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66 심화

2. 모세가 창조와 에덴동산의 기록을 태고교회 후손들에게서 받았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AC.66에는 처음 읽는 독자를 상당히 놀라게 할 만한 문장이 있습니다. ‘창조, 에덴동산 등에 관한  모든 내용,  아브람 시대까지의 기록을 모세는 태고교회의 후손들로부터 전해 받았습니다. 우리는 흔히 창세기를 모세가 기록한 이라고 알고 있기 때문에, 이 문장을 읽으면 곧 여러 질문이 생깁니다. ‘그러면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장부터 아브람 이전까지의 내용을 모세가 직접 계시받아 기록한 것이 아니라고 보는가?’, ‘그렇다면  내용은 실제 역사가 아니라 전승된 이야기일 뿐이라는 뜻인가?

 

먼저 AC.66의 문장을 약화시키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분명히 창조와 에덴동산 등을 포함하여 아브람 시대까지의 내용을 모세가 태고교회의 후손들로부터 받았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적어도 스베덴보리 자신의 설명에서는 이 부분의 자료가 모세에게서 처음 생겨난 것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전해져 내려온 것입니다. 이것은 AC.66이 직접 말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 문장을 이해하려면 바로 앞의 첫째 스타일 설명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땅과 세상의 것을 말하면서 동시에 그것들이 표상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생각했고, 그러한 표상들을 일종의 역사적 연속으로 엮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설명 뒤에 한나와 시편을 인용한 다음, 창조와 에덴동산 등의 내용을 모세가 태고교회 후손들로부터 받았다고 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전승은 단순히 후대 사람들이 꾸며 낸 민담이라는 뜻이 아니라, 태고교회의 표상적 표현 방식과 연결된 오래된 자료입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이어지는 둘째 스타일과의 구별입니다. 아브람 이후의 모세오경과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기, 열왕기에 대해서는 스베덴보리가 역사적 사실들은 문자적 의미에 나타난 그대로라고 명시합니다. 반면 아브람 이전의 첫째 스타일에 대해서는 표상들을 일종의 역사적 연속으로 만들었다고 표현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두 부분을 의도적으로 다르게 설명하고 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아브람 이전은 역사가 아니고 아브람 이후부터만 역사이다라고 한 줄로 정리해도 될까요? AC.66 하나만으로 그렇게까지 단정하는 것도 조심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이 글은 첫째 스타일과 둘째 스타일의 차이를 분명히 하지만, 창세기 앞부분의 각각의 인물과 사건이 어느 의미에서 역사적이며 어느 의미에서 표상적 구성인지를 세세하게 판정하지는 않습니다. ‘아담은 실제 개인이 아니었다’, ‘노아 홍수는 실제 사건이 아니었다 같은 결론을 AC.66 한 문장에서 바로 끌어내는 것은 본문보다 앞서가는 것입니다.

 

반대로 이 문장을 없었던 것처럼 만들어 1부터 모든 내용은 아브람 이후와 똑같은 의미에서 문자 그대로의 역사라고 스베덴보리도 가르친다고 하는 것도 정확하지 않습니다. AC.66은 분명히 서로 다른 두 스타일을 구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익숙한 선입견에 맞추어 그 구별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스베덴보리가 아담, 노아, 홍수, 족보 등을 실제로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따라가면서 조금씩 구체화하는 것입니다.

 

또 이것을 곧 현대 성서학의 문서설이나 구전 전승론과 동일시할 필요도 없습니다. 현대 성서학도 모세오경의 자료와 전승을 연구하지만, 그 학문적 이론과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태고교회 후손들로부터 받은 표상적 역사는 출발점과 목적이 다릅니다. 용어상 전승된 자료라는 공통점이 있다고 해서 같은 이론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AC.66은 현대적인 문헌비평을 제시하는 글이 아니라 말씀의 네 가지 스타일과 그 속뜻을 설명하는 글입니다.

 

그러면 모세가 이전 자료를 받았다는 것이 말씀의 신적 권위를 약화시키는 것일까요? 반드시 그렇다고 볼 이유는 없습니다. 성경의 권위가 성경의 모든 문장이 기록자의 머릿속에 아무 선행 자료 없이 직접 받아쓰기처럼 들어왔다는 방식에만 의존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AC.66에서 중요한 것은 모세 이전부터 태고교회의 표상들이 전해졌고, 그것이 말씀의 창세기 앞부분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심은 자료의 인간적 전달 경로를 밝혀 말씀을 낮추는 데 있지 않고, 그 오래된 표상적 기록 속에 영적이고 천적인 의미가 들어 있음을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오히려 이 설명은 지금까지 창세기 1장을 왜 그렇게 읽었는지를 돌아보게 합니다. 빛과 궁창과 물, 식물과 광명체, 물고기와 새와 짐승, 사람의 창조를 스베덴보리가 거듭남의 상태로 읽은 것은 후대의 문자 기록에 임의로 상징을 붙인 것이라고 그 자신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AC.66에 따르면 바로 이런 방식으로 자연적인 것을 말하면서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생각하던 태고교회의 표현 방식이 창세기 앞부분의 배경에 있습니다.

 

또 하나 기억할 것은 모세가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직접 받은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의 후손들에게서 받았다고 한다는 점입니다. 즉 매우 오래된 표상적 자료가 후손들을 통해 보존되어 모세에게 전해졌다는 그림입니다. 그 구체적인 전승 과정이 몇 세대를 거쳤고 어떤 형태의 문헌이었는지 AC.66은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 빈칸을 우리가 상상으로 채울 필요도 없습니다.

 

처음에는 이런 설명이 성경에 대한 익숙한 생각을 흔드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를 읽는 과정에서는 바로 이런 곳에서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무엇을 말하는가를 먼저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미리 가지고 있던 성경관에 맞지 않는다고 문장을 약화시키지도 않고, 반대로 한 문장을 가지고 AC가 아직 말하지 않은 결론까지 확대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현 단계에서 가장 정확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창조와 에덴동산 등을 포함하여 아브람 시대까지의 기록을 모세가 태고교회 후손들로부터 받았다고 실제로 말합니다. 그는 그 부분을 태고교회의 표상적 스타일과 연결하며, 아브람 이후의 역사적 스타일과 구별합니다. 그러나 이 한 문장만으로 창세기 앞부분의 개별 인물과 사건의 역사성 여부를 모두 결정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앞으로 관련 AC들이 직접 설명하는 내용을 따라가며 판단해야 합니다.

 

이렇게 읽으면 이 문장은 말씀의 권위를 낮추기보다 오히려 창세기 1장을 지금까지 왜 거듭남의 아르카나를 담은 표상적 연속으로 읽어 왔는지를 이해하게 해 줍니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에게 중요한 독법 하나를 가르쳐 줍니다. 성경의 권위를 존중하는 것과 스베덴보리가 성경의 형성과 스타일에 대해 실제로 한 말을 정직하게 읽는 것은 서로 반대되는 일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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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5 심화

2. 가장 가까운 내적 의미 무엇인가?

AC.65에서 특히 눈에 띄는 표현 가운데 하나가 가장 가까운 내적 의미(the nearest interior sense)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말씀을 읽고 있을 때 하늘의 첫 입구 뜰까지 들려 올라간 이들은 말씀의 단어나 글자를 이해하지 못하고 오직 가장 가까운 내적 의미에서 뜻하는 만을 이해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왜 그냥 내적 의미라고 하지 않고 가장 가까운이라고 했을까요? 이 말은 말씀 안에 여러 층의 내적 의미가 있다는 뜻일까요?

