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말렉’의 속뜻 (1)

 

 

8그때에 아말렉이 와서 이스라엘과 르비딤에서 싸우니라 9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꼭대기에 서리라 (17:8-9) 8And Amalek came, and fought with Israel in Rephidim. 9And Moses said unto Joshua, Choose us out men, and go out, fight against Amalek; tomorrow I stand upon the top of the hill, and the rod of God in my hand. (Exdo. 17:8-9)

 

 

오늘부터 3주에 걸쳐 다룰 주제는 ‘아말렉(Amalek)입니다. 출애굽기 17장은 총 열여섯 절밖에 안 되는 작은 장이며, 거기서도 이 아말렉 본문은 8절로 16절까지 단일 본문임에도 이걸 3주씩이나 다루고자 함은, 주제의 특별함 때문이기도 하지만 거기 담긴 아르카나의 방대함 때문이기도 합니다. 아르카나의 특성상 비록 그 일점일획이어도 어느 하나 방대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특별히 여기 이 아말렉 본문엔 매우 근본적인 아르카나가 여럿 들어있어서 그렇습니다. 그래서인지 스베덴보리도 이 본문을 삼등분해서 다루고 있는데요, 저는 처음엔 모르고 그냥 1회에 걸쳐 다 다루려고 했지만 결국은 포기, 스베덴보리처럼 세 번에 걸쳐 나누어 다루게 되었습니다.

 

이 ‘아르카나(arcana, 라틴어 arcanum의 복수, 秘義, 영어로는 secrets, 지상 언어라는 그릇에 담아놓으신 주님의 속뜻, 내적 의미)라는 개념 역시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데요, 이는 또한 상응과 연결되어 있어 사실은 ‘상응(相應, correspondence, 지상과 천국 간 상응을 말하며, 말씀이 기록된 원리)을 먼저 알아야 아르카나를 어렴풋이라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이들을 다룰 수는 없어 아래와 같은 예로 잠깐 이해를 돕고자 합니다.

 

먼저 아말렉 두 번째 본문인 출애굽기 1710절로 13절 중 12절에 ‘해가 지도록’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상응에는 모든 능력이 들어있는데요, 이 상응을 따라 땅에서 행해지는 것은 하늘에서도 소용이 될 정도로 말입니다. 그 이유는, 상응은 신성(the Divine)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선과 신앙의 선 안에 있는 사람들은 실제로는 상응 안에 있는 건데요, 그래서 신성, 곧 주님이 이들과 관련된 모든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사랑의 선과 신앙의 선이 신성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기적은 상응으로 행해진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은 그 일점일획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하나하나 천국에 있는 것들과 상응하도록 기록되었고, 그 결과 말씀에 신성한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말씀은 천국과 이 세상, 곧 하늘과 땅을 결합하게 하는데요, 땅에서 말씀이 읽힐 때, 천국 천사들은 그 속뜻 안에 있는 거룩함 가운데로 들어가기 때문, 곧 감동하기 때문입니다. Correspondences have all power, insomuch that what is done on earth according to correspondences avails in heaven, because correspondences are from the Divine. They who are in the good of love and of faith are in correspondence, and the Divine does all things that appertain to them, for from the Divine come the good of love and the good of faith. All the miracles recorded in the Word were done by means of correspondences. The Word has been so written that every particular therein, even to the most minute, corresponds to things that are in heaven. Consequently the Word has Divine power; and it conjoins heaven with earth, for when the Word is read on earth, the angels in heaven are moved unto the holiness that is in the internal sense.

 

그러므로 우리는 예를 들면, 병 낫는 기도도 이 상응으로 하는 법을 배웠으면 좋겠고, 평소 이 아르카나가 담긴 말씀 리딩에 힘썼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소리 내어 읽을 때, 우리에게 와 있는 천사들한테는 저런 일들이 일어난다니 말입니다. 저 때, 곧 내가 성경을 읽을 때 내 안에서 천국과 지상 간 결합이 일어난다니 정말 놀랍습니다.

 

다른 하나는,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322번 글에 나오는 에피소드입니다. 김은경 역입니다.

 

기독교인의 경우처럼, 비기독교인 가운데도 현명한 사람과 단순한 사람이 있다. 허락하심에 의해 나는 몇 시간, 또는 며칠간 양쪽 사람들과 얘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비기독교인 중에는 고대인들처럼, 특히 아시아에 크게 자리 잡았고, 거기서 여러 민족에 전파된 종교인 고대교회에 속했던 사람들처럼 지혜로운 사람들은 없다. 이들에 대해 충분히 알 수 있도록 그 현인(賢人)들 중 몇 사람과 아주 가깝게 대화하는 것이 내게 허락되었다. 당대 뛰어난 현인들 중 한 사람이자 학식 있는 사람들 사이에 널리 알려진 사람을 만난 나는, 다양한 주제를 놓고 그와 대화를 나누던 중 어떤 이유들로 인해 그가 키케로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가 현인임을 알고 있었으므로, 나는 그와 지혜, 지성, 질서, 성경 말씀, 그리고 끝으로 주님에 관해 얘기를 나누었다.

 

지혜에 대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삶의 지혜 외에 다른 지혜는 없으며, 지혜는 삶 외에 다른 것에 입각할 수 없다. 또 그는 지성이란 지혜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했고, 질서는 지존자이신 신으로부터 비롯된다고 했으며, 그 질서에 따라 사는 것이 지혜이며, 지성이라고 말했다. 말씀에 대해서는, 내가 성서의 예언서에서 몇 구절을 읽어 주자 그는 굉장히 기뻐했다. 특히 모든 이름과 낱말이 내적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을 아주 좋아했고, 현재의 지식인들이 이런 연구에 흥미가 없다는 사실을 놀라워했다. 나는 그의 사고와 마음의 내면이 열려 있음을 분명히 보았다. 그는 내적으로 너무도 감동하여, 자기가 감당할 수 없는 신성함이 느껴져 더 이상 말씀을 들을 수 없노라고 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평소 바이블 리딩, 곧 성경 읽기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되겠습니다. 우리가 성경, 곧 아르카나가 들어있는 말씀을 읽을 때, 그때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이 놀라운 일들을 안다면 말입니다. 물론 소리 내어 읽든, 그냥 눈으로 읽든 상관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모든 속뜻을 알고 있지 못해도 상관없습니다. 주님은 그걸 충분히 감안하고 말씀을 기록하셨습니다. 그러니 걱정 마시고, 다만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 주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읽으시면 됩니다.

 

참고로, 성경 66권 중 주님의 아르카나가 들어있는 것만 ‘말씀(The Word)이며, 이는 구약은 창, 출, 레, 민, 신, 수, 삿, 삼상, 삼하, 왕상, 왕하, 시, 사, 렘, 애, 겔, 단, 호, 욜, 암, 옵, 욘, 미, 나, 합, 습, 학, 슥, 말까지 총 29권이며, 신약은 마, 막, 눅, 요, 계5권 등 총 34권입니다. 그럼에도 나머지 신구약 32권을 성경에 포함하신 이유는 신앙생활에 유익한 글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들 글은 그저 참고만 해야지 여기서 무슨 교리를 뽑아내고 하면 안 되겠습니다. 주님의 아르카나가 들어있지 않은, 인간의 글, 사람의 글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아말렉에 대해서만 먼저 좀 자세히 살피겠습니다. 8절,

 

그때에 아말렉이 와서 이스라엘과 르비딤에서 싸우니라

 

아말렉’에 대한 첫 기록은 아래 창세기 147절에 나옵니다.

 

그들이 돌이켜 엔미스밧 곧 가데스에 이르러 아말렉 족속의 온 땅과 하사손다말에 사는 아모리 족속을 친지라

 

아브람이 사로잡혀 간 롯을 구하는 본문 가운데 당시 상황을 기숙한 본문이지요. 이는 사실은, 그러니까 속뜻으로는 주님의 어린 시절, 주님의 인성 안에서 일어난 시험을 말합니다.

 

두 번째 기록입니다. 창세기 36장입니다.

 

12에서의 아들 엘리바스의 첩 딤나는 아말렉을 엘리바스에게 낳았으니 이들은 에서의 아내 아다의 자손이며, 16고라 족장, 가담 족장, 아말렉 족장이니 이들은 에돔 땅에 있는 엘리바스의 족장들이요 이들은 아다의 자손이며 (36:12, 16)

 

이 창세기 36장에 나오는 에서의 족보는 그 속뜻으로는 주님의 신성한 자연적 선(the Lord’s Divine good natural)입니다. ‘에서(Esau)의 속뜻이 이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설명들, 이런 표현들, 용어들이 많이 낯설 줄 압니다. 그래서 사실은 이런 속뜻 강해는 처음부터, 그러니까 창세기부터 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래야 순서대로 그 표현들, 용어들 및 설명들이 이해되니까요. 스베덴보리의 고민이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주님의 허락으로 27년간 영계를 경험하며, 알게 된 수많은 개념을 어떻게 지상의 언어로 표현해야 할지 막막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의 대부분 새로 지어내고 만들어야 했을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출애굽기 설교는 이 17장으로 마치고, 창세기 1장부터 들어갈 생각입니다. 아마 여러 해 걸리지 싶은데요, 주께서 제게 기력을 더하여 주시면 계시록까지 좀 마치고 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표현 하나하나, 글 번호 하나하나를 다루기는 무리이지 싶고, 대략 중요 개념들 위주로 스케치를 하게 되지 싶습니다. 저의 풀이를 듣고 참고만 하셔서 전체적인 세세한 건 직접 이 주석을 가까이하여 읽으시기들 바랍니다. 분명 굳건한 신앙의 반석 위에 점점 세워져 감을 느끼실 겁니다.

 

그때에 아말렉이 와서 이스라엘과 르비딤에서 싸우니라

 

아말렉의 속뜻은 ‘the falsity from interior evil’, 즉 ‘내적 악에서 나오는 거짓’입니다. 좀 알쏭달쏭하시지요? 다음은 스베덴보리의 설명입니다.

 

Interior evil is that which lies inwardly concealed with man, hidden in his will, and thence in his thought, no trace of which appears in his externals, as in his actions, speech, and face. They who are in such evil study by every method and art to hide and hoard it under the semblance of what is honorable and just, and under the semblance of the love of the neighbor; yet still they devise nothing else within themselves than how they can inflict evil, and so far as they can they do inflict evil by means of others, taking care that it should not appear to be from them; they also color over the evil itself, that it may not seem like evil. The greatest delight of their life is to meditate such things, and to attempt them in concealment. This is called interior evil. They who are in this evil are called “evil genii,” and in the other life are completely separated from those who are in exterior evil, and who are called “spirits.” (AC.8593)

 

살짝 의역을 좀 하자면,

 

내적 악이란 다음과 같습니다. 이는 사람 안에 봉인된, 사람 속에 있는 것으로, 사람의 의지 안에, 그리고 그렇게 해서 그의 생각 속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사람의 겉, 그러니까 사람의 행동이나 말, 표정 같은 걸로는 도무지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런 악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자기들의 이런 걸 몰래 감출 수 있을까 늘 고민하고 연구하는데요, 그래서 사람들 앞에서 자신들을 짐짓 영예와 공정, 정직을 추구하는 사람들인 양, 짐짓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들인 양 꾸미지만, 그러나 여전히 어떻게 하면 악을 행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타인을 이용해 먹을 수 있을까, 그래야 탄로가 나지 않을 텐데 하는 것밖에는 궁리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악에 색을 입혀 마치 악이 아닌 것 처럼 보이게 하는데요, 이들의 가장 큰 즐거움은 이런 걸 깊이 생각하는 것이며, 몰래 행하는 것입니다. 이런 걸 ‘내적 악’(interior evil)이라 하며, 이런 악 가운데 있는 자들을 ‘악한 정령(精靈)들’(evil genii)이라 합니다. 사후 세상에서 이들은 ‘외적 악’(exterior evil) 가운데 있는, ‘영들’(spirits)이라 하는 자들하고는 완전히 격리되어 있습니다. (AC.8593)

 

좀 더 보충 설명이 이어지는데요, 영어 원본은 생략하겠습니다.

 

이 악에서 나오는 거짓에 대해 좀 더 설명을 드리면, 이 거짓은 악한 영들의 악에서 나오는 거짓하고는 다릅니다. 이 거짓은 그 자체가 악이기 때문입니다. 이 악 가운데 있는 자들은 그 공격하는 대상이 신앙의 진리들이 아닌, 신앙의 선들입니다. 이들은 타락한 애정들을 가지고 액션을 취하는데요, 그걸로 이들은 선한 생각들을 왜곡시키는데, 그 방법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이들은 영적 교회에 속한 사람의 양심에 진짜 감쪽같이 어떤 액션을 취해 비뚤어진 양심이 되게 할 것이기 때문이지요. 이런 일은 타락한 애정을 호흡함으로써 일어납니다. 이들 지옥의 정령급들은 사람을 공격할 때 절대 공개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그가 아주 완강하게 저항할 것 같을 때도 말이지요. 대신 가만히 보다가 그가 낙심, 거의 포기할 것 같다 싶을 때, 그때 갑자기 공격, 그를 밀어 넘어뜨려 그로 하여금 완전히 끝장나게 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을 넘어뜨린 아말렉인데요, 그 결과 이스라엘 자손은 여호와를 등지게 되고, 그 결과 가나안 땅 여러 족속을 두려워하게 됩니다.(14) (AC.8593:2)

 

이들 아말렉에 대해 읽다 보니 무시무시한데요... 저도 모르게 요즘 정치인들을 비롯, 온 나라를, 그리고 전 세계를 시끄럽게 하는 사람들과 세력, 기운들이 생각납니다. 솔직히 제 안에도 이런 아말렉의 속성이 살짝 좀 섞여 있는 것 같아 식은땀이 나기도 하고, 지난날 제가 겪었던 일들이 생각나기도 합니다. 이런 아말렉을 일상생활 속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는 다음 주와 그다음 주 이어지는 말씀들을 통해 계속 살피겠습니다.

 

아래는 위에 나온 민수기 14장입니다. 먼저 13장 끝부분을 보면,

 

30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조용하게 하고 이르되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하나 31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은 이르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32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33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13:30-33)

 

14장입니다.

 

1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백성이 밤새도록 통곡하였더라 2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3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4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지휘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매 5모세와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 앞에서 엎드린지라 6그 땅을 정탐한 자 중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자기들의 옷을 찢고 7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8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9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 10온 회중이 그들을 돌로 치려 하는데 그 때에 여호와의 영광이 회막에서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나타나시니라 11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많은 이적을 행하였으나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 12내가 전염병으로 그들을 쳐서 멸하고 네게 그들보다 크고 강한 나라를 이루게 하리라 13모세가 여호와께 여짜오되 애굽인 중에서 주의 능력으로 이 백성을 인도하여 내셨거늘 그리하시면 그들이 듣고 14이 땅 거주민에게 전하리이다 주 여호와께서 이 백성 중에 계심을 그들도 들었으니 곧 주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보이시며 주의 구름이 그들 위에 섰으며 주께서 낮에는 구름 기둥 가운데에서, 밤에는 불 기둥 가운데에서 그들 앞에 행하시는 것이니이다 15이제 주께서 이 백성을 하나 같이 죽이시면 주의 명성을 들은 여러 나라가 말하여 이르기를 16여호와가 이 백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에 인도할 능력이 없었으므로 광야에서 죽였다 하리이다 17이제 구하옵나니 이미 말씀하신 대로 주의 큰 권능을 나타내옵소서 이르시기를 18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자가 많아 죄악과 허물을 사하시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사하지 아니하시고 아버지의 죄악을 자식에게 갚아 삼사대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19구하옵나니 주의 인자의 광대하심을 따라 이 백성의 죄악을 사하시되 애굽에서부터 지금까지 이 백성을 사하신 것 같이 사하시옵소서 20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네 말대로 사하노라 21그러나 진실로 내가 살아 있는 것과 여호와의 영광이 온 세계에 충만할 것을 두고 맹세하노니 22내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내 이적을 보고서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한 그 사람들은 23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을 결단코 보지 못할 것이요 또 나를 멸시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그것을 보지 못하리라 24그러나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따랐은즉 그가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의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 25아말렉인과 가나안인이 골짜기에 거주하나니 너희는 내일 돌이켜 홍해 길을 따라 광야로 들어갈지니라 26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7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에게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28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29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중에서 이십 세 이상으로서 계수된 자 곧 나를 원망한 자 전부가 30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에게 살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31너희가 사로잡히겠다고 말하던 너희의 유아들은 내가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들은 너희가 싫어하던 땅을 보려니와 32너희의 시체는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요 33너희의 자녀들은 너희 반역한 죄를 지고 너희의 시체가 광야에서 소멸되기까지 사십 년을 광야에서 방황하는 자가 되리라 34너희는 그 땅을 정탐한 날 수인 사십 일의 하루를 일 년으로 쳐서 그 사십 년간 너희의 죄악을 담당할지니 너희는 그제서야 내가 싫어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알리라 하셨다 하라 35나 여호와가 말하였거니와 모여 나를 거역하는 이 악한 온 회중에게 내가 반드시 이같이 행하리니 그들이 이 광야에서 소멸되어 거기서 죽으리라 36모세의 보냄을 받고 땅을 정탐하고 돌아와서 그 땅을 악평하여 온 회중이 모세를 원망하게 한 사람 37곧 그 땅에 대하여 악평한 자들은 여호와 앞에서 재앙으로 죽었고 38그 땅을 정탐하러 갔던 사람들 중에서 오직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은 생존하니라 39모세가 이 말로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알리매 백성이 크게 슬퍼하여 40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산 꼭대기로 올라가며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여기 있나이다 우리가 여호와께서 허락하신 곳으로 올라가리니 우리가 범죄하였음이니이다 41모세가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제 여호와의 명령을 범하느냐 이 일이 형통하지 못하리라 42여호와께서 너희 중에 계시지 아니하니 올라가지 말라 너희의 대적 앞에서 패할까 하노라 43아말렉인과 가나안인이 너희 앞에 있으니 너희가 그 칼에 망하리라 너희가 여호와를 배반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나 44그들이 그래도 산 꼭대기로 올라갔고 여호와의 언약궤와 모세는 진영을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45아말렉인과 산간지대에 거주하는 가나안인이 내려와 그들을 무찌르고 호르마까지 이르렀더라 (14)

 

엄청난 본문입니다. 우리가 오늘 이 본문을 읽을 때, 천사들은 어땠을까요? 아마 수천수만 배의 감동 가운데 들어갔을 줄 믿습니다. 오늘 원고를 여러 번 되새김하시는 가운데 주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설교

2025-06-22(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06-22(D1)-주일예배(2603, 출17,8-9, AC.8592-8599), '아말렉'의 속뜻 (1).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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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의 속뜻

 

 

1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 광야에서 떠나 그 노정대로 행하여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백성이 마실 물이 없는지라 2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이르되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3거기서 백성이 목이 말라 물을 찾으매 그들이 모세에게 대하여 원망하여 이르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 4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조금 있으면 내게 돌을 던지겠나이다 (17:1-4) And all the assemblage of the sons of Israel journeyed from the wilderness of Sin, after their journeys according to the mouth of Jehovah, and they encamped in Rephidim; and there was no water for the people to drink. And the people quarreled with Moses, and they said, Give ye us water and we will drink. And Moses said to them, Why quarrel ye with me? why do ye tempt Jehovah? And the people thirsted there for the waters; and the people murmured against Moses, and said, Wherefore is this, that thou hast made us come up out of Egypt, to make me die, and my sons, and my cattle, with thirst? And Moses cried unto Jehovah, saying, What shall I do to this people? a little more and they stone me (Exdo. 17:1-4).

 

 

오늘은 제가 37년 전인 198868일, 당시 삼성그룹 공채 29기에 합격, 아침에 서울 소공동 삼성물산 앞 주차장에 모여 수십 대 버스에 나눠타고, 용인 자연농원 내 삼성종합연수원으로 들어가던 날입니다. 거의 4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그날의 기억이 마치 영상 보듯 생생한데요, 요단을 건너기 전, 지난 40년 광야 세월을 회상하며 광야에서 새롭게 태어난 이스라엘에게 거듭 여호와의 말씀을 신명(申命)하는 모세의 심경을 조금 알듯도 합니다.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개인적으로는 지난 37년간의 저의 지난날을 조금 회상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1절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 광야에서 떠나 그 노정대로 행하여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백성이 마실 물이 없는지라

 

신 광야(the wilderness of Sin)를 떠난다는 것은 두 번째 시험인 선과 관련된 시험이 끝났다는 것이며,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을 향해 가까이 가는 과정, 즉 거듭나는 과정은 이렇게 하나의 시험이 끝나면 다시 다른 시험이 시작됩니다. 보통은 한번은 선(good)에 관한, 한번은 진리(truth)에 관한 시험이 옵니다.

 

※ 진리 안에 있다 보면 그 진리와 관련된 선이 필요해져서이고요, 선을 행하다 보면 이번엔 관련된 진리가 필요해져서입니다. 그렇게 계속해서 보완, 공급, 성장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영적 성장입니다.

 

여호와의 명령대로(according to the mouth of Jehovah)라는 말씀은 이러한 일들이 주님의 섭리(Divine Providence)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인간의 생각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섭리하시는 대로 따라간다는 것이지요. 섭리는 진리와는 조금 다릅니다. 물론 하나님의 섭리는 기본적으로는 진리를 바탕으로 이루어집니다만, 그러나 진리가 삶의 아주 미세한 국면을 좌우하는 것이라면, 섭리는 인간의 구원 전체를 바라보시는 역사입니다. 주님의 섭리는 영원부터 영원까지를 내다보시는 주님의 통찰, 예지를 바탕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인간은 진리는 이해할 수 있어도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다만 그 대강의 흐름과 원칙 정도만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의 섭리로 이루어지는 일은 항상 앞으로만 가지 않습니다. 상황에 따라서는 한발 물러서기도 하고요, 또 가까운 길을 두고 멀리 돌아가기도 합니다. 여기 지금 가나안까지 해안을 따라 일주일이나 열흘 정도로 질러갈 수 있는 지름길이 있음에도 불구, 주님은 그 길로 인도하지 않으시고, 40년 광야 길로 돌아가게 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17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하게 되면 마음을 돌이켜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 18그러므로 하나님이 홍해의 광야 길로 돌려 백성을 인도하시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대열을 지어 나올 때에 (13:17, 18)

 

주님은 그렇게 각 사람의 성품이나 영적인 특성들을 모두 내다보십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 사람의 인생 전체와 심지어는 조상부터 후손까지를 모두 내다보시고 섭리하시는지도 모릅니다. 그럴지도 모른다고 말씀드리는 것은, 저도 주님의 섭리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라는 책에서는 섭리의 원칙에 대해서는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을 보시면 하나님의 섭리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짐작하실 수 있습니다.

 

※ 보통 우리가 어린아이처럼 순진무구하다면 이 정도의 가이드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들은 어른들처럼 무슨 점이나 사주(四柱) 같은 거 없이 오직 부모의 인도만으로도 행복해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저런 걸 찾는 자는 안전하지 않습니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 ‘하나님의 섭리’는 스베덴보리 저, ‘Angelic Wisdom about Divine Providence’(1764, 라틴)를 말하며, 이는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Angelic Wisdom concerning Divine Love and Wisdom, 1763, 라틴)의 속편입니다. 그 내용은 하나님은 인간의 삶과 모든 피조물을 어떻게 살피시는가, 어떻게 감독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섭리는 이렇게 가까운 길을 두고 먼 길을 돌아가게도 하시는데요, 그것은 우리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루어지는 일이기 때문에 때로는 극심한 고통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우리의 구원을 위한 섭리인 것은 분명합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이 주님의 섭리 따라가는 걸 1절 말씀에서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 광야에서 떠나 그 노정대로 행하여’라고 한 것입니다.

 

신 광야를 떠난 이스라엘은 ‘르비딤’(Rephidim)이라는 곳에 장막을 쳤습니다. 르비딤이라는 곳 역시 광야에 있는 곳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르비딤도 또 하나의 시험이겠구나 짐작할 수 있는데요, 왜냐하면 광야는 시험(temptation)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신 광야에서의 시험이 선에 관한 시험이었다면, 이번 시험은 진리에 관한 시험입니다. 본문에서 이스라엘에게 마실 물이 없었다고 했기 때문이며, 물의 속뜻은 진리이기 때입니다.

 

그런데 말씀에는 이스라엘이 거기서 장막을 쳤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장막을 친다는 것은 시험을 대비, 각 사람의 내면에 있는 선과 진리를 주님이 질서 있게 배치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전쟁을 앞두고 군대가 진을 치는데, 군사들이나 병기를 일정한 모양으로 배치하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은 왜 선과 진리를 자연스럽게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질서에 맞춰 서로 유기적으로 묶으실까요? 그 이유는, 그래야만 시험 중에 지옥으로부터 오는 악과 거짓들을 막아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축구 같은 운동경기를 할 때도 선수 각각의 포지션이 있고, 얼핏 보면 서로 따로 떨어져 아무렇게나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아도 사실은 마치 어떤 보이지 않는 줄로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전략에 따라 매우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마 상대방의 공격에 수시로 방어선이 무너질 것입니다. 그것처럼 주님도 우리 안에 있는 선과 진리를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하셔서 만반의 준비를 갖추게 하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어디를 가든지 장막을 쳤습니다. 주님이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 우리가 시험 중에 힘들어 비록 불평과 불만, 원망을 하더라도 주님 주신 어떤 선 안에서, 어떤 울타리 안에서 한다면 말입니다. 안 그러면 주님은 우리 안에 장막을 치실 수 없으시고, 그러면 우리는 내면에 준비된 뭐가 없어 굉장히 힘든 시간들을 보내게 됩니다. 그래서 평소 싸울 수 있는 무기, 곧 말씀 생활을 많이 해야 하는 것입니다.

 

2절입니다.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이르되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이스라엘이 모세에게 물을 달라고 하는 것은 주님에게 진리를 구하는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백성이 모세와 다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일상생활에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우리가 이웃을 위해 어떤 일을 할 때, 그것이 오히려 상대를 불편하게 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나의 진리가 상대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때 우리는 자기의 진리에 대해 의문을 갖기 시작하는데요, 회의를 느끼는 것이죠.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약간 화가 나기도 합니다. 이렇게 자기가 믿었던 진리에 대해 회의를 느끼거나 갈등하는 것이 모세와 다투는 것이라고 저는 이해합니다. 시험이 깊어질수록 진리에 대한 갈등이나 회의는 점점 더 커집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비로소 냉정을 되찾고, 자신의 행동을 돌아봅니다. 그때 우리는 아! 이 행동이 진리와 거리가 먼 것이었구나! 깨닫게 되지요. 그때 우리는 자신에게 진리가 없음을 인정하게 됩니다.

 

※ 아마 스베덴보리를 통한 주님의 계시를 이웃이나 친지, 지인에게 전할 때 경험하는 걸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이 경우, 거의 예외 없이 방금 말씀하신 저런 단계를 밟게 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행함 없이 전할 경우, 더욱 그렇지요.

 

보통 우리가 알고 있는 진리는 진리에 대한 원칙론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으로는 삶의 구체적인 상황, 즉 인간관계라든지, 그 밖의 현실적인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때 우리는 아, 나는 진리에 대해 사실은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곧 주님에게 진리를 구하게 되지요. 이 일련의 과정이 이스라엘이 물이 부족하다고 모세에게 아우성을 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일이 왜 생길까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신앙인들이 본격적으로 이웃사랑의 삶을 살기 시작할 때, 내면에서 선에 대한 애정이 점점 커집니다. 그런데 선에 대한 애정이 커지면 그만큼 다시 진리를 원하게 됩니다. 마치 남자가 장성하면 이성을 그리워하는 것처럼, 선이 자기 짝이 될 진리를 그리워하는 것인데요, 그때 선에 비해 상대적으로 진리의 부족을 느낍니다. 그때의 시험이 바로 진리 시험입니다. 이와 같이 이웃사랑의 삶을 사는 사람에게 진리가 충족되지 않을 때 이런 영적 시험이 오는데, 그것이 바로 이 르비딤에서의 시험입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이 말씀은 시험 가운데서 진리에 대해 불평을 하더라도 도를 넘어서면, 곧 선을 넘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진리는 본질적으로 주님이시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진리에 대해 회의를 느끼거나 불평하더라도 선을 넘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신성에 대해 불경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물론 시험이 깊어지면 자기도 모르게 자포자기하는 마음도 들고요, 내가 이 진리를 왜 알았을까? 차라리 몰랐더라면... 하고 후회하기도 합니다. 심하게 불평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더라도 선을 넘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오늘 모세는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라는 말로 표현한 것입니다.

