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And God said, Let the waters under the heaven be gathered together in one place, and let the dry [land] appear; and it was so. (1:9)

 

AC.27

 

속 사람과 겉 사람이 둘 다 존재한다는 사실과, 여러 진리와 선이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에서 겉 사람으로,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으로 흘러 들어온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그러니까 겉보기에는 그렇지 않아 보여도 말입니다. 그때 거듭나는 중인 사람 안에 있는 그러한 여러 진리와 선, 곧 참과 선에 관한 여러 지식은 그의 기억 속에 저장되어 기억 지식(scientifica) 가운데로 분류됩니다. 왜냐하면 겉 사람의 기억 속에 스며든 건, 그것이 자연적이든, 영적이든, 또는 천적이든 간에 모두 기억 지식으로 그곳에 머물며, 나중에 필요에 따라 주님에 의해 거기에서 불러내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지식들이 바로 한곳으로 모인 물(waters gathered together into one place)이며, 이렇게 모인 것들을 바다(seas)라고 합니다. 이때 겉 사람 자체를 가리켜서는 마른 땅(dry [land])이라 하고, 곧이어 (earth)이라 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이어지는 다음 내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When it is known that there is both an internal and an external man, and that truths and goods flow in from, or through, the internal man to the external, from the Lord, although it does not so appear, then those truths and goods, or the knowledges of the true and the good in the regenerating man, are stored up in his memory, and are classed among its knowledges [scientifica]; for whatsoever is insinuated into the memory of the external man, whether it be natural, or spiritual, or celestial, abides there as memory-knowledge, and is brought forth thence by the Lord. These knowledges are the “waters gathered together into one place,” and are called “seas,” but the external man himself is called the “dry [land],” and presently “earth,” as in what follows.

 

 

해설

 

이 글은 창세기 1장의 셋째 날, 곧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는’ 장면이 인간 거듭남에서는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풀어 주는 핵심 연결 고리입니다. 앞선 글들에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구별이 세워졌다면, 이제 그 둘 사이의 ‘유입과 저장의 질서’가 설명됩니다. 거듭남은 단지 내면에서 무언가가 일어나는 사건만이 아니라, 기억과 삶의 차원에서도 실제로 무언가가 일어나는, 축적되는 과정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중요한 전제를 다시 확인합니다. 진리(truths)와 선(goods)은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을 통해 겉 사람으로 흘러 들어옵니다. 그러나 이 유입은 대부분의 사람들한테 있어서는 이런 순서로 인식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자기가 이해하고, 자기가 느끼고, 자기가 선택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인데, 그러나 실제로는 그 모든 것이 속 사람을 통해 조용히 유입된 결과입니다. 이것이 영적 실상입니다. 이 ‘보이지 않는 유입’을 알게 되는 것, 이런 영적 실상에 대해 눈이 떠지는 것, 이것이 거듭남의 중요한 인식 단계입니다.

 

이렇게 유입된 진리와 선이 어디로 가는가 하면, 겉 사람의 기억 속으로 들어가 저장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매우 분명히 말합니다. 자연적인 지식이든, 영적인 지식이든, 아니면 천적인 지식이든, 한 번 겉 사람의 기억 속에 들어온 것은 모두 ‘기억 지식(memory-knowledges)으로서 그곳에 머뭅니다. 즉, 기억은 단순한 정보 창고가 아니라, 주님이 언제든지 꺼내어 사용하실 수 있는 ‘영적 저장소’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 기억 지식이 인간의 소유로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 의해 ‘불러내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은 기억 속에 무엇이 있는지조차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주님은 적절한 때에, 적절한 질서로, 필요한 지식을 기억에서 꺼내어 삶과 사고에 연결시키십니다. 이는 거듭남이 인간의 계획이나 통제가 아니라, ‘주님의 섭리에 의해 조율되는 과정’임을 다시 한번 보여 줍니다.

