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5:3)

 

AC.482

 

이 장에 나오는 ‘세’(years, 백삼십 세, 구백삼십 세 같은)와 ‘연수’(numbers of years, 팔백 년 같은)가 그 속뜻으로는 무엇을 뜻하는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겉뜻의 의미에 머무는 사람들은 그것들을 세속적 향년, 그러니까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다는 말을 글자 그대로, 즉 아담이 죽을 때 나이가 구백삼십 살이었던 것으로 받아들이지만, 이 장부터 12장에 이르기까지는 문자적 의미의 겉뜻대로 역사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고, 모든 것은 전체적으로나 각각의 세부에 이르기까지 다른 것들을 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이름들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숫자들에도 해당됩니다. 말씀에서는 숫자 삼과 숫자 칠이 자주 언급되는데, 어디에서 나타나든 그것들은 시간이나 다른 것들이 포함하거나 표상하는 상태에 관하여 어떤 거룩한 것, 혹은 지극히 거룩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는 가장 짧은 시간 간격에서나 가장 긴 시간 간격에서나 동일합니다. 부분이 전체에 속하듯이, 가장 작은 것들도 가장 큰 것들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전체가 부분들로부터, 혹은 가장 큰 것이 그 가장 작은 것들로부터 올바르게 나아오기 위해서는, 그 사이에 닮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사야서에서 말하기를 What the “years” and the “numbers of years,” which occur in this chapter, signify in the internal sense, has hitherto been unknown. Those who abide in the literal sense suppose them to be secular years, whereas from this to the twelfth chapter there is nothing historical according to its appearance in the literal sense, but all things in general and every single thing in particular contain other matters. And this is the case not only with the names, but also with the numbers. In the Word frequent mention is made of the number three, and also of the number seven, and wheresoever they occur they signify something holy or most sacred in regard to the states which the times or other things involve or represent; and they have the same signification in the least intervals of time as in the greatest, for as the parts belong to the whole, so the least things belong to the greatest, for there must be a likeness in order that the whole may properly come forth from the parts, or the greatest from its leasts. Thus in Isaiah:

 

이제 여호와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품꾼의 정한 해와 같이 삼 년 내에 모압의 영화와 그 큰 무리가 능욕을 당할지라 (16:14) Now hath Jehovah spoken, saying, Within three years, as the years of a hireling, and the glory of Moab shall be rendered worthless. (Isa. 16:14)

 

주께서 이같이 내게 이르시되 품꾼의 정한 기한 같이 일 년 내에 게달의 영광이 다 쇠멸하리니 (21:16) Thus hath the Lord said unto me, Within a year, according to the years of a hireling, and all the glory of Kedar shall be consumed, (Isa. 21:16)

 

여기서 가장 짧은 간격과 가장 긴 간격이 모두 의미되고 있습니다. 하박국서에서는 where both the least and the greatest intervals are signified. In Habakkuk: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3:2) Jehovah, I have heard thy renown, and was afraid; O Jehovah, revive thy work in the midst of the years, in the midst of the years make known, (Hab. 3:2)

 

여기서 ‘수년 내에’(midst of the years)는 주님의 강림을 의미합니다. 짧은 간격에서는 사람이 거듭날 때마다의 주님의 오심을 뜻하고, 긴 간격에서는 주님의 교회가 새로 일어날 때를 뜻합니다. 이와 같이 이사야서에서는 ‘구속할 해’(year of the redeemed)라고도 불립니다. where the “midst of the years” signifies the Lord’s advent. In lesser intervals it signifies every coming of the Lord, as when man is being regenerated; in greater, when the church of the Lord is arising anew. It is likewise called the “year of the redeemed,” in Isaiah:

 

이는 내 원수 갚는 날이 내 마음에 있고 내가 구속할 해가 왔으나 (63:4) The day of vengeance is in my heart, and the year of my redeemed is come. (Isa. 63:4)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사탄이 결박된 천 년(20:2, 7)과 첫째 부활의 천 년(20:4-6)도 결코 글자 그대로의 천 년을 뜻하지 않고, 그 상태들을 뜻합니다. 앞에서 보인 바와 같이 ‘날’(days)이 상태를 나타내는 데 사용되듯이, ‘해’(years)도 그러하며, 그 상태들은 해의 숫자로 묘사됩니다. So also the thousand years in which Satan was to be bound (Rev. 20:2, 7), and the thousand years of the first resurrection (Rev. 20:4–6), by no means signify a thousand years, but their states; for as “days” are used to express states, as shown above, so also are “years,” and the states are described by the number of the years.

 

2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 잡아서 천 년 동안 결박하여 7천 년이 차매 사탄이 그 옥에서 놓여 (20:2, 7)

 

4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5(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6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하리라 (20:4-6)

 

이로부터 이 장에 나오는 시간들도 상태들을 포함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각 교회는 타고난 성향과 후천적으로 형성된 성향의 차이에 따라, 서로 다른 인식의 상태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Hence it is evident that the times in this chapter also involve states; for every church was in a different state of perception from the rest, according to the differences of genius, hereditary and acquired.

