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26그들이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것을 붙들어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따르게 하더라 27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28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29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30그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31푸른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 32또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가니라 33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눅23:26-33)

 

 

‘잉태하지 못한 자’와 ‘해산하지 못한 배’는 사랑의 선에 속한 진리가 없는 사람을 뜻하고, ‘먹이지 못한 젖’은 인애의 선에 속한 진리가 없는 사람을 뜻한다. (AE.710:8, 이순철 역) the barren,” and “the bellies that have not borne,” signify those who have not received genuine truths, that is, truths from the good of love, and “the breasts that have not given suck” signify those who have not received genuine truths from the good of charity. (AE.710:8)

 

 

유대 성직자들의 요구로 주님을 심문했던 총독 빌라도는 여러 번 저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눅23:4)

 

14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고 15보라 그가 행한 일에는 죽일 일이 없느니라 (눅23:14-15)

 

나는 그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눅23:22)

 

그러나 저들은 한사코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집요하게 주님을 십자가에 매달기를 원했고, 마침내 빌라도는 손을 들었습니다. 주님을 저들 손에 맡겨 저들 뜻대로 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주님은 십자가를 지고 해골이라 하는 처형장으로 끌려가십니다.

 

26그들이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것을 붙들어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따르게 하더라

 

주님은 그 전날 대제사장의 군사들에게 체포되던 때부터 날밤을 새우시며 욕을 당하시고, 이리저리 끌려다니셨습니다. 그래서인지 주님은 무거운 십자가로 기진하셨고, 주님의 그런 모습을 본 병사들이 행인 중에서 시몬이라는 사람을 붙잡아 주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게 합니다. 말씀에서 시몬이라는 이름은 진리에 대한 순종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제자 베드로의 이름이 시몬인 것도 그런 까닭입니다. 본문에는 시몬에 대해 시골에서 온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킹 제임스 영어 성경 표현이고, 새 교회에서 사용하는 영어 성경에는 밭에서 온 사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 새 교회에서 사용하는 영어 성경은 스베덴보리가 히브리, 헬라 성경을 라틴어로 직접 번역한 성경을 사람들이 나중에 다시 영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기존 성경을 속뜻을 염두에 두고 번역, 자신의 모든 저술에서 그 성경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일부 확인한 바에 의하면, 기존 성경에서 너무 엉뚱하게, 즉 원어대로 번역하기엔 너무 이상한 나머지 살짝 손을 댄 그런 부분들만 바로 잡았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가령, 창세기 2장 16절,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같은 부분인데요, 원래대로라면 ‘열매’를 빼고 그냥 ‘나무는 네가 임의로 먹되’ 해야 합니다. 여기 ‘나무’는 퍼셉션(perception)을 의미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이런 속뜻을 알 수 없었던 번역자들은 나무를 먹는다는 게 너무 이상한 나머지 살짝 보조 설명을 추가한 건데, 이렇게 되면 살짝 정도가 아니라 전체가 흔들리기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새로 번역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 누가복음에는 지금 주님을 둘러싸고 진행되는 일이 하룻밤 사이에 일어나는 일처럼 기술되어 있지만, 문제는 사 복음서 전체를 놓고 보면, 누가복음에는 누락된 다른 일들도 많은데, 그 일이 다 일어나기에는 세 시간 정도로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세 시간이라 함은 만약 이 모든 일이 당일에 일어났다 가정할 경우, 이제 오전 아홉 시면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놓고 학자들 사이에 몇 가지 입장들이 있는데, 아래는 이와 관련한 글 일부 인용입니다. 역사 드라마로 읽는 성경 (류모세 저) 인용입니다.

 

...둘째, 예수님이 금요일 새벽에 체포되신 후 금요일 아침에 심자가형을 언도받았다고 하면 다음과 같은 문제가 발생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시간은 오전 9시였다. 그렇다면 금요일 새벽 체포된 시간이 대략 동틀녘인 6시라고 할 때, 새벽 6시부터 아침 9시까지의 짧은 3시간 동안 다음에 나오는 모든 사건이 벌어져야 한다.

 

안나스의 심문 - 가야바의 심문 - 산헤드린의 유죄 판결 - 유다의 후회와 죽음 - 1차 빌라도의 심문 - 헤롯 안티파스의 심문 - 2차 빌라도의 심문 - 십자가형 언도 - 로마 군병들의 조롱 -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심 - 도중에 쓰러지고 구레네 시몬이 대신 십자가를 짐 - 마침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에 도착...

 

※ 천사들은 내적 존재여서 지상 만물이 모두 그 내적 의미로만 보입니다. 예를 들면, 지상에 걸어 다니는 모든 사람 역시 그들 눈에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즉 그 안에 주님의 신성, 곧 주님으로 말미암은 선과 진리 여부에 따라 빛으로, 또는 까만 덩어리로 보이는 식이지요. 심지어 갓난아이조차 그렇습니다. 그들에겐 사람들의 이름이나 외모, 출신 지역이나 배경 등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읽을 때, 그들에겐 ‘시몬’이라는 이름의 내적 의미만 보이지, 그가 베드로인지, 여기 구레네 시몬인지는 중요하지도, 보이지도 않습니다. 시간(time) 개념 또한 그렇습니다. 천국은 시공간의 나라가 아닌, 상태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이라는 표현이 중요한 까닭은, 밭은 진리의 씨가 뿌려지는 교회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시몬이 밭에서 왔다는 것은 그가 교회에 속한 사람임을 나타냅니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우리는 시몬이 어떤 성격의 사람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즉 시몬은 교회에 속한 사람으로 진리에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새 교회 가르침에 의하면 주님은 세상에서의 모든 시험을 홀로 싸워 이기셨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는 왜 시몬이 주님의 시험에 참여하는 것으로 그렸을까요? 그 이유는, 첫째, 시험을 통한 주님의 영화(glorification)와 인간의 거듭남(regeneration)은 원인과 결과처럼 서로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의 영화가 없으면 인간의 거듭남도 없는 것입니다. 둘째, 인간이 시험을 당할 때 혼자 싸우는 것 같지만 사실은 주님과 함께 싸우기 때문이며, 셋째, 시험에 관한 이런 진실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라야 주님과 함께 시험에서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시몬이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27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주님께서 처형장으로 끌려가실 때, 한 무리의 여인들이 주님을 따라가며 통곡하고 슬퍼했습니다. 말씀의 문자적인 뜻으로만 보면, 이 여자들은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처럼 보입니다. 실제로도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속뜻으로는 좀 다른데요, 속뜻으로는, 이들은 주님 당시 유대교회, 또는 더 나아가 말세에 타락한 교회들을 나타냅니다. 말씀에서 ‘여자’, ‘여인’은 교회를 뜻하기 때문인데요, 그렇다면 그들은 왜 그렇게 통곡하고 슬퍼했을까요? 영적 의미로, 통곡하는 건 교회 안에 사랑이 없다는 뜻이고, 애통해하는 건 교회 안에 진정한 진리, 또는 진정한 신앙이 없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주님 당시 유대교회는 이른바 장로의 전통이라는 인간의 교리를 만들어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그때 교회로부터 신성한 선과 진리들이 사라지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여인들이 주님을 따라가며 통곡하고 애통해하는 것,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것’은 교회가 그렇게 황폐해진 것을 의미합니다.

 

28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앞 절에 나오는 여인이나 여기 ‘예루살렘의 딸들’은 모두 마지막 때 기울어져 가는 교회들을 뜻합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향해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하십니다. 여기서 ‘자녀’는 교회들이 생산해 내는 모든 선하고 진실한 것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우는 것’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선과 진리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하시는 것은 앞으로 교회 안에 선과 진리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교회가 말씀의 진리를 거짓으로 변질시킬 때, 필연적으로 주님과의 연결이 끊어집니다. 그것은 더 이상 주님에게서 선과 진리를 받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교회들이 영적으로 황폐해지는 것은 그래서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9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이 말씀에 대해 ‘계시록 해설’ 710번 글 8항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는 사랑의 선에 속한 진리가 없는 사람을 뜻하고, ‘먹이지 못한 젖’은 인애(仁愛, charity)의 선에 속한 진리가 없는 사람을 뜻한다.

 

오래전부터 한국 여성들은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을 죄로 여겼습니다. 심지어 이혼 사유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제 왜 그랬는지 짐작됩니다. 그러니까 한국인들에게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건 자연적인 의미 이상의 그 무엇이었던 겁니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이 진리와 관련이 있다면, 앞에서 말한 사랑의 선에 속한 진리(truths from the good of love)와 인애의 선에 속한 진리(truths from the good of charity)의 차이는 뭘까요? 전자는 진리의 바탕에 주님에 대한 사랑, 또는 선에 대한 사랑이 있는 것을 의미하고, 후자 즉 인애, 체어리티(charity)의 선에 속한 진리는 진리의 바탕에 이웃 사랑, 또는 진리에 대한 사랑이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주님 사랑에 속한 진리를 가진 사람은 일을 할 때 그 일의 목적인 선을 먼저 생각하고, 다음에 일의 절차와 방법인 진리를 따집니다. 그에 비해 이웃 사랑에 속한 진리를 가진 사람은 일의 목적이나 유익 같은 선보다는 절차와 방법의 합리성, 즉 진리를 먼저 고려합니다. 이 두 가지 진리가 바로 영적인 진리입니다. 즉 사랑의 선에 속한 진리와 체어리티의 선에 속한 진리가 영적 진리들인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에 아기를 출산하지 못했거나, 젖을 먹인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영적 진리를 소유하지 못한 사람들, 즉 교회 밖 이방인들을 뜻합니다. 그러면 교회 밖의 사람들도 어쨌든 진리를 가졌을 텐데, 그렇다면 그들이 가진 진리는 무엇입니까? 영적인 진리라기보다는 도덕적 진리에 가깝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주님이 어떤 분이시고, 이웃이 누군지 정확히 모르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이방 종교의 진리는 모호한 진리입니다. 진리가 모호하면 그에 따라 삶도 모호해집니다. 그럼에도 이들에게 복이 있다 하신 이유는, 영적 진리를 알고도 더럽히는 것보다는, 차라리 모르는 채 도덕적으로 사는 편이 낫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전자의 사람은 구원받지 못하지만, 후자의 사람은 구원을 받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속 사람의 나라인데, 전자의 사람은 속 사람이 영원히 뒤집히는 상태가 되지만, 후자의 사람은 사후 살짝 교정 및 떼어내기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30그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본문에서 말하는 그때는 부활하신 주님이 참된 진리로 다시 오시는 때이며, 그 진리를 가지고 낡고 부패한 교회들을 심판하시는 때입니다. 다시 오신 주님으로 표상되는 진리란 어떤 것일까요? 말씀의 문자적 의미 안에 담긴 신성한 내적 진리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적 진리로 충만한 말씀의 문자적 의미가 바로 다시 오신 주님이신 것입니다. 내적 진리로 다시 오신 주님께서 친히 낡고 부패한 교회들을 심판하십니다. 그때 거짓 진리를 가지고 참된 진리를 대적하던 교회들은 참된 진리의 눈부신 빛을 감당하지 못하고, 자신들의 악 속에 숨어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됩니다. 본문에 ‘그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리라’ 한 것은 그런 의미입니다. 산은 본래 사랑을 뜻하지만 여기서는 반대로 인간의 악을 뜻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니까 진리를 마주하기보다 차라리 자신의 악에 숨는 것이 오히려 편하다는 것입니다.

 

31푸른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

 

천국의 천사들조차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성한 진리의 빛을 직접 날 것으로 마주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각 천사와 사람에게 맞는 순화된 빛으로 오십니다. 그럴진대 악한 사람들이 어떻게 참된 진리의 빛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아마 빛을 마주 대하는 순간, 숨을 쉴 수 없을 것 같은 고통을 느낄 것입니다.

 

끝으로 32절과 33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32또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 가니라 33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주님의 고난의 장소는 해골, 즉 골고다라 하는 곳이었습니다. 주님은 왜 그곳에서 마지막 시험을 당하셨을까요? 해골은 머리를 둘러싼 뼈이고, 뼈는 영적으로 가장 차원이 낮은 것을 뜻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여기서 해골은 이른바 기억 지식(memory-knowledge [scientia])이라고 하는 가장 낮은 차원의 진리를 뜻합니다. 주님은 바로 그 기억 지식을 통해 들어오는 세상의 거짓 및 온갖 욕망과 마지막 순간까지 싸우셨고, 결국 이기셨습니다. 주님께서 해골이라 불리는 곳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그래서입니다. 말씀에는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두 강도도 함께 달렸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강도는 재림하신 주님 앞에서 심판받는 모든 인간을 나타냅니다. 인간의 본성은 모두 강도와 같기 때문입니다. 심판과 관련, 마태복음 25장 32, 33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32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33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마25:32-33)

 

여기서 오른편 양은 순진한 마음으로 진리를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왼편 염소는 그 반대, 즉 끝까지 진리를 인정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전자의 사람들은 구원받았고, 후자의 사람들은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강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인정하고 시험에 동참한 자는 구원을 받았고, 반대로 주님을 끝까지 부인한 자는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주님을 십자가에 매단 사람과 주님과 십자가를 함께 짐으로써 구원의 길을 가는 사람의 극명한 대비를 봤습니다. 인생을 사는 것은 모두 십자가를 지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런 중에도 생명의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 있고, 영원한 죽음에 이르는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십자가를 지고 가는 중일까요? 입으로는 주님을 믿는다 하면서 이해관계가 생기면 주님을 버리고 자기 욕심대로 하는 건 아닐까요? 진리 앞에서 굴복하지 않고, 인간의 얕은 지식을 내세워 오히려 진리를 내려다보는 건 아닐까요? 나를 내려놓고 주님을 우러러보고 순종하는 것은 너무나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그게 왜 그렇게 힘든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앞에서 잠시 말씀드린 것처럼 인간의 본성은 본시 강도와 같기 때문일 것입니다. 주님이 세상에서 입으신 인성 안에도 그런 본성이 있었고, 그래서 주님은 필사적으로 그것들과 싸워 이기셨습니다. 십자가의 시험은 그 마지막 시험이었습니다. 주님은 그 싸움에서 이기심으로 해서 인류에게 생명의 부활을 주셨습니다. 주님이 이기신 것처럼 우리도 주님께 의지해 나를 버리는 싸움에서 이겨야 합니다. 그리하여 어렵게 찾은 이 진리를 헛되게 만들지 않고 끝까지 지켜야 합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모든 성도와, 또한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이와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워하며 나의 백성을 기뻐하리니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그 가운데에서 다시는 들리지 아니할 것이며 (사65:19)

 

아멘.

 

 

2023-03-05(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11-17(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4-11-17(D1)-주일예배(2570, 눅23,26-33),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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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4-11-17(D1)-주일예배(2570, 눅23,26-33),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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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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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게 버림받으신 주님

 

 

13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관리들과 백성을 불러 모으고 14이르되 너희가 이 사람이 백성을 미혹하는 자라 하여 내게 끌고 왔도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서 심문하였으되 너희가 고발하는 일에 대하여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고 15헤롯이 또한 그렇게 하여 그를 우리에게 도로 보내었도다 보라 그가 행한 일에는 죽일 일이 없느니라 16그러므로 때려서 놓겠노라 17(없음) 18무리가 일제히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없이하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주소서 하니 19이 바라바는 성중에서 일어난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러라 20빌라도는 예수를 놓고자 하여 다시 그들에게 말하되 21그들은 소리 질러 이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22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하니 23그들이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그들의 소리가 이긴지라 24이에 빌라도가 그들이 구하는 대로 하기를 언도하고 25그들이 요구하는 자 곧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를 놓아주고 예수는 넘겨주어 그들의 뜻대로 하게 하니라 (눅23:13-25)

 

 

헤롯에게 보냈던 예수를 그러나 헤롯이 다시 자기에게 돌려보내자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관리들, 그리고 백성을 불러 모으고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14절로 16절 말씀입니다.

