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타락하는 흐름, 순서

 

그러므로 (serpent), 곧 감각 파트가 여자를 설득하여, 주님에 대한 신앙에 속한 것들을 그것들이 정말로 그러한지 보기 위해 탐구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eating of the tree of knowledge)의 의미입니다. 그리고 사람의 이성 파트가 이에 동의한 것, 이것이 남자도 그것을 먹었다(the man that he did eat)의 의미입니다 (1-6). Hence the “serpent,” or sensuous part, persuaded the woman to inquire into matters pertaining to faith in the Lord in order to see whether they are really so, which is signified by “eating of the tree of knowledge”; and that the rational of man consented is signified by “the man that he did eat.” (verses 1–6) (AC.192)

 

이어지는 남자도 그것을 먹었다는 표현은, 이성 파트가 이러한 방식에 동의했음을 뜻합니다. 이성은 처음부터 주도하지는 않지만, 애정이 움직인 뒤에는 그것을 정당화하고 체계화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렇게 해서 감각이 제안하고, 사랑이 그것을 원하며, 이성이 이에 동의하는 구조가 완성됩니다.

 

이 단락은 타락을 하나의 순간적 사건이 아니라, 내적 과정으로 보여 줍니다. 감각의 제안, 사랑의 동의, 이성의 승인이라는 단계적 흐름 속에서, 인간은 주님을 신뢰하는 상태에서 자기 판단을 신뢰하는 상태로 이동합니다. (AC.192 해설)

 

감각의 제안, 사랑의 동의, 이성의 승인... 내 삶의 태도에 이런 흐름이 혹시라도 있는 건 아닌지 긴장하게 됩니다.

 

 

그 긴장은 매우 건강한 긴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AC.192를 읽으며 가장 위험한 반응은 ‘, 저건 태고교회 이야기구나’, ‘저건 저 사람들 이야기구나’ 하는 반응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혹시 내 안에도 이런 흐름이 있는 것은 아닐까?’라고 묻게 된다면, 이미 창3을 역사나 신화가 아니라 자신의 삶에 비추어 읽기 시작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스베덴보리가 창3을 해설하는 목적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태고교회 사람들이 한때 어떻게 타락했는지를 기록하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 안에서 지금도 반복되는 영적 과정을 보여 주려 합니다. 그래서 뱀도, 여자도, 남자도 결국 우리 안에 있습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AC.192에서 이성이 처음부터 주범으로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현대인들은 흔히 ‘이성이 문제다’ 또는 ‘생각이 문제다’라고 말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훨씬 섬세합니다. 먼저 감각이 제안합니다. ‘정말 그런가?’, ‘직접 확인해 보자.’ 그다음 애정이 그것을 좋아합니다. ‘그래, 나도 알고 싶다.’, ‘내가 직접 판단해 보고 싶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성이 등장하여 그것을 정당화합니다.

 

이것이 무서운 이유는, 이성이 악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원하는 것을 논리적으로 정리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종종 자신이 논리 때문에 어떤 결론에 도달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먼저 사랑이 방향을 정했고, 이성은 그 길을 포장했을 뿐인 경우가 많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오래 읽은 목사님께는 익숙한 주제이겠지만, 그는 인간을 본질적으로 ‘생각하는 존재’보다 ‘사랑하는 존재’로 봅니다. 이해는 의지를 따라갑니다. 사고는 애정을 따라갑니다. 그래서 어떤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도 대개 지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것과 반대되는 사랑이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내 삶의 태도에 이런 흐름이 혹시라도 있는 건 아닌지 긴장하게 됩니다’라는 말은 사실 매우 중요한 자기 인식의 시작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어떤 문제를 두고 기도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미 마음속으로는 원하는 답을 정해 놓은 경우가 있습니다. 그다음에는 그 답을 지지하는 정보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충분히 생각해 보니 이 결론이 맞다’고 말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이성적인 과정 같지만, 실제로는 애정이 먼저 방향을 정하고 이성이 뒤따라온 경우일 수 있습니다.

 

3의 뱀도 바로 그런 방식으로 일합니다. 처음부터 노골적으로 ‘하나님을 버려라’고 하지 않습니다. 먼저 ‘정말 그런가?’라고 묻습니다. 그다음 ‘직접 확인해 보면 어떨까?’라고 제안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네가 판단하는 것이 더 확실하지 않겠는가?’에 이르게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AC.192는 우리를 의심 많은 사람이 되게 하려는 본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에 대해 겸손한 사람이 되게 하려는 본문입니다. 우리는 보통 감각을 의심하고, 세상을 의심하고, 다른 사람을 의심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오히려 ‘너 자신의 own을 의심해 보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천적 인간의 반대는 생각하는 인간이 아니라, 자기 생각을 최종 기준으로 삼는 인간입니다. 천적 인간은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보다 주님을 더 신뢰하는 사람입니다.

 

목사님께서 AC.190부터 192까지 읽으며 반복해서 마음이 무거워지는 이유도 아마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창3은 다른 사람의 죄를 보여 주는 장이 아니라, 우리가 매일 겪는 작은 선택들의 구조를 보여 주는 장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너무 염려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자기 안에서 이런 흐름을 전혀 보지 못하는 상태가 오히려 더 위험합니다. AC.206의 사람들은 자기 눈이 완전히 열렸다고 확신했습니다. 반면 AC.189가 말하는 천국으로 인도되는 조건 가운데 하나는 ‘자기 인식’입니다.

 

어쩌면 목사님께서 지금 느끼시는 그 긴장 자체가 이미 AC.189의 의미에서 말하는 자기 인식의 한 형태일 수도 있습니다. ‘혹시 내 안에도 뱀의 제안, 애정의 동의, 이성의 승인이 반복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고 묻는 사람은 적어도 그것을 절대적으로 옳다고 믿고 있는 사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AC.192를 읽으며 가장 무서운 사람이 ‘나는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이고, 가장 희망적인 사람은 ‘주님, 혹시 제 안에도 이런 흐름이 있다면 보여 주십시오’라고 말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목사님께서 지금 보이시는 반응은 후자에 훨씬 더 가까워 보입니다.

 

 

 

AC.192, 창3:1-13, ‘타락의 과정’

개요 AC.192 그러므로 ‘뱀’(serpent), 곧 감각적인 부분이 ‘여자’를 설득하여, 주님에 대한 신앙에 속한 것들을 그것들이 정말로 그러한지 보기 위해 탐구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선악을 알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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