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방이 듣고 싶어 하는 말로 대답하기 (2025/4/23)

 

이 말은 얼핏 상대방에게 아첨, 아부하라는 말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그런 말이 아니라 상대방이 감당할 수 있는 말로 대답하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내면이 열린 만큼만 들으며,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브리엘 앞에 사가랴처럼, 주님이 말씀하시는데 들을 역량이 안 되면 그가 들릴 때까지 잠시 벙어리가 되는 일도 일어납니다. 그러니까 이젠 그만 깨달아야 하는데 자만과 교만, 자기 사랑, 세상 사랑 등으로 좀체 정신 못 차리면 차릴 때까지 다시, 다시 하며 비슷한 패턴의 불행한 일이 계속 반복되기도 합니다. 제 경우엔, 기억나는 큰 것만 한 서너 가지가 있었네요... 이 역시 우리를 성장케 하시는 주님의 사랑의 섭리이시지만, 그러나 그 과정을 통과하는 본인은 죽을 맛입니다.

 

다른 말로는 하나님이 듣고 싶어 하시는 대답을 하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즉 정답을 말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 앞에 해야 한다는 것은, 세상에 태어나 어떤 인생을 살든 결국은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이니까요. 창세기를 비롯, 구약 중 말씀에 등장하는 등장인물들 하나하나가 사실은 주님의 표상이었듯 우리네 인생 역시 둘 사이 대화든 셋 사이 대화든, 아니 그 이상이든 사실은 주님 앞에 입을 여는 것입니다. 바로 앞에 요셉이 그랬고, 요셉 앞에 유다가 그랬으며, 여러 왕을 섬겼던 다니엘이 그랬습니다. 이슬에 젖으며 짐승처럼 풀을 먹던 느부갓네살이 그랬고, 완전 상거지가 되어 아버지를 찾아간 둘째 또한 그랬습니다. 

 

26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7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에게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28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29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중에서 이십 세 이상으로서 계수된 자 곧 나를 원망한 자 전부가 30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에게 살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민14:26-30)

 

그냥 힘들어 무심코, 그리고 부주의하게 내뱉은 불평 한마디 한마디가 사실은 하나님 앞에 하는 것임을 저들은 몰랐던 것입니다.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무서운 말씀입니다.  

 

천사들이 늘 주님의 얼굴을 향하듯, 사실은 주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천사들을 늘 주님을 향하게 하시는 것이지만, 세상 가운데서 구별되어 사실은 늘 주님을 향하고 있는 우리 역시 깨어있어야 하겠습니다. 단순한 일대일 대화든지, 일대다 무슨 팀 회의든지 우리는 늘 주님을 생각하고 입을 열어야 하겠습니다. 천사들이 전하는 말은 100% 주님 뜻, 자기 생각은 전혀 그 안에 담기지 않은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흐릿하고 모자라지만, 그래도 천진난만하게 저 천사들처럼 주님을 바라면 저들과 똑같이 지금도 주님은 그때그때 해야 할 말을 우리 입에 넣어주십니다. 아래 말씀처럼 말입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요14:26)  

 

덧붙이자면, 그러므로 누가 나한테 하는 말에 너무 일희일비할 필요 없습니다. 오히려 대부분은 듣고 깜짝 놀라며, ‘아, 나는 이 정도밖에 아닌 거구나...’ 긴장하는 게 좋습니다. 칭찬 앞에서도 말입니다. 중요한 건, 나에 대한 사람의 평가가 아니라 나의 내면에 들리는 주님의 음성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집중하시면, 그다음부터는 사람들이 나에 대해 뭐라 하던 잘 안 들립니다. 그냥 덤덤해지지요. 무시와 모욕을 당해도 그러려니... 즉, ‘주님의 무슨 허락 있으신 게지...’ 하고, 칭찬과 영광 앞에서는 ‘이런 건 주님이 받으셔야...’ 하며 안 흔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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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이단(heresy)인가? (2025/4/21)

 

오늘날 저마다 무슨 이단 대책 위원회다, 이단 심판, 혹은 판정 위원회다 하여 열심히 자기에게 속한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정성을 다합니다. ‘현대종교’라는 앱을 켜면 수많은 이단 목록이 나오지요. 전에는 저도 여기를 자주 찾곤 했습니다. 이 모든 분들의 노고를 모르는 바 아니며, 한편으론 감사한 마음도 있습니다.

 

시야가 좀 더 높아진, 그리고 넓어진 지금은, 그러나 이 ‘이단’(heresy)에 대한 생각이 좀 달라졌습니다. 지금의 저 이단 판정의 기준은 ‘교리’인데요, 즉 내 교리를 기준으로 봤을 때, 너는 틀렸다 판정하는 것이 지금의 이단 판정입니다. 교리라는 것은 진리에서 추출하는 것이므로, 그러니까 내가 진리라고 믿는 것들로 봤을 때, 네가 믿는 진리는 틀렸다는 것이죠.

 

이런 모습은 ‘영적인 사람들’(the spiritual)의 일반적 특징인데요, 놀라운 것은, 이들은 ‘지적인 면’(the intellectual part)으로만 거듭날 수 있어, 주님은 이들 역시 온전한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새로운 의지를 심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저마다 믿는 그 교리 눈높이에 맞춰서 말이죠. 그러니까 누구나 자기가 믿는 교리에 따라 선을 행하면 천국 가는 데 아무 지장이 없다는 것입니다. 거기 묻은 좀 어설픈 오류들은 천국에 오르기 전 다 정돈되니까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중요한 건, 교리가 아니라 사랑입니다. 자기 교리에 녹아져 들어간 주님의 신성을 따라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천국에 합당한 선이 구비되기 때문인데, 천국은 선의 나라이므로 이는 매우 중요한 필수 구비 요건 중 하나입니다. 참고로, 그러나 이 선을 행하는 것 또한 오직 주님으로만 말미암는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첫 번째 책 창세기에 나오는 첫 번째 이단이 가인입니다. 창세기 첫 1, 2, 3장의 태고교회는 사랑으로 주님을 신앙하는 교회였으나, 창세기 4장,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하는 사람들이 일어납니다. 바로 가인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가인과 아벨이 나오는데요, 이들의 속뜻을 살펴보면,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교리를 ‘가인’(Cain)이라 하고, 이웃을 향한 사랑인 체어리티(charity, 이웃 사랑)를 ‘아벨’(Abel)이라고 합니다.

