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말은 얼핏 상대방에게 아첨, 아부하라는 말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그런 말이 아니라 상대방이 감당할 수 있는 말로 대답하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내면이 열린 만큼만 들으며,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브리엘 앞에 사가랴처럼, 주님이 말씀하시는데 들을 역량이 안 되면 그가 들릴 때까지 잠시 벙어리가 되는 일도 일어납니다. 그러니까 이젠 그만 깨달아야 하는데 자만과 교만, 자기 사랑, 세상 사랑 등으로 좀체 정신 못 차리면 차릴 때까지 다시, 다시하며 비슷한 패턴의 불행한 일이 계속 반복되기도 합니다. 제 경우엔, 기억나는 큰 것만 한 서너 가지가 있었네요...이 역시 우리를 성장케 하시는 주님의 사랑의 섭리이시지만, 그러나 그 과정을 통과하는 본인은 죽을 맛입니다.
다른 말로는 하나님이 듣고 싶어 하시는 대답을 하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즉 정답을 말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 앞에 해야 한다는 것은, 세상에 태어나 어떤 인생을 살든 결국은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이니까요. 창세기를 비롯, 구약 중 말씀에 등장하는 등장인물들 하나하나가 사실은 주님의 표상이었듯 우리네 인생 역시 둘 사이 대화든 셋 사이 대화든, 아니 그 이상이든 사실은 주님 앞에 입을 여는 것입니다. 바로 앞에 요셉이 그랬고, 요셉 앞에 유다가 그랬으며, 여러 왕을 섬겼던 다니엘이 그랬습니다. 이슬에 젖으며 짐승처럼 풀을 먹던 느부갓네살이 그랬고, 완전 상거지가 되어 아버지를 찾아간 둘째 또한 그랬습니다.
26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7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에게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28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29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중에서 이십 세 이상으로서 계수된 자 곧 나를 원망한 자 전부가 30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에게 살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민14:26-30)
그냥 힘들어 무심코, 그리고 부주의하게 내뱉은 불평 한마디 한마디가 사실은 하나님 앞에 하는 것임을 저들은 몰랐던 것입니다.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무서운 말씀입니다.
천사들이 늘 주님의 얼굴을 향하듯, 사실은 주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천사들을 늘 주님을 향하게 하시는 것이지만, 세상 가운데서 구별되어 사실은 늘 주님을 향하고 있는 우리 역시 깨어있어야 하겠습니다. 단순한 일대일 대화든지, 일대다 무슨 팀 회의든지 우리는 늘 주님을 생각하고 입을 열어야 하겠습니다. 천사들이 전하는 말은 100% 주님 뜻, 자기 생각은 전혀 그 안에 담기지 않은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흐릿하고 모자라지만, 그래도 천진난만하게 저 천사들처럼 주님을 바라면 저들과 똑같이 지금도 주님은 그때그때 해야 할 말을 우리 입에 넣어주십니다. 아래 말씀처럼 말입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요14:26)
덧붙이자면, 그러므로 누가 나한테 하는 말에 너무 일희일비할 필요 없습니다. 오히려 대부분은 듣고 깜짝 놀라며, ‘아, 나는 이 정도밖에 아닌 거구나...’ 긴장하는 게 좋습니다. 칭찬 앞에서도 말입니다. 중요한 건, 나에 대한 사람의 평가가 아니라 나의 내면에 들리는 주님의 음성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집중하시면, 그다음부터는 사람들이 나에 대해 뭐라 하던 잘 안 들립니다. 그냥 덤덤해지지요. 무시와 모욕을 당해도 그러려니... 즉, ‘주님의 무슨 허락 있으신 게지...’ 하고, 칭찬과 영광 앞에서는 ‘이런 건 주님이 받으셔야...’ 하며 안 흔들립니다.
오늘날 저마다 무슨 이단 대책 위원회다, 이단 심판, 혹은 판정 위원회다 하여 열심히 자기에게 속한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정성을 다합니다. ‘현대종교’라는 앱을 켜면 수많은 이단 목록이 나오지요. 전에는 저도 여기를 자주 찾곤 했습니다. 이 모든 분들의 노고를 모르는 바 아니며, 한편으론 감사한 마음도 있습니다.
시야가 좀 더 높아진, 그리고 넓어진 지금은, 그러나 이 ‘이단’(heresy)에 대한 생각이 좀 달라졌습니다. 지금의 저 이단 판정의 기준은 ‘교리’인데요, 즉 내 교리를 기준으로 봤을 때, 너는 틀렸다 판정하는 것이 지금의 이단 판정입니다. 교리라는 것은 진리에서 추출하는 것이므로, 그러니까 내가 진리라고 믿는 것들로 봤을 때, 네가 믿는 진리는 틀렸다는 것이죠.
이런 모습은 ‘영적인 사람들’(the spiritual)의 일반적 특징인데요, 놀라운 것은, 이들은 ‘지적인 면’(the intellectual part)으로만 거듭날 수 있어, 주님은 이들 역시 온전한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새로운 의지를 심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저마다 믿는 그 교리 눈높이에 맞춰서 말이죠. 그러니까 누구나 자기가 믿는 교리에 따라 선을 행하면 천국 가는 데 아무 지장이 없다는 것입니다. 거기 묻은 좀 어설픈 오류들은 천국에 오르기 전 다 정돈되니까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중요한 건, 교리가 아니라 사랑입니다. 자기 교리에 녹아져 들어간 주님의 신성을 따라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천국에 합당한 선이 구비되기 때문인데, 천국은 선의 나라이므로 이는 매우 중요한 필수 구비 요건 중 하나입니다.참고로, 그러나 이 선을 행하는 것 또한 오직 주님으로만 말미암는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첫 번째 책 창세기에 나오는 첫 번째 이단이 가인입니다. 창세기 첫 1, 2, 3장의 태고교회는 사랑으로 주님을 신앙하는 교회였으나, 창세기 4장,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하는 사람들이 일어납니다. 바로 가인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가인과 아벨이 나오는데요, 이들의 속뜻을 살펴보면,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교리를 ‘가인’(Cain)이라 하고, 이웃을 향한 사랑인 체어리티(charity, 이웃 사랑)를 ‘아벨’(Abel)이라고 합니다.
이것입니다. 이것이 이단의 기준입니다. 즉 가인 편에 서면 이단, 아벨 편에 서면 정통(?), 그러니까 안전합니다. 자신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사랑과 신앙이 일치하는가? 그러니까 나는 주님 사랑 따로, 주님 신앙 따로인가 아닌가 말이죠. 말로만, 립 서비스로만 이웃 사랑을 하고 있는 건 아닌가 말입니다. 안타깝게도 이런 글 쓰는 저 자신도 여기서 자유롭지 못하네요... 어쩌면 우리 모두 여전히 가인의 후손, 후예인지 모르겠어요. 이런 우리를 건사하여 주시는 주님, 진심으로 고맙고 감사합니다...
1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2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보고 3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하더라 4이로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5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6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7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 8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9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에게 알리니 10(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그들과 함께 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알리니라) 11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 12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부려 들여다보니 세마포만 보이는지라 그 된 일을 놀랍게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 (눅24:1-12)
사람의 생명에 속한 모든 것은 내적인 것에서 외적인 것으로 차례로 흘러들어온다. 외적인 것은 호감이 느껴지는 기억의 지식과 가장 바깥쪽의 것인 감각에 속한 것인데, 감각에 속한 것이란,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 맡고, 만짐으로써 세상과 소통하는 것이다. 외적인 것에 내적인 것들이 머무는 까닭은 내적인 것의 흐름이 거기서 끝나기 때문이다. 영적 의미로 사람이 걸치는 피복이나 옷으로 나타내어지는 것은 바로 이 외적인 것을 말한다. (천국의 비밀 9216:2, 이순철 역) It is the same with all things that belong to man’s very life, as with those which relate to his understanding, and those which relate to his will. These also follow in order from interior to exterior things. Exterior things are memory-knowledges with their pleasant feelings; and outermost things are those of the senses, which communicate with the world by the sight, the hearing, the taste, the smell, and the touch. Upon these the interior things rest, for in these they terminate. These are the things which are signified in the spiritual sense by the “covering” or “garment wherein he may sleep.” (AC.9216:2, 출22:26, ‘그가 무엇을 입고 자겠느냐’의 풀이 중)
※ 이 원고 중 ‘※’ 표시는 원고에 없는, 제가 더한 보충 설명입니다. 이 설명은 한 단락일 경우는 뒤에 아무 마감 표시가 없지만, 두 단락이 넘어가면 ‘//’로 마감합니다. 비록 원고일지라도 상당 부분 우리 교회 실정에 맞게 좀 다듬었습니다. 원고 사용에 관한 원 저자의 사전 허락을 받았습니다.
※ 오늘은 기독교의 부활절입니다. 주님 오신 성탄절, 그리고 가을 추수감사절과 함께 중요한 절기이지요. 그래서 ‘부활’에 관한 지난 설교 한 편을 다시 기억하고자 합니다.
주님은 왜 세상에 오셔서 고난을 받고 죽었다 다시 사셨을까요? 그와 관련해 스베덴보리 저,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9216번 글 2항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의 생명에 속한 모든 것은 내적인 것에서 외적인 것으로 차례로 흘러들어온다... 외적인 것에 내적인 것들이 머무는 까닭은 내적인 것의 흐름이 거기서 끝나기 때문이다.
이 말은 여러 가지로 이해할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가장 내적 존재인 주님은 가장 외적 존재인 인간에게로 오셔서 영원히 그와 함께 살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섭리입니다. 영원 전부터 계신 무한하신 주님이 당신의 피조물인 유한한 인간과 영원히 함께 살기를 원하신다는 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님은 당신의 생명을 내어주실 정도로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지극히 높은 천국으로부터 지극히 낮은 땅으로 내려오셔서 모진 고난을 이기시고, 신성하고 완전한 진리가 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진리를 통해서만 인간은 주님을 바르게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최근 ‘유월절’에 관한 속뜻 공부를 하면서 새롭게 알게 된 놀라운 사실들이 있는데 오늘 여기서 그걸 자세히 다룰 수는 없어 중요한 몇 문장에 대한 번역으로 대신합니다.
1. ‘영적인 사람들’(the spiritual)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지적인 면(the intellectual part)에서만 거듭날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고, 의지적인 면(the will part)에서는 아니다. 그래서 그들의 지적인 면에 주님은 새로운 의지를 심어주시는데, 이 의지는 그들의 교회와 관련되는 신앙의 교리적인 것들을 따르는 의지다. (AC.6854)
※ 즉 영적인 사람들의 특징 중 하나는 이들의 신앙과 그에 따른 교리가 다양하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진리라고 믿는 것에서 교리를 추출하고, 그걸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인데요, 하지만 주님은 저들의 다양성을 인정, 거기에 맞춰 어떤 새로운 의지를 주신다는 겁니다.
