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고교회 세 번째, 네 번째 후손 이야기(3:1-6, AC.194-210)

 


1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4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6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7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8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9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11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12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13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3:1-13)

 

 

창세기 속뜻 주석 설교, 창세기 3장 첫 번째 단락인 ‘태고교회 세 번째, 네 번째 후손 이야기(3:1-13)를 오늘은 그 전반부인 1절로 6절까지 번역, 설명을 곁들이며 함께하겠습니다.

 

먼저 개요입니다.

 

 

190

태고교회(the most ancient church)의 세 번째 상태를 다루는데요, 이 상태는 자신의 본성을 사랑할 정도로 원하던(so desired its own as to love it) 상태입니다.



191

자기 사랑, 즉 자신의 본성을 향한 사랑(the love of self, that is, their own love)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자신들의 감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것들은 아무것도 안 믿기 시작했으며, 그래서 본문에서는 감각적인 건(the sensuous part) ‘뱀’(serpent)으로, 자기 사랑, 즉 자신의 본성을 향한 사랑은 ‘여자’(woman)로, 그리고 이성적, 합리적인 건(the rational) ‘남자’(man)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192

이런 배경 가운데 ‘뱀’(serpent), 곧 감각 파트가 여자를 설득, 주님 신앙에 관한 것들이 과연 그런지를 알아보게 하였는데, 이것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는 것’(eating of the tree of knowledge)으로, 사람의 이성이 동의한 것은 ‘그도 먹은지라’(the man that he did eat)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1-6)

 

그러니까 주님 사랑, 이웃 사랑의 사람을 저런 말로 속일 수는 없다, 주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체어리티의 삶을 사는 사람한테는 저런 속삭임이 통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저런 말에 넘어가고 안 넘어가고는 본인이 가진 자아의 퀄러티, 즉 속 사람의 역량 문제인데요, 그러니까 천사들이라면 저런 말에 넘어갈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천사들은 그 자아가 백 퍼센트 주님 편에 선 사람들입니다. 내 마음의 귀가 어떤 속삭임에 솔깃해하는가를 관찰하면 나라는 사람의 정체, 본성, 내가 하고 있는 이 사랑의 정체를 알 수 있습니다.

 

6절에 나오는, 뱀에게 속아 넘어가는 여자는 창2 후반에 나오는 여자와 다른 여자입니다. 저 창2 후반 본문은 두 번째 후손 이야기이지만, 여기는 세 번째 후손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더욱 안 좋게 변한, 자기 사랑에 더욱 기울어진 상태가 된 후손 이야기인데, 두 번째 후손만 되었어도 안 속았을 저런 속삭임에 이들은 그만 쉽게 넘어간 것입니다.

 

참고로 여기에 나오는 뱀은 인간의 감각 파트를 말합니다. 인간은 영과 육, 그러니까 영, 지혜, 지성, 이성, 지식 및 감각 등 여러 파트로 구성된 존재로서, 이 중 가장 낮은 파트인 몸에 속한 감각을 ‘’이라고 한 것입니다. 물론 천적 인간은 이 몸의 감각 또한 거듭났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몸의 감각이 더 이상 뱀이 아니지만 말입니다. 그러니까 영육이 온전히 거듭난 사람한테는 지옥이 더 이상 뭘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들이 바로 천적 인간이며, 일곱 번째 상태, 곧 안식일 상태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193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악 가운데 있음을 지각했는데요, 그들의 ‘눈이 밝아져’(eyes being opened)와 그들이‘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hearing the voice of Jehovah)(7, 8)라는 표현을 보면, 그들에게 아직 퍼셉션이 남아 있음과,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만들고(7), 부끄러워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을(8, 9)뿐 아니라 자신들이 저지른 짓을 시인하고 고백하는 모습(10-13)들을 볼 때, 아직 자연적 선(natural goodness)도 남아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다음은 절 별 속뜻입니다.

 

1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AC.194-197)

 

194

여기 ‘뱀’(serpent)은 인간이 신뢰하고 있는 감각 파트를 말합니다. 여기 ‘들짐승’(wild animal of the field)은 앞에서처럼 겉 사람의 모든 애정을, ‘여자’(woman)는 인간의 본성(man’s own)을 말하며, 뱀이 하고 있는 말,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Yea, hath God said, Ye shall not eat of every tree?)는 그들이 의심하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다루고 있는 주제는 태고교회의 세 번째 후손으로서 그들은 계시된 것들에 관하여 그것이 과연 그런지를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 볼 수 있어야만 믿기 시작했습니다. 본 절과 다음 절은 그들의 첫 번째 상태, 즉 의심의 상태에 대한 설명입니다.



