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4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5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3-5)
말씀에 나오는 숫자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 겉뜻들과는 달리 어떤 속뜻들이 있는데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가령, 3이라는 숫자, 7이라는 숫자, 10이라는 숫자, 12라든지, 40이라든지, 100이라든지, 더 나아가 계시록에 나오는 1,000, 144,000 등... 1에서 9까지의 숫자들의 의미는 두 자릿수, 세 자릿수 등 복합수가 되면서 그 의미가 확장, 예를 들면, 책 한 권 분량의 의미가 어떤 큰 숫자 하나로 표현될 정도로 깊은 의미들을 지니게 됩니다. 천사들한테는 말이죠.
그리고 여기 우리가 사는 이 시공간의 나라와는 달리 천국은 상태와 그 상태변화의 나라이기 때문에, 천국에서는 저 숫자들 역시 어떤 상태와 그 변화를 나타내는 쓰임새를 가지며, 그래서 말씀 역시 천사들은 그렇게 이해하며 읽는데요,
그러니까 이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의 의미는, 아담이라는 첫 번째 태고교회에 ‘구백삼십’(930)으로 표현되는 어떤 수많은 상태와 그 변화가 있었으며, 그후 이 교회의 퍼셉션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는 의미로 읽으시면 되겠습니다. 이 퍼셉션으로 늘 주님과 연결된 상태가 살아있는 상태인데, 그러므로 교회에 이 퍼셉션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건 곧 그 교회는 죽었다, 그 교회의 쓰임새가 다했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참고로, ‘퍼셉션’(perception)이란 천국에서 주님과 천사들 간에 있는 커뮤니케이션 방식으로, 주님으로부터 오는 어떤 내적 음성(an internal dictate)을 지각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창3:8) 같은 것이지요. 이런 방식의 커뮤니케이션이 아직까진 그래도 존재했던 시기를 태고교회(the most ancient church)라 하며,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새로운 방식이 시작된 때를 고대교회(the ancient church)라 합니다. 새로운 방식은 ‘양심’(conscience)입니다. 즉 노아의 홍수를 기점으로 그 이후 사람들은 이전 선조들이 누렸던 방식을 잃어버리고, 새로운,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저급한 방식으로 주님과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도 그 내면이 열린 사람들, 즉 삶이 받쳐주는 신앙인들은 이 퍼셉션으로 주님과 커뮤니케이션을 합니다. 그리고 주님과 커뮤니케이션을 한다는 것은, 특별히 어디 가서 누구에게 학습하지 않고도 지금 이 선과 진리가 주님으로 말미암았는지 여부를 주님으로 말미암아 안다는 것입니다. 주님 말씀하신,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요10:27)처럼 말입니다.
이 ‘구백삼십’을 비롯, 노아의 홍수 전까지 존재했던 태고교회 전체 기간이 실제로, 그러니까 지구 나이로 얼마만큼 존속했는지는 모릅니다. 지구의 나이가 45, 6억 년이나 되고, 그 사이 오늘날 고고학으로는 도저히 설명 불가한 소위 오파츠(Out-of-place artifacts, OOPARTS)라는 것들이 발견되는 걸 보면, 우리가 알 수 없는, 그리고 주님도 굳이 우리에게 자세히 알려주시지는 않는, 그런 어떤 장구한 세월이지 않을까 추측만 할 뿐입니다.
첫 번째 태고교회인 아담은 그동안 지상에 존재했던 모든 교회 중 주님이가장 사랑하신 교회였습니다. 그러니까 천적(celestial) 교회, 천적 인간이었기 때문이지요. 창세기 2장 3절에 나오는 ‘일곱째 날’이 바로 이 교회입니다. 반면, 창5에 쭉 나열되는,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 및 므두셀라 등 이후 노아로 연결되는 교회들은, 그러나 후대로 갈수록 점점 황폐해져서 결국 대홍수, 노아의 홍수로 표현되는 첫 번째 종말을 맞이하게 되는 교회들입니다. 교회가 황폐해진다는 건, 교회 안에 주님의 신성, 곧 주님으로 말미암은 선과 진리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4:15)
창세기 4장을 보면 가인은 자기 제사를 여호와께서 받지 않으시자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합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그 이유를 말씀하셨으나 결국 그는 들에 있을 때 아우 아벨을 쳐죽이지요. 이 정도로도 그의 악은 충분한데 심지어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하시는 여호와 앞에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 대답하는 등 정말 뻔뻔하기까지 합니다.
그랬던 그가, 여호와의 설명, 곧 그가 자초한, 앞으로 전개될 삶의 무게 앞에 절망하며,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하자 여호와께서는 ‘네가 그러고도 살기를 바라느냐?’ 하시는 대신, 오히려 그에게 표를 주시며, 사람들이 그를 건드리지 못하도록 보호하십니다.
여러분, 이 부분이 이해가 되십니까?
다음은 말씀을 속뜻, 즉 내적 의미로 읽는 천사들이 이해하는 내용입니다. 천사들은 내적 존재여서 이렇게 밖에는 이해를 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아벨은 체어리티(charity, 仁愛, 이웃 사랑) 신앙, 가인은 체어리티 없는 신앙(faith without charity)을 말합니다. 가인의 제사는 체어리티 없는 신앙으로 드리는 예배를 말하며, 그래서 주님이 결코 받으실 수 없으셨던 겁니다.
하지만 주님은 인류의 역사는 결국 이 가인의 역사로 흐를 걸 아시고는 이 가인이라는 신앙을 통해서 아벨이라는 신앙을 일으키실 것을 섭리하셨으며, 그래서 이 가인 신앙을 보호하기로 하시고, 그래서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즉 이 신앙을 건드리면 그걸 신성모독(神性冒瀆, sacrilege)으로 보겠다 하신 것입니다.
타인의 신앙이 나와 다르다 하여 함부로 말로, 행동으로 그의 신앙에 폭행을 가하면 안 되겠습니다. 그 역시 주님이 공을 들이시는 사람이며, 나만 가만히 있으면, 즉 훼방을 놓지 않으면, 그는 어쩌면 주님의 인도대로 체어리티의 사람, 아벨 신앙의 후손이 될 수도, 그러니까 지금은 신앙 따로, 사랑 따로의 신앙인이지만, 그의 안에 신앙심이라는 게 남아있기만 하면 주님은 그걸 가지고 일을 하실 수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창세기 1장부터 쭉 읽다 보면, 아직 지상에 사람은 가인까지 셋뿐인데, 아벨은 죽었으므로, 갑자기 가인의 입에서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하는 말이 나옵니다. 나중엔 놋 땅에 거주하며 아내까지 얻고 말입니다. 그러면, 이 사람들은 어디서 온 사람들인가요?
천사들은 창세기 11장 아브람 전까지는 그 등장인물들을 한 개인으로 보지 않고, 그 이름으로 부르던 교회로 봅니다. 다른 말로는 그 이름으로 부르던 신앙이나 교리로 보지요. 참고로 아브람 전까지는 실제 역사가 아니며, 그 전까지의 장구한 역사(※ 참고로, 저는 지질학적 지구 나이인 45, 6억 년을 받아들입니다)를 일종의 스토리처럼 엮은 것입니다. 아래 링크를 참조하세요.
그러므로 아담, 가인, 아벨 등은 모두 교회를 말합니다. 즉 아담이라는 태고교회(太古, the most ancient church)에서 두 종류의 신앙이 일어났는데, 그 하나가 가인이라는 신앙을 가진 교회, 다른 하나는 아벨이라는 신앙을 가진 교회라는 말입니다. 앞으로도 특별히 에벨(창11) 전까지 등장하는 인명(人名)들은 이렇게 이해하시면 됩니다.
