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보고 엎드려 구한 나병환자
12예수께서 한 동네에 계실 때에 온몸에 나병 들린 사람이 있어 예수를 보고 엎드려 구하여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니 13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나병이 곧 떠나니라 14예수께서 그를 경고하시되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또 네가 깨끗하게 됨으로 인하여 모세가 명한 대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셨더니 15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수많은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고침을 받고자 하여 모여 오되 16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눅5:12-16)
주님과 아버지가 합일해 가는 과정을 주님의 겸비의 상태라고 하고, 합일 그 자체를 영화의 상태라고 한다. 주님이 세상에 계실 때 겸비와 영화라 불리는 두 가지 상태에 계셨다는 것은 교회에서 인정하는 일이다. 전자의 상태, 즉 주님의 겸비의 상태는 말씀의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테면 다윗의 시편과 예언서에 기록되어 있다. 특히 이사야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사53:12)이러한 상태가 아버지 앞에서 주님의 상태, 즉 겸비, 겸손의 상태다. 왜냐하면 그 상태에서 주님은 아버지께 기도하셨고, 또 아버지의 뜻을 행하겠다고 하셨으며, 그가 행하고 말한 모든 것을 아버지께 돌리셨기 때문이다. (TCR.104, 이순철 역)
※ TCR(True Christian Religion, 참된 기독교) 위 104번 글에 대한 Ager 영역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8) The progress towards union was his state of exinanition [emptying himself], and the union itself is his state of glorification. It is acknowledged in the church that when the Lord was in the world he was in two states, called the state of exinanition and the state of glorification. The prior state, which was the state of exinanition, is described in the Word in many places, especially in the psalms of David and also in the prophets, and particularly in Isaiah (chapter 53) where it is said:
That he emptied his soul even unto death (Isa. 53:12).
This same state was his state of humiliation before the Father; for in it he prayed to the Father; and he says that he does the Father’s will, and ascribes to the Father all that he did and said. (TCR.104, Ager 역) //
오늘 말씀은 주님께서 나병 들린 환자를 치유하셨다는 내용의 말씀입니다. 나병(癩病)은 문둥병이라고 부르는 피부병입니다. 오늘날엔 한센병이라고 하지요. 구약 레위기의 기록에 따르면 나병이 걸리면 먼저 제사장에게 가서 진단을 받았습니다. 제사장이 진찰해 나병인지 아닌지 확인을 하는 것입니다. 나병이 확정되면 환자는 장막 밖으로 격리되어 그곳에서 생활해야 했습니다. 병이 완전히 치유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사장이 먼저 진단을 하고, 완치되었다는 판정을 내리면 하나님 앞에 정결 예식을 드리고, 그다음에 소속된 사회로 복귀했습니다. 아래는 관련 레위기 말씀들입니다. 좀 길지만 함께 읽겠습니다.
