신 주님께서 신성한 진리로 우리 안에 마지막 새 교회를 세우십니다. 이 교회는 다시는 넘어지지 않는 교회이며, 슬픔에 눈물짓지 않는 교회입니다.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지혜가 충만한 교회입니다. 이제 마지막 새 교회를 세우시는 주님의 역사에 호산나를 부르며 동참하시지 않겠습니까?

 

주님의 그런 놀라운 은혜가 주님의 새 교회를 사랑하고 사모하는 모든 성도와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과 함께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므로 나의 종 야곱아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이스라엘아 놀라지 말라 내가 너를 먼 곳으로부터 구원하고 네 자손을 잡혀가 있는 땅에서 구원하리니 야곱이 돌아와서 태평과 안락을 누릴 것이며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라 (렘30:10)

 

아멘

 

2023-05-07(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5-01-12(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01-12(D1)-주일예배(2579, 눅24,13-24),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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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5-01-12(D1)-주일예배(2579, 눅24,13-24),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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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평하게 하는 자,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

 

 

9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0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11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마5:9-12)

 

 

진리의 확신이 속 사람과 분리된 겉 사람 안으로 내려오게 되면 맹세에 의한 확신이 되지만, 속 사람을 통해 겉 사람 안으로 내려온다면 그건 다른 것이다. 왜냐하면 속 사람 안에서 진리는 자신의 빛 가운데서 나타나지만, 속 사람과 분리된 겉 사람 안에서는 어둠 속에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내적인 천국, 또는 삼 층 천국의 가장 밝은 빛 안에 있는 천적 천사들은 진리에 대해 추론하지 않고 논쟁하지도 않으며, 단지 예, 아니오 라고만 말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주님으로부터 진리를 깨닫고 지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천국의 비밀 9166:2, 이순철 역) When the confirmation of truth descends into the external man separated from the internal, it is effected by an oath. It is otherwise when it descends into the external through the internal; for in the internal man truth appears in its own light, but in the external apart from the internal man, truth appears in darkness. From this it is that the celestial angels, who are in the inmost or third heaven, being in the highest light, do not even confirm truths by reasons, still less do they debate or reason about them, but merely say Yea, or Nay. This is because they perceive and see truths from the Lord. (AC.9166:2)

 

 

※ 다음은 이 설교의 원 저자이신, 당시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님의 에피소드입니다.

 

우리 교회의 새해 포부는 겸손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과 이웃 앞에, 또는 진리 앞에 자신을 낮추는 사람이 되는 것이죠. 그러나 일상으로 돌아가면 연초에 품었던 생각들을 지켜내는 게 쉽지 않습니다. 가끔은 다른 사람과 다투기도 하고 서로 상처를 받습니다. 저도 새해 벽두에 연말에 거래했던 가구점 주인하고 다툼이 좀 있었습니다. 아내가 나이가 들면 침대 생활을 하는 게 좋다고 해서 지난 연말에 침대를 주문했는데 사정이 생겨 취소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가구점 주인은 주문을 취소할 경우, 10% 위약금을 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전에 고지도 없이 그런 규정을 소비자에게 강요하는 게 옳으냐고 항의를 했습니다. 결국 위약금 없이 주문이 취소되긴 했는데, 그러고 나니 마음이 몹시 불편했습니다. 이런 일이 있을 때 신앙인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다투지 말고 손해를 보는 편이 옳은가요, 아니면 시비를 끝까지 가리는 게 주님 앞에 옳은 일인가요?

오늘 본문 9절입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여기 ‘화평하게 하는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새 교회에서 말하는 평화나 화평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천국의 비밀’ 1038:2번 글을 보면,

 

천국의 평화는 천사들 간의 상호적 사랑 안에만 있다. peace” signifies the kingdom of the Lord, and the kingdom of the Lord consists in mutual love, in which alone is peace.

 

고 합니다. 상호적 사랑이란 한마디로 이웃에 대한 사랑을 뜻합니다. 천국에서 이웃 사랑을 상호적 사랑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천국의 천사들은 색깔은 다르나 각자의 진리를 가지고 있고, 그 진리를 서로 존중하고 지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사들끼리는 상대방의 진리를 가지고 옳으니 그르니 다투는 일이 없고, 평화만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떻습니까? 세상에서는 같은 일을 가지고도 어떤 사람은 진리라고 하고, 다른 사람은 거짓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가족이나 친한 친구 사이에도 어떤 진리에 대해 의견이 하나 되기가 어렵습니다. 세상에 평화가 없고, 싸움이 그치지 않는 것은 그런 까닭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사정을 너무도 잘 아시면서도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되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이웃이 거짓을 말하는데도 자신의 진리를 버리고, 이웃의 생각을 따라야 할까요? 그것이 화평일까요? 그건 아닙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화평하게 하는 자’는 이웃을 사랑하되 상대의 진실만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를 판단하는 일인데, 주님께서는 겉 사람의 얕은 지식으로 진리를 추론하지 말고, 속 사람으로부터 유입되는 진리를 통해 판단하라고 하십니다. 그것에 대해 주님은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마5:37)

 

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라고 하신 것은,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진리가 아니라 겉 사람의 지식만으로 진리를 판단할 때는 자칫 자아의 욕망에 휘둘릴 수 있음을 경계하라시는 말씀입니다. 자아가 끼어들면 진리가 쉽게 왜곡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주님은 세상에 계실 때, 화평하게 하는 자의 모범이 되셨습니다. 주님이 보여 주신 몇 가지 사례를 통해 우리는 어떻게 하는 게 화평케 하는 일인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21장에는 주님께서 성전에서 돈을 바꿔주거나 비둘기를 파는 자들의 상을 엎으시고, 그들을 모두 성전 밖으로 쫓아내시는 모습이 나옵니다.

 

12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고 13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마21:12-13)

 

주님이 그렇게 과격한 행동을 하신 것은 성경 전체에서 처음 있는 일일 것입니다. 주님이 그렇게 하신 까닭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할 교회 안에 말씀을 이용해 사리사욕을 취하는 장사꾼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보시기에 당시 유대 교회의 지도자들은 말씀을 이용해 재물을 모으거나 높은 자리에 오르려는 장사꾼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주님은 교회 안에서 진리가 바로 서야 함을 보여 주려 하신 것입니다.

 

※ 다음은 이와 관련된 배경 이야기입니다. 류모세 저, ‘열린다 성경, 성전 이야기’ 인용입니다.

 

성전 벽 남쪽의 더블 게이트를 통해 들어가면 왕의 행각 지하를 거쳐서 성전 뜰 밖으로 나오게 된다. 밖으로 나오면 바로 왼쪽에 예수님 당시 대제사장이었던 안나스와 가야바가 직영하던 부스가 있었다. 가야바는 안나스의 사위다.

 

이 상점에서 성전 제사에 필요한 물건, 즉 소, 양, 비둘기, 밀가루, 올리브 기름, 포도주, 나무 등을 팔았고, 성전세로 바칠 반 세겔을 바꾸는 환전상도 이곳에 있었다. 이 상점은 대제사장인 안나스 가문이 직영으로 운영했고, 여기서 구입한 제물만 성전 제사에 적합한 규격품으로 인정받았다. 당연히 가격은 시중가의 몇 배나 비쌌고, 이들은 엄청난 폭리를 취했다.

 

성전 뜰에서는 물건을 사고파는 행위를 할 수 없었지만, 안나스의 직영 상점은 원래의 성전 뜰인 마카베오 성전산의 바깥인 헤롯 성전산에 위치했기 때문에, 법적으로 따지면 모세의 율법을 어긴 것은 아니었다. 이렇듯 성전을 중심으로 한, 당시의 종교적 기득권층은 교묘하게 법망을 피해 가며,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채우고 있었다.

 

여호와께 드리는 제물은 자신의 수확물과 가축 가운데 흠이 없는 것을 가져와야 했지만, 안나스 가문은 자신의 상점에서 구입한 제물만 바치도록 함으로써 가장 수지맞는 이권에 개입하였다. 당시 이런 일은 유대 땅을 다스리던 로마 총독과의 결탁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제사장은 로마 총독에게 엄청난 뇌물을 리베이트로 바침으로써 대제사장직을 얻을 수 있었고, 꾸준한 뇌물공여로 자신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예수님 당시 안나스 가문은 로마에 엄청난 뇌물을 주어 대제사장직을 독차지했는데, 이처럼 극도로 타락한 종교 세력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이다.

 

당시에 제사장 그룹은 로마와 한패로 인식되었다. 66년 로마에 대항해 유대인들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예루살렘을 점령한 메나헴이 가장 먼저 제사장 가문을 학살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

 

그런가 하면 누가복음 11장에는,

 

37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한 바리새인이 자기와 함께 점심 잡수시기를 청하므로 들어가 앉으셨더니 38잡수시기 전에 손 씻지 아니하심을 그 바리새인이 보고 이상히 여기는지라 39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40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41그러나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 42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43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 44화 있을진저 너희여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느니라 45한 율법교사가 예수께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이렇게 말씀하시니 우리까지 모욕하심이니이다 46이르시되 화 있을진저 또 너희 율법교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 47화 있을진저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드는도다 그들을 죽인 자도 너희 조상들이로다 48이와 같이 그들은 죽이고 너희는 무덤을 만드니 너희가 너희 조상의 행한 일에 증인이 되어 옳게 여기는도다 49그러므로 하나님의 지혜가 일렀으되 내가 선지자와 사도들을 그들에게 보내리니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며 또 박해하리라 하였느니라 50창세 이후로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를 이 세대가 담당하되 51곧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과연 이 세대가 담당하리라 52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교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서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하시니라 53거기서 나오실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거세게 달려들어 여러 가지 일을 따져 묻고 54그 입에서 나오는 말을 책잡고자 하여 노리고 있더라 (눅11:37-끝)

 

라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주님이 미워하신 건 인간 바리새인이 아니라 그들의 위선이었습니다. 이런 말씀들에서 주님의 분노를 느낄 수 있습니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그 사랑만큼 거짓을 미워합니다. 하물며 주님은 진리 자체이신 분입니다. 그러니 진리를 대적하고 교회를 파괴하는 지옥의 악과 거짓이 얼마나 미우셨겠습니까? 그러므로 그때 주님의 분노는 속된 인간의 분노가 아니라 진리에 대한 주님의 무한한 사랑에서 비롯한 신성한 분노입니다.

 

주님이 악과 거짓을 상대로 늘 과격하셨던 건 아닙니다. 대제사장들과 빌라도에게 끌려가셨을 때는 몸이 찢겨나가고, 종국에는 십자가 위에서 죽을 것을 아셨음에도 당신 자신을 위해 어떤 변명도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당신의 인간 안에 있는 자아와의 싸움에서 이기는 방법이기도 했습니다. 인간의 자아는 언제나 수치와 굴욕을 두려워하고, 궁극적으로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므로 그런 일들이 닥칠 때, 할 수만 있다면 그것들로부터 달아나려 합니다. 영화롭게 되기 전 주님의 인성(human) 안에도 자아의 그런 원초적인 욕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그 모든 고난을 묵묵히 이기셨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때로는 진리를 위해 분연히 맞서 싸우셨고, 때로는 자아의 욕구를 누르시며, 고난을 견뎌내셨습니다. 그것이 세상에 화평을 주는 길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주님에게서 그와 같은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화평케 하는 자가 되라 하신 주님께서 이번에는 의를 위하여 박해받은 자는 복이 있다 하십니다. 본문 10절과 11절입니다.

 

10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11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이 말씀에서 의란 뭘까요? ‘참된 기독교’ 96번은

 

의는 하나님의 질서를 뜻하고, 의를 실천하는 것은 의로움과 진실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부터 이웃을 사랑하는 것 Divine order is righteousness. Righteousness is acquired only so far as man practices righteousness; and this he does so far as he acts towards the neighbor from a love of what is righteous and true;

 

이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의란 진리를 따라 이웃을 사랑하는 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무조건 베푸는 걸 이웃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만,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되 진리를 따라 사랑해야 합니다. 상대가 원한다고 악한 사람에게 흉기를 내어 주거나 마약 중독자에게 마약을 파는 건 의도 아니고 사랑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의를 위한 일이 박해를 받는 이유가 뭘까요? 의롭지 않은 사람에게는 의로운 사람의 행동이 눈엣가시처럼 거슬리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본 것처럼, 주님은 진실하지 않은 자들과는 타협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을 가리켜 그들의 외식을 주의하라고 하셨고, 유대 교회의 지도자들을 향해서는 강도요 삯꾼이라고 비난하셨습니다. 반대로 진리를 갈구하는 사람들과는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그들과 함께 먹고 마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위선자와 삯꾼들에 의해 박해받으셨고, 결국 죽임을 당하신 것입니다. 의를 추구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렇게 박해를 받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라고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해 주님은 화평케 하는 자, 의를 위해 박해 받는 자가 되라고 하십니다. 이 두 가지 가르침 속에 공통적으로 들어 있는 교훈은 이웃을 사랑하되 진리를 따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자기 생각이 곧 진리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보실 때는 진리가 아닐 때가 많습니다. 진리와 거짓을 어떻게 분별할 수 있습니까? 대개는 각자가 가지고 있는 지식을 바탕으로 추론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방법으로는 진리와 거짓을 올바로 판단할 수 없다고 하십니다. 그것은 겉 사람의 생각으로 속 사람에 속한 것을 판단하는 것이며, 그러므로 질서에 어긋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의 생각과 의지 안으로 진리의 빛이 흘러들어올 때, 우리는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생각이 진리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머리로 추론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방법으로 이웃의 진리를 사랑하고 그것과 연합할 때, 비로소 화평케 하는 자, 의로운 자가 됩니다. 그러다 보면 어려운 일이 많을 것입니다. 가까운 사람에게조차 때로는 ‘아니오’라고 말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화평케 하는 자, 의를 위해 박해받는 자에게 주시는 상이 새해를 맞는 모든 성도와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이웃과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마5:12)

 

아멘

 

 

2024-01-07(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5-01-05(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01-05(D1)-주일예배(2578, 마5,9-12, 신년주일예배), '화평하게 하는 자,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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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5-01-05(D1)-주일예배(2578, 마5,9-12, 신년주일예배), '화평하게 하는 자,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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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의 죄악을  담당하신 주님

 

 

2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4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사53:2-6)

 

 

※ 2024년 올 한 해 개인적으로 가장 많이 자주 들었던 이름과 키워드들은 아마도 ‘이재명’과 ‘부정선거’, 그리고 ‘탄핵’ 등이었겠고, 가장 많은 시간을 썼던 건 유튜브 정치 클립들 보기이지 싶습니다. 주님과 보낸 시간이 아니고 말입니다. 정말 부끄럽지요... ‘이젠 좀 절제해야지...’ 하다가도 날마다 순간순간 들려오는 소식들, 특히 부정선거 소식과 그로 인한 거짓 국회의원들이 벌이는 이 기가 막힌 상황에 가슴에 열불이 나고, 마음이 정말 힘들었던, 정말 원치 않는 스트레스로 저뿐 아니라 나라를 걱정하는 대다수 보수 우파 국민 모두가 힘들었던 한 해였던 것 같습니다. 더더욱 한 해의 마지막 달인 이번 달에 터진 윤석열 대통령의 구국의 비상계엄으로 인해 나라가 광란의 도가니로 돌변, 급기야 거대 야당은 이때다 싶어 대통령을 국회 탄핵 소추시키고, 엊그제는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애쓰고 있던 한덕수 국무총리마저 탄핵 소추시켰습니다. 이로 인해 국내는 물론, 전 세계가 발칵 뒤집혔고, 급기야 국내 정세 불안으로 환율 상승, 나라의 경제가 안 그래도 어려운 때, 더욱 휘청거리기 시작했음에도, 여전히 저 거짓의 정당은 탄핵을 멈출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오죽하면, 제가 기도하기를, ‘주님, 아브라함의 조카 롯을 구하러 간 천사들이 롯과 그 가족을 해코지하려던 소돔 백성들의 눈을 어둡게 한 것처럼 지금 이 나라 좌파들의 눈을 어둡게 하사 저들로 스스로 망하게 하옵소서’라고까지 하지 않았겠습니까?

