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인과 아벨, 가인의 제사, 아벨의 제사 (2025/11/5)

 

 

1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2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3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5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6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7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8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9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4:1-9)

 

 

태고교회는 사랑으로 주님을 신앙하는 교회(church had faith in the Lord through love)였으나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하는 사람들(some who separated faith from love)이 일어났습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교리를 ‘가인’(Cain)이라 하고, 이웃을 향한 사랑인 체어리티(charity, 자선, 기부, 이웃사랑)를 ‘아벨’(Abel)이라 하였습니다. (1, 2) (AC.325)  

 

사랑으로 주님을 신앙한다’는 것은 그의 신앙생활 전반에 주님을 사랑함이 가득함을 말합니다. 그가 하는 말, 표정, 태도 등 전반에 주님 사랑으로 말미암은 따뜻함과 애정이 느껴지는 신앙으로, 그가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의 동기가 오직 주님을 사랑함에 있는, 그런 신앙을 말합니다.

 

반면,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한다’는 것은 신앙 따로, 사랑 따로, 그러니까 말로는 주님 신앙을 말하면서도 태도나 표정, 느껴지는 아우라 등은 전혀 주님 사랑이 아닌, 그런 차갑고 낯선, 이상한 신앙을 말합니다. 말로는 원수를 사랑하라를 가르치면서 정작 자기는 원수를 미워하는 신앙인들이 여기에 해당되겠습니다.

 

 

각각의 예배에 대한 설명입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으로 드리는 예배를 ‘가인의 제사’(offering of Cain)라 하고, 체어리티로 드리는 예배를 ‘아벨의 제사’(offering of Abel)라 합니다. (3, 4) 체어리티로 드리는 예배는 열납(悅納, acceptable)될 수 있었으나 분리된 신앙으로 드리는 예배는 열납될 수 없었습니다. (4, 5) (AC.326)

 

 

분리된 신앙에 속한 사람들은 악한 상태가 되었는데, 이걸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Cain’s anger being kindled, and his countenance falling)라고 표현하신 것입니다. (5, 6) (AC.327)

 

 

그리고 신앙의 질(, quality)은 체어리티를 보면 알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신앙이 주(主)가 되려 하거나 체어리티보다 높아지려고만 하지 않으면 이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하고 싶어 한다는 것 (7절) (AC.327)

 

 

신앙을 분리, 신앙을 체어리티보다 우선하는 사람들한테서는 체어리티가 사라지게 되는데, 이것을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Cain slaying his brother Abel)로 표현하였습니다. (8, 9) (AC.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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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인, 기독교인이 스베덴보리를 하게 되면 (2025/11/4)

 

 

피난 간 부산 보수동 시절, 같은 동네 어느 권사님의 백일기도 정성에 마음이 움직여 그분 다니시던 감리교회에서 신앙생활이라는 걸 처음 시작하신, 그것도 가문 전체에서 처음으로! 부모님을 따라 이번에는 원래 사시던 서울로 제 나이 네 살 때 귀경, 서울 옥수동이라는 데에 터를 잡아 살면서 서울 약수교회라는 데에서 저의 어린 시절은 시작되었습니다. 약수교회는 근처 신일교회에서 나온 교회입니다. 장로교 통합측입니다. 한국 장로교회는 예장통합, 예장합동, 예장고신, 예장합신 및 기장 등 대표 교단과 함께 군소 수백 개 교단이 있습니다.

 

