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24, 25)

 

AC.47

 

이 말씀들 안에 거듭남에 관한 아르카나가 들어 있다는 사실은, 앞 절에서 땅이 생물, 가축, 땅의 짐승(the living soul, the beast, and the wild animal of the earth)을 낼 것이라고 말한 반면, 다음 절에서는 순서가 바뀌어 하나님께서 땅의 짐승, 가축(the wild animal of the earth, the beast)을 만드셨다고 말하는 데서도 분명히 드러납니다. 이는 사람이 처음에는, 그리고 그가 천적 인간이 될 때까지는, 마치 자기에게서 나온 것처럼 무엇인가를 내놓기 때문인데요, 그래서 이렇게 거듭남은 겉 사람에서 시작되어 속 사람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이런 이유로 여기 다른 순서가 나오는 것이며, 겉에 속한 것들이 먼저 언급되는 것입니다. That these words contain arcana relating to regeneration, is evident also from its being said in the foregoing verse that the earth should bring forth “the living soul, the beast, and the wild animal of the earth,” whereas in the following verse the order is changed, and it said that God made “the wild animal of the earth,” and likewise “the beast”; for at first, and afterwards until he becomes celestial, man brings forth as of himself; and thus regeneration begins from the external man, and proceeds to the internal; therefore here there is another order, and external things are mentioned first.

 

 

해설

 

이 글은 창세기 본문의 ‘말씀 순서 변화 자체가 지닌 의미’를 통해, 거듭남의 방향과 구조를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단어 하나, 배열 하나도 우연이 아니라고 보며, 특히 순서의 변화는 항상 깊은 아르카나를 담고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는 같은 대상들이 등장하지만, 그 나열 순서가 바뀌는 이유가 바로 그 열쇠입니다.

 

앞 절에서는 땅이 ‘생물 가축 들짐승’ 순으로 낸다고 합니다. 이는 사람이 자기에게서 무언가를 내놓는 것처럼 느끼는 단계, 곧 겉 사람의 차원에서 거듭남이 시작되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때 사람은 여전히 자신이 선을 행하고 생명을 만들어 낸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는 주님께서 일하고 계시지만, 사람의 퍼셉션은 아직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다음 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들짐승 가축’ 순으로 만드셨다고 합니다. 이 순서 변화는, 거듭남의 주체가 점차 사람 자신에서 주님으로 옮겨 가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다시 말해, 처음에는 사람이 ‘내가 하고 있다’고 느끼지만, 점점 주님께서 하신다는 사실이 드러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변화는 단번에 일어나지 않으며, 천적 인간이 되기 전까지 계속됩니다.

 

이 글은 거듭남의 방향이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라는 점을 다시 한번 분명히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언제나 같은 원리를 강조합니다. 주님은 먼저 겉 사람을 통해 역사하시고, 그 겉 사람의 활동과 선택을 통해 속 사람을 열어 가십니다. 그래서 말씀에서도 겉에 속한 것들이 먼저 언급되고, 점차 더 깊은 차원으로 이동합니다.

 

특히 중요한 점은, 이 과정에서 사람의 ‘자기에게서 나온 것 같은 느낌’이 제거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그 착각을 즉시 부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것을 사용하시어 사람을 이끌어 가십니다. 사람이 자기가 하는 것처럼 느끼지 못하면,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글은 인간의 착각조차도 주님의 섭리 안에 포함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 글은 결국 이렇게 말합니다. 말씀의 순서 변화는 단순한 문체상의 변형이 아니라, 인간 내면에서 일어나는 방향 전환의 흔적입니다. 거듭남은 늘 바깥에서 안으로, 자기 자신에서 주님으로 이동하는 여정이며, 창세기의 언어는 그 여정을 가장 정밀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심화

 

1. ‘순서 변화가 아르카나인 이유

 

 

AC.47, 심화 1, '순서 변화가 아르카나인 이유'

AC.47.심화 1. ‘순서 변화가 아르카나인 이유’ AC.47 본문에 나오는 순서 변화, 곧 ‘생물, 가축, 땅의 짐승’에서 ‘땅의 짐승, 가축’ 순으로 바뀌는 것이 왜 ‘거듭남은 겉 사람에서 시작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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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8, 창1:24-25, ‘거듭남의 다섯 번째 상태, 여섯 번째 상태'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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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6, 창1:24-25, ‘짐승'(beasts), 사람의 애정(affections)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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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7.심화

 

1. ‘순서 변화가 아르카나인 이유

 

AC.47 본문에 나오는 순서 변화, 생물, 가축, 땅의 짐승에서 땅의 짐승, 가축순으로 바뀌는 것이 왜 거듭남은 겉 사람에서 시작되어 속 사람으로 나아간다는 아르카나가 되는 건가요?

