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7-14(D1)-주일예배(2552, 눅20,27-40), '결혼과 부활에 관한 주님의 가르침'.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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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과 부활에 관한 주님의 가르침

 

 

27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개인 중 어떤 이들이 와서 28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만일 어떤 사람의 형이 아내를 두고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29그런데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아내를 취하였다가 자식이 없이 죽고 30그 둘째와 셋째가 그를 취하고 31일곱이 다 그와 같이 자식이 없이 죽고 32그 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33일곱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그중에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34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35저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 36그들은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라 37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서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 38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시니 39서기관 중 어떤 이들이 말하되 선생님 잘 말씀하셨나이다 하니 40그들은 아무 것도 감히 더 물을 수 없음이더라 (눅20:27-40)

 

 

말씀에서 장가가는 것은 주님과의 결합을 뜻하고, 시집가는 것은 주님에 의해 천국에 받아들여지는 것을 뜻한다. 이것이 분명한 이유는 마태복음 22장 1절로 14절까지의 말씀에서, 천국은 아들을 위해 혼인 잔치를 베풀고, 종을 보내 사람들을 초대하는 임금과 같다고 했기 때문이다. (결혼의 사랑 41:3, 이순철 역) That to be married is to be conjoined with the Lord, and that to enter into marriage is to be received in heaven by the Lord is clear from the following passages: The kingdom of the heavens is like unto a man, a king, who made a marriage for his son, and sent forth servants and invited to the wedding (Matt. 22:1–14).

 

 

27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개인 중 어떤 이들이 와서

 

주님 당시 유대교회 안에는 바리새파와 사두개파라는 두 개의 파벌이 있었습니다. 사두개파는 성직자들이 많았고, 주로 엘리트층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교리적으로는 구약의 율법을 문자 그대로 지키려는 경향이 강했고, 사후의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바리새파는 일반 대중들의 지지를 받았고, 부활을 믿었습니다. 또 그들의 구전 율법인 장로의 전통을 하나님의 말씀만큼이나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 사두개파 사람들이 주님을 찾아와 다음과 같이 물었습니다. 본문 28절 말씀입니다.

 

28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만일 어떤 사람의 형이 아내를 두고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당시 이스라엘에는 형이 자손을 남기지 않고 죽었을 경우, 동생이 형수와 결혼해 대를 잇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신명기 25장 말씀에 근거한 것입니다.

 

5형제들이 함께 사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 가지 말 것이요 그의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 6그 여인이 낳은 첫 아들이 그 죽은 형제의 이름을 잇게 하여 그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 (신25:5, 6)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정해주신 결혼의 원칙은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혼이었습니다. 그것은 창세기 2장의 아담과 하와의 결혼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앞에서 말한 신명기의 규례는 일부일처의 원칙에도 맞지 않을뿐더러, 엄격히 말하면 레위기 18장에 형제의 아내와 관계하지 말라는 율법에도 맞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왜 이러한 법을 만들어 지키게 하셨을까요? 영적으로 남편의 형제는 이른바 친족의 선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각자 생각이나 취미가 다른 것처럼 각각의 진리와 선도 성격이 모두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진리와 선은 끊임없이 자기와 맞는 선 또는 진리를 찾아 그것과 결합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 내면에서 선과 진리들 사이에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따라서 친족의 선(kindred good)이란, 어떤 진리가 좋아하여 자신을 그것과 결합시키려 하는 비슷한 성격의 선들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여인이 남편의 형제와 결혼해 아이를 낳는 것은 어떤 진리가 죽은 남편으로 상징되는 선과 친족의 관계에 있는 선과 결합하는 것이고, 그렇게 해서 새로운 선과 진리를 낳는 것을 의미합니다.

 

선과 진리가 그렇게 결합해 열매를 맺을 때 각자의 내면에 교회가 굳건하게 서고, 점점 부흥하게 됩니다. 물론 반대의 경우는 교회가 침체하겠지요. 그렇다면 여인과 첫 번째 남편 사이에 아이가 없었던 까닭은 뭘까요? 예를 들면 하나의 진리가 하나의 선을 좋아하여 만났는데 만나보니 생각이 다르고 열정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때 둘 사이에는 완전한 결합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 다음은 새 교회 이순철 목사님의 에피소드입니다.

 

이번에 미국 제너럴 처치 목회자 회의에 참석해서 보니 목사님들의 성향이 모두 달랐습니다. 어떤 분은 교회의 살림을 맡아 건전하게 꾸리는 데 관심이 있고, 어떤 분은 유튜브 같은 매체를 통해 선교를 하는 데 관심이 있었습니다. 또 어떤 분은 말씀과 교리를 연구하여 그것을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또한 동료 목사님들과 공유하고자 하는 열정을 가진 분도 있었습니다. 그러한 일들이 각자의 내면에서 선과 진리들이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때 어느 한쪽이 기울어지면, 예를 들면 진리가 미숙하거나 아니면 애정이 부족하거나 하면 둘 사이에 충분한 결합이 이루어지지 않고, 그에 따라 성과가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 안에서도 비슷한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같은 신앙 안에 있지만 생각이나 애정이 모두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다 보면 어떤 분들은 서로 잘 맞아 협력하여 선을 이루지만, 어떤 분들은 마음이 잘 맞지 않아 함께 일해도 시너지가 생기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 영적으로 아이가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사두개파 사람들이 계속해서 주님께 묻습니다.

 

29그런데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아내를 취하였다가 자식이 없이 죽고 30그 둘째와 셋째가 그를 취하고 31일곱이 다 그와 같이 자식이 없이 죽고 32그 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33일곱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그중에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사두개파 사람들의 말에서 간교함이 느껴집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자들이 말씀을 이용해 부활의 신앙을 공격하고, 주님을 함정에 빠뜨리려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보실 때, 이들은 두 가지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사후의 부활을 믿지 않는 것이고, 또 하나는 천국의 결혼도 세상의 결혼처럼 육신의 결합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들으시고 주님께서 34절 이하에서 다음과 같이 대답하십니다.

 

34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35저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한 자는 어떤 사람일까요? 세상에 살 때 많이 거듭나 사후에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그들에 대해 세상 사람들처럼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천국의 천사들의 결혼은 어떤 것입니까? 그것에 대해 ‘결혼의 사랑’ 41:3항은

 

말씀에서 장가가는 것은 주님과의 결합을 뜻하고, 시집가는 것은 주님에 의해 천국에 받아들여지는 것을 뜻한다. 이것이 분명한 이유는 마태복음 22장 1절로 14절까지의 말씀에서 천국은 아들을 위해 혼인 잔치를 베풀고 종을 보내 사람들을 초대하는 임금과 같다고 했기 때문이다.

 

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임금의 아들은 주님을 뜻하고, 혼인 잔치에 초대될 사람은 주님과 결혼할 준비가 된 사람, 즉 세상에서 충분히 거듭난 사람을 뜻합니다. 또한 ‘천국과 지옥’ 366항 이하에서는

 

천국에도 남녀의 결혼이 있으나 세상의 결혼과는 다르다. 즉 천국에서 남녀의 결혼은 이성과 의지의 결합이고, 선과 진리의 결합이며, 믿음과 사랑의 결합이다.

 

라고 합니다. 이것으로 천국의 결혼은 육신의 결합이 아니라 영의 결합이며, 궁극적으로는 영의 결합을 통한 주님과의 결합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에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한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느니라고 하신 것은 천국의 남녀는 더 이상 육신으로 결합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그러므로 천국에서 결혼의 기쁨은 육신의 결혼에서 오는 기쁨이 아니라 영적인 결혼에서 오는 기쁨, 즉 믿음과 사랑이 하나가 될 때 주님이 주시는 지극한 평화와 순진함의 기쁨이라는 뜻입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그들에게 주님께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37절의 말씀입니다.

 

37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서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 38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시니

 

주님은 육신을 입고 오셔서 죽었다가 부활하심으로써 영원한 부활을 꿈꾸는 이들의 표상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천국으로 올라가셔서 죽어가는 인류를 살리시고, 그들과 하나가 되셨습니다. 본문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있는 자의 하나님이라고 하신 것은 그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성경의 여러 곳에서 사후의 부활을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세상에서 부자로 살았던 사람은 사후에 지옥에 있고, 거지였던 나사로는 천국에 있다는 누가복음 16장 22절의 비유의 말씀이 그렇고,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죄수 중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했던 겸손한 사람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신 누가복음 23장 43절 말씀이 그렇습니다.

 

내적인 눈, 시야가 닫힌 상태에서 외적인 눈, 시야로만 보는 사두개파 사람들은 주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사두개파 사람들처럼 외적인 눈만 발달한 사람들이 오늘날에도 많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구약의 율법과 선지자의 예언은 지금도 유효하며, 할 수만 있으면 문자 그대로 지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사람들은 그것은 구시대의 유물이기 때문에 지킬 필요가 전혀 없다고 말합니다. 어느 쪽이든 진실을 바로 아는 게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진실을 알고 지킬 때, 부활에 합당한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진실은 무엇일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문자의 의미로서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들은 말씀의 내적 의미에 비추어 볼 때 일치하는 것만 지키고, 그 밖의 것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주님이 오시기 전 모세와 선지자를 통해 내려주셨던 법도들은 진리 자체가 아니라 진리에 관한 표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진리 자체이신 주님이 오셨을 때, 그 표상들은 모두 폐지되었습니다. 그와 관련해 누가복음 16장 16절에서는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고 하셨습니다. 말씀에서 율법과 선지자, 그리고 요한은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뜻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주님이 부활하신 후 보내시기로 약속하신 보혜사, 즉 말씀의 내적 진리를 뜻합니다. 그렇게 보면 구약성경의 문자적 의미는 더 이상 유효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문자적 가르침을 모두 버리면 안 되는 이유는, 마태복음 5장 17절에서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오심으로 해서 구약의 모든 율법이 폐지된 것이 아니라 말씀의 내적 의미를 통해 더욱 분명하고 힘이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문자적 의미 안으로 내적 의미라는 말씀의 생명을 불어넣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문자적 의미로서 구약의 말씀들은 말씀의 내적 의미를 통해 비춰봐야 하고, 그렇게 해서 내적인 것과 일치하는 말씀은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예를 들면, 십계명의 대부분의 내용과 순결한 부부 사랑에 관한 것들이 그런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말씀의 문자적인 의미 안에서 구원에 관한 교리들은 얼굴이나 손이 그렇듯 벌거벗은 진리로 명확히 드러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신 내적 진리를 통해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바로 알고 지켜야 하겠습니다. 서울 새 교회와 대전 한결같은 교회, 그리고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이 외적이면서 동시에 내적인 말씀의 의미를 통해 부활에 합당한 결혼의 기쁨을 영원히 누리시길 축원합니다.

 

 

7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9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계19:7, 9)

 

아멘

 

2022-07-17(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07-14(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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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7(D1)-주일예배(2551, 눅20,19-26), ‘가이사의 것, 하나님의 것’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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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사의 것, 하나님의 것’의 속뜻

 

 

19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이 예수의 이 비유는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즉시 잡고자 하되 백성을 두려워하더라 20이에 그들이 엿보다가 예수를 총독의 다스림과 권세 아래에 넘기려 하여 정탐들을 보내어 그들로 스스로 의인인 체하며 예수의 말을 책잡게 하니 21그들이 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바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나이다 22우리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않으니이까 하니 23예수께서 그 간계를 아시고 이르시되 24데나리온 하나를 내게 보이라 누구의 형상과 글이 여기 있느냐 대답하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25이르시되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26그들이 백성 앞에서 그의 말을 능히 책잡지 못하고 그의 대답을 놀랍게 여겨 침묵하니라 (눅20:19-26)

 

 

자연적인 것은 영적인 것을 받는 그릇이고 영적인 것은 천적인 것을 받는 그릇이다, 천적인 것을 통해 주님으로부터 생명이 흘러들어오며 그것을 유입이라고 한다. 천적인 것은 모든 신앙에 속한 선이며, 영적인 것은 진리이다. 진리가 신앙의 진리가 되려면 그 속에 신앙의 선이라고 하는 인애의 선이 있어야 한다. 인애의 선 안에는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 그 자체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천국의 비밀 880:2, 이순철 역) ...the natural, the spiritual, and the celestial. His natural never receives any life except from the spiritual, and the spiritual never except from the celestial, and the celestial from the Lord alone, who is life itself. But in order that a still fuller idea may be gained: the natural is the receptacle that receives the spiritual, or is the vessel into which the spiritual is poured; and the spiritual is the receptacle which receives, or is the vessel into which is poured, the celestial. Thus, through things celestial, life comes from the Lord. Such is the influx. The celestial is all the good of faith; in the spiritual man it is the good of charity. The spiritual is truth, which never becomes the truth of faith unless there is in it the good of faith, that is, the good of charity, in which there is life itself from the Lord... (AC.880:2)

 

 

※ 아래 서울 새 교회 에피소드는 꼭 기억 되어져야 할 유익한 내용이라 그대로 인용합니다.

 

오늘 예배는 이한구 장로님 추모예배를 겸해서 드리겠습니다. 장로님께서 우리 곁을 떠나신 지 꼭 2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가끔 장로님을 생각하면 그리움이 있습니다. 장로님은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업신여기시지 않았습니다. 사람을 주눅 들게 하시지도 않았고, 언제나 주변 사람들을 배려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유머가 많아서 장로님이 계신 곳에는 항상 웃음이 있었습니다. 이한구 장로님은 새 교회 설교가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이해하기 쉽게 설교해야 교회가 부흥되지 않겠느냐 하시는 말씀이었지요. 공감은 하지만 능력이 부족해서인지 마음대로 잘 안됐습니다. 그런 면에서 장로님께 미안함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진리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보통 네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진리를 만나면 바로 자신의 신앙으로 삼는 사람입니다. 이들은 진리를 열심히 배울 뿐 아니라 삶으로도 적극적으로 실천합니다. 새 교회에 오신 분들이 보통 이런 분들이십니다. 두 번째는 진리에 호기심은 있지만 미온적인 사람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진리를 반대하고, 심지어 파괴하려는 사람입니다. 네 번째는 진리에 전혀 무관심한 사람입니다.

 

오늘 말씀에는 진리에 대해 상반된 태도를 보이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진리를 지키려는 사람이고, 하나는 진리를 파괴하려는 사람입니다. 그들의 모습을 본문 19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19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이 예수의 이 비유는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즉시 잡고자 하되 백성을 두려워하더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주님을 체포하려고 합니다.

 

※ 원래 ‘대제사장’은 복수가 아닌 단수여야 합니다. 즉 오늘 본문의 ‘대제사장들’이라는 표현은 매우 이상한 표현입니다. 왜 이런 표현이 나오는지 그 배경에 대한 설명은 지난 6월 16일 주일 설교, ‘성전에서 장사들을 내쫓으신 주님’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제사장의 속뜻은 자아에서 비롯한 악을 뜻하고, 서기관은 자아에서 비롯한 거짓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누구보다 자신의 자아를 사랑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자아는 이기적이지만 진리는 이타적입니다. 그러니까 서로 원하는 것이 정반대인 것이지요. 자아를 사랑하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진리이신 주님을 해치려 했던 것은 그 때문입니다. 그런데 백성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백성은 누굴까요? 백성은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주시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지옥이 진리를 공격하더라도 능히 진리를 지킬 수 있습니다.

 

※ 다음은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김은경 역) 중 26장, ‘천국 천사들의 능력’(228-336)에 나오는 글들 일부 인용입니다.

 

...그러나 영계에서의 천사들의 능력은 너무도 커서 그에 대해 내가 목격한 것을 모두 얘기한다면 믿기 어려울 것이다. 영계에서 신적 질서에 어긋나 제거해야 하는 어떤 장애물이든지 천사들은 단지 한 번의 의도함과 응시함으로 쫓아내거나 전복한다. 나는 악인들이 점령한 산들이 그렇게 내던져지고 파괴되는 것과, 때로는 지진이 난 듯 끝에서 끝까지 흔들리는 것을 보았으며, 암벽이 밑바닥까지 갈라져 그 위에 있던 악인들을 삼키는 것도 보았다. 또 나는 천사들이 수십만의 악한 영들을 흩어 지옥으로 내던져지는 것도 보았다. 아무리 숫자가 많아도 악한 영들은 천사를 당할 수 없고, 술책과 교활함과 무리지음도 허사가 된다. 천사들은 그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즉시 쫓아버리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바빌론의 멸망을 다룬 책에서 자세히 다루었다.) 영계에서 천사들은 이와 같은 능력이 있다. 성서를 보면 천사들은 허락되었을 때는 자연계에서도 이런 힘을 나타낸 것을 알 수 있다. 군대 전체를 쳐부수거나 전염병을 내려 칠만 명을 멸했다고 한 구절 등이 그 예다...

 

...그러나 알아두어야 할 것은 천사들 스스로는 아무 능력이 없고, 그들의 모든 능력은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이다. 또 그들이 이것을 인식할 때만 능력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 중 누군가 자기 스스로 능력이 있다고 믿게 되면 그 순간, 단 한 악령에게도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천사들은 어떤 공로도 자기들에게 돌리지 않으며, 그들이 한 일에 대한 어떤 찬사와 영광도 싫어하고, 모든 찬사와 영광을 주께 돌린다...