서울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잠시 중학교를 다니던 저는 경남 김해로 이사, 부산까지 통학하면서 고1까지, 그리고 다시 이번에는 경기도 수원으로 가게 되는데, 거기서 수원중앙침례교회라는 데를 다니게 되면서 저의 침례교회와의 연결고리가 시작됩니다. 이는 제가 다니던 고등학교가 크리스찬스쿨로서 거기 교목이 바로 이동원 목사님이셨기 때문이며, 그로 인해 자연스럽게 김장환 목사님과 수원중앙침례교회로 연결된 것입니다. 김장환 목사님은 이동원 목사님 미국 유학 뒷바라지를 하신 분이시며, 또 제가 셋째 형님 따라 거기 5천 명 성가대도 섰던, 빌리 그래함 초청, 여의도 집회 때 통역으로 섬기신 분이셔서 나름 검증된(?)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여기 ‘검증’이라 한 이유는, 그때만 해도 한국 개신교단에서 침례교회는 이단 아닌가 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이지요. 그 고등학교에서 중간에 이동원 목사님이 서울침례교회로 가시게 되어 저 역시 자연스럽게 서울침례교회로, 그리고 그곳 대학부에서 제 아내를 만나게 되며, 이곳에서 삼성 입사 및 결혼도, 그리고 두 아들도 얻게 됩니다.

 

그러다 미국에서 돌아오신 이동원 목사님을 돕기 위해 기업을 나와 교회 직원으로 들어가 정보시스템 분야에 현 지구촌교회의 첫 토대 놓는 일에 한 장의 벽돌로 쓰임을 받게 되지요. 이후 대전 내려와 지내던 중 2005년 어느 날, 살던 아파트 앞, 다니던 교회에서 한밤중 장모 병 낫기를 위해 기도하다가 신학으로의 부름을 받고, 준비, 이듬해 대전침신신대원에 입학, 늦은 나이에 신학을 하게 됩니다.

 

3년 신대원을 마치고 대전 모 교회에 청빙 받아 마을 사역자 및 교회 내 정보시스템 총괄로 섬기다가 지난 2013년 허리 디스크 악화로 사임, 재활 중 그해 9월, 집에서 ‘한결같은 교회’라는 이름으로 교회를 시작, 처음엔 남들처럼 일반 목회로 부르심 받은 줄 알고 그쪽으로 여러 해 두리번거렸으나 둘째를 통해 주님은 전혀 새로운 길, 곧 수도원으로 부르시고,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새로운 길로 인도하심을 알고, 순종, 처음엔 수도 목회를 준비하다가 지금은 스베덴보리 저작 번역 및 준비에만 전념하고 있습니다.

 

수도원 공부를 하며, 많은 수도원, 성인전 통해 수많은 국내외 성인을 접하면서, 그동안 개신교, 특히 침례교회 안에서만 숨 쉬던 저는 개신교를 포함하는 전체 기독교, 그리고 기독교를 포함하는 인류 전체를 보는 시선, 시야, 주님의 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비유하자면,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옮겨가는 것과 같다 할까요? 그러나 이 변화는 결국 만나게 될 어떤 인물을 위한 중간 과정이었을 뿐인데요, 그가 바로 스베덴보리(Emanuel Swendenborg, 1688-1772)입니다. 이 스베덴보리를 통해 저는 비로소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또렷이 알아가게 되었어요. 주님은 스베덴보리를 통해 많은 것을 계시하셨는데, 그 계시의 전부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주님은 어떤 분이신가, 곧 주님의 신성(神性, The Divine)에 관한 걸 알게 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신성의 나라인 천국, 곧 사람들로 하여금 생전에 천국에 합당한 상태가 되는 일에 힘쓰도록 말입니다.

 

내 나이 만 64세... 지난 세월이 몇 글자로 이리 쉽게 요약, 정리가 되지만, 사실 이 글 사이사이 다 적지 못할 많은 내적, 외적 갈등과 고민, 어려움들, 그러니까 혈육을 비롯, 모든 신앙의 지인들로부터 버림받음, 무시, 모욕, 무례, 함부로 취급받음 등이 있었는데, 다 지난 일들이며, 한발 물러난 지금은 뭐랄까... 마치 껍질을 찢고 나와 아름다운 나비가 되는 과정이었다랄까요? 모든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주님, 지난날 제 삶은 전적으로 주님의 섭리와 경륜임을 인정합니다.

