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사렛 사람들이 주님에게 크게 화를 낸 이유
23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용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가 들은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24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25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26엘리야가 그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27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 뿐이었느니라 28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크게 화가 나서 29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하되 30예수께서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눅4:23-30)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는 말씀은 주님과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적 진리는 교회 안의 사람들보다 교회 밖의 사람들이 더 잘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것을 뜻한다. 주님은 당시 교회가 그들에게 있던 유대인들에게 이 말씀을 하셨고, 그렇게 해서 그들이 교회 밖의 사람들보다 주님을 더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오늘날 기독교회라고 불리는 교회 안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은 기독교회의 교리를 통해 주님을 받아들이지만, 소수의 사람들만 마음으로 주님을 인정하고, 그나마 사랑에서 비롯한 애정으로 주님을 인정하는 사람은 숫자가 더 작다. 그러나 교회 밖의 개종한 이교도들은 다르다. 이들은 주님을 그들의 한 분 하나님으로 예배하고 공경한다. (AC.9198:2, 이순철 역)
※ AC(Arcana Coelestia, 천국의 비밀, 라틴) 9198번 글에 대한 Clowes 영역 및 Potts 개정본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That ‘no prophet is accepted in his own country’ signifies that the Lord, and the Divine truth which is from him, are less received and loved in heart within the church, than outside of it. He spoke to the Jews, with whom the church then was; and it is known that the Lord was less received by them than by the nations outside the church. The case is similar at this day in the church which from him is called the Christian church. In this the Lord is indeed received in doctrine; but only by a few with acknowledgment of heart; and by still fewer from the affection of love. It is otherwise with the converted gentiles outside the church. These worship and adore him as their one only God, (AC.9198:2, Clowes 역)
이는 출애굽기 22장 22절,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에 관한 주석 중 ‘과부나’(Any widow)에 대한 내용입니다. //
그동안 장마철이라 비가 많이 왔는데, 오늘 맑은 하늘을 보니 여러 가지로 기분이 상쾌합니다. 양동룡 부목사님께서 휴가를 가셨는데 좋은 시간 보내고 오시면 좋겠습니다.
※ 이 설교는 지난 2017년 7월 30일,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님의 설교를 원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에 나오는 구절에는 주님께서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주님께서 성경을 읽으시고, 사람들은 말씀에 귀 기울이고 있는데, 그 모습이 참으로 평화로워 보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은 분위기가 많이 다릅니다. 주님께서 나사렛 사람들을 질책하시고, 그러는 주님에게 사람들이 화를 냅니다. 그리고 결국 주님을 동네 밖으로 쫓아내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 밀쳐 떨어뜨리려고까지 합니다. 주님과 회당에 모인 사람들 사이에 과연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겉뜻으로는 어리둥절한 이 상황, 그 이유를, 하지만 속뜻을 통해서는 알 수 있는데요, 23절입니다.
23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용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가 들은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주님은 나사렛 사람들이 당신이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자기들에게도 똑같이 행하라고 요구할 거라 말씀하십니다. 가버나움에서 주님이 행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가버나움은 주님께서 공생애를 처음 시작하신 갈릴리 북쪽에 있는 동네입니다. 그곳에서 주님은 많은 기적을 행하셨는데요, 가령, 백부장의 하인을 고치시고, 회당에서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도 고치시며, 천정을 뜯고 달아 내린 중풍병자도 고치시는 등 많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들은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이란 그곳에서 행하신 여러 기적을 말합니다. 기적이란 노력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행운이 찾아오거나, 또는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어떤 일이 실제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주님께서 가버나움에서 행하신 일들은 기적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죽어가는 심령들을 살리는 구원의 역사였고, 그러한 역사는 주님을 진실하게 믿는 사람에게는 늘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나사렛 사람들의 눈에는 그것이 기적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 기적들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하신 것입니다.