63지키는 사람들이 예수를 희롱하고 때리며 64그의 눈을 가리고 물어 이르되 선지자 노릇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고 65이 외에도 많은 말로 욕하더라 (눅22:63-65)
영어 성경에는 주님의 눈을 가리는 게 아니라 얼굴을 가리고 때렸다고 되어 있습니다. 말씀에서 주님의 얼굴은 주님의 사랑과 자비를 나타냅니다. 그래서 민수기 6장에는 주님께서 아론에게 명하시길,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할 때는 다음과 같이 말하라고 하십니다. 즉
24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25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26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민6:24-26)
라고 말입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명령하신 이유는, 주님에게서 나오는 사랑과 자비는 모든 악과 거짓을 이기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주님의 얼굴을 가리고 때리는 것은, 타락한 교회들이 말씀을 왜곡, 말씀의 생명인 사랑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생겨난 교리가 바로 사랑 없는 믿음만의 교리, 오직 믿음의 교리입니다. (이상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님 설교에서 인용)
이 ‘오직 믿음’(Faith Alone) 교리는 대단히 위험합니다. 주님은 스베덴보리를 통해 계시록에 나오는 모든 심판의 대상이 모두 이 ‘오직 믿음’ 교리에 함몰된 교회임을 밝히고 계십니다. 저는 이 교리가 왜 이토록 위험한 교리일까 좀 생각해 봤는데요, 그것은... 천국은 속 사람의 상태로 가는 곳인데, 이 ‘오직 믿음’ 교리로는 이런 사실을 가볍게 여기게 되기 때문이 아닐까, 즉 평소 속 사람의 상태 관리에 소홀, 결국 구원받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 아닐까 한 적이 있습니다.
주님은 누가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17:21, 22)
즉, 우리 속 사람의 상태가 천국을 받을 수 있는 상태여야 한다는 것이며, 그러므로 살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속 사람의 상태 관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직 믿음’ 교리에 취해 속 사람의 상태에 소홀히 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받을 수 없어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무서운 얘깁니다.
참고로, 이 ‘오직 믿음’ 교리, 다른 말로 ‘이신칭의’(以信稱義)라 해도 될까요?, 이 교리의 출처는 로마서, 고린도후서, 갈라디아서, 빌립보서, 디모데전서 등 주로 사도들, 특히 바울의 서신들입니다만, 그러나 이들은 사실은 ‘말씀’(The Word)이 아닙니다. ‘말씀’은 오직 주님, 그러니까 사람이 아닌 신(神, The Divine)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 속뜻, 그러니까 내적 의미(다른 말로는 아르카나 Arcana 라틴)가 있어야만 말씀이기 때문이며, 신이 아닌 사람이 쓴 글에는 이게 없기 때문입니다. 자세한 건 아래 링크를 참조하세요.
63지키는 사람들이 예수를 희롱하고 때리며 64그의 눈을 가리고 물어 이르되 선지자 노릇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고 65이 외에도 많은 말로 욕하더라 (눅22:63-65)
아타나시우스 신조(the Athanasian Faith)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제작 연대는 분명하지 않지만, 사도신경, 니케아 신조와 함께 초대교회 3대 신경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이 신조의 주된 내용은 삼위일체와 성육신입니다. 스베덴보리(Emanuel Swendenborg, 1688-1772, 스웨덴)는 그의 유작, ‘계시록 해설’(Apocalypse Explained, 첫 라틴 출간 1785-1789, 쓰기는 1757, 계19:10에서 멈춤)에서 이 신조를 다루고 있는데, 아래 내용은 그중 어떤 게 ‘말씀을 더럽히는 것’인지 당시 종교, 특히 교황 교회(the papal church, 스베덴보리식 표현, the papal religion이라고도 함)의 부패상을 아래와 같이 적고 있습니다.
심지어 죽은 자의 뼈와 무덤에 거룩함이 있다는 것, 시체가 기적을 행한다는 것, 사람이 자신의 부를 우상이나 수도원에 성별(聖別)하지 않으면 나중에 연옥에서 고통을 당한다는 것, 천국과 지옥의 권세를 가졌으므로 사람이 신이라는 것even that there is holiness in the bones of the dead and in sepulchers, that carcasses perform miracles, that man will be tormented in purgatory if he does not consecrate his wealth to idols or to monasteries, that men are gods because heaven and hell are in their power
위 하나하나의 사례는 우리가 교회사를 통해 자세히 알 수 있듯 당시 아주 지독하게 부패한 교황 교회의 폐단들이며, 결국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된 사례들입니다.
위 본문은 또한 교회의 마지막 때, 타락한 교회의 사람들을 의미하기도 하는데요, 그러니까 말씀을 앞세우는 목적이 주님 사랑이 아닌, 저들 교황 교회들처럼 말씀을 그저 자기 사랑, 세상 사랑을 위한 수단과 도구로 삼는 일체의 종교적 행위가 곧 말씀을 더럽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 전체가 이런 건 아닙니다. 기독교 안에 정교회, 카톨릭, 개신교 (발생순) 등 여러 기독 신앙이 있는데, 그중 삶은 소홀히 하고, ‘오직 믿음’에 치우친 나머지 그 사고와 언행이 매우 세속화된 모든 교회를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오직 믿음’의 뿌리는 의외로 그 기원이 태초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표현만 마틴 루터 때 생겨났을 뿐, 그 본질은 아벨을 죽인 가인한테까지 올라갑니다. 아벨의 속뜻이 사랑과 신앙이 하나 된 교회, 곧 신앙고백이라면, 가인은 사랑 따로 신앙 따로의 교회요, 신앙고백이기 때문입니다.
63지키는 사람들이 예수를 희롱하고 때리며64그의 눈을 가리고 물어 이르되 선지자 노릇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고65이 외에도 많은 말로 욕하더라(눅22:63-65)
위 본문은, 겉뜻으로는 기록된 대로 이들이 주님을 괴롭히며 욕보이고 있는 것이지만, 속뜻으로는 말세에 타락한 교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The WORD)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상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님 설교에서 인용)
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럽힘’이라는 건 말씀에 손을 댄다는 것으로, 주님의 말씀에 사람이 무엇을 섞는 것, 곧 자의적으로 해석, 곡해, 왜곡하는 걸 말합니다. 말씀은 오직 말씀하신 분만이 푸실 수 있으며, 이를 계시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계시받은 자만이 풀 수 있으며, 이때에도 푼다고 하지 않고, 전달한다고 해야 합니다. 사람은 오직 전달만 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전달자는 자신의 상태를 순도 100%로 유지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절대로 결코 뭘 섞으면 안 됩니다.
63지키는 사람들이 예수를 희롱하고 때리며 64그의 눈을 가리고 물어 이르되 선지자 노릇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고 65이 외에도 많은 말로 욕하더라 66날이 새매 백성의 장로들 곧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모여서 예수를 그 공회로 끌어들여 67이르되 네가 그리스도이거든 우리에게 말하라 대답하시되 내가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할 것이요 68내가 물어도 너희가 대답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69그러나 이제부터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 하시니 70다 이르되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대답하시되 너희들이 내가 그라고 말하고 있느니라 71그들이 이르되 어찌 더 증거를 요구하리요 우리가 친히 그 입에서 들었노라 하더라 (눅22:63-71)
“인자”는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적 진리를 뜻하고, “권능의 우편에 앉는 것”은 주님의 전능하심을 뜻한다. 신적 선은 신적 진리를 통해 전능한 힘을 가지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그들이 보리라”고 말한 것은 주님이 세상에서 지옥을 완전히 이기시고 지옥의 모든 것과 천국의 모든 것을 당신의 질서 안에 두신 후, 신적 진리는 자체로 전능한 힘이 있음을 뜻한다. (천국의 비밀 9807:6, 이순철 역) I say unto you, Henceforth ye shall see the son of man sitting at the right hand of power, and coming upon the clouds of heaven (Matt. 26:64).From henceforth shall the son of man be sitting at the right hand of the power of God (Luke 22:69). “The son of man” denotes the Divine truth that proceeds from the Lord; “sitting at the right hand of power” denotes that he has omnipotence, for Divine good has omnipotence by means of Divine truth; its being said that “from henceforth they shall see it” signifies that Divine truth was in its omnipotence after the Lord in the world had conquered the hells, and had reduced all things therein and in the heavens into order, and that in this way those could be saved who would receive him in faith and love (see n. 9715). (AC.9807:6, 출28:1, ‘그의 아들들’에 관한 주석에서)
오늘 말씀에는 주님께서 ‘지키는 사람들’에게 어떤 수모를 겪으셨으며, 주님은 어떻게 그 모든 일을 견디셨는지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말씀의 문자적 의미로 보면, 이 ‘지키는 사람들’이 주님을 괴롭히며 욕보이고 있지만, 속뜻으로는 말세에 타락한 교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럽히는 것이고, 그리하여 그들 스스로 지옥으로 떨어지는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이제 그것에 대해 하나하나 살펴보겠습니다.