 

14이르되 너희가 이 사람이 백성을 미혹하는 자라 하여 내게 끌고 왔도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서 심문하였으되 너희가 고발하는 일에 대하여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고 15헤롯이 또한 그렇게 하여 그를 우리에게 도로 보내었도다 보라 그가 행한 일에는 죽일 일이 없느니라 16그러므로 때려서 놓겠노라

 

대제사장과 빌라도, 그리고 헤롯은 모두 일종의 왕이고, 왕은 영적으로는 진리를 뜻합니다. 따라서 대제사장과 총독 빌라도, 그리고 헤롯 왕은 당시 유대인들을 자연적으로, 또는 영적으로 다스리는 등차(等差, degree, 등급)가 다른 세 가지 진리를 나타냅니다. 이를테면 대제사장은 교회에 속한 진리를 나타내고, 빌라도는 세상의 법을, 헤롯 왕은 이방 종교의 진리나 도덕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어떤 사회의 진리가 여러 등차로 존재하는 것과 관련, ‘계시록 해설’ 351번 글의 2번 항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천국의 빛은 주님으로부터 말씀을 통해 흘러나온다. 즉 말씀으로부터 중심이 되는 빛이 나와 주변 사방으로 퍼져나가며, 그렇게 해서 교회 밖의 이방인들에게까지 흘러들어간다. (AE.351:2,이순철 역) The light of heaven, or the light in which are the angels of heaven who are from this earth, is from the Lord by means of the Word; from this as from a center light is diffused into the circumferences in every direction, thus to those who are there, who, as was said, are the Gentiles that are outside of our church. (AE.351:2)

 

그러니까 신성한 진리는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거쳐 지상으로 내려오는데, 제일 먼저 말씀이 있는 교회로 내려오고, 그 다음에 교회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다른 종교의 교리 안으로 들어가며, 마지막에는 세상의 법과 종교를 갖지 않은 사람들에게까지 흘러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나름대로 합리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는 건, 그런 식으로 각 사람에게 천국의 빛이 흘러들어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말씀을 갖고 있는 교회가 타락하면 어떻게 될까요? 예를 들면, 교회가 불순한 의도로 말씀을 마음대로 조작한다면 말입니다. 그때는 교회의 말씀 가운데로 진리의 빛이 흘러들어오지를 않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통해 사회 곳곳으로 연결된 진리의 통로 또한 막힙니다. 오늘 말씀에서 주님이 교회로부터 배척당하시고, 그 후에도 이리저리 끌려다니시며 핍박받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의 의식을 지배하던 진리의 체계가 완전히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가장 높은 진리인 교회의 진리가 가장 낮고 비천한 진리가 되고, 가장 낮은 진리인 세상의 법이 가장 높은 진리가 되어 진리의 질서가 뒤바뀌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진리로 오신 주님을 지켜야 할 교회가 오히려 주님을 죽이려 하고, 세상의 법과 도덕을 표상하는 빌라도와 헤롯이 오히려 주님을 두둔하고 있습니다.

 

빌라도가 무리에게 ‘보라 그가 행한 일에는 죽일 일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때려서 놓겠노라’라고 말했습니다. ‘주님을 때리는 것’은 교회, 곧 유대인의 생각대로 진리를 곡해하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때려서 놓아주겠다’라는 건 진리를 아주 없애버리지는 않고, 그들 입맛에 맞게 고치겠다는 의미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간혹 그런 일이 벌어집니다. 객관적으로는 분명한 진리임에도 불구, 그건 진리가 아니고 거짓이니 애초에 씨를 말려야 한다 주장하는 우매한 대중이 있습니다. 그때 공정해야 할 법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흔들리게 되지요. 그리고 진리를 아주 없애지는 않고 사람들의 입맛에 맞게 적당하게 고치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니까 객관적으로는 진리일지 모르나 세태에는 맞지 않으니 대중의 취향에 맞게 고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을 때려서 놓아주는 것입니다. 그러자 18절과 19절에서 무리가 소리칩니다.

 

※ 지난주 말씀드린 대로, 여기 이 ‘무리’는 두 부류, 곧 하나는 아까 새벽녘 급히 소집된 산헤드린 공의회 사형 의결 정족수인 23명과, 미리 매수해 놓은 시정잡배들일 가능성이 아주 큽니다. 산헤드린의 경우, 총 70명에 대제사장 포함, 71명이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귀족 가문 계열인 사두개 제사장 그룹과, 서민, 즉 흑수저 출신인 바리새 그룹의 두 파가 서로 오랜 세월 대립, 원수처럼 지내오던 터라, 그리고 바리새들 중엔 주님께 무척 호의적인 사람들도 여럿 있었던 터라 아무래도 바리새쪽 의원들을 부르기엔 좀 껄끄러웠을 것이기 때문이며, 거리 불량배들이야 뭐 부리기가 손쉬웠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지금 이 무리를 유월절을 지키러 온 유대인 전체로 보는 건 무리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18무리가 일제히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없이하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주소서 하니 19이 바라바는 성 중에서 일어난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러라

 

주님 당시 유대 유월절 관례 중 하나는 사형수 하나를 풀어주는 게 있었는데, 그래서 빌라도는 이를 이용, 주님을 풀어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진리이신 주님을 세상 잣대로 심판한다는 게 내심 찜찜하기도 하고, 두려웠기 때문이며, 그의 아내가 이른 아침, 급히 사람을 보내 이 예수라는 사람은 의인이니 그에게 관여하지 말라고, 그로 인해 간밤 꿈자리가 뒤숭숭했다고 하는 말을 듣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것은 가장 낮은 세상 법으로 가장 높은 신성한 법을 심판하는 일이었는데, 이를 직감적으로 안 빌라도는 어떻게 하든 최악의 상황을 피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때려 놓아주면 어떻겠느냐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 사람을 없이하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주소서’라며, 무리가 일제히 소리쳤습니다. 바라바라는 이름은 주님 당시 아람어 ‘바르아빠’에서 유래된 이름인데,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아버지의 아들’이란 영적으로 무슨 뜻일까요? 선으로부터 나오는 진리를 뜻합니다. 아버지는 선, 아들은 진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바라바는 그 반대의 뜻이라고 봐야 합니다. 즉 악의적인 거짓이 바로 바라바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본문에 ‘이 바라바는 성 중에서 일어난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성에서 일어난 민란과 살인에 관련되었다는 건 참된 교리를 악의적으로 왜곡하는 행동을 뜻합니다. 속뜻으로 성은 교회의 교리를 뜻하고, 민란이나 살인은 교리를 왜곡하는 짓, 이를테면 참된 교리로부터 사랑과 체어리티(charity, 仁愛)를 빼고, 믿음만 남겨 놓는 것입니다. 믿음, 즉 신앙은 단지 그릇일 뿐이며, 중요한 건 거기 담기는 내용, 즉 체어리티인데도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진리에 대한 민란이며, 바라바는 그렇게 해서 생겨나는 거짓 진리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주님을 없애고, 대신 바라바를 놓아주라 하는 것은 말세에 부패한 교회들이 체어리티의 교리를 없애고, 믿음만의 교리, ‘오직 믿음’의 교리만이 구원의 진리라 주장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회의 지성이 마비될 때, 대중은 정의를 거짓으로 몰아 핍박하고, 반대로 거짓을 정의의 자리에 올려놓고 추앙합니다. 가치가 전도되는 것이지요. 이를테면 그것이 주님을 죽이고 바라바를 살리는 일입니다.

 

※ 2024년 11월 현재, 각종 여론조사를 보면, 차기 대통령감으로 이재명을 가장 선호하는 것과, 그리고 국민의 절반 이상이 좌파 성향을 보이는 걸 보면 과연 지금 대한민국의 영적 기상도와 그 실상이 어떤지를 알 수 있습니다.

 

무리는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 하고, 빌라도는 계속 그들을 설득합니다. 그것을 21절과 22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21그들은 소리 질러 이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22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하니

 

세상의 법으로 교회의 진리를 심판하고 단죄하는 일은 역사적으로 흔치는 않으나 가끔 있었던 일입니다. 예를 들면, 4세기 초인 325년에 니케아의 콘스탄티누스 1세는 그의 별궁인 니케아에서 기독교 공의회를 열어 주님의 신성을 부인하던 아리우스파를 교회에서 축출하고 삼위일체 신앙을 확립했습니다. 그것은 빌라도가 주님을 십자가에 매단 이후, 로마 황제가 교회의 일에 관여했던 가장 큰 사건이었습니다. 그렇더라도 그것은 교회의 비진리를 단죄한 사건이었고, 비교적 지성적인 일이었습니다. 그에 비하면, 11세기 초인 1095년에 시작된 십자군 전쟁은 로마의 황제와 가톨릭교회가 야합한 반 지성적인 일이었습니다. 오늘날 공산주의자들이 교회와 교회의 진리를 말살하는 것 역시 지극히 반 지성적인 일이라 하겠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로 상징되는 참된 진리를 말살하는 게 옳지 않다 생각했고, 그래서 ‘나는 그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라며 무리를 끝까지 설득했습니다. 본문에 빌라도가 무리에게 세 번 말했다는 것은 그런 의미입니다. 셋이라는 수는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한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리는 계속해서 빌라도를 압박합니다. 23절에는

 

그들이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그들의 소리가 이긴지라

 

고 말합니다. 무리는 주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처형함으로써 참된 진리를 완전하게 파괴하고 죽여 없애길 원했습니다. 결국 빌라도가 손을 들었습니다. 그들의 요구대로 바라바를 풀어주고, 주님을 그들에게 넘겨 뜻대로 하도록 한 것입니다. 무리는 그렇게 해서 자기들의 악한 뜻을 이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의 마지막 때는 모든 교회가 사랑과 체어리티의 신앙을 버리고 오로지 믿음만의 신앙, ‘오직 믿음’ 신앙을 고집합니다. 그것을 말씀에서는 유대교회가 주님을 죽이고, 바라바 살리는 걸로 표상하고 있습니다. 사랑이 없는 신앙, 체어리티와 분리된 신앙 안에 있을 때, 신앙인들은 어떻게 변할까요? 그것에 대해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1949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신앙의 진리 안에만 있고 인애의 선 안에 있지 않은 사람은 성질이 까다롭고, 어떤 일도 참지 않으며, 모든 사람을 적대시하고, 벌하려고 하며, 동정심이 없고, 다른 사람의 생각에 맞추기보다 그들의 마음을 굽힐 궁리를 한다. 왜냐하면 그는 모든 일을 선으로부터 보지 않고 진리로부터 바라보기 때문이다. (AC.1949:2, 창16:12, 이순철 역) The man whose rational is of such a character that he is solely in truth—even though it be the truth of faith—and who is not at the same time in the good of charity, is altogether of such a character. He is a morose man, will bear nothing, is against all, regards everybody as being in falsity, is ready to rebuke, to chastise, and to punish; has no pity, and does not apply or adapt himself to others and study to bend their minds; for he looks at everything from truth, and at nothing from good. (AC.1949:2)

 

이 구절을 읽으며 이건 나의 모습인데... 하시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인간의 자아가 본래 그렇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런 상태에서 거듭나기 시작합니다. 새 교회에서는 거듭나는 과정에서 사람은 두 가지 합리성(rational)의 단계를 거친다고 말합니다. 위 내용은 첫 단계의 합리성에 이를 때 우리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즉 사랑이 없고, 오직 진리만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나 거기서 머물지 않고 계속 나아가면 두 번째 단계의 합리성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 합리성은 진리와 사랑이 함께 있는 합리성입니다. 말씀에서는 전자의 합리성을 들나귀(창16:12), 또는 이스마엘로 표현하고, 후자의 진정한 합리성을 이삭으로 표현합니다. 체어리티의 신앙 안에 있을 때, 우리는 이삭으로 표현되는, 지혜로우면서도 따뜻한 합리성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체어리티 신앙을 버리면 햇볕이 들지 않는 방처럼, 또는 주님을 죽인 유대인들처럼 점점 더 차갑고 잔인해질 것입니다.

 

※ 오늘날 적어도 대한민국에 사는 기독교인으로서 ‘오직 믿음’(Faith Alone)의 신앙을 고백한다고 해서 모두 저렇지는 않습니다. 저 역시 어려서는 개신교 장로교회 통합측, 커서는 개신교 침례교회에 속해서 나름 개신교를 경험했지만, 대부분은 사랑, 그러니까 체어리티 몇 %, 신앙, 그러니까 교리 몇 % 식으로 구성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마 저 정도의 사람들은 스베덴보리 당시 여전히 문제가 많은 교황파 사람들 중 리더십들 내지는 개혁교회 내 소수의 극단적 사람들이지 싶습니다. 그러나 역시 확실한 건, 오늘날 대한민국 개신교 안에도 사실 얼음장 같은 사람들이 분명히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들은 그런 게 무슨 신념이나 신조라고 한번 어긋난 사람은 다시는 보려 하지 않습니다. 대부분 자기와 같은 입장이어야만 사랑하는 그런 상황이지요. 타 종교는 물론, 심지어 같은 개신교, 같은 교파와 교단, 심지어 한 교회 안에서도 무시무시할 정도로 폐쇄적이고, 오직 적과 아군만 존재하는, 참으로 숨 막히는 그런 곳이 바로 오늘 대한민국 개신교입니다. 그러니까 서운한 걸 풀고, 비록 내키지는 않지만 용서와 화해, 양보와 물러남 등을 기꺼이 하는 게 즐거워서가 아니라 그렇게 하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으니까, 그렇게 하는 게 옳으니까 하는, 그런 사람이 정말 쉽지 않은, 오늘날 대한민국 개신교 내 ‘오직 믿음’을 목숨 걸고 지키는 사람들의 현주소요, 진면목인 것입니다. 참 부끄럽지만, 오히려 타종교인들 중에 정감넘치고 친절하고 따뜻한 사람들이 더 많은 게 현실입니다. 비록 그들에겐 참 진리, 곧 말씀이 없어 그 빛이 기독교에 비해 상대적으로 흐림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오히려 이 사람들은 구원을 받으나 저 사람들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저들은 알면서 범하기 때문에 더러워지지만, 이들은 모르기 때문에 적어도 더러워지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속 사람의 나라입니다. 속 사람의 상태가 천국을 받을 수 있어야 들어갈 수 있는 나라라는 말입니다. 속 사람의 상태와 상관없이 ‘오직 믿음’으로 들어갈 수 있는 데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이런 양상은 교회가 타락했기 때문이고, 교회를 통해 사회 구석구석으로 흘러 들어가는 진리의 흐름이 막혔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라도 그 질서가 다시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행복한 꿈을 꿀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 대안은 계시록에,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으로 예언된 마지막 교회의 진리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주님은 바로 그 진리로 세상에 다시 오셨습니다. 새로운 진리로 다시 오신 주님께서 얼음장 같은 이 사회를 구원하실 것입니다. 주님의 놀라우신 역사가 새 교회로부터 불길같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방인의 우상 가운데 능히 비를 내리게 할 자가 있나이까 하늘이 능히 소나기를 내릴 수 있으리이까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그리하는 자는 주가 아니시니이까 그러므로 우리가 주를 앙망하옵는 것은 주께서 이 모든 것을 만드셨음이니이다 하니라 (렘14:22)

 

아멘

 

2023-02-19(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11-10(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4-11-03(D1)-주일예배(2568, 눅23,1-12), '대제사장들의 무리, 총독 빌라도, 헤롯 안티파스'.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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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4-11-10(D1)-주일예배(2569, 눅23,13-25), '교회에게 버림받으신 주님'.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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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제사장들의 무리, 총독 빌라도, 헤롯 안티파스

 

 

1무리가 다 일어나 예수를 빌라도에게 끌고 가서 2고발하여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하니 3빌라도가 예수께 물어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 말이 옳도다 4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무리에게 이르되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하니 5무리가 더욱 강하게 말하되 그가 온 유대에서 가르치고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여기까지 와서 백성을 소동하게 하나이다 6빌라도가 듣고 그가 갈릴리 사람이냐 물어 7헤롯의 관할에 속한 줄을 알고 헤롯에게 보내니 그때에 헤롯이 예루살렘에 있더라 8헤롯이 예수를 보고 매우 기뻐하니 이는 그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보고자 한 지 오래였고 또한 무엇이나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연고러라 9여러 말로 물으나 아무 말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10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서서 힘써 고발하더라 11헤롯이 그 군인들과 함께 예수를 업신여기며 희롱하고 빛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도로 보내니 12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였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 (눅23:1-12)

 

 

주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까지 당신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으셨습니다. 병자들에게 치유의 기적을 보이신 후에는 그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하시기도 하셨고요. 심지어 변화산에서는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대화하셨고, 그때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마17:5)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음에도, 그런데도 주님은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마17:9) 제자들에게 당부하기도 하셨습니다. 주님은 왜 그러셨을까요? 만약 주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당신의 뜻을 이루시기도 전에 유대의 대제사장들의 무리에게 붙잡혀 해를 입으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주님과 같은 메시아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시는 것처럼 주님은 세상에 오셔서 당신에 대한 성경의 예언들을 빠짐없이 이루셨습니다. 어떤 것은 문자적인 뜻 그대로 이루셨고, 또 어떤 것은 문자의 뜻 안에 있는 내적 의미로 이루셨습니다. 문자의 뜻 안에 있는 내적 의미로 이루셨다는 건,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이사야 63장 4절에는 ‘만민 가운데 나와 함께 한 자가 없이 내가 홀로 포도즙틀을 밟았는데 내가 노함으로 말미암아 무리를 밟았고 분함으로 말미암아 짓밟았으므로 그들의 선혈이 내 옷에 튀어 내 의복을 다 더럽혔음이니’라고 했는데, 그것은 주님이 지옥과의 치열한 싸움에서 이기신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 ‘만민 가운데 나와 함께 한 자가 없이’는 시험 가운데서 주님 홀로 싸우신 것을 의미합니다. 또 예레미야 46장 10절에는 ‘그 날은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의 대적에게 원수 갚는 보복일이라 칼이 배부르게 삼키며 그들의 피를 넘치도록 마시리니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북쪽 유브라데 강 가에서 희생제물을 받으실 것임이로다’라고 했는데, 이 말씀은 주님이 세상에 오신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주님이 이루셨다는 구약의 예언들은 대개는 내적, 외적으로 닥치는 수많은 시험과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주님은 십자가의 마지막 시험이 있기까지 당신이 메시아이며 왕이라는 사실을 철저히 숨기셨습니다.