 

먼저 AC.65가 직접 말하는 범위부터 분명히 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 글은 가장 가까운 내적 의미가 정확히 몇 번째 층이며 그보다 더 안쪽에 어떤 의미들이 몇 단계로 존재하는지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표현 하나만 가지고 문자적 의미  영적 의미  천적 의미라는 완성된 층위표를 만들고, AC.65의 사람들이 그 가운데 정확히 어느 단계에 있었다고 확정하는 것은 본문보다 앞서가는 설명입니다.

 

그러나 가장 가까운이라는 말이 아무 의미 없이 붙은 것도 아닙니다. 적어도 이 표현은 그들이 지각한 내적 의미를 말씀의 문자와의 관계에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즉 스베덴보리는 단순히 내적 의미라고 하지 않고 가장 가까운 내적 의미라고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내적 의미에 더 깊은 차원이나 질서가 있을 가능성을 생각하게 하는 표현인 것은 분명합니다.

 

바로 앞 AC.64에서도 천사들은 말씀의 말과 이름에서 완전히 떠나 그것들이 의미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지각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AC.64-65를 함께 보면 말씀의 문자적 의미와 천사들이 지각하는 내적 의미가 구별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 내적 의미 안의 세부적인 층위와 서로의 관계는 스베덴보리가 그것을 직접 설명하는 다른 본문들을 함께 보아야 정확합니다.

 

이 점은 AC를 읽을 때 중요한 독법 하나를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의 한 단어가 더 큰 교리를 암시한다고 해서 그 자리에서 우리가 그 교리 전체를 완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가장 가까운이라는 말을 발견하면 , 그렇다면 내적 의미에도  깊은 질서가 있을  있겠구나 하고 기억해 두고, 뒤에서 스베덴보리가 그 질서를 직접 설명할 때 연결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들이 지각한 것은 문자 자체가 아니라 가장 가까운 내적 의미였을까요? AC.65가 직접 알려 주는 것은 그 결과입니다. 그 의미는 너무 아름다웠고, 연속의 질서가 너무 완전했으며, 그들을 깊이 감동시켰기 때문에 그들은 그것을 영광이라고 불렀습니다. 즉 이번 글의 초점은 그 의미가 내적 의미의 몇 번째 층인가를 분류하는 데 있기보다, 문자에서 드러나지 않는 그 의미가 천사적 지각에서 얼마나 아름답고 질서 있는 것이었는가에 있습니다.

 

특히 연속의 질서라는 표현과 함께 읽으면 도움이 됩니다. 내적 의미는 단어마다 임의의 상징 하나를 붙여 놓은 사전처럼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이어지는 질서 가운데 지각됩니다. 창세기 1장에서 우리가 지금까지 읽어 온 것도 좋은 예가 됩니다. , 궁창, 식물, 광명체, 생물, 사람이라는 각각의 표현이 따로 흩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거듭남이라는 연속된 흐름 안에서 설명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가까운 내적 의미를 단순히 문자 바로 밑에 숨어 있는  번째 암호처럼 상상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내적 의미는 비밀 암호를 해독하듯 단어 하나를 다른 단어 하나로 바꾸는 작업보다 훨씬 깊습니다. AC.65의 표현대로 아름다움과 연속의 질서를 가지고 천사들을 깊이 감동시키는 의미입니다.

 

또 이것을 인간이 노력하면 곧 천사처럼 직접 지각할 수 있는 어떤 단계라고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AC.65는 그곳에 들려 올라간 이들이 무엇을 이해했는지를 말하는 것이지, 독자에게 가장 가까운 내적 의미를 직접 지각하는 훈련법을 가르치는 글이 아닙니다. 우리는 자연계에서 말씀의 문자를 읽고, AC를 통하여 스베덴보리가 밝힌다고 주장하는 속뜻을 배우며, 그 말씀을 삶에서 받아들입니다. 천사적 지각 자체를 재현하려는 것이 우리의 목표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가까운 내적 의미라는 표현 때문에 말씀의 문자를 낮추어서도 안 됩니다. ‘가장 가까운 내적 의미는 바로 무엇의 내적 의미인가 하면 말씀의 내적 의미입니다. 문자와 아무 관계 없이 따로 존재하는 영적 지식이 아닙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말씀의 문자 안에 이러한 깊이가 있다는 것이 AC.65의 놀라운 주장입니다.

 

따라서 현 단계에서 가장 안전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가장 가까운 내적 의미라는 표현은 말씀의 문자와 구별되는 내적 의미 가운데 문자에 가장 가까운 어떤 의미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지만, AC.65는 그보다 더 깊은 의미들의 수나 정확한 구조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 문제는 관련 본문에서 더 분명해질 때까지 열어 두는 것이 좋습니다.

 

오히려 AC.65가 우리에게 먼저 보여 주려는 것은 그 내적 의미의 위치보다 그 성질입니다. 그것은 아름답고, 완전한 연속의 질서를 가지며, 천사들을 깊이 감동시키는 것이어서 그들이 영광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한 장면만으로도 스베덴보리가 왜 바로 앞 AC.64에서 속뜻을 말씀의 가장 참된 생명이라고 불렀는지를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65, 창1, ‘영광’이라 불리는 말씀의 내적 의미 : 천사들의 지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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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5 심화 1, 천사들이 단어나 글자를 이해하지 않는다면 ‘원어 연구’는 필요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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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4 심화

1. 천상의 결혼이란 무엇인가?

 

AC.54에는 매우 중요한 표현 하나가 등장합니다. ‘천상의 결혼(heavenly marriage)입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자기들의 결혼이 주는 행복이 이 천상의 결혼에서 온다고 퍼셉션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천상의 결혼은 무엇일까요? 천국에 간 남자와 여자가 이루는 결혼을 말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이해와 의지의 결합을 말하는 것일까요?

 

먼저 AC.54가 직접 말하는 것부터 구별해야 합니다. 이 글은 태고교회 사람들의 실제 결혼이 그들에게 행복과 기쁨의 주된 근원이었고, 그들이 외적인 것에서 내적인 것을 보았기 때문에 자기들의 결혼을 통해 천상의 결혼을 생각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기들의 결혼의 행복이 그 천상의 결혼에서 온다고 퍼셉션했다고 합니다.

 

이어 스베덴보리는 영적 인간 안의 이해를 남자’, 의지를 여자라고 불렀으며 둘이 하나로 작동할 때 그것을 결혼이라고 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AC.54 안에서만 보아도 결혼이라는 말은 자연적인 남녀 관계에만 머물지 않고 인간 내면의 두 기능이 하나로 작동하는 관계까지 가리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천상의 결혼 = 이해와 의지의 결합이라고 완전히 동일시하는 것도 조금 조심해야 합니다. AC 전체에서 천상의 결혼이라는 개념은 여러 층위에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해와 의지의 결합, 진리와 선의 결합, 신앙과 사랑의 결합 등이 서로 연결되며, 궁극적으로 모든 참된 결합의 근원은 주님에게 있습니다.

 

따라서 천상의 결혼을 하나의 평면적인 등식으로 외우기보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의 참된 결합이 여러 차원에서 나타나는 질서라는 방향으로 이해하는 편이 좋습니다. 다만 이 표현 역시 AC.54 자체의 문장을 넘어선 전체 AC의 관점에서 정리한 설명이라는 점은 구별해야 합니다.