 

9그들이 이르되 너는 물러나라 또 이르되 이 자가 들어와서 거류하면서 우리의 법관이 되려 하는도다 이제 우리가 그들보다 너를 더 해하리라 하고 롯을 밀치며 가까이 가서 그 문을 부수려고 하는지라 10그 사람들이 손을 내밀어 롯을 집으로 끌어들이고 문을 닫고 11문 밖의 무리를 대소를 막론하고 그 눈을 어둡게 하니 그들이 문을 찾느라고 헤매었더라 (창19:9-11)

 

이제 사흘 후인 글피면 2025년 1월 1일 새해인데도 지난 성탄절 때도 그랬지만, 송구영신을 앞두고도 온 나라 백성의 주된 관심은 이 나라가 어찌 될 것인가에만 있어 불안, 초조, 암담한 상황입니다. 검찰, 경찰, 공수처를 비롯, 모든 언론, 방송, 심지어 여론 조사 기관들마저 한통속으로 미쳐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며, 심지어 법원과 헌재에도 좌파들의 독버섯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이 주님 오시던 로마 시대라면 모르겠는데, 그로부터 이천년이 지난 21세기 2024년 말임에도 이런 정말 말도 안 되는 상황이라는 게 믿어지지가 않는데요, 지금이 이럴진대, 주님 오시던 이천년 전 상황은 더욱더 어땠을까요? 오래전 모세를 통해 주님은 율법, 곧 지상의 언어로 된 ‘말씀’(The Word)을 주셨고, 이 ‘말씀’에 기반한 교회가 새롭게 시작되었지만, 앞선 두 교회 시대인 태고교회, 고대교회가 그랬던 것처럼, 이 ‘표상’(表象, representative) 교회, 유대 교회라고도 하는 이 교회 역시 세월이 흐르면서 변질, 타락, 결국 주님의 모든 선과 진리가 황폐해지는 상태, 곧 종말에 이르게 되자, 이때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항상 새로운 교회는 이전 교회가 생명을 다할 때 일어납니다. 이것이 현 기독교회의 시작입니다. 이런 상황을 BC 8세기에 활동했던 이사야 선지자가 미리 예언한 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주님이 오실 때는 그 속뜻으로는 하나의 교회 시대가 교체되는, 그러므로 오늘날 대한민국 상황의 몇 배, 몇십 배나 더 혼란스러웠을 때인데요, 그때 주님은 어떤 모습으로 오셨는지를 보면서, 오늘 이런 나라 안팎 혼란의 때에 과연 우리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를 깨닫고자 송년 주일예배 본문으로 오늘 말씀을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설교 말씀으로 주님이 여러분을 위로하시고, 빛을 비춰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오늘 설교 원본은 작년 서울 새 교회 송년 주일예배 원고입니다. 그래서 도입 부분을 올해 사정에 맞게 수정했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여리고 연약한 신앙을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라고 말합니다. 물론 이 말씀은 주님에게 처음 신앙이 생길 때의 상태를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도 우리 인간처럼 신앙이 연한 순 같이 연약할 때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게 언젤까요? 주님이 아직 어리셨을 때, 자기 안에 아버지가 계신다는 것과 그를 통해 자기가 세상에 오신 이유를 처음 아셨을 때입니다. 오늘 본문 2절은 그때의 주님의 연한 모습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연한 순과 같다는 것은 그 당시 주님에게 있는 진리, 또는 신앙이 그렇게 약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마른 땅은 주님의 겉 사람인 인성(human)의 상태를 뜻하는데, 처음에는 주님의 인성 안에 진리가 별로 없었다는 뜻입니다. 진리가 없는 사람에게서는 하나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말씀에서는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고운 모양이란 주님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형상을 말합니다.

 

※ 우리는 그동안 이 말씀을 겉 글자의 뜻으로만 이해, 실제로 주님의 외모가 그다지 별로였다, 주님은 보잘 것 없는 외모의 소유자이셨다, 그러니 자신의 외모가 맘에 안 드시는 여러분, 힘을 내시라는 식으로 설교도 하고, 또 그런 설교를 들어왔지만, 그러나 이 말씀의 속뜻은 그런 게 아니라는 사실에, 말씀의 속뜻을 모르면 정말 이렇게 정반대의 엉뚱한 풀이와 적용을 하게 되는 걸 봅니다.

 

그랬던 주님이 여호와의 도움을 받아 몸과 마음이 점점 자랍니다. 그리고 열두 살이 되었을 때는 유월절 날 예루살렘 성전에서 만난 랍비들과 성경에 대해 토론하기에 이릅니다. 누가복음 2장은 그때 랍비들의 반응을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기더라’라고 전합니다. 내면에 지혜가 있는 사람은 외모 또한 아름답게 변합니다.

 

※ 주님의 질서, 곧 주님의 모든 것은 주님으로부터 출발, 속 사람을 거쳐 겉 사람으로, 내면에서 외면으로 흐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후 공생애를 시작하셨을 때 주님은 이미 충분히 아름답고 거룩한 모습이셨을 거라고 짐작됩니다.

 

※ 즉 누가 보더라도 범상치 않았을, 누가 보더라도 예사롭지 않았을, 자기 안에 여호와 하나님이 계신, 그래서 그런 내면이 밖으로 드러나는 그런 어린이였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주님은 아기였을 때에도 이미 몇몇 사람에게는 그러셨는데요, 아래 누가복음 말씀을 보면 말입니다.

 

21할례할 팔 일이 되매 그 이름을 예수라 하니 곧 잉태하기 전에 천사가 일컬은 바러라 22모세의 법대로 정결예식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23이는 주의 율법에 쓴 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 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 24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산비둘기 한 쌍이나 혹은 어린 집비둘기 둘로 제사하려 함이더라 25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26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7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28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29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30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31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32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33그의 부모가 그에 대한 말들을 놀랍게 여기더라 34시므온이 그들에게 축복하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35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36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가 매우 많았더라 그가 결혼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37과부가 되고 팔십사 세가 되었더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38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하니라 (눅2:21-38)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주님에게서 하나님의 신성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 모두 영적으로는 맹인이요, 귀머거리였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영적으로 맹인이었다는 사실은 마가복음 6장 말씀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이 안식일에 나사렛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의 일입니다. 말씀에는 거기 모였던 사람들의 반응을 이렇게 전합니다.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며 주님을 배척했다고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누군가를 판단할 때, 겉모습으로만 판단합니다. 어떤 학교를 나왔는지, 집안은 어떤지, 또는 돈은 많이 버는 지로 판단합니다. 유대인들이 그랬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거룩하고 힘이 있었고, 주님에 의해 많은 병자가 치유되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주님을 업신여기고 멸시했습니다. 나사렛 마리아의 아들 목수라는 한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 여기서 마리아의 남편, ‘요셉’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는 걸 보면, 이때는 이미 ‘요셉’은 세상을 떠난 상태인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외면하고 멸시하고 함부로 대할 때, 주님은 말할 수 없이 슬프셨을 것입니다. 분하고 억울해서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하나님이신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배척하고 모독하며, 그렇게 그런 식으로 영적으로 죽어가는 게 안타까우셨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주님을 죄인처럼 끌고 가 때리고 침 뱉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벌을 받아 고난당하는 것이라고 주님을 비웃었습니다. 주님은 한 번도 불법을 저지르거나 신성을 모독하지도 않았는데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스스로 원해서 고난을 받으신 것입니다.

 

※ 주님의 이런 모습을 저는 참으로 본받고 싶습니다. 이런저런 사람들로 제 마음이 힘들어 조용히 주님 앞에 나아가 말씀드리면, 그때마다 주님은 제게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어땠겠니?’ 그럴 때 저는 ‘어휴, 주님...’ 합니다. 그러면 주님은 다시 제게 ‘너는 나를 사랑하여라. 그래서 누구든지 내가 사랑하면 너도 그를 사랑으로 대하거라. 그리고 모든 일을 사랑으로, 즉 사랑하기 때문에 하도록 하여라’ 하십니다. 그럴 때, 제 눈빛이 돌아오며, 초롱초롱해집니다. 마음도 가벼워지고 말입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왜 주님은 그런 모욕과 조롱을 스스로 자원하셨을까요? 본문 5절에서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주님은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궁극적으로 평화를 주시기 위해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것에 대해 ‘계시록 해설’ 365번 글 31번 항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과 결합한 사람들에게 평화란 천국과 영원한 삶을 뜻한다. 왜냐하면 주님이 천국과 지옥의 모든 것을 당신의 질서 가운데로 끌어내려 굴복시키시지 않으셨다면, 그리고 동시에 당신의 인성 안으로 불러들인 시험을 통해 인성을 영화롭게 만드시지 않았다면 인류는 어떤 방법으로도 구원받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계시록 해설 365:31, 이순철 역) Therefore “peace” here signifies heaven and eternal life to those who are conjoined with Him; for the human race could by no means be saved if the Lord had not reduced all things in the hells and in the heavens into order, and at the same time glorified His Human, and these were accomplished by temptations admitted into His Human. (AE.365:31)

 

주님은 인간의 몸으로 지옥을 이기심으로 당신 안의 신성과 인성을 하나로 만드시고, 그렇게 해서 신성한 인간(Divine Human)인 동시에 하나님이 되시기 위해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영원하고 무한하신 주님이 살인자와 강도와 같은 인간들에게 가까이 오시기 위해서는 그 길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 주님의 유전 악 인성을 영어로는 human이라 하고, 영화되신 인성을 Divine Human이라 합니다. 이 Divine Human에 담긴 아르카나(arcana, 라틴, 秘義)는 그 의미가 무한합니다.

 

그래서 본문 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말씀에서 양은 본래 순진한 사람을 뜻하지만 여기서는 반대입니다. 즉 주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육신의 욕망을 좇아 마음대로 사는 자들이 양입니다. 주님은 그런 인간들을 위해 세상에 오셔서 온갖 멸시와 죽음에 이르는 고통을 견디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높고 높은 천국에서 낮고 비천한 땅으로 스스로 내려오셔서 기꺼이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오직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주님이 얼마나 인자하고 겸손한 분이신지를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세상에 계시는 동안 사람들로부터 지독한 멸시와 천대를 받으시고도 끝내 참으셨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당신 안에 계신 아버지 앞에 지극히 낮은 자세로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왜냐하면 영화롭게 되시기 전 주님의 인성은 무한한 신성이신 아버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세상에 계실 때 얼마나 겸손하셨는지는 말씀의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겟세마네 동산에서 마지막 시험을 앞두고 기도하실 때는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또 대제사장과 빌라도에게 끌려가 심문받으실 때는 자신을 위해 한마디도 입을 열지 않으셨습니다. 이사야서 53장 7절은 그것에 대해 예언하기를,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닮겠다는 우리는 어떻습니까? 다른 사람의 사소한 말에도 쉽게 상처받고 분개합니다. 조금만 불이익이 돌아와도 참지를 못합니다. 모든 게 사랑이 없고 신앙이 없기 때문이며, 또한 겸손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 또한 주님은 유대가 로마의 식민지 시절이던 때 오셨습니다. 공의의 하나님, 정의의 주께서 이런 나라 안팎 사정에 유대의 독립을 위해 싸우는 소위 독립군들에게 힘을 보태시기는 커녕, 오히려 주님은 정치와 군사에는 일체 함구하시고 오로지 하나님의 나라만 전파하셨습니다. 이런 주님을 오늘 우리는 어떻게 닮아야 할까요?