1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만일 사람이 그의 피부에 무엇이 돋거나 뾰루지가 나거나 색점이 생겨서 그의 피부에 나병 같은 것이 생기거든 그를 곧 제사장 아론에게나 그의 아들 중 한 제사장에게로 데리고 갈 것이요 3제사장은 그 피부의 병을 진찰할지니 환부의 털이 희어졌고 환부가 피부보다 우묵하여졌으면 이는 나병의 환부라 제사장이 그를 진찰하여 그를 부정하다 할 것이요 4피부에 색점이 희나 우묵하지 아니하고 그 털이 희지 아니하면 제사장은 그 환자를 이레 동안 가두어둘 것이며 5이레 만에 제사장이 그를 진찰할지니 그가 보기에 그 환부가 변하지 아니하고 병색이 피부에 퍼지지 아니하였으면 제사장이 그를 또 이레 동안을 가두어둘 것이며 6이레 만에 제사장이 또 진찰할지니 그 환부가 엷어졌고 병색이 피부에 퍼지지 아니하였으면 피부병이라 제사장이 그를 정하다 할 것이요 그의 옷을 빨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리라 7그러나 그가 정결한지를 제사장에게 보인 후에 병이 피부에 퍼지면 제사장에게 다시 보일 것이요 8제사장은 진찰할지니 그 병이 피부에 퍼졌으면 그를 부정하다 할지니라 이는 나병임이니라 (레13:1-8)
45나병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46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영 밖에서 살지니라 (레13:45-46)
1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나병 환자가 정결하게 되는 날의 규례는 이러하니 곧 그 사람을 제사장에게로 데려갈 것이요 3제사장은 진영에서 나가 진찰할지니 그 환자에게 있던 나병 환부가 나았으면 4제사장은 그 정결함을 받을 자를 위하여 명령하여 살아 있는 정결한 새 두 마리와 백향목과 홍색 실과 우슬초를 가져오게 하고 5제사장은 또 명령하여 그 새 하나는 흐르는 물 위 질그릇 안에서 잡게 하고 6다른 새는 산 채로 가져다가 백향목과 홍색 실과 우슬초와 함께 가져다가 흐르는 물 위에서 잡은 새의 피를 찍어 7나병에서 정결함을 받을 자에게 일곱 번 뿌려 정하다 하고 그 살아 있는 새는 들에 놓을지며 8정결함을 받는 자는 그의 옷을 빨고 모든 털을 밀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리니 그 후에 진영에 들어올 것이나 자기 장막 밖에 이레를 머물 것이요 9일곱째 날에 그는 모든 털을 밀되 머리털과 수염과 눈썹을 다 밀고 그의 옷을 빨고 몸을 물에 씻을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리라 10여덟째 날에 그는 흠 없는 어린 숫양 두 마리와 일 년 된 흠 없는 어린 암양 한 마리와 또 고운 가루 십분의 삼 에바에 기름 섞은 소제물과 기름 한 록을 취할 것이요 11정결하게 하는 제사장은 정결함을 받을 자와 그 물건들을 회막 문 여호와 앞에 두고 12어린 숫양 한 마리를 가져다가 기름 한 록과 아울러 속건제로 드리되 여호와 앞에 흔들어 요제를 삼고 13그 어린 숫양은 거룩한 장소 곧 속죄제와 번제물 잡는 곳에서 잡을 것이며 속건제물은 속죄제물과 마찬가지로 제사장에게 돌릴지니 이는 지극히 거룩한 것이니라 14제사장은 그 속건제물의 피를 취하여 정결함을 받을 자의 오른쪽 귓부리와 오른쪽 엄지 손가락과 오른쪽 엄지 발가락에 바를 것이요 15제사장은 또 그 한 록의 기름을 취하여 자기 왼쪽 손바닥에 따르고 16오른쪽 손가락으로 왼쪽 손의 기름을 찍어 그 손가락으로 그것을 여호와 앞에 일곱 번 뿌릴 것이요 17손에 남은 기름은 제사장이 정결함을 받을 자의 오른쪽 귓부리와 오른쪽 엄지 손가락과 오른쪽 엄지 발가락 곧 속건제물의 피 위에 바를 것이며 18아직도 그 손에 남은 기름은 제사장이 그 정결함을 받는 자의 머리에 바르고 제사장은 여호와 앞에서 그를 위하여 속죄하고 19또 제사장은 속죄제를 드려 그 부정함으로 말미암아 정결함을 받을 자를 위하여 속죄하고 그 후에 번제물을 잡을 것이요 (레14:1-19)
그러면 나병의 영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나병’(癩病, 한센병)의 영적인 의미는 교회의 진리를 모독하는 것, 즉 진리를 더럽히는 것입니다. 신앙인들에게 진리의 모독은 보통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진리가 옳다 인정하고 믿으면서도 진리에 반(反)하는 삶을 사는 경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리를 모르는 사람은 진리를 모독할 수 없습니다. 진리를 소유하고 있지 않으니까 진리를 더럽힐 수 없는 것입니다. 진리를 모독하는 또 다른 경우는, 진리를 인정했던 사람이 나중에 진리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인정했던 사람이 진리를 부정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요. 진리를 인정하는 것이 자신의 이익에 배치되기 때문에 부인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진리에 따라 사는 것이 너무 힘이 들어서 진리를 포기해 버리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다 귀찮다. 이렇게 나를 속박하는 것이 어떻게 진리가 될 수 있어!’라고 자기 합리화를 하면서 진리를 떠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28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모든 모독하는 일은 사하심을 얻되 29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 (막3:28-29)
