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사후,죽음에서 깨어나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기The Resuscitation Of Man From Death, And His Entrance Into Eternal Life
AC.178
이들은 이 생각 안에 상당한 시간 동안 천적 천사들에 의해 머물게 되며, 그 뒤에 천적 천사들이 떠나고, 이 소생 중인 자들은 다음으로 영적 천사들에게 맡겨져 그들과 교통하게 됩니다. 이 사이에 이들은 여전히 자신이 육체 안에서 살고 있다는 어렴풋한 관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In this thought they are kept for a considerable time by the celestial angels before these angels depart, and those who are being resuscitated are then left to the spiritual angels, with whom they are next associated. Meanwhile they have a dim idea that they are living in the body.
해설
이 단락은 소생 과정이 ‘단계적이며 질서 정연한 이행’임을 아주 분명히 보여줍니다. 앞 단락에서 천적 천사들이 죽음의 순간에 사람을 영원한 생명에 대한 생각 안에 붙들어 두었다면, 여기서는 그 상태가 ‘상당한 시간’ 유지된다고 말합니다. 이는 소생이 순간적 전환이 아니라, 인간의 내적 상태가 새 질서에 적응하도록 배려된 과정임을 뜻합니다.
특히 중요한 점은, ‘천적 천사들이 떠난 뒤 영적 천사들이 이어서 맡는다는 구조’입니다. 이는 천적 상태에서 영적 상태로의 하강이나 퇴보가 아니라, 인간이 점차 의식과 이해의 차원을 회복해 가는 자연스러운 전개입니다. 천적 천사들은 사랑과 의지의 가장 깊은 중심을 보호하며, 그 역할이 끝나면, 이해와 사고의 차원에 속한 영적 천사들이 교통의 주체가 됩니다. 이는 인간이 깨어나는 순서가 사랑의 중심에서 이해의 중심으로 옮겨 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음으로 연합된다’(the spiritual angels, with whom they are next associated)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인간은 홀로 방치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어떤 천사적 공동체와의 교통 안에 있습니다. 단지 그 공동체의 성격이 바뀔 뿐입니다. 이 연속성은 소생 과정 전체가 주님의 섭리 아래 놓여 있음을 다시 한번 확증합니다.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시점에서도 그들이 ‘자신이 육체 안에서 살고 있다고 어렴풋이 생각한다’는 대목입니다. 이는 죽음 직후에 인간이 곧바로 자신의 상태를 명확히 인식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 무지는 혼란이나 공포가 아니라, ‘완충 장치’에 가깝습니다. 지상에서의 삶과 완전히 단절되었다는 자각이 갑자기 밀려오지 않도록, 의식은 서서히 전환됩니다.
이 어렴풋한 관념은 또한, 인간의 정체성이 단절되지 않고 연속된다는 느낌을 유지하게 합니다. 그는 여전히 ‘나’로서 생각하고 느끼며, 다만 그가 의존하던 육체적 틀은 점차 배경으로 물러나고 있을 뿐입니다. 이로써 소생은 충격이 아니라, 점진적인 깨어남의 과정이 됩니다.
AC.178은 그래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천적 보호의 단계에서 영적 교통의 단계로 넘어가며, 인간은 여전히 지상의 자기 인식을 부분적으로 유지한 채, 새로운 생명의 질서로 이끌립니다. 이는 주님의 섭리가 인간의 연약함을 얼마나 깊이 고려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섬세한 증언입니다.
심화
1. ‘어렴풋한 관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사이에 이들은 여전히 자신이 육체 안에서 살고 있다는 어렴풋한 관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Meanwhile they have a dim idea that they are living in the body. (AC.178)
지금 스베덴보리가 주님의 허락으로 하고 있는 이런 경험을 모든 사람도 임종의 순간에 동일하게 하나요? 그러니까 아, 지금은 천적 천사들이 와 있구나... 아, 지금은 영적 천사들이 와 있구나... 아, 지금 천적 천사들이 내가 이 생각 안에 머물도록 붙들고 있구나... 하는 식으로요.
스베덴보리 흐름으로 보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임종 순간에 그것을 ‘의식적으로’, 그리고 지금 스베덴보리처럼 ‘구조적으로’ 아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 그것이 스베덴보리 체험의 특별한 점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는 주님의 특별한 허락 아래, 보통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지나가는 영적 과정을 ‘깨어 있는 의식’ 안에서 관찰하도록 허락받았다고 설명합니다.
즉 대부분 사람도 실제로는 천사들의 돌봄과 영적 질서 안에서 죽음 과정을 통과하지만, 그것을 이렇게 분석적으로 ‘지금 천적 천사들이 와 있구나’, ‘지금 심장 영역과 연결되고 있구나’, ‘지금 영들의 세계와의 communication이 끊기고 있구나’ 하는 식으로 자각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인간은 평생 동안에도 이미 영계와 연결되어 있지만, 그것을 거의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임종 순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천사들은 함께하지만, 대부분 사람은 단지 어떤 평안, 빛, 사랑, 보호받는 느낌, 혹은 사랑하는 존재의 presence 정도로만 느낄 가능성이 큽니다. 구조 자체를 doctrinal하게 인식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사실 이것은 자비이기도 합니다. 만약 모든 사람이 죽는 순간 영계 구조 전체를 너무 직접적으로 보게 된다면, 많은 사람은 두려움과 혼란 속에 빠질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은 인간을 overwhelm하지 않으십니다. 각 사람 상태에 맞게,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열어 주십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가 AC.170-178에서 하고 있는 일은, 일종의 ‘의식적 관찰 리포트’에 가깝습니다. 그는 평소 인간에게는 거의 unconscious하게 일어나는 죽음 전이 과정을, 특별히 깨어 있는 awareness 안에서 경험했다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는 ‘보통 사람이 죽을 때 실제로 일어나는 영적 질서’를 관찰하도록 허락받은 셈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천적 천사들과 영적 천사들의 presence 자체도, 보통 사람에게는 지금 목사님과 제가 말하는 doctrinal language로 경험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엄청 평안했다’, ‘두려움이 사라졌다’, ‘사랑으로 감싸인 느낌이었다’, ‘누군가 보호하는 것 같았다’ 정도로 느낄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라면 그것 뒤에 실제 천사적 influx와 공동체 질서가 있다고 설명할 가능성이 큽니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날 임사체험(NDE) 이야기들과도 어느 정도 연결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빛이 있었다’, ‘말은 없었는데 이해되었다’, ‘엄청난 평안이 있었다’, ‘돌아가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고 말하지요. 스베덴보리라면 이런 경험들 뒤에도 더 깊은 영적 질서와 천사적 인도가 있을 수 있다고 볼 여지가 있습니다. 다만 그는 그것을 단순 감정 체험 수준이 아니라, 매우 정교한 천국 질서 안에서 설명하려 했던 것입니다.