※ 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럽힌다’는 건 말씀에 손을 댄다는 것으로, 주님의 말씀에 사람이 무엇을 섞는 것, 곧 자의적으로 해석, 곡해, 왜곡하는 걸 말합니다. 말씀은 오직 말씀하신 분만이 푸실 수 있으며, 이를 계시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계시받은 자만이 풀 수 있으며, 이때에도 푼다고 하지 않고, 전달한다고 해야 합니다. 사람은 오직 전달만 할 수 있을 뿐입니다.
먼저 본문 63절입니다.
63지키는 사람들이 예수를 희롱하고 때리며
여기서 지키는 사람들은 주님 당시 유대교회 사람들이고요,
※ 당시 예루살렘에는 두 종류의 군인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본래 성전 경비대, 다른 하나는 식민지를 관할, 통치하는 로마 군인들이었습니다. 지금 장면은 아직 빌라도를 만나기 전이므로 유대인들로 구성된 성전 경비대이지 싶습니다.
또한 교회의 마지막 때, 타락한 교회의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교회의 마지막 때에는 유대교회 사람들이 주님을 함부로 대한 것처럼 교회들이 신성한 말씀을 마음대로 해석하여 더럽힙니다. 그것이 군사들이 예수를 희롱하고 때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은 곧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말씀을 더럽히는 이유는, 말씀을 통해 주님을 만나려고 하지 않고, 세상 욕심을 채우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 욕심 때문에 말씀이 오염되고 변질되는 것입니다.
※ 아타나시우스 신조(the Athanasian Faith)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제작 연대는 분명하지 않지만, 사도신경, 니케아 신조와 함께 초대교회 3대 신경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이 신조의 주된 내용은 삼위일체와 성육신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의 유작, ‘계시록 해설’에서 이 신조를 다루고 있는데, 아래 내용은 그중 어떤 게 ‘말씀을 더럽히는 것’인지 당시 종교, 특히 교황 교회의 부패상을 배경으로 아래와 같이 적고 있습니다.
심지어 죽은 자의 뼈와 무덤에 거룩함이 있다는 것, 시체가 기적을 행한다는 것, 사람이 자신의 부를 우상이나 수도원에 성별(聖別)하지 않으면 나중에 연옥에서 고통을 당한다는 것, 천국과 지옥의 권세를 가졌으므로 사람이 신이라는 것even that there is holiness in the bones of the dead and in sepulchers, that carcasses perform miracles, that man will be tormented in purgatory if he does not consecrate his wealth to idols or to monasteries, that men are gods because heaven and hell are in their power
그러니까 말씀을 가까이하는 목적이 주님 사랑이 아닌, 말씀을 그저 자기 사랑, 세상 사랑을 위한 수단과 도구로 삼는 일체의 종교적 행위가 곧 말씀을 더럽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계속해서 그들이 말씀을 어떻게 더럽히는지 하는 내용입니다. 64절, 65절입니다.
64그의 눈을 가리고 물어 이르되 선지자 노릇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고 65이 외에도 많은 말로 욕하더라
영어 성경에는 주님의 눈을 가리는 게 아니라 얼굴을 가리고 때렸다고 되어 있습니다. 말씀에서 주님의 얼굴은 주님의 사랑과 자비를 나타냅니다. 그래서 민수기 6장에는 주님께서 아론에게 명하시길,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할 때는 다음과 같이 말하라고 하십니다. 즉
24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25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26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민6:24-26)
라고 말입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명령하신 이유는, 주님에게서 나오는 사랑과 자비는 모든 악과 거짓을 이기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볼 때, 군사들이 주님의 얼굴을 가리고 때리는 것은, 타락한 교회들이 말씀을 왜곡함으로써 말씀의 생명인 사랑을 죽이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생겨난 교리가 바로 사랑 없는 믿음만의 교리, 오직 믿음의 교리입니다.
※ 이 ‘오직 믿음’(Faith Alone) 교리는 대단히 위험합니다. 주님은 스베덴보리를 통해 계시록에 나오는 모든 심판의 대상이 모두 이 ‘오직 믿음’의 교회임을 밝히고 계십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천국은 속 사람의 상태로 들어가는 곳인데, 이 교리로는 이런 사실을 가볍게 여기게 되기 때문이 아닐까, 즉 평소 속 사람의 상태 관리에 소홀, 결국 구원받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마27에도 비슷한 말씀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주님을 십자가에 매달고 조롱하기를,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마27:42)
라고 합니다. 사실 나를 버리고 다른 사람을 살린다는 것은 역설 중에서도 역설입니다. 내가 있어야 남도 있지 않나 그렇게 모두 생각하기 때문인데요, 그런데도 주님은 인류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버리심으로써, 이웃을 위해 나를 죽이는 것이 사랑이요 구원이라는 것을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그러나 사랑 없는 믿음 안에 있는 자들은 주님의 그 사랑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 위에 계신 주님을 향해 “거기서 내려와 먼저 너 자신을 구원하라”고 조롱했습니다. 앞에서 주님의 얼굴을 가리고 때리면서 누가 때렸는지 말하라고 하는 자들도 같은 자들입니다. 그들은 말씀 안에 신성이 있음을 믿지 않았고, 그러므로 말씀의 능력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자기 입맛대로 곡해했고, 내심 말씀의 능력이 어디 있는가 하고 비웃었습니다. 그것이 주님의 얼굴을 가리고 때리면서 누가 때렸는지 말하라고 조롱하는 것입니다. 만약 기적이 나타났다면 그들은 말씀이신 주님을 믿었을까요? 잠시는 믿는 것같이 했겠지만, 계속 믿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기적에 대해 ‘천국의 비밀’ 7290:2번 글은 이렇게 말합니다.
기적은 믿음을 강제하며 강제된 믿음은 사람 안에 남지 않고 흩어져 없어진다. 그러므로 예배의 내적인 것인 믿음과 인애는 사람의 자유 안에 심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그때 그것은 그의 것이 되고 그의 것이 되면 그에게 영원히 남기 때문이다.But miracles are not done among those who are in internal worship, that is, in charity and faith, because to these they are hurtful, for miracles compel belief, and what is compelled does not remain, but is dissipated. The inward things of worship, which are faith and charity, must be implanted in freedom, for then they are appropriated, and what is so appropriated remains; whereas that which is implanted in compulsion, remains outside the internal man in the external, because nothing enters into the internal man except by means of intellectual ideas, which are reasons; for the ground which there receives is an enlightened rational.
그래서 주님은 기적을 보이라고 하는 자들에게 아무 대꾸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군사들이 밤새 주님을 욕보이는 동안 날이 밝았습니다. 66절입니다.
66날이 새매 백성의 장로들 곧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모여서 예수를 그 공회로 끌어들여
말씀에서 날이 밝았다는 건 교회가 주님과 연결된 상태, 즉 가르침을 받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반대로 교회가 주님에게 등을 돌린 상태입니다. 주님에게 등을 돌렸다는 것은 주님이 주시는 선과 진리를 거부하고, 지옥의 악과 거짓에 깊이 빠져 있다는 뜻입니다. 그 상태에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주님을 공회로 끌고 갔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들은 지옥적인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며, 그리하여 진리를 핍박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를테면 대제사장들은 말씀 안에 있는 선을 자아의 악과 섞는 사람들이고, 서기관들은 말씀 안에 있는 진리를 자아의 거짓과 섞는 사람들입니다. 말세에 교회들은 그런 방법으로 말씀을 더럽히고, 더럽혀진 말씀을 가지고 교인들을 잘못된 길로 끌고 갑니다. 그러므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주님을 공회로 끌고 가는 건 말세에 타락한 교회들이 거짓 교리를 가지고 진리를 심판하려고 하는 걸 의미합니다. 지금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존 교회의 지도자들은 새 교회의 진리로 다시 오신 주님을 불법자요 이단이라고 마음대로 심판합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주님께 묻습니다. 67절, 68절입니다.
67이르되 네가 그리스도이거든 우리에게 말하라 대답하시되 내가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할 것이요 68내가 물어도 너희가 대답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말씀에서 그리스도라는 말은 기름 부음 받은 자, 또는 왕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왕은 속뜻으로 진리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네가 그리스도이거든 우리에게 말하라 하는 것은 악의적인 거짓 안에 있는 자들이 진리를 심판하는 것입니다. 악의적인 거짓 안에 있는 사람이 있고, 선의의 거짓 안에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후자의 사람은 언젠가는 진리를 이해합니다. 그들에게 아직 선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전자의 사람, 즉 악의적인 거짓 안에 있는 사람은 영원히 진리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악과 진리는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가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할 것이요 내가 물어도 너희가 대답하지 아니할 것이다 하신 것입니다. 계속해서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69절입니다.