 

모태신앙인의 삶, 곧 개신교인의 삶도 살아보고, 스베덴보리 역시 만 8년째인 현재 두 신앙 세계를 굳이 대비, 비교하자면,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제 경우는, 전자의 삶이 이 세상 정오의 빛 같은 삶이라면, 후자의 삶은 그 일곱 배의 빛 가운데 사는 삶이라 하겠습니다. 이 한 문장으로도 충분하지만 덧붙이자면, 전자는 영생을 얻기 위해 예수를 믿는다면 후자는 주님을 사랑하다 보니 덤으로 영생을 얻는 것이며, 전자는 영성, 영성 하지만 결국 겉 사람의 삶을 좀 거룩하게 사는 걸 가르친다면, 후자는 신성 그 자체에만, 그러니까 무슨 일체의 세속적인 걸 섞지 않고 오로지 주님의 신성만 가르치는, 그래서 순도 100%의 속 사람 되는 걸 가르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아래는 스베덴보리 관련, 제 블로그 글들입니다. 참고하세요.

 

 

에마누엘 스베덴보리(Emanuel Swendenborg, 1688-1772)

다음은 제가 번역하는 책들의 저자에 대한 간단한 소개입니다. 에마누엘 스베덴보리는 1688년,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에서 출생, 웁살라대학에서 언어학, 수학, 광물학, 천문학, 생리학, 신학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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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덴보리의 저서들(Writings)

다음은 스베덴보리의 저서목록(Writings)입니다. 인류사에 존재했던 사람 중 가장 지능이 높은 사람으로 기네스 북에는 밀턴, 괴테 그리고 스베덴보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마 생전에 가장 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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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주신 남편 본연의 역할을 가볍게 여기면 (2025/11/3)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3:17)  

 

다음은 이 합리적 능력이라는 래셔널의 퀄러티(The quality of the rational)에 관한 설명입니다. 여기 보면, 이 합리적 능력은 자아, 즉 본성에 동의, 저주를 자초하더니 결국 지옥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더 이상 남아 있는 이성(理性, reason)은 없고, 대신 이성 노릇을 하는 추론 능력(推論, ratiocination)만 남게 된 것이지요. (17) (AC.237)

 

오늘날에도 아내라는 본성(own)에 사로잡혀 그만 주님 주신 본연의 역할인 합리(rational)라는 능력을 포기하는 남편들이 있는데요, 그럴 경우, 이들이 비록 선한 마음으로 그리했을지라도 주님의 질서는 엄정하여 결국 그 값을 치루게 됩니다. 좀 헷갈리고 잘 모르겠을 땐 주님 말씀을 의지하여 결정해야 합니다. 그저 당장 급한 불을 끄고자 자기 소견에 좋은 대로 서둘러 좋게 좋게 결정하면 좀 심하게 말씀드리면 지옥문이 열리기 때문인데요, 우리는 잘 모르겠을 땐 베드로처럼 해야 합니다.

 

4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5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6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7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8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9이는 자기 및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으로 말미암아 놀라고 10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11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5:4-11)

 

이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이라는 표현은 또한 다음 주님 말씀을 생각나게 하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18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19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려진 자요 20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21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22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23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13:18-23)

 

혹시 이제라도 돌이켜 수습할 마음이 있으시면 자신의 경솔함을 주님 앞에 시인하시고,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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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삶 동안 내가 가장 원하는 것 (2025/10/31)

 

 

천사들에게는 정말 말로 어떻게 설명이 안 되는, 차원이 다른 정교한 퍼셉션(the exquisite perception)이 있는데요, 천사들은 이걸로 신앙의 진리와 사랑의 선에 반대되는 어떤 것에 들어갈지 말지를 지각합니다. 천사들은 들어가는 것의 퀄리티(quality, )와 언제 들어가야 하는지에 대해 그런 것에 관해서는 거의 아는 게 없는 사람이 혼자 하는 것보다 수천 배나 더 완벽하게 지각합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생각조차도 천사들은 더욱 풀로(fully) 지각합니다. 사람이 그걸로 할 수 있는 가장 그레이트한 것보다도 더 말이지요. 이런 얘기는 정말 믿어지지 않으시겠지만 백 프로 사실입니다. (AC.228)

 

저는 여전히 이 퍼셉션에 대해 잘 모르지만, 어렴풋이나마 이해하는 바로는 천사 개개인에게 주님으로부터 오는 어떤 내적 음성 내지는 깨달음 같은 게 아닐까 합니다. 영계에서는 어떤 영이 무엇을 궁금해하면 하늘로부터 즉시 어떤 답을 들을 수 있다고 하니까요. 영 또는 천사 개개인의 주님을 향한 사랑 및 내면의 열림에 따라 그 들을 수 있는 퍼셉션 또한 다 다르겠지만 말입니다.