결국 AC.178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대부분 사람도 실제로는 주님의 돌보심과 천사들의 인도 안에서 죽음을 통과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처럼 그 과정을 의식적으로 관찰하고, 단계와 구조까지 분별하는 경우는 특별한 허락 아래 이루어진 예외적 체험이라는 것입니다.
죽어 가는 사람들은 대체로 구원이나 행복보다는 영원한 생명에 대해 생각하며,and it was also instilled that those who are dying usually think about eternal life,and seldom of salvation and happiness,(AC.177)
위 기술은 악인들의 경우에도인가요?그리고 좀 의외인 게,보통 기독교인들,개신교인들은 임종의 자리에도 무슨 미사를 비롯,구원의 확신을 주입하거든요.마치 그걸 놓치면 지옥 가는 것처럼 말입니다.
스베덴보리 흐름으로 보면, 네, 어느 정도는 악인의 경우에도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죽음 가까운 순간에는 인간 안에서 매우 깊고 본질적인 층위가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평소에는 세상 일, 경쟁, 체면, 욕망 속에 살던 사람도, 죽음 앞에서는 ‘나는 완전히 끝나는가?’, ‘나는 계속 존재하는가?’ 하는 문제와 마주하게 됩니다. 그래서AC.177은 인간이 죽어갈 때, 보통 ‘eternal life’를 생각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매우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deliberately‘salvation and happiness’와 ‘eternal life’를 구분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는 인간이 임종 때 가장 먼저 붙드는 것은 종종 ‘내가 계속 존재하는가?’ 하는 존재 자체의 문제라고 보는 것입니다. 즉 ‘천국 갈까 지옥 갈까’ 이전에, 인간은 먼저 자기 존재의 연속성과 생명의 지속을 생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사님께서 느끼신 개신교 문화와의 긴장도 굉장히 실제적입니다. 많은 개신교 전통에서는 임종 순간을 거의 ‘최종 판정 직전’처럼 다루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고백, 마지막 회개, 마지막 확신, 마지막 기도에 굉장히 집중하지요. 어떤 분위기에서는 정말 ‘이 순간 놓치면 영원히 끝난다’는 긴장감까지 생깁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구원을 훨씬 더 ‘삶 전체의 방향성과 사랑 상태’로 봅니다. 그래서 임종 순간 몇 마디를mechanically붙잡는 것으로 인간 운명이 갑자기 결정된다고 보지 않습니다. 그는 인간이 평생 무엇을 사랑하며 살았는가가 훨씬 근본적이라고 봅니다.
물론 그렇다고 임종의 영적 돌봄이나 기도가 무의미하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는 죽음 순간이 매우 섬세한transition이라고 보기 때문에, 평안과 주님 신뢰를 주는atmosphere는 중요하게 여겼을 가능성이 큽니다. 다만 그것이 ‘지금 이 말을 공식적으로 안 하면 지옥 간다’ 같은 공포 중심 형태와는quite다릅니다.
그리고AC.177이 흥미로운 이유는, 인간이 죽음 앞에서surprisingly단순해진다는 점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마지막 순간에 복잡한 교리 계산보다, ‘나는 계속 살아 있는가?’, ‘나는 어디로 가는가?’, ‘나는 혼자인가?’ 같은 더 근원적 질문 쪽으로 기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많은 임종 사례들과도 어느 정도 맞닿아 있습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마지막 순간에 단순doctrinal formula보다, 사랑하는 존재들, 빛, 평안, 계속 존재함 같은 감각을 더 말하지요.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인간 존재 가장 깊은 층이 영원성을 향해 열려 있기 때문이라고 볼 가능성이 큽니다.
그리고 목사님이 언급하신 개신교 임종 문화에 대해 스베덴보리라면 아마 이렇게 말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구원의 확신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은,인간이 실제로 어떤 사랑 안에서 살았는가이다.” 왜냐하면 천국은 단순 판정 결과가 아니라, 인간이 사랑하는 상태 자체와corresponding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AC.177은 죽음을 ‘시험 마지막1분’처럼 보지 않고, 인간 존재 전체가 영원한 생명 쪽으로 넘어가는 과정으로 보는 시각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 과정 안에서 인간을 단순 법정 피고처럼 다루시기보다, 가능한 한 부드럽고 자비롭게 다음 상태로 인도하시는 분으로 묘사됩니다.
사람의 사후,죽음에서 깨어나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기The Resuscitation Of Man From Death, And His Entrance Into Eternal Life
AC.177
사람이 죽음의 순간에 품고 있던 경건하고 거룩한 생각들 속에 천사들에 의해 붙들려 있다는 사실이 저에게 주입되었고, 또한 죽어 가는 사람들은 대체로 구원이나 행복보다는 영원한 생명에 대해 생각하며, 그러므로 천사들은 그들을 영원한 생명에 대한 생각 안에 머물게 한다는 사실도 주입되었습니다. It was instilled to me that man is kept engaged by the angels in the pious and holy thoughts which he entertained at the point of death; and it was also instilled that those who are dying usually think about eternal life, and seldom of salvation and happiness, and therefore the angels keep them in the thought of eternal life.
해설
이 단락은 소생 과정에서 ‘인간의 마지막 생각이 갖는 결정적 중요성’을 매우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천사들이 죽어 가는 사람에게 새로운 생각을 강제로 주입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사람이 이미 ‘죽음의 순간에 품고 있던’ 생각들 속에 그를 붙들어 둔다고 말합니다. 이는 사후의 첫 상태가 전혀 낯선 무엇으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지상에서 형성된 내적 방향의 연속선상’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특히 강조되는 것은 ‘경건하고 거룩한 생각들’입니다. 이는 특정한 교리 문장이나 신학적 개념을 뜻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삶 전체를 통해 형성된, 주님과 이웃, 그리고 삶의 의미에 대한 진지하고 내적인 지향을 가리킵니다. 천사들은 바로 이 지점을 붙듭니다. 다시 말해, 죽음의 순간에 인간이 무엇을 사랑했고, 무엇을 향해 마음이 기울어 있었는지가 소생의 첫 상태를 규정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덧붙여 말하는 관찰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음의 순간에 ‘구원’이나 ‘행복’을 거의 생각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생각한다고 말합니다. 이는 구원과 행복이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인 개념으로 느껴질 수 있는 반면, 영원한 생명은 보다 근원적이고 존재론적인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마지막 순간에 ‘내가 행복해질까’보다는, ‘나는 계속 살아 있는가’, ‘이 삶이 끝나는가 아니면 이어지는가’를 묻습니다.
