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2:17)
AC.130
세상으로부터 지혜로워지고자 하는 사람은,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 지식을 자기의 ‘동산’(garden)으로 삼습니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그의 ‘에덴’(Eden)이며, 그의 ‘동쪽’(east)은 동쪽이 아니라 서쪽, 곧 자기 자신입니다. 그의 ‘유브라데 강’(river Euphrates)은 그의 모든 기억 지식으로서, 이는 정죄 받습니다. 그의 ‘둘째 강’(second river), 곧 ‘앗수르가 있는 곳’(Assyria)은 거짓들을 낳는 어리석은 추론이며, 그의 ‘셋째 강’(third river), 곧 ‘구스가 있는 곳’(Ethiopia)은 거기서 나온 악과 거짓의 원리들로서, 이것들이 그의 신앙의 지식입니다. 그의 ‘넷째 강’(fourth river)은 거기서 비롯된 지혜인데, 말씀에서는 이것을 ‘마술’(magic)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애굽’(Egypt), 그러니까 이는 기억 지식을 뜻하는데, 지식이 마술적인 것이 된 이후에는 이러한 사람을 의미하게 됩니다. 이는 그가 자기로부터 지혜로워지고자 하기 때문이며, 이 점은 말씀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자들에 대해 에스겔에서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He who desires to be wise from the world has for his “garden” the things of sense and of memory-knowledge [sensualia et scientifica]; the love of self and the love of the world are his “Eden”; his “east” is the west, or himself; his “river Euphrates” is all his memory-knowledge, which is condemned; his “second river,” where is “Assyria” is infatuated reasoning productive of falsities; his “third river,” where is “Ethiopia” is the principles of evil and falsity thence derived, which are the knowledges of his faith; his “fourth river” is the wisdom thence derived, which in the Word is called “magic.” And therefore “Egypt”—which signifies memory-knowledge—after the knowledge became magical, signifies such a man, because, as may be seen from the Word, he desires to be wise from self. Of such it is written in Ezekiel:
3너는 말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애굽의 바로 왕이여 내가 너를 대적하노라 너는 자기의 강들 가운데에 누운 큰 악어라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나를 위하여 만들었다 하는도다, 9애굽 땅이 사막과 황무지가 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네가 스스로 이르기를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만들었다 하도다 (겔29:3, 9) Thus hath said the Lord Jehovih, Behold, I am against thee, Pharaoh king of Egypt, the great whale that lieth in the midst of his rivers, who hath said, My river is mine own, and I have made it for myself. And the land of Egypt shall be for a solitude, and a waste, and they shall know that I am Jehovah, because he hath said, The river is mine, and I have made it. (Ezek. 29:3, 9)
이러한 사람들은 같은 예언서에서 ‘지옥에 있는 에덴의 나무들’(trees of Eden in hell)이라고도 불립니다. 거기서도 바로, 곧 애굽이 다음과 같은 말로 다루어집니다. Such men are also called “trees of Eden in hell,” in the same prophet, where also Pharaoh, or the Egyptian, is treated of in these words:
16내가 그를 구덩이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스올에 떨어뜨리던 때에 백성들이 그 떨어지는 소리로 말미암아 진동하게 하였고 물을 마시는 에덴의 모든 나무 곧 레바논의 뛰어나고 아름다운 나무들이 지하에서 위로를 받게 하였느니라, 18너의 영광과 위대함이 에덴의 나무들 중에서 어떤 것과 같은고 그러나 네가 에덴의 나무들과 함께 지하에 내려갈 것이요 거기에서 할례를 받지 못하고 칼에 죽임을 당한 자 가운데에 누우리라 이들은 바로와 그의 모든 군대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라 (겔31:16, 18) When I shall have made him descend into hell with them that descend into the pit; to whom art thou thus made like in glory and in greatness among the trees of Eden? yet shalt thou be made to descend with the trees of Eden into the lower earth, in the midst of the uncircumcised, with them that be slain by the sword. This is Pharaoh and all his crew, (Ezek. 31:16, 18)
여기서 ‘에덴의 나무들’(trees of Eden)은 말씀에서 나온 지식, 곧 기억 지식과 인식을 뜻하는데, 이들이 추론들로 말미암아 그것들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where the “trees of Eden” denote knowledges [scientifica et cognitiones] from the Word, which they thus profane by reasonings.