 

이것입니다. 이것이 이단의 기준입니다. 즉 가인 편에 서면 이단, 아벨 편에 서면 정통(?), 그러니까 안전합니다. 자신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사랑과 신앙이 일치하는가? 그러니까 나는 주님 사랑 따로, 주님 신앙 따로인가 아닌가 말이죠. 말로만, 립 서비스로만 이웃 사랑을 하고 있는 건 아닌가 말입니다. 안타깝게도 이런 글 쓰는 저 자신도 여기서 자유롭지 못하네요... 어쩌면 우리 모두 여전히 가인의 후손, 후예인지 모르겠어요. 이런 우리를 건사하여 주시는 주님, 진심으로 고맙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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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사랑하되 주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사랑하는 건 좀... (2025/4/16)

 
이런 제목이 좀 터무니없거나 자극적이십니까? 그러나 실제로는 자주, 아니 거의 만연하다시피 한 걸 볼 수 있습니다. 제 주변, 나라 사랑하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그분들은 그 어떤 분들보다도 나라를 사랑하여 나라의 장래에 대한 근심과 걱정으로 몸이 마르실 지경입니다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많은 말씀 중에도 주님이 어떤 분이시고, 천국은 어떤 곳인지에 대한 말씀은 거의 안 하십니다. 이상하지요? 또 가령 지방회 같은 델 참석해 보면, 분명 수십 교회 목사님과 사모님들이 모이셨음에도 주님은 어떤 분이시고, 천국은 어떤 곳이고 하는 얘긴 요만큼도 들을 수 없습니다. 그냥 기본으로 깔고 가는 건가요? 아니면, 그런 걸 꼭 말을 해야 아나 인가요? 지방회뿐이 아닙니다. 무슨 이만한, 그러니까 전국 규모의 무슨 집회나 세미나에 가봐도 이런저런 방법이나 간증, 그러니까 뭘 어떻게 했더니 어떻게 부흥하고 성장했다는 등이 주된 내용이지, 주님이 어떤 분이시며, 천국은 어떤 곳인지에 대해서는 거의 전혀 무슨 언급이 없습니다. 새삼 뭘 그런 걸 다... 인가요? 오히려 좀 뻘쭘해지나요? 참 이상합니다... 천국은 그렇지 않은데 말입니다. 천국은 주님을 빼면 모든 것이 멈추는 것은 물론, 존재 자체도 못하는데 말입니다.
 
혹시 우리 안에 이런 거, 그러니까 가령, 나는 전도 몇 명 했고, 선교지 몇 번 나갔고, 어디를 얼만큼 몇 교회를 후원하거나 교회 몇 개를 세웠고, 지금까지 몇 교회 주의 종들을 섬겼고, 무슨 헌신과 헌금을 얼마나 했고... 등등 많은 공을 세웠으니,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는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이미 오래전에 영접기도한 사람이므로, 그러므로 나같은 사람은 당연히 천국 프리패스지... 같은 이런 생각, 이런 오해와 착각이 있는 거 아닐까요? 천국은 예수 영접기도로 가는 나라가 아니라 속 사람의 상태로 가는 나라이며, 특히 그 상태가 천국을 수용할 수 있는 상태여야 갈 수 있는 나라인데, 그렇다면 이런 분들은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나라 사랑, 교회 사랑 등 열심히 하셔야 합니다. 아니, 특히 우리 기독교인들은 더욱 그래야 합니다. 실제로 많은 분들이 이런 분들이십니다. 그러나 나라 사랑하다 보면, 교회 사랑하다 보면 주님이 알아서 그걸 주님 사랑한 걸로 쳐주셔서 하늘 상급 많아지겠지 하시는 의식과 태도, 동기로 하신다면 조심하셔야 합니다. 안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행위들이 고스란히 하늘 상급이 되려면, 이런 행위들은 주님을 더욱 사랑한 결과로 당연히 뒤따르는 행위일 때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다만 주님을 놓치시지 말기 바랍니다. 천사들처럼 말입니다. 천사들한테는 주님을 사랑하여 주님 뜻 가운데 주님 주신 쓰임새의 삶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없습니다. 그때 그들은 주님 주시는 지고한(inmost) 행복 가운데 들기 때문입니다.
 
 
※ 다음은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김은경 역) 31장, ‘천국 천사들의 순진한 상태’(276-283) 중 278번 글입니다.
 
...그래서 천국에서는 순진함은 지혜를 거처로 삼는다고 하고, 천사는 그 순진한 정도만큼만 지혜롭다고 한다. 이것을 뒷받침하는 사실들은 다음과 같다. 순진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어떤 선한 것도 제게서 나온 것으로 여기지 않고, 모든 것을 받은 것으로 여기고, 그 근원을 주께 돌린다. 그들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의 인도를 받기 원한다. 또 모든 선한 것을 사랑하고, 모든 진리에서 기쁨을 얻는다. 선을 사랑하는 것, 즉 선을 의도하고 행하는 것이야말로 주를 사랑하는 것이고, 진리를 사랑하는 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임을 그들이 알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들은 많든 적든 자기가 가진 것으로 만족한다. 왜냐하면 자기에게 필요한 만큼만 주어진다는 것을, 즉 조금 필요한 사람은 조금 받고, 많이 필요한 사람은 많이 받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무엇이 우리에게 좋은지 우리는 모른다는 것, 오직 모든 것을 살피시고 영원한 것을 섭리하시는 주님만이 아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2] 그들은 미래에 대해 불안해하지도 않는다. 미래에 대한 불안을 그들은 내일 염려라 부르고, 그것은 삶에 필요하지도 않은 것을 잃거나, 못 받을까 봐 근심하는 일이라고 정의한다. 대인관계에서 그들은 절대 악한 의도로 행동하지 않으며, 오직 선하고 공정하고 정직한 의도로 행동한다. 악한 의도로 행동하는 것을 그들은 교활함이라 부르며, 뱀의 독처럼 기피한다. 그것이 순진함에 완전히 대립되기 때문이다. 그들이 주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없기 때문에, 그리고 그들은 그들이 받는 모든 것의 근원을 주께 돌리기 때문에, 자기 본성으로부터 떨어져 있다. 그들이 자기 본성에서 떨어져 있는 정도만큼 주께서 그들에게 들어가신다. 그 결과 성경 말씀이나 설교를 통해 주의 말씀을 들으면, 그들은 기억에 저장하지 않고 즉시 순종한다. 즉 말씀대로 의도하고 실천한다. 그들에게는 의지 자체가 기억인 것이다. 이들은 겉으로는 대체로 단순해 보인다. 그러나 내적으로는 아주 지혜롭고 분별력 있다. 다음의 성경 말씀은 이들을 가리킨 것이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마10:16) Be ye prudent as serpents and simple as doves (Matt. 10:16).
 
이것이 ‘지혜로운 순진함’이라 부르는 그 순진함이다.
 
[3] 순진함이란, 어떤 선함도 그 근원을 자기에게 돌리지 않고, 모두 주께 돌리는 것이다. 따라서 순진함이란, 주의 인도를 받는 것을 사랑하는 것이며, 이것은 지혜를 이루는 모든 선과 진리를 받는 근본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어린 시절에는 외적 순진성, 나이 들어서는 내적 순진성을 지니도록 창조되었다. 그래서 전자를 통해 후자에 이르고, 다시 후자에서 전자로 돌아가도록 되어 있다. 그래서 사람은 늙으면 몸도 줄어들고, 다시 아이가 되는 것인데, 그러나 이번엔 지혜로운 아이, 즉 천사가 되는 것이다. ‘지혜로운 아이’란 높은 의미로는 천사를 뜻한다. 성서에서 ‘어린아이’는 순진한 사람을 뜻하고, ‘노인’은 순진한 상태에 있는 지혜로운 사람을 의미한다.192
 
