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덴동산, 네 강’의 속뜻 (2025/9/21)


1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4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7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8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9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10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13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을 둘렀고 14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15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16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2:1-17)

창세기 속뜻 강해, 오늘은 2장 세 번째 시간으로, 10절로 14절, ‘에덴동산, 네 강’의 속뜻입니다.

오늘부터는 각 단락의 절 별 개요도 다루겠습니다. 이는 마치 지도와 같아 이를 이용하면 그 구절과 단락의 전체 속뜻을 쉽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인데, 이를 위해 지난주부터 시작한 2장 첫 단락(1-17) 전체 절 별 개요를 먼저 살피고 오늘 본문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이를 위해 오늘은 본문을 전체 본문으로 실었습니다.

시작합니다.

 

73

죽은 상태에서 사람은 그동안 영적(靈的, spiritual) 상태가 되어 왔고, 이 상태에서 이번에는 천적(天的, celestial) 상태가 되는데, 이것이 이제부터 다루는 내용입니다. (1)

74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이며, 이날 주님은 안식하십니다. (2, 3)

75

안개로 축축해진 땅에서 나는 ‘초목’(the shrub)과 ‘채소’(the herb)는 그의 지식과 그의 합리성(rationality), 곧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5, 6)

 

76

그의 생명, 곧 천적 인간의 생명을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로 표현, 표상하고 있습니다. (7)

 

77

그다음, ‘동방 에덴동산’은 그의 지성(intelligence)을, ‘보기에 아름다운 나무’는 진리에 관한 퍼셉션(perceptions)을, ‘먹기에 좋은 나무’는 선에 관한 퍼셉션을 말합니다. ‘생명나무’(the tree of lives)는 사랑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the tree of knowledge), 곧 지식의 나무는 신앙(faith)을 의미합니다. (8, 9)

 

78

‘동산을 적시는 강’은 지혜(wisdom)를 의미합니다. 거기 네 개의 강이 있었는데, 그 첫 번째는 선과 진리, 두 번째는 선과 진리, 즉 사랑과 신앙에 관한 모든 지식입니다. 이 둘은 속 사람에게 속합니다. 세 번째는 이성(reason), 네 번째는 기억-지식인데, 이 둘은 겉 사람에게 속합니다. 모든 것은 지혜로 비롯되며, 지혜는 주님 사랑, 주님 신앙에서 비롯됩니다. (10-14)

 

79

천적 인간(天的, the celestial man)은 그런 일종의 동산입니다. 이 사람이 동산 안 모든 것을 즐기는 것은 허락되었으나 자기 것으로 소유하는 건 금하셨습니다. 이 동산은 그 소유권이 주님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15)

 

80

그는 또한 주님의 허락으로, 주님이 주시는 모든 퍼셉션을 가지고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을 습득합니다. 그러나 그가 자신과 세상의 것을 가지고 그러거나, 감각과 기억-지식을 가지고 신앙의 신비들을 탐구하거나 하면 절대 안 됩니다. 그런 짓을 하면 그의 천적 본성이 죽음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16, 17)


어떻게 좀 도움이 되십니까? 항상 숲의 나무 하나하나와 숲 전체를 함께 보아야 중간에 길을 잃지 않고 끝까지 갈 수 있습니다.

그럼 오늘 본문입니다.


10절, 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107

‘강이 에덴에서’(a river out of Eden)는 사랑에서 나오는, 즉 사랑에서 생겨나는 지혜를 말합니다. ‘에덴’(Eden)은 사랑이기 때문이지요. ‘동산을 적시고’는 지성이나 이해하는 재능 부여를,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는 이어지는 내용처럼 네 강을 가지고 지성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108

태고인들(太古人, the most ancient people)은 사람을 일종의 ‘동산’(a garden)에 비유하면서 또한 지혜에도 비유했습니다. 그리고 지혜에 관계된 것들은 ‘강’(rivers)에 비유했지요. 그들은 단순히 비유만 한 게 아니라 실제로도 그렇게 불렀는데, 그것은 그런 언어생활이 그들의 일상이었기 때문입니다. 후대의 선지자들도 그랬습니다. 선지자들도 종종 그렇게 비유했고 그렇게 불렀습니다. 이사야를 보면,

10주린 자에게 네 심정이 동하며 괴로워하는 자의 심정을 만족하게 하면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떠올라 네 어둠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 11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58:10, 11)

신앙과 사랑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다루면서 말이지요...

※ 지면 관계상 다른 예들은 첨부하는 주석 원본을 참고하세요.

...이들 본문에서 분명한 것은, 태고인들이 사람이나 사람의 일들을 하나의 ‘동산’에 비유할 때 그들은 ‘물들’과 ‘강들’이라는 표현을 보탰다는 사실입니다. 이를 통해 사람이 적셔질 수 있도록, 그리고 이들 물들과 강들을 통해 사람을 성장케 하는 것들을 의미하도록 말입니다.

 

109

비록 지혜와 지성이, 보이는 건 사람한테서지만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처럼 이들은 오직 주님에게 속한 것이라는 사실을 에스겔에서는 비슷한 표상으로 분명히 선언하고 있습니다.

1그가 나를 데리고 성전 문에 이르시니 성전의 앞면이 동쪽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 동쪽으로 흐르다가 성전 오른쪽 제단 남쪽으로 흘러내리더라, 8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 물이 동쪽으로 향하여 흘러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에 이르리니 이 흘러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되살아나리라 9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되살아나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12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과실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열매가 끊이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열매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를 통하여 나옴이라 그 열매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재료가 되리라 (47:1, 8-9, 12)

여기서 주님은 ‘동’(, the east)으로, 그리고 물과 강물이 발원하는 ‘성소’(the sanctuary)로 상징되십니다. 계시록에서도 그렇습니다.

1또 그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2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22:1-2)


11, 12절, 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110

‘첫 번째’ 강, 즉 ‘비손’(Pishon)은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 지성, 즉 사랑 기반 신앙과 같이 가는, 어울리는 지성을, ‘하윌라 땅’(the land of Havilah)은 마음을, ‘금’은 선을, ‘베델리엄과 호마노’(bdellium and the onyx stone)는 진리를 의미합니다. ‘금’이 두 번 언급되는 이유는, 금이 사랑의 선, 곧 사랑하고 같이 가는 선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선, 곧 사랑 기반 신앙과 같이 가는 선을 의미하기 때문이며, ‘베델리엄과 호마노’가 언급되는 이유는, 하나는 사랑의 진리, 곧 사랑에 속한 진리를, 다른 하나는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진리, 곧 사랑 기반 신앙에 속한 진리를 각각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이 천적 인간입니다.

 

111

하지만 이런 내용은 속뜻(the internal sense)으로 있기 때문에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오늘날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 그러니까 사랑에 기반한 신앙이라는 게 뭔지, 또 그런 신앙에서 나오는 지혜라든지 지성 같은 게 뭔지를 아는 사람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겉 사람들이 아는 거라곤 거의 기억-지식, 그러니까 세속적 팩트(fact)밖에 없기 때문인데, 그들은 이런 걸 가지고 지성이니, 지혜니, 신앙이니들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심지어 사랑이 뭔지도 모릅니다. 많은 사람이 의지와 이해, 즉 지적 능력이 무엇이며, 그리고 이 둘이 한마음을 이루기 위해 결합한다는 게 뭔지를 모릅니다. 비록 실상이 이렇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 모든 것 하나하나가 다 뚜렷하며, 실제로 저마다 고유한 아이덴티티를 갖습니다. 주님은 사랑과 신앙의 그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차이점만큼이나 이 온 천국을 마치 수학 좌표처럼 가장 명료하고, 정밀, 정교하게 지으셨습니다.

※ 우리가 모른다고 해서, 우리가 희미하다고 해서 주님 지으신 이 피조 세계도 덩달아 흐릿한 게 아닙니다. 우리의 내적 시야가 열리지 않아 못 보는 것일 뿐, 실제로 주님 지으신 이 모든 세계는 더할 수 없이 세밀하고 명료합니다. 과연 그런지는 자연계는 초 고배율 현미경과 천체망원경으로, 영계는 주님이 사모하는 자에게 점점 허락하시는 내적 시야로 보시면 됩니다. 가령, 전자의 경우, 전에는 천체망원경 기술이 요즘과 같지 않아 저 우주 흐릿한 뭔가가 그저 무슨 큰 별인가 보다 했지만, 최근 제임스웹이라는 우주 망원경을 통해 보니 세상에! 그게 수천 개의 은하가 모여있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것입니다. 주님의 세계는 우리가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닌, 상상할 수 없는 세계인 것입니다!

 

112

모든 지혜는 사랑에서, 그러니까 주님한테서만 나온다는 사실, 모든 지성은 신앙에서, 역시 주님한테서만 나온다는 사실, 또 모든 선은 사랑에서, 마찬가지로 주님한테서만 나오며, 모든 진리는 신앙에서, 이 역시 주님한테서만 나온다는 사실 등, 이런 모든 사실이 더욱더 알려지게 하세요. 사랑과 신앙에서 나온 게 아닌, 그러니까 주님한테서 나온 게 아닌데도 버젓이 사랑이다, 신앙이다 하는 것들이 있는데, 이런 것들은 다 가짜입니다.