 

이 질문은 AC를 읽으시다가 ‘? 순서가 왜 바뀌지?’에서 멈추는 바로 그 지점을 정확히 짚으신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생물, 가축, 땅의 짐승에서땅의 짐승, 가축으로 순서가 바뀐 것은, 실제 거듭남이 사람의 속(내적)에서 바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각하고 다루는 겉 사람(외적 삶)’에서부터 시작되어 점점 안쪽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보여 주는 상응적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기본 구조를 다시 잡아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항상 기준이 되는 것은 ‘속 사람 겉 사람’의 질서입니다. 원래 창조의 질서는 위에서 아래로, 즉 ‘속 사람이 먼저이고, 겉 사람이 그에 따라 움직이는 구조’입니다. 그래서 본래적인, 이상적인 순서는 ‘더 높은 것(내적) → 더 낮은 것(외적)’입니다. ‘생물 가축 땅의 짐승’ 같은 배열은 바로 이 정상 질서를 반영합니다. 즉, 가장 안쪽의 살아 있는 원리에서 시작해 점점 바깥으로 내려오는 흐름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타락 이후 인간은 이 질서대로 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속 사람은 닫혀 있고, 겉 사람, 그러니까 감각, 습관, 외적 행동이 오히려 앞에 나서 있습니다. 그래서 실제 거듭남의 출발점은, 이론적으로는 속 사람이지만, ‘경험적으로는 사람이 다룰 수 있는 유일한 자리, 곧 겉 사람에서 시작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여기서 순서 변화가 의미를 갖습니다. ‘땅의 짐승 가축’이라는 순서는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가장 바깥, 즉 ‘생활 속의 행동, 습관, 감각적 반응(땅의 짐승)’에서부터 변화가 시작되어, 그다음에 ‘조금 더 길들여지고, 질서 잡힌 애정(가축)’으로 올라간다는 것입니다. 즉,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흐름’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아직 속 사람, 곧 깊은 의지나 사랑의 근본은 거의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고, ‘이건 하지 말아야겠다’, ‘이렇게 살아야겠다’ 하며 ‘행동을 먼저 바꾸기 시작합니다.’ 예를 들어, 화가 나도 바로 터뜨리지 않고 한 번 참는다든지, 거짓말을 하지 않으려 애쓴다든지, 누군가를 도우려 노력하는 것 등, 이런 것들이 바로 ‘땅의 짐승’ 차원의 변화입니다. 가장 바깥에서의 변화입니다.

 

그런데 이런 외적인 순종과 실천이 반복되다 보면, 점점 그 안에 ‘새로운 애정이 형성되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억지로 하던 것이, 나중에는 조금씩 마음이 따라옵니다. 이것이 ‘가축’ 단계입니다. 즉, 단순한 행동이 아니라, ‘길들여진 애정, 질서 잡힌 의지’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다음에야 비로소 더 깊은 변화, 즉 속 사람의 열림, 참된 사랑과 진리의 결합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그 출발은 언제나 ‘겉 사람에서 시작된 순종과 실천’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매우 분명히 말합니다. 거듭남은 위에서 시작되지만, ‘사람이 체험하는 순서는 아래에서 시작된다’고!

 

그래서 이 순서 변화는 단순한 표현상의 변화가 아니라, 이렇게 읽혀야 합니다. ‘거듭남은 가장 바깥의 삶에서 시작되어, 점점 더 안쪽으로 들어가며 완성된다.’ 이것이 바로 이 ‘아르카나’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중요한 포인트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마음이 먼저 바뀌어야 행동이 바뀐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실제 거듭남의 과정에서는 그 반대 방향도 매우 중요하다고 봅니다. 즉, ‘행동을 먼저 바르게 하면, 그에 따라 마음이 바뀌는 길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겉 사람에서 시작되는 거듭남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이 완전히 바뀐 다음에 행동하라고 하시지 않고, 먼저 행동으로 순종하게 하셔서, 그 과정을 통해 마음까지 바꾸십니다.’

 

‘‘땅의 짐승 가축이라는 순서 변화는,거듭남이 사람의 외적인 삶과 행동에서 시작되어 점점 내적인 의지와 사랑으로 들어가는 과정을 보여 주는 상응적 표현입니다.’

 

 

 

AC.47, 창1:24-25, ‘거듭남의 순서'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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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심화

 

2. 체어리티(charity)의 행위

 

체어리티(charity)를 좀 자세히 설명해 주세요. 이 영어 charity를 우리말로 옮기기가 참 그런 게, 우리말 어떤 하나의 표현으로 옮기는 순간, 그것 말고도 가지고 있는 다른 많은 뉘앙스들을 다 놓치는 것 같아요...