 

이제 창세기의 표현이 상응으로 해석됩니다. 기억 속에 저장된 이 모든 지식이 ‘한곳으로 모인 물’입니다. 물은 진리의 지식을 뜻하고, 그것들이 한곳으로 모인다는 것은 이렇게 모인 지식이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지 않고, 기억이라는 한 영역 안에 정돈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것들을 가리켜 ‘바다’라고 합니다. 바다는 넓고 깊으며, 겉으로 보기에는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풍부한 내용이 저장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겉 사람 자체는 ‘마른 땅’으로 불립니다. 이는 겉 사람이 그 자체로는 생명을 생산하지 못한다는 뜻이지요. 마른 땅은 씨앗을 받아야만 열매를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겉 사람은 속 사람을 통해 유입된 진리와 선이 있어야만 의미 있는 활동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때 비로소 겉 사람은 단순한 ‘마른 땅’을 넘어 ‘(earth)이라 불리게 됩니다. 이는 다음 단계에서 생명 있는 것이 나타날 준비가 되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 글은 거듭남의 중요한 균형을 가르쳐 줍니다. 한편으로는,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들이 인간의 기억과 삶의 영역에 실제로 저장되고 사용된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거듭남은 인간을 수동적인 그릇으로 만들지 않고, 기억과 사고와 행위를 지닌 ‘살아 있는 협력자로 세웁니다’.

 

또한 이 설명은 왜 말씀과 교훈, 설교와 배움이 거듭남에서 중요한지를 잘 보여 줍니다. 지금 당장 이해되지 않거나 감동 없는 말씀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기억 속에 저장되면, 언젠가 주님에 의해 기억-지식이라는 바다에서 불려 나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거듭남의 관점에서 보면, 헛된 배움은 없습니다. 모든 참된 것과 선한 것은, 때를 기다리며 바닷속에 모여 있습니다.

 

결국 AC.27은 셋째 날의 준비 단계입니다. 물들이 모이고 땅이 드러난 뒤에야, 비로소 풀과 씨 맺는 채소와 열매 맺는 나무가 나타납니다. 마찬가지로, 진리와 선에 관한 수많은 지식이 기억 속에 질서 있게 모이고, 겉 사람이 그 자리를 갖춘 뒤에야 삶의 실제 변화가 시작됩니다. 이 질서는 느리지만 확실하며, 언제나 주님의 손안에서 진행됩니다.  

 

 

심화

 

1.나중에 필요에 따라 주님에 의해 거기에서 불러내어지다

 

AC.27 본문에 나오는 위 표현은 스베덴보리 사상을 처음 접하는 분들이 거의 반드시 멈칫하는 부분입니다. ‘지식이 필요할 때 주님에 의해 불러내어진다’라는 말은 자칫 들으면 ‘그럼 나는 아무 역할이 없다는 말인가?’라는 느낌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생각은 인간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주님의 협력 구조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 균형을 이해하면 오히려 인간의 역할이 더 분명해집니다.

 

먼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기본 전제부터 정리해야 합니다. 그는 인간의 삶을 두 층으로 봅니다. 하나는 ‘생명의 근원’, 다른 하나는 ‘생명의 수용과 사용’입니다. 생명의 근원은 인간에게 있지 않고 주님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 생명을 받아서 생각하고 선택하고 행동하는 ‘자유로운 수용자’입니다. 전기는 발전소가 만들지만, 실제로 방을 밝히는 건 전등인 것과 같습니다.