 

113

말씀에서 지혜나 사랑의 선을 표상하는 데 있어 ‘금’(gold)보다 더 일반적인 것은 없습니다. 법궤, 성전, 금상, 촛대, 대접들 및 아론의 예복 등 이 모든 것에 있는 금은 지혜나 사랑의 선을 표상했습니다...

※ 역시 지면 관계상 내용을 줄입니다.

1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11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2:1, 11)

여기 ‘황금’(gold)은 선을, ‘유향과 몰약’(frankincense and myrrh)은 사랑과 신앙에서 나오는, 정말 그레이트한 것을, 그래서 이르기를 ‘여호와의 찬송’(the praises of Jehovah)이라 하는 것들을 의미합니다...

 

114

신앙의 진리는 말씀에서 ‘보석’(precious stones)으로 표상되고 있습니다. 아론의 에봇 판결 흉패(the breastplate of judgment)와 두 어깨 위 보석들처럼 말입니다. 판결 흉패에서 ‘금 실과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 실’(gold, blue, bright crimson, scarlet double-dyed, and fine-twined linen)은 사랑에 속한 것들을, ‘보석’은 그 사랑에서 나오는, 그 사랑에 기반한 신앙에 속한 것들을 표상합니다. 금테에 물릴 호마노 둘, 에봇 두 어깨 위 두 ‘기념 보석’(the two stones of memorial)처럼 말이지요.

9호마노 두 개를 가져다가 그 위에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을 새기되 10그들의 나이대로 여섯 이름을 한 보석에, 나머지 여섯 이름은 다른 보석에 새기라 11보석을 새기는 자가 도장에 새김 같이 너는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을 그 두 보석에 새겨 금 테에 물리고 12그 두 보석을 에봇의 두 어깨받이에 붙여 이스라엘 아들들의 기념 보석을 삼되 아론이 여호와 앞에서 그들의 이름을 그 두 어깨에 메워서 기념이 되게 할지며 13너는 금으로 테를 만들고 14순금으로 노끈처럼 두 사슬을 땋고 그 땋은 사슬을 그 테에 달지니라 15너는 판결 흉패를 에봇 짜는 방법으로 금 실과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 실로 정교하게 짜서 만들되 16길이와 너비가 한 뼘씩 두 겹으로 네모 반듯하게 하고 17그것에 네 줄로 보석을 물리되 첫 줄은 홍보석 황옥 녹주옥이요 18둘째 줄은 석류석 남보석 홍마노요 19셋째 줄은 호박 백마노 자수정이요 20넷째 줄은 녹보석 호마노 벽옥으로 다 금 테에 물릴지니 21이 보석들은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대로 열둘이라 보석마다 열두 지파의 한 이름씩 도장을 새기는 법으로 새기고 22순금으로 노끈처럼 땋은 사슬을 흉패 위에 붙이고 (28:9-22) 

...이 본문은 보석들이 아닌, 신앙의 천적 영적인 것들을 표상하는 말씀임은 누가 보더라도 확실합니다. 맞습니다! 보석 하나하나는 신앙의 어떤 에센셜을 표상하고 있습니다.

 

115

태곳적 사람들은 ‘땅’(lands)을 말할 때, ‘땅’이 무엇을 표상하는지를 이해했습니다. 마치 오늘날 가나안 땅과 시온산은 천국을 상징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장소들이 언급될 때마다 무슨 물리적 장소가 아닌, 오직 그것이 상징하는 것, 곧 천국을 떠올리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런 게 본문 ‘하윌라 땅’(the land of Havilah)에도 해당합니다. 이 하윌라는 창세기 2518절에도 다시 나오는데요, 이 구절은 이스마엘 자손들 이야기인데, 거기서 그들은 ‘하윌라에서부터 앗수르로 통하는 애굽 앞 술까지 거주하였더라’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 자손들은 하윌라에서부터 앗수르로 통하는 애굽 앞 술까지 이르러 그 모든 형제의 맞은편에 거주하였더라 (25:18)

천국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런 말씀들에서 나오는 지성과 지성에서 흘러나오는 것들만 지각합니다. 그래서 ‘비손이라는 강이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에 나오는 ‘두르다’(to compass) 역시 그들은 흘러들어오는 걸로 지각합니다. 출애굽기 28장 11절에 나오는, 금테로 물린 아론의 에봇 두 어깨의 호마노 역시 그들은 사랑의 선이 신앙의 진리 안으로 흘러 들어가야 하는 것으로 지각합니다.

보석을 새기는 자가 도장에 새김 같이 너는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을 그 두 보석에 새겨 금 테에 물리고 (28:11)

다른 많은 경우도 그렇습니다.


13절,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을 둘렀고

 

116

‘기혼’(Gihon)이라 하는 ‘두 번째 강’은 선과 진리, 혹은 사랑과 신앙에 속한 모든 지식을, ‘구스 땅’(the land of Cush)은 마음이나 역량(力量, faculty), 곧 멘탈 능력을 의미합니다. 마음은 의지와 이해, 곧 지적 능력(intellect)으로 구성됩니다. 첫 번째 강에 대해 말한 것이 의지에 관한 거라면, 이 두 번째 강은 이해, 곧 지적 능력에 관한 것으로,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이 바로 여기에 속합니다.

 

117

게다가 ‘구스 땅’, 즉 이디오피아는 금, 보석, 그리고 향신료들로 풍부했는데, 이들은 앞서 말씀드린 대로, 선, 진리,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정말 그레이트한 것들, 가령 사랑과 신앙 관련 지식 같은 그런 걸 의미합니다...

...이들 본문은 그 앞뒤 이어지는 연결 구절들을 보면 명백한 것처럼 신앙의 천적인 것들을 의미합니다. 스바의 여왕에 의해서도 유사한 것들이 의미되었는데, 그녀는 솔로몬을 찾아와 어려운 질문들을 하면서 그에게 향신료, 금, 그리고 보석들을 주었습니다.

1스바의 여왕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미암은 솔로몬의 명성을 듣고 와서 어려운 문제로 그를 시험하고자 하여 2예루살렘에 이르니 수행하는 자가 심히 많고 향품과 심히 많은 금과 보석을 낙타에 실었더라 그가 솔로몬에게 나아와 자기 마음에 있는 것을 다 말하매 (왕상10:1-2) 

선지서 뿐만 아니라 말씀의 역사 파트에 들어있는 모든 것이 아르카나를 의미, 표상 및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 ‘말씀의 역사 파트’란 말씀을 분류할 때 흔히 역사서로 분류하는 말씀들, 그러니까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서, 열왕기서를 말합니다. 신학교에서는 이 외에도 룻기, 역대서,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도 포함하지만, 스베덴보리에 의하면, 이들 성경은 비록 성경에 포함은 되었어도 ‘말씀’은 아니므로 저 역시 제외하였습니다. 참고로, ‘말씀’이란, 천사들이 읽을 수 있는 아르카나가 들어있어야 ‘말씀’입니다. 저 성경들은 안타깝게도 아르카나가 들어있지 않고, 그래서 천사들이 읽을 수 없어서 ‘말씀’이 아닙니다. 아르카나가 없는 성경을 천사들이 읽고자 들여다보면 그냥 까맣게만 보인다고 합니다. 아르카나가 없는 성경들은 그러나 사람들을 위해서는 좋은 글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글들이 아르카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성경 확정 작업을 지난 수천 년 동안 해올 때 성경에 포함되는 걸 허락하신 것 같습니다. 참고로, ‘아르카나(arcana, 라틴, 복수, 단수는 arcanum, 秘義, 숨겨진 비밀, 비밀스런 뜻, secrets)는 주님이 직접 하신 말씀에만 들어있습니다.


14절,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118

‘힛데겔 강’(the river Hiddekel)은 이성(理性, reason), 즉 이성에 속한 명민함, 통찰력(the clearsightedness of reason), 명석함입니다. ‘앗수르’(Asshur)는 합리적 마인드(the rational mind), 곧 그런 이성을 발휘하는 마음입니다. ‘앗수르 동쪽으로 흐르는 강’의 의미는, 이 능력이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을 통해 이 마인드 안으로, 즉 겉 사람에게 속한 그 안으로 흐른다는 것입니다. ‘프라’(Phrath), 즉 ‘유브라데’(Euphrates)는 기억-지식, 곧 팩트에 입각한 지식인데, 이는 종단(終端, the ultimate)이나 경계(boundary), 곧 마음의 최종 경계를 말합니다.

※ 그러니까 지금 천적 인간에게 있어 그 마음의 네 가지 영역, 곧 지혜, 지성, 이성 및 지식을 각각 이렇게 비손, 기혼, 힛데겔 및 유브라데라는 네 강으로 표상하고 있는 것입니다.

 

119

‘앗수르’가 합리적 마인드, 즉 인간의 합리적인 면,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능력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선지서들, 가령...

...이것은 이사야에서 훨씬 더 명료합니다.