 

그러셨던 주님이 마지막 시험을 앞두고 이제 당신의 존재를 드러내십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눅22:70)라고 묻자 ‘너희들이 내가 그라고 말하고 있느니라’라고 간접적으로 시인하신 것이지요. 그러자 이들은 ‘어찌 더 증거를 요구하리요 우리가 친히 그 입에서 들었노라’라면서 주님을 죽이기로 마음을 굳힙니다. 그리고 당시 유대를 다스리던 총독 빌라도에게 주님을 데려가 고발합니다.

 

※ 이들이 주님을 직접 처리하지 못하고,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데려간 것은, 당시 유대는 로마의 식민지로서 비록 나름의 자치권을 인정받았으나 이방인이 성전 안뜰을 함부로 들어가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사형 집행권을 박탈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때는 마침 유월절이라 평소엔 저쪽 지중해 해안가 가이사랴에서 대왕 헤롯의 궁전을 관저로 삼아 지내지만, 이 기간엔 예루살렘에 와 전반적인 치안 살핀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로마 총독이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와 지내는 건 유독 이때 참 많은 사건 사고가 일어나기 때문이며, 만에 하나 이때 로마에 대항하는 민란이라도 나는 날이면, 총독의 목이 날아가기 때문입니다.

 

본문 1, 2절입니다.

 

1무리가 다 일어나 예수를 빌라도에게 끌고 가서 2고발하여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하니

 

그들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한 번도 백성을 속이시거나 미혹하신 적이 없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신 적도 없습니다. 오히려 바리새인들이 주님을 시험하기 위해 ‘그러면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마22:17)라고 물었고, 주님은 그 질문에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대답하셨지요. 가이사는 로마의 왕입니다. 그러므로 가이사를 섬기는 건 세상 법도를 따르는 삶, 즉 자연적 삶입니다. 그에 비해 하나님을 섬기는 건 하늘의 법을 따르는 삶이며, 영적인 삶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두 가지가 조화된 삶을 살기를 바라십니다. 다시 말하면 영적 삶을 위해 자연적 삶을 버려서도 안 되고, 자연적 삶을 위해 영적 삶을 버려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자연적 삶은 영적 삶을 담는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신 것이고,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하신 것입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 곧 ‘주님의 나라와 주님의 의’가 바로 자연적 삶 속에 담아야 할 영적 생명이라는 것이지요.

 

3빌라도가 예수께 물어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 말이 옳도다

 

빌라도가 주님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네 말이 옳도다’라고 대답하십니다. 말씀에서 왕은 진리를 뜻합니다. 그리고 유대는 주님에 대한 사랑, 또는 선에 대한 사랑을 뜻합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과 선에 대한 사랑이 같은 뜻인 이유는, 주님은 선 그 자체이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고 한 것은 속뜻으로는 ‘네가 선으로부터 빛나는 진리이냐’ 또는 ‘네가 선을 동반한 진리이냐’라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사랑과 선 그 자체이신 여호와로부터 잉태된 진리이신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빌라도의 물음에 ‘네 말이 옳도다’라고 대답하신 것입니다.

 

4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무리에게 이르되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하니 5무리가 더욱 강하게 말하되 그가 온 유대에서 가르치고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여기까지 와서 백성을 소동하게 하나이다

 

빌라도가 볼 때 아무리 봐도 주님에게는 잘못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고발한 자들에게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자 무리들이 심하게 소리 지르며, ‘그가 온 유대에서 가르치고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여기까지 와서 백성을 소동하게 하나이다’라고 외쳤습니다.

 

※ 여기 이 ‘무리’는 두 부류, 곧 하나는 아까 새벽녘 급히 소집된 산헤드린 공의회 사형 의결 정족수인 23명과, 미리 매수해 놓은 시정잡배들일 가능성이 아주 큽니다. 산헤드린의 경우, 총 71명이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귀족 가문 계열인 사두개 제사장 그룹과, 서민, 즉 흑수저 출신인 바리새 그룹의 두 파가 서로 오랜 세월 대립, 원수처럼 지내오던 터라, 그리고 바리새들 중엔 주님께 무척 호의적인 사람들도 여럿 있었던 터라 아무래도 바리새쪽 의원들을 부르기엔 좀 껄끄러웠을 것이기 때문이며, 거리 불량배들이야 뭐 부리기가 손쉬웠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에서 갈릴리는 이방인, 즉 교회 밖의 사람들을, 유대는 여기서는 유대교회 사람들을 뜻합니다. 같은 말이라도 말씀의 맥락에 따라 그 속뜻, 그러니까 내적 의미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말은 주님이 이방인들은 물론이고, 유대교회 사람들에게까지 잘못된 진리를 가르치고 있다는 뜻입니다. 빌라도는 주님을 재판하는 것이 내심 부담스럽고 불편했습니다. 그가 보기에 주님은 의로운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건 무슨 형사 사건이 아니라 단지 무슨 신학적, 철학적인 문제요, 저들의 그저 질투심 어린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차에 주님이 갈릴리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는 당시 갈릴리 지역을 다스리던 헤롯 왕에게로 주님을 보내기로 결심합니다.

 

6빌라도가 듣고 그가 갈릴리 사람이냐 물어 7헤롯의 관할에 속한 줄을 알고 헤롯에게 보내니 그때에 헤롯이 예루살렘에 있더라

 

※ 이 헤롯은 아버지 대왕 헤롯의 아들로서 헤롯 안티파스를 말합니다. 아버지 대왕 헤롯이 다스리던 유대 땅을 그가 죽은 후, 로마는 삼 분할, 세 아들에게 나눠 주었고, 그중 헤롯 안티파스는 갈릴리 지역을 맡았으나 이 기간 마침 예루살렘에 와 있다는 걸 빌라도는 알고 있습니다. 전에 세례(침례) 요한의 목을 잘라 헤로디아의 딸에게 준 자가 바로 이 헤롯 안티파스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주님을 심판하는 세 부류의 사람들, 즉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같은 사람들, 그리고 총독 빌라도, 끝으로 헤롯 왕은 영적으로는 어떤 사람들인가 하는 겁니다. 새 교회 가르침에는 이들이 누군지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저 개인적으로는 대제사장들 무리와 빌라도, 그리고 헤롯은 세상을 다스리는, 등차(等差, degree)가 다른 세 가지 진리를 나타낸다고 이해합니다. 이를테면 대제사장들의 무리는 교회의 진리, 또는 교리를 뜻하고, 총독 빌라도는 세상을 다스리는 진리, 즉 세상의 법을 뜻하며, 갈릴리의 왕 헤롯은 이방 종교의 진리, 또는 도덕적 진리를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와 관련해 새 교회 가르침들 중 ‘말씀에 관한 교리’ 27번 글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에는 처음과 중간과 마지막이 있다. 처음의 것은 중간의 것을 거쳐 마지막의 것에 이르러 실체가 드러나며 존재한다. 그래서 마지막의 것은 기초이며 그릇이다. (이순철 역) In every Divine work there is a first, a middle, and a last (or ultimate); and the first passes through the middle to the last (or ultimate), and so comes into manifest being and subsists. Hence the last or ultimate is the basis. But the first is in the middle, and through the middle in the ultimate; so that the ultimate is the container. And as the ultimate is the container and the basis, it is also the support. (SS.27)

 

교회가 영적으로 건강할 때는 교회의 진리가 처음 것이 되고, 도덕적 진리는 중간 것, 그리고 마지막에 세상의 법이 있습니다. 진리의 질서가 그러할 때, 하나님의 진리가 도덕적 진리를 거쳐 세상 법 안으로 흘러 들어가 그것을 통해 세상을 다스립니다. 그리고 그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점차 하나님의 나라로 변합니다. 반대로 교회의 마지막 때에는 그 질서가 반대가 됩니다. 즉 가장 낮은 진리인 세상 법이 처음의 것이 되고, 도덕적 진리가 중간 것, 교회의 진리가 가장 마지막 것이 되지요. 이런 경우에는 교회의 진리가 세상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의 나쁜 풍조가 교회를 지배하게 됩니다. 참된 진리이신 주님이 대제사장들의 무리와 빌라도, 헤롯에게 차례로 심판받고 모욕을 당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교회의 마지막 때에는 그렇게 참된 진리가 거짓 진리에 의해 박해를 당합니다.

 

헤롯은 주님에게 궁금한 게 많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에게 여러 가지를 묻습니다. 그것에 대해 9절과 1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8헤롯이 예수를 보고 매우 기뻐하니 이는 그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보고자 한 지 오래였고 또한 무엇이나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연고러라 9여러 말로 물으나 아무 말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10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서서 힘써 고발하더라 11헤롯이 그 군인들과 함께 예수를 업신여기며 희롱하고 빛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도로 보내니

 

교회가 부패하면 사회의 도덕이나 윤리 또한 부패하게 됩니다. 주님에게서 나오는 진리의 빛이 교회를 통해 윤리와 도덕 속으로 흘러 들어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헤롯이 주님으로부터 아무 대답도 듣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그런 것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헤롯은 결국 참된 진리이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리고 주님에게 빛나는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다시 보냈습니다. 말씀에서 옷은 진리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헤롯이 주님께 빛나는 옷을 입혔다는 것은 얼핏 보면 주님을 인정한 듯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부패한 윤리와 도덕이 그들 앞에 나타난 참된 진리를 업신여기고 조롱하는 모습입니다.

 

생각해 보면 사람의 생애 동안 참된 진리를 만난다는 건 정말 큰 행운입니다. 그럼에도 진리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냥 지나치는 사람이 많습니다. 심지어 업신여기고 비아냥거리는 이들도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다음은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님의 에피소드입니다.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문득 서울교회에 처음 발령받았을 때의 일이 생각났습니다. 교회 건축이 시작될 무렵인데 좀처럼 건축 허가가 나지 않았습니다. 알아보니 주변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건축을 반대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어떻게 문제가 풀리긴 했으나 그로 인해 8개월이면 끝날 공사가 3년을 끌었습니다. 그 일을 겪으면서 진리가 견뎌야 할 것이 참으로 많다는 걸 느꼈습니다. 주님이 당하신 일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지만 말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교회나 종교가 어지러워지면 세상의 법이나 풍조 또한 어지러워집니다. 진리의 질서가 거꾸로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으로부터 교회를 통해 세상 곳곳으로 퍼져나가는 진리의 질서가 있습니다. 마치 심장과 폐로부터 흘러나오는 깨끗한 피가 인체의 말단까지 흘러 들어가는 것과 같은 그런 질서가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마지막 때는 그 질서가 거꾸로 됩니다. 오늘 말씀에서 주님이 대제사장들의 무리와 빌라도, 그리고 헤롯에게 차례로 불려 다니며 심판받고 모욕당하는 것은 진리의 질서가 거꾸로 될 때 생기는 일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그렇고 각자의 삶에서도 그렇습니다. 가장 낮은 진리는 더 높은 진리를 섬겨야 합니다. 일을 하면서 결과만 좋으면 되지 않느냐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결과뿐 아니라 일하는 방법과 목적이 처음부터 끝까지 서로 통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일상의 모든 행위는 주님과 이웃을 위한 목적으로부터 시작해 진리를 수단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온전한 진리의 질서 안에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때 건강한 교회, 건강한 교인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과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어질 것이라 하늘에서 우레로 그들을 치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땅끝까지 심판을 내리시고 자기 왕에게 힘을 주시며 자기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뿔을 높이시리로다 하니라 (삼상2:10)

 

아멘

 

2023-02-12(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11-03(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4-11-03(D1)-주일예배(2568, 눅23,1-12), '대제사장들의 무리, 총독 빌라도, 헤롯 안티파스'.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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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03(D1)-주일예배(2568, 눅23,1-12), '대제사장들의 무리, 총독 빌라도, 헤롯 안티파스'.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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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

 

 

63지키는 사람들이 예수를 희롱하고 때리며 64그의 눈을 가리고 물어 이르되 선지자 노릇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고 65이 외에도 많은 말로 욕하더라 66날이 새매 백성의 장로들 곧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모여서 예수를 그 공회로 끌어들여 67이르되 네가 그리스도이거든 우리에게 말하라 대답하시되 내가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할 것이요 68내가 물어도 너희가 대답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69그러나 이제부터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 하시니 70다 이르되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대답하시되 너희들이 내가 그라고 말하고 있느니라 71그들이 이르되 어찌 더 증거를 요구하리요 우리가 친히 그 입에서 들었노라 하더라 (눅22:63-71)

 

 

“인자”는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적 진리를 뜻하고, “권능의 우편에 앉는 것”은 주님의 전능하심을 뜻한다. 신적 선은 신적 진리를 통해 전능한 힘을 가지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그들이 보리라”고 말한 것은 주님이 세상에서 지옥을 완전히 이기시고 지옥의 모든 것과 천국의 모든 것을 당신의 질서 안에 두신 후, 신적 진리는 자체로 전능한 힘이 있음을 뜻한다. (천국의 비밀 9807:6, 이순철 역) I say unto you, Henceforth ye shall see the son of man sitting at the right hand of power, and coming upon the clouds of heaven (Matt. 26:64). From henceforth shall the son of man be sitting at the right hand of the power of God (Luke 22:69).The son of man” denotes the Divine truth that proceeds from the Lord; “sitting at the right hand of power” denotes that he has omnipotence, for Divine good has omnipotence by means of Divine truth; its being said that “from henceforth they shall see it” signifies that Divine truth was in its omnipotence after the Lord in the world had conquered the hells, and had reduced all things therein and in the heavens into order, and that in this way those could be saved who would receive him in faith and love (see n. 9715). (AC.9807:6, 출28:1, ‘그의 아들들’에 관한 주석에서)

 

 

오늘 말씀에는 주님께서 ‘지키는 사람들’에게 어떤 수모를 겪으셨으며, 주님은 어떻게 그 모든 일을 견디셨는지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말씀의 문자적 의미로 보면, 이 ‘지키는 사람들’이 주님을 괴롭히며 욕보이고 있지만, 속뜻으로는 말세에 타락한 교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럽히는 것이고, 그리하여 그들 스스로 지옥으로 떨어지는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이제 그것에 대해 하나하나 살펴보겠습니다.

 

※ 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럽힌다’는 건 말씀에 손을 댄다는 것으로, 주님의 말씀에 사람이 무엇을 섞는 것, 곧 자의적으로 해석, 곡해, 왜곡하는 걸 말합니다. 말씀은 오직 말씀하신 분만이 푸실 수 있으며, 이를 계시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계시받은 자만이 풀 수 있으며, 이때에도 푼다고 하지 않고, 전달한다고 해야 합니다. 사람은 오직 전달만 할 수 있을 뿐입니다.

