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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4.11.17 주일예배(2024/11/17, 눅23:26-33),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4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26그들이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것을 붙들어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따르게 하더라 27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28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29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30그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31푸른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 32또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가니라 33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눅23:26-33)

 

 

‘잉태하지 못한 자’와 ‘해산하지 못한 배’는 사랑의 선에 속한 진리가 없는 사람을 뜻하고, ‘먹이지 못한 젖’은 인애의 선에 속한 진리가 없는 사람을 뜻한다. (AE.710:8, 이순철 역) the barren,” and “the bellies that have not borne,” signify those who have not received genuine truths, that is, truths from the good of love, and “the breasts that have not given suck” signify those who have not received genuine truths from the good of charity. (AE.710:8)

 

 

유대 성직자들의 요구로 주님을 심문했던 총독 빌라도는 여러 번 저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눅23:4)

 

14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고 15보라 그가 행한 일에는 죽일 일이 없느니라 (눅23:14-15)

 

나는 그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눅23:22)

 

그러나 저들은 한사코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집요하게 주님을 십자가에 매달기를 원했고, 마침내 빌라도는 손을 들었습니다. 주님을 저들 손에 맡겨 저들 뜻대로 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주님은 십자가를 지고 해골이라 하는 처형장으로 끌려가십니다.

 

26그들이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것을 붙들어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따르게 하더라

 

주님은 그 전날 대제사장의 군사들에게 체포되던 때부터 날밤을 새우시며 욕을 당하시고, 이리저리 끌려다니셨습니다. 그래서인지 주님은 무거운 십자가로 기진하셨고, 주님의 그런 모습을 본 병사들이 행인 중에서 시몬이라는 사람을 붙잡아 주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게 합니다. 말씀에서 시몬이라는 이름은 진리에 대한 순종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제자 베드로의 이름이 시몬인 것도 그런 까닭입니다. 본문에는 시몬에 대해 시골에서 온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킹 제임스 영어 성경 표현이고, 새 교회에서 사용하는 영어 성경에는 밭에서 온 사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 새 교회에서 사용하는 영어 성경은 스베덴보리가 히브리, 헬라 성경을 라틴어로 직접 번역한 성경을 사람들이 나중에 다시 영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기존 성경을 속뜻을 염두에 두고 번역, 자신의 모든 저술에서 그 성경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일부 확인한 바에 의하면, 기존 성경에서 너무 엉뚱하게, 즉 원어대로 번역하기엔 너무 이상한 나머지 살짝 손을 댄 그런 부분들만 바로 잡았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가령, 창세기 2장 16절,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같은 부분인데요, 원래대로라면 ‘열매’를 빼고 그냥 ‘나무는 네가 임의로 먹되’ 해야 합니다. 여기 ‘나무’는 퍼셉션(perception)을 의미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이런 속뜻을 알 수 없었던 번역자들은 나무를 먹는다는 게 너무 이상한 나머지 살짝 보조 설명을 추가한 건데, 이렇게 되면 살짝 정도가 아니라 전체가 흔들리기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새로 번역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 누가복음에는 지금 주님을 둘러싸고 진행되는 일이 하룻밤 사이에 일어나는 일처럼 기술되어 있지만, 문제는 사 복음서 전체를 놓고 보면, 누가복음에는 누락된 다른 일들도 많은데, 그 일이 다 일어나기에는 세 시간 정도로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세 시간이라 함은 만약 이 모든 일이 당일에 일어났다 가정할 경우, 이제 오전 아홉 시면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놓고 학자들 사이에 몇 가지 입장들이 있는데, 아래는 이와 관련한 글 일부 인용입니다. 역사 드라마로 읽는 성경 (류모세 저) 인용입니다.

 

...둘째, 예수님이 금요일 새벽에 체포되신 후 금요일 아침에 심자가형을 언도받았다고 하면 다음과 같은 문제가 발생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시간은 오전 9시였다. 그렇다면 금요일 새벽 체포된 시간이 대략 동틀녘인 6시라고 할 때, 새벽 6시부터 아침 9시까지의 짧은 3시간 동안 다음에 나오는 모든 사건이 벌어져야 한다.

 

안나스의 심문 - 가야바의 심문 - 산헤드린의 유죄 판결 - 유다의 후회와 죽음 - 1차 빌라도의 심문 - 헤롯 안티파스의 심문 - 2차 빌라도의 심문 - 십자가형 언도 - 로마 군병들의 조롱 -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심 - 도중에 쓰러지고 구레네 시몬이 대신 십자가를 짐 - 마침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에 도착...

