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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5.03.13 21. 눅4:5-13, '주님의 사십 일 광야 시험 (2)' 2

 

주님의 사십 일 광야 시험 (2)

 

 

5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만국을 보이며 6이르되 이 모든 권위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7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8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된 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9또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내리라 10기록되었으되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하였고 11또한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시리라 하였느니라 12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13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 (눅4:5-13)

 

주님은 (어머니로부터 받은) 인성(人性, this human)을 벗으셨을 때 신적 인성(the Divine human)을 입으셨다. 그것 때문에 주님은 신약 성경에 여러 번 언급된 바와 같이 자신을 ‘인자’(the son of man)라 부르시고, 또 ‘하나님의 아들’(the son of God)이라 부르셨다. ‘인자’로서 주님은 진리 자체를 뜻하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주님은 선 자체를 뜻하는데, 그것은 주님의 인간 본질(human essence)이 신성하게 되었을 때 그 본질에 속한 것이었다. ‘인자’의 상태는 주님의 겸비(謙卑)와 관련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의 상태는 주님의 영화와 관련이 있다. (AC.2159:2, 이순철 역)

 

※ AC(Arcana Coelestia, 천국의 비밀) 2159:2번 글에 대한 Clowes 영역본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And when he had put off this human, he put on the Divine human, from which he called himself the ‘son of man’ as we find many times in the Word of the New Testament; and also the ‘son of God’; and by the ‘son of man’ he meant the truth itself, and by the ‘son of God’ the good itself, which belonged to his human essence when this was made Divine. The former state was that of the Lord’s humiliation, but the latter that of his glorification (treated of before, n. 1999). (AC.2159:2, Clowes 역)

 

이는 창세기 18장 3절, ‘이르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시옵고’에 관한 주석 중 ‘원하건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시옵고’ 부분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

 

 

다음은 창14:1-11입니다.

 

1당시에 시날 왕 아므라벨과 엘라살 왕 아리옥과 엘람 왕 그돌라오멜과 고임 왕 디달이 2소돔 왕 베라와 고모라 왕 비르사와 아드마 왕 시납과 스보임 왕 세메벨과 벨라 곧 소알 왕과 싸우니라 3이들이 다 싯딤 골짜기 곧 지금의 염해에 모였더라 4이들이 십이 년 동안 그돌라오멜을 섬기다가 제십삼년에 배반한지라 5제십사년에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한 왕들이 나와서 아스드롯 가르나임에서 르바 족속을, 함에서 수스 족속을, 사웨 기랴다임에서 엠 족속을 치고 6호리 족속을 그 산 세일에서 쳐서 광야 근방 엘바란까지 이르렀으며 7그들이 돌이켜 엔미스밧 곧 가데스에 이르러 아말렉 족속의 온 땅과 하사손다말에 사는 아모리 족속을 친지라 8소돔 왕과 고모라 왕과 아드마 왕과 스보임 왕과 벨라 곧 소알 왕이 나와서 싯딤 골짜기에서 그들과 전쟁을 하기 위하여 진을 쳤더니 9엘람 왕 그돌라오멜과 고임 왕 디달과 시날 왕 아므라벨과 엘라살 왕 아리옥 네 왕이 곧 그 다섯 왕과 맞서니라 10싯딤 골짜기에는 역청 구덩이가 많은지라 소돔 왕과 고모라 왕이 달아날 때에 그들이 거기 빠지고 그 나머지는 산으로 도망하매 11네 왕이 소돔과 고모라의 모든 재물과 양식을 빼앗아 가고 (창14:1-11)

 

여기 보면, 아브라함의 아브람 시절, 엘람 왕 그돌라오멜의 연합군과 소돔 왕 베라의 연합군이 싯딤 골짜기에서 전쟁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전쟁은 소돔과 고모라의 왕들이 그돌라오멜을 12년 동안 섬기다가 이듬해 배반한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돌라오멜은 주변의 다른 왕들과 손을 잡고 그들을 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돌라오멜의 연합군과 소돔 왕의 연합군이 싯딤 골짜기에서 만났는데, 결과는, ‘싯딤 골짜기에는 역청 구덩이가 많은지라 소돔 왕과 고모라 왕이 달아날 때에 그들이 거기 빠지고 그 나머지는 산으로 도망하매’, 즉 그돌라오멜의 연합군이 소돔 왕의 연합군을 이긴 것입니다.