195

태고인들은 인간의 모든 것을 짐승과 새에 비유하는 대신 실제로 그렇게 명명하였으며, 이런 식으로 말하는 그들의 스피킹은 홍수 후 고대교회에까지도 이어져 이후 선지자들한테까지 전해졌습니다. 사람 안의 감각적인 것을 그들은 ‘뱀’(serpents)이라고 했는데 그 이유는 뱀이 땅에 가까이 붙어 지내는 것처럼 감각적인 것들 역시 몸하고 그렇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신앙의 신비에 관한 감각적 증거에 기반을 둔 이성 활동, 즉 신앙의 신비를 감각을 가지고 이해하려는 일련의 이성적 활동을 ‘뱀의 독’(poison of a serpent)이라 하였고, 그런 짓을 하는 사람들을 ‘뱀’(serpents)이라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많은 걸 감각, 즉 보이는 걸 가지고 하기 때문에 이르기를 ‘뱀은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the serpent was more subtle than any wild animal of the field) 하는 것입니다. 이 보인다는 것은 땅에 속한(terrestrial) 거, 육적인(corporeal) 거, 일상적인(mundane) 거, 자연적인(natural) 거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무슨 주술에 가까운 행위의 결과, 그때 나타나는 어떤 설명할 수 없는 현상에 대해 무슨 학술이나 신학, 영성 세미나를 연다는 식의 이성적 활동들을 말합니다.

 

[2] 그리고 또 시편에 보면 이성(理性)놀이(reasonings)를 통해 사람을 유혹하는 자들에 대해 이르기를,

 

뱀 같이 그 혀를 날카롭게 하니 그 입술 아래에는 독사의 독이 있나이다 (140:3)

 

3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 4그들의 독은 뱀의 독 같으며 그들은 귀를 막은 귀머거리 독사 같으니 5술사의 홀리는 소리도 듣지 않고 능숙한 술객의 요술도 따르지 아니하는 독사로다 (58:3-5)

 

이성(理性)놀이, 이성(理性)질 같은 용어나 표현은 제가 만든 겁니다. 주님이 주신 이성을 주님을 위해 사용하는 순기능 대신 자기를 높이고 자랑하려는 역기능으로 사용하는 자들의 악한 의도를 비웃기 위한 용도로 말이지요.

 

현자(賢者)가 하는 말이나 현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조차 하지 않으려는 그런 캐릭터를 가진 사람들의 이성놀이, 이성질을 가리켜 여기서는 ‘뱀의 독’(poison of a serpent)이라 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고대인들 사이에서 ‘뱀이 귀를 막는다’(The serpent stoppeth the ear)는 말이 하나의 속담이 되었지요. 아모스입니다.

 

19마치 사람이 사자를 피하다가 곰을 만나거나 혹은 집에 들어가서 손을 벽에 대었다가 뱀에게 물림 같도다 20여호와의 날은 빛 없는 어둠이 아니며 빛남 없는 캄캄함이 아니냐 (5:19, 20)

 

‘손을 벽에 대는 것’(hand on the wall)은 자기가 힘의 근원이라는 것, 그리고 감각적인 것들을 신뢰한다는 의미이며, 여기에 나오는 실명(失明, the blindness)이 이런 태도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3] 예레미야입니다.

 

22애굽의 소리가 뱀의 소리 같으리니 이는 그들의 군대가 벌목하는 자 같이 도끼를 가지고 올 것임이라 23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이 황충보다 많아서 셀 수 없으므로 조사할 수 없는 그의 수풀을 찍을 것이라 24딸 애굽이 수치를 당하여 북쪽 백성의 손에 붙임을 당하리로다 (46:22-24)

 

‘애굽’(Egypt)은 신성한 것(Divine things), 주님께 속한 일을 감각적인 것과 기억-지식, 곧 세상에서 학습한 지식으로 헤아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 짓을 가리켜 ‘뱀의 소리’(voice of a serpent)라 하며, 그로 인해 야기된 실명(the blindness)을 ‘북쪽 백성’(people of the north)이라고 한 것입니다.

 

욥기입니다.

 

16그는 독사의 독을 빨며 뱀의 혀에 죽을 것이라 17그는 강 곧 꿀과 엉긴 젖이 흐르는 강을 보지 못할 것이요 (20:16, 17)

 

‘꿀과 엉긴 젖이 흐르는 강’(Rivers of honey and butter)은 영적 천적인 것들인데 이는 단지 이성적이기만 한 사람들은 볼 수 없는 것들입니다. 위 본문에서는 이성적이기만 한 것을 일컬어 ‘독사의 독’(poison of the asp), ‘뱀의 혀’(viper’s tongue)라고 합니다. 뱀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14, 15절에서 보시기 바랍니다.