 

...천국에서는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신적 진리에 모든 능력이 있다. 천국에서 주님은 신적 선에 결합된 신적 진리이시기 때문이다. 천사들은 신적 진리를 받아들이는 정도만큼 능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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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로부터 주님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주님을 체포할 수 없게 되자 계책을 세웁니다. 20절에서는 그것을 이렇게 말합니다.

 

20이에 그들이 엿보다가 예수를 총독의 다스림과 권세 아래에 넘기려 하여 정탐들을 보내어 그들로 스스로 의인인 체하며 예수의 말을 책잡게 하니

 

정탐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이들 역시 대제사장들이나 서기관들과 같이 진리보다 자아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며, 그러므로 진리를 파괴하려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진리를 사랑하는 것처럼 다가와 진리의 허점을 캐고, 그렇게 해서 진리를 무력화시키려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시대에도 새 교회의 진리를 무너뜨리기 위해 허점을 캐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 정탐들입니다. 그들이 주님께 묻습니다.

 

21그들이 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바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나이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영어 성경 원문에는 face, 즉 얼굴로 취하지 않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속뜻으로 얼굴은 사람의 내면을 뜻합니다. 얼굴을 통해 사람의 내면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로 볼 때, ‘당신은 바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나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세상에는 내적인 것만 중시하는 사이비 진리가 많은데, 주님의 진리는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을 함께 아우르는 합리적 진리라는 칭찬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이 가르치시는 진리는 천국의 삶과 세상의 삶 모두를 아우르는 조화로운 진리라는 것입니다.

 

※ 다음은 이순철 목사님 본인의 이야기입니다.

 

저는 어릴 때 어머니를 따라 한동안 교회 공동체의 어떤 마을에서 생활한 적이 있습니다. 그 교회는 무엇보다 결혼의 순결을 소중히 여겼습니다. 그러다 보니 길에서 동창생 여자아이를 만나도 쳐다보지를 못했습니다. 심지어 TV 드라마나 영화를 보는 것도 자제해야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몸이 아파 병원에 가는 것도 다른 사람의 눈치를 봐야 했습니다. 모두가 믿음이 부족한 때문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종교의 교리는 그렇게 외골수적인 편향이 있습니다. 정탐들은 그런 점을 의심했지만, 일단 주님을 칭찬합니다. ‘내가 들어보니 당신의 진리는 천국의 삶만 중시하고 세상의 삶은 소홀히 하는 그런 사이비는 아닙니다’라고 말이죠. 그러나 바로 다음에 또 이렇게 말합니다. 22, 23절 말씀입니다.

 

22우리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않으니이까 하니 23예수께서 그 간계를 아시고 이르시되

 

가이사, 즉 케사르(Caesar, 라틴)는 당시 로마 황제를 일컫는 호칭입니다. 헬라어 카이사르(Καῖσαρ)를 라틴으로 읽은 것입니다. 온 세상의 황제, 그러므로 속뜻으로 가이사는 세상의 진리를 뜻합니다. 말씀에서 왕은 진리를 뜻하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가이사에게 세를 바친다는 건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의 진리를 좇지 않고, 세상 진리를 좇는 것을 말합니다. 이를테면 신앙인이 병이 들었을 때, 분명 신앙인이면서도 먼저 하나님을 찾는 대신 거의 자동반사적으로 병원 의사를 찾는 거와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않으니이까’라고 묻는 것은, 신앙인들이 신앙인이면서도 먼저 하나님을 찾는 대신 거의 무의식적, 반사적으로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세상의 진리를 좇는 것이 옳으냐, 옳지 않으냐고 묻는 것입니다. 만약 옳다고 하면, 그들은 주님을 세속적이라고 비난할 것입니다. 반대로 옳지 않다고 하면, 세상의 삶과는 동떨어진 공허한 진리를 가르친다 비난하겠지요. 그들의 말을 듣고 주님께서 그들의 간계를 알았다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입장으로는 어떻게 대답해도 책잡힐 것이 뻔했기 때문입니다.

 

24데나리온 하나를 내게 보이라 누구의 형상과 글이 여기 있느냐 대답하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25이르시되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주님께서 그들에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무슨 뜻일까요? 그것에 대해 잠깐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람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가이사의 것도 필요하고, 하나님의 것도 필요합니다. 가이사의 것은 세상 물질이나 학문 같은 것이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들어오는 선과 진리입니다. 새 교회 가르침, ‘천국의 비밀’ 880번 글 2번 항에서는 ‘자연적인 것은 영적인 것을 담는 그릇이다’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누구나 각자가 소유하는 세상의 것 안에 하나님의 것을 담으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에 하나님의 것을 담는다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세상의 일을 할 때는 세상의 지식을 가지고 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나보다는 주님과 이웃을 위해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는 일입니다.

 

26그들이 백성 앞에서 그의 말을 능히 책잡지 못하고 그의 대답을 놀랍게 여겨 침묵하니라

 

주님의 말씀을 들은 정탐꾼들은 더는 주님을 책잡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것과 세상의 것이 하나인 것처럼 말하면서도 사실은 그것을 분리시키는 자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소유를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싫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한다는 말씀을 들었을 때 침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 여기서 잠깐, 여기 주님의 말씀, ‘데나리온 하나를 내게 보이라 누구의 형상과 글이 여기 있느냐 대답하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관련, 흥미로운 글이 하나 있어 소개합니다. 류모세 저, ‘열린다 성경, 생활 풍습 이야기 (하)’ 인용입니다.

 

...이들이 가져온 올무는 당시 로마의 압제하에서 가장 민감한 문제인 세금 납부와 관련된 것이었다.

 

그러면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하니 (마22:17)

 

사실 이 질문은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완벽한 올무였다. 로마 황제의 얼굴이 새겨진 로마 화폐는 종교성이 강한 유대인들에게 강한 거부감을 주었는데, 이로 인해 주후 6년, 열심당의 주도 아래 로마 화폐 사용에 저항하는 폭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로마는 이를 잔인하게 진압함으로써 유대인들에게 원한을 샀으므로 이 같은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예수님이 어떻게 대답하실까 귀추가 주목되는 순간이었다. 예스든 노든 어떤 대답으로도 올무에 걸려들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허를 찌르는 질문을 하신다.

 

18예수께서 그들의 악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19세금 낼 돈을 내게 보이라 하시니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왔거늘 (마22:18, 19)

 

예수님은 이미 질문 속에 숨겨진 악한 의도를 간파하시고는 오히려 그들에게 셋돈을 달라고 하셨다. ‘셋돈’은 로마 제국에 세금으로 바치는 데나리온이었는데, 여기에는 당시의 로마 황제이며, 신으로 추앙받는 티베리우스 황제의 얼굴이 새겨져 있었다. 바리새인들은 로마 제국에 내는 납세의 정당성 문제를 놓고 예수님을 올무에 걸려들게 하려고 했지만, 오히려 예수님이 쳐 놓은 올무에 그들이 걸리고 말았다.

 

당시 종교적인 유대인들은 황제 숭배와 관련된 영적인 문제와 압제자 로마에 대한 정치적인 적대감 때문에 데나리온을 소유하지 않았다. 심지어 데나리온에서 황제의 얼굴이 있는 쪽을 망치로 때리는 의식을 갖기도 했다. 이런 상황을 이해할 때, 바리새인들이 보인 데나리온은 그들이 이미 종교적인 유대인들과 다른 길을 걷고 있음을 확인해 준 셈이었다.

 

그들은 예수님이 내놓을 예스나 노의 대답에만 정신이 팔려서 정작 예수님이 ‘셋돈을 달라’시며 쳐 놓은 그물에는 아무 생각 없이 걸려들어, 갖고 있던 데나리온을 내보였던 것이다. 그 순간 아차 싶었겠지만,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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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6장에는 주인에게 빚진 자들을 불러 모아 빚을 탕감해 주는 청지기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자기 것이 아니라 주인의 것으로 이웃의 환심을 사는 청지기가 결코 좋게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주인은 그를 지혜롭다고 칭찬을 합니다. 청지기의 주인은 왜 그를 칭찬했을까요? 주님이 보시기에 인간은 모두 하나님의 청지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은 모두 하나님의 것입니다. 주님은 그것을 가지고 이웃을 위해 사용하길 원하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주인의 것으로 다른 사람의 환심을 사는 청지기는 가이사의 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 신앙인들의 좋은 본보기라 하겠습니다.

 

이한구 장로님은 평생 노력해 큰 재산을 모았지만, 당신 자신에게 쓰는 데는 정작 엄격했다고 들었습니다. 형제와 이웃들을 위해 좋은 일을 많이 했고, 마지막에는 한국 새 교회를 위해 큰 공헌을 하셨습니다. 교회를 짓기 시작했을 때, 바로 앞의 녹번초등학교 학부형들이 아무 이유 없이 구청에 민원을 제기해 건축허가를 얻지 못한 적이 있습니다. 나중에야 그들이 주변에 큰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임을 알았습니다.

 

※ ‘아무 이유 없이’라고 하셨지만, 틀립없이 우리 동네에 이단이 들어오면 안 된다 하여 ‘결사반대’ 차원에서 그랬을 것입니다. 나름 개신교 십자가 복음 교리를 수호하느라 그러셨겠지만, 지금의 개신교, 기독교는 좀 더 넓으신 주님의 마음, 개신교와 기독교뿐 아니라 온 세상 사람 모두를 구원하시려는 주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그런 어려움들을 극복하는데 장로님이 큰 힘이 되었습니다. 그때 장로님과 우리들이 세상의 부조리와 싸우는 모습은 주님을 지키기 위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싸우는 사도들의 모습과도 같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장로님은 누구보다 훌륭한 주님의 청지기였습니다. 장로님이 천국의 천사들로부터 말씀의 진리를 어렵지 않게 배우고 기뻐하시는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천국에 계신 이한구 장로님과 그분이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주님의 놀라운 축복과 은혜가 함께 하시길 기도합니다. 아울러 주님의 진실한 청지기가 되기를 원하는 서울 새 교회, 그리고 한결같은 교회의 모든 성도와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분에게도 주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길 기도합니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마25:21)

 

아멘

 

 

2022-06-12(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07-07(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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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30(D1)-주일예배(2550, 눅20,9-18), ‘모퉁잇돌’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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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4-06-30(D1)-주일예배(2550, 눅20,9-18), ‘모퉁잇돌’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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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퉁잇돌’의 속뜻

 

 

9그가 또 이 비유로 백성에게 말씀하시기 시작하시니라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가서 오래 있다가 10때가 이르매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바치게 하려고 한 종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을 몹시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11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도 몹시 때리고 능욕하고 거저 보내었거늘 12다시 세 번째 종을 보내니 이 종도 상하게 하고 내쫓은지라 13포도원 주인이 이르되 어찌할까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혹 그는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14농부들이 그를 보고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 유산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 하고 15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느니라 그런즉 포도원 주인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16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하시니 사람들이 듣고 이르되 그렇게 되지 말아지이다 하거늘 17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그러면 기록된 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찜이냐 18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라 (눅20:9-18)

 

 

모퉁이 돌과 주춧돌은 교회의 기초가 되는 모든 신성한 진리를 뜻하고, 또한 신적 인성으로서 주님을 뜻한다. (계시록 해설 417:12, 이순철 역) and because “the stone of the corner” signifies all Divine truth upon which the church is founded, it also signifies the Lord in respect to His Divine Human; (AE.417:12)

 

 

오늘 본문의 말씀은,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가서 오래 있다가, 때가 이르러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바치게 하려고 종을 세 차례, 그리고 마지막엔 아들을 보내었지만 다 소용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말씀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9절과 10절의 말씀입니다.

 

9그가 또 이 비유로 백성에게 말씀하시기 시작하시니라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가서 오래 있다가 10때가 이르매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바치게 하려고 한 종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을 몹시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말씀에서 포도원은 교회를 뜻하고, 포도원 주인은 교회의 주인이신 주님을 뜻합니다. 교회는 꼭 외적으로만, 즉 겉으로 건물 형태로만 있는 것이 아니고, 각 사람의 마음속에도 있습니다. 어디 있든지 교회의 본질은 주님에 대한 신앙과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즉 주님 사랑, 이웃 사랑이지요. 그러면 포도원을 가꾸는 농부는 누굴까요? 교회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는 각 사람의 마음속에 신앙과 사랑의 씨앗을 심어주시고, 그것을 잘 가꿔 좋은 열매 맺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는 동안 주님은 각 사람과 항상 함께 계시지만 우리는 그것을 느끼지 못하고, 아주 멀리 계시거나 아예 안 계신 것처럼 여깁니다. 말씀에는 그것을 포도원 주인이 농부들에게 포도원을 세로 주고, 멀리 타국에 나가 있는 걸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때가 되자 주인이 종을 농부들에게 보내 소출 얼마를 바치라고 합니다. 여기서 종은 누굴까요? 주님의 말씀을 뜻합니다. 신앙인들은 말씀을 통해 자신의 신앙을 살핍니다. 예를 들면, 진리에 어긋난 행동은 하지 않는지, 잘못이 있으면 바로바로 회개하는지, 맡은 일을 통해 이웃을 사랑하는지 돌아봅니다. 그리고 신앙이 잘 자라는 것을 확인하면 영광을 모두 주님께 돌립니다. 주인이 종을 보내 소출 얼마를 받으려 한다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농부들이 종을 몹시 때리고 거저 보냈다고 합니다. 농부들이 주인의 종을 때리는 것은 교회들이 말씀을 왜곡, 거짓으로 만드는 걸 의미하고, 거저, 즉 빈손으로 보내는 건 교회 안에 진실한 신앙과 사랑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은 걸 의미합니다. 그렇게 볼 때, 본문의 농부들은 주님 당시 유대교회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말씀을 임의로 푼답시고 여러 가지 인간적인 것들을 섞어, 결국 장로의 전통이라는 걸 만들었고, 그걸로 교인들을 가르쳤으며, 심지어 말씀보다 자기들이 만든 전통을 더 우선시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포도원 주인이 두 번째, 세 번째 종을 보냅니다. 본문 11절과 12절에서는 그것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11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도 몹시 때리고 능욕하고 거저 보내었거늘 12다시 세 번째 종을 보내니 이 종도 상하게 하고 내쫓은지라

 

유대교회도 그렇고, 다른 교회들, 그러니까 현 기독교회를 비롯, 과거 고대교회나 태고교회도 교회가 타락할 때는 먼저 말씀부터 왜곡했습니다. 말씀이 왜곡되면, 교인들의 삶이 피폐해지는데요, 왜냐하면 신앙인들은 말씀을 통해 삶을 배우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실제로 주님이 보내신 선지자들을 여럿 욕보이고 죽였습니다. 선지자들을 욕보이는 것은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주님 말씀에 대한 폭행을 뜻하지요. 그래서 주님은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눅13:33)고 하셨는데요, 말씀의 진리를 더럽히고 죽이는 자가 바로 교회라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선지자는 말씀을 뜻하고, 예루살렘은 교회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에는 종을 세 번까지 보냈다고 했습니다. ‘세 번’에 나오는 이 ‘’이라는 숫자는 처음부터 끝까지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주인이 세 번씩이나 종을 보내고, 농부들이 그때마다 때리고 쫓아내는 건 교회가 마지막까지, 끝까지 말씀을 더럽혔음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교회 안에 사랑과 신앙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아 스스로 무너질 때까지 끝까지 말씀을 왜곡했다는, 즉 말씀에다가 인간적인 것들을 섞었다는 것입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결심을 하십니다. 13절로 15절입니다.

