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사십 일 광야 시험 (1)
1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2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 3마귀가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 4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된 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 (눅4:1-4)
모든 시험은 사람의 사랑에 대한 공격이며, 시험은 그 사랑과 같은 정도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사랑이 공격받지 않으면 시험은 없다. 어떤 사람의 사랑을 파괴하는 것은 그의 생명을 파괴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은 곧 생명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생명은 전 인류에 대한 사랑이었다. 주님의 그 생명에 대해 시험이 허용되었고, 그것은 주님이 아주 어릴 때부터 세상에서의 마지막 시간에까지 계속되었다. (AC.1690)
※ AC(Arcana Coelestia, 천국의 비밀) 1690번 글에 대한 Clowes 영역본은 아래와 같습니다.
All temptation is an assault upon the love in which the man is, and the temptation is in the same degree as is the love. If the love is not assaulted, there is no temptation. To destroy anyone’s love is to destroy his very life; for the love is the life. The Lord’s life was love toward the whole human race, and was indeed so great, and of such a quality, as to be nothing but pure love. Against this his life, continual temptations were admitted, as before said, from his earliest childhood to his last hour in the world. (n. 1690:3).
이는 창세기 14장 10절, ‘싯딤 골짜기에는 역청 구덩이가 많은지라 소돔 왕과 고모라 왕이 달아날 때에 그들이 거기 빠지고 그 나머지는 산으로 도망하매’에 관한 주석 중 ‘그 나머지는 산으로 도망하매’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
오늘 예배를 드리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예배 인도를 담임이 하니까 마치 담임이 모든 일을 하는 것처럼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성가대의 찬양이 있고, 기도해 주시는 목사님이 계시고, 또 보이지 않는 곳에서 헌신하시는 우리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역할을 할 때, 우리 교회는 아름다운 교회, 경건한 교회,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로 성장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진리만 가지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선이 있는 진리이어야 합니다. 우리 각자가 선이 있는 진리로서 묵묵히 헌신할 때, 그 진리는 이웃들의 마음에 조용히 젖어 들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그런 교회로 성장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말씀을 시작하겠습니다.
창세기 12장 1, 2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1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창12:1-2)
사람들 대부분은 이 말씀이 아브라함이 아브람 시절, 여호와를 처음 만나 하란을 떠나는 모습을 그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속뜻으로 볼 때 이 말씀은, 주님께서 아주 어리실 때 당신 안에 계신 여호와를 처음 만나는 장면을 기술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고 주님이신 것이지요.
※ 말씀에 나오는 모든 등장인물은 주님의 표상입니다. 심지어 악인도 말입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자기 인생을 살다 갔지만, 사실은 마치 무대 위 배우들처럼 주님을 연기한 것입니다.
주님도 처음에는 당신 자신이 보통의 어린이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점점 지각이 생기면서 당신 안에 여호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여호와로부터 당신이 어떤 존재인지, 또 어떤 사명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여기서는 아브라함의 이름을 ‘아브람’이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은 거룩하신 주님을 나타냅니다. 영어로 알파벳 ‘H’자가 그런 뜻이라고 합니다.
※ AC 1416번 글 두 번째 항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Concerning Abraham it is said: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창17:5) Thy name shall not any more be called Abram, and thy name shall be Abraham, for the father of a multitude of nations have I given thee (Gen. 17:5).
The letter h in “Abraham” was taken from the name Jehovah, on account of his representation of Jehovah or the Lord. In like manner it is said of Sarai:
15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사라라 하라 16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여러 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창17:15-16) Thou shalt not call her name Sarai, but Sarah shall her name be. And I will bless her, and also give thee a son of her; thus I will bless her, and she shall become nations; kings of peoples shall be of her (Gen. 17:15–16);
where “nations” denote the celestial things of love, and “kings of peoples” the spiritual things of faith thence derived, which belong to the Lord alone.
이는 창세기 12장 2절,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에 관한 주석 중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에 나오는 내용으로, ‘아브라함’(Abraham)의 ‘h’는 아브라함이 여호와 혹은 주님을 표상하기 때문에 그 이름 여호와에서 취한 것이라고 합니다. //
반대로 ‘아브람’은 거룩하게 되시기 전의 주님을 나타냅니다. 주님이 거룩하지 않다고 하는 이유는, 주님께서 처음 세상에 오셨을 때, 그러니까 아주 어린 시절, 주님의 인성 가운데는 마리아로부터 받은 유전적 악이 그대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말씀에서는 그것을 아브라함이 하란에서 세겜으로 옮길 때 ‘그 땅에 가나안 사람이 거주하였다’라는 식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에서 ‘가나안 사람’은 바로 주님 안에 있는, 마리아로부터 받은 유전적 악인 것입니다.
