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의 죄악을  담당하신 주님

 

 

2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4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사53:2-6)

 

 

※ 2024년 올 한 해 개인적으로 가장 많이 자주 들었던 이름과 키워드들은 아마도 ‘이재명’과 ‘부정선거’, 그리고 ‘탄핵’ 등이었겠고, 가장 많은 시간을 썼던 건 유튜브 정치 클립들 보기이지 싶습니다. 주님과 보낸 시간이 아니고 말입니다. 정말 부끄럽지요... ‘이젠 좀 절제해야지...’ 하다가도 날마다 순간순간 들려오는 소식들, 특히 부정선거 소식과 그로 인한 거짓 국회의원들이 벌이는 이 기가 막힌 상황에 가슴에 열불이 나고, 마음이 정말 힘들었던, 정말 원치 않는 스트레스로 저뿐 아니라 나라를 걱정하는 대다수 보수 우파 국민 모두가 힘들었던 한 해였던 것 같습니다. 더더욱 한 해의 마지막 달인 이번 달에 터진 윤석열 대통령의 구국의 비상계엄으로 인해 나라가 광란의 도가니로 돌변, 급기야 거대 야당은 이때다 싶어 대통령을 국회 탄핵 소추시키고, 엊그제는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애쓰고 있던 한덕수 국무총리마저 탄핵 소추시켰습니다. 이로 인해 국내는 물론, 전 세계가 발칵 뒤집혔고, 급기야 국내 정세 불안으로 환율 상승, 나라의 경제가 안 그래도 어려운 때, 더욱 휘청거리기 시작했음에도, 여전히 저 거짓의 정당은 탄핵을 멈출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오죽하면, 제가 기도하기를, ‘주님, 아브라함의 조카 롯을 구하러 간 천사들이 롯과 그 가족을 해코지하려던 소돔 백성들의 눈을 어둡게 한 것처럼 지금 이 나라 좌파들의 눈을 어둡게 하사 저들로 스스로 망하게 하옵소서’라고까지 하지 않았겠습니까?

 

9그들이 이르되 너는 물러나라 또 이르되 이 자가 들어와서 거류하면서 우리의 법관이 되려 하는도다 이제 우리가 그들보다 너를 더 해하리라 하고 롯을 밀치며 가까이 가서 그 문을 부수려고 하는지라 10그 사람들이 손을 내밀어 롯을 집으로 끌어들이고 문을 닫고 11문 밖의 무리를 대소를 막론하고 그 눈을 어둡게 하니 그들이 문을 찾느라고 헤매었더라 (창19:9-11)

 

이제 사흘 후인 글피면 2025년 1월 1일 새해인데도 지난 성탄절 때도 그랬지만, 송구영신을 앞두고도 온 나라 백성의 주된 관심은 이 나라가 어찌 될 것인가에만 있어 불안, 초조, 암담한 상황입니다. 검찰, 경찰, 공수처를 비롯, 모든 언론, 방송, 심지어 여론 조사 기관들마저 한통속으로 미쳐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며, 심지어 법원과 헌재에도 좌파들의 독버섯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이 주님 오시던 로마 시대라면 모르겠는데, 그로부터 이천년이 지난 21세기 2024년 말임에도 이런 정말 말도 안 되는 상황이라는 게 믿어지지가 않는데요, 지금이 이럴진대, 주님 오시던 이천년 전 상황은 더욱더 어땠을까요? 오래전 모세를 통해 주님은 율법, 곧 지상의 언어로 된 ‘말씀’(The Word)을 주셨고, 이 ‘말씀’에 기반한 교회가 새롭게 시작되었지만, 앞선 두 교회 시대인 태고교회, 고대교회가 그랬던 것처럼, 이 ‘표상’(表象, representative) 교회, 유대 교회라고도 하는 이 교회 역시 세월이 흐르면서 변질, 타락, 결국 주님의 모든 선과 진리가 황폐해지는 상태, 곧 종말에 이르게 되자, 이때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항상 새로운 교회는 이전 교회가 생명을 다할 때 일어납니다. 이것이 현 기독교회의 시작입니다. 이런 상황을 BC 8세기에 활동했던 이사야 선지자가 미리 예언한 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주님이 오실 때는 그 속뜻으로는 하나의 교회 시대가 교체되는, 그러므로 오늘날 대한민국 상황의 몇 배, 몇십 배나 더 혼란스러웠을 때인데요, 그때 주님은 어떤 모습으로 오셨는지를 보면서, 오늘 이런 나라 안팎 혼란의 때에 과연 우리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를 깨닫고자 송년 주일예배 본문으로 오늘 말씀을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설교 말씀으로 주님이 여러분을 위로하시고, 빛을 비춰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오늘 설교 원본은 작년 서울 새 교회 송년 주일예배 원고입니다. 그래서 도입 부분을 올해 사정에 맞게 수정했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여리고 연약한 신앙을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라고 말합니다. 물론 이 말씀은 주님에게 처음 신앙이 생길 때의 상태를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도 우리 인간처럼 신앙이 연한 순 같이 연약할 때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게 언젤까요? 주님이 아직 어리셨을 때, 자기 안에 아버지가 계신다는 것과 그를 통해 자기가 세상에 오신 이유를 처음 아셨을 때입니다. 오늘 본문 2절은 그때의 주님의 연한 모습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연한 순과 같다는 것은 그 당시 주님에게 있는 진리, 또는 신앙이 그렇게 약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마른 땅은 주님의 겉 사람인 인성(human)의 상태를 뜻하는데, 처음에는 주님의 인성 안에 진리가 별로 없었다는 뜻입니다. 진리가 없는 사람에게서는 하나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말씀에서는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고운 모양이란 주님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형상을 말합니다.

 

※ 우리는 그동안 이 말씀을 겉 글자의 뜻으로만 이해, 실제로 주님의 외모가 그다지 별로였다, 주님은 보잘 것 없는 외모의 소유자이셨다, 그러니 자신의 외모가 맘에 안 드시는 여러분, 힘을 내시라는 식으로 설교도 하고, 또 그런 설교를 들어왔지만, 그러나 이 말씀의 속뜻은 그런 게 아니라는 사실에, 말씀의 속뜻을 모르면 정말 이렇게 정반대의 엉뚱한 풀이와 적용을 하게 되는 걸 봅니다.

 

그랬던 주님이 여호와의 도움을 받아 몸과 마음이 점점 자랍니다. 그리고 열두 살이 되었을 때는 유월절 날 예루살렘 성전에서 만난 랍비들과 성경에 대해 토론하기에 이릅니다. 누가복음 2장은 그때 랍비들의 반응을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기더라’라고 전합니다. 내면에 지혜가 있는 사람은 외모 또한 아름답게 변합니다.

 

※ 주님의 질서, 곧 주님의 모든 것은 주님으로부터 출발, 속 사람을 거쳐 겉 사람으로, 내면에서 외면으로 흐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후 공생애를 시작하셨을 때 주님은 이미 충분히 아름답고 거룩한 모습이셨을 거라고 짐작됩니다.

 

※ 즉 누가 보더라도 범상치 않았을, 누가 보더라도 예사롭지 않았을, 자기 안에 여호와 하나님이 계신, 그래서 그런 내면이 밖으로 드러나는 그런 어린이였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주님은 아기였을 때에도 이미 몇몇 사람에게는 그러셨는데요, 아래 누가복음 말씀을 보면 말입니다.

 

21할례할 팔 일이 되매 그 이름을 예수라 하니 곧 잉태하기 전에 천사가 일컬은 바러라 22모세의 법대로 정결예식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23이는 주의 율법에 쓴 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 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 24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산비둘기 한 쌍이나 혹은 어린 집비둘기 둘로 제사하려 함이더라 25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26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7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28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29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30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31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32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33그의 부모가 그에 대한 말들을 놀랍게 여기더라 34시므온이 그들에게 축복하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35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36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가 매우 많았더라 그가 결혼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37과부가 되고 팔십사 세가 되었더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38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하니라 (눅2:21-38)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주님에게서 하나님의 신성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 모두 영적으로는 맹인이요, 귀머거리였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영적으로 맹인이었다는 사실은 마가복음 6장 말씀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이 안식일에 나사렛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의 일입니다. 말씀에는 거기 모였던 사람들의 반응을 이렇게 전합니다.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며 주님을 배척했다고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누군가를 판단할 때, 겉모습으로만 판단합니다. 어떤 학교를 나왔는지, 집안은 어떤지, 또는 돈은 많이 버는 지로 판단합니다. 유대인들이 그랬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거룩하고 힘이 있었고, 주님에 의해 많은 병자가 치유되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주님을 업신여기고 멸시했습니다. 나사렛 마리아의 아들 목수라는 한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 여기서 마리아의 남편, ‘요셉’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는 걸 보면, 이때는 이미 ‘요셉’은 세상을 떠난 상태인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외면하고 멸시하고 함부로 대할 때, 주님은 말할 수 없이 슬프셨을 것입니다. 분하고 억울해서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하나님이신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배척하고 모독하며, 그렇게 그런 식으로 영적으로 죽어가는 게 안타까우셨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주님을 죄인처럼 끌고 가 때리고 침 뱉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벌을 받아 고난당하는 것이라고 주님을 비웃었습니다. 주님은 한 번도 불법을 저지르거나 신성을 모독하지도 않았는데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스스로 원해서 고난을 받으신 것입니다.

 

※ 주님의 이런 모습을 저는 참으로 본받고 싶습니다. 이런저런 사람들로 제 마음이 힘들어 조용히 주님 앞에 나아가 말씀드리면, 그때마다 주님은 제게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어땠겠니?’ 그럴 때 저는 ‘어휴, 주님...’ 합니다. 그러면 주님은 다시 제게 ‘너는 나를 사랑하여라. 그래서 누구든지 내가 사랑하면 너도 그를 사랑으로 대하거라. 그리고 모든 일을 사랑으로, 즉 사랑하기 때문에 하도록 하여라’ 하십니다. 그럴 때, 제 눈빛이 돌아오며, 초롱초롱해집니다. 마음도 가벼워지고 말입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왜 주님은 그런 모욕과 조롱을 스스로 자원하셨을까요? 본문 5절에서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주님은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궁극적으로 평화를 주시기 위해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것에 대해 ‘계시록 해설’ 365번 글 31번 항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과 결합한 사람들에게 평화란 천국과 영원한 삶을 뜻한다. 왜냐하면 주님이 천국과 지옥의 모든 것을 당신의 질서 가운데로 끌어내려 굴복시키시지 않으셨다면, 그리고 동시에 당신의 인성 안으로 불러들인 시험을 통해 인성을 영화롭게 만드시지 않았다면 인류는 어떤 방법으로도 구원받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계시록 해설 365:31, 이순철 역) Therefore “peace” here signifies heaven and eternal life to those who are conjoined with Him; for the human race could by no means be saved if the Lord had not reduced all things in the hells and in the heavens into order, and at the same time glorified His Human, and these were accomplished by temptations admitted into His Human. (AE.365:31)

 

주님은 인간의 몸으로 지옥을 이기심으로 당신 안의 신성과 인성을 하나로 만드시고, 그렇게 해서 신성한 인간(Divine Human)인 동시에 하나님이 되시기 위해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영원하고 무한하신 주님이 살인자와 강도와 같은 인간들에게 가까이 오시기 위해서는 그 길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 주님의 유전 악 인성을 영어로는 human이라 하고, 영화되신 인성을 Divine Human이라 합니다. 이 Divine Human에 담긴 아르카나(arcana, 라틴, 秘義)는 그 의미가 무한합니다.