 

주님의 광야 시험에 대해 설명하면서 왜 갑자기 이런 말씀을 드리는가 하면, 이 전쟁이 단순히 가나안 땅에 있었던 왕들의 전쟁만 말하는 게 아니고요, 그 속뜻으로는 어린 시절 주님의 내면에서 벌어진 영적 전쟁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40일간 광야 시험으로 압축해서 표현한 주님의 시험 안에는 당연히 이 전쟁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전쟁이 주님에게 어떤 시험이었는가를 속뜻을 통해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여기서 그돌라오멜 왕과 그 친구들은 어린 시절 주님 안에 있었던 선과 진리들인데, 진정한 선과 진리는 아니고 외견상 선과 진리입니다. 그리고 소돔의 왕들은 외견상 선과 진리 안에 감추어진 이기적인 성향을 나타냅니다. 외견상 선과 진리라는 건 이를테면, 젖먹이들의 천진난만함 같은 것이 외견상의 선과 진리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순수하고 선하게 보이는 그것을 외견상의 선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 천진함 속에 이기적인 것이 숨어있으며, 그러므로 진정한 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소돔과 고모라의 왕들이 그돌라오멜 왕을 섬겼던 기간은, 이기적인 성향들이 천진난만함 속에 가려져 있는 기간입니다. 그러다가 지각이 점점 발달하면서 이기적인 것들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이기적인 것이란, 자기 것을 챙기려 하고, 다른 친구들의 것을 빼앗으려 한다든가 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러한 것이 이기적 성향이 드러나는 것이고, 소돔의 왕들이 그동안 섬기던 그돌라오멜에게 반역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때부터 당신 안의 이기적인 성향과 싸우기 시작하셨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주님은 일찍부터 당신 안에 계신 여호와의 신성으로부터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진리인지 가르침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가르침을 바탕으로 당신의 인성(인간성) 안에 이기적인 것들이 있다는 것을 이미 보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그 이기적인 것들과 치열하게 싸우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돌라오멜 왕의 승리는 그 싸움에서 주님이 승리하신 것을 의미하고요, 그리고 외견상의 선 안에 감추어진 이기적인 것들이 정화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소돔 왕의 군대 가운데 살아남은 자들이 있었습니다. 말씀에는 그들이 산으로 도망했다고 합니다. ‘’은 본래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의미합니다만, 여기서는 반대로 자아에 대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산으로 도망했다는 것은, 이기적인 것들이 그 근원인 자아 사랑으로 돌아가 또 다른 시험을 준비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아직 완전히 이기신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에게 이런 시험들이 있었다는 것을 배경으로 아시고, 오늘 본문으로 이제 돌아가겠습니다. 오늘 5절로 7절까지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5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만국을 보이며 6이르되 이 모든 권위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7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한글 성경에는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로 되어 있지만, 영어 성경에는 ‘주님을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갔다’로 되어 있습니다. ‘’은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자아에 대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주님을 산으로 데리고 가는 것은 마귀가 주님의 인성 안 자아에 대한 사랑을 시험하는 모습입니다. 인간에게 자아와 세상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시험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마귀가 시험할 단서, 꺼리가 없어지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마귀가 주님을 산으로 데리고 간 것은 주님의 자아에 대한 시험입니다. 마귀는 주님에게 순식간에 천하만국을 보여 주면서, 그 권위와 영광을 모두 주겠다고 합니다. 여기 ‘순식간에 천하만국을 보이며’라는 말은, 시험은 아주 순간적으로 온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주님을 생각하면 고맙고 마음이 울컥하다가도, 순간적으로 다른 마음이 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주님이 주시는 선과 진리보다 세상 돈이나 명예, 쾌락이 더 힘이 있는 것처럼 생각되는 마음입니다. 일상생활에서 잠깐씩 그런 마음이 들 때가 있는데요, 그런데 그것이 모두 마귀가 주는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마음이 들 때, 그냥 지나가도록 내버려둬야 합니다. 그 마음을 덥석 붙잡으면 안 됩니다. 그렇게 하는 순간 마귀에게 절하는 것이 되며, 그래서 그것은 지옥의 노예가 되는 일입니다.