 

13포도원 주인이 이르되 어찌할까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혹 그는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14농부들이 그를 보고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 유산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 하고 15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느니라 그런즉 포도원 주인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포도원 주인이 마침내 아들을 보내기로 결심합니다. 여기서 주인의 아들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육신을 입고 오신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지만 그런데도 아들이라 부르는 까닭은, 말씀에서 아들은 진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본래 사랑 자체이신 분이지만, 인간에게 오실 때는 진리로 오십니다. 왜냐하면 사랑 자체이신 여호와는 인간이 볼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에 보면, 여호와를 본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고 했습니다. 그것만 보더라도 여호와는 인간이 만날 수 없는 존재임이 분명합니다. 그런 까닭에, 말씀에서 주님을 아버지라 부를 때는 사랑이신 주님을 뜻하고, 아들이라 부를 때는 진리이신 주님을 뜻합니다. 따라서 포도원 주인의 아들은 진리, 또는 신성한 인간(Divine Human)으로 우리에게 오신 주님을 뜻합니다. 그런데 주님이 오셨을 때, 교회는 주님을 환대하지 않았고, 오히려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습니다. 본문에 포도원 농부들이 주인의 아들을 내쫓고 죽였다는 것은 그런 의미입니다. 유대교회의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어쩌면 자기들 눈앞에 있는 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걸 알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끔찍한 일을 저지른 것은 그들이 무엇보다도 자신의 자아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농부들처럼 어리석게도 그들 역시 선과 진리 자체이신 주님을 죽임으로써 스스로 선과 진리의 주인이 될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것이 농부들이 주인의 아들을 죽이고, 스스로 상속자가 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16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하시니 사람들이 듣고 이르되 그렇게 되지 말아지이다 하거늘

 

농부들을 진멸한다는 것은 주님이 교회를 벌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을 배척한 교회가 스스로 멸망을 자초, 망하는 것을 뜻합니다. 사랑 그 자체이신 주님은 절대로 누구를 진멸하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진리이신 주님을 주인으로 섬겨야 살아나는데 진리를 왜곡하고 죽였으니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을 대적하는 사람은 일종의 무장해제가 진행되어 지옥의 기운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으며, 오히려 그 기운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 결과 당연히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자초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 피하면 보호받지만, 주님을 등지면 그대로 노출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포도원을 다른 사람에게 준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타락한 교회를 대신해 주님께서 새로운 교회를 세우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자 사람들이 ‘그렇게 되지 말았으면 합니다’라고 합니다. 주님께서 다시,

 

17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그러면 기록된 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찜이냐 18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라

 

계시록 해설 417:12항에서는 ‘모퉁이 돌과 주춧돌은 교회의 기초가 되는 모든 신성한 진리를 뜻하고, 또한 신성한 인간으로서 주님을 뜻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건축자들이 버린 돌은 타락한 교회들이 배척한 진리이신 주님을 뜻합니다. 그리고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는 것은 그 진리가 새로운 교회의 근간이 되는 진리라는 뜻입니다. 새로운 교회의 근간이 되는 진리란 어떤 것입니까? 마지막 때 새 교회를 통해 주께서 밝히시는 말씀의 내적 진리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진리 위에 떨어지는 자는 모두 가루가 되어 흩어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마지막 때 주님이 밝혀 주시는 내적 진리를 거역하는 사람이나 교회는 그들이 가지고 있던 선과 진리마저 모두 잃어버리고, 스스로 멸망한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우리를 살리시려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교회들은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교회에서 쫓아내 죽이고 말았습니다. 유대교회의 제사장들이나 바리새인들만 주님을 죽이는 건 아닙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진리를 왜곡하고 악용하는 것은 모두 주님을 죽이는 일입니다. 진리를 알면서 거역하는 것도 주님을 죽이는 일입니다. 진리는 우리 삶의 곳곳에 있습니다. 일할 때도, 인간관계를 맺을 때도 진리가 있습니다. 무엇이 진리에 합당한 일인지 항상 정신을 차리고 살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자아에 대한 사랑을 거두고, 진리만을 사랑해야 합니다. 진리 배우기를 힘쓰고, 배우는 대로 하루에 한가지씩이라도 행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때로는 이유 없이 박해나 모함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럴수록 주님 앞에 자기를 내려놓고 견뎌야 합니다. 그때 합리에 속한 능력이 열리고,

 

※ 이 ‘합리’에 관한 능력이 우리 안에 열리는 게 중요합니다. 우리의 연약함으로 인해 우리는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 외적인 것에서 내적인 것으로 바로 점프를 할 수 없기 때문인데요, 이 둘을 중간에서 연결시켜 주는 거, 그게 바로 ‘합리’, 즉 납득하는 능력, 고개를 끄덕이는 능력입니다. 무엇이든 일단 알아들을 수가 있어야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지요. 이 능력을 가장 빠르게 얻는 방법은 바로 ‘애정’입니다. 애정이 있을 때, 우리의 내면이 진리의 말씀 앞에 확 열립니다.

 

그때 주님으로부터 천국적 자아가 우리 안에 흘러 들어옵니다. 이 새로운 천국적 자아를 통해 신앙을 지킬 수 있고, 신앙의 열매를 많이 맺을 수 있습니다. 한결같은 교회 모든 성도와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분에게 주님의 그런 은혜가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4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5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6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시121:4-6)

 

아멘

 

 

2022-06-05(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06-30(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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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23(D1)-주일예배(2549, 눅20,1-8), '요한의 세례'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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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4-06-23(D1)-주일예배(2549, 눅20,1-8, AC.7456.8), '요한의 세례'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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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의 세례’의 속뜻

 

 

1하루는 예수께서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하실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장로들과 함께 가까이 와서 2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위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3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내게 말하라 4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5그들이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로부터라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6만일 사람으로부터라 하면 백성이 요한을 선지자로 인정하니 그들이 다 우리를 돌로 칠 것이라 하고 7대답하되 어디로부터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니 8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눅20:1-8)

 

 

말씀에서 돌로 치는 행위는 진리에 반(反)하는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을 뜻한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돌로 치려 한 까닭은 그가 아브라함이 있기 전부터 있었다고 말했기 때문이며, 그들은 그것을 신성모독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천국의 비밀 7456:8)

 

 

오늘부터 누가복음 20장입니다.

 

※ 다음은 이 설교의 원 저자이신 이순철 목사의 에피소드입니다.

 

제가 새 교회 진리를 처음 알게 된 건 30여 년 전입니다. 당시 저는 플라스틱 포장재를 생산하는 어떤 회사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건강이 좋지 않았고, 회사도 마음에 들지 않아 여러모로 우울할 때였습니다. 그때 가족 중 한 분이 스베덴보리의 ‘천국과 지옥’을 주시면서 읽어보라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별생각 없이 읽기 시작했는데, 읽어갈수록 거기 적힌 내용이 모두 진실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을 계기로 가족들이 모두 세례를 받고, 새 교회인이 되었습니다. 새 교회의 가르침 ‘천국의 비밀’ 5044번 글에는 ‘사람이 시험 가운데 있을 때 주님으로부터 진리가 흘러들어온다. 그 진리가 그들의 생각을 다스리며, 의심하거나 절망할 때 그들을 끌어올린다’라고 합니다. 사람이 어려운 지경에 있을 때, 자존감이 크게 낮아집니다. 새 교회에서는 그것을 자아가 죽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자아가 죽을 때, 주님으로부터 진리가 흘러들어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자아는 자기 생각이 아닌 것을 잘 안 받아들이며, 그러므로 자아가 성(盛)하게 되면, 진리를 오히려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인생의 시련은 사람을 영적으로 만드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이름만 대면 알만한 큰 교회에 다니는 분이 우리 교회로 찾아오셨습니다. 스베덴보리를 읽고 공감하는 바가 있어 몇 가지 물어볼 게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의 얘기에 따르면, 장애가 있는 딸이 있어 교회의 식구들과 오랫동안 기도해 왔는데 낫지는 않고, 오히려 좋지 않은 사고가 간혹가다 일어난다는 겁니다. 답답하고 가슴 아픈 일입니다. 요한복음 9장에 보면, 주님께서 날 때부터 소경으로 태어난 자에 대해 그가 소경인 건 그 사람의 죄도 아니고 부모의 죄도 아니며,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보면, 그분의 자녀에게 생긴 불행한 일도 필경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기 위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본인이나 부모의 고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삼중의 장애, 즉 시각, 청각 및 언어 장애 속에 살아야 했던 헬렌 켈러(1880-1968)는 새 교회인이었습니다. 그녀는 잠시만이라도 아름다운 하늘과 땅, 계절이 변화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평생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1927년에 ‘내 어둠 속의 빛’이라는 책을 냈는데 거기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임마누엘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은 나의 빛이었고, 내 손의 지팡이였으며, 그의 밝은 시력이 나의 길에 함께했다...’ 그녀가 한 말을 되뇌면서, 그녀를 통해 나타내신 하나님의 일이 무엇이었을까 잠시 생각해 봤습니다. 인간들은 부족한 자신을 통해 하나님이 무엇을 나타내려 하시는지 알려 하지 않습니다. 그저 당장 눈앞의 문제를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해결해 주시기만 바랍니다. 그리고 일이 뜻대로 안 되면, 주님을 원망하고 의심합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자아가 하는 일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주님이 성전에서 복음을 전하실 때, ‘당신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위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며서 주님의 권위를 의심합니다. 본문 1절과 2절입니다.

 

1하루는 예수께서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하실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장로들과 함께 가까이 와서 2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위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볼 때, 주님은 가난한 시골의 보잘것없는 목수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전에서 복음을 전하시는 주님께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이런 일을 하느냐 물었습니다. 말씀에서 성전(temple)은 진리를 가르치는 교회인 영적 교회를 나타내는데, 여기서는 특별히 마지막 때 주님이 세우시는 새 교회를 뜻한다고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의 내적 의미라는 참된 진리가 새 교회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가르치시는 백성(people)은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진리에 대한 애정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진리를 말해도 받아들이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십니다. 그런데 그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나타나 주님께 당신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고 묻습니다. 제사장(priest)은 본래 선을 뜻하지만, 여기서는 자아에서 나오는 악을 뜻합니다. 그리고 서기관은 그런 자아에서 나오는 거짓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주님과 주님이 전하시는 복음의 권위를 의심하는 것은 새 교회를 통해 말씀의 내적 의미가 밝혀질 때, 자아의 악과 거짓에 빠진 사람들이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문자로 된 겉뜻과 그 속에 감춰진 속뜻으로 되어 있습니다. 겉뜻만 있고 속뜻이 없다면, 말씀은 생명이 없는 죽은 것과 같습니다. 마치 영혼과 분리된 육신이 곧 시신인 것처럼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속뜻만 있고 겉뜻이 없으면, 속뜻은 허공 중에 흩어져 버리고 말 것입니다. 내용물만 있고, 담을 그릇이 없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은 겉뜻과 속뜻이 모두 중요하며, 둘 다 신성한 권위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겉뜻만 말씀이고, 속뜻은 말씀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 주님의 권위를 의심하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같은 자들이며, 자아에 매인 사람들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의 말을 들으시고 하신 주님의 말씀입니다. 3절과 4절,

 

3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내게 말하라 4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내적 의미로 볼 때, 주님이 말씀의 속뜻을 표상한다면 요한은 속뜻을 담는 그릇인 말씀의 겉뜻을 표상합니다. 요한을 가리켜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선지자라고 말한 것은 말씀의 겉뜻은 속뜻을 담기 위해 예비한 그릇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요한의 세례란 무엇일까요? 세례는 주님의 교회에 입문하는 것, 즉 회개와 거듭남의 삶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을 뜻하며, 추상적 의미, 곧 속뜻으로는 선, 또는 인애, 즉 체어리티(charity)의 삶을 뜻합니다. 그에 비해 요한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말씀의 겉뜻을 뜻하고, 속뜻으로는 진리, 또는 신앙을 뜻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요한의 세례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삶이 하나라는 새 교회의 신앙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체어리티의 삶은 없더라도 신앙, 즉 믿음만으로 능히 구원받을 수 있다는 신앙과는 반대되는 신앙이지요. 따라서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주님께서 물으시는 것은, 신앙과 체어리티의 삶이 하나라는 신앙이 하나님으로 온 것이냐, 아니면 인간이 사사로이 만든 것이냐 물으시는 것입니다. 주님 당시 유대 교회나 오늘날의 주류 교회들은 말씀을 임의로 왜곡, 체어리티의 삶은 빼고,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걸 가르칩니다.

 

※ 지금까지 개신교 안에서 신앙생활을 해온 제가 볼 때는 위 문장처럼 노골적으로 체어리티의 삶을 빼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아마 대부분의 새 교회 목회자들은 개신교 경험이 거의 없거나 있어도 잠깐 다니신 것만 있어 그 안에 깊숙이 있어 본 적이 없으셔서 이러시는 것 같습니다. 개신교 관련, 스베덴보리의 표현들을 보면, 살짝 무슨 중간이라는 게 없어 보이거든요... 다만 에베소서 다음 본문을 근거로 행위, 즉 체어리티의 삶을 덜 강조하거나 막연히 ‘뒤따라오는 것’ 정도로만 인식할 뿐이지요.

 

8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엡2:8, 9)

 

다만 신앙이냐 체어리티냐, 둘 중 하나를 택하라는, 양자택일식 접근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스베덴보리가 전하는 흥미로운 일화가 하나 있어 옮깁니다. ‘이신칭의’(以信稱義, 믿음으로 의롭게 됨)를 창안한 마틴 루터(1483-1546)를 영계에서 만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믿음 만에 의한 '이신득의'(위 이신칭의의 다른 말)라는 독단교리가 성언(聖言, ‘말씀’)에서 유래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총명에서 창안한 것이라는 확신을 하게 되었을 때, 주님, 체어리티, 참믿음, 자유의지, 그리고 속량에 관해 성언에 의한 새 교육을 받기를 원하였다. 그는 마침내 새로운 교회가 주초를 놓아야 할 진리들에 찬동하며, 점차적으로 그 교리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가 새로운 교회의 진리들을 획득하는 데 따라 가끔 자기의 옛 견해가 성언에 직접 반대되는 것이라고 자조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내가 믿음 만에 의한 득의에 내포되어 있는 다른 독단교리들, 곧 영적인 것들에 있어서 자유의지의 부정, 체어리티의 영적 본질의 부정 따위를 설교했다는 것을 이상히 여기지 마시오. 왜냐하면 내 목적은 로마 카톨릭으로부터의 분리였으니 그렇게 하지 않고는 그 목적이 달성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오류를 범했다는 것을 이상히 여기지 않고, 오히려 한 광인(狂人, 미치광이, 루터 자신을 말함)에 의해 다른 사람들이 따라서 광인이 된 것, 곧 이 독단교리 안에 내포된 사상들이 명확히 성서와 모순된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던 그들이 이상할 따름이요.'

 

여기서 그는 자기 옆에 서 있는 약간의 유명한 교리학자들을 향해 경멸의 눈길을 던졌다. 이어 나는 천사들에게 루터가 믿음 만에 의한 득의 교리로 자신들을 굳힌 다른 많은 자들보다 훨씬 전에 회심되었다고 알려주었다. 이런 루터의 회심이 가능했던 이유는 그가 젊어서 기독교 개혁이 시작되기 전에 체어리티의 중요성에 관한 교리에 정통해 있었기 때문이다. 또 그가 글로나 설교들로 체어리티를 훌륭하게 가르칠 수 있었던 것은 믿음만이라는 교리가 그의 겉 사람에게는 심겼으나 그의 속 사람 안에는 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루터와는 달리 젊어서부터 믿음 만에 의한 득의에 찬동하는 논조로 체어리티의 영적 성질에 반대하고, 스스로를 그 교리에 다진 자들의 경우는 다르다. 나는 삭소니 후작과 대화한 적이 있는데, 그는 루터와 세상에서 사귄 사람이다. 그는 말하기를 '루터는 겉으로는 체어리티를 믿음과 분리시켜, 구원하는 것은 체어리티가 아니라 믿음이라고 하였으나 이는 로마 카톨릭 종도들 때문에 그리하였고, 그 실제에 있어서는 체어리티를 믿음으로부터 분리한 것을 강하게 비난했다.'고 하였다. 이 후작은 축복받은 자들 가운데 있다...

 

즉 루터가 현 개신교가 그토록 붙들고 있는 ‘이신칭의’ 교리를 만든 것은 로마 카톨릭 때문이었으며, 실제로 그는 사후 영계에서 스베덴보리를 만나 이 사실을 자백하고, 돌이켰다는 얘기입니다.

 

제 설명은 여기까지 //

 

그러면서, 즉 ‘오직 믿음(Sola Fide)의 기치 아래 주님이 새 교회를 통해 밝히시는 말씀의 내적 의미를 진리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물으시는 것은 말씀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정작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주님을 부정하는 자들의 위선을 주님께서 꼬집으신 것입니다. 그러자 그들이 다음과 같이 의논합니다. 5절로 7절,

 

5그들이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로부터라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6만일 사람으로부터라 하면 백성이 요한을 선지자로 인정하니 그들이 다 우리를 돌로 칠 것이라 하고 7대답하되 어디로부터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요한이 말씀의 외적 부분인 진리와 신앙을 뜻한다면, 세례는 말씀의 내적 부분인 선과 체어리티의 삶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그 둘은 떼려야 뗄 수가 없는 관계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의 고민이 거기 있습니다. 요한의 세례를 인정한다는 건 진리와 선, 신앙과 체어리티의 삶이 하나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동안 믿음 만의 신앙을 가르친 자들은 진리와 선, 신앙과 체어리티의 삶을 분리시켰다는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요한의 세례가 인간으로부터 왔다는 것은 신앙과 체어리티의 삶이 하나라는 신앙은 참된 신앙이 아니라 이단에 속한 사람들이 사사로이 만든 신앙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들을 영원히 떠날 것입니다. 백성들이 돌로 치는 것은 그런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돌로 치는 건 그들의 주장이 거짓임이 밝혀지는 것이고, 그리하여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들을 정죄하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도 저렇게도 대답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어디로부터인지 알지 못하노라’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8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하셨습니다. 양심을 따르지도 않고, 진리를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들은 주님과 말씀의 권위에 대해 아무리 말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양심에 따라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합리성, 즉 겉 사람과 속 사람을 연결하는 중간이 열리고, 이를 통해 말씀의 내적 의미와 그 속에 계신 주님의 권위를 인정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새 교회의 가르침, 그러니까 주님이 스베덴보리를 통해 밝히신 가르침에 의하면, 말씀의 겉뜻만으로도 구원에 관해 꼭 필요한 진리들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이를테면 신체의 다른 부분은 옷으로 가려져 있지만 손과 발만은 그대로 노출되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끊임없이 우리 내면의 성전에서 말씀의 속뜻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 이유는 말씀의 속뜻이야말로 다시 오신 주님이시고, 마지막 때 보내주시기로 한 또 다른 보혜사 성령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속뜻을 통해 우리는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아들이신 예수, 그리고 성령이 왜 한 분 주님이신지를 알 수 있습니다. 말씀의 속뜻을 통해 왜 믿기만 하면 안 되고, 그 믿음에 기반한 체어리티의 삶을 살아야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고, 받아들이더라도 일부만 받아들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내면에 영적 합리성이 아직 열리지 않아서이고, 이는 곧 자아의 방해가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자아가 문제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그것을 주님의 권위를 의심하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로 그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같은 악하고 거짓된 것이 없는지 늘 살피고, 주님과 함께 그것들을 몰아내야 하겠습니다. 그때 주님으로부터 진리가 강처럼 흘러들어와 광야와 같은 마음을 적셔 살아나게 할 것입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이 교회의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눅3:8)

 

아멘

 

 

 

2022-05-29(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06-23(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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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16(D1)-주일예배(2548, 눅19,45-48),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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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4-06-16(D1)-주일예배(2548, 눅19,45-48),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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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집은 기도하는 집의 속뜻

 

 

45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46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47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이 그를 죽이려고 꾀하되 48백성이 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 어찌할 방도를 찾지 못하였더라 (눅19:45-48)

 

 

기도에 의존하면 안 되는 이유는 하나님으로부터 하는 기도에는 그것이 유익한 것일지 어떨지 하는 것은 주님만이 아신다는 생각과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자는 기도를 들어주실지 말지는 주님께 맡기고, 주님이 겟세마네의 가장 가혹한 시험 중에 말씀하신 대로 나의 뜻이 아니라 주의 뜻을 이루시길 기도해야 한다. (AC.8179, 이순철 역) ...prayer is not to be relied upon. For in prayer from the Divine it is always thought and believed that the Lord alone knows whether it is profitable or not; and therefore the suppliant submits the hearing to the Lord, and immediately after prays that the will of the Lord, and not his own, may be done, according to the Lord’s words in His own most grievous temptation at Gethsemane (Matt. 26:39, 42, 44).