 

먼저 본문 63절입니다.

 

63지키는 사람들이 예수를 희롱하고 때리며

 

여기서 지키는 사람들은 주님 당시 유대교회 사람들이고요,

 

※ 당시 예루살렘에는 두 종류의 군인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본래 성전 경비대, 다른 하나는 식민지를 관할, 통치하는 로마 군인들이었습니다. 지금 장면은 아직 빌라도를 만나기 전이므로 유대인들로 구성된 성전 경비대이지 싶습니다.

 

또한 교회의 마지막 때, 타락한 교회의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교회의 마지막 때에는 유대교회 사람들이 주님을 함부로 대한 것처럼 교회들이 신성한 말씀을 마음대로 해석하여 더럽힙니다. 그것이 군사들이 예수를 희롱하고 때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은 곧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말씀을 더럽히는 이유는, 말씀을 통해 주님을 만나려고 하지 않고, 세상 욕심을 채우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 욕심 때문에 말씀이 오염되고 변질되는 것입니다.

 

※ 아타나시우스 신조(the Athanasian Faith)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제작 연대는 분명하지 않지만, 사도신경, 니케아 신조와 함께 초대교회 3대 신경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이 신조의 주된 내용은 삼위일체와 성육신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의 유작, ‘계시록 해설’에서 이 신조를 다루고 있는데, 아래 내용은 그중 어떤 게 ‘말씀을 더럽히는 것’인지 당시 종교, 특히 교황 교회의 부패상을 배경으로 아래와 같이 적고 있습니다.

 

심지어 죽은 자의 뼈와 무덤에 거룩함이 있다는 것, 시체가 기적을 행한다는 것, 사람이 자신의 부를 우상이나 수도원에 성별(聖別)하지 않으면 나중에 연옥에서 고통을 당한다는 것, 천국과 지옥의 권세를 가졌으므로 사람이 신이라는 것 even that there is holiness in the bones of the dead and in sepulchers, that carcasses perform miracles, that man will be tormented in purgatory if he does not consecrate his wealth to idols or to monasteries, that men are gods because heaven and hell are in their power

 

그러니까 말씀을 가까이하는 목적이 주님 사랑이 아닌, 말씀을 그저 자기 사랑, 세상 사랑을 위한 수단과 도구로 삼는 일체의 종교적 행위가 곧 말씀을 더럽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계속해서 그들이 말씀을 어떻게 더럽히는지 하는 내용입니다. 64절, 65절입니다.

 

64그의 눈을 가리고 물어 이르되 선지자 노릇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고 65이 외에도 많은 말로 욕하더라

 

영어 성경에는 주님의 눈을 가리는 게 아니라 얼굴을 가리고 때렸다고 되어 있습니다. 말씀에서 주님의 얼굴은 주님의 사랑과 자비를 나타냅니다. 그래서 민수기 6장에는 주님께서 아론에게 명하시길,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할 때는 다음과 같이 말하라고 하십니다. 즉

 

24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25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26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민6:24-26)

 

라고 말입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명령하신 이유는, 주님에게서 나오는 사랑과 자비는 모든 악과 거짓을 이기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볼 때, 군사들이 주님의 얼굴을 가리고 때리는 것은, 타락한 교회들이 말씀을 왜곡함으로써 말씀의 생명인 사랑을 죽이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생겨난 교리가 바로 사랑 없는 믿음만의 교리, 오직 믿음의 교리입니다.

 

※ 이 ‘오직 믿음’(Faith Alone) 교리는 대단히 위험합니다. 주님은 스베덴보리를 통해 계시록에 나오는 모든 심판의 대상이 모두 이 ‘오직 믿음’의 교회임을 밝히고 계십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천국은 속 사람의 상태로 들어가는 곳인데, 이 교리로는 이런 사실을 가볍게 여기게 되기 때문이 아닐까, 즉 평소 속 사람의 상태 관리에 소홀, 결국 구원받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마27에도 비슷한 말씀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주님을 십자가에 매달고 조롱하기를,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마27:42)

 

라고 합니다. 사실 나를 버리고 다른 사람을 살린다는 것은 역설 중에서도 역설입니다. 내가 있어야 남도 있지 않나 그렇게 모두 생각하기 때문인데요, 그런데도 주님은 인류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버리심으로써, 이웃을 위해 나를 죽이는 것이 사랑이요 구원이라는 것을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그러나 사랑 없는 믿음 안에 있는 자들은 주님의 그 사랑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 위에 계신 주님을 향해 “거기서 내려와 먼저 너 자신을 구원하라”고 조롱했습니다. 앞에서 주님의 얼굴을 가리고 때리면서 누가 때렸는지 말하라고 하는 자들도 같은 자들입니다. 그들은 말씀 안에 신성이 있음을 믿지 않았고, 그러므로 말씀의 능력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자기 입맛대로 곡해했고, 내심 말씀의 능력이 어디 있는가 하고 비웃었습니다. 그것이 주님의 얼굴을 가리고 때리면서 누가 때렸는지 말하라고 조롱하는 것입니다. 만약 기적이 나타났다면 그들은 말씀이신 주님을 믿었을까요? 잠시는 믿는 것같이 했겠지만, 계속 믿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기적에 대해 ‘천국의 비밀’ 7290:2번 글은 이렇게 말합니다.

 

기적은 믿음을 강제하며 강제된 믿음은 사람 안에 남지 않고 흩어져 없어진다. 그러므로 예배의 내적인 것인 믿음과 인애는 사람의 자유 안에 심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그때 그것은 그의 것이 되고 그의 것이 되면 그에게 영원히 남기 때문이다. But miracles are not done among those who are in internal worship, that is, in charity and faith, because to these they are hurtful, for miracles compel belief, and what is compelled does not remain, but is dissipated. The inward things of worship, which are faith and charity, must be implanted in freedom, for then they are appropriated, and what is so appropriated remains; whereas that which is implanted in compulsion, remains outside the internal man in the external, because nothing enters into the internal man except by means of intellectual ideas, which are reasons; for the ground which there receives is an enlightened rational.

 

그래서 주님은 기적을 보이라고 하는 자들에게 아무 대꾸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군사들이 밤새 주님을 욕보이는 동안 날이 밝았습니다. 66절입니다.

 

66날이 새매 백성의 장로들 곧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모여서 예수를 그 공회로 끌어들여

 

말씀에서 날이 밝았다는 건 교회가 주님과 연결된 상태, 즉 가르침을 받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반대로 교회가 주님에게 등을 돌린 상태입니다. 주님에게 등을 돌렸다는 것은 주님이 주시는 선과 진리를 거부하고, 지옥의 악과 거짓에 깊이 빠져 있다는 뜻입니다. 그 상태에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주님을 공회로 끌고 갔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들은 지옥적인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며, 그리하여 진리를 핍박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를테면 대제사장들은 말씀 안에 있는 선을 자아의 악과 섞는 사람들이고, 서기관들은 말씀 안에 있는 진리를 자아의 거짓과 섞는 사람들입니다. 말세에 교회들은 그런 방법으로 말씀을 더럽히고, 더럽혀진 말씀을 가지고 교인들을 잘못된 길로 끌고 갑니다. 그러므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주님을 공회로 끌고 가는 건 말세에 타락한 교회들이 거짓 교리를 가지고 진리를 심판하려고 하는 걸 의미합니다. 지금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존 교회의 지도자들은 새 교회의 진리로 다시 오신 주님을 불법자요 이단이라고 마음대로 심판합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주님께 묻습니다. 67절, 68절입니다.

 

67이르되 네가 그리스도이거든 우리에게 말하라 대답하시되 내가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할 것이요 68내가 물어도 너희가 대답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말씀에서 그리스도라는 말은 기름 부음 받은 자, 또는 왕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왕은 속뜻으로 진리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네가 그리스도이거든 우리에게 말하라 하는 것은 악의적인 거짓 안에 있는 자들이 진리를 심판하는 것입니다. 악의적인 거짓 안에 있는 사람이 있고, 선의의 거짓 안에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후자의 사람은 언젠가는 진리를 이해합니다. 그들에게 아직 선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전자의 사람, 즉 악의적인 거짓 안에 있는 사람은 영원히 진리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악과 진리는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가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할 것이요 내가 물어도 너희가 대답하지 아니할 것이다 하신 것입니다. 계속해서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69절입니다.

 

69그러나 이제부터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 하시니

 

여기서 인자는 진리의 측면에서 주님을 뜻합니다. 인자로 표현되는 진리는 지옥과 싸우는 진리이고, 그러므로 아직 완전한 진리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완전한 진리라면 지옥이 감히 공격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시험을 받으실 때마다 당신 자신을 인자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리라고 한 인자는 누굴까요? 지옥의 시험을 완전히 이기시고 전능한 힘을 갖게 된 진리, 바로 주님이십니다. 따라서 ‘이제부터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 하신 것은, 이제부터의 말씀은 지옥의 어떤 어둠도 훼손할 수 없는 완전한 말씀이며 진리라는 뜻입니다. 주님은 지옥의 모든 시험을 이기시고, 완전한 진리로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진리를 가지고, 낡고 타락한 교회를 대신, 새 교회의 문을 여십니다. 그 완전하고 전능한 진리이시며 주님이신 이가 바로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인자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이 오셔서 지옥을 완전히 이기시기 전의 말씀은 완전한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에 대해 ‘천국의 비밀’ 6373번 글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신성한 진리는 천국을 통해 인간에게로 흘러들어온다. 그러나 인간이 선으로부터 멀어졌을 때, 그 신성은 충분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주님은 세상에 오셔서 당신 안의 인성을 거룩하게 만드셨고, 그리하여 그때 주님의 신적 인성은 신성한 진리의 근원이 되었다.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진리를 통해 선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구원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것에 대해 욥기 15장 15절은 ‘하나님은 거룩한 자들을 믿지 아니하시나니 하늘이라도 그가 보시기에 부정하거든’이라고 말한다.

 

욥기에 ‘하늘이라도 그가 보시기에 부정하거든’이라고 한 것은 주님이 보시기에 그동안 천국을 통해 지상으로 내려오는 진리는 인간을 거듭나게 할 정도로 완전한 진리가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그런가 하면 ‘천국의 비밀’ 9807:6번 글은

 

주님이 세상에서 지옥을 완전히 이기시고 천국과 지옥의 모든 것을 당신의 질서 안에 두신 후, 신적 진리는 자체로 전능한 힘을 가진다.

 

라고 합니다. 이상으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주님 오시기 전의 말씀이 인간에 의해 훼손될 수 있는 말씀이라면, 주님이 오신 후의 말씀은 아무도 훼손할 수 없는 능력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해 오늘 본문 70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70다 이르되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대답하시되 너희들이 내가 그라고 말하고 있느니라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은 지옥을 이기고 영화롭게 되신 주님의 신적 인성을 뜻하고, 또한 그때 선으로 충만하게 된 능력의 말씀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대제사장에게 ‘너희들이 내가 그라고 말하고 있느니라’ 하신 것은, 이제부터의 말씀은 누군가 더럽히려고 할 때, 그들의 추악함이 드러날 뿐 결코 더럽힐 수 없는 말씀임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더럽히려 할수록 오히려 그들 스스로 진리를 증거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지금 우리가 믿는 이 진리가 바로 그런 전능하신 진리입니다. 새 교회의 모든 성도가 이 진리의 힘을 의심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또한 진리의 전능하신 힘에 의지해 매일 같이 새로워지시길 기도합니다.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요17:5)

 

아멘

 

2023-02-05(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10-27(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4-10-27(D1)-주일예배(2567, 눅22,63-71), '이제부터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pdf
0.41MB
축도.2024-10-27(D1)-주일예배(2567, 눅22,63-71), '이제부터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pdf
0.20M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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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 울기 전에 세 번 주님을 부인한 베드로

 

 

54예수를 잡아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갈새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니라 55사람들이 뜰 가운데 불을 피우고 함께 앉았는지라 베드로도 그 가운데 앉았더니 56한 여종이 베드로의 불빛을 향하여 앉은 것을 보고 주목하여 이르되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하니 57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이 여자여 내가 그를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58조금 후에 다른 사람이 보고 이르되 너도 그 도당이라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아니로라 하더라 59한 시간쯤 있다가 또 한 사람이 장담하여 이르되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60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네가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아직 말하고 있을 때에 닭이 곧 울더라 61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62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눅22:54-62)

 

 

(오직 믿음의) 신앙이 주님을 배척한다는 것은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 부인한 것의 의미를 통해 알 수 있다. 그가 밤에 주님을 부인한 것은 교회의 마지막 때 즉 교회 안에 인애가 없는 때를 뜻한다. (천국의 비밀 6073:3, 이순철 역) And that faith would reject the Lord is evident from the representation by Peter when he denied Him thrice; that he did this at night, signifies the last time of the church, when there is no longer any charity (see n. 6000);

 

 

말씀의 영적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이 말씀을 읽으면서, ‘나라도 아마 그랬을 거야’ 할까요, 아니면 베드로를 비난하거나 안타까워할까요? 여기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는 영적 의미, 곧 속뜻으로 주님의 제자를 뜻하는 게 아니라 사랑 없는 신앙, 그러니까 사랑과 분리된 신앙, 말로는 사랑, 사랑하는데 실제로는 삶이 받쳐주지 않거나 사랑의 삶, 즉 체어리티(charity, 인애)의 삶에 별로 관심이 없는 신앙을 뜻합니다. 베드로는 본래 사랑과 체어리티를 동반한 신앙을 뜻합니다만, 그러나 본문에서는 교회의 마지막 때의 신앙, 즉 신앙과 교리만 있고, 정작 있어야 할 사랑은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 없는 신앙이란 어떤 것입니까? 주님을 믿기는 하는 데 그에 따라 살지는 않는 것입니다. 사랑은 곧 삶이기 때문입니다.

 

※ 이 문제는 사실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제가 요즘 요한계시록 번역 준비 작업을 하면서 그 속뜻 브리핑을 읽고 있는데, 거기 보면 계시록에 나오는 용, 짐승이 다 그 속뜻으로는 이런 신앙, 이런 신앙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읽고 있는 책은 스베덴보리(1688-1772, 스웨덴) 저, ‘계시록 해설’(Apocalypse Explained, 1757년에 책을 쓰기 시작했으나 생전엔 출판을 못 한, 사후 첫 라틴 출판은 1785-1789)입니다.

 

세상에서는 이웃에게 많이 베풀고 기부를 많이 하는 사람을 사랑이 많은 사람이라고 합니다만, 그러나 새 교회에서는 자기가 맡은 일을 공정하고 성실하게 하는 걸 사랑이며 체어리티라고 가르칩니다. 만약 국회의원이 자기 자신이나 가까운 사람들에게 유리하도록 법을 만든다면, 그것은 몇몇 사람에게만 좋고 그 밖의 사람에게는 나쁜 법이 될 것이며, 그러므로 그것은 이웃을 사랑하는 게 아닙니다. 교회가 주님에게서 점점 멀어지면 나중에는 신앙만으로 구원받는다고 가르치고 삶을 소홀히 합니다. 그런 신앙, 그런 신앙이 오늘 본문의 베드로로 표상되는 신앙입니다.