23그날에 애굽에서 앗수르로 통하는 대로가 있어 앗수르 사람은 애굽으로 가겠고 애굽 사람은 앗수르로 갈 것이며 애굽 사람이 앗수르 사람과 함께 경배하리라 24그날에 이스라엘이 애굽 및 앗수르와 더불어 셋이 세계 중에 복이 되리니 25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복 주시며 이르시되 내 백성 애굽이여, 내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 나의 기업 이스라엘이여, 복이 있을지어다 하실 것임이라 (19:23-25)

여기와 여러 다른 구절에서, ‘애굽’(Egypt)은 기억-지식, 곧 팩트 기반 정보를, ‘앗수르’는 이성, 곧 이성적 능력을, ‘이스라엘’은 지성, 곧 이해하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120

‘애굽’ 및 ‘유브라데’는 기억-지식 및 이들 지식이 시작되는 감각적인 것들(the sensuous things), 곧 팩트 기반 세속 지식과 이 세속 지식이 기반을 두는 감각적 인상을 말합니다.

※ 그러니까 인간의 오감에 깊은 인상을 주는 그런 것들만 팩트로 받아들이는 지식을 말합니다.

이런 사실은 선지서들을 보면 분명합니다...

...예레미야에

네가 시홀의 물을 마시려고 애굽으로 가는 길에 있음은 어찌 됨이며 또 네가 그 강물을 마시려고 앗수르로 가는 길에 있음은 어찌 됨이냐 (2:18)

여기 ‘애굽’과 ‘유브라데’는 같이 기억-지식, 곧 팩트를, ‘앗수르’는 거기서 나오는 합리화(reasonings), 곧 그런 걸로 건축되는 합리화를 말합니다.

시편에

8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민족들을 쫓아내시고 그것을 심으셨나이다11그 가지가 바다까지 뻗고 넝쿨이 강까지 미쳤거늘 (80:8, 11)

여기 ‘유브라데 강’은 감각적인 것과 기억에 속한 것, 곧 감각적이고 팩트에 기반한 정보를 말합니다. 기억 지식이 영적 천적 인간의 지성과 지혜의 바깥쪽 경계인 것과 같이 유브라데는 이스라엘 영토의 앗수르 방향 경계였기 때문입니다.

※ 내세에 들면, 즉 우리 영이 몸에서 들리면, 우리가 그동안 추상적으로만 생각하던 추상 개념들을 직접 영의 눈으로 볼 수 있게 되는데 가령 선, 진리, 사랑, 신앙, 의지, 이해, 지혜, 지성, 지식 및 감각 등 수많은 추상 개념들을 이제는 생생하게 마치 영상처럼 볼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속 사람, 곧 내적 존재가 되었으므로 내적 시야가 열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치 육안으로 보듯 저렇게 명료하게 진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들은 말씀 또한 같은 걸 말합니다.

그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더불어 언약을 세워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15:18)

위 두 경계는 같은 걸 말합니다.

 

121

이 강들을 통해서 천적 질서의 본성, 즉 생명에 속한 것들의 일 진행 방법을 분명히 알 수 있는데요, 즉 ‘동’(, East)이신 주님한테서(from) 출발, 주님으로부터(from) 지혜가, 지혜를 통해서(through) 지성이, 지성을 통해서(through) 이성, 그리고 그렇게 이성을 가지고(by means of) 기억 지식이 생생해진다는 것입니다.

※ 즉, ‘기억-지식’이라 하는 세상 지식도 이 천적 질서 안에 있으면, 주님의 생명으로 생생해진다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돈 그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니요, 다만 그 쓰임새, 용도에 달려 있듯 이 세상, 세속 지식도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생명의 순서이며 이런 사람들이 천적 인간들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의 장로들로 천적 인간들을 표상하였기에 그들을 일컬어 ‘지혜와 지식이 있는 인정받는 자들’(wise, intelligent, and knowing)(1:13, 15)이라 한 것입니다.

13너희의 각 지파에서 지혜와 지식이 있는 인정 받는 자들을 택하라 내가 그들을 세워 너희 수령을 삼으리라 한즉15내가 너희 지파의 수령으로 지혜가 있고 인정 받는 자들을 취하여 너희의 수령을 삼되 곧 각 지파를 따라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과 조장을 삼고 (1:13, 15)

그래서 법궤를 짠 브살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1브살렐과 오홀리압과 및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 곧 여호와께서 지혜와 총명을 부으사 성소에 쓸 모든 일을 할 줄 알게 하신 자들은 모두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할 것이니라 2모세가 브살렐과 오홀리압과 및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 곧 그 마음에 여호와께로부터 지혜를 얻고 와서 그 일을 하려고 마음에 원하는 모든 자를 부르매 (36:1-2)


이상으로 창세기 2장 세 번째 시간인 ‘에덴동산, 네 강’ 본문(2:10-14)을 번역, 역시 설명을 곁들여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본문 및 이 부분 개요를 한 번 더 읽고 마치겠습니다.

10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13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을 둘렀고 14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2:10-14)

 

121

‘동산을 적시는 강’은 지혜(wisdom)를 의미합니다. 거기 네 개의 강이 있었는데, 그 첫 번째는 선과 진리, 두 번째는 선과 진리, 즉 사랑과 신앙에 관한 모든 지식입니다. 이 둘은 속 사람에게 속합니다. 세 번째는 이성(reason), 네 번째는 기억-지식인데, 이 둘은 겉 사람에게 속합니다. 모든 것은 지혜로 비롯되며, 지혜는 주님 사랑, 주님 신앙에서 비롯됩니다. (10-14)


여러 번 복습하시면서 가능하면 본문도 줄줄 외우시기를 바랍니다.



설교
2025-09-21(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09-21(D1)-주일예배(2616, 창2,10-14, AC.107-121), ‘에덴동산, 네 강’의 속뜻.pdf
0.53MB
창2,10-14, AC.107-121.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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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5/9/14, 창2:4-9),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의 속뜻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의 속뜻 4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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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소와 푸른 풀(1:29) (2025/9/20)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1:29)

 

전투가 진행되는 동안, 선하고 진실한 모든 것, 즉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에 관한 거라면 뭐든지 - 오직 이런 것들만 선하고 진실한데요, 그것은 그 안에 영생이 있기 때문입니다 - 아주아주 극도로 증오하는 악한 영들은 사람에게 양식으로 ‘채소와 푸른 풀’과 같은 것 외에는 아무 것도 남겨주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과 달리 주님은 그에게 ‘씨 맺는 채소’, ‘열매 맺는 나무’와 같은 양식도 주시는데요, 이는 기쁨, 즐거움과 함께 더할 나위 없는 고요와 평화의 상태이며, 주님은 이 양식을 간격을 두고 사람에게 주십니다. (AC.59)

 

※ 여기서 우리는 악한 영들의 정체와 그들이 주는 달콤한 것의 그 숨은 본질을 정확히 꿰뚫어 보아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주는 것은 아무리 그럴듯해 보여도 그것은 그 안에 생명이 없는, 결국은 보잘것없는 ‘채소와 푸른 풀’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오직 주님만이 ‘씨 맺는 채소’, ‘열매 맺는 나무’, 곧 그 안에 선과 진리가 있어 우리로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게 하시는, 그래서 기쁨, 즐거움과 함께 더할 나위 없는 고요와 평화의 상태에 들게 하시는 분임을 깊이 명심해야 합니다. 즉 악한 영들이 주는 것은 짝퉁, 모조품, 가짜인 반면, 오직 주님이 주시는 것만이 진품, 정품, 진짜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사람을 매 순간, 아니 정말 눈 깜빡할 순간이라도 막아주지 않으셨으면 인간은 즉시 소멸되었을 것입니다. 영들의 세계에는 주님을 향한 사랑 및 신앙과 관련된 것들을 향한,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하고 지독한 증오가 만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저는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는데요, 지난 수년간 (저는 분명히 몸 안에 있었음에도) 저세상의 영들, 특히 아주 못된 영들과 본의 아니게 어울려 왔습니다. 주님의 허락하심으로 저는 수천의 영들에 둘러싸이기도 했고, 그들은 저를 향해 독을 뱉기도 했습니다. 모든 가능한 방법으로 그들은 저를 향해 우글거렸지요. 하지만 그들은 제 머리카락 한 올조차 건드릴 수 없었는데, 그것은 제가 주님의 보호 아래 안전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여러 해 경험으로, 저는 정말 영들의 세계와 그 본성에 대하여, 뿐만 아니라 현재 거듭남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영생의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왜 반드시 견뎌야만 하는지 하는 영적 전투에 대하여 정말 철저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AC.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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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적(內, internal, 속), 외적(外, external, 겉) (2025/9/19)

 

이 세상은 자연적, 곧 육(肉)과 물질의 나라, 겉의 나라인 반면, 영계라고 하는 저 세상은 비물질, 곧 영의 나라, 속의 나라입니다. 한편으로 이 세상은 시간과 공간의 나라이지만, 저 세상은 시공간이 없는, 상태와 그 변화의 나라입니다.