 

39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42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44또 그들을 두시고 나아가 세 번째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마26:39, 42, 44)

 

오늘 전해드릴 말씀은 주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일이 있기 전에 주님과 제자들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을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주님이 예루살렘으로 오시는 도중, 감람산 근처에 오셨을 때, 제자들에게 맞은편 마을에 가면 아무도 타지 않은 나귀 새끼가 묶여 있을 터이니 풀어서 끌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가서 보니 정말 나귀 새끼가 묶여 있어 그것을 풀어 끌고 옵니다. 그리고 자기들의 옷을 벗어 나귀의 등에 깐 다음, 주님을 거기 태워 예루살렘 성을 향해 옵니다. 여기까지가 앞 절의 내용입니다. 이 말씀에서 주님과 제자들에게 일어나는 일련의 일들은 영적으로는 교회의 마지막 때, 주님에 의해 새 교회가 세워지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첫째로, 감람산 맞은편 마을은 믿음, 그러니까 신앙(faith)만 중시하고, 인애, 곧 체어리티(charity)의 삶을 가벼이 여기는, 이른바 외적인 교회를 뜻합니다. 감람산은 사랑과 체어리티를 나타내고, 맞은편은 반대를 뜻하구요, 마을은 교회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거기 매여있는 나귀 새끼는 외적 교회의 진리인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뜻합니다. 매여있다는 것은 문자적 의미에 매여 내적 의미가 밝혀지지 않은 상태를 의미합니다. 셋째, 제자들이 나귀 새끼를 풀어 끌고 왔다고 했는데, 이 말의 의미는 새 교회를 통해 비로소 말씀의 내적인 의미가 밝혀지는 것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주님의 제자들은 마지막 때 주님이 세우시는 새 교회의 사람들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넷째, 제자들이 옷을 벗어 나귀 위에 깔고 주님을 태웠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새 교회의 사람들이 말씀의 문자적인 의미와 그것을 통해 깨우친 내적 진리를 가지고 주님을 섬기고, 또한 이웃을 섬기는 걸 의미합니다. 제자들의 옷은 새 교회 사람들이 이해하는 말씀의 내적 의미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앞 절에서 살핀 본문은 교회의 마지막 때, 참된 진리가 ‘오직 믿음’의 교리를 가진 외적인 교회로부터 신앙과 체어리티의 신앙을 가진 내적인 교회, 즉 새 교회로 옮겨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 이 설교 원본에 있는 ‘믿음’과 ‘인애’(仁愛)를 저는 가급적 ‘신앙’과 ‘체어리티(charity)로 수정하여 쓰고 있습니다. ‘믿음’은 개신교적 표현, ‘오직 믿음’이나 ‘믿습니다! 아멘!’ 같을 때만 그대로 사용하겠습니다. ‘인애’의 경우, 왠지 ‘체어리티’의 더욱 풍성한 뉘앙스를 많이 놓치는 것 같아 그렇습니다.

 

새 교회 교인이라고 처음부터 내적인 신앙을 가지는 건 아닙니다. 그분들 역시 새 교회로 오기 전에는 말씀의 문자적 의미가 진리의 전부라고 믿었고, 또 주류교회들의 신앙인 ‘오직 믿음’의 교리만이 진정한 신앙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밝혀주신 말씀의 내적 의미를 통해 신앙만이 아니라 신앙과 사랑이 함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보면 새 교회로 오기 전 그들의 신앙이 감람산 맞은편 마을에 묶여 있어 아직 아무도 태운 적이 없는 나귀 새끼와도 같은 신앙이라면, 새 교회로 온 후의 신앙은 그 매인 상태에서 풀려난 나귀 새끼가 주님을 태우고 예루살렘으로 힘차게 가는 것과도 같은 신앙이라고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도착, 성전으로 들어가시니 그곳에는 장사하는 자들이 가득했습니다. 누가복음에는 그냥 장사하는 자들이 있었다고 하지만, 마태복음 21장 12절에는 돈을 바꿔주는 자들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이 성전에 가득히 들어와 있었다고 합니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고 (마21:12)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는 영적으로 어떤 사람일까요? 하나님의 거룩한 것인 선과 진리를 가지고 사적인 욕심을 채우는 자들입니다. 이를테면 돈을 바꿔주는 자는 진리를 가지고 사욕을 채우는 자이고, 비둘기를 파는 자는 선을 가지고 욕심을 채우는 자입니다. 진리를 가르치는 목회자가 교인들의 구원에는 뜻이 없고, 높은 지위나 재물을 모으는 데만 관심이 있다면 그는 장사꾼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또 교회를 위해 열심히 봉사하는 사람 중에 그 목적이 사적 이득이나 명예를 얻는 데 있다면 그런 사람도 영적으로는 장사꾼에 불과합니다. 새 교회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본인 신앙의 순수함에 따라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 다음은 어떻게 이렇게 성전 안에 장사하는 자들이 득실댈 수 있었을까 하는 그 배경 이야기입니다.

 

...성전 벽 남쪽의 더블 게이트를 통해 들어가면 왕의 행각 지하를 거쳐서 성전 뜰 밖으로 나오게 된다. 밖으로 나오면 바로 왼쪽에 예수님 당시 대제사장이었던 안나스와 가야바가 직영하던 부스가 있었다. 가야바는 안나스의 사위다.

 

이 상점에서 성전 제사에 필요한 물건, 즉 소, 양, 비둘기, 밀가루, 올리브 기름, 포도주, 나무 등을 팔았고, 성전세로 바칠 반 세겔을 바꾸는 환전상도 이곳에 있었다. 이 상점은 대제사장인 안나스 가문이 직영으로 운영했고, 여기서 구입한 제물만 성전 제사에 적합한 규격품으로 인정받았다. 당연히 가격은 시중가의 몇 배나 비쌌고, 이들은 엄청난 폭리를 취했다.

 

성전 뜰에서는 물건을 사고파는 상행위를 할 수 없었지만, 안나스의 직영 상점은 원래의 성전 뜰인 마카베오 성전산의 바깥인 헤롯 성전산에 위치했기 때문에 법적으로 따지면 모세의 율법을 어긴 것은 아니었다. 이렇듯 성전을 중심으로 한 당시의 종교적 기득권층은 교묘하게 법망을 피해 가며,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채우고 있었다...

 

(류모세 저, 열린다 성경 성전 이야기)

 

※ 오늘 본문에서는 ‘대제사장들’이라는 복수 표현, 그리고 위 이야기에서는 ‘당시 대제사장이었던 안나스와 가야바’라는, 이런 좀 이해하기 힘든 표현들은, 왜냐하면 대제사장은 본래 한 명이어야 하니까요, 당시 극도로 부패, 혼란스러웠던 상황을 암시하는 표현들입니다.

 

※ 헤롯 성전은 원래의 성전인 스룹바벨 성전을 확장한 성전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역사를 성전 시대로 나누는데요, 먼저 솔로몬 성전 건축부터 멸망까지를 1차 성전 시대(BC.960-586)라 하고, 스룹바벨 성전 건축부터 AD 70년, 헤롯 성전 함락까지를 2차 성전 시대(BC.515-AD.70)라고 합니다.

 

주님께서 장사하는 자들을 보고 어떻게 하셨을까요? 45절과 46절에는 그것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45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46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주님께서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주님을 모욕하고 폭행할 때도 묵묵히 참으셨던 분입니다. 그러나 장사하는 자들이 성전을 점령한 것을 보시고 참지 못하고 무섭게 그들을 내쫓으셨습니다. 주님이 그렇게 하신 이유는 단지 혈기를 누르지 못해서가 아니라 진리에 의해 교회가 정화되는 모습을 보여주시기 위해섭니다. 진리는 자체로 악과 거짓을 흩어버리는 힘을 가집니다. 그러므로 거듭나기를 진심으로 원하는 사람이라면 그에게는 진리에 대한 순수한 애정이 꼭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장사하는 자들을 성전에서 내쫓으시며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셨습니다. 그와 관련해 계시록 해설 325번 글은 ‘예배의 첫째는 체어리티의 삶이고, 둘째는 기도다’라고 합니다. 기도는 자신을 돌아보며 주님 앞에 죄를 고백하는 일이며, 또 죄를 이길 힘을 구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진실한 기도가 없으면 체어리티의 삶을 살 수 없고, 체어리티의 삶이 없으면 진실한 기도를 드릴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두 가지 예배가 모두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 앞에 모습을 드러낸 성전에는 기도와 체어리티의 예배는 없고, 오로지 장사하는 자들 뿐이었습니다. 주님이 그 모습을 보시고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신 것입니다.

 

본문 47절에는 주님께서 장사하는 자들을 쫓아내신 후의 성전의 모습을 이렇게 말합니다.

 

47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이 그를 죽이려고 꾀하되

 

신앙인들의 내면에 있는 교회 안에는 진리를 방해하거나 파괴하려는 여러 종류의 도둑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정체는 지옥으로부터 자아를 통해 흘러들어오는 악한 욕망과 거짓된 망상들입니다. 그것들은 주님에 의해 일시적으로 쫓겨났다가도 경계가 느슨해지면 다시 들어와 어떻게 해서든지 진리를 파괴하려고 합니다. 본문에 주님을 죽이려고 기회를 엿보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바로 그런 악과 거짓들입니다. 제사장은 본래 사랑과 선을 표상하지만 여기서는 진리를 파괴하는 악한 욕망을 뜻하고, 서기관은 진리를 방해하는 거짓된 망상을 뜻합니다. 진리에 대한 순수한 애정을 가진 사람은 진리를 통해 쉬지 않고 주님과 대화하면서 그런 악과 거짓들의 훼방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본문에는 그것을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라는 표현으로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렇게 주님께서 가르치실 때, 48절에는,

 

48백성이 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 어찌할 방도를 찾지 못하였더라

 

백성의 영어식 표현은 people인데, people의 속뜻은 진리, 또는 진리에서 비롯한 애정을 뜻합니다. 따라서 백성이 주님에게 귀를 기울이는 것은 새 교회 사람들의 진리의 애정이 주님을 향하여 열려 있다는 것이고, 그러므로 주님께 복종한다는 뜻입니다. 귀를 기울이는 것은 복종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복종할 때 악하고 거짓된 영들은 우리를 공격할 수 없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주님을 죽이려 꾀하나 방도를 찾지 못한다는 게 그런 것입니다. 요즘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이 많이 발전해서 그것만 있으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모두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젊은 사람이나 나이 든 사람이나 계속해서 스마트폰만 들여다봅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신앙인들은 그들과 좀 달라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스마트폰 속에 있는 세상의 일에 집착하다 보면 말씀을 가까이하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별거 아닌 거 같아도 이러한 것들이 진리에 대한 애정을 빼앗아 갑니다. 진리에 대한 애정의 크기에 따라 진리를 파괴하는 악한 영들이 들고 일어나기도 하고 죽은 듯 잠잠하게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리에 대한 애정이 크고 순수한 만큼 우리의 겉 사람은 합리성과 가까워지고 합리성을 통해 속 사람 안에 계신 주님과 가까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이 ‘합리성’이라는 것은 영어로는 rational이라 하며, 우리의 겉 사람과 속 사람 간 가교 역할, 다리 역할을 하는 기능입니다. 쉬운 말로는 ‘이성’(理性, reason)으로 이해하셔도 됩니다. 어떤 사안, 어떤 진리에 대한 설명이 낯설지만, 그러나 매우 합리적일 때, 우리는 보다 쉽게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 수용하게 되는 걸 생각하시면 됩니다. 다음은 이에 대한 보다 깊은 설명입니다.

 

늘 말씀드리는 것처럼 사람의 내면 가장 깊은 곳에는 주님이 거처하시는 곳, 즉 속 사람이라는 마음이 있고, 가장 바깥쪽에는 겉 사람이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에는 합리적 사람, 또는 합리성이라는 마음이 있어 속 사람과 겉 사람을 서로 연결하는 일을 합니다. 합리성과 겉 사람이 서로 연결되어 있어야 주님은 합리성을 통해 겉 사람 안으로 오셔서 그 속에 있는 악하고 거짓된 것들을 몰아내실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겉 사람은 합리성과 만나 서로 결합할 수 있을까요? ‘천국의 비밀’ 3030:2번 글에 의하면,

 

합리성의 근본은 선이지만 그것이 겉으로 나올 때는 진리이다. 선은 내적인 경로를 통해 합리성 안으로 유입되지만, 진리는 외적 경로를 통해 유입된다. 선과 진리는 그렇게 합리성 안에서 하나로 결합한다. (AC.3030:2, 이순철 역) The genuine rational is from good, but comes forth [existit] from truth. Good flows in by an internal way; but truth by an external way. Good thus conjoins itself with truth in the rational,

 

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합리성이라는 의식은 선과 진리로 형성되는데, 합리성을 이루는 선은 주님에게서 오고, 그것과 결합할 진리는 겉 사람으로부터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합리성을 형성하는 진리는 어떻게 마련할 수 있을까요? 좀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그것은 외적인 경로를 통해 흘러들어옵니다. 즉 겉 사람 안에는 기억이라고 하는 지식의 창고가 있는데 거기서부터 흘러들어온다는 겁니다. 사람의 기억 속에는 세상의 지식이나 말씀으로부터 얻은 지식 등 수많은 지식이 있습니다. 외적 경로를 통해 합리성 안으로 유입되는 진리란 이를테면 그러한 지식들을 말합니다. 단지 세상적인 흥미나 명예를 위해 그런 지식을 습득한다면, 그것은 진리에 대한 애정이 아닙니다. 지식을 추구하되 주님과 이웃을 섬길 목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진리에 대한 애정입니다. 그 애정이 기억 속에 있는 지식을 소환해 합리성의 선과 결합하도록 만듭니다. 그때 비로소 영적인 합리성을 소유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주시는 영적 합리성은 세상의 합리성과는 전혀 다릅니다. 신앙인들은 그런 합리성을 통해 진리를 파괴하려는 악과 거짓과 싸워 이길 수 있습니다. 반복해서 말씀드리지만, 진리에 대한 순수한 애정이 있어야 합니다. 합리성의 선은 오염된 진리와는 결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의 진리가 주님을 향하고 있는지, 아니면 자아와 세상을 향하고 있는지를 늘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자아로부터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기도하도록 항상 힘써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예수께 말하되 그들이 하는 말을 듣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 (마21:16)

 

아멘

 

 

 

 

2022-05-15(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06-16(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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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09(D1)-주일예배(2547, 눅19,37-44), '예루살렘 성을 보며 우시는 주님'.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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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4-06-09(D1)-주일예배(2547, 눅19,37-44), '예루살렘 성을 보며 우시는 주님'.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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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성을 보며 우시는 주님

 

 

37이미 감람산 내리막길에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들이 본 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38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39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40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41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42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43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44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눅19:37-44)

 

 

세상에 계실 때 주님은 표상(representatives)과 표의(significatives)로서 존재하셨다. 그것은 주님 스스로 천국과 교회에 속한 최초의 것이면서 동시에 마지막의 것이 되기 위해서였으며, 그렇게 해서 최초의 것으로부터 마지막의 것들을 다스리고, 또한 그것들을 (쓸모에 따라) 배치시키기 위함이었다. (계시록해설 405:24, 이순철 역) The Lord when in the world was in representatives and significatives, in order that He might be in the ultimates of heaven and the church, and at the same time in their firsts, and thus might rule and dispose ultimates from firsts, and thus all intermediates from firsts through ultimates; representatives and significatives are in ultimates. (AE.405d:24)

 

 

지난 주일에는 주님께서 제자들을 시켜 맞은편 마을에 있는 나귀 새끼를 끌고 오라고 하신 일과 제자들이 나귀의 등에 옷을 깔아 그 위에 주님을 모셨다는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오늘은 그 말씀에 이어 그 후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본문 37절과 38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37이미 감람산 내리막길에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들이 본 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38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제자들이 주님이 하신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찬송했다고 합니다. 여기, 주님이 하신 일이란, 첫째, 교회의 마지막 때 주님께서 새 교회를 통해 말씀의 내적 의미, 곧 속뜻을 열어주신 일입니다. 말씀에는 그것을 ‘주님의 제자들이 매여 있는 나귀 새끼를 푸는 것’으로 묘사했지요. ‘나귀 새끼’의 속뜻은 내적 의미가 숨겨져 있는 말씀의 문자적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하신 두 번째 일은, 새 교회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를 가지고 이웃을 섬기고, 나아가서는 주님을 섬길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의 속뜻입니다.