 

아직 몸 안에 있는 저는 그럼에도 불구, 이 지상에서 저 천사들처럼 주님의 퍼셉션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정말로 소망합니다. 제가 아는 퍼셉션의 첫 번째 주된 기능이 바로 어떤 것, 어떤 상황, 어떤 일이 주님의 선과 진리로 말미암음인지를 직관적으로 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매사에 먼저 이걸 알 수만 있다면 얼마나 많은 실수와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을까요? 그리고 저 글처럼 범사에 얼마나 온전한 타이밍에 무엇을 할 수 있게 될까요? 뭘 하든지, 무슨 말을 하든지 등 말입니다.

 

제가 아직 이 세상에 머무르면서 천사들의 이런 퍼셉션을 원하는 이유는 천사들처럼 저도 주님의 뜻 알고 따르는 일에 완전할 수 있었으면 해서입니다. 제가 천사들처럼 저럴 수만 있다면 제게 일어나는 많은 일들의 그 정체를 꿰뚫어 보고 결코 보이는 겉모습으로 판단, 일을 그르치는 짓을 더 이상 저지르지 않을 수 있겠지요.

 

부디 이 세상, 눈에 보이는 것들에서 한발 물러나 영원하신 주님의 아르카나 안에서 모든 걸 할 수 있는 남은 삶 살다 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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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이성이 오동작하는 이유 (2025/10/30)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3:17)

 

여기 아담이라 하는 사람은 인간 이성(reason)을 말하며, 아내라 하는 여자는 인간의 본성(own, self)을, 그리고 이 본문 관련된 뱀은 사람의 감각 파트(sensuous part)를 말합니다.

 

2만 하더라도 거기 등장하는 첫 아담은 온전한 아담, 그러니까 주님 사랑(love to the Lord)의 전형과도 같았던 천적(天的, celestial) 인간이었고, 그래서 그때는 이성도, 본성도, 그리고 감각 파트도 모두 오직 주님 사랑에 오리엔티드된 상태였습니다. 즉, 태고교회의 시조, 시초인 첫 태고교회(2:1-17)는 흠잡을데 없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2:18-25) 태고교회부터 슬그머니 자기 사랑(love of self)이 시작되더니, 세 번째(3:1-13), 그리고 지금 창3 두 번째 단락인 네 번째(3:14-19)에 이르러서는 그 처지가 거의 지옥과도 같은 비참한 상태가 되었는데요,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는 표현이 바로 그것입니다.

 

사람의 모든 것, 곧 지혜, 지성, 이성, 지식 및 감각은 항상 그 상태가 똑같은 게 아닙니다. 사실 이 모든 것은 영적이어서 모두 속 사람에게 속한 것이며, 또 속 사람에게 속한 모든 것은 오직 주님으로부터만 옵니다.

 

그러니까 그 순서가 주님, 속 사람, 겉 사람일 때는 이 모든 것이 정상 작동, 더없이 생생하지만, 반대로 겉 사람, 속 사람, 주님 순일 때는 비정상 작동, 속이 텅 빈 껍데기들이 되어 숱한 역기능의 연속이 됩니다.

 

가령 인간 이성의 경우, 선과 악, 옳고 그름 등 초롱초롱해야 할 일들에 대해 엉망진창, 뒤죽박죽, 이랬다저랬다, 내로남불 등의 상태, 작태를 남발하게 되지요. 이성이라는 주님 주신 빛나는 능력은 사라지고, 전에 그걸 담았던 껍데기, 빈 그릇만 남았기 때문인데, 안타깝게도 이번엔 거기에 지옥의 모든 것이 들어와 자리 잡았기 때문입니다. 지옥은 모든 것이 천국의 정반대입니다.