 

54예수를 잡아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갈새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니라

 

그래서 본문 54절에 보면, 베드로가 주님을 멀찍이 따라갔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베드로로 표상되는 신앙이 주님과는 거리가 먼 신앙이라는 뜻입니다. 신앙인들이 사랑 없는 신앙 안에 있을 때, 그들에게 있는 진리는 마치 감옥에 갇힌 것처럼 힘을 쓰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그런 신앙을 가지고는 이웃을 사랑할 수도 없고, 악의 유혹을 물리칠 수도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이 대제사장의 집에 붙잡혀 있는 것은 진리가 그렇게 힘을 쓰지 못하는 모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 이 누가복음 속뜻 강해를 비롯, 이순철 목사님의 설교 원본은 ‘믿음’(belief)과 ‘신앙’(faith)을 별로 구분하지 않습니다. 이는 목사님이 개신교 배경이시기 때문인 것 같은데요,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글들을 보면 ‘belief’보다 ‘faith’를 압도적으로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오직 믿음’이라는 표현에서조차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는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가급적 ‘믿음’을 ‘신앙’으로 수정, 표기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집에 들어갔을 때 일어난 일들을 본문 55절과 56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55사람들이 뜰 가운데 불을 피우고 함께 앉았는지라 베드로도 그 가운데 앉았더니 56한 여종이 베드로의 불빛을 향하여 앉은 것을 보고 주목하여 이르되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하니

 

한글 성경에는 뜰 한가운데 불을 피웠다고 하는데, 영어 성경에는 ‘넓은 방 한가운데’라고 되어 있습니다. 말씀에서 방은 사람의 마음을 의미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대제사장 집의 방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사랑 없는 신앙 안에 있는 사람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나타냅니다. 이를테면 방 한가운데 타고 있는 불은 애정을 뜻하는데, 그것은 지옥으로부터 그들의 자아 사랑을 통해 흘러들어오는 탐욕과 미움, 질투 같은 악한 애정을 뜻하며, 그러므로 베드로가 그 불을 쬐는 것은 사랑 없는 신앙은 필연적으로 악한 애정의 지배를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때 여종 하나가 베드로를 주목하다가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합니다. 여종은 악한 애정을 가진 지옥의 영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여종이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다 도발하는 건, 지옥의 영들이 베드로로 표상되는 사랑 없는 신앙 안에 있는 사람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사랑 없는 신앙 안에 있는 사람들, 이를테면 믿음만의 교리 안에 있는 사람 중에도 진리를 따라 살려는 순진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때 그의 마음속에 있는 지옥의 영들은 그의 일거일동을 주의 깊게 살피다 그가 자기들과 한 편이 아니다 싶을 때, 마치 이리가 달려들 듯 그를 공격합니다. 여종이 베드로를 주목하다가 도발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마침내 지옥의 영들과의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여종의 말,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에서 ‘’는 바로 진리이신 주님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이 말은 사랑 없는 신앙 안에 있는 사람에게 아직 진리가 남아 있음을 뜻합니다. 이러한 의미를 통해 지옥이 싸움을 걸어오는 목적이 무엇인지 분명해지는데요, 그들은 신앙인의 내면에 남아 있는 진리를 파괴하려는 것입니다. 싸움의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57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이 여자여 내가 그를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베드로는 ‘이 여자여 내가 그를 알지 못하노라’라고 주님을 부인했고, 그 순간 싸움이 끝나버렸습니다. 주님을 부인한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지옥의 유혹에 굴복하는 것이고, 그것은 시험에서 지는 것입니다.

 

신앙인들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속 깊은 곳으로부터 남을 미워하거나 시기하는 마음이 수시로 올라옵니다. 부정한 욕망에 휩싸일 때도 있습니다. 그런 것이 모두 지옥으로부터 오는 시험입니다. 그때 사랑 있는 신앙 안에 있는 사람은 그 싸움에서 어렵지 않게 이길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 있는 신앙 안에 주님이 계셔서 우리를 대신해 싸워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 없는 신앙 안에 있는 사람은 주님도 도우실 수 없습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그때 주님은 손발이 묶여 대제사장의 집에 갇힌 것과 같은 상태에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입으로만 말하고, 행하지는 않을 때, 우리에게 있는 진리는 그렇게 힘을 쓸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그렇게 되면 시험이 있을 때마다 속절없이 무너집니다. 그리고 그때 가지고 있던 선과 진리를 하나씩 지옥에게 빼앗깁니다. 그것은 마치 이스라엘의 왕들이 이방 왕들과의 싸움에서 졌을 때, 성전의 보물을 빼앗기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시험이 한바탕 휘몰아치고 지나가면 한동안은 평화가 찾아옵니다. 그때 신앙인들은 간신히 몸과 마음을 추슬러 새로운 삶을 살고자 하는데, 그러나 다시 지옥의 공격이 시작되고, 또 다시 무릎을 꿇습니다. 사랑 없는 신앙 가운데 있는 신앙인들의 그런 모습을 58절과 59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58조금 후에 다른 사람이 보고 이르되 너도 그 도당이라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아니로라 하더라 59한 시간쯤 있다가 또 한 사람이 장담하여 이르되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60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네가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아직 말하고 있을 때에 닭이 곧 울더라

 

지옥은 신앙인들을 항상 주시합니다. 그리고 그가 진리를 붙잡고 일어서려 할 때, 어디선가 나타나 ‘너도 그 도당이라’,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하며 계속 달려듭니다. 말씀에서 갈릴리 사람은 주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을 뜻하지만, 여기 지옥 영들이 말하는 갈릴리 사람은 온전히 지옥의 편에 서지 않은 사람, 즉 그들이 조금만 방심하면 언제든 예수의 편에 설 사람을 의미합니다. 지옥의 영들은 그런 사람을 유심히 지켜보다가 조금만 이상하면 ‘너도 그 도당이라’,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하며 맹렬히 공격해 넘어뜨립니다. 사랑 없는 신앙 안에 있는 교회가 그렇게 넘어지기를 반복하다 나중에는 더 이상 회복될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그렇게 교회가 완전히 무너지는 것이 베드로가 세 번 주님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말씀에서 세 번은 완전한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에는 그때 닭이 울었다고 합니다. 닭 우는 새벽은 주님이 오시는 때를 말합니다. 주님은 교회 안에 사랑과 신앙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때, 새로운 진리로 오셔서 그것으로 교회를 심판하시고, 새 교회를 여십니다. 그것이 닭이 울고 새벽이 오는 것입니다.

 

61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62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위 말씀은 기존의 교회가 무너지고, 새로운 교회가 열리는 걸 표현한 것입니다.

 

교회의 마지막 때 모든 사람이 죄의 홍수 속으로 빠져들 때도 노아처럼 주님의 손을 붙잡고 놓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돌아보시고, 그들을 그 무너지는 교회로부터 구해내십니다. 주님께서 돌이켜 보신 베드로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타락한 교회 안에서도 신앙을 잃지 않으려고 발버둥 쳤던 아주 적은 수의 사람들인 것입니다. 주님의 시선이 그들에게 머물렀을 때 비로소 그들의 영의 눈이 열리고 자신의 실체를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사랑도 신앙도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에 통곡합니다. 말씀에는 그것을 베드로가 제사장의 집을 빠져나와 슬피 우는 것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회개하는 사람들을 데리고 새로운 교회의 문을 여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교회의 마지막 때 어떻게 교회들이 무너지는가를 봤습니다. 주님은 교회와 교회에 속한 사람들에게 수없이 기회를 주십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그들은 입으로만 주님을 믿는다 할 뿐 변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의지가 약해서이기도 하고, 그들의 신앙인 사랑 없는 신앙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사랑 없는 신앙은 아무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옥이 공격해 올 때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다 보면 홍수에 떠내려가듯 한없이 주님에게서 멀어집니다. 새 교회 사람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새 교회의 진리는 힘이 있는 진리이지만 그렇더라도 삶 속에서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신앙에 따라 살지 않는 사람은 시험이 있을 때마다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한 것처럼 시험에서 지고, 그렇게 해서 주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는 한없이 미끄러져 지옥의 문턱에까지 이르렀지만, 마지막 순간에 주님께서 그를 들어 올려 구원하셨습니다. 그것은 침몰하는 거대한 배에서 구해지는 것과 같은 기적입니다. 그러므로 일이 뜻대로 되지 않더라도 누구든지 구원의 소망을 버리면 안 됩니다. 주님은 각자에게 숙제를 맡기십니다. 어떤 사람은 바로바로 마치지만, 한없이 미루는 사람도 있습니다. 후자라고 왜 숙제를 빨리 마치고 싶지 않겠습니까? 뜻대로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한없이 미적거리고 있을 때, 호된 시련이 닥칩니다. 시련은 극한의 상황에 몰릴 때까지 계속됩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그동안 어디에도 계시지 않은 것 같던 주님이 우리를 돌아보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시선이 우리에게 머무는 순간 눈이 밝아져 우리 자신의 실체를 볼 수 있습니다. 그때 한편으로는 수치의 눈물이, 그리고 한편으로는 회개의 눈물이 터집니다. 주님은 그렇게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십니다.

 

언젠가 제자들이 주님께 왜 우리는 주님처럼 귀신을 쫓아내지 못합니까 라고 물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이런 종류의 문제는 기도로 밖에는 풀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기도로 오랜 숙제를 풀어나가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기도할 때는 말로만 하지 말고, 작은 일이라도 사랑을 실천하며 하시기 바랍니다. 그때 주님께서 우리를 도와 기적을 만드십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새해를 맞이하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일는지, 밤중일는지, 닭 울 때일는지, 새벽일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막13:35)

 

아멘

 

2023-01-22(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10-20(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4-10-20(D1)-주일예배(2566, 눅22,54-62), '닭 울기 전에 세 번 주님을 부인한 베드로'.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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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4-10-20(D1)-주일예배(2566, 눅22,54-62), '닭 울기 전에 세 번 주님을 부인한 베드로'.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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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

 

 

47말씀하실 때에 한 무리가 오는데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라 하는 자가 그들을 앞장서 와서 48예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하시니 49그의 주위 사람들이 그 된 일을 보고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칼로 치리이까 하고 50그 중의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오른쪽 귀를 떨어뜨린지라 51예수께서 일러 이르시되 52예수께서 그 잡으러 온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경비대장들과 장로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왔느냐 53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 내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둠의 권세로다 하시더라 (눅22:47-53)

 

 

겟세마네 동산에서 마지막 기도를 마치신 주님이 제자들과 함께 계실 때, 열두 제자 중 하나인 유다가 한 무리의 사람들을 이끌고 나타났습니다. 주님을 잡으러 온 것입니다. 유다가 자기들끼리 정한 약속에 따라 주님께 입을 맞추러 다가옵니다. 그 장면을 본문 47, 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47말씀하실 때에 한 무리가 오는데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라 하는 자가 그들을 앞장서 와서 48예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하시니

 

말씀에서 유다라는 이름은 본래 사랑으로 행하는 선을 뜻합니다. 그러나 반대의 의미로는 자아 사랑에서 나오는 악을 뜻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유다는 특별히 자아 사랑에 깊이 빠져 있는 유대교회를 뜻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말씀에서 유다라는 이름은 좋은 의미로 쓰일 때도 있고, 나쁜 의미로 쓰일 때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다윗과 솔로몬 같은 걸출한 왕들이 유다 지파에서 나왔습니다. 그런가 하면, 야곱의 열두 아들 중 유다는 동생 요셉을 팔아넘기는 데 앞장섰고, 오늘 말씀에서 열두 제자 중 하나인 유다는 주님을 팔아넘기고 있습니다. 영적인 의미, 즉 그 속뜻으로 볼 때, 전자의 경우인 유다 지파로부터 왕들이 나온 것은 사랑의 선으로부터 진리가 나오는 걸 의미합니다. 그리고 후자의 경우, 즉 유다가 주님을 팔아넘기는 건 자아 사랑에 빠진 교회들이 진리를 파괴하는 걸 의미합니다. 자아 사랑에 빠진 사람이 진리를 미워하고 나중에는 파괴하기까지 하는 이유는, 진리가 자아 사랑에서 나오는 욕망을 죄라고 하고, 그러므로 멀리하라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불순한 욕망을 정당화하기 위해 진리를 왜곡, 조작합니다. 그것이 진리를 파괴하는 것이며, 또한 유다가 주님을 파는 것입니다.

 

유다가 입을 맞추려고 주님께 다가갔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하십니다. 주님이 유다에게 하신 말씀은 자아 사랑에 빠진 유대교회가 겉으로는 진리를 사랑하는 것처럼 하면서 속으로는 진리를 죽이는 것을 뜻합니다.

 

갑자기 나타난 대제사장의 군사들을 보고 주님의 제자들이 두려워하며 검을 빼 들었습니다. 그 모습을 49절과 50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49그의 주위 사람들이 그 된 일을 보고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칼로 치리이까 하고 50그 중의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오른쪽 귀를 떨어뜨린지라

 

※ 다음은 이순철 목사님의 청주 새 교회 시절 에피소드입니다.

 

청주에 살 때 일입니다. 어느 교파 사람들이 전도를 목적으로 저를 찾아온 적이 있습니다. 그분들이 얘기하는 걸 한참 듣고 있다가 궁금한 것을 몇 가지 물어봤습니다. 그러다가 논쟁이 좀 있었고, 정작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안 하고 돌아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읽으면서 그때 생각이 났습니다. 새 교회 진리 안에 있는 사람들이 다른 교파 사람들의 논리적 오류를 지적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런 상황을 즐기려 하는 건 좋지 않습니다. 그것은 마치 주님의 제자들이 진리의 검을 휘두르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제자 중 하나가 대제사장의 종의 귀, 오른쪽 귀를 잘랐다는 건 무슨 뜻일까요? 여기서 대제사장은 유대교회로 상징되는 타락한 교회의 성직자를 뜻하고, 그가 보낸 종은 그들이 만들어 낸 거짓 교리를 추종하는 사람들입니다. 또 오른쪽 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남아 있는 선한 의지를 뜻합니다. 왜냐하면 말씀에서 오른쪽은 선을 뜻하고, 귀는 의지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제자들이 검을 빼 종의 오른쪽 귀를 자르는 건, 진리를 가지고 거짓 진리에 맞서 싸울 때, 상대의 선한 의지를 꺾을 정도로 압도적으로 이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리와 비진리의 논쟁에서 진리의 편이 완승했다고 해서 비진리 안에 있던 사람들이 바로 승복하는 건 아닙니다. 승복하지 않는다는 건 거짓인 줄 알면서 기존의 신앙을 고집한다는 뜻일까요? 대개는 그렇지만 때에 따라서는 크게 실망한 나머지 그동안의 신앙을 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그런 것이 상대의 선한 의지를 꺾는 것입니다. 잘못된 신앙을 버린다면 잘된 일이라 하겠지만 꼭 그런 건 아닙니다. 진리이든 비진리이든 그것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신앙으로 구원받겠다는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도 강압적으로 상대의 신앙에 상처를 주면 안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말고 참으라고 하시고 종의 잘린 귀를 만져 낫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비록 거짓 진리 안에 있는 사람이라도 구원을 바라는 순수한 뜻이 있으면 그것을 꺾지 않고 지켜주십니다. 그런 의지가 있어야 언젠가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거짓 진리 안에 있는 사람 중 어떤 사람이 상대적으로 선한 사람이고, 어떤 사람이 악한 사람일까요? 그것에 대해 잠깐 말씀드리겠습니다. 스베덴보리 저, ‘계시록 해설’(Apocalypse Explained, 1785, 라틴) 413번 글에 따르면, 진리를 대적하는 사람 중에는 두 부류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거짓으로부터 악을 행하는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악으로부터 거짓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거짓으로부터 악을 행하는 사람은 거짓된 교리를 진리라고 믿고 그것에 따라 악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어리석을 뿐이고 악한 사람은 아닙니다. 적어도 자기가 믿는 교리에 충성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런 사람들의 신앙을 억지로 빼앗지 않으시고 지켜주십니다. 마치 아벨을 죽인 가인을 보호하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반대로 악으로부터 거짓을 행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악을 죄라고 생각하지 않을 뿐 아니라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대로 해석해 악이 죄가 아닌 것처럼 조작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어떤 경우에도 회개하지 않으며, 그래서 희망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귀를 만져 낫게 하신 것은 전자의 사람, 즉 거짓 교리를 진리로 믿고 충성하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손으로 만지신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그것에 대해 ‘계시록 해설’ 79번 글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영적인 힘은 다른 사람의 유익을 바라는 것이고, 할 수만 있다면 자기에게 있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영적으로 ‘손’이 뜻하는 것은 바로 이런 힘을 말한다. 그러므로 손으로 만지는 것은 그 힘이 통하고 전해지는 것을 뜻한다. (AE.79, 이순철 역) but spiritual power is to will the good of another, and to will to convey to another as far as possible what is with oneself. This power is what “hand” in the spiritual sense signifies, and its communication and transference are signified by “touching with the hand.” (AE.79, 계1:17 속뜻 주석)

 

주님께서 손으로 만지실 때,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와 그 능력이 상대에게 흘러 들어가 그의 영혼을 살린다는 것입니다. 바울도 한 때 주님을 심하게 대적했습니다. 사도행전 22장 20절에서 바울은 스데반이 피를 흘릴 적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했다고 고백합니다. 그럴 정도로 그는 주님을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런 바울에게도 회개와 갱생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것이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만져 낫게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당신을 잡으러 온 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52절 말씀입니다.

