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사십 일 광야 시험 (1)

 

 

1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2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 3마귀가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 4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된 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 (눅4:1-4)

 

 

모든 시험은 사람의 사랑에 대한 공격이며, 시험은 그 사랑과 같은 정도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사랑이 공격받지 않으면 시험은 없다. 어떤 사람의 사랑을 파괴하는 것은 그의 생명을 파괴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은 곧 생명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생명은 전 인류에 대한 사랑이었다. 주님의 그 생명에 대해 시험이 허용되었고, 그것은 주님이 아주 어릴 때부터 세상에서의 마지막 시간에까지 계속되었다. (AC.1690)

 

※ AC(Arcana Coelestia, 천국의 비밀) 1690번 글에 대한 Clowes 영역본은 아래와 같습니다.

 

All temptation is an assault upon the love in which the man is, and the temptation is in the same degree as is the love. If the love is not assaulted, there is no temptation. To destroy anyone’s love is to destroy his very life; for the love is the life. The Lord’s life was love toward the whole human race, and was indeed so great, and of such a quality, as to be nothing but pure love. Against this his life, continual temptations were admitted, as before said, from his earliest childhood to his last hour in the world. (n. 1690:3).

 

이는 창세기 14장 10절, ‘싯딤 골짜기에는 역청 구덩이가 많은지라 소돔 왕과 고모라 왕이 달아날 때에 그들이 거기 빠지고 그 나머지는 산으로 도망하매’에 관한 주석 중 ‘그 나머지는 산으로 도망하매’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

 

 

오늘 예배를 드리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예배 인도를 담임이 하니까 마치 담임이 모든 일을 하는 것처럼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성가대의 찬양이 있고, 기도해 주시는 목사님이 계시고, 또 보이지 않는 곳에서 헌신하시는 우리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역할을 할 때, 우리 교회는 아름다운 교회, 경건한 교회,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로 성장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진리만 가지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선이 있는 진리이어야 합니다. 우리 각자가 선이 있는 진리로서 묵묵히 헌신할 때, 그 진리는 이웃들의 마음에 조용히 젖어 들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그런 교회로 성장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말씀을 시작하겠습니다.

 

창세기 12장 1, 2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1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창12:1-2)

 

사람들 대부분은 이 말씀이 아브라함이 아브람 시절, 여호와를 처음 만나 하란을 떠나는 모습을 그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속뜻으로 볼 때 이 말씀은, 주님께서 아주 어리실 때 당신 안에 계신 여호와를 처음 만나는 장면을 기술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고 주님이신 것이지요.

 

※ 말씀에 나오는 모든 등장인물은 주님의 표상입니다. 심지어 악인도 말입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자기 인생을 살다 갔지만, 사실은 마치 무대 위 배우들처럼 주님을 연기한 것입니다.

 

주님도 처음에는 당신 자신이 보통의 어린이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점점 지각이 생기면서 당신 안에 여호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여호와로부터 당신이 어떤 존재인지, 또 어떤 사명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여기서는 아브라함의 이름을 ‘아브람’이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은 거룩하신 주님을 나타냅니다. 영어로 알파벳 ‘H’자가 그런 뜻이라고 합니다.

 

※ AC 1416번 글 두 번째 항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Concerning Abraham it is said: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창17:5) Thy name shall not any more be called Abram, and thy name shall be Abraham, for the father of a multitude of nations have I given thee (Gen. 17:5).

 

The letter h in “Abraham” was taken from the name Jehovah, on account of his representation of Jehovah or the Lord. In like manner it is said of Sarai:

 

15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사라라 하라 16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여러 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창17:15-16) Thou shalt not call her name Sarai, but Sarah shall her name be. And I will bless her, and also give thee a son of her; thus I will bless her, and she shall become nations; kings of peoples shall be of her (Gen. 17:15–16);

 

where “nations” denote the celestial things of love, and “kings of peoples” the spiritual things of faith thence derived, which belong to the Lord alone.

 

이는 창세기 12장 2절,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에 관한 주석 중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에 나오는 내용으로, ‘아브라함’(Abraham)의 ‘h’는 아브라함이 여호와 혹은 주님을 표상하기 때문에 그 이름 여호와에서 취한 것이라고 합니다. //

 

반대로 ‘아브람’은 거룩하게 되시기 전의 주님을 나타냅니다. 주님이 거룩하지 않다고 하는 이유는, 주님께서 처음 세상에 오셨을 때, 그러니까 아주 어린 시절, 주님의 인성 가운데는 마리아로부터 받은 유전적 악이 그대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말씀에서는 그것을 아브라함이 하란에서 세겜으로 옮길 때 ‘그 땅에 가나안 사람이 거주하였다’라는 식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에서 ‘가나안 사람’은 바로 주님 안에 있는, 마리아로부터 받은 유전적 악인 것입니다.