 

 

196

고대에는 계시된 것들에서보다 감각적인 것들에서 더 확신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뱀’(serpents)이라고 했습니다. 오늘날은 사정이 더욱 안 좋은데요, 지금 사람들은 자기들이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없는 것은 무엇이든 안 믿을 뿐만 아니라 고대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과학 지식이라는 걸 가지고 더욱 자신들을 그런 불신 가운데 있게 하기 때문이며, 그 결과 스스로를 더욱더 깊이 눈먼 상태 가운데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저들이 스스로를 어떻게 눈멀게 하는지, 그 결과 나중에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게 하는지, 이 사람들은 천국에 관한 일들을 감각과 기억-지식, 그리고 철학에 관한 걸로 자신들의 결론을 내리며, 그리고 말씀에서 자주 ‘귀머거리 뱀’(deaf serpents)이요, ‘날아다니는 뱀’(flying serpents)으로 언급되는 사람들인데, 이 경우가 훨씬 더 치명적이지요, 이런 게 사람들에게 알려지도록 우리는 영에 대해 그들이 믿는 게 뭔지 한 가지 예를 들고자 합니다.

 

[2] 감각적인 사람, 즉 오직 감각 증거만을 믿는 사람은 영의 존재를 부인합니다. 그가 영을 볼 수 없기 때문인데요, ‘그건 아무것도 아닌 게, 내가 그걸 느낄 수 없으니까 당연한 거 아냐? 만약 내가 그걸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다면, 그땐 당연히 존재하는 거지. 그걸 내가 왜 모르겠어?’라고 말하면서 말이지요. 기억-지식의 사람, 곧 과학적 지식을 가지고 결론을 내리는 사람은 말하기를, ‘영이라는 게, 말하자면 눈앞에서 허공중에 사라지는 수증기나 열기, 혹은 그 밖의 무슨 과학적 실체가 아니면 영이라는 게 도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동물에게도 일종의 몸, 감각 및 이성과 유사한 뭔가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동물은 죽지만 인간의 영은 산다고들 하네요’ 이런 식으로 그들은 영의 존재를 부인합니다.

 

[3] 철학자들의 경우입니다. 인류의 대부분보다 훨씬 예리한 이들 철학자들도 영에 대해 말할 때는 결과적으로 자신들도 이해할 수 없는 말로 말하는데요, 이들은 서로 논쟁하기를, 물질이나 유기물, 혹은 그 밖의 것들에 관한 그 어떤 하나의 표현으로도 이 영을 설명할 수 없다고 하면서 다투기 때문이며, 그래서 이들은 영에 대해 머리를 쥐어짜 너무 추상화한 나머지 영에 대한 장황한 설명이라는 게 결국은 그냥 사라져 버리고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그중에서 좀 나은 사람은 영은 생각(thought)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생각에 대한 그들의 소위 이성적이라는 주장을 보면 생각에서 모든 실재(substantiality), 알맹이를 다 분리하는 것이었고, 그러다 보니 그들은 결국 몸이 끝나면 영도 사라져야 하는 결론에 도달하지요. 결국 감각에 속한, 기억-지식에 속한, 그리고 철학에 속한 걸 가지고 이성적 사고를 한다는 사람들은 모두 영의 존재를 부인하며, 영과 영적인 것들에 관하여 하는 모든 말을 전혀 믿지 않지요. 마음이 단순한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데요, 그들은 영이 존재하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대답하기를, 자기들은 그게 존재한다는 걸 안다고 해요. 주님 말씀하시기를, 자기들은 사후에도 살 것이라 하셨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그들은 자신들의 이성을 소멸시키는 대신 주님의 말씀으로 그것을 생생하게 하지요.



197

태고인들, 천적 인간들이었지요, 이런 태고인들 가운데서 ‘뱀’(serpent)은 세심함, 신중함(circumspection)을 의미했으며, 또한 감각 파트(sensuous part)를 의미했지요. 이를 통해 그들은 신중함을 훈련, 부상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었습니다. ‘뱀’(serpent)에 관한 이러한 의미는 제자들에게 하신 주님 말씀으로도 알 수 있는데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마10:16)

 

그런가 하면 또 광야에 세워진 ‘놋 뱀’(brazen serpent)을 통해서도 알 수 있지요. 놋 뱀은 주님의 감각 파트를 상징하는데 주님만이 홀로 천적 인간이시며, 홀로 모두를 돌보시고 그들의 필요를 공급하시는 분이시지요. 그래서 이 놋 뱀을 쳐다본 모두가 산 것입니다.

