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2:19, 20)

 

AC.146

 

지금까지 말한 바를 통해 그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하는 연결을 알 수 있습니다. 18절에서는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It is not good that the man should be alone, I will make him a help as with him) 하시고, 곧이어 각종 들짐승(beasts)공중의 각종 새(birds)가 언급되는데, 이들은 이미 앞에서 다루어진 것들입니다. 그리고 즉시 다시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for the man there was not found a help as with him)가 반복되는데, 이는 그가 선에 대한 애정들과 진리에 대한 인식들(knowledges)에 관한 자신의 질(quality) 아는 것이 허락되었음에도 불구, 여전히 자신의 own,proprium으로 기울어졌음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proprium을 원하는 성향 가운데 있는 자들은, 주님의 것들이 아무리 분명하게 표상되고 보인다 하더라도 그것에 대한 업신여김을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From what has been stated, the connection of what is signified may be seen. In verse 18 it is said, “It is not good that the man should be alone, I will make him a help as with him,” and presently “beasts” and “birds” are spoken of, which nevertheless had been treated of before, and immediately it is repeated that “for the man there was not found a help as with him,” which denotes that although he was permitted to know his quality as to the affections of good, and knowledges of truth, still he inclined to his own; for those who are such as to desire what is their own, begin to despise the things of the Lord, however plainly they may be represented and shown to them.



해설

 

이 단락은 창2:18-20의 구조 전체를 ‘해석적으로 봉합’해 주는 매우 중요한 정리 문장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본문의 반복과 배열이 우연이 아니라, 인간 내면의 상태 변화를 드러내기 위한 ‘의도적인 구성’임을 밝힙니다. ‘돕는 배필’이 필요하다고 말한 직후에 다시 짐승들과 새들이 등장하고, 그럼에도 다시 ‘돕는 배필이 없었다’ 결론짓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핵심은 이것입니다. 인간은 이미 주님께로부터 받은 선의 애정들과 진리의 인식들에 대한 ‘질(quality)을 알도록 허락받았습니다’. 이는 무지의 문제가 아니라, 인식의 충분함을 뜻합니다. 짐승들과 새들을 알고 이름 붙였다는 것은, 의지와 이해의 내용들이 어떤 것인지를 분별할 수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인간은 주님의 질서를 ‘보지 못해서’ 자신의 own, 자신의 proprium으로 기울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 같은 결론이 반복됩니다.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이 반복은 실패가 아니라, ‘의지의 방향’을 드러냅니다. 인간은 충분히 보여 주어도, 충분히 설명해 주어도, 이미 자신의 proprium을 원하기 시작한 상태에서는 주님의 것들을 중심에 두지 않습니다. 문제는 계시의 부족이 아니라, ‘욕구의 방향’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날카로운 진술을 덧붙입니다. 자신의 proprium을 원하는 성향 가운데 있는 자들은, 주님의 것들이 아무리 분명하게 표상되고 보여지더라도 그것들을 업신여기기 시작한다고 말입니다. 이는 고의적인 반항이 아니라, 내적 중심이 이동한 결과입니다. 주님의 것이 여전히 보이지만, 더 이상 귀하게 여겨지지 않습니다.

 

이 단락은 오늘을 사는 독자에게도 매우 직접적인 통찰을 줍니다. 신앙의 쇠퇴는 대개 진리가 사라져서가 아니라, ‘자신의 proprium이 더 매력적으로 느껴지기 시작했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말씀이 더 이상 이해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이해는 되어도 중심에 두고 싶지는 않게 되는 것입니다.

 

AC.146은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이 자신의 proprium으로 기울어지는 순간, 주님께서 아무리 분명히 보여 주셔도 그것은 더 이상 결정을 바꾸지 못하며, 그 결과 ‘돕는 배필’은 외부에서 찾을 수 없고, 결국 인간은 자신의 proprium을 하나의 구조로 받아들이는 다음 단계로 나아가게 된다고 말입니다.

 

 

심화

 

1. ‘represented and shown’

 

왜냐하면 자신의 proprium을 원하는 성향 가운데 있는 자들은, 주님의 것들이 아무리 분명하게 표상 및 보인다 하더라도 그것에 대한 업신여김을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for those who are such as to desire what is their own, begin to despise the things of the Lord, however plainly they may be represented and shown to them.

 

위 본문에서 맨 끝 영어, ‘plainly they may be represented and shown to them’가 정확히 무슨 뜻인가요?

 

 

여기 ‘however plainly they may be represented and shown to them’는 직역하면, ‘그것들이 그들에게 아무리 분명하게 표상되고 보여진다 하더라도’ 정도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핵심은 represented와 shown이 단순 반복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 문맥에서 ‘represented’(표상되다)는 단순히 눈앞에 나타난다는 뜻이 아닙니다. 어떤 영적 진리나 주님의 것이 상징과 표상, 상응을 통해 드러나는 것을 뜻합니다. 즉, 말씀, 교회의 예식, 자연 속 질서, 천사적 상태 등 다양한 방식으로 주님의 진리와 선이 인간 앞에 ‘표상적으로’ 제시되는 것입니다.