2. 이들, 곧 이런 영적인 사람들은 오직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심으로만 구원을 받았다. 그 이유는, 천국을 통과하는 신성(the Divine passing through heaven), 이 신성은 주님이 오시기 전 신적 인성(the Divine human before the Lord’s coming)이었는데, 이 신성은 그들에게 도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 교회의 교리적인 것들 때문이었는데, 그것들은 대부분 진리가 아니었고, 그 결과 그 의지에서 나오는 선은 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AC.6427)
3. 그들은 오직 주님이 오셔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었고, 그래서 그전엔 천국에 올라갈 수 없었으며, 그래서 그들은 그동안 ‘낮은 땅’(the lower earth)이라는 곳에 보내어져 돌봄 받고 있었다. 이곳은 말씀에서 ‘구덩이’(pits)라고 하는 곳이다. 이 땅은 거짓이 가득한 지옥들로 둘러싸여 있었고, 그 거짓으로 인해 그들은 심하게 감염되었지만, 그러나 주님이 그들을 보호하셨다.
4. 그러나 주님이 세상에 오셔서, 스스로 인성(the human)을 신성(Divine)으로 만드신 후, 이 ‘구덩이’에 있던 사람들을 구원, 천국으로 올려보내셨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 영적 천국, 즉 이층천을 만드셨는데, 이것이 주님이 더 낮은 지역으로 내려오셔서 갇힌 자들을 구원하신다는,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출3:8)라는 말씀의 속뜻이다.
5. ‘영적인 사람들’(the spiritual)은 그 신앙의 진리와 선에 있어 흐릿, 모호하다. (AC.2708, 2715, 2718, 2831, 2849, 2935, 2937, 3241, 3833, 6289)
6. 그들의 흐릿함, 모호함(obscurity)은 주님의 신적 인성에 의해 조명, 그러니까 밝혀진다. (AC.2716, 4402)
7. 그들은 신앙의 진리와 선에 있어 흐릿하고 모호하기 때문에 지옥의 공격을 많이 받지만, 주님은 그들을 끊임없이 보호하신다. (AC.6419)
8. 영적인 사람들은 의지적인 면으로는 거듭날 수 없고, 단지 지적인 면으로만이지만, 주님에 의해 거기에 새 의지가 형성된다. (AC.863, 875, 895, 927, 928, 1023, 1043, 1044, 2256, 4328, 4493, 5113)
9. 영적인 사람들은 주님이 세상에 오심으로 구원을 받았다. (AC.2833, 2834, 3969)
그러니까 영원하신 창조주 주님은 단지 이 세대뿐 아니라 홍수 이후 주님 오시기 전 인류의 구원에 대해서도 늘 마음을 기울이고 계셨던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그것이 더 주(主, 메인)였고, 주님 후 세대인 우리는 그저 그 혜택을 받고 있었을 뿐이구나 싶습니다. 이것이 ‘유월절’, 곧 주님이 성육신하여 세상에 오신 주된 이유입니다.
내용이 좀 어리둥절하지요? 네, 저도 좀 그렇습니다. 그만큼 우리가 아는 진리는 사실은 겨우 요만큼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담는 그릇인데, 지금은 이 그릇의 크기가 겨우 요 정도이기 때문이지요. 비유하자면, 발전, 송전, 배전으로 구성된 전기 이야기인데요, 역시 처음 댐이나 발전소에서 생성된 몇십만 볼트의 전기가 가정집에 맞는 볼트가 되기까지 낮추고 또 낮춰 220볼트가 되듯 주님도 그렇게 진리의 근원이신 주님을 우리 역량에 맞춰 허락하시는 것으로 이해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그러니까 기록된 성경만 신앙과 삶의 유일한 기준으로 삼겠다는, 즉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라는 태도는, 물론 중세 때 카톨릭의 극심한 타락으로 루터, 멜랑히톤, 쯔빙글리, 칼빈 등이 일어나 이를 바로잡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었어서 그 배경을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지만, 이 또한 지나쳐 주님으로부터 오는 또 다른 형태의 계시는 모두 차단하는 우를 범하는, 그러니까 구더기 무섭다고 장 담그는 걸 포기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는 영계, 즉 천국에 대해 무지했기 때문인데요, 주님을 사랑하되 순진하게 그냥 뭘 몰라서였다면 몰라도 아니라면, 너무 이런 태도에 함몰되는 것은 그건 무슨 신념도 고백도 아닌, 그저 주님을 모독하는 게 될 수 있으니 조심하셔야 합니다. //
오늘 본문 1절은 완전하고 신성한 진리로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 만나는 사람들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습니다.
1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새벽은 영적으로는 주님과 주님의 나라가 임하는 때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부활하신 주님이 완전한 진리로 인간 앞에 모습을 드러내시는 때이며, 동시에 그 진리를 가지고 낡고 부패한 교회를 심판, 새로운 교회를 여시는 때입니다. 그때가 새벽입니다.
※ 여자들이 이렇게 안식일이 끝나자마자 새벽같이 무덤으로 찾아간 이유는, 주님 운명하신 첫날, 주님을 장사할 때, 바로 코앞이 안식일의 시작이라 부랴부랴 서두르느라 미처 주님 시신에 향품 바를 새도 없었기 때문이고, 또 관습적으로 장례 때 죽은 시신에 향품 바르는 일은 오직 여자들의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여자들이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으로 갔다고 했습니다. 여자들은, 진리를 사랑하여 참된 진리이신 주님을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심판 때 구원받을 사람들이며, 주님이 세우시는 새 교회에 참여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여자들은 부활하신, 그래서 살아 계신 주님이 아니라 주님의 시신을 만나러 갑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있는 진리가 죽은 자의 시신처럼 아직은 생명 없는 진리라는 반증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시신은 죽은 진리, 즉 생명 없는, 말씀의 지식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처음 진리를 받아들일 때의 진리는 생명 없는 진리입니다. 그 이유는 처음에는 진리를 믿기만 할 뿐, 아직 행동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자들이 향품을 가지고 주님의 시신에 바르는 것은 죽은 것 같은 진리에 생명을 불어넣는 최초의 노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향품은 내적 진리를 획득하기 전, 신앙인들이 소유하는 자연적인 진리, 이를테면 십계명의 문자적인 가르침 같은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2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보고 3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하더라
여자들이 무덤에 갔을 때, 무덤을 막았던 돌이 옮겨져 있었고, 그 안에는 시신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무덤을 막은 돌은, 신앙인들의 내면에서 진리가 살아나는 것을 방해하는, 여러 가지 자아의 거짓을 뜻합니다. 예를 들면, 진리를 안다는 자부심이나 진리에 대한 잘못된 추론, 또는 그밖에 이기적인 악과 그것에서 비롯된 거짓들입니다. 우리 안에 그런 것들이 있는 동안에는 진리는 무덤 밖으로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님이 이끄시는 대로 처음에는 자연적 진리로, 그리고 다음에는 내적 진리로 말씀을 이해하고 지키려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주님에 의해 진리를 방해하던 거짓들이 물러갑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자아의 거짓을 물리칠 수 없고, 심지어 어떤 게 거짓인지도 잘 모릅니다. 거짓들은 마치 칡넝쿨이 나무를 감아 옴짝달싹 못 하게 하는 것처럼 진리가 자라는 걸 가로막습니다. 주님만이 그것들을 잘라내 치워주실 수 있습니다. 그때 죽었던 진리가 살아납니다. 바로 그런 상태가 무덤을 막았던 돌이 옮겨지는 것이고, 주님이 무덤에서 살아나시는 것입니다.
무덤을 막았던 돌이 옮겨진 걸 보고 들어갔는데, 정작 있어야 할 주님의 시신이 보이지 않자, 여자들은 어쩔 줄을 몰라 합니다. 그 모습, 그 상황을 4절로 6절에선 이렇게 전합니다.
4이로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5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6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한글 성경에는 여자들이 근심했다고 하지만, 영어 성경에는 perplex, 즉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일종의 공황 상태에 빠졌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부활하셨는데 왜 여인들은 기뻐하는 대신 공황 상태에 빠졌을까요? 첫째는, 신앙인의 내면에서 진리가 살아나려면 자아에 속한 게 죽어야 하는데, 그때 모든 걸 잃은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진리가 살아났다 해도 처음 한동안은 진리가 나를 주장한다는 걸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 앞에 바로 나타나시지 않은 것과 같은 일일 것입니다. 한마디로, 내면에서 진리가 살아날 때, 신앙인들은 역설적으로 어디에도 기댈 진리가 없는 것 같은 상실감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인들이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것입니다.
※ 제가 그랬습니다. 저는 소위 모태신앙이라는 사람으로, 유아세례라는 것을 받은, 정말 이 나이 되도록 평생 교회 밖 세상에 있어 본 적이 없는, 모두가 익히 알고 있는 평범한 기독교인입니다만, 그러나 지난 2017년 여름, 처음으로 스베덴보리를 접하여 이 새로운 계시를 받아들이던 초창기 땐 정말이지 얼마나 두려웠는지 모릅니다. 지난 세월 저를 떠받치고 있던 모든 신앙과 종교적 신념이 한꺼번에 떠나가는 듯했기 때문입니다. 그건 마치 고3 때 어머니를 갑자기 교통사고로 잃었던 트라우마를 훨씬 웃도는 일이었지요.
그때 그들 곁에 빛나는 옷을 입은 두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두 사람은 누굴까요? 천사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살아있는 진리인 주님이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입은 빛나는 옷은 부활하신 주님에게서 나오는 가장 밝고 환한, 완전한 진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두 사람이 나타났다고 했을까요? 부활하신 주님에게서 나오는 진리는 선만 있고 진리는 없거나, 진리만 있고 선은 없는 그런 진리가 아니라, 선과 진리가 함께 있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천사가 여인들에게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여인들은 전에 주님이 고난을 받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실 거라는 말씀을 들은 적이 있으나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는 믿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신앙이 아직 자연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직접 눈으로 봐야만 믿는 그런 신앙이었던 것입니다.
31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32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희롱을 당하고 능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겠으며 33그들은 채찍질하고 그를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 34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취었으므로 그들이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 (눅18:31-34)
천사들을 보고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댑니다. 주님이 나타나셨을 때, 사람들이 두려워 떨거나 죽은 자처럼 되었다는 것은 말씀의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계시록을 쓴 요한도 주님의 발 앞에 죽은 자처럼 되었다고 했습니다. 다니엘도 그랬지요. 신앙인들이 그렇게 두려워하는 것은, 내면에서 어떤 영적 변화가 일어날 때 느끼는 불안과 공포를 의미합니다. 주님의 신성이 사람 안으로 임하실 때, 인간이 불안과 두려움을 느끼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자들이 느끼는 두려움은 일종의 경건한 두려움입니다. 여자들에게 일어난 이러한 내면의 변화는, 그에게서 죽은 진리가 살아나는 것이며, 그로 인해 자연적 신앙이 영적 신앙으로 한 단계 올라서는 것입니다.
