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창세기 5장 세 번째 시간, 21절로 24절이며, AC 글 번호로는 516번에서 522번입니다. 본문 함께 읽습니다.

 

 

21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22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23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24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5:21-24)

 

 

이 본문을

 

에녹, 퍼셉션을 교리로 보존한 사람들

 

이라는 제목으로 말씀 준비했습니다. 오늘 말씀에 주님이 빛을 비추셔서 이 시간 우리 영과 육이 활짝 열려 모두 들을 귀 만들어 주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럼, 시작합니다.

 

먼저 오늘 본문에 대한 속뜻 요약입니다.

 

에녹(Enoch)은 일곱 번째 교회를, ‘므두셀라(Methuselah)는 여덟 번째 교회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며(walk with God)는 신앙에 관한 교리를, ‘자녀들을 낳았으며(begat sons and daughters)는 진리와 선에 관한 교리적인 것들을,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all the days of Enoch being three hundred sixty and five years)는 그 기간이 매우 짧았음(few)을 의미합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walking with God)는 앞에서와 같이 신앙에 관한 교리(doctrine concerning faith)를,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he was no more, for God took him)는 그 교리가 후대의 쓰임새를 위하여 보존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상과 같은 속뜻 요약에서 핵심은 ‘퍼셉션(perception)의 시대였던 태고교회에서 왜 갑자기 교리 얘기가 나오는가 하는 것’이며, 이걸 이해하려면 그렇다면, ‘퍼셉션이란 무엇인가’ 하는 더욱 근본적인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다음은 며칠 전 제가 블로그에 올린 글인데 이해를 돕기 위해 인용합니다.

 

 

아래는 AC.521(23-24) 해설 중 퍼셉션은 일반적 개념이 아니라, 상태와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극히 미세하고 개별적인 인식이기 때문에(for they enter into the most minute and particular things, with all variety according to states and circumstances), 언어로 고정해 설명하는 순간 이미 그 본질을 놓치게 됩니다.’라는 문장에 대한 설명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퍼셉션은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개념적 이해나 논리적 판단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인식입니다. 그것은 정보를 모아 분석한 결과도 아니고, 규칙을 적용해 도출한 결론도 아닙니다. 퍼셉션은 선과 진리를 직접 감지하고 즉각적으로 알아차리는 인식으로, 생각이 작동하기 이전에 이미 방향이 주어지는 상태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퍼셉션은 배우는 대상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이며, 설명을 통해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상태로 작동합니다. 마치 아이가 어느 순간 엄마의 얼굴 표정을 보고, 속으로 ‘아, 엄마가 지금 힘들어하시는구나...’ 엄마의 상태를 즉각적으로 아는 것과 비슷합니다. 누가 알려주지도 않았는데 말이죠.

 

이때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미세하다(the most minute)라는 표현은 퍼셉션이 불분명하거나 흐릿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퍼셉션은 너무 정밀해서 일반적인 언어로는 쉽게 포착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퍼셉션은 어떤 상황을 볼 때, 그 상황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를 분리하지 않고 한꺼번에 인식합니다. 그러니까 말하는 사람의 내적 상태, 듣는 사람의 준비 정도, 관계의 맥락, 시기의 적절성, 그리고 그 선택이 불러올 결과까지가 동시에 감지되는 식입니다. 이 모든 요소가 하나의 인식으로 주어지기 때문에, 퍼셉션은 매우 정교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퍼셉션은 항상 개별적으로 작동합니다. 같은 말, 같은 행동이라 하더라도 퍼셉션은 그것을 상황마다 다르게 인식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진실을 말하는 것이 선이 되지만, 다른 경우에는 침묵하는 것이 선이 됩니다. 이 차이는 원칙을 어긴 결과가 아니라, 상태, 곧 상황이, 사정이 다르기 때문에 생기는 분별의 차이입니다. 퍼셉션은 언제나 ‘지금 이 순간의 상태’를 기준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모든 경우에 동일하게 적용되는 판단을 전제로 하지 않습니다.