 

인류 최초의 사람들, 곧 태고교회(太古, the most ancient church)는 천국의 모든 속성이 그대로 지상에 구현된 교회로서 그들은 비록 자연계에 있었지만 저런 영적 천적 속성도 병행한 사람들이어서 그들은 지상에서 천사들과 대화할 수 있었고, 주님도 오셔서 함께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은 사람을, 인간을 영과 육이 함께할 수 있는 존재로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즉 영이라는 실체가 육이라는 옷을 입고 자연계에 있게 하신 것이지요. 육이라는 그릇에 영이라는 실체를 담아놓으셨다 하여도 같은 말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 저,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창, 출 속뜻 주석) 54번 글을 보면,

 

그들은 그래서 또한 내적(內的, internal)이었기 때문에 오직 내적인 것들로만 기뻐했습니다. 외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그들은 육안(肉眼)으로는 그저 볼 뿐 그러나 이게 영적으로 뭘 표현하는 걸까 그 영적 천적 의미를 생각했습니다. (AC.54, 창1:27,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이는 참 부러운 특성입니다. 오늘 이 시대 사람들에게는 말이지요. 지금 사람들은 너무나 외적(external)이요 겉과 감각의 사람들이어서 심지어 교회 다니는 사람들조차 거의 대부분 영적 천적인 주의 말씀들을 오로지 감각적으로만 이해합니다. 가령, 신령한 사람은 방언도 유창하고 세련되게 해야 하며, 안수기도를 하면 바로 눈앞에서 병이 척척 낫고, 각종 장애도 바로 나아야 하며, 예언 기도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40일 금식기도, 각종 1000일 예배, 철야기도 등 뭔가 지극정성을 다 하면 하늘 보좌를 움직여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다고 가르치고 또 믿습니다. 복 받기를 참 좋아하며, ‘’의 참 의미에 대해서는 아예 관심도 없고 무지하며, 내적(internal)이라는 게 도대체 무엇인지를 아예 이해조차 못 하면서도 자기는 믿는 사람이요 신앙인이라고 말하는, 자기는 예수 믿고 교회 다니는 사람이므로 죽으면 천당 간다고 믿는 그런 현실입니다.  

 

현 기독교인들은 사람의 내면, 속, 내적, 영적인 것에 대하여는 거의 아는 게 없습니다. 그들은 신앙의 모든 것을 외면 혹은 겉, 외적, 육적(肉的, corporeal)인 것과 연관지어야만 이해가 가능한, 본인들은 좀 언짢겠지만... 대부분 아주 철저히 육적이며, 감각적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많이 배우신 분들도, 못 배우신 분들도 거의 예외가 없습니다. 조금 단순, 더 일반화하여 말씀드리면, 가령, 복(福, blessing)도 재물과 명예, 건강과 형통의 형태로 나타나야 이해하며, 기도도 합심기도, 통성기도, 철야기도, 금식기도 및 치유기도 등 뭔가 인간의 노력과 정성이 충분히 곁들여져야 응답이 되는 줄 아는, 그리고 구원을 무슨 천국 가는 표 얻는 걸로 이해하는, 네, 그런 식이지요... 주님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17:21)라는 말씀의 속뜻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매우 안타까운 상황 가운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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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거

즐겨찾기/블로그 2025. 9. 18. 09:39

휴거 (2025/9/18)

 

그가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24:31)

 

AC.4060 글을 보면, 이 말씀은 새 교회의 일어남을 의미합니다. ‘택하신 자들’은 사랑의 선, 신앙의 선 안에 있는 사람들을, ‘사방에서’는 선과 진리의 모든 상태를,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는 교회의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들을 의미합니다.

 

즉, 휴거란, 종말의 때임에도 불구, 여전히 사랑과 신앙의 선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일으켜 주님의 새 교회 세우시는 걸 의미하지 우리가 아는 것처럼 사람들이 갑자기 공중으로 막 들림 받고 하는 게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태고교회 종말의 때에 그런 암흑과도 같은 상황에서도 노아라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통해 주님 신앙을 이어가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즉, 그들을 리메인스처럼 보관하셨다가 나중에 쓰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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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에 나오는 숫자들 (2025/9/17)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2:2, 3)

 

위 구절들에 ‘일곱(7)이라는 숫자가 나오는 것처럼 말씀 전반에 의외로 숫자가 참 많이 나옵니다. 예를 들면,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6:2)

 

이 호세아 말씀에는 ‘이틀(2), ‘셋째(3)라는 숫자들이 나오며, 무엇보다 창세기 1장엔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1:5)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1:8)

 

식으로 ‘여섯(6)째 날까지 계속 숫자들이 나옵니다. 계속해서

 

때가 제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며 (23:44)

 

이 구절에는 ‘(6) 시와 ‘(9) 시가 나옵니다.

 

이렇게 단순 숫자들이 있는가 하면 ‘십일조(10), ‘열두 지파, 열두 제자, 열두 문, 열두 돌(12), ‘40일 정탐, 40년 광야 생활, 40일 금식(40), ‘측량한 성곽 규빗수(144), ‘일천 번제, 천 년(1000), ‘지파별 인침 받은 자의 수(144000) 등이 나오고, 그리고 창5 아담의 계보 장엔 아담, ‘구백삼십(930) 세, 셋, ‘구백십이(912) 세... 가장 오래 산 므두셀라의 경우, ‘구백육십구(969) 세 등 복합 숫자들과 큰 숫자들이 나옵니다.

 

이 숫자들은 그냥 등장하는 게 아닙니다. 말씀은 모두 천국과의 상응으로 기록된 것으로 이 숫자들 역시 그 안에 형언할 수 없는 아르카나가 담겨 있습니다.

 

참고로, 저 창5 아담 계보의 경우, 저마다 누렸다는 저 향년은 그 어느 특정 개인이 저 나이 되도록 살다 갔다는 뜻이 아니라 저 이름으로 일컫던 교회가 저 숫자에 담긴 ‘상태와 그 변화’를 겪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969세라 해서 실제 969년 동안 존재했다, 살았다는 뜻이 아니라 ‘므두셀라’라는 교회, 또는 교리나 어떤 신학적 입장이 969라는 숫자로 표현해야만 하는 어떤 장구한 상태변화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저 숫자가 실제 역사로 얼마나 되는 기간을 말하는 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지질학적 지구의 나이, 그리고 오파츠(Out-of-place artifacts, OOPARTS)들의 발견 등을 고려할 때, 아주 장구한 세월일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노아는 오백 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 (5:32)

 

이 역시 ‘노아’라는 교회에서 ‘오백(500)이라는 어떤 상태변화 후에, ‘셈, 함, 야벳’이라는 세 종류의 교회가 나왔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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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 사람의 변화 (2025/9/16)

 

사람이 영적 상태에 있는 동안은 겉 사람은 아직 속 사람에게 기꺼이 복종하려 하거나 섬기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때는 아직 일종의 싸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천적 상태가 되면, 그때는 겉 사람은 속 사람에게 복종하고 섬기기 시작합니다. 자연히 싸움도 그치고, 평온함이 시작되지요. (AC.91)

 

지난날 국민 드라마 ‘허준(1999) 생각이 납니다. 거기 보면 주인공 허준과 그가 처음 몸담았던 경남 산청 유의태, 그리고 그의 아들 유도지와 유의태가 걷어 딸처럼 키운 아름다운 예진 아씨가 나옵니다. 도지는 준의 걸출, 범상치 않은 등장 및 연모하던 예진의 마음이 준에게로 향하는 데 앙심을 품고, 오랜 세월, 심지어 궁궐 내의원에 들어가서까지도 준을 시기, 질투하며, 내의원으로서 함께 임금을 모시는 입장이면서도 사사건건 준을 모함, 대적합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후, 그러니까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함께 노인이 된 후에는 사람이 변해 진심으로 준을 아끼고 존경하며 따르지요.

 

AC.91번 글을 읽으며, 겉 사람, 속 사람 관계가 꼭 저들, 특히 저 유도지의 변화와도 같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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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적, 영적, 천적 (2025/9/15)

 

영어로는 natural, spiritual, celestial(heavenly)로 표기할 수 있는 이 세 종류의 상태는 곧 사람을 영적으로 구분한 상태이며, 각각 일층천, 이층천, 삼층천에 상응하지만, 한편으론 ‘거듭남’의 관점에서 본 구분이기도 합니다.

 

이 상태들을 자세히 설명하는 건 거의 책을 쓰는 수준이 될 것 같아 아주 단순하게 비유적으로만 살짝 말씀드립니다.

 

밭에서 갓 수확한, 그래서 여전히 흙이 묻어 있고 아직 다듬지 않은 거친 채소나 농장의 과일, 그리고 육류나 생선 등의 식재료들의 상태, 바로 이 상태를 가리켜 자연적이라 하며, 영적으로는 아직 거듭남이 시작되지 않은 상태라 할 수 있겠습니다. 창1:2의 ‘혼돈(void)과 ‘공허(emptiness), ‘흑암(thick darkness) 상태를 말합니다.