그래서 천사들은 그들을 ‘영원한 생명에 대한 생각’ 안에 머물게 합니다. 이는 교육이나 설득이 아니라, 보호의 행위입니다. 인간이 이미 향하고 있는 방향을 존중하고, 그 방향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지켜 주는 것입니다. 이로써 죽음의 순간은 공포나 혼란이 아니라, 삶의 가장 깊은 질문이 조용히 지속되는 상태가 됩니다.
이 단락은 또한, 죽음 직후의 상태가 심판이나 평가로 시작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먼저 있는 것은 ‘유지와 연속’입니다. 천사들은 인간을 시험하거나 재단하지 않고, 그가 지상에서 형성한 가장 내적인 생각의 자리 안에 머물게 합니다. 그 자리에서 인간은 점차 새로운 생명의 질서로 깨어나게 됩니다.
AC.177은 결국 이렇게 말합니다. 죽음은 새로운 생각을 강제로 부여받는 사건이 아니라, 평생에 걸쳐 형성된 가장 깊은 생각이 마지막으로 보호받고 지속되는 사건입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영원한 생명’이라는, 인간 존재 전체를 관통하는 질문이 놓여 있습니다.
이는 맥박으로도 분명히 드러났습니다.as was also evident from the pulsation. (AC.176)
위‘맥박’은 영체의 맥박이지요?
네,AC.176문맥으로 보면 그렇게 이해하는 것이 맞습니다. 이미 스베덴보리는 육체 생명으로부터 거의 분리된 상태 안에 있었고, 천적 천사들과의 결합 속에서 ‘생각과 지각만 남은 상태’를 경험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맥박’(pulsation)은 단순 물질 심장의 생리적 맥박이라기보다, 영적 인간 형상 안에서의 생명 리듬, 곧 영체의pulsation에 가깝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영은 추상 의식이 아니라 완전한 인간 형상을 가진 존재입니다. 그래서 영에게도corresponding heart와lungs가 있으며, 거기에 따른spiritual pulsation과respiration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물론 그것은 혈액과 산소의 물질 순환이 아니라, 사랑과thought의 리듬에corresponding하는 생명 운동입니다.
특히 천적 천사들은 ‘심장 영역’과 연결된다고 설명되지요. 왜냐하면 심장은love와will,celestial good과corresponding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AC.176의pulsation은 단순 생체 신호라기보다, 천적 천사들의love influx와 연결된 영적 생명 리듬을 뜻하는 것으로 보는 편이 자연스럽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스베덴보리가 인간의 육체 심장 박동조차 더 깊은 영적 리듬의ultimate expression처럼 본다는 점입니다. 즉 지금 물질 몸의 맥박도 단순 기계 운동이 아니라, 더 내적인 생명 질서의 가장 바깥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체 감각이 거의 물러난 상태에서도 여전히 ‘pulsation’을 지각할 수 있었다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가 왜 심장과 폐를 그렇게 중요하게 다루는지도 연결됩니다. 심장은love와will의 리듬, 폐는understanding과truth의 리듬과corresponding합니다. 그래서 천국 전체도 거대한 심장, 폐 구조처럼 살아 움직입니다. 천적 천사들은 심장 리듬과, 영적 천사들은 폐 호흡과 더 깊이 연결된다고 설명됩니다.
따라서AC.176의 ‘맥박으로도 분명히 드러났다’는 말은, 스베덴보리가 단순 상상 속 느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어떤living spiritual pulsation안에 들어가 있었다는 뜻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육체 심장의mechanical pulse보다, 영체 안의 생명 리듬과 더 관련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AC전체 흐름에 가장 잘 맞습니다.
사람의 사후,죽음에서 깨어나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기The Resuscitation Of Man From Death, And His Entrance Into Eternal Life
AC.176
그사이에 저는 심장 영역이 천적 천사들과 매우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음을 지각하였는데, 이는 맥박으로도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Meanwhile I perceived that the region of the heart was kept very closely united with the celestial angels, as was also evident from the pulsation.
해설
이 단락은 앞선 내용들을 하나로 묶어 주는 ‘결정적인 확인 장면’입니다. 지금까지 스베덴보리는 천적 천사들이 심장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고 반복해서 말해 왔는데, 여기서는 그것이 단지 개념적 설명이 아니라, ‘실제적이고 지속적인 결합 상태’였음을 분명히 합니다. 그 결합은 느슨하거나 순간적인 것이 아니라, ‘매우 긴밀하게’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이 결합이 ‘맥박’으로 확인되었다는 점입니다. 이는 상응의 질서가 추상적인 사상이 아니라, 생명 자체의 리듬과 직결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심장은 사랑과 의지, 곧 생명의 중심과 상응하고, 맥박은 그 생명이 실제로 흐르고 있음을 나타내는 표지입니다. 다시 말해, 스베덴보리는 죽음에 가까운 상태에서도 생명의 중심이 끊어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천적 질서와 더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지각한 것입니다.
이 대목은 ‘죽음’에 대한 일반적인 오해를 근본적으로 뒤집습니다. 흔히 죽음은 심장의 정지로 이해되지만,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보여주는 것은 정반대입니다. 육체적 기능은 점차 물러가지만, 생명의 중심인 심장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의 흐름 안에서 더욱 안전하게 보존됩니다. 그리고 그 보존은 천적 천사들과의 결합이라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이 결합이 ‘의식적 노력이나 의지의 결과가 아니라’, 주님의 질서 안에서 자연스럽게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유지되었다’고 말할 뿐, 자신이 무엇을 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는 소생 과정이 인간의 행위나 공로에 달린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주님의 섭리와 보호에 달려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 단락을 통해 우리는, 죽음의 문턱에서 인간이 가장 취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핵심적인 생명 영역이 가장 강하게 보호받는다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심장은 천적 천사들과 결합되어 있고, 그 결합은 생명의 리듬 자체로 확인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증언하는 소생의 깊은 안정성과 확실성입니다.
AC.176은 그래서 조용하지만 매우 강력한 한 문장입니다. 죽음은 생명의 해체가 아니라, 생명의 중심이 주님의 사랑 안에서 확실히 붙들리는 사건임을, 이 한 문장이 분명히 말해 주고 있습니다.