 

52예수께서 그 잡으러 온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경비대장들과 장로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왔느냐

 

대제사장은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타락한 유대교회의 성직자들을 뜻합니다. 그리고 경비대장은 성직자의 말만 듣고 참된 진리를 적대하는 교회 안의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경비대장에 비유하는 것은 영적으로 볼 때, 그들은 진리를 대적해 싸우는 악한 군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장로들은 누굴까요? 타락한 교회 안에 있는 지적인 사람들, 즉 교리에 밝은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유대교회의 성직자와 신학자들과 평신도들이 모두 합세해서 주님을 죽이려 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향해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같이 검과 뭉치를 가지고 왔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말씀에서 강도와 도둑은 신앙인들에게 거짓 진리를 주입하는 나쁜 성직자를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교인들에게 있는 진리와 선을 빼앗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도둑들이 오히려 주님을 강도로 몰고 있습니다. 그들이 들고 있는 검과 몽둥이는 말씀을 조작해 만든 거짓 진리를 뜻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같이 검과 몽둥이를 가지고 나왔느냐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53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 내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둠의 권세로다 하시더라

 

주님께서 끝으로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 내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둠의 권세로다 하시더라’ 하십니다. 어둠의 권세는 지옥으로부터 오는 악과 거짓의 권세입니다.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 주님을 대적하게 만드는 사악한 권세이며, 진리의 영광을 가리는 어둠의 권세입니다. 주님은 이제 그 악과 거짓의 권세에 맞서 최후의 싸움을 하려고 하십니다. 지옥의 칠흑 같은 어둠이 주님에게 아직 남아 있는 불완전한 인성을 통해 들어와 주님을 공격해 올 때, 주님은 당신 안에 있는 아버지의 신성으로 그것을 물리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불완전한 인성을 벗고, 여호와가 주시는 신적 인성을 입고 부활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둠의 권세로다’ 하시며, 마지막 시험 가운데로 기꺼이 들어가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유대교회의 마지막 때, 그들이 주님을 핍박한 것처럼 교회의 마지막 때에는 타락한 교회들이 참된 진리를 핍박합니다. 그들은 말씀을 조작해 만든 거짓 진리를 가지고 참된 진리를 이단이요, 불법자라 규정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님의 제자들처럼 진리의 검을 빼 들고 그들의 귀를 잘라야 할까요? 주님은 그러지 말라고 하십니다. 오히려 당신을 대적하는 자의 귀를 만져 낫게 하시고, 담담히 마지막 시험 가운데로 들어가셨습니다.

 

새 교회인들은 교파가 다르다고 다른 교파 사람들을 미워하면 안 됩니다. 진리에 대해 우월감을 가지거나 말씀을 전할 때 논쟁하듯 몰아붙여서도 안 됩니다. 상대의 신앙을 존중하고 언제까지라도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어둠의 때를 견뎌내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주님이 지옥의 어둠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의 신앙도 이 시대의 어둠을 뚫고 눈부시게 떠오를 날이 올 것입니다. 그때까지 유다처럼 실족하지 않도록 서로 기도하고 격려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성도에게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7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8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끝까지 이르리로다 (시2:7-8)

 

아멘

 

 

2023-01-08(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10-13(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4-10-13(D1)-주일예배(2565, 눅22,47-53),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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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4-10-13(D1)-주일예배(2565, 눅22,47-53, AE.79),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pdf
0.22M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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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39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 40그곳에 이르러 그들에게 이르시되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 하시고 41그들을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42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43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 44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되더라 45기도 후에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서 슬픔으로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 46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 (눅22:39-46)

 

 

오늘 본문 말씀에는 주님께서 마지막 시험인 십자가의 고난을 앞두고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모습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극한의 시험을 앞둔 주님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하나님이신 주님의 마음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러나 인간이신 예수의 두려움과 절망감이 어떤 것인지는 상상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앞으로 얼마나 지독하고 끔찍한 고통이 기다리고 있을지 내다보고 계셨고, 그래서 할 수만 있다면 거기서 벗어나고 싶으셨습니다. 그토록 절망적인 상황에서 주님은 평소와 같이 날이 어두워지자 감람(橄欖, 올리브나무의 中譯인 橄欖을 우리말로 읽은 것. 실제로는 중국의 감람나무와 이스라엘의 올리브나무는 서로 다른 나무) 산으로 가십니다. 그것을 본문 39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39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

 

주님은 아주 어릴 때부터 어른이 되어 십자가에 달리실 때까지 수없이 많은 시험을 당하셨습니다. 그 시험에 대해 마가복음 1장 13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광야에서 사십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막1:13)

 

사람들은 이 시험을 주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직전 잠시 겪으신 시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한 구절의 말씀 속에는 주님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 겪으신 모든 시험이 집약되어 있습니다. 말씀에서 40일은 주님의 모든 시험을 뜻하고, 들짐승과 함께 계시는 것은, 주님이 당신의 불완전한 인간을 통해 스스로 끌어들인 지옥의 공격들을 의미합니다. 이 말씀 말고 주님이 당신의 시험에 대해 따로 말씀하신 적은 없습니다. 이런 사실로부터 우리는 주님이 모든 시험을 혼자 묵묵히 싸워 이기셨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주님이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로 가셨다고 합니다. 모든 시험을 홀로 견디신 주님이 마지막 시험을 앞두고는 제자들과 함께 가신 이유가 뭘까요? 주님은 이 시험을 통해 두 가지를 보여 주시려 한 것 같습니다. 하나는 인류의 보편적 구원과 개별적 구원에 대해서입니다, 보편적 구원이란 시험을 통해 주님 자신이 영화롭게 되시는 것, 즉 완전한 진리가 되시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개별적 구원은 시험을 통해 신앙인들의 내면에서 선 없는 불완전 진리가 선을 동반한 완전 진리로 변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모든 시험에서 이기는 길은 사랑으로 드리는 기도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신 감람산, 즉 올리브 산은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선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감람산으로 가셔서 주님이 도착하신 곳은 어딜까요? 본문에는 지명을 말하지 않지만, 다른 복음서에서는 그곳을 겟세마네라고 합니다. 겟세마네에서 주님의 모습을 40절과 41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40그곳에 이르러 그들에게 이르시되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 하시고 41그들을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주님이 겟세마네를 마지막 기도의 장소로 택하신 까닭은, 겟세마네(가트 슈마님)는 올리브기름(슈마님)을 짜는 틀(가트)을 말하고, 앞에서 말한 것처럼 올리브기름은 사랑과 인애, 곧 체어리티(charity)의 선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당신 안에 계신 아버지와 전 인류에 대한 지극한 사랑으로 마지막 시험을 감당하시고자 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돌을 던지면 닿을 만한 곳에서 기도하기 시작하셨습니다. 돌을 던지면 닿을 만한 거리에 주님이 계신 것은,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부를 때 언제라도 오셔서 진리를 가지고 싸울 준비가 되어 있음을 뜻합니다. 돌은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성한 진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인들에게 시험이 있을 때 주님은 진리로 오셔서 그들을 위해 싸우십니다. 그렇다고 주님이 무조건 우리들의 시험에 개입하시는 건 아닙니다. 우리가 먼저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주님은 인간의 자유로운 의사를 존중하시기 때문이지요. 어떻게 하는 게 도움을 청하는 걸까요? 주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때 주님이 오셔서 모든 유혹에서 우리를 구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시험에서 이기지 못하거나, 또는 원하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소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도해도 응답이 없는 이유가 뭘까요? 그것에 대해 ‘천국의 비밀’ 2535번 글은,

 

사람이 사랑과 믿음으로, 그리고 오직 천국과 영적인 것을 위해 기도한다면 그 기도에는 희망과 위로, 또는 어떤 내적 기쁨의 계시 같은 것이 나타난다. (이순철 역) If the man prays from love and faith, and for only heavenly and spiritual things, there then comes forth in the prayer something like a revelation (which is manifested in the affection of him that prays) as to hope, consolation, or a certain inward joy. (AC.2535)

 

라고 합니다. 이 글을 통해 기도의 응답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이 필요하며, 그 결과로 오는 응답은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많은 경우에 기도의 응답이 없는 이유는, 주님에 대한 사랑과 믿음으로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나라를 바라보지 않고, 세상일에만 골몰하는 사람, 무슨 일이든 진리를 따르는 대신 자기 마음대로 하는 사람은 주님보다는 자기 자신과 세상을 더 사랑하고 믿는 사람입니다. 그런 경우는 기도 응답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열심히 해도 시험에 잘 넘어지거나 원하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자기의 삶을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주님의 뜻과 진리에 따라 이루어질 때 기도 응답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오랫동안 풀리지 않던 문제들이 풀리고, 주님에게서 오는 위로와 희망, 그리고 형언할 수 없는 내적인 기쁨이 있습니다. 그것이 기도 응답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 근처에서 무릎을 꿇고, 다음과 같이 기도하십니다.

 

42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말씀에서 잔과 포도주는 진리를 뜻하지만, 여기서는 반대로 거짓을 뜻하고, 또한 시험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시험은 결국 거짓이 진리를 공격하고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하신 것은 어떻게 해서든 시험을 피하고 싶은 주님의 인간적인 욕구를 뜻합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에게 남아 있는 불완전한 인간이 하는 기도라는 말입니다. 만일 그 기도가 이루어졌다면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지 않았을 것이고, 그렇다면 인류의 구원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 반전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기도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기도로 말미암아 주님은 지옥과의 싸움에서 완전히 이기실 수 있었습니다. 그때 당신 안에 있는 불완전한 인간의 뜻이 완전히 꺾이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43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 44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되더라

 

말씀에는 주님이 힘써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마치 핏방울처럼 땅에 떨어졌다고 합니다. 땀이 핏방울처럼 떨어지는 것은 주님이 지독한 두려움과 절망 속에서 싸우시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절망과 고통만 있었던 건 아닙니다. 한편으로는 위로와 희망의 소리도 들렸습니다.

 

이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창15:1)

 

라고 아버지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위로가 있었기 때문에, 주님은 죽을 것 같은 시험을 떨치고 일어나실 수 있었습니다.

 

※ 위 창세기 말씀에서 아브람은 주님을 표상(表象)합니다.

 

45기도 후에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서 슬픔으로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 46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

 

주님께서 기도를 마치시고 제자들에게로 가셨습니다. 45절에는 제자들이 슬픔으로 인하여 잠들었다고 했습니다. 시험이 깊을 때는 주님으로부터 버려진 것과 같은 느낌이 듭니다. 지옥이 너무 두렵고 싸울 생각이 없습니다. 기도할 의지도 사라집니다. 일종의 자포자기와 같은 상태가 됩니다. 그런 상태가 제자들이 슬픔에 지쳐 잠이 든 상태입니다. 그렇더라도 주님은 당신의 제자들을 한심해하거나 나무라지 않으시고, 포기하지도 않으십니다. 가만히 다가와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라고 하십니다. 시험을 이기신 능력의 주님이 우리를 깨우시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세상을 향하던 마음을 돌려 주님을 바라봅니다. 그것이 일어나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왜 주님은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었을까요? 그 이유는 주님의 영혼은 신성(神性, Divine)이셨지만, 어머니로부터 받은 인간, 인성(人性, human)은 순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시험을 통해 불완전한 인간을 신성하게 만드셔야 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주님은 아버지이신 신성 앞에 자신을 모두 내려놓고 지극히 겸손하셨습니다. 그와 관련해 ‘참된 기독교’ 104번 글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의 신성과 인성이 하나로 되어가는 것이 비움(Exinanition)의 상태라면 신성과 인성의 합일(union) 그 자체는 영화(Glorification)의 상태이다. 주님은 세상에 계실 때 이 두 상태, 즉 비움의 상태와 영화의 상태로 계셨다. (이순철 역) The progress towards union was his state of exinanition [emptying himself], and the union itself is his state of glorification. when the Lord was in the world he was in two states, called the state of exinanition and the state of glorification. (TCR.104)

 

그러므로 주님이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신 것은 주님의 겸손과 비움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거룩하신 주님도 비움과 겸손을 통해 지독한 시험들을 이겨내시고 아버지와 분리된 인간을 벗고 아버지와 하나 된 인간이 되셨습니다. 우리도 주님처럼 주님과 이웃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처럼 우리도 승리할 수 있으며, 그렇게 해서 주님과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배운 또 하나의 교훈은 기도할 때는 사랑과 믿음으로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헌금을 많이 하고, 이웃에게 베푸는 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물론 그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원하시는 사랑은 각자 직업에 관한 일과 일상의 일들을 성실하고 정직하게 하는 것입니다. 또 진리가 아닌 것을 멀리하는 것은 사랑 중에서도 첫 번째 사랑입니다. 한 손으로 악을 행하면서 다른 손으로 이웃을 사랑하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얼굴에 난 종기를 그대로 두고 분을 바르는 거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사랑과 믿음과 겸손의 기도를 드리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모든 성도와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함께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사53:12)

 

아멘

 

2022-12-11(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10-06(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4-10-06(D1)-주일예배(2564, 눅22,39-46),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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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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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의 속뜻

 

 

35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전대와 배낭과 신발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부족한 것이 있더냐 이르되 없었나이다 36이르시되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배낭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 37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기록된 바 그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한 말이 내게 이루어져야 하리니 내게 관한 일이 이루어져 감이니라 38그들이 여짜오되 주여 보소서 여기 검 둘이 있나이다 대답하시되 족하다 하시니라 (눅22:35-38)

 

 

오늘 본문 첫 구절입니다.

 

35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전대와 배낭과 신발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부족한 것이 있더냐 이르되 없었나이다

 

※ 아래 에피소드는 오늘 이 설교의 원저자이신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님의 에피소드입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신학교를 졸업하고 처음 목회를 시작할 때 생각이 났습니다. 2011년 1월 2일, 정초(正初)에 집에서 아내와 함께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아직 목회에 대한 열의가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뭐랄까 이 진리를 누군가에게 전해야만 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생계에 대한 대책도 없었고, 신학교를 졸업했다고는 하나 진리에 대한 이해도 여전히 부족했습니다. 그때를 돌아보면, 오늘 본문 말씀처럼, 전대(纏帶, 허리에 두르거나 어깨에 메게 된 자루, 중간을 막고 두 끝을 터서 그곳으로 돈이나 물건을 넣게 되었음)도 없고, 변변한 신발도 없이 먼 길을 떠나는 사람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 말씀이 특별히 마음에 와닿습니다. 어려운 일이 많았는데도 목회를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고비마다 주님의 도우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족한 것이 있더냐’시는 주님 말씀이 마치 제게 하시는 것처럼 느껴지는 건 아마도 그래서일 것입니다.