 

정리하면, ‘주님의 제자들’은 교회의 마지막 때 주님이 세우시는 새 교회에 속한 사람들을 뜻하고, ‘나귀 새끼’는 가장 낮은 진리인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그리고 ‘제자들의 옷’은 그보다 높은 영적 진리인 이웃 사랑의 진리를, 끝으로 ‘그 위에 앉으신 주님’은 가장 높은 진리인 천적 진리, 즉 주님에 대한 사랑을 가르치는 진리를 뜻합니다.

 

마지막 때 새 교회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이 같은 일들은 주님께서 당신의 신적 선에서 비롯한 신적 진리의 능력으로 이루시는 일입니다. 그래서 본문에는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들이 본 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였다’고 하고 있습니다. 말씀에서 ‘주의 이름’은 주님에게서 나오는 생명인 진리와 선, 또는 신앙과 사랑을 뜻하는데, 매일 같이 자신의 이익만 생각하고, 이웃에는 관심이 없던 사람들이 주님의 은혜로 눈이 열려 말씀의 문자 안에 감춰진 내적 진리를 볼 수 있게 되고, 그 진리의 힘으로 나보다 이웃을 생각하고 주님을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이룰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기뻐하며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39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제자들이 예수를 향해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라고 찬양하자 바리새인들이 주님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라고 말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유대교회의 지식인들이었지만 속뜻으로는 외적인 교회 안에 있는 위선자를 뜻합니다. 그들을 위선자라 하는 이유는 누구보다도 말씀에 대해 많이 알고 있고 신앙이 좋은 것 같지만, 사실은 주님을 전혀 믿지 않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주님이 행하시는 기적을 수없이 보면서도 끝내 주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 사람들이었기에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라며 예수를 찬송하는 제자들의 모습이 마땅치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마치 신성을 모독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그들이 주님을 ‘선생’이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말씀에서 ‘선생’은 진리를 뜻하는데요, 그러므로 주님을 선생으로 부른 것은 주님이 진리 자체이신 분이라는 걸 그들이 이미 알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주님을 믿지 않았을까요? 주님을 인정하면 그만큼 교회 안에서 자신들의 입지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 이 부분에 대해서는 또 이런 설명도 있는데요, 당시 유대가 처한 정치적 상황으로 본 설명입니다.

 

당시 유대 전체는 로마 식민지요, 또 그 가운데 예루살렘은 대왕 헤롯의 세 아들 중 헤롯 안티파스가 분봉왕으로 있던 곳으로, 로마는 그 당시 지중해 연안 거의 모든 문명 세계를 정복하였으나 정복지의 거의 모든 문화, 종교를 존중, 반란만 일으키지 않으면 얼마든지 자치를 허락했다. 그러나 로마가 파송, 혹은 세운 속주의 장들이 그 재임 중 한 번이라도 자기가 맡은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나면 그대로 직위해제 되는 원칙이 있어, 특히 반란이 잦은 유대 땅은 분봉왕들이나 로마 총독이나 늘 신경이 곤두서는 곳이었다. 이런 정치적 상황에서 이때가 마침 유월절 시즌으로 당시 전 세계에서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수많은 유대인이 몰려드는 기간이어서 더더욱 정치적으로 민감한 분위기였다. 특히 안티파스의 경우, 즉위하던 해 바로 반란이 터져 큰 문제가 되었으나, 로마에서는 즉위하던 원년에 일어난 일임을 감안, 한번은 봐주기로 하였던 터라 이 기간 그는 더더욱 전전긍긍했다. 이런 상황에서 ‘제자의 온 무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며 무리 지어 다니고 있으니... 그래서 특히 이런 정치적 상황에 훤했던 바리새인들이 아연실색하며 주님께 그런 조언을 한 것이라는...

 

그럴듯하지요? 우리가 말씀을 영적으로 풀 때, 사람들은 이렇게도 풀고, 오히려 이런 풀이가 더 그럴듯하게 와닿으며 사람들이 선호한다는 사실에, 혹시 사람들의 호응과 반응에 더 촉각을 곤두세우는 설교자, 목회자라면 설교를 어떤 식으로 준비해야 하나 심각한 고민을 하게 될 것 같습니다. 참고로, 신, 구약성경을 저런 식으로 풀어 시리즈로 낸 저 저자는 저런 관점의 책들로 많이 유명해졌고, 일약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전 세계적으로 유명 초청 인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천사들은 말씀을 읽을 때, 말씀의 이 지상 배경 및 당시 정치, 경제 등 국제 정세, 그리고 등장인물과 장소 등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도 없고, 그들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다고 합니다. 그들은 내적 존재이며, 천국은 내적 상태의 나라라 말씀도 그 안에 담긴 속뜻, 즉 아르카나(arcana, 秘義, 주님이 말씀에 불어넣으신 천국의 비밀)만 보인다고 합니다. 하여... 주님을 가르치며, 천국에 대한 올바른 소개와 인도의 책임이 있는 설교자, 목회자로서 저는 무슨 고민할 것도 없이 후자의 길을 걸을 생각입니다. 물론 우리는 아직 몸 안에 머물며, 이 세상에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이기에, 무조건 영적이고 내적이기만 하는 건 무리가 있지요. 말씀을 속뜻으로 풀되 필요하면, 저런 설명도 곁들이는 균형과 지혜가 필요하다는, 그런 생각을 저는 갖고 있습니다. 다만 제 역량이 많이 부족하여 그런 설교 준비에 많이 미흡한 게 안타깝지만 말입니다.

 

자, 그럼 계속해서, 주님께서 그들의 말을 들으시고, 4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40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이 사람들’은 주님의 제자들을 가리키는 말로, 내적 의미로는 주님이 세우신 새 교회에 속한 사람들을 뜻합니다. 그리고 ‘돌들’은 진리를 뜻하는데, 여기서는 새 교회의 진리를 뜻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교회의 마지막 때, 새 교회가 참된 진리에 대해 증거하지 못한다면 진리 스스로 증거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모든 진리는 스스로 자신을 증거하는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도 세상에 계실 때, 당신 자신에 대해, 천국과 교회에 대해, 그리고 거듭남과 시험에 대해 끊임없이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진리가 스스로를 증거하는 모습입니다. 주님은 진리 그 자체이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 당시 정황상 바리새인들의 저런 조언과 충고도 나름 일리 있어 보임에도 불구, 주님은 전혀 개의치 않으시는 듯 말씀하십니다. 저도 저럴 수 있었으면 좋겠지만... 저런 상황에서 나는 과연 저럴 수 있을까 고민됩니다. 주님의 도우심과 붙들어 주심을 간구합니다.

 

41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42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말씀에서 ‘(, city)은 교회의 교리를 뜻하지만 여기 ‘예루살렘 성’은 타락한 유대교회의 교리를 뜻합니다. 주님께서는 왜 성을 보고 우셨을까요? 교회 안에 신앙과 사랑이 사라지고, 그렇게 해서 교회가 황폐해지는 것을 내다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우시는 것’은 무너져 가는 교회에 대한 연민과 자비를 나타냅니다. 주님께서 성을 향해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평화란 어떤 것입니까? 주님의 종 스베덴보리의 증언에 따르면 주님이 오시기 직전 천국에는 고요함이나 평화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지옥의 세력이 팽창해 천국과 지옥의 균형이 깨졌기 때문입니다. 천국에 평화가 없다면 그것에 대응하는 지상의 교회에도 평화가 있을 수 없습니다. 교회 안에 평화가 없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교회가 지옥의 영들에게 사로잡혀 더 이상 진리를 말하고 선을 행할 수 없는 상태에 있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억류된 것처럼 영적 자유가 없는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그 상태에서 인류는 아무도 구원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지옥을 완전히 정복하시고, 그 능력으로 천국과 교회의 질서를 회복하셨습니다.

 

주님은 지옥이 팽창해 천국의 일부를 오염시킬 때도 그냥 두셨습니다. 주님께서 능력이 없어서 그러셨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단 한마디의 말씀으로도 지옥을 당신의 발아래 굴복시킬 수 있는 분이십니다.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왜 주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았을까요? 영계에서 지옥의 세력이 커진 것은 지상의 사람들이 영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들을 대신해 인간의 몸을 입고 지옥과 싸워 이겨 그 능력으로 천국과 지옥 그리고 지상의 교회를 다스리시기를 원하셨습니다.

 

※ 많은 개신교인은 이런 말씀을 드리면 대부분 그런 게 성경 어디에 나오느냐면서 마뜩잖아합니다. 이런 태도가 시작되면 바로 마음의 창, 내면이 닫혀 천국의 입류를 받지 못하기 때문에 모든 게 중단됩니다. 그러므로 내 안에서 뭔가 반감이 시작될 때, 객관적으로 그 내용이 주님께 해가 되는 내용이 아니라면 그 평가는 주님께 맡기시고 쿨하게 반응하시기 바랍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천진난만하게 반응하듯 말이지요. 그것이 마음을 지키는 것이며, 그런 태도가 안전한 태도입니다.

 

주님은 스스로 높이 앉아 인간에게만 지옥을 이기라 요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와 같은 인간, 즉 인성을 입으시고, 직접 지옥과 싸워 이기심으로써 거듭나는 모든 이들의 본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것이 주님의 사랑입니다.

 

새 교회의 가르침에 의하면 주님의 시험은 인간의 시험과는 비교할 수 없는 혹독한 시험이었다고 합니다.

 

※ 시험의 난이도는 사랑의 대상 수에 비례합니다. 한 사람을 사랑할 때와 두 사람을 사랑할 때, 가족 전체, 직장 전체, 교회 전체 등등, 그러니 인류 전체를 품고 사랑하고자 하시는 주님을 대적하고자 지옥 전체가 달려드니 그 난이도, 그 지독, 그 혹독함이 어땠겠습니까?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는 것만큼 큰 사랑이 어디 있겠습니까? 주님은 인간에게 당신의 생명을 내어 주는 그런 시험을 기꺼이 감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시험을 이기신 그 능력으로 영계와 지상의 질서를 회복하셨습니다. 그때 하늘과 땅의 주님의 나라에 영원한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따라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평화’란 지옥을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성한 선과 진리로 천국과 지옥 그리고 지상의 교회가 완벽하게 다스려지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선과 진리이신 주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이 평화를 얻을 수 있지만, 바리새인처럼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얻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으로 표상되는 유대교회와 모든 타락한 교회들을 향해,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라고 하시며, 우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새 교회를 통해 참된 진리를 끊임없이 보내주십니다. 그러나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아니 너무 적어 희귀할 정도입니다. 몰라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도 있고, 진리인 줄 알면서도 세속의 입장과 지위 때문에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과 그들의 교회는 진리가 주는 평화와 자유를 얻을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43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44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그릇된 교회들의 심판을 나타냅니다. 토둔(土屯, 고대 전쟁 시 함락하고자 하는 성 높이만큼 흙을 쌓아 공격하는 공성법 중 하나)을 쌓는다고 했는데, 원문에는 성벽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벽’은 보통 교리를 뜻하는데, 여기서는 타락한 교회들의 그릇된 교리를 뜻합니다. 그리고 ‘너와 네 자식’은 유대교회 같은 외적인 교회의 모든 것들, 즉 아름다운 예배당과 경건한 의식 등을 뜻합니다. 그것들이 ‘땅에 메어쳐진다’는 것은 그 모든 것들이 무너지는 것을 뜻합니다. 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아 있지 않다’고 했는데, 그것은 그들 교회에 진정한 진리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을 거라는 뜻입니다. ‘’은 진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또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했다’는 것은 그들이 심판의 날이 올 줄 몰랐기 때문에 회개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유대교회는 진리이신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습니다. 그 결과 이교도들, 그러니까 로마에 의해 성전은 철저히 파괴되고, 예배의 표상이었던 희생 제사는 영원히 사라졌습니다. 또한 교회에 속한 사람들, 곧 유대인들은 자신의 땅에서 살지 못하고 온 세상으로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그것이 주님을 인정하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내려진 심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에서는 주님을 받아들인 제자들과 끝까지 주님을 인정하지 않았던 바리새인들의 모습이 대비를 이루고 있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이 열어주신 내적 진리를 통해 이웃을 사랑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삶을 살 수 있었고, 그렇게 해서 영원한 평화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았던 바리새인들은 심판 날에 영원한 죽음을 맞이합니다. 바리새인 중에도 주님이 진리라는 사실을 알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주님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은 주님보다 자신의 자아를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본래 그랬습니다. 애굽에 살 때부터 여호와의 기적을 많이 봤습니다. 애굽을 탈출한 후에는 홍해가 갈라지는 모습과 애굽의 기병들이 홍해의 깊은 바닷속에 잠기는 것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광야로 나와서는 매일 같이 주님이 주시는 만나를 먹었고, 그들 앞에서 구름 기둥과 불기둥이 인도하는 광경을 지켜봤습니다. 그렇게 많은 기적을 경험했음에도 그들은 모세가 잠시 시내산에 올라간 사이에 우상을 만들어 놓고, 노래하고 춤을 췄습니다.

 

주님의 기적을 매일 경험하면서도 마음속에 다른 신을 품는 사람들은 주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자아와 세상에 속한 것은 항상 우리를 유혹하여 주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듭니다. 그러한 것이 바로 우상입니다. 우리 안에 어떤 우상들이 있는지 살펴보고, 그것들을 매일 버려야 하겠습니다. 뜻대로 잘 안될 때는 주님께 고하고, 주님과 함께 그것들을 버려야 합니다. 그러한 것을 버릴 때 시험이 점점 줄어들고, 시험이 오더라도 수월하게 이길 수 있습니다. 선과 진리로 함께하시는 주님께서 모든 것을 이루어 주십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마10:22)

 

아멘

 

 

2022-05-01(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06-09(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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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02(D1)-주일예배(2546, 눅19,28-36), '주가 쓰시겠다'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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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가 쓰시겠다’의 속뜻

 

 

28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29감람원이라 불리는 산 쪽에 있는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30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31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말하기를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 32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그 말씀하신 대로 만난지라 33나귀 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 34대답하되 주께서 쓰시겠다 하고 35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 36가실 때에 그들이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 (눅19:28-36)

 

 

제자들이 자기 옷을 나귀의 등 위에 까는 것은 진리 전체가 가장 높은 재판관이며, 왕이신 주님께 복종하는 것을 뜻한다. (천국의 비밀 9212:6, 이순철 역) By the disciples putting their garments on the ass and her colt was represented that truths in the whole complex were submitted to the Lord as the highest judge and king; (AC.9212:6, 출22:26)

 

 

※ 아래 에피소드는 설교 원본의 에피소드인데 오늘 설교 도입부로 적절해 보여 그대로 사용합니다.

 

지난 주일에는 부목사님과 함께 교회 담벼락과 보도블럭 사이의 땅에다 회양목을 100주 정도 사다 심었습니다. 봄이 되니 돌들 사이로 잡초가 올라오고 행인들이 담배꽁초도 버리고 해서 미관상 좋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금방 끝날 줄 알았는데 막상 시작하니 꼬박 이틀이 걸렸습니다. 나무를 심기 전에 땅을 팠는데 그 아래 건축 폐기물들이 잔뜩 묻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난번 건축 공사를 할 때 시공하는 사람들이 시멘트나 벽돌 조각 같은 것들을 거기 묻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걷어낸 건축 폐기물이며 오염된 흙이 폐기물 처리용 마대 자루로 20부대가 넘게 나왔습니다.

 

서두에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진리는 관념이 아니라 행동이며 일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늘 말씀드리는 것이지만, 주님은 선이 있는 진리, 또는 진리가 있는, 진리를 동반한 선으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주님의 선은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 목적을 가르쳐 줍니다. 그리고 주님의 진리는 목적에 맞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그러므로 신앙인들은 무슨 일을 하든 주님과 함께 일을 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일은 향기가 나고 주변을 아름답게 만듭니다. 그러나 인간 혼자서 하는 일은 오히려 주변을 오염시킵니다.

 

오늘 본문은 주님이 어떻게 내적 교회의 사람들과 함께 계시는가 하는 내용입니다. 본문 28절과 29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28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29감람원이라 불리는 산 쪽에 있는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예루살렘은 성전이 있는 곳이므로, 속뜻으로는 교회, 또는 하나님의 진리를 뜻합니다. 그에 비해 감람산은 하나님의 사랑, 또는 선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말씀에서 감람나무, 즉 올리브나무와 산은 모두 하나님의 사랑과 선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님이 감람산을 거쳐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것은 주님이 신적 사랑에서 비롯한 신적 진리로 당신의 교회 안으로 오시는 것을 뜻합니다. 주님은 사랑이 있는 진리, 사랑을 동반한 진리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사랑 없는 진리는 개인의 삶을 변화시키지 못하며, 그러므로 죽은 진리입니다. 반대로 사랑이 있는 진리는 사람의 의지를 움직여 삶을 변화시킵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있는 진리를 소유한 사람이라야 주님과 함께하는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감람산 근처에 오셨을 때, 제자 둘을 부르셨습니다. 내적으로, 즉 속뜻으로 볼 때, 주님의 제자들은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뜻합니다. 그리고 둘이라고 한 것은 선과 진리의 결합을 뜻합니다. 선과 진리의 결합이란, 진리를 배우는 대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부르신 제자 둘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로서 진리를 배우는 대로 행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30절 말씀입니다.