 

이것이 주님 사랑과 자기 사랑의 정반대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이 순서, 곧 주님, 속 사람, 겉 사람의 순서를 붙들어야 합니다. 일도, 사람도, 그리고 모든 것이 범사에 평안하고 형통하기를 원한다면 말입니다. 이 말은 그러니까 지금 내 삶이 뭔가 문제가 있고, 꼬이고 막혔다면, 그건 순서에 문제가 있다는 말이지요. 얼른 순서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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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하는 일과 만나는 사람의 정체 (2025/10/29)

 

 

상대방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하세요.

 

상대방이 그 상황에서 원하는 행동을 하세요.

 

얼핏 무슨 처세와 아부를 권하는 말처럼 들릴 수도 있으나 그런 게 아니라는 것쯤은 제 글을 구독하시는 분들은 이미 알고들 계시죠.

 

잠언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 사과니라 (25:11)

 

말뿐이겠습니까?

 

사무실에서, 현장에서 우리가 저럴 수 있으려면 눈치도 있어야 하고, 일머리도 있어야 합니다. 상대방의 입장에 설 줄도 알아야 하고, 팀장의 입장, 관리자의 입장에 설 줄도 알아야 합니다.

 

제가 전에 기업에 있을 때, 과거 이명박 대통령의 현대 시절, 정주영 회장을 도와 함께 일할 때, 그는 항상 두세 가지 안을 준비했다는 말을 듣고, 당시 부서 전산 담당이었던 저는 부장님이 시키시는 일 외에도 가령, 내일 수원 내려가 관련 부서 전체 회의 시 분명 개발 및 영업에서 원하는 자료들이 있을 텐데... 하며, 따로 늦은 밤까지 남아 두세 가지 안과 자료들을 준비하곤 했습니다. 그 결과는? 네, 맞습니다. 부장님이 아주 흡족해하시는 일이 많으셨고, 이런 일로 저는 여러 유관 부서에 알려졌으며, 향후 사업본부 전체의 프로세스 이노베이션 팀으로 발탁되어 가기도 했습니다.

 

원치 않게 제 얘기를...

 

이 모든 것은 주님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22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23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24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3:22-24)

 

당시 이 구절들을 심비(心碑)에 새길 정도로 가까이하여 늘 떠올렸던 결과였습니다.

 

지금의 일과 사람은 모두 주님이 허락하신 것입니다. 즉, 지금 하고 있는 이 일과 만나는 사람은 사실은 주님이 그 안에 계신 것이지요. 그래서 주님을 사랑하듯 주님이 주신 일과 사람을 귀히 여기고 존중하면 반드시 주님으로부터 무척 기뻐하시는 결과가 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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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상할 일이 생길 때 (2025/10/28)

 

 

4백성이 호르 산에서 출발하여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려 하였다가 길로 말미암아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5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 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 6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7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말하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8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9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21:4-9)

 

살다 보면 마음이 상할 때가 있습니다. 위 본문에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려 하였다가 길로 말미암아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처럼 말입니다. 저들이 바로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한 걸 보면, 저 길은 하나님과 모세의 인도를 받아 가던 행로였던 것 같고, 그럼에도 그 길이 마음이 상할 정도로 험한 길이었던 것 같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상하면 틈이 생깁니다. 지옥 기운이 엿볼 틈 말입니다. 우리 안에 이 지옥의 기운이 스멀스멀 흘러들어오면 반드시 탈이 납니다. 옛날 연탄 때던 시절, 방바닥 틈으로 연탄가스가 새서 아침이면 난리가 나던 것처럼, 상황이 좀 어려워졌다고 바로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다가는 지옥문이 열리는 심각한 상황이 벌어집니다.