해설
AC.130은 지금까지 창세기 2장에서 차근차근 쌓아 온 ‘천적 질서의 완전한 반전, 전도, 뒤집힘’을 한 번에 보여주는, 매우 강력하고도 무서운 단락입니다. 앞 단락들에서 ‘에덴동산’과 네 강이 어떻게 주님으로부터 흘러오는 생명의 질서인지를 설명했다면, 이 단락은 그 질서가 ‘인간 자신을 출발점으로 삼을 때, 어떻게 뒤집히는지’를 정면으로 드러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같은 상징들을 그대로 사용합니다. 동산, 에덴, 동쪽, 네 강이 다시 등장합니다. 그러나 의미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왜냐하면 출발점이 주님이 아니라 ‘세상’과 ‘자기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이 차이 하나가 모든 것을 바꿉니다.
세상으로부터 지혜로워지고자 하는 사람의 동산은 감각과 기억 지식입니다. 즉, 보이는 것, 축적된 정보, 경험과 논리입니다. 이것 자체가 문제는 아닙니다. 문제는 이것이 ‘동산’, 곧 삶과 지혜의 중심이 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에덴, 곧 사랑의 중심은 주님 사랑이 아니라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됩니다.
가장 인상적인 표현은 ‘그의 동쪽은 서쪽’이라는 말입니다. 말씀 전체에서 동쪽은 주님을 뜻하는데, 이 사람에게 동쪽은 자기 자신입니다. 곧, 그는 빛이 떠오르는 방향을 완전히 거꾸로 돌려놓은 사람입니다. 이것이 영적 방향 상실의 본질입니다.
네 강의 왜곡은 더 심각합니다. 유브라데 강, 곧 기억 지식은 ‘정죄 받는 것’이 됩니다. 지식이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지 못하고, 자기 소유로 굳어졌기 때문입니다. 둘째 강 ‘앗수르’는 이성적 사고가 아니라, 거짓을 낳는 어리석은 추론이 됩니다. 셋째 강 ‘구스’는 악과 거짓의 원리들이 되며, 심지어 그것이 그의 ‘신앙의 지식’이라고 불립니다. 넷째 강은 더 이상 지혜가 아니라, 말씀에서 ‘마술’이라 부르는 상태입니다. 이는 지식을 가지고 영적 세계를 조종하려는 태도, 곧 신앙의 완전한 왜곡입니다.
이 지점에서 ‘애굽’의 의미가 결정적으로 변합니다. 애굽은 원래 기억 지식을 뜻하지만, 그것이 마술적인 것이 될 때, 즉, 자기로부터 지혜로워지고자 할 때, 그 사람 자체를 가리키는 이름이 됩니다. 그래서 바로는 ‘내 강은 내 것이며, 내가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이는 지식의 주권을 주님이 아니라 자기에게 돌리는 선언입니다. 이 선언이 바로 심판의 이유입니다.
마지막에 나오는 ‘지옥에 있는 에덴의 나무들’이라는 표현은 충격적입니다. 에덴의 나무는 원래 말씀에서 나온 지식, 곧 거룩한 진리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자기 추론과 자기 사랑을 섬기는 도구가 될 때, 그 나무들은 더 이상 천국에 있지 않고 지옥에 있게 됩니다. 이는 지식 자체가 악해진 것이 아니라, ‘사용 목적과 출발점이 뒤틀린 결과’입니다.
AC.130은 이렇게 말합니다. 같은 말씀, 같은 지식, 같은 상징도 주님을 출발점으로 삼으면 생명의 강이 되지만, 자기 자신을 출발점으로 삼는 순간, 마술과 파괴의 체계가 되며, 에덴의 동산은 지옥의 숲으로 뒤바뀐다고 말합니다. 이 단락은 창세기 3장의 비극을 예고함과 동시에, 모든 시대 모든 개인에게 주어지는 가장 근본적인 경고이기도 합니다.