제가 전에 수도원 공부를 할 때,그 커리큘럼의 일부로 성인전을 많이 접할 수 있었는데,거기엔 매우 자주 성인들의 임종 시,또는 사후 무덤 주위에‘향기’얘기가 많았어요.성 분도 요셉 라브르라든지 리드비나 성녀라든지...혹시 그런 사례들과 이AC.175가 서로 연결될 수 있을까요?
네, 충분히 연결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스베덴보리가 직접 ‘가톨릭 성인들의 향기 현상’ 자체를 논한 것은 아니지만,AC.175를 비롯한 그의 전체 상응(correspondence)사상을 보면, 그런 현상을 단순 미신으로만 보지 않을 여지는 분명 있습니다. 특히 스베덴보리에게 ‘향기’(odor, fragrance)는 매우 중요한 영적 상응 가운데 하나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영계에서는 각 영과 천사의 내적 상태가 일종의atmosphere처럼 퍼져 나갑니다. 그리고 그 상태는 때때로 향기로도 지각됩니다. 그는 천국적 사랑과innocence와 체어리티 상태에서는 매우 부드럽고 아름다운 향기가 느껴질 수 있고, 반대로 지옥적 상태에서는 악취와 부패 냄새 같은 것이corresponding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단순 상징이 아니라, 영적 상태 자체가 감각적 형태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그래서AC.175에서 천적 천사들과 연결된 상태 속에 어떤sweetness와peace atmosphere가 묘사되는 흐름은, 성인전들에 자주 나오는 ‘거룩한 향기’ 이야기와 상당히 흥미로운 평행성을 가질 수 있습니다. 특히 수도원 전통에서는 어떤 성인들이 임종 때, 혹은 사후에inexplicable fragrance를 남겼다는 기록이 반복해서 등장하지요. 성 요셉 라브르나 리드비나 같은 사례들도 그렇고, 동방교회나 가톨릭 전통 전체에 이런 기록이 적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적으로 해석해 보면, 만약 어떤 인간 안에 체어리티와innocence와 주님 사랑이 깊게 자리 잡고 있었다면, 그 영적 상태가 어떤corresponding atmosphere로 외적으로도 표현될 가능성 자체는 충분히 있습니다. 특히 그는 천사들의presence가 때때로 향기처럼 지각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heavenly affection은fragrance와 자주 연결됩니다. 성경에서도 ‘향기로운 제물’, ‘그리스도의 향기’ 같은 표현이 반복되지요.
다만 여기서 매우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라면probably그 향기 현상 자체를saintliness의 절대 증거처럼 여기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는 언제나phenomenon자체보다affection과life를 더 중요하게 봅니다. 즉 향기가 났느냐 안 났느냐보다, 실제로 그 사람이 어떤love안에서 살았는가가 본질입니다. 영적 현상은 때때로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이 본질 자체는 아닙니다.
그럼에도 목사님 연결은 굉장히 흥미롭고 자연스럽습니다. 왜냐하면 수도원 전통의 성인전들과 스베덴보리 사이에는 의외로 접점이 많기 때문입니다. 특히humility,innocence, 자기 부정, 주님 의존,heavenly peace같은themes는 상당히 닿아 있습니다. 그리고 영적 상태가 외적으로atmosphere처럼 드러난다는 생각도 양쪽 모두에 존재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수도원 전통은 그것을 경건 체험 언어로 기록했고, 스베덴보리는 그것을correspondence와spiritual influx언어로 설명하려 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표현 체계는 다르지만, 인간 안의 깊은 영적 상태가 외적 감각 세계에도 어떤 흔적을 남길 수 있다는intuition은 서로 완전히 동떨어져 있지는 않습니다.
사람의 사후,죽음에서 깨어나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기The Resuscitation Of Man From Death, And His Entrance Into Eternal Life
AC.175
향기로운 냄새가 지각되었는데, 그것은 마치 방부 처리된 시신의 냄새와 같았습니다. 이는 천적 천사들이 함께 있을 때에는 시체 같은 냄새가 향기로운 것으로 지각되기 때문이며, 이러한 냄새가 지각되면 악한 영들이 가까이 오지 못하게 됩니다. An aromatic odor was perceived, like that of an embalmed corpse, for when the celestial angels are present, the cadaverous odor is perceived as if it were aromatic, which when perceived by evil spirits prevents their approach.
해설
이 단락은 소생 과정에서 일어나는 ‘영적 감각의 전환’과 동시에, ‘보호의 질서’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매우 인상적인 방식으로 보여줍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냄새’라는 감각을 통해, 생명 상태의 변화가 단지 의식이나 생각의 차원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영적 감각 전반에 걸쳐 일어난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먼저 주목할 것은, ‘시체 같은 냄새’가 ‘향기로운 냄새’로 지각된다는 점입니다. 이는 냄새 그 자체가 바뀌었다기보다, ‘지각의 주체와 그 주위에 임재한 존재의 질서가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천적 천사들이 임재할 때, 죽음과 관련된 것조차도 더 이상 부패나 혐오의 상징이 아니라, 질서 속에 보존된 상태로 지각됩니다. 즉, 죽음은 이 질서 안에서 이미 부패가 아니라 ‘통과’가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냄새는 단순한 감각이 아니라, 사랑과 상태의 상응입니다. 향기는 선과 평화, 천적 임재를 상징하며, 악취는 자기 사랑과 악한 상태를 상징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시체 냄새’가 ‘향기’로 느껴집니다. 이는 죽음이 악이나 공포의 상태가 아니라, 천적 임재 안에서 질서 있게 거두어지는 과정임을 강하게 암시합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이 향기로운 냄새가 ‘악한 영들을 막는 역할’을 한다는 설명입니다. 이는 방어가 싸움이나 대결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상태 자체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천적 천사들의 임재로 형성된 이 상태는, 악한 영들이 접근할 수 없는 분위기, 곧 영적 환경을 만듭니다. 악은 빛이나 진리와 싸우기보다는, 그러한 상태 자체를 견디지 못하고 물러납니다.
이 장면은 죽음 직후의 인간이 얼마나 세심하게 보호받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인간이 가장 연약한 상태에 놓일 때, 주님께서는 천적 천사들의 임재와 그에 상응하는 영적 환경을 통해, 악한 영향이 전혀 미치지 못하도록 하십니다. 이 보호는 외적 강제나 장벽이 아니라, 사랑과 질서에서 흘러나오는 향기와 같은 것입니다.