 

기억도 이와 비슷한 구조로 설명됩니다. 사람이 공부하고, 경험하고, 생각하면서 기억을 쌓는 일은 분명히 인간의 활동입니다. 책을 읽고, 듣고, 배우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이 실제로 하는 일입니다. 스베덴보리도 이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기억 속에 있는 것들을 언제 어떻게 떠올리게 할지, 어떤 진리를 어떤 순간에 살아 움직이게 할지는 더 깊은 섭리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성경 말씀을 오래전에 읽었습니다. 그때는 그냥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몇 년 뒤 어떤 어려운 상황을 겪으면서 순간 그 말씀이 갑자기 마음에 떠오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그 사람의 판단과 행동을 바꾸어 놓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경험을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경우를 두고 ‘주님이 기억 속에서 필요한 것을 불러내신다’고 설명합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설교를 준비할 때, 어떤 목사님은 이런 경험을 하실 것입니다. 여러 책을 읽고 자료를 공부했는데, 막상 설교를 준비하는 순간 이전에 읽었던 내용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면서 떠오릅니다. 어떤 때는 생각지도 않았던 구절이 딱 맞게 떠오르기도 합니다. 이런 경우도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섭리 속에서 기억이 질서 있게 사용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여기서 중요한 균형은 이것입니다. 인간은 ‘지식을 배우고 쌓는 책임을 가지고 있고’, 주님은 ‘그 지식이 언제 어떻게 살아 움직일지 섭리하신다’는 것입니다. 즉 인간은 창고를 채우고, 주님은 그 창고를 질서 있게 사용하십니다. 둘 중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둘이 함께 작용합니다.

 

이렇게 설명하면 처음 읽는 분들도 반감을 덜 느낍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노력과 책임이 분명히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공부하지 않으면 기억도 없습니다. 읽지 않으면 떠오를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억을 쌓는 일은 인간의 몫’입니다. 그러나 그 기억이 진리와 선을 위해 가장 적절한 순간에 사용되도록 이끄시는 것은 ‘주님의 섭리’입니다.

 

스베덴보리 자신도 바로 이 균형을 강조합니다. 그는 인간이 마치 모든 것을 스스로 하는 것처럼 살아야 한다고 반복해서 말합니다. 실제 삶에서는 그렇게 느끼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깊이 생각해 보면 모든 선과 진리의 근원은 주님에게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마치 자기가 하는 것처럼(as of oneself)의 삶입니다.

 

사람은 공부하고, 경험하고, 생각하면서 기억을 쌓습니다. 그러나 그 기억이 언제 어떻게 살아 움직여 진리가 되고 지혜가 되는지는 더 깊은 섭리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열심히 배우고 기억을 쌓는 책임이 있고’, 주님은 ‘그 기억을 통해 사람을 이끄시는 분’입니다.

 

이렇게 보면 인간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분명해집니다. 인간은 배우고, 선택하고, 행동하는 ‘자유로운 협력자’이고, 주님은 그 모든 것을 ‘생명과 질서 속에서 이끄시는 근원’입니다. 바로 이 두 요소의 균형이 스베덴보리 인간 이해의 핵심입니다.  

 

 

2.주님에 의해 거기에서 불러내어지다

 

혹시 위 심화 1주님에 의해 거기에서 불러내어지다를 좀 자세히 알 수 있을까요? 그러니까 각 사람에게 와있다는 천사나 선한 영들을 통해선가요, 아니면 퍼셉션 같은 영적 지각으로인가요?

 

AC.27에서 말하는 ‘주님에 의해 거기에서 불러내어지다’는 표현은 리메인스(remains)가 실제 삶 속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설명하는 매우 중요한 말입니다. 여기서 ‘거기’라는 것은 사람의 속 사람 안에 보존되어 있는 리메인스의 저장소를 가리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사람의 어린 시절부터 주님은 여러 선한 감정과 진리의 씨앗들을 그 속 사람 안에 저장해 두시는데, 이것들이 바로 리메인스입니다. 평소에는 그것들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마치 조용히 보관되어 있는 것처럼 있지만, 사람이 어떤 상황에 놓이거나 어떤 진리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을 때 주님이 그것들을 ‘‘불러내어사용하신다’고 말합니다. 이때 ‘불러낸다’는 말은 기억 속에서 어떤 지식을 꺼내듯이 기계적으로 작동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생각과 의지 안에 그 선과 진리의 감정을 다시 살아나게 하시는 작용’을 뜻합니다.