 

한 해를 보내면서 겸손하지 못했던 일, 주님을 믿지 못하고, 그리하여 오래 참지 못했던 일, 이웃을 마음을 다해 사랑하지 못했던 일을 반성합니다. 그리고 새해에는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 또한 필요하다면 손에 손, 총칼을 들고 일어나 나라와 민족을 위해 싸워야 하지만, 더 깊은 상대, 곧 저들 식민 지배계급의 사람들 안에서, 인류의 안에서 숨어 활동하며, 무대 뒤에서 조종하여 인류를 자기들 뜻대로 부리는 지옥을 상대하시기 위해 인류를 깨우시고, 각 사람을 그 무너진 기초에서부터 다시 세우시는 일에 오직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하신 주님처럼, 우리 중에 누구는 그 형편과 사정에 따라 광화문으로, 또 누구는 골방에서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며, 변화된 삶, 곧 일터와 직장에서 자기 안에 일하시는 주님을 드러내는 생활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구호를 외쳐도 절대 무슨 악한 기운, 그러니까 지옥에서 오는 기운을 일체 배제하며, 비록 마이크를 잡아도 이런 나라 사랑의 마음 주시는 주님께 그 공과 고마움, 영광을 온전히 돌리고, 자기는 뒤로 물러나며 자기를 부인하는, 천사들의 겸손으로 마이크를 잡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2024년 송년 주일, 이 말씀에 귀 기울이는 모든 성도와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이웃에게 주님의 그런 은혜가 함께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11:29-30)

 

아멘

 

2023-12-31(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12-29(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4-12-29(D1)-주일예배(2577, 사53,2-6, 송년주일예배), '우리 모두의 죄악을 담당하신 주님'.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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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4-12-29(D1)-주일예배(2577, 사53,2-6, 송년주일예배), '우리 모두의 죄악을 담당하신 주님'.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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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오시는 날

 
 
4겁내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복하시며 갚아 주실 것이라 하나님이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 5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6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7뜨거운 사막이 변하여 못이 될 것이며 메마른 땅이 변하여 원천이 될 것이며 승냥이의 눕던 곳에 풀과 갈대와 부들이 날 것이며 8거기에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 바 되리니 깨끗하지 못한 자는 지나가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될 것이라 우매한 행인은 그 길로 다니지 못할 것이며 9거기에는 사자가 없고 사나운 짐승이 그리로 올라가지 아니하므로 그것을 만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받은 자만 그리로 행할 것이며 (사35:4-9)
 
 
오늘날 많은 사람이 주님에 대해 자기와 같은 보통 사람으로 생각한다. 그 이유는 주님의 인성만 보고 동시에 신성은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의 인성과 신성은 분리될 수 없다. 왜냐하면 주님은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사람이시고, 주님 안의 하나님과 사람은 영혼과 육체가 한 사람인 것처럼 둘이 아니라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주님에 관한 교리 21, 이순철 역) At the present day many think of the Lord no otherwise than as of a common man like themselves, because they think solely of his human, and not at the same time of his Divine, when yet his Divine and his human cannot be separated. For the Lord is God and man, and God and man in the Lord are not two, but one person, yes, altogether one, just as soul and body are one man, (L.21)
 
 
주님의 탄생을 축하하며 성도들과 함께 찬송과 영광을 주님께 드립니다. 주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교회가 빛 그 자체이신 주님을 바르게 가르치지 못했고, 그 결과 세상은 빛이 없는 암흑의 세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빛이 없는 세상을 말씀에서는 사막과 메마른 땅, 용이 사는 곳이라고 표현합니다. 사막과 메마른 땅, 용이 사는 곳은 우리 주변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 다음은 작년 이맘때 국내 및 국외 정세입니다. 이 설교의 원본이 작년 성탄절 설교이기 때문입니다. 1년 후인 오늘은 국내적으로는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및 초거대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의 대통령 탄핵소추, 부정선거 이슈 및 각종 대규모집회, 국외적으로는 다음 달인 2025년 1월, 미 트럼프 대통령 취임과 그에 따른 국제 정세의 급변 등 그 어수선하고 어지러운, 선과 악, 진실과 거짓 간 첨예한 대립 상황은 여전합니다.
 
힘을 가진 사람이 힘없는 사람들을 조상 대대로 살아온 땅에서 쫓아내고,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을 빼앗긴 사람들은 총을 들고 일어나 보복을 꾀하고, 보복은 더 큰 보복으로 이어집니다. 수많은 부녀자와 아이들이 죽어가는 동안 싸움의 당사자들은 자기의 입장과 명분만 고집합니다.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 이야기입니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곳에서는 동성애자들이 늘어나 전통적인 결혼의 질서를 파괴합니다. 최근에는 급기야 어느 종교의 지도자가 동성애자 부부를 축복했다는 소식도 들립니다. 그러면 나라 안 사정은 어떨까요? 80년대 말에 참교육을 하겠다고 처음 교사들의 노조가 생겼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한 일은 그로부터 30년이 지나도록 순진한 학생들에게 편향된 사상을 심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게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6.25 전쟁 때 북쪽의 공산주의자로부터 나라를 지킨 지도자를 민족의 반역자라고 생각합니다. 산업화를 통해 이 나라를 빈곤에서 구한 지도자 역시 그들에게는 반역자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역사의 진실을 뒤집고 우리 사회의 건전한 권위를 파괴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지금 그들 교사의 권위는 자기가 가르친 학생들에 의해 부정당하고 있습니다. 모든 일은 뿌린 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교육계뿐 아니라 정치와 사법, 언론 등의 직업군과 산업 현장 곳곳에서 직업윤리가 사라지고 있고, 종교계의 부패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를테면 이런 게 사막이요 메마른 땅이며, 용이 사는 곳의 모습일 것입니다.
 
세상이 혼란할수록 양심적인 사람들은 사는 게 힘듭니다. 양심을 지키는 사람은 여러 가지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한두 번 시류에 따라 눈을 질끈 감기도 하는데, 그러다 보면 처음 가졌던 마음을 회복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때 그들은 말할 수 없는 슬픔과 두려움을 느낍니다. 오늘 본문 4절에서는 사막과 같은 세상에서 두려움에 떠는 선한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복하시며 갚아주실 것이라 하나님이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주님께서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복하시며 갚아주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주님이 세상에 오실 때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기쁘게 주님을 영접합니다. 주님이 바로 진리이시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진리를 대적하는 악한 자들과 지옥의 영들은 그들이 괴롭히던 선한 사람들로부터 분리되어 지옥에 떨어집니다. 그것은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을 쫓던 애굽의 군대가 모세가 바다를 향해 손을 내밀자 홍해의 깊은 바다에 잠기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구원이며 보복입니다.
 
26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물이 애굽 사람들과 그들의 병거들과 마병들 위에 다시 흐르게 하라 하시니 27모세가 곧 손을 바다 위로 내밀매 새벽이 되어 바다의 힘이 회복된지라 애굽 사람들이 물을 거슬러 도망하나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을 바다 가운데 엎으시니 28물이 다시 흘러 병거들과 기병들을 덮되 그들의 뒤를 따라 바다에 들어간 바로의 군대를 다 덮으니 하나도 남지 아니하였더라 29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바다 가운데를 육지로 행하였고 물이 좌우에 벽이 되었더라 30그 날에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스라엘을 애굽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시매 이스라엘이 바닷가에서 애굽 사람들이 죽어있는 것을 보았더라 31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행하신 그 큰 능력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의 종 모세를 믿었더라 (출14:26-31)
 
주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구원하실까요? 그것에 대해 본문 5절로 7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5그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6그때에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7뜨거운 사막이 변하여 못이 될 것이며 메마른 땅이 변하여 원천이 될 것이며 승냥이의 눕던 곳에 풀과 갈대와 부들이 날 것이며
 
주님은 세상에 오셔서 한편으로는 진리로 사람들을 가르치시고, 한편으로는 낡은 교회를 폐하고 새 교회를 세우십니다. 앞의 말씀에서 ‘그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때에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는 주님의 제자들이 진리를 통해 영적으로 거듭나는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뜨거운 사막이 변하여 못이 될 것이며 메마른 땅이 변하여 원천이 될 것이며 승냥이의 눕던 곳에 풀과 갈대와 부들이 날 것이며’는 새 교회의 출현을 알리는 말씀입니다. 신앙인이 거듭나는 것과 새 교회가 세워지는 것은 떨어질 수 없는 관계입니다. 왜냐하면 새 교회는 거듭나는 모든 사람의 내면에 세워지기 때문입니다.
 
주님에게서 참된 진리를 받아들이기 전에는 우리 모두 맹인이며, 귀머거리이고 절름발이입니다. 왜냐하면 진리를 알지 못하면 눈에 보이는 세상 이치를 진리로 믿고 따르는데 그것은 영원한 진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세상 것들에 매여 있는 동안에는 영원한 진리에 눈뜰 수 없습니다. 그건 주님에 대해, 사후의 삶에 대해, 영원히 사는 이치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바로 맹인의 상태입니다. 진리를 모르면 또 귀머거리라고 했습니다. 귀머거리라는 건 진리에 따라 살고자 하는 의지가 없다는 뜻입니다. 말씀에서 귀는 진리에 순종하는 의지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뭔지 모르는데 어떻게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절름발이는 무슨 뜻일까요? 참된 진리를 모르는 사람은 삶 가운데서 세상에 속한 것과 영적인 것의 조화를 이뤄낼 수 없다는 뜻입니다. 영적 진리를 모를 때 사람들은 세상 법이나 도덕을 기준으로 행동합니다. 새 교회에서는 그건 세상 사람의 눈에 맞춰 사는 것이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게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그런 사람들은 사후 육신의 옷을 벗고 영계에 들어갈 때, 속에 감추었던 추악한 본성이 그대로 드러난다고 합니다. 그런 걸 보더라도 진리가 없는 절름발이의 삶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세상에 오셔서 진리로 맹인의 눈을 밝히시고, 귀머거리의 귀를 여시며, 절름발이들을 사슴과 같이 뛰게 만드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데리고 기존의 교회가 무너진 자리에 새 교회를 세우십니다. 그러므로 앞의 말씀에서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승냥이의 눕던 곳에 풀과 갈대와 부들이 날 것이며’라고 한 것은 새 교회가 세워지는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광야와 사막은 풀과 나무가 자라지 못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속뜻으로는 진리와 진리에 따른 삶이 없는 황폐한 교회들을 의미합니다. 말씀에서는 또 그런 교회들을 용이 눕던 곳이라고 했습니다.
 
한글 성경에는 ‘승냥이’라고 했는데 원문에는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속뜻으로 용은 무슨 뜻일까요? 기존 교회들이 가르치는 잘못된 교리를 뜻합니다. 즉 입으로는 한 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세 하나님을 믿는 교리입니다. 둘째는 믿음으로부터 삶을 분리하여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교리입니다. 그러면 새 교회에서는 주님을 어떻게 이해할까요? 한 분 주님 안에 세 본질이 있다고 믿습니다. 즉 주님은 사랑 자체이신 분이지만, 인간 앞에 나타나실 때는 진리로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인간의 구원에 구체적으로 관여하실 때는 진리의 능력, 즉 성령으로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한 분 하나님 안에 있는 세 본질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버지가 사랑 자체이신 분이라면, 아들은 사랑에서 발현되는 진리이고, 성령은 첫 번째와 두 번째 본질인 사랑과 진리로부터 발현되는 진리의 능력인 것입니다. 주님을 이렇게 이해할 때, 우리는 한 분 하나님이신 주님과 온전히 결합할 수 있으며, 그때 주님이 주시는 믿음과 사랑은 떼어놓을 수 없는 하나라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게 됩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마지막 때 교회들은 신관에 있어서는 한 분 하나님을 셋으로 나누고, 신앙관에 있어서는 믿음으로부터 사랑을 떼어놓음으로써 주님에게서 멀어졌습니다. 주님은 그래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교회의 원형을 회복하시고, 그를 통해 주님에게서 멀어졌던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승냥이의 눕던 곳에 풀과 갈대와 부들이 날 것이며’라고 한 것은 주님이 세우시는 새 교회로부터 참된 진리가 샘솟듯 솟아남을 의미합니다. 물과 시내는 참된 진리와 그것에서 비롯한 교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8거기에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 바 되리니 깨끗하지 못한 자는 지나가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될 것이라 우매한 행인은 그 길로 다니지 못할 것이며 9거기에는 사자가 없고 사나운 짐승이 그리로 올라가지 아니하므로 그것을 만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받은 자만 그리로 행할 것이며
 
본문 8절에는 새 교회를 통해 주님이 가르치시는 진리를 ‘거기에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 바 되리니 깨끗하지 못한 자는 지나가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될 것이라 우매한 행인은 그 길로 다니지 못할 것이며’라고 말합니다. 또 9절에서는 ‘거기에는 사자가 없고 사나운 짐승이 그리로 올라가지 아니하므로 그것을 만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받은 자만 그리로 행할 것이며’라고 말합니다. 사자는 본래 악과 거짓으로부터 교회를 지키는 진리의 능력을 나타내지만, 여기서는 진리를 파괴하는 거짓의 힘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사나운 짐승은 신앙인을 유혹하는 불결한 욕망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사자와 사나운 짐승이 없다는 것은 주님께서 오신 후에는 어떤 거짓이나 추악한 욕망도 새 교회의 신성한 진리를 파괴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참으로 위로가 되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제가 어릴 때는 성탄절과 연말이 되면 카드를 손수 써서 친구들에게 보내곤 했습니다. 카드 속 그림에는 산타할아버지가 썰매를 타고 눈 덮인 숲길을 달리고 숲속에 작은 교회로부터 불빛이 새어 나왔습니다. 그림 속의 교회처럼 새 교회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작은 교회입니다. 그러나 이 교회로부터 나오는 불빛과 빛은 온 세상을 밝히는 가장 밝고 힘 있는 진리입니다. 2000년 전에 오신 주님께서 세상을 이기고 지옥을 이기신 능력의 진리로 다시 새 교회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주님은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과 관련, ‘하나님의 섭리’ 33:2항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습니다.
 
주님은 정욕이라고 하는 악한 사랑과 그 애정이 제거되는 만큼만 사람들과 가까이 결합하신다. 이 사랑과 애정들은 자연적 사람 안에 있으며, 사람이 자연적 사람으로부터 하는 일은 뭐든 스스로 하는 것처럼 느낀다. 그러므로 사람은 스스로 하는 것처럼 그 사랑의 악을 제거해야 하며, 그런 만큼 주님은 가까이 오셔서 당신 자신을 그에게 결합시키신다. (이순철 역) the Lord can conjoin himself more closely to a man only as the love of evil is removed along with its affections, which are lusts. These lusts reside in the natural man. What a man does from the natural man he feels that he does of himself. For his part, therefore, a man should remove the evils of that love; so far as he does, the Lord comes nearer and conjoins himself to him. (DP.33:2)
 
이 글을 통해 우리는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과 하나님을 보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러니까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세상 정욕을 멀리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보는 것은 그때 주님과 결합하여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신앙인을 괴롭히는 여러 가지 정욕들이 있습니다. 나를 내세우는 것, 다른 사람 위에 올라 지배하려는 것, 이웃의 것을 탐내는 것, 물질적인 쾌락 그 자체를 즐기는 것 등 다양한 욕망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에 붙잡혀 있는 동안에는 주님은 우리 안으로 오실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악한 사랑이 주님과 우리 사이에 장애가 되기 때문입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탄식합니다. ‘주님을 정말 사랑하지만, 세상을 도저히 이길 수 없습니다.’라고 말이죠. 그러나 그럴수록 능력의 진리로 오신 주님을 믿고 일어서야 합니다. 주님께서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복하시며 갚아주실 것이라 하나님이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성탄절을 맞아 주님의 그런 은혜가 모든 성도와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이웃과 함께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1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2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 3너희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며, 10여호와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들의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로다 (사35:1-3, 10)
 
아멘

 
2023-12-24(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12-25(D4)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4-12-25(D4)-성탄예배(2576, 사35,4-10), '주님이 오시는 날'(성탄절).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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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4-12-25(D4)-성탄예배(2576, 사35,4-10), '주님이 오시는 날'(성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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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1그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2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3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4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5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6거기 있을 그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7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눅2:1-7)

 

 

오늘은 주님의 탄생에 대한 말씀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주님의 탄생 이야기는 주님이 세상에 오신 역사적 사실에 대한 기록이지만, 그 내적 의미, 즉 속뜻은 많이 다릅니다. 내적 의미로 주님의 탄생은 주님께서 당신을 믿는 사람들에게 내적 진리로 오시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그것에 대해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1절입니다.

