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창5:1)

 

AC.470

‘계보의 책’(book of the births)이 태고교회에 속했던 사람들을 열거한 것이라는 사실은 뒤에 이어지는 내용으로부터 매우 분명합니다. 여기서부터 11장, 곧 에벨(Eber)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이름들은 결코 사람들을 의미하지 않고, 실제적인 것들(actual things)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태고 시대에 인류는 집(houses)과 가족(families)과 민족(nations)으로 구분되어 있었습니다. 하나의 집은 남편과 아내와 그 자녀들, 그리고 그 가족에 속하여 섬기는 몇몇 사람들로 이루어졌고, 하나의 가족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지만 함께 살지는 않는 많거나 적은 수의 집들로 이루어졌으며, 하나의 민족은 많거나 적은 수의 가족들로 이루어졌습니다. That the “book of the births” is an enumeration of those who were of the most ancient church is very evident from what follows, for from this to the eleventh chapter, that is, to the time of Eber, names never signify persons, but actual things. In the most ancient time mankind were distinguished into houses, families, and nations; a house consisting of the husband and wife with their children, together with some of their family who served; a family, of a greater or lesser number of houses, that lived not far apart and yet not together; and a nation, of a larger or smaller number of families.

 

해설

AC.470은 창5의 이름들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매우 분명하게 밝혀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창5에서 시작하여 창11의 에벨 시대에 이르기까지 등장하는 이름들이 ‘결코 사람들을 의미하지 않고, 실제적인 것들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실제적인 것들’은 이름을 가진 개인 자체가 아니라, 그 이름으로 표상되는 교회와 그 교회의 상태, 교리와 같은 실재적인 영적 내용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창5의 계보를 읽을 때 ‘이 사람 다음에 저 사람이 태어났다’는 문자적 흐름만 따라가서는 속뜻으로 기록된 교회사의 구조를 볼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이 설명을 ‘그런 이름을 가진 개인은 역사적으로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는 단순한 주장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AC.470의 초점은 이름들의 역사적 실재 여부를 판정하는 데 있지 않고, 말씀 안에서 그 이름들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강조하는 것은 창5에서 창11의 에벨에 이르기까지 그 이름들이 속뜻으로는 개인이 아니라 그 이름으로 대표되는 교회적 실재를 가리킨다는 사실입니다.

 

이어지는 ‘집, 가족, 민족’에 관한 설명은 그러한 이름들이 어떻게 교회적 집단을 나타낼 수 있는지를 이해하게 합니다. 태고 시대의 사람들은 오늘날처럼 서로 분리된 개인들의 집합으로만 존재한 것이 아니라, 먼저 한 부부와 자녀 및 그 집에 속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집’을 이루었고, 여러 집이 모여 ‘가족’을 이루었으며, 다시 여러 가족이 하나의 ‘민족’을 이루었습니다. 즉 개인에서 집으로, 집에서 가족으로, 가족에서 민족으로 확대되는 공동체적 구조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앞으로 창5의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 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배경이 됩니다. 한 이름이 단지 한 개인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어떤 공통된 신앙과 삶, 교리와 내적 상태를 공유하는 집단을 대표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셋 다음에 에노스가 태어났다’는 말씀도 속뜻으로는 단순한 생물학적 출생의 연속이 아니라, 한 교회적 상태로부터 또 다른 교회적 상태가 생겨나고 이어지는 과정으로 읽게 됩니다.

 

이 설명은 우리가 앞서 창4와 창5의 관계를 살펴보면서 제기했던 문제에도 중요한 자료가 됩니다. 특히 스베덴보리가 이름들을 개인이 아니라 교회적 실재를 나타내는 것으로 읽고 있으며, 그 배경에 ‘집-가족-민족’이라는 복수의 공동체 구조가 있었다는 점은 앞으로 서로 다른 교회적 계열이 어떻게 형성되고 이어질 수 있었는지를 검토할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합니다. 다만 AC.470만으로 창4와 창5가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병행했다고 결론 내리기보다는, 이후 설명을 더 살펴보면서 그 관계를 계속 확인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결국 ‘계보의 책’은 단순히 누가 누구를 낳았는지를 기록한 명단을 넘어섭니다. 그 이름들 안에는 태고교회 이후 여러 공동체 가운데 나타난 교회의 상태와 변화가 담겨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개인 한 사람만이 아니라 집과 가족과 민족이라는 공동체 안에서도 교회를 보존하시고 이어 가셨으며, 창5의 이름들은 바로 그 교회적 역사를 드러내는 표지들이 됩니다. (AC.470 해설)

