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의 세례’의 속뜻
1하루는 예수께서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하실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장로들과 함께 가까이 와서 2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위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3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내게 말하라 4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5그들이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로부터라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6만일 사람으로부터라 하면 백성이 요한을 선지자로 인정하니 그들이 다 우리를 돌로 칠 것이라 하고 7대답하되 어디로부터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니 8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눅20:1-8)
말씀에서 돌로 치는 행위는 진리에 반(反)하는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을 뜻한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돌로 치려 한 까닭은 그가 아브라함이 있기 전부터 있었다고 말했기 때문이며, 그들은 그것을 신성모독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천국의 비밀 7456:8)
오늘부터 누가복음 20장입니다.
※ 다음은 이 설교의 원 저자이신 이순철 목사의 에피소드입니다.
제가 새 교회 진리를 처음 알게 된 건 30여 년 전입니다. 당시 저는 플라스틱 포장재를 생산하는 어떤 회사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건강이 좋지 않았고, 회사도 마음에 들지 않아 여러모로 우울할 때였습니다. 그때 가족 중 한 분이 스베덴보리의 ‘천국과 지옥’을 주시면서 읽어보라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별생각 없이 읽기 시작했는데, 읽어갈수록 거기 적힌 내용이 모두 진실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을 계기로 가족들이 모두 세례를 받고, 새 교회인이 되었습니다. 새 교회의 가르침 ‘천국의 비밀’ 5044번 글에는 ‘사람이 시험 가운데 있을 때 주님으로부터 진리가 흘러들어온다. 그 진리가 그들의 생각을 다스리며, 의심하거나 절망할 때 그들을 끌어올린다’라고 합니다. 사람이 어려운 지경에 있을 때, 자존감이 크게 낮아집니다. 새 교회에서는 그것을 자아가 죽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자아가 죽을 때, 주님으로부터 진리가 흘러들어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자아는 자기 생각이 아닌 것을 잘 안 받아들이며, 그러므로 자아가 성(盛)하게 되면, 진리를 오히려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인생의 시련은 사람을 영적으로 만드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이름만 대면 알만한 큰 교회에 다니는 분이 우리 교회로 찾아오셨습니다. 스베덴보리를 읽고 공감하는 바가 있어 몇 가지 물어볼 게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의 얘기에 따르면, 장애가 있는 딸이 있어 교회의 식구들과 오랫동안 기도해 왔는데 낫지는 않고, 오히려 좋지 않은 사고가 간혹가다 일어난다는 겁니다. 답답하고 가슴 아픈 일입니다. 요한복음 9장에 보면, 주님께서 날 때부터 소경으로 태어난 자에 대해 그가 소경인 건 그 사람의 죄도 아니고 부모의 죄도 아니며,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보면, 그분의 자녀에게 생긴 불행한 일도 필경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기 위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본인이나 부모의 고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삼중의 장애, 즉 시각, 청각 및 언어 장애 속에 살아야 했던 헬렌 켈러(1880-1968)는 새 교회인이었습니다. 그녀는 잠시만이라도 아름다운 하늘과 땅, 계절이 변화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평생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1927년에 ‘내 어둠 속의 빛’이라는 책을 냈는데 거기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임마누엘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은 나의 빛이었고, 내 손의 지팡이였으며, 그의 밝은 시력이 나의 길에 함께했다...’ 그녀가 한 말을 되뇌면서, 그녀를 통해 나타내신 하나님의 일이 무엇이었을까 잠시 생각해 봤습니다. 인간들은 부족한 자신을 통해 하나님이 무엇을 나타내려 하시는지 알려 하지 않습니다. 그저 당장 눈앞의 문제를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해결해 주시기만 바랍니다. 그리고 일이 뜻대로 안 되면, 주님을 원망하고 의심합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자아가 하는 일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주님이 성전에서 복음을 전하실 때, ‘당신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위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며서 주님의 권위를 의심합니다. 본문 1절과 2절입니다.