 

1그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가이사는 본래 그 기원이 된 줄리어스 씨저(Gaius Julius Caesar)의 이름입니다. 씨저는 로마 황제의 기원이 된 사람입니다. 클레오파트라로 유명한 그가 암살당한 후, 그의 양자요, 조카인 옥타비아누스가 초대 로마 황제가 됩니다. 신약 말씀에서는 ‘가이사’를 로마 황제를 칭하는 일반명사로 사용했습니다.

 

※ 신약에 나오는 가이사들은 ① 오늘 본문의 가이사 아구스도(B.C. 27–A.D. 14) ②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 총독으로 있을 때 디베료(A.D. 14–37, 눅3:1; 막12:14) ③ 로마에 거주하던 모든 유대인을 추방한 글라우디오(A.D. 41–54, 행17:7, 18:2) ④ 바울이 로마에 상소했을 때 가이사(A.D. 54–68, 행25:11) 등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저 가이사 아구스도는 주님 당시에 로마를 다스렸던 황제, 즉 옥타비아누스의 이름이며, 바로 그가 주님께서 탄생하실 즈음에 모든 사람에게 호적을 하도록 명령을 내렸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호적을 한다 하지만, 영어 성경에는 인구조사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말씀에는 인구조사를 했다는 기록이 몇 군데 나옵니다. 예를 들어, 민수기 1장에서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인구를 세어 보라 명령하시고요, 또 사무엘하 24장에는 다윗이 인구조사를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인구조사를 한다는 것이 영적으로는 어떤 의미일까요? 말씀에 나오는 인구조사의 속뜻은 사람의 내면에 있는 선과 진리들을 살피고 판단하는 일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떤 사람에게 선과 진리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그리고 그 선과 진리들의 종류와 특성이 어떤 것인지를 판단하는 것, 이것이 말씀에 나오는 인구조사의 속뜻입니다. 따라서 인구조사는 그 속뜻, 곧 영적 의미로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오직 주님만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다른 사람들 속에 선과 진리가 어떤 것들이 있는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겉으로 드러난 것만 보고는 사람의 내면을 알 수 없지 않습니까? 따라서 말씀에서 인구조사라 하면 결국 주님께서 각 사람 안에 있는 선과 진리의 특성이 어떤 것인지를 파악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왜 ‘그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했을까요?

 

주님이 세상에 오시기 전, 또는 각 개인의 내면으로 오시기 전에는 아직 사람들 안에 진정한 진리가 없습니다. 주님이 각 사람의 내면에 오시기 전 상태의 사람들 안에 있는 진리는 세상 진리입니다.

 

※ 여기 ‘주님이 각 사람의 내면에 오신다’는 표현을 개신교식으로 표현하면, ‘각 사람은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한다’이지 싶습니다. 뭔가 살짝 2% 부족합니다만...

 

이 진리 역시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이기는 하지만, 가장 낮은 차원의 진리입니다. 그러니까 여기 가이사 아구스도는 그 속뜻으로는 세상 진리나 규범, 또는 세상 법도를 의미합니다. 우리 역시 참된 진리를 전혀 모르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세상의 규범, 또는 말씀의 글자의 뜻으로부터 이해한 진리,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를테면, 그때가 가이사 아구스도가 우리의 삶을 다스리던 때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때부터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살피시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가이사의 영에 따라 인구조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왜 우리 안에 선하고 진실한 것에 대해 관심을 가지실까요? 우리 안의 선과 진리의 특성을 왜 살피실까요? 그것을 아셔야 각 사람에게 맞는 구원의 섭리를 펼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2절입니다.

 

2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구레뇨’가 아니라 ‘수리아’입니다. 수리아 지역에서 처음으로 인구조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수리아는 지금의 시리아를 말하는데, 주님 당시에는 아람이라고 불리던 곳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아브라함이 종 엘리에셀을 보내 아들 이삭의 짝으로 리브가를 밧단 아람이라는 곳에서 구해 온 기록이 있습니다. 또한 이삭의 아들 야곱도 하란이라고도 하는, 이 아람에 사는 외삼촌의 딸들을 아내로 맞이했습니다. 이런 기록의 속뜻이 무엇일까요? 수리아 또는 아람은 선과 진리를 인식하는 것, 또는 그 상태를 의미합니다. 아람이 선과 진리에 대한 인식을 뜻하는 까닭은, 아람은 원래 노아의 아들 셈의 후손들이 살았던 지역이며, 그러므로 아람이라는 지역에는 오래전부터 고대교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곳 사람들은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말씀에 나오는 아람, 또는 시리아가 그 속뜻으로는, 선과 진리에 관한 인식을 나타내는 이유입니다.

 

※ 이런 관점에서 보면, 최근 시리아 반군이 대를 이어 54년간 세습하던 아주 악명높은 독재자 바샤르 알아사드 정권을 몰아내고 나라를 되찾는 일이 일어났는데, 이 역시 무슨 주님의 섭리 있으심이지 싶습니다.

 

여기서 잠깐,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과정을 통해 선과 진리를 인식할까요? 주님께서 선과 진리를 보내주시면, 그것을 바로 인식, 이해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는 인간의 머리로는 바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내면에 있는 합리(合理, rational)라는 눈을 통해서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것이 선이며, 어떤 것이 진리인지, 그리고 선과 진리가 어떤 모양인지를 보는 능력이 합리입니다. 이성(理性)이라 해도 될까요? 다시 말하면 합리라는 의식 속에서 비로소 선과 진리가 형상화됩니다. 그래서 이삭과 야곱이 아내를 아람에서 만나는 것은 합리를 통해 진리를 만나는 것을 뜻하며, 따라서 시리아, 즉 아람에서 가장 먼저 인구조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주님께서 본격적으로 사람의 내면을 살피시는 시기는 우리가 합리(合理)라는 능력을 통해 진리를 이해하기 시작할 때부터라는 사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물론 그전에도 주님께서는 우리 속에 있는 모든 것을 알고 계세요. 그런데 그 전에 아시는 것과, 우리가 진리와 선이 무엇인지 알고 난 후에 우리를 살피시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 처음 호적을 시작했다는 말은 바로 그런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이웃에 대한 사랑과 진리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할 때, 주님께서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시각으로 우리들의 내면을 살피시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 오늘 본문 앞부분은 전반적으로 주님이 오시는 시대적 상황, 즉 한 사람의 내면에 주님이 찾아오시는, 전반적 정황에 대한 설명입니다.

 

3절입니다.

 

3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여기서 고향이라고 하지만, 영어 성경에는 성읍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4절과 5절에는 베들레헴 동네라는 말이 나오는데, 동네라는 말도 같은 의미입니다. 그러면 말씀에서 고향, 성읍, 동네의 속뜻은 무엇일까요? 종교의 교리를 나타냅니다. 각 사람의 종교적 신념을 나타낸다는 것이죠. 그래서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라는 것은 주님이 아직 오시기 전에는, 주님께서 각 사람을 그의 종교적 신념에 따라 판단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어떤 사람을 선하다 하실까요? 자기 종교의 교리 가운데 주님으로 말미암은 교리에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교리를 그냥 알고만 있는 것이 아니고, 교리를 삶으로 실천하는 사람, 주님은 그런 사람을 선하게 여기십니다.

 

※ 여기 ‘자기 종교의 교리 가운데 주님으로 말미암은 교리’라고 굳이 구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슬람 교리 가운데 보면, 몹시 악한, 누가 보아도 지옥으로 말미암은 교리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은 교리, 곧 거기 녹아있는 주님의 신성은 선하고 진실합니다. 주님 사랑, 이웃 사랑에서 녹아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세상 모든 종교에 주님의 신성이 녹아져 들어가게 하셨고, 그러므로 자기 종교에 녹아져 있는 주님의 신성에 생전에 건강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은 사후에 천사들의 오리엔테이션을 받고, 거기서 모두 주님을 영접합니다. 다음은 이와 관련,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김은경 역) 321번 글 인용입니다.

 

나는 많은 경우에 의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도덕적으로 살고, 자기 종교에 따라 순종과 겸손과 서로 간의 이웃 사랑으로 살았으며, 그래서 양심을 지니게 된 비기독교인들이 내세에 가면 천사들이 이들을 받아들여 정성을 다해 선과 신앙적 진리에 대해 세심히 가르쳐준다. 이 사람들은 일단 배우고 나면, 겸손하고 총명하며, 지혜롭게 행하고, 기꺼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흡수한다. 그 이유는, 그들에게는 신앙적 진리에 위배 되는, 뽑아버려야 할 그릇된 관념이 형성되어 있지 않고, 특히 주님을 보통 사람으로밖에 여기지 않는 기독교인들이 갖고 있는 것과 같은, 주님을 함부로 여기는 관념은 더욱 없기 때문이다. 그와 반대로 비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고, 그렇게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셨다는 말을 들으면, 즉시 수긍하고 주님을 예배하며, 하나님은 천상천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리고 인류는 그분의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당신을 온전히 나타내신 것이라고 말한다. 주를 떠나서는 구원이 없다는 것은 신적 진리다. 그러나 그 말은 모든 구원은 주님으로 말미암는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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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모든 사람이 호적 하러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4절과 5절에서는 요셉과 마리아에 대해 말합니다.

 

4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5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 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여기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와,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호적 하러 올라가니’라는 말씀을 보겠습니다. 다윗은 그 속뜻으로 주님을 표상합니다. 그래서 다윗의 집 족속은 주님의 교회에 속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러면 다윗의 집 족속은 언제부터 주님의 교회에 속하게 되었을까요? 아람 시절부터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에서 아람, 또는 수리아(시리아)의 상태는 말씀을 통해 진리와 선을 깨닫는 상태,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오래전부터 시작된 길고 긴 과정을 거쳐 오늘 그 자손 요셉은 지금 다윗의 집 족속, 즉 주님의 교회에 속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 위 ‘아람 시절’이란 말은 요셉이 아람, 곧 수리아에서 실제 살았었다는 말이 아니라 그 내적 의미, 곧 우리 모두 누구나 다 개인 신앙 발전 과정에서 수리아 시절, 아람 시절이 있다는 말입니다. 즉 말씀을 통해 진리와 선을 깨닫는 시기, 우리 안의 합리와 이성을 통해 진리를 만나는 순간이 있다는 말이지요.

 

5절에서는 요셉 혼자 다윗의 동네를 향하는 것이 아니라, 요셉과 마리아가 함께 다윗의 동네를 향하는데요,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엘리사벳과 사가랴의 경우처럼 그 내면에 교회가 존재하는 사람을 나타냅니다. 즉 교회를 이루는 두 가지 요소인 선과 진리가 바로 요셉과 마리아입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참된 진리를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그 진리에 따라 살려고 노력하는 어떤 사람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진리를 알기만 하고, 그것에 따라 살려고는 하지 않는 사람은 그 마음속에 아직 교회가 세워졌다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두 사람이 갈릴리 나사렛에서 유대 땅 베들레헴으로 가는 길은 주님을 전혀 몰랐던 사람들이 주님을 믿게 되고, 마침내 주님께서 내적 진리로 그들에게 임재하시기까지 걸리는 기나긴 여정을 나타냅니다. 우리 자신을 생각해 보십시오, 처음 진리를 알기까지 여기저기 얼마나 많은 곳을 헤매고 다녔습니까? 그리고 진리를 안 다음에도 제대로 신앙생활을 한다 말할 수 있게 된 건 또 언제부터입니까? 대개는 내적 싸움을 치열하게 하면서 잘못된 습관들을 고치기 시작한 것이 그리 오래지 않습니다. 어떤 경우는 아직 그 단계에 들어서지도 못한 분들도 계시고요. 그러니 주님에 대해 전혀 몰랐던 사람이 주님을 알고, 그리고 가장 순수한 진리이신 주님을 만나는 과정이 얼마나 험난한 길입니까? 오늘 말씀에서는 단순히 ‘요셉이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 하러 올라갔다’고 하지만, 그것은 그 속뜻으로는 사실 아주 길고 험난한 여정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그 길을 처음 가기 시작할 때, 이미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오시기로 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계획입니다. 마리아가 아기를 잉태하고 있다는 것이 그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사랑이 놀랍지 않습니까? 주님을 만나는 것은 그냥 하루 이틀 걸어가면 되는 그런 길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길을 기를 쓰고 가다 보면 언젠간 주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길의 시작인 갈릴리 나사렛 동네는 주님을 알기 전 이방인의 교리 가운데 있었던 상태이고요, 유대 땅에 들어온 것은 주님의 교회에 소속, 기적적으로 선한 삶을 살기 시작하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요셉과 마리아는 주님이 탄생하시는 곳 베들레헴에 당도했습니다. 6절입니다.

 

6거기 있을 그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이 말씀은 주님께서 우리 신앙인들의 내면으로 오실 때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때가 되기까지 너무나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때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마리아에게 첫아들이 태어났습니다. 그 모습을 7절에서는

 

7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라고 합니다. 마리아에게 첫아들이 태어나는 것은 우리 신앙인들의 믿음 가운데로 내적 진리이신 주님께서 오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내적 진리이신 것은, 아기가 강보에 싸였다는 사실로 알 수 있는데요, 강보는 그 영적 의미로는 가장 순수한 진리를 나타냅니다. 가장 순수한 진리란, 그 속에 사랑이 있는 진리입니다. 주님이 오시기 전의 진리는 사랑이 없는 진리입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그것은 진리에 대한 지식이나 교리에 대해 그저 알고만 있는 지식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제 주님께서 사랑을 동반한 내적 진리로 오셨습니다. 그 주님이 요셉과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오신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이제까지 전혀 경험해 보지 못했던 가장 순수한 진리, 그 안에 사랑이 있는 진리가 우리 내면으로 흘러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아기가 구유에 누웠다’ 합니다. 구유는 말의 먹이를 담는 통입니다. 건초 같은 걸 담는 통입니다. 그리고 말은 진리에 대한 이해력을 뜻합니다. 따라서 구유는 말씀에서 얻는 진리, 또는 교리를 뜻합니다. 왜냐하면 말이 구유의 먹이를 먹고 사는 것처럼, 자라는 것처럼, 사람의 이해력은 말씀의 진리를 먹고 살기 때문에, 자리기 때문에입니다. 그래서 구유는 말씀의 진리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아기가 구유에 누웠다는 것은 주님께서 말씀의 진리 가운데로 오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진리 또는 교리의 지식 안으로 오시는 겁니다. 그것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구유가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주님께서 오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말씀을 읽으면서 교리 지식을 습득해야 합니다.