 

그래서 본문 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말씀에서 양은 본래 순진한 사람을 뜻하지만 여기서는 반대입니다. 즉 주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육신의 욕망을 좇아 마음대로 사는 자들이 양입니다. 주님은 그런 인간들을 위해 세상에 오셔서 온갖 멸시와 죽음에 이르는 고통을 견디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높고 높은 천국에서 낮고 비천한 땅으로 스스로 내려오셔서 기꺼이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오직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주님이 얼마나 인자하고 겸손한 분이신지를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세상에 계시는 동안 사람들로부터 지독한 멸시와 천대를 받으시고도 끝내 참으셨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당신 안에 계신 아버지 앞에 지극히 낮은 자세로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왜냐하면 영화롭게 되시기 전 주님의 인성은 무한한 신성이신 아버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세상에 계실 때 얼마나 겸손하셨는지는 말씀의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겟세마네 동산에서 마지막 시험을 앞두고 기도하실 때는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또 대제사장과 빌라도에게 끌려가 심문받으실 때는 자신을 위해 한마디도 입을 열지 않으셨습니다. 이사야서 53장 7절은 그것에 대해 예언하기를,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닮겠다는 우리는 어떻습니까? 다른 사람의 사소한 말에도 쉽게 상처받고 분개합니다. 조금만 불이익이 돌아와도 참지를 못합니다. 모든 게 사랑이 없고 신앙이 없기 때문이며, 또한 겸손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 또한 주님은 유대가 로마의 식민지 시절이던 때 오셨습니다. 공의의 하나님, 정의의 주께서 이런 나라 안팎 사정에 유대의 독립을 위해 싸우는 소위 독립군들에게 힘을 보태시기는 커녕, 오히려 주님은 정치와 군사에는 일체 함구하시고 오로지 하나님의 나라만 전파하셨습니다. 이런 주님을 오늘 우리는 어떻게 닮아야 할까요?

 

한 해를 보내면서 겸손하지 못했던 일, 주님을 믿지 못하고, 그리하여 오래 참지 못했던 일, 이웃을 마음을 다해 사랑하지 못했던 일을 반성합니다. 그리고 새해에는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 또한 필요하다면 손에 손, 총칼을 들고 일어나 나라와 민족을 위해 싸워야 하지만, 더 깊은 상대, 곧 저들 식민 지배계급의 사람들 안에서, 인류의 안에서 숨어 활동하며, 무대 뒤에서 조종하여 인류를 자기들 뜻대로 부리는 지옥을 상대하시기 위해 인류를 깨우시고, 각 사람을 그 무너진 기초에서부터 다시 세우시는 일에 오직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하신 주님처럼, 우리 중에 누구는 그 형편과 사정에 따라 광화문으로, 또 누구는 골방에서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며, 변화된 삶, 곧 일터와 직장에서 자기 안에 일하시는 주님을 드러내는 생활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구호를 외쳐도 절대 무슨 악한 기운, 그러니까 지옥에서 오는 기운을 일체 배제하며, 비록 마이크를 잡아도 이런 나라 사랑의 마음 주시는 주님께 그 공과 고마움, 영광을 온전히 돌리고, 자기는 뒤로 물러나며 자기를 부인하는, 천사들의 겸손으로 마이크를 잡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2024년 송년 주일, 이 말씀에 귀 기울이는 모든 성도와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이웃에게 주님의 그런 은혜가 함께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11:29-30)

 

아멘

 

2023-12-31(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12-29(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4-12-29(D1)-주일예배(2577, 사53,2-6, 송년주일예배), '우리 모두의 죄악을 담당하신 주님'.pdf
0.54MB
축도.2024-12-29(D1)-주일예배(2577, 사53,2-6, 송년주일예배), '우리 모두의 죄악을 담당하신 주님'.pdf
0.25MB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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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오시는 날

 
 
4겁내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복하시며 갚아 주실 것이라 하나님이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 5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6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7뜨거운 사막이 변하여 못이 될 것이며 메마른 땅이 변하여 원천이 될 것이며 승냥이의 눕던 곳에 풀과 갈대와 부들이 날 것이며 8거기에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 바 되리니 깨끗하지 못한 자는 지나가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될 것이라 우매한 행인은 그 길로 다니지 못할 것이며 9거기에는 사자가 없고 사나운 짐승이 그리로 올라가지 아니하므로 그것을 만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받은 자만 그리로 행할 것이며 (사35:4-9)
 
 
오늘날 많은 사람이 주님에 대해 자기와 같은 보통 사람으로 생각한다. 그 이유는 주님의 인성만 보고 동시에 신성은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의 인성과 신성은 분리될 수 없다. 왜냐하면 주님은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사람이시고, 주님 안의 하나님과 사람은 영혼과 육체가 한 사람인 것처럼 둘이 아니라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주님에 관한 교리 21, 이순철 역) At the present day many think of the Lord no otherwise than as of a common man like themselves, because they think solely of his human, and not at the same time of his Divine, when yet his Divine and his human cannot be separated. For the Lord is God and man, and God and man in the Lord are not two, but one person, yes, altogether one, just as soul and body are one man, (L.21)
 
 
주님의 탄생을 축하하며 성도들과 함께 찬송과 영광을 주님께 드립니다. 주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교회가 빛 그 자체이신 주님을 바르게 가르치지 못했고, 그 결과 세상은 빛이 없는 암흑의 세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빛이 없는 세상을 말씀에서는 사막과 메마른 땅, 용이 사는 곳이라고 표현합니다. 사막과 메마른 땅, 용이 사는 곳은 우리 주변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 다음은 작년 이맘때 국내 및 국외 정세입니다. 이 설교의 원본이 작년 성탄절 설교이기 때문입니다. 1년 후인 오늘은 국내적으로는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및 초거대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의 대통령 탄핵소추, 부정선거 이슈 및 각종 대규모집회, 국외적으로는 다음 달인 2025년 1월, 미 트럼프 대통령 취임과 그에 따른 국제 정세의 급변 등 그 어수선하고 어지러운, 선과 악, 진실과 거짓 간 첨예한 대립 상황은 여전합니다.
 
힘을 가진 사람이 힘없는 사람들을 조상 대대로 살아온 땅에서 쫓아내고,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을 빼앗긴 사람들은 총을 들고 일어나 보복을 꾀하고, 보복은 더 큰 보복으로 이어집니다. 수많은 부녀자와 아이들이 죽어가는 동안 싸움의 당사자들은 자기의 입장과 명분만 고집합니다.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 이야기입니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곳에서는 동성애자들이 늘어나 전통적인 결혼의 질서를 파괴합니다. 최근에는 급기야 어느 종교의 지도자가 동성애자 부부를 축복했다는 소식도 들립니다. 그러면 나라 안 사정은 어떨까요? 80년대 말에 참교육을 하겠다고 처음 교사들의 노조가 생겼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한 일은 그로부터 30년이 지나도록 순진한 학생들에게 편향된 사상을 심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게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6.25 전쟁 때 북쪽의 공산주의자로부터 나라를 지킨 지도자를 민족의 반역자라고 생각합니다. 산업화를 통해 이 나라를 빈곤에서 구한 지도자 역시 그들에게는 반역자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역사의 진실을 뒤집고 우리 사회의 건전한 권위를 파괴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지금 그들 교사의 권위는 자기가 가르친 학생들에 의해 부정당하고 있습니다. 모든 일은 뿌린 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교육계뿐 아니라 정치와 사법, 언론 등의 직업군과 산업 현장 곳곳에서 직업윤리가 사라지고 있고, 종교계의 부패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를테면 이런 게 사막이요 메마른 땅이며, 용이 사는 곳의 모습일 것입니다.
 
세상이 혼란할수록 양심적인 사람들은 사는 게 힘듭니다. 양심을 지키는 사람은 여러 가지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한두 번 시류에 따라 눈을 질끈 감기도 하는데, 그러다 보면 처음 가졌던 마음을 회복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때 그들은 말할 수 없는 슬픔과 두려움을 느낍니다. 오늘 본문 4절에서는 사막과 같은 세상에서 두려움에 떠는 선한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복하시며 갚아주실 것이라 하나님이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주님께서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복하시며 갚아주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주님이 세상에 오실 때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기쁘게 주님을 영접합니다. 주님이 바로 진리이시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진리를 대적하는 악한 자들과 지옥의 영들은 그들이 괴롭히던 선한 사람들로부터 분리되어 지옥에 떨어집니다. 그것은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을 쫓던 애굽의 군대가 모세가 바다를 향해 손을 내밀자 홍해의 깊은 바다에 잠기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구원이며 보복입니다.
 
26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물이 애굽 사람들과 그들의 병거들과 마병들 위에 다시 흐르게 하라 하시니 27모세가 곧 손을 바다 위로 내밀매 새벽이 되어 바다의 힘이 회복된지라 애굽 사람들이 물을 거슬러 도망하나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을 바다 가운데 엎으시니 28물이 다시 흘러 병거들과 기병들을 덮되 그들의 뒤를 따라 바다에 들어간 바로의 군대를 다 덮으니 하나도 남지 아니하였더라 29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바다 가운데를 육지로 행하였고 물이 좌우에 벽이 되었더라 30그 날에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스라엘을 애굽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시매 이스라엘이 바닷가에서 애굽 사람들이 죽어있는 것을 보았더라 31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행하신 그 큰 능력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의 종 모세를 믿었더라 (출14:26-31)
 
주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구원하실까요? 그것에 대해 본문 5절로 7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5그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6그때에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7뜨거운 사막이 변하여 못이 될 것이며 메마른 땅이 변하여 원천이 될 것이며 승냥이의 눕던 곳에 풀과 갈대와 부들이 날 것이며
 
주님은 세상에 오셔서 한편으로는 진리로 사람들을 가르치시고, 한편으로는 낡은 교회를 폐하고 새 교회를 세우십니다. 앞의 말씀에서 ‘그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때에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는 주님의 제자들이 진리를 통해 영적으로 거듭나는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뜨거운 사막이 변하여 못이 될 것이며 메마른 땅이 변하여 원천이 될 것이며 승냥이의 눕던 곳에 풀과 갈대와 부들이 날 것이며’는 새 교회의 출현을 알리는 말씀입니다. 신앙인이 거듭나는 것과 새 교회가 세워지는 것은 떨어질 수 없는 관계입니다. 왜냐하면 새 교회는 거듭나는 모든 사람의 내면에 세워지기 때문입니다.
 
주님에게서 참된 진리를 받아들이기 전에는 우리 모두 맹인이며, 귀머거리이고 절름발이입니다. 왜냐하면 진리를 알지 못하면 눈에 보이는 세상 이치를 진리로 믿고 따르는데 그것은 영원한 진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세상 것들에 매여 있는 동안에는 영원한 진리에 눈뜰 수 없습니다. 그건 주님에 대해, 사후의 삶에 대해, 영원히 사는 이치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바로 맹인의 상태입니다. 진리를 모르면 또 귀머거리라고 했습니다. 귀머거리라는 건 진리에 따라 살고자 하는 의지가 없다는 뜻입니다. 말씀에서 귀는 진리에 순종하는 의지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뭔지 모르는데 어떻게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절름발이는 무슨 뜻일까요? 참된 진리를 모르는 사람은 삶 가운데서 세상에 속한 것과 영적인 것의 조화를 이뤄낼 수 없다는 뜻입니다. 영적 진리를 모를 때 사람들은 세상 법이나 도덕을 기준으로 행동합니다. 새 교회에서는 그건 세상 사람의 눈에 맞춰 사는 것이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게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그런 사람들은 사후 육신의 옷을 벗고 영계에 들어갈 때, 속에 감추었던 추악한 본성이 그대로 드러난다고 합니다. 그런 걸 보더라도 진리가 없는 절름발이의 삶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세상에 오셔서 진리로 맹인의 눈을 밝히시고, 귀머거리의 귀를 여시며, 절름발이들을 사슴과 같이 뛰게 만드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데리고 기존의 교회가 무너진 자리에 새 교회를 세우십니다. 그러므로 앞의 말씀에서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승냥이의 눕던 곳에 풀과 갈대와 부들이 날 것이며’라고 한 것은 새 교회가 세워지는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광야와 사막은 풀과 나무가 자라지 못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속뜻으로는 진리와 진리에 따른 삶이 없는 황폐한 교회들을 의미합니다. 말씀에서는 또 그런 교회들을 용이 눕던 곳이라고 했습니다.
 