69그러나 이제부터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 하시니
여기서 인자는 진리의 측면에서 주님을 뜻합니다. 인자로 표현되는 진리는 지옥과 싸우는 진리이고, 그러므로 아직 완전한 진리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완전한 진리라면 지옥이 감히 공격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시험을 받으실 때마다 당신 자신을 인자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리라고 한 인자는 누굴까요? 지옥의 시험을 완전히 이기시고 전능한 힘을 갖게 된 진리, 바로 주님이십니다. 따라서 ‘이제부터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 하신 것은, 이제부터의 말씀은 지옥의 어떤 어둠도 훼손할 수 없는 완전한 말씀이며 진리라는 뜻입니다. 주님은 지옥의 모든 시험을 이기시고, 완전한 진리로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진리를 가지고, 낡고 타락한 교회를 대신, 새 교회의 문을 여십니다. 그 완전하고 전능한 진리이시며 주님이신 이가 바로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인자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이 오셔서 지옥을 완전히 이기시기 전의 말씀은 완전한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에 대해 ‘천국의 비밀’ 6373번 글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신성한 진리는 천국을 통해 인간에게로 흘러들어온다. 그러나 인간이 선으로부터 멀어졌을 때, 그 신성은 충분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주님은 세상에 오셔서 당신 안의 인성을 거룩하게 만드셨고, 그리하여 그때 주님의 신적 인성은 신성한 진리의 근원이 되었다.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진리를 통해 선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구원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것에 대해 욥기 15장 15절은 ‘하나님은 거룩한 자들을 믿지 아니하시나니 하늘이라도 그가 보시기에 부정하거든’이라고 말한다.
욥기에 ‘하늘이라도 그가 보시기에 부정하거든’이라고 한 것은 주님이 보시기에 그동안 천국을 통해 지상으로 내려오는 진리는 인간을 거듭나게 할 정도로 완전한 진리가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그런가 하면 ‘천국의 비밀’ 9807:6번 글은
주님이 세상에서 지옥을 완전히 이기시고 천국과 지옥의 모든 것을 당신의 질서 안에 두신 후, 신적 진리는 자체로 전능한 힘을 가진다.
라고 합니다. 이상으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주님 오시기 전의 말씀이 인간에 의해 훼손될 수 있는 말씀이라면, 주님이 오신 후의 말씀은 아무도 훼손할 수 없는 능력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해 오늘 본문 70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70다 이르되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대답하시되 너희들이 내가 그라고 말하고 있느니라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은 지옥을 이기고 영화롭게 되신 주님의 신적 인성을 뜻하고, 또한 그때 선으로 충만하게 된 능력의 말씀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대제사장에게 ‘너희들이 내가 그라고 말하고 있느니라’ 하신 것은, 이제부터의 말씀은 누군가 더럽히려고 할 때, 그들의 추악함이 드러날 뿐 결코 더럽힐 수 없는 말씀임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더럽히려 할수록 오히려 그들 스스로 진리를 증거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지금 우리가 믿는 이 진리가 바로 그런 전능하신 진리입니다. 새 교회의 모든 성도가 이 진리의 힘을 의심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또한 진리의 전능하신 힘에 의지해 매일 같이 새로워지시길 기도합니다.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요17:5)
54예수를 잡아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갈새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니라 55사람들이 뜰 가운데 불을 피우고 함께 앉았는지라 베드로도 그 가운데 앉았더니 56한 여종이 베드로의 불빛을 향하여 앉은 것을 보고 주목하여 이르되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하니 57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이 여자여 내가 그를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58조금 후에 다른 사람이 보고 이르되 너도 그 도당이라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아니로라 하더라 59한 시간쯤 있다가 또 한 사람이 장담하여 이르되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60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네가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아직 말하고 있을 때에 닭이 곧 울더라 61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62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눅22:54-62)
(오직 믿음의) 신앙이 주님을 배척한다는 것은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 부인한 것의 의미를 통해 알 수 있다. 그가 밤에 주님을 부인한 것은 교회의 마지막 때 즉 교회 안에 인애가 없는 때를 뜻한다. (천국의 비밀 6073:3, 이순철 역) And that faith would reject the Lord is evident from the representation by Peter when he denied Him thrice; that he did this at night, signifies the last time of the church, when there is no longer any charity (see n. 6000);
말씀의 영적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이 말씀을 읽으면서, ‘나라도 아마 그랬을 거야’ 할까요, 아니면 베드로를 비난하거나 안타까워할까요? 여기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는 영적 의미, 곧 속뜻으로 주님의 제자를 뜻하는 게 아니라 사랑 없는 신앙, 그러니까 사랑과 분리된 신앙, 말로는 사랑, 사랑하는데 실제로는 삶이 받쳐주지 않거나 사랑의 삶, 즉 체어리티(charity, 인애)의 삶에 별로 관심이 없는 신앙을 뜻합니다. 베드로는 본래 사랑과 체어리티를 동반한 신앙을 뜻합니다만, 그러나 본문에서는 교회의 마지막 때의 신앙, 즉 신앙과 교리만 있고, 정작 있어야 할 사랑은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 없는 신앙이란 어떤 것입니까? 주님을 믿기는 하는 데 그에 따라 살지는 않는 것입니다. 사랑은 곧 삶이기 때문입니다.
※ 이 문제는 사실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제가 요즘 요한계시록 번역 준비 작업을 하면서 그 속뜻 브리핑을 읽고 있는데, 거기 보면 계시록에 나오는 용, 짐승이 다 그 속뜻으로는 이런 신앙, 이런 신앙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읽고 있는 책은 스베덴보리(1688-1772, 스웨덴) 저, ‘계시록 해설’(Apocalypse Explained, 1757년에 책을 쓰기 시작했으나 생전엔 출판을 못 한, 사후 첫 라틴 출판은 1785-1789)입니다.
세상에서는 이웃에게 많이 베풀고 기부를 많이 하는 사람을 사랑이 많은 사람이라고 합니다만, 그러나 새 교회에서는 자기가 맡은 일을 공정하고 성실하게 하는 걸 사랑이며 체어리티라고 가르칩니다. 만약 국회의원이 자기 자신이나 가까운 사람들에게 유리하도록 법을 만든다면, 그것은 몇몇 사람에게만 좋고 그 밖의 사람에게는 나쁜 법이 될 것이며, 그러므로 그것은 이웃을 사랑하는 게 아닙니다. 교회가 주님에게서 점점 멀어지면 나중에는 신앙만으로 구원받는다고 가르치고 삶을 소홀히 합니다. 그런 신앙, 그런 신앙이 오늘 본문의 베드로로 표상되는 신앙입니다.