 

※ 천사들은 내적 존재여서 지상 만물이 모두 그 내적 의미로만 보입니다. 예를 들면, 지상에 걸어 다니는 모든 사람 역시 그들 눈에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즉 그 안에 주님의 신성, 곧 주님으로 말미암은 선과 진리 여부에 따라 빛으로, 또는 까만 덩어리로 보이는 식이지요. 심지어 갓난아이조차 그렇습니다. 그들에겐 사람들의 이름이나 외모, 출신 지역이나 배경 등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읽을 때, 그들에겐 ‘시몬’이라는 이름의 내적 의미만 보이지, 그가 베드로인지, 여기 구레네 시몬인지는 중요하지도, 보이지도 않습니다. 시간(time) 개념 또한 그렇습니다. 천국은 시공간의 나라가 아닌, 상태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이라는 표현이 중요한 까닭은, 밭은 진리의 씨가 뿌려지는 교회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시몬이 밭에서 왔다는 것은 그가 교회에 속한 사람임을 나타냅니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우리는 시몬이 어떤 성격의 사람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즉 시몬은 교회에 속한 사람으로 진리에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새 교회 가르침에 의하면 주님은 세상에서의 모든 시험을 홀로 싸워 이기셨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는 왜 시몬이 주님의 시험에 참여하는 것으로 그렸을까요? 그 이유는, 첫째, 시험을 통한 주님의 영화(glorification)와 인간의 거듭남(regeneration)은 원인과 결과처럼 서로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의 영화가 없으면 인간의 거듭남도 없는 것입니다. 둘째, 인간이 시험을 당할 때 혼자 싸우는 것 같지만 사실은 주님과 함께 싸우기 때문이며, 셋째, 시험에 관한 이런 진실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라야 주님과 함께 시험에서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시몬이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27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주님께서 처형장으로 끌려가실 때, 한 무리의 여인들이 주님을 따라가며 통곡하고 슬퍼했습니다. 말씀의 문자적인 뜻으로만 보면, 이 여자들은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처럼 보입니다. 실제로도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속뜻으로는 좀 다른데요, 속뜻으로는, 이들은 주님 당시 유대교회, 또는 더 나아가 말세에 타락한 교회들을 나타냅니다. 말씀에서 ‘여자’, ‘여인’은 교회를 뜻하기 때문인데요, 그렇다면 그들은 왜 그렇게 통곡하고 슬퍼했을까요? 영적 의미로, 통곡하는 건 교회 안에 사랑이 없다는 뜻이고, 애통해하는 건 교회 안에 진정한 진리, 또는 진정한 신앙이 없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주님 당시 유대교회는 이른바 장로의 전통이라는 인간의 교리를 만들어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그때 교회로부터 신성한 선과 진리들이 사라지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여인들이 주님을 따라가며 통곡하고 애통해하는 것,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것’은 교회가 그렇게 황폐해진 것을 의미합니다.

 

28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앞 절에 나오는 여인이나 여기 ‘예루살렘의 딸들’은 모두 마지막 때 기울어져 가는 교회들을 뜻합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향해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하십니다. 여기서 ‘자녀’는 교회들이 생산해 내는 모든 선하고 진실한 것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우는 것’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선과 진리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하시는 것은 앞으로 교회 안에 선과 진리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교회가 말씀의 진리를 거짓으로 변질시킬 때, 필연적으로 주님과의 연결이 끊어집니다. 그것은 더 이상 주님에게서 선과 진리를 받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교회들이 영적으로 황폐해지는 것은 그래서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9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이 말씀에 대해 ‘계시록 해설’ 710번 글 8항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는 사랑의 선에 속한 진리가 없는 사람을 뜻하고, ‘먹이지 못한 젖’은 인애(仁愛, charity)의 선에 속한 진리가 없는 사람을 뜻한다.

 

오래전부터 한국 여성들은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을 죄로 여겼습니다. 심지어 이혼 사유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제 왜 그랬는지 짐작됩니다. 그러니까 한국인들에게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건 자연적인 의미 이상의 그 무엇이었던 겁니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이 진리와 관련이 있다면, 앞에서 말한 사랑의 선에 속한 진리(truths from the good of love)와 인애의 선에 속한 진리(truths from the good of charity)의 차이는 뭘까요? 전자는 진리의 바탕에 주님에 대한 사랑, 또는 선에 대한 사랑이 있는 것을 의미하고, 후자 즉 인애, 체어리티(charity)의 선에 속한 진리는 진리의 바탕에 이웃 사랑, 또는 진리에 대한 사랑이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주님 사랑에 속한 진리를 가진 사람은 일을 할 때 그 일의 목적인 선을 먼저 생각하고, 다음에 일의 절차와 방법인 진리를 따집니다. 그에 비해 이웃 사랑에 속한 진리를 가진 사람은 일의 목적이나 유익 같은 선보다는 절차와 방법의 합리성, 즉 진리를 먼저 고려합니다. 이 두 가지 진리가 바로 영적인 진리입니다. 즉 사랑의 선에 속한 진리와 체어리티의 선에 속한 진리가 영적 진리들인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에 아기를 출산하지 못했거나, 젖을 먹인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영적 진리를 소유하지 못한 사람들, 즉 교회 밖 이방인들을 뜻합니다. 그러면 교회 밖의 사람들도 어쨌든 진리를 가졌을 텐데, 그렇다면 그들이 가진 진리는 무엇입니까? 영적인 진리라기보다는 도덕적 진리에 가깝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주님이 어떤 분이시고, 이웃이 누군지 정확히 모르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이방 종교의 진리는 모호한 진리입니다. 진리가 모호하면 그에 따라 삶도 모호해집니다. 그럼에도 이들에게 복이 있다 하신 이유는, 영적 진리를 알고도 더럽히는 것보다는, 차라리 모르는 채 도덕적으로 사는 편이 낫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전자의 사람은 구원받지 못하지만, 후자의 사람은 구원을 받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속 사람의 나라인데, 전자의 사람은 속 사람이 영원히 뒤집히는 상태가 되지만, 후자의 사람은 사후 살짝 교정 및 떼어내기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30그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본문에서 말하는 그때는 부활하신 주님이 참된 진리로 다시 오시는 때이며, 그 진리를 가지고 낡고 부패한 교회들을 심판하시는 때입니다. 다시 오신 주님으로 표상되는 진리란 어떤 것일까요? 말씀의 문자적 의미 안에 담긴 신성한 내적 진리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적 진리로 충만한 말씀의 문자적 의미가 바로 다시 오신 주님이신 것입니다. 내적 진리로 다시 오신 주님께서 친히 낡고 부패한 교회들을 심판하십니다. 그때 거짓 진리를 가지고 참된 진리를 대적하던 교회들은 참된 진리의 눈부신 빛을 감당하지 못하고, 자신들의 악 속에 숨어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됩니다. 본문에 ‘그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리라’ 한 것은 그런 의미입니다. 산은 본래 사랑을 뜻하지만 여기서는 반대로 인간의 악을 뜻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니까 진리를 마주하기보다 차라리 자신의 악에 숨는 것이 오히려 편하다는 것입니다.