 

3절입니다.

 

거기서 백성이 목이 말라 물을 찾으매 그들이 모세에게 대하여 원망하여 이르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

 

백성들이 목이 말라서 물을 찾게 되는 것은 진리에 대한 갈증이 점점 커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만큼 시험의 고통이 심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는 중에 백성들이 모세에게 우리를 왜 애굽에서 인도해 냈느냐고 따지듯이 말합니다. 그 말은 차라리 우리가 애굽에 있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진리 가운데로 들어온 것을 후회하는 것입니다. 애굽에 있다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진리를 모르는 상태에서 그냥 자기 욕심대로 사는 것입니다. 세속적 욕심, 돈과 소유, 명예와 권력 등에 대한 욕심 같은 그런 욕망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사실 자유로운 삶이 아니며, 그 실체는 욕망의 노예가 되어 사는 삶입니다. 애굽에서 산다는 것이 이런 건데도 불구, 그러나 시험이 깊어지면 너무 고통스러운 나머지 차라리 내가 진리를 몰랐더라면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정도로 영적 싸움, 영적 전쟁은 치열합니다. 그리고 또 시험이 깊어지면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이러다가 내 안에 그나마 있는 선하고 진실한 것들이 모두 사라지는 건 아닐까? 말이지요. 선하고 진실한 것들이 있어야 우리는 최소한의 인간 모습으로 살 수 있는데, 그마저 없어지면 속으로는 짐승과 같은 모습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그것이 두려워지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이스라엘이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to make me die, and my sons, and my cattle, with thirst?)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여기서 ‘우리(me), 자녀(my sons), 가축(my cattle)’은 우리 내면에 있는 영적 자산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와 자녀와 가축이 죽게 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영적 자산인 선하고 진실한 것들이 죽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선이 많아지면 그에 따라 새로운 진리가 계속 주님으로부터 공급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공급되지 않으면 다른 영적 자산들, 곧 선이라든가 이웃에 대한 사랑이라든가 그런 것들마저 위축됩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이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라고 모세를 원망하는 것입니다.

 

※ 시험이 너무 극심하면 주님의 진리마저 즐겁지 않은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시험을 대비, 평소에 기도하게 됩니다. 주님, 비록 시험이 저를 영적으로 성장케 하는 순기능이 있다 하더라도 정작 시험 중에는 무척 힘들고 고통스럽습니다. 부디 원하옵기는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살짝살짝 주님의 진리를 즐거워할 수 있도록 제 숨구멍을 열어주시옵소서...

 

4절, 오늘 본문 끝 절입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조금 있으면 내게 돌을 던지겠나이다

 

모세는 진리이신 주님의 표상입니다. 그러므로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는다는 것은 진리가 주님과 인간 사이를 중재한다는 뜻입니다. 인간은 선 자체이신 주님을 직접 만날 수는 없고, 오직 진리를 통해서만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과 우리 사이를 중재하는 역할을 하는 것은 언제나 진리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 중재(intercession)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인간을 대신해 십자가를 지고 죽으셨고, 그렇게 해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화해시켜 화목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새 예루살렘교회를 사모하는 새 교회에서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새 교회에서 가르치는 중재는 다음과 같은데요,

 

주님한테서 나오는 신적 진리(the Divine truth)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중재합니다(continually intercedes). 그것은 신적 사랑(Divine love)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인데요, 세상에 계실 때 주님은 신적 진리이셨습니다(was the Divine truth)만, 그러나 부활을 통해 영화하신(was glorified) 후부터는 주님은 신적 선이십니다(is the Divine good). 말씀에 나오는 ‘아버지’(the Father)는 속뜻으로 신적 선이십니다. 그리고 ‘아들’(the Son)은 신적 진리시지요. 신적 진리는 신적 선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여기에 끊임없는 중재(continual intercession)가 있는데, 이걸 우리 식대로 표현, 아들이 인간을 위해 아버지께 간구하신다 하는 겁니다. 이런 설명은 우리한테 이해가 되나 저런 앞의 설명은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천국의 비밀8573, 출17:4,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A secret that lies still more interiorly hidden in the word “intercession,” shall also be told. The Divine truth which proceeds from the Lord continually intercedes in the manner described, because it proceeds from the Divine love. When the Lord was in the world He was the Divine truth; but since He was glorified, which was effected when He rose again, He is the Divine good (n. 7499). It is the Divine good which is meant in the Word in the internal sense by “the Father,” and the Divine truth which is meant by “the Son” (n. 2803, 3704, 7499). And as in the Divine truth, which proceeds from the Divine good, there is continual intercession, therefore it is said that the Son entreats the Father, and intercedes for man. This latter idea could be apprehended by man, but the former with difficulty. (AC.8573)

 

※ 저 하늘의 해처럼, 그러니까 해가 변함없이 지상에 열과 빛을 말없이 공급하는 것처럼 주님의 중재는 그런 것이라는 말입니다.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처럼, 남편을 사랑하는 아내처럼,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처럼, 부모를 사랑하는 자녀처럼, 자기 이웃과 친구를 사랑하는, 즉 이 모든,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는 모든 체어리티의 사람들처럼 은은히 말없이 조용히 끝까지 사랑과 자비를 거두지 않는, 이런 게 중재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조금 있으면 내게 돌을 던지겠나이다’라는 말은 시험이 좀 더 깊어지면 신앙인들이 진리를 모독하는 상황에까지 갈지도 모른다는 뜻입니다. 진리를 모독한다는 것은 시험 가운데서 자포자기의 상태가 되는 것이고, 그러므로 진리에 따라 살고자 하는 의지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알면서도 죄를 짓습니다. 그럴 때 진리를 모독하게 되는데요, 모독이란 알면서 범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요9:41)

 

주님은 지금 그것을 염려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모세는 여호와께 ‘그들이 조금 있으면 내게 돌을 던지겠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모세의 말 속에는 인간에 대한 연민과 사랑 그리고 관용이 있습니다. 그것은 중재하는 진리 안에 들어 있는 인간에 대한 주님의 자비와 연민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리가 부족하다는 것은 선을 행하기는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는 경우입니다. 그때 지옥은 진리가 충족되는 것을 방해하고 공격하는데 주님은 그 시험을 오히려 이용하세요. 그래서 시험 가운데서 선이나 진리의 부족을 절실히 깨닫게 하시고요, 또 그것을 간절히 원하게 하십니다. 방해가 크면 클수록 간절함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 식으로 시험을 극복할 때, 우리 안에 선과 진리는 더 풍부해지며, 한 차원 더 높아집니다. 주님은 그런 식으로 우리를 한 단계 한 단계 주님 자신에게로 끌어 올리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시험이라는 것은 그냥 단순한 시련이 아니고, 그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험이 올 때는 그것을 나의 부족함을 깨닫고 채워나가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사실 오늘 말씀처럼 그렇게 극심한 시험을 경험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죽을 것 같은 고비, 앞이 안 보이는 시기를 계속 걸어가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우리의 모든 시험 가운데 주님의 목적이 매번 이루어지시기를 바랍니다.

 

※ 이 사실들을 꼭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는, 주님은 우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신다. 또 하나는, 모든 시험은 주님이 허락하시는 것이며, 그걸 통해 나로 하여금 거듭남을 향해 나아가게 하시는 도구일 뿐이다!

 

 

네가 고난 중에 부르짖으매 내가 너를 건졌고 우렛소리의 은밀한 곳에서 네게 응답하며 므리바 물가에서 너를 시험하였도다 (81:7)

 

아멘

 

원본

2016-07-03(D1)

청주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5-06-08(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06-08(D1)-주일예배(2601, 출17,1-4),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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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렙의 반석이신 주님

 

 

5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 앞을 지나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나일강을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 6내가 호렙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17:5, 6) And Jehovah said unto Moses, Pass on before the people, and take with thee of the elders of Israel; and thy rod, wherewith thou smotest the river, take in thine hand, and go. Behold, I stand before thee there upon the rock in Horeb; and thou shalt smite the rock, and there shall come waters out of it, that the people may drink. And Moses did so before the eyes of the elders of Israel. (Exdo. 17:5, 6)

 

 

그동안 여러 해 제 설교는 저의 오리지날 설교가 아니고, 지금은 은퇴하신,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님의 설교를 원본으로 하여 우리 교회에 맞게 좀 다듬는 설교였습니다. 물론 사전 허락하에 말입니다. 몇 가지 이유가 있지만, 무엇보다도 제 역량, 곧 말씀을 속뜻(internal sense, inner meaning)으로 푸는 역량이 아직은 많이 부족하다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저는 여전하지만, 그러나 몇 주 전부터 이제는 네 힘으로 하라시는 주님의 어떤 퍼셉션이 있으셔요... 그래서 순종, 조금 준비와 연습을 거쳐 오늘부터 이렇게 저의 첫 속뜻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당분간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는 등 안정화 기간이 예상됩니다. 정성을 다하겠사오니 많은 이해 부탁드립니다.

 

저의 다른 모든 설교도 마찬가지지만, 특별히 창세기와 출애굽기, 그리고 계시록 본문은 모두 스베덴보리의 속뜻 주석인 Arcana CoelestiaApocalypse Explained’(혹은Apocalypse Revealed’)를 가지고 준비합니다. 즉 이 주석들의 설명을 좀 더 쉽게 풀어드리는 것입니다. 지난 2018 10월 이후 설교들부터는 말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저의 오리지날 설교는 아니었어도 말이지요.

 

말씀을 속뜻으로 읽는 것은 말씀을 천사들이 읽는 방식으로 읽는 것입니다. 천사들은 내적(內的, internal) 존재여서 모든 걸 내적으로 보는데요, 그러니까 천사들이 사람을 볼 때 그들 눈에는 사람의 육은 안 보이고 영, 곧 사람의 속만 보이며, 사람의 어떤 행위도 그 겉은 안 보이고 대신 그 속, 그 동기와 의도만 보이는 식입니다.

 

말씀을 속뜻으로 읽고자 하는 이유와 유익은 참 많고, 그리고 큽니다. 가장 결정적인 건, 사후 우리가 가게 될 나라가 그런 나라, 그러니까 겉이 아닌 속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미리 준비하자는 것이지요. 우리가 다른 나라 이민을 고려할 때, 미리 그 나라에 대해 알아보고 익숙해지기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말씀을 속뜻으로 읽게 되면 시작되는 가장 큰 변화는 그동안 글자로만 있던 말씀이 살아있는 능력으로 바뀐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미지의 세계요, 그저 막연했던, 그저 좋은 내용들이기만 했던 말씀의 글자들이 말입니다. 이런 경험은 정말 매력적이어서 마치 ‘극히 값진 진주(13:46)를 발견한 사람처럼,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13:44)를 발견한 사람처럼 행동하게 되는데요, 말씀의 살아있는 능력 가운데 들어가는 것은, 비유하자면 그런 것입니다.

 

덧붙이자면, 그러나 아무나 지금 내가 하는 이 풀이가 속뜻이다 하면 곤란하므로, 주님은 280년 전인 1745년 어느 날 스베덴보리(1688-1772, 스웨덴) 나이 57세 때 그를 찾아오신 후, 1772년 그를 데려가실 때까지 27년간 영계 구석구석, 그리고 수많은 천사와 영들을 만나게 하시면서 그때그때 필요한 것들을 라틴어로 기록하게 하셨는데요,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Arcana Coelestia’(1749-1756, ‘천국의 비밀들’)입니다. 이는 창세기, 출애굽기를 속뜻으로 풀이한 주석인데요, 총 10,837개의 글로 되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 의하면, 이 주석을 집필할 때 주님이 곁에서 말씀하시고, 자기는 그걸 받아적기만 했다고, 자기는 그때 그 어떠한 세상 도서도 참고하지 않았고, 자기 책상 위엔 오직 속뜻 성경 한 권과 속뜻 사전 한 권, 그리고 펜과 종이, 잉크만 있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정황이 곧 이 주석의 영적 권위를 드러내는데요, 이는 곧 신구약 말씀들이 기록되던 정황과 똑같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현 성경 66권 중 ‘말씀’은 구약 29권, 신약 5권, 총 34권뿐입니다. 속뜻이 들어있는 성경이라야 ‘말씀’이기 때문인데요, 속뜻은 주님이 친히 하신 말씀에만 들어있습니다.

 

끝으로, 저는 이 주석을 온전히, 그리고 쉽게 풀어 전하는 게 저의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절대 여기에 무슨 개인적 사사로움을 보태어 마치 저의 무슨 그럴듯한 새로운 저작인양하는 행태는 추호도 사양할 작정입니다. 천국과 지옥은 종이 한 장 차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앞으로도 제가 가장 힘쓰는 건 끊임없는 하늘의 퍼셉션(perception)입니다. 푸는 것도 오직 주님으로만 말미암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시작합니다.

 

지난 본문 끝 절인 4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4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조금 있으면 내게 돌을 던지겠나이다

 

아주 다급한 상황입니다. 이어서 오늘 본문인 5절로 6절입니다. 먼저 5절,

 

5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 앞을 지나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나일강을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

 

여기 세 가지를 말씀하시는데요, 첫째, ‘백성 앞을 지나서’, 둘째,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그리고 끝으로 ‘나일강을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입니다. 이 말씀들을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백성 앞을 지나서(Pass on before the people)입니다. 이 말씀의 속뜻은, ‘모세가 그들을 이끌고 가르쳐야 한다(he should lead and teach them)는 것입니다. ‘모세(Moses)의 속뜻은 ‘신성, 곧 여호와로 말미암는 진리(truth from the Divine)이며, 이스라엘 자손을 표상하고 있는 ‘백성’은 ‘영적 교회에 속한 사람들(those who are of the spiritual church)을 의미하고, ‘앞을 지나서(pass on before)는 이끄는 것, 곧 가르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르치는 사람은 영적으로 인도하는 사람이기 때문인데, 지금 이 백성, 곧 영적 교회에 속한 이들 이스라엘은 물, 곧 진리가 없어 이 지경까지 이른 것이며, 그래서 신성한 진리를 표상하는 모세가 이들을 이끌고 이들에게 진리를 가르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백성 앞을 지나서’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시험을 당하여 주님께 도우심(aid,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을 구할 때, 우리는 제일 먼저 주님의 진리를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 진리가 아니고 말입니다. 모든 것이 고도로 발달한 오늘날 우리는 어떤 일을 당했을 때 즉각적으로 행동합니다. 수많은 지식과 정보가 이 스마트폰 하나면 다 되니까요. 그래서 무슨 망설임도 없습니다. 머리로는 혹 아, 먼저 주님께 여쭈어야 하는데, 먼저 기도하고 도우심을 구해야 하는데 할지 몰라도 그러나 몸이 먼저 반응합니다. 저부터도 우선 그럴 때가 많으니까요... 큰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요만큼의 시간도 우리는 주님께 드리지 않습니다.

 

다음은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and take with thee of the elders of Israel)입니다. 이 말씀의 속뜻은, ‘으뜸되는 진리들, 주된 진리들(from primary truths)입니다. ‘이스라엘 장로들’의 속뜻은, ‘선에 일치하고 진리와 일치하는, 지혜와 지성에 속한 으뜸되는 것들(the primary things of wisdom and intelligence which are in agreement with good and with truth)이며, 이는 곧 ‘으뜸되는 진리들, 주된 진리들’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백성’, 곧 ‘이스라엘’은 영적 교회(the spiritual church)라 하였습니다. 영적 교회는 그 메인이 진리입니다. 천적 교회(the celestial church)는 선이고요. 영적 교회는 신앙이 주된 교회이고, 천적 교회는 사랑이 주된 교회라고 해도 됩니다. 그래서 실제로도 신앙과 진리, 말씀을 우선하는 교회는 좀 날카롭고 예민하며 판단하지만, 사랑과 선, 체어리티(charity, 이웃 사랑)를 우선하는 교회는 한결 따뜻하고, 넉넉하여 품어줍니다. 어느 게 맞다, 틀리다가 아니고, 두 교회의 특성이 그렇다는 것이며, 이는 곧 두 천국의 특성, 두 천국 천사들의 특성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잠깐, 그렇다면 으뜸되는 진리의 예를 하나 살피고 계속 나아가겠습니다. 으뜸되는 진리의 가장 대표적인 말씀은 바로 아래 주님의 말씀이 아닐까 하는데요,

 

37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22:37-40)

 

우리는 어떤 크고 작은 선을 행할 때 대체로 어떤 진리를 가지고 합니다. 가령 교회 봉사를 나가는 경우인데요, 교회 봉사, 즉 어떤 섬김이든 그 자체로는 참 좋은 일이나 그 동기는 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좀 쉬고픈데 맡은 직급이 있어 억지로 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어요. 우리는 다른 사람의 속마음, 곧 그 동기를 볼 수 없으므로 이 경우, 우리는 그 겉만 보고 저분은 참 귀하시다 합니다. 또한 다른 경우는, 이 경우 역시 좀 쉬고 싶은 건 같지만, 그러나 남들 시선을 의식해서 억지로 하는 게 아니라 주님을 사랑해서 하는 경우입니다. 전자는 자기 힘으로 사는 사람이고, 후자는 주님 주시는 힘과 능력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모든 개인적인 사사로움은 내려놓고 오직 주님을 사랑해서 교회와 이웃, 나라와 민족을 섬기는 것, 일상생활 속 크고 작은 모든 상황, 즉 시험들 가운데서 이렇게 하는 사람이 바로 오늘 본문,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하는 사람입니다. 즉 시험을 만났을 때, 우리는 이 가장 큰 진리, 가장 으뜸되는 귀한 계명인 ‘주님 사랑, 이웃 사랑’을 기억해야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나일강을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and thy rod, wherewith thou smotest the river, take in thine hand, and go)입니다. 먼저 ‘나일강을 치던 네 지팡이를’인데요, 이 표현은 ‘거짓들을 소멸시켜 버린 신성한 능력, 힘(the Divine power by which falsities had been dissipated)을 말합니다. ‘지팡이(a rod)는 힘, 곧 신성한 능력을 가리키는데, 특히 이 지팡이는 모세의 지팡이로서, 모세는 신성한 진리이신 주님(he Lord as to Divine truth)을 표상하기 때문이며, 또 한 가지, ‘’, 여기 애굽의 강인 나일강은 ‘거짓(falsity)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나일강을 치던 네 지팡이’라는 표현으로 ‘거짓의 소멸(the dissipation of falsity)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진리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신성한 능력으로 거짓들은 소멸되기 때문이지요. 이 진리는 ‘호렙산 반석에서 나오는 물(the water out of the rock in Horeb)을 말합니다. 다음은 ‘손에 잡고 가라(take in thine hand, and go)인데요, 이 표현은 ‘그걸 가지고 권한, 명령을 수행해야 하는 어떤 무장(that equipped therewith he should perform the mandate)을 말합니다.

 

진리의 부족과 결핍으로 야기되는 시험 앞에서 우리는 오직 지난날 우리에게 행하신 주님의 순전하신 진리의 힘과 능력을 기억, 거기에만 의지해야 합니다. 좀 다른 얘기일 수 있지만, 이번 대선 결과와, 그 전에도 여러 번 부정선거로 인한, 진실이 거짓에 먹히는, 이 되풀이되는 현실은 어쩌면 우리 민족, 특히 우리 신앙인들과 그 가운데 특별히 신앙을 가진 지도자들이 ‘오직 지난날 우리에게 행하신 주님의 순전하신 진리의 힘과 능력을 기억, 거기에만 의지하지 않았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주께 속한 이스라엘에게 40년 광야 세월을 허락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저의 지난날 중에서 지금도 여전히 믿어지지 않는 기적이 있다면 단연 대학 졸업 후 감히 삼성 그룹공채에 지원, 합격한 일입니다. 부끄럽지만 저는 졸업 평점이 아주 낮아 삼성에 응시원서를 낸다는 건 언감생심, 그래서 처음엔 여러 중소기업 위주로 원서를 냈으나 아무 데서도 연락오는 데가 없었던 사람입니다. 1988년 당시, 전자공학을 했는데도 말입니다. 그래서 골방에 들어가 한 달을 주님께 부르짖었는데요, 제 동기들은 이미 엘지, 현대, 대우 등 대기업 여기저기 들어가 신입사원 입문 교육들을 받고 있을 때였지요. 비록 그땐 지금처럼 말씀의 속뜻 같은 건 전혀 모르고 오직 네비게이토식 성경 암송과 제자 훈련, 제자 양육이 신앙의 전부인 줄 알던 시절이었지만, 그럼에도 한 달을 골방에서 보냈더니 뭔가 걸러지고 깨끗해지는 느낌과 함께 주님께 백지수표를 내어드릴 수 있는 심정이 되더군요. 그날 오전 기도 후 오늘 조간 1면 하단을 보라시는 분명한 음성인지 생각인지 하여튼, 지금 생각하면 그런 게 바로 퍼셉션(perception)인데, 그래서 현관에 놓인 중앙일보를 펼쳐 그 1면 하단을 보니 ‘삼성그룹공채 29기 2, 3차 신입사원 모집’ 공고가 있더군요. 그때 솔직히 숨이 좀 막혔으나 눈 딱 감고 순종, 용기를 내어 응시했던 것입니다. 특히 1차 서류전형이라 졸업 평점이 아주 낮은 저로서는 보나마나였거든요. 그러나 적성 검사를 마치고, 사장단 면접과 실제 면접관들 대상 다면 면접 때, 그때그때 대답할 말을 주시는 주님의 도우심으로 결국 ‘합격’했습니다. 나중에 들으니 201이었다는군요. 그날의 감동, 감격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이 일은 지금 모세와 이스라엘의 르비딤 시험 같은 에피소드는 아니지만, 그러나 이후 제 삶의 여러 고비마다 주님이 지난날 내 앞이 캄캄했을 때 내게 어떻게 하셨는지를 기억, 힘을 낼 수 있었던 정말 고맙고 감사한 개인적 사례여서 특별히 나눴습니다. 지금 모세에게도 주님은 출애굽 전 그와 함께하셨던 열 가지 재앙 중 물을 피로 변케 하셨던 때를 기억하게 하시고 용기를 내게 하신 것입니다.

 

6절입니다.

 

6내가 호렙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먼저 ‘내가 호렙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Behold I stand before thee there upon the rock in Horeb)입니다. 이 표현의 속뜻은, ‘신앙의 진리들에 응답하시는 주님(the Lord in respect to the truths of faith)입니다. 여기 ‘반석(a rock)의 의미가 ‘신앙, 여기서는 주님으로 말미암는 신앙, 혹은 신앙에 응답하시는 주님(faith, here faith from the Lord, or the Lord in respect to faith)이기 때문인데, 여호와, 즉 주님이 말씀하시길, ‘내가 그 반석 위에 서리니’라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또 ‘호렙(Horeb)은 ‘신성한 법(the Divine Law)이기 때문입니다. 이상의 말씀들로 ‘내가 호렙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의 속뜻은 ‘그분의 법, 곧 말씀으로 말미암는 신앙의 진리들에 응답하시는 주님(the Lord in respect to the truths of faith which are from His law, or the Word)입니다.

 

여기서 잠깐, ‘반석’ 이야기가 나와서 그런데요, 잠깐 저 유명한 ‘베드로와 천국 열쇠’ 본문을 좀 보고 가겠습니다.

 

18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19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16:18, 19)

 

로마 카톨릭은 이 본문을 글자 그대로 해석, 주님이 베드로에게 말씀대로 천국 열쇠를 주셨고, 그리고 자기들은 베드로의 후계자들이니 당연히 자기들한테 이 천국 열쇠의 권한, 곧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신 권한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교황한테 이런 권한, 권세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말씀을 글자 그대로 해석할 경우 마주하게 되는 대표적인 오류 중 하나가 바로 이 경우인데요, 사실 이 오류는 교회사, 세계사 전체에 절대 가볍지 않은 큰 상흔을 남겼기에 더욱 심각한 것입니다.

 

주님은 절대 한 인간 베드로에게 저런 엄청난 권세를 주신 적이 없으신데요, 이는 여기서 말씀하신 ‘반석’의 의미, 곧 그 속뜻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여기 ‘반석(rock)의 의미는 ‘신앙에 관한 주님, 그리고 또한 주님으로 말미암는 신앙(the Lord as to faith, and also the faith which is from the Lord)입니다. 즉 신앙을 말할 땐 주님을, 그리고 사람과 관련해서는 신앙을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주님이 반석이시며, 우리가 가진 이 신앙은 우리 것, 곧 우리가 잘나서 우리한테서 나온 게 아니라 주님의 것, 곧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말씀이지요. 즉 우리의 이 신앙 역시 주님이 주신 것이며, 주님이 주신 신앙으로 우리는 주님을 향한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엔 일체 무슨 사사로움이 들어갈 틈이 없습니다. 로마 카톨릭이 대단히 오해한 것입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은 신성한 진리조차 거기에 인간의 무슨 사사로움이 섞이면 이토록 타락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대로 주님의 순결하신 진리에 우리의 무얼 섞으려는, 적당히 섞어 자신의 무슨 목적을 관철하려는 불순한 의도를 품어서는 절대 안 되겠습니다. 사후 무서운 운명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호렙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의 의미는 우리 신앙생활의 반석을 주님께 둘 때, 이스라엘이 그 반석에서 나오는 물을 마시고 기운을 차릴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 역시 우리의 신앙에 응답하시는 주님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두리번거리거나 주님이 주신 이 신앙의 진리들에다가 잔머리를 굴리며 세상에서 배운 뭘 섞는 짓을 하면 안 되겠습니다.

 

다음은 ‘너는 그 반석을 치라(and thou shalt smite the rock)입니다. 이는 ‘to entreat urgently from a humble heart’, 곧 ‘절박한 심정으로, 그러나 겸손하게 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반석을 치는 것입니다.

 

이번 이 르비딤 시험을 오늘 이 출애굽기 본문에서는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로 요약하지만, 아래 민수기 본문은 같은 사건을 좀 더 자세히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오늘 이 출애굽기 본문에서는 주님은 분명히 ‘겸손한 마음(a humble heart)을 명령하셨음에도 아래 민수기 본문을 보면, 실제로 모세와 아론은 그때 ‘완악한 마음(a hard heart)이었다는 것입니다.

 

10모세와 아론이 회중을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11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 물이 많이 솟아 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12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20:10-12)

 

참고로, 이때 모세와 아론은 ‘신성한 진리에 관한 주님(he Lord as to Divine truth)을 표상하는 게 아니라 ‘저들의 지도자들한테서 볼 수 있었던 이스라엘 민족의 지나치게 종교적인 모습(the religiosity of that nation whose leaders and heads they were)을 의미합니다. 이런 종교성은 필연적으로 완악함을 나타내게 되지요.

 

한 가지, 위 본문은 얼핏 여호와께서 저들을 저주하시는 것처럼 읽을 수도 있으나, 그러나 절대 그런 게 아니고, 오히려 주님은 정성을 다해 인격적으로 말씀하고 계시는(expostulated) 것입니다. 차근차근 부드럽게 넌지시(was intimated to him) 말이지요. 주님은 절대로 누구를 저주하시거나 누구에게 화를 내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우리 연약함을 불쌍히 여기시는 분입니다. 아멘!

 

그것에서 물이 나오리니(and there shall come waters out of it)와 ‘백성이 마시리라(that the people may drink)의 속뜻은 각각 ‘그분으로부터 나오는 신앙의 진리들(the truths of faith are from Him)과 ‘그들을 기운 차리게 하고, 그들에게 영적 생명을 주는(which shall refresh them and give them spiritual life)입니다. 그리고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and Moses did so before the eyes of the elders of Israel)의 속뜻은, ‘으뜸되는 진리들로 인한 결과(the effect by means of primary truths)입니다.

 

이들 풀이는 지금까지 다룬 내용들로 자명, 생략합니다. 다만 한 가지 덧붙이면, 우리가 말하는 소위 ‘영적 깨달음’이나 ‘영안이 열림’, 혹은 ‘내면이 밝아지는 것(enlightenment)은 모두 이들로 인한 효과라는 것입니다. 그들, 곧 으뜸되는 진리들로부터 흘러들어오는 진리들, 이걸 ‘세컨더리(secondary)라고 하는데, 이것들이 이제 밝히 깨달아진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주님 사랑, 이웃 사랑’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인 건 알겠는데 실제 일상생활을 하면서 부딪치는 다양한 상황 속에서는 그럼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게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지를 그동안은 잘 몰랐다면, 우리가 이렇게 주님을 우리 신앙의 반석으로 믿고, 모든 것을 반석 되신 주님으로만 해결하려고 하면, 즉 현재 천사들이 바로 그런 존재들인데, 그들처럼 우리도 일상생활 가운데 아주 해처럼 빛나는 명료함과 능력, 그리고 지혜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멘!