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성령은 진리로 세상에 오신 주님 자신, 또는 주님에게서 나오는 진리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모독하는 것은 성령을 모독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경우든 알면서 진리를 어기거나, 또 부인하는 일은 진리를 모독하는 일이며 두려운 일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는 이 진리를 모독하는 죄, 영적인 나병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서 그 방법을 알아보겠습니다. 12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12예수께서 한 동네에 계실 때에 온몸에 나병 들린 사람이 있어 예수를 보고 엎드려 구하여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니
주님께서 한 동네에 계실 때 온몸에 나병 들린 사람이 주님을 찾아왔다고 합니다. 말씀에서 ‘동네’는 교회의 교리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한 동네에 계실 때에’라는 말씀은 주님이 우리 내면에서 교회의 교리를 가르치고 계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씀에서는 주님께서 교회의 교리를 가르치시는 모습을 이처럼 ‘한 동네에 계실 때’라 하기도 하고, 지난 시간 말씀처럼,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라 하기도 합니다. 배 역시 교회의 교리를 뜻하기 때문인데요, 그런데 그때 한 나병환자가 찾아와 주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나병환자는 진리를 믿으면서도 진리에 반대되는 삶을 사는 사람, 또는 그런 상태를 의미합니다. 즉 여기 ‘나병환자’라는 상태는 어떤 종류의 계명을 잘 이해하고 믿으면서도 그 계명을 습관적으로 어기는 상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일부러 주님의 말씀을 어기기야 하겠습니까? 진리에 따라 살고자 하는 마음은 있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아서 그러는 거겠죠.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의 제자들도 그랬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깨어 있으라 하셨는데 제자들은 깊은 잠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무어라 하셨습니까?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마26:41) 하셨습니다. 그처럼 몸이 말을 듣지 않아 계명을 어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때 신실한 사람들이라면 할 수 있는 노력은 다할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간의 힘으로는 이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고 오직 주님만이 치유하실 수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을 찾아온 나병환자의 모습입니다. 말씀에는 나병환자가 주님께 엎드렸다고 했지만, 영어 성경에는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다고 표현합니다. 성(聖) 문서의 기록에 따르면,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는 것은 고대교회 때부터 있었던 습관이라고 합니다. 고대교회 사람들은 어떤 경우에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을까요? 상대에 대한 지극한 공경심을 표현할 때 그렇게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나병환자가 주님 앞에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 것은 자신을 낮추고 주님을 지극히 높이는 행동입니다. 얼굴은 내적인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는 외적인 부분이 있고, 내적인 부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얼굴을 땅에 댄다 할 때는 그냥 겉으로만 자기를 낮추는 것이 아니고요, 내적으로도 몸을 낮추는 것입니다. 주님께 내적으로 몸을 낮춘다는 것은, 그냥 생각으로만 겸손한 것이 아니고요, 의지로부터도 나오는 겸손함입니다. 의지로부터 나오는 겸손함이란, 주님의 계명을 머리로만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계명대로 살기를 원하는 강한 의지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겸손한 것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굳은 의지를 갖고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주님 앞에 겸손한 것입니다. 입으로 아무리 주님을 높이고 찬양한다 하더라도 주님의 계명대로 살지 않으면 주님을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겸손한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내적으로 겸손하다 하는 것은 주님의 계명대로 살기를 원하는 강한 애정의 상태를 말합니다. 지금 나병환자가 그런 상태인 것이며, 그 상태에서 병자가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 ‘원하시면’이 나오는데요, 이 말을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이렇게 형편없는 죄인인데 과연 주님께서 받아주실까? 라며 자신을 낮추는 것이며, 또한 절실한 간구라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병자의 말을 들으시고 어떻게 하시나요? 13절입니다.