 

주님 안에 악이 있었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그 악은 주님 자신이 저지른 악이 아니며, 모두가 마리아로부터 유전된 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은 왜 당신 안에 악이 있도록 허용하셨을까요? 그 첫 번째 이유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인간의 몸을 입으실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악이 있어야 시험을 불러들일 수 있고요, 그리고 그 시험을 통해 지옥을 정복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악이 없으면 시험도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당신 안에 악을 허용하시고, 그것을 통해 시험을 불러들이셨습니다. 주님께서 당신 안에 악을 허용하신 세 번째 이유는, 주님은 당신이 시험을 당하고 거룩하게 되신 것처럼, 인간도 그렇게 거듭나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스스로 거듭남의 모범이 되시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무한한 사랑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주님의 그런 사랑을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하면서 말씀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 주님은 천국보다 크시고 지옥보다 크셔서 신성 그 자체로 직접 오실 수 없으십니다. 만일 그런 일이 일어나면 천국도 지옥도 그냥 소멸해 버리기 때문인데요, 그래서 주님은 천국이든 지옥이든 또는 이 세상이든 지으신 이 피조세계에 임하실 때는 피조물들을 보호하시기 위해 일종의 보호장치를 사전에 마련하십니다. 그것이 예를 들면, 삼층천 천사들에게조차 투명한 얇은 겉옷을 입히신 것이고요, 인성을 입으시고 지옥을 찾으신 것입니다. 주님은 지옥, 즉 지옥에 있는 모든 비참한 영들조차 여전히 사랑하시기에 주님의 방문으로 그들이 소멸되지 않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본문 1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1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셨다’라고 합니다. 요단강은 가나안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강입니다. 그래서 요단강을 건너거나, 또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는다고 하는 것은, 영적인 의미로는 신앙의 진리를 처음 받아들일 때를 의미합니다. 신앙의 진리를 받아들여야 우리는 교회에 속한 사람이 될 수 있고요, 또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단강을 건넌다는 것은 신앙의 진리를 처음 받아들일 때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때는 마치 아기가 걸음마를 배우기도 전의 상태와 같아서 진리를 배우기는 하는데, 아직 행함은 없는 상태입니다. 다시 말하면 진리만 있고, 아직 선은 없는 상태입니다. 주님도 처음에는 그런 과정을 거치셨습니다. 그러다 점차 진리를 뜨겁게 사랑하게 되셨을 것입니다. 진리를 사랑한다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자기가 배운 진리를 삶을 통해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리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진리는 더 이상 지식적인 진리가 아니라, 그 바탕에 선이 있는 진리로 변하게 됩니다. 본문에 주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는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주님도 어린 시절에는 당신 안에 성령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지각할 뿐 아니라 뜨겁게 사랑하면서 성령이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계속되는 말씀에서 주님은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셨다’고 합니다. 광야는 시험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광야로 가신 것은 주님에게 시험이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성령에 이끌리셨다고 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주님께서 성령 충만할 때까지 기다리셨다가 시험을 불러들이셨다는 뜻입니다. 성령의 역사, 즉 선이 있는 진리의 역사가 없으면 시험에서 이길 수 없습니다. 주님도 예외가 아니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성령 충만할 정도로 영적으로 성장하실 때까지 기다리셨다가 시험을 불러들이신 것입니다. 주님은 단 한 번의 시험도 실패하시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사십 일 동안’이란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시험이 처음 시작될 때부터 끝날 때까지 전체 기간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볼 때, ‘사십 일’은 주님이 아주 어릴 적부터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시기까지의 모든 기간을 의미합니다.

 

※ 말씀에서 이 ‘40’이라는 숫자는 여러 번 나옵니다. 노아의 홍수 때 ‘사십 주야를 땅에 비를 내려’(창7:4)라든지, 모세가 호렙산에서 보낸 기간인, ‘모세가 사십 일 사십 야를 산에 있으니라’(출24:18)라든지,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에서 보낸 기간인, ‘이스라엘 자손이 사십 년 동안 만나를 먹었으니’(출16:15), 그리고 가나안을 정탐하고 돌아온, ‘사십 일 동안 땅을 정탐하기를 마치고 돌아와’(민13:25) 등을 볼 때,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이 ‘사십’이라는 숫자는 ‘전체’, ‘모두’를 의미함을 알 수 있습니다. 참고로, 성경 앱을 열고, ‘사십’이라는 키워드로 검색하시면 어마어마하게 나오는 걸 보실 수 있습니다.

 

따라서 40일간의 시험은 그 속뜻으로는 말씀에 기록된 것처럼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직후에 있었던 일이 아닙니다. 즉 선과 진리에 대한 지각이 생기면서부터 주님은 끊임없이 시험을 받으셨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영적 성장은 보통의 인간과는 비교할 수 없이 빨랐기 때문입니다. 그것에 대해 누가복음 2장 52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눅2:52)

 

주님이 아주 빠른 속도로 거룩하게 되시는 모습을 그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음 2절과 3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2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 3마귀가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

 

이 말씀에서 주님을 시험하는 ‘마귀’는 지옥 전체를 의미합니다.

 

※ 다음은 이와 관련, ‘천국과 지옥’ 544번 글입니다.