 

AC.54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볼 수 있는 형태는 이해와 의지의 결합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해를 남자, 의지를 여자라고 하고  둘이 하나로 작동할  그것을 결혼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둘 중 하나가 다른 하나를 없애는 것이 아닙니다. 이해는 이해이고 의지는 의지인 채로, 둘이 하나로 작동합니다.

 

이것은 결혼이라는 상응의 중요한 성질을 보여 줍니다. 참된 결합은 차이를 없애는 동일화가 아니라 구별된 것들이 하나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해와 의지가 결합한다고 해서 이해가 의지가 되거나 의지가 이해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서로 다른 두 기능이 하나의 생명을 이루어 작동합니다.

 

앞의 AC.53과 연결하면 신앙과 사랑의 관계도 여기에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AC.53은 이해에 속한 신앙과 의지에 속한 사랑을 구별했습니다. 따라서 이해와 의지의 결혼은 자연스럽게 신앙과 사랑의 결합과도 연결됩니다. 이후 AC.475-476에서도 스베덴보리는 남자와 여자가 신앙과 사랑의 결혼을 뜻한다고 다시 설명합니다.

 

여기서 신앙과 사랑의 결혼은 교리를 많이 알면서 사랑도 조금 더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신앙과 사랑이 참으로 결합한다는 것은 사람이 아는 진리와 그가 실제로 사랑하고 원하는 선이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은 상태와 관계됩니다. 이해가 한 방향을 보고 의지가 정반대 방향을 향한다면 둘이 하나로 작동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곧바로 아는 대로 완벽하게 살아야만 결혼이 이루어진다는 도덕적 완전주의로 바꾸어서도 안 됩니다. 거듭남은 진행되는 과정이며, AC.54는 그 과정의 세부 단계를 설명하는 글이 아닙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참된 영적 질서가 이해와 의지의 분리에 있지 않고 그 결합에 있다는 것입니다.

 

천상의 결혼이라는 말을 선과 진리의 관계에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해는 진리를 받아들이는 기능과, 의지는 선을 사랑하고 행하는 기능과 깊이 관계되므로 이해와 의지의 결합은 진리와 선의 결합과 분리되어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술 전체에서 선과 진리의 결합은 천국과 거듭남을 이해하는 매우 근본적인 원리가 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남자 = 진리’, ‘여자 = 이라는 하나의 기계적인 공식으로 모든 성경 구절에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상응은 문맥을 따라 보아야 합니다. AC.54가 직접 말하는 것은 영적 인간 안에서 남자 = 진리’, ‘여자 = 이며, 둘이 하나로 작동할 때 그것을 결혼이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관련된 더 넓은 대응은 이후의 AC 설명과 함께 확인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태고교회 사람들의 실제 결혼은 이 내적인 결혼과 어떤 관계였을까요? AC.54의 표현은 매우 아름답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결혼에서 누리는 행복이 천상의 결혼에서 온다고 퍼셉션했습니다. 즉 자연적인 결혼 자체를 행복의 최종 근원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 결합의 행복 안에서 더 높은 결합의 질서를 보았고, 그 근원을 천적인 것과 궁극적으로 주님에게서 찾았습니다.

 

그렇다고 자연적인 결혼을 단순한 그림자나 중요하지 않은 외피로 취급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의 결혼이 행복과 기쁨의 주된 근원이었다고 AC.54가 직접 말합니다. 외적인 것이 내적인 것을 참으로 표상할 때 외적인 것은 버려야 할 것이 아니라 내적인 것을 담고 드러내는 귀한 형식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태고교회 사람들이 무엇이든 결혼에 비유할 수 있으면 결혼에 비유했던 이유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됩니다. 그들에게 결혼은 단순히 사회제도 하나가 아니라 서로 구별되는 것들이 하나를 이루는 행복을 경험하게 하는 매우 깊은 표상이었습니다.

 

또 이 때문에 말씀에서 교회 자체도 ’, ‘처녀’, ‘아내라는 결혼의 언어로 표현됩니다. AC.54는 그 이유를 교회의 선에 대한 애정에서 찾습니다. 이후 말씀에서 주님과 교회의 관계가 혼인과 부부의 언어로 나타날 때에도 이 천상의 결혼이라는 큰 주제가 배경에 놓이게 됩니다.

 

그러면 천국에서의 실제 남녀 결혼과 천상의 결혼은 아무 관계가 없을까요? 그렇다고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다른 저술에서 천국의 결혼과 결혼애를 별도로 매우 깊게 다룹니다. 다만 AC.54 천상의 결혼을 처음부터 사후세계의 부부생활만을 뜻하는 용어로 제한하면 이번 글의 중심을 놓치게 됩니다. 여기서는 자연적인 결혼의 행복이 더 내적인 천상의 결합에서 온다는 방향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결합의 궁극적인 근원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AC.54에서 태고교회 사람들의 생각은 외적인 것에서 내적인 것으로, 내적인 것에서 천적인 것으로, 그리고 마침내 그들의 모든 이신 주님께로 향했습니다. 따라서 천상의 결혼도 인간이 자기 힘으로 만들어 내는 완전한 조화가 아닙니다. 모든 참된 선과 진리와 생명의 근원이 주님이라는 앞의 AC.39 이후의 원리는 여기에서도 그대로 유지됩니다.

 

그래서 천상의 결혼을 가장 안전하게 기억하는 방법은 하나의 단단한 등식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중심 질서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서로 구별되는 선과 진리, 사랑과 신앙, 의지와 이해가 주님에게서 오는 질서 안에서 하나로 결합하여 작동하는 것입니다. AC.54에서는 그 가운데 특별히 이해와 의지가 하나로 작동하는 것을 결혼이라고 부릅니다.

 

결국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실제 결혼의 행복은 그 자체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더 내적인 결합을 비추었고, 그 결합은 다시 천적인 것으로, 궁극적으로 주님께 시선을 돌리게 했습니다. 이것이 AC.54에서 남자와 여자의 속뜻을 설명하면서 굳이 태고교회의 결혼의 행복과 천상의 결혼을 함께 이야기하는 이유입니다.

 

 

 

AC.54, 창1:27, ‘남자와 여자’ : 이해와 의지가 하나로 작동하는 결혼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1:27) AC.54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남자와 여자’(male and female)가 속뜻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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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5 심화

1. 태고 시대

 

AC.45에는 태고 시대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처음 읽는 독자라면 이 말을 듣고 자연스럽게 석기 시대, 동굴 생활, 돌도구, 사냥과 채집 같은 모습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곧 의문이 생깁니다. ‘그렇게 원시적인 시대의 사람들이 어떻게 이해와 의지의 상태를 동물로 표현할 만큼 깊은 영적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하려면 먼저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사용하는 태고 시대와 현대의 역사학·고고학에서 사용하는 시대 구분을 그대로 같은 것으로 놓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현대의 선사시대 구분은 주로 도구, 생활 방식, 유물과 같은 자료를 바탕으로 이루어집니다. 반면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에서 태고 시대를 말할 때 스베덴보리의 주된 관심은 그러한 기술사적 분류가 아니라 태고교회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영적 상태입니다.