※ 그래서 저는 저희 혈육들을 비롯, 주위 많은 지인이 영적 체험을 좀 했으면 좋겠습니다. 기록된 겉 글자 신앙에만 갇혀 있지 말고, 그 안에 꿈틀대는 영계를 살짝살짝,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이라도 좀 주님이 허락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본인이 원해야 하지만 말입니다. 신령한 영적 체험은 두꺼운 껍질을 깨고, 저 높은 곳으로 도약하는 데 있어 큰 도움이 됩니다.
저는 지난날 제 안에 있는 악령을 어렴풋이나마 본 적이 있습니다. 물론 영안으로 보았겠지요. 정원 목사의 ‘대적기도’라는 책을 읽던 시절이었는데, 이 경험은 제가 신앙적으로 새로운 도약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참고로, 그러나 저런 체험보다는 이왕이면 천사를 만나는 그런 체험이면 더 좋겠습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평소 마음 상태가 천사가 찾아올 수 있는 상태여야 하겠지만 말입니다. //
7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 8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9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에게 알리니 10(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그들과 함께 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알리니라) 11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
여자들이 마침내 주님이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것을 기억해 내고는 무덤에서 돌아가 그 모든 것을 사도들에게 알렸습니다. 무덤은 속뜻으로는 그들이 죽은 진리를 만나던 곳이고, 필요할 때마다 꺼내 사용하던 곳입니다. 이를테면 진리의 지식이 보관된 내면의 기억 장소와 같은 곳이죠. 그러나 진리가 완전히 살아날 때, 이제는 애써 그곳을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살아있는 진리, 살아 계신 주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면서 그때그때 필요한 진리를 공급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요14:26)
※ 이것이 퍼셉션(perception)입니다. 천사들이 천국에서 주님과 커뮤니케이션하는 방식인데, 그 내면이 열려있던 태고교회가 바로 지상에서 이 방식으로 주님의 인도를 받았습니다. 즉 주님의 뜻과 인도하심을 공부를 통해서, 학습해서 아는 게 아닌, 내가 묻거나 무슨 의문을 품을 때 내적으로 바로 답이 오는 그런 것입니다. 가령, 창세기에 나오는
8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9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창3:8-9)
와 같은 커뮤니케이션이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의 딕테이트(dictate)를 나의 내면, 곧 내 영이 듣는, 가장 고급하고 고차원적인 커뮤니케이션입니다. 비유하자면, 퍼셉션으로 아는 걸 햇빛으로 보는 것이라 한다면, 이 세상 학습을 통해 아는 건 달빛으로 보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
그것이 부활하신 주님이 주시는 은혜입니다. 주님이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들은 사도들은 여자들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 역시 아직은 자연적 신앙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을 직접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봐야만 믿는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베드로가 주님의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12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부려 들여다보니 세마포만 보이는지라 그 된 일을 놀랍게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
베드로란 이름의 속뜻은 진리에 대한 순종입니다. 실제로 베드로의 성품이 그랬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그는 급히 무덤으로 달려가 몸을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봤습니다. 무덤으로 달려가는 것은 진리에 대한 뜨거운 애정을 뜻합니다. 그리고 몸을 구부려 들여다보는 건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 안에 있는 진리들을 돌아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리, 또는 말씀을 대할 때는 언제나 몸을 낮춰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진리가 보이고, 또한 죽었던 진리가 살아나는 것이 보입니다.
그때 베드로의 눈에 들어온 것은, 주님의 시신이 아니라 세마포였습니다. 세마포의 속뜻은 주님이 주시는 내적 진리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본 진리는 이전에 알던, 생명 없는 지식이 아니라 내적 진리였던 것입니다. 그제서야 그는 자신에게 있던 진리들이 살아났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내면에서 진리가 살아나는 건 눈먼 자가 눈을 뜨는 것 이상의 기적입니다. 흔히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진리가 살아나면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던 기질이 바뀝니다. 그것은 주님만이 이루실 수 있는 기적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 모든 일을 놀랍게 여겼다고 합니다. 놀랍게 여겼다는 건 기적과 같은 일이라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에서 여자들은 향품으로 표상되는 자연적 진리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시작합니다. 자연적 진리란 말씀의 문자로 표현된 진리이며, 내적 진리를 담기 위한 그릇 역할을 하는 진리입니다. 그래서 그 자체로는 아직 완전한 진리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자연적 진리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더라도 점차 그 안에 내적 진리를 담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는 까닭은 내적 진리가 자연적 그릇인 글자 안에 담길 때, 온전하고 힘 있는 진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지옥을 이기신 주님의 능력이 그 안에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도 세상에 계실 때 완전하지 않은 진리의 상태에서 지옥의 시험을 완전히 이기시고, 신성한 진리(Divine Truth) 자체가 되셨습니다. 만약 주님이 처음부터 신성한 진리 자체이셨다면, 주님은 시험을 당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피조물인 지옥은 감히 창조주이신 주님을 대적하거나 도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에는 시험을 당하는 주님의 진리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지 않고, 인자, 곧 사람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완전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께 기대어 자신에게 있는 진리를 매일 살려야 하고, 더 내적인 진리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온전히 거듭날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은혜가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성도, 그리고 이들과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호6:2)
아멘
※ 제 설교가 점점 길어지지요? 저는 10년 전인 지난 2014년 5월, 경기도 고양시 헤븐교회 예배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아직 정원 목사님 살아 계시던 시절이었지요. 목사님은 이듬해인 2015년 11월에 별세하셨습니다. 그때 주일예배가 몇 시간씩 계속되는 것에 질려, 그리고 다른 일정도 있어 할 수 없이 중간에 일어나야만 했던 경험이 있어요. 큰애와 우리 부부, 이렇게 함께 갔는데... 그 당시 제 영적 역량이 그런 예배를 감당할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 제가 점점 그런 경향을 보이네요. 그나마 저는 원고 설교를 하기 때문에 이 정도이지 싶습니다. 설교를 되새김질하다 보면 계속 내용이 더해지고 보태집니다. 절제도 필요하겠지만, 대부분 퍼셉션, 곧 성령의 인도하심인지 꼭 필요한 내용들이지 싶습니다.
이런 제목이 좀 터무니없거나 자극적이십니까? 그러나 실제로는 자주, 아니 거의 만연하다시피 한 걸 볼 수 있습니다. 제 주변, 나라 사랑하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그분들은 그 어떤 분들보다도 나라를 사랑하여 나라의 장래에 대한 근심과 걱정으로 몸이 마르실 지경입니다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많은 말씀 중에도 주님이 어떤 분이시고, 천국은 어떤 곳인지에 대한 말씀은 거의 안 하십니다. 이상하지요? 또 가령 지방회 같은 델 참석해 보면, 분명 수십 교회 목사님과 사모님들이 모이셨음에도 주님은 어떤 분이시고, 천국은 어떤 곳이고 하는 얘긴 요만큼도 들을 수 없습니다. 그냥 기본으로 깔고 가는 건가요? 아니면, 그런 걸 꼭 말을 해야 아나 인가요? 지방회뿐이 아닙니다. 무슨 이만한, 그러니까 전국 규모의 무슨 집회나 세미나에 가봐도 이런저런 방법이나 간증, 그러니까 뭘 어떻게 했더니 어떻게 부흥하고 성장했다는 등이 주된 내용이지, 주님이 어떤 분이시며, 천국은 어떤 곳인지에 대해서는 거의 전혀 무슨 언급이 없습니다. 새삼 뭘 그런 걸 다... 인가요? 오히려 좀 뻘쭘해지나요? 참 이상합니다... 천국은 그렇지 않은데 말입니다. 천국은 주님을 빼면 모든 것이 멈추는 것은 물론, 존재 자체도 못하는데 말입니다.
혹시 우리 안에 이런 거, 그러니까 가령, 나는 전도 몇 명 했고, 선교지 몇 번 나갔고, 어디를 얼만큼 몇 교회를 후원하거나 교회 몇 개를 세웠고, 지금까지 몇 교회 주의 종들을 섬겼고, 무슨 헌신과 헌금을 얼마나 했고... 등등 많은 공을 세웠으니,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는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이미 오래전에 영접기도한 사람이므로, 그러므로 나같은 사람은 당연히 천국 프리패스지... 같은 이런 생각, 이런 오해와 착각이 있는 거 아닐까요? 천국은 예수 영접기도로 가는 나라가 아니라 속 사람의 상태로 가는 나라이며, 특히 그 상태가 천국을 수용할 수 있는 상태여야 갈 수 있는 나라인데, 그렇다면 이런 분들은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나라 사랑, 교회 사랑 등 열심히 하셔야 합니다. 아니, 특히 우리 기독교인들은 더욱 그래야 합니다. 실제로 많은 분들이 이런 분들이십니다. 그러나 나라 사랑하다 보면, 교회 사랑하다 보면 주님이 알아서 그걸 주님 사랑한 걸로 쳐주셔서 하늘 상급 많아지겠지 하시는 의식과 태도, 동기로 하신다면 조심하셔야 합니다. 안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행위들이 고스란히 하늘 상급이 되려면, 이런 행위들은 주님을 더욱 사랑한 결과로 당연히 뒤따르는 행위일 때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다만 주님을 놓치시지 말기 바랍니다. 천사들처럼 말입니다. 천사들한테는 주님을 사랑하여 주님 뜻 가운데 주님 주신 쓰임새의 삶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없습니다. 그때 그들은 주님 주시는 지고한(inmost) 행복 가운데 들기 때문입니다.
※ 다음은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김은경 역) 31장, ‘천국 천사들의 순진한 상태’(276-283) 중 278번 글입니다.