주님 안에 악이 있었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그 악은 주님 자신이 저지른 악이 아니며, 모두가 마리아로부터 유전된 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은 왜 당신 안에 악이 있도록 허용하셨을까요? 그 첫 번째 이유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인간의 몸을 입으실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악이 있어야 시험을 불러들일 수 있고요, 그리고 그 시험을 통해 지옥을 정복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악이 없으면 시험도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당신 안에 악을 허용하시고, 그것을 통해 시험을 불러들이셨습니다. 주님께서 당신 안에 악을 허용하신 세 번째 이유는, 주님은 당신이 시험을 당하고 거룩하게 되신 것처럼, 인간도 그렇게 거듭나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스스로 거듭남의 모범이 되시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무한한 사랑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주님의 그런 사랑을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하면서 말씀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 주님은 천국보다 크시고 지옥보다 크셔서 신성 그 자체로 직접 오실 수 없으십니다. 만일 그런 일이 일어나면 천국도 지옥도 그냥 소멸해 버리기 때문인데요, 그래서 주님은 천국이든 지옥이든 또는 이 세상이든 지으신 이 피조세계에 임하실 때는 피조물들을 보호하시기 위해 일종의 보호장치를 사전에 마련하십니다. 그것이 예를 들면, 삼층천 천사들에게조차 투명한 얇은 겉옷을 입히신 것이고요, 인성을 입으시고 지옥을 찾으신 것입니다. 주님은 지옥, 즉 지옥에 있는 모든 비참한 영들조차 여전히 사랑하시기에 주님의 방문으로 그들이 소멸되지 않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본문 1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1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셨다’라고 합니다. 요단강은 가나안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강입니다. 그래서 요단강을 건너거나, 또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는다고 하는 것은, 영적인 의미로는 신앙의 진리를 처음 받아들일 때를 의미합니다. 신앙의 진리를 받아들여야 우리는 교회에 속한 사람이 될 수 있고요, 또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단강을 건넌다는 것은 신앙의 진리를 처음 받아들일 때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때는 마치 아기가 걸음마를 배우기도 전의 상태와 같아서 진리를 배우기는 하는데, 아직 행함은 없는 상태입니다. 다시 말하면 진리만 있고, 아직 선은 없는 상태입니다. 주님도 처음에는 그런 과정을 거치셨습니다. 그러다 점차 진리를 뜨겁게 사랑하게 되셨을 것입니다. 진리를 사랑한다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자기가 배운 진리를 삶을 통해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리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진리는 더 이상 지식적인 진리가 아니라, 그 바탕에 선이 있는 진리로 변하게 됩니다. 본문에 주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는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주님도 어린 시절에는 당신 안에 성령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지각할 뿐 아니라 뜨겁게 사랑하면서 성령이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계속되는 말씀에서 주님은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셨다’고 합니다. 광야는 시험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광야로 가신 것은 주님에게 시험이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성령에 이끌리셨다고 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주님께서 성령 충만할 때까지 기다리셨다가 시험을 불러들이셨다는 뜻입니다. 성령의 역사, 즉 선이 있는 진리의 역사가 없으면 시험에서 이길 수 없습니다. 주님도 예외가 아니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성령 충만할 정도로 영적으로 성장하실 때까지 기다리셨다가 시험을 불러들이신 것입니다. 주님은 단 한 번의 시험도 실패하시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사십 일 동안’이란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시험이 처음 시작될 때부터 끝날 때까지 전체 기간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볼 때, ‘사십 일’은 주님이 아주 어릴 적부터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시기까지의 모든 기간을 의미합니다.
※ 말씀에서 이 ‘40’이라는 숫자는 여러 번 나옵니다. 노아의 홍수 때 ‘사십 주야를 땅에 비를 내려’(창7:4)라든지, 모세가 호렙산에서 보낸 기간인, ‘모세가 사십 일 사십 야를 산에 있으니라’(출24:18)라든지,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에서 보낸 기간인, ‘이스라엘 자손이 사십 년 동안 만나를 먹었으니’(출16:15), 그리고 가나안을 정탐하고 돌아온, ‘사십 일 동안 땅을 정탐하기를 마치고 돌아와’(민13:25) 등을 볼 때,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이 ‘사십’이라는 숫자는 ‘전체’, ‘모두’를 의미함을 알 수 있습니다. 참고로, 성경 앱을 열고, ‘사십’이라는 키워드로 검색하시면 어마어마하게 나오는 걸 보실 수 있습니다.
따라서 40일간의 시험은 그 속뜻으로는 말씀에 기록된 것처럼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직후에 있었던 일이 아닙니다. 즉 선과 진리에 대한 지각이 생기면서부터 주님은 끊임없이 시험을 받으셨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영적 성장은 보통의 인간과는 비교할 수 없이 빨랐기 때문입니다. 그것에 대해 누가복음 2장 52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눅2:52)
주님이 아주 빠른 속도로 거룩하게 되시는 모습을 그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음 2절과 3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2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 3마귀가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
이 말씀에서 주님을 시험하는 ‘마귀’는 지옥 전체를 의미합니다.
※ 다음은 이와 관련, ‘천국과 지옥’ 544번 글입니다.