 

오늘 본문입니다.

 

5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 앞을 지나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나일강을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 6내가 호렙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17:5, 6)

 

지금까지 시험을 만난 이스라엘과 모세에게 주님이 하신 말씀을 그 속뜻으로 살폈습니다. 오늘 주신 이 말씀을 거듭 되새김질하셔서 그럴수록 속 심령이 뜨거워지는 여러분 모두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설교

2025-06-15(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06-15(D1)-주일예배(2602, 출17,5, 6, AC.8576-8585), '호렙의 반석이신 주님'.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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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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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 한 오멜을 여호와 앞과 증거판 앞에 간수하다 (16:30-36)

 

 

30그러므로 백성이 일곱째 날에 안식하니라 31이스라엘 족속이 그 이름을 만나라 하였으며 깟씨 같이 희고 맛은 꿀 섞은 과자 같았더라 32모세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시기를 이것을 오멜에 채워서 너희의 대대 후손을 위하여 간수하라 이는 내가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 광야에서 너희에게 먹인 양식을 그들에게 보이기 위함이니라 하셨다 하고 33또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항아리를 가져다가 그 속에 만나 한 오멜을 담아 여호와 앞에 두어 너희 대대로 간수하라 34아론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것을 증거판 앞에 두어 간수하게 하였고 35사람이 사는 땅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자손이 사십 년 동안 만나를 먹었으니 곧 가나안 땅 접경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만나를 먹었더라 36오멜은 십 분의 일 에바이더라 (출16:30-36) And the people rested on the seventh day. And the house of Israel called the name of it Manna; and it was like coriander seed, white; and the taste of it was like that of a cake in honey. And Moses said, This is the word which Jehovah hath commanded, Fill an omer with it to be kept for your generations, to the end that they may see the bread wherewith I fed you in the wilderness, when I brought you forth from the land of Egypt. And Moses said unto Aaron, Take an urn, and put the omer full of manna therein, and lay it up before Jehovah, to be kept for your generations. As Jehovah commanded Moses, and Aaron laid it up before the Testimony to be kept. And the sons of Israel did eat the manna forty years, until they came to a land inhabited; they did eat the manna until they came unto the border of the land of Canaan. And an omer is the tenth part of an ephah (Exod. 16:30-36).

 

※ 이후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이스라엘 족속’, ‘이스라엘 백성’, ‘이스라엘 자손’ 등을 모두 ‘이스라엘’ 하나로 통칭하겠습니다.

 

※ 그리고 ‘주님께서’라는 표현은 ‘주님이’, ‘주님은’ 등으로 하겠습니다.

 

바로 들어가겠습니다.

 

30그러므로 백성이 일곱째 날에 안식하니라

 

안식일은 선과 진리가 결합해 하나 되는 걸 의미하고, 그러므로 거듭난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면 이렇게 선과 진리가 결합해야 하는 이유는 뭘까요? 진리는 행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진리를 행하는 것이 선, 다른 말로는 선은 실행된 진리라는 말입니다. 진리가 실천될 때, 그것은 곧 선이 된다는 말이지요. 이것이 선과 진리의 결합입니다. 주님은 진리는 아는 것만으로는 안 되고, 실천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래서 진리를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을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에 비유하셨지요. 그런데 선과 진리의 결합을 이루어내기 위해서는 우리 혼자 힘으로는 안 되고, 주님이 절대적으로 도와주셔야 하는데요, 그동안 말씀드린 것처럼 주님은 ‘만나’(Manna)라고 하는 선을 보내주셔서 그걸 가지고 우리의 의지를 끌어 올리셔요. 그러니까 만나라는 선을 받기 전의 우리 의지는 마치 땅에 기어다니는 벌레, 짐승과 같아서 계속 아래만, 즉 지옥만 바라보는 습성이 있었는데, 그러나 주님으로부터 이 만나라는 선을 받고는 비로소 우리의 의지가 주님과 천국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고, 그리고 그때 의지와 생각이 하나 되어 움직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만나를 받아먹는 것처럼 우리도 주님으로부터 만나라고 하는 선을 끊임없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야 악을 멀리할 수 있게 되고, 진리에 따라 선을 행할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선과 진리의 결합은 그렇게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우리 신앙인들이 만나의 맛을 느끼기 시작하는 것도 이때부터인데요, 오늘 말씀 31절에서는 이스라엘이 비로소 만나의 맛을 느끼기 시작하는 것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31이스라엘 족속이 그 이름을 만나라 하였으며 깟씨 같이 희고 맛은 꿀 섞은 과자 같았더라

 

이스라엘은 만나를 처음 보았을 때 그것이 무엇인지 전혀 몰랐는데요, 그처럼 주님으로부터 만나라고 하는 선이 처음 우리 속으로 흘러들어올 때, 우리 역시 그것이 무엇인지 느끼지 못합니다. 이처럼 우리 신앙인들에게 만나가 처음 흘러들어올 때, 그것에 대해 전혀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이 진리의 선이라고 하는 만나는 그동안 우리가 알던 선하고는 많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선’(the good of truth)이라는 것은 진리 모양을 한 선이라는 뜻인데요, 그동안 우리가 경험하던 진리가 판단하고 분별하는 냉정한 진리였다면, 이 진리는 따뜻하고 포용하는 그런 진리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는 무어라고 표현할 수 없는 깊은 평화와 기쁨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일에 골몰하는 사람들은 도저히 알 수 없는 그런 평화이며 기쁨입니다.

 

※ 예를 들면,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시는’(창2:6) 상태,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시는’(창2:3) 상태, 갓난아이의 순진무구한 상태, 깜깜한 밤을 보내고 고요한 아침이 시작되는 상태, 추운 겨울을 지나 파릇파릇 봄이 시작되는 상태 등을 말합니다.

 

따라서 본문에서 이스라엘이 그 이름을 만나라고 했다는 건 그들이 이제 만나의 본질에 대해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다는 것인데요, 왜냐하면 말씀에서 이름을 부른다는 건 그것에 대한 본질을 이해한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나 사물의 이름 안에는 그에 대한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인데요,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만나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는 건 그들이 만나라는 선을 이해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며, 그들이 진리를 따라 살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진리를 따라 살지 않는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이라든가 진리를 이해할 수 없어요. 왜냐하면 그의 안에 빛, 곧 주님으로 말미암는 빛이 없기 때문입니다. 비록 이 세상 빛은 있을지 몰라도 말입니다. 주님으로 말미암는 이 빛을 통해서만이 우리는 어떤 사람이 무슨 말을 할 때 그것이 진리인지 아닌지 알 수 있고, 말씀을 통해 흘러 들어오는 진리와 선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퍼셉션(perception)이라고 하지요.

 

※ 어떤 것이 참인지 거짓인지는 밑에서 올려다보는 걸로는 알 수 없고, 오직 위에서 내려다보아야만 알 수 있습니다. 밑에서 올려다보는 건 세상 진리로 주님의 진리를 판단하려는 거고요, 위에서 내려다보는 건 주님의 진리로 세상 진리를 살피는 겁니다. 이것이 퍼셉션으로 보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나름의 진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잘못된 믿음 가운데 있는 사람들, 예를 들면 잘못된 종교나 거짓을 가르치는 교회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조차도 자기가 믿는 것이 진리라고 생각하는데요, 그것은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그들 안에 주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만나는 주님이 진실한 사람들에게만 열어주시는 참된 진리이고 선입니다.

 

이스라엘이 만나를 이해하게 되었을 때, 그것을 본문에서는 ‘깟씨 같이 희고 맛은 꿀 섞은 과자 같았더라’라고 합니다. 말씀에서 씨앗(seed) 또는 흰 것(white)은 진리를 말하는데요, 씨 뿌리는 농부의 비유에서 주님이 씨앗을 진리에 비유하신 걸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여기 ‘깟씨 같이 희고’는 만나가 가지고 있는 진리의 특성을, ‘맛은 꿀 섞은 과자 같았더라’는 선의 특성을 말합니다. 과자(cake)는 선을 뜻하는데요, 이것은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마26:26) 말씀으로 알 수 있습니다. 떡이나 빵, 과자는 모두 영적으로 같은 의미입니다. 그리고 ‘꿀 섞은 과자’는 선으로부터 나오는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뜻합니다. 선 안에는 이렇게 그 자체로 내재 되어 있는 기쁨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걸 못 느낄 뿐이죠. 따라서 이 말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이스라엘은 만나를 먼저 진리로 느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느낀 그 진리는 이전에 그들이 알고 있었던 교리 지식과는 전혀 다른 진리였습니다. 그 속에는 선이 들어 있었고, 그 선으로부터 꿀 같은 기쁨이 흘러나왔기 때문이지요.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은 이제 만나가 주는 기쁨을 느끼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32절에서 여호와께서 명령하십니다.

 

32모세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시기를 이것을 오멜에 채워서 너희의 대대 후손을 위하여 간수하라 이는 내가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 광야에서 너희에게 먹인 양식을 그들에게 보이기 위함이니라 하셨다 하고

 

여호와께서는 만나에 대해 ‘내가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 광야에서 너희에게 먹인 양식’이라고 하십니다. 아시는 것처럼 광야는 시험을 뜻하는데요, 따라서 이 말씀은 거듭나기 위해 내적 싸움을 하는 신앙인들, 곧 영적 전쟁을 하는 신앙인들에게는 만나가 유일한 양식이라는 것입니다. 만나에서 나오는 능력, 곧 만나가 주는 기쁨이 없으면 진리를 삶으로, 생활로 옮기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만나 없는 삶은 마치 죽도록 일을 하는데도 앞이 안 보이는 삶과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만나가 꼭 필요합니다.

 

33또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항아리를 가져다가 그 속에 만나 한 오멜을 담아 여호와 앞에 두어 너희 대대로 간수하라

 

여기서 ‘항아리’(urn)는 만나라는 선을 담는 그릇입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진리를 준비하지 않으면 주님으로부터 만나를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진리는 곧 만나 담는 항아리인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예배에 참석해 설교를 들어야 하고요, 시간을 내 말씀을 읽고, 또 교리 공부도 해야 합니다. 그걸 아는 만큼, 그리고 그 지식을 삶으로 살아내려고 노력하는 만큼 주님은 우리가 가진 진리 속에 만나를 넣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가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일상 생활 가운데 살아내는 만큼 만나 항아리가 점점 커진다는 겁니다. 항아리로 표상되는 그 진리 안에 만나라는 선이 담길 때, 비로소 선과 진리의 결합이 일어납니다. 선과 진리의 결합이란 다른 게 아닙니다. 우리가 진리를 따라 살게 되는 겁니다.

 

오멜’(omer)은 곡식 같은 걸 계량하는 단위입니다. 그것에 대해 오늘 말씀의 마지막 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오멜은 십 분의 일 에바이더라’, 그러니까 곡식을 계량하는 단위로 오멜과 ‘에바’(ephah)가 있는데 오멜은 에바의 십 분의 일에 해당된다는 것입니다. 말씀에서 ‘’(ten, 10)이라는 수가 들어가면 ‘충분하다’라는 속뜻을 가집니다. 그 겉 표현이 크든 작든 상관없는데요, 그래서 ‘십 분의 일’(1/10, the tenth part of)도 같은 의미입니다. ‘십 분의 일’ 역시 그 속뜻으로는 ‘충분하다’라는 뜻입니다. 요약, 정리하면, 항아리에 만나를 한 오멜 담는다는 건 주님이 각 사람에게 선을 주실 때 각자의 그릇에 따라 충분히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 그릇이 크면 큰 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말입니다. 주님은 이 말씀을 하시기 위해 ‘오멜은 십 분의 일 에바이더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이렇게 각자의 그릇에 넘치도록 충분하게 주시는 이유는, 그래야 시험을 이길 능력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충분치 않은 상태에서는 능력이 나오지를 않습니다. 100도가 되지 않으면, 물이 끓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 이 숫자 ‘10’의 속뜻을 가지고 ‘십일조’를 생각해 보는 것도 좋습니다. 우리의 십 분의 일만 가지고도 주님은 우리가 사실은 전부를 주님께 드린 것으로 여기시는데요, 이를 알면, 우리가 우리 소득의 십 분의 일, 곧 십일조를 주께 드릴 때, 어떤 마음가짐으로 드려야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시험은 각자의 그릇 크기만큼 옵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이길 수 있는 만큼만 주님은 시험을 허락하셔요.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고전10:13)

 

시험을 이기기 위해서는 주님으로부터 만나를 충분히 받아야 하는데요, 그래서 주님은 만나를 항아리에 한 오멜을 담으라 하셔요. 그런데 사실 우리가 담는다기보다는 주님이 주시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우리의 역할이 있다는 말씀인데요, 그 역할은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먼저 진리를 열심히 배워야 하고요, 그리고 배운 것을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내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 속에 만나 한 오멜을 담으라’시는 말씀의 속뜻입니다.

 

만나를 담아 여호와 앞에 둔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여호와 앞에 둔다는 것은 주님의 임재를 뜻합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진리나 선은 바로 주님 자신이셔요. 그렇기 때문에 만나라는 선이 우리 속으로 흘러들어올 때, 동시에 주님도 우리 안으로 임하신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간수하라’는 말씀은 기억하라는 뜻이고, ‘너희 대대로’라는 말은, 만나는 영적 교회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말씀에서 이스라엘은 영적 교회 사람들을 뜻하는데요, 이 영적 교회의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새 교회에서는 ‘천적 교회’(the celestial church), ‘영적 교회’(the spiritual church)라는 표현을 쓰는데요, 여기서 ‘영적 교회’란 진리를 통해 선으로 나아가는 사람들, 곧 진리가 이끄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진리가 먼저인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들에게 만나가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진리를 삶으로 옮기기 위해서는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선의 능력이 필요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거듭날 때까지는 만나가 필요하며, 거듭난 다음에는 만나를 먹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므로 ‘항아리를 가져다가 그 속에 만나 한 오멜을 담아 여호와 앞에 두어 너희 대대로 간수하라’는 이 말씀은 그것이 영적 교회 사람들을 위한 주님의 처방이라는 걸 꼭 기억하라는 말씀입니다.

 

34절에서 아론 역시 이스라엘에게 또 비슷한 말씀을 전합니다.

 

34아론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것을 증거판 앞에 두어 간수하게 하였고

 

이 말씀은 33절 말씀이나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33절에서는 만나를 담아 여호와 앞에 간수하라 하고, 34절에서는 증거판 앞에 간수하라는 것입니다. 먼저 ‘증거판’(the two tables of the testimony)입니다. 증거판은 여호와, 곧 주님이 시내 산에서 십계명을 선포하실 때 십계명을 친히 기록하신 돌판(the tables of stone)입니다.

 

여호와께서 시내 산 위에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마치신 때에 증거판 둘을 모세에게 주시니 이는 돌판이요 하나님이 친히 쓰신 것이더라 (출31:18)

 

증거판은 하나님의 법, 진리이신 주님을 나타냅니다. 증거판이 그렇게 주님을 나타내고 신성하지 않았다면, 이스라엘은 성막 가장 깊은 곳에 증거판을 담은 괘를 안치하지 않았을 것이고, 모세는 증거판 위에 있는 속죄소의 그룹 사이에서 여호와 하나님과 대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증거판은 법으로서, 또는 진리로서 주님을 나타냅니다. 반면, 만나를 여호와 앞에 간수하라 할 때 여호와는 사랑 그 자체이신 주님을 나타냅니다.

 

35사람이 사는 땅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자손이 사십 년 동안 만나를 먹었으니 곧 가나안 땅 접경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만나를 먹었더라

 

이스라엘은 사람이 사는 땅, 즉 가나안땅에 들어갈 때까지 만나를 먹었다고 합니다.

 

10또 이스라엘 자손들이 길갈에 진 쳤고 그 달 십사일 저녁에는 여리고 평지에서 유월절을 지켰으며 11유월절 이튿날에 그 땅의 소산물을 먹되 그날에 무교병과 볶은 곡식을 먹었더라 12또 그 땅의 소산물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 그 해에 가나안 땅의 소출을 먹었더라 (수5:10-12)

 

여기서 사람이 사는 땅, 가나안 땅은 바로 천국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천국에 들어가기 전에는 우리는 매일 같이 주님으로부터 만나를 받아먹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여기 천국을 사람이 사는 땅이라고 하는데요, 그 이유는 천국은 선이 충만한 곳이며, 그리고 그것이 사람을 살리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사람을 살리는 게 아니고 선이 사람을 살립니다. 물론 진리와 선이 함께 사람을 살리죠. 그런데 먼저는 선이라는 것입니다. 선으로부터 모든 능력이 나옵니다. 마치 태양의 뜨거운 열기가 있어야 모든 생물이 싹을 내고, 열매를 맺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천국을 사람이 사는 땅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말씀에서는 천국에 들어가기까지의 삶과 천국에 들어간 이후의 삶을 완전히 다르게 표현하는데요, 즉 천국에 들어가기 전의 삶에 대해서는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유랑하는 사십(40) 년으로, 그리고 한 주간의 엿새(6)로 표현하고, 그리고 천국에 들어간 이후의 삶은 가나안 땅에서의 삶으로, 그리고 엿새가 지난 후 일곱째(7) 날, 곧 안식일로 표현합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거듭나기 전에는 진리의 인도를 받아 선한 삶으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거듭난 다음에는 반대로 선의 인도를 받습니다. 즉 선의 인도를 받아 진리를 아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만나는 거듭나기 전까지만 필요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보낸 40년 동안, 즉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만나를 먹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나름의 진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진리가 진정한 진리가 아닐 때가 참 많습니다. 왜냐하면 거짓도 얼마든지 진실인 것처럼 논리적으로 입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처럼 말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자신이 믿는 진리를 입증할 수 있었고, 그렇게 그들은 자기들의 생각을 진리로 믿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진리이신 주님을 십자가에 매달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볼 때 진리를 진리로 알아본다는 것은 참으로 엄청난 축복입니다. 그런 축복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에 대해 주님한테 감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새 교회 분이라고 해서, 새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다 진리를 알아보는 눈이 있는 건 아닙니다. 이건 좀 놀라운, 좀 불편한 진실입니다. 진리를 적용할 때는 냉정하면 안 되지만, 그러나 엄격하게는 적용해야 합니다. 그런데 주변에 보면 그것이 엄격하지 않은 분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버려야 할 것을 버리지 않고 이것도 취하고 저것도 취합니다. 왜 그럴까요? 진리를 알아보는 눈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스베덴보리를 통해 기술하신 창, 출 속뜻 주석인,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8521번 글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사람이 교회의 교리에서 배운 진리에 따라 행하려고 할 때, 그 진리는 그에게 선이 되며 그는 그것을 진정한 진리로 믿게 된다... (이순철 역, 출16:32, ‘깟씨 같이 희고’) The good of truth which is with those who are of the spiritual kingdom is implanted in the intellectual part, for there is formed by the Lord in this part a new will, which is that the man wills to do according to the truth that he has drawn from the teaching of his church; and when he wills and does this truth, it becomes with him good, and is called “spiritual good,” and also “the good of truth.” That this is really truth, he indeed believes, because he has faith from the teaching; (AC.8521:2, Exod. 16:32, ‘And it was like coriander seed, white’)

 

그러므로 먼저 진리를 따라 살려는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어린아이처럼 순진한 마음으로 진리를 행해야 합니다. 진리를 따라 사는 것은 내적인 것들을 외적인 것 안에 담는 일입니다. 외적인 행위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필요 없는 게 절대 아닙니다. 외적인 것이 없는 내적인 것은 기초 없는 집과 같아서 그냥 공중에 흩어져 버린다고 했습니다. 모든 내적인 것이 최종적으로 도착하는 곳이 바로 외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외적인 행위가 중요합니다. 그때 주님에 의해 진리를 분별하는 눈이 열립니다. 그러기 전에는 마치 바리새인들처럼 진리가 무엇인지를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진리는 좋아하는 물건을 모아 두듯 취미 삼아 무슨 소장품 모아 두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살아내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 목적으로 진리를 사랑할 때 주님으로부터 만나를 받을 수 있고, 또 진리를 알아보는 눈을 가질 수 있습니다.

 

주님은 사람의 지성 안에 진리를 행동으로 옮기고자 하는 새로운 의지를 심어주시는데요, 그렇지 않고서야 우리가 어떻게 진리를 삶으로 살아내려는 마음조차 먹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옛날부터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지행합일(知行合一)을 강조했습니다.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반드시 일치해야 한다는 말이지요. 그런 생각을 우리 조상들부터 했다는 것 자체가 주님이 인간의 지성 안에 새로운 의지를 심어주신다는 뜻입니다. 주님이 이렇게 우리 안에 새 의지를 심어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무리 진리를 배워도 그냥 쌓아두기만 하다가 끝날 겁니다.

 

새로운 의지를 따라 진리를 행하려 할 때, 반드시 시험이 찾아오는데 그 시험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바로 만나라고 하는 선으로부터 나옵니다. 그러므로 거듭나기 위한 싸움을 하는 우리들은 주님께 만나를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주님은 시험을 이기기에 충분한 만나를 준비해 놓고 항상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오늘 말씀에서 만나를 한 오멜 담아 여호와 앞에 두라는 말씀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꼭 머릿속에 기억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사십 년 동안 광야를 유랑하는 모습은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매일 만나를 먹었듯, 우리도 매일 같이 만나를 먹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교우님들이 이 만나의 맛이 어떤지, 그리고 어느 때 주님으로부터 이 만나가 내 안에 흘러 들어오는지 하는 그 느낌을 꼭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모든 교우님과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37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못쓰게 되리라 38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눅5:37-38)

 

아멘

 

원본

2016-06-19(D1)

청주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5-06-01(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06-01(D1)-주일예배(2600, 출16,30-36), '만나 한 오멜을 여호와 앞과 증거판 앞에 간수하다'.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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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째 날은 안식일인즉 그날에는 없으리라’의 속뜻 (16:25-29)

 

 

25모세가 이르되 오늘은 그것을 먹으라 오늘은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오늘은 너희가 들에서 그것을 얻지 못하리라 26엿새 동안은 너희가 그것을 거두되 일곱째 날은 안식일인즉 그날에는 없으리라 하였으나 27일곱째 날에 백성 중 어떤 사람들이 거두러 나갔다가 얻지 못하니라 28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어느 때까지 너희가 내 계명과 내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려느냐 29볼지어다 여호와가 너희에게 안식일을 줌으로 여섯째 날에는 이틀 양식을 너희에게 주는 것이니 너희는 각기 처소에 있고 일곱째 날에는 아무도 그의 처소에서 나오지 말지니라 (출16:25-29) And Moses said, Eat ye this today, because today is a sabbath to Jehovah, today ye shall not find it in the field. Six days ye shall gather it, and on the seventh day is the sabbath, it shall not be in it. And it was on the seventh day, there went out some of the people for to gather, and they found none. And Jehovah said unto Moses, How long do ye refuse to keep My commandments and My laws? See ye, because Jehovah hath given you the sabbath, therefore He giveth you on the sixth day the bread of two days; rest ye everyone in his place, let no one go forth from his place on the seventh day (Exdo. 16:25-29).

 

 

오늘은 안식일의 속뜻인 선과 진리의 결합(the sabbath, the conjunction of good and truth)에 대하여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다음은 스베덴보리 저,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8516번 글 중, 오늘 본문 29절에 나오는 ‘여섯째 날에는 이틀 양식을 너희에게 주는 것이니’에 대한 주석 일부 인용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더 알아야 하는 사실은 진리들은 스스로는 선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과, 선이 진리들을 채택, 자기들 곁에 둔다는 사실입니다. 신앙의 진리들은 사람의 기억 속에 마치 내적 시야 아래 펼쳐진 밭처럼 있는데요, 주님으로 말미암는 선이 이 시야를 통해 흘러들어와 자신과 일치하는 진리들 가운데서 골라 스스로를 그 진리들하고 결합하기 때문입니다. 아래에 있는 진리들은 위에 있는 선 안으로 흘러 들어갈 수 없는데요, 이는 완전히 질서에 어긋나기 때문이며, 더 낮은 것이 더 높은 것으로 흘러가겠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A man must know further that truths do not of themselves enter into good, but that good adopts truths and adjoins them to itself; for the truths of faith lie in the memory of a man as in a field extended beneath the interior sight. Good from the Lord flows in through this sight, and chooses from them, and conjoins with itself the truths which are in agreement with it. The truths which lie beneath cannot flow into the good which is above; for it is quite contrary to order, and even impossible, for the lower to flow into the higher. (AC.8516:2)

 

우리가 말씀을 읽거나 예배 시간에 설교를 듣거나 하면서 배우는 진리들은 늘 말씀드리지만 기억이라는 창고에 저장되는데, 진리들이 이 창고 안에 차곡차곡 어떤 질서에 따라 저장되는 모습은 내적 시야(the interior sight)로 볼 때는 마치 들판에 진리들이 있는 모습과 같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할 때는 우리는 잘 못 느끼지만, 내적 시야로 거기 있는 진리들을 마치 스캔하듯 훑고 나서 필요한 진리를 선택, 그것을 삶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신앙인들이 사는 모습인데요, 우리가 그런 식으로 진리를 가지고 삶에 적용하려 할 때, 그때 주님으로부터 흘러들어오는 선이 있는데, 이 선이 바로 ‘만나’라는 선입니다. 그런데 이 만나라는 선은 내적 시야를 통해 흘러들어오며,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많은 진리들 가운데 자기와 맞는 것을 선택, 그것과 결합합니다. 이것이 선과 진리의 결합입니다. 그러니까 만나, 즉 진리의 선(the good of truth)은 처음부터 진리와 결합한 상태가 아니고, 들어올 땐 선으로 들어와서는 나중에 우리 안에 있는 진리와 결합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안의 선과 진리의 결합은 주님이 일방적으로 진행하시는 게 아니라는 말씀이지요. 우리가 진리를 준비하면 그때 주님이 선을 보내주시고, 그러면 그때 비로소 우리 안에서 선과 진리의 결합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준비하는 진리를 보통 신앙의 진리라고 하는데, 사람이 신앙하고, 그러므로 삶의 규범으로 삼는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인간 편에서 진리를 준비해야 합니다.

 

※ 참고로 주님은 우리가 이 진리를 좋게 여기도록 여러 즐겁고 기쁜 일들(things that are pleasant and delightful)을 허락하십니다. 우리가 그것을 사모하고 원하는 만큼 말이지요. 이것이 우리가 주님의 여러 약속의 말씀들을 붙들고 살아가야 하는 이유인데요, 그럴 때 주님은 우리에게 그 약속대로 ‘즐겁고 기쁜’ 일들을 허락하셔서 이 진리들이, 그리고 그 지식들이 우리 안에 스며들게 하십니다. ‘주님을 사랑하여 약속하신 말씀들을 붙들고 살았더니 내 삶이 형통하네!’ 깨닫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동안 우리가 배우기는 선은 의지(will) 안으로 들어오고, 진리는 이해(understanding) 안으로 들어온다고 배웠습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생명을 받는 두 가지 그릇인 이해와 의지가 있는데, 이때 이해는 진리를, 의지는 선을 받는 그릇이라고 배웠어요. 그런데 오늘 이 만나라고 하는 선은 의지가 아닌, 이해로 들어온다고 하네요.

 

※ 영어 understanding에 대한 ‘이해’(理解)라는 번역이 좀 이상하시면 ‘이성’(理性)으로 읽으셔도 되겠습니다. 그래서인지 이 understanding을 ‘이해력’, ‘사고력’, 혹은 ‘이해하는 능력’ 등으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저는 그냥 곧이곧대로 번역했습니다.