 

따라서 태고 시대 사람들은 영적으로 깊었다는 말을 석기 시대에 살았던 모든 사람이 높은 영적 상태에 있었다는 주장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AC.45도 그런 역사학적 주장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스베덴보리가 태고교회와 관련하여 설명하는 사람들의 내적 상태와 표현 방식입니다. 이 둘을 구별해 두면 현대 고고학과 스베덴보리의 설명을 불필요하게 정면충돌시키지 않고 그의 글이 실제로 무엇을 말하는지 살펴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특별히 돌리는 특징 가운데 하나가 퍼셉션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사람이 무엇이 선하고 참인지 교리와 지식을 통해 배우고 양심에 따라 판단하는 방식과는 다른 내적인 지각을 가리킵니다. AC를 계속 읽으면 태고교회와 퍼셉션의 관계가 훨씬 자세하게 설명됩니다. 따라서 AC.45 태고 시대 사람들이라는 표현도 그러한 전체 문맥 안에서 읽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동물들을 가지고 이해와 의지에 속한 것을 표현했다는 말은 무엇일까요? AC.45가 직접 말하는 것은 태고 시대 사람들이 그렇게 상징으로 표현했다는 사실이며, 그와 같은 표현이 이후 선지서들과 구약 말씀 전체에도 계속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그들의 구체적인 언어생활이나 의사소통 방식을 상상하여 복원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들은 추상어가 없어서 동물 그림으로 말했던 원시인들이라는 뜻도 아니고, 반대로 모든 태고교회 사람이 오늘날의 신학자보다 더 많은 교리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지식의  영적 상태의 깊이를 같은 척도로 재지 않는 것입니다. 현대인은 자연과학, 역사, 언어, 기술에 관해 과거 사람이 알지 못했던 엄청난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현대인이 그만큼 더 깊은 퍼셉션을 가지고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반대로 스베덴보리가 태고교회의 높은 영적 상태를 말한다고 해서 그들이 현대 과학과 기술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뜻도 아닙니다. 두 종류의 을 구별해야 합니다.

 

이 구별은 앞으로 AC를 읽는 데 상당히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인류의 역사를 단순히 옛날에는 무지했고 오늘날은 발전했다는 한 방향으로만 보지 않습니다. 자연적인 지식과 문명이 발전할 수 있는 것과, 인간의 내적 상태가 주님을 향해 얼마나 열려 있는가는 서로 다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의 저술에서 태고교회가 높은 상태로 묘사되는 것을 현대의 기술 발전에 대한 부정으로 읽을 필요도 없습니다.

 

또 하나 주의할 것은 태고교회를 낭만적인 완전무결한 황금시대로 만드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 이하와 AC의 설명을 따라가면 바로 그 태고교회 안에서도 인간의 proprium이 강해지고 질서가 무너지는 과정이 나타납니다. 따라서 태고 시대=모든 사람이 완전했던 시대라는 식으로 이해하면 이후의 설명과 맞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높이 평가하는 것은 특별히 태고교회의 초기 상태와 그들에게 있었던 천적인 성질과 퍼셉션이지, 아주 먼 옛날이라는 시간 자체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AC.45에서 태고 시대를 만났을 때 석기 시대와 어떻게 맞지?라는 질문에 너무 오래 붙잡힐 필요는 없습니다. 먼저 이렇게 구별하면 충분합니다. 현대 역사학의 시대 구분은 인간의 외적인 생활과 물질문화를 중심으로 하고,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말하는 태고 시대는 태고교회와 관련된 인간의 영적 상태를 중심으로 합니다. 두 설명은 애초에 같은 질문에 답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렇게 이해하고 나면 AC.45의 문장도 훨씬 자연스럽게 읽힙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려는 것은 원시인들이 놀랍게도 고등 신학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의 사람들이 인간의 이해와 의지에 속한 내적인 것들을 동물들을 통해 표현했으며, 그러한 상징적 표현이 이후 말씀에도 이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자연의 형상과 인간의 내적 상태 사이의 관계를 오늘날과는 다르게 지각했던 태고교회의 영적 상태가 놓여 있습니다.

 

 

 

AC.45, 창1:24-25, ‘짐승으로 드러나는 마음 : 애정과 욕정의 질서화’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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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4 심화

1.  AC 처음부터 끝까지 선과 진리 말하는가?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처음 읽다 보면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  책은 처음부터 계속 선과 진리 이야기인가? 선과 진리, 사랑과 신앙, 의지와 이해, 그리고 이제 AC.44에서는 듣는 것과 행하는 것까지 비슷한 구도가 계속 나타납니다. 창세기에는 빛과 어둠, 물과 땅, 풀과 나무, 해와 달, 물고기와 새, 짐승이 나오는데, 스베덴보리의 설명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다시 인간 안의 선과 진리 이야기로 돌아오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질문은 AC를 처음 읽는 사람에게 매우 자연스러운 질문입니다. 그리고 사실 이 질문을 잘 이해하면 앞으로 AC를 읽기가 훨씬 쉬워집니다. 스베덴보리가 선과 진리를 수많은 교리 가운데 특별히 좋아하는 두 주제로 골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영적 생명과 거듭남을 설명할 때 이 둘의 관계가 매우 근본적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먼저 인간을 생각해 보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사람에게는 무엇인가를 알고 생각하고 이해하는 면이 있고, 무엇인가를 사랑하고 원하며 행하는 면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크게 이해와 의지로 구별합니다. 진리는 이해와 특별히 관계되고 선은 의지와 특별히 관계됩니다. 그러나 이것을 진리 = 이해,  = 의지라는 기계적인 공식으로만 외우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 참된 것을 알고 이해하는 것과, 그것을 좋아하고 원하여 실제로 행하는 것이 하나의 삶을 이루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AC.44가 바로 그 문제를 매우 실제적인 언어로 보여 줍니다. 말씀을 듣는 은 이해의 역할이고, 그것을 행하는 은 의지의 역할입니다. 사람은 들으면서 행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무엇이 참인지 알면서도 그것을 원하지 않을 수 있고, 신앙을 말하면서도 그 신앙에 따라 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선과 진리의 문제는 추상적인 철학이 아니라 내가 아는 진리가 내가 사랑하고 행하는 선과 하나가 되어 있는가?라는 삶의 문제입니다.

 

그러면 왜 창세기 1장을 설명하면서 이 문제가 계속 나타날까요? 지금 스베덴보리가 창조 이야기를 한 사람의 거듭남에 관한 속뜻으로 읽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듭남은 한순간에 완성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진리가 비치고, 서로 다른 것들이 구별되고, 지식이 생기고, 그 지식들이 살아나며, 마침내 이해에 속한 것뿐 아니라 의지에 속한 것들도 새롭게 되어 갑니다. 그러므로 창조의 날들이 진행될수록 선과 진리의 관계도 같은 모습으로 단순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점차 다른 단계에서 나타납니다.

 

이 점에서 사랑과 신앙’, ‘의지와 이해’, ‘선과 진리’, ‘행함과 들음을 완전히 같은 말이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각각은 서로 다른 것을 가리키며 사용되는 문맥도 다릅니다. 그러나 서로 깊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신앙은 진리와 관계되고 사랑은 선과 관계되며, 이해는 진리를 받아들이는 기능과 관계되고 의지는 선을 받아들이고 행하는 것과 관계됩니다. 그래서 AC를 읽다 보면 서로 다른 용어들이 계속 선과 진리의 관계를 중심으로 연결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천국을 설명할 때도 선과 진리가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의 생명은 단순히 많은 진리를 알고 있는 상태도 아니고, 막연히 좋은 감정을 많이 가지고 있는 상태도 아닙니다. 천사들의 생명 역시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 그것들이 결합된 삶과 관계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거듭남도 결국 천국의 질서를 받아들이는 과정이며, 선과 진리의 결합은 그 설명에서 계속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합니다.