지금까지 세상에는 지옥을 관장하는 한 악마가 있으며, 그는 빛의 천사로 지음 받았으나 반역하여 그 일당과 함께 지옥에 떨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믿음이 퍼져있는 것은 사람들이 성경 말씀에 마귀, 사탄, 루시퍼라는 이름이 언급되어 있는 구절들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귀’와 ‘사탄’은 지옥을 의미한다. ‘마귀’는 악마라고 불리는, 가장 악한 사람들이 있는 뒤쪽 지옥이다. ‘사탄’은 악령이라고 불리는 덜 악한 사람들이 있는 앞쪽 지옥이다. ‘루시퍼’는 바벨 또는 바빌론에 속한 사람들로, 천국까지도 지배하려고 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혼자서 지옥 전체를 주관하는 악마는 없다는 것은 다음의 사실로도 분명히 알 수 있다. 지옥은 천국과 마찬가지로 모두 사람으로 이루어진다는 것(311–317항), 그리고 창조 이래 지금까지 지옥에 간 사람은 무수히 많으며, 그 모두가 다 이 세상 삶에서 신성을 적대한 정도만큼 악마라는 사실이다(311, 312항). //
그러니까 지옥 전체가 주님을 넘어뜨리기 위해 덤벼들었던 것입니다. 주님을 넘어뜨린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말하면, 주님의 사랑, 즉 인간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또 주님께서 ‘이 모든 날에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셨다’고 했는데, 이 말씀은 음식을 드시지 못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물론 주님께서 광야에서 음식을 드시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적 의미로 보면 그런 뜻이 아니고, 시험 가운데서 주님이 영적인 양식을 전혀 섭취하지 못하셨다는 뜻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영적 양식을 섭취하지 못하는 것처럼 느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시험 중에 그런 경험을 합니다. 자신에게 진리와 선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 느낄 때가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주님의 보살핌이 없이 혼자 싸운다는 뜻입니다. 그때 지옥은 우리에게 있는 거짓과 악을 들춰내면서 계속 우리를 추궁합니다. ‘너는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이야’라고 하면서 우리를 절망 상태로 몰아넣습니다. 만약 그때 주님께서 함께하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싸움을 이길 수 없을 것입니다. 주님은 시험 중에 우리와 가장 가까이 계십니다. 다만 우리가 그렇게 느끼지 못할 뿐입니다. 주님도 십자가 위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부르짖으시지 않았습니까!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마27:46)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아무 것도 잡수시지 못한다는 것은 극한의 시험 속에서 여호와께서 당신을 버리시는 것 같이 느끼시는 것이고, 그래서 여호와로부터 진리와 선이 전혀 흘러들어오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악을 끊고 선을 행하는 일이 참으로 어렵습니다. 마음은 간절히 원하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도 그런 어려움을 느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느끼시는 허기(虛飢)는 본질적으로는 선에 대한 갈증입니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인간에 대한 무한한 사랑이 있습니다.
마귀가 주님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돌’은 진리를 의미하고, ‘떡’은 세상의 양식을 의미합니다. 본래 떡은 영적 양식인 선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 반대로 쓰였습니다. 그렇다면 세상 양식은 어떤 것입니까? 음식이나 재물, 건강이나 명예 같은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은 육신의 생명을 살찌울지는 몰라도 영을 살찌울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유한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마귀는 돌을 떡이 되게 하라고 합니다. 썩어버릴 떡을 위해서 영원한 진리를 버리라고 유혹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시험 중에 그런 유혹을 받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을 때나 건강을 잃었을 때, 또는 어떤 욕망에 시달릴 때, 진리를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 것이 모두 마귀의 시험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4절입니다.
4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된 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
주님은 ‘기록된 바’라고 말씀하세요. 신명기 8장 3절에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신8:3)
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시험을 이기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 이외에 다른 것은 없습니다. 인간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 안에는 반드시 선이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선이 있는 말씀을 소유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행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에게 있는 말씀 가운데 선이 깃들고 능력이 생깁니다. 주님은 그렇게 해서 첫 번째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음서에는 주님께서 시험받으셨다는 기록이 별로 없습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40일간 광야 시험과 겟세마네 동산의 시험, 그리고 십자가상에서의 마지막 시험, 그것이 거의 전부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조차도 당신의 시험에 대해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광야 40일간의 시험은 주님 생애에 잠깐 있었던 시험이 아닙니다. 아주 어릴 적부터 시작, 숨을 거두시는 마지막 순간까지 지속되었던 모든 시험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시험은 인간의 시험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 시험의 강도는 인간에 대한 주님의 무한한 사랑에 비례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시험이 얼마나 지독하고 가혹한 것이었는지는 인간의 머리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그 모든 시험을 묵묵히 이기셨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계시는 동안의 모습으로도 주님이 얼마나 진실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분인지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마귀는 허기와 갈증을 집요하게 파고들면서 주님을 시험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배고픔은 세상의 떡에 대한 갈증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선에 대한 갈증이며 인간에 대한 끝없는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귀에게 ‘기록된 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은 주님의 시험에 대한 것이지만 동시에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시험을 이기시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행할 때 능력이 있습니다. 모든 새 교회 식구들과 또 이 진리 안에 있는 모든 형제자매께서는 이 말씀 가운데서 크고 작은 시험들을 이겨내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사53:7)
아멘
원본
2017-05-28(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3-20(D2)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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