 

이것은 그동안 우리가 배운 것하고는 반대인데요, 이건 이렇게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만나는 아직 진리와 결합한 선이 아니기 때문에 아직은, 그러니까 처음부터 의지 안에 담길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주님은 만나라는 선을 먼저 이해 안으로 넣어주시고, 그렇게 해서 이해 가운데 있는 진리와 결합하도록 하십니다. 그러고 나서 마치 모종 옮기듯 의지 안으로 옮겨심어 주시지요. 만나가 이해 가운데로 들어오는 건 이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나가 이해 가운데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먼저 진리의 모습을 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해(understanding)의 본성상 이해와 진리는 어울리지만, 이해와 선은 안 어울려요. 그래서 만나는 선 상태로 처음부터 이해 안으로 들어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만나가 이해 가운데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일단 진리의 모습이어야 하며, 그래서 주님은 만나라는 선에게 진리의 옷을 입혀주시는데, 겉으로 볼 때 진리처럼 보이게 하시는 것이지요. 그래서 말씀에서 만나를 ‘작고 둥글다’ 하신 것입니다.

 

그 이슬이 마른 후에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 같이 가는 것이 있는지라 (출16:14)

 

작다는 건 진리의 특성을, 둥글다는 건 선의 특성을 나타내기 때문인데요, 그래서 만나는 겉으로 보면 진리처럼 보이는데 속을 들여다보면 선인, 그런 것입니다.

 

이제까지 말씀드린 것이 주님으로부터 만나를 얻어 온전히 우리 걸로 만드는 과정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만나가 밤새 하늘에서 비처럼 내려 아침에 그냥 받아먹는 것인 줄로만 알았지만, 사실은 만나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받아먹는 것입니다. 이 만나를 먹는 과정이 곧 우리 안에서 선과 진리가 결합, 하나 되는 과정입니다.

 

 

25모세가 이르되 오늘은 그것을 먹으라 오늘은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오늘은 너희가 들에서 그것을 얻지 못하리라

 

이 말씀의 의미는 한 마디로 안식일 이전에 만나를 얻는 상황과 안식일 이후의 상황이 서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거듭나기 전. 즉 선과 진리의 결합이 이루어지기 전 하나님의 생명 얻는 방법과, 거듭난 다음에 하나님의 생명 얻는 방법이 다르다는 것이지요.

 

다음은 스베덴보리 저,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8505번 글 일부 인용입니다. ‘오늘은 너희가 들에서 그것을 얻지 못하리라’에 대한 주석입니다.

 

거듭나기 전 사람은 진리로 행하여 선을 얻습니다(is acquired). 진리는 사람의 의지가 되며, 그렇게 해서 그의 생명이 될 때 선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거듭난 후에는 선으로 행하여 진리를 얻습니다(are procured). 거듭나기 전 사람은 복종으로(from obedience) 행하지만, 거듭난 사람은 애정(from affection)으로 행합니다. 이 둘의 상태는 서로 정반대입니다. 전자는 진리가 다스리지만, 후자는 선이 다스립니다. 그러니까 전자에서는 사람은 내려다보거나 뒤를 돌아보지만, 후자에서는 올려다보거나 앞을 봅니다. 사람이 후자의 상태, 곧 애정으로 행할 때, 그는 더 이상 뒤돌아보는 것도, 진리로 선을 행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습니다. 그때는 주님이 그의 선 안으로 들어오셔서 선을 가지고 그를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때 그가 뒤돌아보거나 진리로 선을 행하려 하면, 그는 자신으로 말미암아(from his own) 하는 것입니다. 진리로 행하는 사람은 자기가 자기를 인도하는 사람이지만, 선으로 행하는 사람은 주님의 인도를 받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Before regeneration man acts from truth, but through it good is acquired; for truth becomes good with him when it becomes of his will, and thus of his life; but after regeneration he acts from good, and through it truths are procured. Before regeneration man acts from obedience; but after regeneration from affection. These two states are inverse to each other; for in the former state truth rules, but in the latter good rules; or, in the former state man looks downward or backward, but in the latter upward or forward. When a man is in the latter state, that is, when he acts from affection, he is no longer allowed to look back, and to do good from truth, for at that time the Lord flows into the good with him, and leads him by means of the good. If at that time he were to look back, or were to do good from truth, he would act from his own; for he who acts from truth leads himself, whereas he who acts from good is led by the Lord. (AC.8505)

 

거듭나기 전에는 진리에 대한 복종심, 또는 의무감으로 선을 행하지만, 거듭난 다음에는 그럴 필요가 없는데요, 왜냐하면 거듭난 다음에는 진리와 결합한 선으로부터 나오는 기쁨에 따라 선을 행하기 때문입니다. 그때 그 선을 통해 우리는 진리를 얻게 됩니다. 그래서 거듭나기 전에는 진리를 통해 선을 얻지만, 거듭난 후에는 선을 통해 진리를 얻는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듭난 후에는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해도 선과 진리에서 벗어나는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음에서 원하는 대로 행할 때마다 그것은 사실은 주님의 인도를 받아 하는 것이며, 이는 주님의 지혜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듭난 후에는 점점 지혜가 많아집니다. 그것이 안식일 전과 후의 차이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 중에는 안식일에 만나를 거두러 나간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26엿새 동안은 너희가 그것을 거두되 일곱째 날은 안식일인즉 그날에는 없으리라 하였으나 27일곱째 날에 백성 중 어떤 사람들이 거두러 나갔다가 얻지 못하니라

 

같은 말씀이 반복되는데요, 다음은 우리의 일상 중에서 거듭남을 살펴본 것입니다.

 

사람이 거듭나기 위해서는 그동안 갖고 있던 좋지 않은 습관들이 진리에 따라 하나씩 하나씩 교정되어야 합니다. 그 좋지 않은 습관이란 반복되는 말투와 표정, 태도와 행동 같은 것이며, 또 그런 습관의 바탕에는 개인의 취향과 애정, 신념 같은 것들이 버티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습관을 형성하는 요소들입니다. 그래서 하나의 작은 습관이 바뀌려면 그 습관을 형성하는 수많은 요소가 모두 진리와 선으로 바뀌어야 하지요. 이를테면 습관의 바탕에 있는 신념들은 진리로 교체되어야 하고, 애정이나 취향 같은 것은 선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그런 식으로 잘못된 애정이나 신념들이 주님에 의해 하나씩 선하고 진실한 것으로 바뀌는 것이 엿새 동안 만나를 먹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엿새 동안의 변화를 바탕으로 해서 이레째 되는 날 하나의 습관이 완전히 교정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안식일은 마치 진리와 선으로 만들어진 구슬들을 하나씩 꿰어 하나의 목걸이를 완성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느 한 부분은 거듭났다 하더라도 다른 부분은 여전히 거듭나지 못한 상태일 수 있습니다. 마치 인체의 장기 중 하나라도 병들어 있으며 나머지 모든 장기가 불안정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마치 롯의 아내가 뒤를 돌아보는 것처럼 하나님의 질서를 어기는 일이 생깁니다. 백성 중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안식일에 만나를 거두러 나간 것도 말하자면 이런 것이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런 모습을 보시고 여호와께서 28절에서 말씀하십니다.

 

28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어느 때까지 너희가 내 계명과 내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려느냐

 

이 말씀을 읽으시는 분들은 마치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원망하시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나무라시거나 원망하시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들의 의식 속에서 주님의 존재가 희미해질 때, 주님은 그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는데요, 그것이 이 ‘어느 때까지 너희가 내 계명과 내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려느냐’는 말씀의 속뜻입니다. 그러니까 ‘너희에게 나의 존재가 희미해졌구나’라고 알려주시는 것이지요.

 

주님은 모든 사람 안에 계십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모든 사람 안에 주님이 계세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주님을 느끼고, 어떤 사람은 주님을 느끼지 못합니다. 주님을 느끼는 사람은 주님의 인도 받기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입니다. 내가 나를 이끌고 가려 하면 안 되고, 주님의 인도하심에 나를 맡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먼저 나의 아집, 고집을 꺾어야 하고, 주님이 나를 주장하시기를 바라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주님의 존재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 나로부터 나오는 생각이나 애정이 얼마나 악한지,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질서에서 얼마나 멀리 있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나의 자아에서 나오는 것들은 대개는 오만하고 위선적이며, 탐욕스럽고, 그리고 나 외에는 아무도 존중하지 않으며, 심지어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함부로 대하기까지 합니다. 이런 걸 심각하게 느낄 때 우리는 진심으로 자아의 지배에서 벗어나기를 원하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주님과 연결되고, 그때 주님의 존재를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존재를 느낄 때, 우리 안에는 따뜻함이라든가 어린아이 같은 순진함, 또 나를 주장하지 않는 겸손함 같은 것으로 채워집니다. 그러한 것을 느끼는 것이 주님의 존재를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주님에 대한 그런 느낌이 거의 없고, 오히려 희미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것을 염려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29볼지어다 여호와가 너희에게 안식일을 줌으로 여섯째 날에는 이틀 양식을 너희에게 주는 것이니 너희는 각기 처소에 있고 일곱째 날에는 아무도 그의 처소에서 나오지 말지니라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일곱째 날에는 각자의 처소에 그대로 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처소에 머물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안식일의 평화를 의미합니다. 안식일의 평화는 본질적으로 인간의 의도를 버리는 것이고, 오직 주님의 인도만을 받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 평화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이 자기 뜻대로 할 때, 혼란이 오고 불화가 생기며, 평화가 깨집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버리고 주님의 인도를 바라야 합니다. 그래야 마음에 평화가 찾아옵니다. 그러니까 안식일에 만나를 거두러 나간 사람들은 사실은 주님의 인도를 받고자 하는 사람들이 아니고 자신의 의도대로 행동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평화가 없고, 주님은 그들에게 안식일의 축복을 주실 수 없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주님이 일을 하실 수가 없고, 그러므로 선과 진리의 결합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안식일 규례에 대해 아주 엄격하게 말씀하셨습니다.

 

2엿새 동안은 일하고 일곱째 날은 너희를 위한 거룩한 날이니 여호와께 엄숙한 안식일이라 누구든지 이날에 일하는 자는 죽일지니 3안식일에는 너희의 모든 처소에서 불도 피우지 말지니라 (출35:2, 3)

 

주님은 안식일에 아무것도 하지 말라 하십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이날에 일하는 자는 죽일지니’라고 하십니다. 이 ‘죽이라’는 말씀은 정말 영적으로 죽는다는 말씀입니다. 인간이 피우는 불이나 인간이 하는 일은 모두 자아에서 나오는 사랑이고 집착이며, 의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주님이 아무 일도 하실 수 없기 때문에, 그래서 주님은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집에 머물러 있으라, 불도 피우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너희는 각기 처소에 있고 일곱째 날에는 아무도 그의 처소에서 나오지 말지니라’ 두 번이나 말씀하십니다. 왜 두 번씩이나 말씀하실까요? 첫 번 말씀은 자기의 의도를 버리고 주님의 인도를 따르라는 것이고, 두 번째 말씀하신 것은 그 상태를 계속 유지하라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배우면서 교우님들 가운데는 이 말씀이 과연 나와 관련이 있는가 하시는 분도 계실 겁니다. 왜냐하면 나는 여전히 내적 싸움을 하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 안식일은 아직 요원한 일이다 이렇게 생각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거듭남이란 한 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작은 거듭남이 쌓여서 완전한 거듭남이 이루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마다 이미 조금씩은 거듭나 있거나 어떤 부분에서는 안식일에 가까운 상태에 있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상태에 있을 때, 이제 이전처럼 진리를 머리로만 생각하는 태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진리를 머리로만 생각하기보다는 마음으로 느끼려는 습관이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님이 나를 주장하시기를 바라면서 주님께 집중하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기도도 내가 원하는 걸 구하기보다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야 합니다. 말씀 하나를 가지고 조용히 묵상하는 습관을 가져 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이런 습관을 가지게 되면, 무슨 일을 하든 기억 속에 있는 진리로 하지 않고 마음 깊은 곳에서 나오는 애정으로 하게 됩니다. 그때 주님으로부터 선한 것이 흘러들어와 기억 속에 있는 진리들과 하나로 결합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요원한 것 같이 여겨졌던 이 안식일의 평화가 찾아옵니다. 주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 그런 교훈을 주려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지난 시간에 배운 것처럼, 안식일을 위해 준비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물과 불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에 대한 신앙과 사랑입니다. 우리가 그것만 준비한다면 주님이 우리를 위해 안식일의 떡을 구워주시고, 안식일의 고기를 삶아 주십니다. 모든 분께 이런 안식일의 평화가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15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이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17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 안에 있는 물건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며 18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 (마24:15, 17-18)

 

31그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의 세간이 그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그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 32롯의 처를 기억하라 (눅17:31-32)

 

아멘

 

원본

2016-05-29(D1)

청주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5-05-25(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05-25(D1)-주일예배(2599, 출16,25-29), ‘일곱째 날은 안식일인즉 그날에는 없으리라’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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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혹시 시간 되시면 아래 링크를 따라가 관련 내용들을 틈틈이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HH) '목차'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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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째 날에는 각 사람이 갑절, 곧 두 오멜씩 거둔지라’의 속뜻  (16:21-24)

 

 

21무리가 아침마다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고 햇볕이 뜨겁게 쬐면 그것이 스러졌더라 22여섯째 날에는 각 사람이 갑절의 식물 곧 하나에 두 오멜씩 거둔지라 회중의 모든 지도자가 와서 모세에게 알리매 23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일은 휴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안식일이라 너희가 구울 것은 굽고 삶을 것은 삶고 그 나머지는 다 너희를 위하여 아침까지 간수하라 24그들이 모세의 명령대로 아침까지 간수하였으나 냄새도 나지 아니하고 벌레도 생기지 아니한지라 (출16:21-24) And they gathered it morning by morning, everyone according to the mouth of his eating; and the sun grew hot and it melted. And it was that on the sixth day they gathered bread double, two omers for each one; and all the princes of the assemblage came and told Moses. And he said unto them, This is what Jehovah spake, A rest, a sabbath holy to Jehovah, is the morrow; what ye will bake, bake ye; and what ye will boil, boil ye; and all that is left over, this lay ye by for you to keep until the morning. And they laid it by till the morning, as Moses commanded, and it did not stink, and the worm was not in it. (Exod. 16:21-24)

 

※ 지난주부터 출애굽기 속뜻 강해를 시작했습니다. 출애굽기 속뜻 강해를 1장이 아닌 16장부터 갑자기 시작하는 이유는 그 앞부분 원본을 구할 수가 없기 때문인데요, 이 부분은 훗날 제 역량이 준비가 되고, 주님의 허락 있으시면 그때 마저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출애굽기 16장을 1절부터 지난주 본문까지 다시 읽겠습니다. //

 

1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엘림에서 떠나 엘림과 시내 산 사이에 있는 신 광야에 이르니 애굽에서 나온 후 둘째 달 십오일이라 2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3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4그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5여섯째 날에는 그들이 그 거둔 것을 준비할지니 날마다 거두던 것의 갑절이 되리라 6모세와 아론이 온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저녁이 되면 너희가 여호와께서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을 알 것이요 7아침에는 너희가 여호와의 영광을 보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가 자기를 향하여 원망함을 들으셨음이라 우리가 누구이기에 너희가 우리에게 대하여 원망하느냐 8모세가 또 이르되 여호와께서 저녁에는 너희에게 고기를 주어 먹이시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불리시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자기를 향하여 너희가 원망하는 그 말을 들으셨음이라 우리가 누구냐 너희의 원망은 우리를 향하여 함이 아니요 여호와를 향하여 함이로다 9모세가 또 아론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 가까이 나아오라 여호와께서 너희의 원망함을 들으셨느니라 하라 10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매 그들이 광야를 바라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구름 속에 나타나더라 11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2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원망함을 들었노라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해 질 때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부르리니 내가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인 줄 알리라 하라 하시니라 13저녁에는 메추라기가 와서 진에 덮이고 아침에는 이슬이 진 주위에 있더니 14그 이슬이 마른 후에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 같이 가는 것이 있는지라 15이스라엘 자손이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서로 이르되 이것이 무엇이냐 하니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어 먹게 하신 양식이라 16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시기를 너희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이것을 거둘지니 곧 너희 사람 수효대로 한 사람에 한 오멜씩 거두되 각 사람이 그의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거둘지니라 하셨느니라 17이스라엘 자손이 그같이 하였더니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 18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더라 19모세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두지 말라 하였으나 20그들이 모세에게 순종하지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 (출16:1-20)

 

※ 이스라엘의 어느 한국인 선교사는 한국에서 오시는 성지순례 목회자들, 그리고 성도들에게 광야 체험 코스를 반드시 권하신다고 합니다. 자동차로 한 바퀴 휙 둘러보고 갈 요량으로 가이드를 부탁하시는 분들에겐 절대 사양하신다고 하네요. 이스라엘은 광야의 백성이기 때문에 광야를 자동차 타고 대충 둘러보는 걸로는 참된 순례의 정신을 놓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직접 두 발로 하루를 걸어보아야, 예를 들면, 오늘 이 출애굽기 16장 같은 본문, 그러니까 왜 이들이 이렇게 불평하고 원망하는지 하는 그 정황이 생생하게 이해가 된다는 것이지요. 그 선교사님이 왜 이렇게 하시는지 그 의도는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만... 그러나 다음 말씀들을 보면 실제로 주님은 자기 백성을 한낮 광야 그 타는 열기에서는 구름 기둥으로, 한밤 광야 그 온몸이 덜덜 떨리는 추위에서는 불 기둥으로 돌보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21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을 그들에게 비추사 낮이나 밤이나 진행하게 하시니 22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출13:21-22)

 

주 여호와께서 이 백성 중에 계심을 그들도 들었으니 곧 주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보이시며 주의 구름이 그들 위에 섰으며 주께서 낮에는 구름 기둥 가운데에서, 밤에는 불 기둥 가운데에서 그들 앞에 행하시는 것이니이다 (민14:14)

 

주께서는 주의 크신 긍휼로 그들을 광야에 버리지 아니하시고 낮에는 구름 기둥이 그들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길을 인도하며 밤에는 불 기둥이 그들이 갈 길을 비추게 하셨사오며 (느9:19)

 

그러니까 주님은 우리처럼 자기 자녀를 훈련을 빙자, 혹독하게 인도하시는 그런 분이 아니시라는 것이지요. 인생들이 겪는 혹독함은 불의의 사고 등을 제외하면 거의 본인들이 자초하는 것이며, 그 불의의 사고라는 것조차도 다 주님의 섭리 가운데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 우주에서 주님의 허락 없이 일어나는 그 어떤 일도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주님을 사랑하고 범사 주님을 의뢰하는 자녀들에게 셀 수 없이 많은 돌봄과 보살핌의 약속을 하시는 분입니다. //

 

만나는 주님이 당신의 교회에 속한 사람들에게 내려 주시는 진리의 선(the good of truth)이라고 새 교회에서는 가르칩니다.

 

※ ‘선한 진리’라고 해도 되겠습니다. 그 안에 선이 들어있다는 의미라면 말입니다.

 

이것은 이전에 알고 있었던 진리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동안 말씀을 통해서나 또 교리를 통해 진리를 배운다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그냥 우리가 머리로 기억하는 지식일 뿐이지 진리 그 자체는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이전에 알았던 진리가 단순히 지식에 그쳤다면 이 진리의 선, 곧 선한 진리는 그 안에 선이 들어있는 진리인 것입니다. 지식적인 선은 누구나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진리의 선은 아무나 가질 수 없습니다. 이 선을 받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왜냐하면 알고 있는 진리에 관한 지식들을 어떻게 해서든지 삶으로 옮기려는 노력이 있어야 하고, 그것이 잘 안될 때는 주님을 향한 간절히 매달림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러한 긴 시련과 아픔의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만나라고 하는 진리의 선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선이 있는 진리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인들은 주님으로부터 만나를 받아먹는 순간부터 비로소 삶이 조금씩 변합니다. 그전에는 잘 변하지가 않아요. 진리 속에 들어있는 선의 능력이 우리를 그렇게 변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만나를 받아먹으면 이전에 즐기던 악한 것, 거짓된 습관들을 더 이상 즐거워하지 않게 됩니다. 싫어하는 마음이 생기는 겁니다. 그리고 이전에는 주님보다 나를 더 믿었다면 이제는 나보다는 주님을 더 신뢰하게 됩니다. 이런 것들이 만나를 받기 시작하면서 일어나는 삶의 변화들입니다.

 

21절입니다.

 

무리가 아침마다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고 햇볕이 뜨겁게 쬐면 그것이 스러졌더라

 

여기서 ‘아침마다’의 속뜻은 영원히 지속된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으로부터 일단 진리의 선이 흘러 들어오기 시작하면 멈추지 않고 계속 흘러 들어오기 때문이지요.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고’는 각자의 그릇에 따라 선을 받는다는 뜻인데요, 그러니까 각 사람의 역량, 곧 주님이 주시는 선과 진리를 바로 자기 것으로 만드는 사람, 즉시 생활로 옮기는 사람의 역량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선을 많이 주세요. 흘러들어오는 선을 방해할 무슨 장애물이 없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선을 받아서 그것을 생활로 옮기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주시지 않습니다.

 

※ 사실은 안 주시는 게 아니라 본인이 못 받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한테는 하늘을 향한 창문이 닫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은 주님이 주시는 거룩한 것을 자꾸 더럽히는 것인데요, 그렇게 되면 그 사람 본인에게 좋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각자의 분량이라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을 삶으로 살아내는 능력을 말합니다. 그 능력에 따라 만나를 받는 분량이 정해지는 것입니다.

 

다음은 ‘햇볕이 뜨겁게 쬐면 그것이 스러졌더라’의 속뜻입니다. 말씀에서 햇볕은 보통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서는 정반대의 의미입니다.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과 반대니까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나오는 욕망(concupiscence)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의 속뜻은 우리 마음에 세상적 욕망이 뜨겁게 일어날 때, 즉 자기 사랑과 세상에 대한 사랑으로 우리 마음이 뜨거울 때, 그때는 주님으로부터 선이 더 이상 들어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주님과 우리 사이 일단 선의 물꼬가 터지면 그때부터는 계속해서 주님으로부터 선이 흘러들어오는데, 그러나 그 선의 유입이 항상 일정한 것은 아닙니다. 어떨 때는 많이, 어떨 때는 잠시 중단될 때도 있습니다. 방금 말씀드린 것처럼,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우리 마음에 충만할 때에는 선이 많이 흘러들어오지만, 그러나 우리 마음속에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 세상에 대한 관심이나 욕망이 많을 때에는 선의 흐름이 중단됩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면서 그 일의 목적에 충실할 때, 즉 나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고 그 일을 내게 주신 주님의 목적 자체에만 충실할 때, 그때는 주님으로부터 선이 활발하게 흘러들어옵니다. 그러나 반대로, 일을 하면서 자기를 내세우려 하거나, 그 일의 결과 어떤 보상을 바라거나 할 때는 선이 흘러들어오다가 딱 멈춥니다. ‘햇볕이 뜨겁게 쬐면 그것이 스러졌더라’는 바로 이런 뜻입니다. 이런 식으로 주님은 선의 흐름을 그때그때 조절하십니다. 그 이유는 그래야 우리가 선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또 그것을 기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 참고로, 우리의 인생은 천국을 향한 준비 과정이며, 그래서 현재 거듭남의 풀코스를 밟고 있는 우리이지만, 그럼에도 우리 역시 날마다 주시는 주님의 만나를 소홀히 여기는데요, 이스라엘도 그랬습니다.

 

4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이르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 5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6이제는 우리의 기력이 다하여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하니, 10백성의 온 종족들이 각기 자기 장막 문에서 우는 것을 모세가 들으니라 이러므로 여호와의 진노가 심히 크고 모세도 기뻐하지 아니하여 (민11:4-6, 10)

 

그들은 만나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몰랐습니다. 그것이 우리를 살릴 뿐 아니라 영원한 나라로 인도하며, 그리고 만나 속에는 온갖 순진함과 평화, 안전과 기쁨이 있다는 것을 전혀 몰랐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갓난아이와 어린 자녀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먹이며 돌보듯 주님에게 만나는 그런 것인데 말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니 우리도 주님보다는 자기를 더 사랑하며, 천국보다는 세상 것에 더 관심이 많기 때문에 그런 걸 몰랐습니다. 하늘의 것에 대한 소중함을 전혀 느끼지 못했던 것입니다.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 (민21:5)

 

만나를 하찮은 음식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삶을 보면 주님의 생명인 선과 진리를 하찮게 여긴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선이나 진리는 청정한 공기와 물, 그리고 화창한 봄날의 햇볕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이 많을 때는 그 소중함을 잘 모릅니다만, 그러나 잠시 마음을 비우고 그것을 바라볼 때, 아니면 가끔 도시를 떠나 깊은 산중에 들어가 오염되지 않은 공기와 물을 대할 때 우리는 그것이 생명같이 소중한 것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선이나 진리는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각자의 내면 상태를 보시고, 그것에 따라 선의 흐름을 조절하십니다.

 

22절입니다.

 

여섯째 날에는 각 사람이 갑절의 식물 곧 하나에 두 오멜씩 거둔지라 회중의 모든 지도자가 와서 모세에게 알리매

 

여섯째 날’은 영적인 어떤 상태의 마지막 단계를 뜻합니다. 그다음 날이 하나의 상태를 마무리하는 날, 즉 안식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거듭나는 동안 수많은 영적 상태를 거칩니다. 그리고 하나의 상태 안에서도 여러 단계를 넘어가야 합니다. 마치 일주일에 일곱 날이 있는 것처럼, 그리고 첫째 날이 지나면 둘째 날이, 둘째 날이 지나면 셋째 날이, 그렇게 해서 여섯째 날이 지나야 하나의 상태가 마무리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주님은 그런 식으로 수많은 진리와 선의 구슬들을 꿰어 하나의 큰 목걸이를 만드십니다. 그것이 인간의 거듭남입니다. 그런데 그 여섯째 날인 마지막 단계에 주님은 평소보다 만나를 두 배로 거두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겉뜻으로는 다음 날은 쉬는 날이니까 두 배로 거두라는 뜻이지만 속뜻은 다릅니다. 둘이라는 숫자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는데요, ‘’이란 숫자의 속뜻은 선과 진리의 결합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주님이 두 배를 거두라는 말씀은 그동안 주님이 주셨던 선과 진리들을 하나로 만들기 위한 준비를 하라는 뜻입니다. 그동안 이스라엘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만나를 계속 먹었습니다. 그것은 우리 신앙인들이 주님이 주시는 선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그 선을 가지고 계속해서 영적 싸움, 영적 전쟁을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선과 반대되는 악이 계속해서 우리를 유혹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이스라엘이 만나를 매일 먹는 모습은 우리 신앙인들이 선을 가지고 영적 싸움을 하는 것이구요, 또 삶 속에서 선을 실천하는 모습입니다. 그전, 그러니까 만나를 받기 전에는, 영적 싸움이 시작되면 거의 이기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선의 능력에 힘입어 싸움이 시작되면 거의 이깁니다. 그럼에도 아직 완전한 상태는 아닙니다. 선과 진리가 확실히 결합된 상태가 아니라는 것이죠. 왜 그럴까요? 싸움에서 이긴다고는 하는데, 때로는 완전히 이기지 못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때냐 하면 악과 적당한 선에서 타협할 때, 그때에는 완전히 이기는 게 아닙니다. 또 선을 행하기는 하는데 진리에 입각해서 선을 행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말하자면 자기 생각대로 선을 행할 때인데요, 주님의 진리를 따라 선을 행하는 게 아니라 자기 머리에서 나오는 생각을 따라 선을 행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 그러니까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한’ 사사기 백성처럼 말입니다.

 

그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선 같지만 실제로는 선이 아닙니다. 그런 일들이 많은 상태에서는 아직 선과 진리가 결합되었다 말할 수 없는데요, 그래서 주님은 이제까지의 내적 싸움과 수고를 묶어 선과 진리의 결합을 이루어 주시려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안식일입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에게 그것을 준비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여섯째 날에는 각 사람이 갑절의 식물을 거둔지라’의 속뜻, 곧 선과 진리의 결합을 준비하라, 안식일을 준비하라시는 뜻입니다.

 

각 사람이 두 오멜씩 거둔지라’의 속뜻인데요, 여기서 ‘오멜’은 지난주 말씀드린 것처럼 충분한 양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것은 또한 능력을 의미하지요. 따라서 두 오멜씩 거두라는 말씀은 선과 진리의 결합을 이루어 내는 능력을 내가 너희에게 줄 터이니 그것을 받으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 혼신의 힘을 다하는 데도 마지막 단계를 넘지 못하고 쓰러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하는 것이죠. 세상일도 그렇고, 영적인 일도 그렇습니다. 마지막 한고비만 넘기면 아름다운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는데 그렇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런 것까지 잘 아시고 이렇게 말씀하세요. ‘너희가 지금까지 잘했으니 이제 한고비만 넘기자’, 그리고 ‘내가 선과 진리의 결합을 이루어 낼 수 있는 능력을 주겠다. 그러니 그것을 받아 유종의 미를 거두어라’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한 사람 앞에 두 오멜 씩 거두라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어렵게 마지막 단계를 넘어가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여호와께서 또 말씀하십니다.