심화
1. ‘겔29:3, 9’
3너는 말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애굽의 바로 왕이여 내가 너를 대적하노라 너는 자기의 강들 가운데에 누운 큰 악어라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나를 위하여 만들었다 하는도다, 9애굽 땅이 사막과 황무지가 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네가 스스로 이르기를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만들었다 하도다 (겔29:3, 9) Thus hath said the Lord Jehovih, Behold, I am against thee, Pharaoh king of Egypt, the great whale that lieth in the midst of his rivers, who hath said, My river is mine own, and I have made it for myself. And the land of Egypt shall be for a solitude, and a waste, and they shall know that I am Jehovah, because he hath said, The river is mine, and I have made it. (Ezek. 29:3, 9)
이 구절이 AC.130에 인용된 이유는, ‘모든 것을 주님에게서 받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자기 것으로 돌리는 상태’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결과가 무엇인지를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는 대표적 표상’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에스겔서 29장의 ‘애굽 왕 바로’는 단순한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 스베덴보리의 상응에서 ‘기억 지식과 감각적 이성에 의존하는 인간’, 곧 외적 인간, 겉 사람을 표상합니다. 그리고 ‘강’은 그 사람이 의지하고 있는 지식의 흐름, 곧 기억 지식과 그로부터 나온 사고 체계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바로가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나를 위하여 만들었다’라고 말합니다. 이 한 문장이 핵심입니다.
이것은 AC.122–130 전체에서 반복되는 주제, 곧 ‘소유 의식의 왜곡’을 정확히 보여줍니다. 인간은 실제로는 아무 것도 스스로 만들어내지 못하고, 모든 것을 주님으로부터 받습니다. 그러나 외적 인간은 그것을 ‘내가 만든 것’, ‘내 능력의 결과’라고 여깁니다. 지식도, 판단도, 심지어 신앙까지도 자기 소유로 돌립니다. 이것이 바로 ‘선악을 스스로 알겠다’는 상태의 구체적 모습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단순히 교만을 꾸짖는 말이 아니라, ‘영적 질서가 뒤집힌 상태’를 드러냅니다. 원래 질서는 주님 → 지혜 → 지성 → 이성 → 기억 지식으로 내려오는 흐름인데, 여기서는 그 맨 아래 단계에 있는 기억 지식이 스스로 근원인 것처럼 주장합니다. 이것이 바로가 ‘강의 한가운데 누워 있는 큰 악어’로 묘사되는 이유입니다. 그는 흐름을 받아야 할 자리에 있으면서, 오히려 그 흐름의 주인인 것처럼 행동합니다.
이어지는 ‘애굽 땅이 황무지가 된다’는 선언은 그 결과를 보여줍니다. 기억 지식과 이성이 스스로를 근원으로 삼을 때, 겉으로는 풍부해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생명이 빠져나가 ‘내적으로는 황폐해집니다’. 왜냐하면 위로부터의 유입이 끊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심판의 목적은 단순한 파괴가 아니라, ‘내가 여호와인 줄 알게 하려 함’입니다. 곧, 근원을 다시 바로잡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AC.130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왜냐하면 앞에서 말한 ‘소유하지 말라’, ‘받은 것일 뿐이다’라는 원리가, 여기서는 반대로 뒤집힌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뒤집힘이 어떤 영적 결과를 낳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정리하면, 이 에스겔의 말씀은 AC.130에서 다음을 확증합니다. 인간이 자기 지식과 능력, 심지어 진리까지도 ‘내 것’이라고 부르는 순간, 그는 바로의 상태에 서게 되며, 그 결과는 필연적으로 내적 황폐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상태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하나, ‘모든 것이 주님에게서 온 것임을 다시 인정하는 것’뿐입니다.