 

지금까지 세상에는 지옥을 관장하는 한 악마가 있으며, 그는 빛의 천사로 지음 받았으나 반역하여 그 일당과 함께 지옥에 떨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믿음이 퍼져있는 것은 사람들이 성경 말씀에 마귀, 사탄, 루시퍼라는 이름이 언급되어 있는 구절들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귀’와 ‘사탄’은 지옥을 의미한다. ‘마귀’는 악마라고 불리는, 가장 악한 사람들이 있는 뒤쪽 지옥이다. ‘사탄’은 악령이라고 불리는 덜 악한 사람들이 있는 앞쪽 지옥이다. ‘루시퍼’는 바벨 또는 바빌론에 속한 사람들로, 천국까지도 지배하려고 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혼자서 지옥 전체를 주관하는 악마는 없다는 것은 다음의 사실로도 분명히 알 수 있다. 지옥은 천국과 마찬가지로 모두 사람으로 이루어진다는 것(311–317항), 그리고 창조 이래 지금까지 지옥에 간 사람은 무수히 많으며, 그 모두가 다 이 세상 삶에서 신성을 적대한 정도만큼 악마라는 사실이다(311, 312항). //

 

그러니까 지옥 전체가 주님을 넘어뜨리기 위해 덤벼들었던 것입니다. 주님을 넘어뜨린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말하면, 주님의 사랑, 즉 인간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또 주님께서 ‘이 모든 날에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셨다’고 했는데, 이 말씀은 음식을 드시지 못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물론 주님께서 광야에서 음식을 드시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적 의미로 보면 그런 뜻이 아니고, 시험 가운데서 주님이 영적인 양식을 전혀 섭취하지 못하셨다는 뜻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영적 양식을 섭취하지 못하는 것처럼 느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시험 중에 그런 경험을 합니다. 자신에게 진리와 선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 느낄 때가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주님의 보살핌이 없이 혼자 싸운다는 뜻입니다. 그때 지옥은 우리에게 있는 거짓과 악을 들춰내면서 계속 우리를 추궁합니다. ‘너는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이야’라고 하면서 우리를 절망 상태로 몰아넣습니다. 만약 그때 주님께서 함께하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싸움을 이길 수 없을 것입니다. 주님은 시험 중에 우리와 가장 가까이 계십니다. 다만 우리가 그렇게 느끼지 못할 뿐입니다. 주님도 십자가 위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부르짖으시지 않았습니까!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마27:46)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아무 것도 잡수시지 못한다는 것은 극한의 시험 속에서 여호와께서 당신을 버리시는 것 같이 느끼시는 것이고, 그래서 여호와로부터 진리와 선이 전혀 흘러들어오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악을 끊고 선을 행하는 일이 참으로 어렵습니다. 마음은 간절히 원하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도 그런 어려움을 느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느끼시는 허기(虛飢)는 본질적으로는 선에 대한 갈증입니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인간에 대한 무한한 사랑이 있습니다.

 

마귀가 주님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은 진리를 의미하고, ‘’은 세상의 양식을 의미합니다. 본래 떡은 영적 양식인 선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 반대로 쓰였습니다. 그렇다면 세상 양식은 어떤 것입니까? 음식이나 재물, 건강이나 명예 같은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은 육신의 생명을 살찌울지는 몰라도 영을 살찌울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유한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마귀는 돌을 떡이 되게 하라고 합니다. 썩어버릴 떡을 위해서 영원한 진리를 버리라고 유혹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시험 중에 그런 유혹을 받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을 때나 건강을 잃었을 때, 또는 어떤 욕망에 시달릴 때, 진리를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 것이 모두 마귀의 시험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4절입니다.

 

4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된 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

 

주님은 ‘기록된 바’라고 말씀하세요. 신명기 8장 3절에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신8:3)

 

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시험을 이기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 이외에 다른 것은 없습니다. 인간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 안에는 반드시 선이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선이 있는 말씀을 소유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행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에게 있는 말씀 가운데 선이 깃들고 능력이 생깁니다. 주님은 그렇게 해서 첫 번째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음서에는 주님께서 시험받으셨다는 기록이 별로 없습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40일간 광야 시험과 겟세마네 동산의 시험, 그리고 십자가상에서의 마지막 시험, 그것이 거의 전부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조차도 당신의 시험에 대해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광야 40일간의 시험은 주님 생애에 잠깐 있었던 시험이 아닙니다. 아주 어릴 적부터 시작, 숨을 거두시는 마지막 순간까지 지속되었던 모든 시험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시험은 인간의 시험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 시험의 강도는 인간에 대한 주님의 무한한 사랑에 비례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시험이 얼마나 지독하고 가혹한 것이었는지는 인간의 머리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그 모든 시험을 묵묵히 이기셨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계시는 동안의 모습으로도 주님이 얼마나 진실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분인지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마귀는 허기와 갈증을 집요하게 파고들면서 주님을 시험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배고픔은 세상의 떡에 대한 갈증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선에 대한 갈증이며 인간에 대한 끝없는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귀에게 ‘기록된 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은 주님의 시험에 대한 것이지만 동시에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시험을 이기시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행할 때 능력이 있습니다. 모든 새 교회 식구들과 또 이 진리 안에 있는 모든 형제자매께서는 이 말씀 가운데서 크고 작은 시험들을 이겨내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사53:7)

 

아멘

 

원본

2017-05-28(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3-20(D2)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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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의 속뜻

 

 