 

23절입니다.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일은 휴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안식일이라 너희가 구울 것은 굽고 삶을 것은 삶고 그 나머지는 다 너희를 위하여 아침까지 간수하라

 

안식일은 조금 전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 내면에서 선과 진리가 결합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가장 높은 의미는, 주님 안에 신적 인성과 신성이 하나 되는 것(the union of the Divine and the Divine Human in the Lord)을 의미합니다. 우리 내면에서 선과 진리가 결합하는 것은 원인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주님이 세상에 오셔서 당신 안에 인성과 신성을 하나로 만드신 것에서 시작됩니다. 주님이 그러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선과 진리의 결합을 이루어 낼 수도, 거듭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선과 진리의 결합을 이루어 내는 모든 능력이 신성과 인성을 하나로 만드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주님이 지옥과의 싸움을 온전히 이기지 못하시고, 그래서 주님의 인성 안에 여전히 육신의 어머니로부터 받은 인성, 즉 유전악에 속한 것이 남아있었다면 주님이 과연 완전하신, 온전하신 하나님이실 수 있겠습니까? 그런 주님에게서는 아무런 능력도 나올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지옥과 싸워 온전히 이기심으로 불완전한 인성을 벗으시고, 여호와로부터 오는 거룩한 인성으로 갈아입으시는 것이 정말 정말 중요하였고, 그렇게 해서 주님의 인성은 당신 안에 여호와의 신성과 완전히 하나 되신 것입니다. 그때 주님은 거룩한 인간이시며, 거룩한 하나님이 되신 것입니다. 이렇게 안식일이란 의미는 주님 안에 인성과 신성이 하나 되는 것이구요,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서 진리와 선이 하나 되는 걸 의미합니다. 주님은 바로 이걸 위해 세상에 오셔서 지옥과 싸우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주님 자신을 위한 일이 아니었구요, 인간의 거듭남과 구원을 위한 일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은 스스로 선과 진리의 결합을 위한 씨앗이 되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그 씨앗의 열매를 맺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선과 진리가 완전히 하나가 되면 더 이상 영적 싸움이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일은 휴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안식일이라’, 곧 영적 싸움이 이제 더 이상 없으니 ‘휴일’이라 하시고, 선과 진리가 결합했기 때문에 ‘거룩하다’ 하시는 것입니다. 거룩하다는 말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선과 진리가 결합된 상태를 말하구요, 우리 안에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이 하나 되는 것, 그렇게 해서 주님과 우리가 하나가 되는 상태가 거룩한 것입니다.

 

너희가 구울 것은 굽고 삶을 것은 삶고’의 속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구울 것을 굽기 위해서는 불이 필요합니다. ‘’은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은 진리이며 신앙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적 안식일을 위해 우리가 준비해야 할 것은 주님에 대한 신앙과 사랑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진리와 선입니다. 주님은 안식일을 위해 이 두 가지를 준비하라 하십니다. 그냥 신앙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함께 준비하라고 하십니다. 그냥 신앙만으로는, 즉 ‘오직 믿음’만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 바탕에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그것을 제대로 가르치는 교회가 그렇게 많지가 않습니다. 사랑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선 없는 진리는 너무나 무섭고 살벌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진리와 선을 하나로 만들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안식일의 의미입니다.

 

그 나머지는 다 너희를 위하여 아침까지 간수하라’의 속뜻입니다. ‘나머지’라는 것은 우리가 안식일을 위해 준비해 온 모든 선과 진리인데요,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진리와 선을 마치 우리 자신의 것처럼 즐기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본래부터 내 것이라는 마음을 가지라는 게 아니고, 그러면서도 사실은 이 모든 것은 다 주님의 것이라는, 다 주님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인정하는 마음으로 즐기라는 것입니다. 마치 천사들처럼 말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마음입니다. 만약 우리가 선을 행할 때, 항상 ‘이것은 주님이 주시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주님이 시키시는 대로 그냥 하는 거야. 주님의 명령이니까...’ 하면서 한다면 선을 행하면서도 우리는 조금도 즐겁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은 마치 자기가 하는 것처럼 할 때 즐거움을 느낍니다. 그래서 사람의 자아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의 생명입니다. 우리는 자아를 늘 나쁘게 말하지만, 그러나 자아가 있어야 살아있는 사람이며, 자아가 없으면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자아의 기쁨을 존중하세요. 그래서 주님은 선과 진리를 행하면서 마치 자기가 하는 것처럼 기쁘고 즐겁게 여기길 바라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주시는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내가 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에게 선을 베풀고 그것으로부터 기쁨을 느끼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때의 기쁨은 이전에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자아, 잘난체하고 나만 잘되려는 자아에서 나오는 기쁨이 아니구요, 거듭남에 따라 주님이 새롭게 주시는 천국적 자아에서 나오는 기쁨입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 가지고 있던 자아를 그냥 계속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물론 거듭남을 위한 수고와 싸움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세상 떠날 때까지 타고난 이기적 자아를 가지고 살겠지요. 그러나 거듭나기 위해 싸우고 수고를 아끼지 않는 우리 신앙인들은 거듭남에 따라 주님으로부터 천국적 자아를 받습니다. 그 천국적 자아를 통해 우리는 마치 자기가 선을 행하는 것 같은 기분과 그것으로부터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느낄 수 있습니다.

 

24절입니다.

 

그들이 모세의 명령대로 아침까지 간수하였으나 냄새도 나지 아니하고 벌레도 생기지 아니한지라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일 먹을 만큼만 거두라고 하신 주님의 명령을 거역한 적이 있습니다. 왜 거역했을까요?

 

※ 아마도 ‘내일 염려’(care for the morrow) 때문이겠죠. 우리 인간이 그렇습니다. 내일 또 주신다시는데도 그 말씀을 믿지 못하고 덜 먹고 아침까지 남깁니다. 오늘 다 먹었다가 혹시 내일 안 주시면 어떻게 하지? 하는 염려 말입니다. 다음은 천국 천사들의, 이 ‘내일 염려’에 대한 글입니다.

 

그들은 미래에 대해 불안해하지도 않는다. 미래에 대한 불안을 그들은 내일 염려라 부르고, 그것은 삶에 필요하지도 않은 것을 잃거나 못 받을까 봐 근심하는 일이라고 정의한다. (HH.278:2)

 

욕심 때문은 아닌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17, 18절에,

 

17이스라엘 자손이 그같이 하였더니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 18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더라

 

하였기 때문입니다. //

 

그랬더니 만나에서 벌레가 생기구요, 악취가 풍겼습니다. 주님의 뜻을 무시하고 만나를 남겨두는 행위는 주님의 뜻에 따라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생각대로 선을 행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그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선 같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선이 아닙니다. 그러니 벌레가 생기고 악취가 풍길 수밖에 없겠죠. ‘악취’라는 것은 그 행위 가운데 있는 인간의 악한 의도입니다. 여기서 악한 의도란 자기만 생각하는 것, 이기적인 의도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겉으로는 마치 선을 행하는 것 같이 하면서도 속으로는 자기를 생각하는 것, 즉 자기를 높이려 한다거나 자기를 선하게 포장하려 하는 그런 의도가 있다는 것이죠. 그것이 바로 악취입니다. 그런데 악취가 나는 곳에는 보통은 또 벌레도 생기는데요, 그래서 ‘벌레’는 악한 의도에서 나오는 여러 가지 거짓들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것을 철저히 금하시고,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두지 말라’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 사람들은 그 말씀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상황은 다릅니다. 주님은 5절에,

 

여섯째 날에는 그들이 그 거둔 것을 준비할지니 날마다 거두던 것의 갑절이 되리라

 

말씀하셨고,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의 말씀대로 안식일을 위해 갑절의 만나를 준비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모든 행위는 순수한 선이며 진리입니다. 그래서 벌레가 생기지 않고 냄새도 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영적 만나를 받기 시작할 때, 우리의 신앙은 본격적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만나는 진리이기도 하고, 선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만나 속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넘어서지 못했던 여러 가지 신앙의 문제들을 만나를 통해 능히 극복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처음 우리가 만나를 받기 시작할 때에는 그것이 얼마나 기쁜 것인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잘 느끼지 못합니다. 그냥 밋밋하게 느끼고요, 여전히 세상에서 오는 자극적인 즐거움들을 더 기쁘게 생각합니다. 그것은 우리 속 자아가 아직 죽지 않았다는 뜻이구요, 그래서 자아로부터 수시로 욕망이 올라온다는 증거입니다. 그 욕망 가운데는 흔히 생각하는 세상적이고 감각적인 욕망도 있겠지만,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욕망도 수없이 많습니다. 우리가 자기를 사랑할 때, 그로 인해 일어나는 욕망이 사실은 그렇게 다양합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주님이 주시는 선과 진리의 고마움을 잘 모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가 욕망 가운데 있을 때에는 만나를 주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욕망 가운데 있고, 그러므로 주님으로부터 생명의 흐름이 중단될 때, 그때 우리는 행복할까요? 욕망을 따라 사니까 행복할 것 같은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때 우리는 공기가 부족하거나 물이 없는 것과 같은 그런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불안하고 또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해서 두려움을 느끼며, 무언지 모르는 불편함이 있구요, 그리고 실질적인 고통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다시 주님을 찾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모르고 있었던 선하고 진실한 것들의 가치를 알게 됩니다. 그것이 우리를 매일같이 영적으로 끌어올리며, 그리고 우리 신앙인들에게 살아가는 동력을 준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때 주님은 다시 우리에게 영적 아침을 열어주시고, 만나를 우리 마음의 지면 위로 하얗게 내려 주십니다. 그때 우리는 만나가 주는 평화와 순수함을 느낄 수 있고, 또 무언가 모르는 안정감과 은근한 기쁨을 느끼게 됩니다. 주님이 당신의 생명인 선과 진리를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선과 진리를 우리 속에서 하나로 만들라는 뜻이며, 그렇게 해서 주님과 하나가 되라는 뜻입니다. 우리 새 교회에서는 선과 진리의 결합이란 말을 자주 하는데, 구체적으로 그것은 선과 진리가 우리 의지 속에 뿌리를 내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상황에서도 늘 진리에 입각해서, 즉 주님 주신 진리에 기초해서 선을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하나의 선과 연관된 진리가 결합하는 일이 거듭나는 동안에 끊임없이 계속됩니다. 주님은 그렇게 주님의 생명과 우리의 생명이 하나 되기를 바라세요. 그래서 주님은 오늘 23절에,

 

내일은 휴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안식일이라 너희가 구울 것은 굽고 삶을 것은 삶고 그 나머지는 다 너희를 위하여 아침까지 간수하라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당신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겠다는 뜻이구요, 그것을 우리 자신의 것처럼 소유하기를 원하시고, 또 그것을 우리가 즐기기를 원하신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그런 마음을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늘 새겨야 할 줄로 압니다. 주님의 은혜가 우리 교우님들과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6또 여호와와 연합하여 그를 섬기며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그의 종이 되며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마다 7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사56:6-7)

 

아멘

 

 

※ 설교가 길다고 다들 시험 들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일점일획도 모두 주님의 말씀입니다.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는 꼭 원고를 함께 제공하는데요, 그 이유는 첫째, 설교 중 제가 무슨 사사로운 말을 할까 봐서이고, 둘째, 설교 중 다들 메시지보다는 메신저, 곧 설교자를 주목할까 봐서입니다. 

 

 

 

원본

2016-05-15(D1)

청주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5-05-18(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05-18(D1)-주일예배(2598, 출16,21-24), ‘여섯째 날에는 각 사람이 갑절, 곧 두 오멜씩 거둔지라’의 속뜻.pdf
0.55MB

 

 


※ 혹시 시간 되시면 아래 링크를 따라가 관련 내용들을 틈틈이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HH) '목차' (Contents)

‘목차’ Contents Editor’s Preface ‘저자 서문’ (Author’s Preface, 1) HH.1, '저자 서문(序文)'(Author’s Preface)(HH.1)※ HH는 'Heaven and Hell'의 약어(略語)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모든 저작은 공용 약어가 있습

heavenanditswondersandhell.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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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 그리고 함께 주신 두 계명 (16:15-20)

 

 

15이스라엘 자손이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서로 이르되 이것이 무엇이냐 하니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어 먹게 하신 양식이라 16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시기를 너희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이것을 거둘지니 곧 너희 사람 수효대로 한 사람에 한 오멜씩 거두되 각 사람이 그의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거둘지니라 하셨느니라 17이스라엘 자손이 그같이 하였더니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 18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더라 19모세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두지 말라 하였으나 20그들이 모세에게 순종하지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 (출16:15-20) And the sons of Israel saw, and they said a man to his brother, What is this [Man hoc]? for they knew not what it was. And Moses said unto them, This is the bread which Jehovah hath given you to eat. This is the word that Jehovah hath commanded, Gather ye of it everyone according to the mouth of his eating, an omer a head, according to the number of your souls, take ye everyone for him who is in his tent. And the sons of Israel did so, and they gathered, collecting for the numerous and the few. And they measured it with the omer, and it made nothing over for the numerous; and for the few there was no lack; they gathered everyone according to his eating. And Moses said unto them, Let no one make a residue of it till the morning. And they heard not unto Moses; and men made a residue of it until the morning, and it bred worms and stank, and Moses was angry with them (Exod. 16:15-20).

 

 

오늘 본문을 좀 더 충분히 이해하기 위해 출16 1절로 14절까지를 먼저 좀 보겠습니다.

 

1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엘림에서 떠나 엘림과 시내 산 사이에 있는 신 광야에 이르니 애굽에서 나온 후 둘째 달 십오일이라 2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3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4그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5여섯째 날에는 그들이 그 거둔 것을 준비할지니 날마다 거두던 것의 갑절이 되리라 6모세와 아론이 온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저녁이 되면 너희가 여호와께서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을 알 것이요 7아침에는 너희가 여호와의 영광을 보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가 자기를 향하여 원망함을 들으셨음이라 우리가 누구이기에 너희가 우리에게 대하여 원망하느냐 8모세가 또 이르되 여호와께서 저녁에는 너희에게 고기를 주어 먹이시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불리시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자기를 향하여 너희가 원망하는 그 말을 들으셨음이라 우리가 누구냐 너희의 원망은 우리를 향하여 함이 아니요 여호와를 향하여 함이로다 9모세가 또 아론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 가까이 나아오라 여호와께서 너희의 원망함을 들으셨느니라 하라 10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매 그들이 광야를 바라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구름 속에 나타나더라 11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2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원망함을 들었노라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해 질 때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부르리니 내가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인 줄 알리라 하라 하시니라 13저녁에는 메추라기가 와서 진에 덮이고 아침에는 이슬이 진 주위에 있더니 14그 이슬이 마른 후에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 같이 가는 것이 있는지라 (출16:1-14)

 

만나’(히브리어: מָן, 그리스어: μάννα)는 15절의 ‘이것이 무엇이냐’를 히브리어로 말한 것입니다. 아침에 처음 보는 그걸 보고 이게 뭐지? 서로 묻던 그 의문문이 그대로 ‘만나’라는 이름이 된 것이지요.

 

만나는 영적 의미, 곧 속뜻으로는 ‘진리의 선’(the good of truth)을 뜻합니다. 그것을 진리의 선이라 하는 것은, 바로 영적 교회의 사람들에게 내려 주신 선(善)이기 때문입니다. 선한 진리라고 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 안에 선이 들어있는 진리라는 의미라면 말입니다. 영적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영적 교회에는 처음에는 사랑이 없습니다.

 

※ 이 교회의 기원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면 창세기 4장 아벨과 가인에까지 이릅니다. 여기서 아벨은 체어리티(charity)를, 가인은 신앙(faith)을 말합니다. 원래 주님은 이 둘이 하나로 결합하기를 원하셨지만, 가인이라는 사람들, 즉 신앙, 신앙하는 사람들이 일어나 신앙에서 체어리티를 분리했는데, 이걸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8절)

 

이렇게 표현하신 것입니다. 우리 같으면 당장 이런 가인을 어떻게 해버려야 할 것 같은데, 그러나 주님은 인류 역사가 결국 가인 쪽으로 흐를 것을 아시고, 다음과 같은 조치를 취하십니다.

 

14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15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14, 15절)

 

그러니까 주님은 이런 가인들일지라도 그 쥐고 있는 신앙, 즉 진리를 통해 결국은 다시 체어리티를 회복, 체어리티와 신앙, 선과 진리가 하나 되게 하시려는 장구한 계획, 그것이 곧 인류의 역사가 되는 그런 계획을 섭리하신 것입니다. //

 

그래서 주님은 먼저 진리를 주시고, 그다음 그 진리를 가지고 사랑을 실천하게끔 하십니다. 그러니까 진리를 가지고 선을 행하도록 만드시는 것이지요. 왜 그렇게 하실까요? 진리를 모르면 뭐가 선이고 뭐가 악인지, 뭐가 참이고 뭐가 거짓인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진리에 따라 살려고 노력할 때, 그때 주님은 선이나 선한 애정을 주시는데, 그것이 바로 주님이 주시는 만나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진리의 선입니다. 진리면 진리고 선이면 선이지, 왜 진리의 선이라고 하냐면 이 선은 진리를 통해 얻는 선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것은 겉으로 보면 진리이지만 그 속을 보면 선이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 선이 담긴 진리인 것이지요. 진리로 말미암는 선이라고도 해도 됩니다. 선은 능력입니다. 선은 곧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진리 안에 이 선이 없으면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 진리, 앉은뱅이 신앙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나를 받기 시작했다는 것은 우리 거듭나는 사람들한테 있어서는 진리의 선을 받는 것이구요, 그러므로 그것은 거듭나는 과정에서 대단히 중요한 변화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진리의 선, 곧 선한 진리가 우리에게 흘러들어올 때 일어나는 삶의 변화는 어떤 것입니까? 제일 먼저 일어나는 변화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있는 악과 거짓을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전에는 대부분 나는 항상 경우가 밝다, 나는 항상 옳다, 나는 참 합리적이다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실상은 정반대인 것이지요. 그런데 이 캄캄한 어둠 속으로 이제 진리의 선, 선한 진리라는 빛이 비침으로 말미암아 그동안 어두워서 안 보이던 것들, 내 안의 모든 악하고 거짓된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깜깜한 데서 밤을 보내며, 아, 참 좋다, 여기는 무슨 호텔 같아 했는데 정작 아침 동이 틀 때 보니 자기가 쓰레기 더미들 가운데 있었던 걸 알게 되는, 그런 것과 같습니다. 두 번째 변화는, 그런 악하고 거짓된 것을 몰아내려는 노력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동안은 악한 생각이 일어날 때 그걸 끊는 게 어려웠는데, 이제는 그걸 끊어낼 수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 진리의 선은 설교나 말씀을 통해 배우는 단순한 지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진리의 선, 선한 진리 안에는 주님이 계세요. 그래서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악을 끊는 것이 이전보다 훨씬 쉬워집니다. 세 번째 일어나는 변화는, 보상을 바라지 않는 선한 기쁨을 알게 됩니다. 이전에 우리는 어땠습니까? 무슨 선한 일을 하든 반드시 돌아오는 게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주님을 사랑해서 하는 게 아니라 뭘 얻어내기 위해서 말이죠. 그런데 이제는 아무 대가 없이 이웃에게 선을 행한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것은 이전에는 몰랐던 행복입니다. 놀라운 변화 아닙니까? 이러한 모든 일이 주님으로부터 만나라는, 즉 진리의 선, 선한 진리를 받기 시작하면서 생기는 변화들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처음에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무엇이지? 했던 것입니다. 주님으로부터 흘러들어오는 선과 그것에 수반되는 은근한, 은은한 기쁨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과 세상만 사랑하는 사람들은 물질적인 것에만 익숙해 있고, 그래서 주님이 주시는 영적인 것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잘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도시에 살면서 빠르고 자극적인 삶에 익숙한 사람들은 대체로 시골의 단순하고 느리게 사는 삶의 기쁨, 소확행을 알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16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시기를 너희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이것을 거둘지니 곧 너희 사람 수효대로 한 사람에 한 오멜 씩 거두되 각 사람이 그의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거둘지니라 하셨느니라

 

주님은 만나를 내려 주시면서 두 가지 지킬 것을 명하십니다. 첫째는, ‘자기 먹을 만큼만 거두되 한 사람 앞에 한 오멜 씩 거두라’입니다. 자기 먹을 만큼만 거두라는 말씀은 각자의 분량에 맞게 선을 받으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한 오멜(omer) 씩 거두라는 말씀은, 오멜은 곡식 같은 걸 측정하는 단위인데, 성경에는 오멜이란 것도 있고, 에바라는 것도 있습니다. 오멜은 에바의 십 분의 일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오멜은 속뜻으로는 충분한 것을 뜻하는데요, 왜냐하면 말씀에서 ‘’, ‘’(10)이란 수는 충분하다는 속뜻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그 배수나 분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에바의 십 분의 일인 한 오멜 역시 충분하다(enough for)라는 속뜻을 갖습니다. 따라서 자기 먹을 만큼만 거두되 한 사람에 한 오멜 씩 거두라는 말씀은 주님은 각자의 능력에 맞게 선을 주시되 충분한 양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 그러니까 저마다 가진 잔의 크기는 다르지만, 그 모든 잔을 주님은 넘치게 채우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각 사람에게 해당하는 분량은 어떤 식으로 정해질까요? 그것은 개개인이 행하는 선의 질과 양에 따라 달라집니다. 예를 들면, 선을 행하더라도 얼마만큼 진리를 따라 행하는가에 따라서 선의 질이 달라집니다. 또 선과 결합한 진리가 얼마나 내적인 진리이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진리에도 외적인 진리가 있고, 내적인 진리가 있습니다. 내적인 진리는 주님과 보다 가까운 진리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행하는 모든 선 가운데 있는 진리가 보다 내적인 진리일수록 선의 질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에 따라 주님은 각 사람이 받을 선의 분량을 정해주십니다.

 

※ 다음은 이와 관련된 천국의 어떤 사실들입니다.

 

한 천국 안의 천사들은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지 않고, 그들의 사랑과 신앙에서 나온 선의 차이에 따라 크고 작은 공동체로 나뉘어 있다. 같은 선을 지닌 천사들이 한 공동체를 이룬다. 천국의 선은 무한히 다양하며, 각 천사마다 선이 다르다.주44 (HH.41)

 

주44. 무한한 다양성이 존재하며, 그 어떤 것도 결코 다른 것과 똑같지 않다 (AC. 7236, 9002). 천국에는 그래서 무한한 다양성이 존재한다 (AC. 684, 690, 3744, 5598, 7236). 천국의 무한한 다양성은 선의 다양성이다 (AC. 3744, 4005, 7236, 7833, 7836, 9002). 이들 다양성은 다양한 진리를 통해 존재하며, 각 천사의 선은 이들로부터 나온다 (AC. 3470, 3804, 4149, 6917, 7236). 천국의 모든 공동체와 어느 한 공동체 내 모든 천사가 서로 구분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AC. 690, 3241, 3519, 3804, 3986, 4067, 4149, 4263, 7236, 7833, 7836).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모두는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을 통해 하나가 된다 (AC. 457, 3986).

 

천국의 천사 공동체들은 그 선이 전체적으로나 부분적으로 차이가 나는 만큼 서로 떨어져 있다. 영계에서 거리는 오직 사람의 내면 상태의 차이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천국에서는 사랑의 상태가 다르면 거리가 생긴다. 많이 다른 사람들은 멀리, 약간 다르면 조금 떨어져 있다. 유사성이 그들을 함께 있게 하는 것이다.주45 (HH.42)

 

주45. 천국 모든 공동체는 그들 생명의 상태 차이, 곧 사랑과 신앙의 상태 차이에 따라 어떤 일정한 위치가 정해진다 (AC. 1274, 3638, 3639). 저세상, 곧 영들의 세계에 있는, 거리, 상황, 장소 및 시공간에 관한 놀라운 것들 (AC. 1273–1277)

 

한 공동체 내 천사들은 모두 서로 간에 위와 같은 방식으로 배열되는데, 보다 완전한 천사들, 즉 선에 있어 뛰어난, 그래서 사랑, 지혜, 지성에 있어 뛰어난 천사들은 가운데 중앙으로, 덜한 천사들은 그 완전함이 덜한 정도에 따라 주변으로 빙 둘러 퍼지게 된다. 이 배열은 마치 중앙의 빛이 주변으로 퍼져 감소하는 것과 같으며, 중앙에 있는 천사들은 가장 밝은 빛 가운데, 주변으로 퍼져 있는 천사들은 점점 더 희미한 빛에 있는 것과 같다. (HH.43) //

 

주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리신 두 번째 명령은, ‘각 사람이 그의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거둘지니라’입니다. 여기서 자기 장막에 있는 자는 자기 가족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선의 공동체(society)를 뜻합니다. ‘선의 공동체’란 무엇일까요? 선의 공동체는 천국에서는 천사들의 사회가 선의 공동체이구요, 지상에서는 교회가 선의 공동체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의 연대가 바로 선의 공동체입니다. 따라서 자기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만나를 거두라는 말씀은, 주님이 주시는 선과 진리를 자기 자신만을 위하여 쓰지 말고, 교회를 위하여 쓰라는 말씀입니다. 선하고 진실한 모든 사람과 서로 나누라는 것이죠. 말로만이 아닌 행동으로 서로 나누라는 것입니다. 나의 선이 주님의 교회에 속한 모든 사람에게 흘러가고, 또 모든 사람의 선이 끊임없이 내게로 흘러오는 그런 관계 속에서 주님의 교회는 점점 천국의 모습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주님은 지금 그걸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 다음은 이와 관련된 글입니다.

 

앞의 두 가름에서, 천국 전체가 한 사람의 모습이고, 각 공동체도 그와 마찬가지라는 것을 밝혔다. 각 천사도 이와 똑같다는 것은 거기 설명한 원리에 따른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다. 천국이 가장 큰 형태의 사람이고, 각 공동체가 작은 형태의 사람이듯이 천사는 가장 작은 형태의 사람인 것이다. 천국 형태처럼 지극히 완벽한 형태는 전체와 부분이 서로 같은 모양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천국이 모든 것을 함께 나누는 곳이라는 데 있다. 천국의 모든 것은 모든 구성원에게 나누어지며, 각 구성원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그 나누어짐에 의해 받기 때문이다. 앞의 해당 가름에서 말했듯이, 천사는 그처럼 받아들이는 그릇이기 때문에, 천국의 가장 작은 형태가 되는 것이다. 사람도 그가 천국을 받아들이는 한, 그릇이며 천국이고 천사이다. (HH.73) //

 

17이스라엘 자손이 그같이 하였더니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 18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더라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이 말씀은 각자의 분량대로, 각자의 그릇대로 주님으로부터 선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의 중심에 계시는 분들은 선을 많이 받을 것이고, 반면에 변두리에 계신 분들은 선을 조금밖에 받지 못할 것입니다.