13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나병이 곧 떠나니라
주님께서 나병환자의 간절한 마음을 받으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내가 원한다 하시며 그의 몸에 손을 대셨습니다. 주님께서 병자를 고치실 때, 병자의 몸에 손을 대시곤 하셨는데요, ‘몸에 손을 대시는 것’은 주님과 우리 사이 접촉이 일어나는 것이며, 그렇게 해서 주님과 우리가 결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때 주님으로부터 능력이 병자에게 흘러 들어갑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손을 대시면서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셨을 때, 나병이 떠났습니다.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진리의 능력이 나병을 치유한 것입니다. 14절에서는 주님께서 나병환자에게 경고를 하셨다고 합니다. 경고라고 하지만 영어 성경의 표현은 명령입니다. 주님의 명령을 본문에서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14예수께서 그를 경고하시되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또 네가 깨끗하게 됨으로 인하여 모세가 명한 대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셨더니
여기 주님의 명령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둘째는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셋째는 ‘네가 깨끗하게 됨으로 인하여 모세가 명한 대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입니다. 주님에 의해 영적 질병의 치유를 받으면 우리는 그냥 가만히 있어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영적 질병에 들렸던 자는 스스로 완치되었음을 입증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병이 완치되었음을 입증하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같은 범죄를 다시는 저지르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질병을 치유하신다는 것은 같은 죄를 다시 저지르지 않도록 능력을 주신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죄의 유혹이 있을 때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할 때 병은 완치됩니다. 그렇다면 병이 깨끗하게 나았음을 입증하려면 어떤 과정이 필요할까요?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주님께서는 세 가지로 말씀하십니다.
첫째,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입니다. ‘이르다’, 즉 말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진리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는 것은 어떤 진리도 생각하지 말라는 뜻인데, 주님께서 과연 그런 뜻으로 말씀하셨을까요? 그것이 아니고요, 자신의 자아에서 나오는 생각을 진리처럼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생각하는 것들 중에는 진리처럼 보이지만 진리 아닌 것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우리가 이웃에게 선을 베풀 때, 과하게 선을 베푸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옛 성인들의 말씀에 ‘과한 것은 모자람만 못하다’(過猶不及)는 말이 있습니다. 선이나 진리는 그렇게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상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상식적으로 너무 과하다 싶은 것은 보통 진리에서 벗어난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라고 누가 시킵니까? 우리 내면에 있는 자아가 시킵니다. 나병환자가 그동안 병을 떼어내지 못한 이유는, 진리에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에 의지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인간의 생각을 멈추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의 유입을 기다리라고 하십니다. 그것을 주님께서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표현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또 ‘가라’고 하셨는데, 이 말은 진리를 행동으로 옮기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가서’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자아에서 오는 생각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주님께서 주시는 진리를 따라 그냥 행하라는 뜻입니다.