 

 

 

AC.471, 창5:1, ‘집과 가족과 민족으로 구별되어 살았던 이유’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창5:1) AC.471그들이 이처럼 따로 떨어져 살면서 오직 집과 가족과 민족으로 구별되어 있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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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69, 창5:1, '계보의 책, 영적으로 창조되어 천적으로 된 태고교회'(AC.469-474)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This is the book of the births of man. In the day that God created man, in the likeness of God made he him. (창5:1) AC.4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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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This is the book of the births of man. In the day that God created man, in the likeness of God made he him. (창5:1)

 

AC.469

‘계보의 책’(book of the births)은 태고교회에 속했던 사람들을 열거한 것이고,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in the day that God created man)는 그가 영적으로 만들어진 것을 뜻하며,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셨다’(in the likeness of God made he him)는 그가 천적으로 만들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태고교회에 대한 묘사입니다. “book of the births” is an enumeration of those who were of the most ancient church; “in the day that God created man” denotes his being made spiritual; and “in the likeness of God made he him” signifies that he was made celestial: thus it is a description of the most ancient church.

 

해설

AC.469는 창5:1을 단순한 족보의 머리말로 읽지 않고, 태고교회의 성립과 그 성격을 압축하여 보여 주는 말씀으로 읽습니다. 먼저 ‘계보의 책’은 문자적으로는 아담 이후의 후손들을 기록하는 족보처럼 보이지만, 속뜻으로는 태고교회에 속했던 사람들, 곧 이후 이 장에서 여러 이름으로 표상되는 교회들을 열거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앞으로 이어질 ‘셋’, ‘에노스’, ‘게난’ 등의 이름도 단순히 개인들의 이름으로만 읽어서는 이 장이 말하려는 교회적 역사를 충분히 볼 수 없습니다.

 

특히 주목할 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가 ‘사람이 영적으로 만들어진 것’을 뜻한다는 설명입니다. 여기서 ‘창조’는 단순히 육체를 가진 인간이 처음 생겨났다는 의미에 머물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거듭나게 하셔서 자연적이고 외적인 삶에 머물던 사람에게 영적인 생명을 주시는 것을 가리킵니다. 창1의 창조 기사가 사람의 거듭남을 다루었던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사람의 창조’는 주님께서 사람 안에 새로운 영적 질서를 세우시는 일입니다.

 

그런데 AC.469는 거기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셨다’는 것은 그 사람이 ‘천적으로 만들어졌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창1에서 살펴본 거듭남의 질서를 다시 떠올리게 합니다. 사람은 먼저 영적이 되고, 그다음 주님께서 그를 천적인 사람으로 이끄십니다. 영적인 상태에서는 아직 신앙을 통하여 사랑으로 나아가는 질서가 두드러지지만, 천적인 상태에서는 주님을 향한 사랑이 중심이 되고 그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지각합니다. 태고교회가 바로 이러한 천적 교회였습니다.

 

따라서 창5:1은 단순히 ‘아담의 후손들이 누구였는가’를 알려 주기 위한 족보의 시작이 아닙니다. 이 한 절 안에서 먼저 태고교회 자체가 어떤 교회였는지를 다시 세워 놓고, 그다음 그 교회로부터 이어지는 여러 교회들의 상태를 살펴볼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창조’에서 영적 상태가, ‘하나님의 모양’에서 천적 상태가 언급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이 점은 앞으로 창5 전체를 읽는 데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창5의 여러 이름을 단순히 사람들의 출생과 죽음의 연속으로만 보면 이 장은 긴 족보에 지나지 않지만, AC가 밝히는 속뜻으로는 주님께서 세우신 태고교회가 여러 후대의 교회들을 거치면서 어떻게 계승되고 변화되어 갔는지를 보여 주는 교회사입니다. 그리고 그 출발점에는 사람이 스스로 자신을 높여 ‘하나님의 모양’이 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를 영적으로 창조하시고 마침내 천적인 사람으로 만드셨다는 사실이 놓여 있습니다. 태고교회의 모든 생명과 지혜의 시작은 사람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셨습니다. (AC.469 해설)