 

30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맞은편’은 한글 성경 표현이고, 영어로는 ‘against’라고 되어 있는데, ‘against’라는 말은 주님을 대적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마을은 예루살렘 성 바깥에 있으므로 외적인 교회를 뜻합니다. 외적 교회와 내적 교회가 있습니다. 외적 교회는 웅장한 예배당과 경건한 예배 의식 같은, 예배의 외적인 것, 외향적인, 외모를 중시하는 교회입니다. 그에 반해 내적인 교회는 예배의 내적인 것, 즉 진리에 따른 삶을 중시하는 교회입니다. 따라서 맞은편 마을은 예배의 내적인 것은 없고, 외적인 것만 있는 교회를 뜻하고, 그러므로 주님을 대적하는 교회입니다.

 

※ 현실적으로 이렇게 완전 100% 외적이기만 한 교회는 없습니다. 논지를 또렷이 하기 위해 이런 대비를 하시는 것 같습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그리로 가면 아무도 타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을 터이니 풀어서 끌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나귀 새끼의 속뜻은 자연적 진리를 뜻합니다. 자연적 진리(natural truth)란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포함한 자연적 지식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영적 지식이 아니라는 것이죠. 말씀의 문자적 의미나 세상 지식을 새 교회에서는 ‘기억 지식(knowledge of memory)이라고 부르는데, 본문에서는 그런 지식을 ‘나귀 새끼’로 표현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아무도 타지 않았다는 것은 그 지식이 주님과 이웃을 섬기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외적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말씀을 배우기만 할 뿐 삶에 적용하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내적 합리성이 닫혀 주님으로부터 오는 천국 빛이 차단되고, 그리하여 말씀의 내적인 것들을 볼 수 없게 됩니다. 그러니까 말씀의 문자적인 의미 이상의 것을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맞은편 마을에서 나귀 새끼를 끌고 오는 것은 교회의 마지막 때, 이런 외적 교회들에 대한 심판을 뜻합니다. 외적 교회들에 대한 심판이란, 외적 교회들이 가지고 있던 말씀 지식이 주님에 의해 내적 교회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사용하지 않는 진리를 주님께서 걷어 들여 잘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외적 교회에 대한 심판입니다. 그것은 마치 사후에 심판받을 때, 주님께서 악한 사람들에게 있는 선과 진리를 모두 빼앗아 선한 사람들에게 주시는 것과 같습니다. 다음은 이와 관련, 오늘 본문 앞 본문인데요, 거기서

 

주인이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눅19:26)

 

라고 합니다. 교회의 마지막 때 말씀의 지식을 빼앗긴 외적 교회의 상태는 어떤 것일까요? 마치 캄캄한 어둠 속에 있는 것처럼 말씀을 읽어도 아무 것도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마지막 때에는 외적 교회는 점점 진리에 대해 무지해지고, 내적인 교회는 점점 더 지혜로워집니다.

 

31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말하기를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 32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그 말씀하신 대로 만난지라 33나귀 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 34대답하되 주께서 쓰시겠다 하고

 

주님 말씀에 따라 제자들이 마을에 들어갔습니다. 그랬더니 과연 나귀 새끼가 매여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그 매인 것을 푸는데 그 주인들이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고 합니다. 제자들이 ‘주께서 쓰시겠다’ 하고 나귀를 끌고 왔습니다.

 

나귀 새끼가 매여 있다는 것은 말씀의 문자적 의미 속에 감춰진 내적 의미가 외적 교회 사람들에게 열리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제자들에 의해 매여 있는 나귀가 풀리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주님이 세우신 새 교회에 의해 말씀의 내적 의미가 밝혀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때 나귀의 주인이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고 말합니다. 이것은 외적 교회들이 새 교회를 통해 밝혀지는 내적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자 주님의 제자들이 ‘주께서 쓰시겠다’고 했습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일까요? 진리를 가지고만 있고 쓰지 않는 사람은 결국 진리를 모두 빼앗길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을 위해 진리를 쓰는 사람이라야 진리가 점점 더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35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 36가실 때에 그들이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

 

제자들이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 나귀 새끼의 등에 덮고 그 위에 주님을 태웠습니다. ‘천국의 비밀’ 9212:6항을 보면,

 

제자들이 자기 옷을 나귀의 등 위에 까는 것은 진리 전체가 가장 높은 재판관이며, 왕이신 주님께 복종하는 것을 뜻한다.

 

라고 합니다. 여기서 제자들의 겉옷(garment)은 내적 교회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진리를 뜻하고, 나귀 새끼는 진리가 감춰져 있는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나귀 위에 옷을 깔고, 그 위에 주님을 태우는 것은 주님의 교회에 속한 사람들이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통해 깨우친 진리를 가지고 가장 높은 진리이신 주님을 섬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장 낮은 진리인 말씀의 문자적인 의미는 그보다 더 높은 영적 의미(spiritual meaning)를 섬겨야 하고, 영적 의미는 가장 높은 진리인 천적 의미(celestial meaning)를 섬겨야 합니다. 말씀의 영적 의미가 이웃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느냐에 관한 진리라면, 천적 의미는 주님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느냐에 관한 진리입니다. 우리는 자연계의 지식과 모든 걸 가지고 이웃을 사랑해야 하고, 궁극적으로는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한 애정들은 단절되면 안 되고, 서로 통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제자들이 겉옷을 벗어 나귀의 등에 덮고 그 위에 주님을 태우는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말씀을 통해 진리를 배우는 것은 옷이나 장식처럼 남에게 진리를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주님과 이웃을 섬기기 위해서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주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것일까요? 첫째는, 악을 멀리하되 그것이 진리에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에 멀리 해야 합니다. 다른 이유로 악을 멀리할 때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건강을 위해, 또는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 등등의 이유로 그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한 일입니다. 둘째는, 주님과 이웃을 위해 선을 행해야 합니다. 선을 행할 때는 자기 마음대로 해선 안 되고, 언제나 진리에 따라 행해야 합니다.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진리에 부합하는 일인지 잘 모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주님께 여쭤봐야 합니다. 그때 주님께서 진리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그렇게 하나하나 주님께 물어가면서 일할 때 우리가 하는 모든 일 속에 정성이 담기고, 주님의 질서가 담깁니다. 그리고 그 일을 통해 많은 사람이 혜택을 보게 됩니다. 직장의 일이든 교회의 일이든, 아니면 개인의 일이든 모든 일 가운데 나귀 위에 자기의 겉옷을 깔고 그 위에 주님을 모시는 것과 같은 겸손과 정성이 깃들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주님께서 우리의 삶 가장 낮은 곳까지 오셔서 우리를 다스리시며, 각자의 삶을 향기 나는 삶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모든 성도 위에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슥9:9)

 

아멘

 

2022-04-24(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06-02(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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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26(D1)-주일예배(2545, 눅19,12-24), '열 므나 비유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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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므나 비유의 속뜻

 

 

12이르시되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13그 종 열을 불러 은화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 하니라 14그런데 그 백성이 그를 미워하여 사자를 뒤로 보내어 이르되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나이다 하였더라 15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돌아와서 은화를 준 종들이 각각 어떻게 장사하였는지를 알고자 하여 그들을 부르니 16그 첫째가 나아와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17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 18그 둘째가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의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만들었나이다 19주인이 그에게도 이르되 너도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 하고 20또 한 사람이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보소서 당신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 두었었나이다 21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 22주인이 이르되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심판하노니 너는 내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로 알았느냐 23그러면 어찌하여 내 돈을 은행에 맡기지 아니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와서 그 이자와 함께 그 돈을 찾았으리라 하고 24곁에 섰는 자들에게 이르되 그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 하니 (눅19:12-24)

 

 

진리를 기억 속에만 가지고 있고, 삶 안에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사후에 진리를 모두 빼앗겨 버리지만, 그러나 기억과 삶 안에 모두 진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지혜가 영원히 늘어난다. 그래서 말씀에서는 은화 한 므나를 가지고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 사람에게서 그것을 빼앗아 열 므나 남긴 사람에게 준다고 말한다. (계시록 해설)

 

 

오늘 본문은 심판에 대한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종들에게 과제를 내어 주신 다음, 심판 때에 과제를 충실히 이행한 착한 종은 천국으로 보내시고, 그렇지 않은 악한 종은 지옥에 던지신다는 내용입니다. 주님에게 심판받을 때, 악한 종이라고 꾸지람을 듣는다면 그 사람 마음은 어떨까요? 버나드 쇼(아일랜드, 1926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는 자신의 묘비명에 ‘오래 살다 보면 이런 일이 생길 줄 난 알았지!(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라고 적었다고 하는데, 우리도 그렇게 후회를 할까요, 아니면 이를 갈며 주님께 대들까요? 생각만 해도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은 우연히 태어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그 목적은 세상 사는 동안 진리를 열심히 배우고 익혀 천국에 들어갈 만한 인격을 갖추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그것을 어느 귀인이 먼 나라로 가면서 종들에게 과제를 부여하고 떠나는 것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먼저 12절과 13절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12이르시되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13그 종 열을 불러 은화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 하니라

 

여기서 귀인은 주님을 뜻합니다. 그리고 귀인의 종 열 명은 주님의 교회에 속한 모든 사람을 뜻합니다. 열(10)이란 수는 모든 걸 뜻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종들에게 은화 열 므나를 나눠주었다고 합니다.

 

※ 참고로, 므나는 주님 당시 사용되던 은으로 된 화폐인데, 100 드라크마에 해당하며, 당시 로마 화폐인 데나리온과 함께 품꾼들 하루 품삯에 해당하였다고 하니, 한 므나는 백 일치 품삯으로 작은 돈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월 300 일용직의 경우, 대략 천 정도에 해당한다 하겠습니다.

 

이런 므나의 그 속뜻은 말씀을 통해 배우는 선과 진리의 지식을 뜻합니다. 따라서 주인이 종 열 명에게 열 므나를 나눠줬다는 것은 주님께서 교회에 속한 사람들에게 말씀을 주시고, 그것을 통해 선과 진리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시는 걸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은화를 가지고 장사를 하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선과 진리의 지식을 삶에 적용하여 더 많은 선과 진리를 소유하라는 것입니다. 진리를 배우기만 하고 행하지는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배우는 대로 열심히 행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전자의 경우는 선과 진리가 늘어나지 않고 언제나 그대로이지만, 후자의 경우는, 즉 진리를 배우는 대로 행하는 사람들은 장사꾼이 재물을 모으듯 선과 진리가 점점 많아집니다. 왜냐하면 선을 행할 때마다 주님으로부터 새로운 선과 진리들이 끊임없이 흘러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신앙인들이 그렇게 선과 진리의 지식을 불려 나가는 것이 바로 종들이 주인의 돈으로 장사를 해 이문을 남기는 것입니다.

 

주인이 한참 후에 돌아와 종들이 어떻게 장사를 하였는지 보고자 하여 종들을 불렀습니다. 첫 번째 종이 주인에게 나아와 보고합니다.

 

15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돌아와서 은화를 준 종들이 각각 어떻게 장사하였는지를 알고자 하여 그들을 부르니 16그 첫째가 나아와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17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 18그 둘째가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의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만들었나이다 19주인이 그에게도 이르되 너도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 하고

 

첫 번째 종은 한 므나를 가지고 열 배를 남겼고, 두 번째 종도 다섯 배를 남겼습니다. 왜 이렇게 차이가 벌어질까요? 그 이유는 사람마다 영적인 상태와 능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것에 대해 ‘천국의 비밀’ 2967번 글 2번 항은 ‘모든 사람은 각자의 상태와 능력에 따라 거듭난다(but each according to his capacity and his state;)라고 말합니다. 예를 들면, 같은 시기에 같은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더라도 각 사람의 영적인 상태와 능력이 다르며, 그에 따라 믿음과 사랑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열 배 이문을 남긴 종은 다섯 배 남긴 종에 비해 영적 능력이 우월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가끔 왜 나는 다른 사람보다 의지가 약할까, 왜 다른 사람보다 말씀을 이해하는 능력이 부족할까 하면서 고민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통해 사람마다 영적인 상태와 능력이 다르다는 걸 알았습니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겁니다. 유전적인 요인도 있겠고, 그동안 살아온 삶의 방식과도 관련이 있을 겁니다. 중요한 건, 주님이 주신 선과 진리를 가지고 어떻게 하면 이문을 남겨 주님께 돌려드리느냐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한 므나를 가지고 열 배를 남긴 사람에게는 열 고을을, 그리고 다섯 배를 남긴 사람에게는 다섯 고을을 다스릴 권세를 주십니다.

 

※ 이건 차별이 아닌 오히려 똑같이 공평하게 대하시는 겁니다. 왜냐하면, 열 배의 역량을 가진 사람한테는 열 배, 다섯 배의 역량을 가진 사람한테는 다섯 배, 즉 각자의 입장에서는 100%, 감당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부어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섯 배의 역량을 가진 사람에게 열 배로 부으시면 그 사람한테는 오히려 큰 고통이 됩니다. 내면이 안 열려 오히려 천국 질서가 뒤집힌 사람에게 그가 원한다고 천국 문턱에라도 들어가 보게 하는 순간, 그는 마치 불 위에 놓인 마른오징어처럼 온몸이 뒤틀리며, 죽을 것만 같은 상태가 되어 그만 후닥닥 원래 있던 지옥으로 도망치듯 뛰어내리는 걸 보면 말입니다. 이런 건 천국 내에서도, 즉 일층천에서 이층천, 이층천에서 삼층천을 희망하는 천사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각 천사마다 자기 내면이 열린 곳에 있는 것이 천국이요,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열 고을과 다섯 고을을 상으로 받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말씀에서 고을(city)은 ‘남은 자(remains, 한글 번역 시 음역 그대로 ‘리메인스’로 표기)라고 하는, 선과 진리의 의식이 있는, 속 사람 속 깊은 내면을 뜻합니다. 따라서 열 고을과 다섯 고을을 상으로 받는 건 진리에 따라 사는 사람에게 리메인스가 많아지는 것을 뜻합니다.

 

리메인스란, 사람이 아주 어릴 때, 주님께서 속 사람 깊은 곳에 심어놓으신 선과 진리의 의식, 또는 선과 진리에 관한 애정을 뜻합니다. 리메인스는 주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어린아이의 영 속으로 주님으로부터 흘러들어오다가 아이에게 자의식이 생기기 시작하면 유입이 멈춥니다. 그리고 성인이 되어 신념에 따라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는 삶을 살 때, 다시 흘러들어옵니다. 반대로 선과 진리를 멀리하고 악을 행하는 사람한테는 리메인스가 파괴되어 점점 고갈이 됩니다. 그러므로 리메인스는 개인의 영적 상태에 따라 많아지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합니다. 리메인스가 있기 때문에 사람은 자기 자신보다 주님과 이웃을 더 사랑할 수 있으며, 선과 진리를 그 자체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리메인스가 중요한 까닭은 이 리메인스가 없으면 악과 거짓에 저항할 힘을 잃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리메인스가 많아진다는 건 개인의 영적 상태가 점점 강화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씀에는 주님께서 소득의 십분의 일을 십일조로 바치라고 명하시는데, 십일조를 드리는 것 역시 리메인스가 많아지는 걸 뜻합니다. 10이란 수가 리메인스와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이 십일조를 단순히 소득의 십분의 일을 바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십일조의 의미는 선과 진리라는 영적 재물이 늘어날 때, 리메인스 또한 그만큼 늘어나는 걸 뜻합니다. 그러니까 십일조를 드리는 건 내 걸 가지고 주님께 드리는 게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과 진리를 오늘 본문의 종들처럼 여러 배로 주님께 돌려드리는 것이며, 그때 리메인스라고 하는 주님의 생명이 각자의 내면에 쌓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위해 한번 악을 멀리하고, 한번 선을 행할 때마다 내면에 리메인스가 쌓이고, 그리하여 점차 거듭나기 좋은 상태로 바뀐다는 걸 알아야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종이 와서 주님께 고했습니다.

 

20또 한 사람이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보소서 당신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 두었었나이다 21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

 

세 번째 종은 주인의 명에 따라 장사를 하지 않고, 돈을 수건으로 싸두었다가 그대로 가지고 왔습니다. 그러면서 주인이 엄한 사람이라 심지 않아도 거두시는 분으로 생각했다고 변명합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일까요? 주인이 준 은화를 수건에 싸두는 건 선과 진리의 지식을 기억 속에만 넣어두고 행하지는 않는 걸 의미합니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이 ‘오직 믿음’, 즉 믿음만으로 구원받는다고 배워 행위, 즉 삶의 실천을 소홀히 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해,

 

※ 여기서부터는 설교 원본을 수정, 제가 조금 보충하였습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엡2:8, 9)

 

라는 에베소서 구절을 댑니다. 그러나 이는 하나만 본 것입니다. 모든 행위는 겉으로 보기에는 같아도 그 출발은 다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정말 주님을 사랑해서이고, 다른 하나는 사실은 자기를 사랑해서이기 때문이지요. 위 에베소서 구절은 후자의 경우입니다. 즉 바울은 에베소서 및 그 근방 교회들에게 자기를 사랑해서 선행을 하고, 그걸 근거로 자기 구원의 공로로 여기는, 그런 걸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 선행은 다음과 같기 때문입니다.