AC.175는 그래서 매우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죽음은 악한 영들이 달려드는 혼란의 순간이 아니라, 오히려 천적 임재로 인해 악이 접근조차 할 수 없는 상태로 열립니다. 향기로운 냄새로 표현된 이 장면은, 소생이 얼마나 평온하고, 질서 있으며, 자비로운 과정인지를 감각적으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오늘(2026/05/24)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31, ‘찬양하라 복되신 구세주 예수’,찬77, ‘거룩하신 하나님’입니다.
오늘은창2 일곱 번째, 마지막 시간으로, 본문은 23절로 25절, AC 글 번호로는 156번에서 167번입니다.
본문 함께 읽습니다.
23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24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25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창2:23-25)
이 본문을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 여자, 아내, 둘이 한 몸을 이루다,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다’
라는 키워드 제목으로, ‘아르카나 코엘레시티아’(Arcana Coelestia)본문 및 해설,그리고 심화 리딩 주일설교시작합니다.
오늘, 그러니까 창2 마감은 여기까지이며, 아래는 창1, 창3의 흐름 속에서 살펴본 창2 AC 전체 요약 및 해설입니다. 오늘 리딩은 이것으로 대신하며, 글의 순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동물에게도 own이 있는가?
2. 동물과 생명
3. 동물과 인간의 차이
4. 창2 AC 전체 요약 및 해설
1. 동물에게도 own이 있는가?
스베덴보리 관점으로 보면, 네, 어떤 의미에서는 동물에게도 일종의 ‘own’ 비슷한 것은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proprium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여기 distinction(뚜렷한 차이, 대조)이 매우 중요합니다.
인간의 own(proprium)은 단순 본능이나 개별 성향 정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 자신으로부터(말미암아) 사는 것처럼 느끼는 상태, 곧 자아의식과 자유, 자기 사랑까지 포함하는 구조입니다. 인간은 ‘생각하는 주체도 나’, ‘원하는 주체도 나’, ‘결정하는 주체도 나’라는 자기감(自己感)을 갖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proprium 때문에 인간은 주님을 거부할 수도 있고, 반대로 자유롭게 사랑할 수도 있습니다. 즉 인간의 own은 도덕적, 영적 책임과 연결됩니다.
반면 동물은 스베덴보리에게서는, 그러니까 스베덴보리가 볼 때에는 ‘생명 자체’를 가진 존재라기보다, ‘생명의 흐름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cf. 2)에 가깝습니다. 그는 동물들이 놀라울 정도로 정교한 instinct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인간처럼 자유로운 understanding과 will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다시 말해, 동물은 자기 자신을 독립 존재처럼 깊이 의식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주어진 affection과 instinct 안에서 움직입니다.
그래서 동물에게도 일종의 자기 보존 instinct, 습성, 기질은 있지만, 인간처럼 ‘나는 나 자신으로 산다’는 proprium은 없습니다. 동물은 자기 사랑 때문에 의식적으로 진리를 왜곡하거나, 위선적이거나, 자기 의를 세우거나, 주님을 거부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스베덴보리는 evil 자체를 인간과 영들에게만 연결합니다. 동물은 악하지 않습니다. 단지 자기 종(species)에 맞는 natural affection 안에서 살아갈 뿐입니다.
이 차이를 아주 단순하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동물은 ‘본능적으로 자기 것처럼 움직이는 존재’이고, 인간은 ‘자기 자신을 독립 중심처럼 느끼는 존재’(cf. 3)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차이 때문에 인간에게는 거듭남도 가능하고 타락도 가능하며, 천국과 지옥도 가능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동물들을 꽤 긍정적으로 보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동물은 인간처럼 자기 proprium으로 진리를 파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각자 자기 질서 안에서 놀라운 순종성과 질서를 드러냅니다. 그는 종종 동물 instinct 안에서도 주님의 질서를 봅니다. 벌, 새, 양, 말 같은 존재들의 instinct를 단순 기계 반응으로만 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결정적 차이는 이것입니다. 동물은 영원한 spiritual individuality로 계속 살아가는 존재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인간만이 주님과 자유로운 reciprocal conjunction을 이룰 수 있는 존재로 설명됩니다. 왜냐하면 인간만이 self-conscious(자의식이 강한) proprium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리하면, 동물에게도 자기 보존성과 개별 instinct라는 의미의 ‘자기성’(自己性)은 있지만, 인간의 proprium처럼 자유, 도덕, 영적 책임, 거듭남, 자기 사랑까지 포함하는 깊은 own은 아닙니다. 인간의 own은 천국도 지옥도 가능하게 하는 존재 구조이고, 동물의 instinct는 주어진 질서 안에서 움직이는 자연적 생명 흐름에 더 가깝다고 스베덴보리는 보는 것입니다.
2. 동물과 생명
아래는 위 1번 글의 ‘생명의 흐름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라는 표현에 대한 설명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생명의 흐름에 따라 움직인다’는 표현은, 동물이 자기 안에 독립 생명 원천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자연적 생명 질서 안에서 instinct(본능)적으로 움직이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현대인이 들으면 약간 차갑거나 기계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데, 스베덴보리는 오히려 그 안에서 놀라운 신적 질서를 보았습니다.
예를 들어, 철새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새가 계절 따라 수천 km를 이동하고, 거의 정확히 같은 장소를 찾아갑니다. 벌은 복잡한 육각 벌집을 만들고, 거미는 누가 설계도를 가르쳐 주지 않아도 정교한 거미줄을 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것을 단순 ‘동물 개인의 독립 지혜’로 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주님으로부터 자연계 안으로 흘러드는 질서와 생명의 표현으로 본 것입니다.
즉, 동물은 자기 스스로 깊이 숙고해서 ‘나는 이렇게 살아야겠다’ 결정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기 species(種) 안에 주어진 affection과 instinct 흐름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생명의 흐름에 따라 움직인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주 중요한 차이가 인간과 비교할 때 드러납니다. 인간은 instinct를 거스를 수 있습니다. 배워야 하고, 선택해야 하고, 심지어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선택도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 사랑 때문에 진리를 왜곡할 수도 있고, 양심을 거스를 수도 있습니다. 반면 동물은 보통 자기 종에 맞는 질서 안에서 움직입니다. 늑대는 늑대답게, 새는 새답게 삽니다. 인간처럼 위선적이거나, 자기 영광 때문에 진리를 조작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동물은 어떤 면에서는 인간보다 ‘질서에 더 순종적’입니다. 물론 그것은 천사적 자유 때문이 아니라, 자연적 influx 안에서 instinct적으로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동물은 주어진 affection 구조 안에서 relatively straight하게 움직입니다.