 

말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내적 의미가 인간의 거듭남과 천국, 그리고 궁극적으로 주님을 다룬다고 봅니다. 따라서 말씀 속의 수많은 자연물과 사건이 속뜻에서 선과 진리, 그리고 그것들의 여러 상태와 관계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성경의 모든 단어를 이것은 , 저것은 진리라는 두 칸짜리 표에 넣어 해석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상응은 훨씬 다양하고 문맥에 따라 세밀하게 달라집니다. 다만 그 다양한 상응들이 결국 사람의 사랑과 신앙, 의지와 이해, 선과 진리의 상태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선과 진리는   어느 것이  중요한가?라는 경쟁 구도로 읽지 않는 것입니다. 진리를 많이 아는 것만으로 거듭나는 것도 아니지만, ‘마음만 착하면 진리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사람은 무엇이 선인지 알기 위해 진리가 필요하고, 알게 된 진리는 실제 선한 삶을 향해야 합니다. AC.44에서 신앙의 지식이 먼저 사람 안에 심겨야 한다고 한 뒤 곧바로 듣는 것과 행하는 것의 결합을 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따라서 AC에서 선과 진리가 계속 등장하는 것을  같은 이야기라고 느낄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이번에는 선과 진리의 관계가 거듭남의 어느 단계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라고 물으며 읽으면 좋습니다. 창조 첫째 날의 빛에서 말하는 진리와 여섯째 날의 이해와 의지의 관계는 똑같은 상태가 아닙니다. 거듭남이 진행됨에 따라 같은 근본 문제가 점점 더 깊은 차원에서 다시 나타나는 것입니다.

 

결국 스베덴보리가 선과 진리를 계속 말하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사람의 영적 생명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들이 서로 결합하여 하나의 삶을 이루는 것과 깊이 관계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AC를 읽을 때 선과 진리가 또 나왔다고 생각하기보다, ‘이번에는  둘이 어떻게 만나고 있으며, 아직 무엇이 분리되어 있고, 거듭남이 그것을 어떻게 하나로 만들어 가는가?라고 살펴보면 글의 흐름이 훨씬 선명해집니다.

 

그러면 처음부터 끝까지 , 진리 이야기만 한다는 첫인상도 조금 달라질 수 있습니다. 같은 두 단어를 되풀이하는 책이라기보다, 인간의 내면이 주님에 의해 어떻게 새롭게 창조되어 가는지를 선과 진리의 관계를 통해 아주 오랫동안, 여러 각도와 여러 단계에서 추적하는 책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AC.44, 창1:24-25, ‘지식에서 생명으로 : 이해와 의지가 하나 될 때 나타나는 참된 신앙’(AC.44-48)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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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 심화

1. 스베덴보리는 인용 구절들의 이런 속뜻을 어떻게 아는가?

 

AC.42를 처음 읽으면 놀라운 장면을 계속 만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겔29:3의 바로와 큰 악어, 32:2의 바다와 강을 휘젓는 악어, 27:1의 리워야단과 바다의 용, 51:34의 삼키는 큰 뱀을 차례로 인용하면서 그것들이 기억 지식과 그 일반 원리, 그리고 인간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신앙의 신비에 들어가려는 상태와 관계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질문이 생깁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먼저 분명히 할 것은 스베덴보리 자신이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의 속뜻을 단순한 개인적 성경 연구의 결과라고 제시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 저작 전체의 전제 자체가 말씀에는 문자적 의미 안에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내적 의미가 있으며, 그것이 주님의 자비로 밝혀졌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의 주장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려면 적어도 스베덴보리는 자신이 말씀의 내적 의미에 관한 계시를 받았다고 이해했다는 사실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곧바로 그러면 주님이나 천사가 옆에서  문장씩 불러 주었고 스베덴보리는 받아 적었는가?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의 저술에는 영들과 천사들과의 대화, 영계에서 보고 들은 것, 어떤 것의 의미를 지각하거나 알도록 허락받았다는 진술 등이 매우 많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이것들을 모두 하나의 방식으로 묶어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는 천사가 구술한 책이다라고 말하면 그의 저술 방식 자체를 지나치게 단순화하게 됩니다.

 

반대로 성경을 펼치면 속뜻이 화면처럼 눈앞에 자동으로 나타났다고 말하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영계에서 실제로 보고 들었다고 기록한 경험과, 말씀의 내적 의미를 해설하는 작업은 서로 깊이 관련되어 있지만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닙니다. 그가 어떤 한 절의 속뜻을 알게 되는 모든 순간에 정확히 어떤 인식 과정이 일어났는지를 우리가 재구성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실제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읽으면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일관된 상응의 연결입니다. 예를 들어 AC.42에서 큰 물고기가 기억 지식의 일반적인 것을 뜻한다고 한 뒤, 스베덴보리는 그 뜻을 한 구절에만 기대지 않습니다. 여러 선지서의 서로 다른 구절을 가져와 같은 상징이 문맥에 따라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앞으로 AC를 계속 읽으면 물, , , 나무, , , 짐승, 애굽, 앗수르, 바벨론 같은 표현들이 한 번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말씀 전체에서 서로 연결되어 해석되는 것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속뜻을 단어마다 비밀 암호 하나가 붙어 있는 처럼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물고기=기억 지식’, ‘=이성적인 이라는 대응표를 외운 뒤 모든 성경 구절에 기계적으로 대입하는 방식이 아닙니다. 같은 표현도 문맥과 그것이 놓인 관계, 긍정적 또는 부정적 의미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AC.42에서  바다짐승이 좋은 창조의 일부로 등장하면서도, 선지서에서는 인간 자신의 지혜와 결합된 부정적인 상태를 표현하는 데 사용되는 것이 좋은 예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말씀의 내적 의미를 인간이 임의로 만들어 내는 비유적 해석으로 제시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의 설명에서 상응은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 사이에 주님께서 세우신 질서에 근거합니다. 따라서 그에게 속뜻은  구절을 오늘  삶에 이렇게 적용해   있겠다는 설교적 적용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우리는 그의 해석에 동의할 것인지 검토할 수 있지만, 적어도 그가 무엇을 주장하는지는 정확하게 구별해야 합니다. 그는 자신이 성경에 재미있는 상징적 의미를 덧붙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스베덴보리의 속뜻 설명을 읽을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스베덴보리가 계시를 받았다고 했으니 아무것도 묻지 말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할 필요도 없고, 반대로 한 구절만 떼어 놓고 문자만 보면 이런 뜻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며 즉시 버릴 필요도 없습니다. 오히려 AC를 계속 읽으면서 그가 같은 상징을 말씀 전체에서 어떻게 사용하는지, 서로 다른 구절의 해석이 일관되는지, 앞뒤의 교리적 맥락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좋습니다.

 

AC.42의 겔32:2가 좋은 사례입니다. 그 한 절만 처음 보면 기억 지식을 수단으로 삼아 자기 자신으로부터 신앙의 신비 속으로 들어가려는 사람이라는 해석은 매우 갑작스럽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AC.40-42에서 물고기와 큰 물고기, 기억 지식과 그 일반적인 것, 인간의 지혜와 지성이라는 연결을 차례로 읽고 나면 적어도 스베덴보리가 어떤 구조 안에서 그 구절을 읽고 있는지는 조금씩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AC 전체를 더 읽을수록 그 연결이 다른 곳에서도 반복되는지 검토할 수 있습니다.