54예수를 잡아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갈새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니라
그래서 본문 54절에 보면, 베드로가 주님을 멀찍이 따라갔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베드로로 표상되는 신앙이 주님과는 거리가 먼 신앙이라는 뜻입니다. 신앙인들이 사랑 없는 신앙 안에 있을 때, 그들에게 있는 진리는 마치 감옥에 갇힌 것처럼 힘을 쓰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그런 신앙을 가지고는 이웃을 사랑할 수도 없고, 악의 유혹을 물리칠 수도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이 대제사장의 집에 붙잡혀 있는 것은 진리가 그렇게 힘을 쓰지 못하는 모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 이 누가복음 속뜻 강해를 비롯, 이순철 목사님의 설교 원본은 ‘믿음’(belief)과 ‘신앙’(faith)을 별로 구분하지 않습니다. 이는 목사님이 개신교 배경이시기 때문인 것 같은데요,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글들을 보면 ‘belief’보다 ‘faith’를 압도적으로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오직 믿음’이라는 표현에서조차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는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가급적 ‘믿음’을 ‘신앙’으로 수정, 표기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집에 들어갔을 때 일어난 일들을 본문 55절과 56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55사람들이 뜰 가운데 불을 피우고 함께 앉았는지라 베드로도 그 가운데 앉았더니 56한 여종이 베드로의 불빛을 향하여 앉은 것을 보고 주목하여 이르되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하니
한글 성경에는 뜰 한가운데 불을 피웠다고 하는데, 영어 성경에는 ‘넓은 방 한가운데’라고 되어 있습니다. 말씀에서 방은 사람의 마음을 의미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대제사장 집의 방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사랑 없는 신앙 안에 있는 사람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나타냅니다. 이를테면 방 한가운데 타고 있는 불은 애정을 뜻하는데, 그것은 지옥으로부터 그들의 자아 사랑을 통해 흘러들어오는 탐욕과 미움, 질투 같은 악한 애정을 뜻하며, 그러므로 베드로가 그 불을 쬐는 것은 사랑 없는 신앙은 필연적으로 악한 애정의 지배를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때 여종 하나가 베드로를 주목하다가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합니다. 여종은 악한 애정을 가진 지옥의 영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여종이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다 도발하는 건, 지옥의 영들이 베드로로 표상되는 사랑 없는 신앙 안에 있는 사람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사랑 없는 신앙 안에 있는 사람들, 이를테면 믿음만의 교리 안에 있는 사람 중에도 진리를 따라 살려는 순진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때 그의 마음속에 있는 지옥의 영들은 그의 일거일동을 주의 깊게 살피다 그가 자기들과 한 편이 아니다 싶을 때, 마치 이리가 달려들 듯 그를 공격합니다. 여종이 베드로를 주목하다가 도발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마침내 지옥의 영들과의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여종의 말,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에서 ‘그’는 바로 진리이신 주님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이 말은 사랑 없는 신앙 안에 있는 사람에게 아직 진리가 남아 있음을 뜻합니다. 이러한 의미를 통해 지옥이 싸움을 걸어오는 목적이 무엇인지 분명해지는데요, 그들은 신앙인의 내면에 남아 있는 진리를 파괴하려는 것입니다. 싸움의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57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이 여자여 내가 그를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베드로는 ‘이 여자여 내가 그를 알지 못하노라’라고 주님을 부인했고, 그 순간 싸움이 끝나버렸습니다. 주님을 부인한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지옥의 유혹에 굴복하는 것이고, 그것은 시험에서 지는 것입니다.
신앙인들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속 깊은 곳으로부터 남을 미워하거나 시기하는 마음이 수시로 올라옵니다. 부정한 욕망에 휩싸일 때도 있습니다. 그런 것이 모두 지옥으로부터 오는 시험입니다. 그때 사랑 있는 신앙 안에 있는 사람은 그 싸움에서 어렵지 않게 이길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 있는 신앙 안에 주님이 계셔서 우리를 대신해 싸워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 없는 신앙 안에 있는 사람은 주님도 도우실 수 없습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그때 주님은 손발이 묶여 대제사장의 집에 갇힌 것과 같은 상태에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입으로만 말하고, 행하지는 않을 때, 우리에게 있는 진리는 그렇게 힘을 쓸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그렇게 되면 시험이 있을 때마다 속절없이 무너집니다. 그리고 그때 가지고 있던 선과 진리를 하나씩 지옥에게 빼앗깁니다. 그것은 마치 이스라엘의 왕들이 이방 왕들과의 싸움에서 졌을 때, 성전의 보물을 빼앗기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시험이 한바탕 휘몰아치고 지나가면 한동안은 평화가 찾아옵니다. 그때 신앙인들은 간신히 몸과 마음을 추슬러 새로운 삶을 살고자 하는데, 그러나 다시 지옥의 공격이 시작되고, 또 다시 무릎을 꿇습니다. 사랑 없는 신앙 가운데 있는 신앙인들의 그런 모습을 58절과 59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58조금 후에 다른 사람이 보고 이르되 너도 그 도당이라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아니로라 하더라 59한 시간쯤 있다가 또 한 사람이 장담하여 이르되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60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네가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아직 말하고 있을 때에 닭이 곧 울더라
지옥은 신앙인들을 항상 주시합니다. 그리고 그가 진리를 붙잡고 일어서려 할 때, 어디선가 나타나 ‘너도 그 도당이라’,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하며 계속 달려듭니다. 말씀에서 갈릴리 사람은 주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을 뜻하지만, 여기 지옥 영들이 말하는 갈릴리 사람은 온전히 지옥의 편에 서지 않은 사람, 즉 그들이 조금만 방심하면 언제든 예수의 편에 설 사람을 의미합니다. 지옥의 영들은 그런 사람을 유심히 지켜보다가 조금만 이상하면 ‘너도 그 도당이라’,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하며 맹렬히 공격해 넘어뜨립니다. 사랑 없는 신앙 안에 있는 교회가 그렇게 넘어지기를 반복하다 나중에는 더 이상 회복될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그렇게 교회가 완전히 무너지는 것이 베드로가 세 번 주님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말씀에서 세 번은 완전한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에는 그때 닭이 울었다고 합니다. 닭 우는 새벽은 주님이 오시는 때를 말합니다. 주님은 교회 안에 사랑과 신앙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때, 새로운 진리로 오셔서 그것으로 교회를 심판하시고, 새 교회를 여십니다. 그것이 닭이 울고 새벽이 오는 것입니다.
61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62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위 말씀은 기존의 교회가 무너지고, 새로운 교회가 열리는 걸 표현한 것입니다.
교회의 마지막 때 모든 사람이 죄의 홍수 속으로 빠져들 때도 노아처럼 주님의 손을 붙잡고 놓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돌아보시고, 그들을 그 무너지는 교회로부터 구해내십니다. 주님께서 돌이켜 보신 베드로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타락한 교회 안에서도 신앙을 잃지 않으려고 발버둥 쳤던 아주 적은 수의 사람들인 것입니다. 주님의 시선이 그들에게 머물렀을 때 비로소 그들의 영의 눈이 열리고 자신의 실체를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사랑도 신앙도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에 통곡합니다. 말씀에는 그것을 베드로가 제사장의 집을 빠져나와 슬피 우는 것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회개하는 사람들을 데리고 새로운 교회의 문을 여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교회의 마지막 때 어떻게 교회들이 무너지는가를 봤습니다. 주님은 교회와 교회에 속한 사람들에게 수없이 기회를 주십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그들은 입으로만 주님을 믿는다 할 뿐 변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의지가 약해서이기도 하고, 그들의 신앙인 사랑 없는 신앙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사랑 없는 신앙은 아무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옥이 공격해 올 때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다 보면 홍수에 떠내려가듯 한없이 주님에게서 멀어집니다. 새 교회 사람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새 교회의 진리는 힘이 있는 진리이지만 그렇더라도 삶 속에서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신앙에 따라 살지 않는 사람은 시험이 있을 때마다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한 것처럼 시험에서 지고, 그렇게 해서 주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는 한없이 미끄러져 지옥의 문턱에까지 이르렀지만, 마지막 순간에 주님께서 그를 들어 올려 구원하셨습니다. 그것은 침몰하는 거대한 배에서 구해지는 것과 같은 기적입니다. 그러므로 일이 뜻대로 되지 않더라도 누구든지 구원의 소망을 버리면 안 됩니다. 주님은 각자에게 숙제를 맡기십니다. 어떤 사람은 바로바로 마치지만, 한없이 미루는 사람도 있습니다. 후자라고 왜 숙제를 빨리 마치고 싶지 않겠습니까? 뜻대로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한없이 미적거리고 있을 때, 호된 시련이 닥칩니다. 시련은 극한의 상황에 몰릴 때까지 계속됩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그동안 어디에도 계시지 않은 것 같던 주님이 우리를 돌아보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시선이 우리에게 머무는 순간 눈이 밝아져 우리 자신의 실체를 볼 수 있습니다. 그때 한편으로는 수치의 눈물이, 그리고 한편으로는 회개의 눈물이 터집니다. 주님은 그렇게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십니다.