병의 완치를 입증하기 위한 두 번째 해법은 무엇입니까?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제사장은 말씀에서 선을 나타냅니다. 주님에 대해 제사장이라 부를 때가 있고, 왕이라 부를 때가 있는데요, 왕으로서의 주님은 진리이신 주님을, 제사장으로서의 주님은 선이신 주님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제사장에게 몸을 보인다는 것은, 자신의 삶 전체를 선의 관점에서 돌아보라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극복할 수 없는 영적 문제가 있을 때, 그 원인은 대개 진리의 문제라기보다는 삶의 문제일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삶을 이루는 습관들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서로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마치 집을 지을 때, 기둥을 세우고 보를 치고, 그 위에 슬라브와 지붕을 얹는 것처럼 그렇게 서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가 흔들리면 다른 것도 흔들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삶의 습관이 하나 잘못되면 다른 것에도 영향을 줘서 치유되기 어려운 영적 질병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영적 문제가 있을 때는 원인을 찾아 해결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삶의 습관들을 선의 관점에서 하나씩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행하는 습관들이 많이 있습니다. 말하는 습관과 행동하는 습관, 일을 처리하는 습관, 이웃에게 선을 베푸는 습관 등 어쩌면 진리처럼 보이는 이러한 모든 것들이 정말 진정한 체어리티이며 사랑인가를 따져 보라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주님은 그에게 너는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라’ 하신 것입니다.
질병의 완치를 위한 세 번째 해법은,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리는 것입니다. 앞서 읽은 레위기 14장에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정결 예물의 목록이 있습니다.
2나병 환자가 정결하게 되는 날의 규례는 이러하니 곧 그 사람을 제사장에게로 데려갈 것이요 3제사장은 진영에서 나가 진찰할지니 그 환자에게 있던 나병 환부가 나았으면 4제사장은 그 정결함을 받을 자를 위하여 명령하여 살아 있는 정결한 새 두 마리와 백향목과 홍색 실과 우슬초를 가져오게 하고 (레14:2-4)
여기 ‘정결한 새 두 마리와 백향목과 홍색 실과 우슬초’가 그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러한 것들을 나병환자의 정결 예물로 드리라 하신 이유는, 이 각각의 것들이 어떤 영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의미를 살펴볼까요? 먼저 ‘정결한 새 두 마리’는 진리와 선의 결합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진리를 머리로만 생각하지 말고, 행동으로도 옮기라는 뜻입니다. 그다음 ‘백향목과 우슬초’를 드리는 것은 각각 내적 진리와 외적 진리를 함께 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백향목은 내적인 진리를 나타내고, 우슬초는 외적인 진리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 내적 진리와 외적 진리를 함께 주님께 드린다는 것은, 먼저 외적 진리를 드리는 것은 겉으로 보기에 정직하고 바르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법도에도 어긋나지 않고, 윤리와 도덕에도 어긋나지 않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에 비해 내적 진리를 드리는 것은, 겉으로 반듯하고 진실하게 행동할 뿐 아니라 그 동기도 진실하고 선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행위의 동기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주님과 이웃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겉으로는 반듯해 보여도 속을 들여다보면 자기 이익을 챙기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사람들은 외적 진리만 드릴 뿐 내적 진리를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두 가지를 함께 드리라고 하세요. 따라서 우리가 겉으로 진리에 따라 반듯하게 살 뿐 아니라 내면의 동기에 있어서도 주님과 이웃을 위한 사랑으로 충만하다면 영적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었다고 봐도 될 것입니다. 그러기 전까지는 우리의 영적 질병은, 겉은 깨끗하지만, 속의 뿌리는 아직 남아 있는 종양과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영적으로 취약하거나 할 때면 언제든지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는 정결 예물로 정결한 새 두 마리와 백향목, 우슬초를 함께 드리라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 때 주님께서는 나병의 완치를 선언하십니다. 다음 15절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15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수많은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고침을 받고자 하여 모여 오되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는 주님에 의해 치유된 자들의 모습을 통해 진리이신 주님이 증거 되시는 것입니다.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많은 무리가 참 진리가 있는 교회로 모여듭니다. 여기서 ‘무리’란 속뜻으로는 진리 안에만 있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진리만 있고 선은 없는 사람들이 무리인데, 그들은 선이 없기 때문에 영적 질병에 감염되기 쉬운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참 진리가 있는 교회, 선을 동반한 진리가 있는 교회로 모여들게 됩니다. 그 매개자의 역할을 누가 합니까? 주님으로부터 치유 받은 우리가 할 수 있습니다. 