 

그러면 ‘여관이 없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여관의 속뜻은 진리를 가르치는 곳입니다. 그래서 여관이 없다는 것은 유대교회 어디에도 진리를 가르치는 곳이 없다는 뜻입니다. 교회가 말씀의 진리를 모두 파괴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교회의 마지막 때를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주님께서 아주 오래전부터, 즉 주님을 알기 전부터 우리를 살피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살피시는 것은 각 사람의 영적 상태에 따라 그를 구원의 길로 이끄시기 위한 것입니다. 주님을 모르는 사람도 나름의 종교가 있고, 신념이 있습니다. 주님은 각자의 종교와 그의 진리를 존중하십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그것을 요셉이 유대 땅으로 오기 전 갈릴리에 살던 시기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그때부터 각 사람을 위한 구원의 섭리를 펼치십니다. 그러한 주님의 섭리가 있었기 때문에, 요셉과 마리아는 갈릴리 땅에서 유대 땅으로 넘어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다윗의 동네 베들레헴에서 가장 순수한 진리이신 주님을 만납니다. 가장 순수한 진리란 어떤 것입니까? 그 속에 선이 있는 진리이며, 능력이 있는 진리입니다. 따라서 주님이 오신다는 것은 바로 그 순수한 진리가 우리 안으로 흘러 들어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오시기 전에는 진정한 믿음 가운데 있다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주님이 오실 때 비로소 진정한 진리를 가질 수 있고, 그리고 선과 진리를 그 자체로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이런 삶을 실제로 산 대표적인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성 프란치스코입니다. 카톨릭에 보면 사람 이름 앞에 ‘’(聖)을 붙여 성인이다, 성자다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 즉 ‘거룩하다’는 표현은 오직 주님한테만 사용하는 것이 맞습니다. 이 점은 확실히 해야 합니다. 그러나 성 아무개, 성자 아무개 할 때의 그 취지와 의도는 그 사람을 주님과 동등으로 여기고자 함이 아니라 그가 그만큼 주님을 본받아 살았음을 존중하고자 함입니다. 물론 이 점을 간과하여 부주의하게 그 성인을 거의 숭배까지 하는 사람들과 그런 경향은 심각한 문제이지만 말입니다. 하여튼 본래 취지는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 이름 앞에 ‘’을 쓴다고 너무 예민하게 반응할 것이 아니라 우리는 감히 그렇게 못 살지만 그렇게 살다 간 그 사람, 즉 그가 오직 주님만 사랑하여 주님이 그와 함께하신 그 모든 기록을 읽고, 우리 역시 그런 삶을 살 용기를 얻을 수만 있다면 좋은 것이며, 그래서 저는 여러분더러 가급적 성인전을 읽으시라 권하는 편입니다.

 

그전에는 어떻습니까? 선과 진리를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이 우리에게 반드시 오셔야 합니다. 주님이 오실 때 비로소 우리는 시험에서 넘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나라 안팍으로 어수선한 이때, 주님의 그런 은혜가 성탄을 맞는 우리 성도님들과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미5:2)

 

아멘

원본

2016-08-07(D1)

청주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4-12-22(D1)

한결같은교회 변일국 목사

 

2024-12-22(D1)-주일예배(2575, 눅2,1-7, 성탄주일예배),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pdf
0.44MB
축도.2024-12-22(D1)-주일예배(2575, 눅2,1-7, 성탄주일예배),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pdf
0.24M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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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1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2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보고 3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하더라 4이로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5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6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7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 8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9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에게 알리니 10(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그들과 함께 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알리니라) 11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 12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부려 들여다보니 세마포만 보이는지라 그 된 일을 놀랍게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 (눅24:1-12)

 

 

사람의 생명에 속한 모든 것은 내적인 것에서 외적인 것으로 차례로 흘러들어온다. 외적인 것은 호감이 느껴지는 기억의 지식과 가장 바깥쪽의 것인 감각에 속한 것인데, 감각에 속한 것이란,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 맡고, 만짐으로써 세상과 소통하는 것이다. 외적인 것에 내적인 것들이 머무는 까닭은 내적인 것의 흐름이 거기서 끝나기 때문이다. 영적 의미로 사람이 걸치는 피복이나 옷으로 나타내어지는 것은 바로 이 외적인 것을 말한다. (천국의 비밀 9216:2, 이순철 역) It is the same with all things that belong to man’s very life, as with those which relate to his understanding, and those which relate to his will. These also follow in order from interior to exterior things. Exterior things are memory-knowledges with their pleasant feelings; and outermost things are those of the senses, which communicate with the world by the sight, the hearing, the taste, the smell, and the touch. Upon these the interior things rest, for in these they terminate. These are the things which are signified in the spiritual sense by the “covering” or “garment wherein he may sleep.” (AC.9216:2)

 

 

다음 주(22일)가 주님 오신 성탄인데 그 전 주인 오늘(15일) 주님의 부활 본문을 만나니 이 또한 새롭습니다.

 

오늘부터 누가복음 24장입니다. 누가복음 마지막 장입니다. 그전에 매일예배 본문으로 하다가 작년 5월, 9장부터 주일예배 본문으로 하였으니, 만일 처음부터 주일예배 본문으로 하였으면 만 3년 정도가 걸리는 대장정이 될 뻔했습니다. 이 귀한 누가복음 속뜻 강해의 길을 먼저 걸으신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님, 지금은 원로 목사님이 되셨지요, 목사님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목사님의 이런 원본 설교가 있었기에, 그리고 사용 허락이 있었기에 저 같은 사람이 용기를 내어 살필 수 있었습니다. 거듭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네, 그럼 시작합니다.

 

주님은 왜 세상에 오셔서 고난을 받고 죽었다 다시 사셨을까요? 그와 관련해 스베덴보리 저,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9216번 글 2항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의 생명에 속한 모든 것은 내적인 것에서 외적인 것으로 차례로 흘러들어온다... 외적인 것에 내적인 것들이 머무는 까닭은 내적인 것의 흐름이 거기서 끝나기 때문이다.

 

이 말이 무슨 뜻일까요? 여러 가지로 이해할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가장 내적 존재인 주님은 가장 외적 존재인 인간에게로 오셔서 영원히 그와 함께 살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섭리입니다. 영원 전부터 계신 무한하신 주님이 당신의 피조물인 유한한 인간과 영원히 함께 살기를 원하신다는 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님은 당신의 생명을 내어주실 정도로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지극히 높은 천국으로부터 지극히 낮은 땅으로 내려오셔서 모진 고난을 이기시고, 신성하고 완전한 진리가 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진리를 통해서만 인간은 주님을 바르게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1절은 완전하고 신성한 진리로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 만나는 사람들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습니다.

 

1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새벽은 영적으로는 주님과 주님의 나라가 임하는 때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부활하신 주님이 완전한 진리로 인간 앞에 모습을 드러내시는 때이며, 동시에 그 진리를 가지고 낡고 부패한 교회를 심판, 새로운 교회를 여시는 때입니다. 그때가 새벽입니다.

 

※ 여자들이 이렇게 안식일이 끝나자마자 새벽같이 무덤으로 찾아간 이유는, 주님 운명하신 첫날, 주님을 장사할 때, 바로 코앞이 안식일의 시작이라 부랴부랴 서두르느라 미처 주님 시신에 향품 바를 새도 없었기 때문이고, 또 관습적으로 장례 때 죽은 시신에 향품 바르는 일은 오직 여자들의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여자들이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으로 갔다고 했습니다. 여자들은 어떤 사람입니까? 진리를 사랑하여 참된 진리이신 주님을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심판 때 구원받을 사람들이며, 주님이 세우시는 새 교회에 참여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여자들은 부활하신, 그래서 살아계신 주님이 아니라 주님의 시신을 만나러 갑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있는 진리가 죽은 자의 시신처럼 아직 생명 없는 진리라는 반증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시신은 죽은 진리, 즉 생명 없는, 말씀의 지식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처음 진리를 받아들일 때의 진리는 생명 없는 진리입니다. 그 이유는 처음에는 진리를 믿기만 할 뿐 아직 행동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자들이 향품을 가지고 주님의 시신에 바르는 것은 죽은 것 같은 진리에 생명을 불어넣는 최초의 노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향품은 내적 진리를 획득하기 전, 신앙인들이 소유하는 자연적인 진리, 이를테면 십계명의 문자적인 가르침 같은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2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보고 3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하더라

 

여자들이 무덤에 갔을 때, 무덤을 막았던 돌이 옮겨져 있었고, 그 안에는 시신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무덤을 막은 돌은 뭘까요? 신앙인들의 내면에서 진리가 살아나는 것을 방해하는, 여러 가지 자아의 거짓을 뜻합니다. 예를 들면, 진리를 안다는 자부심이나 진리에 대한 잘못된 추론, 또는 그 밖에 이기적인 악과 그것에서 비롯된 거짓들입니다. 우리 안에 그런 것들이 있는 동안에는 진리는 무덤 밖으로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님이 이끄시는 대로 처음에는 자연적 진리로, 그리고 다음에는 내적 진리로 말씀을 이해하고 지키려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주님에 의해 진리를 방해하던 거짓들이 물러갑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자아의 거짓을 물리칠 수 없고, 심지어 어떤 게 거짓인지도 잘 모릅니다. 거짓들은 마치 칡넝쿨이 나무를 감아 옴짝달싹 못 하게 하는 것처럼 진리가 자라는 걸 가로막습니다. 주님만이 그것들을 잘라내 치워주실 수 있습니다. 그때 죽었던 진리가 살아납니다. 바로 그런 상태가 무덤을 막았던 돌이 옮겨지는 것이고, 주님이 무덤에서 살아나시는 것입니다.

 

무덤을 막았던 돌이 옮겨진 걸 보고 들어갔는데 정작 있어야 할 주님의 시신이 보이지 않자 여자들은 어쩔 줄을 몰라 합니다. 그 모습, 그 상황을 4절과 5절에선 이렇게 전합니다.

 

4이로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5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6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한글 성경에는 여자들이 근심했다고 하지만, 영어 성경에는 perplex, 즉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일종의 공황 상태에 빠졌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부활하셨는데 왜 여인들은 기뻐하는 대신 공황 상태에 빠졌을까요? 첫째는, 신앙인의 내면에서 진리가 살아나려면 자아에 속한 게 죽어야 하는데, 그때 모든 걸 잃은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진리가 살아났다 해도 처음 한동안은 진리가 나를 주장한다는 걸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 앞에 바로 나타나시지 않은 것과 같은 일일 것입니다. 한마디로, 내면에서 진리가 살아날 때, 신앙인들은 역설적으로 어디에도 기댈 진리가 없는 것 같은 상실감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인들이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것입니다.

 

※ 제가 그랬습니다. 저는 소위 모태신앙이라는 사람으로, 유아세례라는 것을 받은, 정말 나이 육십 되기까지 태어나 교회 밖 세상에 있어 본 적이 없는, 모두가 익히 알고 있는 평범한 기독교인이었습니다만, 그러나 칠 년 전 처음 스베덴보리를 접하여 이 새로운 계시를 받아들일 땐 정말이지 얼마나 두려웠는지 모릅니다. 지난 세월 저를 떠받치고 있던 모든 신앙과 종교적 신념이 한꺼번에 떠나가는 듯했기 때문입니다. 그건 마치 고3 때 갑자기 어머니를 교통사고로 잃었던 트라우마에 버금가는 일이었습니다.

 

※ 위 교회 밖 세상에 있어 본 적이 없는’이라는 말은, 죄를 지어본 적이 없다는 말이 절대 아닙니다. ㅎㅎㅎ

 

그때 그들 곁에 빛나는 옷을 입은 두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두 사람은 누굴까요? 천사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살아있는 진리이신 주님이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입은 빛나는 옷은 부활하신 주님에게서 나오는 가장 밝고 환한, 완전한 진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두 사람이 나타났다고 했을까요? 부활하신 주님에게서 나오는 진리는 선만 있고 진리는 없거나, 진리만 있고 선은 없는 그런 진리가 아니라, 선과 진리가 함께 있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천사가 여인들에게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여인들은 전에 주님이 고난을 받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실 거라는 말씀을 들은 적이 있으나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는 믿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신앙이 아직 자연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직접 눈으로 봐야만 믿는 그런 신앙이었던 것입니다.

 

천사들을 보고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댑니다. 주님이 나타나셨을 때, 사람들이 두려워 떨거나 죽은 자처럼 되었다는 것은 말씀의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계시록을 쓴 요한도 주님의 발 앞에 죽은 자처럼 되었다고 했습니다. 다니엘도 그랬지요. 신앙인들이 그렇게 두려워하는 것은, 내면에서 어떤 영적 변화가 일어날 때 느끼는 불안과 공포를 의미합니다. 주님의 신성이 사람 안으로 임하실 때 인간이 불안과 두려움을 느끼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자들이 느끼는 두려움은 일종의 경건한 두려움입니다. 그러면 여자들에게 일어난 내면의 변화란 어떤 것입니까? 그에게서 죽은 진리가 살아나는 것이며, 그로 인해 자연적 신앙이 영적 신앙으로 한 단계 올라서는 것입니다.

