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4:26)

 

AC.442

 

위에서 설명한 이 장의 내용을 보면, 태고 시대에는 교회와 분리된 많은 교리와 이단이 있었고, 각각 이름이 있었으며, 이러한 교리와 이단을 분리한 것은 오늘날의 어떤 사상보다 훨씬 더 심오한 사상의 산물이었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 당시 사람들의 천재성이 바로 그러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From the contents of this chapter as above explained, it is evident that in the most ancient time there were many doctrines and heresies separate from the church, each one of which had its name, which separate doctrines and heresies were the outcome of much more profound thought than any at the present day, because such was the genius of the men of that time.

 

해설

 

AC.442는 창세기 4장을 단락별로 해설한 뒤 제시되는 총괄적 결론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더 이상 개별 인물(가인, 아벨, 셋, 에노스 등)을 논하지 않고, 그 모든 서술의 배후에 놓인 시대 전체의 정신적 풍경을 조망합니다. 즉, 창세기 4장은 단일한 이단이나 한두 갈래의 오류를 다룬 이야기가 아니라, 태고교회 말기에 존재했던 다수의 분화된 교리들과 이단들의 전반적 상황을 요약한 장이라는 선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당시에는 교회와 분리된 많은 교리들과 이단들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소수의 이단 집단을 뜻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교회에서 파생된 수많은 사상적 분화, 곧 체어리티와 신앙의 관계를 각기 다르게 이해하고 해석한 다양한 교리적 노선들을 가리킵니다. 창세기 4장에 나열된 이름들, 그러니까 에녹, 이랏, 므후야엘, 므드사엘, 라멕 등은 모두 이런 분리된 교리적 흐름들에 붙여진 이름들입니다.

 

각 교리와 이단이 ‘자기 이름’을 가졌다는 사실은 중요합니다. 이름은 곧 정체성과 체계를 뜻합니다. 즉, 이들은 단순한 감정적 일탈이나 미숙한 오해가 아니라, 나름의 논리와 일관성을 갖춘 사상 체계였습니다. 태고 인류는 생각 없이 믿는 존재들이 아니었고, 오히려 오늘날보다 훨씬 깊이 사유하는 존재들이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지점에서 결정적인 말을 덧붙입니다.

 

이는 그 시대 사람들의 천재성(genius)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천재성은 지능의 높낮이가 아니라, 사유 방식의 깊이와 방향성을 뜻합니다. 태고 인류는 감각적, 외적 사고를 하기보다, 내적이고 직관적인 사유를 했습니다. 그들의 생각은 자연 현상을 넘어, 곧바로 영적, 상응적 의미로 향했습니다. 이런 천재성 때문에, 그들이 만들어 낸 교리와 이단 역시 표면적이고 단순한 주장이 아니라, 매우 깊은 사상적 구조를 갖추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점에서 오늘날과의 차이를 분명히 합니다. 오늘날의 교리적 분열이나 이단들은 대부분 기억 지식의 조합, 감정적 동기, 권력욕, 혹은 문자적 해석의 고집에서 나옵니다. 반면 태고 인류의 이단들은 지나치게 깊은 사유에서 비롯된 일탈이었습니다. 즉, 그들은 너무 많이 보고, 너무 깊이 생각했으나, 질서의 중심인 체어리티를 잃었기 때문에 분화되었습니다.

 

깊이 있음과 바름은 다르다’, 이 문장은 중요한 경고를 담고 있습니다. 깊이 있는 사유가 곧 참됨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태고 인류의 이단들은 오늘날보다 훨씬 깊었지만, 그 깊이는 체어리티와 결합되지 않을 때 오히려 분열을 낳았습니다. 이는 지성의 오만에 대한 경고이기도 합니다. 신앙과 사유가 아무리 정교해도, 체어리티가 중심을 잃으면 그것은 교회가 아니라 교리적 파편이 됩니다.

 

AC.442는 왜 이런 교리적 분화를 사람의 계보로 기록했는지도 암시합니다. 태고 인류는 추상 개념을 추상으로 표현하지 않고, 살아 있는 이야기와 인물의 계보로 배열하는 것을 즐겼습니다. 이는 그들에게 사상이 단순한 개념이 아니라, 생명처럼 태어나고 증식하는 현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리는 ‘낳고’, ‘자라고’, ‘죽이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AC.442는 오늘의 독자에게 중요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첫째, 교리의 깊이 자체를 절대화하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둘째, 교회의 분열은 언제나 사랑, 즉 체어리티의 중심을 잃을 때 시작된다는 사실입니다. 셋째, 성경의 고대 이야기는 미숙한 시대의 산물이 아니라, 오늘날보다 훨씬 깊은 영적 사유의 기록이라는 점입니다.

 

AC.442의 핵심은 이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태고교회의 이단들은 단순해서가 아니라, 너무 깊이 생각했기 때문에 생겨났으며, 그 깊이가 체어리티와 결합되지 않았을 때 교회에서 분리되었다.

 

이로써 창세기 4장은 단순한 ‘최초의 살인 이야기’가 아니라, 인류 사유사의 첫 대분화, 곧 신앙과 사랑의 관계가 어떻게 무너지고 다시 회복의 길을 찾는가를 보여주는 장으로 완결됩니다.