다음은 저런 식재료들을 잘 다듬고 정성껏 씻어 준비한 상태, 이 상태를 가리켜 영적이라 하며, 창1:3-31의 천지창조의 육일, 곧 사람의 거듭남 여섯 단계를 말합니다. 첫째 날, 둘째 날... 등으로 구분한 이 순서를 따라 사람은 점점 성숙, 마침내 거듭남의 최종단계, 그러니까 이제 요리를 시작해도 될 단계가 됩니다.

 

모든 준비를 끝마쳤어도 이것이 정말 먹기 좋은 훌륭한 음식, 아름다운 요리가 되려면 결정적으로 열을 가해야 하는데 이 열이 바로 사랑, 곧 창조주이신 주 여호와 하나님,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며, 이 사랑의 열로 변화된 최종 상태, 이 상태가 바로 천적이라는 상태입니다. 창2:1-17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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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의 속뜻

 
4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7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8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9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2:4-9)

 


창세기 속뜻 강해, 오늘은 2장 두 번째 시간으로, 원래 본문은 24절로 17절, 제목은 ‘에덴동산의 속뜻’이지만 한 번에 다루기에는 너무 길어 세 등분, 3주에 걸쳐 다루겠습니다. 오늘은 그 첫 시간, 4절로 9절,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의 속뜻입니다.

※ 여전히 주석 원본과 인용문은 볼드체로, 메시지를 겸한 설명, 곧 추임새는 ‘’로 구분합니다.

시작합니다.

 

4절, 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89

‘하늘과 땅의 내력’(The nativities of the heavens and of the earth)은 천적 인간의 형성, 즉 천적 인간을 빚으신 방식을 말합니다. 여기서 다루는 내용이 천적 인간을 빚으심이라는 것은 이어지는 모든 내용을 보면 아주 분명한데요,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이상 5), 뿐만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시고’(7), 나중에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19) 등 이들에 대한 지으심은 이미 앞 장에서 다룬 내용들임에도 불구, 여기서 다시 다루는 걸 보면 분명 여기는 또 다른 사람을 다루는 내용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다음 사실들을 보면 더 분명한데요, 먼저 주님을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새로운 호칭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영적 인간을 다룬 앞장에선 간단히 ‘하나님’이라는 호칭으로만 불렀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또 여기선 ‘땅’(ground)과 ‘들’(field)(5)을 함께 언급하는 반면, 앞에선 ‘땅’(earth)만 언급했다는 사실입니다. 또 오늘 본문 구절인 이 4절에서는 ‘하늘’이 ‘땅’보다 먼저 언급되다가 나중에는 ‘땅’이 ‘하늘’보다 먼저 나옵니다. 이는 ‘땅’은 겉 사람을, ‘하늘’은 속 사람을 상징한다는 것, 그리고 다시 빚으심(reformation), 곧 개혁이 영적 인간의 경우는 ‘땅’, 즉 겉 사람에서 시작하지만, 천적 인간은, 지금 다루는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인데, 이 천적 인간의 경우에는 속 사람, 즉 ‘하늘’에서 시작한다는 것 등 이런 여러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분명 여기는 또 다른 사람을 다루는 내용임을 알 수 있습니다.

※ 사실 개인적으로는 창세기 2장 3절까지를 창세기 1장으로 했었어야 맞지 않나 싶습니다. 바로 ‘하나님’이라는 호칭 때문인데, 아직 영적으로 죽어있는, 즉 아직 거듭남의 과정이 시작도 안 된 사람들(1:2 혼돈, 공허, 흑암의 상태)과 영적 인간(靈的, spiritual man)이 되어가는 중인 사람들, 곧 거듭남의 과정 중인 사람들(1:3-2:3)한테는 주님의 신성(神性, The Divine)의 두 호칭인 ‘여호와’와 ‘하나님’ 중 후자인 ‘하나님’이 해당되며, 그래서 창세기 1장에서는 내내 ‘하나님’으로 호칭하는데 그것이 창세기 2장 3절까지 계속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라는 호칭은 2장 4절부터 ‘여호와 하나님’으로 나옵니다. 그러니까 전혀 다른 것이죠. 창1:1-2:3까지가 하나, 창2:4부터가 또 하나, 이 둘은 완전히 다른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래 말씀처럼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2:2, 3)

일곱째 날’이라는 표현 또한 분명히 나오는 걸로 보아 그렇다면 분명 천적 인간의 시작이기도 하여 좀 어리둥절한 게 사실입니다. 이 ‘하나님’이라는 호칭과 ‘일곱째 날’이라는 표현이 함께 쓰인 데에는 어떤 아르카나가 있는 건지 아직은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나중에 알게 되면 공유하겠습니다.

참고로 이 두 호칭, ‘여호와’와 ‘하나님’은 각각 선(good)과 진리(truth) 혹은 사랑(love)과 신앙(faith)으로 연결되며, 거듭남이 완료되어 ‘일곱째 날’, 곧 천적 인간(天的, celestial man)이 되기 전까지는 사람은 일단은 진리로, 그러니까 신앙으로 먼저 주님을 접하게 됩니다. 사람으로 치면, 의지(will)와 이해(understanding) 중 먼저 이해로 접근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우선은 ‘하나님’ 호칭이 나오는 것이지요.

주님의 신성 호칭인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 이런 것처럼, 주님의 신적 인성(人性, The Divine Human) 호칭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예수’는 선 또는 사랑, ‘그리스도’는 진리 또는 신앙으로 연결됩니다. //

 

5, 6절,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90

‘들의 초목’(the shrub of the field)과 ‘밭의 채소’(the herb of the field)는 보통은 겉 사람한테서 나오는 모든 걸 의미합니다. 겉 사람은 사람이 아직 영적(靈的, spiritual)일 동안은 ‘땅’(earth)이라고 하지만, 천적(天的, celestial, heavenly)이 되면 ‘땅’(ground) 및 ‘들’(field)이라고 합니다. 바로 뒤에 ‘안개’(mist)로 언급되는 ‘비’(rain)는 싸움이 그친 뒤 오는 천국 평화의 평온함, 고요함(the tranquility of peace, the peaceful calm)을 말합니다.

 

91

그러나 여기 이런 것들은 사람이 영적 상태에서 천적 상태로 그 상태가 바뀌어 간다는 게 무엇인지를 먼저 알기 전까지는 절대로 지각할 수조차 없는 내용입니다. 그만큼 아주 깊이 감춰진 내용이기 때문이지요. 사람이 영적 상태에 있는 동안은 겉 사람은 아직 속 사람에게 기꺼이 복종하려 하거나 섬기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때는 아직 일종의 싸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천적 상태가 되면, 그때는 겉 사람은 속 사람에게 복종하고 섬기기 시작합니다. 자연히 싸움도 그치고, 평온함이 시작되지요. (AC.87 참조)

※ 지난날 국민 드라마 ‘허준(1999) 생각이 납니다. 거기 보면 주인공 허준과 그가 처음 몸담았던 경남 산청 유의태와 그의 아들 유도지, 그리고 유의태가 걷어 딸처럼 기르는 아름다운 예진 아씨가 나옵니다. 도지는 준의 걸출한 등장과 연모하던 예진의 마음이 준에게로 향하는 데 앙심을 품고 오랜 세월, 심지어 궁궐 내의원에 들어가서까지도 준을 시기하고 질투하며, 내의원으로서 함께 임금을 모시는 입장이면서도 사사건건 준을 대적합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후 함께 노인이 된 후에는 진심으로 준을 아끼고 존경하며 따르게 되지요. 이 겉 사람, 속 사람 관계가 꼭 저들 같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 87번 글 앞부분 인용입니다.

천적 인간을 가리켜 ‘안식일’(the sabbath), 즉 ‘쉼’(rest)이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그가 천적 인간이 될 때 싸움이 그치기 때문인데, 이때 악한 영들은 물러가고 선한 영들과 천적 천사들이 다가옵니다. 이들이 있으면 악한 영들은 도저히 머무를 수 없어 멀리 달아나기 때문이며, 그래서 더 이상 싸울 일이 없게 되고, 또한 그동안 전투를 치른 장본인은 이 사람 본인이 아니라 홀로 주님이시기 때문에, 그래서 주님이 쉬시는 것, 곧 주님이 ‘안식하시니라’(rested) 하는 것입니다... //

※ 거듭 성 프란치스코(1182(?)-1226)나 성 분도 요셉 라브르(1748-1783) 같은 경우가 아닐까 합니다. 이들의 전기를 꼭 읽어 보시기를 권합니다. 이들은 스베덴보리(1688-1772)를 알지도, 또 스베덴보리처럼 무슨 영계를 수십 년 왕래하며 체험한 바도 없지만, 그리고 지금 이런 아르카나도 접한 적 없지만, 참으로 겉 사람과 속 사람의 하나 됨, 합일에까지 이른 것으로 보이는 그런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비’, ‘안개’가 바로 이 평온함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수증기와도 같아서 마치 겉 사람이 속 사람으로부터 수분 공급을 받아 촉촉해지는 것과 같지요. ‘들의 초목’과 ‘밭의 채소’라 하는 것들, 특별히 천적 영적 기원에서 나오는 합리적인 마음과 기억, 곧 이성적인 생각들과 팩트 기반 지식에 속한 것들이 이 평온함, 평화의 샘(the offspring of peace)에서 나옵니다.