 

사실 전대와 배낭, 신발이 없는 제자들의 모습은, 진리를 찾아 처음 새 교회로 왔을 때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영적 의미로 전대와 배낭이 없다는 것은 진리, 또는 진리의 지식이 없다는 뜻이니까요. 그동안 새 교회로 오신 분들을 보면, 대개 ‘천국과 지옥’이나 ‘참된 기독교’ 같은 스베덴보리의 책을 읽고 공감하는 분들이었습니다. 그때는 진리에 대한 이해도 부족하고, 아직 확신도 없는 상태입니다. 이를테면 그런 게 전대와 배낭이 없이 길을 떠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발이 없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발은 인체에서 가장 낮은 데 있으므로 영적으로는 가장 낮은 차원의 것인 물질적이고 세상적인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신발은 발보다 아래 있으므로 영적으로는 가장 낮은 것인 감각적인 것을 뜻합니다. 감각적인 것은 어떤 걸까요? 눈과 귀, 촉감과 같은 감각을 통해 느껴지는 것들입니다. 예를 들면 영화를 본다거나 좋은 오디오로 음악을 듣는 것, 좋은 천으로 만든 옷을 입는 것 같은 말초적인 즐거움이 모두 감각적인 것입니다. 이런 감각적 즐거움에 몰두하게 되면 영적인 것에서 점점 멀어지게 됩니다. 감각적 기쁨이 영적인 것을 방해하기 때문인데요, 그런 이유로 해서 주님은 떨기나무의 불꽃 속에서 모세를 처음 만나실 때,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출3:5)

 

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몇 년 전에 교회를 지으면서 바닥에 온돌을 깔았는데 그 역시 같은 의미입니다. 주님 앞에 나올 때 신을 벗음으로써 감각적인 것으로부터 멀리 있음을 나타내려는 것이지요. 그렇게 보면 신발이 없다는 건 영적으로 나쁜 의미가 아닌데, 오늘 본문에서는 그러나 부정적인 의미를 나타냅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신발이 없다는 건 외적인 면에서 제자들에게 부족한 게 많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제자들의 표정이나 말투, 행동거지 같은 외적인 것들이 그다지 경건하거나 썩 지적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읽다 보면, 주님의 제자들이 누가 더 높으냐 서로 다투는 모습을 종종 봅니다. 베드로는 특히 감정 기복이 심한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저들에게 잡혀가실 때는 검을 꺼내어 그중 한 사람의 귀를 자르더니, 이번에는 정반대로 대제사장의 뜰에서 만난 사람이 그를 고발하려고 했을 때는 두려운 나머지 주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습니다. 그에 비해 바리새인들은 어땠을까요? 적어도 겉으로는 경건했습니다. 회당과 큰 거리에서 거룩한 모습으로 기도했고, 말투는 온유하고 행동거지는 신중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그 모든 게 겉모습일 뿐이고, 속을 들여다보면 누구보다 교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들을 회칠한 무덤에 비유하셨습니다. 이런 정황들을 볼 때,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처음 모습은 지금 우리들의 모습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족한 것이 없더냐는 주님의 물음에 제자들이 ‘없었나이다’라고 대답하자 주님께서는 다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6절,

 

36이르시되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배낭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

 

이 말씀은, 한마디로 각자가 가지고 있는 진리의 지식을 시험을 통해 진리로 바꾸라는 말씀입니다. 새 교회에 처음 나온 분들은 예배에 참석해 설교를 듣고, 말씀을 통해 교리를 배웁니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시험이 옵니다. 여러 가지 시험이 있습니다. 질병이나 물질의 시험이 있는가 하면, 직장에서의 시험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러한 시험을 허용하시는 이유에 대해 ‘천국의 비밀’ 8966번 글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시험은 신앙의 진리를 확인하고 고취시켜 의지 안에 심으며, 그렇게 해서 인애(仁愛, charity 체어리티)의 선이 되게끔 도와준다. 사람은 신앙의 진리를 가지고 악과 거짓에 맞서 싸우기 때문이다. (AC.8966, 이순철 역) Temptations conduce to the confirmation of the truths of faith, also to the implantation of them, and the insinuation of them into the will, that they may become goods of charity. For, as before said, man fights from the truths of faith against evils and falsities; (AC.8966)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앙의 진리는 시험을 통해 체어리티의 선으로 바뀐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처음 신앙으로 받아들인 진리는 그 자체로는 선이 없는 진리입니다. 그래서 그것으로는 시험에서 이기기 어렵습니다. 진리의 능력은 진리 안에 있는 선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에 비해 신앙의 선(goods of charity)이라고 하는 체어리티의 선은 선을 품고 있는 진리이며, 그러므로 능력의 진리입니다. 그래서 거듭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각자가 가지고 있는 신앙의 진리를 체어리티의 선으로 바꿔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배낭도 그리하고’라 하신 말씀은 선 없는 진리, 즉 진리의 지식만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것을 선 있는 진리로 바꿔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앞의 ‘전대, 배낭’은 최초의 신앙의 진리를 뜻하고, 뒤의 ‘가지라’는 것은 신앙의 선, 또는 인애, 체어리티의 선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이성 안에만 머물러 있는 진리의 지식을 주님과 협력하여 의지 안으로 옮기라는 것입니다. 그때 그 진리는 선 있는 진리가 됩니다. 이성 안에는 선이 없지만 의지 안에는 선이 있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지식을 의지 안으로 옮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것에 대해 주님은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라고 하십니다. 말씀에서 검이나 칼은 자아와의 싸움, 즉 시험을 뜻합니다. 그리고 겉옷은 자아에 속한 것들을 뜻합니다. 예를 들면, 자아로부터 올라오는 이기심이나 좋지 않은 욕망 같은 것입니다. 진리를 통해 자신을 돌아볼 때, 그런 좋지 않은 것들이 보입니다. 그때 그것과 싸워 몰아내야 합니다. 겉옷을 팔아 검을 사라는 것은 그런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교회에 나와 처음 배운 진리의 지식은 아무 힘이 없다 했는데, 어떻게 그것을 가지고 시험에서 이길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진리의 지식으로는 시험에서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사람의 이성 안에는 진리의 지식만 있는 게 아니라 이른바 양심이라는 선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진리의 지식과 양심이라는 선을 가지고 처음에는 가벼운 시험부터 이겨나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번 시험에서 이길 때마다 점점 더 큰 시험을 이길 능력이 생깁니다. 그와 관련해 ‘천국의 비밀’ 6663번 글은 시험에서 이길 때마다 점점 진리가 늘어난다(truths grew according to the infestations)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진리는 선이 있는 진리이며, 그래서 능력이 있는 진리입니다.

 

시험의 중요성을 말씀하신 주님께서 이번에는 당신 자신의 시험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37절 말씀이 그것입니다.

 

37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기록된 바 그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한 말이 내게 이루어져야 하리니 내게 관한 일이 이루어져 감이니라

 

주님은 세상에 오셔서 당신에 대한 구약의 모든 예언을 빠짐없이 이루셨고, 그리하여 완전한 말씀이 되셨습니다. 말씀 안에는 말씀의 목적인 사랑이 있고, 목적을 이루는 수단인 진리가 있으며, 그것의 결과인 쓸모, 쓰임새(use)가 있습니다. 여기서 쓰임새란 말씀 안의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통해 나오는 말씀의 능력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완전한 말씀이 되셨다는 건 세상에서의 삶을 통해 당신에 대한 구약의 모든 예언을 구체적으로 실현하셨다는 뜻이며, 그리하여 주님 자신이 사랑 자체, 진리 자체, 쓸모 자체가 되셨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생애를 돌아보면 그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기록된 바 그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한 말’은 이사야서 53장 12절,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라는 말씀에서 비롯한 것인데, 주님은 이 예언이 실제로 이루어질 거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크게 낙심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언젠가는 주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모든 사람이 인정하게 될 거라고 믿었고, 그 결과 자기들의 앞날도 훤하게 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속된, 다분히 세속적인 이해와는 달리 인류 전체의 거듭남을 위해서는, 즉 인류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사실 이것이 주님이 오신 주된 목적인데, 주님은 자신이 먼저 영화롭게 되셔야만 했습니다. 주님의 영화란 당신의 불완전한 인성, 즉 육의 어머니 마리아를 통해 유전하신 인성이 시험과 시험에서의 승리를 통해 당신 안에 계신 신성과 하나 되는 일입니다. 그렇게 볼 때 인간의 시험이 거듭남을 위한 시험이라면 주님의 시험은 인성을 영화롭게 만드는 시험이었습니다. 주님은 지금 그 마지막 시험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고 계신 것입니다.

 

38그들이 여짜오되 주여 보소서 여기 검 둘이 있나이다 대답하시되 족하다 하시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고 제자들이 ‘주여 보소서 여기 검 둘이 있나이다’ 하니 주님께서 대답하시길 ‘족하다’ 하십니다. 앞의 36절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겉옷을 팔아 검을 사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당신이 마치 범법자처럼 끌려갈 것을 말씀하시지요. 그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검을 들고 싸워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검 두 자루를 주님 앞에 내놓았습니다. 그랬더니 주님께서 그것이면 족하다 하십니다. 주님은 이 말씀을 통해 무엇을 나타내려고 하셨을까요? 여기서 검은 시험을 통해 얻은 진리를 뜻하고, 둘이라는 수는 진리와 선의 결합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내놓은 검 두 자루는 곧, 시험을 통해 얻은, 선이 있는 진리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것이면 족하다 하신 것입니다. 선과 결합한 진리만 있으면 어떤 시험에서도 이길 수 있고 거듭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에 살다 보면 부조리한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진리를 알수록 그런 것들이 더 뚜렷하게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그것들과 싸우려 합니다. 그러나 부조리한 것은 외부에만 있는 게 아니라 각자의 마음속에도 있습니다. 외부 부조리에만 집중하고 맞서다 보면 내부의 부조리를 개선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가 진리를 가지고 실제로는 내면의 부조리와 맞서 싸우길 바라십니다. 즉 외부 부조리와 싸울 때에도 그에 상응하는 내부 부조리를 생각하며 싸우는 것이지요. 겉옷을 팔아 검을 사라는 말씀은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한편으로는 내면의 부조리와 싸우면서, 또 한편으로는 외부의 부조리를 견디며 의로운 방법으로 순응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주님께서 친히 그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주님은 아무 잘못이 없으신, 지극히 순결하신 분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주님을 마치 범법자처럼 끌어가 모욕, 폭행하였으며, 마지막에는 십자가에 매달았습니다. 그러는 동안 주님은 한 번도 저항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그런 점을 배워야 합니다. 그러므로 불의한 자들이 잘 되는 것을 불평하지 말고, 자기 안의 게으름과 탐욕, 이기심부터 먼저 몰아내야 하겠습니다. 그때 우리의 진리는 지식의 차원에서 진리의 차원으로, 선 없는 진리에서 선 있는 진리로 상승합니다. 그리고 내적으로도 그렇고, 외적인 면에서도 지극히 겸손, 온유, 지혜로운 사람이 됩니다.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성도가 선 있는 진리로 매일 같이 승리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마10:34)

 

아멘

 

2022-12-04(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09-29(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4-09-29(D1)-주일예배(2563, 눅22,35-38),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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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4-09-29(D1)-주일예배(2563, 눅22,35-38),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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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d) 없는 진리, 체어리티(charity) 없는 신앙

 

 

24또 그들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25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그들을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26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27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28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29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30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31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32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33그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 34이르시되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 (눅22:24-34)

 

 

다음은 마가복음 10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35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36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37여짜오되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38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39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내가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40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41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화를 내거늘 (막10:35-41)

 

※ 다음은 새 교회 이순철 목사님의 에피소드입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얼마 전 미국 제너럴 처치 목회자 회의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났습니다. 회의 도중에 제너럴 처치의 어떤 직책을 맡을 사람을 뽑았는데, 투표 결과 아시아에서는 일본 목사님이 선출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자리에 대한 욕심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서운하다고 할까 그런 생각이 잠깐 들었습니다. 한국 목회자들도 여럿 있는데 왜 일본 목회자인가 하는 생각이었겠지요. 오늘 말씀을 읽으면서 그때 그런 생각도 어쩌면 야고보와 요한 형제에게 다른 제자들이 화를 내는 심리 같은 것이었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주님의 제자들끼리 서로 다투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것을 24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24또 그들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과 늘 함께 다니며 주님에게서 천국에 대한 말씀을 수도 없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세상 사람들처럼 서로 누가 더 크냐 하며 동료들과 다툽니다. 그들이 그러는 이유에 대해 ‘천국의 비밀’ 3417번 글 3번 항은

 

기억의 지식 안에만 있고, 인애(charity)의 삶 안에 있지 않은 사람은 남보다 우월함에서 오는 기쁨만 알고, 겸손과 섬김의 애정에서 비롯한 천국의 기쁨은 전혀 모른다. (이순철 역) Thus they who are in the memory-knowledge of knowledges, and not in the life of charity, cannot know that there is any other delight than that which results from preeminence; and because this is the only delight that is seated in their minds, and makes all their life, therefore they are utterly ignorant of the heavenly delight that results from humiliation and the affection of serving others—that is, the delight of love to the Lord and of charity toward the neighbor—consequently of the blessedness and happiness thence derived. (AC.3417.3)

 

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제자들이 남보다 높아지려 하고, 지배하기를 좋아하는 것은 진리를 알기만 하고, 행하지는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사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새 교회 진리가 너무 좋고, 참으로 구원의 진리라는 걸 확신하지만, 정작 실천하지는 못할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제자들이 다투는 모습을 보시고, 주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25절에서 27절까지 말씀입니다.

 

25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그들을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26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27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주님께서 이르시길, ‘이방인의 임금들은 그들을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라 하십니다. 말씀에서 이방인은 교회 밖 사람을 뜻합니다. 그리고 임금과 집권자는 본래는 선이 있는 진리를 뜻하는데, 여기서는 이방인의 임금과 집권자라고 했기 때문에 선 없는 진리, 또는 체어리티(charity) 없는 신앙을 뜻합니다. 그러면 은인은 누굴까요? 은인은 주님이 주시는 선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신앙인들에게 은혜가 되는 것은 진리를 많이 아는 게 아니라 실천하는 것인데, 이때 진리 실천의 힘이 진리 안에 있는 선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에서 은인은 선을 뜻합니다. 이런 의미들을 종합해 볼 때, ‘이방인의 임금들은 그들을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라는 말씀은, 교회 밖 사람들은 선 없는 진리, 체어리티 없는 신앙을 마치 구원의 진리이며 신앙인 것처럼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그런 이유로 해서 이방인들 사이에서는 행하는 것보다는 진리를 많이 아는 사람이 높임을 받는 경향이 두드러짐을 봅니다.

 

주님께서는 이방인들은 그렇더라도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하십니다. 주님께서 너희라고 부른 제자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선 있는 진리, 즉 선을 동반한 진리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진리를 알기만 하는 게 아니라 행하면서 가르치기까지 하는 사람들이 주님의 제자들인 것입니다. 따라서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라 하신 것은 주님의 제자들은 이방인들과는 다르다는 겁니다. 어떻게 다를까요? 그것에 대해 주님은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고 하십니다. 큰 자와 다스리는 자는 선 있는 진리, 선을 동반한 진리 안에 있는 사람을 뜻하고, 젊은 자와 같다, 섬기는 자와 같다는 것은 자신을 낮춰 이웃을 섬긴다는 뜻입니다. 선 있는 진리를 소유한 사람은 교회 밖 사람처럼 스스로 높아지려 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낮추고 이웃을 섬기려고 노력합니다. 선 있는 진리가 그렇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선 있는 진리 그 자체인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주님의 제자들은 매우 세속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이 언젠가 자기들을 모든 나라 사람 위에 높이 세우시고, 그 사람들을 다스리게 하실 거라고 믿었습니다. 유대인들 대다수가 메시아에 대해 그런 환상을 가졌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신앙이 비록 속되지만, 그러나 꺾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8, 9절입니다.

 

28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29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주님께서 당신과 함께 시험을 견딘 사람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맡기겠다고 하십니다. 사실 주님이 시험을 받으시는 동안 제자들이 한 일은 없습니다. 주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지옥과 싸우셨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제자들을 가리켜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이라 하신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얻으려는 사람은 누구나 시험을 당하는데, 그때 혼자서는 싸울 수 없고, 항상 주님과 함께 싸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시험에서 싸워 이길 때, 각 사람 안에 교회가 세워집니다. 그리고 사후에는 그 교회의 모습과 똑같은 천국의 사회로 들어갑니다. 그러므로 시험에서 이긴 사람들에게 맡겨질 하나님의 나라는 지위나 권세가 아닙니다. 거듭나는 사람 안에 세워지는 교회와 사후에 들어갈 천국을 뜻합니다. 제자들은 이 말씀을 그냥 문자적으로만 이해하고 기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이 이 말씀을 하신 까닭은, 말씀의 문자적 의미는 내적 진리로 들어가는 문과 같으며, 그러므로 언젠가 제자들이 이를 통해 내적 진리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장차 시험을 받게 될 제자 시몬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31, 2절 말씀입니다.