 

우리가 마음 관리를 잘 못하여 이런 상태가 되면 안 되는 게, 우리 마음이 이 지경이 되면 보호, 하늘의 보호를 받지 못하기 때문인데요, 그렇게 되면 지옥 악령들에게 휘둘리게 되어 영육이 무방비 상태가 되고, 그 결과 보통은 매사 지혜와 총명이 사라져 바보 같은 선택을 연거푸 하게 되며, 몸에도 여러 악한 기운이 들어와 여기저기 아프고 병이 생기게 됩니다.

 

비록 분명 하나님의 뜻이라 확신하고 그 길로 따라갔음에도 이런 마음이 상할 정도의 상황을 맞닥뜨릴 때가 있는데, 이때 우리는 저들처럼 바로 원망과 비난의 대상을 찾는 대신, ‘이 상황 역시 주님이 허락하심이지’ 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태도를 견지하는 것이 좋습니다. 어떤 것도 주님의 허락 없이 우리 삶에 일어나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것이 명백히 우리의 실수 때문이라 하더라도 말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건 범사에 주님을 시인하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늘 복과 형통의 연속이면 가장 좋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오히려 그걸 주님을 사랑하고 참으로 신앙하는 기회 삼으시기 바랍니다. 지옥이, 악한 영들이 ‘아, 이 사람은 뭘 어떻게 해도 끄떡도 안 하네. 방법이 없네...’ 포기하고 물러가도록 말입니다. 영혼의 근육이 생기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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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종류의 사람들 (2025/10/27)

 

 

아직 거듭남이 시작되지 않은 상태, 곧 자연적 인간은 밭에서 갓 수확한, 흙이 묻고 거친 채소라 할 수 있습니다. 날 것 그대로이며, ‘혼돈’과 ‘공허’, 그리고 ‘흑암(1:2) 상태의 인간입니다. 여기서 ‘혼돈(void)은 선이 하나도 없는 상태, ‘공허(empty)는 진리가 하나도 없는 상태를 말하며, 그 결과 ‘흑암(thick darkness) 상태, 즉 어리석은 상태가 되어 주님 신앙(faith in the Lord)에 속한 모든 것에,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영적 천적 생명(spiritual and heavenly life)에 관한 모든 것에 대해 무지한 상태를 말합니다.

 

영적 인간은 잘 다듬고 정성껏 씻어 준비한 식재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거듭남이 시작되어 진행 중인 상태(1:3-31)입니다. 사람은 이때 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 모두 여섯 단계의 상태변화를 경험하며, 처음엔 날 것 그대로이던 사람이 주님을 사랑하여 신앙하는 사람으로 거듭납니다. 이들은 영생을 얻기 위해 주님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머리 신앙의 사람들입니다.

 

천적 인간은 훌륭한 요리로 변화된 상태를 말합니다. 잘 준비된 식재료들이 이런 요리로 변화되려면 최종적으로 열을 가해야 하는데 이 열이 바로 사랑이지요. 사랑이신 주님처럼 모든 걸 사랑으로 하는 사람들, 그래서 삼층천 주님 닮은 모양이 된 사람들이 바로 천적 인간입니다. 일곱째 날, 안식일의 사람들이지요. 거듭남이 완성된 사람들(2:1-17)이며, 이들은 주님을 사랑하다가 영생을 덤으로 얻는 사람들입니다. 가슴 신앙의 사람들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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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결정짓는 두 가지 태도 (2025/10/24)

 

 

하나는 로드쉽(lordship)이고, 다른 하나는 오너쉽(ownership)입니다.

 

먼저 로드쉽입니다. 사전적 의미를 좀 확장하여 ‘주종(主從)관계를 명확히 함’, 즉 ‘주님의 주(主) 되심을 시인, 인정함’ 정도로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과거와 달리 우리는 누구의 종(從)으로 살아본 적이 없어 이런 주종관계가 솔직히 와닿지 않지만, 삶 가운데 오직 주님만이 나의 주인(主人)이심을 명심하고 사는 것, 이것이 참된 의미의 인생입니다.

 

이런 태도는 자연스럽게 오너쉽 문제로 연결됩니다. 오너쉽이란 소유권, 즉 누구의 것이냐 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 즉 타고난 재능과 소유, 환경과 상황 등에 대한 일체의 소유권을 오직 주님께만 두는 태도, 이것이 참된 의미의 인생을 사는 열쇠입니다.