 
주192. 말씀에서 ‘어린아이들’은 이노센스를 의미한다 (AC.5608). ‘젖먹이들’도 마찬가지다 (AC.3183). ‘노인’은 지혜로운 사람을, 그리고 추상적으로는 지혜를 의미한다 (AC.3183, 6524). 인간은 나이가 들수록 어린아이가 되며, 그때 그의 지혜 안에 이노센스가 있어, 그 상태로 천국에 들어가 천사가 될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 (AC.3183, 5608). //
 
 
천사들은 금식기도, 산기도, 안수기도, 방언기도, 예언기도, 무슨 무슨 작정기도 같은 거 안 합니다. 그들은 주님으로 말미암아 늘 주님 앞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천사들이 저런 거 한다면 너무 이상하잖아요? 기도든 뭐든 주님을 움직여 내 뜻을 관철하기 위한 동기로는 하지 마세요. 설령, 40일 금식기도 했더니 전에 없던 신령한 은사가 마침내 생겼다 해도 사실은 별로 안 좋은 겁니다. 그게 나중에 자기 계급장이 된다면 말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여 이웃을 열심히 사랑했더니 생각지도 않은 이런 은혜를 주셨어요 한다면 몰라도 말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다가 영생을 얻는 사람이 되어야지 영생을 얻기 위해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안 된다기보다는 뭐랄까, 주님 보시기에 좀 아쉬운 사람이 되는 것이죠.
 
육으로는 세상과, 영으로는 천국과 연결되어 있는 우리 역시 천사들처럼 천국과, 그리고 주님과 연결되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니까 천국과 천사 공부 많이 하시고, 지상에서 천국을 사시기 바랍니다. 거듭 당부드립니다. 주님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천국은 주님의 신성으로 가득 찬 나라이며, 주님의 신성은 주님의 선과 진리로 되어 있습니다. 마치 해에서 열과 빛이 나오는 것처럼 말입니다. 천국에서 주님을 사랑한다는 건, 주님을 개인적으로 사랑하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사랑하는 것이고요, 마찬가지로 이웃을 사랑한다는 건 이웃을 개인적으로 사랑하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를 사랑한다는 의미입니다.
 
이걸 좀 확장하면, 지상에서 원수를 사랑한다는 건, 원수를 개인적으로 사랑하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니라 원수 안에 거하시는 주님의 형상을 사랑하는, 그러니까 그의 안에 깃드신 주님 신성에 대해 예의를 잃지 않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닐까 합니다. 가령, 이재명 같은 사람한테도 말이죠. 비록 그와 같은 사람들한테 예의 바르게 대했다가 해를 입더라도 말입니다. 아래 유다서를 보면,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관하여 마귀와 다투어 변론할 때에 감히 비방하는 판결을 내리지 못하고 다만 말하되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 하였거늘 (유1:9)
 
비록 천사장 미가엘일지라도 비방하는 판결을 삼가지 않습니까? 심지어 그 상대가 마귀인데도 말입니다. 우리 주님은 사랑 그 자체이신 분, 심지어 지옥도 사랑하셔서 여전히 돌보시는 분임을 미가엘은 알고 있는 것입니다.
 
선한 집회, 평화적 시위에서도 우리는 만에 하나 적의, 증오, 복수 같은, 지옥에서 올라오는 기운에 사로잡히면 안 됩니다. 그러면 주님은 더 이상 우리를 보호하실 수 없게 되며, 우리를 향한 천국이 닫히기 때문입니다. 좌우가 서로 먹느냐, 먹히느냐의 긴박한 상황인데 이 무슨 한가한 소리인가 싶으셔도 우리는 주님의 자녀! 끝까지 주님의 전능, 전지, 편재, 그리고 사랑과 섭리를 붙들어야 합니다. 붙들어 보시면 압니다. 오직 주님만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우리 시야에 다른 건 안 들어옵니다. 제발 두리번거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heaven_and_hell, 581.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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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스베덴보리의 글들(Writings)이 필요하시면 (2025/4/13)

 

아래 Swedenborg Foundation에 가시면 거의 모든 글을 pdf로 받으실 수 있습니다. 참고로 Redesigned Standard Edition이며, 1900년대 초 번역을 1990년대에 몇 가지 손본 버전입니다. 그러니까 영어가 좀 옛글투입니다. 저는 이걸로 하고 있어 그런지 이젠 오히려 NCE라고 현대어역은 좀 낯설더군요. 뭐랄까... 좀 지나치게 의역을 했다고나 할까? 네, 뭐 좀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제 처음 입문하시는 분들한테는 오히려 NCE역이 나을 수도 있겠습니다.

 

https://swedenborg.com/emanuel-swedenborg/writings/rse-downloa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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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덴보리의 글들을 읽다 보면 (2025/4/13)

 

스베덴보리의 글들을 읽다 보면, 순간 뇌 정지가 오는 때가 있습니다. 글의 내용이 저의 이해력 역량을 초과했기 때문인데요, 그래서인지 더 이상 진도가 안 나가지는 겁니다.

 

저는 살면서 이런 걸 몇 번 경험했는데요, 지금 생각나는 첫 번째는, 대학 시절, 철학과 다니는 친구 통해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처음 읽었던 때입니다. 비록 어려서부터, 그러니까 중학생 때 벌써 한국문학전집 같은 걸 읽은 저지만, 예를 들면, 월탄 박종화의 ‘금삼의 피’를, 페이지당 열 개 정도 나오는 고어들을 사전을 찾아 노트에 옮겨 적어 가며 읽었지요. 그런 저인데도... 아, 그때 그 당혹감이란... 단 한 문장을 후련하게 읽지 못하겠더군요. 아니, 그 책은 고사하고, 그 친구의 글조차 읽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전자공학을 하던 저라서 그랬는지... 나중엔 화가 나서 원어로 읽고 싶더군요. 그러나 독일어를 따로 해야 한다는 부담 때문에 포기했지요.

 

또 하나는, 제가 삼성에 입사, 당시 기흥 첨단연구소라는 데를 가서 C 언어 관련 무슨 과정 밟느라 연수 중이었는데, 하루는 어느 현업 여성 개발자 한 분이 나와 소프트웨어 드라이버 개발 과정을 설명하면서 특별히 어셈블리 관련 부분 핸들링을 설명하셨던 것 같은데... 저는 당시 이게 무슨 외계어인가 머리가 하얘지며 토할 것 같았습니다. 이 역시 저의 수준을 훨씬 웃도는, 저 높고 깊은 세계를 잠깐 들여다본 것이었지요.

 

그 후론 거의 없다가 오랜만에 또 이런 일이 생겼는데 바로 스베덴보리의 글들입니다. 이분의 글들은 영계를 다녀오신 분의 글이라 기본적으로 신비스러운데요, 특히 그에 더해 당혹스럽기까지 한 건 거의 모든 추상 개념을 마치 영상처럼 설명하시는 겁니다. 눈으로 보지 않았으면, 도저히 그렇게 표현, 묘사하실 수 없는... 이 지상의 모든 추상 개념은 그곳에선 눈에 보이게 나타난답니다. 주님의 어떠하심에 대한 설명들 역시 사실 저 개인적으로는 참으로 영광스럽고 그렇게 귀할 수가 없음에도, 본 적 없는 나라, 접한 적 없는 개념들 앞에 뇌 정지가 오는 건 어쩔 수가 없습니다. 아래는 이럴 때 눈 딱 감고 드리는 유일한 기도입니다.