 

놋 뱀 에피소드는 아래 민수기 본문에 나옵니다.

 

4백성이 호르산에서 출발하여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려 하였다가 길로 말미암아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5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 6여호와께서 불 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7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말하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8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9모세가 놋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 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21:4-9)



2, 3

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AC.198-203)

 

198

‘동산 나무의 열매’(fruit of the tree of the garden)는 태고교회로부터 그들에게 계시, 계승된 선과 진리이며, ‘그들이 먹어서는 안 되는,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fruit of the tree which is in the midst of the garden, of which they were not to eat)는 주님께 속한 신앙의 선과 진리인데, 이는 그들이 자신들한테서 배워서는 안 되는, 즉 세상 학문이나 지식을 가지고 배워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만지지도 말라’(not to touch it)는 금지입니다. 그들 자신이나 감각, 기억-지식에 속한 걸 가지고 함부로 주님께 속한 신앙의 선과 진리 들여다보는 행위를 금하는 것이지요.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lest ye die)는 그랬다가는 신앙, 즉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지혜와 총명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199

‘그들이 먹을 수 있는 나무의 열매’(fruit of the tree of which they might eat)가 태고교회로부터 그들에게 계시, 계승된 선과 진리, 즉 신앙에 관한 지식을 의미한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로 분명한데요, 앞서 천적 인간, 곧 태고교회를 다루던 창2:16에서는 ‘동산의 나무’(tree of the garden)라 한 반면, 여기서는 ‘그들이 먹을 수 있는 동산 나무의 열매’(fruit of the tree of the garden of which they might eat)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2:16)

 

우리말 개역 개정에서는 위 창2:16 번역을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라 하여 원전에는 없는 ‘열매’를 첨가했습니다. 원전에는 ‘동산 각종 나무’인데요, ‘나무’는 퍼셉션(perception)을 의미한다는, 이런 속뜻을 알 길이 없었던 번역자들은 ‘나무를 먹는다고?’ 하면서 이 부분을 원전 그대로 번역하기가 굉장히 어색했을 것입니다.

 

위 창2:16본문의 ‘동산 나무’(tree of the garden)는 선하고 참된 것에 관한 퍼셉션이며, 이 선과 진리는 그 퍼셉션의 산물이기 때문에, 여기서 ‘열매’(fruit)라 하는 것입니다. 말씀에 나오는 ‘열매’(fruit)는 자주 이 선과 진리를 의미합니다.

 

태고교회의 첫 세대와 두 번째 후손 간, 그리고 두 번째와 세 번째 후손 간 등 이 세대 간 구분이 실제 역사로는 얼마나 될까요? 보통 아버지 세대와 아들 세대를 실제 역사로는 30년으로 봅니다만, 그러나 창5에 나오는 아담의 계보를 보면, 태고교회 후손들이 평균 8, 9백 년씩 살았던 걸 볼 때, 그 장구한 세월이 어느 정도인지 감이 잘 안 잡힙니다. 저 후손들의 이름은 사실은 당대를 풍미한(?) 교회의 이름, 교리의 이름이었기 때문이며, 저 숫자들 역시 어떤 아르카나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실제 지질학적 지구 역사는 45, 6억 년이라 한다는 점도 고려해야 해서이지요.



200

앞서 창2:9에서는, ‘동산 중앙에’(in the midst of the garden)있는 나무는 생명나무이지 지식의 나무가 아니라고 하더니 여기서는 ‘지식의 나무’(tree of knowledge)라 하는 이유는, 동산 ‘중앙’(midst)은 가장 내적인(the inmost), 가장 깊은 내면을 상징하기 때문인데 천적 인간, 즉 태고교회의 가장 깊은 내면은 이 ‘생명나무’(tree of lives), 곧 사랑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이었던 반면, 여기 이 사람, 곧 천적 영적 인간(a celestial spiritual man)이라고 하는, 혹은 그 후손이라고 하는 이 사람한테서는 신앙이 동산의 ‘중앙’, 즉 가장 깊은 내면이었기 때문입니다. 태곳적 사람들의 퀄리티(quality)를 아주 제대로 묘사하는 건 불가능한데 왜냐하면 오늘날은 그들에 대해서 알려진 게 전혀 없고, 그들의 지니어스(genius)는 지금까지 발견된 그 어떤 사람들보다도 정말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지니어스에 대한 다음과 같은 사실들, 곧 그들은 선을 통해 진리를 알았고 사랑을 통해 신앙이라는 게 뭔지를 알던 사람들이었다는, 이런 말씀을 드리면 조금은 이해하실 수 있을까요? 그러나 그 세대가 막을 내렸을 때 그다음에 일어난 세대는 완전히 다른 지니어스를 가졌는데요, 그들은 이전 세대처럼 선을 통해 진리를 알거나 사랑을 통해 신앙이라는 게 뭔지를 아는 대신, 선이 무엇인지를 진리를 가지고 습득하거나 신앙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사랑에 관한 걸 아는, 즉 선과 사랑을 지식으로 습득, 학습으로 아는 그런 세대였기 때문입니다. 그들 중 거의 대부분이 지식밖에는 거의 가진 게 없었습니다. 이것이 홍수 후 세상의 멸망을 막기 위해 생긴 변화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2:9)