...그래서 천국에서는 순진함은 지혜를 거처로 삼는다고 하고, 천사는 그 순진한 정도만큼만 지혜롭다고 한다. 이것을 뒷받침하는 사실들은 다음과 같다. 순진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어떤 선한 것도 제게서 나온 것으로 여기지 않고, 모든 것을 받은 것으로 여기고, 그 근원을 주께 돌린다. 그들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의 인도를 받기 원한다. 또 모든 선한 것을 사랑하고, 모든 진리에서 기쁨을 얻는다. 선을 사랑하는 것, 즉 선을 의도하고 행하는 것이야말로 주를 사랑하는 것이고, 진리를 사랑하는 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임을 그들이 알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들은 많든 적든 자기가 가진 것으로 만족한다. 왜냐하면 자기에게 필요한 만큼만 주어진다는 것을, 즉 조금 필요한 사람은 조금 받고, 많이 필요한 사람은 많이 받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무엇이 우리에게 좋은지 우리는 모른다는 것, 오직 모든 것을 살피시고 영원한 것을 섭리하시는 주님만이 아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2] 그들은 미래에 대해 불안해하지도 않는다. 미래에 대한 불안을 그들은 내일 염려라 부르고, 그것은 삶에 필요하지도 않은 것을 잃거나, 못 받을까 봐 근심하는 일이라고 정의한다. 대인관계에서 그들은 절대 악한 의도로 행동하지 않으며, 오직 선하고 공정하고 정직한 의도로 행동한다. 악한 의도로 행동하는 것을 그들은 교활함이라 부르며, 뱀의 독처럼 기피한다. 그것이 순진함에 완전히 대립되기 때문이다. 그들이 주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없기 때문에, 그리고 그들은 그들이 받는 모든 것의 근원을 주께 돌리기 때문에, 자기 본성으로부터 떨어져 있다. 그들이 자기 본성에서 떨어져 있는 정도만큼 주께서 그들에게 들어가신다. 그 결과 성경 말씀이나 설교를 통해 주의 말씀을 들으면, 그들은 기억에 저장하지 않고 즉시 순종한다. 즉 말씀대로 의도하고 실천한다. 그들에게는 의지 자체가 기억인 것이다. 이들은 겉으로는 대체로 단순해 보인다. 그러나 내적으로는 아주 지혜롭고 분별력 있다. 다음의 성경 말씀은 이들을 가리킨 것이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10:16) Be ye prudent as serpents and simple as doves(Matt. 10:16).
이것이 ‘지혜로운 순진함’이라 부르는 그 순진함이다.
[3] 순진함이란, 어떤 선함도 그 근원을 자기에게 돌리지 않고, 모두 주께 돌리는 것이다. 따라서 순진함이란, 주의 인도를 받는 것을 사랑하는 것이며, 이것은 지혜를 이루는 모든 선과 진리를 받는 근본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어린 시절에는 외적 순진성, 나이 들어서는 내적 순진성을 지니도록 창조되었다. 그래서 전자를 통해 후자에 이르고, 다시 후자에서 전자로 돌아가도록 되어 있다. 그래서 사람은 늙으면 몸도 줄어들고, 다시 아이가 되는 것인데, 그러나 이번엔 지혜로운 아이, 즉 천사가 되는 것이다. ‘지혜로운 아이’란 높은 의미로는 천사를 뜻한다. 성서에서 ‘어린아이’는 순진한 사람을 뜻하고, ‘노인’은 순진한 상태에 있는 지혜로운 사람을 의미한다.주192
주192. 말씀에서 ‘어린아이들’은 이노센스를 의미한다 (AC.5608). ‘젖먹이들’도 마찬가지다 (AC.3183). ‘노인’은 지혜로운 사람을, 그리고 추상적으로는 지혜를 의미한다 (AC.3183, 6524). 인간은 나이가 들수록 어린아이가 되며, 그때 그의 지혜 안에 이노센스가 있어, 그 상태로 천국에 들어가 천사가 될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 (AC.3183, 5608). //
천사들은 금식기도, 산기도, 안수기도, 방언기도, 예언기도, 무슨 무슨 작정기도 같은 거 안 합니다. 그들은 주님으로 말미암아 늘 주님 앞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천사들이 저런 거 한다면 너무 이상하잖아요? 기도든 뭐든 주님을 움직여 내 뜻을 관철하기 위한 동기로는 하지 마세요. 설령, 40일 금식기도 했더니 전에 없던 신령한 은사가 마침내 생겼다 해도 사실은 별로 안 좋은 겁니다. 그게 나중에 자기 계급장이 된다면 말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여 이웃을 열심히 사랑했더니 생각지도 않은 이런 은혜를 주셨어요 한다면 몰라도 말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다가 영생을 얻는 사람이 되어야지 영생을 얻기 위해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안 된다기보다는 뭐랄까, 주님 보시기에 좀 아쉬운 사람이 되는 것이죠.
육으로는 세상과, 영으로는 천국과 연결되어 있는 우리 역시 천사들처럼 천국과, 그리고 주님과 연결되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니까 천국과 천사 공부 많이 하시고, 지상에서 천국을 사시기 바랍니다. 거듭 당부드립니다. 주님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천국은 주님의 신성으로 가득 찬 나라이며, 주님의 신성은 주님의 선과 진리로 되어 있습니다. 마치 해에서 열과 빛이 나오는 것처럼 말입니다. 천국에서 주님을 사랑한다는 건, 주님을 개인적으로 사랑하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사랑하는 것이고요, 마찬가지로 이웃을 사랑한다는 건 이웃을 개인적으로 사랑하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를 사랑한다는 의미입니다.
이걸 좀 확장하면, 지상에서 원수를 사랑한다는 건, 원수를 개인적으로 사랑하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니라 원수 안에 거하시는 주님의 형상을 사랑하는, 그러니까 그의 안에 깃드신 주님 신성에 대해 예의를 잃지 않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닐까 합니다. 가령, 이재명 같은 사람한테도 말이죠. 비록 그와 같은 사람들한테 예의 바르게 대했다가 해를 입더라도 말입니다. 아래 유다서를 보면,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관하여 마귀와 다투어 변론할 때에 감히 비방하는 판결을 내리지 못하고 다만 말하되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 하였거늘 (유1:9)
비록 천사장 미가엘일지라도 비방하는 판결을 삼가지 않습니까? 심지어 그 상대가 마귀인데도 말입니다. 우리 주님은 사랑 그 자체이신 분, 심지어 지옥도 사랑하셔서 여전히 돌보시는 분임을 미가엘은 알고 있는 것입니다.
선한 집회, 평화적 시위에서도 우리는 만에 하나 적의, 증오, 복수 같은, 지옥에서 올라오는 기운에 사로잡히면 안 됩니다. 그러면 주님은 더 이상 우리를 보호하실 수 없게 되며, 우리를 향한 천국이 닫히기 때문입니다. 좌우가 서로 먹느냐, 먹히느냐의 긴박한 상황인데 이 무슨 한가한 소리인가 싶으셔도 우리는 주님의 자녀! 끝까지 주님의 전능, 전지, 편재, 그리고 사랑과 섭리를 붙들어야 합니다. 붙들어 보시면 압니다. 오직 주님만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우리 시야에 다른 건 안 들어옵니다. 제발 두리번거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래 Swedenborg Foundation에 가시면 거의 모든 글을 pdf로 받으실 수 있습니다. 참고로 Redesigned Standard Edition이며, 1900년대 초 번역을 1990년대에 몇 가지 손본 버전입니다. 그러니까 영어가 좀 옛글투입니다. 저는 이걸로 하고 있어 그런지 이젠 오히려 NCE라고 현대어역은 좀 낯설더군요. 뭐랄까... 좀 지나치게 의역을 했다고나 할까? 네, 뭐 좀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제 처음 입문하시는 분들한테는 오히려 NCE역이 나을 수도 있겠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글들을 읽다 보면, 순간 뇌 정지가 오는 때가 있습니다. 글의 내용이 저의 이해력 역량을 초과했기 때문인데요, 그래서인지 더 이상 진도가 안 나가지는 겁니다.
저는 살면서 이런 걸 몇 번 경험했는데요, 지금 생각나는 첫 번째는, 대학 시절, 철학과 다니는 친구 통해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처음 읽었던 때입니다. 비록 어려서부터, 그러니까 중학생 때 벌써 한국문학전집 같은 걸 읽은 저지만, 예를 들면, 월탄 박종화의 ‘금삼의 피’를, 페이지당 열 개 정도 나오는 고어들을 사전을 찾아 노트에 옮겨 적어 가며 읽었지요. 그런 저인데도... 아, 그때 그 당혹감이란... 단 한 문장을 후련하게 읽지 못하겠더군요. 아니, 그 책은 고사하고, 그 친구의 글조차 읽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전자공학을 하던 저라서 그랬는지... 나중엔 화가 나서 원어로 읽고 싶더군요. 그러나 독일어를 따로 해야 한다는 부담 때문에 포기했지요.
또 하나는, 제가 삼성에 입사, 당시 기흥 첨단연구소라는 데를 가서 C 언어 관련 무슨 과정 밟느라 연수 중이었는데, 하루는 어느 현업 여성 개발자 한 분이 나와 소프트웨어 드라이버 개발 과정을 설명하면서 특별히 어셈블리 관련 부분 핸들링을 설명하셨던 것 같은데... 저는 당시 이게 무슨 외계어인가 머리가 하얘지며 토할 것 같았습니다. 이 역시 저의 수준을 훨씬 웃도는, 저 높고 깊은 세계를 잠깐 들여다본 것이었지요.
그 후론 거의 없다가 오랜만에 또 이런 일이 생겼는데 바로 스베덴보리의 글들입니다. 이분의 글들은 영계를 다녀오신 분의 글이라 기본적으로 신비스러운데요, 특히 그에 더해 당혹스럽기까지 한 건 거의 모든 추상 개념을 마치 영상처럼 설명하시는 겁니다. 눈으로 보지 않았으면, 도저히 그렇게 표현, 묘사하실 수 없는... 이 지상의 모든 추상 개념은 그곳에선 눈에 보이게 나타난답니다. 주님의 어떠하심에 대한 설명들 역시 사실 저 개인적으로는 참으로 영광스럽고 그렇게 귀할 수가 없음에도, 본 적 없는 나라, 접한 적 없는 개념들 앞에 뇌 정지가 오는 건 어쩔 수가 없습니다. 아래는 이럴 때 눈 딱 감고 드리는 유일한 기도입니다.
‘오, 주님, 지금 제게 천국 빛을 더하사 이 글들을 읽고 이해하게 해주세요. 저를 천국 천사들 가운데 잠시 올려주셔서 이 글들을 이해할 수 있는 천사들의 지혜 가운데 저를 잠시 있게 해주세요...’
놀랍게도 이 기도를 드리고 나면 잠시 후 웬만하면 거의 다 깨닫게 됩니다. 아멘, 할렐루야!