※ 땅에 비가 내리고 안개로 축축해져야 들의 초목과 밭의 채소가 자라듯 사람도 심령 상태가 평화, 평온해야 하늘에 기반을 둔 학습 능력과 합리적인 마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는 지금 이 번역의 일만 놓고 보아도 분명합니다. 나랏일과 여타 사적 일로 마음이 힘들면 번역도 잘 안 되지만, 심령이 평안하면 주님의 빛도 훨씬 더 환하게 느껴지며, 번역도 참 잘 되기 때문입니다.

 

92

탐욕과 거짓 때문에 생기는 싸움이나 불안이 사라질 때, 겉 사람이 맛보는 천국의 평화, 평온의 어떠함은 천국 평화의 상태를 경험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습니다.

※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김은경 역) 제32장, ‘천국 안의 평화의 상태’ 284번 글을 보면,

...천국의 평화를 경험해 본 사람만이 천사들이 누리는 평화를 조금이라도 감지할 수 있다. 사람은 육체를 입고 사는 동안은 천국의 평화를 받을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을 느낄 수도 없다. 사람의 지각 능력은 자연계에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감지하기 위해서는 사고 기능이 몸에서 들려 올라가 영의 차원에 머물 수 있어야 하며, 동시에 천사들과 함께 있어야 한다. 나에게 천국의 평화가 느껴진 것도 그런 방법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 평화를 기술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의 말이 부적합하여 그 평화 그대로를 말로 옮길 수는 없다. 다만 하나님 안에서 만족하는 사람들이 누리는 마음의 평안에 비할 수 있을 뿐이다...

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참고하세요. //

이 상태는 기쁨에 대한 우리의 모든 생각을 초월하는 그런 건데, 단순히 싸움이 끝났다는 정도가 아니라 내적 평화로부터 뻗어 나가며 말로 어떻게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겉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그런 생명입니다. 평화의 기쁨에서 그 생명이 나오는 신앙의 진리와 사랑의 선이 이때 이 상태에서 생깁니다.

 

93

천적 인간의 상태, 이 사람한테 선물로 주어진 평화롭고 평온한 상태, 곧 비가 내려 대지가 리프레쉬 되는 걸로 표현된 상태, 그리고 악하고 거짓된 것의 종노릇한 데서 구원받은 상태 등 이런 것이 천적 인간의 상태인데, 그래서 에스겔에서 주님은 천적 인간의 상태를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25내가 또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맺고 악한 짐승을 그 땅에서 그치게 하리니 그들이 빈 들에 평안히 거하며 수풀 가운데에서 잘지라 26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고 내 산 사방에 복을 내리며 때를 따라 소낙비를 내리되 복된 소낙비를 내리리라 27그리한즉 밭에 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땅이 그 소산을 내리니 그들이 그 땅에서 평안할지라 내가 그들의 멍에의 나무를 꺾고 그들을 종으로 삼은 자의 손에서 그들을 건져낸 후에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겠고31내 양 곧 내 초장의 양 너희는 사람이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라 (34:25-27, 31)

그리고 이런 효과가 ‘셋째 날’에도 있다는 말씀이 호세아에 나오는데 거기에 보면 ‘일곱째 날’과 같은 의미라고 합니다.

2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3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빛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6:2-3)

※ 말씀에 나오는 숫자들 역시 그 속뜻이 있는데, 특히 ‘7’(일곱)처럼 ‘3’(셋)과 ‘12’(열둘)가 비슷하게 ‘완전함’, ‘전부’ 등의 뜻을 갖습니다.

이 상태를 비유하여 ‘들의 풀’(the growth of the field)이라 함을 에스겔, 고대교회에 관해 말씀하시는 부분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너를 들의 풀같이 많게 하였더니 네가 크게 자라고 심히 아름다우며 (16:7)

이렇게도 비유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내가 심은 가지요 내가 손으로 만든 것으로서 (60:21)


7절,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94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는 그의 겉 사람을 지으시는 것입니다. 5절에,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를 보면, 그의 겉 사람은 전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는 그에게 신앙과 사랑의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는 그의 겉 사람 또한 살아있는(alive) 상태가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95

앞의 두 구절, 즉 5, 6절에서는 겉 사람의 생명, 즉 그의 신앙의 생명, 이해(understanding)의 생명을 다루었다면, 본 절에서는 그의 사랑의 생명, 의지의 생명을 다루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겉 사람은 속 사람과 함께 지속적으로 전투에 임하면서도 사실은 그를 따르며 섬기는 걸 내켜 하지 않았고, 그래서 겉 사람은 아직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천적 인간이 되어가면서 겉 사람은 속 사람에게 복종, 그를 섬기기 시작하며, 신앙의 생명, 사랑의 생명으로 변화되어 가면서 또한 ‘사람’이 됩니다. 그를 준비시키는 것은 신앙의 생명이지만, 그로 하여금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은 사랑의 생명입니다.

※ 거듭, 신앙은 사랑을 담는 그릇이며, 자원함으로 하는 것이 그의 생명이 됨을 알 수 있습니다. 밭에서 갓 수확한, 흙이 묻고 거친 채소를 아직 거듭남이 시작되지 않은 인간이라 한다면, 채소, 과일 등 잘 다듬고 정성껏 씻어 준비한 식재료들은 영적 인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정말 먹기 좋은 훌륭한 음식, 요리가 되려면 최종적으로 열을 가해야 하는데 이 열이 바로 사랑이며, 그렇게 해서 나오는 최종 상태가 바로 천적 인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9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이 경우는 이렇습니다. 고대에, 그리고 말씀에서 ‘코’(nostrils, 콧구멍)는 향기(odor)의 결과 감사했던 모든 것, 곧 어떤 ‘향기로운 아이디어’(the idea of fragrance)가 떠오를 때 맛보는 모든 즐거운 걸 말합니다. 여기서 향기는 퍼셉션(perception)을 말합니다. 이런 이유로, 여호와에 관한 다음과 같은 기록들, 가령, 번제(燔祭, the burnt offerings)나 주님, 주님의 나라에 대한 기록들에 ‘이는 향기로운 냄새니’ 같은 표현이 반복되는 이유입니다. 주님은 사랑과 신앙에 관련된 것을 무척 기뻐하시기 때문에 이르시기를, ‘여호와 하나님이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셨다’ 하십니다. 그래서 여호와, 곧 주님이 임명하신 자를 가리켜 ‘콧김’(4:20)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콧김 곧 여호와께서 기름 부으신 자가 그들의 함정에 빠졌음이여 우리가 그를 가리키며 전에 이르기를 우리가 그의 그늘 아래에서 이방인들 중에 살겠다 하던 자로다 (4:20)

주님 자신 요한복음에서 ‘그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며’라 하심으로써 같은 걸 상징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20:22)

 

97

생명을 ‘호흡’(breathing)과 ‘숨’(breath)으로 묘사하는 이유는 태고교회의 사람들이 사랑과 신앙의 상태를 호흡의 상태로 지각했기 때문인데, 이는 후에 그 후손들로 내려오면서 연속적으로 변했습니다. 이 호흡에 관해서는 아직 아무것도 말씀드릴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오늘날 이런 것들에 대해 알려진 게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태고 사람들은 이런 것에 매우 친숙했고, 내세 사람들 역시 그렇습니다만 이 세상 사람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이 그들이 영 또는 생명을 ‘바람’(wind)에 비유하는 이유입니다. 주님 또한 요한복음에서 사람의 거듭남을 이야기하시면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3:8)


8절,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98

‘동산’(a garden)은 지성(intelligence)을, ‘에덴’(Eden)은 사랑을, ‘동방’(the east)은 주님을 의미하며, 그 결과, ‘동방의 에덴동산’(the garden of Eden eastward)은 천적 인간의 지성(the intelligence of the celestial man), 곧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통해 천적 인간 안으로 흘러 들어가는 지성을 말합니다.