 

31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32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시몬은 주님의 제자 베드로를 뜻하는데, 속뜻으로는 선이 있는 진리, 또는 체어리티 있는 신앙 안에 있는 사람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시몬아! 라고 부르시는 것은 선이 있는 진리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한다는 것은 시험을 뜻합니다. 신앙인들에게 시험은 마치 농부가 키로 곡식을 까불어 알곡과 쭉정이를 가려내는 일과 같습니다. 시험을 통해 마음속에서 거짓이 제거되고 진리가 남으며, 악이 제거되고 사랑과 체어리티가 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제자들에게는 시험이 꼭 필요합니다. 그러나 시험이 너무 깊으면 신앙을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동안 새 교회에 나와 세례까지 받았던 분들이 여럿 계신데, 그중 일부는 시험을 이기지 못하시고 그만 교회를 떠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라 하십니다. 주님과 함께 혹독한 시험에서 이긴 제자들은 선 없는 진리에서 선 있는 진리로, 체어리티 없는 신앙에서 체어리티 있는 신앙으로 완전히 돌아서게 됩니다. 새 교회 교리에서는 이것을 신앙의 진리 상태에서 신앙의 선 상태로 옮겨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신앙의 진리 상태는 진리를 믿기는 하는데 아직 실천하지는 못하는 상태이고, 신앙의 선 상태는 진리가 이끄는 대로 선을 행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돌이킨 후에’는 신앙의 진리 상태에서 신앙의 선 상태로 완전히 올라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네 형제를 굳게 하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일단 신앙의 선 상태가 되면 다시는 신앙의 진리 상태로 돌아가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뜻입니다. ‘형제’는 거듭나는 사람들이 소유하는 신앙의 선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33그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베드로는 사랑이 있는 신앙을 뜻합니다. 모든 교회가 처음에는 그렇게 순수하고 뜨거운 신앙으로 출발합니다. 그리고 그때 교회에 속한 사람들은 주님을 위해서라면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베드로가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 라고 말한 것은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의 이 각오는 교회가 처음 시작될 때, 신앙인들의 처음 사랑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뜨겁던 사랑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식어가고 나중에는 신앙만 남게 됩니다. 교회의 마지막 때 사람들의 신앙을 34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34이르시되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

 

닭 울기 전은 새벽을 뜻합니다. 영적 의미로 새벽은 기존 교회의 마지막 때이며, 동시에 주님이 오셔서 새 교회를 세우시는 때입니다. 베드로가 세 번 주님을 부인 한다는 것은 기존 교회에 주님에 대한 신앙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은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교회의 마지막 때의 신앙을 뜻하고, 세 번 부인한다는 것은 주님을 완전히 부인하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신앙 안에 사랑이 없으면, 삶이 없으면 신앙 없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신앙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 부인할 것이라는 예언은 가깝게는 유대교회의 몰락을, 멀게는 유대교회 이후에 세워질 교회의 몰락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다음은 새 교회의 에피소드입니다. 비록 새 교회에 있었던 일이지만, 내용이 유익하여 그대로 인용합니다.

 

지난 주일 예배가 끝난 후, 어떤 분이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주님이 십자가 마지막 시험을 이기고 부활하셨을 때 완전한 진리가 되셨다고 했는데, 그럼 왜 1,700년이 훨씬 지난 후에야 새 교회가 세워지고, 완전한 진리인 새 교회의 교리가 선포되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다른 분들도 비슷한 의문을 가질 것 같아 답변을 드립니다. 주님이 부활하셨을 때, 완전하고 신성한 진리가 되신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증언에 따르면, 주님께서 이른바 보혜사 성령이라고 하는 완전한 진리를 보내주시기 전, 영계에서 먼저 이루실 일이 있었습니다. 그 일은 마지막 심판을 통해 영계의 질서를 회복하는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오시기 전에는 지옥의 세력이 너무 커져서 천국을 압도했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하늘에 오르셔서 지옥을 이기신 완전한 진리로 마지막 심판을 단행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천국과 지옥을 그 신성하고 완전한 진리의 질서 아래 복종시키셨습니다. 주님이 영계의 질서를 회복했다는 것은 그런 뜻입니다. 천국이 지옥의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남으로써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해 지상으로 흘러들어오는 진리 또한 완전하고 신성한 진리가 되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일이 일어난 때를 지상의 시간으로 1770년 6월 19일이라고 증언합니다.

 

※ 아래는 위 내용에 대한 원문입니다. 참고하세요.

 

After this work was finished the Lord called together his twelve disciples who followed him in the world; and the next day he sent them all forth throughout the whole spiritual world to preach the gospel that the Lord God Jesus Christ reigns, whose kingdom shall be for ages and ages, according to the prediction in Daniel (7:13, 14), and in Revelation (11:15).

 

Also that blessed are those that come to the marriage supper of the lamb (Rev. 19:9).

 

This took place on the nineteenth day of June, 1770. This is what is meant by these words of the Lord:

 

He shall send his angels and they shall gather together his elect, from the end of the heavens to the end thereof (Matt. 24:31). (TCR.791)

 

그런 이유로 해서 주님은 부활하신 후 처음 만난 마리아에게,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요20:17) 말씀하셨습니다. 인류에게 완전한 진리를 주시기 위해서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았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에서 마리아는 진리에 대한 애정을 뜻하고, 주님과 마리아가 접촉하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신성하고 완전한 진리가 흘러들어오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인간에게 왜 완전한 진리가 필요한가를 알았고, 또 완전한 진리란 신성한 인간(The Divine Human)이신 주님에게서 나오는, 선 있는 진리, 선을 수반, 동반한 진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선 없는 진리, 체어리티 없는 신앙으로는 아무리 오래 신앙생활을 해도 거듭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제자들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세상에 오셔서 지옥과 싸우셨고, 그러는 동안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으셨습니다. 완전한 능력의 진리를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새 교회의 진리가 바로 그 완전한 능력의 진리입니다. 이 진리를 붙잡고 당면한 문제들과 싸워 나간다면 아무리 어려운 일도 반드시 극복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함께 하시길 기도합니다.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눅22:32)

 

아멘

 

이순철 목사

2022-11-13(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09-22(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4-09-22(D1)-주일예배(2562, 눅22,24-34), ‘선(Good) 없는 진리, 체어리티(charity) 없는 신앙’.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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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4-09-22(D1)-주일예배(2562, 눅22,24-34), ‘선(Good) 없는 진리, 체어리티(charity) 없는 신앙’.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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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와 함께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의 속뜻

 

 

14때가 이르매 예수께서 사도들과 함께 앉으사 15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16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17이에 잔을 받으사 감사 기도 하시고 이르시되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 18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19또 떡을 가져 감사 기도 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0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21그러나 보라 나를 파는 자의 손이 나와 함께 상 위에 있도다 22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하시니 23그들이 서로 묻되 우리 중에서 이 일을 행할 자가 누구일까 하더라 (눅22:14-23)

 

 

오늘 본문 14절과 15절은 주님이 어떤 마음으로 세상에 오셨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은 이렇습니다.

 

14때가 이르매 예수께서 사도들과 함께 앉으사 15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와 함께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또 원했다고 하십니다. 여기 너희, 곧 주님과 함께 유월절을 보내는 제자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세상 것을 버리고, 영원한 천국을 꿈꾸는 사람들입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 자유와 평화의 나라 가나안으로 가기를 원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그런데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주님이 주시는 유월절 떡과 잔을 먹고 마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떡과 잔으로 상징되는, 순진무구(純眞無垢)의 선과 거짓 없는 진리를 소유하지 않으면, 주님을 온전히 믿고 따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당신의 제자들이 당신과 함께 유월절 음식 먹기를 고대(苦待, 몹시 기다림)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날이 왔습니다. 제자들이 생각과 의지를 활짝 열고, 유월절 음식을 기꺼이 먹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에는 때가 이르렀다 했고, 주님께서는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또 원하였다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왜 고난을 앞두고 마지막 유월절 음식을 제자들과 함께 드시며, 또한 말씀에 그것을 자세히 기록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유월절 만찬을 통해 성찬 예배의 전례를 세우려 하시기 때문입니다. 아시는 것처럼 주님은 십자가의 마지막 시험을 이기신 후, 비로소 완전하신 하나님, 완전하신 말씀이 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때 주님 안의 신성(神性, The Divine)이 인성의 끝에까지 흘러들어와 신성과 인성(人性, The Divine Human)이 완전히 하나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상응의 의미로 볼 때, 주님의 신성과 인성이 하나가 되었다는 것은 말씀의 내적 진리가 문자적 의미 안에 충만하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속 사람이신 신성이 말씀의 내적 진리라면 주님의 겉 사람이신 인성은 말씀의 문자적 의미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말씀 그 자체이신 분이기 때문이지요. 그렇게 보면 고난이 있기 전의 말씀은 완전한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완전한 말씀이 아니었다는 것은, 그때 구약 말씀의 문자적 의미 안의 상태가 아직 내적 진리로 충만한 상태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당시 주님의 제자들은 성찬의 내적 의미를 완전히는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이 성찬 예배를 제정하신 것은 시대와 각자의 신앙에 따라 어떤 사람은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통해, 또 어떤 사람은 내적 진리를 통해 십자가 고난의 의미와 그 근저(根底, 밑바탕)에 있는 인류에 대한 주님의 사랑을 영원히 기억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가 고난을 받기 전 너희와 함께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또 원했다고 하셨습니다.

 

주님과 함께 먹는 유월절 음식은 어떤 것일까요? 그것에 대해 17절과 19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먼저 17절,

 

17이에 잔을 받으사 감사 기도 하시고 이르시되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

 

주님이 주시는 잔, 즉 포도주와 주님의 피는 영적으로는 같은 뜻입니다. 그러니까 성찬의 포도주로 표상되는 주님의 피는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적 진리(The Divine Truth)를 뜻합니다. 주님은 그것을 너희끼리 나누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진리를 배우는 것에 그치지 말고, 이웃에게 전하고 행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고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 진리를 억지로 전하라는 것은 아니고, 알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아는 만큼만 전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이 주신 잔을 서로 나누는 것이며, 그렇게 해서 주님께 다시 돌려드리는 일입니다. 다음은 19절,

 

19또 떡을 가져 감사 기도 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여기서 떡과 주님의 몸은 모두 인류에 대한 주님의 사랑(The Divine Love)을 뜻합니다. 그리고 떡을 떼어주시는 것은 주님과 인간 사이 상호적 사랑을 뜻합니다. 즉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이 주신 사랑으로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궁극적으로 주님을 사랑하며, 그렇게 해서 주님과 우리가 영원히 결합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성찬 예배를 제정하신 목적입니다. 그러나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성찬식에 담긴 이런 의미는 마지막 때 새 교회를 통해 말씀의 내적 의미가 밝혀지기 전에는 아무도 알 수 없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18절에서

 

18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26장 29절에서는 같은 말씀을,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은 땅에 마지막 새 교회가 나타나는 것을 의미하고, 그때 포도나무에서 난 새것은 새 교회를 통해 밝히시는 완전하고 신성한 진리를 뜻합니다. 그리고 너희와 함께 마신다는 것은 그 신성한 진리로 주님과 인간이 영원히 결합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 말씀과 관련하여 ‘계시록 해설’ 376번 글 26번 항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이 부활하신 후에는 주님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이 신성했으므로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 너희와 함께 마시겠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동시에 주님이 오시는 때는 주님께서 천국과 지옥의 모든 것을 당신의 질서 아래 두시는 때이다. (계시록 해설 376.26, 이순철 역) And as everything Divine, since the Lord has risen, proceeds from Him, He says that He will drink it with them when the kingdom of God shall come, and it came when He reduced all things to order in the heavens and in the hells. (AE.376.26)

 

이 말이 무슨 뜻일까요? 첫째는, 주님은 부활하심으로써 흠 없는 신성한 진리가 되셨다는 것이고, 둘째는, 하늘에 오르신 후, 마지막 심판을 통해 천국과 지옥을 주님의 신성한 진리 아래 굴복시키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는, 마지막 새 교회에 주신 완전하고 신성한 진리, 즉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통해 드러나는 내적 진리로 주님과 인류가 영원히 결합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런 이유로 해서, 주님은 당신에게서 나오는 신성한 진리를 언약의 피(blood of covenant)라 하셨습니다. 언약은 주님과의 결합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증언에 따르면, 주님이 오시기 전 천국은 지옥의 팽창으로 인해 완전한 상태가 아니었다고 합니다. 세상이 너무 악해서 사후, 지옥에 가는 사람들이 많아졌을 뿐만 아니라 악의 정도 또한 극악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지옥의 세력이 천국의 낮은 부분에까지 영향을 미쳤다고 합니다. 그것은 천국이 더 이상 완전하고 순수한 상태가 아니었다는 것이고, 그리하여 천국을 통해 지상으로 흘러들어오는 신성의 흐름 또한 완전하고 순수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해 지상으로 흘러들어오는 주님의 선과 진리가 인간을 거듭나게 할 정도로 그렇게 신성하거나 완전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직접 말씀을 가르치시고, 병을 고쳐주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인간의 몸으로 세상에 오신 주님은 지옥을 상대로 치열한 싸움을 하셨고, 그렇게 해서 지옥을 완전히 정복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천국과 지옥을 당신의 질서 아래 두실 수 있었던 것은 지옥을 이기신 그 신성하고 완전하신 능력으로 인함이었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신 것은 마지막 새 교회를 통해 완전하고 신성한 진리가 나타나기 전에는 주님과 인간 사이에 완전한 결합이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말씀입니다. 인간은 신성한 인간이신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성하고 완전한 진리를 통해서만 온전히 개혁되고 거듭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이 시대는 원하기만 하면 주님에게서 오는 신성한 진리와 선을 마음껏 먹고 마실 수 있는 때입니다. 그런데 21절과 22절에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1그러나 보라 나를 파는 자의 손이 나와 함께 상 위에 있도다 22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하시니

 

상은 음식을 올려놓고 먹는 곳입니다. 그래서 영적으로는 교회를 뜻합니다. 교회는 주님이 주시는 영적 양식을 먹고 마시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나를 파는 자의 손이 나와 함께 상 위에 있다 하십니다. 이 말씀이 무슨 뜻일까요? 진리를 배반하는 자는 늘 교회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진리를 가지고 주님과 이웃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사사로운 목적으로 악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일수록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진리를 왜곡하거나 조작하기를 잘합니다. 그동안 교회를 타락시킨 사람들도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제자 중에는 유다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혹자는 주님께서 구원의 섭리를 위해 그를 쓰셨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당신의 섭리를 이루시기 위해 사랑하는 제자를 타락시키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불순한 욕망이 그로 하여 주님을 배반하게 했고, 주님은 그것을 막지 않으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인자는 작정한 길을 가려니와 인자를 파는 사람에게 화가 있다 하신 것은 그 때문입니다.

 

23그들이 서로 묻되 우리 중에서 이 일을 행할 자가 누구일까 하더라

 

주님의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서로 물으며, 우리 중에 그런 일을 행할 자가 누굴까 했습니다. 참된 진리를 아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매우 두려운 일입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진리를 팔아넘기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절대 안 그럴 거라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지옥은 작은 틈을 비집고 들어와 우리의 욕망을 자극하고, 나쁜 생각을 불어넣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삶이 끝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마음을 놓으면 안 됩니다. 진리를 가까이하되 언제나 경외하는 마음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이 세상에 오심으로 주님과 예배를 표상하던 많은 것들이 폐지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에서 정하고 있는 각종 법도와 제사의 규례 같은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예배의 필수적인 요소라 생각하시고, 주님이 직접 남겨 놓으신 것이 있습니다. 세례(洗禮, 원어로는 βαπτίζω, βἀπτισμα, 곧 浸禮)식과 성찬식이 그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주님께서 마지막 시험을 앞두고 제자들과 함께 성찬식을 제정하시는 장면을 그리고 있습니다. 당시 주님의 제자들은 성찬식이 왜 필요한지, 성찬식에 나누는 음식이 어떤 의미인지 정확히 몰랐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 마지막 새 교회를 통해 밝히시기 전에는 아무도 알 수 없는 내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 성찬식을 제정하신 것은 그것이 가지고 있는 거룩한 의미 때문입니다. 그것이 뭘까요? 주님이 주신 사랑과 지혜, 또는 선과 진리로 주님과 인간이 영원히 결합하는 것입니다. 말씀의 속뜻으로 다시 오신 주님에게서 나오는 진리는 그 속에 선이 있는 진리입니다. 그리고 그 선의 바탕에는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있습니다. 사랑과 선이 없는 진리로는 주님이 주시는 것을 받을 수 없고, 주님과 결합할 수도 없습니다. 새 교회인이라고 해서 모두 선이 있는 진리를 가진 것은 아닙니다. 내면에 새 교회가 세워진 사람이라야 선이 있는 진리를 소유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성찬의 떡과 잔으로 매일 같이 선이 있는 진리를 소유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물질로는 살 수 없는 영원한 것을 향해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이 진리 안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눅22:15)

 

아멘

 

2022-11-06(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09-15(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4-09-15(D1)-주일예배(2561, 눅22,14-23), ‘너희와 함께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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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4-09-15(D1)-주일예배(2561, 눅22,14-23), ‘너희와 함께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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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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