21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22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23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위는 헬리요 24그 위는 맛닷이요 그 위는 레위요 그 위는 멜기요 그 위는 얀나요 그 위는 요셉이요 25그 위는 맛다디아요 그 위는 아모스요 그 위는 나훔이요 그 위는 에슬리요 그 위는 낙개요 26그 위는 마앗이요 그 위는 맛다디아요 그 위는 서머인이요 그 위는 요섹이요 그 위는 요다요 27그 위는 요아난이요 그 위는 레사요 그 위는 스룹바벨이요 그 위는 스알디엘이요 그 위는 네리요 28그 위는 멜기요 그 위는 앗디요 그 위는 고삼이요 그 위는 엘마담이요 그 위는 에르요 29그 위는 예수요 그 위는 엘리에서요 그 위는 요림이요 그 위는 맛닷이요 그 위는 레위요 30그 위는 시므온이요 그 위는 유다요 그 위는 요셉이요 그 위는 요남이요 그 위는 엘리아김이요 31그 위는 멜레아요 그 위는 멘나요 그 위는 맛다다요 그 위는 나단이요 그 위는 다윗이요 32그 위는 이새요 그 위는 오벳이요 그 위는 보아스요 그 위는 살몬이요 그 위는 나손이요 33그 위는 아미나답이요 그 위는 아니요 그 위는 헤스론이요 그 위는 베레스요 그 위는 유다요 34그 위는 야곱이요 그 위는 이삭이요 그 위는 아브라함이요 그 위는 데라요 그 위는 나홀이요 35그 위는 스룩이요 그 위는 르우요 그 위는 벨렉이요 그 위는 헤버요 그 위는 살라요 36그 위는 가이난이요 그 위는 아박삿이요 그 위는 셈이요 그 위는 노아요 그 위는 레멕이요 37그 위는 므두셀라요 그 위는 에녹이요 그 위는 야렛이요 그 위는 마할랄렐이요 그 위는 가이난이요 38그 위는 에노스요 그 위는 셋이요 그 위는 아담이요 그 위는 하나님이시니라 (눅3:21-38)

 

 

주님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이유는 스스로 본보기가 되어 장래를 위해 세례의 관례를 만드시기 위함뿐 아니라 당신께서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고, 영적으로 만드시는 것처럼, 주님도 당신의 인성을 영화롭게 하시고 신성하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TCR.684, 이순철 역)

 

※ TCR(True Christian Religion, 참된 기독교) 위 684번 글에 대한 Ager 영역본은 아래와 같습니다.

 

This he did not only that he might institute baptism for the future, himself setting the example, but also because he glorified his human and made it divine, as he regenerates man and renders him spiritual. (TCR.684, Ager 역) //

 

※ 본래 ‘침례’(浸禮)라는 표기가 맞지만, 현 신약 성경에 ‘세례’(洗禮)로 되어 있어, 혼란을 피하기 위해 이후 ‘세례’로 통일하겠습니다.

 

※ 신약 성서 원어인 헬라어 원전에 의하면, ‘침례’(浸禮, baptism, 헬, βἀπτισμα)가 맞습니다. 그럼에도 한글 성경에 ‘세례’(洗禮)가 채택된 것은, 광복 전 성경 한글화 작업으로 각 교단이 모였을 때 침례교만 빠졌기 때문입니다. 침례교 대표가 연락을 받지 못했기 때문인데, 이는 당시 대부분의 교단은 효과적 선교를 위해 큰 도시 위주로 움직여 연락이 수월했던 반면, 침례교만 유독 내륙 오지나 바닷가 농어촌 선교에 힘써 그렇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이런 표기 문제 때문인지 일본어 성경은 그냥 원어를 그대로 표기합니다.

 

 

세례요한이 요단강 부근에서 세례를 베풀 때, 많은 사람은 그가 혹시 메시아인가?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요한은 그들에게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그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라며, 자기는 그리스도가 아님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속뜻으로 본다면, 요한과 주님은 모두 말씀을 표상합니다. 그러나 요한으로 표상되는 말씀과 주님으로 표상되는 말씀은 근본적으로 다른데요, 주님으로 표상되는 말씀은 외적 진리와 내적 진리를 모두 포괄하는 반면, 요한으로 표상되는 말씀은 외적 진리, 즉 겉 글자인 문자적 의미만을 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으로 표상되는 진리만으로는 거듭날 수 없습니다. 세례요한, 즉 말씀의 문자적 의미로는 주님께로 나아올 수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까지는 말씀의 문자적 의미가 나름의 역할을 할 수 있지만, 그러나 우리는 그 이상으로 더 나아가 거듭나서 구원까지 받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주님을 바라보고, 그다음은 더 나아가 악을 끊고 선을 행해야 합니다. 그런데 말씀의 지식만 가지고는 그런 능력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의 지식 속으로 진정한 진리이신 주님이 오셔야 하며, 그때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성령과 불로 악을 끊고 선을 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신다’ 하고, 또 ‘그가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 한 것입니다. 성령과 불은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선을 동반한 진리, 즉 진리뿐인 진리가 아니고요, 사랑이 있는 진리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요한의 말을 정확하게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럼에도 요한에게 너도나도 세례를 받았습니다. 사람들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다는 이것은, 교회의 마지막 때, 사람들이 새로운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통해 의식이 바뀌는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사람들이 세례를 받을 때, 주님께서도 오셔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21절입니다.

 

21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백성들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만, 그러나 주님께서 세례를 받으신다는 것은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더구나 요한은 주님께서 친히 보내신 선지자인데, 그런 그에게 주님께서 세례를 자청하신 것입니다. 다음은 이 장면에 관한 마태복음의 기록입니다.