끝으로 16절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16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여기서 ‘한적한 곳’은 영어 성경에는 광야라고 되어 있습니다. ‘광야’는 선도 없고 진리도 없는 상태를 말씀에서는 광야라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 광야에 계신다는 것은 곧 시험을 당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시험을 받지 않았습니까? 왜 광야에 계시는 것을 시험받으시는 상태라고 하느냐면, 극심한 시험 상태에 있을 때는, 보통 내 안에 선도 없고, 진리도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아마 주님께서도 극심한 시험의 상태에서는 그런 느낌이시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감히 합니다. 주님에게 선도 없고 진리도 없다고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지만, 그러나 역설적으로 보면 그만큼 주님은 세상에 계실 때 겸손의 상태에 계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세상에서의 생애 전체는 아버지와 합일하는 과정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주님은 당신 안에 계신 아버지에 대해 일관되게 겸손의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그것은 시험 중에 아버지께 기도하시는 모습을 통해 알 수 있는데요,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은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26:39)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와 주님은 한 분이세요. 그러나 주님께서 인성을 거룩하게 만드시기 전, 주님의 인성은 아버지보다 조금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시편 8편에서는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라고 기록하신 것입니다. 또한 십자가상에서도 주님께서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46) 부르짖으셨습니다. 이러한 것이 모두 아버지에 대한 주님의 겸비의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또 주님께서 기도하신다고 했는데, 이 말씀은 주님께서 당신 안의 아버지와 대화하시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주님은 그렇게 아버지와 끊임없이 대화하시면서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은 주님께서 나병환자를 치유하시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나병은 겉으로 보기에도 흉측하고 치유하기가 어려운 병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나병의 속뜻은 진리를 모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리를 모르는 사람은 진리를 모독할 수가 없기 때문에 나병은 진리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질병입니다. 레위기 13장과 14장을 보면 나병의 종류가 아주 많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병이 오랜 것과 오래지 않은 것이 있고요, 외적인 나병과 내적인 나병이 있습니다. 그리고 치유될 수 있는 나병이 있고, 치유될 수 없는 나병이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나병’이라고 하면 진리를 인정하고 믿는다고 하면서 진리에 역행하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인은 누구나 감염될 수 있는 병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나병 들린 환자는 어떻게 치유될 수 있었습니까? 얼굴을 땅에 대고 주님 앞에 엎드렸다고 했습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는 것은 내적으로 주님을 공경하는 모습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위해 악을 끊겠다는 결심을 하는 것이 내적으로 주님을 공경하는 것입니다. 나병환자가 그런 마음으로 주님께 매달렸을 때, 주님께서 그의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주님은 또 병의 완치를 위해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고 예물을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라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자신의 삶 전체를 선의 관점에서 돌아보라는 뜻이고요, 즉 삶의 모든 습관들 속에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있는지를 살펴보라는 뜻입니다. 그런 다음에야 우리는 주님께 진실한 예물을 드릴 수 있고, 다시는 나병에 걸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던져주신 또 하나의 메시지는, 주님은 병자들의 병을 고쳐 주시면서, 한편으로는 광야에서 기도하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어떤 종교의 수도자들처럼 세상과 격리된 곳에서 기도만 하시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지옥의 끊임없는 도전을 뿌리치시고, 다른 한편으로는 병자들과 함께 지내셨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우리 신앙인들에게 모범이 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한편으로는 혹시 있을지 모르는 나병과 싸우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어떤 형태로든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그밖에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서, 그리고 교회에서 자기가 잘할 수 있는 것을 가지고 봉사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이 보여주신 모범을 따르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러한 은혜가 새 교회의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시51:7)
아멘
원본
2017-10-29(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3-28(D3)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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