 

 

201

이렇게 홍수 이전에 존재했던 태고인들의 이런 지니어스가 오늘날엔 발견되지도, 존재하지도 않는 이런 상황 속에서 이 본문에 들어있는 참된 의미, 곧 속뜻을 제대로 설명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다릅니다. 천국에서는 온전한 이해가 가능한데요, 천적이라고 하는 천사들과 천사적 영들(angelic spirits)은 홍수 전에 거듭난 태고인들과 같은(same)지니어스를 지닌 반면, 영적이라고 하는 천사들과 천사적 영들은 홍수 후 거듭난 사람들과 유사한(similar)지니어스를 지녔기 때문입니다. 비록 두 경우 모두 무한히 다양하지만 말입니다.

 

 

202

천적 인간이었던 태고교회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는 것’(eating of the tree of knowledge), 즉 신앙에 속한 걸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을 가지고 배우는 일을 삼가야 할 뿐 아니라, 그 나무를 만지는 것조차, 즉 신앙에 관한 걸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을 가지고 생각하는 것조차 허용될 수 없었던 그런 캐릭터였는데요, 안 그러면 그들은 천적 삶에서 영적 삶으로, 그리고 계속해서 아래로 가라앉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천적 천사들의 삶 또한 그런데요, 그들이 더욱 내적, 더욱 천적일수록 신앙이라고 이름하는 경험이나 영적이라고 하는 걸 약간 접해보는 수준의 경험조차 그들에게는 일절 불허됩니다. 이 신앙이라는 말을 남들을 통해 들을 경우, 그들에게는 신앙 대신 사랑의 퍼셉션이 있는데요, 이게 어떻게 다른 건지는 오직 그들만 알지요. 이렇게 무엇이든 신앙에 속한 것을 그들은 사랑과 체어리티로부터 기원, 시작합니다. 그들은 신앙에 관한 그 어떤 이성질(理性질, 이성을 가지고 말장난하는 거)도 정말 굉장히 못 견뎌 하며, 그와 관련된 그 어떤 기억-지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인데요,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사랑으로 퍼셉션, 곧 선하고 참된 것에 관한, 주님으로 말미암는 퍼셉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 퍼셉션으로 어떤 일이 과연 그런지 안 그런지를 즉시 압니다. 그런 까닭에 어떤 신앙에 관한 말을 듣게 되면 그들은 그저 단순히 그렇다, 아니다로 대답하는데요, 그들은 주님으로 말미암아 그걸 지각, 즉시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마태복음에서 주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의미, 이유입니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5:37)

 

이것이 그들로 하여금 지식의 나무 열매를 만지지 못하게 하셨다는, 즉 ‘너희는 만지지도 말라’ 하신 말씀의 의미, 속뜻입니다. 그들이 그걸 만지면, 그들은 악 가운데 있게 될, 즉 결과적으로 그들은 ‘죽게’(die) 될 것이기 때문이지요. 이런 특별한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천적 천사들은 다양한 주제에 관해 다른 천사들처럼 서로 대화합니다. 다만 천적 언어(天的, a celestial language)로 하지요. 이 언어는 사랑으로 되어 있고, 사랑에서 나오며, 영적 천사들의 언어보다 더욱 형용, 형언할 수 없는 언어입니다.

 

 

203

영적 천사들도 신앙에 관한 대화를 하는데요, 이들은 신앙에 관한 것들을 심지어 지성과 이성, 그리고 많이 배운 사람들의 언어로 확실히 보여 주지만, 그러나 그들은 신앙과 관련된 일들에 이런 걸로 무슨 자기들만의 결론을 내리는 짓은 절대로 안 합니다. 그런 짓을 하는 자는 악 가운데 있기 때문이지요. 이들은 또한 신앙에 관한 모든 진리의 퍼셉션을 주님으로부터 부여받는데요, 비록 천적 천사들의 것과 같은 그런 퍼셉션은 아닐지라도 말입니다. 영적 천사들의 퍼셉션은 일종의 양심(conscience) 같은 건데요, 이것은 주님으로 말미암아 생명력을 갖는, 마치 천적 퍼셉션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저 영적 퍼셉션일 뿐인, 그런 겁니다.