 

이 점에서 퍼셉션은 교리와 뚜렷하게 구별됩니다. 교리는 전달되기 위해 반드시 일반화를 필요로 합니다. ‘항상’, ‘대체로’, ‘원칙적으로’와 같은 표현이 없으면 교리는 성립하기 어렵습니다. 많은 경우를 하나의 틀로 묶어야 가르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퍼셉션은 이러한 일반화 자체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퍼셉션은 언제나 이번 경우를 보고, 지금 상태를 봅니다. 비유하자면, 시력 차이요, 해상도 차이라 할 수 있습니다. 둘 다 높으면 사물이, 화면이 또렷하고 생생하게 보이지만, 낮으면 흐릿하게 무난하게 보이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퍼셉션을 언어로 고정해 설명하는 순간 이미 그 본질을 놓치게 된다고 말합니다. 언어는 필연적으로 경계를 긋고, 흐름을 멈추고, 판단을 고정합니다. 그러나 퍼셉션은 흐르며, 상태에 따라 달라지며, 살아 움직입니다. 살아 있는 분별을 문장이나 규칙으로 붙잡아 두려는 순간, 우리는 그 생명 대신 틀만 붙잡게 됩니다. 주님으로 말미암는 사랑의 퍼셉션은 그 모든 정황 및 그 마음속 동기까지 보지만 일반화된 규범인 교리는 그런 걸 다 놓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든 사고의 비유는 이 점을 매우 잘 보여 줍니다. 바르게 생각할 줄 아는 사람에게 사고의 규칙을 가르치면, 오히려 사고의 자유로움이 약해질 수 있습니다. 이는 사고능력이 사라져서가 아니라, 외적인 규칙에 매이면서 내적 판단이 위축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영재를 일반 학교에 보낼 경우, 많은 경우 아이를 망치는 것과도 같은데요, 퍼셉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내적인 빛으로 알고 있는 것을 규칙으로 다시 배우게 하면, 그 인식은 점차 경직됩니다. 내면이 열려 매 순간 하늘의 빛으로 즉시 알면 되는 것을 굳이 자기들이 정한 어떤 룰을 따라야만 한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천적인 사람의 퍼셉션은 묘사하기 어렵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흐릿하거나 불분명해서가 아니라, 너무 구체적이고 상황 의존적이며 살아 있어서 일반 개념으로 묶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퍼셉션은 숙련된 장인이 재료를 다루며 느끼는 감각과 비슷합니다. 그 감각은 말로 완전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실제 작업에서는 매우 정확하게 작동합니다. 흑백요리사 시즌2에서 종이 한 장 차이보다 더 미세한 차이로 생존과 탈락이 결정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승자 최강록이 재료마다 그릇을 달리하여 다르게 조림한 것을, 예를 들면, ‘중불로 적당하게’ 이런 식으로 획일화, 규칙화, 교리화를 하면, 이후 그 레시피를 사람들이 그대로 따라 했다고 해서 과연 그 맛이 재현될까요? 천국의 천사들이 바로 이런 퍼셉션으로 생활하며, 그래서 그들은 일상 대인관계나 지상의 누구를 도울 때 실수가 없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퍼셉션으로 섬기기 때문에 온전하며, 완전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동시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분명히 말합니다. 이러한 퍼셉션 능력은 장차 사라질 것이었고, 실제로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이후의 인류는 더 이상 내적인 빛으로 즉각 알지 못하고, 오직 잘 정돈된 교리를 통해 배우며 점진적으로 선과 진리에 이르게 되는데, 바로 이 전환을 대비하여, 에녹이라는 교회에게 퍼셉션 내용을 교리로 정리하는 일이 허락되었던 것입니다.