 

7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 8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9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에게 알리니 10(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그들과 함께 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알리니라) 11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

 

여자들이 마침내 주님이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것을 기억해 내고는 무덤에서 돌아가 그 모든 것을 사도들에게 알렸습니다. 무덤은 속뜻으로는 그들이 죽은 진리를 만나던 곳이고, 필요할 때마다 꺼내 사용하던 곳입니다. 이를테면 진리의 지식이 보관된 내면의 기억 장소와 같은 곳이죠. 그러나 진리가 완전히 살아날 때, 이제는 애써 그곳을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살아있는 진리, 살아계신 주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면서 그때그때 필요한 진리를 공급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요14:26)

 

※ 이것이 퍼셉션(perception)입니다. 천사들이 천국에서 주님과 커뮤니케이션하는 방식인데, 그 내면이 열려있던 태고교회도 바로 지상에서 이 방식으로 주님의 인도를 받았습니다. 즉 주님의 뜻과 인도하심을 공부를 통해서, 학습해서 아는 게 아닌, 내가 묻거나 무슨 의문을 품을 때 내적으로 바로 답이 오는 그런 것입니다. 가령, 창세기에 나오는

 

8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9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창3:8-9)

 

와 같은 커뮤니케이션이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의 딕테이트(dictate)를 나의 내면, 곧 내 영이 듣는, 가장 고급하고 고차원적인 커뮤니케이션입니다. //

 

그것이 부활하신 주님이 주시는 은혜입니다. 주님이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들은 사도들은 여자들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 역시 아직은 자연적 신앙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을 직접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봐야만 믿는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베드로가 주님의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12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부려 들여다보니 세마포만 보이는지라 그 된 일을 놀랍게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

 

베드로란 이름의 속뜻은 진리에 대한 순종입니다. 실제로 베드로의 성품이 그랬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그는 급히 무덤으로 달려가 몸을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봤습니다. 무덤으로 달려가는 것은 진리에 대한 뜨거운 애정을 뜻합니다. 그리고 몸을 구부려 들여다보는 건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 안에 있는 진리들을 돌아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리, 또는 말씀을 대할 때는 언제나 몸을 낮춰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진리가 보이고, 또한 죽었던 진리가 살아나는 것이 보입니다.

 

그렇다면 그때 베드로의 눈에 들어온 것은 뭘까요? 주님의 시신이 아니라 세마포였습니다. 세마포의 속뜻은 주님이 주시는 내적 진리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본 진리는 이전에 알던, 생명 없는 지식이 아니라 내적 진리였던 것입니다. 그제서야 그는 자신에게 있던 진리들이 살아났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내면에서 진리가 살아나는 건 눈먼 자가 눈을 뜨는 것 이상의 기적입니다. 흔히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진리가 살아나면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던 기질이 바뀝니다. 그것은 주님만이 이루실 수 있는 기적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 모든 일을 놀랍게 여겼다고 합니다. 놀랍게 여겼다는 건 기적과 같은 일이라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에서 여자들은 향품으로 표상되는 자연적 진리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시작합니다. 자연적 진리란 말씀의 문자로 표현된 진리이며, 내적 진리를 담기 위한 그릇 역할을 하는 진리입니다. 그래서 그 자체로는 아직 완전한 진리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자연적 진리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더라도 점차 그 안에 내적 진리를 담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는 까닭은 내적 진리가 자연적 그릇인 글자 안에 담길 때, 온전하고 힘 있는 진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지옥을 이기신 주님의 능력이 그 안에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도 세상에 계실 때 완전하지 않은 진리의 상태에서 지옥의 시험을 완전히 이기시고, 신성한 진리(Divine Truth) 자체가 되셨습니다. 만약 주님이 처음부터 신성한 진리 자체이셨다면, 주님은 시험을 당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피조물인 지옥이 감히 창조주이신 주님을 대적하거나 도발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에는 시험을 당하는 주님의 진리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지 않고, 인자, 곧 사람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완전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께 기대어 자신에게 있는 진리를 매일 살려야 하고, 더 내적인 진리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온전히 거듭날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은혜가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성도, 그리고 이들과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 다음 주일(22일)은 성탄 주일로, 그리고 성탄절인 25일(수)은 성탄 예배로 드립니다. 시간은 오전 10시 반입니다. 그리고 올해의 마지막 주일인 29일은 송년 예배로, 2025년 첫 주일인 1월 5일은 신년 예배로 드립니다. 이 송년 예배와 신년 예배는 각각 성찬이 있으며, 올해부터는 밤늦은 자정에 드리는 송구영신 예배를 쉬겠습니다. 나중에 교회 규모가 커지고, 또 특별히 많은 요청이 있으면, 그때 가서 재개를 고려하겠습니다. 누가복음 이 24장 속뜻 강해는 2025년 1월 둘째 주일인 1월 12일 주일부터 계속되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호6:2)

 

아멘

 

2023-04-09(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12-15(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4-12-15(D1)-주일예배(2574, 눅24,1-12),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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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4-12-15(D1)-주일예배(2574, 눅24,1-12),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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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마대 요셉, 세마포, 무덤, 향품과 향유’의 속뜻

 

 

50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51(그들의 결의와 행사에 찬성하지 아니한 자라) 그는 유대인의 동네 아리마대 사람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52그가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여 53이를 내려 세마포로 싸고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판 무덤에 넣어 두니 54이날은 준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되었더라 55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이 뒤를 따라 그 무덤과 그의 시체를 어떻게 두었는지를 보고 56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준비하더라 계명을 따라 안식일에 쉬더라 (눅23:50-56)

 

 

주님이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신 후, 주님의 시신을 거두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주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요? 스승의 참혹한 죽음을 보고 놀라 어딘가에 숨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때 공회의 의원이었던 요셉이란 사람이 나타나 빌라도에게 주님의 시신을 달라 요청했습니다. 요셉에 대해 본문 50절과 5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50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51(그들의 결의와 행사에 찬성하지 아니한 자라) 그는 유대인의 동네 아리마대 사람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주님이 계시던 시대는 로마가 세계를 지배하던 때였습니다. 로마인들은 점령지마다 자치정부를 두고, 그들로 하여금 본국에서 보낸 총독의 감독을 받게 하는 방법으로 세상을 지배했습니다. 그러니까 요셉이 의원으로 있는 산헤드린이라 하는 공회는 이를테면 유대의 자치정부 같은 것이었습니다. 당시 공회의 의장은 대제사장 가야바였고, 그 아래 바리새인과 서기관 같은 율법에 밝은 엘리트들 70명이 회원으로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요셉이었습니다.

 

※ ‘산헤드린’(‘סַנְהֶדְרִין’)이라는 말은 헬라어 ‘수네드리온’(συνέδριον, 모여 앉다)에서 나온 히브리 차용어(loan word)입니다.

 

※ 산헤드린의 의장은 대제사장이 맡습니다. 대제사장은 종신직이며, 유고 시 그의 직계가 직무를 자동 승계하는데, 이들의 권력이 너무 커지는 걸 막기 위해 로마는 대제사장의 임면(任免)권을 파견된 총독에게 주었습니다. 복음서에 ‘대제사장들’이라는 표현이 나오는 것은,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이 직이 종신직이어서 한번 대제사장 된 사람을 그가 살아있는 동안은 물릴 수가 없었던 반면, 로마는 저들을 통제하느라 그때그때 파면 및 임명을 새로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 즉 오늘 본문의 배경 된 당시는 로마가 임명한 대제사장 가야바와 유대인들이 인정하는 종신직 대제사장 안나스가 함께 있었습니다. 가야바는 안나스의 사위입니다. 가야바는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볼 때는 일종의 허수아비였던 것이지요.

 

요셉 말고도 공회 의원 중에서 주님을 지지했던 사람은 저 유명한 니고데모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니고데모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 않으나 복음서의 다른 곳에는 주님의 장례를 위해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준비한 사람이 바로 니고데모였다고 전합니다.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 (요19:39)

 

본문에는 공회에서 주님을 죽이기로 결의했을 때, 요셉은 찬성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요셉이란 이름은 속뜻으로는 영적인 사람, 즉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을 뜻하는데, 그것이 바로 요셉의 성품이었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에 의해 영의 눈이 열려 진리와 거짓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요셉은 일찍부터 주님이 선과 진리이신 분이라는 걸 알고 흠모했던 것 같습니다. 요셉을 가리켜 선하고 의로운 자,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선과 진리이신 주님이 다스리시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린다는 것은 주님이 온전히 자기 자신을 다스리길 바란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통치를 바라는 것처럼 선하고 의로운 바람, 사모함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요셉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주님을 반대할 때도 두려움 없이 주님 편에 섰고, 주님이 운명하신 후에는 용감하게 빌라도에게 가서 주님의 시신을 달라한 것입니다. 52절과 53절에는 요셉이 주님의 시신을 수습하여 매장하는 모습을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습니다.

 

52그가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여 53이를 내려 세마포로 싸고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판 무덤에 넣어 두니

 

말씀에서 무덤이나 매장은 속뜻으로는 부활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요셉이 주님의 시신을 세마포로 싸서 무덤에 안치하는 모든 과정은 주님의 편에서는 부활의 마지막 과정, 즉 어머니로부터 받은 인성(human), 유전 악이 묻어 있는 인성을 완전히 벗고, 아버지가 주시는 신성한 인성(Divine Human)으로 갈아입는 마지막 과정을 의미합니다.

 

※ 유대 산지는 대부분 화강암 지대라 조금만 파도 바로 암석이 나와 우리나라처럼 봉분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굴을 파 시신을 보관하는 형태로 매장을 하는데, 부자들은 그 규모가 커 바위 안에 생전에 살던 집 모양을 그대로 구현, 방을 여러 개 만들 정도였습니다. 이런 방식의 매장은 시간도 오래 걸리고, 무엇보다도 큰돈이 들어 일반 백성은 주로 평토장을 해야 했습니다. 평토장(平土葬)이란 한 30센티 정도만 파 관도 없이 시신을 묻고는 대충 흙으로 메워 평평하게 하는 매장을 말합니다. ‘바위에 판 무덤’이라는 낯선 표현엔 이런 배경이 있습니다.

 

그러면 요셉과 같은 신앙인의 편에서는 어떤 의미일까요? 신앙인들이 생명 없는 말씀, 즉 지식으로만 받아들인 말씀을 살아있는 진리, 또는 살아있는 신앙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볼 때, 요셉이 빌라도에게 주님의 시신을 달라 하는 건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 참된 진리의 지식을 구하는 모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요셉이 달라 하는 주님의 시신은 신앙인들이 처음 진리를 배울 때의 아직 생명 없는 말씀 지식, 즉 말씀을 일단 지식으로 받아들이는 걸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말씀 자체이신 반면, 주님의 몸은 말씀의 외관인 문자적 의미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말씀으로부터 진리를 처음 배울 때, 그것들은 일단 기억이라는 창고에 보관됩니다. 그때의 진리의 지식은 마치 서가에 꽂힌 책처럼 아직 생명 없는 상태입니다. 그러다가 그것을 꺼내 읽으며, 말씀의 의미를 깨닫고, 깨달은 그것을 실천, 삶으로 옮기려 할 때, 그때 그 지식은 비로소 살아나기 시작합니다. 비로소 생기가 돈다 할까요? 우리 삶에 영향을 주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좋지 않은 버릇을 끊으려 할 때, 또는 하기 어려운 선한 일을 하려 할 때, 말씀의 능력이 우리를 돕는 것입니다. 나는 그 악습, 그 버릇을 계속하고 싶은데 주님은 그걸 원치 않으심을 알고는, 사랑하는 주님을 위하여 기꺼이 그걸 포기하는 것, 그것이 죽었던 말씀이 살아나는 것이고, 오늘 말씀에서는 요셉의 무덤에서 주님의 시신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요14:21)

 

그렇다면 요셉은 왜 이방인인 빌라도에게서 말씀의 지식을 얻으려 했을까요? 교회의 마지막 때는 부패한 교회의 눈으로는 진리를 볼 수 없고, 교회 밖 사람의 단순한 눈을 통해서만 참된 진리가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와 관련해 말씀에는 교회 밖의 사람인 빌라도가 주님을 보고 바로 진리로 인정한 것을 여러 곳에서 증언합니다.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무리에게 이르되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하니 (눅23:4)

 

19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20예수께서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 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되었더라 21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라 쓰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 하니 22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쓸 것을 썼다 하니라 (요19:19-22)

 

이 역시 주님이 진정한 진리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진리는 스스로 많이 안다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습니다. 진리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이방인들처럼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봐야 보입니다. 그런 까닭에 교회 안의 사람인 요셉은 교회 밖의 사람인 빌라도에게 가서 말씀의 지식을 구한 것입니다.

 

요셉이 주님의 시신을 세마포로 싸서 바위에 판 자기 무덤에 넣었습니다. 세마포는 주님에게서 오는 내적 진리를 뜻합니다. 그것은 사랑이 있는 진리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몸을 세마포로 쌌다는 건 신앙인들이 내적 진리를 가지고 말씀을 이해하는 것이고, 그렇게 해서 말씀을 조금씩 살리는 행위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시신을 바위에 판 자기 무덤에 넣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여기서 바위는 진리를 뜻하고, 팠다는 것은 가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무덤은 죽은 진리가 살아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진리를 처음 배울 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자기 나름대로 이해한 어떤 모양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다 보면 인간의 생각이 섞일 때가 있고, 때로는 본래의 의미를 앞질러 가기도 합니다. 처음에는 모두 그렇게 진리를 받아들입니다. 그것이 돌을 파낸 자기의 무덤에 주님의 시신을 모시는 것입니다. 요셉은 그런 방법으로 참된 말씀을 받아들여 자신의 신앙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요셉 말고도 주님을 받아들인 사람이 또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에 대해 본문 55절은,

 

55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이 뒤를 따라 그 무덤과 그의 시체를 어떻게 두었는지를 보고

 

말씀에서 갈릴리는 이방인을 뜻합니다. 그리고 여자들은 교회를 뜻하지만, 여기서는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갈릴리에서 주님을 따라온 여자들은 교회 밖의 이방인들 가운데 특히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고, 그러므로 참된 진리를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무덤과 주님의 시신을 어떻게 두었는지 보았다고 합니다. 그것은 참된 진리를 받아들인 요셉의 삶에서 죽은 말씀이 어떻게 살아있는 말씀으로 변하는지를 지켜봤다는 뜻입니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들 안에서 진리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나는지 서로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아름다운 꽃이 피어나는 모습과 같은 것이고, 바람이 불 때마다 코끝을 스치는 향기와 같은 것입니다. 갈릴리에서 온 여자들은 요셉에게서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56절에서는 여자들의 그 후의 모습을 이렇게 말합니다.