 

99

영적 인간에게 있어 생명이나 생명의 질서(order, 순서)는 이렇습니다. 주님이 신앙을 통해서 그의 이해, 이성 및 기억에 속한 것들 안으로 들어오심에도 불구, 아직 그의 겉 사람은 그의 속 사람과 싸우고 있기 때문에, 지성이 주님으로부터가 아닌 자기 자신으로부터 기억과 이성에 속한 것들을 통해서 들어오는 것처럼 보입니다. 반면, 천적 인간의 생명 혹은 생명의 질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주님이 사랑과 사랑의 신앙을 통해서 그의 이해, 이성 및 기억에 속한 것들 안으로 들어오십니다. 그리고 거기엔 더 이상 속 사람과 겉 사람 간 싸움이 없기 때문에, 그는 이것이 실상이라는 것을 지각합니다(perceives). 영적 인간일 동안 이때까지 뒤집혔었던 질서가 천적 인간이 되면서 회복되었다는 걸 지금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질서, 혹은 사람을 가리켜 ‘동방의 에덴동산’이라고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창설하신 동산’은 가장 높은 뜻(the supreme sense)으로는 주님 자신입니다. 가장 내적인 뜻(the inmost sense)으로는, 이는 또한 보편적인(universal) 뜻이기도 한데, 바로 주님의 나라, 곧 천국입니다. 이 천국은 사람이 천적 인간이 되면 있게 될 그곳이지요. 그때 아직 지상에 있는 그의 상태는 천국 천사들과 함께하는 상태, 마치 그들 중 하나가 된 것 같은 그런 상태입니다. 사람은 이 세상에 살면서 동시에 천국에도 있을 수 있도록 그렇게 창조되었기 때문인데, 이 상태에서는 그의 모든 사고(thoughts)와 사고에서 나오는 아이디어들, 그리고 심지어 그의 언행도 모두 열린(open) 상태이며, 심지어 주님으로부터 온 것들까지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 안에는 천적 영적인 것들이 담깁니다. 그 이유는 그 하나하나에 다 주님의 생명이 들어 있기 때문인데, 이 생명은 그로 하여금 퍼셉션을 가질 수 있게 하는 생명입니다.

 

100

‘동산’은 지성, ‘에덴’은 사랑이라는 것은 이사야에도 나옵니다.

나 여호와가 시온의 모든 황폐한 곳들을 위로하여 그 사막을 에덴 같게, 그 광야를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였나니 그 가운데에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감사함과 창화하는 소리가 있으리라 (51:3)

여기 ‘사막’(wilderness), ‘기뻐함’(joy), ‘감사함’(confession)은 신앙의 천적인 것들이나 사랑과 관련된 것들인 반면, ‘광야’(desert), ‘즐거워함’(gladness), ‘창화하는 소리’(the voice of singing)는 신앙의 영적인 것들이나 이해에 속한 것들에 관한 표현입니다. 전자는 ‘에덴’, 후자는 ‘동산’에 관련되는데, 그 이유는, 이 선지자는 이 두 가지 표현을 사용해서 늘 하나는 천적인 것을, 다른 하나는 영적인 것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의 더욱 깊은 의미에 관해서는 10절에서 다루겠습니다.

※ ‘에덴동산’에서 ‘에덴’은 천적인 것에, ‘동산’은 영적인 것에 각각 상응한다는 말입니다.

 

101

주님이 ‘동’(, the east)이시라는 것 또한 말씀에 나오는데요, 에스겔입니다. 

1그 후에 그가 나를 데리고 문에 이르니 곧 동쪽을 향한 문이라 2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동쪽에서부터 오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많은 물소리 같고 땅은 그 영광으로 말미암아 빛나니4여호와의 영광이 동문을 통하여 성전으로 들어가고 (43:1-2, 4)

표상(表象, representative) 교회였던 유대교회에서 성전 건물 앞에서 기도할 때, 그들의 얼굴을 동쪽을 향하여 돌렸던 거룩한 관습은 이렇게 주님의 임재가 ‘동’이셨기 때문입니다.

※ 어떤 선과 진리, 사랑과 신앙이 주님과 천국으로 말미암은 것이 되려면, 그 안에 천국의 두 키워드 중 하나인 이노센스(innocence, 純眞)가 있어야 하듯, 어떤 지성 역시 주님과 천국으로 말미암은 것이 되려면, 그 순서, 질서가 올바른 순서, 질서여야 합니다. 즉 주님으로 말미암아 사랑을 통해 위에서부터 내려와야지, 거꾸로 세상 지식으로 말미암아 교리를 통해 위로 올라가려 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지성을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얼핏 비슷해 보여도 그 본성과 정체는 완전 정반대입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9절,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102

‘나무’(A tree)는 퍼셉션(perception)을, ‘보기에 아름다운 나무’(a tree desirable to behold)는 진리의 퍼셉션, 곧 진리를 알게 하는 퍼셉션을, ‘먹기에 좋은 나무’(a tree good for food)는 선의 퍼셉션, 곧 선을 알게 하는 퍼셉션을, ‘생명나무’(the tree of lives)는 사랑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는 감각적인 것, 즉 그저 기억일 뿐인 지식, 그러니까 감각적 증거, 세속적 지식에 기반한 신앙을 의미합니다.

 

103

여기 ‘나무들’(trees)이 퍼셉션을 상징하는 이유는 천적 인간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제가 영적 인간이면 달라지는데, 주제의 성격에 따라 서술되는 것도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104

오늘날은 퍼셉션이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 여기서 말하는 ‘오늘날’은 1750년대(이 주석의 작성 연대는 1749-1756) 유럽을 말하지만, 퍼셉션에 대해 여전히 무지한 건 270여 년이 지난 오늘날(2025년 현재) 대한민국을 비롯, 전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오직 주님으로만 말미암는, 어떤 것이 참되고 선한지 여부에 대한 어떤 내적 감각(a certain internal sensation)으로, 태고교회에는 아주 잘 알려져 있던 것입니다. 천사들에게 있어서 이 퍼셉션은 정말 완벽한데 그들은 이것으로 무엇이 참되고 선한지, 무엇이 주님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자신들로 말미암은 것인지, 또 그들에게 다가오는 아무개가 어떤 자인지, 심지어 그가 다가오는 것만 가지고도, 그리고 그의 한 조각 생각만 가지고도 그가 어떤 자인지 등을 알아챌 수 있습니다. 영적 인간한테는 이 퍼셉션은 없고, 대신 양심이라는 게 있습니다. 죽은 사람은 양심조차 없으며, 굉장히 많은 사람이 이 양심이 뭔지 모르고, 퍼셉션이 뭔지는 더더욱 모릅니다.

 

105

‘생명나무’(The tree of lives)는 사랑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이며, ‘동산 가운데’(in the midst of the garden)는 속 사람의 의지 안입니다.

※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the faith thence derived)이란, 신앙은 신앙인데 사랑으로 말미암는 신앙, 사랑하기 때문에 신앙하는 가슴 신앙을 말합니다. 지식에서만 나오는 신앙, 즉 머리 신앙이 아니고 말입니다.

말씀에서 ‘마음’(the heart)이라고 하는 이 의지는 사람과 천사한테 있어 주님의 주된 소유(the primary possession of the Lord), 그러니까 사람과 천사한테 있는 주님의 소유, 그 소유권이 주님한테 있는 것들 중 메인이라는 말입니다. 스스로 선을 행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에, 비록 기술(記述), 즉 적기는 그렇게 적고 있지만, 그러나 의지나 마음은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탐욕(cupidity)이 사람의 것입니다. 흔히들 이걸 의지라고 하지만 말입니다. 의지는 생명나무가 있는 ‘동산 가운데’인 반면, 사람한테는 의지는 전혀 없고 대신 그저 탐욕만 있기 때문에 ‘생명나무’(the tree of lives)는 주님의 자비입니다. 주님은 모든 사랑과 신앙, 곧 모든 생명이 말미암는, 모든 생명의 근원 되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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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산의 나무’, 곧 퍼셉션, ‘생명나무’, 곧 사랑 및 그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 그리고 ‘지식의 나무’(the tree of knowledge), 곧 감각적 증거와 세속적 지식에 기반한 신앙 등, 이 세 종류의 나무들의 본성에 대해서는 이어지는 페이지들에서 보여드리겠습니다.


이상으로 창세기 2장 두 번째 시간인 ‘에덴동산’의 속뜻 (1)을 번역, 설명을 곁들여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본문은 천적 인간의 상태와 주님이 천적 인간을 어떻게 지으시고, 에덴동산을 어떻게 만드시는지, 그리고 그 의미는 무엇인지 하는 첫 번째 시간이었습니다.

느끼셨겠지만 우리의 이 주일설교는 일반적인 설교와 다릅니다. 설교라기보다는 무슨 주석 낭독회에 가까운데요, 많은 고민 끝에 결국 이렇게 방향을 잡은 이유는, 원전을 건드리기 싫어서입니다. 어쭙잖은 저의 역량으로 괜히 임의로 풀다가 큰 사고를 칠까 봐서이지요. 역시 느끼셨겠지만, 저는 이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창, 출 속뜻 주석, 1749-1756)라는 주석을 주님의 말씀과 거의 동급으로 봅니다. 이 주석이 기록된 방식 때문인데요,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이 주석은 주님이 직접 곁에서 계시하시고 스베덴보리는 그걸 그대로 받아적기만 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말씀, 곧 선지자들이 말씀을 기록하는 방식입니다. 물론 주님은 그런 중에도 술자(述者), 곧 받아적는 사람의 퍼스낼러티를 허용하셔서 술자, 이 경우에는 스베덴보리, 의 어떤 특성들이 군데군데 스며드는 걸 허용하셨지만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의 주일 설교는 마치 굉장한 고액 강의를 수강하듯 들으시며 복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러시라고 이 원고와 함께 제 블로그에도 올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태도이기 때문인데요, 누구하고는 한 끼 점심 식사 하는데 10억이라는 데 그렇다면 우리는 더욱 분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잠시만 숨을 못 쉬어도 죽는 이 대기 속 공기, 산소를 그러나 주님은 한 푼도 안 받으시고 거저 우리 모든 인류와 피조물에게 주시지요. 그러나 우리 중 누구도 그걸 고마워하며 살지는 않습니다. 좀 너무한 거 아닌가요? 말씀에 대한, 그리고 이 아르카나 설교에 대한 주의를 환기하여 드리고자 드리는 말씀입니다.