한글 성경에는 ‘승냥이’라고 했는데 원문에는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속뜻으로 용은 무슨 뜻일까요? 기존 교회들이 가르치는 잘못된 교리를 뜻합니다. 즉 입으로는 한 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세 하나님을 믿는 교리입니다. 둘째는 믿음으로부터 삶을 분리하여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교리입니다. 그러면 새 교회에서는 주님을 어떻게 이해할까요? 한 분 주님 안에 세 본질이 있다고 믿습니다. 즉 주님은 사랑 자체이신 분이지만, 인간 앞에 나타나실 때는 진리로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인간의 구원에 구체적으로 관여하실 때는 진리의 능력, 즉 성령으로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한 분 하나님 안에 있는 세 본질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버지가 사랑 자체이신 분이라면, 아들은 사랑에서 발현되는 진리이고, 성령은 첫 번째와 두 번째 본질인 사랑과 진리로부터 발현되는 진리의 능력인 것입니다. 주님을 이렇게 이해할 때, 우리는 한 분 하나님이신 주님과 온전히 결합할 수 있으며, 그때 주님이 주시는 믿음과 사랑은 떼어놓을 수 없는 하나라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게 됩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마지막 때 교회들은 신관에 있어서는 한 분 하나님을 셋으로 나누고, 신앙관에 있어서는 믿음으로부터 사랑을 떼어놓음으로써 주님에게서 멀어졌습니다. 주님은 그래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교회의 원형을 회복하시고, 그를 통해 주님에게서 멀어졌던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승냥이의 눕던 곳에 풀과 갈대와 부들이 날 것이며’라고 한 것은 주님이 세우시는 새 교회로부터 참된 진리가 샘솟듯 솟아남을 의미합니다. 물과 시내는 참된 진리와 그것에서 비롯한 교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8거기에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 바 되리니 깨끗하지 못한 자는 지나가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될 것이라 우매한 행인은 그 길로 다니지 못할 것이며 9거기에는 사자가 없고 사나운 짐승이 그리로 올라가지 아니하므로 그것을 만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받은 자만 그리로 행할 것이며
 
본문 8절에는 새 교회를 통해 주님이 가르치시는 진리를 ‘거기에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 바 되리니 깨끗하지 못한 자는 지나가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될 것이라 우매한 행인은 그 길로 다니지 못할 것이며’라고 말합니다. 또 9절에서는 ‘거기에는 사자가 없고 사나운 짐승이 그리로 올라가지 아니하므로 그것을 만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받은 자만 그리로 행할 것이며’라고 말합니다. 사자는 본래 악과 거짓으로부터 교회를 지키는 진리의 능력을 나타내지만, 여기서는 진리를 파괴하는 거짓의 힘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사나운 짐승은 신앙인을 유혹하는 불결한 욕망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사자와 사나운 짐승이 없다는 것은 주님께서 오신 후에는 어떤 거짓이나 추악한 욕망도 새 교회의 신성한 진리를 파괴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참으로 위로가 되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제가 어릴 때는 성탄절과 연말이 되면 카드를 손수 써서 친구들에게 보내곤 했습니다. 카드 속 그림에는 산타할아버지가 썰매를 타고 눈 덮인 숲길을 달리고 숲속에 작은 교회로부터 불빛이 새어 나왔습니다. 그림 속의 교회처럼 새 교회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작은 교회입니다. 그러나 이 교회로부터 나오는 불빛과 빛은 온 세상을 밝히는 가장 밝고 힘 있는 진리입니다. 2000년 전에 오신 주님께서 세상을 이기고 지옥을 이기신 능력의 진리로 다시 새 교회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주님은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과 관련, ‘하나님의 섭리’ 33:2항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습니다.
 
주님은 정욕이라고 하는 악한 사랑과 그 애정이 제거되는 만큼만 사람들과 가까이 결합하신다. 이 사랑과 애정들은 자연적 사람 안에 있으며, 사람이 자연적 사람으로부터 하는 일은 뭐든 스스로 하는 것처럼 느낀다. 그러므로 사람은 스스로 하는 것처럼 그 사랑의 악을 제거해야 하며, 그런 만큼 주님은 가까이 오셔서 당신 자신을 그에게 결합시키신다. (이순철 역) the Lord can conjoin himself more closely to a man only as the love of evil is removed along with its affections, which are lusts. These lusts reside in the natural man. What a man does from the natural man he feels that he does of himself. For his part, therefore, a man should remove the evils of that love; so far as he does, the Lord comes nearer and conjoins himself to him. (DP.33:2)
 
이 글을 통해 우리는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과 하나님을 보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러니까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세상 정욕을 멀리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보는 것은 그때 주님과 결합하여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신앙인을 괴롭히는 여러 가지 정욕들이 있습니다. 나를 내세우는 것, 다른 사람 위에 올라 지배하려는 것, 이웃의 것을 탐내는 것, 물질적인 쾌락 그 자체를 즐기는 것 등 다양한 욕망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에 붙잡혀 있는 동안에는 주님은 우리 안으로 오실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악한 사랑이 주님과 우리 사이에 장애가 되기 때문입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탄식합니다. ‘주님을 정말 사랑하지만, 세상을 도저히 이길 수 없습니다.’라고 말이죠. 그러나 그럴수록 능력의 진리로 오신 주님을 믿고 일어서야 합니다. 주님께서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복하시며 갚아주실 것이라 하나님이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성탄절을 맞아 주님의 그런 은혜가 모든 성도와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이웃과 함께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1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2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 3너희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며, 10여호와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들의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로다 (사35:1-3, 10)
 
아멘

 
2023-12-24(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12-25(D4)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4-12-25(D4)-성탄예배(2576, 사35,4-10), '주님이 오시는 날'(성탄절).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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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4-12-25(D4)-성탄예배(2576, 사35,4-10), '주님이 오시는 날'(성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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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1그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2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3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4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5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6거기 있을 그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7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눅2:1-7)

 

 

오늘은 주님의 탄생에 대한 말씀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주님의 탄생 이야기는 주님이 세상에 오신 역사적 사실에 대한 기록이지만, 그 내적 의미, 즉 속뜻은 많이 다릅니다. 내적 의미로 주님의 탄생은 주님께서 당신을 믿는 사람들에게 내적 진리로 오시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그것에 대해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1절입니다.

 

1그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가이사는 본래 그 기원이 된 줄리어스 씨저(Gaius Julius Caesar)의 이름입니다. 씨저는 로마 황제의 기원이 된 사람입니다. 클레오파트라로 유명한 그가 암살당한 후, 그의 양자요, 조카인 옥타비아누스가 초대 로마 황제가 됩니다. 신약 말씀에서는 ‘가이사’를 로마 황제를 칭하는 일반명사로 사용했습니다.

 

※ 신약에 나오는 가이사들은 ① 오늘 본문의 가이사 아구스도(B.C. 27–A.D. 14) ②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 총독으로 있을 때 디베료(A.D. 14–37, 눅3:1; 막12:14) ③ 로마에 거주하던 모든 유대인을 추방한 글라우디오(A.D. 41–54, 행17:7, 18:2) ④ 바울이 로마에 상소했을 때 가이사(A.D. 54–68, 행25:11) 등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저 가이사 아구스도는 주님 당시에 로마를 다스렸던 황제, 즉 옥타비아누스의 이름이며, 바로 그가 주님께서 탄생하실 즈음에 모든 사람에게 호적을 하도록 명령을 내렸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호적을 한다 하지만, 영어 성경에는 인구조사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말씀에는 인구조사를 했다는 기록이 몇 군데 나옵니다. 예를 들어, 민수기 1장에서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인구를 세어 보라 명령하시고요, 또 사무엘하 24장에는 다윗이 인구조사를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인구조사를 한다는 것이 영적으로는 어떤 의미일까요? 말씀에 나오는 인구조사의 속뜻은 사람의 내면에 있는 선과 진리들을 살피고 판단하는 일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떤 사람에게 선과 진리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그리고 그 선과 진리들의 종류와 특성이 어떤 것인지를 판단하는 것, 이것이 말씀에 나오는 인구조사의 속뜻입니다. 따라서 인구조사는 그 속뜻, 곧 영적 의미로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오직 주님만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다른 사람들 속에 선과 진리가 어떤 것들이 있는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겉으로 드러난 것만 보고는 사람의 내면을 알 수 없지 않습니까? 따라서 말씀에서 인구조사라 하면 결국 주님께서 각 사람 안에 있는 선과 진리의 특성이 어떤 것인지를 파악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왜 ‘그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했을까요?

 

주님이 세상에 오시기 전, 또는 각 개인의 내면으로 오시기 전에는 아직 사람들 안에 진정한 진리가 없습니다. 주님이 각 사람의 내면에 오시기 전 상태의 사람들 안에 있는 진리는 세상 진리입니다.

 

※ 여기 ‘주님이 각 사람의 내면에 오신다’는 표현을 개신교식으로 표현하면, ‘각 사람은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한다’이지 싶습니다. 뭔가 살짝 2% 부족합니다만...

 

이 진리 역시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이기는 하지만, 가장 낮은 차원의 진리입니다. 그러니까 여기 가이사 아구스도는 그 속뜻으로는 세상 진리나 규범, 또는 세상 법도를 의미합니다. 우리 역시 참된 진리를 전혀 모르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세상의 규범, 또는 말씀의 글자의 뜻으로부터 이해한 진리,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를테면, 그때가 가이사 아구스도가 우리의 삶을 다스리던 때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때부터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살피시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가이사의 영에 따라 인구조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왜 우리 안에 선하고 진실한 것에 대해 관심을 가지실까요? 우리 안의 선과 진리의 특성을 왜 살피실까요? 그것을 아셔야 각 사람에게 맞는 구원의 섭리를 펼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2절입니다.

 

2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구레뇨’가 아니라 ‘수리아’입니다. 수리아 지역에서 처음으로 인구조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수리아는 지금의 시리아를 말하는데, 주님 당시에는 아람이라고 불리던 곳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아브라함이 종 엘리에셀을 보내 아들 이삭의 짝으로 리브가를 밧단 아람이라는 곳에서 구해 온 기록이 있습니다. 또한 이삭의 아들 야곱도 하란이라고도 하는, 이 아람에 사는 외삼촌의 딸들을 아내로 맞이했습니다. 이런 기록의 속뜻이 무엇일까요? 수리아 또는 아람은 선과 진리를 인식하는 것, 또는 그 상태를 의미합니다. 아람이 선과 진리에 대한 인식을 뜻하는 까닭은, 아람은 원래 노아의 아들 셈의 후손들이 살았던 지역이며, 그러므로 아람이라는 지역에는 오래전부터 고대교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곳 사람들은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말씀에 나오는 아람, 또는 시리아가 그 속뜻으로는, 선과 진리에 관한 인식을 나타내는 이유입니다.

 

※ 이런 관점에서 보면, 최근 시리아 반군이 대를 이어 54년간 세습하던 아주 악명높은 독재자 바샤르 알아사드 정권을 몰아내고 나라를 되찾는 일이 일어났는데, 이 역시 무슨 주님의 섭리 있으심이지 싶습니다.

 

여기서 잠깐,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과정을 통해 선과 진리를 인식할까요? 주님께서 선과 진리를 보내주시면, 그것을 바로 인식, 이해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는 인간의 머리로는 바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내면에 있는 합리(合理, rational)라는 눈을 통해서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것이 선이며, 어떤 것이 진리인지, 그리고 선과 진리가 어떤 모양인지를 보는 능력이 합리입니다. 이성(理性)이라 해도 될까요? 다시 말하면 합리라는 의식 속에서 비로소 선과 진리가 형상화됩니다. 그래서 이삭과 야곱이 아내를 아람에서 만나는 것은 합리를 통해 진리를 만나는 것을 뜻하며, 따라서 시리아, 즉 아람에서 가장 먼저 인구조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주님께서 본격적으로 사람의 내면을 살피시는 시기는 우리가 합리(合理)라는 능력을 통해 진리를 이해하기 시작할 때부터라는 사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물론 그전에도 주님께서는 우리 속에 있는 모든 것을 알고 계세요. 그런데 그 전에 아시는 것과, 우리가 진리와 선이 무엇인지 알고 난 후에 우리를 살피시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 처음 호적을 시작했다는 말은 바로 그런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이웃에 대한 사랑과 진리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할 때, 주님께서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시각으로 우리들의 내면을 살피시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 오늘 본문 앞부분은 전반적으로 주님이 오시는 시대적 상황, 즉 한 사람의 내면에 주님이 찾아오시는, 전반적 정황에 대한 설명입니다.