 

56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준비하더라 계명을 따라 안식일에 쉬더라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삶 가운데서 나타나는 영적인 변화들을 서로 느끼고, 또 자극을 받습니다. 그런 의미에 여자들이 돌아갔다는 것은 요셉에게서 진리가 살아나는 모습을 보고, 여자들이 자신을 돌아봤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여자들은 왜 향품과 향유를 준비했을까요? 그들도 무덤을 찾아가 주님의 시신에 향품과 향유를 바르기 위해서입니다. 향품과 향유를 죽은 자의 시신에 바르는 것은 고대로부터의 관습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향품과 향유는 진리의 가장 바깥에 있는 자연적 진리를 뜻하는데 그것은 그 안쪽에 있는 내적 진리를 마치 방부제처럼 보호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고대인들은 사람이 죽었을 때, 향품과 향유를 시신에 바름으로써 그가 생전에 획득한 선과 진리를 훼손됨 없이 영계에까지 가지고 가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래야 천국에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자들이 주님의 시신에 향품을 바르려 했던 이유는 뭘까요? 말씀의 지식을 살리기 위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말씀에서 배운 진리를 가지고 자연적이고 감각적인 욕구들을 다스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향품과 향유는 신앙인의 삶과 가장 맞닿아 있는 자연적 진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인들은 향품과 향유를 준비해 다시 주님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 갈 생각을 합니다.

 

※ 현실적으로 유대인의 유월절은 안식일 전날 해질녘인 오후 5시부터 시작됩니다. 주님은 오후 3시에 운명하셨으므로 두 시간 만에 모든 장례를 마치느라 다들 경황이 없었을 것입니다. 빌라도에게 시신 처리에 대한 승낙도 받아야지, 사람들을 시켜 나무에서 내려 시신 수습, 곧 세마포로 싸야지, 얼른 무덤에 넣어 두어야지... 무슨 제대로 된 염할 시간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전통적으로 시신에 대한 염, 즉 시신에 향품과 향유 바르는 일은 여자들이 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여자들은 무덤의 위치와 시신 상태를 봐두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안식일 후 새벽같이 와서 오늘 미처 하지 못한 이 일을 그 어두운 무덤 안에서 더듬거려가면서라도 할 수 있으려면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새 교회 가르침 ‘천국의 비밀’ 10252:7항은 주님의 부활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은 여느 사람과는 달리 세상에서 입으셨던 몸 그대로 부활하셨다. 왜냐하면 무덤에 아무 것도 남기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은 당신을 보고 영을 본 것으로 생각한 제자들에게 이르시길, ‘어찌하여 두려워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 (천국의 비밀 10252:7, 이순철 역) It is known that the Lord rose again with the whole body which he had in the world, differently from other men, for he left nothing in the sepulcher; and therefore he also said to the disciples, who when they saw the Lord supposed that they saw a spirit, “Why are ye troubled? Behold my hands and my feet, touch me and see; for a spirit hath not flesh and bones as ye see me have” (Luke 24:38, 39). (AC.10251:7)

 

주님은 보이지 않는 영으로 살아나신 것이 아니라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 볼 수 있는 신성한 인간으로 살아나셨습니다. 그 살아나신 주님, 살아있는 말씀이 거듭나는 사람들의 삶 가운데 매일 나타나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서로의 모습을 보며, 더 많은 사랑과 기쁨을 느낄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요셉이 세마포로 주님의 시신을 싸는 것처럼, 또는 여인들이 향품과 향유를 준비해 주님의 시신에 바르는 것과 같은 노력과 정성을 기울여야 합니다. 세마포로 주님의 시신을 싸는 것은 내적 진리를 가지고 말씀을 이해하고 그것을 삶에 적용함으로써 말씀을 살려내는 것입니다. 향품과 향유를 주님의 시신에 바르는 것은 자연적 진리를 가지고 육신의 욕구들을 다스림으로써 말씀을 살려내는 것입니다. 그런 노력이 없다면 우리에게 있는 말씀은 살아나지 못하고 언제까지나 무덤 속에 갇혀 있을 것입니다.

 

요셉과 갈릴리에서부터 주님을 따라온 여인들에게 내려졌던 은혜가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과 함께 하시길 기도합니다.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신대 (요18:37)

 

아멘

 

2023-04-02(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12-08(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4-12-08(D1)-주일예배(2573, 눅23,50-56), ‘아리마대 요셉, 세마포, 무덤, 향품과 향유’의 속뜻.pdf
0.46MB
축도.2024-12-08(D1)-주일예배(2573, 눅23,50-56), ‘아리마대 요셉, 세마포, 무덤, 향품과 향유’의 속뜻.pdf
0.22M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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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숨지시니라

 

 

44때가 제 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하며 45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 46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47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하고 48이를 구경하러 모인 무리도 그 된 일을 보고 다 가슴을 치며 돌아가고 49예수를 아는 자들과 갈릴리로부터 따라온 여자들도 다 멀리 서서 이 일을 보니라 (눅23:44-49)

 

 

주님의 고난에 대한 말씀을 읽다 보면, 유대인들은 왜 주님을 그토록 미워했을까? 어떻게 진리를 그렇게나 미워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떨쳐 버릴 수가 없습니다.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AC) 904번을 보면,

 

사람에게는 적어도 두 악령과 두 천사가 함께 있다. 악령은 사람에게 있는 악을 부추기나 천사들은 선과 진리를 북돋운다. (AC.904, 이순철 역) There are with every man at least two evil spirits and two angels. The evil spirits excite his evils, and the angels inspire things that are good and true. Every good and true thing inspired by the angels is of the Lord; (AC.904)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진리를 바라지 않고, 자신의 욕망이 원하는 쪽으로 행동할 때, 그는 계속해서 악령의 손을 잡게 됩니다. 그리고 시간이 가면서 점점 진리를 미워하고, 나중에는 자기도 모르게, 그러니까 의도치 않게 진리 그 자체이신 주님을 대적하기까지 이릅니다. 유대인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지독하게 이기적인 사람들이었고, 일상을 부주의하게 살면서 점점 선을 넘더니 결국 악령이 시키는 대로 주님을 없애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라고 하셨습니다.

 

※ 창세기 에서의 유명한 장자권 이야기이지요.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창25:34)

 

물론 이 본문의 속뜻은 따로 있지만, 겉뜻만으로도 깊이 생각해야 하는 본문입니다. 즉 에서의 저런 행동이 저 날만 갑자기 툭 튀어나온 게 아니라는 것이죠. 일상을 부주의하게 살면서 점점 더 선을 넘게 된 결과라는 사실입니다. 무서운 얘깁니다. //

 

오늘 본문 44절은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는 현장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44때가 제 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하며

 

본문에서 육시와 구시, 그러니까 정오와 오후 세 시는 모두 3의 배수여서 속뜻으로는 3과 같은 의미, 즉 완전한 것을 뜻합니다.

 

※ 오늘날은 자정부터 다음날 자정까지가 하루이지만, 성서 시대 이스라엘은 달랐습니다. 그때는 오후 6시부터 다음 날 오후 6시가 하루였습니다. 그래서 아침 6시가 영시, 아침 7시가 일시, 오전 8시가 이시 등등, 그러므로 본문의 육시는 정오, 구시는 오후 세 시를 말합니다.

 

따라서 주님이 삼시, 곧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달리셔서 육시, 곧 정오를 지나 구시, 곧 오후 3시에 숨을 거두시는 것은 주님의 편에서는 시험에서 완전히 이기실 때까지 거쳐야 할 모든 상태를 의미합니다. 말씀에서 시간은 영적인 상태와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거듭나는 사람에게 시험은 단계별로 옵니다. 그리고 그 시험들을 하나하나 완전하게 이겨야 거듭날 수 있습니다. 주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십자가 위에서 고난받으신 시간은, 내적으로는 당신이 영화롭게 되기까지 겪으신 모든 시험의 단계들을 나타낸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육시에서 구시까지의 시간은 교회가 점점 영적으로 어두워지다가 결국 완전히 문을 닫을 때까지의 모든 상태를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죽어가시는 것은 곧 교회에서 진리가 사라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에 대해 말씀에는, ‘때가 제 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해는 주님을 뜻하고, 땅은 교회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해가 빛을 잃고, 땅이 어둡다는 것은 유대교회 안에 주님에 관한 지식과 신앙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는 걸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에 관한 지식이 없으면 신앙도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말씀에는 어둠이 구시까지 계속되었다고 했습니다. 9는 3의 세 배수입니다. 그러므로 그건 모든 것이 완전히 끝난 걸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유대교회 안에 빛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라는 것이고, 그러므로 교회로서의 사명이 끝났다는 뜻입니다. 본문 45절과 46절입니다.

 

45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 46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주님이 숨지신 것을 영어 성경은 영혼을 ‘포기’한(give up) 걸로 표현합니다. 주목할 점은, 앞에서 주님이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실 때는 spirit, 즉 영이라 하고, 뒤에 영혼을 포기하셨다 할 때는 ghost, 즉 망령이라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포기하신 ghost는 무엇이고,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신 spirit은 무엇일까요? 포기하신 ghost는 마지막까지 주님 안에 남아 주님을 시험했던, 어머니로부터 받은 유전적 자아(human self)를 말합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신 spirit은 인간의 자아를 완전히 버렸을 때, 아버지로부터 받는 신성한 자아(Divine Self)를 뜻합니다. 다시 말하면 십자가의 마지막 시험에서 완전히 이기셨을 때, 주님은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로부터 받은 자아를 남김없이 벗으시고, 대신 아버지이신 여호와의 신성한 자아로 갈아입으셨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타고난 생명인 자아는 그냥 생각으로 버린다고 버려지는 게 아닙니다. 주님께 의지해서 죽기를 무릅쓰고 끊어내려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버릴 수 있습니다. 주님도 그런 방법으로 육신의 어머니로부터 받은 자아를 완전히 버리셨습니다. 그리고 그때 주님은 내면에 계신 아버지인 여호와 하나님과 하나로 결합하셨고, 그리하여 신성한 인간(Divine Human)이며,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숨을 거두실 때 성소의 휘장이 찢어졌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이와 관련해서 ‘천국의 비밀’ 4772번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고대교회의 외적인 것은 주님에 관한 모든 것을 표상했고, 또한 주님의 나라의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 즉 사랑과 인애와 그것에서 비롯한 믿음을 표상했으며, 결과적으로는 기독교회에 속한 것을 표상했다. 그러므로 고대교회와 유대교회의 외적인 것들이 꺼풀이 벗겨지듯 밝혀졌을 때 기독교회가 나타났다. 말씀에서 성전의 휘장이 찢어졌다는 것은 바로 그것을 의미한다. (AC.4772, 이순철 역) The externals of the ancient church were all representative of the Lord and of the celestial and spiritual things of his kingdom, that is, of love and charity and the faith thence derived, consequently of such things as are of the Christian church. Thus when the externals of the ancient, and also of the Jewish church, are unfolded and as it were unwrapped, the Christian church is disclosed. This was signified also by the veil of the temple being rent asunder (Matt. 27:51; Mark 15:38; Luke 23:45). (AC.4772)

 

이 글은 주님이 세상에 오셔서 신성한 인간으로 우리와 함께 계실 때, 그동안 주님을 표상해 오던 모든 것이 사라졌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고대교회와 유대교회 같은 표상의 교회는 사라지고, 대신 새로운 교회인 기독교회가 나타났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성소의 휘장이 찢어지는 것입니다. 아시는 것처럼 성전의 성소와 언약궤가 있는 지성소 사이에는 위에서 아래로 휘장이 처져 있었습니다. 영적 의미로 볼 때, 휘장 바깥쪽에 있는 성소는 교회의 외적인 것, 이를테면 말씀의 문자적인 뜻과 예배의 의례, 성전의 기물 같은 것을 나타냅니다. 그에 비해 휘장 안쪽의 지성소는 외적인 것들로 표상되는 교회의 내적인 것, 즉 사랑과 체어리티, 신앙 같은 것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주님이 오시기 전에는 이른바 상응(相應, correspondence) 지식을 가진 극소수의 사람들 말고는 아무도 그 외적인 것들로 표상되는 내적인 것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운명하실 때, 성소의 휘장이 찢어졌다는 것은, 그때부터 인류는 신성한 인간이신 주님과 직접 교통함으로써 그동안 표상에 가려져 왔던 주님과 주님의 나라에 관한 내적 비밀들을 알 수 있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영원 전부터 계신 주님이 신성한 인간이 되어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주님의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의 몸을 만지고,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직접 들은 것처럼 신성한 인간이신 주님을 통해 말씀의 내적인 것들을 직접 만지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성소와 지성소 사이를 가리고 있던 휘장이 찢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소의 휘장이 주님이 운명하시는 순간에 찢어진 이유는 뭘까요? 그때 주님은 비로소 어머니로부터 받은 인성(human)을 완전히 벗고, 아버지가 주시는 신성한 인성(Human)을 입으셨으며, 그리하여 신성한 인간으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운명하셨을 때, 군중은 모두 기뻐했을까요? 꼭 그런 건 아니었습니다. 그것에 대해 47절로 49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47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하고 48이를 구경하러 모인 무리도 그 된 일을 보고 다 가슴을 치며 돌아가고 49예수를 아는 자들과 갈릴리로부터 따라온 여자들도 다 멀리 서서 이 일을 보니라

 