 

1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3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고전13:1-3)

 

참고로, 거듭나는 세 종류의 사람 중에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이 있습니다. 이 둘의 차이는, 영적 인간은 영생을 추구하다가 주님을 만나는 사람이고, 후자인 천적 인간은 주님을 사랑하다가 영생을 덤으로 얻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자연적인 사람인데, 이 사람은 이런 일, 곧 주님과 영생에 도무지 관심이 없고, 그냥 선하고 착하기만 했던 사람입니다.

 

(여기까지)

 

오직 믿음’, ‘오직 은혜’의 교리에 충성, 정작 ‘주님을 사랑하여 선을 행하는 삶’은 소홀히 하는 대부분의 기독교, 개신교인들의 모습은 마치 주인이 엄격한 사람이라 장사를 하다 돈을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안 되기 때문에 돈을 수건에 싸두었다고 하는 오늘 본문, 세 번째 종의 모습과도 같은 것입니다. 종의 말을 듣고 주인이 말합니다.

 

22주인이 이르되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심판하노니 너는 내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로 알았느냐 23그러면 어찌하여 내 돈을 은행에 맡기지 아니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와서 그 이자와 함께 그 돈을 찾았으리라 하고

 

말씀에는 진리를 배워 머리에만 쌓아두는 것을 재물을 수건에 싸서 보관하거나 땅에 묻어두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반대로 진리를 삶으로 실천하는 것을 장사하는 것, 또는 은행에 맡겨 이식(利殖, 이자에 이자가 붙어 재물이 늘어가는 것)을 하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당신의 뜻을 따르지 않은 종에게 악한 종이라고 꾸짖으시며, ‘너는 내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로 알았느냐 그러면 어찌하여 내 돈을 은행에 맡기지 아니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와서 그 이자와 함께 그 돈을 찾았으리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과 관련, 이사야에서는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사55:1)

 

고 하십니다. 여기서 포도주와 젖은 각각 진리와 선을 뜻하고, 값없이 사서 먹으라는 것은 스스로 하는 것처럼 진리와 선을 행하되 주님으로부터 행하라는 뜻입니다.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스스로의 힘으로는 선을 행할 수 없고, 주님을 의지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즉 선을 행할 때는 즐겁게, 마치 자원하여, 그러니까 자기가 원해서, 하고 싶어서 하듯 하면서도, 하고 나서는 그 모든 공을 오직 주님께 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인이 곁에 서 있는 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24곁에 섰는 자들에게 이르되 그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 하니

 

세상 살 때 진리를 많이 안다 자랑하면서도 정작 행하지는 않았던 사람들은 나중에 주님 앞에 가면 가지고 있던 진리를 모두 빼앗기고 지옥에 떨어집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열심히 진리를 따라 살았던 사람들은 기왕에 가지고 있던 진리와 선 말고도 더 많은 선과 진리를 얻어 천국으로 올라갑니다. 그러니까 진리가 없는 사람은 가진 것마저 모두 빼앗기고, 상대적으로 진리가 많은 사람은 넘치도록 주님께서 채워주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악한 종에게서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가진 자에게 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공부하면서 진리를 안다고 모두 구원받는 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진리에 따라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말씀에서는 그것을 주인이 멀리 떠나면서 종들에게 은화 한 므나씩을 주면서 장사를 하라고 명하는 것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새 교회인이라면 누구나 진리에 따라 살기를 원하고 매일 같이 거듭나기를 원합니다. 그럼에도 그것이 뜻대로 잘되지 않는 것은 사람마다 영적 상태가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열 므나를 남긴 사람이나 다섯 므나를 남긴 사람이나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꼭 열 므나를 남기려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힘닿는 대로 진리에 어긋나는 일은 하지 않고, 대신 진리에 부합하는 일은 열심히 하면 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주님이 주신 한 므나를 여러 배로 만들어 주님께 돌려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중에는 한 므나를 그대로 가지고 가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주님도 구원하실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변명합니다. 주님이 워낙 엄격하셔서 인위적인 어떤 선도 허락하시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말이고, 내심으로는 다른 생각을 한 것입니다. 어떤 생각일까요? 본문 14절에는 그것에 대해

 

그런데 그 백성이 그를 미워하여 사자를 뒤로 보내어 이르되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나이다 하였더라

 

라고 알려주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그들은 주님을, 또는 진리를 왕으로 섬기려는 마음이 애초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주인이 준 은화를 수건에 싸둔 종은 바로 그런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진리와 자기 생각이 충돌할 때, 언제나 진리는 버리고, 자기 생각대로 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도 진리와 선이 늘어나지를 않았습니다. 많은 신앙인이 그런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시간을 허비합니다. 그러므로 일상에서 주님을 왕으로 인정하는지, 아니면 주님보다 자신을 높이는 것은 아닌지 항상 스스로를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스스로 하는 것처럼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되 주님으로부터 하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사55:1)

 

아멘

 

2022-04-10(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05-26(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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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19(D1)-주일예배(2544, 눅19,1-10), '삭개오 본문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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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4-05-19(D1)-주일예배(2544, 눅19,1-10), '삭개오 본문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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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개오 본문의 속뜻

 

 

1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2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3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4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5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쳐다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6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7뭇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8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9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10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눅19:1-10)

 

 

일반적으로 성령이 의미하는 바 하나님의 능력과 작용(The Divine energy and operation)으로 개혁과 거듭남(reformation and regeneration)이 있고, 그에 따라 (영적) 쇄신과 살아남, 성화와 의롭게 됨(renovation, vivification, sanctification and justification)이 있으며, 또한 그로 인해 악이 씻어지고 죄가 사해지며(purification from evils, forgiveness of sins), 최종적으로는 구원(salvation)이 있다. (참된 기독교 142, 이순철 역) The Divine energy and operation, which are meant by the Holy Spirit, are, in general, reformation and regeneration; and in accordance with these, renovation, vivification, sanctification and justification; and in accordance with these latter, purification from evils, forgiveness of sins, and finally salvation. (TCR.142)

 

 

오늘은 저 유명한 삭개오에 대한 이야기와 그 의미, 곧 그 속뜻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본문 1절과 2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1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2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여리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요단강을 건넜을 때 처음 마주친 곳입니다. 그러니까 가나안에 가까운 곳이지만, 그렇다고 아직 가나안 땅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리고의 속뜻은 보통은 교회 밖의 이방인을 뜻하거나, 또는 사람들을 교회로 이끄는 선과 진리에 속한 지식을 뜻하지만, 오늘 말씀에서는 참된 진리를 방해하는 거짓 교리를 뜻합니다. 이를테면, 주님 당시 유대교회의 교리인 장로의 전통이나 오늘날 믿음만의 교리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시는 건 어쩔 수 없이 태생적으로 잘못된 교리 안에 있지만,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참된 진리를 배우기를 갈망하는 사람들을 만나러 가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사람들 가운데 삭개오라는 세리가 있었던 것입니다. 세리가 무슨 뜻인지는 성문서(聖문서, ※ 스베덴보리의 모든 저작들을 가리키는데요, 스베덴보리에게 이 모든 기술(記述)을 허락하시고, 또 친히 계시, 딕테이션하게 하신 분이 주님이셔서 사람들의 일반적 저작들과는 구분하려고 이렇게 부르는 것 같습니다.)에서 명확히 밝히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를 통해 우리는 세리가 어떤 사람인지, 그 속뜻을 짐작해 볼 수 있는데요, 다음은 위 비유의 본문입니다.

 

9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0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눅18:9-14)

 

이 본문의 세리를 보면, 그는 그 역시 비록 잘못된 교리 안에 있지만, 겸손하고 늘 자신을 돌아보는 진실한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말씀에는 삭개오가 부자라고 했습니다. 부자의 속뜻은 말씀에 대한 지식이 많은 사람을 뜻하는데요, 이러한 의미들을 통해 삭개오가 어떤 사람인지를 유추해 볼 수 있겠는데요, 정리하자면, 그는 태생적으로, 즉 태어나길 당시의 잘못된 교리 안에서 태어났지만, 그럼에도 자신을 돌아보며 반성하는 겸손한 사람이었고, 또 말씀을 항상 가까이하여 참된 진리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었겠구나 하는 걸 말입니다. 그런 삭개오이니 그런 그가 진리 그 자체이신 주님에 대해 궁금해하는 건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키가 작아 인파 속에서는 도무지 주님을 볼 수 없었고, 그래서 할 수 없이 길가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갔습니다. 참고로, 이 돌무화과나무는 이전 번역인 개역한글에서는 ‘뽕나무’로 번역된 나무입니다. 삭개오의 그런 모습을 3절과 4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3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4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삭개오가 키가 작다고 합니다. 말씀에서 키가 작다는 것의 속뜻은 자연적 합리성만 있고, 영적 합리성은 아직 열리지 않은 사람을 뜻합니다. 영적 합리성은 주님이 주시는 합리성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적 합리성을 소유한 사람은 주님이 주시는 특별한 지각, 즉 퍼셉션(perception, ※ 주님으로 말미암는 통찰력인데요, 태고교회 때 존재했던, 그리고 지금도 천국에서는 이 퍼셉션으로 천사들과 주님 간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주님의 신성인 선과 진리를 따로 학습하지 않고도 바로 직관하는 능력입니다.)으로 말씀을 읽을 때, 그 의미를 바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연적 합리성은 인간의 지식에 의존하는 합리성입니다. 그래서 자연적 합리성 안에 있는 사람은 인간의 지식을 바탕으로 말씀의 의미를 추론하여 이해합니다. 가령, 히브리어, 헬라어 같은 원어를 가지고 말씀을 풀고자 하는, 그리고 각종 주석이나 세상의 온갖 사례들을 가지고 하고자 하는 이런 일련의 태도들을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사람은 하다 보면, 본의 아니게 결국 자기를 높이게 되는데요, 그런 사람이 영적으로는 키가 작은 사람이며, 삭개오입니다.

 

본문에는 사람이 많아서 삭개오가 주님을 볼 수 없었다고 하지만, 그러나 원문에는 삭개오가 인파에 떠밀렸다(press)고 되어 있습니다. 인파에 떠밀렸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거짓 교리로 인해 합리성이 훼손되는 걸 의미합니다. 말씀에서 군중이나 무리(multitude)는 진리를 뜻하고, 떠미는 건 폭행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합리성이 훼손된 사람들은 참된 진리를 만나더라도 잘 이해하지 못하고, 그래서 받아들이지를 않습니다. 예를 들면, 믿음만의 교리에 젖어있는 사람에게 인애(charity)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고 하면 오히려 그걸 거짓이라고 하는데요, 이를테면, 그런 것이 키가 작은 삭개오가 사람들 속에서 주님을 보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그때 삭개오가 주님을 보기 위해 돌무화과나무 위로 올라갑니다. 이 나무는 바로 이런 열매를 맺는 나무인데요

엄밀히 말하면, 무화과나무하고는 다른 나무이지만, 그 열매가 얼핏 무화과나무의 열매 같아 이렇게 부르는 나무입니다. 이 무수히 열리는 열매들은 그대로 두면 너무나 떫어 나중에 익어도 도저히 먹을 수 없지만, 익기 전 바늘 같은 걸로 구멍을 내고, 거기에 올리브기름을 발라주면 나중엔 달달해져서 먹을 만하게 되는 그런 신기한 나무입니다. 이 나무는 아모스가 자신을 가리켜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라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재배하는 자로서’(암7:14)라 했던 말씀에 나오는 나무인데요, 당시 양을 치던 목자들은 우기에는 그럭저럭 들에서 양을 칠 수 있지만, 건기에는 도저히 방법이 없어 성읍 근방 논으로 들어와 거기 남아 있는, 추수하고 남은 곡식 밑동들을 양들에게 먹여야 하는데, 이때 땅 주인들과 협상, 그 대신 목자들은 이 돌무화과나무에 이 무수히 달린 열매들을 일일이 올리브기름으로 침놓는 일을 하게 됩니다. 이걸 ‘뽕나무를 재배한다’한 것인데요, 그래서 아모스는 자신을 이렇게 소개한 것입니다. 이렇듯 엄밀히 말하면, 다른 나무이지만, 말씀에서는, 그리고 위 두 번째 이미지처럼 실제 무화과나무 열매하고도 비슷하게 생겨 당시 사람들은 이 돌무화과나무도 일종의 무화과나무로 쳐주었으므로 우리도 무화과나무로 보고,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말씀에는 무화과나무(fig tree)나 포도나무, 올리브나무가 자주 등장하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속뜻으로는 신앙인들의 선의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무화과나무는 자연적 선을 뜻하고, 포도나무는 영적 선을, 그리고 올리브 나무는 천적 선을 뜻합니다. 자연적 선은 무엇이고, 영적 선은 무엇일까요? 사회생활을 하면서 행하는 모든 선이 자연적 선입니다. 예를 들면, 질서를 지키고, 이웃에게 예의 바르게 행동하고 하는 것 같은, 이런 선한 행실이 모두 자연적 선입니다. 그러나 똑같은 자연적 선이라도 내적으로 영적인 것이 있고, 영적이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그와 관련해 천국의 비밀 4988번 글 2항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에게 있는 선의 기원은 두 가지이다. 즉 유전적인 것이 있고, 믿음과 인애의 교리에서 비롯한 것이 있다. 유전적인 선은 자연적이지만 영적이지는 않은 선이고, 교리에 따른 선은 자연적이며 동시에 영적인 선이다라고 말이지요. 그러니까 교리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천성적으로 선한 사람이 있는데요, 그런 사람의 선이 바로 자연적이지만 영적이지는 않은 선이고, 교회의 교리에 따라 행하는 선은 자연적이며 영적인 선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삭개오가 돌무화과나무 위에 올라가 주님을 보려고 했다는 것은 그의 선이 자연적이지만 아직 영적이지는 않다는 뜻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의 안에 참된 진리에 대한 갈망이 있었겠구나 생각해 볼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잘못된 교리 안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양심적인 사람들은 자기가 진리라고 믿고 있는 것들에 대해 회의를 느낄 때가 있는데 그런 것이 바로 참된 진리에 대한 갈증이며, 그리고 그것이 진리에 대한 삭개오의 갈증인 것입니다.

 

※ 저 역시 이러한 갈증으로 지난 2022년 12월, 그동안 속했던 지방회를 나왔던 것이며, 또 수도원 역시 거리를 두게 된 것인데요, 지방회에서는 모이면 그저 어디 다니자는 이야기, 무슨 집회에 가자는 이야기, 어느 교회 누가 어떻다더라 등 무슨 친목회, 동호회 수준 같은, 도무지 주님과 천국 이야기는 없는, 그리고 그런 지식도, 관심도 없어 보이는 그런 이야기에 제가 많이 지쳤으며, 물론 참 선하신 분들이 거의 대부분이었지만 말입니다. 수도원 역시 그 심성들이 다르지 않았고, 역시 주님보다는, 그리고 천국보다는 무슨 성인들 이야기, 그리고 남들 모르는 무슨 신기한 이야기들에만, 그래서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혹하게 하는, 그리고 자꾸 처음 원칙과 규칙들을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깨면서 변칙, 반칙을 허용하는, 이름은 ‘봉쇄’이면서, 그러나 사실은 그 누구보다도 세상을 향해 두리번거리며, 혼자 주님을 독대하려 하기보다는 계속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덜 심심하고, 늘 주목의 대상이 되고자 하는, 뭔가 계속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여 그 에너지로 살아가고자 하는 그런 모습 때문에 처음 몇 년을 마음을 다해 다녔으나 결국은 지쳤기 때문입니다. 네, 하여튼 그런 갈증이 저 역시 있었기 때문에, 그로 인해 어쩌면 이렇게 스베덴보리를 만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합니다.

 

자, 다시 이제 마침내 주님이 삭개오를 보셨습니다. 5절과 6절입니다.

 

5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쳐다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6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주님께서 삭개오에게 속히 내려오라 하십니다. 주님은 삭개오의 착한 마음과 진리에 대한 갈증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그의 마음을 두드리십니다. 그러자 삭개오가 급히 내려옵니다. 교리의 오류 속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참된 진리를 만날 때, 처음에는 선뜻 받아들이지를 않습니다. 스스로 높이 앉아 무슨 소리를 하는지 한번 들어 보자 라고 생각합니다. 삭개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돌무화과나무 높은 곳에서 주님을 내려다 봤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음성을 듣자마자 그분이 참된 진리라는 것을 알았지요. 그래서 진리 앞에 황급히 자신을 낮추고, 진리이신 주님을 영접합니다. 그것이 삭개오가 나무에서 급히 내려와 주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참된 진리를 만나게 된 삭개오가 감격해 말합니다.