 

결국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어떻게 알았는가?라는 질문에는 두 층의 답이 필요합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의 주장에 따르면 말씀의 내적 의미는 인간의 독창적인 추론으로 발명한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밝혀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계시가 매 구절마다 정확히 어떤 심리적·지각적 과정으로 전달되었는지를 우리가 하나의 공식으로 재구성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그의 저작에서 실제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영계와의 열린 교통을 주장했고, 말씀의 내적 의미가 주님으로부터 밝혀졌다고 증언했으며, 그것을 방대한 성경 구절과 상응의 연결 속에서 체계적으로 설명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어떻게 이런 뜻이 나오지?라는 어리둥절함을 그대로 가지고 읽어도 괜찮습니다. 오히려 그 질문을 가지고 계속 읽는 것이 좋습니다. 한두 구절에서 모든 것을 납득하려 하기보다 AC 전체를 따라가면서 같은 상응이 어떻게 되풀이되고, 문맥에 따라 어떻게 달라지며, 전체 말씀의 내적 의미 안에서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확인하는 것 자체가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검토하는 가장 좋은 방법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AC.42, 창1:21, 큰 바다짐승들 : 기억 지식을 묶는 일반 원리

하나님이 큰 바다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God created great whales, and every living 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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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1 심화

1. 천사적 

 

AC.41 천사적 (angelic spirit)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처음 읽으면 조금 낯섭니다. ‘천사라는 것인지 이라는 것인지, 혹은 천사와 영 사이에 또 다른 종류의 존재가 있다는 뜻인지 궁금해질 수 있습니다.

 

먼저 조심해야 할 것은 천사적 을 단순히 천사를 다른 관점에서 부르는 이름이라고 단정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후세계의 존재들을 설명하면서 영들(spirits), ‘천사적 영들(angelic spirits), ‘천사들(angels)이라는 표현을 문맥에 따라 구별하여 사용합니다. 따라서 angelic spirit이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그것을 곧바로 angel과 완전히 같은 말로 바꾸어 읽는 것은 안전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천사적 을 천사와 영 사이에 존재하는 완전히 별개의 제3종족처럼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서로 다른 생물학적 종과 같은 구별이 아니라 영적 상태의 차이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사후의 인간을 ’, ‘천사적 ’, ‘천사 등으로 말할 때에는 그 존재의 상태와 그가 속한 사회, 그리고 설명하고 있는 문맥이 함께 고려됩니다. 따라서 천사적 이라는 표현에는 적어도 일반적인 보다 천사적인 상태와 성질에 가까운 존재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면 AC.41에서는 왜 굳이 천사적 을 언급했을까요?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관심은 사실 천사적 영이 정확히 어느 계층에 속하는가?를 설명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이 글의 중심은 생명입니다. 사람의 proprium에 속한 것은 그 자체로 생명이 없지만, 주님에게서 오는 것은 살아 있다는 것을 설명하면서, 그 실제적인 예로 천사적 영의 말과 생각을 듭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사적 영의 말 하나하나와 생각 하나하나, 심지어 생각의 가장 미세한 부분까지 살아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그 가장 작은 것 안에도 주님에게서 나오는 애정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 대목을 읽을 때 우리의 관심도 천사적 영은 천사인가 영인가?라는 존재 분류에만 머물기보다, ‘ 그의 생각의 가장 작은 부분까지 살아 있다고 하는가?라는 AC.41의 본래 질문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습니다.

 

이것은 AC.41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독법이기도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글에는 사후세계의 여러 존재와 상태를 가리키는 낯선 명칭들이 등장합니다. 그런 표현의 정확한 의미를 살펴보는 것은 필요하지만, 한 단어가 등장할 때마다 곧바로 완성된 영계의 계층표를 만들려고 하면 오히려 그 글이 지금 말하려는 중심을 놓칠 수 있습니다. AC.41에서 천사적 은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천사적  천사와 완전히 같은 존재를 달리 부르는 이라고 고정하지도 않고, ‘천사와  사이의 별도 종족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선은 천사적인 상태와 성질을 가진 영적 존재를 가리키는 스베덴보리의 표현 정도로 이해하면서, AC.41의 핵심인 주님에게서 오는 애정이 생각과 말의 가장 작은 부분까지 살아 있게 한다는 데 초점을 맞추면 충분합니다. 이후 AC를 계속 읽으면서 스베덴보리가 ’, ‘천사적 ’, ‘천사를 실제로 어떤 문맥에서 구별하여 사용하는지를 차츰 더 정확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AC.41, 창1:20, ‘참된 생명의 근원 : 주님에게서 오는 것만이 살아 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창1:20) AC.41 사람의 본성(own, proprium)에 속한 것은 그 자체로는 생명이 없으며, 그것을 눈으로 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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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0 심화

1. 지적인 것들은  사람에 속한다 이성적인 것은  사람에 속할까?

 

AC.40에는 처음 읽으면 조금 걸리는 문장이 있습니다.

 

‘‘새들은 일반적으로 이성적이고 지적인 것들을 뜻하는데, 이 가운데 지적인 것들은 속 사람에 속합니다.’

 

영문은 by birds in general, rational and intellectual things, of which the latter belong to the internal man입니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지적인 것들이  사람에 속한다면, 앞의 이성적인 것들은  사람에 속한다는 뜻인가?

 

먼저 문장 자체가 무엇을 분명하게 말하는지부터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rational and intellectual things라는 두 가지를 말한 뒤 the latter’,  후자가 속 사람에 속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후자 intellectual things’,  지적인 것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AC.40이 직접 말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지적인 것들은  사람에 속한다.

 

그러나 여기서 곧바로 반대편 명제까지 만들어 그러므로 이성적인 것들은  사람에 속한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AC.40은 그렇게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짧은 문장이지만 AC를 읽을 때 상당히 중요한 원칙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가 어떤 것에 대해서는 분명히 말하고 다른 것에 대해서는 아직 말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빈자리를 대칭적으로 채워 넣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왜 스베덴보리는 새들이 일반적으로 이성적이고 지적인 것들을 뜻한다고 하면서 그 가운데 특별히 지적인 것들이 속 사람에 속한다고 덧붙였을까요?

 

AC.40의 문맥에서 먼저 분명한 것은 물들이 번성하게 하는 것들 새들 사이의 차이입니다. 물에서 번성하는 것들은 겉 사람에 속한 기억 지식을 뜻합니다. 반면 새들은 이성적이고 지적인 것들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물고기와 새의 차이를 통해 단순히 기억 속에 저장된 지식과, 그것을 넘어서 생각하고 이해하는 인간의 더 높은 능력이 구별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성경 구절 하나를 외우고 있다는 것과 그 구절이 무엇을 뜻하는지 생각하고 이해하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앞의 것은 기억 지식으로 가지고 있을 수 있지만, 뒤의 것은 이성적·지적인 활동과 관계됩니다. 물론 이것은 AC.40의 대응을 이해하기 위한 쉬운 예이지, rational intellectual을 각각 이렇게 정의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특히 지적인 것들은  사람에 속한다는 말은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의 참된 영적 이해는 단순히 외부에서 정보를 많이 축적하는 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겉 사람의 기억 지식은 필요하지만, 기억에 저장되어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것이 곧 속 사람의 지적인 것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AC.40은 적어도 이 둘의 층위가 같지 않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다만 여기서 rational intellectual의 차이를 현대 심리학의 두 가지 사고 기능처럼 간단히 정의하려고 하면 오히려 조심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rational 논리적으로 계산하는 능력이고 intellectual 마음 깊이 진리를 직관하는 능력이다라고 고정하면 이해하기는 쉬워 보이지만, AC.40은 그런 정의를 제시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rational  사람과  사람 사이의 중간 영역이다라고 이번 한 문장만으로 확정하는 것도 피하는 편이 좋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후 여러 글에서 인간의 rational intellectual,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를 훨씬 더 세밀하게 다룹니다. 그 전체 설명을 따라가야 두 용어의 관계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AC.40에서는 먼저 본문이 말하는 만큼을 정확하게 붙드는 것이 좋겠습니다. 물고기는 겉 사람의 기억 지식을 나타냅니다. 새들은 일반적으로 이성적이고 지적인 것들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지적인 것들은 속 사람에 속합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가 왜 물고기와 함께 다섯째 날에 등장하는지도 조금 보이기 시작합니다. 사람 안에는 단순히 기억에 저장된 지식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가지고 생각하고 이해하는 더 높은 차원의 활동도 있습니다.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이러한 인간의 여러 능력도 살아 있는 질서 안으로 들어옵니다.

