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가인을 보호하시는 이유 (2025/7/14)
다음은 창세기 4장, 저 유명한 가인과 아벨 본문입니다.
1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2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3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5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6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7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8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9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10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11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12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13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14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15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16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17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창4:1-17)
이 가인 본문을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창, 출 속뜻 주석)에서는 글 번호 AC.324-403에 걸쳐 다루고 있지만, 오늘은 한 가지, 곧 여호와는 왜 친 아우를 살해한 자를 보호하시는 걸까? 하는 의문이 들게 하시는,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의 속뜻에만 주목하고자 합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여기에도 사실 여러 아르카나가 있어, 그리고 모두 서로 연결되어 있어 어느 하나를 분리해 내기가 쉽지 않지만, 그래도 한 가지,
‘심지어 그 신앙이, 분리된 신앙, 곧 사랑 따로 신앙 따로 신앙일지라도 신앙에 대한 폭행은 신성모독이 될 수 있다’(to do violence to faith even when thus separated would be a sacrilege)
는 이것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 창세기 첫 열한 장, 곧 1장부터 11장까지는, 주님이 스베덴보리를 통해 알리신 바에 의하면 실제 역사가 아닙니다. 여기는 고대인들이 즐겨 사용하던 스토리텔링식 역사 서술 방식으로, 지구의 지질학적 나이가 45, 6억 년 정도임을 감안하면, 그리고 말씀에 나오는 숫자들, 특히 날 수, 연 수의 의미가 상태들과 그 변화임을 감안하면, 그래서 비록 총 11장에 불과하지만 실제로는 수천, 수만, 아니 수십, 수백만 년의 역사일지도 모릅니다. 말씀은,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인류의 출발, 그 첫 등장에 대한 역사적 사실 확인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습니다. 실제 역사는 아브라함의 등장부터입니다. 참고로, 그래서 창11까지 말씀에 나오는 인명들은 어느 한 개인의 이름이 아닌, 그 이름으로 부른 교회, 교리, 신앙을 말합니다. 즉 예를 들면, 므두셀라가 969세를 살았다는 건, 므두셀라라는 교회, 혹은 교리나 신앙이 숫자 969로 표현하는 어떤 장구한 세월 존재했다는 말입니다.
AC.66, ‘말씀의 네 가지 스타일’(AC.66)
66말씀(the Word)에는 일반적으로 네 가지 스타일이 있습니다. 첫 번째 스타일은 태고교회(太古, the most ancient church) 스타일입니다. 그들의 표현 방식은 다음과 같았는데요, 그들은 어떤 지상에 속
arcanacoelestia.tistory.com
첫 사람 아담은 일곱째 날, 곧 안식일 상태, 천적 인간의 상태를 말하며, 이는 곧 태고교회를 의미합니다. 이 상태는 사랑과 신앙, 선과 진리가 하나 된 상태입니다. 여기 사랑과 신앙은 주님 사랑, 주님 신앙을 말합니다. 이때는 주님 사랑 안에서만 주님 신앙도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그랬던 태고교회가 시간이 흐르자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하는 사람들이 일어났는데 이들이 곧 가인입니다. 이들은 주님을 사랑하는 일에 올인하는 대신 주님을 연구하는 일에 올인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의 신비를 탐구, 그걸 교리화하는 일에 전념하는 사람들이었지요. 당연히 이들의 삶은 이웃 사랑, 곧 체어리티를 소홀히 하는 삶이었고, 그러므로 이들은 오리지날 태고교회 입장에서 보면 이단(heresy)이었습니다.