언젠가 제자들이 주님께 왜 우리는 주님처럼 귀신을 쫓아내지 못합니까 라고 물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이런 종류의 문제는 기도로 밖에는 풀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기도로 오랜 숙제를 풀어나가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기도할 때는 말로만 하지 말고, 작은 일이라도 사랑을 실천하며 하시기 바랍니다. 그때 주님께서 우리를 도와 기적을 만드십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새해를 맞이하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일는지, 밤중일는지, 닭 울 때일는지, 새벽일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막13:35)
47말씀하실 때에 한 무리가 오는데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라 하는 자가 그들을 앞장서 와서 48예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하시니 49그의 주위 사람들이 그 된 일을 보고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칼로 치리이까 하고 50그 중의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오른쪽 귀를 떨어뜨린지라 51예수께서 일러 이르시되 52예수께서 그 잡으러 온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경비대장들과 장로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왔느냐 53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 내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둠의 권세로다 하시더라 (눅22:47-53)
겟세마네 동산에서 마지막 기도를 마치신 주님이 제자들과 함께 계실 때, 열두 제자 중 하나인 유다가 한 무리의 사람들을 이끌고 나타났습니다. 주님을 잡으러 온 것입니다. 유다가 자기들끼리 정한 약속에 따라 주님께 입을 맞추러 다가옵니다. 그 장면을 본문 47, 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47말씀하실 때에 한 무리가 오는데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라 하는 자가 그들을 앞장서 와서 48예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하시니
말씀에서 유다라는 이름은 본래 사랑으로 행하는 선을 뜻합니다. 그러나 반대의 의미로는 자아 사랑에서 나오는 악을 뜻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유다는 특별히 자아 사랑에 깊이 빠져 있는 유대교회를 뜻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말씀에서 유다라는 이름은 좋은 의미로 쓰일 때도 있고, 나쁜 의미로 쓰일 때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다윗과 솔로몬 같은 걸출한 왕들이 유다 지파에서 나왔습니다. 그런가 하면, 야곱의 열두 아들 중 유다는 동생 요셉을 팔아넘기는 데 앞장섰고, 오늘 말씀에서 열두 제자 중 하나인 유다는 주님을 팔아넘기고 있습니다. 영적인 의미, 즉 그 속뜻으로 볼 때, 전자의 경우인 유다 지파로부터 왕들이 나온 것은 사랑의 선으로부터 진리가 나오는 걸 의미합니다. 그리고 후자의 경우, 즉 유다가 주님을 팔아넘기는 건 자아 사랑에 빠진 교회들이 진리를 파괴하는 걸 의미합니다. 자아 사랑에 빠진 사람이 진리를 미워하고 나중에는 파괴하기까지 하는 이유는, 진리가 자아 사랑에서 나오는 욕망을 죄라고 하고, 그러므로 멀리하라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불순한 욕망을 정당화하기 위해 진리를 왜곡, 조작합니다. 그것이 진리를 파괴하는 것이며, 또한 유다가 주님을 파는 것입니다.
유다가 입을 맞추려고 주님께 다가갔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하십니다. 주님이 유다에게 하신 말씀은 자아 사랑에 빠진 유대교회가 겉으로는 진리를 사랑하는 것처럼 하면서 속으로는 진리를 죽이는 것을 뜻합니다.
갑자기 나타난 대제사장의 군사들을 보고 주님의 제자들이 두려워하며 검을 빼 들었습니다. 그 모습을 49절과 50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49그의 주위 사람들이 그 된 일을 보고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칼로 치리이까 하고 50그 중의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오른쪽 귀를 떨어뜨린지라
※ 다음은 이순철 목사님의 청주 새 교회 시절 에피소드입니다.
청주에 살 때 일입니다. 어느 교파 사람들이 전도를 목적으로 저를 찾아온 적이 있습니다. 그분들이 얘기하는 걸 한참 듣고 있다가 궁금한 것을 몇 가지 물어봤습니다. 그러다가 논쟁이 좀 있었고, 정작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안 하고 돌아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읽으면서 그때 생각이 났습니다. 새 교회 진리 안에 있는 사람들이 다른 교파 사람들의 논리적 오류를 지적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런 상황을 즐기려 하는 건 좋지 않습니다. 그것은 마치 주님의 제자들이 진리의 검을 휘두르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제자 중 하나가 대제사장의 종의 귀, 오른쪽 귀를 잘랐다는 건 무슨 뜻일까요? 여기서 대제사장은 유대교회로 상징되는 타락한 교회의 성직자를 뜻하고, 그가 보낸 종은 그들이 만들어 낸 거짓 교리를 추종하는 사람들입니다. 또 오른쪽 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남아 있는 선한 의지를 뜻합니다. 왜냐하면 말씀에서 오른쪽은 선을 뜻하고, 귀는 의지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제자들이 검을 빼 종의 오른쪽 귀를 자르는 건, 진리를 가지고 거짓 진리에 맞서 싸울 때, 상대의 선한 의지를 꺾을 정도로 압도적으로 이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리와 비진리의 논쟁에서 진리의 편이 완승했다고 해서 비진리 안에 있던 사람들이 바로 승복하는 건 아닙니다. 승복하지 않는다는 건 거짓인 줄 알면서 기존의 신앙을 고집한다는 뜻일까요? 대개는 그렇지만 때에 따라서는 크게 실망한 나머지 그동안의 신앙을 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그런 것이 상대의 선한 의지를 꺾는 것입니다. 잘못된 신앙을 버린다면 잘된 일이라 하겠지만 꼭 그런 건 아닙니다. 진리이든 비진리이든 그것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신앙으로 구원받겠다는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도 강압적으로 상대의 신앙에 상처를 주면 안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말고 참으라고 하시고 종의 잘린 귀를 만져 낫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비록 거짓 진리 안에 있는 사람이라도 구원을 바라는 순수한 뜻이 있으면 그것을 꺾지 않고 지켜주십니다. 그런 의지가 있어야 언젠가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거짓 진리 안에 있는 사람 중 어떤 사람이 상대적으로 선한 사람이고, 어떤 사람이 악한 사람일까요? 그것에 대해 잠깐 말씀드리겠습니다. 스베덴보리 저, ‘계시록 해설’(Apocalypse Explained, 1785, 라틴) 413번 글에 따르면, 진리를 대적하는 사람 중에는 두 부류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거짓으로부터 악을 행하는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악으로부터 거짓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거짓으로부터 악을 행하는 사람은 거짓된 교리를 진리라고 믿고 그것에 따라 악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어리석을 뿐이고 악한 사람은 아닙니다. 적어도 자기가 믿는 교리에 충성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런 사람들의 신앙을 억지로 빼앗지 않으시고 지켜주십니다. 마치 아벨을 죽인 가인을 보호하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반대로 악으로부터 거짓을 행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악을 죄라고 생각하지 않을 뿐 아니라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대로 해석해 악이 죄가 아닌 것처럼 조작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어떤 경우에도 회개하지 않으며, 그래서 희망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귀를 만져 낫게 하신 것은 전자의 사람, 즉 거짓 교리를 진리로 믿고 충성하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손으로 만지신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그것에 대해 ‘계시록 해설’ 79번 글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영적인 힘은 다른 사람의 유익을 바라는 것이고, 할 수만 있다면 자기에게 있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영적으로 ‘손’이 뜻하는 것은 바로 이런 힘을 말한다. 그러므로 손으로 만지는 것은 그 힘이 통하고 전해지는 것을 뜻한다. (AE.79, 이순철 역) but spiritual power is to will the good of another, and to will to convey to another as far as possible what is with oneself. This power is what “hand” in the spiritual sense signifies, and its communication and transference are signified by “touching with the hand.” (AE.79, 계1:17 속뜻 주석)
주님께서 손으로 만지실 때,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와 그 능력이 상대에게 흘러 들어가 그의 영혼을 살린다는 것입니다. 바울도 한 때 주님을 심하게 대적했습니다. 사도행전 22장 20절에서 바울은 스데반이 피를 흘릴 적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했다고 고백합니다. 그럴 정도로 그는 주님을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런 바울에게도 회개와 갱생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것이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만져 낫게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당신을 잡으러 온 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52절 말씀입니다.