 

※ 가령, 로또의 유혹 같은 것도 여기 해당되지 싶습니다. ‘만약 내게 수억의 현금이 생기면 나는 그 돈을 참 은혜롭게 주님 영광 위해 잘 사용할 텐데...’ 하면서 말이지요...

 

마귀는 주님께 자기에게 절하면 천하만국의 권위와 영광이 다 네 것이 되리라고 말하지만, 지옥의 노예가 되는 삶에 무슨 권위와 영광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마귀가 하는 말은 다 거짓말입니다. 주님은 당신을 시험하는 마귀에게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8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된 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이 말씀은 신명기 6장 13절,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를 섬기며 그의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는 말씀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그 순간 마귀는 주님께 무릎을 꿇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능력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주님에 대한 공격이 좌절되자 마귀는 지체함 없이 바로 또 다른 시험을 준비합니다. 그 시험에 대해서 9절 이하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9또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내리라 10기록되었으되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하였고 11또한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시리라 하였느니라

 

한글 성경에는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로 되어 있지만, 영어 성경에는 ‘예루살렘 성전의 첨탑 위에 주님을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예루살렘 성전’은 교회의 교리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교회를 ‘새 예루살렘 교회’라고 부를 때는 그냥 새 교회라는 뜻이 아니고, 이 교회의 교리가 전혀 새로운 교리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전’은 ‘교회의 교리’를 뜻합니다. 그리고 ‘성전 위의 탑’은 ‘자아에 대한 사랑’, 또는 ‘세상에 대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앞 절에서 주님을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간 것과 여기서 성전 탑 꼭대기에 주님을 데리고 간 것은 같은 의미입니다. 왜 그럴까요? 높은 산이나 탑은 모두 우리의 자아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자아가 높은 산이나 첨탑과 같이 그렇게 대단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귀가 주님을 성전 위 탑 꼭대기로 데리고 간 것은, 주님의 인간 안에 있는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 안으로 마귀가 들어와 주님을 유혹하는 모습입니다.

 

마귀는 주님에게 성전에서 뛰어내리라고 했습니다. 영어 성경 표현에는 그냥 뛰어내리라고 한 것이 아니고, 아래로 몸을 던지라고 했습니다. 말씀에서 아래로 몸을 던지는 것은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 548번 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사람이 내세에 들면 먼저 천사들이 맞아들여 모든 선한 도움을 주고, 주님과 천국, 천사의 삶에 대해 들려주며 진리와 선으로 가르친다. 그러나 그 사람이 만일 세상에서 그 모든 것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마음속으로 그것을 부인하고 무시해왔으면, 몇 마디 나눠본 후에 그 천사들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한다. 그것을 감지하자마자 천사들은 그를 떠나게 된다. 다른 이들과의 만남을 여러 번 거치고 나서 마침내 그는 자기와 같은 악 안에 있는 사람들과 어울린다. 이렇게 되고 나면, 그는 주님으로부터 돌아서고, 자기가 세상에서 연결되어 살던 바로 그 지옥을 바라본다. 그 지옥 안에는 자기와 비슷한 악에 대한 사랑을 지닌 사람들이 살고 있다. 주께서는 천사를 통해서 그리고 천국에서 나오는 입류를 통해서 모든 영을 당신께로 이끄시지만, 악 안에 있는 영들은 거세게 저항하고, 마치 자기 자신을 주님으로부터 찢어내듯 하며, 밧줄에 끌려가듯 자기 자신의 악에, 즉 지옥에 끌려간다. 그렇게 끌려가기 때문에, 즉 그들의 악에 대한 사랑이 거기 따라가길 원하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의 자유로 지옥에 뛰어든다는 것이 확실해지는 것이다. 이 세상 사람들은 지옥에 대한 그들의 관념 때문에 이것을 믿지 못한다. 사실, 저 세상에서 지옥 바깥에 있는 사람들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오직 지옥으로 스스로 뛰어드는 사람들 자신에게만 그렇게 보인다. 이것은 그들이 자발적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악에 대한 불타는 사랑으로 지옥에 들어가는 사람은 머리를 아래로 하고, 발을 위로 한 채 뛰어드는 것처럼 나타난다. 이런 모습 때문에, 하나님의 힘에 의해 지옥으로 던져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상 모든 내용은 주께서는 아무도 지옥에 던지지 않으시며, 이 세상에 살 때나 죽은 뒤 영이 된 후에나 사람이 스스로 지옥에 뛰어든다는 것을 보여준다. (HH.548, 김은경 역) //