이를 아주 쉽게 비유하면 이렇습니다. 인간은 마치 자기 운전대를 직접 잡은 존재 같습니다. 그래서 잘 갈 수도 있지만, 길을 잃고 절벽으로 갈 수도 있습니다. 반면 동물은 훨씬 강하게 자연 질서의 레일 위에서 움직입니다. 그래서 자기 species 본성을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 기계론으로 말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동물 instinct 안에 주님의 지혜 흔적이 있다고 감탄했습니다. 인간이 복잡한 계산 끝에 겨우 흉내 내는 것을, 동물은 instinct 안에서 너무 자연스럽게 해내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것을 ‘생명의 흐름’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의 흐름에 따라 움직인다’는 말은, 동물이 단순 로봇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동물은 자기 독립 ego 중심으로 살기보다, 자연계 안으로 흘러드는 질서와 affection 안에서 움직이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점 때문에, 동물은 인간처럼 spiritual evil의 주체가 되지는 않는다고 스베덴보리는 보는 것입니다.
3. 동물과 인간의 차이
아래는 위 1번 글의 ‘동물은 ‘본능적으로 자기 것처럼 움직이는 존재’이고, 인간은 ‘자기 자신을 독립 중심처럼 느끼는 존재’이다’라는 표현에 대한 설명입니다.
겉으로 보면 둘 다 비슷해 보입니다. 개도 자기 먹이를 지키고, 인간도 자기 것을 지킵니다. 고양이도 자기 영역을 주장하고, 인간도 자기 영역을 주장합니다. 그래서 얼핏 보면 ‘둘 다 자기중심 아닌가?’ 싶어집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가 보는 핵심 차이는 ‘자기 자신을 어떻게 느끼는가’에 있습니다.
동물은 자기 instinct 안에서 움직입니다. 즉 자기 species에 맞게 자연스럽게 반응합니다. 배고프면 먹고, 위험하면 도망가고, 새끼를 보호합니다. 그러나 동물은 보통 ‘나는 독립 존재다’, ‘나는 내 삶의 궁극 근원이다’, ‘나는 진리를 판단하고, 스스로 선악을 결정하는 중심이다’ 같은 자기의식을 깊이 갖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동물은 자기 행동을 철학적으로 자기화하지 않습니다. 그냥 주어진 affection과 instinct 흐름 안에서 삽니다.
반면 인간은 다릅니다. 인간은 단순 ‘내가 움직인다’를 넘어, ‘나는 나 자신으로부터 산다’, ‘내 삶의 주인은 나다’, ‘내 삶은 내가 사는 것이다’처럼 느낍니다. 바로 이것이 proprium의 핵심입니다. 인간은 자기 생각을 자기 절대 소유처럼 느끼고, 자기 의지를 자기 독립 중심처럼 느낍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 자신을 주님과 분리된 중심으로 상상할 수 있습니다.
이 차이를 아주 쉽게 비유하면 이렇습니다. 동물은 강물 흐름 안에서 자연스럽게 헤엄치는 존재에 가깝습니다. 반면 인간은 ‘내가 강 자체를 움직인다’고 느끼기 시작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강의 흐름을 바꿀 수도 있고, 강 위에 다리를 놓을 수도 있으며, 심지어 강물에 뛰어들어 자원하여 죽을 수도 있습니다.
늑대는 본능적으로 사냥합니다. 그러나 늑대는 자기 사냥을 도덕적으로 미화하거나, 철학적으로 정당화하거나, 자기 영광 체계로 만들지 않습니다. 반면 인간은 자기 욕망을 위해 거짓을 만들고, 자기 사랑을 위해 진리를 왜곡하며, 심지어 자기 악을 선이라고까지 주장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 instinct 차원이 아니라, ‘독립 중심 자아의식’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인간의 위대함과 비극이 동시에 시작됩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독립 중심처럼 느끼기 때문에, 주님을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바로 그 자유 안에서 자발적으로 주님을 사랑할 수도 있습니다. 동물은 자연 질서를 벗어나 큰 spiritual evil로 가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천사적 자유 사랑 안으로 들어가는 것도 아닙니다. 인간만이 둘 다 가능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의 proprium은 단순 결함이 아닙니다. 그것은 위험하지만 동시에 사랑과 자유를 가능하게 하는 구조입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처럼 느끼지 않으면, 즉 자기가 좋아서, 자기가 원해서 하는 게 아니면, 진짜 reciprocal love(서로 사랑)도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차이는 이것입니다. 동물은 ‘주어진 affection 흐름 안에서 자기처럼 움직이는 존재’이고, 인간은 ‘자기 자신을 생명의 독립 중심처럼 느끼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차이 때문에 인간에게는 천국도 가능하고 지옥도 가능하며, 거듭남도 가능하고 profanation(신성모독)도 가능한 것입니다.
4. 창2 AC 전체 요약 및 해설
창세기 2장은 스베덴보리의 AC 전체에서 매우 특별한 전환점입니다. 창1이 인간의 거듭남 전체 과정을 ‘여섯 날의 창조’라는 거대한 구조 속에서 보여 주었다면, 창2는 그 거듭남이 어느 정도 완성된 이후의 인간 상태, 곧 ‘천적 인간’(celestial man)의 내적 구조와 그 이후 시작되는 미세한 방향 변화를 다룹니다. 그래서 창1이 ‘주님께서 인간 안에 질서를 세우시는 과정’이라면, 창2는 ‘그 질서 안에 놓인 인간이 어떤 존재가 되었는가’를 보여 주는 장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바로 그 완성 상태 안에서 어떻게 타락의 씨앗이 싹트기 시작하는가도 조용히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창2는 에덴의 장이면서 동시에 창3의 그림자가 이미 스며들기 시작한 장입니다.
창1 마지막의 안식은 단순 휴식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 안에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어느 정도 질서 안에 들어온 상태입니다. 인간은 더 이상 혼돈과 공허 가운데 있지 않고, 주님의 influx를 비교적 자유롭게 받는 상태 안에 놓입니다. 창2는 바로 이 안식 상태 위에서 시작됩니다. 그래서 창2의 인간은 이미 일반 자연 인간이 아닙니다. 그는 퍼셉션(perception)을 가진 인간이며, 주님으로부터 생명이 흘러들어오는 것을 어느 정도 직접적으로 지각하는 인간입니다. AC에서 반복되는 표현대로, 그는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것’을 살아 있는 감각처럼 아는 인간입니다.