 

 

(쉬는 시간)

 

 

4, 5

4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AC.204-206)

 

204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eyes being opened by eating of the fruit of the tree)는 신앙에 관한 것을 감각과 지식, 곧 자기 자신, 그러니까 자기가 알고 있는 걸 기준 삼아 신앙에 관한 것을 헤아릴 경우, 분명히 말하지만, 오히려 신앙에 관한 게 잘못되었다 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as God, knowing good and evil)은 만일 그들이 그런 짓, 곧 스스로를 기준 삼아 그런 짓을 하면, 그들은 마치 자신이 하나님인 양 스스로를 인도하려 할 것이라는, 즉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는 대신, 오직 자기 힘으로만 살아가려 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205

모든 구절에는 교회의 어떤 특별한 상태나 상태의 변화가 들어 있습니다. 앞선 구절들에는 그들이 그렇게 기울어졌음에도 그들, 곧 그 당시 교회는 자신들의 상태가 주님 보시기에 불법이라는 걸 지각했다는 내용이 들어 있는 반면, 이 구절들에는 막 시작된 의심, 곧 자신들이 볼 때, 이들은 태고교회의 세 번째 후손들인데, 합법적이지가 않다(whether it might not be lawful for them, since they would thus see), 자신들의 감각과 세상에서 배운 걸로 봤을 때, 자신들이 그동안 선대로부터 들어온 것들, 곧 주님과 천국, 이 세상에 관한 이야기들, 교리들이 좀 안 맞는 것 같다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되면서 자신들의 눈이 열렸다는, (사실은 정반대로 오히려 더 눈이 멀어 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 우리가 너무 교회 중심으로, 교리 중심으로만 살아왔구나. 실제 세상 지식과 감각 경험은 전혀 다른데...’ 하는, 그리고 결국 이런 식의 자기 사랑, 이렇게 자기중심적인 태도가 깊어지면서, 그들은 ‘이 정도면 우리 스스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주님과 같아질 수 있지 않을까?’ 여기기 시작했다는 그런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이런 게 자기 사랑의 본질인데요, 이는 주님 따르는 건 꺼리고, 대신 혼자 힘으로 살아가는 걸 더 선호하며, 믿음 관련한 일들을 감각과 기억-지식으로 혼자 알아서 하는 그런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글 번역은 특별히 쉽지가 않아 여러 날 걸렸고, 이해를 돕기 위해 최대한 풀어 번역했습니다.

 

 

206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된 사람들, 그리고 자기를 사랑하고 동시에 세상 배움에 탁월한 사람들, 이 둘 중 누가 더 대단한 믿음을 가진 걸까요? 그러나 사실은 누가 더 눈이 먼 걸까요? 그들에게 단지 질문만 해도 알 수 있는 사실은, 그들은 영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기는 고사하고 심지어 알지도 못하며, 영적 천적 삶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정말이지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낯설어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영원한 삶을 인정하지 않는데요, 그들은 스스로를 사라질 짐승과도 같은 존재라 믿으며, 주님도 인정하지 않고 대신 오직 자신들과 자연만 숭배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 가운데 좀 신중하게 말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이르기를, 어떤 최고의 존재가 만물을 다스리지만, 자신들은 그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고 합니다. 그들이 감각 및 기억-지식과 관련된 일들을 가지고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들을 입증할 때 사용하는 원리들이 있는데요, 그들은 맘만 먹으면 온 우주를 앞에 놓고도 그럴 겁니다. 그들은 남에게 신(, gods)처럼, 또는 정말 지혜로운 사람처럼 여겨지기를 간절히 원하지만, 만약 그들의 본성 가운데 없는 게 뭔지 아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대답하기를, 그런 건 없다고, 다만 자신들의 본성 전부를 잃게 되면 자신들은 아무것도 아닌 게 될 거라는 대답들을 할 겁니다.