 

따라서 성전에서 몸을 던지라는 말은 예루살렘 성전, 즉 ‘교회의 교리에서 이탈하라’는 것이고, 그러므로 ‘지옥을 향해 몸을 던지라’는 뜻입니다. 마귀는 종종 이와 같은 유혹을 합니다. 마치 뱀이 하와를 시험하듯이 ‘네가 지키려고 힘쓰는 교회 교리는 너를 구속할 뿐이다. 그러므로 세상 즐거움에 몸을 던져라. 그리하면 네가 자유를 얻을 것이다’라고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것을 본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10기록되었으되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하였고 11또한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시리라 하였느니라

 

마귀는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살지 않고 세상의 쾌락에 몸을 맡겨도 아무 탈이 없을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귀가 ‘기록되었으되’라고 한 것은 아래 시편 91편 11, 12절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11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12그들이 그들의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 (시91:11-12)

 

마귀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해 우리를 유혹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시편의 이 말씀은 우리가 진리를 따라 살 때, 하나님의 영원한 보살핌과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지금 그 반대로 말하고 있습니다. 즉 ‘진리에서 뛰어내리더라도 하나님께서 아무 탈 없이 지켜 주실 것이다’라고 이야기하고요, 또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실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여기 ‘발이 돌에 부딪힌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발은 우리 몸의 가장 낮은 곳에 있기 때문에 가장 낮은 의식, 또는 가장 바깥쪽의 의식인 자연적인 의식, 즉 겉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돌은 진리를 의미합니다. 그러면 마귀는 왜 발에 대해 말했을까요? 사람이 선을 행하거나 악을 행하는 것은 모두 겉 사람이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네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실 것이다’라는 말은 ‘성전, 즉 교리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더라도 겉 사람이 진리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돌에 부딪힌다’ 그랬는데, 영어식 표현은 against stone입니다. stone은 돌이기 때문에 이 말은 돌, 즉 진리에 반(反)한다는 뜻이지요. 즉 ‘네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실 것이다’라는 말은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니 아무렇게나 행동을 해도 진리에 반(反)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사람이 완전히 거듭나게 되면, 마음이 원하는 대로 행동을 하더라도 진리에 어긋나지 않습니다. 소위 공자가 말하는 ‘종심(從心)의 경지’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거듭나는 동안에는 마음이 원한다고 그대로 하면 안 됩니다. 철저히 진리의 명령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마귀는 지금 반대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들으신 주님께서

 

12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물을 달라고 모세를 다그쳤을 때, 그때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너희가 맛사에서 시험한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고 (신6:16)

 

신앙인들은 언제나 주님의 뜻에 따라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자신의 뜻대로 해달라고 주님을 다그칩니다. ‘하나님께서 설마 당신의 자녀들을 버리시겠어?’라고 생각하며 진리를 어기려고 합니다.