 

13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부터 요단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시니 14요한이 말려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15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마3:13-15)

 

주님은 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고 하실까요? 그것에 대해 ‘참된 기독교’ 684번 글에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주님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이유는 스스로 본보기가 되어 장래를 위해 세례의 관례를 만드시기 위함뿐 아니라 당신께서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고, 영적으로 만드시는 것처럼, 주님도 당신의 인성을 영화롭게 하시고 신성하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주님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심으로 세례의 전통을 세우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세례와 성찬을 통해 거듭나 구원받는 것처럼, 주님 역시 자기 안에 계신 여호와의 능력으로 자신의 불완전한 인성(人性, human), 마리아를 통해 유전한 인성을 신성하게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주님도 인간이 거듭나는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인성을 거룩하게 하셨고, 그래서 여느 인간처럼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는 사실에서 주님의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사랑이 느껴집니다. 아시는 것처럼 유대 교회가 문을 닫으면서 예배와 관련된 모든 표징, 표상들이 사라졌습니다. 이를테면, 성전의 양식이라든가 기물들, 그리고 번제와 희생제물의 영적 의미들이 모두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런 가운데 주님께서는 두 가지 상징적 예전만 남기셨는데요, 하나는 세례이고, 다른 하나는 성찬입니다. 그러니까 세례식에서 이마에 물을 바르거나 침례식에서 물속에 잠기고, 성찬식에서 포도주와 무교병(떡, 빵)을 먹는 건 그냥 하는 형식적인 게 아니라는 것이지요.

 

※ 참고로, 이마에 물을 바르는, 어디서는 손에 물을 따라 머리에 붓는, 세례는 후대에 생긴 것입니다. 좀 쉽고 편하게 하자고 생긴 편법이지요. 주님이 요한에게 받으신 세례는 몸 전체를 물에 담그는 침례(浸禮)였습니다. 영어로는 뱁티즘, 원어인 헬라어로는 밥티조마라 합니다.

 

주님은 이 예전들을 통해서 인간과 하나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세례와 성찬은 새 교회에서는 대단히 중요한 예배 의식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이 두 가지 예배의 전례(典禮)를 친히 만드셨다는 사실을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하신 첫 번째 이유는, 그것이 속 사람의 개혁과 겉 사람의 거듭남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세례는 속 사람의 개혁을 의미하고요, 성찬에 참여하는 것은 겉 사람이 거듭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례와 성찬을 제정하신 두 번째 이유는, 그것이 인간이 거듭나는 것처럼 주님도 같은 방법으로 영화(榮化, Glorification)하심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의 속 사람과 겉 사람이 하나로 결합하는 것처럼, 주님의 인성과 신성이 하나로 결합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인성이 영화롭게 되신 것과 인간이 거듭나는 것은 동전의 양면처럼 떼려야 뗄 수 없는 하나입니다. 그렇게 볼 때, 주님이 당신의 인성을 영화롭게 하신 일은, 주님이 세상에 계실 때 일어났던 일회적인 일이 아니며, 모든 신앙인의 내면에서 지금도 현재 진행 중인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은 지금도 거듭나는 사람들 안에서 치욕을 당하시고 지옥을 이기시며, 계속해서 당신의 인성을 영화롭게 만드십니다.

 

※ 우리는 악을 직접 상대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악에서 물러나 영적 전투에서 이길 수 있는 이유는, 사실은 우리 안에서 주님이 대신 싸우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다음 말씀의 속뜻입니다.

 

28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11:28-30) //

 

그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불완전한 진리가 선이 있는 진리, 완전한 진리로 계속해서 바뀌어 감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셨다’ 한 것입니다. 세례와 성찬은 백성들만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주님도 함께 세례를 받으시고요, 우리가 성만찬을 할 때, 주님도 함께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거듭날 때, 주님의 인성도 우리 안에서 계속해서 영화롭게 되십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은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셨다’는 이 말씀이 아닐까 합니다. 거듭나는 모든 과정에 있어 주님이 우리와 늘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는 거듭날 수 있습니다.

 

거듭남은 우리 혼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렸다’ 하는데요, 이 말씀은 주님과 우리가 함께 세례를 받을 때, 속 사람이 열리며, 천국과 연결된다는 뜻입니다. 혼자 힘으로 거듭나려는 사람은 속 사람이 닫힙니다. 그렇게 되면 주님이 그에게 오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 거듭나고자 하는 사람의 경우는 속 사람이 열리고, 주님으로부터 생명이 흘러 들어옵니다. 그 모습을 22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합니다.

 

22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셨다’는 것은 우리가 주님과 함께 거듭날 때 속 사람이 열리고,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해 진리와 선이 흘러들어오는 모습입니다. 그것을 ‘비둘기 같다’ 표현한 까닭은, ‘비둘기’는 속뜻으로 주님으로부터 오는 믿음의 진리와 선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강림하실 때, 하늘로부터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여기서 아들은 주님의 신적 인성(神的 人性, Divine Human)을 나타냅니다. ‘신적 인성’이란 신성한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신적 인성이신 주님을 아들이라 하는 것은, 주님의 신적 인성은 존재 자체이신 여호와 하나님이 바깥으로 드러나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존재 자체이시고, 사랑 자체이신 여호와 하나님이 일차적인 주님이시라면, 그분의 바깥으로, 겉으로 드러나심인 신적 인성으로서의 주님은 이차적인 주님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일차적이신 주님, 즉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신 여호와를 우리는 아버지라 부르고요, 그분에게서 비롯한 이차적이신 주님, 즉 인간이신 예수님을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 하나님 따로, 아들 하나님 따로 계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만약 그렇게 믿는다면 대단히 안타깝고 불행한 일입니다. 우리는 한 분 하나님을 섬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 저는 소위 모태신앙으로 장로교 통합에서 유아세례 및 주일학교를, 그리고 고등학교 때 침례교회에 처음 출석, 침례교인이 되었으며, 이후 침례교 신학을 하여 침례교 목사가 되었습니다. 늦게 신학을 하여 신대원 어느 조직신학 시간에 삼위일체에 대한 시간이었는데, 그때 ‘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음 접하고, 무척 감동하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 생각하면 거 참... 하며 많이 부끄러운데요, 그러나 여전히 기독교와 개신교 거의 모든 교인은 삼위일체에 대하여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고 봅니다. 다소 좀 뿌연 생각인데요, 수년 전 무슨 금식기도를 배우러 대전 어느 대형 교회 유명 세미나를 다닌 적이 있는데, 그곳 주 강사이신 목사님도 하나님들을 따로따로 부르며 기도하시더군요...