 

오, 주님, 지금 제게 천국 빛을 더하사 이 글들을 읽고 이해하게 해주세요. 저를 천국 천사들 가운데 잠시 올려주셔서 이 글들을 이해할 수 있는 천사들의 지혜 가운데 저를 잠시 있게 해주세요...

 

놀랍게도 이 기도를 드리고 나면 잠시 후 웬만하면 거의 다 깨닫게 됩니다. 아멘,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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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이 나이가 많아 늙었고’(창24:1)의 속뜻 (2025/4/11)

 
저는 61년 소띠입니다. 올해로 만 63세네요. 저는 100세는 바라지도 않고, 소명으로 받은 지금 이 일을 어느 정도 마치면 그저 깔끔하게 이 육신을 벗고 갈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 역시 주님의 허락이 있으셔야 하지만 말입니다. 더욱 바람이 있다면, 천국에서도 제 아내와 영원히 함께 지낼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인데요, 제 아내는 틀림없는데 저는 암만 생각해도 좀 간당간당하거든요. 웬만큼 제 아내와 주님 속을 썩였어야 말이죠 ㅎㅎㅎ 참고로, 천국은 서로의 선이 비슷해야 같이 지낼 수 있습니다.
 
30년대 전후반 태생이신 분들은 슬슬 떠날 생각들을 진지하게 하실 것 같습니다. 아닌가요? 여전히 이 세상 삶에 더욱 마음 기울이고 계신가요? 이제는 슬슬 가실 준비를 하시는 게 좋을 듯 한데... 그런데 이런 말씀드린다고 언짢아들 하실까 봐 좀 걱정됩니다. 절대 오해하지 말아 주세요...
 
말씀에 보면, 이 글 제목처럼 ‘나이가 많아 늙었고’, ‘아브라함의 향년이 백칠십 오세라’, ‘기운이 다하여 죽어’ 같은 표현들이 자주 등장하는데요, 이 표현들은 그 겉뜻으로도 그냥 이해하는 데 별 무리가 없지만, 그러나 그 속뜻이 참 놀라워서 오늘 특별히 제가 이해하는 데까지만 좀 말씀드려 볼까 합니다.
 
첫째, 아브라함은 주님의 표상(表象, representative)입니다. 즉 지금 아브라함은 세상에서 자기 인생을 살고 있지만, 그러나 그의 삶을 통해 주님은 주님의 내면 상태와 그 변화를 설명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아브라함이 나이가 많아 늙었고’라는 표현의 속뜻은, 주님 안의 인성(human) 상태가 머잖아 신성(Divine) 상태가 되실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주님은 육의 어머니 마리아로 말미암은 인성을 입으셨기 때문에, 주님의 일생은 이 인성을 벗고 신성을 입는 과정이었습니다. 거듭 주님은, 속 사람으로서는 여호와 하나님, 겉 사람으로서는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신적 진리(Divine Truth)로 활동하시는 성령, 이렇게 삼위일체이신 한 분 주님이시며, 이것을 생각하면, 왜 주님의 인성이 신성이 되셔야만 하셨나를 살짝 깨닫게 되는데요, 그러니까 주님의 속 사람이신 여호와 하나님은 그대로는 이 피조세계에 나타나실 수 없어 반드시 겉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 곧 신적 인간(Divine Human)의 형태로만 나타나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둘째, 천사들은 이 ‘나이가 많아 늙었고’라는 표현을 지금 자기들이 와있는 사람의 눈을 통해 읽을 때, ‘나이가 많다’, ‘늙었다’ 같은 지상 표현을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천국은 여기 지상처럼 시공간의 나라가 아닌, 상태와 그 변화의 나라이기 때문이며, 그들은 영적 존재라 지상 언어는 못 읽고, 다만 그 안에 담긴 영적 의미, 곧 말씀의 영인 속뜻만 읽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저런 표현을 접하면, 상태와 그 변화, 곧 인간을 벗고, 천국을 입는 것(to put off what is human, and put on what is heavenly)으로 이해합니다. 천사들에게 있어서는, 인생이란 세상에 태어나 천국 가는 과정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이 드는 것을 피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곧 새로운 상태로 들어가실 테니까요. 팔십 평생 이룬 게 많아 덕스럽고 복 받은 인생 살아오신 분들도 계실 것이고, 후회와 눈물만 남은 분들도 계실 겁니다. 두 인생이 사후 그 상태가 그 속 사람이 어떤지 여부에 따라 다르겠지만, 천국은 속 사람 상태로 들어가는 나라임을 기억하시고, 눈을 들어 천국을 옷입으시기 바랍니다. 그동안 세상을 꽉 쥐고 살아오셨다면 이젠 놓으시고, 천국을 바라보시며 천국 옷으로 새로 갈아입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나이 드는 것’이며, ‘늙는 것’입니다. 말씀 생활에 힘쓰시고, 그동안 이런저런 아쉬웠던 모든 관계를 풀고 가시기 바랍니다. 부지런히 선을 행하시고, 진리의 삶으로 마무리하시고요. 천국 가는 건, 흐릿한 데 있다가 밝고 또렷한 데로 가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시고, 이웃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천국에 대한 공부를 많이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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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전하기는 하지만, 그 결과는 본인 몫... (2025/4/9)

 
저는 제 주일 설교 포함, 여기 올리는 글 대부분을 많은 분께 개인 카톡으로 보내드리고 있습니다. 대부분 몇 년 이상 되신 분들이시며, 겨우 살아남으신(?) 얼마 안 되는 분들이십니다. 저는 제 본업인 리딩과 번역 외에, 이 또한 제가 이 환경에서 힘쓸 수 있는 사역이라 생각하고 힘써 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살아남으셨다’ 한 이유는, 다들 아시겠지만, 여기 글들은 기존 기독교 교리와 많이 좀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 일로 저는 오랫동안 많은 일, 별의별 일을 다 겪어야 했으며, 대부분 오랜 사귐에도 불구, 등을 돌리시거나 좀 불편한 관계가 되거나 하는 그런 일들이었지요. 그럼에도 불구, 이분들은 그 가운데서도 아직 꾸준히 제 글을 거부하시지는 않고 계시는 분들입니다. 그러고 보면, 이분들 대부분은 참 마음이 곧고 정직한, 한길만 파는 그런 올곧은 분들이시지 싶습니다. 한편으론, 평생을 그 교리로 살아오신 분들이시라 그 교리는 자신들의 생명이 되었는데, 이제 와서 누가 그 생명을 건드리면 많이 힘들어하시지 않을까요? 저도 그랬으니까요...
 
그러나 적극적으로 거부하시지만 않고 있을 뿐, 그렇다고 그동안 적극적인, 또는 눈이 확 열렸을 때와 같은 반응을 보이시는 분은 거의 없습니다. 세 손가락도 많을 듯한데요. 이분들은 정말 희귀한 분들이시며, 참으로 귀한 분들이 아닐 수 없으십니다. 이분들은 나중에 주님과 함께 새 교회에 들어가실 분들입니다.
 