 

이 과정은 대체로 사람에게는 매우 자연스럽게 느껴지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이 주님의 역사라는 사실을 거의 의식하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어려운 상황에서 갑자기 ‘그래도 선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마음이 일어나거나, 어떤 진리를 들었을 때 이상하게 마음이 깊이 공감하며 받아들여지는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순간들은 종종 사람이 자신의 양심이나 성격에서 나온 것처럼 느끼지만, 스베덴보리는 이런 작용 가운데 상당 부분이 ‘리메인스가 다시 활성화되는 순간’이라고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 오래전에 주님이 사람 안에 심어 두셨던 선과 진리의 씨앗이 그 순간 다시 살아나 사람의 생각과 의지를 움직이게 되는 것입니다.

 

목사님께서 질문하신 것처럼, 이 일이 ‘천사나 선한 영들을 통해 이루어지는가’, 아니면 ‘퍼셉션 같은 직접적인 영적 지각으로 이루어지는가’ 하는 문제는 스베덴보리의 인간 구조 이해와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결코 혼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영적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고 설명합니다. 사람에게는 항상 두 천사와 두 영이 함께 있으며, 이를 통해 인간은 영계와 연결된 상태에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이 인간에게 어떤 선과 진리를 작용시키실 때, 그 작용은 대부분 ‘천사들의 매개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천사들은 인간의 속 사람과 연결되어 있고, 그 속 사람 안에 있는 리메인스와 조화를 이루는 선과 진리를 사람에게 흘려보냅니다. 그러므로 리메인스가 불러내어지는 작용은 대체로 ‘주님 천사들 인간의 속 사람 인간의 생각과 의지’라는 질서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그것을 직접적으로 ‘천사가 이렇게 했다’고 느끼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사람 자신의 생각과 감정처럼 느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주님의 섭리라고 설명합니다. 만약 사람이 그 선과 진리가 외부에서 강제로 들어온다는 사실을 명확히 느낀다면, 인간의 자유가 손상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사람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그 작용이 ‘마치 사람 자신의 생각과 감정처럼 느껴지도록’ 하신다고 합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리메인스가 작용하는 순간에도 그것을 대개 ‘내 마음이 그렇게 움직였다’고 느끼게 됩니다.

 

퍼셉션(perception)은 이와 조금 다른 차원의 경험입니다. 퍼셉션은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있었던 것으로 설명되는데, 그들은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오는 것임을 거의 직접적으로 ‘느끼는’ 상태에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이런 직접적인 퍼셉션이 거의 없고, 대신 ‘양심(conscience)을 통해 주님의 작용이 전달됩니다. 그러므로 현대 인간에게서 리메인스가 불러내어질 때, 그것은 대개 퍼셉션의 형태가 아니라 ‘양심의 움직임이나 내적 깨달음’으로 나타납니다. 사람이 어떤 일을 하려 할 때, 마음속에서 ‘이건 옳지 않다’거나 ‘이렇게 하는 것이 선하다’는 조용한 감각이 일어나는 경우가 있는데, 스베덴보리는 이런 양심의 작용 속에도 리메인스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설명합니다.

 

결국 AC.27에서 말하는 ‘주님이 거기에서 불러내신다’는 말은 한 가지 단일한 메커니즘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속 사람 안에 저장된 리메인스를 ‘천사들의 매개를 통해 다시 활성화하여 사람의 생각과 의지 안에 작용하게 하시는 주님의 섭리적 역사’를 가리킨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대개 자신의 양심이나 깨달음처럼 느껴지지만,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그것이 바로 주님이 인간을 거듭남의 길로 이끄시기 위해 리메인스를 사용하시는 방식입니다.

 

 

 

AC.28, 창1:10,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God called the dry [land] earth, and the gathering together of the waters called he seas;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창1:10)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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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6, 창1:8,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And God called the expanse heaven.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second day. (창1:8) AC.26 ‘저녁’(evening), ‘아침’(mor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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