 

그리고 이 문장은 앞으로 AC를 계속 읽게 만드는 작은 예고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성적인 것은 정확히 어디에 속하는가?’, ‘이성적인 것과 지적인 것은 정확히 어떻게 다른가?라는 질문에 AC.40 한 문장으로 성급하게 답을 만들어 넣기보다, 스베덴보리가 뒤에서 인간의 내적 구조를 더 펼쳐 보일 때까지 따라가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면 답은 간단합니다.

 

지적인 것들이  사람에 속한다고 했으므로 이성적인 것들은   사람에 속한다는 뜻인가?

 

AC.40만 놓고 보면 그렇게까지 말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이 명시적으로 말하는 것은 후자,  지적인 것들이  사람에 속한다는 사실입니다. 이성적인 것의 정확한 위치와 역할은 더 넓은 AC의 설명 속에서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처럼 본문이 말하는 것과 우리가 거기서 추론하는 것을 구별하는 것이 AC를 오래 읽어 가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때로는 조금 덜 설명하는 것이 오히려 스베덴보리가 말한 것을 더 정확하게 이해하는 길이 됩니다.

 

 

 

AC.40, 창1:20, ‘지식과 지성이 살아나는 순간 : 물고기와 새로 나타나는 거듭난 생명’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창1:20) AC.40 ‘물들이 번성하게 하는 것들’(creeping things which the waters bring forth)은 겉 사람에 속한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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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9 심화

1.  처음에는 내가 선을 행한다 생각하도록 허락하실까?

 

AC.39에서 특히 마음에 오래 남는 문장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자기가 선을 행하고 진리를 말한다고 생각하는  허락하십니다.

 

처음 이 문장을 읽으면 조금 이상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모든 선과 진리가 오직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 사실이라면, 왜 주님께서는 처음부터 그 사실을 분명히 알게 하지 않으실까요? 왜 사람이 내가 선을 행한다’, ‘내가 진리를 말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허락하실까요?

 

AC.39은 그 이유를 직접 말합니다. 그 단계의 사람은 달리 생각할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른 방법으로는 나중에 모든 선과 진리가 오직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믿고, 마침내 퍼셉션하도록 인도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주님께서 사람을 일부러 속여 네가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라고 가르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원문이 사용하는 말은 허락하신다(permit)는 것입니다. 사람은 거듭남의 처음부터 자기 생명의 근원이 주님이라는 것을 깊이 알고 살아갈 수 있는 상태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그가 현재 생각할 수 있는 상태에서부터 출발하도록 허락하시고, 거기서부터 점차 더 깊은 인식으로 이끄십니다.

 

이것은 AC.39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아직 도달하지 못한 영적 상태를 처음부터 완성된 형태로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상태에서부터 거듭남을 시작하게 하십니다.

 

사람은 실제로 내가 공부한다’, ‘내가 선택한다’, ‘내가 선을 행한다’, ‘내가 진리를 말한다고 생각하면서 살아갑니다. AC.39은 그런 인간의 활동 자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이 실제로 선을 행하고 진리를 말하는 가운데, 그 근원에 대한 인식이 점차 달라지는 과정을 설명합니다.

 

처음에는 내가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사람은 내가 행하는  선의 근원은 정말  자신인가?라는 것을 배우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모든 참된 선과 진리의 근원이 주님이라는 것을 먼저 믿게 됩니다. AC.39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나중에는 그것을 퍼셉션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여기에는 중요한 순서가 있습니다. 처음부터 완전한 퍼셉션이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한다고 생각하는 상태에서 출발하여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온다고 믿는 상태를 지나, 마침내 그것을 더욱 내적으로 퍼셉션하는 상태로 나아갑니다. AC.39은 바로 이 과정을 주님께서 허락하시고 이끄신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모든 선은 주님께서 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AC.39의 관심은 인간의 행동을 없애는 데 있지 않고, 그 행동의 생명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알게 하는 데 있습니다. 사람이 선을 행하지 않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선을 행하면서 그것을 자기 고유의 선으로 여기지 않는 데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 점은 신앙생활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께서 하시니까 나는 아무것도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면 AC.39이 보여 주는 거듭남의 흐름과 맞지 않습니다. 반대로 내가 노력해서 선한 사람이 되었다고 모든 것을 자기에게 돌리는 것도 AC.39이 향하는 방향과 다릅니다. 사람은 실제로 배우고 선택하고 행하지만,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그 안에 있는 참된 선과 진리의 근원이 주님임을 인정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다른 글들에서는 이것이 나중에 마치 자기로부터인 것처럼 행한다는 중요한 원리와 더욱 분명하게 연결됩니다. 그러나 AC.39 자체에서는 아직 그 전체 교리를 펼치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먼저 주님께서 사람의 현재 상태를 허락하시고, ‘내가 한다고 생각하는 데서부터 시작하여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믿고 퍼셉션하는 데까지 이끄신다는 사실을 붙드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이렇게 읽으면 허락하신다는 한 단어가 참 깊게 다가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처음부터 완성된 영적 인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이유로 거듭남을 시작하지 않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직 자기에게서 생각하고 자기에게서 행한다고 여기는 바로 그 상태에서도 시작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씩 이끌어, 마침내 선과 진리의 참된 근원을 알아보게 하십니다.

 

지난 삶을 돌아보면서 그때는 정말 내가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안에서도 주님께서 나를 이끌고 계셨던 것은 아닐까?라는 감사가 생길 수 있습니다. 다만 개별 사건 하나하나에 대해 이것은 주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이다라고 우리가 섣불리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AC.39이 분명히 말해 주는 것은 더 근본적인 사실입니다. 우리의 거듭남을 시작하시고, 선과 진리의 근원을 자기에게서 찾던 상태에서 그것을 주님에게서 인정하는 상태로 이끄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AC.39의 이 짧은 문장은 인간의 미숙함을 정죄하는 말이라기보다, 그 미숙함 속에서부터 사람을 이끄시는 주님의 자비를 생각하게 합니다. 사람이 아직 내가 한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단계에서도 주님께서는 거듭남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사람은 자기가 선의 근원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선을 행하고, 자기가 진리의 근원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진리를 말하게 됩니다. ‘내가 한다는 자기 공로에서 주님으로부터 받는다는 인정으로 옮겨 가는 것, AC.39이 보여 주는 살아남의 과정에는 바로 이러한 깊은 변화가 들어 있습니다.