반면, 이런 중에도 여전히 주님을 사랑하여 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체어리티(charity)의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들이 바로 아벨입니다. 이들은 주님께 받아들여졌지만, 가인이라는 교회는, 당연한 얘기지만, 주님이 받으실 수 없었습니다. 참고로, 교회가 낳는 것은 신앙과 체어리티, 이 둘 뿐입니다. 그래서 아담이라는 교회에서 가인과 아벨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불행히도 가인이라는 교회는 그럼에도 돌이키는 대신 아벨이라는 체어리티를 자신들한테서 완전히 끊어내었는데, 즉 박탈하고 말았는데, 이것을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 결과, 이제 끔찍한 삶이 펼쳐지는데요, 그러자 가인은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하소연합니다. 사람은, 교회는 오직 체어리티로만 주님과 결합하는데, 이 유일한 연결고리를 끊어냈으니, 즉 스스로 박탈하고 말았으니, 이제는 철저히 악과 거짓만 남은 상태로 큰 두려움 가운데 살아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놀라운 것은, 그러자 주님은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보통 우리 같으면, 그걸 이제 알았냐? 너는 선을 넘었으니 어쩔 수 없다. 심은 대로 거두는 것이니 나는 모르겠다 보통 이럴 텐데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러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예상을 깨고, 주님은 이런 가인일지라도 그를 지키시며, 보호하십니다. 가인은 형제 살해범, 곧 이단인데도 말입니다.
이 아르카나의 결론만 말씀드리면, 주님의 섭리는 이후 인류의 미래를 보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류가 아벨의 길이 아닌, 결국 가인의 길을 걷게 될 걸 아시고, 비록 그가 이단이지만 그의 안에 새로운 일을 시작하셔서, 그를 통해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큰 그림을 그리신 것입니다. 그래서 가인을 보호하시는 것입니다. 이 ‘그의 안에 새로운 일을 시작하셨다’는 표현 안에는 사실은 어마어마한 배경 이야기가 숨어있습니다. 여기서 다루기에는 무리여서 그냥 이렇게만 넘어가겠습니다.
※ 창4:25,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에 나오는 ‘아담’(the man)과 그의 ‘아내’(wife)는 앞 19절에 나오는 ‘아다와 씰라’(Adah and Zillah)로 상징된 새 교회를, 이름이 셋(Seth)인 그녀의 ‘아들’(son)은 새로운 신앙을 의미합니다. 가인의 계보는 역사 속에 사라지고, 아담과 하와로부터 새로운 아들이 시작되는 게 아닙니다.
주님은 가인에 대하여 이런 섭리를 갖고 계시는데, 이런 주님의 계획은 아랑곳하지 않고, 가인은 이단이야, 가인은 아벨을 죽였어, 그러므로 가인을 죽여야 해 하며 그에게 손을 대는 것은, 주님 보실 때 신앙에 대한 폭행이며, 곧 신성모독을 범하는 것입니다. 기억할 것은, 단지 가인에 대한 소멸만 막으셨을 뿐, 그에 대한 저주는 계속 유효하다는 사실입니다.
※ 저 같으면 시작부터 헝클어져서 에이, 파토났네... 그냥 다 리셋하고, 첨부터 다시 하지 할 것 같은데 주님은 그러지 않으십니다.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정말 번거로운 일을 시작하십니다. 주님은 참으로 우리가 상상할 수 없으신 신(The Divine)이십니다. 그런 분이 또 사랑의 신이신 게 얼마나 천만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이단을 대할 때 염두에 두어야 할 많은 것을 알려줍니다. 두 가지만 말씀드립니다.
첫째, 이단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는 교리 문제가 아니라 삶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기독교, 개신교 교리로 살아간다 하더라도 신앙 따로 체어리티 따로의 삶, 곧 자기 사랑, 세상 사랑의 삶을 산다면, 그는 주님이 보실 땐, 그가 오히려 가인의 후예, 곧 정통 이단입니다. 반면, 개신교에서 말하는 이단이라 하더라도 그가 그의 신앙 안에서 체어리티의 삶을 산다면, 그는 주님 보실 때 아벨의 후손인 것이고 말입니다. 이런 분들은 혹시 생전에 회심하지 못해도 사후, 돕는 천사들에 의해 재교육받고, 주님을 영접하여 천국에 들어갑니다. 천국은 생전에 그 속 사람의 상태가 천국을 받을 수 있는 상태인 사람이 들어가는 나라이지, 속 사람의 상태와 상관없이 무슨 라이센스만 취득하면 무조건 들어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한 좀 더 자세한 내용은 아래 링크를 참조하세요.