 

3절입니다.

 

3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여기서 고향이라고 하지만, 영어 성경에는 성읍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4절과 5절에는 베들레헴 동네라는 말이 나오는데, 동네라는 말도 같은 의미입니다. 그러면 말씀에서 고향, 성읍, 동네의 속뜻은 무엇일까요? 종교의 교리를 나타냅니다. 각 사람의 종교적 신념을 나타낸다는 것이죠. 그래서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라는 것은 주님이 아직 오시기 전에는, 주님께서 각 사람을 그의 종교적 신념에 따라 판단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어떤 사람을 선하다 하실까요? 자기 종교의 교리 가운데 주님으로 말미암은 교리에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교리를 그냥 알고만 있는 것이 아니고, 교리를 삶으로 실천하는 사람, 주님은 그런 사람을 선하게 여기십니다.

 

※ 여기 ‘자기 종교의 교리 가운데 주님으로 말미암은 교리’라고 굳이 구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슬람 교리 가운데 보면, 몹시 악한, 누가 보아도 지옥으로 말미암은 교리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은 교리, 곧 거기 녹아있는 주님의 신성은 선하고 진실합니다. 주님 사랑, 이웃 사랑에서 녹아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세상 모든 종교에 주님의 신성이 녹아져 들어가게 하셨고, 그러므로 자기 종교에 녹아져 있는 주님의 신성에 생전에 건강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은 사후에 천사들의 오리엔테이션을 받고, 거기서 모두 주님을 영접합니다. 다음은 이와 관련,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김은경 역) 321번 글 인용입니다.

 

나는 많은 경우에 의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도덕적으로 살고, 자기 종교에 따라 순종과 겸손과 서로 간의 이웃 사랑으로 살았으며, 그래서 양심을 지니게 된 비기독교인들이 내세에 가면 천사들이 이들을 받아들여 정성을 다해 선과 신앙적 진리에 대해 세심히 가르쳐준다. 이 사람들은 일단 배우고 나면, 겸손하고 총명하며, 지혜롭게 행하고, 기꺼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흡수한다. 그 이유는, 그들에게는 신앙적 진리에 위배 되는, 뽑아버려야 할 그릇된 관념이 형성되어 있지 않고, 특히 주님을 보통 사람으로밖에 여기지 않는 기독교인들이 갖고 있는 것과 같은, 주님을 함부로 여기는 관념은 더욱 없기 때문이다. 그와 반대로 비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고, 그렇게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셨다는 말을 들으면, 즉시 수긍하고 주님을 예배하며, 하나님은 천상천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리고 인류는 그분의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당신을 온전히 나타내신 것이라고 말한다. 주를 떠나서는 구원이 없다는 것은 신적 진리다. 그러나 그 말은 모든 구원은 주님으로 말미암는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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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모든 사람이 호적 하러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4절과 5절에서는 요셉과 마리아에 대해 말합니다.

 

4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5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 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여기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와,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호적 하러 올라가니’라는 말씀을 보겠습니다. 다윗은 그 속뜻으로 주님을 표상합니다. 그래서 다윗의 집 족속은 주님의 교회에 속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러면 다윗의 집 족속은 언제부터 주님의 교회에 속하게 되었을까요? 아람 시절부터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에서 아람, 또는 수리아(시리아)의 상태는 말씀을 통해 진리와 선을 깨닫는 상태,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오래전부터 시작된 길고 긴 과정을 거쳐 오늘 그 자손 요셉은 지금 다윗의 집 족속, 즉 주님의 교회에 속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 위 ‘아람 시절’이란 말은 요셉이 아람, 곧 수리아에서 실제 살았었다는 말이 아니라 그 내적 의미, 곧 우리 모두 누구나 다 개인 신앙 발전 과정에서 수리아 시절, 아람 시절이 있다는 말입니다. 즉 말씀을 통해 진리와 선을 깨닫는 시기, 우리 안의 합리와 이성을 통해 진리를 만나는 순간이 있다는 말이지요.

 

5절에서는 요셉 혼자 다윗의 동네를 향하는 것이 아니라, 요셉과 마리아가 함께 다윗의 동네를 향하는데요,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엘리사벳과 사가랴의 경우처럼 그 내면에 교회가 존재하는 사람을 나타냅니다. 즉 교회를 이루는 두 가지 요소인 선과 진리가 바로 요셉과 마리아입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참된 진리를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그 진리에 따라 살려고 노력하는 어떤 사람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진리를 알기만 하고, 그것에 따라 살려고는 하지 않는 사람은 그 마음속에 아직 교회가 세워졌다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두 사람이 갈릴리 나사렛에서 유대 땅 베들레헴으로 가는 길은 주님을 전혀 몰랐던 사람들이 주님을 믿게 되고, 마침내 주님께서 내적 진리로 그들에게 임재하시기까지 걸리는 기나긴 여정을 나타냅니다. 우리 자신을 생각해 보십시오, 처음 진리를 알기까지 여기저기 얼마나 많은 곳을 헤매고 다녔습니까? 그리고 진리를 안 다음에도 제대로 신앙생활을 한다 말할 수 있게 된 건 또 언제부터입니까? 대개는 내적 싸움을 치열하게 하면서 잘못된 습관들을 고치기 시작한 것이 그리 오래지 않습니다. 어떤 경우는 아직 그 단계에 들어서지도 못한 분들도 계시고요. 그러니 주님에 대해 전혀 몰랐던 사람이 주님을 알고, 그리고 가장 순수한 진리이신 주님을 만나는 과정이 얼마나 험난한 길입니까? 오늘 말씀에서는 단순히 ‘요셉이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 하러 올라갔다’고 하지만, 그것은 그 속뜻으로는 사실 아주 길고 험난한 여정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그 길을 처음 가기 시작할 때, 이미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오시기로 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계획입니다. 마리아가 아기를 잉태하고 있다는 것이 그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사랑이 놀랍지 않습니까? 주님을 만나는 것은 그냥 하루 이틀 걸어가면 되는 그런 길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길을 기를 쓰고 가다 보면 언젠간 주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길의 시작인 갈릴리 나사렛 동네는 주님을 알기 전 이방인의 교리 가운데 있었던 상태이고요, 유대 땅에 들어온 것은 주님의 교회에 소속, 기적적으로 선한 삶을 살기 시작하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요셉과 마리아는 주님이 탄생하시는 곳 베들레헴에 당도했습니다. 6절입니다.

 

6거기 있을 그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이 말씀은 주님께서 우리 신앙인들의 내면으로 오실 때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때가 되기까지 너무나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때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마리아에게 첫아들이 태어났습니다. 그 모습을 7절에서는

 

7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라고 합니다. 마리아에게 첫아들이 태어나는 것은 우리 신앙인들의 믿음 가운데로 내적 진리이신 주님께서 오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내적 진리이신 것은, 아기가 강보에 싸였다는 사실로 알 수 있는데요, 강보는 그 영적 의미로는 가장 순수한 진리를 나타냅니다. 가장 순수한 진리란, 그 속에 사랑이 있는 진리입니다. 주님이 오시기 전의 진리는 사랑이 없는 진리입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그것은 진리에 대한 지식이나 교리에 대해 그저 알고만 있는 지식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제 주님께서 사랑을 동반한 내적 진리로 오셨습니다. 그 주님이 요셉과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오신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이제까지 전혀 경험해 보지 못했던 가장 순수한 진리, 그 안에 사랑이 있는 진리가 우리 내면으로 흘러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아기가 구유에 누웠다’ 합니다. 구유는 말의 먹이를 담는 통입니다. 건초 같은 걸 담는 통입니다. 그리고 말은 진리에 대한 이해력을 뜻합니다. 따라서 구유는 말씀에서 얻는 진리, 또는 교리를 뜻합니다. 왜냐하면 말이 구유의 먹이를 먹고 사는 것처럼, 자라는 것처럼, 사람의 이해력은 말씀의 진리를 먹고 살기 때문에, 자리기 때문에입니다. 그래서 구유는 말씀의 진리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아기가 구유에 누웠다는 것은 주님께서 말씀의 진리 가운데로 오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진리 또는 교리의 지식 안으로 오시는 겁니다. 그것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구유가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주님께서 오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말씀을 읽으면서 교리 지식을 습득해야 합니다.

 

그러면 ‘여관이 없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여관의 속뜻은 진리를 가르치는 곳입니다. 그래서 여관이 없다는 것은 유대교회 어디에도 진리를 가르치는 곳이 없다는 뜻입니다. 교회가 말씀의 진리를 모두 파괴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교회의 마지막 때를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주님께서 아주 오래전부터, 즉 주님을 알기 전부터 우리를 살피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살피시는 것은 각 사람의 영적 상태에 따라 그를 구원의 길로 이끄시기 위한 것입니다. 주님을 모르는 사람도 나름의 종교가 있고, 신념이 있습니다. 주님은 각자의 종교와 그의 진리를 존중하십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그것을 요셉이 유대 땅으로 오기 전 갈릴리에 살던 시기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그때부터 각 사람을 위한 구원의 섭리를 펼치십니다. 그러한 주님의 섭리가 있었기 때문에, 요셉과 마리아는 갈릴리 땅에서 유대 땅으로 넘어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다윗의 동네 베들레헴에서 가장 순수한 진리이신 주님을 만납니다. 가장 순수한 진리란 어떤 것입니까? 그 속에 선이 있는 진리이며, 능력이 있는 진리입니다. 따라서 주님이 오신다는 것은 바로 그 순수한 진리가 우리 안으로 흘러 들어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오시기 전에는 진정한 믿음 가운데 있다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주님이 오실 때 비로소 진정한 진리를 가질 수 있고, 그리고 선과 진리를 그 자체로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이런 삶을 실제로 산 대표적인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성 프란치스코입니다. 카톨릭에 보면 사람 이름 앞에 ‘’(聖)을 붙여 성인이다, 성자다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 즉 ‘거룩하다’는 표현은 오직 주님한테만 사용하는 것이 맞습니다. 이 점은 확실히 해야 합니다. 그러나 성 아무개, 성자 아무개 할 때의 그 취지와 의도는 그 사람을 주님과 동등으로 여기고자 함이 아니라 그가 그만큼 주님을 본받아 살았음을 존중하고자 함입니다. 물론 이 점을 간과하여 부주의하게 그 성인을 거의 숭배까지 하는 사람들과 그런 경향은 심각한 문제이지만 말입니다. 하여튼 본래 취지는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 이름 앞에 ‘’을 쓴다고 너무 예민하게 반응할 것이 아니라 우리는 감히 그렇게 못 살지만 그렇게 살다 간 그 사람, 즉 그가 오직 주님만 사랑하여 주님이 그와 함께하신 그 모든 기록을 읽고, 우리 역시 그런 삶을 살 용기를 얻을 수만 있다면 좋은 것이며, 그래서 저는 여러분더러 가급적 성인전을 읽으시라 권하는 편입니다.

 

그전에는 어떻습니까? 선과 진리를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이 우리에게 반드시 오셔야 합니다. 주님이 오실 때 비로소 우리는 시험에서 넘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나라 안팍으로 어수선한 이때, 주님의 그런 은혜가 성탄을 맞는 우리 성도님들과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미5:2)

 

아멘

원본

2016-08-07(D1)

청주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4-12-22(D1)

한결같은교회 변일국 목사

 

2024-12-22(D1)-주일예배(2575, 눅2,1-7, 성탄주일예배),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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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4-12-22(D1)-주일예배(2575, 눅2,1-7, 성탄주일예배),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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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스베덴보리(1688-1772, 스웨덴) 생전에 창세기, 출애굽기를 친히 풀어 주셨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당시 관례처럼 자신의 글에 번호들을 매겼는데, 창세기 50장, 출애굽기 40장까지 글 번호가 10,837번까지 갔으며, 걸린 기간은 1749년에서 1756년이고, 라틴어로 기록했습니다. 이 저작의 이름은 ‘Arcana Coelestia’, 역시 라틴어이며, 천계비의(天界秘義) 정도로 번역할 수 있겠습니다. 약어로는 AC를 사용합니다.