18사가랴가 천사에게 이르되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가 많으니이다 19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가브리엘이라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말하라고 보내심을 받았노라 20보라 이 일이 되는 날까지 네가 말 못 하는 자가 되어 능히 말을 못 하리니 이는 네가 내 말을 믿지 아니함이거니와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어지리라 하더라 21백성들이 사가랴를 기다리며 그가 성전 안에서 지체함을 이상히 여기더라 22그가 나와서 그들에게 말을 못 하니 백성들이 그가 성전 안에서 환상을 본 줄 알았더라 그가 몸짓으로 뜻을 표시하며 그냥 말 못 하는 대로 있더니 23그 직무의 날이 다 되매 집으로 돌아가니라 24이 후에 그의 아내 엘리사벳이 잉태하고 다섯 달 동안 숨어있으며 이르되 25주께서 나를 돌보시는 날에 사람들 앞에서 내 부끄러움을 없게 하시려고 이렇게 행하심이라 하더라 (눅1:18-25)
저는 주일설교 준비에 거의 한 주를 다 씁니다. 본업이라 할 수 있는 번역의 일이 있음에도, 그리고 원본이 따로 있음에도 그렇습니다. 수시로 렌더링, 그러니까 되새김질을 하지요. 보고 또 보고, 늘 다듬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다 보니 여러 사정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당분간은 기존 설교로 대신하고자 합니다. 사실 어떤 설교든 그 설교자가 주님과 결합, 성령의 퍼셉션이 있으면 그 설교는 살아있는 겁니다. 이천 년 전, 아니 수천 년 전 신구약 성경이 오늘 우리를 살리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 누가복음 시리즈는 아쉽게도 맨 처음 몇 편, 그러니까 두 편 정도가 없습니다. 알아보니 분실하셨다고 합니다. 정말 아쉽지만, 그러나 이도 주님의 섭리이지 싶습니다. 나중에 주님 허락 있으시면, 저라도 채울 수 있었으면 합니다.
따라서 앞에 빠진 부분은 본문 리딩으로 대신합니다.
1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2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 된 자들이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3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4이는 각하가 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하게 하려 함이로라 5유대 왕 헤롯 때에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 한 사람이 있었으니 이름은 사가랴요 그의 아내는 아론의 자손이니 이름은 엘리사벳이라 6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 7엘리사벳이 잉태를 못하므로 그들에게 자식이 없고 두 사람의 나이가 많더라 8마침 사가랴가 그 반열의 차례대로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의 직무를 행할새 9제사장의 전례를 따라 제비를 뽑아 주의 성전에 들어가 분향하고 10모든 백성은 그 분향하는 시간에 밖에서 기도하더니 11주의 사자가 그에게 나타나 향단 우편에 선지라 12사가랴가 보고 놀라며 무서워하니 13천사가 그에게 이르되 사가랴여 무서워하지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14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태어남을 기뻐하리니 15이는 그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16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그들의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라 17그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하리라 (눅1:1-17)
복음서의 시작이 예사롭지가 않지요? 이 복음서 저자, 그러니까 대필자인 누가의, 정성을 다하는 모습이 느껴집니다.
시작합니다.
천사가 사가랴에게 나타나서 아내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게 될 것이라고 하자, 사가랴는 그 말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천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18절입니다.
18사가랴가 천사에게 이르되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가 많으니이다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아들을 낳는다는 것은, 주님께서 사가랴로 표상되는 선한 사람에게 참된 진리, 또는 참된 말씀을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나이가 많다는 것은, 그냥 아기를 낳기에는 나이가 많다는 뜻이 아니구요, 주님의 때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때는 어떤 때입니까? 주님께서 참된 진리를 주시는 때이구요, 그동안 우리가 가지고 있던 거짓 진리들을 버려야 하는 때입니다. 그러므로 사가랴가 자신과 아내의 나이 많음을 걱정하는 것은, 실제로 그러한 일이 자신에게 일어난다는 사실을 잘 믿지 못하는 것인데요, 말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말씀에는 항상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겨라, 주님께서 원하는 것을 다 이루어 주시리라 이렇게 말하고, 또 주님께 맡기면 시험에서 우리를 건져 주시겠다고 합니다. 우리는 그 말씀을 믿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현실로 돌아오면, 실제로는 잘 믿지를 못 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동안의 경험을 돌아보면, 주님을 믿는다 했음에도 뜻대로 안 된 적이 참 많기 때문입니다. 시험에서 지는 등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이 뜻대로 잘 안됐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 주시지 않았을까요? 정말 그런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시험에서 넘어진 것도, 그리고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한 것도 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입니다. 주님은 그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 없음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정말 주님을 믿었고, 그리고 우리 삶 가운데서 내 뜻이 아니라 주님 뜻이 이루어지기를 항상 원했다면 주님은 아마 더 빨리 당신의 뜻을 이루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큰 시련을 겪지 않고, 거듭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지 않습니까? 사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나를 믿었고, 그리고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기보다 내 뜻대로 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렇게 볼 때, 그동안 겪었던 많은 시련은 주님께서 우리를 바로 세우시기 위한 사랑의 섭리입니다. 그래서 많은 시련을 겪게 되는데, 그러다가 때가 되면 주님께서 말씀을 하세요. ‘이제 너에게 진짜 진리를 주겠다. 그동안 네가 가지고 있었던 진리는 거짓 진리이든가 생명 없는 진리, 즉 지식에 불과한 것이었을 뿐이다. 그러니 이제 살아있는, 생명 있는 산 지식을 주겠다’ 이렇게 말이지요. 그때 우리는 그 말을 믿지 못합니다. 과연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날 수 있을까? 그때가 지금이란 말인가? 하고 믿지를 못합니다.
또 주님께서 진리를 보내주실 때 그것을 믿지 못하는 이유는, 그동안 익숙해진 진리와 그것, 곧 주님이 새롭게 주시는 진리가 많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내적 진리는 처음에는 잘 이해하지를 못합니다. 그것이 지금 사가랴의 상태입니다. 사가랴는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지만, 거짓 진리를 가르치는 교회 안에 있지만, 참된 진리에 목말라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제 주님께서 때가 되어 참된 진리를 열어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사가랴가 천사로부터 들은 기쁜 소식은 그것입니다.
사실 꼭 우리 새 교회가 아니더라도 다른 교회에 다니시거나 다른 종교를 가지신 분들 가운데 교리에 따라 진실하고 선하게 사시는 분들은 모두 구원을 받습니다. 다만 그 교회나 그 종교가 참된 진리를 가르치는 곳이라는 전제하에 말이지요. 왜냐하면 진리를 모르면 뭐가 진실한지, 뭐가 거짓인지를 구별 못 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그들이 옳다 믿는 수많은 진리와 선 가운데는 거짓들이 섞여 있는데, 그런 것들을 분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진리의 빛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진리가 없는 교회에 그 빛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참된 진리를 가르치는 교회나 종교가 아닌 곳에서는 거듭나기가 매우 어려우며, 그렇기 때문에 참된 진리를 찾아야만 한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잘못된 교회 안에 있던 사가랴가 이제 참된 진리를 갖게 되었습니다.
※ 위 ‘꼭 우리 새 교회가 아니더라도 다른 교회에 다니시거나 다른 종교를 가지신 분들 가운데 교리에 따라 진실하고 선하게 사시는 분들은 모두 구원을 받습니다’와 같은 기술(記述)에 대해서는 아래 첨부하는,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김은경 역) 36장, ‘천국의 비기독교인들’(The Heathen, or Peoples outside of the Church, in Heaven, 318-328)이라는 글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아래는 그 맨 처음 글인 318번 글입니다.
일반적 견해에 의하면, 교회 밖에서 난 사람들, ‘이교도’, ‘비기독교인’이라 불리는 그들은 구원받지 못한다고 한다. 그들은 하나님 말씀을 몰라 주님을 전혀 알지 못하는데, 주님 외에는 구원의 길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들도 구원받는다는 것은 다음 한 가지만으로도 확실히 알 수 있다. 주의 자비는 보편적이며, 모든 사람을 향한 자비라는 사실이다. 또 비기독교인들은 이들에 비하면 소수에 불과한 교회 사람들과 다를 것 없이 사람으로 태어나며, 또 그들이 주를 모르는 것도 그들의 잘못이 아닌 것이다. 밝은 이성으로 생각한다면, 사람은 단 한 명도 지옥에 가도록 태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주는 사랑 자체이시고, 그분의 사랑은 모든 사람의 구원을 바라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는 모든 사람에게 종교가 있도록 섭리하시고, 그 종교에 의해 신성과 내적 삶을 인식할 수 있게 섭리하셨다. 자기 종교에 따라 사는 것이 곧 내적으로 사는 것이다. 그럴 때 사람은 신성을 바라보게 되며, 사람이 신성을 바라보는 만큼 그는 세상을 보지 않고, 세상에 대한, 즉 외적 삶인 세속적 삶에 대한 집착을 버리게 되기 때문이다.주219 (HH.318)
주219. 이교도들도 크리스찬과 더불어 똑같이 구원받는다 (AC.932, 1032, 1059, 2284, 2589, 2590, 3778, 4190, 4197). 저세상에 있는, 많은 수의 교회 밖 나라들과 사람들 (AC.2589–2604) 교회는 특별히 그곳에 말씀이 있으며, 그로 인해 주님이 알려진 곳이다 (AC.3857, 10761). 그럼에도 불구, 말씀이 있으며, 그래서 주님이 알려진, 그런 곳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교회 때문이 아닌, 단지 체어리티와 신앙의 삶을 사는 사람들일 뿐이다 (AC.6637, 10143, 10153, 10578, 10645, 10829). 주님의 교회는 자기 종교를 따라 선하게 살며, 신(神, a Divine)을 시인하는 온 세상 사람들과 함께하는 교회다. 그들은 주님께 받아들여지며, 천국에 들어간다 (AC.2589–2604, 2861, 2863, 3263, 4190, 4197, 6700, 9256). //
19절입니다.
19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가브리엘이라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말하라고 보내심을 받았노라
말씀에서 좋은 소식이라는 것은 단순히 침례(세례) 요한의 탄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구요, 궁극적으로는 주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세상을 구하신다는 진리를 말합니다. 그 소식을 전하는 천사가 바로 가브리엘입니다. 여기서 가브리엘은 가브리엘이라는 이름을 가진 어떤 천사 개인을 뜻하는 게 아닌데요,
※ 다음은 ‘천국과 지옥’ 7장, ‘각 공동체는 보다 작은 형태의 천국이고, 각 천사는 가장 작은 형태의 천국이다’(Each Society Is a Heaven in a Smaller Form, and Each Angel in the Smallest Form, 51-58) 51번, 52번 글입니다.
