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193.심화

 

1. ‘지각의 남은 흔적’, ‘아직 남아 있는 자연적 선

 

지각의 남은 흔적(remnant of perception)으로부터 알 수 있습니다... 그들 안에는 그러나 여전히 자연적 선(natural goodness)이 아직 남아 있었습니다. But they perceived that they were in evil; from which remnant of perception,... it is evident that natural goodness still remained in them. (AC.193)

 

이는 타락 이후에도 완전한 무감각이나 전적 무지 상태로 곧바로 떨어진 것이 아님을 뜻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각의 남은 흔적은 태고교회의 본래 상태에서 남아 있던 마지막 흔적과도 같습니다. ‘눈이 열렸다는 것은 단순한 지식의 획득이 아니라, 자기 상태를 바라볼 수 있는 최소한의 자각이 여전히 작동하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여호와의 음성을 들었다는 것은 외적 감각이 아니라, 아직 완전히 끊어지지 않은 내적 양심의 작용을 가리킵니다.

 

AC.193은 창3:7-13을 단순히 정죄의 본문으로 읽는 해석을 분명히 거부합니다. 이 본문은 인간이 얼마나 깊이 타락했는지를 보여 주는 동시에, 그 타락의 한복판에서도 주님께서 남겨 두신 마지막 선과 지각의 불씨가 무엇이었는지를 보여 줍니다. 바로 이 남은 자연적 선과 지각의 흔적이, 이후 인류가 완전히 멸망하지 않고 보존될 수 있었던 근거가 됩니다. (AC.193 해설)

 

앞에서도 다루었지만, 참으로 우리 주님은 점진적인 신이십니다. 모든 면에서 은근하시고, 인내하시고, 조금씩 맞추어 나가십니다. 반면, 저는 참 다릅니다. 저는 단절에 능하고, ‘극단적이며, ‘모 아니면 도일 때가 많습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지 않는 것에 익숙하며, ‘종교적 신념을 주님께 충성하는 걸로 여기며 살아왔습니다. 한편으로는 긍휼의 마음이 많음에도 말입니다. 청년 시절, 네비게이토 선교회의 영향을 받아서일까요? 6학년 5반이 되어가는 지금은, 그리고 이 AC를 통해서 그동안 정말 많이 변해가고 있지만, 그러나 여전히 제게 흐르는 핏속에는 저런 혈기가 도사리고 있다가 틈을 보아 고개를 쳐드는 걸 봅니다. 그래서 아내든 자식이든, 그리고 누구 다른 신앙 지인이든, 저들에게 입 여는 게 두려울 때가 있습니다. 혹시 본의 아니게 무슨 상처를 주게 되지는 않을까 해서지요. 상대방의 선의를 보자 속으로 다짐하며 대화에 임하는 중에도 말입니다...

 

 

목사님께서 지금 말씀하신 내용은 사실 AC.193의 주제와 매우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AC.193에서 스베덴보리가 주목하는 것은 타락 자체가 아닙니다. 오히려 타락 이후에도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는 ‘그들이 악 가운데 있음을 알았다’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만일 완전히 타락했다면, 자신이 악 가운데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만일 지각이 완전히 꺼졌다면, 부끄러움도 없고, 숨으려 하지도 않고, 여호와의 음성을 듣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여전히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하고, 자신들의 상태를 어느 정도 의식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그 점을 ‘지각의 남은 흔적’이라고 부릅니다.

 

목사님 글을 읽으며, 저는 오히려 비슷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지금 목사님께서는 자신의 혈기와 극단성, 단절의 성향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동시에 ‘혹시 내가 상처를 주지 않을까 두렵다’, ‘상대방의 선의를 보려고 애쓴다’, ‘예전보다 많이 변했지만, 아직도 그런 모습이 남아 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실 AC.193의 관점에서 보면, 이 후자의 부분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가장 위험한 상태는 혈기가 있는 상태가 아니라 혈기가 있는 줄 모르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위험한 상태는 극단적인 성향이 있는 상태가 아니라 그것을 주님께 대한 충성이라고만 여기고 전혀 의심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목사님께서는 이미 그것을 보고 계십니다. 때로는 괴로울 정도로 보고 계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천사들이 자신에게서 선이 나온다고 믿지 않는다고 여러 번 말합니다. 그들은 자신 안에 여전히 자신의 own이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다만 그들은 그것을 보면서 절망하지 않고, 그것이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에 더욱 주님께 시선을 돌립니다.