52예수께서 그 잡으러 온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경비대장들과 장로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왔느냐
대제사장은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타락한 유대교회의 성직자들을 뜻합니다. 그리고 경비대장은 성직자의 말만 듣고 참된 진리를 적대하는 교회 안의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경비대장에 비유하는 것은 영적으로 볼 때, 그들은 진리를 대적해 싸우는 악한 군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장로들은 누굴까요? 타락한 교회 안에 있는 지적인 사람들, 즉 교리에 밝은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유대교회의 성직자와 신학자들과 평신도들이 모두 합세해서 주님을 죽이려 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향해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같이 검과 뭉치를 가지고 왔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말씀에서 강도와 도둑은 신앙인들에게 거짓 진리를 주입하는 나쁜 성직자를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교인들에게 있는 진리와 선을 빼앗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도둑들이 오히려 주님을 강도로 몰고 있습니다. 그들이 들고 있는 검과 몽둥이는 말씀을 조작해 만든 거짓 진리를 뜻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같이 검과 몽둥이를 가지고 나왔느냐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53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 내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둠의 권세로다 하시더라
주님께서 끝으로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 내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둠의 권세로다 하시더라’ 하십니다. 어둠의 권세는 지옥으로부터 오는 악과 거짓의 권세입니다.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 주님을 대적하게 만드는 사악한 권세이며, 진리의 영광을 가리는 어둠의 권세입니다. 주님은 이제 그 악과 거짓의 권세에 맞서 최후의 싸움을 하려고 하십니다. 지옥의 칠흑 같은 어둠이 주님에게 아직 남아 있는 불완전한 인성을 통해 들어와 주님을 공격해 올 때, 주님은 당신 안에 있는 아버지의 신성으로 그것을 물리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불완전한 인성을 벗고, 여호와가 주시는 신적 인성을 입고 부활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둠의 권세로다’ 하시며, 마지막 시험 가운데로 기꺼이 들어가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유대교회의 마지막 때, 그들이 주님을 핍박한 것처럼 교회의 마지막 때에는 타락한 교회들이 참된 진리를 핍박합니다. 그들은 말씀을 조작해 만든 거짓 진리를 가지고 참된 진리를 이단이요, 불법자라 규정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님의 제자들처럼 진리의 검을 빼 들고 그들의 귀를 잘라야 할까요? 주님은 그러지 말라고 하십니다. 오히려 당신을 대적하는 자의 귀를 만져 낫게 하시고, 담담히 마지막 시험 가운데로 들어가셨습니다.
새 교회인들은 교파가 다르다고 다른 교파 사람들을 미워하면 안 됩니다. 진리에 대해 우월감을 가지거나 말씀을 전할 때 논쟁하듯 몰아붙여서도 안 됩니다. 상대의 신앙을 존중하고 언제까지라도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어둠의 때를 견뎌내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주님이 지옥의 어둠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의 신앙도 이 시대의 어둠을 뚫고 눈부시게 떠오를 날이 올 것입니다. 그때까지 유다처럼 실족하지 않도록 서로 기도하고 격려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성도에게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7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8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끝까지 이르리로다 (시2:7-8)
다음은 제게 ‘할 말은 태산이지만 지금은 침묵할께요...’ 하신 어느 권사님께 보낸 답신입니다.
곧 팔 학년 되실 그분의 어떤 정황을 좀 아는 저는 다음날 아래와 같은 카톡 답신을 보내드렸는데요, 자세한 건 프라이버시 있어 좀 가리고, 내용 또한 좀 다듬어 글 올립니다.
권사님, 오늘은 어제 한글날을 피해 세종시 모처에서 외식 후, 국립 세종수목원에 들러 저희 부부, 둘째와 함께 좋은 시간을 가진 하루였습니다. 세종 국립수목원은 대전 저희 집에서 차로 25분 거리입니다.
이곳은 두 번째 오는 데, 처음 방문 때 놓쳤던 여러 가지, 가령 수목원 전체 전기차 버스 투어라든지, 지중해 전시 온실 전망대를 새롭게 경험하면서, 그러나 이 모든 눈에 보이는 겉의 나라의 것들을 통해 이것들과 서로 상응(相應, correspondence)하고 있는 저 천국, 속의 나라의 어떠함들을 마음에 그리며 구경하는 중에 권사님 생각이 났지요...
권사님, 이제 얼마 안 남은 이 지상 생활 후, 우리는 그토록 바라던 천국으로 가게 되는데요, 그런데 천국은 눈에 보이는 이 겉 사람의 세상과 달리 속 사람으로 가게 되는 나라이며, 그러므로 당연히 천국은 이 겉의 나라가 아닌, 속의 나라라는 사실을 깊이 생각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중에 아직 아무도 자기 영의 모습을 본 자가 없듯 자기 육의 모습인 지금 거울에 비친 자기 외모 밖에는 본 사람이 없습니다. 아무도 자기 속 사람의 모습을 본 사람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어떤 섭리로 다른 사람들의 영을 잠깐 볼 수 있도록 허락받으신 분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그 육신의 외모는 말할 수 없이 아름답지만, 그 영은 가히 형용할 수 없이 끔찍한 괴물 형상인 여자들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그 외모는 주름투성이인 노파이지만 그 영은 가히 이를 데 없이 젊고 아름다우신, 천사 같은 분들도 계시다고 합니다.
이는 사람이 겉 사람과 속 사람으로 되어 있다는 하나의 예이지만, 그러나 방금 말씀드린 대로, 천국은 속 사람으로 가는 나라임을 기억, 그러므로 권사님, 이제 그만 이 세상 일, 곧 겉의 나라의 일들로부터는 물러나시고, 저 천국, 곧 속의 나라에 대해서만 집중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이 겉의 나라에 속한 모든 일은, 그 동기가 주님을 사랑해서 하는 게 아닌 한, 우리 속 사람을 아름답게 단장하는 일에 아무 상관이 없거나 쓰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여전히 겉의 일에 마음을 기울여 거기서 헤어나지 못하실 경우, 이번에는 그 빈틈으로 계속해서 지옥이 우리 삶에 흘러들어오며, 그 결과, 삶의 우환이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히게 됩니다.
지옥, 곧 악한 영들은 우리의 속 사람, 곧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여 주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한, 우리 속 사람을 못 건드리지만, 그러나 우리의 겉 사람, 곧 유전 악 아래에 있어 지키기 쉽지 않은, 겉의 일들은 건드리며, 공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도 ‘너는 그의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3:15) 하신 대로 악에게 공격을 받으신 것처럼 말입니다.
생전에 주님도 육으로는 마리아로 유전한 유전 악 가운데, 즉 십자가 마지막 시험 전까지는 아직 불완전한 인성 가운데 계셨기 때문이지요. 악은 오직 감각을 비롯, 이 겉의 나라에 속한 것들만 건드릴 수 있습니다. 창세기 3장에 등장하는 ‘뱀’을 비롯, ‘발꿈치’ 등은 이런 것들을 의미합니다.
겉의 일에서 물러나는 것은 주님 말씀하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11:28)
하신 말씀을 붙들고, 그 울타리 안에 머무르는 것이지만, 반대로 계속 겉의 일을 붙들고 씨름하는 것은 위 주님의 권면을 거스르는 것으로, 그 결과 주님도 더 이상 우리를 대신하여 싸우실 수 없어, 즉 더 이상 우리를 도우실 수 없어 우리는 지옥의 공격에 그대로 노출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권사님, 이제 그만 이 세상 겉의 일에서 손을 떼고 물러날 수 있도록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계속된 주님 말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마11:29-30)
하시는 이 말씀의 보호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살면서 당하는, 혹은 자초하는 모든 시험은 사실은 우리를 대신하여 주님이 홀로 싸우시는 시험들이며, 그래서 우리 힘으로 싸우면 지지만, 주님이 대신 싸워주셔서 우리가 이기는 줄을 믿습니다. 아멘!