 

그는 이 주석을 쓸 때, 곁에 주님이 계셔서 딕테이트하시면, 자기는 그저 받아적기만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마치 오늘날의 프린터 역할만 했다는 말이지요. 그는 성경 외에 그 어떤 세상 책도 참조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저는 여러 해 전부터 스베덴보리의 여러 Writings를 작업 중인데, 특별히 그 메인은 이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입니다. 위 라틴 제목을 저는 이렇게 읽습니다.

 

우리에게 친숙한 창세기는 다분히 그 기록된 겉 글자의 뜻인데요, 그러니까 창세기 1장 천지창조의 기록을 글자 그대로 하나님이 천지를 육 일 만에 창조하셨고, 인류 첫 번째 인간은 아담이다라는 식으로 읽는 것입니다. 기독교 전체가 이렇게 읽지요.

 

그러나 이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읽어 보시면 단번에 느끼시겠지만, 우리가 알던 창세기, 출애굽기하고는 많이, 아니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창세기 1장은 한 사람의 거듭남 전 과정을 여섯 단계로 설명하고 있는, 그리고 아담은 인류 최초의 교회로 설명하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닫힌 마음으로 읽으시면, 무척 당황하시거나 화가 나실 겁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로 읽는 걸 ‘속뜻으로 읽는다’ 하고, 기존처럼 읽는 걸  ‘겉뜻으로 읽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영과 육으로 되어 있듯, 말씀도 그렇게 되어 있는 걸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사람은 영과 육이 하나 되어 살듯, 말씀 역시 속뜻과 겉뜻이 하나 되어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건 어느 게 옳다, 그르다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자신의 몸, 즉 육은 친숙, 익숙하지만, 자신의 영은 무척 낯설듯, 우리 중에 아직 자기 영을 본 사람은 없듯이 말입니다, 그런 식으로 이해하시면 좋겠습니다. 겉뜻이라는 그릇 안에 속뜻이라는 내용이 담긴 것이지요!

 

그러니까, 도저히 속뜻으로는 못 읽겠다, 너무 어렵고, 거부감이 심하게 든다 하시면, 겉뜻으로만 읽으며, 신앙생활 하시면 됩니다. 주님은 놀랍게도 겉뜻이라는 그릇만으로도 얼마든지 그 속 사람이 천국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속뜻이 와닿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부디 겉 글자에 담아놓으신 주님의 신성을 실천, 체어리티(charity)의 삶을 사시면 됩니다.

 

그럼에도 굳이 이 책을 번역, 속뜻으로 주님 말씀 읽는 걸 소개하는 이유는, 그 유익이 헤아릴 수 없이 크기 때문이며, 이것이 천국 천사들이 말씀 읽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혹시 이 속뜻으로 푼 창세기가 이해가 되시고, 와닿으시면 정말 복 받으신 겁니다. 그런 분이 만 명 중 한 명도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친히 풀어 주셨다는 사실에 닻을 내리시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도우심, 곧 빛을 비추어 주시기를 구하면서 읽으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주님이 보내주신 천사들의 도우심이 있으실 것입니다. 아멘, 할렐루야!

 

우선 창세기 1장만 올립니다.

창1, AC.1-66.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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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링크는 스베덴보리라는 사람에 관한 링크이며, 그 아래는 그의 저작들(Writings)에 관한 링크입니다.

 

 

에마누엘 스베덴보리(Emanuel Swendenborg, 1688-1772)

다음은 제가 번역하는 책들의 저자에 대한 간단한 소개입니다. 에마누엘 스베덴보리는 1688년,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에서 출생, 웁살라대학에서 언어학, 수학, 광물학, 천문학, 생리학, 신학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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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덴보리의 저서들(Writings)

다음은 스베덴보리의 저서목록(Writings)입니다. 인류사에 존재했던 사람 중 가장 지능이 높은 사람으로 기네스 북에는 밀턴, 괴테 그리고 스베덴보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마 생전에 가장 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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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래는 스베덴보리가 알려준, 성경 66권 중 어떤 성경이 말씀’(The Word)인가 하는 내용입니다.

 

 

성경 66권 중 말씀(The Word)은...

성경 66권 중에서 속뜻(internal sense, inner meaning)이 있는 성경, 곧 그 안에 주님의 아르카나(arcana, 秘義, 말씀의 내적 의미)가 담긴 성경을 ‘말씀’(The Word, 총 34권)이라 하며, 스베덴보리에 의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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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거에 관하여 (2024/12/18)

 

주님은 시대의 끝, 종말을 예언하실 때, 신앙이 없거나 사랑 없는 신앙을 또한 ‘겨울(winter)로 비유하셨습니다. 마가복음입니다. No faith and faith without love are also compared by the Lord to “winter,” where he foretells the consummation of the age, in Mark:

 

18이 일이 겨울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 19이는 그날들이 환난의 날이 되겠음이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시초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막13:18-19) Pray ye that your flight be not in the winter, for those shall be days of affliction (Mark 13:18–19).

 

여기서 ‘이 일(Flight, 비행, 들림, 휴거)은 마지막 때를, 그리고 모든 사람이 자기가 죽는 때를 의미합니다. ‘겨울(Winter)은 사랑이 결핍된 삶을, ‘환난의 날(the day of affliction)은 저세상 삶의 끔찍한 상태를 말합니다. Flight” means the last time, and also that of every man when he dies. “Winter” is a life destitute of love; the “day of affliction” is its miserable state in the other life. (AC.34)

 

 

※ 휴거는 특히 개신교인들에게 아주 중요한 사건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을 겉 글자의 뜻 그대로 이해를 했기 때문인데요, 같은 본문의 마태복음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마24:31)

 

AC.4060번 글을 보면, 이 말씀은 새 교회의 일어남을 의미합니다. ‘택하신 자들’은 사랑의 선, 신앙의 선 안에 있는 사람들을, ‘사방에서’는 선과 진리의 모든 상태를,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는 교회의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들을 의미합니다. 즉 휴거란, 종말의 때임에도 불구, 여전히 사랑과 신앙의 선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일으켜 주님의 새 교회 세우시는 걸 의미하지, 우리가 아는 것처럼 사람들이 갑자기 공중으로 들림 받고 하는 게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태고교회 종말의 때에, 그런 암흑과도 같은 상황에서도 노아라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통해 주님 신앙을 이어가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즉, 그들을 리메인스처럼 보관하셨다가 나중에 쓰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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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주님, 이 대통령 탄핵 정국을 수습하여 주시옵소서! (2024/12/14)

 

먼저 주님을 사랑하는, 그래서 주께 속한 모든 자녀를 주님, 안전하게 지켜주시고, 일곱 배나 되는 진리의 빛을 더하사 천국 천사들 같은 판단력 안에 머무르게 하여 주시옵소서!

 

석연치 않은 삶을 사는 자들 안에 와있는 저 악한 영들과 저들에게 매여 함께 저 광란의 칼춤을 추며, 함께 미쳐 돌아가는 사람들의 저 광기를 주님, 주의 천사들을 통해 수습하여 주시옵소서!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 김은경 역에서 인용

 

영계에서의 천사들의 능력은 너무도 커서 그에 대해 내가 목격한 것을 모두 얘기한다면 믿기 어려울 것이다. 영계에서 신적 질서에 어긋나 제거해야 하는 어떤 장애물이든지 천사들은 단지 한 번의 의도함과 응시함으로(merely by an effort of the will and a look) 쫓아내거나 전복한다. 나는 악인들이 점령한 산들이 그렇게 내던져지고 파괴되는 것과, 때로는 지진이 난 듯 끝에서 끝까지 흔들리는 것을 보았으며, 암벽이 밑바닥까지 갈라져 그 위에 있던 악인들을 삼키는 것도 보았다. 또 나는 천사들이 수십만의 악한 영들을 흩어 지옥으로 내던져지는 것도 보았다. 아무리 숫자가 많아도 악한 영들은 천사를 당할 수 없고, 술책과 교활함과 무리 지음도 허사가 된다. 천사들은 그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즉시 쫓아버리기 때문이다.영계에서 천사들은 이와 같은 능력이 있다. 성서를 보면 천사들은 허락되었을 때는 자연계에서도 이런 힘을 나타낸 것을 알 수 있다. 군대 전체를 쳐부수거나 전염병을 내려 칠만 명을 멸했다고 한 구절 등이 그 예다.

 

이 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와서 앗수르 진영에서 군사 십팔만 오천 명을 친지라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보니 다 송장이 되었더라 (왕하19:35)

 

15이에 여호와께서 그 아침부터 정하신 때까지 전염병을 이스라엘에게 내리시니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백성의 죽은 자가 칠만 명이라 16천사가 예루살렘을 향하여 그의 손을 들어 멸하려 하더니 여호와께서 이 재앙 내리심을 뉘우치사 백성을 멸하는 천사에게 이르시되 족하다 이제는 네 손을 거두라 하시니 여호와의 사자가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 곁에 있는지라 (삼하24:15-16)(HH.229)

 

 

마치 무저갱이 열린 듯 지옥의 모든 악과 거짓의 기운이 우든 좌든, 여든 야든, 보수든 진보, 빨갱이든 가리지 않고, 누구든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틈이 조금이라도 보이면 거침없이 쏟아져 들어가 그를 초토화하고 있습니다.

 

이런 지옥의 공격에, 오래도록 주님을 사랑하여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명확하게 아는 사람이 아니면, 그리고 천국을 오랫동안 사모하여 이 세상 그 어떤 걸로도 도저히 빈틈을 만들어 낼 수 없는 사람이 아니면, 요즘 저 광기 앞에 배겨날 사람이 없습니다.

 

오,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주의 날개 아래 피하오니 주님, 저희를 지키시며, 안전하게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제발 사법부 저 대법 산하, 그리고 헌재 판사들에게 역시 일곱 배의 빛을 더하사 하늘에 저들의 판관이 있음을 시인, 두려워하게, 그래서 의롭고 정의로운 판결을 내리게 하옵소서! 절대로 세상 여론, 특히 조중동의 신문 기사나 여론조사에 휘둘리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비록 각 사람 안에서 부추기는 자들은 지옥에서 온 악한 영들이지만, 그러나 그것이 악이요, 거짓임을 알고도 자기 사랑에 함몰된 나머지 악령들과 함께 즐겁게 악을 행한 자들의 모든 행위에 벌을 주시고, 그 모든 결과가 본인에게 돌아가게 하옵소서!

 

이것은 주의 정하신 보응의 법칙(the law of retaliation), 곧 심은 대로 거두고, 행한 대로 갚는, 그리고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주께서 정하신 신적 질서(Divine Order)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주님을 사랑한 모든 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혹시 순진한 마음에, 그리고 단순한 사람들, 그러니까 무슨 무료 아이돌 음악회 한다 하여, 그리고 그냥 재미로 저들의 구호를 따라 외치는 등 잠시 미혹된 사람들은 주님의 빛이 비칠 때, 정신들을 차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윤석열 대통령의 심령을 붙드사 요동치 않게 하시고, 그가 헌재 앞에 서서 자신을 변호할 때에 요셉 같고, 다니엘 같게 하옵소서! 그가 대답할 말이 사람의 말이 아니라 주님으로 말미암는 주의 권능이 실린 말이 되게 하시오며, 그에게 친히 대답할 말을 주시옵소서!