 

조금이라도 영의 존재를 시인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사후 자기 영의 상태를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여기서 이런 사람에게 맨 먼저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는, 다른 모든 빛나는 성취를 이루었어도 정작 그가 자기 영에 대하여 전혀 무지하며 관심조차 없고, 그저 철저히 세속적이며 물질적이기만 한다면, 이 사람에겐 가장 시급한 질문이 바로 이 영, 다른 말로는 그의 본성과 관련된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본성은 타고난 자연 상태로는 악 그 자체이기 때문에, 얼른 주님의 생명에 접붙임을 받아 그 안에 주님의 생명이 흘러들어 새로운 상태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주님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게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으면, 그런 건 일종의 환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양심이라는 걸 아느냐는 질문에는, 그건 그저 상상 속 산물로서, 천민들(賤民, the vulgar)을 통제하는 방법으로 써먹을 수 있는 거라고 할 겁니다. 퍼셉션(perception)이 무엇인지는 아느냐는 질문에는, 그들은 씨익 비웃으며, 그런 건 광적인 쓰레기, 곧 종교 마니아들 간 사용하는 일종의 무슨 싸인 같은 거라고 할 겁니다.

 

스베덴보리 시절인 1750년대 유럽의 영적 분위기가 이랬나 봅니다. 이 하나하나의 사례가 모두 스베덴보리가 직접 겪었던 사례이지 싶은데요, 오늘날 한국 사회라고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개신교를 비롯, 거의 모든 기독교가 외적(外的, external) 사고, 즉 ‘겉의 사람’이 되었기 때문인데, 말로는 ‘영성, 영성’ 하지만 그 사고의 뿌리는 ‘’에 있습니다. 내적(內的, internal) 사고, 즉 ‘’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으며, 말해도 거의 이해를 못 합니다.

 

이런 게 그들의 지혜이며, 이런 게 그들이 말하는, 소위 ‘눈이 밝아지는 것’(open eyes)입니다. 이런 게 그들이 말하는 ‘하나님’(gods)입니다. 이런 원리들, 그들 생각에는 대낮보다 더 밝은 원리들인데, 이런 원리들을 가지고 그들은 모든 것의 출발점 삼으며, 이런 식으로 그들은 계속해서 신앙의 신비들에 대한 이성질(理性질)을 하는데요, 그 결과는 과연 어둠의 깊은 심연밖에 뭐가 더 있을까요? 무엇보다도 이런 것이 바로 세상을 꾀는 ‘뱀’(serpents)인 것입니다만, 그러나 태고교회의 후손은 아직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되는 건 본 장 14절로 19절에서 다루게 됩니다.

 

 

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man [vir])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AC.207-210)

 

207

‘먹음직도 하고’(Good for food)는 탐욕(cupidity)을, ‘보암직도 하고’(pleasant to the eyes)는 환상(fantasy)을,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desirable to give intelligence)은 쾌락(pleasure)을 각각 의미합니다. 이것들은 다 본성(the own), 곧 ‘여자’(woman)에게 속한 것들이며, ‘그도 먹은지라’(husband eating)는 이성의 동의(the consent of the rational)를 의미합니다. (AC.265)

 

즉, 이 세 가지, 탐욕, 환상 및 쾌락은 인간의 본성, 자아의 속성들이라는 말입니다.

 

아래는 265번 글이고, 그 아래는 158번 글입니다.

 

‘남편’(husband or man)이 합리적, 이성적 능력(the rational capacity)을 의미한다는 것이 본 장인 36절에 보면 있는데요, 거기에 보면, ‘여자가 그 열매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즉 그도 동의했음을 의미합니다. 같은 내용이 158번 글, 사람에 관한 내용을 보아도 분명한데요, 거기 보면 사람은 지혜와 지성(understanding)을 가진 존재인데요, 하지만 여기 나오는 ‘사람’(man)은 이성적 사고를 할 수 있는 능력(the ability to reason)에 머무를 뿐입니다. 지식의 나무, 곧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음으로써 지혜와 지성이 파괴되었고, 그 결과 더 이상 아무것도 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합리적, 이성적 능력은 지적 이해(an intelligent understanding)를 모방하는 것, 혹은 그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AC.265)

 

사람(man, 아담)이 내적 인간, 같은 말이지만, 지성과 지혜의 사람을 상징한다는 것은 이사야를 보면 분명합니다.

 

내가 본즉 한 사람(vir)도 없으며 내가 물어도 그들 가운데에 한 말도 대답할 조언자가 없도다 (41:28)

 

지혜와 지성을 가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뜻입니다. (AC.158)

 

위 본문의 ‘사람’은 라틴어로 ‘비르(vir)입니다. 라틴어에 ‘사람’이라는 뜻의 ‘호모(homo)라는 말이 따로 있지만, ‘호모’에 비해 ‘비르’는 지혜와 지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예레미야에도 보면은,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 (5:1)

 

여기 ‘정의를 행하는 자’는 지혜로운 사람을, ‘진리를 구하는 자’는 지성인을 각각 의미합니다.