그렇다 보니 지금은 누구를 또 새롭게 공유 명단에 올리기가 쉽지 않은데요, 괜히 또 불편한 관계가 되지 않을까 해서지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 꾸준히 생각나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러면 예레미야처럼 제 사정을 주님께 말씀드리며, 어떤 증거를 기다리지요. 그래도 계속 생각나며, 저를 꾹꾹 누르시면 할 수 없이 보내기 시작합니다. 사전 양해를 구해야 마땅하나 오랫동안 알던 사이라 그 또한 괜히 부담드릴 듯하여 그냥 슬그머니 보냅니다.
 
그 다음부터는 주님이 일하실 차례입니다. 이런 거, 다시는 보내지 마시라든가 슬그머니 차단, 카톡 읽은 표시 노란 숫자가 한두 달 안 사라지고 있다든가 뭐, 등등... 아니면, 감사 인사라든가 무슨 질문이라든가 등 한결 좀 나은 반응을 보이시지요. 그러면 참 감사한 거고요...
 
여기 글들은 주님의 빛 비추심이 없으면 이해조차 쉽지 않으신 글들입니다. 오히려 속에서 막연한 반발심이 피어오르는 그런 글들이지요... 오직 믿음의 교리, 그리고 말씀을 겉 글자로만 읽는 신앙에 반해 선과 진리, 사랑과 신앙의 일치, 하나 됨, 구원이란 속 사람의 상태가 천국을 수용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말씀은 그 안에 주님의 아르카나(arcana, 秘義)가 담긴 것만 말씀이며, 사람이 영과 육으로 되어 있듯 말씀도 말씀의 속뜻과 겉뜻이 있다는 등 기존 기독교, 개신교 교리에서는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얘기를 하니까요...
 
이 사역에 힘써 벌써 8년 차... 외롭고 고독합니다. 그러나 하기 싫거나 후회하거나 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늘 새롭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다정한 격려 있으셔서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하고는 합니다. 특별히 말씀들 안에 감추어 두신 아르카나는 저의 영과 육을 뒤흔들 만큼 말할 수 없는 감동과 감격의 연속입니다. 최근엔 내면이 조금씩 열림과 복음서 병 고침의 역사가 조금씩 내게도 일어나는 걸 보고 있습니다.  다만 저희 사모에게는 많이 미안합니다. 제가 이 일에 힘쓰는 대신 좀 더 기존 사역을 힘써 교세를 확장하거나 다른 직장을 알아보았거나 했으면 한결 수입이 많아 생활이 훨씬 나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최근 주님의 어떤 당부가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이 느껴집니다.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는... 그래서 못 지킬 때가 간혹 있지만 더욱 요만큼의 세상 두리번거림도 끊고, 스베덴보리의 글들 리딩과 번역에만 전념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주일 설교, 그러니까 주일예배도 어떻게 약식으로 진행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 중입니다. 주일 설교 준비가 시간을 너무 끌어당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오늘의 결론, 주님 주시는 퍼셉션을 따라 보내기는 하지만, 그 결과는 본인 몫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주님은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사55:11) 하셨으니 분명 언젠가는 일을 이루시며, 아 그래서 그때 나로 하여금 글들을 보내게 하셨구나 깨닫게 하실 줄 믿습니다. 제가 이 세상 떠나기 전 그런 소식들을 접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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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수 out...

황교안 무소속 후보밖에는 길이 없네요

 

이토록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 없다니...

 

윤 대통령님도 창당 안 하고, 헌재 결과 받아들인다라고 윤상현 의원 통해 언급하셔서, 윤 대통령님 역할도 계엄까지로 막을 내린다고 하네요

 

이재명 관련 재판들은 법원에서 출석 통보 포기하고, 김만배는 오늘 무죄판결 나고... 대 놓고 법이 없는 상태가 되었어요

 

마치 모압-암몬-마온이 유다에 쳐들어왔을 때 여호사밧이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는 심정이랑 비슷하네요

 

중국이 깊게 쳐들어와서 무정부 상태를 만들어놓았는데 국민들은 정신 못 차리고 있고... //

 

 

이상은 어젯밤 받은 어느 우국충정 지사의 카톡입니다. 아래는 제가 보낸 답신입니다.

 

 

주님 복음서 시절, 자기 지상 조국 유다의 운명에 대해 취하셨던 태도가 생각납니다. 우리는 나라를 사랑할 때에도, 의롭고 올바름을 사랑할 때에도, 주님을 생각하며, 주님 안에서 해야겠다고 말입니다. 그것이 생각만큼 쉬운 일은 아니지만...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의 상황, 밖으로는 로마의 식민 통치, 안으로는 나라의 독립을 꾀하는 끊임없는 움직임 가운데서도 주님은 한가로이(?) 천국 이야기만 하시고, 사람들을 치료하고 다니실 뿐이셨습니다. 그 덕에 나라 안팎 권력 잡은 자들, 정치인들의 시선을 피하실 수 있었지만... 아마 대제사장들을 비롯, 당대 종교 리더십들의 시기, 질투만 아니었어도 주님이 십자가에서 처형당할 일은 없으셨을 뻔할 정도였습니다.

 

만일 주님이 지금 이 대한민국 상황에 오셔서 저 복음서 시절처럼 동일한 사역에 힘쓰고 계시면... 지금은 뭐 좀 달라질까요? 아마 똑같은 상황이 전개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소위 종교 리더십이라는 사람들의 수많은 지적질 때문에 말입니다. 나라 사랑이라든지, 정의와 공정을 사랑한다든지 하는 것들을 잘, 그러니까 주님 관점에서 생각해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처럼 사람들을 모아 집회를 열어 로마에 아부하는 종교, 정치 지도자들에 대한 타도를 외치시지도, 그렇다고 로마에 부역해야 우리는 살 수 있다 하시지도 않았습니다. 주님은 아예 그런 현실 정치에 관여하시지 않았습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마22:21)라고 하신 주님이십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우리는 겉을 보지만, 주님은 속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다의 정치적 상황이 겉이라면, 유다를 비롯, 온 세상에 만연한 지옥의 기운, 곧 속을 주님은 상대하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자유민주주의든, 공산, 전체주의, 사회주의든 사실 무슨 무슨 주의 같은 것 때문에 주님의 일과 계획, 영원하신 섭리가 차질을 빚는 일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천국 갈 사람이 천국 못 가고, 천국 못 갈 사람이 천국 가고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지상 어떤 정치 제도나 체제에 의해 영향을 받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재명 같은 사람 하나 때문에 주님이 곤란을 겪으시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묻는 빌라도에게 '네 말이 옳도다'(마27:11) 하신 주님이십니다. 지금도입니다. 지금도 그때처럼 겉과 속 상황이 전개되어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주님께 주목해야 할 때입니다.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말입니다. 주님은 주님의 어떠하심을 위해 굳이 사람들의 예배와 영광, 찬송을 필요로 하는 분도 아니시고. 그런 걸로 이랬다저랬다 하는 신도 아니십니다. 사람들의 예배, 영광, 찬송 없이도 주님은 이미 모든 것이 충분하신 분입니다. 주님은 비유하자면, 저 하늘의 해와 같은 분이셔서 우리의 무슨 찬송과 영광 돌림은 그저 성냥개비 하나 켜서 그 빛에 보태는 정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분이 우리더러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께 영광 돌리며, 주님을 섬기라 하시는 건 뭐가 부족하셔서가 아니라 순전히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천국에서 지낼 수 있게 하시려고 말입니다.