 

 

 

AC.470, 창5:1, ‘이름들은 사람이 아니라 실제적인 것들을 뜻한다’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창5:1) AC.470‘계보의 책’(book of the births)이 태고교회에 속했던 사람들을 열거한 것이라는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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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68, 창5, ‘노아는 교회에 남아 있던 마지막 리메인스를 가리킨다’

속뜻 AC.468앞 장에서 말하고 보여 준 것으로부터, 이름들이 이단과 교리를 의미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이 장의 이름들이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들을 뜻하며, 여기서는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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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25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26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4:25, 26)

 

 

※ 오늘 부를 찬송가는 순서대로 찬301, ‘지금까지 지내온 것’과 찬554, ‘종소리 크게 울려라’입니다.

 

 

오늘은 올해 2025년 마지막 주일예배입니다. 방금 찬송가 301장 가사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처럼 찬양하게 되는 아침입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오늘 본문은 창세기 4장 마지막 단락으로 창세기 4장 관련 모두 다섯 번의 설교를 마치게 됩니다.

 

 

여러분, 살면서 사람이 가장 절망하는 순간은 언제일까요? 어떤 의욕 충만했던 시도가 처음 의도와는 달리 결국 크게 실패했을 때일까요?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리고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제 경우를 보면, 같은 말인데요, ‘앞이 캄캄하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히지?’ 했던 때인 것 같습니다. 지난 1980년 9월, 고3 예비고사를 한 달 남겨두고 모친께서 교통사고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을 때가 그랬던 것 같고, 주님 일에 헌신하고자 멀쩡히 다니던 대기업을 나와 여러 해 동분서주하던 대형 교회에서 결국 권고사직을 당하던 때가 그랬던 것 같습니다. 세월이 흐른 지금은 고요한 심령으로 지난날들을 돌아보게 되고, 그 결과 지금 생각하면 무척 아쉬웠던 순간들, 그러니까 ‘아, 그때 내가 왜 그랬을까? 그보다는 이렇게 저렇게 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을...’ 하는 장면들이지요, 곧 사소한 말 한마디, 소소한 대인관계, 크고 작은 선택들 가운데 참 지혜롭지 못했던 순간들이 수두룩함을, 그러니까 위 두 경우 말고도 지난날의 많은 막힘과 왜곡들 가운데 사실은 내가 자초한 측면들이 많음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전체적으로 보면, 주님은 그런 너무나 서투르게 살아온 저라는 사람의 일생을, 그러나 또한 기가 막히게 보살펴주셔서 오늘 이렇게 생의 마지막을 주님께 붙들려 오직 주님 일에 쓰임 받게 하심을 봅니다. 천방지축 어디서부터 손봐야 할지 모를 인생을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지금도 여전히 이루고 계심을 봅니다.

 

우리가 지난 4주에 걸쳐 살펴온 창세기 4장이 바로 그런 장입니다. 가인은 여호와 앞을 떠났고, 그의 계보는 점점 신앙과 체어리티에서 멀어졌습니다. 문명은 발전했지만, 사랑은 사라졌고, 라멕의 노래는 신앙과 체어리티가 모두 죽었음을 선언합니다. 다음과 같은 정신 나간 노래나 하고 말이지요.

 

23...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24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창4:23, 24)

 

이쯤 되면 우리는 보통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서 끝이다. 사람은 변하지 않아. 사람은 고쳐쓰는 게 아니야...’ 주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으로서 오랜 세월 가인 계보를 돌보셨음에도 말이지요. 우리라면 그냥 다 포기하고 다시 새로 리셋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바로 이 지점에서 전혀 다른 문장을 시작합니다.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창4:25)

 

이 문장은 조용하지만, 그러나 우리에게 말합니다. ‘주님은 아직 일을 끝내지 않으셨다. ‘황폐’(vastation)는 마지막 장이 아니다.’라고 말이지요.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가 볼 땐 정말 엉망진창이 된 가인 계보의 끝, 곧 하나의 장구한 교회 시대의 종말의 때에,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 사랑과 자비의 여호와이신 주님이 하시는 일을 다음 세 가지로 살피고자 합니다.