※ 저는 특히 이 신유(神癒), 즉 병 고침의 역사에 관심이 많습니다. 아마 개척 전 부사역자로 있던 중형교회에서의 경험 때문인 것 같은데요, 저는 그때 한 80여 세대를 담당하는 마을사역자였습니다. 거의 웬만한 큰 교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다 겪어야만 했었는데요, 그중 열에 일곱은 이 질병과 장애, 장례에 관련된 일이었지요... 그래서인지 저는 특히 복음서 내용 중 주님의 치유의 현장이 늘 부러웠고, 주목할 수 밖에 없었으며, 그 비밀을 찾기 위해 애썼습니다. 아마 ‘나는 내가 안수하는 자마다 낫는다’라는, 치유의 은사로 좀 유명해지고 싶은 공명심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부끄럽지만... 그러나 정확하게는, 마을 목원들의 그 아픔과 안타까운 사정들을 좀 해결해 줄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더 컸더랬습니다. 그러다가 세월이 흘러 수도원 공부를 하게 되고, 그러다가 스베덴보리를 알게 되어 지금은 이 일, 이 길을 소명으로 받아 벌써 햇수로 8년째입니다. 그러면서 지금은 어렴풋이 그 어떤 영적 원리 내지는 비밀을 알게 된 것 같은데요, 그것은 바로 ‘천국의 모든 것과 사람의 모든 것은 상응한다’(There Is a Correspondence of All Things of Heaven with All Things of Man)라는,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Heaven and Its Wonders and Hell) 12장에 나오는 내용 덕분입니다. 즉 천국 전체는 한 사람 모습이며, 천국은 사람의 모든 신체, 곧 머리, 몸, 팔과 다리 등에 상응하는 수많은 공동체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 이 세상 사람들은 모두 저마다 그런 천국과 상응하고 있다는 등의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몸 어디가 아프면 그 부분에 상응하는 천국 공동체들의 인플럭스(influx, 입류)를 통해 그 능력을 공급받으면 되는 것이지요. 좀 엉뚱하고 믿기 어려운 내용이시겠지만... 하여튼 저는 이 책의 모든 내용이 쑤욱 들어왔으며, 그러니까 그냥 믿어졌으며, 드러내어 밝히기는 좀 그렇지만, 어쨌든 저는 이렇게 제 몸에 대해 적용, 나름 상당한, 거의 확실하다는 걸 알았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물론, 저도 때로는 약도 쓰고, 병원도 다닙니다만, 네, 하여튼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기술(記述)이 믿어지려면 사람의 내면이 열려야 합니다. 내면이 닫히면 천국을 향한 창이 닫혀 천국의 모든 걸 받을 수 없기 때문이지요. 사람의 내면은 세 단계로 되어 있는데, 단계마다 천국에서 흘러들어오는 것들이 차원이 다릅니다. 아마 천국이 삼층천으로 되어 있는 것도 그래서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을 만나 그 자리에서 고침 받은 복음서 여러 케이스들은 그 내면이 그 일이 일어날 수 있도록 확실히 열렸던 사람들이지 싶습니다. 주님은 그 사람의 내면이 어디까지 열렸는가를 보시고, 엔터키만 치셨던 거 같아요. 여러분도 이 사실을 믿어 내면이 열리고, 그래서 동일한 은혜를 입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나사렛은 갈릴리 지역에 있기 때문에, 속뜻으로는 이방인의 지역을 뜻하고, 또한 겉 사람을 의미한다는 건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내면에 있는 겉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가장 멀리 있으며, 심지어 주님을 배척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 지난주 설교를 참고하세요.
그런데 본문에서는 나사렛을 주님의 고향이라고 했습니다. 나사렛을 주님의 고향이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주님께서 겉 사람 안에 세우신 교회를 뜻하기 때문이며, 주님의 고향은 천국, 또는 교회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거듭나게 하실 때, 제일 먼저 하시는 일은 속 사람을 변화시키시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겉 사람을 변화시키십니다. 어떤 방법으로 변화시키십니까? 겉 사람 안에 진리의 씨를 뿌리십니다. 주님께서 겉 사람 안에 진리의 씨 뿌리시는 모습이 오늘 본문 바로 전 본문에 나오는 장면입니다. 즉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시고, 나사렛 사람들이 그 말씀을 경청하는 모습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경청한다는 것은 귀의 작용이며, 그러므로 겉 사람 안에 있는 애정을 나타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그 애정 안에 진리의 씨를 뿌리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런 방법으로 겉 사람 안에 교회를 세우시고, 궁극적으로 그곳에 거처하기를 원하십니다. 그 교회가 24절에서 말하는 주님의 고향 나사렛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교회가 가버나움의 기적을 원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그 이유를 설명하겠습니다.