 

에녹의 교회는 퍼셉션 자체를 살아내는 교회가 아니라, 퍼셉션을 기억하고 보존하는 역할을 맡은 교회였습니다. 그 교리는 퍼셉션 그 자체는 아니지만, 퍼셉션이 다시 회복될 방향을 가리키는 표지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라는 표현은, 이 교리가 인간의 판단이나 역사적 우연에 맡겨진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섭리 안에 안전하게 보존되었음을 뜻합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설명은 오늘날 우리의 신앙 현실을 깊이 비춥니다. 우리는 대부분 교리를 통해 신앙을 배웁니다. 이것은 잘못이 아니라, 현재 인류의 상태에 맞는 방식입니다. 다만 교리가 곧 생명이라고 착각할 때 문제가 생깁니다. 교리는 빛을 가리키는 창이요, 담아두는 그릇이지, 빛 그 자체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정리하면, 퍼셉션이 ‘미세하고 개별적’이라는 말은 선과 진리를 규칙이나 원칙이 아니라 각 상태와 순간 속에서 직접 분별하는 살아 있는 인식을 뜻합니다. 이 인식은 너무 살아 있어서 언어로 고정될 수 없고, 교리로 완전히 담을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퍼셉션은 사라졌고, 대신 교리가 보존되었습니다. 이 흐름을 이해할 때, 에녹의 교회와 그 보존의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

 

 

그러니까 첫 천적 인간이었던 ‘사람’, 곧 아담 교회 때는 이런 퍼셉션이 온전했던, 그래서 천국 천사들과 거의 차이가 없어 그 시절엔 천사들도 지상에 내려와 같이 대화도 하고 어울릴 수 있었지만, 차츰 외적 감각, 그러니까 시각, 청각, 후각, 미각 및 촉각에 익숙해져 간 그 후손들, 곧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으로 내려오면서 점점 속 아닌 겉, 즉 내면보다 외면을 추구, 오직 내면으로만 들을 수 있는 퍼셉션이 잘 안 들리게 되었으며, 그 결과 삶 가운데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잘 모르게 되자 부득이하게 그 하나하나를 교리 형태로 정돈할 필요가 생겼고, 그래서 그때 이 일에 쓰임 받은 사람들, 곧 교회가 바로 에녹인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에서 이 에녹이라는 사람들을 만나 그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곧 그들의 퍼셉션이 어땠는지를 알 수 있었는데 다음은 그 기록입니다.

 

에녹(Enoch)이라 하는 이들에게서 나타난 퍼셉션의 상태와 성격 또한 저는 알 수 있었는데요, 그것은 어떤 분명함도 없는, 다소 일반적이고 어두운 퍼셉션의 한 형태였습니다. 이러한 경우에는 마음이 자기 안에서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교리적인 것들 쪽으로 그 시선을 바깥으로 돌리게 되는 그런 퍼셉션이었습니다. (AC.522)

 

즉 이미 그들 자신, 퍼셉션이 거의 정상 작동을 하지 않는, 그런 안타까운 상태였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행스러운 것은 그럼에도 불구, 그들은 여러 전해 내려오는 선과 진리들을 수집, 잘 정돈하여 나름 교리화, ‘퍼셉션이 사라진 이후를 대비한 형식화된 분별의 틀’을 남겼다는 것입니다. 즉,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진리인지 ‘직접 알던 시대가 끝난 뒤에도’, 인간이 최소한의 질서를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그들은 ‘교리적 토대’를 구축하는 일에 쓰임을 받았던 것입니다. 비록 영적 시력은 거의 잃어가고 있으나 힘을 다하여 수고, 후손들이 여전히 주님 안에서, 그러니까 주님의 선과 진리라는 큰 울타리 안에서 살아가게 하려고 말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다’와 ‘여호와와 동행하다’는 다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신앙의 교리에 따라 살고 가르치는 것을 뜻합니다. 반면 여호와와 동행하는 것은 사랑의 삶, 곧 쓰임새의 삶을 직접 사는 것을 뜻합니다. 이 구분은 결코 사소하지가 않습니다. 이는 교회의 중심이 퍼셉션과 사랑의 삶에서 교리와 신앙의 삶으로 이동했음을 보여 주는 결정적 표시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라는 말은, 이 교리가 인간의 판단이나 역사적 우연에 맡겨진 것이 아니라, ‘주님의 손 안에 보관되었다’는 뜻입니다. 에녹의 교회는 더 이상 역사 속에서 드러나지 않지만, 그 교리는 후대의 쓰임새를 위해 안전하게 간직됩니다. 이는 교회의 생명이 끊어진 것이 아니라, 형태를 바꾸어 이어졌다는 의미입니다.