1하루는 예수께서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하실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장로들과 함께 가까이 와서 2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위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볼 때, 주님은 가난한 시골의 보잘것없는 목수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전에서 복음을 전하시는 주님께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이런 일을 하느냐 물었습니다. 말씀에서 성전(temple)은 진리를 가르치는 교회인 영적 교회를 나타내는데, 여기서는 특별히 마지막 때 주님이 세우시는 새 교회를 뜻한다고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의 내적 의미라는 참된 진리가 새 교회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가르치시는 백성(people)은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진리에 대한 애정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진리를 말해도 받아들이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십니다. 그런데 그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나타나 주님께 당신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고 묻습니다. 제사장(priest)은 본래 선을 뜻하지만, 여기서는 자아에서 나오는 악을 뜻합니다. 그리고 서기관은 그런 자아에서 나오는 거짓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주님과 주님이 전하시는 복음의 권위를 의심하는 것은 새 교회를 통해 말씀의 내적 의미가 밝혀질 때, 자아의 악과 거짓에 빠진 사람들이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문자로 된 겉뜻과 그 속에 감춰진 속뜻으로 되어 있습니다. 겉뜻만 있고 속뜻이 없다면, 말씀은 생명이 없는 죽은 것과 같습니다. 마치 영혼과 분리된 육신이 곧 시신인 것처럼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속뜻만 있고 겉뜻이 없으면, 속뜻은 허공 중에 흩어져 버리고 말 것입니다. 내용물만 있고, 담을 그릇이 없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은 겉뜻과 속뜻이 모두 중요하며, 둘 다 신성한 권위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겉뜻만 말씀이고, 속뜻은 말씀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 주님의 권위를 의심하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같은 자들이며, 자아에 매인 사람들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의 말을 들으시고 하신 주님의 말씀입니다. 3절과 4절,
3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내게 말하라 4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내적 의미로 볼 때, 주님이 말씀의 속뜻을 표상한다면 요한은 속뜻을 담는 그릇인 말씀의 겉뜻을 표상합니다. 요한을 가리켜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선지자라고 말한 것은 말씀의 겉뜻은 속뜻을 담기 위해 예비한 그릇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요한의 세례란 무엇일까요? 세례는 주님의 교회에 입문하는 것, 즉 회개와 거듭남의 삶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을 뜻하며, 추상적 의미, 곧 속뜻으로는 선, 또는 인애, 즉 체어리티(charity)의 삶을 뜻합니다. 그에 비해 요한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말씀의 겉뜻을 뜻하고, 속뜻으로는 진리, 또는 신앙을 뜻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요한의 세례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삶이 하나라는 새 교회의 신앙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체어리티의 삶은 없더라도 신앙, 즉 믿음만으로 능히 구원받을 수 있다는 신앙과는 반대되는 신앙이지요. 따라서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주님께서 물으시는 것은, 신앙과 체어리티의 삶이 하나라는 신앙이 하나님으로 온 것이냐, 아니면 인간이 사사로이 만든 것이냐 물으시는 것입니다. 주님 당시 유대 교회나 오늘날의 주류 교회들은 말씀을 임의로 왜곡, 체어리티의 삶은 빼고,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걸 가르칩니다.
※ 지금까지 개신교 안에서 신앙생활을 해온 제가 볼 때는 위 문장처럼 노골적으로 체어리티의 삶을 빼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아마 대부분의 새 교회 목회자들은 개신교 경험이 거의 없거나 있어도 잠깐 다니신 것만 있어 그 안에 깊숙이 있어 본 적이 없으셔서 이러시는 것 같습니다. 개신교 관련, 스베덴보리의 표현들을 보면, 살짝 무슨 중간이라는 게 없어 보이거든요... 다만 에베소서 다음 본문을 근거로 행위, 즉 체어리티의 삶을 덜 강조하거나 막연히 ‘뒤따라오는 것’ 정도로만 인식할 뿐이지요.
8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엡2:8, 9)
다만 신앙이냐 체어리티냐, 둘 중 하나를 택하라는, 양자택일식 접근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스베덴보리가 전하는 흥미로운 일화가 하나 있어 옮깁니다. ‘이신칭의’(以信稱義, 믿음으로 의롭게 됨)를 창안한 마틴 루터(1483-1546)를 영계에서 만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믿음 만에 의한 '이신득의'(위 이신칭의의 다른 말)라는 독단교리가 성언(聖言, ‘말씀’)에서 유래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총명에서 창안한 것이라는 확신을 하게 되었을 때, 주님, 체어리티, 참믿음, 자유의지, 그리고 속량에 관해 성언에 의한 새 교육을 받기를 원하였다. 그는 마침내 새로운 교회가 주초를 놓아야 할 진리들에 찬동하며, 점차적으로 그 교리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가 새로운 교회의 진리들을 획득하는 데 따라 가끔 자기의 옛 견해가 성언에 직접 반대되는 것이라고 자조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내가 믿음 만에 의한 득의에 내포되어 있는 다른 독단교리들, 곧 영적인 것들에 있어서 자유의지의 부정, 체어리티의 영적 본질의 부정 따위를 설교했다는 것을 이상히 여기지 마시오. 왜냐하면 내 목적은 로마 카톨릭으로부터의 분리였으니 그렇게 하지 않고는 그 목적이 달성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오류를 범했다는 것을 이상히 여기지 않고, 오히려 한 광인(狂人, 미치광이, 루터 자신을 말함)에 의해 다른 사람들이 따라서 광인이 된 것, 곧 이 독단교리 안에 내포된 사상들이 명확히 성서와 모순된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던 그들이 이상할 따름이요.'