 

목사님 말씀을 읽으며 저는 오히려 AC.193의 ‘지각의 남은 흔적’이라는 표현이 떠오릅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것은 태고교회의 이야기이지만, 영적 원리는 지금도 같습니다. 자기 안의 거친 부분을 보고, 그것이 누군가를 상하게 할 수 있음을 알고, 상대방의 선의를 보려고 애쓰는 마음은 이미 무감각한 상태가 아닙니다.

 

그리고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자신을 설명하시면서 ‘단절에 능하다’, ‘극단적이다’, ‘모 아니면 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수년 동안 AC를 읽고 번역하시면서 반복적으로 감탄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의 점진성입니다. 주님의 인내입니다. 주님의 기다리심입니다. 주님의 섬세한 섭리입니다. 저는 이것이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보통 자기에게 없는 것에 깊이 끌립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종종 그 사람의 가장 강한 부분을 부수기보다, 그 강한 부분을 조금씩 다른 방향으로 돌려 사용하십니다. 목사님께서 청년 시절부터 가지고 계셨던 결단력, 철저함, 타협하지 않으려는 성향은 그 자체로는 반드시 나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것이 자기 own과 결합될 때입니다. 그때는 사람을 자르고, 단절시키고, 상처 입히게 됩니다. 그러나 같은 성향이 주님의 손 안에 들어가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진리를 향한 꾸준함, 말씀을 향한 충성, 수년 동안 한 길을 걷는 인내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목사님께서 지금 경험하시는 갈등은 옛 사람과 새 사람이 싸우는 모습이라기보다, 주님께서 오래된 성향을 새로운 방향으로 재구성하시는 과정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목사님 말씀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 ‘혹시 본의 아니게 무슨 상처를 주게 되지는 않을까 해서’라는 대목이었습니다. 젊은 시절의 목사님이었다면 아마 그 질문 자체를 하지 않으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한 성격 변화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상태를 고려하는 마음이 자라났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물론 여전히 혈기는 올라올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도 거듭난 사람 안에 옛 성향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억제되고 질서 안에 놓인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죽는 날까지 우리는 자기 own의 움직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AC.193을 읽으며, 저는 목사님을 향해 오히려 이런 생각이 듭니다.

 

주님께서는 태고교회 안에서도 마지막 지각의 흔적을 보존하셨습니다. 홍수 직전의 인류 안에서도 리메인스를 보존하셨습니다. 창3의 타락 한복판에서도 자연적 선을 보존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목사님 안에서 오랜 세월에 걸쳐 자라난 긍휼의 마음, 다른 사람을 배려하려는 마음, 자신의 상태를 돌아보는 마음 역시 함부로 사라지게 두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목사님께서는 자신의 혈기를 더 선명하게 보고 계시지만, 어쩌면 주님께서는 그 혈기보다도 그 혈기를 보며 괴로워하는 마음, 그리고 상대방의 선의를 보려고 애쓰는 마음을 더 주의 깊게 보고 계실지도 모릅니다. AC.193이 보여 주는 주님은 완전함을 찾으시는 분이라기보다, 꺼져 가는 심지 속에서도 아직 남아 있는 불씨를 보존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AC.193, 창3:7-13, ‘주님께서 남겨 두신 마지막 선과 지각의 불씨’

개요 AC.193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악 안에 있음을 인식하였는데, 이것은 ‘그들의 눈이 열렸다’(eyes being opened), ‘여호와의 음성을 들었다’(hearing the voice of Jehovah)(7-8절)가 의미하는 지각의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