 

우리의 가장 큰 적은 자기 사랑(the love of self)입니다. 우리가 잠시라도 주님으로부터 눈을 돌려 자기를 바라보는 순간, 빈틈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의 자녀들은 주님 사랑(the love of the Lord)으로, 아직 주를 모르는 사람들은 나라 사랑으로, 그리고 ‘올바른 일을 그것이 올바르기 때문에 하는, 그런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 주님, 저희 대한민국, 대통령 탄핵 정국을 수습하여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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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1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2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보고 3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하더라 4이로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5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6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7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 8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9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에게 알리니 10(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그들과 함께 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알리니라) 11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 12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부려 들여다보니 세마포만 보이는지라 그 된 일을 놀랍게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 (눅24:1-12)

 

 

사람의 생명에 속한 모든 것은 내적인 것에서 외적인 것으로 차례로 흘러들어온다. 외적인 것은 호감이 느껴지는 기억의 지식과 가장 바깥쪽의 것인 감각에 속한 것인데, 감각에 속한 것이란,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 맡고, 만짐으로써 세상과 소통하는 것이다. 외적인 것에 내적인 것들이 머무는 까닭은 내적인 것의 흐름이 거기서 끝나기 때문이다. 영적 의미로 사람이 걸치는 피복이나 옷으로 나타내어지는 것은 바로 이 외적인 것을 말한다. (천국의 비밀 9216:2, 이순철 역) It is the same with all things that belong to man’s very life, as with those which relate to his understanding, and those which relate to his will. These also follow in order from interior to exterior things. Exterior things are memory-knowledges with their pleasant feelings; and outermost things are those of the senses, which communicate with the world by the sight, the hearing, the taste, the smell, and the touch. Upon these the interior things rest, for in these they terminate. These are the things which are signified in the spiritual sense by the “covering” or “garment wherein he may sleep.” (AC.9216:2)

 

 

다음 주(22일)가 주님 오신 성탄인데 그 전 주인 오늘(15일) 주님의 부활 본문을 만나니 이 또한 새롭습니다.

 

오늘부터 누가복음 24장입니다. 누가복음 마지막 장입니다. 그전에 매일예배 본문으로 하다가 작년 5월, 9장부터 주일예배 본문으로 하였으니, 만일 처음부터 주일예배 본문으로 하였으면 만 3년 정도가 걸리는 대장정이 될 뻔했습니다. 이 귀한 누가복음 속뜻 강해의 길을 먼저 걸으신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님, 지금은 원로 목사님이 되셨지요, 목사님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목사님의 이런 원본 설교가 있었기에, 그리고 사용 허락이 있었기에 저 같은 사람이 용기를 내어 살필 수 있었습니다. 거듭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네, 그럼 시작합니다.

 

주님은 왜 세상에 오셔서 고난을 받고 죽었다 다시 사셨을까요? 그와 관련해 스베덴보리 저,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9216번 글 2항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의 생명에 속한 모든 것은 내적인 것에서 외적인 것으로 차례로 흘러들어온다... 외적인 것에 내적인 것들이 머무는 까닭은 내적인 것의 흐름이 거기서 끝나기 때문이다.

 

이 말이 무슨 뜻일까요? 여러 가지로 이해할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가장 내적 존재인 주님은 가장 외적 존재인 인간에게로 오셔서 영원히 그와 함께 살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섭리입니다. 영원 전부터 계신 무한하신 주님이 당신의 피조물인 유한한 인간과 영원히 함께 살기를 원하신다는 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님은 당신의 생명을 내어주실 정도로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지극히 높은 천국으로부터 지극히 낮은 땅으로 내려오셔서 모진 고난을 이기시고, 신성하고 완전한 진리가 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진리를 통해서만 인간은 주님을 바르게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1절은 완전하고 신성한 진리로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 만나는 사람들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습니다.

 

1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새벽은 영적으로는 주님과 주님의 나라가 임하는 때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부활하신 주님이 완전한 진리로 인간 앞에 모습을 드러내시는 때이며, 동시에 그 진리를 가지고 낡고 부패한 교회를 심판, 새로운 교회를 여시는 때입니다. 그때가 새벽입니다.

 

※ 여자들이 이렇게 안식일이 끝나자마자 새벽같이 무덤으로 찾아간 이유는, 주님 운명하신 첫날, 주님을 장사할 때, 바로 코앞이 안식일의 시작이라 부랴부랴 서두르느라 미처 주님 시신에 향품 바를 새도 없었기 때문이고, 또 관습적으로 장례 때 죽은 시신에 향품 바르는 일은 오직 여자들의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여자들이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으로 갔다고 했습니다. 여자들은 어떤 사람입니까? 진리를 사랑하여 참된 진리이신 주님을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심판 때 구원받을 사람들이며, 주님이 세우시는 새 교회에 참여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여자들은 부활하신, 그래서 살아계신 주님이 아니라 주님의 시신을 만나러 갑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있는 진리가 죽은 자의 시신처럼 아직 생명 없는 진리라는 반증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시신은 죽은 진리, 즉 생명 없는, 말씀의 지식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처음 진리를 받아들일 때의 진리는 생명 없는 진리입니다. 그 이유는 처음에는 진리를 믿기만 할 뿐 아직 행동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자들이 향품을 가지고 주님의 시신에 바르는 것은 죽은 것 같은 진리에 생명을 불어넣는 최초의 노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향품은 내적 진리를 획득하기 전, 신앙인들이 소유하는 자연적인 진리, 이를테면 십계명의 문자적인 가르침 같은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2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보고 3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하더라

 

여자들이 무덤에 갔을 때, 무덤을 막았던 돌이 옮겨져 있었고, 그 안에는 시신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무덤을 막은 돌은 뭘까요? 신앙인들의 내면에서 진리가 살아나는 것을 방해하는, 여러 가지 자아의 거짓을 뜻합니다. 예를 들면, 진리를 안다는 자부심이나 진리에 대한 잘못된 추론, 또는 그 밖에 이기적인 악과 그것에서 비롯된 거짓들입니다. 우리 안에 그런 것들이 있는 동안에는 진리는 무덤 밖으로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님이 이끄시는 대로 처음에는 자연적 진리로, 그리고 다음에는 내적 진리로 말씀을 이해하고 지키려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주님에 의해 진리를 방해하던 거짓들이 물러갑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자아의 거짓을 물리칠 수 없고, 심지어 어떤 게 거짓인지도 잘 모릅니다. 거짓들은 마치 칡넝쿨이 나무를 감아 옴짝달싹 못 하게 하는 것처럼 진리가 자라는 걸 가로막습니다. 주님만이 그것들을 잘라내 치워주실 수 있습니다. 그때 죽었던 진리가 살아납니다. 바로 그런 상태가 무덤을 막았던 돌이 옮겨지는 것이고, 주님이 무덤에서 살아나시는 것입니다.

 

무덤을 막았던 돌이 옮겨진 걸 보고 들어갔는데 정작 있어야 할 주님의 시신이 보이지 않자 여자들은 어쩔 줄을 몰라 합니다. 그 모습, 그 상황을 4절과 5절에선 이렇게 전합니다.

 

4이로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5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6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한글 성경에는 여자들이 근심했다고 하지만, 영어 성경에는 perplex, 즉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일종의 공황 상태에 빠졌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부활하셨는데 왜 여인들은 기뻐하는 대신 공황 상태에 빠졌을까요? 첫째는, 신앙인의 내면에서 진리가 살아나려면 자아에 속한 게 죽어야 하는데, 그때 모든 걸 잃은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진리가 살아났다 해도 처음 한동안은 진리가 나를 주장한다는 걸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 앞에 바로 나타나시지 않은 것과 같은 일일 것입니다. 한마디로, 내면에서 진리가 살아날 때, 신앙인들은 역설적으로 어디에도 기댈 진리가 없는 것 같은 상실감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인들이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것입니다.

 

※ 제가 그랬습니다. 저는 소위 모태신앙이라는 사람으로, 유아세례라는 것을 받은, 정말 나이 육십 되기까지 태어나 교회 밖 세상에 있어 본 적이 없는, 모두가 익히 알고 있는 평범한 기독교인이었습니다만, 그러나 칠 년 전 처음 스베덴보리를 접하여 이 새로운 계시를 받아들일 땐 정말이지 얼마나 두려웠는지 모릅니다. 지난 세월 저를 떠받치고 있던 모든 신앙과 종교적 신념이 한꺼번에 떠나가는 듯했기 때문입니다. 그건 마치 고3 때 갑자기 어머니를 교통사고로 잃었던 트라우마에 버금가는 일이었습니다.

 

※ 위 교회 밖 세상에 있어 본 적이 없는’이라는 말은, 죄를 지어본 적이 없다는 말이 절대 아닙니다. ㅎㅎㅎ

 

그때 그들 곁에 빛나는 옷을 입은 두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두 사람은 누굴까요? 천사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살아있는 진리이신 주님이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입은 빛나는 옷은 부활하신 주님에게서 나오는 가장 밝고 환한, 완전한 진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두 사람이 나타났다고 했을까요? 부활하신 주님에게서 나오는 진리는 선만 있고 진리는 없거나, 진리만 있고 선은 없는 그런 진리가 아니라, 선과 진리가 함께 있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천사가 여인들에게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여인들은 전에 주님이 고난을 받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실 거라는 말씀을 들은 적이 있으나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는 믿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신앙이 아직 자연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직접 눈으로 봐야만 믿는 그런 신앙이었던 것입니다.

 

천사들을 보고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댑니다. 주님이 나타나셨을 때, 사람들이 두려워 떨거나 죽은 자처럼 되었다는 것은 말씀의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계시록을 쓴 요한도 주님의 발 앞에 죽은 자처럼 되었다고 했습니다. 다니엘도 그랬지요. 신앙인들이 그렇게 두려워하는 것은, 내면에서 어떤 영적 변화가 일어날 때 느끼는 불안과 공포를 의미합니다. 주님의 신성이 사람 안으로 임하실 때 인간이 불안과 두려움을 느끼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자들이 느끼는 두려움은 일종의 경건한 두려움입니다. 그러면 여자들에게 일어난 내면의 변화란 어떤 것입니까? 그에게서 죽은 진리가 살아나는 것이며, 그로 인해 자연적 신앙이 영적 신앙으로 한 단계 올라서는 것입니다.

 

7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 8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9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에게 알리니 10(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그들과 함께 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알리니라) 11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

 

여자들이 마침내 주님이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것을 기억해 내고는 무덤에서 돌아가 그 모든 것을 사도들에게 알렸습니다. 무덤은 속뜻으로는 그들이 죽은 진리를 만나던 곳이고, 필요할 때마다 꺼내 사용하던 곳입니다. 이를테면 진리의 지식이 보관된 내면의 기억 장소와 같은 곳이죠. 그러나 진리가 완전히 살아날 때, 이제는 애써 그곳을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살아있는 진리, 살아계신 주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면서 그때그때 필요한 진리를 공급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요14:26)

 

※ 이것이 퍼셉션(perception)입니다. 천사들이 천국에서 주님과 커뮤니케이션하는 방식인데, 그 내면이 열려있던 태고교회도 바로 지상에서 이 방식으로 주님의 인도를 받았습니다. 즉 주님의 뜻과 인도하심을 공부를 통해서, 학습해서 아는 게 아닌, 내가 묻거나 무슨 의문을 품을 때 내적으로 바로 답이 오는 그런 것입니다. 가령, 창세기에 나오는

 

8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9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창3:8-9)

 

와 같은 커뮤니케이션이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의 딕테이트(dictate)를 나의 내면, 곧 내 영이 듣는, 가장 고급하고 고차원적인 커뮤니케이션입니다. //

 

그것이 부활하신 주님이 주시는 은혜입니다. 주님이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들은 사도들은 여자들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 역시 아직은 자연적 신앙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을 직접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봐야만 믿는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베드로가 주님의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12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부려 들여다보니 세마포만 보이는지라 그 된 일을 놀랍게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

 

베드로란 이름의 속뜻은 진리에 대한 순종입니다. 실제로 베드로의 성품이 그랬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그는 급히 무덤으로 달려가 몸을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봤습니다. 무덤으로 달려가는 것은 진리에 대한 뜨거운 애정을 뜻합니다. 그리고 몸을 구부려 들여다보는 건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 안에 있는 진리들을 돌아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리, 또는 말씀을 대할 때는 언제나 몸을 낮춰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진리가 보이고, 또한 죽었던 진리가 살아나는 것이 보입니다.