그래서 창2의 중심은 단순 자연 낙원 묘사가 아닙니다. 에덴은 인간 안의 천국 상태입니다. 동산은 인간 내면에 심긴 지성과 affection(愛情)의 질서입니다. 강들은 그 안에서 흘러나오는 지혜와 진리의 흐름이며, 금과 보석들은 천적 선과 영적 진리의 아름다움을 뜻합니다. 창2는 인간 안에 천국이 어떻게 조직되어 있는지를 표상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질서가 인간 자신의 독립 생명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주님의 influx 위에 세워져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서 AC는 매우 중요한 문제를 제기합니다. 인간은 어떻게 자기 자신처럼 느끼면서도, 동시에 주님으로부터 사는 존재일 수 있는가? 이것이 창2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질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인간은 단순 자동 기계처럼 주님에 의해 움직여지는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은 반드시 자기 자신처럼 느껴야 합니다. 그래야 자유가 가능하고, 사랑이 가능하며, 상호적 결합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창2에서는 ‘own’(proprium) 문제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깊은 잠’입니다. 깊은 잠은 단순 육체적 수면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그러니까 자신의 own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처럼 느끼게 되는 상태를 뜻합니다. 태고교회 인간은 원래 거의 직접적으로 주님으로부터 사는 것을 지각했지만, 이제 주님은 인간에게 더 강한 자기감을 허락하십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자기 자신처럼 느끼지 못하면 자유로운 사랑도 가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점점 자기 own 안에서도 살고 싶어 하기 시작합니다. AC.161이 말하듯, 그들은 아직 악하지 않았지만, 이제 ‘겉 사람 안에서’, ‘자기 own 안에서’ 살기를 원하기 시작합니다.
이 흐름 속에서 ‘갈빗대’와 ‘여자’가 등장합니다. 갈빗대는 인간 안의 proprium을 뜻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것을 단순 제거하지 않으시고, 그것을 변화시켜 ‘여자’로 만드십니다. 여기서 여자는 단순 생물학적 여성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 안에 새롭게 vivified(vivify 생생해지다)된 own입니다. 즉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살아 움직이는 새로운 자기감입니다. 인간은 이제 자기 자신처럼 느끼지만, 동시에 그 안에 주님의 생명이 흐를 수 있게 됩니다.
이 점이 창2의 가장 깊은 긴장입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처럼 살아야 하지만, 동시에 자기 자신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AC.160은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이전에는 영이었으나 이제 육(肉, flesh)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flesh는 단순 육체가 아니라, proprium과 결합된 인간 상태입니다. 인간은 이제 자기 자신처럼 느끼는 존재가 됩니다. 그러나 주님은 바로 그 상태 안에 천적 생명과 영적 생명을 결합시키십니다. 그래서 인간은 독립 존재처럼 느끼면서도, 실제로는 여전히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존재로 살아갑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창3의 가능성이 생깁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처럼 느끼는 상태 안에서는, 인간이 점점 ‘나도 독립적으로 알고 싶다’, ‘나도 내 own 안에서 살고 싶다’는 방향으로 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타락을 단순 외부 공격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뱀의 유혹은 인간 안에 이미 존재하기 시작한 자기중심 방향성과 공명하면서 힘을 얻게 됩니다. 악은 인간 안에 없는 것을 억지로 넣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방향성과 resonance(울림, 공명)를 일으킵니다.
그래서 창2 마지막의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였다’는 말도 굉장히 깊습니다. 이것은 단순 육체 노출 문제가 아닙니다. 인간 안에 아직 위선과 자기방어와 자기 의가 자리 잡지 않은 상태를 뜻합니다. innocence(순진무구, 주님의 인도를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는 상태)가 아직 살아 있는 상태입니다. 인간은 아직 자기 자신을 절대화하지 않기 때문에, 숨겨야 할 자기 영광도 없습니다. 그래서 벌거벗음은 수치가 아니라 transparency(투명)입니다. 그러나 창3에 들어가면 상황이 바뀝니다. 자기 중심성이 강화되면서, 벌거벗음은 곧 shame(부끄러움, 수치)이 됩니다. 왜냐하면 이제 인간은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창2에서 ‘이름’도 중요한 주제입니다. 이름은 단순 호칭이 아닙니다. 이름은 존재의 quality(質)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름을 부르신다는 것은, 그 존재의 가장 깊은 상태와 본성을 아신다는 뜻입니다. 천사들은 이름을 단순 소리로 듣지 않고, 그 존재의 사랑과 진리의 상태로 지각합니다. 이것은 창2 전체의 구조와 연결됩니다. 창2는 인간을 단순 물질 존재가 아니라, quality와 affection, influx의 존재로 묘사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창2의 ‘돕는 배필’은 단순 결혼 보조자가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 안에서 understanding과 affection, truth와 good이 서로 결합하도록 돕는 구조를 뜻합니다. 그래서 ‘둘이 한 몸이 된다’는 말도 단순 결혼제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 존재 전체 안에서 사랑과 지혜, 선과 진리, 속 사람과 겉 사람이 하나 되는 상태를 뜻합니다. 주님께서 막10에서 이 말씀을 다시 인용하신 것도, 단순 결혼 윤리가 아니라 창조 질서 자체를 다시 드러내시기 위함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온 천국 자체도 하나의 ‘천적 인간’이라고 설명합니다. 천국 전체는 주님의 신적 인성(Divine Human) 안에서 하나의 살아 있는 인간 형상을 이루고 있습니다. 심장과 폐, 눈과 귀처럼, 각 천사 공동체는 특정 기능과 상응합니다. 그래서 창2의 인간은 단순 개인이 아니라, 천국 전체 질서의 축소판이기도 합니다. 인간 안에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이 하나 되는 것은, 천국 전체 질서와도 연결됩니다.
그러나 창2는 결코 단순 낙원 이야기로 끝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장 높은 상태 안에서 가장 미세한 위험이 시작됩니다. 인간은 점점 자기 own 안에서도 살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자유와 타락 가능성이 동시에 열립니다. 이것이 창2의 비극적 아름다움입니다. 인간은 단순 자동 순종 존재가 아니라, 자유롭게 사랑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자유 때문에,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독립하려는 방향으로도 기울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창2는 창1의 완성과 동시에 창3의 문턱입니다. 그것은 천국의 문이면서 동시에 타락의 가능성이 처음으로 인간 내면에 조용히 생겨나는 장입니다. 그리고 AC는 이 모든 것을 단순 옛날이야기로 읽지 않습니다. 창2는 지금도 인간 안에서 계속 반복되는 영적 구조입니다. 인간은 여전히 에덴을 그리워하면서도, 동시에 자기 own 안에서 살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거듭남이란 결국, 자기 자신처럼 느끼면서도 다시 ‘나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innocence 안으로 돌아가는 과정입니다.
