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히려 그때그때 야단치고,강압적으로 하면 사람은 고분고분,빙 돌아갈 길을 질러갈 수 있을 텐데...?
겉으로 보면 그 방법이 더 빠르고 확실해 보입니다. 실제로 강하게 몰아붙이면, 사람은 일단 멈추고, 겉 행동은 곧바로 바뀌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변화는 ‘사람의 중심이 바뀐 결과가 아니라,압력에 대한 반응’일 뿐입니다. 압력이 사라지면 다시 원래 상태로 돌아가거나, 안쪽에서는 오히려 반발이 쌓입니다. 그래서 길을 ‘질러간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내면의 질서가 세워지지 않은 채 외형만 정돈된 상태’가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핵심은,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순종하는 행동’ 그 자체보다 ‘자유 속에서 선택된 사랑과 신앙’이라는 점입니다. 사랑은 강요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억지로 사랑하게 만들 수 없듯이, 선도 강압으로는 뿌리내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인도는 언제나 ‘자유를 보존하는 방식’으로 작용합니다. 이 자유가 유지되어야, 사람이 ‘정말로 자기 것처럼’ 선택하고, 그 선택이 그의 삶이 됩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강압은 인간의 프로프리움을 꺾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형태로 강화’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복종하지만, 속에서는 ‘억지로 한다’, ‘나는 원래 다르게 생각한다’는 감각이 남습니다. 이것은 진짜 변화가 아니라, ‘눌려 있는 자기중심’입니다. 반대로 주님의 방식은 느리고 답답해 보일 수 있지만, 사람 안에서 스스로 ‘아,이게 맞다’고 동의하는 지점이 생기도록 기다립니다. 이 동의가 생길 때, 비로소 변화는 되돌아가지 않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지름길처럼 보이는 강압은 사실은 우회로이고,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자유 속의 인도는 실제로는 ‘가장 곧은 길,곧 지름길’입니다. 왜냐하면 그 길만이 사람의 의지와 이해, 곧 마음 전체를 함께 바꾸기 때문입니다.
정리하면, 주님이 강압적으로 하지 않으시는 이유는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사람을 ‘진짜로 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이 스스로 선택하고 사랑하게 될 때에만, 그 삶은 그의 것이 되며, 그 상태만이 천국까지 이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위 본문에‘사람은 주님께 인도받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고,자기 자신과 세상,곧 자기의‘프로프리움’(proprium, own)에 의해서도 인도받고자 하는 존재’라는 부분 말인데요,주님의 인도에 무슨2프로 부족함이 있나요?뭐가 부족해서 이런 것이죠?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주님의 인도에는 결핍이 전혀 없습니다.’ 문제는 인도의 내용이 아니라, ‘인도를 받는‘인간의 상태’’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그 문장은 ‘주님의 인도에 무엇이 빠져 있어서 사람이 보충하려 든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이 그렇게 느끼고 싶어 하는 성향’을 가리킵니다.
왜 그런 성향이 생기느냐 하면, 인간은 창조될 때부터 ‘자기처럼 느끼는 상태’ 안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생각할 때 ‘내가 생각한다’, 결정할 때 ‘내가 결정한다’고 느낍니다. 이 감각이 없으면 자유도, 사랑도, 책임도 성립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자기감’(自己感)이, 방향을 잘못 잡으면 ‘내가 중심이 되고 싶다’는 욕구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주님이 충분히 인도하고 계셔도, 사람은 그 안에 머무르기보다 ‘자기 쪽에서 한 번 더 쥐고 확인하고 싶어 합니다.’
이것은 결핍을 보충하려는 행동이라기보다, ‘주도권을 잡고 싶어 하는 움직임’에 가깝습니다. 주님의 인도는 위에서 아래로, 사랑에서 지혜로, 질서 있게 흐릅니다. 그런데 인간의 프로프리움은 ‘그 흐름에 맡겨지기’보다, ‘내가 알고,내가 판단하고,내가 결정했다’는 느낌을 원합니다. 그래서 동일한 상황에서도 ‘주님이 이끄셨다’고 보기보다, ‘내가 잘해서 이렇게 됐다’고 해석하려는 경향이 생깁니다.
여기에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주님의 인도는 언제나 ‘자유를 해치지 않는 방식’으로 작용합니다. 강제로 밀어붙이지 않고, 은밀하고 부드럽게, 안에서 움직입니다. 그러다 보니 인간은 그 인도를 ‘뚜렷한 외적 확증’으로 느끼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 빈틈에서 사람은 ‘그래도 내가 판단해야 확실하지’라는 쪽으로 기웁니다. 즉, 인도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인도가 너무 강압적이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사람이 자기 쪽으로 돌아설 여지가 생깁니다.
그래서AC.132의 말은 이렇게 이해하시면 정확합니다. 사람은 주님의 인도만으로도 충분히 살 수 있도록 되어 있지만, 동시에 ‘자기처럼 느끼는 상태’ 때문에, 거기에 더해 ‘자기중심에서 한 번 더 움직이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프로프리움으로의 기울어짐입니다.
결국 핵심은 이것입니다. 주님의 인도는 언제나 완전하지만, 인간은 그 인도를 ‘그대로 받는 자리’에 머물기보다, ‘자기중심을 끼워 넣고 싶어 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길은 무엇을 더 보태는 길이 아니라, 오히려 ‘이미 충분한 인도 앞에서‘내가 중심이 되려는 부분’을 알아차리고 내려놓는 과정’입니다. 그럴 때 비로소 사람은 깨닫게 됩니다. 부족했던 것은 인도가 아니라, ‘그 인도를 온전히 맡기지 못했던 나의 상태’였다는 것을 말입니다.