 

그렇다면 그때 베드로의 눈에 들어온 것은 뭘까요? 주님의 시신이 아니라 세마포였습니다. 세마포의 속뜻은 주님이 주시는 내적 진리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본 진리는 이전에 알던, 생명 없는 지식이 아니라 내적 진리였던 것입니다. 그제서야 그는 자신에게 있던 진리들이 살아났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내면에서 진리가 살아나는 건 눈먼 자가 눈을 뜨는 것 이상의 기적입니다. 흔히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진리가 살아나면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던 기질이 바뀝니다. 그것은 주님만이 이루실 수 있는 기적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 모든 일을 놀랍게 여겼다고 합니다. 놀랍게 여겼다는 건 기적과 같은 일이라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에서 여자들은 향품으로 표상되는 자연적 진리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시작합니다. 자연적 진리란 말씀의 문자로 표현된 진리이며, 내적 진리를 담기 위한 그릇 역할을 하는 진리입니다. 그래서 그 자체로는 아직 완전한 진리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자연적 진리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더라도 점차 그 안에 내적 진리를 담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는 까닭은 내적 진리가 자연적 그릇인 글자 안에 담길 때, 온전하고 힘 있는 진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지옥을 이기신 주님의 능력이 그 안에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도 세상에 계실 때 완전하지 않은 진리의 상태에서 지옥의 시험을 완전히 이기시고, 신성한 진리(Divine Truth) 자체가 되셨습니다. 만약 주님이 처음부터 신성한 진리 자체이셨다면, 주님은 시험을 당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피조물인 지옥이 감히 창조주이신 주님을 대적하거나 도발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에는 시험을 당하는 주님의 진리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지 않고, 인자, 곧 사람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완전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께 기대어 자신에게 있는 진리를 매일 살려야 하고, 더 내적인 진리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온전히 거듭날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은혜가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성도, 그리고 이들과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 다음 주일(22일)은 성탄 주일로, 그리고 성탄절인 25일(수)은 성탄 예배로 드립니다. 시간은 오전 10시 반입니다. 그리고 올해의 마지막 주일인 29일은 송년 예배로, 2025년 첫 주일인 1월 5일은 신년 예배로 드립니다. 이 송년 예배와 신년 예배는 각각 성찬이 있으며, 올해부터는 밤늦은 자정에 드리는 송구영신 예배를 쉬겠습니다. 나중에 교회 규모가 커지고, 또 특별히 많은 요청이 있으면, 그때 가서 재개를 고려하겠습니다. 누가복음 이 24장 속뜻 강해는 2025년 1월 둘째 주일인 1월 12일 주일부터 계속되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호6:2)

 

아멘

 

2023-04-09(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12-15(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4-12-15(D1)-주일예배(2574, 눅24,1-12),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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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4-12-15(D1)-주일예배(2574, 눅24,1-12),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pdf
0.24M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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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 (마19:12)

 

천국의 결혼(the heavenly marriage)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고자’(鼓子, eunuch)라 합니다. ‘어머니의 태로부터 된’(born from the womb) 고자들은 천적 천사들(the celestial angels)을 닮았고, ‘사람이 만든’(made of men) 고자들은 영적 천사들(the spiritual angels)과 같으며, ‘스스로 된’(made so by themselves) 고자들은 천사 같은 영들(angelic spirits)과 같은데, 그 행위가 체어리티(charity)로라기보다는 순종(obedience)으로가 더 두드러진 사람들입니다. (AC.394)

 

천국의 결혼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고자’인 이유는, 영적 고자, 즉 이들은 천국과 결혼 상태에 있기 위해, 지상에서 자칫 있을 수 있는 성적(性的) 문란의 악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고, 필요 이상의 성적 호기심으로부터 물러나 다른 사람들이 볼 때, 혹시 저 사람, 성적으로 무슨 문제 있는 거 아냐? 할 정도로 자기 자신을 지킨, 그러니까 성적으로 건강한 금욕을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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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한민국 상황에서 천사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2024/12/8)

 

다음은 책, ‘천국과 지옥’ 26장, ‘천국 천사들의 능력’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영계에서의 천사들의 능력은 너무도 커서 그에 대해 내가 목격한 것을 모두 얘기한다면 믿기 어려울 것이다. 영계에서 신적 질서에 어긋나 제거해야 하는 어떤 장애물이든지 천사들은 단지 한 번의 의도함과 응시함으로(merely by an effort of the will and a look) 쫓아내거나 전복한다. 나는 악인들이 점령한 산들이 그렇게 내던져지고 파괴되는 것과, 때로는 지진이 난 듯 끝에서 끝까지 흔들리는 것을 보았으며, 암벽이 밑바닥까지 갈라져 그 위에 있던 악인들을 삼키는 것도 보았다. 또 나는 천사들이 수십만의 악한 영들을 흩어 지옥으로 내던져지는 것도 보았다. 아무리 숫자가 많아도 악한 영들은 천사를 당할 수 없고, 술책과 교활함과 무리지음도 허사가 된다. 천사들은 그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즉시 쫓아버리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바빌론의 멸망을 다룬 책에서 자세히 다루었다.) 영계에서 천사들은 이와 같은 능력이 있다. 성서를 보면 천사들은 허락되었을 때는 자연계에서도 이런 힘을 나타낸 것을 알 수 있다. 군대 전체를 쳐부수거나 전염병을 내려 칠만 명을 멸했다고 한 구절 등이 그 예다.

 

이 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와서 앗수르 진영에서 군사 십팔만 오천 명을 친지라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보니 다 송장이 되었더라 (왕하19:35)

 

15이에 여호와께서 그 아침부터 정하신 때까지 전염병을 이스라엘에게 내리시니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백성의 죽은 자가 칠만 명이라 16천사가 예루살렘을 향하여 그의 손을 들어 멸하려 하더니 여호와께서 이 재앙 내리심을 뉘우치사 백성을 멸하는 천사에게 이르시되 족하다 이제는 네 손을 거두라 하시니 여호와의 사자가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 곁에 있는지라 (삼하24:15-16)

 

이 외에 다른 구절들도 있다. 천사들에게 이런 능력이 있기 때문에, 그들은 ‘능력’이라고 불린다.

 

능력이 있어 여호와의 말씀을 행하며 그의 말씀의 소리를 듣는 여호와의 천사들이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시103:20) (HH.229, 김은경 역)

 

 

마음 같아서는 주님이 천사들을 보내어 대한민국의 현 상황 역시 저렇게 수습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절대로 어느 한 개인도 그의 속 사람 역량을 무시, 강제로 그를 천국으로 인도하시거나 지옥으로 던지시거나 하지 않으십니다. 그에게 돕는 천사들을 통해 끝까지 빛을 비추시지만, 결국 자신들의 영원한 운명은 본인들이 선택하는 것이며, 결국 모든 벌은 각 개인이 스스로 자초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사랑 그 자체이셔서 결코 누구를 벌주고 처단하는 신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은 ‘보응의 법칙(the law of retaliation), 즉 심은 대로 거두고, 행한 대로 갚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돌아감의 법칙’ 대로입니다.

 

지금 대한민국의 현 상황에서 주님은 천사들을 통해 남아 있는 리메인스(remains)들, 곧 주님의 자녀들을 곁에서 지켜 보호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계십니다. 마치 대홍수 때 노아라는 리메인스를 지키셨던 것처럼, 그리고 모세 때, 여호와의 편에 섰던 갈렙과 여호수아, 그리고 레위 자손처럼, 또한 주님 승천 후, 초대교회를 지켜 보호하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애쓰시는 모든 분, 곧 주님 편에 서고자 몸부림치는 의로운 국회의원들과 광화문 모든 어르신, 그리고 보수 우파 유튜버들의 영육 간 강건을 허락, 지켜주시고, 저들에게 주님의 빛을 비추시되 일곱 배로 비추사 저들로 오직 주님의 능력을 힘입어 이 의로운 싸움을 싸울 수 있게 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또한 이럴 때일수록 주님을 향해 심령을 활짝 열어 주께서 내게 붙이신 천사들의 인도를 받아 절대 흔들리지 말고 주님 진리의 빛 안에 머물러야 하겠습니다. 부화뇌동하는 대신 말입니다.

 

※ 모든 사람한테는 지옥에서 온 악한 영 둘, 그리고 주님이 보내신 천사 둘이 와있습니다. 왜 둘이냐면, 사람은 의지(will)와 이해하는 능력(understanding)이 있어 사람인데, 이 두 가지가 주님의 신성인 선(Divine Good)과 진리(Divine Truth)로 연결되며, 또 두 종류의 천국과 두 종류의 지옥으로도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오, 주님, 주님을 영원히 사랑합니다. 주님이 저 이재명 같은 자와 그 무리들을 당장 오늘밤 데려가지 않으심도 주님은 신이시요, 저들은 인간, 곧 한 줌 호흡이요, 해 뜨면 사라질 아침 안개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국회에 주님의 빛을 일곱 배나 더하사 국회의원들의 사리 판단을 흐리게 하는 악한 영들의 활동이 망하게 하시고, 이쪽이든 저쪽이든 그 가운데 주께 속한 자들이 정신들을 차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 같은 일개 필부도 분명히 아는 옳고 그름을 저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지옥조차 그 빽빽한 구름을 뚫고 천국의 빛이 한 줄기 들어가면 그 순간 지옥 그 악한 영들이 살짝 정신들이 돌아온다 하니 주님, 국회를, 그리고 모든 언론, 방송, 인터넷 등을 천국 주님의 빛으로 환히 비추사 다들 좀 제 정신들을 차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이 나라의 쓰임새가 아직 남았으면 부디 이 나라가 문재인에 이어 다시 이재명과 그 무리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지켜주시옵소서. 주 예수님 이름 받들어 간절히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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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마대 요셉, 세마포, 무덤, 향품과 향유’의 속뜻

 

 

50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51(그들의 결의와 행사에 찬성하지 아니한 자라) 그는 유대인의 동네 아리마대 사람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52그가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여 53이를 내려 세마포로 싸고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판 무덤에 넣어 두니 54이날은 준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되었더라 55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이 뒤를 따라 그 무덤과 그의 시체를 어떻게 두었는지를 보고 56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준비하더라 계명을 따라 안식일에 쉬더라 (눅23:50-56)

 

 

주님이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신 후, 주님의 시신을 거두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주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요? 스승의 참혹한 죽음을 보고 놀라 어딘가에 숨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때 공회의 의원이었던 요셉이란 사람이 나타나 빌라도에게 주님의 시신을 달라 요청했습니다. 요셉에 대해 본문 50절과 5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50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51(그들의 결의와 행사에 찬성하지 아니한 자라) 그는 유대인의 동네 아리마대 사람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주님이 계시던 시대는 로마가 세계를 지배하던 때였습니다. 로마인들은 점령지마다 자치정부를 두고, 그들로 하여금 본국에서 보낸 총독의 감독을 받게 하는 방법으로 세상을 지배했습니다. 그러니까 요셉이 의원으로 있는 산헤드린이라 하는 공회는 이를테면 유대의 자치정부 같은 것이었습니다. 당시 공회의 의장은 대제사장 가야바였고, 그 아래 바리새인과 서기관 같은 율법에 밝은 엘리트들 70명이 회원으로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요셉이었습니다.

 

※ ‘산헤드린’(‘סַנְהֶדְרִין’)이라는 말은 헬라어 ‘수네드리온’(συνέδριον, 모여 앉다)에서 나온 히브리 차용어(loan word)입니다.

 

※ 산헤드린의 의장은 대제사장이 맡습니다. 대제사장은 종신직이며, 유고 시 그의 직계가 직무를 자동 승계하는데, 이들의 권력이 너무 커지는 걸 막기 위해 로마는 대제사장의 임면(任免)권을 파견된 총독에게 주었습니다. 복음서에 ‘대제사장들’이라는 표현이 나오는 것은,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이 직이 종신직이어서 한번 대제사장 된 사람을 그가 살아있는 동안은 물릴 수가 없었던 반면, 로마는 저들을 통제하느라 그때그때 파면 및 임명을 새로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 즉 오늘 본문의 배경 된 당시는 로마가 임명한 대제사장 가야바와 유대인들이 인정하는 종신직 대제사장 안나스가 함께 있었습니다. 가야바는 안나스의 사위입니다. 가야바는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볼 때는 일종의 허수아비였던 것이지요.