각 공동체가 작은 형태의 천국이고, 각 천사가 가장 작은 형태의 천국인 까닭은 사랑과 신앙의 선이 천국을 이루기 때문이며, 이 선이 모든 공동체와 거기 속한 천사들 안에 있기 때문이다. 공동체마다 선이 독특하고 다양하다는 사실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서로 달라도 모두 천국적 선이다. 각 천국의 특성이 다를 뿐이다. 그래서 누가 천국의 어떤 공동체로 올려지면 천국에 들어갔다고 말하는 것이고, 거기 있는 천사들을 각자 자기 특유의 천국 안에 있다고 하는 것이다. 영계 사람들은 모두 이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천국 밖이나 아래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천사의 무리를 보면, 천국이 여기 또는 저기에 있다고 말한다. 비유하자면, 총독, 관리, 하인들이 같은 궁전 안에 사는 것과 같다. 그들이 층마다 자기 처소나 방에 따로 있지만, 여전히 같은 궁전 안에 있으면서 왕을 받드는 임무를 각자 수행하는 것이다. (HH.51)
각 공동체가 작은 형태의 천국임은 모든 공동체가 천국 전체와 똑같은 천국 모양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로 확증할 수 있다. 천국 전체를 보면, 다른 천사보다 뛰어난 천사들이 그 중심에 있고, 가장자리로 갈수록 뛰어남이 덜한 천사들이 있다. 그래서 주님은 천국 전체를 한 명의 천사로 보시고 이끄신다. 각 공동체도 마찬가지다. 따로 천사공동체 하나가 한 명의 천사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나도 이것을 주님의 허락하심으로 본 적이 있다. 나아가, 주께서 천사들 가운데 나타나실 때, 여럿에게 둘러싸인 한 분으로 보이지 않으시고, 그 전체의 모습이 하나가 되어 천사 한 명의 형상으로 보인다. 이런 이유로, 성경에서 ‘천사’가 주님을 뜻하고, 또 천국의 한 공동체를 지칭하기도 한다. ‘미가엘’, ‘가브리엘’, ‘라파엘’은 바로 그 기능에 따라 그렇게 이름지어진 천사 공동체를 말한다. (HH.52) //
이에 따라 가브리엘이라는 천사 공동체가 하는 일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직접 세상에 오신다는 것과, 그때 여호와께서 입으신 인성, 즉 인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증거하는 일입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곧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증거하는 일이지요.
※ 우리가 그동안 배운 삼위일체가 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 성령 하나님, 이렇게 세 하나님으로 이루어진, 잘은 모르겠으나 하나이신 삼위일체였다면, 주님이 스베덴보리를 통해 바로잡아 주신 삼위일체는, 속 사람(Divine)이신 여호와 하나님, 겉 사람(Divine Human)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신적 진리(Divine Truth)가 해처럼 방사하시는, 즉 활동하시는(Divine Operation) 성령이 한 분 주님으로 계신 신적 삼위일체(Divine Trinity)입니다. 이는 우리 한 인간이 속 사람과 겉 사람, 그리고 일상 가운데 활동하는 것과 정확히 매칭됩니다.
따라서 사가랴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났다고 하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가브리엘이 하나님 앞에 서 있다고 말합니다. 그 말씀은 가브리엘을 통해 전해지는 진리 안에 주님이 계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깨달을 때, 그 진리 가운데 주님이 계시지 않으면 그것은 살아있는 진리가 아닙니다. 그런 진리로는 삶을 바꿀 수 없습니다. 따라서 말씀에서 천사들이 나타날 때, 그들이 하나님 앞에 서 있다 하는 것은, 진리를 지식의 상태로 받는 것이 아니고, 그 안에 주님이 계신, 살아있는 진리로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거듭나는 데 있어 매우 의미 있는 순간입니다. 진리에 관한 지식이 아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는 진리가 우리 안으로 흘러들어오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천사가 하나님 앞에 서서 우리에게 말하는 순간입니다. 20절입니다.
20보라 이 일이 되는 날까지 네가 말 못 하는 자가 되어 능히 말을 못 하리니 이는 네가 내 말을 믿지 아니함이거니와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어지리라
천사는 사가랴에게 아들이 태어날 때까지 말을 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말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이것은 주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을 믿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사가랴는 왜 주님을 믿지 못했을까요?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우리가 말씀을 통해 내적 진리를 만날 때, 처음엔 그것이 진리인지 아닌지를 잘 분간 못 합니다. 물론 개인의 영적인 상태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요. 어떤 분은 그것이 진리라는 것을 바로 아실 것이고, 어떤 분은 그것이 진리인지 전혀 모르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래서 보통은 주님께서 진리를 주실 때, 그것을 받아들이기까지는 시간이 걸리고, 때로는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습니다. 예를 들면, 마음에 갈등이 생기는 그런 건데요, 그동안 알고 있던 진리와 새로운 진리 사이에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천사가 전하는 진리를 처음에는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갸라의 이런 상태를 우리 자신의 모습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언제 사가랴와 같은 경험을 하셨습니까? 사가랴와 같이 주님을 만나는 경험을 언제 하셨습니까? 아마 아주 우연한 경로를 통해 스베덴보리의 책을 처음 접하셨을 때일 것입니다. 그 책을 읽기 시작할 때, 우리는 처음 주님을 만납니다. 그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진리가 참된 진리이니 이 진리를 가지고 새롭게 태어나거라’, 그리고 덧붙여서 ‘그동안 가지고 있던 것들은 진리가 아니니 모두 버리거라’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했습니까? 대부분 주님 말씀을 그대로 따르지 않았습니다. 대개는 새로운 진리는 그것대로 가지고 있구요, 그리고 진리 아닌 것들도 계속 가지고 있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께서 전해주시는 진리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우리 안에 있는 자아 때문입니다. 인간의 자아는 진리를 알면 그것으로 자기의 생각을 이루려고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참된 진리를 전해주실 때, 그것 전체를 받아들이지 않고, 구미에 맞는 것만 선택적으로 받아들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이전 것들을 버려야 새로운 진리가 들어설 자리가 생기는데, 그것을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를 완전히 받아들이지를 못합니다. 새 교회 안에도 그런 분들이 많습니다. 입으로는 ‘나는 새 교회 진리를 온전히 믿는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심지어 어떤 분들은 말씀의 속뜻을 주님의 말씀으로 인정하지 않는 분도 계십니다. 속뜻을 단지 말씀을 이해하는 도구 정도로만 생각하는 것인데요, 말하자면, 이런 태도가 진리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며, 진리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도님들은 말씀의 글자의 뜻과 속뜻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말씀의 글자의 뜻과 속뜻의 관계는 주님의 몸과, 몸 안에 있는 영혼과 같은 관계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사람의 몸과 혼이 하나인 것처럼 서로 나눌 수 없는 하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속뜻만 가지고도 말씀이 아니구요, 글자의 뜻만 가지고도 말씀이 아닌 것입니다. 그 둘이 함께 있어야 말씀입니다. 그래서 말씀의 속뜻을 말씀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주님을 주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은 곧 주님이시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천사가 사가랴에게 이 일이 이루어질 때까지 말을 못 할 것’이라고 한 것은 사실은 말씀 전체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고, 원하는 것만 선택적으로 받아들이는 모든 신앙인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21절,
21백성들이 사가랴를 기다리며 그가 성전 안에서 지체함을 이상히 여기더라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죠. 백성들과 사가랴는 각각 내면의 교회를 이루는 신앙과 선을 나타낸다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가랴와 백성들은 그 속뜻으로는 서로 다른 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의 내면에 있는 것들로서, 백성들은 신앙의 진리를, 그리고 사가랴는 이웃 사랑의 선을 나타냅니다. 왜냐하면 사가랴의 직분은 제사장이며, 제사장의 속뜻은 사랑이고 선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왜 성전 안에 함께 있지 않고 따로 있을까요? 그 이유는, 교회 안에 선은 있는데 아직 신앙의 진리는 없기 때문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성전 밖에 백성들이 있는 것처럼 진리가 있기는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신앙의 진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가랴의 상태입니다. 왜냐하면 백성으로 표상되는 진리는 아직 참된 진리, 내적 진리는 아니기 때문이며, 그래서 그것은 아직 신앙이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러한 사가랴에게 이제 참된 진리를 열어 주시려고 하십니다. 그런데 사가랴는 주님이 열어주시는 이런 진리를 아직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22절,
22그가 나와서 그들에게 말을 못 하니 백성들이 그가 성전 안에서 환상을 본 줄 알았더라 그가 몸짓으로 뜻을 표시하며 그냥 말 못 하는 대로 있더니
사가랴는 그가 만난 주님에 대해, 그리고 주님께서 열어주시는 진리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그가 진리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고, 다만 진리를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몸짓으로 뜻을 표시하며 그냥 말 못 하는 대로 있더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리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진리가 오직 주님의 목적을 위해 사용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전에 진리로 믿었던 것들을 모두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리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고, 진리를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가랴는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가랴의 그런 모습을 보고 백성들은 ‘그가 성전 안에서 환상을 본 줄’ 알았습니다. 스베덴보리 저,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창, 출 속뜻 주석) 1786번 글에는 환상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환상이란 가장 내적인 계시이다. 그것은 각자의 영적인 상태에 따라 일어난다. 즉 내면이 닫힌 사람이 보는 환상과 내면이 열린 사람이 보는 환상이 서로 다르다. (이순철 역) That “a vision” denotes inmost revelation, which is that of perception, may be seen from the nature of visions, which take place in accordance with the man’s state. To those whose interiors are closed, a vision is very different from what it is to those whose interiors are open. (AC.1786, Clowes 역, 창15:1)
주님의 계시는 각자의 영적인 상태에 따라 다르게 이해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주님이 시내산에 강림하실 때의 모습은 보는 사람에 따라 다 다르게 보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본 것과 아론이 본 것이 다르구요, 그리고 아론이 본 것과 모세가 본 것이 서로 달랐습니다. 주님의 계시는 그런 것입니다. 따라서 백성들이 사가랴가 환상을 봤다고 하는 것은, 사가랴가 자기의 영적 상태에 따라 주님의 계시를 이해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사가랴의 입이 터져 백성들에게 말할 수 있을 때까지 그에게는 완전한 신앙이라는 게 없는 것입니다. 23절,
23직무의 날이 다 되매 집으로 돌아가니라
이 말씀에서 ‘직무’는 영어 성경 표현으로는 ‘섬기는 일’입니다. 섬기는 일이란 어떤 것입니까? 사랑으로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집으로 돌아갔다고 하는데, 집은 무슨 뜻일까요? 집은 각 사람의 의지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그 직무의 날이 다 되매 집으로 돌아가니라’라는 이 말씀은, 주님으로부터 참된 진리를 받는 사가랴의 의지와 삶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즉 한편으로는 섬김의 삶을 살면서, 한편으로는 자신의 의지를 살피는 모습입니다. 사가랴는 주님이 주시는 계시의 말씀을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러나 선한 의지를 가지고 끊임없이 섬김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선한 애정을 가지고 주님의 말씀, 주님의 진리를 삶으로 옮기려 할 때, 그때 비로소 진리가 신앙이라는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러기 전에는 아무리 주님께서 진리를 주셔도 그것이 신앙이 되지는 않습니다. 그것을 오늘 말씀에서는 사가랴가 ‘그 직무의 날이 다 되매 집으로 돌아가니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는 중에 엘리사벳이 아기를 잉태합니다. 24절,
24이 후에 그의 아내 엘리사벳이 잉태하고 다섯 달 동안 숨어있으며 이르되
‘이 후에’는 어떤 뜻일까요? 주님께서 진리를 주시고, 그것을 애정을 가지고 삶으로 옮긴 다음에라는 뜻입니다. 그때 엘리사벳이 잉태합니다. 엘리사벳이 잉태한다는 것은 사가랴와 엘리사벳으로 표현되는 교회 안에 이제 신앙의 진리가 생기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말씀에는 아기를 잉태한 엘리사벳이 다섯 달 동안 숨어 지낸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다섯 달이란 어떤 뜻입니까? 그것은 주님께서 주시는 진리가 참된 신앙이라는 열매를 맺기까지 걸리는 충분한 시간을 의미합니다. 본래 다섯은 작은 것을 나타내지만, 여기서는 참된 신앙의 열매를 맺기까지 걸리는 충분한 시간, 충분한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러면 숨어있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렇게 진리가 신앙이라는 열매를 맺을 때까지 주님께서 보호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사실 신앙인들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진정한 신앙으로 만들기까지는 여러 가지로 어려움이 많습니다. 그 어려움은 우리 내면에 있는 악하고 거짓된 것들 때문에 생깁니다. 예를 들면, 그동안 가지고 있던 거짓된 관념들이 어떻게 해서든지 진리를 방해하려고 합니다. 그때 주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시지 않으면 진리는 우리 마음 밭에 뿌리를 내리지 못합니다. 마치 돌밭에 뿌려진 씨나, 가시덤불에 뿌려진 씨같이 죽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그것이 아이를 잉태한 엘리사벳이 다섯 달 동안 숨어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계시록 12장에도 나오는 말씀인데요, 계시록 12장에는,
1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 해를 옷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그 발아래에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두 별의 관을 썼더라 2이 여자가 아이를 배어 해산하게 되매 아파서 애를 쓰며 부르짖더라 3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니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왕관이 있는데 4그 꼬리가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더라 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 (계12:1-4)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무슨 뜻일까요? 새 교회의 진리가 신앙의 열매를 맺으려 할 때, 용, 즉 지옥이 그것을 삼키려고 버티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그 해산하는 여인을 지켜주십니다. 진리를 온전한 신앙으로 만드는 일은 그렇게나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 자신도 지금 온전한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는데요, 그래서 주님은 우리의 신앙이 열매를 맺기까지 지옥의 방해로부터 우리를 철저히 지켜주십니다. 아무 일도 안 하시는 것 같지만, 주님께서 늘 그렇게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나를 왜 이렇게 방치하실까’라며, 주님을 원망할 때가 많았습니다. 너무나 힘이 드니까요. 그런데 그 모든 과정 하나하나 가운데 주님께서 지켜주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25절입니다.