 

주님은 정말 크신 분이십니다. 천국보다 크셔서 천국 밖에 계신 분입니다. 천국을 비롯한 모든 영계와 이 세상 자연계, 온 우주 만물 등, 이 피조 세계 전체도 주님을 모시기에는 부족한, 그런 신이십니다! 천국에서 주님을 아주 가까이 모시는 삼층천 한 가운데 천사들조차도 주님이 얇은 보호막을 입혀주시지 않으면 주님의 영광의 그 기운에 해를 입으며, 주님이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으신 채 그대로 천국이나 지옥을 방문하시면, 그곳은 주님의 그 날 것 그대로의 신성(the Divine)을 감당할 수 없어 그대로 소멸되고 맙니다. 그 속 사람으로 여호와 하나님이시고, 그 겉 사람으로 예수 그리스도 이신, 그리고 신적 진리(Divine Truth)이신 성령이 해처럼 방사되시는, 신적 삼위일체(Divine Trinity)이신 주님은 참으로 크고 두려우신,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러니 비록 지금은 분명 엄중한 상황이지만, 우리는 이런 신, 이런 주님을 믿고, 주님 안에서 중심을 잡고 있어야 하겠습니다. 주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잡히실 때에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51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의 하나가 손을 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52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53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54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 (마26:51-54)

 

그 능력의 천사들조차 주님 뒤에서 잠자코 수종 들었음을 생각합시다. 그 정말 기가 막힌 상황에서도 말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주님이 행하실 일을 사모하며 오직 주님의 선(Divine Good)과 진리(Divine Truth), 그 아름다우신 신성(the Divine)에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야 하겠습니다. 늘 주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은 지상의 조국 유다의 엄중한 상황에서 어떻게 하셨나를 말입니다. 지금은 우리 역시 중심을 잡고, 주님처럼 우리도 속에 주목하고 집중, 우리 신앙의 기본으로, 첫 출발점으로 돌아가야 하겠습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우리 속 사람의 상태가 천국을 수용할 수 있는 상태여야 하겠고, 철저히 주님 사랑, 이웃 사랑 가운데 모든 걸 해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주님 사랑, 나라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1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2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3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호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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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어느 경건하신 원로(39생) 여목사님이 보내오신 고백과 그에 대한 저의 답글입니다.

 

먼저 여종의 글입니다.

 

천만에 말씀입니다. 목사님, 너무 두렵고 떨리는 말씀, 저는 얼마나 추악한지 모릅니다. 겉치레만 그럴 듯, 속은 형용할 수 없는 내면입니다. 어찌 표현할 수 없이... 자존심에, 이기심에... 감히 글로 표현 못 하겠습니다. ~~~, 끝이 없습니다. 어서 부르시기 전에 변화되어야지요... 죄송하지만 기도해주세요.

 

저는 목사님 건강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주님이 계획하시고 목적하신 바를 이루시어 그 귀한 보화를 무지한 이들에게 알릴 수 있는 귀한 날이 이르도록...

 

귀한 긴 시간 소비시켜 드린 것 같아 죄송합니다.

 

가내 평강하소서... 🙏🙏🙏🙏🙏🙏

 

 

다음은 다음날 제가 보내드린 답글입니다.

 

목사님, 다음 글은 ‘천국과 지옥’ 513번 글인데요, 53장, ‘사람의 사후 셋째 상태’에 나오는 겁니다.

 

교육은 많은 공동체의 천사들이, 특히 북쪽과 남쪽 공동체의 천사들이 맡는다. 그쪽 천사 공동체들은 선과 진리를 아는 데서 오는 지성과 지혜 안에 있기 때문이다. 교육 장소들은 북쪽을 향하고 있고, 다양하며, 모든 영이 각자의 성격과 수용 능력에 따라 가르침을 받을 수 있도록, 천국적 선의 종류와 다양함에 따라 구분되고 배치되어 있다. 교육 장소들은 아주 멀리까지 둥글게 퍼져 있다. 교육을 받을 선한 영들은 중간 영계에서의 그들의 둘째 상태가 완료되면 주님의 인도로 이 장소들로 오게 된다. 그러나 모두가 다 오는 것은 아니다. 어떤 영들은 세상에서 이미 가르침을 알고 있었고, 주님에 의해 천국에 합당하게 준비되어 있었으므로 다른 길을 거쳐 천국으로 올라간다. 그중 일부는 죽은 뒤 바로 올라가고, 일부는 선한 영들과 잠시 머물면서 세상에서 명예와 재물에 대해 가졌던 생각과 애정의 탁한 요소들이 제거되어 정화된 후에 올라간다. 일부는 먼저 버려짐을 겪는데, 이는 낮은 땅이라고 하는 발바닥 밑에 있는 장소에서 이루어진다. 어떤 이들은 거기서 심한 고통을 겪는다. 이들은 선한 삶을 살았지만, 그릇된 생각을 확신한 사람들이다. 그릇된 생각들은 확신하면 굳게 달라붙고, 그것이 떨어져 나가기 전까지는 진리를 볼 수 없기 때문에, 진리를 받아들일 수도 없는 것이다. 버려짐의 과정은 ‘천국의 비밀’에서 다룬 바 있다.주278 (HH.513)

 

이중 ‘주278’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 나오는데요,

 

① 내세에는 황폐함(vastations, 버려짐)이라는 게 있는데, 그러니까 생을 마감하고 내세에 들어가는 사람들한테 일어나는 것이다. (AC.698, 7122, 7474, 9763)

 

② 선한 사람들은 거짓에 대해 황폐화가 일어나고, 반면 악인들은 진리에 대해 황폐화가 일어난다. (AC.7474, 7541, 7542)

 

③ 선한 사람들이 겪는 황폐함은 지상과 세상에 속한 것들을 벗어버리는 황폐함인데, 이것들은 세상에 살 동안 함께했던 것들이다. (AC.7186, 9763)

 

④ 또한 악과 거짓의 제거, 그리고 그렇게 해서 주님한테서 나오는 천국 선과 진리의 유입을 위한 여지, 그리고 이들을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AC.7122, 9330)

 

⑤ 천국으로 올라가는 것은 그런 것들이 제거될 때까지는 불가능한데, 그 이유는 그것들은 천국에 있는 것들을 방해하고, 그들과 조화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AC.6928, 7122, 7186, 7541, 7542, 9763)

 

⑥ 천국으로 올려지는 사람들은 그래서 미리 준비된다. (AC.4728, 7090)

 

⑦ 준비도 되기 전, 천국에 들어가는 건 위험하다. (AC.537, 538)

 

⑧ 황폐함이라는 과정을 마치고 천국으로 올려진 사람들의 내적 밝아짐과 기쁨의 상태, 그리고 그들을 맞이하는 리셉션에 관하여 (AC.2699, 2701, 2704)

 

⑨ 이들 황폐함의 과정이 진행되는 지역을 가리켜 낮은 땅이라고 한다. (AC.4728, 7090)