각 사람의 내면에 교회가 처음 세워질 때는 진리에 대한 애정 위에 세워집니다. 우리 역시 진리에 대한 애정이 있었기 때문에 새 교회로 들어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교회가 세워지면 제자리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됩니다. 영적으로 계속 발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처음 가졌던 진리의 애정을 잃어버리게 되니까요. 처음 가졌던 진리에 관한 애정을 잃어버리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진리를 악용하기 시작합니다. 진리를 악용한다는 것은 진리를 주님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자기 자신과 세상을 위해 사용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자기 자신을 위해 쓰지 않을 수는 없겠지요. 그러나 그렇더라도 궁극적으로는 주님과 이웃을 위해 써야 합니다. 지난번 교리 강좌에서도 우리는 구원을 위해 믿는가, 아니면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믿는가? 라는 문제를 서로 얘기했습니다. 처음 교회에 나올 때는 누구나 구원을 받기 위해 나옵니다. 즉 천국에서의 행복한 삶을 위해 신앙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그것을 목적으로 삼는 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이웃의 행복을 위해 자신을 헌신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몸담고 있는 사회와 나라, 교회를 위해 헌신하는 것이 신앙의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런 삶을 살 때 천국은 저절로 따라오는 것입니다. 자신의 구원만을 생각하는 신앙, 그런 신앙을 새 교회에서는 자연적 신앙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에서 가버나움의 기적을 바라는 사람들은 자연적 신앙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입니다. 자연적 신앙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의 삶은 어떤 것입니까? 이웃을 위한 일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자녀가 좋은 직장에 취업하기를 원하고, 또 질병의 치유를 바라며 사업의 성공을 바랍니다. 그러한 것들이 다 기적을 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태복음 6장 33절에서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반드시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용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가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하신 말씀은 자연적 신앙에 계속 머물러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일종의 경고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나사렛 사람들이 주님을 산으로 끌고 가 낭떠러지에서 떨어뜨리려 하는데, 바로 그런 것이 자연적 신앙 가운데 있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24절에서 말씀하시기를
24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하셨습니다. 말씀에서 선지자는 성경, 즉 말씀을 나타냅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은 가장 큰 선지자이십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말씀 자체이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선지자의 고향이란 어디입니까?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교회가 선지자의 고향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는 말씀은, 자연적 교회가 말씀의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배척한다는 뜻입니다. 주님 당시에는 유대교회가 자연적 교회였구요, 오늘날에는 기독교회가 자연적 교회입니다. 그리고 좀 더 깊은 뜻으로는 모든 신앙인의 내면에 있는 자연적 신앙이 자연적 교회입니다. 그들이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주님보다는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하고, 세상을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속에 주님이 들어가실 틈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을 환영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것에 대해 주님은 25절로 2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5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26엘리야가 그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27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었느니라
여기서 엘리야 선지자 역시 말씀으로서 주님을 표상합니다. 엘리야 시대라고 시대를 구분하는 것은, 많은 교회가 각각의 영적 상태에 따라 말씀을 대하는 태도가 다 달랐기 때문입니다. 어떤 교회는 말씀을 왜곡했고, 어떤 교회는 말씀 안의 진리를 말살했습니다. 말씀에서는 그것을 교회가 선지자를 핍박, 심지어 죽이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러면 엘리야 시대는 영적으로 어떤 상태의 교회일까요? 그것에 대해 본문에서는 그때 하늘이 삼 년 육 개월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으며,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았다고 말합니다. 하늘이 닫힌 것은 그 교회에 속한 사람들의 속 사람이 닫혔다는 뜻입니다. 흉년이 들었다는 것은, 속 사람이 닫혔기 때문에 겉 사람 안으로 진리와 선이 더 이상 흘러들어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는 속 사람을 통해 겉 사람 안으로 끊임없이 흘러들어와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 세상 것들만 사랑하는 사람들은 속 사람이 닫히고 선과 진리의 흐름이 끊어집니다. 그래서 그들은 영적으로 흉년 상태가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그들 내면의 교회가 타락하게 됩니다. 교회가 타락한다는 것은 교회 안에 선과 진리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선과 진리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를 말씀에서는 삼 년 육 개월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3년 6개월은 교회가 타락해 문을 닫기 직전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러한 상태를 다른 곳에서는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단7:25)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한 해와 두 해를 합하면 삼 년이고, 거기에 반년을 더하면 3년 6개월이 되기 때문입니다. 또 계시록에서는 ‘천이백육십 일’(계12:6)이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이를 한 달을 삼십 일로 계산하면 42 개월, 즉 3년 반으로 모두 같은 의미입니다. 즉 교회가 영적으로 완전히 타락해 문을 닫는 상태가 되었을 때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교회가 그런 상태가 되었을 때,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았다고 합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은 교회를 나타내지만, 영적인 교회는 아니고 자연적 교회를 나타냅니다. 왜냐하면 타락한 교회 안에 영적인 것이 남아 있을 리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곳에 과부가 많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말씀에서 과부는 선이 없는 진리를 나타내거나, 또는 진리가 없는 선을 나타냅니다. 과부는 이렇게 두 가지 의미로 쓰이는데, 본문에 이스라엘의 과부는 진리만 있고 선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진리만 있고 선이 없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진리를 지식으로만 접근할 뿐 실천하지는 않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 사람은 아무리 말씀을 읽어도 진리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으로부터 그들의 내면으로 빛이 흘러들어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리를 봐도 진리인지를 모릅니다. 캄캄한 암흑 속에서 어떻게 진리가 보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이스라엘 과부에게 선지자를 보내지 않으셨다는 것은 말씀을 아무리 읽어도 진리의 깨달음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주님은 어떤 사람에게 진리의 깨달음을 주실까요? 사렙다의 과부와 같은 사람, 수리아 사람 나아만과 같은 사람들에게 깨달음을 주십니다.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사렙다의 과부는 앞에서 말한 이스라엘의 과부와는 다른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의 과부가 선이 없는 진리라면, 사렙다의 과부는 선은 있는데 진리가 없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진리에 순종하기를 원하지만,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어떻게 하는 것이 순종인지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진리를 갈구합니다. 주님은 그런 그녀에게 엘리야 선지자를 보내셔서 흉년 내내 부양하게 하셨습니다. 부양한다는 것은 말씀의 진리와 선으로 그의 영을 먹이시는 것입니다. 말씀에서는 그것을 과부의 집에 기름과 곡식이 끊어지지 않는 것, 곧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왕상17:16)로 표현했습니다.