 

※ 저는 비교적 꽤 최근까지도, 그러니까 스베덴보리를 알기 전까지는 위와 비슷한 생각과 태도가 제게도 있었는데요, 그것은 주님의 뜻을 잘 모르겠는 일이 생기면 그걸 가지고 충분히 기도하며 주님 뜻 알려고 하는 대신, ‘나는 주의 자녀이니 혹시 내가 하는 이 결정이 잘못된 선택이어도 주님이 수습해 주실 거야’ 하며 어떤 중요한 걸 결정하는, 좀 어처구니없는 태도들이었습니다. 물론 주님은 끝까지 저를 돌보셨지만, 조금 착하고 겸손했더라면, 진심으로 주님을 사랑하여 주님 뜻 구하는 사람이었더라면 훨씬 질러갈 길을 굳이 꾸역꾸역 빙 돌아온 느낌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이 모두 마귀가 주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시며, 한마디로 일축해 버리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주님은 시험을 완전히 이기셨습니다. 본문에서는 그것을

 

13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

 

이렇게 기록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음서에서는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 또는 인자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속뜻으로는 선 측면에서 본 주님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인자’는 진리 측면에서 본 주님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주님이 시험을 받으실 때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받으신 것이 아니라 인자로서 받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지옥은 진리는 공격할 수 있지만, 선은 공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를 한번 들어 보겠습니다. 진리를 가지고 따지는 사람들은 자주 시험에 듭니다. 왜냐하면 진리만 가지고는 거짓을 이기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선이 많은 사람들은 시험에 들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선 안에는 주님이 주시는 모든 능력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짓과 부딪치면 언제나 이깁니다. 그런 이유로 해서 주님은 시험을 받으실 때 인자의 상태, 즉 진리의 상태로 받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말씀에서 마귀는 계속해서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니’라고 말하면서 주님에게 절을 요구하고, 성전 첨탑에서 뛰어내리라고 합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저는 이렇게 이해합니다. 인자의 상태에 계신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아직 진리의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주님을 이미 선의 상태가 되었다 하는 것이고, 그러므로 당신은 이미 전능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귀는 자기에게 절을 해도, 성전에서 뛰어내려도 아무 해가 없을 것이라고 주님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조금 전 말씀드린 것처럼, 선의 상태가 되면 마음이 원하는 대로 어떤 일을 하더라도 진리에 어긋나는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마귀가 그렇게 말하는 것은 주님에게 있는 자아 사랑을 흔드는 것입니다.

 

우리도 가끔 자신이 많이 거듭났다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유혹이 올 때, ‘잠깐 이것을 즐기자. 그렇더라도 나는 언제든지 다시 본래(진리)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어’라고 하며, 쉽게 생각하고 자신 있어 하는데요, 그것은 마치 몸에 해로운 기호품을 끊었던 사람이 ‘나는 언제든지 이것을 끊을 수 있어’라고 하면서 다시 그걸 가까이하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그것은 마귀가 주는 생각이고요, 교만한 마음입니다. 마귀는 주님에게도 그런 생각을 불어넣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자의 상태에 계신 주님에게 ‘당신은 이미 선의 상태이니 아무 일이나 해도 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말씀에서는 그것을 마귀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고 하면서 주님을 유혹하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그런 생각이 들 때 우리는 어떻게 물리칩니까? 그 방법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머리로만 기억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의 능력을 믿어야 하고요, 그리고 시험에서 이기겠다는 결의가 있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말씀 안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능력이 흘러들어와 모든 부정한 생각들을 흩어버리십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새 교회 모든 성도와, 또 진리 안에 있는 모든 분과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 (사42:1)

 

아멘

 

원본

2017-06-11(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3-21(D3)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021. 2023-03-21(D3)-매일예배(2438, 눅4,5-13), '주님의 사십 일 광야 시험 (2)'.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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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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