HH.318, 36장, '천국의 비기독교인들'(HH.318-328)
36천국에 있는 이교도, 즉 교회 밖 사람들The Heathen, or Peoples outside of the Church, in Heaven 318일반적 견해에 의하면, 교회 밖에서 난 사람들, ‘이교도’, ‘비기독교인’이라 불리는 그들은 구원받지
heavenanditswondersandhell.tistory.com
둘째, 이단에 속했다고 강제로 무릎 꿇리고, 개종 기도를 시키고, 강요와 윽박, 협박과 위협을 가하는 것은 신앙에 대한 폭행이며, 주님에 대한 신성모독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나면, 이런 일을 주도한 개신교인은 아멘, 할렐루야! 오, 주님, 감사합니다. 제가 길 잃은 어린양을 구원시켰습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일은 착하고 신실할수록, 그리고 굳은 신념의 소유자일수록 더욱 아무 거리낌 없이 행합니다. 무지하기 때문인데요, 자기가 하는 일이 영혼을 살리는 일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옳고 그름, 선과 진리를 오직 학습으로만 알고, 퍼셉션(perception, 천사들과 주님 간 커뮤니케이션 방법), 곧 하늘의 음성으로는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무지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무지하더라도 혹시 주님은? 하며 늘 주님의 눈치 볼 줄은 알아야 합니다. 저런 개신교인은, 아니 어느 종교라 하더라도 자기와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에게 저렇게 하는 사람은 평소 그의 삶의 태도가 주님 앞에 어떤지를 여과 없이 보여주는 것입니다.
유다서에 보면 천사장 미가엘 이야기가 나옵니다.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관하여 마귀와 다투어 변론할 때에 감히 비방하는 판결을 내리지 못하고 다만 말하되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 하였거늘 (유1:9)
천사장 미가엘조차도 심지어 마귀에 관한 일조차 주님 앞에 조심하는 것을 봅니다. 우리도 그래야겠습니다. 몰라서 그럴 수는 있으나 겸손해야 합니다. 무의식 중에라도 늘 주님을 경외하며, 모든 언변과 행실을 조심해야 합니다. 경외란 주님을 향한 거룩한 두려움입니다.
결론입니다.
가인같은 이단도 주님은 존중하셨거늘, 만일 내가 함부로 대하는 이 사람의 신앙이 오히려 아벨의 신앙이라면, 나중에 그 후과를 어떻게 감당하시려고 그러십니까? 유대인들도 신념의 사람들이었지만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는 자들이 되었고, 사울 시절 바울도 그렇게 교회를 핍박, 박해하였으나 결국 거꾸러지지 않았습니까? 다른 사람을 살펴보고 그 열매가 아벨의 열매이면, 비록 내가 믿는 교리와 다르더라도 시비, 훼방, 간섭 등을 하지 말고, 그 시간에 오히려 주님 앞에 자기 할 도리만 다 하시기 바랍니다. 이 ‘자기 할 도리’는 심지어 전도, 선교, 목회보다도 더 우선합니다. 주님의 나라는 속 사람의 나라인데, 이 속 사람은 ‘자기 할 도리’로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굳은 신념으로 함부로 사는 사람보다는 사랑으로 늘 주님 뒤에 있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사랑보다 더 강력한 신념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언행에 있어 항상 나의 이 말과 글, 행위와 행실로 주님을 온전히 드러내고 있는가, 증거하고 있는가, 아니면 사울 시절 바울처럼 바보같이 나의 이 열심으로 오히려 주님을 욕되게 하고 있는 건 아닌가 살펴야 할 것입니다. 이 ‘주님을 드러낸다’는 것은, 거기에 주님이 느껴지는가, 사람들이 내 말, 내 글, 곧 일상 중 나를 접하고 주님을 느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천사들처럼 말입니다.
'즐겨찾기 > 블로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말 사랑한다면 덜 사랑해야... (2025/7/9) (1) | 2025.07.09 |
---|---|
요즘 들어 부쩍 돌아가신 분들 생각이 많이 납니다... (2025/7/4) (3) | 2025.07.04 |
‘두 가지, 좀 어처구니없는 내 모습’ (2025/6/21) (0) | 2025.06.21 |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2025/6/6) (0) | 2025.06.06 |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지 말라'의 속뜻 (2025/5/22) (0) | 2025.05.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