 

평소 우리가 알던 에녹 이야기와 오늘 설교는 아주 다릅니다. 보통은, 에녹이 얼마나 평생을 주님과 동행하였으면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셨겠는가? 우리도 그런 에녹의 삶을 본받아야 하겠다는 식이지요. 이 역시 좋습니다. 겉뜻에 충실한 해석이지만, 그렇게 해서 정말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실 수 있었다면 얼마나 할렐루야입니까? 우리는 절대 겉뜻으로 신앙 생활하시는 분들을 무조건 폄훼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너무 엉뚱하게 해석, 잘못된 길로만 빠지지 않으신다면 말입니다.

 

한 가지, 그렇다면 이 퍼셉션은 에녹 이후로, 태고교회 이후로 이제 완전히 인류한테서 떠난 건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퍼셉션은 창문, 곧 천국을 향해 열린 창문으로 들어옵니다. 그때 이후 인류가 이 퍼셉션으로 살지 못하는 이유는 이 창문이 닫혀있기 때문인데, 그러나 지금도 이 창문을 여는 사람한테는 감사하게도, 그리고 놀랍게도 이 퍼셉션은 변함없이 작동한다고 합니다. 현 시대 가장 최근의 성자라 할 수 있는 정교회 뽀르피리우스를 비롯,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수록 수많은 성인들, 그러니까 이현필, 이세종을 비롯, 분도 요셉 라브르, 성 프란체스코 등이 그렇습니다. 이분들과 우리가 다른 점은 이분들은 하늘을 향해 자기 내면의 창문을 여신 분들이지만 우리는 세상에 몰두하느라 창문을 열어도 세상 창문만 열고 산다는 점입니다. 우리 역시 이제라도 세상 창문은 닫고 천국 창문을 열면 이 퍼셉션은 다시 재개된다고 합니다.

 

다만 이 퍼셉션은 생명과도 같아 서서히 움직입니다. 즉 서서히 증가하고 서서히 사라지고 하는 것이죠. 퍼셉션을 다시 깨어나게 하고 싶으면 일상 매 순간 양심의 소리, 옳고 그름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때마다 하나씩 인내심을 가지고 실천해야 합니다. 그러면 내가 손해 볼 것 같아도 주님을 의지하고 황소 걸음처럼 뚜벅뚜벅 제 길을 걸어야 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다 주께 하듯 하라신 말씀 기억하고, 사람 가려 가며, 환경 탓하는 대신 범사에 감사하며, 그저 매 순간 주님 앞에 제 할 도리만 다하면 됩니다. 그러면 서서히 이 퍼셉션 근육이 생기며, 기운이 돌아옵니다. 영혼의 근육이 생겨 기운을 차리게 되지요. 그러면서 점점 주님 음성이 들리며 영안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 어두운 시대에 이런 식으로 다시 천국을 향한 자신의 창문을 열어 미약하나마 퍼셉션의 삶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기를 주 여호와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설교

2026-01-18(D1)

 

2634, 27. 창5.3, 2026-01-18(D1)-주일예배(창5,21-24, AC.516-522), ‘에녹, 퍼셉션을 교리로 보존한 사람들’.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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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6/01/11, 창5:4-20), '아담,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

오늘은 창세기 5장 두 번째 시간, 4절로 20절입니다. 본문 함께 읽습니다. 4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5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6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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