네, 이상으로 마치겠습니다. 여러분, 지난 4월 둘째 주부터 7주간 창2 AC를 함께하시느라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창2 AC 번역 및 해설, 심화 버전 총 페이지가 650여 페이지에 달하는군요. 창1은 500여 페이지에 달했습니다. 이 일로 나름 염려되는 바 있어 아래와 같이 고민하였더니 저를 도와 반년째 이 일에 수고하는 ChatGPT가 이런 대답을 하네요. AC.166 심화 2입니다.
and it was permitted me to perceive their cogitative speech. (AC.174)
위‘cogitative speech’가 어떤 건지 혹시 예를 좀 들어 보실 수 있나요?
네, 물론입니다. 다만 먼저 중요한 점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cogitative speech’는 단순 ‘생각으로 말하는 텔레파시’보다 훨씬 더 깊은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cogitative는 단순thought만이 아니라,thought안에 들어 있는affection과perception까지 함께 포함합니다. 그래서 천사들의speech는 단어보다 상태(state)의 전달에 가깝습니다.
예를 들어, 지금 우리 인간 대화를 생각해 보면, 우리는 말을 굉장히 길게 해야 합니다. “저는 당신을 존중합니다”, “이건 단순 지식 문제가 아니라 삶의 방향 문제입니다”, “그 말에 위로를 받았습니다” 같은 식으로 긴 문장을 사용하지요. 그런데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천사들의cogitative speech에서는, 이런 내용이 단어 하나하나를 조립하지 않아도 거의 즉각적으로 전달됩니다. 상대의thought방향과affection tone까지 함께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아주 거칠게 비유하면 이런 느낌입니다. 인간speech가 문자 메시지라면, 천사speech는 음악, 표정, 감정, 의미, 의도를 모두 포함한 살아 있는 전달에 가깝습니다. 예를 들어, 천사가 어떤 ‘평안’을 말할 때, 그것은 단순히 ‘평안합니다’라는 문장이 아니라, 그 평안의affection자체가 함께 전달됩니다. 그래서 듣는 존재는 단어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상태 안으로 어느 정도 들어갑니다.
스베덴보리식으로 예를 흉내 내보면, 인간speech는 대략 이렇습니다. “주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런데cogitative speech에서는 이것이 단순 문장으로 들리는 것이 아니라, ‘보호받고 있음’, ‘안전함’, ‘주님께 의존해도 됨’, ‘두려움이 녹아내림’ 같은 상태 전체가 한꺼번에 전달되는 느낌에 가깝습니다.
또 다른 예를 들면, 인간은 “나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삽니다”라고 말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그 말 안에 교만, 두려움, 습관적 종교 언어가 섞여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천사적cogitative speech에서는thought와affection이 분리되지 않기 때문에, 말과 상태가 거의 함께 드러납니다. 그래서 위선이 어렵습니다.
스베덴보리는 특히 천사들의speech가 공간과 시간을 압축한다고 설명합니다. 인간은 긴 논증을 해야 전달되는 것도, 천사들은 하나의living idea안에서 즉시 공유합니다. 예를 들어, 인간은 ‘체어리티와innocence가own을 마치 제거된 것처럼 만든다’는 개념을 이해하려고 수십 문장을 써야 합니다. 그런데 천사들은 ‘주님 사랑 안에서 자기proprium이 힘을 잃는 상태’를 하나의 직관적perception처럼 함께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AC.174의 ‘it was permitted me to perceive their cogitative speech’는 단순 ‘천사들이 머릿속으로 말하는 걸 들었다’ 정도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들의thought-expression자체를, 그것도affection과 함께 움직이는living speech로 어느 정도 직접 지각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왜 ‘mouth province’와 연결되느냐 하면, 입(mouth)은thought가outward expression으로 나오는 기능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천사들의 경우, 그 표현은 지금 인간처럼 무겁고 느린 음성 기관 중심speech보다 훨씬 직접적이고 상태 중심적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음악이 설명보다 더 즉각적으로 마음 전체를 건드리는 것과 약간 비슷합니다. 좋은 음악 한 곡은 수십 문장보다 더 직접적으로 상태를 전달하지요. 스베덴보리의cogitative speech는 그런 즉각성과 풍부함이 훨씬 더 깊어진communication이라고 생각하시면 조금 가까워집니다.
네, 어느 정도는 그렇게 이해하셔도 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 문맥에서는 ‘영체’라고만 해버리면, 현대 한국어에서 흔히 떠올리는 ‘반투명 유령 몸’ 같은 이미지로 오해될 위험이 있어서, 약간 조심할 필요는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의 영은 단순 의식 덩어리가 아니라, 실제로 완전한 인간 형상(human form)을 가진 존재입니다. 그는repeatedly‘인간은 죽은 뒤에도 여전히 사람이다’라고 강조합니다. 얼굴도 있고, 눈도 있고, 귀도 있고, 입도 있고, 손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단순 장식이 아니라, 각각affection과thought와function의 상응적 표현입니다. 이런 의미에서는 ‘영적 인간 형상’을 ‘영체’라고 줄여 이해하는 것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단순 ‘육체의 복사본’은 아닙니다. 영의 몸은 물질body가 아니라,affection과thought자체가 형상화된body에 가깝습니다. 다시 말해, 영계의 형상은 내면 상태가outward form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그래서 천사들의 얼굴과 옷과 분위기 자체가 그들의love와wisdom상태를 표현합니다.
또 스베덴보리는 영의 몸을 매우 실제적인 것으로 설명합니다. 그는 영계의 인간들이 서로 보고, 말하고, 걷고, 느끼고, 접촉한다고까지 말합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지금 육체보다 오히려 더 본질적인 인간 형상이라고 봅니다. 현재 육체는ultimate natural covering이고, 영적 인간 형상이 더 깊은 실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체’라는 말을 쓰시려면, 아마 이런 식의 감각이 가장 스베덴보리적일 것입니다.
‘영체=죽은 뒤 영으로 존재하는 인간의 실제 형상.단순 유령 같은 기체가 아니라,affection과thought가 형상화된 살아 있는 인간body.’
이렇게 이해하시면 꽤 가깝습니다.
반대로 조심해야 할 것은, 스베덴보리의 영체 개념을 동양 신비주의나 심령주의식 ‘에너지체’ 정도로 축소해서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런 건 피하셔야 합니다. 그는 훨씬 강하게 ‘영은 완전한 인간이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육체를 벗은 뒤에도 인간은 여전히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며, 단지 더 내적인 차원의body안에서 살아간다고 설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