39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 40그곳에 이르러 그들에게 이르시되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 하시고 41그들을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42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43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 44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되더라 45기도 후에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서 슬픔으로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 46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 (눅22:39-46)
오늘 본문 말씀에는 주님께서 마지막 시험인 십자가의 고난을 앞두고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모습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극한의 시험을 앞둔 주님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하나님이신 주님의 마음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러나 인간이신 예수의 두려움과 절망감이 어떤 것인지는 상상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앞으로 얼마나 지독하고 끔찍한 고통이 기다리고 있을지 내다보고 계셨고, 그래서 할 수만 있다면 거기서 벗어나고 싶으셨습니다. 그토록 절망적인 상황에서 주님은 평소와 같이 날이 어두워지자 감람(橄欖, 올리브나무의 中譯인 橄欖을 우리말로 읽은 것. 실제로는 중국의 감람나무와 이스라엘의 올리브나무는 서로 다른 나무) 산으로 가십니다. 그것을 본문 39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39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
주님은 아주 어릴 때부터 어른이 되어 십자가에 달리실 때까지 수없이 많은 시험을 당하셨습니다. 그 시험에 대해 마가복음 1장 13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광야에서 사십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막1:13)
사람들은 이 시험을 주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직전 잠시 겪으신 시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한 구절의 말씀 속에는 주님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 겪으신 모든 시험이 집약되어 있습니다. 말씀에서 40일은 주님의 모든 시험을 뜻하고, 들짐승과 함께 계시는 것은, 주님이 당신의 불완전한 인간을 통해 스스로 끌어들인 지옥의 공격들을 의미합니다. 이 말씀 말고 주님이 당신의 시험에 대해 따로 말씀하신 적은 없습니다. 이런 사실로부터 우리는 주님이 모든 시험을 혼자 묵묵히 싸워 이기셨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주님이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로 가셨다고 합니다. 모든 시험을 홀로 견디신 주님이 마지막 시험을 앞두고는 제자들과 함께 가신 이유가 뭘까요? 주님은 이 시험을 통해 두 가지를 보여 주시려 한 것 같습니다. 하나는 인류의 보편적 구원과 개별적 구원에 대해서입니다, 보편적 구원이란 시험을 통해 주님 자신이 영화롭게 되시는 것, 즉 완전한 진리가 되시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개별적 구원은 시험을 통해 신앙인들의 내면에서 선 없는 불완전 진리가 선을 동반한 완전 진리로 변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모든 시험에서 이기는 길은 사랑으로 드리는 기도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신 감람산, 즉 올리브 산은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선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감람산으로 가셔서 주님이 도착하신 곳은 어딜까요? 본문에는 지명을 말하지 않지만, 다른 복음서에서는 그곳을 겟세마네라고 합니다. 겟세마네에서 주님의 모습을 40절과 41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40그곳에 이르러 그들에게 이르시되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 하시고 41그들을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주님이 겟세마네를 마지막 기도의 장소로 택하신 까닭은, 겟세마네(가트 슈마님)는 올리브기름(슈마님)을 짜는 틀(가트)을 말하고, 앞에서 말한 것처럼 올리브기름은 사랑과 인애, 곧 체어리티(charity)의 선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당신 안에 계신 아버지와 전 인류에 대한 지극한 사랑으로 마지막 시험을 감당하시고자 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돌을 던지면 닿을 만한 곳에서 기도하기 시작하셨습니다. 돌을 던지면 닿을 만한 거리에 주님이 계신 것은,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부를 때 언제라도 오셔서 진리를 가지고 싸울 준비가 되어 있음을 뜻합니다. 돌은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성한 진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인들에게 시험이 있을 때 주님은 진리로 오셔서 그들을 위해 싸우십니다. 그렇다고 주님이 무조건 우리들의 시험에 개입하시는 건 아닙니다. 우리가 먼저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주님은 인간의 자유로운 의사를 존중하시기 때문이지요. 어떻게 하는 게 도움을 청하는 걸까요? 주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때 주님이 오셔서 모든 유혹에서 우리를 구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시험에서 이기지 못하거나, 또는 원하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소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도해도 응답이 없는 이유가 뭘까요? 그것에 대해 ‘천국의 비밀’ 2535번 글은,
사람이 사랑과 믿음으로, 그리고 오직 천국과 영적인 것을 위해 기도한다면 그 기도에는 희망과 위로, 또는 어떤 내적 기쁨의 계시 같은 것이 나타난다. (이순철 역) If the man prays from love and faith, and for only heavenly and spiritual things, there then comes forth in the prayer something like a revelation (which is manifested in the affection of him that prays) as to hope, consolation, or a certain inward joy. (AC.2535)
라고 합니다. 이 글을 통해 기도의 응답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이 필요하며, 그 결과로 오는 응답은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많은 경우에 기도의 응답이 없는 이유는, 주님에 대한 사랑과 믿음으로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나라를 바라보지 않고, 세상일에만 골몰하는 사람, 무슨 일이든 진리를 따르는 대신 자기 마음대로 하는 사람은 주님보다는 자기 자신과 세상을 더 사랑하고 믿는 사람입니다. 그런 경우는 기도 응답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열심히 해도 시험에 잘 넘어지거나 원하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자기의 삶을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주님의 뜻과 진리에 따라 이루어질 때 기도 응답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오랫동안 풀리지 않던 문제들이 풀리고, 주님에게서 오는 위로와 희망, 그리고 형언할 수 없는 내적인 기쁨이 있습니다. 그것이 기도 응답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 근처에서 무릎을 꿇고, 다음과 같이 기도하십니다.
42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말씀에서 잔과 포도주는 진리를 뜻하지만, 여기서는 반대로 거짓을 뜻하고, 또한 시험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시험은 결국 거짓이 진리를 공격하고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하신 것은 어떻게 해서든 시험을 피하고 싶은 주님의 인간적인 욕구를 뜻합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에게 남아 있는 불완전한 인간이 하는 기도라는 말입니다. 만일 그 기도가 이루어졌다면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지 않았을 것이고, 그렇다면 인류의 구원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 반전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기도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기도로 말미암아 주님은 지옥과의 싸움에서 완전히 이기실 수 있었습니다. 그때 당신 안에 있는 불완전한 인간의 뜻이 완전히 꺾이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43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 44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되더라
말씀에는 주님이 힘써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마치 핏방울처럼 땅에 떨어졌다고 합니다. 땀이 핏방울처럼 떨어지는 것은 주님이 지독한 두려움과 절망 속에서 싸우시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절망과 고통만 있었던 건 아닙니다. 한편으로는 위로와 희망의 소리도 들렸습니다.
이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창15:1)
라고 아버지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위로가 있었기 때문에, 주님은 죽을 것 같은 시험을 떨치고 일어나실 수 있었습니다.
※ 위 창세기 말씀에서 아브람은 주님을 표상(表象)합니다.
45기도 후에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서 슬픔으로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 46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
주님께서 기도를 마치시고 제자들에게로 가셨습니다. 45절에는 제자들이 슬픔으로 인하여 잠들었다고 했습니다. 시험이 깊을 때는 주님으로부터 버려진 것과 같은 느낌이 듭니다. 지옥이 너무 두렵고 싸울 생각이 없습니다. 기도할 의지도 사라집니다. 일종의 자포자기와 같은 상태가 됩니다. 그런 상태가 제자들이 슬픔에 지쳐 잠이 든 상태입니다. 그렇더라도 주님은 당신의 제자들을 한심해하거나 나무라지 않으시고, 포기하지도 않으십니다. 가만히 다가와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라고 하십니다. 시험을 이기신 능력의 주님이 우리를 깨우시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세상을 향하던 마음을 돌려 주님을 바라봅니다. 그것이 일어나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왜 주님은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었을까요? 그 이유는 주님의 영혼은 신성(神性, Divine)이셨지만, 어머니로부터 받은 인간, 인성(人性, human)은 순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시험을 통해 불완전한 인간을 신성하게 만드셔야 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주님은 아버지이신 신성 앞에 자신을 모두 내려놓고 지극히 겸손하셨습니다. 그와 관련해 ‘참된 기독교’ 104번 글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의 신성과 인성이 하나로 되어가는 것이 비움(Exinanition)의 상태라면 신성과 인성의 합일(union) 그 자체는 영화(Glorification)의 상태이다. 주님은 세상에 계실 때 이 두 상태, 즉 비움의 상태와 영화의 상태로 계셨다. (이순철 역) The progress towards union was his state of exinanition [emptying himself], and the union itself is his state of glorification. when the Lord was in the world he was in two states, called the state of exinanition and the state of glorification. (TCR.104)
그러므로 주님이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신 것은 주님의 겸손과 비움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거룩하신 주님도 비움과 겸손을 통해 지독한 시험들을 이겨내시고 아버지와 분리된 인간을 벗고 아버지와 하나 된 인간이 되셨습니다. 우리도 주님처럼 주님과 이웃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처럼 우리도 승리할 수 있으며, 그렇게 해서 주님과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배운 또 하나의 교훈은 기도할 때는 사랑과 믿음으로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헌금을 많이 하고, 이웃에게 베푸는 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물론 그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원하시는 사랑은 각자 직업에 관한 일과 일상의 일들을 성실하고 정직하게 하는 것입니다. 또 진리가 아닌 것을 멀리하는 것은 사랑 중에서도 첫 번째 사랑입니다. 한 손으로 악을 행하면서 다른 손으로 이웃을 사랑하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얼굴에 난 종기를 그대로 두고 분을 바르는 거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사랑과 믿음과 겸손의 기도를 드리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모든 성도와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함께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사5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