25주께서 나를 돌보시는 날에 사람들 앞에서 내 부끄러움을 없게 하시려고 이렇게 행하심이라 하더라
유대인들에게 여자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은 큰 수치였습니다. 사실 우리 조상들도 그것을 수치로 알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단순히 대를 잇지 못하는 것 때문은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렇게까지 수치를 느끼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잊힌 지식이지만, 대를 잇는다는 말에는 영적 의미가 있습니다. 그 영적 의미가 고대교회로부터 전해져 우리의 DNA에 남아 있어 아이를 낳지 못할 때 수치를 느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고대교회 사람들은 여인이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을, 진리를 알고 있으면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입니까? 이렇게 귀한 진리를 알고 있으면서도 그걸 살아내지 못하고, 신앙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은 사람들 앞에서도 그렇고, 주님 앞에서는 정말로 아주 부끄러운 일입니다. 이런 이유로 유대교회 사람들은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을 대단한 수치로 여기 것입니다. 창세기 30장에서 야곱의 아내 라헬이 아이를 갖지 못해서 화를 내고 짜증을 부리는 걸 보십시오. 그것이 바로 아이를 낳지 못해 부끄러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를 잉태한 엘리사벳은 ‘주께서 나를 돌보시는 날에 사람들 앞에서 내 부끄러움을 없게 하시려고 이렇게 행하심이라’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에서 배운 것처럼 주님으로부터 참된 진리, 또는 참된 말씀을 받는 과정은 대단히 험난한 과정입니다. 많은 분이 자신이 참된 진리를 가지고 있고, 진정한 신앙 가운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진정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사실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희귀할 정도입니다. 진정한 신앙은 이 진리가 참이라고 인정하는 것만으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내면에는 참 신앙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게 방해하는 장애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것은 어떤 것일까요? 이기심이나 불순한 욕망 같은 것이구요, 또 지적 자부심 같은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사람들은 진리 실천하는 것을 주저하고, 또 자신의 구미에 맞는 진리만 실천하려고 합니다.
※ 그러니까 복 받는 것과 관련된 말씀들이나 자신의 명예와 이름 높일 수 있는 것들을 구하는 것입니다. 곧 이런 것들이지요. ‘오, 주님, 제 사업을 크게 형통케 하사 제가 주님을 위해 큰일을 하게 하옵소서’라든지, ‘오, 주님, 제 목회를 크게 성공케 하사 저로 주님께 더욱 큰 영광 돌리게 하시오며, 이를 위해 제게 치유의 은사, 영 분별의 은사, 예언의 은사를 주시옵소서’ 같은 것 말입니다. 이런 건 다 주님의 영광, 주님을 찬양 운운하고 있지만 사실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사가랴도 처음에는 그랬습니다. 주님께서 진리를 주실 때, 온전히 받아들이지를 못한 것입니다. 사가랴가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은 진리를 믿지 못하는 것이고, 그러므로 주님 앞에 올바른 신앙고백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23절에 보면, 사가랴가 섬기는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것은 순수하고 선한 애정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될 때, 주님께서는 아기를 잉태할 수 있게 해주십니다. 마침내 우리 가운데 신앙이라는 진리의 열매가 생기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그냥 ‘이것이 진리다’라고 믿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를 위해 진리 아닌 것들을 버리는 일입니다. 그리고 받은 그 새 진리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때 신앙의 열매가 우리 마음 가운데 생기기 시작합니다. 모쪼록 진리 전체를 온전히 받아들이시기를 바랍니다. 그런 은혜가 우리 성도님들과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때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때 조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 말 못 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이니라’ (사35:5-6)
저는 61년 소띠입니다. 올해로 만 63세네요. 저는 100세는 바라지도 않고, 소명으로 받은 지금 이 일을 어느 정도 마치면 그저 깔끔하게 이 육신을 벗고 갈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 역시 주님의 허락이 있으셔야 하지만 말입니다. 더욱 바람이 있다면, 천국에서도 제 아내와 영원히 함께 지낼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인데요, 제 아내는 틀림없는데 저는 암만 생각해도 좀 간당간당하거든요. 웬만큼 제 아내와 주님 속을 썩였어야 말이죠 ㅎㅎㅎ 참고로, 천국은 서로의 선이 비슷해야 같이 지낼 수 있습니다.
30년대 전후반 태생이신 분들은 슬슬 떠날 생각들을 진지하게 하실 것 같습니다. 아닌가요? 여전히 이 세상 삶에 더욱 마음 기울이고 계신가요? 이제는 슬슬 가실 준비를 하시는 게 좋을 듯 한데... 그런데 이런 말씀드린다고 언짢아들 하실까 봐 좀 걱정됩니다. 절대 오해하지 말아 주세요...
말씀에 보면, 이 글 제목처럼 ‘나이가 많아 늙었고’, ‘아브라함의 향년이 백칠십 오세라’, ‘기운이 다하여 죽어’ 같은 표현들이 자주 등장하는데요, 이 표현들은 그 겉뜻으로도 그냥 이해하는 데 별 무리가 없지만, 그러나 그 속뜻이 참 놀라워서 오늘 특별히 제가 이해하는 데까지만 좀 말씀드려 볼까 합니다.
첫째, 아브라함은 주님의 표상(表象, representative)입니다. 즉 지금 아브라함은 세상에서 자기 인생을 살고 있지만, 그러나 그의 삶을 통해 주님은 주님의 내면 상태와 그 변화를 설명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아브라함이 나이가 많아 늙었고’라는 표현의 속뜻은, 주님 안의 인성(human) 상태가 머잖아 신성(Divine) 상태가 되실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주님은 육의 어머니 마리아로 말미암은 인성을 입으셨기 때문에, 주님의 일생은 이 인성을 벗고 신성을 입는 과정이었습니다. 거듭 주님은, 속 사람으로서는 여호와 하나님, 겉 사람으로서는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신적 진리(Divine Truth)로 활동하시는 성령, 이렇게 삼위일체이신 한 분 주님이시며, 이것을 생각하면, 왜 주님의 인성이 신성이 되셔야만 하셨나를 살짝 깨닫게 되는데요, 그러니까 주님의 속 사람이신 여호와 하나님은 그대로는 이 피조세계에 나타나실 수 없어 반드시 겉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 곧 신적 인간(Divine Human)의 형태로만 나타나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둘째, 천사들은 이 ‘나이가 많아 늙었고’라는 표현을 지금 자기들이 와있는 사람의 눈을 통해 읽을 때, ‘나이가 많다’, ‘늙었다’ 같은 지상 표현을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천국은 여기 지상처럼 시공간의 나라가 아닌, 상태와 그 변화의 나라이기 때문이며, 그들은 영적 존재라 지상 언어는 못 읽고, 다만 그 안에 담긴 영적 의미, 곧 말씀의 영인 속뜻만 읽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저런 표현을 접하면, 상태와 그 변화, 곧 인간을 벗고, 천국을 입는 것(to put off what is human, and put on what is heavenly)으로 이해합니다. 천사들에게 있어서는, 인생이란 세상에 태어나 천국 가는 과정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이 드는 것을 피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곧 새로운 상태로 들어가실 테니까요. 팔십 평생 이룬 게 많아 덕스럽고 복 받은 인생 살아오신 분들도 계실 것이고, 후회와 눈물만 남은 분들도 계실 겁니다. 두 인생이 사후 그 상태가 그 속 사람이 어떤지 여부에 따라 다르겠지만, 천국은 속 사람 상태로 들어가는 나라임을 기억하시고, 눈을 들어 천국을 옷입으시기 바랍니다. 그동안 세상을 꽉 쥐고 살아오셨다면 이젠 놓으시고, 천국을 바라보시며 천국 옷으로 새로 갈아입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나이 드는 것’이며, ‘늙는 것’입니다. 말씀 생활에 힘쓰시고, 그동안 이런저런 아쉬웠던 모든 관계를 풀고 가시기 바랍니다. 부지런히 선을 행하시고, 진리의 삶으로 마무리하시고요. 천국 가는 건, 흐릿한 데 있다가 밝고 또렷한 데로 가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시고, 이웃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제 주일 설교 포함, 여기 올리는 글 대부분을 많은 분께 개인 카톡으로 보내드리고 있습니다. 대부분 몇 년 이상 되신 분들이시며, 겨우 살아남으신(?) 얼마 안 되는 분들이십니다. 저는 제 본업인 리딩과 번역 외에, 이 또한 제가 이 환경에서 힘쓸 수 있는 사역이라 생각하고 힘써 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살아남으셨다’ 한 이유는, 다들 아시겠지만, 여기 글들은 기존 기독교 교리와 많이 좀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 일로 저는 오랫동안 많은 일, 별의별 일을 다 겪어야 했으며, 대부분 오랜 사귐에도 불구, 등을 돌리시거나 좀 불편한 관계가 되거나 하는 그런 일들이었지요. 그럼에도 불구, 이분들은 그 가운데서도 아직 꾸준히 제 글을 거부하시지는 않고 계시는 분들입니다. 그러고 보면, 이분들 대부분은 참 마음이 곧고 정직한, 한길만 파는 그런 올곧은 분들이시지 싶습니다. 한편으론, 평생을 그 교리로 살아오신 분들이시라 그 교리는 자신들의 생명이 되었는데, 이제 와서 누가 그 생명을 건드리면 많이 힘들어하시지 않을까요? 저도 그랬으니까요...