 

요셉 말고도 공회 의원 중에서 주님을 지지했던 사람은 저 유명한 니고데모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니고데모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 않으나 복음서의 다른 곳에는 주님의 장례를 위해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준비한 사람이 바로 니고데모였다고 전합니다.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 (요19:39)

 

본문에는 공회에서 주님을 죽이기로 결의했을 때, 요셉은 찬성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요셉이란 이름은 속뜻으로는 영적인 사람, 즉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을 뜻하는데, 그것이 바로 요셉의 성품이었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에 의해 영의 눈이 열려 진리와 거짓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요셉은 일찍부터 주님이 선과 진리이신 분이라는 걸 알고 흠모했던 것 같습니다. 요셉을 가리켜 선하고 의로운 자,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선과 진리이신 주님이 다스리시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린다는 것은 주님이 온전히 자기 자신을 다스리길 바란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통치를 바라는 것처럼 선하고 의로운 바람, 사모함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요셉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주님을 반대할 때도 두려움 없이 주님 편에 섰고, 주님이 운명하신 후에는 용감하게 빌라도에게 가서 주님의 시신을 달라한 것입니다. 52절과 53절에는 요셉이 주님의 시신을 수습하여 매장하는 모습을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습니다.

 

52그가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여 53이를 내려 세마포로 싸고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판 무덤에 넣어 두니

 

말씀에서 무덤이나 매장은 속뜻으로는 부활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요셉이 주님의 시신을 세마포로 싸서 무덤에 안치하는 모든 과정은 주님의 편에서는 부활의 마지막 과정, 즉 어머니로부터 받은 인성(human), 유전 악이 묻어 있는 인성을 완전히 벗고, 아버지가 주시는 신성한 인성(Divine Human)으로 갈아입는 마지막 과정을 의미합니다.

 

※ 유대 산지는 대부분 화강암 지대라 조금만 파도 바로 암석이 나와 우리나라처럼 봉분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굴을 파 시신을 보관하는 형태로 매장을 하는데, 부자들은 그 규모가 커 바위 안에 생전에 살던 집 모양을 그대로 구현, 방을 여러 개 만들 정도였습니다. 이런 방식의 매장은 시간도 오래 걸리고, 무엇보다도 큰돈이 들어 일반 백성은 주로 평토장을 해야 했습니다. 평토장(平土葬)이란 한 30센티 정도만 파 관도 없이 시신을 묻고는 대충 흙으로 메워 평평하게 하는 매장을 말합니다. ‘바위에 판 무덤’이라는 낯선 표현엔 이런 배경이 있습니다.

 

그러면 요셉과 같은 신앙인의 편에서는 어떤 의미일까요? 신앙인들이 생명 없는 말씀, 즉 지식으로만 받아들인 말씀을 살아있는 진리, 또는 살아있는 신앙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볼 때, 요셉이 빌라도에게 주님의 시신을 달라 하는 건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 참된 진리의 지식을 구하는 모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요셉이 달라 하는 주님의 시신은 신앙인들이 처음 진리를 배울 때의 아직 생명 없는 말씀 지식, 즉 말씀을 일단 지식으로 받아들이는 걸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말씀 자체이신 반면, 주님의 몸은 말씀의 외관인 문자적 의미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말씀으로부터 진리를 처음 배울 때, 그것들은 일단 기억이라는 창고에 보관됩니다. 그때의 진리의 지식은 마치 서가에 꽂힌 책처럼 아직 생명 없는 상태입니다. 그러다가 그것을 꺼내 읽으며, 말씀의 의미를 깨닫고, 깨달은 그것을 실천, 삶으로 옮기려 할 때, 그때 그 지식은 비로소 살아나기 시작합니다. 비로소 생기가 돈다 할까요? 우리 삶에 영향을 주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좋지 않은 버릇을 끊으려 할 때, 또는 하기 어려운 선한 일을 하려 할 때, 말씀의 능력이 우리를 돕는 것입니다. 나는 그 악습, 그 버릇을 계속하고 싶은데 주님은 그걸 원치 않으심을 알고는, 사랑하는 주님을 위하여 기꺼이 그걸 포기하는 것, 그것이 죽었던 말씀이 살아나는 것이고, 오늘 말씀에서는 요셉의 무덤에서 주님의 시신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요14:21)

 

그렇다면 요셉은 왜 이방인인 빌라도에게서 말씀의 지식을 얻으려 했을까요? 교회의 마지막 때는 부패한 교회의 눈으로는 진리를 볼 수 없고, 교회 밖 사람의 단순한 눈을 통해서만 참된 진리가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와 관련해 말씀에는 교회 밖의 사람인 빌라도가 주님을 보고 바로 진리로 인정한 것을 여러 곳에서 증언합니다.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무리에게 이르되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하니 (눅23:4)

 

19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20예수께서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 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되었더라 21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라 쓰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 하니 22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쓸 것을 썼다 하니라 (요19:19-22)

 

이 역시 주님이 진정한 진리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진리는 스스로 많이 안다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습니다. 진리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이방인들처럼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봐야 보입니다. 그런 까닭에 교회 안의 사람인 요셉은 교회 밖의 사람인 빌라도에게 가서 말씀의 지식을 구한 것입니다.

 

요셉이 주님의 시신을 세마포로 싸서 바위에 판 자기 무덤에 넣었습니다. 세마포는 주님에게서 오는 내적 진리를 뜻합니다. 그것은 사랑이 있는 진리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몸을 세마포로 쌌다는 건 신앙인들이 내적 진리를 가지고 말씀을 이해하는 것이고, 그렇게 해서 말씀을 조금씩 살리는 행위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시신을 바위에 판 자기 무덤에 넣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여기서 바위는 진리를 뜻하고, 팠다는 것은 가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무덤은 죽은 진리가 살아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진리를 처음 배울 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자기 나름대로 이해한 어떤 모양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다 보면 인간의 생각이 섞일 때가 있고, 때로는 본래의 의미를 앞질러 가기도 합니다. 처음에는 모두 그렇게 진리를 받아들입니다. 그것이 돌을 파낸 자기의 무덤에 주님의 시신을 모시는 것입니다. 요셉은 그런 방법으로 참된 말씀을 받아들여 자신의 신앙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요셉 말고도 주님을 받아들인 사람이 또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에 대해 본문 55절은,

 

55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이 뒤를 따라 그 무덤과 그의 시체를 어떻게 두었는지를 보고

 

말씀에서 갈릴리는 이방인을 뜻합니다. 그리고 여자들은 교회를 뜻하지만, 여기서는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갈릴리에서 주님을 따라온 여자들은 교회 밖의 이방인들 가운데 특히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고, 그러므로 참된 진리를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무덤과 주님의 시신을 어떻게 두었는지 보았다고 합니다. 그것은 참된 진리를 받아들인 요셉의 삶에서 죽은 말씀이 어떻게 살아있는 말씀으로 변하는지를 지켜봤다는 뜻입니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들 안에서 진리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나는지 서로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아름다운 꽃이 피어나는 모습과 같은 것이고, 바람이 불 때마다 코끝을 스치는 향기와 같은 것입니다. 갈릴리에서 온 여자들은 요셉에게서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56절에서는 여자들의 그 후의 모습을 이렇게 말합니다.

 

56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준비하더라 계명을 따라 안식일에 쉬더라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삶 가운데서 나타나는 영적인 변화들을 서로 느끼고, 또 자극을 받습니다. 그런 의미에 여자들이 돌아갔다는 것은 요셉에게서 진리가 살아나는 모습을 보고, 여자들이 자신을 돌아봤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여자들은 왜 향품과 향유를 준비했을까요? 그들도 무덤을 찾아가 주님의 시신에 향품과 향유를 바르기 위해서입니다. 향품과 향유를 죽은 자의 시신에 바르는 것은 고대로부터의 관습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향품과 향유는 진리의 가장 바깥에 있는 자연적 진리를 뜻하는데 그것은 그 안쪽에 있는 내적 진리를 마치 방부제처럼 보호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고대인들은 사람이 죽었을 때, 향품과 향유를 시신에 바름으로써 그가 생전에 획득한 선과 진리를 훼손됨 없이 영계에까지 가지고 가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래야 천국에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자들이 주님의 시신에 향품을 바르려 했던 이유는 뭘까요? 말씀의 지식을 살리기 위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말씀에서 배운 진리를 가지고 자연적이고 감각적인 욕구들을 다스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향품과 향유는 신앙인의 삶과 가장 맞닿아 있는 자연적 진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인들은 향품과 향유를 준비해 다시 주님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 갈 생각을 합니다.

 

※ 현실적으로 유대인의 유월절은 안식일 전날 해질녘인 오후 5시부터 시작됩니다. 주님은 오후 3시에 운명하셨으므로 두 시간 만에 모든 장례를 마치느라 다들 경황이 없었을 것입니다. 빌라도에게 시신 처리에 대한 승낙도 받아야지, 사람들을 시켜 나무에서 내려 시신 수습, 곧 세마포로 싸야지, 얼른 무덤에 넣어 두어야지... 무슨 제대로 된 염할 시간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전통적으로 시신에 대한 염, 즉 시신에 향품과 향유 바르는 일은 여자들이 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여자들은 무덤의 위치와 시신 상태를 봐두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안식일 후 새벽같이 와서 오늘 미처 하지 못한 이 일을 그 어두운 무덤 안에서 더듬거려가면서라도 할 수 있으려면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새 교회 가르침 ‘천국의 비밀’ 10252:7항은 주님의 부활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은 여느 사람과는 달리 세상에서 입으셨던 몸 그대로 부활하셨다. 왜냐하면 무덤에 아무 것도 남기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은 당신을 보고 영을 본 것으로 생각한 제자들에게 이르시길, ‘어찌하여 두려워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 (천국의 비밀 10252:7, 이순철 역) It is known that the Lord rose again with the whole body which he had in the world, differently from other men, for he left nothing in the sepulcher; and therefore he also said to the disciples, who when they saw the Lord supposed that they saw a spirit, “Why are ye troubled? Behold my hands and my feet, touch me and see; for a spirit hath not flesh and bones as ye see me have” (Luke 24:38, 39). (AC.10251:7)

 

주님은 보이지 않는 영으로 살아나신 것이 아니라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 볼 수 있는 신성한 인간으로 살아나셨습니다. 그 살아나신 주님, 살아있는 말씀이 거듭나는 사람들의 삶 가운데 매일 나타나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서로의 모습을 보며, 더 많은 사랑과 기쁨을 느낄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요셉이 세마포로 주님의 시신을 싸는 것처럼, 또는 여인들이 향품과 향유를 준비해 주님의 시신에 바르는 것과 같은 노력과 정성을 기울여야 합니다. 세마포로 주님의 시신을 싸는 것은 내적 진리를 가지고 말씀을 이해하고 그것을 삶에 적용함으로써 말씀을 살려내는 것입니다. 향품과 향유를 주님의 시신에 바르는 것은 자연적 진리를 가지고 육신의 욕구들을 다스림으로써 말씀을 살려내는 것입니다. 그런 노력이 없다면 우리에게 있는 말씀은 살아나지 못하고 언제까지나 무덤 속에 갇혀 있을 것입니다.

 

요셉과 갈릴리에서부터 주님을 따라온 여인들에게 내려졌던 은혜가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과 함께 하시길 기도합니다.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신대 (요18:37)

 

아멘

 

2023-04-02(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12-08(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4-12-08(D1)-주일예배(2573, 눅23,50-56), ‘아리마대 요셉, 세마포, 무덤, 향품과 향유’의 속뜻.pdf
0.46MB
축도.2024-12-08(D1)-주일예배(2573, 눅23,50-56), ‘아리마대 요셉, 세마포, 무덤, 향품과 향유’의 속뜻.pdf
0.22MB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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