 

그러므로 주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한 것은, 여호와께서 당신과 함께 거듭나는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는가를 말해줍니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주님께서 세례의 전례를 직접 선포하신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23절에서는

 

23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위는 헬리요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가 30세쯤이라고 합니다. 30이란 수는 5와 6을 곱한 수입니다. 그래서 내적 싸움 중에도 작은 싸움을 의미합니다. 그 이유는, 숫자 6은 내적 싸움을 의미하고, 숫자 5는 작은 것, 사소한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 말씀에 나오는 나이와 관련된 숫자들, 가령 창5에 나오는 아담,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 므두셀라, 라멕, 노아 등의 나이들은 그 이름으로 일컫던 교회들의 때와 상태들(the times and states of the church)을 의미합니다. 특히 가장 기본이 되는 1, 2, 3, 4, 5, 6, 7, 8, 9, 10 등의 수들 및 그 복합수들 역시 어떤 아르카나를 담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세례를 받으실 즈음의 주님은 이미 대부분의 시험을 이기신 상태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때 주님이 당하시는 시험들은 아주 사소한 시험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주님에게 남아 있는 큰 싸움이 있다면,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시험과 마지막 십자가의 고난 정도였을 것이라고 짐작됩니다. 본문에서는 주님의 그런 영적 상태를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라고 표현했습니다.

 

24절로 37절까지는 요셉으로부터 조상들에 이르는 가문의 계보가 나옵니다. 사실 요셉은 예수님과는 상관이 없는 사람입니다. 단지 그가 마리아의 남편이라는 사실 때문에, 그리고 표면상으로 주님의 후견인이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의 아버지로 비쳤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 오늘 말씀에서는 무려 14절에 걸쳐 요셉의 가계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요셉의 가계는 주님께서 세상에 오실 때까지 존재했던 모든 교회의 기록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37절에 나오는 아담은 인류 역사상 가장 순수했던 태고교회를 상징하고요, 그다음에 나오는 노아는 고대교회를 상징합니다. 또 한참 내려가 야곱이 나오는데, 야곱 역시 고대교회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30절에 등장하는 시므온은 거듭남의 두 번째 상태를 나타내고, 유다는 거듭남의 네 번째 상태를 나타냅니다. 시므온으로 표상되는 거듭남의 두 번째 상태는 진리를 의도하기 시작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진리를 배운 다음 행동으로 옮기고자 하는 의욕이 생기는 상태입니다. 그것이 시므온으로 상징되는 교회의 상태입니다. 그러면 거듭남의 네 번째 상태, 즉 유다는 어떤 상태입니까? 거듭남의 네 번째 상태는 진리의 인도를 받지 않고, 선의 인도를 받는 상태입니다. 다시 말하면 진리가 시키는 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일어나는 애정, 또는 욕구에 따라 행동하는 상태입니다. 그렇게 해도 진리에 어긋남이 없는 상태가 거듭남의 네 번째 상태입니다. 그것을 선의 인도를 받는 상태라고 하는 것은, 선은 바로 애정과 통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나오는 요셉은 영적 교회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24절부터 34절까지에 기록된 요셉의 가계는 그동안에 있었던 모든 교회의 영적 상태를 나타냅니다.

 

23절에서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라 한 것은, 그동안 모든 교회를 다스리던 주님은 본질적으로 진리 그 자체이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아들은 진리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셉과 아무런 관계가 없어 보이는 주님을 요셉의 아들이라고 하고, 또한 요셉의 족보를 차례로 기록한 것입니다. 다만 이 말씀을 읽는 사람들이 혹시 오해를 하지는 않을까 해서, 그냥 ‘요셉의 아들’이라 하지 않고,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라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세심하신 배려가 느껴지는 부분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니케아 종교회의(AD 325, 니케아, 현 튀르키예 이즈니크) 당시에 아리우스파 같은 이단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주장했던 것은 ‘예수는 요셉의 자손’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최근에 제가 아는 어떤 분과 대화를 나누는데, 그분이 또 그러세요. 우리나라에서 서너 번째 안에 드는 교파에 소속된 어떤 교인이 주님을 요셉의 자손이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 교회의 교리가 그런 건지, 아니면 그분의 사적 견해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많이 놀랐습니다. 그런 오해를 할 수가 있기 때문에, 말씀에서는 이렇게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라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주님께서 요한에게 직접 세례를 받으신 이유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주님은 세례를 베푸시는 분이지 세례를 받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여느 사람들처럼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를 다시 말씀드리면, 첫째는 세례의 전통을 제정하시기 위해서이고, 둘째는 주님도 세상에 오셔서 인간이 거듭나는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당신의 인성을 거룩하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볼 때, 주님이 받으신 세례는 주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고, 오직 인간의 구원을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세례와 성찬에 참여하시는 것은 거듭남의 모든 과정에서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시는 일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는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 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셨다’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와 함께 싸우시고, 우리와 함께 예배를 드리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신 것처럼, 우리도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버려야 할 것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오셔서 무슨 일이든 우리와 함께하실 수 있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새 교회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시니 (요12:28)

 

아멘

 

 

원본

2017-05-14(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3-19(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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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조의 속뜻

 

 

...오늘은 특별히 우리의 헌금생활 중 십일조에 대하여, 그 아르카나(arcana, 秘義, 속뜻)에 대하여 같이 나누고자 합니다.