 

이런 태도들이 인생을 결정짓는 열쇠가 되는 이유는, 이런 태도로 사는 사람들은 천국을 위해 잘 준비되며, 그의 안에 천국이 있어 생전에도 천사들처럼 천국의 모든 것을 누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인생이 나중에 참 잘 살았다 할 수 있으려면 인생을 다 산 후 천국에 들어갈 수 있어야 하지요. 그리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으려면 천국 생활을 감당할 수 있도록 생전에 그 속 사람이 잘 준비되어 있어야 하고 말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여 자원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주 되심과, 모든 것이 오직 주님으로 말미암음을 인정하며 사는 것, 이것이 정말 결정적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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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시련과 앞이 캄캄함은 다 내가 자초하는 것 (2025/10/23)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3:19)

 

홍수 직전까지 존재했던, 지금 여기 다루고 있는 이 태고교회의 마지막 후손은, 신앙의 진리라는 게 무엇이며, 주님이라는 분은 뉘신지, 그리고 그분이 오셔서 자신들을 구원하신다는 말 같은 거 듣기를 더 이상 내켜 하지 않을 정도로, 감각적인 일과 몸에 관한 일에 너무도 철저히 잃어버린 상태, 잠긴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런 주제들이 언급될 때마다, 그들은 듣기 싫어 외면했습니다.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eating bread in the sweat of the face)는 바로 이런 혐오를 말합니다. 그래서 또한 유대인들은 천적인 것들의 존재를 인정하는 대신 오직 세속적 메시아만을 원하는 그런 캐릭터들이 되어버렸고, 그 결과 그들은 만나를 보고 혐오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만나는 주님의 표상이었는데, 그들은 이것을 ‘하찮은 음식’(vile bread)이라 하였고, 그 결과 그들은 자신들한테 불 뱀(fiery serpents)을 불러들이는 상황을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21:5, 6)

 

5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 6여호와께서 불 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21:5, 6)

 

더욱 놀라운 사실은, 천적인 것들을 가리켜 그들이 울면서, ‘역경의 빵’(bread of adversity), ‘비참의 빵’(bread of misery), ‘눈물의 빵’(bread of tears)이라고 했을 때, 실제로 천적인 것들은 역경과 비참이라는 상태로 그들에게 전달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앞의 구절에서, 혐오하면서 받은 것을 가리켜,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bread of the sweat of the face)이라 하고 있습니다. (AC.276)

 

다음 말씀,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14:28) 생각납니다.

 

26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7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에게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28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29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중에서 이십 세 이상으로서 계수된 자 곧 나를 원망한 자 전부가 30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에게 살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14:26-30)  

 

이런 말씀들도 있습니다.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59:2)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3:8)

 

주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이신 주님은 그 신적 본성상 누구를 미워하며 벌주고, 원망하고 저주하실 수 없으십니다. 보복하여 죽이고 지옥에 처넣으실 수가 없으신 분입니다. 그럼에도 말씀을 읽는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오해할 수 있게 기록하신 이유는, 선악 간 모든 일에, 그리고 세상만사 길흉화복 모든 일에 오직 주님만이 다스리시는 줄을 사람들로 하여금 알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 인간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은 우리가 자초하는 것입니다. 모든 복과 화는 주님의 나라, 이 세상 질서와 법칙에 따라 자동적으로, 그러니까 시스템적으로 작동하는 것일 뿐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여 끝까지, 그러니까 어떠한 상황과 환경 속에서도 주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그래야 결국 모든 것이 합력하여 주님의 선을 이루게 됩니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사실은 비록 우리가 자초하는 것이라는 이런 실상에도 불구하고 그런 우리의 실수와 어리석음들을 주님은 우리를 성장, 성숙, 거듭나게 하시는 일련의 재료로, 도구로 삼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너무나 완악하고 완강하여 이마저도 끝까지 거부한다면 뭐 주님도 어쩔 수 없으시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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