 

31푸른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

 

천국의 천사들조차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성한 진리의 빛을 직접 날 것으로 마주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각 천사와 사람에게 맞는 순화된 빛으로 오십니다. 그럴진대 악한 사람들이 어떻게 참된 진리의 빛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아마 빛을 마주 대하는 순간, 숨을 쉴 수 없을 것 같은 고통을 느낄 것입니다.

 

끝으로 32절과 33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32또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 가니라 33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주님의 고난의 장소는 해골, 즉 골고다라 하는 곳이었습니다. 주님은 왜 그곳에서 마지막 시험을 당하셨을까요? 해골은 머리를 둘러싼 뼈이고, 뼈는 영적으로 가장 차원이 낮은 것을 뜻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여기서 해골은 이른바 기억 지식(memory-knowledge [scientia])이라고 하는 가장 낮은 차원의 진리를 뜻합니다. 주님은 바로 그 기억 지식을 통해 들어오는 세상의 거짓 및 온갖 욕망과 마지막 순간까지 싸우셨고, 결국 이기셨습니다. 주님께서 해골이라 불리는 곳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그래서입니다. 말씀에는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두 강도도 함께 달렸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강도는 재림하신 주님 앞에서 심판받는 모든 인간을 나타냅니다. 인간의 본성은 모두 강도와 같기 때문입니다. 심판과 관련, 마태복음 25장 32, 33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32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33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마25:32-33)

 

여기서 오른편 양은 순진한 마음으로 진리를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왼편 염소는 그 반대, 즉 끝까지 진리를 인정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전자의 사람들은 구원받았고, 후자의 사람들은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강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인정하고 시험에 동참한 자는 구원을 받았고, 반대로 주님을 끝까지 부인한 자는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주님을 십자가에 매단 사람과 주님과 십자가를 함께 짐으로써 구원의 길을 가는 사람의 극명한 대비를 봤습니다. 인생을 사는 것은 모두 십자가를 지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런 중에도 생명의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 있고, 영원한 죽음에 이르는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십자가를 지고 가는 중일까요? 입으로는 주님을 믿는다 하면서 이해관계가 생기면 주님을 버리고 자기 욕심대로 하는 건 아닐까요? 진리 앞에서 굴복하지 않고, 인간의 얕은 지식을 내세워 오히려 진리를 내려다보는 건 아닐까요? 나를 내려놓고 주님을 우러러보고 순종하는 것은 너무나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그게 왜 그렇게 힘든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앞에서 잠시 말씀드린 것처럼 인간의 본성은 본시 강도와 같기 때문일 것입니다. 주님이 세상에서 입으신 인성 안에도 그런 본성이 있었고, 그래서 주님은 필사적으로 그것들과 싸워 이기셨습니다. 십자가의 시험은 그 마지막 시험이었습니다. 주님은 그 싸움에서 이기심으로 해서 인류에게 생명의 부활을 주셨습니다. 주님이 이기신 것처럼 우리도 주님께 의지해 나를 버리는 싸움에서 이겨야 합니다. 그리하여 어렵게 찾은 이 진리를 헛되게 만들지 않고 끝까지 지켜야 합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모든 성도와, 또한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이와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워하며 나의 백성을 기뻐하리니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그 가운데에서 다시는 들리지 아니할 것이며 (사65:19)

 

아멘.

 

 

2023-03-05(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11-17(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4-11-17(D1)-주일예배(2570, 눅23,26-33),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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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4-11-17(D1)-주일예배(2570, 눅23,26-33),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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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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