그러나 적극적으로 거부하시지만 않고 있을 뿐, 그렇다고 그동안 적극적인, 또는 눈이 확 열렸을 때와 같은 반응을 보이시는 분은 거의 없습니다. 세 손가락도 많을 듯한데요. 이분들은 정말 희귀한 분들이시며, 참으로 귀한 분들이 아닐 수 없으십니다. 이분들은 나중에 주님과 함께 새 교회에 들어가실 분들입니다.
그렇다 보니 지금은 누구를 또 새롭게 공유 명단에 올리기가 쉽지 않은데요, 괜히 또 불편한 관계가 되지 않을까 해서지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 꾸준히 생각나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러면 예레미야처럼 제 사정을 주님께 말씀드리며, 어떤 증거를 기다리지요. 그래도 계속 생각나며, 저를 꾹꾹 누르시면 할 수 없이 보내기 시작합니다. 사전 양해를 구해야 마땅하나 오랫동안 알던 사이라 그 또한 괜히 부담드릴 듯하여 그냥 슬그머니 보냅니다.
그 다음부터는 주님이 일하실 차례입니다. 이런 거, 다시는 보내지 마시라든가 슬그머니 차단, 카톡 읽은 표시 노란 숫자가 한두 달 안 사라지고 있다든가 뭐, 등등... 아니면, 감사 인사라든가 무슨 질문이라든가 등 한결 좀 나은 반응을 보이시지요. 그러면 참 감사한 거고요...
여기 글들은 주님의 빛 비추심이 없으면 이해조차 쉽지 않으신 글들입니다. 오히려 속에서 막연한 반발심이 피어오르는 그런 글들이지요... ‘오직 믿음’의 교리, 그리고 말씀을 겉 글자로만 읽는 신앙에 반해 선과 진리, 사랑과 신앙의 일치, 하나 됨, 구원이란 속 사람의 상태가 천국을 수용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말씀은 그 안에 주님의 아르카나(arcana, 秘義)가 담긴 것만 말씀이며, 사람이 영과 육으로 되어 있듯 말씀도 말씀의 속뜻과 겉뜻이 있다는 등 기존 기독교, 개신교 교리에서는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얘기를 하니까요...
이 사역에 힘써 벌써 8년 차... 외롭고 고독합니다. 그러나 하기 싫거나 후회하거나 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늘 새롭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다정한 격려 있으셔서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하고는 합니다. 특별히 말씀들 안에 감추어 두신 아르카나는 저의 영과 육을 뒤흔들 만큼 말할 수 없는 감동과 감격의 연속입니다. 최근엔 내면이 조금씩 열림과 복음서 병 고침의 역사가 조금씩 내게도 일어나는 걸 보고 있습니다. 다만 저희 사모에게는 많이 미안합니다. 제가 이 일에 힘쓰는 대신 좀 더 기존 사역을 힘써 교세를 확장하거나 다른 직장을 알아보았거나 했으면 한결 수입이 많아 생활이 훨씬 나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최근 주님의 어떤 당부가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이 느껴집니다.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는... 그래서 못 지킬 때가 간혹 있지만 더욱 요만큼의 세상 두리번거림도 끊고, 스베덴보리의 글들 리딩과 번역에만 전념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주일 설교, 그러니까 주일예배도 어떻게 약식으로 진행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 중입니다. 주일 설교 준비가 시간을 너무 끌어당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오늘의 결론, 주님 주시는 퍼셉션을 따라 보내기는 하지만, 그 결과는 본인 몫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주님은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사55:11) 하셨으니 분명 언젠가는 일을 이루시며, 아 그래서 그때 나로 하여금 글들을 보내게 하셨구나 깨닫게 하실 줄 믿습니다. 제가 이 세상 떠나기 전 그런 소식들을 접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윤 대통령님도 창당 안 하고, 헌재 결과 받아들인다라고 윤상현 의원 통해 언급하셔서, 윤 대통령님 역할도 계엄까지로 막을 내린다고 하네요
이재명 관련 재판들은 법원에서 출석 통보 포기하고, 김만배는 오늘 무죄판결 나고... 대 놓고 법이 없는 상태가 되었어요
마치 모압-암몬-마온이 유다에 쳐들어왔을 때 여호사밧이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는 심정이랑 비슷하네요
중국이 깊게 쳐들어와서 무정부 상태를 만들어놓았는데 국민들은 정신 못 차리고 있고... //
이상은 어젯밤 받은 어느 우국충정 지사의 카톡입니다. 아래는 제가 보낸 답신입니다.
주님 복음서 시절, 자기 지상 조국 유다의 운명에 대해 취하셨던 태도가 생각납니다. 우리는 나라를 사랑할 때에도, 의롭고 올바름을 사랑할 때에도, 주님을 생각하며, 주님 안에서 해야겠다고 말입니다. 그것이 생각만큼 쉬운 일은 아니지만...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의 상황, 밖으로는 로마의 식민 통치, 안으로는 나라의 독립을 꾀하는 끊임없는 움직임 가운데서도 주님은 한가로이(?) 천국 이야기만 하시고, 사람들을 치료하고 다니실 뿐이셨습니다. 그 덕에 나라 안팎 권력 잡은 자들, 정치인들의 시선을 피하실 수 있었지만... 아마 대제사장들을 비롯, 당대 종교 리더십들의 시기, 질투만 아니었어도 주님이 십자가에서 처형당할 일은 없으셨을 뻔할 정도였습니다.
만일 주님이 지금 이 대한민국 상황에 오셔서 저 복음서 시절처럼 동일한 사역에 힘쓰고 계시면... 지금은 뭐 좀 달라질까요? 아마 똑같은 상황이 전개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소위 종교 리더십이라는 사람들의 수많은 지적질 때문에 말입니다. 나라 사랑이라든지, 정의와 공정을 사랑한다든지 하는 것들을 잘, 그러니까 주님 관점에서 생각해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처럼 사람들을 모아 집회를 열어 로마에 아부하는 종교, 정치 지도자들에 대한 타도를 외치시지도, 그렇다고 로마에 부역해야 우리는 살 수 있다 하시지도 않았습니다. 주님은 아예 그런 현실 정치에 관여하시지 않았습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마22:21)라고 하신 주님이십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우리는 겉을 보지만, 주님은 속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다의 정치적 상황이 겉이라면, 유다를 비롯, 온 세상에 만연한 지옥의 기운, 곧 속을 주님은 상대하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자유민주주의든, 공산, 전체주의, 사회주의든 사실 무슨 무슨 주의 같은 것 때문에 주님의 일과 계획, 영원하신 섭리가 차질을 빚는 일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천국 갈 사람이 천국 못 가고, 천국 못 갈 사람이 천국 가고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지상 어떤 정치 제도나 체제에 의해 영향을 받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재명 같은 사람 하나 때문에 주님이 곤란을 겪으시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묻는 빌라도에게 '네 말이 옳도다'(마27:11) 하신 주님이십니다. 지금도입니다. 지금도 그때처럼 겉과 속 상황이 전개되어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주님께 주목해야 할 때입니다.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말입니다. 주님은 주님의 어떠하심을 위해 굳이 사람들의 예배와 영광, 찬송을 필요로 하는 분도 아니시고. 그런 걸로 이랬다저랬다 하는 신도 아니십니다. 사람들의 예배, 영광, 찬송 없이도 주님은 이미 모든 것이 충분하신 분입니다. 주님은 비유하자면, 저 하늘의 해와 같은 분이셔서 우리의 무슨 찬송과 영광 돌림은 그저 성냥개비 하나 켜서 그 빛에 보태는 정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분이 우리더러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께 영광 돌리며, 주님을 섬기라 하시는 건 뭐가 부족하셔서가 아니라 순전히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천국에서 지낼 수 있게 하시려고 말입니다.
주님은 정말 크신 분이십니다. 천국보다 크셔서 천국 밖에 계신 분입니다. 천국을 비롯한 모든 영계와 이 세상 자연계, 온 우주 만물 등, 이 피조 세계 전체도 주님을 모시기에는 부족한, 그런 신이십니다! 천국에서 주님을 아주 가까이 모시는 삼층천 한 가운데 천사들조차도 주님이 얇은 보호막을 입혀주시지 않으면 주님의 영광의 그 기운에 해를 입으며, 주님이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으신 채 그대로 천국이나 지옥을 방문하시면, 그곳은 주님의 그 날 것 그대로의 신성(the Divine)을 감당할 수 없어 그대로 소멸되고 맙니다. 그 속 사람으로 여호와 하나님이시고, 그 겉 사람으로 예수 그리스도 이신, 그리고 신적 진리(Divine Truth)이신 성령이 해처럼 방사되시는, 신적 삼위일체(Divine Trinity)이신 주님은 참으로 크고 두려우신,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러니 비록 지금은 분명 엄중한 상황이지만, 우리는 이런 신, 이런 주님을 믿고, 주님 안에서 중심을 잡고 있어야 하겠습니다. 주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잡히실 때에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51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의 하나가 손을 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52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53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54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 (마26:51-54)
그 능력의 천사들조차 주님 뒤에서 잠자코 수종 들었음을 생각합시다. 그 정말 기가 막힌 상황에서도 말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주님이 행하실 일을 사모하며 오직 주님의 선(Divine Good)과 진리(Divine Truth), 그 아름다우신 신성(the Divine)에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야 하겠습니다. 늘 주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은 지상의 조국 유다의 엄중한 상황에서 어떻게 하셨나를 말입니다. 지금은 우리 역시 중심을 잡고, 주님처럼 우리도 속에 주목하고 집중, 우리 신앙의 기본으로, 첫 출발점으로 돌아가야 하겠습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우리 속 사람의 상태가 천국을 수용할 수 있는 상태여야 하겠고, 철저히 주님 사랑, 이웃 사랑 가운데 모든 걸 해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주님 사랑, 나라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1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2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3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호6: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