 

※ 그러나 상관없습니다. 이분들이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여 천국과 연결된 분들이시라면, 아래 천사들처럼 생각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많든 적든 자기가 가진 것으로 만족한다. 왜냐하면 자기에게 필요한 만큼만 주어진다는 것을, 즉 조금 필요한 사람은 조금 받고, 많이 필요한 사람은 많이 받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HH.278)

 

여기 ‘필요한 만큼’이란 주님이 맡기신 어떤 쓰임새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저마다 가진 잔의 크기는 달라도 그 모든 잔을 주님은 넘치게 채우시기 때문에, 저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고백하는 데가 천국입니다. //

 

그러면 누가 교회 중심에 계시고, 누가 변두리에 계실까요? 그것은 오직 주님만이 아시는 일입니다.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진리를 삶으로 실천하는 만큼 우리는 교회의 중심에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발언권이 세고 영향력이 있다고 해서 꼭 교회의 중심에 있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19모세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두지 말라 하였으나

 

주님이 일용할 양식을 주시니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내일 일을 걱정하는 마음은, 자신의 힘으로 선을 행하려는 마음이구요, 자기 자신만을 위해 선을 쌓아 두려는 마음입니다. 만약 주님이 주시는 대로 받고, 그리고 주님이 주시는 것을 모두 이웃과 나누려고 한다면, 우리는 아마 매일 매일을 만족하면서 살 것입니다. 내일 일을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 아래 천사들처럼 말입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의 인도를 받기 원한다. 또한 그들은 무엇이 우리에게 좋은지 우리는 모른다는 것, 오직 모든 것을 살피시고 영원한 것을 섭리하시는 주님만이 아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들은 미래에 대해 불안해하지도 않는다. 미래에 대한 불안을 그들은 내일 염려라 부르고, 그것은 삶에 필요하지도 않은 것을 잃거나, 못 받을까 봐 근심하는 일이라고 정의한다. 그들이 주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없기 때문에, 그리고 그들은 그들이 받는 모든 것의 근원을 주께 돌리기 때문에, 자기 본성으로부터 떨어져 있다. 그들이 자기 본성에서 떨어져 있는 정도만큼 주께서 그들에게 들어가신다. (HH.278) //

 

그런데 그렇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매일 같이 내일 일을 걱정합니다. 내일 일을 걱정하는 마음은 주님을 믿지 않고 자기 자신을 믿는 마음입니다. 자기 자신을 믿는 사람들은 무슨 일이든지 자기 생각대로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일이 뜻대로 되고, 모든 일이 원만하게 이루어지면 자기도 모르게 다른 사람을 아래로 내려다봅니다. 반대로 일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지나치게 절망합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높은 지위에 올라도 오만하지 않구요, 비천한 자리에 내려와 앉더라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그 모든 것이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방편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매일 먹을 만큼만 만나를 거두라 말씀하신 데에는 그런 뜻이 있습니다.

 

20그들이 모세에게 순종하지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의 말씀에 더러는 순종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죠. 그러니까 내일 먹을 게 걱정되어 다 안 먹고 남겨둔 것입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그것은 자신의 힘으로 선을 행하려는 것이구요, 주님의 것을 자기 창고에 쌓아 두려는 마음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진리를 실천하고 선을 행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오늘 본문에는 그 선 안에, 즉 만나에 벌레가 생기고 악취가 났다고 말합니다. 벌레는 주님의 선이 아닌 인간의 선 안에 들어있는 거짓입니다. 그리고 악취가 나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 행하는 선은 결국 불결한 선으로 바뀐다는 것입니다. 천국 선이 아니라 지옥 선으로 바뀐다는 뜻이지요. 그것이 악취가 난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고 화를 냈습니다. 분명히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라고 했는데 아침까지 남겨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화를 내는 것 같지만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리에 등을 돌린 것입니다. 언제나 말씀드리지만 주님은 우리가 아무리 무엇을 잘못하더라도 성을 내시거나 보복하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사랑이시며, 자비 그 자체이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는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잠깐 진리에 등을 돌리는 모습입니다. 진리의 목적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지 않고, 자신의 목적이 이루어지기를 바랐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그들의 그런 모습을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로 표현하신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약 주님이 선을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웃을 사랑할 수도 없고, 선을 행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일 같이 만나를 내려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이렇게 기도하라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주님은 너희에게 만나를 줄 터이니 이 두 가지는 꼭 지키라 하십니다. 그 하나는 먹을 만큼만 거두라는 것입니다. 자기 분량 이상으로 거두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힘으로 선을 행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자아에서 나오는 선은 겉으로 보기에만 선이지, 그 본질에 있어서는 선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자아는 악하고 거짓된 것 외의 다른 어떤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태복음 6장 29절에서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솔로몬의 옷을 짓기까지 얼마나 많은 장인들의 노력과 지혜가 들어갔겠습니까? 그럼에도 그 모든 것이 들에 핀 백합 한 송이만큼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무엇을 섞지 말고 주님 주시는 선 그대로를 가지고 행하라 하시는 데는 그런 이유가 있습니다.

 

주님이 명령하신 다른 하나는, 자기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거두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또 ‘각 사람이 그의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거둘지니라’라고 하시는데요, 이 말씀은 주님이 주시는 선을 자기 자신만을 위하여 쌓아 두지 말고 이웃과 교회를 위해 사용하라는 뜻입니다. 주님이 주신 것들을 자기 곳간에 쌓아 두는 일은 주님을 모르는 이방인이나 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힘을 다해 이 땅을, 이 교회를 주님의 나라로 만들기 위해서 각자의 분량에 맞게 헌신해야 합니다. 그래야 나중에 주님 앞에 가서 받을 상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래 마태복음 6장 28절로 34절의 말씀을 함께 읽으면서 오늘 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28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29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30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31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마6:28-34)

 

아멘

 

원본

2016-04-17(D1)

청주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5-05-11(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05-11(D1)-주일예배(2597, 출16,15-20), ‘만나’, 그리고 함께 주신 두 계명.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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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Contents)

‘목차’ Contents Editor’s Preface ‘저자 서문’ (Author’s Preface, 1) HH.1, '저자 서문(序文)'(Author’s Preface)(HH.1)※ HH는 'Heaven and Hell'의 약어(略語)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모든 저작은 공용 약어가 있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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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부모를 공경하라’의 속뜻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출20:12) Honor thy father and thy mother, that thy days may be prolonged upon the land which Jehovah thy God giveth thee. (Exod. 20:12)

 

 

앞에서 말씀드린 십계명의 네 가지 계명에 이어서 나머지 계명의 의미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십계명의 각 계명은 별개의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내적으로는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는 자아에 대한 사랑을 버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아를 사랑하면 안 되는 이유는, 그렇게 되면 속 사람을 통해 들어오는 천국의 흐름이 막히고, 지옥의 흐름이 열리게 되며, 그렇게 해서 지옥으로부터 악하고 거짓된 것들이 흘러들어오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 십계명을 주신 것은, 한마디로 자아를 사랑하지 말고,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이기도 합니다.

 

※ 이 설교는 이순철 목사님의 청주 새 교회 및 서울 새 교회 시절 설교하신 ‘출애굽기 속뜻 강해’ 중 한 편입니다. 원래는 13절, 14절까지 포함된 본문이지만, 5월이 가정의 달이며, 어버이날, 어린이날이 있는 달이어서 12절만 따로 다루겠습니다.

 

※ 다음은 십계명 관련, 먼저 좀 알고 있어야 할 내용입니다.

 

...부모 공경에 관한 계명이 그러한 것들을 의미한다는 사실이 좀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겉 글자의 뜻하고는 너무 거리감이 있어 보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십계명(the commandments of the Decalogue)은 세상과 천국, 양쪽 사람들의 삶을 다스리는 계명임을 알아야 합니다. 겉 글자, 즉 겉뜻으로는 세상 사람들을, 그리고 영적, 즉 속뜻으로는 천국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계명이라는 것, 그리고 그 결과 겉과 속, 즉 세상 살 동안 천국에도 속한 사람들을 위한, 그러니까 교리적 진리를 따라 선한 삶을 사는 사람들을 위한 계명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십계명이 천국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는 사실은 말씀에 나오는 모든 것의 속뜻으로부터,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 곧 주님이 친히 하신 말씀들은 사람들뿐 아니라 세상을 위해서도, 그리고 또 천사들, 아니 온 천국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로부터도 아주 명백한데요, 이는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신적 진리는 천국을 경유, 관통, 사람한테로 흘러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친히 시내 산에서 이 십계명을 말씀하신 경우가 이에 해당합니다. (천국의 비밀 8899) ...That such things are signified by the commandment about honoring parents, may seem strange, because they are remote from the sense of the letter. But be it known that the commandments of the Decalogue are rules of life both for those who are in the world and for those who are in heaven—the sense of the letter or the external sense being for those who are in the world, and the spiritual or internal sense for those who are in heaven—and consequently both senses, external as well as internal, are for those who while they are in the world are also in heaven, that is, for those who are in the good of life according to the truths of doctrine. That the commandments of the Decalogue are also for those who are in heaven, is plain from the internal sense of all things in the Word, and clearly from the fact that the things which Jehovah God (that is, the Lord) Himself speaks, are not only for men, or for the world; but are also for angels, nay, for the whole heaven, because the Divine truth which proceeds from the Lord flows through heaven and passes through down unto man. This is the case with these ten commandments, which the Lord Himself spoke from Mount Sinai. (AC.8899) //

 

※ 주님이 우리에게 한 부모 밑에 태어나게 하시고, 부모와 자녀, 즉 가족이라는 혈연으로 묶어주시는 이유를 살피기 위해, 이 지상 혈연관계가 사후 천국에까지 이어지는 여부에 대해서 본 설교 후반에 따로 조금 다루겠습니다. 그 이유는, 그래야 천국을 염두에 둔 올바른 자녀 사랑, 그리고 부모 사랑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12절, 다섯 번째 계명입니다.

 

※ 스베덴보리는 히브리 및 슈미트(Schmidt)의 라틴 성경(1696) 넘버링을 따르고 있으며, 그래서 이 계명을 네 번째 계명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다음은 그 관련 내용입니다.

 

...그런 까닭에 이 계명은 순서상 네 번째이며, 거룩함에 있어 이어지는 계명들을 능가합니다. 여호와, 즉 주님을 경배함에 관한 계명은 첫 번째와 두 번째인데, 이는 주님은 가장 거룩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안식일(the Sabbath)에 관한 계명입니다. 이 계명은 가장 높은 뜻으로는 주님의 신성 자체와 신적 인성 간 연합(the union of the Divine Itself and the Divine Human in the Lord)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다음으로 부모 공경의 계명이 이어집니다. 이 계명은 주님을 사랑함과 그에 따른, 주님으로 말미암은 선과 진리를 사랑함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천국의 비밀 8899:2) ...therefore this commandment is the fourth in order, and surpasses in holiness those which follow. The commandment concerning the worship of Jehovah, that is, the Lord, is first and second, because the most holy one. Next comes the commandment concerning the Sabbath, because by this in the supreme sense is signified the union of the Divine Itself and the Divine Human in the Lord. After this follows the commandment concerning honoring parents, because by this is signified the love of the Lord and the consequent love of good and truth which are from the Lord. (AC.8899:2) //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여기서 부모는 육신의 부모로만 생각하기가 쉬운데 그건 겉뜻이고요, 속뜻은,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선과 진리를 의미합니다. 말씀의 문자적인 의미와 내적 의미가 이렇게 다른 이유는, 세상의 모든 자연적인 것들은 천국에 있는 것들과 내적으로 상응(相應, correspondence)하기 때문입니다.

 

※ 즉 그래서 말씀 또한 모두 상응으로만 기록된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라고 하면 세상에서는 육신의 부모라고 생각하지만, 천국의 천사들은 선과 진리로 이해합니다. 즉 아버지는 선을 뜻하고, 어머니는 진리를 뜻하지요. 선과 진리를 부모라고 하는 이유는, 사람은 선과 진리를 통해 새롭게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원한 부모는 선과 진리이며, 궁극적으로는 선과 진리 그 자체인 주님이십니다. 세상 부모는 세상에 있는 동안만 우리를 돌보는 부모이지만, 주님은 영원한 부모이십니다.

 

※ 그러니까 세상 부모는 부모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계신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효가 고스란히 주님을 향한 효가 되는 것이지요. 이 사실을 알든 모르든 말입니다. 한 가지, 그러나 자녀가 부모를 따르고 의뢰할 때까지만 세상 부모는 부모이고, 더 이상 의뢰하지 않고, 제 뜻대로 살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하늘의 하나님이 그의 부모가 된다고 합니다.

 

아래는 이와 관련된, 지난날 제가 써놓은 글입니다.

 

...자녀가 장성하여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된 후에는 그는 전처럼 아버지(father)를 아버지로 인정하면 안 되는데, 그 이유, 즉 왜 아버지는 자녀가 자랄 동안만 아버지인가 하는 이유는, 그때는 그가 주님을 대신하기 때문이며, 그때는 아직 자녀가 어려 아버지가 돌봐주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자녀가 장성하여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되어 제법 스스로 생각할 줄도 알고, 스스로 잘 헤쳐 나갈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때는 이미 주님이 그의 아버지(Father)이심이 틀림없는데요, 이 아버지 노릇을 그동안은 육신의 아버지가 해왔었죠... (천국의 비밀 6492) ...after a son becomes his own master he ought not to acknowledge his father as father, as before; for the reason why the father is to be acknowledged during the bringing up of the son, is that the father is then in the Lord’s stead, nor does a son know at that time what he ought to do except by the direction of his father. But when a son becomes his own master, and competent to think for himself, and seems to himself to be able to direct himself from himself, then the Lord must be his Father, whose vice regent his natural father had been... (AC.6492)

 

이 글은 스베덴보리의 창세기 주석 중, 입류(influx)와 사람의 영과 육 사이 교류를 다룬, ‘About Influx and The Intercourse of The Soul and The Body’라는 글에 나오는 내용인데, 어느 날 꿈에 자기에게 나타나신 아버지와 나눈 대화의 주 내용입니다.

 

사람이 장성하면 더 이상 육신의 아버지가 아버지가 아니며, 그때는 주님이 그의 아버지시라는 이 글을 읽고 했던 몇 가지 생각을 적어봅니다.

 

이 글에 의하면, 그 이유는 먼저, 육의 아버지는 우리의 어린 시절, 어디까지나 주님의 대역이기 때문이며, 그러므로 이때 아버지 노릇을 하는 우리 육의 아버지들은 끊임없이 실제 아버지이신 하늘의 주님께 안테나를 세우고, 그 주파수를 고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 당연한 귀결, 곧 그때 주님으로부터 나와 내게 흘러들어오는 입류를 통해, 내게 맡기신 이 아이를 내 뜻, 내 생각, 또는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인도해서는 안 되고, 늘 주님 뜻대로 인도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세 번째는, 장성한 자녀도 이제는 하늘의 주님께 직접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지상의 혈연, 그리고 서류상, 행정적으로는 여전히 부모-자식 간이지만, 그러나 삶의 모든 영역에서 자기의 실제 아버지는 주님이심을 시인, 아버지를 사랑하는 가운데 끝없이 아버지께 여쭙고, 아버지의 인도하심 가운데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상은 위 원본 내용 중, ‘세상의 부모는 세상에 있는 동안만 우리를 돌보는 부모’라는 부분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본 것입니다. //

 

그렇기 때문에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은 내적으로는 선과 진리를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선과 진리를 그 자체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자기 자신을 내세우거나 타인을 지배하기 위해, 아니면 물질적 이득을 보기 위해 선과 진리를 사랑한다면 그것은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선과 진리를 사랑하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선과 진리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고, 아는 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보통 행하지는 않고 말로만 사랑한다고 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것은 반드시 원하고, 원하는 것은 반드시 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정말로 선과 진리를 사랑한다면 반드시 행함이 뒤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할 때 이성 가운데 있던 선과 진리가 의지 가운데 심어지고, 그렇게 해서 사람의 생명이 됩니다. 사람의 생명은 이성이 아니라 의지이기 때문입니다. 즉 그 사람이 무엇을 생각하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의도하고 행하느냐가 바로 그 사람을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주님은 네 부모를 공경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여호와가 주신 땅이란 주님의 나라를 의미합니다. 즉 하늘의 천국과 땅에 있는 교회가 주님의 나라입니다. 그런데 부모를 공경하면 그곳에서 생명이 길다고 하십니다. 생명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폐의 호흡이나, 심장의 박동을 생명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육체의 생명이지 영원한 생명은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은 사람의 의지, 또는 의지 속에 있는 사랑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그가 무엇을 의도하고 사랑하느냐에 따라 생명의 질이 변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생명은 의지와 사랑입니다. 그렇게 볼 때,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라는 말씀은, 선과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세상에서뿐만 아니라 사후에 천국에서도 그 사랑이 영원히 커진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란 선과 진리에 대한 사랑이며,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우리가 교회 생활을 하는 것은 선과 진리에 대한 사랑을 키워가기 위해서입니다. 다른 많은 세상 사람처럼 세속적 성공이나, 자녀들의 성공을 위해 교회 생활하는 것이 아닙니다. 유한한 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영원한 복을 위해 우리는 이 세상에서 교회 생활을 하는 것이지요. 영원한 복이란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과 진리를 우리의 생명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진리를 처음 받아들일 때는 머리로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아직 의지에 심어지지는 않은 상태입니다. 그러다가 한 번 두 번 진리를 행할 때, 그것은 의지에 심어지고 생명이 됩니다. 진리는 그런 과정을 통해 우리의 생명이 되는데 그것은 사후에도 영원히 계속됩니다. 그리고 진리가 생명이 될 때의 기쁨은 세상 어느 것에서 얻는 기쁨보다 비교할 수 없는 내적인 기쁨입니다. 주님은 그 기쁨을 주시기 위해 우리를 이 세상에 내보내셨습니다. 그러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는 말씀은, 선과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세상에 살 때에는 교회 안에서, 그리고 사후에는 천국에서 그 사랑이 영원히 커진다는 뜻입니다.

 

※ 다음은 시작 때 말씀드린, ‘이 지상 혈연관계가 사후 천국에까지 이어지는 여부’ 관련, 전에 제가 정리해 둔 글입니다.

 

다음은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53장, ‘사람의 사후 셋째 상태’ 512번 글입니다.

 

죽은 후의 사람, 즉 영의 셋째 상태는 교육받는 단계다. 이 상태는 천국에 들어가 천사가 될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지옥에 갈 사람들에게는 이 단계가 없다. 그들을 가르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의 둘째 상태는 셋째 상태를 겸한 것이며, 그들이 자기 자신의 사랑, 즉 그 사랑이 있는 지옥 사회로 완전히 돌아서면 완료된다. 이렇게 완료되면, 그들은 그 사랑으로 의도하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사랑이 지옥적이므로, 그들은 오직 악한 것만 의도하고, 그릇된 것만 생각한다. 그런 생각과 의도를 그들은 즐긴다. 그것이 그들의 사랑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그들은 이전에 자기의 사랑을 위해 수단으로 이용했던 모든 선하고 참된 것을 거부한다. The third state of man after death, that is, of his spirit, is a state of instruction. This state is for those who enter heaven and become angels. It is not for those who enter hell, because such are incapable of being taught, and therefore their second state is also their third, ending in this, that they are wholly turned to their own love, thus to that infernal society which is in a like love. When this has been done they will and think from that love; and as that love is infernal they will nothing but what is evil and think nothing but what is false; and in such thinking and willing they find their delights, because these belong to their love; and in consequence of this they reject everything good and true which they had previously adopted as serviceable to their love as means.

 

선한 영들은 이와 반대로 둘째 상태에서 셋째 상태로 인도된다. 이 상태는 교육을 통해 천국에 갈 준비가 이루어지는 상태다. 선과 진리를 알아야만, 즉 가르침을 통해서만 천국에 합당하게 준비될 수 있다. 사람은 가르침을 받아야만 영적 선과 진리가 무엇인지, 그에 반대되는 악과 거짓은 무엇인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세상에서 무엇이 올바름과 정직함인지, 즉 무엇이 사회적, 도덕적 선과 진리인지 배울 수 있다. 세상에는 무엇이 올바른 것인가를 가르치는 사회적 법이 있고, 또 대인관계에서 도덕적 법에 따라 사는 것을 배울 수 있으며, 이 모든 것이 정직하고 올바른 것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적인 선과 진리에 대한 가르침은 세상에서 나오지 않고 천국에서 오는 것이다. 그것은 말씀에서, 그리고 말씀에서 도출된 교회의 가르침에서 배울 수 있다. 그러나 사람 마음에 속한 내면이 천국에 있지 않으면, 영적 선과 진리는 사람의 삶 속으로 유입될 수 없다. 그리고 사람은 신성을 인정하고, 말씀에 그렇게 하라고 했기 때문에 올바르고 정직하게 행할 때, 그 마음이 천국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나 세상을 목적으로 해서가 아니라 신성을 위해서 올바르고 정직하게 사는 것이다. Good spirits, on the other hand, are led from the second state into the third, which is the state of their preparation for heaven by means of instruction. For one can be prepared for heaven only by means of knowledges of good and truth, that is, only by means of instruction, since one can know what spiritual good and truth are, and what evil and falsity are, which are their opposites, only by being taught. One can learn in the world what civil and moral good and truth are, which are called justice and honesty, because there are civil laws in the world that teach what is just, and there is association with others whereby man learns to live in accordance with moral laws, all of which have relation to what is honest and right. But spiritual good and truth are learned from heaven, not from the world. They can be learned from the Word and from the doctrine of the church that is drawn from the Word; and yet unless man in respect to his interiors which belong to his mind is in heaven, spiritual good and truth cannot flow into his life; and man is in heaven when he both acknowledges the Divine and acts justly and honestly for the reason that he ought so to act because it is commanded in the Word. This is living justly and honestly for the sake of the Divine, and not for the sake of self and the world, as ends.

 

그러나 아무도 가르침을 받기 전에는 그렇게 행할 수 없다. 하나님이 계시고, 천국과 지옥이 있으며, 사후 생활이 있다는 것, 하나님을 가장 사랑해야 하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해야 한다는 것, 말씀은 신성하기 때문에 말씀 안의 가르침을 믿어야 한다는 것 등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이런 사항들을 알고 인정하지 못하면, 사람은 영적으로 생각할 수 없다. 그리고 영적인 생각이 전혀 없다면, 영적인 것을 의도할 수도 없는 것이다. 사람은 알지 못하는 것을 생각할 수 없고,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의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이 위와 같은 것을 의도할 때, 천국이, 즉 천국을 거쳐서 주께서 그의 삶 속에 들어오신다. 주께서는 사람의 의지 속으로 들어오시고, 의지를 통해서 생각 속으로 들어오시며, 그 둘을 통해 삶 속으로 들어오신다. 사람의 삶 전체가 여기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상의 내용으로, 영적 선과 진리는 세상으로부터가 아니라 천국으로부터 배우는 것이며, 사람은 가르침을 통해서만 천국에 합당하게 준비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 But no one can so act until he has been taught, for example, that there is a God, that there is a heaven and a hell, that there is a life after death, that God ought to be loved supremely, and the neighbor as oneself, and that what is taught in the Word ought to be believed because the Word is Divine. Without a knowledge and acknowledgment of these things man is unable to think spiritually; and if he has no thought about them he does not will them; for what a man does not know he cannot think, and what he does not think he cannot will. So it is when man wills these things that heaven flows into his life, that is, the Lord through heaven, for the Lord flows into the will and through the will into the thought, and through both into the life, and the whole life of man is from these. All this makes clear that spiritual good and truth are learned not from the world but from heaven, and that one can be prepared for heaven only by means of instruction.

 

나아가서 주님은 사람의 삶 속으로 유입하시는 정도만큼 그를 가르치신다. 그 정도만큼 주님은 사람의 의지를 진리를 알고자 하는 사랑으로 불붙이시고, 진리를 앎에 따라 그의 사고를 밝히 깨우치시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루어지는 만큼 사람의 내면은 열리고, 천국이 그 안에 심어진다. 이에 그치지 않고, 신성하고 천국적인 것이 사람의 도덕적 삶에 속하는 정직한 행위와, 사회적 삶에 속하는 올바른 행위 안으로 유입되어 그것을 영적인 것으로 변화시킨다. 그때 사람은 그런 행위를 신으로 말미암아, 즉 신성을 목적으로 행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도덕적, 사회적 삶에서 그런 목적으로 행하는 정직하고 올바른 행위는 영적 삶의 필수적인 결과이며, 결과의 모든 요소는 그 결과를 낸 원인에서 파생된 것이다. 원인의 성격이 결과의 성격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Moreover, so far as the Lord flows into the life of anyone he instructs him, for so far he kindles the will with the love of knowing truths and enlightens the thought to know them; and so far as this is done the interiors of man are opened and heaven is implanted in them; and furthermore, what is Divine and heavenly flows into the honest things pertaining to moral life and into the just things pertaining to civil life in man, and makes them spiritual, since man then does these things from the Divine, which is doing them for the sake of the Divine. For the things honest and just pertaining to moral and civil life which a man does from that source are the essential effects of spiritual life; and the effect derives its all from the effecting cause, since such as the cause is such is the effect. (천국과 지옥 512, 김은경 역)

 

좀 길었지요? 네, 좀 길었지만... 너무나도 중요한 내용이라, 가령, 주님은 어떤 조건과 상황 가운데서 우리 안에 들어오시는지, 우리의 내면은 어떻게 열리는 건지, 우리의 지상 생활이 어떻게 해서 영적으로 변화되는지 등등... 그대로 인용했습니다. 번역도 참 깔끔하게 잘 되었고요. 주님의 빛을 구하시며, 충분히 ‘정독’하시면, 점차 밝아지며, 환하게 이해되실 줄 믿습니다.

 

이 외에도 이 교육장의 전체 구조 및 교육생들의 구성, 그리고 생전에 비기독교인이었던 영들의 경우, 이곳에서 어떻게 주님을 영접하게 되는지 등은, 그리고 교육이 다 끝나면, 주님이 직접 한 사람 한 사람, 앞으로 그가 영원히 있게 될 해당 공동체로 인도하시는 등등은, 글이 너무 길어져 나중에 따로 다루겠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나중에 사후 다 알게 될 사항들을 굳이 이렇게 미리 다루는 이유는, 이런 내용은 닥쳐서 깨닫기에는, 그리고 겪어서 알기에는 너무 늦어 돌이킬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즉 지상 생활을 하는 동안 혈연과 혈육으로 지내게 하신 그 참뜻을 몰라 이 관계가 천년만년 갈 줄 알고, 내 핏줄, 내 혈육, 우리 집과 가문 등에 올인하는 삶을 사는 것은, 내면, 곧 속 사람의 형성에 올인해도 모자랄 시간을 외면, 곧 겉 사람의 삶으로 죄다 낭비를 하는 것과도 같아 사후,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참 안타까운 상황에 놓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영이란 실상은 그의 애정, 곧 그의 중심 사랑(ruling love, 그 사람의 모든 언행을 지배하는 사랑)이 사람의 모양을 띤 것이며, 이것은 오직 삶을 통해서만 형성됩니다. 삶의 대부분을 겉과 속이 다르게 살아놓고는 믿음으로, 은혜로 구원받아 천국에 들어가는 그런 건 없습니다. 구원, 곧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비기독교인들이 보기에 공정하지 않은 무슨 허락이나 자비, 은혜를 받아 들어가는 게 아닌, 오직 이런 만인 앞에 공정하고도 공의로운 방법과 시스템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다음은 다섯 번째인, ‘⑤ 자신의 영원한 공동체에 합류’인데요, 이 내용은 위 책, 40장, ‘천국 안의 결혼’ 383번 글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아래는 윗글에 대한 저의 결론입니다.

 

비슷한 사람들끼리, 곧 선이 비슷한, 거의 같은 사람들끼리는 한 공동체를 이룹니다. 물론, 한 공동체 내에서도 모든 구성원의 선이 다 다르며, 그것은 중심에서 동심원 퍼져나가듯 그렇게 다릅니다. 즉 중심에는 그 공동체의 가장 뚜렷한 선을 가진 사람이, 바깥으로 갈수록 좀 덜한 사람이 배열됩니다. 그러나 한 공동체의 범위를 벗어나지는 않을 정도로만 다릅니다. 마치 아들을 보면 어느 정도 그 얼굴에 아버지의 얼굴이 반영된 것처럼 말입니다. 한 공동체 안에서는 비록 처음 보는 초면일지라도 마치 오랜 고향 사람 만나듯 친숙하고 반갑습니다. 그러나 천국일지라도 공동체가 다르면, 즉 선이 다르면 마치 외국인을 만난 듯 그저 대면대면합니다.

 

네, 이렇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제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지상의 혈육 관계는 휴면 상태로 들어가고, 전혀 새로운 존재로 새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만일, 지금의 남편 혹은 아내를 천국에서도 계속 부부로 만나 지내고 싶으면, 그리고 지금의 자녀들과 또 그리 하고 싶으면, 방법은 하나, 서로 선이 같으면 됩니다. 즉 그 중심 사랑이 같으면, 참된 결혼 생활을 하면 됩니다. 아내가 원하는 걸 남편도 원하고, 남편이 말하는 걸 아내는 따르고... 하여 둘이 한 몸 되면 됩니다!

 

끝으로 ‘⑥ 우리가 지상에서 혈연관계로 살아가게 하신 이유’입니다. 이미 여러 번 말씀드렸습니다. ‘속 사람, 곧 내면을 준비하게 하시려고’입니다.