주님께서 이와 같은 말씀을 하시자, 사람들이 주님께 화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동네 밖으로 쫓아내려고 합니다. 28, 29절에는 나사렛 사람들의 그런 모습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28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크게 화가 나서 29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하되
주님께 화를 내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입니까? 그런데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났고, 우리 역시 그럴 때가 있습니다. 진리를 통해 감추고 싶었던 내면의 악이 드러날 때, 그리고 간절히 원하던 어떤 것을 주님께서 주시지 않을 때, 우리는 속으로 불평하거나 원망합니다. 그런 것이 주님께 화를 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바로 자연적 신앙 안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데 있어 진리가 방해가 될 때는 화를 내며 진리를 밀어냅니다. 여기 ‘그들이 일어나’라고 했는데 이 말은 본래 진리에 대한 사랑이 뜨겁게 일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반대로 진리를 대적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주님을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한 것으로 봐서 그들이 지금 주님을 대적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여기서 동네는 교리를 뜻합니다. 따라서 동네에서 주님을 쫓아내는 것은 교리 속에 들어있는 내적 진리를 말살하는 것입니다. 내적 진리란 말씀의 지식 속에 들어있는 선이며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주님을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어버리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산은 사랑 또는 선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동네가 건설된 산’이란 교리의 바탕에 있는 진리에 대한 사랑을 말합니다. 우리가 교회의 교리를 처음 받아들일 때 마음 가운데 진리에 대한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주님이십니다. 그런데 나사렛 사람들은 주님을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즉 교리의 바탕에 있는 사랑을 몰아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진리에 대한 사랑은 없어지고,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만 남습니다. 그러므로 동네가 건설된 산 아래로 주님을 밀어내는 것은 교리로부터 교리의 생명인 사랑을 몰아내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진리를 가지고는 자신은 물론이고 세상을 바꿀 수 없습니다. 그것이 주님을 동네 밖으로 쫓아내고 동네가 건설된 산에서 밀쳐 떨어뜨릴 때, 우리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30예수께서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신다는 것은 주님은 어느 곳에나 임재해 계신다는 뜻입니다. 주님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나 쫓아내는 사람에게나 주님은 언제나 그들과 함께 계십니다. 그가 주님의 손을 잡기를 기다리시면서 항상 임재해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처음 새 진리 안으로 들어왔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때 우리에게는 진리에 대한 순수한 애정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혹시 타성에 젖어서 제자리걸음을 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거듭남의 길에서 한곳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정체가 아니라 후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단히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오리가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지만 물밑에서는 계속 발을 움직이는 것처럼 그렇게 노력해야 합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하고요, 십계명의 법으로 자기를 비춰보면서 자기 안에 거짓과 악에 맞서 싸워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들의 신앙이 매일 조금씩 성장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오늘 나사렛 사람들의 신앙을 기적을 바라는 신앙이라고 지적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렙다의 과부와 수리아 사람 나아만의 신앙을 가지라고 권고하셨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본받으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선지자의 말에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따르고자 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나아만은 엘리사가 말한 대로 나병을 고치기 위해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씻었습니다. 사렙다의 과부는 엘리야의 말에 따라 자기와 외동아들이 먹을 마지막 양식을 선지자에게 드렸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기적을 바라는 사람들에게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겠습니다. 선량한 이방인들처럼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 전체를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인간의 생각으로 이것은 취하고 저것은 버리는 그런 신앙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 신앙은 자연적 신앙에서 영적 신앙으로, 영적 신앙에서 천적 신앙으로 계속 발전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출15:26)
아멘
원본
2017-07-30(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3-23(D5)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2. 눅4:14-22, ‘예수께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의 속뜻
‘예수께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의 속뜻 14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15친히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매 뭇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시더라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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