18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And Jehovah God said, It is not good that the man should be alone, I will make him a help as with him.(창2:18)
AC.132
사람은 주님께 인도받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고, 자기 자신과 세상, 곧 자기의 ‘프로프리움’(proprium,own)에 의해서도 인도받고자 하는 존재이므로, 여기서는 사람에게 허락된 그 프로프리움이 다루어집니다(18절). Since man is such as not to be content to be led by the Lord, but desires to be led also by himself and the world, or by his own, therefore the own which was granted him is here treated of (verse 18).
해설
이 단락은 창세기 2장 후반부를 관통하는 ‘핵심 주제어 하나’를 정확히 집어냅니다. 바로 ‘자기의 것’(own), 곧 ‘proprium’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문제를 무지나 연약함에서 찾지 않고, 훨씬 더 근원적인 성향에서 찾습니다. 인간은 단순히 주님께 순종하지 못하는 존재가 아니라, ‘주님께만 인도받는 상태에 만족하지 못하는 존재’라는 점이 여기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중요한 것은, 이 ‘프로프리움’이 갑자기 죄로 규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허락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주님께서 인간에게 자율성과 독립성을 어느 정도 허용하셨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은 로봇처럼 전적으로 외부에서만 조종되는 존재가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 느끼고 선택하는 주체로 창조되었습니다. 문제는 이 자기성(自己性) 자체가 아니라, ‘그 자기성이 중심이 되려는 경향’입니다.
이 단락은 인간 내면에서 일어나는 미묘한 이동을 포착합니다. 이전까지의 천적 인간은 주님의 인도 안에서 자유로웠습니다. 그러나 이제 인간은 ‘나도 함께 인도하고 싶다’, ‘나도 판단하고 싶다’, ‘나도 선택의 주체이고 싶다’는 방향으로 기울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AC.131에서 말한 ‘자기 자신에게로 기울어짐’의 구체적 내용입니다.
그래서 창2:18에서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아니하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는 외로움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더 이상 순수한 내적 일치 상태로만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는 신호입니다. 주님과의 직접적인 결합만으로는 더 이상 인간의 의식 구조가 유지되지 않게 되었고, 그 결과 ‘자기의 것’, 곧 ‘프로프리움’이 하나의 구조로 등장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과정을 도덕적으로 비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 존재의 현실을 매우 정직하게 묘사합니다. 인간은 주님께만 인도받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자기 자신과 세상도 함께 끌어안고 싶어 합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이후의 모든 분리, 대응, 결합의 서사가 시작됩니다.
AC.132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에게 허락된 ‘프로프리움’은 타락의 씨앗이 될 수도 있지만, 동시에 인간이 인간으로 존재하기 위한 필연적 조건이기도 하며, 창세기 2장 후반부는 바로 이 긴장 위에서 전개된다고 말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고유 본성’이라는 번역은 가능은 하지만, 핵심을 정확히 전달하기에는 상당히 위험한 번역’입니다. 상황에 따라 보조적으로 쓸 수는 있어도, proprium의 중심 뜻을 대표하는 번역으로 쓰기에는 부족합니다.
왜냐하면 ‘고유 본성’이라고 하면, 대부분의 독자는 그것을 ‘타고난 성품’, ‘본래 가지고 있는 좋은 성질’ 쪽으로 이해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proprium은 그런 중립적이거나 긍정적인 ‘성격’이 아니라, 훨씬 더 근본적인 것, 곧 ‘내가 근원이라고 느끼는 상태’, ‘모든 것을 나에게 귀속시키는 중심 감각’을 말합니다. 그래서 단순히 ‘본성’이라고 하면, 이 핵심이 거의 사라집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proprium은 단지 ‘성질’이 아니라 ‘작동하는 방향성’입니다. 그것은 ‘나에게서 나온 것처럼 느끼고, 그것을 나의 것으로 붙잡으려는 움직임’입니다. 그래서 AC 전체에서 proprium은 거의 언제나 ‘왜곡의 근원’, 혹은 ‘주님으로부터의 흐름을 가로막는 중심’으로 다뤄집니다. 그런데 ‘고유 본성’이라고 하면 이런 긴장과 위험성이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다만 왜 그런 번역이 나오는지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proprium이 단순한 ‘소유물’이 아니라, 사람 안에 깊이 자리 잡은 ‘자기만의 것 같은 느낌’, ‘자기에게 속한 특유한 것’이라는 뉘앙스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고유’라는 말이 그 일부를 잡아주기는 합니다. 그래서 문맥에 따라 ‘자기 고유의 것’ 정도로 풀어 설명할 때는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심 번역으로는, ‘자기 것’, ‘자기 것으로 삼는 상태’, 혹은 ‘자기중심’(proprium) 쪽이 훨씬 정확합니다. 왜냐하면 이 표현들은 proprium의 핵심인 ‘귀속(내 것이라 여김)’과 ‘근원 의식’을 직접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체어리티’(charity)처럼 그냥 ‘프로프리움’(proprium)으로 병기하시는 것도 좋겠습니다. 처음에 한번 그 의미를 잡아주신 후 말이지요.
정리하면, ‘고유 본성’은 일부 뉘앙스를 담을 수는 있지만, proprium의 핵심인 ‘자기에게 돌리는 상태’를 흐릴 위험이 크기 때문에, 주 번역으로 쓰기보다는 설명용으로 제한하는 것이 좋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맥락에서는 결국 이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가 아니라, 그것을 누구의 것으로 여기느냐’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