 

땅 위 혈연관계는 천국의 관점에서 보면, 인류의 모종밭입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인류로 채워지며 구성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천사들은 땅 위 혈연관계, 그중에서도 특히, 결혼을 가장 신성시합니다. 천국 자체가 ‘결혼’입니다. 천국 결혼과 지상 결혼의 차이는 천국 결혼은 그 결과 선과 진리가 생겨나지만, 지상 결혼은 그 결과, 아들, 딸들이 나온다는 점입니다. 이런 상응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손주, 우리의 자녀들을 보며, ‘이 아이의 선과 진리는 어떤 면에서 나랑 살짝 다를까?’, 영적 시야로 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땅 위 혈연관계를 통해 부지런히 우리는 자신의 속 사람, 영의 내면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것은 자녀, 부모, 손주 등 혈육, 핏줄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계신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육의 눈으로 이들을 볼 때, 영의 눈이 함께 켜져서 주님의 모습 또한 겹쳐 보여야 하겠습니다. 자녀를 볼 땐, 부부, 곧 주님의 선과 진리의 결합으로 새로운 선과 진리가 생겨난 것으로 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부모를 뵐 땐, 자신의 뿌리이신 주님의 선과 진리를 역시 볼 수 있어야 하겠고 말입니다.

 

이래야 우리의 지상 혈육, 핏줄 사랑이 주께 복을 받으며, 안전할 것입니다. 이걸 놓치면, 우리는 그저 겉 사람의 일로, 육체의 일로 끝나게 될 것입니다...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동안 십계명의 의미를 배우면서 겉뜻과 속뜻의 의미가 많이 다르다는 사실에 놀라셨을 것입니다. 신앙인들에게 십계명은 자연적 법이면서 영적인 법입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 법이면서 천국 법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겉뜻과 속뜻이 모두 중요합니다.

 

※ 즉 겉뜻도 지키지 않으면서, 속뜻, 속뜻 하는 것은 마치 기초 없이 집을 짓겠다 하는 것과 같고, 반대로 속뜻을 모르면서 겉뜻, 겉뜻 하는 것은 기초는 있는데 정작 집이 올라가지 않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속뜻을 이해하고 사랑해야 겉뜻도 온전히 지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먼저 내면에서 천국적 결혼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즉 신앙과 체어리티의 삶에 있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십계명의 속뜻뿐 아니라 겉뜻까지도 온전히 지킬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체어리티의 삶을 살지 않는 사람은 진정으로 부모를 공경할 수 없고, 또한 순결한 결혼 생활을 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십계명의 외적인 뜻은 이렇게 내적인 뜻과 서로 통합니다. 새 교회에서는 이러한 것을 영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들의 상응(相應)이라고 가르칩니다. 이러한 것들을 잘 이해하셔서 모든 교우께서는 십계명의 내적, 외적 은혜 가운데 충만한 삶을 이루어 나가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요14:15)

 

아멘

 

원본

2017-05-21(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5-05-04(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05-04(D1)-주일예배(2596, 출20,12), '네 부모를 공경하라'의 속뜻.pdf
0.51MB
성찬.pdf
0.14MB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목차 (Contents)

 

Contents

Contents Editor’s Preface ‘저자 서문’ (Author’s Preface, 1) HH.1, '저자 서문(序文)'(Author’s Preface)(HH.1)※ HH는 'Heaven and Hell'의 약어(略語)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모든 저작은 공용 약어가 있습니다; 본문

heavenanditswondersandhell.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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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이성(理性, the rational)이 거듭나야 하는 이유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And he said, Returning I will return unto thee about this time of life; and behold Sarah thy wife shall have a son. And Sarah heard at the door of the tent, and it was behind him. (창18:10)

 

 

인간의 합리적 진리는 신성한 것들을 이해하지 못하는데 그 이유는, 신성한 것들은 인간의 진리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 밖에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합리적 진리는 겉 사람 안의 기억 지식과 소통하며, 그러므로 그 상태에서 자신보다 높은 것을 바라보면 그만큼 그것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천국의 비밀 2196:2, 이순철 역) Human rational truth does not apprehend Divine things, because these are above the sphere of its understanding, for this truth communicates with the memory–knowledges which are in the natural man, and in so far as it looks from these at the things which are above itself, so far it does not acknowledge them. (AC.2196:2)

 

※ 위는 오늘 본문 중 ‘그 뒤’(And it was behind him)에 관한 풀이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사람들에게 인생의 목표가 뭐냐고 물으면 대부분의 사람은 돈 많이 벌거나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이라고 답합니다. 돈이나 지위를 귀하게 여기는 이유는, 그것을 통해 모든 억압과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으며, 그러므로 자유와 평화, 그리고 안정된 미래를 얻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돈이나 지위 같은 것으로는 진정한 자유와 평화, 그리고 안정된 미래를 얻을 수 없습니다. 당장의 상황 수습, 그리고 당면한 필요들은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겠지만 말입니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여러모로 자유를 얻기 위해 노력을 많이 했고, 나름대로 성과도 거뒀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가 궁핍했던 196, 70년대보다 더 행복하다고 믿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물질적으로는 풍요롭게 됐을지 모르지만, 빈부의 격차나 계층 간의 차별로 인한 억압과 불화는 더 커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와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은 무엇일까요? 오늘은 그것에 대해 알아보려고 합니다.

 

※ 이 설교는 지난 2021년 10월 설교이지만 2025년 4월 지금도 별반 달라진 게 없어 그대로 인용합니다.

 

※ 아래는 소유에 대한, 그리고 삶에 대한 천사들의 태도를 엿볼 수 있는, 제가 참 좋아하는 글입니다.

 

그들은 많든 적든 자기가 가진 것으로 만족한다. 왜냐하면 자기에게 필요한 만큼만 주어진다는 것을, 즉 조금 필요한 사람은 조금 받고, 많이 필요한 사람은 많이 받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무엇이 우리에게 좋은지 우리는 모른다는 것, 오직 모든 것을 살피시고 영원한 것을 섭리하시는 주님만이 아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김은경 역) They live contented with their own, whether it is little or much, because they know that they receive just as much as is good for them— those receiving little for whom a little is useful, and those receiving much for whom much is useful; also they do not themselves know what is good for them, the Lord alone knowing this, who looks in all things that he provides to what is eternal. (HH,278)

 

이는 ‘천국과 지옥’ 31장, ‘천국 천사들의 순진한 상태’(The State of Innocence of the Angels of Heaven, 276-283)에 나오는 글입니다. //

 

※ 그리고 다음은 같은 책 39장, ‘천국의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The Rich and the Poor in Heaven, 357-365)에 나오는 글들입니다. 이 장을 통해 저는 많은 편견을 교정할 수 있었습니다. 내용이 좀 길지만 숙려 끝에 그대로 싣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 여러 가지 의견이 있다. 일부에서는 가난한 사람은 들어가고 부자는 못 들어간다고 하고, 또 일부는 부자나 가난한 자나 다 들어간다고 하고, 일부는 부자는 그들의 재산을 포기하고 가난해져야만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이 모든 주장이 전부 말씀을 근거로 한 신념이다. 그러나 천국에 가는데 부자와 가난한 사람 사이에 차별을 두는 것은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결과다. 말씀은 그 속뜻으로 보면 영적이고, 글자의 뜻으로는 자연적이다. 따라서 말씀을 영적 뜻으로 보지 않고, 오직 그 글자의 뜻으로만 이해하면 여러 가지 면에서 오류가 생긴다. 예를 들어, 부자와 가난한 사람에 대해서가 특히 그렇다. 부자가 천국 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을 지나는 것처럼 어렵고, 가난한 사람은 가난하기 때문에 천국에 쉽게 간다고 하는 생각이 그것이다. 이는 말씀에 아래의 구절이 있기 때문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마5:3)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눅6:20)

 

그러나 말씀의 영적 뜻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천국은 가난하건 부자이건 간에 신앙과 사랑의 생활을 한 모든 사람을 위한 곳임을 안다. 그렇다면 말씀에 나오는 부자와 가난한 자는 어떤 사람들을 말하는가를 이제 설명하겠다. 천사들과 많은 대화를 하고, 그들과 함께 지낸 결과, 내가 확실히 알게 된 것은 부자도 가난한 사람과 똑같이 쉽게 천국에 간다는 것이며, 사람은 재산 때문에 천국에 못 가거나 가난 때문에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부자나 가난한 사람 모두 천국에 가고, 부자들 중 많은 사람은 가난한 사람보다 더 큰 영광과 행복을 누린다. (HH.357)

 

먼저 얘기해 둘 것은, 사람은 술책이나 사기가 아니라면 기회가 닿는 대로 부를 얻고 쌓아도 되며, 너무 빠져들지 않는 한 고급 음식을 즐겨도 되고, 조건에 따라 호화로운 저택에 살며 조건이 같은 사람들과 교제할 수 있고, 오락을 즐기고 세상사를 얘기해도 된다는 사실이다. 또 경건한 사람처럼 슬프고 애통하는 얼굴로 고개를 떨구고 다닐 필요가 없으며, 즐겁고 활기에 넘칠 수 있다. 또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가난한 사람에게 자기 것을 주지 않아도 된다. 한마디로 사람이 세상 사람과 겉으로 보기에 똑같이 살아도, 내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생각을 올바로 가지며, 이웃에게 신실하고 공정하게 대하기만 하면, 천국 가는데 전혀 지장이 없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어떠한가는 그의 애정과 생각이 어떠한가, 즉 그의 사랑과 신앙이 어떠한가가 결정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모든 외적 행동은 그 두 가지 것에서 생명을 얻는 까닭이다. 사람은 의지로 말미암아 행동하고, 사고로 말미암아 말하므로 행동은 곧 의지이고, 말은 곧 생각이다. 따라서 말씀에 사람은 그의 행위대로 심판받고, 일한 대로 상을 받는다고 하신 것은, 사람이 그의 행위의 근원인, 즉 행위 안에 들어 있는 생각과 애정에 따라 심판받는다는 뜻이다. 행위는 생각과 애정을 제외하면 아무 것도 아니고, 그 두 가지에 정확히 일치하기 때문이다.233 따라서 어떤 결과를 이루는 것은 사람의 외면이 아니라 오직 그 외면의 근원인 내면이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예를 들면, 사람이 정직하게 행하고 남을 속이지 않는 이유가 단지 법이 두렵고 평판을 잃을까 봐, 그래서 명예와 이득을 잃을까 봐 두려워서라면, 그 두려움에 의해 제지당하지 않는다면 기회 있을 때마다 남을 속일 것이다. 비록 그의 행동이 겉으로는 정직해 보이더라도 그의 사고와 의지는 속이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게 그는 정직하지 않고 속이고자 하기 때문에, 그런 사람 안에는 지옥이 있다. 반면 그것이 하나님과 이웃을 거스르는 일이기 때문에, 남을 속이는 행위를 하지 않고 정직하게 행하는 사람은 기회가 주어져도 남을 속이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생각과 의지는 그의 양심이며, 그 사람 안에는 천국이 있다. 이 두 사람의 행위는 외적 형태는 같아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전적으로 다른 것이다.

 

주233. 사람은 그의 행위와 한 일에 따라 심판받고 상 받을 것이라는 내용이 말씀에 자주 나온다 (AC.3934). ‘행위와 일’이라 하면, 그 내적 형태의 행위와 일을 의미하지, 외적 형태의 걸 의미하는 게 아니다. 악인에 의한 외적 형태의 선한 일도 겉보기에는 똑같기 때문인데, 내적, 외적 형태가 같은 행위와 일은 오직 선인에 의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AC.3934, 6073). 모든 활동처럼 일도 사람의 내면으로부터 존재와 결과, 그리고 퀄러티를 가지는데, 이는 사람의 사고와 의지에 관한 것이다. 일은 이들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면이 어떠하면, 그 일도 그러하다 (AC.3934, 8911, 10331). 즉, 그 내면은 사랑과 신앙에 관한, 그런 것이다 (AC.3934, 6073, 10331, 10332). 그렇게 일에는 사랑과 신앙이 들어있으며, 실제로도 일이라는 것은 사랑과 신앙이다 (AC.10331). 그러므로 행위와 한 일에 따라 심판하고 상을 준다는 것은 사랑과 신앙에 따라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AC.3147, 3934, 6073, 8911, 10331, 10332). 일이라는 것이 자신과 세상을 주목하는 한, 그 일은 선하지 않다. 그러나 주님과 이웃을 주목하는 한, 그 일은 선하다 (AC.3147). (HH.358)

 

사람이 신을 인정하고, 이웃을 선의로 대하기만 한다면, 겉으로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살아도 되고, 부자가 될 수도 있으며, 형편과 역할에 따라 풍성한 식탁과 우아한 집과 좋은 옷을 갖추고 살 수도 있고, 즐거움과 만족을 누려도 되며, 직무와 사업을 위해, 그리고 정신생활과 육신 생활을 위해 세상일에 종사할 수 있다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분명한 결론을 낳는다. 즉 천국에 가는 것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어렵지 않다는 사실이다. 유일한 어려움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저항하고, 그 두 사랑이 지배적이 되지 않도록 하는 데 있다. 그 두 사랑이 모든 악의 근원이기 때문이다.234 다음의 주의 말씀은 이것이 생각처럼 그렇게 어렵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11:29, 30)

 

주의 멍에는 쉽고 주의 짐은 가볍다고 하신 이유는 사람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비롯되는 악에 저항하는 정도만큼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의 인도를 따르는 것이며, 그렇게 되면 주께서 그 사람 안에 있는 악을 물리치고 제거하시기 때문이다.

 

주234. 모든 악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나온다 (AC.1307, 1308, 1321, 1594, 1691, 3413, 7255, 7376, 7488, 7490, 8318, 9335, 9348, 10038, 10742). 모든 악이란 다른 사람을 향한 경멸, 원한, 증오, 복수, 잔인, 속임이다 (AC.6667, 7370–7374, 9348, 10038, 10742). 그런 사랑들 가운데 인간은 태어나며, 그래서 인간의 유전한 악이 그 안에 있는 것이다 (AC.694, 4317, 5660). (HH.359) //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인간의 지식을 믿는 사람과 하나님의 진리를 믿는 사람입니다. 전자의 사람을 자연적인 사람(the natural)이라 하고, 후자의 사람을 영적인 사람(the spiritual)이라 합니다. 자연적인 사람들에게 있어 지식을 배우는 목적은 돈과 명예를 얻기 위한 것입니다. 이를테면, 좋은 학교에 진학, 출세하고 돈 많이 벌기 위해 지식을 추구하는 것이지요.

 

※ 그렇다고 영적인 사람은 돈, 명예, 좋은 학교 진학, 출세 및 부자가 되는 걸 죄악시 해야 한다는 건 아닙니다. 앞 인용글들에서도 읽으셨겠지만, 단지 이것이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지상에서 주님의 진리를 추구함에 있어 이런 것들이 어디까지나 수단일 뿐 목적이 아닌 사람들이 영적인 사람들이고, 반대로 그저 목적이기만 한 사람들이 자연적인 사람들입니다. 참고로, 천국의 부(富)는 주님의 선과 진리입니다. 말씀에 나오는 부자는 주님의 진리를 많이 소유한 사람들, 주로 유대인을 가리킵니다.

 

어떤 의미에서든 지식, 즉 세상 지식에 대한 애정을 말씀에서는 이스마엘을 낳은 애굽 여인 하갈로 표현합니다. 영적 의미, 곧 속뜻으로 애굽은 세상 지식을 뜻하고, 여자는 진리에 대한 애정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애굽 여인 하갈은 세상 지식에 대한 애정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갈에게서 태어나는 이스마엘은 누굴까요? 거듭나는 사람들에게 생기는 첫 번째 합리적 능력을 의미합니다.

 

※ 창세기 본문에서는 주님의 첫 번째 합리적 능력(The Lord’s first rational)을 말합니다.

 

합리적 능력이란 지식이나 진리를 바탕으로 사물을 이해하고 판단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 말이 좀 어려우시면 추론하는 능력이나 이성(理性)으로 이해하셔도 되겠습니다.

 

이스마엘로 표현되는 첫 번째 합리적 능력(the first rational)이 열릴 때, 사람들은 그동안 세상 지식을 가지고 물질만을 좇았던 자신을 반성하고, 비로소 영적인 걸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이 태어나기까지의 기간은 한 사람의 인생에 있어서 결코 간단치 않은 시간입니다. 많은 역경과 좌절이 있고, 그때마다 주님이 주시는 깨달음이 있습니다. 그런 깨달음을 통해 우리는 물질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지요.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을 낳은 아브라함은 이번에는 본처 사라로부터 두 번째 아들 이삭을 얻습니다. 사라가 낳은 아들 이삭은 거듭나는 사람에게 생기는 두 번째 합리적 능력을 뜻합니다.

 

※ 역시 창세기 본문에서는 주님의 두 번째 합리적 능력, 곧 주님의 신성한 합리적 능력(the Lord’s Divine rational)을 말합니다.

 

사라는 지식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애정(affection)을 뜻합니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이삭이라는 합리적 능력이 어떤 성격인지 짐작할 수 있는데요, 즉 첫 번째 합리적 능력인 이스마엘이 인간의 지식을 바탕으로 한 인간의 합리적 능력이라면, 두 번째 합리적 능력인 이삭은 하나님의 진리를 바탕으로 한 거룩한 합리적 능력인 것입니다. 바로 그 거룩한 합리적 능력을 통해 우리는 진정한 진리인 말씀의 내적 의미, 곧 아르카나(arcana)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 후자는 너무 높고 깊어 전자로는 쳐다볼 수도, 이해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주님이 그 태생적 인성(human)을 신성(Divine Human)으로 갈아입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주님에 관한 모든 것, 곧 모든 신령한 진리, 천국에 속한 진리들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고, 그 결과 우리는 구원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마리아의 몸을 빌려 태어나신 후, 부단한 영적 전투를 통해 마침내 십자가에서 이기심으로써 영광의 몸, 곧 신성으로 갈아입으셔야만 했던 이유입니다.

 

이삭을 얻은 후에 아브라함은 결국 하갈과 이스마엘을 집에서 내보냅니다.

 

8아이가 자라매 젖을 떼고 이삭이 젖을 떼는 날에 아브라함이 큰 잔치를 베풀었더라 9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아들이 이삭을 놀리는지라 10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므로 11아브라함이 그의 아들로 말미암아 그 일이 매우 근심이 되었더니 12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 13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신지라 14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가져다가 하갈의 어깨에 메워 주고 그 아이를 데리고 가게 하니 하갈이 나가서 브엘세바 광야에서 방황하더니 (창21:8-14)

 

문자적으로만 보면, 참 냉정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만, 그러나 이 말씀의 영적 의미는, 거듭나는 동안 첫 번째 합리적 능력과의 결별을 의미합니다. 그 이유는, 인간의 합리적 능력을 그대로 두면,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합리적 능력을 대적하거나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나는 과정에서 누구나 때가 되면, 첫 번째 합리적 능력을 버려야 합니다.

 

※ 즉, 세상 지식과 세상 경험을 가지고 주님의 일, 주님의 신비를 살피려는 태도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 말씀하신, 낙타가 바늘귀 통과하는 비유인데요, 대부분의 신학교 교수, 그리고 유튜브에 나와 대담하는 많은 신학자 류(類)의 경우, 일단 해당 주제에 관한 많은 견해, 입장들을 좍 나열한 후, 끝에 자기 생각을 보탭니다. 연역이든 귀납이든 뭐, 하나의 방법론이니 그런가 보다 할 수 있지만, 문제는 주님이 어떤 분이신가 보다는 ‘자, 나는 이렇게 이 주제에 대한 열린 마음의 소유자입니다. 저는 극단적이지 않습니다’라는 사실에 더 초점을 맞춘듯하다는, 그러니까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성경은 하나님에 대해 무엇이라 말하고 있는지보다는 어떻게 하면 사람들의 공감을 더 많이 끌어낼 수 있을까에만 초점을 맞추는듯하다는 것입니다. ‘제가 경험한 주님은 이런 분입니다. 제게 나타나신 신은 이런 신이셨습니다’하는 신학자는 거의 보질 못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이 두 번째 합리적 능력이 생기기 직전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바로 앞 절인 9절 말씀,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대답하되 장막에 있나이다 (창18:9)

 

에 의하면, 여기서 말을 하는 사람들, 즉 ‘그들’은 한 분 주님을 이루는 세 가지 본질을 나타내는데요, 이를 최대한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중심으로 설명합니다.

 

이 세 본질은, 사실은 신성 자체(Divine itself)이시며, 신적 인성(Divine Human)이시고, 신성의 활동(Holy proceeding)이신 한 분 여호와 하나님을 뜻하는 것입니다. 신성 자체라는 말은 존재 자체이시며, 동시에 사랑과 선 그 자체이신 여호와를 뜻합니다. 그리고 신적 인성은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여호와 하나님, 즉 예수 그리스도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신적 인성이신 예수는 본질적으로는 존재 자체이신 신성의 드러나심이며, 동시에 무한한 사랑에서 비롯한 진리이신 분입니다. 신성의 활동은 신적 인성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나오는 신성의 능력, 즉 성령을 뜻합니다. 성령을 다르게 표현하면 진리를 통해 발현되는 선의 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성의 능력이 곧 성령이시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시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9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21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요20:19-22)

 

그러므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는 ‘그들’은 사실은 셋이 아닌 한 분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은 세상에 오신 주님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네게로 돌아오겠다는 말씀은 주님 안에서 여호와 하나님이신 신성과 예수 그리스도이신 인성이 결합하는 것을 뜻합니다. 주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신성과 인성의 결합을 이루시는 것이고, 그렇게 해서 사람이신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야 인간들이 하나님과 결합할 수 있고, 그래야 신적 진리들을 이해하여 구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이 되시는 과정은 혹독한 시험의 연속이었습니다.

 

※ 복음서에 보면, ‘주님이 시험받으시는 장면은 몇 없는데 왜 혹독한 시험의 연속이라 하는가?’ 하실 텐데요, 사실은 주님의 어린 시절 및 청소년, 청년기 모든 과정이 창세기 12장 이하에 속뜻으로 다 기술되어 있어 그러는 것이고요, 그 시험이 혹독하다고 하는 건, 사람이 받는 시험은 그가 사랑하는 대상에 비례하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는 기껏해야 자기 사랑, 혹은 가족을 포함한 주위 몇 사람이 전부이지만, 주님은 인류 전체를 사랑하셨어요. 그래서 지옥도 우리한테는 몇 명의 악령이면 충분하지만, 주님께는 지옥 전체가 달려들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시험을 ‘혹독한 시험의 연속’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 시험을 이길 때마다 주님의 겉 사람인 인성은 속 사람인 신성과 하나가 되어 갔습니다. 신성과 인성이 하나가 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는 주님의 겉 사람을 이루는 모든 생각과 의지들이 신성한 진리와 선 그 자체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의 몸 안에 신성이 머무는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 그 자체가 신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시나요? 그래서 주님의 영화는 인간의 거듭남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인간의 거듭남은 주님을 닮는 것이지만, 주님의 영화는 주님이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셨습니다.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말씀은 주님의 영화의 과정에서 두 번째 합리적 능력이 곧 열릴 것이라는 뜻입니다. 물론 이때는 주님에게 이스마엘이라고 하는 첫 번째 합리적 능력이 열려 있는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이 첫 번째 합리적 능력은 육신의 어머니인 마리아의 잔재가 섞인 순수하지 않은 인간적 합리적 능력입니다. 반면, 이제 이 두 번째 합리적 능력이 열린다는 건 신성에서 비롯한 순수하고 거룩한 합리적 능력이 열리는 걸 의미합니다. 그 거룩한 합리적 능력이 열릴 때, 그것을 통해 주님의 인성은 빠르게 신성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속 사람과 겉 사람을 연결하여 주는 중간자의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이 합리적 능력이라는 영적 지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직 두 번째 합리적 능력이 생기기 전이라는 것은 주님의 인성이 아직은 신성과 결합하지 않았다는 것이며, 그러므로 거룩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말씀에는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라고 합니다.

 

사라는 주님의 합리적 사람 안에 있는 진리, 즉 합리적 진리(rational truth)를 뜻합니다. 그리고 사라의 남편 아브라함은 주님을 뜻하지만, 여기서는 특별히 합리적 진리와 결합한 합리적 선(rational good)을 뜻합니다.

 

※ 여기 이런 표현들, 즉 ‘주님의 합리적 사람 안에 있는 진리, 즉 합리적 진리’ 같은... 이런 표현들이 좀 어려우시지요? 네, 저도 이런 게 많이 마음에 걸립니다. 거의 다들 이런 설교는 어렵고 지루하실 것 같아서지요. 이 말씀의 속뜻을 풀어드리는 설교는 참 귀하고 좋은데, 딱 한 가지, 우리한테는 어렵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준비하는 저도 결코 쉽지가 않아요. 아마 제 역량의 한계이지 싶습니다. 이동원 목사님이나 강문호 목사님 같은 이름난 설교가들이시라면 아마 이런 설교도 참 재미나게 잘 전하실 것 같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창12 이후 등장인물들은 주님을 표상합니다. 다들 자기 인생을 살다 갔지만, 사실은 자기도 모르게 주님 역할을 하다 간 것이지요. 그중엔 선인도 있고, 악인도 있어요. 그리고 많은 전쟁도 있지요. 이런 것이 모두 주님과 주님의 내면에서 있었던 영적 전투를 표상하는 것입니다. 우리처럼 인성(human)을 입고 태어나신 주님은 여전히 그 속 사람은 신성(Divine), 즉 금수저 중에서도 금수저이셨으면서도 결코 쉬운 길을 안 가시고, 대신 철저히, 아주 철저히 우리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영적 전투를 다 치루신 후,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피날레인 십자가에서도 완벽하게 이기신 것이고요. 인간으로서 치룰 수 있는 모든 시험을 남김없이 통과하셨으므로, 그때 주님은 그 인성을 벗고 신성으로 옷 입으셨으며, 그 몸 또한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몸의 부활은 오직 주님께만 가능한 것이었다고!

 

우리는 오직 영으로만 부활합니다. 바울의 서신서 중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편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오지요.

 

16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살전4:16-17)

 

이런 구절들 때문에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몸의 부활을 믿고 사모하는데요, 그러나 사실은 몸의 부활은 주님한테서 한번 일어나는 걸로 끝입니다. 만일 우리한테도 주님처럼 저런 몸의 부활이 일어나면 오히려 큰일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임종 후 사흘이 지나 영계에서 눈을 뜨는데요, 그게 곧 우리의 부활이며, 그때 우리한테는 영의 몸이 주어져 눈뜰 때 이미 자신이 영체를 입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천국이든 지옥이든 오직 영, 곧 속 사람으로만 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지상 물질은 일체 반입 금지이며, 우리는 신이 아니므로 우리 몸이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는 건 있을 수 없습니다.

 

사도들의 서신서들은 성경에는 포함되어 있지만, 주의 말씀은 아닙니다. 그 안에 속뜻이 없기 때문입니다. 속뜻 없는 글들까지 성경에 포함시킨 건, 오늘의 성경 66권이 있기까지 구약은 구약대로, 그리고 신약 역시 역사적으로 수차례 있었던 카톨릭 공의회에서 결정된 것인데, 그때 참여한 추기경들이 아직 말씀의 속뜻에 대해 그 내면이 열리지 않았고, 단지 자기들이 정한 몇 가지 기준에 부합하는 여부만 살폈기 때문입니다. 속뜻이 있는 성경은 천사들이 읽을 수 있지만, 없는 성경은 천사들은 읽을 수 없습니다. 겉뜻만 있기 때문이지요. 신구약 66권 중 구약은 29권, 신약은 5권에만 속뜻이 있으며, 그러므로 이들만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죽은 자의 부활에 관한 저 데살로니가 교회에게 보낸 편지 내용은 그냥 바울의 사견일 뿐입니다.