구약성경에서 십일조에 관한 거의 첫 본문이라 할 수 있는 곳은 바로 창세기 14장, 아브람이 살렘 왕 멜기세덱에게 드린 부분입니다.

17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한 왕들을 쳐부수고 돌아올 때에 소돔 왕이 사웨 골짜기 곧 왕의 골짜기로 나와 그를 영접하였고 18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19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20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창14:17-20)

여기 20절,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에 나오는 이 ‘십분의 일’에 관하여, 창세기 주석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38번 글을 보면 이렇게 풀이하고 있습니다.

 

십일조(tithes)가 리메인스(remains)를 상징한다, 가리킨다는 사실은 앞에서 여러 번 말씀드렸습니다만 다시 한번 말씀드리면, 리메인스라는 것은 사랑과 체어리티(charity, 이웃 사랑, 선행, 인애)의 모든 상태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 사랑의 모든 상태, 이웃 사랑의 모든 상태들을 말하며,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순진함(innocence)과 평화(peace)의 모든 상태, 곧 천국의 모든 상태이며, 주님은 이런 상태, 이런 리메인스를 거듭남의 과정을 걷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선물로 주십니다. 이 상태들이 사람에게 그 유아기 때부터 주어져 어른이 되면서 점점 줄어들지만 그러다가 거듭남이 시작되면 사람은 다시 이번에는 새로운 리메인스를 받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주님이 주시는 새 생명입니다. 사람이 진정 사람이 되는 것은 바로 이 리메인스로부터, 또는 리메인스에 의해서이며, 만약 사람에게 이 주님 사랑, 이웃 사랑의 상태가 없다면, 그래서 결국 순진함의 상태가 없다면 사람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니며, 그때는 오히려 짐승보다도 더 최악이 됩니다. 사람은 순진함이 있어 자기도 모르게 점점 더 생명의 다른 상태들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본문에서 말하는 리메인스는 시험을 이김으로써 얻는 리메인스입니다. 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싸워 이긴 후, 멜기세덱에게 바친 십일조를 가지고 이 리메인스를 표현한 것입니다. 이 리메인스는 사랑의 모든 상태, 곧 사랑의 모든 천적인 것들인데, 주님도 마리아로 유전한 인성을 입고 계신 동안은 지속적인 싸움과 이김을 통해서 힘들게 습득하신 것입니다. 이것으로 주님은 끊임없이 주님의 신적 본성과 결합하셨고, 같은 방식으로 주님의 인성이 사랑, 곧 생명 그 자체, 곧 여호와가 되실 때까지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That this signifies remains derived from victory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tithes” as being remains (spoken of before, n. 576). But what remains are may be seen above (n. 468, 530, 560–561, 661, 1050), namely, that they are all the states of love and charity, and consequently all the states of innocence and peace, with which a man is gifted. These states are given to man from infancy, but less by degrees as the man advances into adult age. But when a man is being regenerated, he then receives new remains also, besides the former, thus new life. For it is from remains, or by remains, that a man is a man; for without the state of love and charity, and without the state of innocence—which states instill themselves into the other states of his life—a man is not a man, but is worse than any wild beast. The remains acquired in the combats of temptations are those which are here meant. These remains are what are signified by the tithes given to Melchizedek by Abram; and they are all the celestial things of love which the Lord procured to himself by the continual combats and victories by which he was continually being united to his Divine essence, until his human essence in like manner became love, or the being of life, that is, Jehovah.

 

이해가 되시나요? 좀 어렵지 않으신지... 스베덴보리의 글들은 천계(天界), 초월적 지혜의 나라의 일을 매우 제한적인 지상의 언어로 표현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는지 원문은 사실 이보다 더 간략하고 문장과 문장 사이, 글과 글 사이 무슨 배경지식이 없으면 한 번에 이해하기가 다소 좀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위 주석을 제가 이해한 바로 좀 쉽게 풀이하자면...

모든 사람은 거듭남의 유무와 관계없이 일단은 주님으로부터 첫 번째 리메인스라는 것을 선물로 받습니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사람은 어떻게든 결국 선 쪽으로 기울어지는데요, 물론 사람들 중에는 끝까지 주님을 거절하여 선보다는 악을, 천국보다는 지옥을 선택, 결국 멸망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말입니다. 주님의 이 첫 번째 선물로 말미암아 사람은 여러 우여곡절 끝에 거듭남의 여정을 시작하며, 일단 거듭남이 시작되면 이제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두 번째 리메인스를 또 선물로 받습니다. 이 선물로 말미암아 사람은 생명, 곧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주님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발자국을 떼는 것이지요. 사람은 주님의 선물, 주님의 호의, 주님의 돌보심 없이는 결코 거듭남의 여정을 시작도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탐욕과 거짓의 덩어리, 곧 악의 덩어리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입니다. 사람 안에 주님이 넣어 두신, 주님으로 말미암은 이 리메인스라는 것이 있다는 것, 그리고 이것이 ‘십분의 일’로 표현된,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십일조’라 일컫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무슨 이쁜 짓을 하고, 무슨 기특한 행실을 보일 수 있는 것도 다 우리 안에 넣어 두신 이 리메인스 덕분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이것으로 멜기세덱, 곧 여호와 하나님으로 나타나신 주님을 공경하였습니다. ‘주님, 이것은 주님의 것입니다. 이것으로 제가 롯을 데려올 수 있었습니다.’ 사례한 것입니다. 이것이 십일조의 아르카나입니다.