2. ‘겔31:16, 18’
16내가 그를 구덩이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스올에 떨어뜨리던 때에 백성들이 그 떨어지는 소리로 말미암아 진동하게 하였고 물을 마시는 에덴의 모든 나무 곧 레바논의 뛰어나고 아름다운 나무들이 지하에서 위로를 받게 하였느니라, 18너의 영광과 위대함이 에덴의 나무들 중에서 어떤 것과 같은고 그러나 네가 에덴의 나무들과 함께 지하에 내려갈 것이요 거기에서 할례를 받지 못하고 칼에 죽임을 당한 자 가운데에 누우리라 이들은 바로와 그의 모든 군대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라 (겔31:16, 18) When I shall have made him descend into hell with them that descend into the pit; to whom art thou thus made like in glory and in greatness among the trees of Eden? yet shalt thou be made to descend with the trees of Eden into the lower earth, in the midst of the uncircumcised, with them that be slain by the sword. This is Pharaoh and all his crew, (Ezek. 31:16, 18)
이 구절이 AC.130에 인용된 이유는, 앞서 에스겔서 29장에서 보았던 ‘내 것이라’는 소유 의식이 ‘어디까지 나아가며, 결국 어떤 종말에 이르는가’를 한 단계 더 깊이, 그리고 더 완결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곧 AC.130의 주제인 ‘자기 것으로 삼는 상태의 결과’를, 이번에는 ‘에덴의 나무들’이라는 표현과 연결하여 드러내는 자리입니다.
여기서 ‘바로’는 여전히 기억 지식과 그로부터 나온 이성, 곧 외적 인간의 정점을 표상합니다. 그런데 이번 구절에서는 그가 단순히 교만한 상태에 머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에덴의 나무들과 함께 내려간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이 핵심입니다. ‘에덴의 나무들’은 원래 퍼셉션, 곧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인식과 그로부터 나온 모든 선과 진리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바로가 그 나무들과 ‘같은 자리’에 놓이면서도 결국 ‘지하로 내려간다’는 것은, ‘외적 인간이 내적 생명의 언어와 형식을 흉내 내거나 소유한 것처럼 보일 수는 있지만, 그 실제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떨어진다’는 것을 뜻합니다.
즉, 이 구절은 매우 중요한 역설을 보여줍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에덴의 나무들처럼 보이는 상태’, 곧 지혜롭고, 풍성하고, 영광스러워 보이는 상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근원이 주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일 때, 그 모든 것은 결국 동일한 방향으로 떨어집니다. 그래서 ‘너의 영광과 위대함이 에덴의 나무들 중 어떤 것과 같은고’라는 질문은, 사실상 ‘겉모습의 유사성과 내적 본질의 차이를 대비시키는 선언’입니다.
또한 ‘칼에 죽임을 당한 자 가운데 누우리라’는 표현은, 진리(칼)에 의해 드러나고 분리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참된 진리 앞에서 그가 의지하던 모든 것이 실제로는 생명 없는 것이었음이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할례받지 못한 자’라는 표현은, 내적 정결, 곧 사랑에 의해 정화되지 않은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는 곧, 아무리 지식과 이성이 발달했어도, ‘사랑과 연결되지 않은 상태는 결국 외적인 것에 머문다’는 의미입니다.
이 구절이 AC.130에서 중요한 이유는, 단순히 ‘내 것이라 하지 말라’는 권면을 넘어서, 그 태도가 지속될 때, ‘영적 구조 전체가 어떻게 붕괴되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내가 했다’는 생각으로 시작하지만, 그 결과는 결국 ‘생명과의 단절’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바로가 ‘그 모든 군대와 함께’ 내려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이 의지하던 모든 사고 체계와 지식 체계 전체가 함께 무너진다는 뜻입니다.
정리하면, 이 에스겔의 구절은 AC.130에서 다음을 확증합니다.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온 것을 자기 것으로 삼아, 겉으로는 에덴의 나무들처럼 보일지라도, 그 근원이 자기 자신일 때에는 결국 동일한 결말, 곧 내적 생명으로부터의 추락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선악을 스스로 알겠다’는 상태가 도달하는 최종적인 모습입니다.