 

⑩ 그 지역은 지옥들로 빙 둘러싸인 발바닥 아래이다. 그곳에 대한 설명(AC.4940–4951, 7090)과 그곳을 경험한 이야기(AC.699)

 

⑪ 그 무엇보다 훨씬 더 감염되게 하고, 황폐하게 하는 지옥들이란 무엇인가 (AC.7317, 7502, 7545)

 

⑫ 선한 사람들을 감염시켜 황폐하게 한 사람들은 나중에는 그들을 두려워한 나머지 그들을 피하며, 그들로부터 돌아선다. (AC.7768)

 

⑬ 이들 감염과 황폐의 과정은 악과 거짓의 들러붙은 정도에 따라 다양하게 진행되며, 그들의 질과 양에 따라 계속된다. (AC.1106–1113)

 

⑭ 일부는 황폐화 과정을 진심으로 기꺼이 원한다. (AC.1107)

 

⑮ 일부는 두려워하면서 황폐화 과정을 밟는다. (AC.4942)

 

⑯ 일부는 세상에서 행한 악과 세상에서 한 거짓된 생각들로 감염되어 있다. 그들은 이 악과 거짓 때문에 근심하고 양심의 큰 고통을 겪는다. (AC.1106)

 

⑰ 일부는 진리 알기를 간절히 원하는 가운데 영적 감금 상태에 있는, 그런 식으로 이 과정을 지나는데, 이 상태는 진리에 관한 무지와 진리를 차단하는 상태다. (AC.1109, 2694)

 

⑱ 일부는 잠드는 식으로, 일부는 깨어있음과 잠이 든, 그 중간 상태에 있는 식으로 (AC.1108)

 

⑲ 자기가 한 일을 공으로 여긴 사람들한테는 자신들이 마치 장작을 패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AC.1110)

 

⑳ 다른 이들은 다른 방식으로, 엄청한 다양함으로 (AC.6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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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예를 들어, ‘AC.699’라는 표현은, ‘Arcana Coelestia 699번 글’이라는 뜻입니다.

 

Arcana Coelestia’는 라틴어로, ‘天界秘義, 천국의 비밀’ 등으로 옮길 수 있고, 이는 주님이 풀어 주시는 창세기, 출애굽기 속뜻 주석을 스베덴보리가 총 7년에 걸쳐 딕테이션한 것입니다. 글 번호가 10,837번으로 끝나지요.

 

목사님, 어제 목사님 마지막 글을 읽고 계속 생각하게 하시더니 오늘 아침, 이렇게 답을 하게 하시네요...

 

목사님, 우리 중에 과연 누가 사후 천국으로 직행할 수 있을까요? 스베덴보리는 그런 사람을 보긴 보았지만 아주 아주 희귀했다고 합니다. 반대로 지옥으로 직행하는 사람들도 보았답니다.

 

위 ⑦번 글처럼 저 역시 이 상태로 만일 임종, 그리고 천국으로 바로 들어가면 큰일 날 것 같습니다.

 

위 ④번 글처럼 사후, 저렇게 천국에 올라갈 준비를 시켜주시는 주님께 정말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입니다.

 

저 역시 ⑬번 글처럼 제게 들러붙은 것들을 떼어내는 과정이 진행되겠지만, 욥의 고백처럼 정금, 순금처럼 정제되어 천국에 올라갈 줄 믿습니다.

 

목사님이야말로 주님 보시기에 순금(pure gold)이시며, 극락조(a bird of paradise)이십니다. 목사님은 스스로 자신을 배설물이요, 거기 앉아 있는 파리로 여기시기 때문인데요, 참으로 우리는 주님 보시기에 그런 존재임을 시인, 인정, 그리고 믿습니다.

 

그러니 목사님, 더 이상 자꾸 저거하지 마시고, 오히려 주님의 사랑과 호의, 선의 안에 머무르시며, 감사하고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목사님에게 와있는 천사들이 목사님 홀로 계시는 방과 거실을 삼층천 천국 향기로 가득 채우실 줄 믿사오며...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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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조의 속뜻

 

 

...오늘은 특별히 우리의 헌금생활 중 십일조에 대하여, 그 아르카나(arcana, 秘義, 속뜻)에 대하여 같이 나누고자 합니다.

구약성경에서 십일조에 관한 거의 첫 본문이라 할 수 있는 곳은 바로 창세기 14장, 아브람이 살렘 왕 멜기세덱에게 드린 부분입니다.

17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한 왕들을 쳐부수고 돌아올 때에 소돔 왕이 사웨 골짜기 곧 왕의 골짜기로 나와 그를 영접하였고 18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19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20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창14:17-20)

여기 20절,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에 나오는 이 ‘십분의 일’에 관하여, 창세기 주석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38번 글을 보면 이렇게 풀이하고 있습니다.

 

십일조(tithes)가 리메인스(remains)를 상징한다, 가리킨다는 사실은 앞에서 여러 번 말씀드렸습니다만 다시 한번 말씀드리면, 리메인스라는 것은 사랑과 체어리티(charity, 이웃 사랑, 선행, 인애)의 모든 상태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 사랑의 모든 상태, 이웃 사랑의 모든 상태들을 말하며,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순진함(innocence)과 평화(peace)의 모든 상태, 곧 천국의 모든 상태이며, 주님은 이런 상태, 이런 리메인스를 거듭남의 과정을 걷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선물로 주십니다. 이 상태들이 사람에게 그 유아기 때부터 주어져 어른이 되면서 점점 줄어들지만 그러다가 거듭남이 시작되면 사람은 다시 이번에는 새로운 리메인스를 받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주님이 주시는 새 생명입니다. 사람이 진정 사람이 되는 것은 바로 이 리메인스로부터, 또는 리메인스에 의해서이며, 만약 사람에게 이 주님 사랑, 이웃 사랑의 상태가 없다면, 그래서 결국 순진함의 상태가 없다면 사람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니며, 그때는 오히려 짐승보다도 더 최악이 됩니다. 사람은 순진함이 있어 자기도 모르게 점점 더 생명의 다른 상태들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본문에서 말하는 리메인스는 시험을 이김으로써 얻는 리메인스입니다. 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싸워 이긴 후, 멜기세덱에게 바친 십일조를 가지고 이 리메인스를 표현한 것입니다. 이 리메인스는 사랑의 모든 상태, 곧 사랑의 모든 천적인 것들인데, 주님도 마리아로 유전한 인성을 입고 계신 동안은 지속적인 싸움과 이김을 통해서 힘들게 습득하신 것입니다. 이것으로 주님은 끊임없이 주님의 신적 본성과 결합하셨고, 같은 방식으로 주님의 인성이 사랑, 곧 생명 그 자체, 곧 여호와가 되실 때까지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That this signifies remains derived from victory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tithes” as being remains (spoken of before, n. 576). But what remains are may be seen above (n. 468, 530, 560–561, 661, 1050), namely, that they are all the states of love and charity, and consequently all the states of innocence and peace, with which a man is gifted. These states are given to man from infancy, but less by degrees as the man advances into adult age. But when a man is being regenerated, he then receives new remains also, besides the former, thus new life. For it is from remains, or by remains, that a man is a man; for without the state of love and charity, and without the state of innocence—which states instill themselves into the other states of his life—a man is not a man, but is worse than any wild beast. The remains acquired in the combats of temptations are those which are here meant. These remains are what are signified by the tithes given to Melchizedek by Abram; and they are all the celestial things of love which the Lord procured to himself by the continual combats and victories by which he was continually being united to his Divine essence, until his human essence in like manner became love, or the being of life, that is, Jehovah.