여기서 그는 자기 옆에 서 있는 약간의 유명한 교리학자들을 향해 경멸의 눈길을 던졌다. 이어 나는 천사들에게 루터가 믿음 만에 의한 득의 교리로 자신들을 굳힌 다른 많은 자들보다 훨씬 전에 회심되었다고 알려주었다. 이런 루터의 회심이 가능했던 이유는 그가 젊어서 기독교 개혁이 시작되기 전에 체어리티의 중요성에 관한 교리에 정통해 있었기 때문이다. 또 그가 글로나 설교들로 체어리티를 훌륭하게 가르칠 수 있었던 것은 믿음만이라는 교리가 그의 겉 사람에게는 심겼으나 그의 속 사람 안에는 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루터와는 달리 젊어서부터 믿음 만에 의한 득의에 찬동하는 논조로 체어리티의 영적 성질에 반대하고, 스스로를 그 교리에 다진 자들의 경우는 다르다. 나는 삭소니 후작과 대화한 적이 있는데, 그는 루터와 세상에서 사귄 사람이다. 그는 말하기를 '루터는 겉으로는 체어리티를 믿음과 분리시켜, 구원하는 것은 체어리티가 아니라 믿음이라고 하였으나 이는 로마 카톨릭 종도들 때문에 그리하였고, 그 실제에 있어서는 체어리티를 믿음으로부터 분리한 것을 강하게 비난했다.'고 하였다. 이 후작은 축복받은 자들 가운데 있다...
즉 루터가 현 개신교가 그토록 붙들고 있는 ‘이신칭의’ 교리를 만든 것은 로마 카톨릭 때문이었으며, 실제로 그는 사후 영계에서 스베덴보리를 만나 이 사실을 자백하고, 돌이켰다는 얘기입니다.
제 설명은 여기까지 //
그러면서, 즉 ‘오직 믿음’(Sola Fide)의 기치 아래 주님이 새 교회를 통해 밝히시는 말씀의 내적 의미를 진리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물으시는 것은 말씀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정작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주님을 부정하는 자들의 위선을 주님께서 꼬집으신 것입니다. 그러자 그들이 다음과 같이 의논합니다. 5절로 7절,
5그들이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로부터라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6만일 사람으로부터라 하면 백성이 요한을 선지자로 인정하니 그들이 다 우리를 돌로 칠 것이라 하고 7대답하되 어디로부터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요한이 말씀의 외적 부분인 진리와 신앙을 뜻한다면, 세례는 말씀의 내적 부분인 선과 체어리티의 삶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그 둘은 떼려야 뗄 수가 없는 관계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의 고민이 거기 있습니다. 요한의 세례를 인정한다는 건 진리와 선, 신앙과 체어리티의 삶이 하나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동안 믿음 만의 신앙을 가르친 자들은 진리와 선, 신앙과 체어리티의 삶을 분리시켰다는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요한의 세례가 인간으로부터 왔다는 것은 신앙과 체어리티의 삶이 하나라는 신앙은 참된 신앙이 아니라 이단에 속한 사람들이 사사로이 만든 신앙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들을 영원히 떠날 것입니다. 백성들이 돌로 치는 것은 그런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돌로 치는 건 그들의 주장이 거짓임이 밝혀지는 것이고, 그리하여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들을 정죄하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도 저렇게도 대답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어디로부터인지 알지 못하노라’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8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하셨습니다. 양심을 따르지도 않고, 진리를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들은 주님과 말씀의 권위에 대해 아무리 말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양심에 따라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합리성, 즉 겉 사람과 속 사람을 연결하는 중간이 열리고, 이를 통해 말씀의 내적 의미와 그 속에 계신 주님의 권위를 인정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새 교회의 가르침, 그러니까 주님이 스베덴보리를 통해 밝히신 가르침에 의하면, 말씀의 겉뜻만으로도 구원에 관해 꼭 필요한 진리들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이를테면 신체의 다른 부분은 옷으로 가려져 있지만 손과 발만은 그대로 노출되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끊임없이 우리 내면의 성전에서 말씀의 속뜻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 이유는 말씀의 속뜻이야말로 다시 오신 주님이시고, 마지막 때 보내주시기로 한 또 다른 보혜사 성령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속뜻을 통해 우리는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아들이신 예수, 그리고 성령이 왜 한 분 주님이신지를 알 수 있습니다. 말씀의 속뜻을 통해 왜 믿기만 하면 안 되고, 그 믿음에 기반한 체어리티의 삶을 살아야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고, 받아들이더라도 일부만 받아들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내면에 영적 합리성이 아직 열리지 않아서이고, 이는 곧 자아의 방해가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자아가 문제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그것을 주님의 권위를 의심하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로 그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같은 악하고 거짓된 것이 없는지 늘 살피고, 주님과 함께 그것들을 몰아내야 하겠습니다. 그때 주님으로부터 진리가 강처럼 흘러들어와 광야와 같은 마음을 적셔 살아나게 할 것입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이 교회의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눅3:8)
아멘
2022-05-29(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06-23(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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