 

 

 

AC.39, 창1:20, ‘비로소 살아나는 신앙 : 주님이 행하심을 알 때 시작되는 생명’(AC.39-41)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And God said, Let the waters cause to creep forth the creeping thing, the living soul; and let fowl fly above the earth upon the f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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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 심화

1. 넷째  요약, 정리

 

1:14-19의 넷째 날에 해당하는 AC.30-38을 여기까지 읽고 나면 여러 내용이 한꺼번에 등장해서 조금 복잡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해와 달과 별, 사랑과 신앙, 의지와 이해, 순종, 교대와 다양함, 낮과 밤, 빛과 어둠이 연이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넷째 날이 끝나는 이 지점에서 전체 흐름을 한 번 묶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먼저 넷째 날은 빛이 처음 생기는 이라고 이해하면 정확하지 않습니다. 빛은 이미 첫째 날에 등장했습니다. 넷째 날에 새롭게 등장하는 것은 광명체들입니다. AC.30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사랑과 신앙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말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이제 사랑과 신앙이 사람 안에서 빛을 비추고 삶을 이끌게 되는 상태를 설명합니다. 그래서 큰 광명체는 사랑, 작은 광명체는 신앙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신앙이 사랑과 떨어져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AC.31-34를 지나면서 이 점이 점점 분명해집니다. 사람은 처음에는 말씀과 교리를 배우고 신앙에 속한 것들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참된 영적 생명에서는 신앙이 사랑과 분리되어 홀로 서는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큰 광명체와 작은 광명체를 말하면서 사랑을 더 큰 것으로 두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신앙의 생명은 사랑에서 옵니다.

 

이것은 사랑만 있으면 진리나 신앙은 필요 없다는 뜻도 아닙니다. 사랑과 신앙은 하나를 이루어야 합니다. 다만 그 질서에서 사랑이 먼저이고 신앙은 사랑에서 생명을 받습니다. 넷째 날의 해와 달은 바로 이 관계를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신앙을 많이 알고 말하는 것만으로 영적 생명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 신앙이 사랑과 결합되어 삶 안에서 살아 있어야 합니다.

 

별들도 등장합니다. 별은 신앙에 속한 여러 지식과 진리들을 나타냅니다. 해와 달과 별을 함께 보면 넷째 날의 모습이 조금 더 선명해집니다. 사람 안에 단지 하나의 막연한 종교적 느낌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신앙과 그것에 속한 여러 진리가 서로 관계를 이루면서 영적 삶을 비추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AC.33에서는 이 빛의 근원이 더욱 깊이 설명됩니다. 사람의 생각은 그 자체로 독립적인 생명을 가진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사랑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무엇을 사랑하느냐에 따라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달라집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사랑은 단순한 감정 하나가 아니라 인간 생명의 중심과 관계된 것입니다. 넷째 날에 큰 광명체인 사랑이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이유도 이 흐름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34에서는 사랑과 신앙의 결합이 다시 강조됩니다. 사랑 없는 신앙, 곧 삶과 분리된 신앙은 참된 의미의 살아 있는 신앙이 될 수 없습니다. 여기서 넷째 날의 핵심 가운데 하나가 분명해집니다. 거듭남은 사람이 진리를 머릿속에 많이 저장하는 과정만이 아니라, 그 진리가 사랑과 결합하여 살아 있는 신앙이 되어 가는 과정입니다.

 

AC.35에서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인간의 두 능력인 의지 이해가 등장합니다. 사람은 의지하고 이해하는 존재이며, 이 두 능력은 본래 하나의 생명을 이루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에게서는 의지와 이해의 관계가 크게 손상되었습니다. 주님의 자비로 사람이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길이 보존되기 때문에, 사람은 자신의 악한 의지가 원하는 것과 다른 진리를 배우고 받아들일 수 있으며, 이를 통해 거듭남의 길이 열립니다.

 

이 대목은 넷째 날의 사랑과 신앙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사랑과 신앙이 하나가 된다는 말을 단순히 내가 원하는 것을 옳다고 믿으면 된다는 뜻으로 읽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의지는 처음부터 선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진리를 통해 사람을 가르치시고, 사람은 그 진리를 받아들이며 점차 의지와 삶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참된 결합은 악한 의지와 거짓된 생각의 일치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사람 안에서 하나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AC.36은 그래서 신앙을 순종과 연결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이 단순히 무엇을 알고 인정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특별히 순종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순종의 중심에 주님 사랑 이웃 사랑을 둡니다. 여기서도 신앙과 삶이 분리되지 않습니다. 무엇을 신앙한다고 말하는가만이 아니라, 그 신앙이 어떤 사랑과 삶으로 나타나는가가 중요합니다.

 

AC.37에서는 창1:14 징조와 계절과 날과 로부터 영적·천적 상태의 교대와 다양함이라는 중요한 원리를 설명합니다. 자연계에 아침과 낮과 저녁과 밤이 있고,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이 있듯이 영적 생명에도 서로 다른 상태들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교대와 다양함이 없다면 삶이 획일적이 되어 생명이 없게 되고, 선과 진리도 분별되거나 구별되거나 퍼셉션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다만 이것을 영적으로 성장하려면 반드시 침체와 혼란과 악을 경험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37이 말하는 것은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의 교대와 다양함입니다. 따라서 모든 영적 후퇴나 악한 상태를 주님께서 성장시키기 위해 주신 필수적인 계절이라고 정당화할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영적 생명이 변화 없는 정지 상태가 아니라 교대와 다양함을 가진 살아 있는 생명이라는 사실입니다.

 

마지막 AC.38에서는 넷째 날을 마무리하면서 네 가지 대응을 매우 간결하게 제시합니다. ‘은 선, ‘은 악, ‘은 진리, ‘어둠은 거짓입니다. 그래서 선한 것들은 낮의 ’, 악한 것들은 밤의 이라고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요3:19, 21을 인용하여 빛과 어둠이 인간이 받아들이는 진리와 거짓, 그리고 그의 삶과 관계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 AC.37  AC.38 을 기계적으로 똑같이 읽지 않는 것도 중요합니다. AC.37에서는 하루의 변화 전체가 상태의 교대와 다양함을 설명하는 데 사용되지만, AC.38에서는 낮과 밤의 대조를 통해 선과 악을 나타냅니다. 말씀의 상응은 단어 하나에 언제나 하나의 뜻만 붙여 놓은 고정된 암호표가 아니라, 문맥 안에서 그 의미를 살펴야 합니다.

 

이렇게 AC.30-38을 한 흐름으로 놓고 보면 넷째 날의 중심이 보입니다. 앞선 과정에서 사람이 선과 진리를 배우고 받아들였다면, 이제 사랑과 신앙이 사람 안에서 광명체처럼 세워지고 영적 삶을 비추며 다스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사랑과 신앙은 서로 분리된 두 생명이 아니라 하나를 이루어야 하며, 신앙은 사랑에서 생명을 받고 순종과 삶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넷째 날을 단순히 해와 달과 별의 창조라고만 읽으면 그 속뜻의 중심을 놓치게 됩니다. 이 날은 거듭나는 사람 안에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신앙이 점차 살아 있는 빛으로 자리 잡고,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이 더욱 분명히 구별되며, 영적 생명이 그 빛 아래서 질서를 이루어 가는 상태를 보여 줍니다.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넷째 날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신앙이 사람 안에서 광명체처럼 세워져 영적 삶을 비추고 다스리며, 사랑과 신앙, 선과 진리가 살아 있는 질서를 이루어 가기 시작하는 단계입니다.

 

 

 

AC.38, 창1:18-19, ‘낮과 밤의 분별 : 행위로 드러나는 선과 악, 빛과 어둠의 기준’

18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9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 And to rule in the day, and in the night, and to distinguish between the l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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