이 멜기세덱 본문을 보다 더 온전히 이해하려면 그돌라오멜, 소돔왕, 그리고 롯과 아브람의 속뜻, 그 아르카나가 무엇이며, 그들 간 전쟁과 그 결과, 그리고 멜기세덱과 그가 들고 온 ‘떡과 포도주’의 아르카나가 무엇인지 등을 알아야 하지만 그것은 내용이 깊어지므로 다음에 기회 있을 때 정식으로(?) 다루기로 하고요, 여기서는 간략히만 말씀드리면...

주님도 인성을 입고 오셔서 처음에는 외견상의 선과 진리(apparent good and truth), 겉으로 보기엔 선이요, 진리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닌 것, 가짜인 것들과 끊임없이 싸우셨습니다. 그것이 아브람과 그돌라오멜 간 전쟁입니다. 아브람은 주님의 합리성(合理性, rationality)을, 그돌라오멜은 외견상 진리를, 롯은 주님의 겉 사람을 각각 가리킵니다. 겉 사람과 합리성은 같이 있어야 하는데 겉 사람이 합리성을 떠나 가짜 진리에게 사로잡힌 것을 롯이 아브람을 떠나 소돔에 있다가 그돌라오멜에게 사로잡힌 것으로 본문은 말씀하고 있는 것이며, 주님이 이 가짜들과 싸워 이기신 후, 주님의 겉 사람이 속 사람이신 여호와 하나님께로 온전히 인도된 것을 아브람이 롯을 데리고 멜기세덱을 만난 것과 그의 ‘떡과 포도주’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네, 여기서는 이 정도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렇게 간략하게라도 소개를 하고 넘어가는 것은, 말씀(the Word)은 정말 철저하게 상응(相應, correspondence)으로 기록되었다는 것과 그래서 정말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깊은 아르카나로 기록되었다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신명기 14장 28절, 29절입니다.

28매 삼 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의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29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 중에 거류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신14:28-29)

십분의 일’을 가지고 주님이 무슨 일을 하시는지를 말씀하시는 본문입니다. 주님은 이 ‘십분의 일’을 가지고 레위인과 객, 고아와 과부들을 돌보십니다. 이들은 겉뜻으로도 그렇지만 속뜻으로도 영적 결핍을 뜻합니다. 주님은 거듭남을 시작한 사람들이 주님이 주시는 두 번째 리메인스를 가지고 이런 영적 결핍 해결하기를 원하십니다. 거듭남의 여정 가운데 있는 우리는 정말 그래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우리와 우리의 이웃들에게 있는 이 영적 결핍들을 돌아보고 채워주는 일에 이 두 번째 리메인스를 열심히 사용해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 아브라함의 십일조 본문을 통해, 그리고 오늘 주님 말씀 마태복음 본문을 통해 우리가 확인하는 사실들이 있습니다.

먼저, 십일조를 드린다, 십일조 헌금을 한다는 것은 단순한 헌금 행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주님이 넣어주신 선한 능력, 리메인스를 잘, 그리고 열심히 사용하여 더욱 주님으로부터 더욱더 많은 리메인스가 우리 속 사람 안에 공급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 드리는 개념이 아닌, 주님의 것이 우리 안에 쌓이는 개념입니다.

말라기 말씀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말3:10)

여기 ‘시험하여’는 ‘증명하여’(prove, verify)라는 뜻입니다.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 자신의 믿음을 입증하라, 증명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온전한 십일조를 드릴 때, 주님은 우리 안에 더욱 더 넘치게 주님의 리메인스를 공급하십니다. 그리고 이런 넘치는 리메인스로 우리는 더욱더 쉽게 거듭남의 여정, 곧 영적 싸움을 싸울 수 있습니다.

또 하나, 내 것을 드리는 게 아니라 사실은 주님의 것을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리메인스라는 것을 우리는 두 번 다 거저 받았습니다. 우리가 악을 이겨 낼 근본 능력을 우리도 모르게 주님께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주신 것으로 살며, 영적 전투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은 사실은 모두 주님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이 사실을 시인하며 사는 삶은 복된 삶이며, 그럴수록 우리는 더욱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게 되며, 우리가 드리는 것이 사실은 우리 안에 리메인스로 쌓이게 되는 것입니다. 아멘, 할렐루야!

오늘 본문, 주님 말씀입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마23:23)

박하와 회향, 근채의 십일조는 외적인 십일조입니다. 정의와 긍휼, 믿음의 십일조는 내적인 십일조입니다. 이 둘은 같이 갑니다. 외적 십일조는 내적 십일조가 겉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십일조를 하지 않는 사람의 신앙이 온전할 수 없고, 반대로 온전한 신앙의 사람이 십일조 헌금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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