 

반면 ‘shown’(보여지다)은 그것이 단지 상징 속에 숨어 있는 정도가 아니라, 실제로 이해 가능하도록 드러나고 밝혀지는 것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단순 표상만이 아니라 설명되고 드러나며, 어느 정도 인식 가능한 상태까지 포함합니다.

 

그래서 이 문장은 단순히 ‘아무리 설명해 줘도’ 정도보다 더 깊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어떤 사람이 proprium, 곧 자기 자신의 것을 원하는 상태로 기울기 시작하면, 주님의 진리와 질서가 상징적으로나 직접적으로나 아무리 분명하게 드러나도 점점 그것을 업신여기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즉, 문제는 정보 부족이 아니라 사랑의 방향이라는 뜻입니다. 진리가 충분히 제시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인간 안의 중심 사랑이 자기 자신 쪽으로 굳어질 때, 그 사람은 점점 주님의 것들을 하찮게 여기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문장을 자연스럽게 풀면 대략 이런 뜻입니다.

 

‘자기 자신의 proprium을 원하는 상태에 있는 사람은, 주님의 진리와 선이 상징과 계시를 통해 아무리 분명히 드러나고 실제로 보여진다 해도, 점점 그것들을 업신여기기 시작한다.’

 

여기서 ‘plainly’도 중요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희미하게 암시된 정도가 아니라, 상당히 명백하게 드러난 경우를 말합니다. 그런데도 proprium이 중심이 되면, 인간은 결국 자기 자신을 더 신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AC.146의 이 문장은, 타락의 핵심이 단순 무지가 아니라 ‘proprium, 곧 자기 자신의 것을 원함’에 있다는 점을 아주 날카롭게 보여 주는 구절입니다.

 

 

2. ‘quality를 결정하는 두 축’

 

his quality as to the affections of good, and knowledges of truth

 

본문에 나오는 위 표현말인데요, his quality가 the affections of good과 knowledges of truth, 이 두 가지로 결정되네요?

 

 

네, 바로 그렇습니다. AC.146의 이 표현은 스베덴보리 인간론의 핵심을 아주 압축적으로 보여 줍니다. 인간의 ‘quality’, 곧 그 사람이 실제로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은, 결국 두 축으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선의 애정들’(affections of good)이고, 다른 하나는 ‘진리의 지식들’(knowledges of truth)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단순히 ‘선행과 지식’이라고 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는 매우 의도적으로 affections와 knowledges라는 말을 씁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단순히 무엇을 알고 있느냐만으로 규정되지 않고, 무엇을 사랑하느냐에 의해 훨씬 더 깊이 규정되기 때문입니다.

 

먼저 ‘affections of good’, 곧 ‘선의 애정들’은 인간 안의 사랑의 방향을 뜻합니다. 어떤 선을 기뻐하는가, 무엇을 귀하게 여기는가, 어디에 마음이 끌리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것이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층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affection은 단순 감정이 아니라, 의지와 사랑의 움직임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어떤 선을 사랑하느냐가 그 사람의 가장 깊은 quality를 결정합니다.

 

반면 ‘knowledges of truth’, 곧 ‘진리의 지식들’은 그 사랑이 어떤 진리 안에서 형성되고 인도받는가를 뜻합니다. 여기서 knowledges는 단순 암기 정보가 아니라, 진리를 인식하고 이해하는 내용들입니다. 인간은 사랑만으로는 방향을 잃기 쉽고, 진리만으로는 생명이 메마르기 쉽기 때문에, 선의 애정과 진리의 인식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AC.146의 이 표현은, 인간의 quality가 결국 ‘무엇을 사랑하는가’와 ‘무엇을 참이라고 알고 있는가’라는, 이 두 가지의 결합으로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순서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affections of good을 두고, 그다음 knowledges of truth를 둡니다. 이것은 인간의 중심이 결국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진리의 지식도 중요하지만, 그것은 사랑을 섬길 때 살아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같은 진리를 알아도, 어떤 사람은 자기 우월감을 위해 사용하고, 어떤 사람은 이웃을 섬기기 위해 사용합니다. 겉 지식은 비슷해도 quality는 완전히 다릅니다. 왜냐하면 quality의 중심에는 affection, 곧 사랑의 방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AC.146은 인간을 평가하는 기준이 단순 학문 수준이나 외적 행위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 줍니다. 인간의 실제 quality는, 그 사람이 어떤 선을 사랑하고 있으며, 어떤 진리 안에서 그 사랑을 살아가고 있는가에 의해 결정됩니다.

 

 

 

AC.145, 창2:19-20, 이사야와 계시록을 통해 확인하는 '이름'의 의미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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