 

 

해설

 

스베덴보리는 AC.482에서 창세기 5장에 나오는 ‘연수’와 ‘수명’에 대한 오랜 오해를 정면으로 다룹니다. 그는 이 장의 연수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지금까지 아무도 그 내적 의미, 곧 속뜻을 알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문자적 의미에 머물러, 이 숫자들을 세속적 연대로 이해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창세기 5장부터 11장까지는 겉으로 보이는 역사 서술과 달리, ‘문자 그대로의 역사로 읽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구간’입니다. 이 구간은 인물 이름뿐 아니라, 숫자 하나하나까지도 모두 내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점에서 숫자는 단순한 계산 단위가 아니라, ‘상태를 표현하는 언어’입니다. 말씀에서 자주 등장하는 숫자 삼과 숫자 칠은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 숫자들은 언제 어디서 나타나든, 시간이나 사건이 포함하고 있는 ‘거룩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 의미가 짧은 시간과 긴 시간에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점입니다. 삼 일이든 삼 년이든, 혹은 칠 일이든 일곱 세대든, 그것이 가리키는 것은 길이가 아니라 ‘상태의 성격’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원리를 ‘부분과 전체의 닮음’으로 설명합니다. 가장 작은 시간의 단위와 가장 큰 시간의 단위는 서로 닮아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작은 것들이 모여 큰 것을 이루고, 큰 것이 다시 작은 것들 속에 반영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시간의 길이는 중요하지 않고, 그 시간에 담긴 상태가 중요합니다. 이 닮음의 원리가 없으면, 말씀은 내적으로 하나의 질서를 이룰 수 없습니다.

 

이사야서에 나오는 ‘삼 년’과 ‘일 년’의 예는 이 사실을 잘 보여줍니다. 문자적으로 보면 서로 다른 기간이지만, 내적으로는 동일한 종류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것은 일정한 한계 안에서 완성되거나 소진되는 상태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박국서에서 말하는 ‘수년 내에’는 연대의 중간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오심’, 곧 주님이 인간과 교회 안에 새롭게 임재하시는 결정적인 순간을 뜻합니다.

 

이 ‘오심’은 한 번의 사건으로만 이해되지 않습니다. 짧은 간격에서는 사람이 거듭날 때마다 주님이 오시는 것을 의미하고, 긴 간격에서는 교회가 쇠퇴한 뒤 다시 일어날 때 주님이 오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것을 ‘구속할 해’라고도 부릅니다. 이는 특정 연도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구원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상태’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천 년’도 같은 원리로 이해해야 합니다. 사탄이 결박된 천 년, 첫째 부활의 천 년은 문자적인 기간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모두 ‘영적 상태의 지속’을 나타냅니다. 성경에서 ‘’이 상태를 나타내듯이, ‘’ 역시 상태를 나타내며, 숫자는 그 상태의 성격과 완결성을 묘사합니다. 그러므로 숫자를 문자 그대로 붙잡으면, 말씀의 중심을 놓치게 됩니다.

 

이 원리를 창세기 5장에 적용하면, 족보에 나오는 긴 수명과 연수들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한 사람의 생물학적 수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각 교회 상태가 얼마나 지속되었는지’, 그리고 그 상태가 어떤 성격을 가졌는지를 나타냅니다. 각 교회는 서로 다른 인식의 상태에 있었고, 그 차이는 타고난 성향과 삶을 통해 형성된 성향의 차이에서 나왔습니다. 숫자는 바로 그 차이를 표현하는 도구입니다.

 

AC.482는 우리로 하여금 말씀을 읽는 시선을 바꾸게 합니다. 우리는 종종 ‘얼마나 오래’라는 질문을 던지지만, 성경은 언제나 ‘어떤 상태였는가’를 묻습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얼마나 오래 교회를 다녔는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냈는가보다 중요한 것은, ‘그 시간 동안 어떤 상태에 있었는가’입니다.

 

결국 AC.482는 창세기 5장의 숫자들이 교회의 생애를 기록한 ‘영적 지도’임을 밝혀 줍니다. 그 숫자들은 시간의 길이를 재기 위한 것이 아니라, 교회가 걸어온 길의 성격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이 관점을 붙들 때, 족보처럼 보이던 이 장은 더 이상 난해한 기록이 아니라, ‘교회가 어떻게 태어나고, 머물고, 변화해 갔는지를 보여 주는 깊은 영적 증언’으로 읽히게 됩니다.

 

 

 

AC.481, 창5:3,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And man lived a hundred and thirty years, and begat into his likeness, after his image, and called his name Seth. (창5:3) AC.481 ‘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