 

천국을 다녀왔다는 많은 사람이 유튜브나 인터넷에 있는데 특이한 건, 그들이 진술하는 천국이 조금씩 다 달라요. 이상하지요? 제 생각에 이것은 천국의 그 모든 외관은 보는 자의 역량에 맞추어지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니까 보는 사람이 원하는 대로, 그리고 그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형태로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한테는 사람의 부활에 대해 평소 저런 선입견이 있었던 것 같아요. 혹시 바울이 저 진술을 영적 체험을 하고 나서 한 거라면 틀림없습니다. 바울처럼 자기주장이 강한 사람은 천국도 자기가 보고픈 대로만 보기 때문입니다. 정말 천국을 있는 그대로 보기 원한다면, 그리고 알기 원한다면 어린아이 같아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모든 걸 허락하시거든요. 스베덴보리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의 서신서에서 어떤 걸 인용하는 건 안전하지 않은 일입니다. 될 수 있으면 피하시길 권하며, 꼭 인용하셔야 한다면, 신약에서는 복음서들과 계시록에서만, 구약에서는 창, 출, 레, 민, 신, 수, 삿, 삼상, 삼하, 왕상, 왕하, 시, 사, 렘, 애, 겔, 단, 호, 욜, 암, 옵, 욘, 미, 나, 합, 습, 학, 슥, 말에서만 하시기를 권합니다. 아래 내용은 바울에 관한 스베덴보리의 기록입니다. 참고하세요.

 

...복음을 전하기 전에 그가 올무에 빠져있던 자아애가 그 후에도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 이후의 대부분의 시기도 그런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그는 자아애와 자기의 기질에 휘둘려, 격동의 장(場)에 있기를 원하였다. 천국에서 가장 큰 자가 되고, 이스라엘 족을 심판하려는 것을 목적으로 그는 모든 것을 했다. 그가 그 후에도 그러한 상태에 머물렀다는 것은 매우 많은 경험으로 분명하다. 왜냐하면 나는 다른 이보다 더 많이 그와 대화했기 때문이다. 실로 그는 그러한 자였기 때문에, 그곳 다른 사도들은 그를 벗 삼으려 하지 않고, 자기들의 일원으로도 여기지 않고 있다... 그가 신약성서의 서간을 쓴 것은 그의 내면도 그와 같다는 증거는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경건치 못한 자도 좋은 설교를 하고, 서간을 쓸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 전해진 것처럼, 말하고 쓰는 것과 그 사람이 어떠한지는 별개의 문제다. 게다가 그는 그의 서간 중에 주님께서 가르치신 말씀의 한마디도 말하고 있지 않으며, 주님의 비유의 말씀 중 한 가지도 인용하고 있지 않다. 이렇게 그는 주님의 생애나 그 말씀으로부터 아무것도 받지 않았다...

 

...바울의 사도서간이 속뜻이 없다는 것은 영계에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의 편지는 교회에 속한 사람들이, 속뜻이 담긴 주님의 말씀에 악을 행하지 못하도록 교회 안에 허락되어 있다. 만약 사람이 악한 생활을 하면서도 거룩한 말씀을 믿는다면, 그 사람은 천국에 악을 행하는 것이다. 이러므로 바울의 편지가 허락되어 있으나, 바울 자신에게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비유의 말씀이나 주님께서 가르치신 교리 중 하나라도 그것을 들어 설명하거나 밝히는 것이 허락되지 않은 것이다. 바울은 모든 것을 주님으로부터가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부터 취했다. 교회는 분명 주님의 말씀을 설명하고는 있으나 바울의 서간을 수단으로 함으로 교회 도처에서 사랑의 선을 떠난 신앙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주님은 오직 인애의 선이 모든 것이 되도록 하는 길로만 가르치셨다...  //

 

사람의 마음을 이루는 생각(understanding)과 의지(will)는 본질적으로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good)과 진리(truth)이거나 지옥에서 오는 악(evil)과 거짓(falsity)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듭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등차(degree)가 다른 수많은 선과 진리들이 있습니다. 속 사람(internal man)의 선과 진리가 있고, 겉 사람(external man)의 선과 진리가 있으며,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 합리적 사람(rational man)을 이루는 선과 진리가 있습니다. 그 합리적 선과 합리적 진리가 바로 아브라함과 사라로 표상되는 선과 진리입니다.

 

그런데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곧 아브라함 뒤에서 들었다고 합니다. 사라가 아브라함 뒤에 있다는 것은 주님의 합리적 진리가 합리적 선과 아직 결합하지 못하고 분리된 상태를 의미하는데요, 이처럼 주님의 겉 사람 안에서 합리적 진리가 온전한 상태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그렇게 해서 거룩함이 떨어지는 이유는, 이스마엘이라고 하는, 인간의 합리적 능력(human rational) 때문입니다. ‘천국의 비밀’ 2196:2항은 인간의 합리적 능력이 신성한 진리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인간의 합리적 진리는 신성한 것들을 이해하지 못하는데 그 이유는 신성한 것들은 인간의 진리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 밖에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합리적 진리는 겉 사람 안의 기억의 지식과 소통하며 그러므로 그 상태에서 자신보다 높이 있는 것을 바라보면 그것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 같은 글 4항 이하에서는 인간적 합리적 능력이 신성한 진리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을 몇 가지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첫째, 인간적 합리적 능력은 겉으로 나타나는 외관(appearance)만 보고 사람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선을 행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사람에게서는 어떤 선도 나오지 않고 악만 나올 뿐이다.

 

둘째, 인간적 합리적 능력은 사람이 선을 행함으로써 스스로 구원받을 공로를 얻는다라고 말하지만, 그러나 사람에게는 구원에 관한 어떤 공로(merit)도 없고 오직 주님에게만 공로가 있다.

 

셋째, 인간적 합리적 능력은 어떤 사람도 자기 자신보다 이웃을 사랑할 수는 없고, 모든 사랑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시작한다고 생각하지만, 천국의 사랑 안에는 자아에 대한 사랑은 조금도 없다.

 

주님의 안에도 아직 인성이셨을 때는 이스마엘로 표상되는 이런 순수하지 않은 진리들이 있었습니다. 그것들이 사라로 표상되는 합리적 진리가 흘러들어올 때,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그러므로 온전히 받아들이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첫 번째 합리적 능력이 자기보다 높은 차원의 합리적 능력을 방해하고 심지어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아래 말씀처럼 말입니다.

 

8아이가 자라매 젖을 떼고 이삭이 젖을 떼는 날에 아브라함이 큰 잔치를 베풀었더라 9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아들이 이삭을 놀리는지라 10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므로 (창21:8-10)

 

그렇기 때문에 거듭나는 과정에 있는 사람은, 때가 되면 인간적인 합리적 능력을 버리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거룩한 합리적 능력을 새롭게 입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는 여러 가지 종류의 억압과 불화 부조리가 있고, 그로 인한 고통들이 있습니다. 만약 그것들을 물질이나 인간의 지식으로 해결하려고 한다면 구원은 영원히 없을 것입니다. 거듭나는 사람들에게 물질은 또 다른 억압을 낳고, 인간의 지식은 또 다른 굴레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언젠가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물질이나 인간의 지식이 삶의 목적이 될 때, 그것은 결국 불의한 것이 됩니다. 그러나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를 위한 도구가 된다면 그것은 우리의 친구가 됩니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모든 억압과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자유와 평화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세상을 살며 습득한 모든 세상 지식과 경험 또한 그렇습니다. 그동안은 이것들이 우리의 주인이었다면, 이제는 새롭게 주님이 우리의 주인 되시고, 이것들은 주님을 섬기는 종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의 삶이 복되고 안전합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6:33)

 

아멘

 

원본

2021-10-03(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5-04-27(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04-27(D1)-주일예배(2595, 창18,10), '우리의 이성(理性, the rational)이 거듭나야 하는 이유'.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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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aven_and_hell, 581.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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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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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1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2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보고 3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하더라 4이로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5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6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7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 8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9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에게 알리니 10(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그들과 함께 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알리니라) 11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 12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부려 들여다보니 세마포만 보이는지라 그 된 일을 놀랍게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 (눅24:1-12)

 

 

사람의 생명에 속한 모든 것은 내적인 것에서 외적인 것으로 차례로 흘러들어온다. 외적인 것은 호감이 느껴지는 기억의 지식과 가장 바깥쪽의 것인 감각에 속한 것인데, 감각에 속한 것이란,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 맡고, 만짐으로써 세상과 소통하는 것이다. 외적인 것에 내적인 것들이 머무는 까닭은 내적인 것의 흐름이 거기서 끝나기 때문이다. 영적 의미로 사람이 걸치는 피복이나 옷으로 나타내어지는 것은 바로 이 외적인 것을 말한다. (천국의 비밀 9216:2, 이순철 역) It is the same with all things that belong to man’s very life, as with those which relate to his understanding, and those which relate to his will. These also follow in order from interior to exterior things. Exterior things are memory-knowledges with their pleasant feelings; and outermost things are those of the senses, which communicate with the world by the sight, the hearing, the taste, the smell, and the touch. Upon these the interior things rest, for in these they terminate. These are the things which are signified in the spiritual sense by the “covering” or “garment wherein he may sleep.” (AC.9216:2, 출22:26, ‘그가 무엇을 입고 자겠느냐’의 풀이 중)

 

 

※ 이 원고 중 ‘’ 표시는 원고에 없는, 제가 더한 보충 설명입니다. 이 설명은 한 단락일 경우는 뒤에 아무 마감 표시가 없지만, 두 단락이 넘어가면 ‘//’로 마감합니다. 비록 원고일지라도 상당 부분 우리 교회 실정에 맞게 좀 다듬었습니다. 원고 사용에 관한 원 저자의 사전 허락을 받았습니다.

 

※ 오늘은 기독교의 부활절입니다. 주님 오신 성탄절, 그리고 가을 추수감사절과 함께 중요한 절기이지요. 그래서 ‘부활’에 관한 지난 설교 한 편을 다시 기억하고자 합니다.

 

 

주님은 왜 세상에 오셔서 고난을 받고 죽었다 다시 사셨을까요? 그와 관련해 스베덴보리 저,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9216번 글 2항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의 생명에 속한 모든 것은 내적인 것에서 외적인 것으로 차례로 흘러들어온다... 외적인 것에 내적인 것들이 머무는 까닭은 내적인 것의 흐름이 거기서 끝나기 때문이다.

 

이 말은 여러 가지로 이해할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가장 내적 존재인 주님은 가장 외적 존재인 인간에게로 오셔서 영원히 그와 함께 살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섭리입니다. 영원 전부터 계신 무한하신 주님이 당신의 피조물인 유한한 인간과 영원히 함께 살기를 원하신다는 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님은 당신의 생명을 내어주실 정도로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지극히 높은 천국으로부터 지극히 낮은 땅으로 내려오셔서 모진 고난을 이기시고, 신성하고 완전한 진리가 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진리를 통해서만 인간은 주님을 바르게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최근 ‘유월절’에 관한 속뜻 공부를 하면서 새롭게 알게 된 놀라운 사실들이 있는데 오늘 여기서 그걸 자세히 다룰 수는 없어 중요한 몇 문장에 대한 번역으로 대신합니다.

 

1. ‘영적인 사람들’(the spiritual)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지적인 면(the intellectual part)에서만 거듭날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고, 의지적인 면(the will part)에서는 아니다. 그래서 그들의 지적인 면에 주님은 새로운 의지를 심어주시는데, 이 의지는 그들의 교회와 관련되는 신앙의 교리적인 것들을 따르는 의지다. (AC.6854)

 

※ 즉 영적인 사람들의 특징 중 하나는 이들의 신앙과 그에 따른 교리가 다양하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진리라고 믿는 것에서 교리를 추출하고, 그걸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인데요, 하지만 주님은 저들의 다양성을 인정, 거기에 맞춰 어떤 새로운 의지를 주신다는 겁니다.

 

2. 이들, 곧 이런 영적인 사람들은 오직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심으로만 구원을 받았다. 그 이유는, 천국을 통과하는 신성(the Divine passing through heaven), 이 신성은 주님이 오시기 전 신적 인성(the Divine human before the Lord’s coming)이었는데, 이 신성은 그들에게 도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 교회의 교리적인 것들 때문이었는데, 그것들은 대부분 진리가 아니었고, 그 결과 그 의지에서 나오는 선은 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AC.6427)

 

3. 그들은 오직 주님이 오셔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었고, 그래서 그전엔 천국에 올라갈 수 없었으며, 그래서 그들은 그동안 ‘낮은 땅’(the lower earth)이라는 곳에 보내어져 돌봄 받고 있었다. 이곳은 말씀에서 ‘구덩이’(pits)라고 하는 곳이다. 이 땅은 거짓이 가득한 지옥들로 둘러싸여 있었고, 그 거짓으로 인해 그들은 심하게 감염되었지만, 그러나 주님이 그들을 보호하셨다.

 

4. 그러나 주님이 세상에 오셔서, 스스로 인성(the human)을 신성(Divine)으로 만드신 후, 이 ‘구덩이’에 있던 사람들을 구원, 천국으로 올려보내셨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 영적 천국, 즉 이층천을 만드셨는데, 이것이 주님이 더 낮은 지역으로 내려오셔서 갇힌 자들을 구원하신다는,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출3:8)라는 말씀의 속뜻이다.

 

5. ‘영적인 사람들’(the spiritual)은 그 신앙의 진리와 선에 있어 흐릿, 모호하다. (AC.2708, 2715, 2718, 2831, 2849, 2935, 2937, 3241, 3833, 6289)

 

6. 그들의 흐릿함, 모호함(obscurity)은 주님의 신적 인성에 의해 조명, 그러니까 밝혀진다. (AC.2716, 4402)

 

7. 그들은 신앙의 진리와 선에 있어 흐릿하고 모호하기 때문에 지옥의 공격을 많이 받지만, 주님은 그들을 끊임없이 보호하신다. (AC.6419)

 

8. 영적인 사람들은 의지적인 면으로는 거듭날 수 없고, 단지 지적인 면으로만이지만, 주님에 의해 거기에 새 의지가 형성된다. (AC.863, 875, 895, 927, 928, 1023, 1043, 1044, 2256, 4328, 4493, 5113)

 

9. 영적인 사람들은 주님이 세상에 오심으로 구원을 받았다. (AC.2833, 2834, 3969)

 

그러니까 영원하신 창조주 주님은 단지 이 세대뿐 아니라 홍수 이후 주님 오시기 전 인류의 구원에 대해서도 늘 마음을 기울이고 계셨던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그것이 더 주(主, 메인)였고, 주님 후 세대인 우리는 그저 그 혜택을 받고 있었을 뿐이구나 싶습니다. 이것이 ‘유월절’, 곧 주님이 성육신하여 세상에 오신 주된 이유입니다.

 

내용이 좀 어리둥절하지요? 네, 저도 좀 그렇습니다. 그만큼 우리가 아는 진리는 사실은 겨우 요만큼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담는 그릇인데, 지금은 이 그릇의 크기가 겨우 요 정도이기 때문이지요. 비유하자면, 발전, 송전, 배전으로 구성된 전기 이야기인데요, 역시 처음 댐이나 발전소에서 생성된 몇십만 볼트의 전기가 가정집에 맞는 볼트가 되기까지 낮추고 또 낮춰 220볼트가 되듯 주님도 그렇게 진리의 근원이신 주님을 우리 역량에 맞춰 허락하시는 것으로 이해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그러니까 기록된 성경만 신앙과 삶의 유일한 기준으로 삼겠다는, 즉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라는 태도는, 물론 중세 때 카톨릭의 극심한 타락으로 루터, 멜랑히톤, 쯔빙글리, 칼빈 등이 일어나 이를 바로잡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었어서 그 배경을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지만, 이 또한 지나쳐 주님으로부터 오는 또 다른 형태의 계시는 모두 차단하는 우를 범하는, 그러니까 구더기 무섭다고 장 담그는 걸 포기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는 영계, 즉 천국에 대해 무지했기 때문인데요, 주님을 사랑하되 순진하게 그냥 뭘 몰라서였다면 몰라도 아니라면, 너무 이런 태도에 함몰되는 것은 그건 무슨 신념도 고백도 아닌, 그저 주님을 모독하는 게 될 수 있으니 조심하셔야 합니다. //

 

 

오늘 본문 1절은 완전하고 신성한 진리로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 만나는 사람들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습니다.

 

1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새벽은 영적으로는 주님과 주님의 나라가 임하는 때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부활하신 주님이 완전한 진리로 인간 앞에 모습을 드러내시는 때이며, 동시에 그 진리를 가지고 낡고 부패한 교회를 심판, 새로운 교회를 여시는 때입니다. 그때가 새벽입니다.

 

※ 여자들이 이렇게 안식일이 끝나자마자 새벽같이 무덤으로 찾아간 이유는, 주님 운명하신 첫날, 주님을 장사할 때, 바로 코앞이 안식일의 시작이라 부랴부랴 서두르느라 미처 주님 시신에 향품 바를 새도 없었기 때문이고, 또 관습적으로 장례 때 죽은 시신에 향품 바르는 일은 오직 여자들의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여자들이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으로 갔다고 했습니다. 여자들은, 진리를 사랑하여 참된 진리이신 주님을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심판 때 구원받을 사람들이며, 주님이 세우시는 새 교회에 참여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여자들은 부활하신, 그래서 살아 계신 주님이 아니라 주님의 시신을 만나러 갑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있는 진리가 죽은 자의 시신처럼 아직은 생명 없는 진리라는 반증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시신은 죽은 진리, 즉 생명 없는, 말씀의 지식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처음 진리를 받아들일 때의 진리는 생명 없는 진리입니다. 그 이유는 처음에는 진리를 믿기만 할 뿐, 아직 행동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자들이 향품을 가지고 주님의 시신에 바르는 것은 죽은 것 같은 진리에 생명을 불어넣는 최초의 노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향품은 내적 진리를 획득하기 전, 신앙인들이 소유하는 자연적인 진리, 이를테면 십계명의 문자적인 가르침 같은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2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보고 3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하더라

 

여자들이 무덤에 갔을 때, 무덤을 막았던 돌이 옮겨져 있었고, 그 안에는 시신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무덤을 막은 돌은, 신앙인들의 내면에서 진리가 살아나는 것을 방해하는, 여러 가지 자아의 거짓을 뜻합니다. 예를 들면, 진리를 안다는 자부심이나 진리에 대한 잘못된 추론, 또는 그밖에 이기적인 악과 그것에서 비롯된 거짓들입니다. 우리 안에 그런 것들이 있는 동안에는 진리는 무덤 밖으로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님이 이끄시는 대로 처음에는 자연적 진리로, 그리고 다음에는 내적 진리로 말씀을 이해하고 지키려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주님에 의해 진리를 방해하던 거짓들이 물러갑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자아의 거짓을 물리칠 수 없고, 심지어 어떤 게 거짓인지도 잘 모릅니다. 거짓들은 마치 칡넝쿨이 나무를 감아 옴짝달싹 못 하게 하는 것처럼 진리가 자라는 걸 가로막습니다. 주님만이 그것들을 잘라내 치워주실 수 있습니다. 그때 죽었던 진리가 살아납니다. 바로 그런 상태가 무덤을 막았던 돌이 옮겨지는 것이고, 주님이 무덤에서 살아나시는 것입니다.

 

무덤을 막았던 돌이 옮겨진 걸 보고 들어갔는데, 정작 있어야 할 주님의 시신이 보이지 않자, 여자들은 어쩔 줄을 몰라 합니다. 그 모습, 그 상황을 4절로 6절에선 이렇게 전합니다.

 

4이로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5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6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한글 성경에는 여자들이 근심했다고 하지만, 영어 성경에는 perplex, 즉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일종의 공황 상태에 빠졌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부활하셨는데 왜 여인들은 기뻐하는 대신 공황 상태에 빠졌을까요? 첫째는, 신앙인의 내면에서 진리가 살아나려면 자아에 속한 게 죽어야 하는데, 그때 모든 걸 잃은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진리가 살아났다 해도 처음 한동안은 진리가 나를 주장한다는 걸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 앞에 바로 나타나시지 않은 것과 같은 일일 것입니다. 한마디로, 내면에서 진리가 살아날 때, 신앙인들은 역설적으로 어디에도 기댈 진리가 없는 것 같은 상실감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인들이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것입니다.

 

※ 제가 그랬습니다. 저는 소위 모태신앙이라는 사람으로, 유아세례라는 것을 받은, 정말 이 나이 되도록 평생 교회 밖 세상에 있어 본 적이 없는, 모두가 익히 알고 있는 평범한 기독교인입니다만, 그러나 지난 2017년 여름, 처음으로 스베덴보리를 접하여 이 새로운 계시를 받아들이던 초창기 땐 정말이지 얼마나 두려웠는지 모릅니다. 지난 세월 저를 떠받치고 있던 모든 신앙과 종교적 신념이 한꺼번에 떠나가는 듯했기 때문입니다. 그건 마치 고3 때 어머니를 갑자기 교통사고로 잃었던 트라우마를 훨씬 웃도는 일이었지요.

 

그때 그들 곁에 빛나는 옷을 입은 두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두 사람은 누굴까요? 천사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살아있는 진리인 주님이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입은 빛나는 옷은 부활하신 주님에게서 나오는 가장 밝고 환한, 완전한 진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두 사람이 나타났다고 했을까요? 부활하신 주님에게서 나오는 진리는 선만 있고 진리는 없거나, 진리만 있고 선은 없는 그런 진리가 아니라, 선과 진리가 함께 있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천사가 여인들에게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여인들은 전에 주님이 고난을 받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실 거라는 말씀을 들은 적이 있으나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는 믿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신앙이 아직 자연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직접 눈으로 봐야만 믿는 그런 신앙이었던 것입니다.

 

31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32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희롱을 당하고 능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겠으며 33그들은 채찍질하고 그를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 34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취었으므로 그들이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 (눅18:31-34)

 

천사들을 보고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댑니다. 주님이 나타나셨을 때, 사람들이 두려워 떨거나 죽은 자처럼 되었다는 것은 말씀의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계시록을 쓴 요한도 주님의 발 앞에 죽은 자처럼 되었다고 했습니다. 다니엘도 그랬지요. 신앙인들이 그렇게 두려워하는 것은, 내면에서 어떤 영적 변화가 일어날 때 느끼는 불안과 공포를 의미합니다. 주님의 신성이 사람 안으로 임하실 때, 인간이 불안과 두려움을 느끼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자들이 느끼는 두려움은 일종의 경건한 두려움입니다. 여자들에게 일어난 이러한 내면의 변화는, 그에게서 죽은 진리가 살아나는 것이며, 그로 인해 자연적 신앙이 영적 신앙으로 한 단계 올라서는 것입니다.

 

※ 그래서 저는 저희 혈육들을 비롯, 주위 많은 지인이 영적 체험을 좀 했으면 좋겠습니다. 기록된 겉 글자 신앙에만 갇혀 있지 말고, 그 안에 꿈틀대는 영계를 살짝살짝,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이라도 좀 주님이 허락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본인이 원해야 하지만 말입니다. 신령한 영적 체험은 두꺼운 껍질을 깨고, 저 높은 곳으로 도약하는 데 있어 큰 도움이 됩니다.

 

저는 지난날 제 안에 있는 악령을 어렴풋이나마 본 적이 있습니다. 물론 영안으로 보았겠지요. 정원 목사의 ‘대적기도’라는 책을 읽던 시절이었는데, 이 경험은 제가 신앙적으로 새로운 도약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참고로, 그러나 저런 체험보다는 이왕이면 천사를 만나는 그런 체험이면 더 좋겠습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평소 마음 상태가 천사가 찾아올 수 있는 상태여야 하겠지만 말입니다. //

 

7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 8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9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에게 알리니 10(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그들과 함께 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알리니라) 11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

 

여자들이 마침내 주님이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것을 기억해 내고는 무덤에서 돌아가 그 모든 것을 사도들에게 알렸습니다. 무덤은 속뜻으로는 그들이 죽은 진리를 만나던 곳이고, 필요할 때마다 꺼내 사용하던 곳입니다. 이를테면 진리의 지식이 보관된 내면의 기억 장소와 같은 곳이죠. 그러나 진리가 완전히 살아날 때, 이제는 애써 그곳을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살아있는 진리, 살아 계신 주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면서 그때그때 필요한 진리를 공급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요14:26)

 

※ 이것이 퍼셉션(perception)입니다. 천사들이 천국에서 주님과 커뮤니케이션하는 방식인데, 그 내면이 열려있던 태고교회가 바로 지상에서 이 방식으로 주님의 인도를 받았습니다. 즉 주님의 뜻과 인도하심을 공부를 통해서, 학습해서 아는 게 아닌, 내가 묻거나 무슨 의문을 품을 때 내적으로 바로 답이 오는 그런 것입니다. 가령, 창세기에 나오는

 

8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9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창3:8-9)

 

와 같은 커뮤니케이션이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의 딕테이트(dictate)를 나의 내면, 곧 내 영이 듣는, 가장 고급하고 고차원적인 커뮤니케이션입니다. 비유하자면, 퍼셉션으로 아는 걸 햇빛으로 보는 것이라 한다면, 이 세상 학습을 통해 아는 건 달빛으로 보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

 

그것이 부활하신 주님이 주시는 은혜입니다. 주님이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들은 사도들은 여자들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 역시 아직은 자연적 신앙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을 직접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봐야만 믿는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베드로가 주님의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12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부려 들여다보니 세마포만 보이는지라 그 된 일을 놀랍게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

 

베드로란 이름의 속뜻은 진리에 대한 순종입니다. 실제로 베드로의 성품이 그랬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그는 급히 무덤으로 달려가 몸을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봤습니다. 무덤으로 달려가는 것은 진리에 대한 뜨거운 애정을 뜻합니다. 그리고 몸을 구부려 들여다보는 건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 안에 있는 진리들을 돌아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리, 또는 말씀을 대할 때는 언제나 몸을 낮춰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진리가 보이고, 또한 죽었던 진리가 살아나는 것이 보입니다.

 

그때 베드로의 눈에 들어온 것은, 주님의 시신이 아니라 세마포였습니다. 세마포의 속뜻은 주님이 주시는 내적 진리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본 진리는 이전에 알던, 생명 없는 지식이 아니라 내적 진리였던 것입니다. 그제서야 그는 자신에게 있던 진리들이 살아났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내면에서 진리가 살아나는 건 눈먼 자가 눈을 뜨는 것 이상의 기적입니다. 흔히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진리가 살아나면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던 기질이 바뀝니다. 그것은 주님만이 이루실 수 있는 기적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 모든 일을 놀랍게 여겼다고 합니다. 놀랍게 여겼다는 건 기적과 같은 일이라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에서 여자들은 향품으로 표상되는 자연적 진리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시작합니다. 자연적 진리란 말씀의 문자로 표현된 진리이며, 내적 진리를 담기 위한 그릇 역할을 하는 진리입니다. 그래서 그 자체로는 아직 완전한 진리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자연적 진리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더라도 점차 그 안에 내적 진리를 담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는 까닭은 내적 진리가 자연적 그릇인 글자 안에 담길 때, 온전하고 힘 있는 진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지옥을 이기신 주님의 능력이 그 안에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도 세상에 계실 때 완전하지 않은 진리의 상태에서 지옥의 시험을 완전히 이기시고, 신성한 진리(Divine Truth) 자체가 되셨습니다. 만약 주님이 처음부터 신성한 진리 자체이셨다면, 주님은 시험을 당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피조물인 지옥은 감히 창조주이신 주님을 대적하거나 도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에는 시험을 당하는 주님의 진리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지 않고, 인자, 곧 사람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완전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께 기대어 자신에게 있는 진리를 매일 살려야 하고, 더 내적인 진리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온전히 거듭날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은혜가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성도, 그리고 이들과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호6:2)

 

아멘

 

 

※ 제 설교가 점점 길어지지요? 저는 10년 전인 지난 2014년 5월, 경기도 고양시 헤븐교회 예배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아직 정원 목사님 살아 계시던 시절이었지요. 목사님은 이듬해인 2015년 11월에 별세하셨습니다. 그때 주일예배가 몇 시간씩 계속되는 것에 질려, 그리고 다른 일정도 있어 할 수 없이 중간에 일어나야만 했던 경험이 있어요. 큰애와 우리 부부, 이렇게 함께 갔는데... 그 당시 제 영적 역량이 그런 예배를 감당할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 제가 점점 그런 경향을 보이네요. 그나마 저는 원고 설교를 하기 때문에 이 정도이지 싶습니다. 설교를 되새김질하다 보면 계속 내용이 더해지고 보태집니다. 절제도 필요하겠지만, 대부분 퍼셉션, 곧 성령의 인도하심인지 꼭 필요한 내용들이지 싶습니다.

 

 

원본

2023-04-09(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두 번째 설교

2025-04-20(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04-20(D1)-주일예배(2594, 눅24,1-12. 부활절),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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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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