 

이해가 되시나요? 좀 어렵지 않으신지... 스베덴보리의 글들은 천계(天界), 초월적 지혜의 나라의 일을 매우 제한적인 지상의 언어로 표현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는지 원문은 사실 이보다 더 간략하고 문장과 문장 사이, 글과 글 사이 무슨 배경지식이 없으면 한 번에 이해하기가 다소 좀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위 주석을 제가 이해한 바로 좀 쉽게 풀이하자면...

모든 사람은 거듭남의 유무와 관계없이 일단은 주님으로부터 첫 번째 리메인스라는 것을 선물로 받습니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사람은 어떻게든 결국 선 쪽으로 기울어지는데요, 물론 사람들 중에는 끝까지 주님을 거절하여 선보다는 악을, 천국보다는 지옥을 선택, 결국 멸망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말입니다. 주님의 이 첫 번째 선물로 말미암아 사람은 여러 우여곡절 끝에 거듭남의 여정을 시작하며, 일단 거듭남이 시작되면 이제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두 번째 리메인스를 또 선물로 받습니다. 이 선물로 말미암아 사람은 생명, 곧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주님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발자국을 떼는 것이지요. 사람은 주님의 선물, 주님의 호의, 주님의 돌보심 없이는 결코 거듭남의 여정을 시작도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탐욕과 거짓의 덩어리, 곧 악의 덩어리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입니다. 사람 안에 주님이 넣어 두신, 주님으로 말미암은 이 리메인스라는 것이 있다는 것, 그리고 이것이 ‘십분의 일’로 표현된,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십일조’라 일컫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무슨 이쁜 짓을 하고, 무슨 기특한 행실을 보일 수 있는 것도 다 우리 안에 넣어 두신 이 리메인스 덕분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이것으로 멜기세덱, 곧 여호와 하나님으로 나타나신 주님을 공경하였습니다. ‘주님, 이것은 주님의 것입니다. 이것으로 제가 롯을 데려올 수 있었습니다.’ 사례한 것입니다. 이것이 십일조의 아르카나입니다.

이 멜기세덱 본문을 보다 더 온전히 이해하려면 그돌라오멜, 소돔왕, 그리고 롯과 아브람의 속뜻, 그 아르카나가 무엇이며, 그들 간 전쟁과 그 결과, 그리고 멜기세덱과 그가 들고 온 ‘떡과 포도주’의 아르카나가 무엇인지 등을 알아야 하지만 그것은 내용이 깊어지므로 다음에 기회 있을 때 정식으로(?) 다루기로 하고요, 여기서는 간략히만 말씀드리면...

주님도 인성을 입고 오셔서 처음에는 외견상의 선과 진리(apparent good and truth), 겉으로 보기엔 선이요, 진리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닌 것, 가짜인 것들과 끊임없이 싸우셨습니다. 그것이 아브람과 그돌라오멜 간 전쟁입니다. 아브람은 주님의 합리성(合理性, rationality)을, 그돌라오멜은 외견상 진리를, 롯은 주님의 겉 사람을 각각 가리킵니다. 겉 사람과 합리성은 같이 있어야 하는데 겉 사람이 합리성을 떠나 가짜 진리에게 사로잡힌 것을 롯이 아브람을 떠나 소돔에 있다가 그돌라오멜에게 사로잡힌 것으로 본문은 말씀하고 있는 것이며, 주님이 이 가짜들과 싸워 이기신 후, 주님의 겉 사람이 속 사람이신 여호와 하나님께로 온전히 인도된 것을 아브람이 롯을 데리고 멜기세덱을 만난 것과 그의 ‘떡과 포도주’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네, 여기서는 이 정도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렇게 간략하게라도 소개를 하고 넘어가는 것은, 말씀(the Word)은 정말 철저하게 상응(相應, correspondence)으로 기록되었다는 것과 그래서 정말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깊은 아르카나로 기록되었다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신명기 14장 28절, 29절입니다.

28매 삼 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의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29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 중에 거류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신14:28-29)

십분의 일’을 가지고 주님이 무슨 일을 하시는지를 말씀하시는 본문입니다. 주님은 이 ‘십분의 일’을 가지고 레위인과 객, 고아와 과부들을 돌보십니다. 이들은 겉뜻으로도 그렇지만 속뜻으로도 영적 결핍을 뜻합니다. 주님은 거듭남을 시작한 사람들이 주님이 주시는 두 번째 리메인스를 가지고 이런 영적 결핍 해결하기를 원하십니다. 거듭남의 여정 가운데 있는 우리는 정말 그래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우리와 우리의 이웃들에게 있는 이 영적 결핍들을 돌아보고 채워주는 일에 이 두 번째 리메인스를 열심히 사용해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 아브라함의 십일조 본문을 통해, 그리고 오늘 주님 말씀 마태복음 본문을 통해 우리가 확인하는 사실들이 있습니다.

먼저, 십일조를 드린다, 십일조 헌금을 한다는 것은 단순한 헌금 행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주님이 넣어주신 선한 능력, 리메인스를 잘, 그리고 열심히 사용하여 더욱 주님으로부터 더욱더 많은 리메인스가 우리 속 사람 안에 공급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 드리는 개념이 아닌, 주님의 것이 우리 안에 쌓이는 개념입니다.

말라기 말씀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말3:10)

여기 ‘시험하여’는 ‘증명하여’(prove, verify)라는 뜻입니다.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 자신의 믿음을 입증하라, 증명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온전한 십일조를 드릴 때, 주님은 우리 안에 더욱 더 넘치게 주님의 리메인스를 공급하십니다. 그리고 이런 넘치는 리메인스로 우리는 더욱더 쉽게 거듭남의 여정, 곧 영적 싸움을 싸울 수 있습니다.

또 하나, 내 것을 드리는 게 아니라 사실은 주님의 것을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리메인스라는 것을 우리는 두 번 다 거저 받았습니다. 우리가 악을 이겨 낼 근본 능력을 우리도 모르게 주님께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주신 것으로 살며, 영적 전투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은 사실은 모두 주님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이 사실을 시인하며 사는 삶은 복된 삶이며, 그럴수록 우리는 더욱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게 되며, 우리가 드리는 것이 사실은 우리 안에 리메인스로 쌓이게 되는 것입니다. 아멘, 할렐루야!

오늘 본문, 주님 말씀입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마23:23)

박하와 회향, 근채의 십일조는 외적인 십일조입니다. 정의와 긍휼, 믿음의 십일조는 내적인 십일조입니다. 이 둘은 같이 갑니다. 외적 십일조는 내적 십일조가 겉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십일조를 하지 않는 사람의 신앙이 온전할 수 없고, 반대로 온전한 신앙의 사람이 십일조 헌금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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