 

8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삭개오는 세리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마 모르긴 해도 부당하게 세금을 매겨 착복한 일이 그동안 많았을 것입니다. 당시 많은 세리들이 그렇게 해서 부자로 살았는데, 그래서 사람들이 세리를 죄인이라 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로마 통치하에서 동족에게 세금을 거두니 말입니다. 이렇게 잘못된 교리에 빠져 있을 때는 그것이 죄인지 모릅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 열심히 믿고, 헌금 많이 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참된 진리를 만나자 그것이 모두 죄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다 하고,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로 갚겠다 주님 앞에 선언합니다. 영적인 의미로 볼 때, 다른 사람의 재물을 빼앗는 건 이웃에게 잘못된 교리를 전해 결과적으로 그들로부터 진리와 선을 빼앗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는 것은 그 속뜻으로는 물질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받은 진리와 선을 필요한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전하겠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절반은 모든 것을 뜻하는데요, 왜냐하면 절반 안에는 전체의 특성이 모두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절반은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또 네 갑절로 갚겠다고 했는데 이 말은 진리를 말로만 전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도 본을 보이며 전하겠다는 뜻입니다. 말씀에서 넷이란 수는 둘의 배수로 둘과 같은 뜻을 가지며, 그래서 둘이나 넷은 선과 진리의 결합을 뜻합니다. 선과 진리의 결합이란 진리를 믿고, 또한 행하는 걸 의미합니다. 따라서 네 갑절로 갚겠다는 건 진리를 말로만 전하는 게 아니라 행하면서 전하는 걸 뜻합니다. 마태복음 5장 19절에서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셨고, 요한복음 13장 15절에서는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하셨습니다. 삭개오는 주님의 이런 말씀들을 온전히 따르고자 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배우는 사람으로서 아주 반듯하고 아름다운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9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10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주님께서 그 모습을 보시고,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하시고,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고 하십니다. 잃어버린 자가 누굴까요? 아담으로 상징되는 천적인 교회의 지극히 순수하고 선한 사람들입니다. 그 교회가 무너졌을 때, 주님께서는 노아와 그 후 이스라엘 백성들로 상징되는 영적인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마저 주님으로부터 완전히 멀어지게 되자 주님은 직접 세상에 오셔서 지옥의 시험을 이기시고, 거룩한 인간이며 동시에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오신 목적은 삭개오와 같은 사람들을 데리고 영적 교회의 재건은 물론, 궁극적으로는 잃어버린 천적 교회를 되살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바르게 진리를 받아들이는 삭개오의 모습을 보시고,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읽으면서 삭개오를 기뻐하시는 주님의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말씀에서 삭개오는 거짓 교리에 빠진 모든 신앙인을 나타냅니다. 거짓 교리는 신앙인들이 참된 진리를 만나는 것을 방해합니다. 본문에는 그것을 삭개오가 무리 속에서 떠밀려 다니는 모습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가까스로 참된 진리를 만나더라도 이전의 동료들로부터 이단의 진리에 빠졌다는 비난을 받습니다. 삭개오가 주님을 자기 집에 모셨을 때, 무리들이 예수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다 비난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참된 진리를 죄인의 진리라고 조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모든 방해를 딛고, 영적 여리고에서 탈출, 주님의 손을 잡고 구원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우리도 그동안 삭개오와 같은 길을 걸어왔다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이 소중한 진리를 혼자만 알면 안 되고, 필요한 모든 사람에게 전해야 하겠습니다. 진리를 전할 때는 말로만 전하는 게 아니라 주님처럼 행동으로 본을 보이며 전해야 하겠습니다. 그때 성령이 함께하십니다. 이 성령에 대해서는 앞의 ‘참된 기독교’ 142번 글을 다시 보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성령이 의미하는 바 하나님의 능력과 작용(The Divine energy and operation)으로 개혁과 거듭남(reformation and regeneration)이 있고, 그에 따라 (영적) 쇄신과 살아남, 성화와 의롭게 됨(renovation, vivification, sanctification and justification)이 있으며, 또한 그로 인해 악이 씻어지고 죄가 사해지며(purification from evils, forgiveness of sins), 최종적으로는 구원(salvation)이 있다. (참된 기독교 142, 이순철 역)

 

※ 참고로, 저 개인적으로 이해하기는 사람에게 영과 육, 그리고 활동이 있듯, 주님 역시 신성(The Divine)과 신적 인성(The Divine Human), 그리고 ‘신적 에너지와 활동(The Divine energy and operation)이라는 게 있으시며, 이때 이 세 번째가 바로 성령이시구나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을 통해 주님을 느끼며, 그 인격을 감지하는 건, 모든 주님으로 말미암은 것 안에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천사들은 모두 그 얼굴을 늘 주님을 향하는데 이는 그들의 중심 사랑이 주님 사랑이기 때문이며, 그렇게 해서 늘 주님을 대면하여 뵙는 듯한 느낌 가운데 지낸다고 하는데요, 지상에 사는 우리 역시 천사들처럼 주님을 사랑하면, 똑같이 늘 주님을 뵙는 것 같은, 늘 주님 앞에 나아가 그분을 독대하는 것 같은 체험을 하게 되는 그런 것과 같은 것입니다. 아멘

 

주님의 은혜가 이 말씀을 듣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마5:19)

 

아멘

 

 

2022-03-30(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05-19(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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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12(D1)-주일예배(2543, 눅18,35-43),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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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4-05-12(D1)-주일예배(2543, 눅18,35-43),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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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의 속뜻

 

 

35여리고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한 맹인이 길가에 앉아 구걸하다가 36무리가 지나감을 듣고 이 무슨 일이냐고 물은대 37그들이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하니 38맹인이 외쳐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39앞서가는 자들이 그를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40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명하여 데려오라 하셨더니 그가 가까이 오매 물어 이르시되 41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42예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매 43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따르니 백성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니라 (눅18:35-43)

 

 

영적인 질병을 치유하는 믿음은 주님으로부터만 온다. 즉 주님께서는 말씀으로부터 진리를 배워 그것에 따라 사는 사람에게 치유의 믿음을 주신다. (계시록 해설 815:5, 이순철 역) the faith by which spiritual diseases are healed by the Lord can be given only through truths from the Word and a life according to them; (AE.815.5)

 

※ 위 글은 스베덴보리 저, ‘계시록 해설(Apocalypse Explained), ‘내가 보매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니 어린 양 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을 하더라’(계13:11) 속뜻 중 ‘내가 보매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니(And I saw another beast coming up out of the earth,)에 관한 주석 내용 일부 인용입니다.

 

 

복음서를 읽다 보면 주님께서 병자들을 고치시는 모습이 자주 나옵니다. 아시는 것처럼, 주님이 고치시는 병은 육신의 질병이 아니라 영적 질병(spiritual diseases)입니다. 영적인 질병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사후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신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영적 질병이란 어떤 것입니까? 영적 질병은 내적으로는 선과 진리의 불균형으로 인해 생기는 병입니다. 그러니까 선은 있는데 진리가 없거나, 진리는 있는데 선이 없거나 할 때 생기는 병입니다. 영적인 질병들은 종종 육신의 병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열등감이나 우울증, 거만함, 분노 조절 장애, 각종 중독 같은 것으로 나타납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맹인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입니다. ‘맹인’(盲人)이라고 부르는 것은 속뜻으로는, 그가 선은 있는데 진리가 없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진리에 대한 애정은 있는데 진리에 대해 아는 게 없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맹인은 어떻게 눈을 뜰 수 있었을까요? 지금부터 그것에 대해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본문 35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35여리고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한 맹인이 길가에 앉아 구걸하다가

 

여리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막 들어가는 초입(初入, 골목 등으로 들어가는 어귀)에 있는 도시입니다. 그래서 ‘여리고’ 사람들의 영적인 의미, 즉 속뜻은 진리에 대해 무지한 교회 밖 이방인을 뜻합니다. 맹인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길가에 앉아 구걸을 하는 것으로 보아 진리에 대한 애정이 많은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길가에 앉아 구걸하다가’는 진리를 구하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36무리가 지나감을 듣고 이 무슨 일이냐고 물은대 37그들이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하니

 

길가에 앉아 구걸하던 맹인이 많은 사람이 지나가는 기척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무슨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이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대답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선만 있고 진리가 없거나, 또는 진리만 있고 그에 부합하는 선이 없을 때, 사람은 영적인 병에 듭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일종의 시험과도 같습니다. 시련이 있을 때, 종교가 없는 사람들은 종교를 찾게 되고, 종교를 가지고 있지만 확신이 없는 사람은 구원의 진리를 찾아 나섭니다. 그것이 길에 앉아 진리를 구걸하는 맹인의 상태입니다. 그리고 그때 주님을 만나게 되는데, 그것이 영적 맹인이 참된 진리를 만나는 순간입니다. 본문에는 주님을 ‘나사렛 예수’라고 불렀습니다. 나사렛 예수라는 말은 주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주님을 비하(卑下, 스스로를 겸손하게 낮추거나 상대방을 업신여겨 낮춤)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인정하는 사람들에게는 신성한 진리, 또는 구원의 진리라는 뜻입니다. (AC 9144:10). From this it is evident what was signified by the “crown of thorns,” and by his being hailed “King of the Jews,” by “behold the man,” and also by the inscription on the cross, “Jesus of Nazareth, the king of the Jews” (John 19:19, 20); namely, that Divine truth, or the Word, was so regarded and so treated by the Jews, among whom was the church. (That all things done to the Lord by the Jews at his crucifixion signified the states of their church with respect to truth Divine, or the Word, see n. 9093.)

 

38맹인이 외쳐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자기 앞을 지나가는 사람이 나사렛 예수라는 말을 들은 맹인이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쳤습니다.

 

맹인은 주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습니다. 다윗은 평생 이방인들과 싸웠던 사람입니다. 그것은 마치 진리가 거짓을 상대로 치열하게 싸우는 모습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다윗’은 신성한 진리를 표상합니다. 그렇게 볼 때, 주님을 향해 ‘다윗의 자손 예수여’라고 부르는 것은 주님이 신성한 진리 그 자체이신 분이라는 사실을 맹인이 인정하는 것입니다. 대다수의 유대인들이 주님을 나사렛 예수라고 비하할 때, 맹인은 어떻게 그런 믿음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맹인은 그동안 말씀을 통해 진리를 배우려고 했고, 진리를 알면 그대로 살려고 노력한 것이 아닐까요? 그것이 길에 앉아 구걸하는 것의 속뜻이기 때문입니다. ‘’의 속뜻은 진리이기 때문이지요. 그때 주님은 이렇게 그를 만나시기 이전에 이미 그에게 당신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요, 진리 자체인 분이시라는 믿음을 주셨던 것이고, 그런 믿음이 그에게 이미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오늘 주님을 만나자마자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도 진리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를 때가 있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진리를 모를 때는 마음에 평안이 없었지요. 그러다가 우연히 스베덴보리를 만났고, 주님의 사랑과 섭리로 그의 책들에 적힌 내용들이 구원의 진리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은 마치 맹인이 오늘 예수를 보자마자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39앞서가는 자들이 그를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맹인이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큰 소리로 외치자, 본문 39절에는 “앞서가는 자들이 그를 꾸짖어 잠잠하라” 했습니다. 주님을 만나 처음 진리를 배우기 시작할 때는 시련이 많습니다. 진리를 잘못 적용, 실수할 때도 있고, 진리를 가지고 옳으니 그르니 하며 다른 사람과 다투기도 합니다. 진리를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할 때는 수치심과 좌절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것은 죽이 막 끓기 시작할 때와 같이 혼란스러운 모습입니다. 그때 마음 한쪽에서 집요하게 꾸짖는 소리가 들립니다. 지옥의 영들이 비난하고 조롱하는 소리이지요. 그런가 하면, 참된 진리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질시 어린 시선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이런 것들이 앞서가는 자들의 꾸짖음입니다. 이런 일련의 시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맹인은 자신의 병의 원인에 대해 점점 더 분명하게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막연하게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던 기도가 좀 더 구체적인 기도로 바뀝니다. 그때를 40절과 41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40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명하여 데려오라 하셨더니 그가 가까이 오매 물어 이르시되 41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맹인이 주님께 가까이 가는 것은 그동안 희미하게 알고 있던 진리를 점점 분명하게 알기 시작하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때 주님께서 ‘내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맹인은 그동안 그저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은혜를 베푸소서’라고 두루뭉술하게만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 가까이 가면서 병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진리에 대한 무지였습니다. 진리에 대한 무지란, 진리가 아예 없거나, 있더라도 진리만 있고 선은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선 없는 진리는 죽은 진리와 같아 설령 있다 하더라도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 맹인은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구체적으로 대답했습니다. 보기를 원한다는 것은 단순한 진리, 지식에 불과한 진리가 아니라 선이 있는 진리, 선을 동반한 진리를 원한다는 뜻입니다. 선이 있는 진리를 소유할 때라야 진리를 적재적소에 올바로 적용할 수 있고, 또한 진리를 가지고만 있지 않고, 적극적으로 행하기 시작합니다. 진리 안에 있는 선, 곧 주님이 우리를 그렇게 만드시기 때문이지요.

 

42예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매

 

주님께서 맹인의 말을 들으시고, “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과, 선이 있는 진리는 오직 그분에게서만 나온다는 사실을 믿을 때, 영적 고질병이 치유됩니다. 그렇게 맹인의 병이 고쳐진 상태를 이사야서 35장 5절에서는,

 

그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라고 했습니다. 맹인의 눈이 밝아지는 것은 진리에 무지했던 사람들이 진리에 눈을 뜨는 것이고,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리는 것은 진리에 순종하는 힘이 생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리를 알면서도 행하지 못하는 때가 그동안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것은 진리를 아는 것도 아니고, 구원도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면서 주시는 진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가 함께 들어있는 진리이며, 그래서 구원의 진리입니다. 맹인은 그 진리를 통해 눈을 뜰 수 있었고, 삶의 질곡(桎梏, 차꼬와 수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맹인의 그런 상태를 본문 43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43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따르니 백성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니라

 

맹인이 보게 되었다는 것은 그의 병의 원인이던 진리에 대한 무지가 해소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맹인은 그동안 진리를 몰라서 극심한 고통을 겪었습니다. 마음속에 사랑이 없어서 이웃과 잘 지내지 못했습니다. 열등감이나 우울증, 근거 없는 교만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일들이 진정한 진리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주님께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맹인이 진리 없음을 고백하고, 주님께 매달렸을 때, 주님으로부터 치유의 믿음이 흘러들어와 닫혔던 눈이 떠졌습니다. 말씀에는 맹인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예수를 따랐다고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계시록 해설 1210번 글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praising God)은 믿음의 고백과 예배(to confess and worship him)라고 말합니다.

 

Saying, Praise God, all ye his servants, signifies worship of the Lord by those who are in truths. This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praising God,” as being to confess and worship him (of which presently); (계19:5)

 

구원의 진리로 인해 닫혔던 눈이 떠질 때,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진정한 믿음의 고백이 터져 나옵니다. 뿐만 아니라, 믿음에 따라 사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고, 예수를 따라가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에서 맹인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종교적인 믿음이든 개인적인 신념이든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믿음이 모두 구원의 믿음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모든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진리로 밝혀져야 구원의 믿음이 됩니다. 구원의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삶이 즐겁지 않고, 삶 속에서 보람을 느낄 수도 없습니다. 그런 상태가 영적으로 병든 상태입니다. 어떻게 하면 구원의 믿음을 얻을 수 있으며, 영적 질병에서 놓여날 수 있을까요? 계시록 해설 815:5번 글에서는 “영적인 질병을 치유하는 믿음은 주님으로부터만 온다. 주님께서는 말씀으로부터 진리를 배워 그것에 따라 사는 사람에게 치유의 믿음을 주신다.”(이순철 역)고 합니다. 구원의 믿음은 인간에게서 나오지 않고,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에 대해, 계시록 해설 1210번 글은, “사람이 자신에게는 어떤 선도 없고 자신으로부터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며 반면에 모든 선은 주님으로부터 오고 주님만이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할 때 그때 사람은 자아 사랑에 속한 것들을 밀어내고 마음을 연다. 그리고 그때 하나님으로부터 선과 능력이 흘러들어올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when he acknowledges in heart that there is nothing of good in himself, and that he can do nothing of himself, and on the other hand, that all good is from the Lord, and that the Lord can do all things. When man is in this acknowledgment he puts aside what is his own which belongs to the love of self, and opens all things of his mind, and thus gives room for the Divine to flow in with good and with power. 이순철 역)라고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병자들을 고치실 때마다 먼저 ‘네가 나를 믿느냐’ 라고 물으시고, 그다음에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 사실, 곧 이 ‘자기 부인’의 태도가 구원의 출발점, 곧 위 말씀, ‘그때 사람은 자아 사랑에 속한 것들을 밀어내고 마음을 연다. 그리고 그때 하나님으로부터 선과 능력이 흘러들어올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처럼, 주님의 구원하시는 능력, 영적 질병에 걸린 나를 치료하시는 주님의 치료의 광선이 내 안을 환히 비춰 나의 내면, 내 영혼을 충만하게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누구를 주님의 제자 삼으실 때마다 하신 말씀,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눅9:23)

 

처럼, ‘자기를 부인할 것’을 요구하신 것도 그래서입니다. 이것이 곧 ‘네가 나를 믿느냐’의 속뜻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배우신 모든 성도와 이 진리를 사랑하시는 모든 분께 구원의 믿음, 치유의 믿음이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6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7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 (사42:7)

 

아멘

 

2022-03-06(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05-12(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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