3. ‘마술’
위 본문에 나오는 ‘그의 ‘넷째 강’(fourth river)은 거기서 비롯된 지혜인데, 말씀에서는 이것을 ‘마술’(magic)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애굽’(Egypt), 그러니까 이는 기억 지식을 뜻하는데, 지식이 마술적인 것이 된 이후에는 이러한 사람을 의미하게 됩니다. 이는 그가 자기로부터 지혜로워지고자 하기 때문이며, 이 점은 말씀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라는 이 부분 좀 설명해 주세요.
이 대목은 꽤 충격적으로 들리지만, 핵심은 ‘지식이나 이성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라, ‘그것들이 어디에서 출발하느냐가 바뀔 때 전혀 다른 성질로 변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넷째 강’, 곧 가장 바깥 단계에서 나타나는 어떤 ‘지혜’를 두고 그것을 ‘마술’이라 부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원래 질서를 먼저 다시 보셔야 이해가 또렷해집니다. 주님으로부터 지혜가 나오고, 그 지혜가 지성, 이성,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억 지식까지 내려와 생명을 줍니다. 이 흐름이 유지될 때에는, 바깥에 있는 기억 지식조차도 살아 있는 것이며, 이성은 밝고 건강하게 작동합니다. 그런데 이 질서가 뒤집히면, 곧 사람이 ‘기억 지식과 이성에서 출발하여 스스로 지혜로워지려 할 때’, 겉으로는 여전히 ‘지혜처럼 보이는 것’이 만들어집니다. 그러나 그 근원이 달라졌기 때문에, 그 성질도 달라집니다. 바로 이것을 스베덴보리는 ‘마술’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마술’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주술이나 초자연적 행위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 본질적으로는, ‘자기중심에서 나온 지식과 추론으로 현실을 지배하고, 진리를 만들어내려는 태도 전체’를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 ‘나는 스스로 알 수 있다’, ‘나는 내 지식으로 판단하고 결론낼 수 있다’는 상태가 극단으로 가면, 그것이 곧 ‘마술적 상태’가 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더 이상 주님으로부터 받지 않고, ‘자기 안에서 근원을 만들어내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애굽이 마술적인 것이 된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애굽’은 원래 기억 지식 자체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지식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빛을 잃고, 오히려 스스로를 근원으로 삼기 시작하면, 그것은 더 이상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사람을 속이고 지배하는 힘’이 됩니다. 겉으로는 매우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진리에서 점점 멀어지게 만듭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애굽과 바로가 종종 ‘마술사’, ‘술객’과 연결되는 이유입니다.
이 상태의 특징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무엇이든 설명할 수 있고 정당화할 수 있습니다. 둘째, 그래서 오히려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자기 안에서 완결된 체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AC.129에서 말한 ‘거짓된 원리를 전제로 삼으면 모든 지식이 그것을 지지하게 된다’는 구조와 정확히 이어집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넷째 강에서 비롯된 지혜’라고 부르는 이유 말인데요, 그것은 겉모습 때문입니다. 이 상태는 매우 ‘지혜로운 것처럼’ 보입니다. 풍부한 지식, 날카로운 분석, 설득력 있는 말 등, 모든 것이 갖춰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위에서 내려온 지혜가 아니라, 아래에서 조합된 지혜의 모양’입니다. 그래서 이름은 지혜이지만, 실제로는 생명을 주지 못합니다.
정리하면, 이 부분은 이렇게 이해하시면 가장 정확합니다.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받는 질서를 떠나, 기억 지식과 이성으로부터 스스로 지혜를 만들어내려 할 때, 그 결과로 나타나는 ‘지혜처럼 보이는 것’을 스베덴보리는 ‘마술’이라 부릅니다. 그것은 겉으로는 빛나지만, 실제로는 근원이 뒤틀린 상태이며, 사람을 진리에서 점점 멀어지게 만드는 힘입니다. 그래서 문제는 지식이 아니라, ‘지식의 출발점과 방향’입니다.
AC.129, 창2:17, ‘인간은 어떤 원리로 살아가는 존재, 그 출발점이 주님인가 자신인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2:17) AC.129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전제로 삼는 원리에 따라 지배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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