208

태고교회의 네 번째 후손 이야기인데요, 이들은 자기 사랑(self-love [amore proprio])에 빠져 유혹에 넘어갔고, 비록 계시라 할지라도 감각과 기억-지식으로 확인이 안 되면 계시 믿기를 언짢아하고 싫어했습니다.

 

세상에서 경험하고 학습한 지식과 주님의 계시가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면, 후자, 곧 주님의 계시 믿기를 꺼렸다, 내켜 하지 않았다는 말인데요, 이처럼 태고교회도 그 후손으로 내려갈수록 점점 더 주님 사랑의 반대인 자기 사랑으로 경도되어 가는 걸 볼 수 있습니다.

 

 

209

여기 사용된,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the tree was good for food, pleasant to the eyes, and desirable for giving intelligence)라는 표현은 저 태고 때 살던 사람들의 지니어스(genius)에 맞춘 표현인데, 특별히 의지(the will)와 관련해서입니다. 그들의 악이 콸콸 흘러나오기 시작한 게 바로 이 의지에서부터였기 때문입니다. 말씀에서 홍수 후를 살았던 사람들이 나오는 데를 보면, 위 표현들은 의지보다는 이해(the understanding)와 관련되어 사용되고 있는데요, 이는 태고인들은 선에서 비롯된 진리(truth from good)를 가지고 있었지만, 홍수 후를 살았던 사람들은 진리에서 비롯된 선(good from truth)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홍수 전 사람들은 그 DNA에 선을 타고났지만, 홍수 후 사람들은 진리에 대한 학습을 통해서만 선을 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210

인간의 본성(man’s own)이라는 걸 이렇게도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인간 본성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그리고 주님이나 말씀을 믿는 대신 자기 자신을 믿는, 끝으로 감각과 기억-지식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 즉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없거나 세상 경험과 배움에 비춰볼 때 도저히 말도 안 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는, 이 세 가지 태도로부터 샘처럼 솟아나는 모든 악과 거짓입니다. 이런 식으로 사람들은 그저 악과 거짓이 되며, 그 결과 모든 걸 반대로 봅니다. 악한 걸 선으로 보며 선한 걸 악으로 보고, 거짓된 걸 참으로 보며 참된 걸 거짓으로 봅니다. 실제로 존재하는 걸 없다 하고, 없는 걸 그들은 모든 것이라 하지요. 증오를 사랑이라 어두움을 빛이라 죽음을 삶이라 하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인데요, 말씀에서는 이런 사람들을 일컬어 ‘다리를 저는 사람들’(lame), ‘눈먼 사람들’(blind)이라고 합니다. 이런 게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 자체로 지옥이요, 저주받은 것이지요.

 

 

이상으로 창세기 3장 첫 번째 단락인 ‘태고교회의 세 번째, 네 번째 후손 이야기(3:1-13)를 오늘은 그 전반부인 1절로 6절까지 번역, 역시 설명을 곁들이며 함께했습니다.

 

지난주부터 설교 중간에 ‘쉬는 시간’을 마련, 예배와 세미나를 믹스한 듯한 새로운 형태의 주석 설교를 시도 중에 있습니다. 보통 매주 설교 원고가 A4 20장 이상이나 되어 부득이한 상황도 함께 고려한 것인데요, 이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주석 설교의 특성상 어떤 하나의 형태로 자리 잡기까지는 일정 기간 다양한 시도가 시행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모두들 깊은 이해와 사랑으로 함께하여 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전에 드린 말씀 한 번 더 드리면, 창세기 4장만 되어도 그 진도 따라가기가 정말 쉽지 않을 터이니 아직 3장 하고 있을 때 부지런히 복습, 이 내용을 나름 충분히 이해들을 하셔야 합니다. 창1, 2, 3에 대한 이해가 이후 모든 내용 전개에 기초 중 기초가 되기 때문입니다. 지난날 우리의 학창 시절, 대부분의 과목들이 그 앞부분을 얼마나 이해하고 탄탄하게 자기 걸로 소화했느냐에 따라 쭈욱 끝까지 완주하느냐, 아니면 얼마 못 가 그만 포기하느냐 하던 것과 같습니다. 저는 이 주석 설교를 최장 10년 잡고 있습니다. 요즘 표현으로 제 영혼을 갈아 넣는 중이오니 다들 조금만 진지하게 저의 권면에 귀 기울이셨으면 좋겠습니다. 분명 측량할 수 없는 주님의 크신 축복 있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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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 맨 앞으로)

 

설교

2025-10-19(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10-19(D1)-주일예배(14, 창3,1-6, AC.194-210), ‘태고교회 세 번째, 네 번째 후손 이야기’.pdf
0.61MB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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