 

 

 

AC.441, 창4:26,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처음이 아니라 재개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4:26) AC.441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일이 이때에 시작되지 않았다는 것은, 다른 어떤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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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4:26)

 

AC.441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일이 이때에 시작되지 않았다는 것은, 다른 어떤 교회보다도 주님을 더욱 경배하고 숭배했던 태고교회에 관해 위에서 이미 언급한 것과, 아벨이 양 떼의 첫 새끼를 제물로 드렸다는 사실에서 충분히 분명해집니다. 따라서 이 구절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calling upon the name of Jehovah)는 것은 ‘가인’(Cain)과 ‘라멕’(Lamech)이라 불리는 자들에 의해 이전 교회가 소멸된 후에 등장한 새 교회의 예배를 의미하는 것 말고는 아무 다른 의미가 없습니다. That the invocation of the name of Jehovah did not commence at this time is sufficiently evident from what has already been said above in regard to the most ancient church, which more than any other adored and worshiped the Lord; and also from the fact that Abel brought an offering of the firstlings of the flock; so that in this passage by “calling upon the name of Jehovah” nothing else is signified than the worship of the new church, after the former church had been extinguished by those who are called “Cain” and “Lamech.”

 

해설

 

AC.441의 출발점은 분명합니다. 창4:26의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는 말은, 역사적으로 그 시점에 처음 예배가 시작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충분히 오해될 수 있음을 알기에, 먼저 단호하게 부정합니다. 태고교회는 그 어떤 교회보다도 주님을 깊이 사랑하고 예배했던 교회였으며, 따라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예배’가 이때 처음 시작되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 증거로 스베덴보리는 두 가지를 듭니다. 첫째, 태고교회 자체가 사랑에 근거한 예배를 드렸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사랑에서 진리를 지각했고, 삶 전체가 예배에 가까웠습니다. 둘째, 아벨의 제사입니다. 아벨이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을 드렸다는 것은, 이미 체어리티에서 나온 참된 예배가 존재했음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창4:26의 표현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예배의 시작 시점으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 본문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는 말은 시간적 최초가 아니라, 질적, 교회적 전환점을 뜻합니다. 즉, 이전의 교회가 완전히 무너진 뒤, 새 교회가 공식적으로 등장하여 참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음을 선언하는 표현입니다. 이 말은 ‘다시 시작되었다’는 뜻이지, ‘처음 시작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AC.441은 이 점을 매우 중요하게 다룹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예배’가 새롭게 언급되는 이유는, 이전 교회가 이미 소멸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소멸은 자연재해나 외적 파괴가 아니라, 영적 소멸입니다. 가인과 라멕으로 표상된 흐름, 즉, 신앙이 체어리티와 분리되고, 마침내 신앙마저 부정되는 상태 속에서 이전 교회는 내적으로 죽었습니다.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라멕은 그 신앙마저 부정한 상태를 표상합니다. 이 지점에 이르면, 더 이상 교회라고 부를 만한 내적 실체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외적 형식이나 기억 지식은 남아 있을지라도, 주님과의 내적 결합은 끊어진 상태입니다. 바로 이런 상태를 가리켜 스베덴보리는 ‘이전 교회가 소멸되었다’고 말합니다.

 

이전 교회가 이렇게 소멸된 후, 주님은 셋과 에노스로 표상된 새 교회를 일으키십니다. 이 교회는 신앙을 통해 체어리티를 회복하고, 체어리티를 신앙의 주된 것으로 삼습니다. 따라서 이 교회의 예배는 다시 여호와, 곧 사랑과 자비의 주를 향한 예배가 됩니다. 이때 성경은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고 말합니다. 이는 새 교회의 예배가 공식적으로 자리 잡았음을 알리는 선언입니다.

 

이러한 표현 방식은 성경 전반에서 반복됩니다. 어떤 상태가 끝나고, 전혀 다른 질서의 상태가 시작될 때, 성경은 종종 ‘그때 비로소’라는 표현을 씁니다. 이는 연대기의 표시가 아니라, 영적 시대의 구분선입니다. AC.441은 바로 이 서술 방식을 해명해 줍니다.

 

이 해설은 오늘의 교회와 개인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형식은 남아 있으나 체어리티가 사라진 상태에서는, 예배가 계속되는 것처럼 보여도 내적으로는 예배가 중단된 상태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체어리티가 회복될 때, 성경적 의미에서의 예배는 다시 ‘시작’됩니다. AC.441은 이 점을 분명히 가르칩니다.

 

AC.441의 요지는 분명합니다.

 

4:26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는 말은 예배의 역사적 최초가 아니라, 이전 교회가 소멸된 뒤 새 교회의 예배가 다시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선언이다.

 

이로써 창세기 4장은, 교회의 붕괴와 보존, 그리고 체어리티에 기초한 예배의 재개라는 완결된 구조로 마무리됩니다.

 

 

 

AC.442, 창4:26, '태고교회 이단들의 뿌리와 그 심오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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