 

 

먼저, ‘셋’(Seth)은 잃어버린 체어리티를 회복하는 길, ‘다른 씨’, 곧 신앙이다 (25절)

 

25절에서 하와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창4:25)

 

많은 사람은 셋을 ‘아벨의 대체품’처럼 생각합니다. 위 말씀은 얼핏 그렇게도 읽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하와는 ‘대신에’라고는 하지만 ‘다른 씨’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아벨은 체어리티, 곧 사랑이었고,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었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는 것은, 교회 안에서 신앙이 사랑을 제거해 버린 상태를 뜻합니다. 그런데 셋은 그 사랑을 그대로 복제한 존재가 아닙니다. 셋은 황폐를 통과한 이후에도 주님께서 보존하신 씨, 곧 리메인스의 표상입니다.

 

큰 산불이 지나간 자리를 가 본 적이 있으신지요? 모든 것이 잿더미가 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나 봄이 되면, 분명 아무도 뭘 뿌리거나 심지 않았는데도 거기서 풀들이, 그리고 새싹들이 조용히 올라옵니다. 그 풀들은, 그 싹들은 불에 타지 않고 땅속에 남아 있던 씨앗에서 나옵니다. 자주 뉴스에 나오는 강원도 산불처럼 말입니다. 사람들은 ‘다 끝났다’고 할 때, 땅은 이미 다음 계절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셋은 바로 그런 존재입니다. 가인의 계보가 겉으로 역사를 이끌고 갈 때, 셋의 계보는 눈에 띄지 않게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겉으로 드러나는 성공한 것처럼 보이는 계보가 아닌, 드러나지 않게 숨겨오신, 그러나 잘 보존된 계보를 통해 일하십니다.

 

오늘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성공, 능력, 영향력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 안에 조용히 지켜 오신 ‘다른 씨’, 곧 아직 꺼지지 않은 신앙의 흔적이 다음 시작의 출발점이 됩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이런 씨가 잘 보관되어 오고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주님은 이 셋이라는 새로운 신앙을 통해 체어리티를 회복하실 것입니다.

 

 

둘째, 에노스(Enosh)는 셋을 통해 회복하게 된 체어리티를 모든 것, 곧 모든 신앙생활의 중심에 두는 새 교회이다 (26절)

 

26절은 셋의 아들 에노스를 소개합니다. ‘에노스’는 셋이라는 신앙을 통해 회복된 체어리티를 그 중심에 두는 교회를 말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전환입니다.

 

태고교회 초기에는 인간이 사랑 안에서 진리를 즉각적으로 보는 지각, 곧 퍼셉션(perception)의 신앙을 살았습니다. 그때는 사실 신앙이 사랑과 분리될 수도 없는 개념이었지요. 그러나 그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신앙이 체어리티로부터 분리되는 순간, 퍼셉션이 닫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인간은 스스로를 강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퍼셉션은 천국과, 그리고 천국을 통해 주님과 바로 연결되는 능력인데 이제 그 연결이 끊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에노스가 등장합니다. 이는 인간이 처음으로 이렇게 말하기 시작했음을 뜻합니다. ‘우리는 약하다. 우리는 스스로 설 수 없다.’

 

젊을 때는 신앙도 자신감으로 합니다. ‘기도하면 돼. 마음만 굳게 먹으면 되지’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인생을 조금 살아보면 알게 됩니다. 어떤 문제는 기도해도 즉시 풀리지 않고, 어떤 상처는 의지로는 감당되지 않는다는 걸 말입니다. 그때부터 비로소 사람은 명령하는 기도가 아닌, 간청하는 기도, 의탁하는 기도를 드리게 됩니다.