오늘 전체 본문입니다.

4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7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8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9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2:4-9)

여러 번 복습하시면서 가급적 본문도 줄줄 외우셨으면 좋겠습니다.


설교
2025-09-14(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09-14(D1)-주일예배(2615, 창2,4-9, AC.89-106),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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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2,4-9, AC.89-106.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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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5/9/21, 창2:10-14), ‘에덴동산, 네 강’의 속뜻

‘에덴동산, 네 강’의 속뜻 (2025/9/21)1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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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5/9/7, 창2:1-3), ‘일곱째 날, 안식일’의 속뜻

‘일곱째 날, 안식일’의 속뜻 1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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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과’의 속뜻 (2025/9/12)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2:17)

 

유명한 ‘선악과’ 본문입니다. 이 본문의 속뜻은,

 

...참됨과 선함에 익숙해지는 데 있어 주님으로 말미암은 모든 퍼셉션으로는 괜찮지만, 자아와 세상으로 말미암는 건 안 된다는 것, 즉 우리가 신앙의 신비를 감각과 기억에 속한 걸 가지고 조사하는 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랬다가는 신앙의 천적인 것이 파괴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it is allowable to become acquainted with what is true and good by means of every perception derived from the Lord, but not from self and the world; that is, we are not to inquire into the mysteries of faith by means of the things of sense and of the memory [per sensualia et scientifica], for in this case the celestial of faith is destroyed. (AC.126)

 

인데요, 여기 ‘감각과 기억에 속한 것’에 관한 설명을 아래 곁들입니다.

 

감각과 기억에 속한 것’은 감각적 증거와 세속적 지식에 의존, 주님의 신성인 선과 진리를 들여다보고자 하는 일체의 것으로,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기독교의 사십일 금식기도나 천일 예배, 불교의 참선, 면벽 수련(달마의 구 년 면벽 같은), 오체투지(五體投地, 삼천 배, 오천 배 같은 불교의 절하는 법), 하안거, 동안거 등은 물론, 다양한 종교의 각종 종교적 수행 등인데요, 이는 인간의 오욕칠정(五慾七情, 五慾: 수면욕, 식욕, 색욕, 명예욕, 재물욕, 七情: 희(喜), 노(怒), 애(哀), 락(樂), 오(惡), 욕(慾), 애(愛)) 문제를 좀 어떻게 건드려서 신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을까, 신앙의 신비를 좀 알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더불어 세상 지식, 곧 세상에서 지식을 추구하여 학자가 되더니 그 지식으로 신의 세계에 발 담그고자 하는 사람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극 초월적 극기 수행을 한다 하여도, 그리고 아무리 오만가지 세상 지식을 머리가 터질 듯이 추구하여 다 알게 되었다 하더라도 이런 걸로 구원을 추구한다거나 천국 가기를 희망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고, 오히려 위에서 밝힌 대로 신앙의 천적인 면만 파괴됩니다. 다만 오직 주님을 사랑하는 데에만 전념하고자 모든 걸 내려놓고 완전히 타인을 위한 삶을 살다 간 사람들, 가령 성 프란치스코라든지, 성 분도 요셉 라브르라든지 하는 분들의 경우는 완전히 다른데요, 이런 분들은 자신의 구원을 위한 방편으로 이런 수도적 삶을 추구한 게 아니라 주님만 사랑하기에도 너무 바빠 자기를 사랑할 틈이 없었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기독교인이다’ 하는 사람들을 영생, 영혼 구원 등의 관점으로 나누면 대략 셋으로 나눌 수 있는데요, 그 첫째는, 신앙생활을 일종의 사후 대비 보험으로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한쪽 발은 이생, 다른 발은 저생에 걸치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천국 중심의 삶을 사는 거엔 그닥 관심이 없으며, 그렇다고 무슨 악하고 거짓된 삶을 사는 것도 아닙니다. 세상에서 가난하게 사는 걸 몹시 불편해 하며, 웬만하면 이 세상에서 부유하게 잘 살다가 천국 가는 게 좋은 거 아니냐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주로 균형 잡힌 영성’이니 건강한 신앙생활’이니 하는 표현을 좋아합니다. 둘째는, 영생을 추구하다가 주님을 만나는 사람들인데, 이들은 대체로 차갑고 딱딱하며, 날이 서 있습니다. 좋게 말하면 이성적, 이지적이지만 사실은 사랑보다는 신앙과 그 교리를 늘 따지는 사람들입니다. 셋째는 주님을 추구하다가 덤으로 영생을 얻는 사람들입니다. 앞서 말한 성 프란치스코 같은 분들입니다. 이런 분들은 아주 희귀하며 이런 분들이 계셔서 한 도시가, 한 나라가 소멸되지 않습니다. 마치 의인 열 명이 있으면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지 않겠다 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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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특히 아버지를 부끄러워한다는 건... (2025/9/10)

 

제목 그대롭니다. 자기 부모를 부끄러워한다는 건 좀... 그러니까 비유하자면, 마치 각종 금은보화, 보물이 가득한 집에 열쇠 없는, 그래서 절대 열 수 없는 큰 자물쇠를 채우는 것과 같습니다. 열쇠가 없으니 아무리 값비싼 재물이 가득해도 열고 들어갈 수가 없고, 결국 그런 집, 그런 창고가 있어 봐야 아무 소용이 없겠지요.

 

어떻게 자식이 자기 부모를 부끄러워하겠나, 어떻게 자기 부모를 수치스러워하겠나 싶지만, 실제로는 그런 일이 일어나는데요, 가령, 부모, 특히 아버지가 너무 무책임하여 자기 하고픈 것만 하며 사느라 가정을 돌보지 않은 경우가 되겠습니다. 이럴 경우, 연약한 어머니가 가정의 경제적 책임을 고스란히 짊어지는 모습을 어려서부터 보아온 자녀는 장성한 후에 그 아버지를 부끄러워할 수 있습니다. 무시하고, 하찮게 여길 수 있지요. 본인도 괴로워하면서 말입니다.  

 

※ 위 경우는 주님의 부르심 있어 따르고자 했던 것입니다. 가정을 이루고 나서 일어난 일이라 부득이하였고, 이후 더욱 크신 전능하신 하늘 아버지께서 가장의 책임을 감당하신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그러나 그렇더라도 그러면 안 됩니다. 뭐 당연한 결론이지만 말입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세상 모든 부모는, 특히 아버지는 하나님의 대리인, 그러니까 표상(表象, representative)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내 아버지의 모습으로 지금 내 곁에, 지금까지 내 삶 가운데 계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상 아버지에 대한 나의 태도가 곧 하늘 아버지이신 하나님에 대한 태도이며, 그렇다면 천국 창고인 저 보물창고의 문을 여는 열쇠는 하늘 아버지이신 하나님에 대한 태도, 곧 지상 아버지에 대한 태도가 됩니다. 마치 어느 나라 대사에 대한 태도가 그를 파송한 그 나라에 대한 태도인 것처럼 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선인이든 악인이든 비유하자면 저마다 하늘 보물 창고가 있습니다. 이 보물 창고를 열고 거기 가득한 보물을 꺼내 쓸 수 있느냐 없느냐로 저마다의 인생이 크게 달라질 것입니다. 문제는 이 창고를 여는 열쇠는 오직 천국의 주인이신 하나님에 대한 태도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주인 마음에 들어야 그 창고가 열리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그래서 누구에게나 아버지를 주시고, 그 아버지에 대한 태도를 보시는 것입니다.  

 

45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48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5:45, 48)

 

굳이 세상 아버지가 꼭 선인일 필요는 없습니다. 내 아버지가 선인이든 악인이든 상관없이 그 아버지를 하나님의 표상,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여기고 하나님을 대하듯 아버지를 대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식이 부모에게 제 할 도리만 다하면 된다는 것이지요. 부모의 죄를 굳이 자식인 내가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건 그런 부모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큰 불경이 되기 때문에 아주 조심해야 합니다. 지상 아버지가 선인이든 악인이든 그 상과 벌은 하나님이 따로 매기실 것입니다.

 

비록 현실적으로 그간 살면서 봐온 정말 맘에 안 드는 모습 때문에 아버지를 공경할 마음이 우러나지 않더라도 눈 딱 감고 자식 된 도리, 주께 하듯 아버지를 대하면 하늘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마음이 동하여 기꺼이 그 창고 열쇠를 주실 것입니다. 삶이 계속 막히고, 경제적 어려움이 끊임없이 계속된다 싶으면 이 ‘아버지’라는, ‘부모’라는 일종의 치트 키를 잘 사용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치트 기마저 없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5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6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7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8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인이나 주께로부터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라 (6:5-8)

 

22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23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24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25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심이 없느니라 (3: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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