마태복음 8장에도 믿음이 깊은 백부장 얘기가 나오는데 여기서도 백부장이 등장합니다. 백부장은 로마 사람으로 자기 종교의 교리에 따라 신실하게 사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백부장이라고 하는 군대의 지휘관은 속뜻으로 신앙의 교리 안에 있는 사람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비록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이지만, 자신의 신앙에 따라 신실하게 사는 사람이 백부장입니다. 말씀에는 그가 그동안의 일을 모두 봤다고 전합니다. 즉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후, 숨을 거두시기까지 조롱하는 군중들을 위해 기도하시는 것이며, 강도의 간구와 신앙고백을 듣고, 그를 구원하시는 것을 봤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지켜본 백부장이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라고 말합니다. 마침내 주님이 진리시라는 사실을 인정한 것입니다. 주님이 의인이시며 진리시라는 사실을 안 사람들은 백부장 말고도 또 있었는데요, 갈릴리로부터 주님을 따라온 여자들입니다. 말씀에서 갈릴리는 이방을 뜻합니다. 그리고 여자는 교회를 뜻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갈릴리에서부터 주님을 따라온 여자들은 백부장처럼 이방 종교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이지만, 마음속에 교회가 세워진 사람을 뜻합니다. 그들의 교회란 진리에 대한 믿음과 사랑입니다. 그들 역시 멀리서 주님이 운명하시기까지의 모든 일을 봤습니다. 그들이 본 건 무엇이었을까요? 단지 주님이 조롱받고 죽어가는 모습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이 본 건 주님이 세상에 오실 때 입으셨던 부정한 인간을 벗고, 신성한 인간으로 새로 태어나시는 장면이었으며, 그렇게 해서 인류의 구속자이시며 구원자가 되시는 모습이었습니다. 주님은 이제 그런 교회 밖 이방인들을 데리고 새로운 교회를 세우려고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이 오시기 전의 교회들을 표상(表象, representative)의 교회라고 하는 이유는, 구약 말씀의 모든 문자적 의미와, 그로 말미암아 세워진 교회, 그리고 예배의 외적인 것들이 모두 주님과 주님의 나라에 대한 표상이며, 그림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직접 세상에 오심으로써 그동안 주님을 나타냈던 이 모든 표상이 사라졌습니다. 즉 그 역할을 다한 것이지요. 실체가 나타나면 그림자는 사라지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운명하실 때, 성소의 휘장이 찢어진 것은 그동안 주님의 본래 모습을 가리던 표상들이 모두 사라지고, 주님의 실체가 드러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실체로서의 주님이 바로 신적 인성, 또는 말씀의 신성한 내적 의미이신 주님이십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교회 안에 말씀의 내적 진리로 오신 주님을 인정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내적 진리로 오신 주님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주님을 의인으로 인정한 백부장과 같은 사람입니다. 본문에는 그에 대해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전합니다. ‘그 된 일을 보았다’는 건, 성경의 주님의 모든 말씀과 행적을 보고, 이해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건 무슨 뜻일까요? 그것에 대해 ‘계시록 해설’ 815:3번 글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사랑의 열매를 맺는 것을 뜻한다. 즉 자신의 직업에 관한 일을 성실하고 정직하고 근면하게 수행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며, 공동체를 결속시키는 일이며, 선이기 때문이다. (AE.815:3, 이순철 역)

 

라고 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주님의 모든 말씀과 행적을 본받아 우리도 자신의 직업에 관한 일들을 성실하고 정직하게, 그리고 근면하고 겸손하게 해야 합니다. 그때 주님께서 이방인과 같이 어두운 우리의 눈과 귀, 그리고 마음을 열어주셔서 주님의 진정한 모습을 볼 수 있도록 하십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이와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요15:8)

 

아멘

 

 

2023-03-19(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12-01(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4-12-01(D1)-주일예배(2572, 눅23,44-49), '예수께서 숨지시니라'.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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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찬.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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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4-12-01(D1)-주일예배(2572, 눅23,44-49), '예수께서 숨지시니라'.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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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34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35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 관리들은 비웃어 이르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36군인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37이르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38그의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가 있더라 39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40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41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42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43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눅23:34–43)

 

 

오늘 본문에서는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많은 사람이 주님을 비웃고 희롱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사람들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에게 그런 짓을 했다는 게 놀랍습니다. 교회가 주님에게서 멀어질 때는 언제나 말씀을 왜곡했고, 그렇게 해서 말씀의 내적인 것, 곧 내용물인 사랑은 없애고, 외적인 것, 곧 그릇인 신앙만 남겨 놓았습니다. 아담의 태고교회가 그랬고, 노아의 고대교회와 모세의 유대교회가 그랬습니다. 그 결과 주님이 오셨을 때, 유대교회 사람들은 외적으로만 경건할 뿐 내적으로는 아주 부패했습니다. 그런 까닭에, 주님께서는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마23:25)라 하시며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34절 후반,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는 유대인들이 말씀의 진리를 왜곡하는 걸 의미하는데 이에 대한 좀 더 자세한 정황이 요한복음 19장에 나옵니다. 23, 24절입니다.

 

23군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24군인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그들이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군인들은 이런 일을 하고 (요19:23, 24)

 

여기 겉옷은 나눠 가지고, 호지 아니하고 통으로 짠 속옷은 찢지 말고 제비를 뽑아 갖기로 했다 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옷의 속뜻이 진리임을 생각하면, 여기 주님의 겉옷은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속옷은 그 문자적 의미 안에 감춰진 내적 의미임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겉옷만 나누어 갖고, 속옷은 제비 뽑아 한 사람이 가지는 건, 마지막 때 교회들이 말씀의 문자적 의미만 훼손하고, 내적 의미는 훼손하지 못하는 걸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말씀의 내적인 것이 허락되지 않았고, 허락되지 않아 모르는 걸 훼손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 참고로 성서 시대 ‘’에 대한 말씀을 잠깐 드리면, 오늘날 우리와는 달리 이때는 샌들, 터번, 겉옷, 허리띠 및 속옷을 함께 ‘’이라 하였습니다. 여기서 ‘겉옷’은 여러 히브리 표현이 있지만, 공통적으로 ‘입는 옷’이 아니라 ‘덮는 옷’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창9:23, ‘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룻3:9, ‘나는 당신의 여종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 등에 나오는 옷에 대한 표현들이 그렇습니다. 특히 이 룻이 말한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의 의미가 현대 유대인 예배에도 그대로 이어져 예배 중 겉옷을 펼쳐서 가족을 보호하는 의미의 순서가 있습니다. 예배 중, 하잔이라 하는 찬양 인도자가 민6:24-26, 제사장의 축복을 낭송하면, 각 가정의 가장들은 그들 어깨에 걸친 기도 숄, 즉 탈릿을 펼치며, 이때 아내가 그 안으로 들어가 가장의 보호 아래 들어간다는 그런 순서가 있습니다.

 

※ 여기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에 대한 설명이 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일반적인 속옷은 씨줄과 날줄로 불리는 두 줄의 실로 짠 옷감으로 만들어졌는데, 두 개의 옷감을 붙여 끝에 솔기를 대어 꿰매면 완성되었다. 그런데 ‘호지 않고’(솔기를 대지 않고, seamless) 통으로 짠 예수님의 속옷은 분명 특별한 옷이었다. 이것은 ‘날줄’로만 짜서 만든 한 개의 옷감으로 된 옷으로, 실밥을 뜯어서 계속 풀다 보면 기다란 한 개의 실로 풀렸을 것이다. 이처럼 씨줄이 없이 ‘끝없는 날줄’로만 만들어진 옷은 고대의 여러 문화에서 성스러운 것으로 인식되었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대제사장의 속옷은 호지 않고 통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런 의미에서 끝없는 날실로 만들어진 옷을 강제로 찢는다는 것은 ‘신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 인식되었다. 이처럼 고대인들의 ‘호지 않고 통으로 짠 옷’에 대한 개념으로 인해 로마 군인들도 함부로 이 옷을 찢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스라엘 선교사 류모세 저, ‘열린다 성경 생활풍습 이야기’)

 

그 밖에도 오늘 본문을 보면, 군인들이 주님께 신 포도주를 드렸다고 했는데, 그것 또한 진리를 왜곡하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본래 포도주는 진리를 뜻하는데, 여기서 신 포도주는 말씀을 왜곡하고 조작해 만든 거짓 진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이라면 주님이 주신 진리를 실천, 진실한 삶으로 주님께 돌려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부패한 교회들은 말씀 안에 담긴 신앙과 사랑, 진리와 선을 서로 분리, 말씀을 변질시켰습니다. 그것이 이들이 주님께 신 포도주를 드리는 것입니다.

 

35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 관리들은 비웃어 이르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36군인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37이르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주님이 고초를 당하시는 동안, 백성은 서서 구경하고, 관리들과 군인들은 비웃고 희롱했습니다. 백성과 관리, 군인은 각각 어떤 사람들일까요? 백성(people)은 영적 의미로는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면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를 분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들은 주님을 서서 구경만 하고 있었을까요? 대중은 보통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진리의 편을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어떤 사회를 이끄는 진리, 또는 질서가 와해 된다면 그로 인한 피해는 온전히 구성원의 몫이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대중은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당장 자신의 안전만 생각합니다. 바로 그들이 십자가 위의 주님을 구경만 하는 백성입니다. 백성이 그러고 있을 때, 관리들과 군인들은 주님을 비웃고 희롱했습니다. 여기서 관리(ruler)는 교회의 지도자인 성직자를 뜻합니다. 그리고 군인은 교리에 밝은 사람, 이를테면 바리새인이나 서기관 같은 사람입니다. 교리에 밝은 사람, 또는 추상적인 의미로 교리를 군인으로 표현하는 것은, 교회가 진리 아닌 것과 맞서 싸울 때 교리를 내세워 싸우기 때문입니다. 유대교회의 마지막 때 교회가 주님과 사도들을 핍박한 것처럼 오늘날에도 진리에 대한 핍박은 여전합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들은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라고 비웃고 희롱합니다. 말씀의 속뜻으로 오신 주님을 믿는 우리에 대한, 말씀을 겉뜻으로만 믿어 온 기존 교회들의 태도가 저런 것입니다.

 

군중들이 주님을 비난하는 가운데 주님이 달리신 십자가 위에 유대인의 왕이라는 패가 붙었습니다. 그것에 대해 본문 38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38그의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가 있더라

 

이에 대해 요한복음 19장에서는

 

19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20예수께서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 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되었더라 (요19:19-20)

 

유대인의 왕이라고 할 때, 유대는 선을 뜻하고, 왕은 진리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의 왕은 주님은 선에서 비롯한 진리이며, 그러므로 신적 진리 자체이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신적 진리는 진리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바탕에 선이 있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곧 신적 진리 자체이신 분이라는 사실을 히브리어와 헬라어, 로마, 즉 라틴어로 패에 적어 십자가 위에 붙인 것입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신 주님의 섭리는 무엇일까요? 이것에 대해서는 성(聖) 문서에 특별한 설명이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이해하기는, 구약과 신약의 말씀과 그 내적 의미를 통해 신적 진리이며 말씀 자체이신 주님이 세상에 오셔서 고난을 받으시고, 그렇게 해서 영화롭게 되신 것을 세상에 널리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구약의 말씀은 히브리어로 처음 기록되었고, 신약의 말씀은 헬라어로 기록되었으며, 말씀의 내적 의미는 라틴어로 처음 기록된 후 나중에 다른 여러 언어로 옮겨 퍼져나갔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보면, 유대의 관리들 말고도 주님을 비웃는 사람이 또 있었습니다. 바로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강도들 중 한 사람인데요, 그에 대해 39절 이하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39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40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41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42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43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강도 중 하나는 끝내 주님을 인정하지 않고 조롱했습니다. 반면에 다른 사람은 주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인정할 뿐 아니라 주님 앞에 스스로 죄인임을 고백했습니다. 그가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라고 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간구했습니다. 주님께서 그 말을 들으시고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며 그를 구원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세상에 계시는 동안 수많은 사람에게 진리를 전하시고, 병을 고치셨으며, 때로는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을 위로하시고, 함께 우시기도 했습니다. 주님이 가시는 데마다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였습니다. 그럼에도 정작 십자가에 달리실 때는 모두가 주님을 외면했습니다. 주님을 따르던 그 많은 사람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 오늘 설교는 전반적으로 복음서에 나오는, 주님께 병 고침을 받은 사람들까지도 전부 포함해서 결국은 주님을 배반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 같은데요, 그러나 저는 이 부분에서 좀 한 번 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주님의 영육 간 치유하시는 능력이 흘러 들어가 병 고침의 효력이 발생했다는 것은 고침 받은 사람의 내면이 어떠했음을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즉 나중에 배신할, 그런 사람에게 주님의 능력이 흘러 들어갈 수 있었을까... 하는 것이지요. 수많은 사람이 주님을 육안으로 보고 구경했지만, 복음서에 기록된 고침 받은 사람의 수는 극히 제한되었던 것으로 보아 이들은 끝까지 주님을 배신하지 않았을 것으로 저는 보고요, 그러므로 유대인 전체, 유대교회 전체를 거론할 때, 가급적 이들은 빼고 언급해야 하지 않나 저는 생각합니다.

 

새 교회 가르침 ‘참된 기독교’ 539번은 신앙인의 의무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에게 지워진 두 가지 의무가 있으니, 그것은 자기 자신을 검토한 다음 (주님께) 간구하고 고백하는 일이다. 간구는 주님의 자비를 구하는 것이고, 자기가 뉘우치는 악에 대항할 힘과 선을 행하고자 하는 성향과 애정을 구하는 것이다.... 고백은 자신의 악을 보고, 인식하고, 인정하는 것이며, 자기가 비천한 죄인임을 아는 것이다. (참된 기독교 539, 이순철 역) There are two duties incumbent on man, to be done after examination, namely, supplication and confession. The supplication should be that the Lord may be merciful, that he may give power to resist the evils that have been repented of, and that he will provide inclination and affection for doing good,

 

Since apart from the Lord man can do nothing (John 15:5).

 

The confession will be that he sees, recognizes, and acknowledges his evils, and finds himself to be a miserable sinner. (TCR.539)

 

신앙인이라면 늘 자신의 생각과 의도를 살피면서 잘못이 있으면 반성하고 주님의 도우심을 받아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유대교회 사람들은 그런 면이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주님에게서 멀어졌고, 끝내는 주님을 대적하고 죽이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서 반성이나 회개 같은 신앙의 습관이 나중에 얼마나 큰 차이를 만드는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주님이 병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신 것은 단순히 기적을 보이시려는 게 아닙니다. 오직 주님에 의해서만 거듭나고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22:31절에서,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에 의해 거듭난 사람은 사후에 영으로 부활해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산다는 것입니다. 또 눅16:22절 이하에서도 거지 나사로는 사후에 천국에 있고, 부자는 지옥에 던져지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사후에 영으로 부활하는 것과 영생이 있다는 걸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주님의 왼편에 있던 행악자가 죽음의 문턱에서도 주님을 조롱한 것은 신앙만 있고, 체어리티가 없는 사람들이 얼마나 완고하게 진리를 대적하는지를 나타냅니다. 반면에 주님의 오른편에 있던 행악자는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하는 것은 체어리티의 신앙 안에 있는 사람의 간구와 고백을 나타냅니다. 주님께서 그의 간구를 들으시고,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라고 화답하셨습니다. 주님의 오른편에 있었던 행악자처럼 우리도 진실한 간구와 고백으로 매일 살아나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과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42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43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눅23:42-43)

 

아멘

 

2023-03-12(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11-24(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4-11-24(D1)-주일예배(2571, 눅23,34-43),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pdf
0.43MB
축도.2024-11-24(D1)-주일예배(2571, 눅23,34-43),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pdf
0.21MB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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