 

에노스의 신앙이 바로 그것입니다. 가인의 계보는 끝까지 자기 확신의 길을 갔습니다. 라멕은 살인을 노래하면서도 자신을 정당화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셋의 계보는 다릅니다. 이 계보는 연약함을 인정하는 자리에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 인정이 바로 다음 단계로 이어집니다.

 

에노스는 비록 천적 인간처럼 체어리티를 타고 나는 인간은 아니지만, 그래서 셋이라는 신앙을 통해 체어리티를 배워가지고 살아내야 하는 영적 인간이지만, 자기를 체어리티로부터 분리했던 가인들과는 달리 체어리티를 자기의 모든 신앙생활의 중심으로 삼는, 그래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인간입니다.

 

 

셋째, 그 결과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예배, 참된 예배가 재개, 회복되었다 (26절)

 

26절 마지막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4:26)

 

이 말은 ‘그때부터 기도가 시작되었다’라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이것은 신앙의 방식이 바뀌었다는 선언입니다. 이전에는 인간이 사랑 안에서 진리를 보았다면, 이제는 보지 못하기 때문에 부릅니다. 확신해서가 아니라, 의지하기 때문에 부릅니다.

 

여기서 하나의 대비가 분명해집니다. 가인은 성을 쌓고 자기 이름을 남겼지만, 셋의 계보는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대비 말입니다.

 

오늘날에도 사람은 여전히 성을 쌓습니다. 경력, 성과, 명성, 업적, 심지어 신앙의 업적까지 쌓아 자신의 이름을 남기려 합니다. 그러나 기도는 그 반대입니다. 기도는 내 이름을 내려놓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행위입니다.

 

체어리티가 회복되면, 그리고 회복된 체어리티를 모든 신앙생활의 중심에 두면, 그때부터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예배, 그것이 바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예배요, 교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라멕은 그 신앙마저 부정한 상태를 표상합니다. 이 지점에 이르면, 더 이상 교회라고 부를 만한 내적 실체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외적 형식이나 기억 지식은 남아 있을지라도, 주님과의 내적 결합은 끊어진 상태이지요. 바로 이런 상태를 가리켜 스베덴보리는 ‘이전 교회가 소멸되었다’고 말합니다.

 

이전 교회가 이렇게 소멸된 후, 주님은 셋과 에노스로 표상된 새 교회를 일으키십니다. 이 교회는 신앙을 통해 체어리티를 회복하고, 체어리티를 신앙의 주된 것으로 삼습니다. 따라서 이 교회의 예배는 다시 여호와, 곧 사랑과 자비의 주를 향한 예배가 됩니다. 이때 성경은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고 말합니다. 이는 새 교회의 예배가 공식적으로 자리 잡았음을 알리는 선언입니다.

 

이러한 표현 방식은 성경 전반에서 반복됩니다. 어떤 상태가 끝나고, 전혀 다른 질서의 상태가 시작될 때, 성경은 종종 ‘그때 비로소’라는 표현을 씁니다. 이는 연대기의 표시가 아니라, 영적 시대의 구분선입니다.

 

오늘 본문은 오늘의 교회와 개인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형식은 남아 있으나 체어리티가 사라진 상태에서는, 예배가 계속되는 것처럼 보여도 내적으로는 예배가 중단된 상태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체어리티가 회복될 때, 성경적 의미에서의 예배는 다시 ‘시작’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주님, 감사합니다. 오늘 창4 마지막 시간, 비록 가인 계보의 이야기였지만, 그래서 내내 우울하고 어두웠지만, 그러나 주님은 가장 어두웠던 라멕의 때에 오히려 아다와 씰라를 일으켜 주님의 일, 즉 교회를 새롭게 하시고, 셋과 에노스로 이어지는 흐름으로 전에 잃어버렸던 아벨이라는 체어리티를 회복, 새 교회의 중심되게 하심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런 주님의 일하심을 오늘 우리도 잘 관찰하였사오니, 오, 주님! 우리 개개인에게도 올해에 이어 내년 2026년에도 동일하게 이런 일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주님을 찬양, 주님게 감사하오며,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설교

2025-12-28(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631, 24. 창4.5, 2025-12-28(D1)-주일예배(창4,25-26, AC.434-442),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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