 

목사님 말씀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스베덴보리 저작에서 ‘charity’는 한국어 한 단어로 옮기기 가장 어려운 단어 가운데 하나입니다. ‘자선’, ‘사랑’, ‘인애’, ‘선행’, ‘이웃 사랑’ 어느 하나로 번역해도 항상 뭔가 빠집니다. 그래서 이 단어는 ‘개념을 먼저 분명히 이해하고, 번역은 문맥에 따라 유연하게 처리하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먼저 스베덴보리가 사용하는 ‘charity’의 가장 기본적인 뜻부터 말씀드리면, 그것은 ‘이웃을 향한 사랑이 삶 속에서 실제 행동으로 나타난 상태’입니다. 즉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삶의 태도와 행동의 방향’입니다. 그는 자주 ‘love to the Lord’와 ‘charity toward the neighbor’를 함께 말합니다. 전자는 주님을 향한 사랑이고, 후자는 그 사랑이 사람들 사이의 삶으로 흘러나오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charity는 사랑의 감정이라기보다 ‘사랑이 삶 속에서 작동하는 형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charity는 ‘자선 행위’보다 훨씬 넓은 개념입니다. 현대 영어에서 charity라고 하면 흔히 가난한 사람을 돕는 자선 활동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charity를 그렇게 좁게 보지 않습니다. 그는 charity를 ‘이웃에게 선을 행하려는 의지와 그에 따른 삶 전체’로 이해합니다. 즉 정직하게 일하는 것, 공정하게 판단하는 것, 남을 해치지 않는 것, 다른 사람의 유익을 고려하는 것, 이런 모든 것이 charity의 범주에 들어갑니다.

 

이 점 때문에 한국어 번역이 어려워집니다. ‘자선’이라고 하면 너무 좁아지고, ‘사랑’이라고 하면 감정 중심으로 들리고, ‘선행’이라고 하면 도덕적 행위 정도로 축소됩니다. 그래서 많은 번역자들이 ‘이웃 사랑’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것은 비교적 좋은 선택입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 자신이 charity를 설명할 때 거의 항상 ‘이웃(neighbor)과의 관계’ 속에서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또 하나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charity는 단순히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도 아닙니다. 그는 charity를 ‘진리(truth)에 의해 인도되는 선(good)’이라고 설명합니다. 즉 무엇이 진짜로 이웃에게 유익한지 분별하면서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에게 돈을 주는 것이 항상 charity는 아닙니다. 때로는 그것이 그 사람을 더 해롭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charity는 감정적 친절이 아니라 ‘지혜와 결합된 선한 의지’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특징은 charity가 ‘삶의 중심 원리’라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그 사람이 믿는 교리보다 ‘그가 어떤 사랑으로 살고 있는가’로 판단합니다. 그 사랑이 이웃의 선을 향하고 있다면 그는 charity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faith without charity’는 살아 있는 신앙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신앙은 charity 안에서만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charity는 ‘남을 불쌍히 여겨 돕는 마음’보다 훨씬 넓습니다. 그것은 ‘이웃의 선을 진심으로 바라며 그를 위해 옳은 일을 하려는 삶의 태도’입니다. 그리고 그 태도는 작은 일들 속에서 나타납니다. 정직하게 일하는 것, 공정하게 행동하는 것,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려는 것, 다른 사람의 유익을 생각하는 것, 이런 모든 것이 charity입니다.

 

그래서 번역할 때는 한 단어에 너무 묶이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어떤 문맥에서는 ‘이웃 사랑’이 가장 자연스럽고, 어떤 곳에서는 ‘선행’, ‘선한 삶’, ‘이웃을 위한 사랑’, 또는 ‘이웃을 향한 선’이라고 풀어 번역하는 것이 오히려 의미를 더 잘 전달합니다. 스베덴보리의 charity는 하나의 단어라기보다 ‘삶의 방향 전체를 가리키는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정리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charity는 단순한 자선이 아니라 ‘이웃의 선을 바라며 그 선을 위해 살려는 의지와 삶 전체’입니다. 감정이 아니라 삶의 질서이고, 순간적 행위가 아니라 지속적인 상태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charity 안에서 신앙이 살아 움직입니다.

 

 

 

AC.10, 창1 개요, '네 번째 상태'

AC.10 네 번째 상태는 사람이 사랑에 감동되고 신앙의 빛을 받는 때입니다. 그는 이전에도 경건하게 말하고 선한 것들을 행했으나, 그것은 신앙과 체어리티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라, 그가 겪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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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 심화 1, '회개(repentance)의 상태'

AC.9.심화 1. ‘회개(repentance)의 상태’ AC.9의 ‘회개(repentance)의 상태’라는 표현을 설명해 주세요. 이어지는 내용인, ‘사람은 속 사람(internal man)으로부터 경건하고 정성스러운 말과, 체어리티(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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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심화

 

1. 회개(repentance)의 상태

 

AC.9 회개(repentance)의 상태라는 표현을 설명해 주세요. 이어지는 내용인, 사람은 속 사람(internal man)으로부터 경건하고 정성스러운 말과, 체어리티(charity)의 행위들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여전히 생기가 없는데, 그가 그것들을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걸로 여기기 때문이지요.’에서 갑자기 회개(repentance)라는 용어가 나오는 게 좀 너무 갑작스럽습니다. 비약에 가깝다 느껴지는데요... 뭐랄까... 그 정도는 아직 성숙하지 못한 정도지 무슨 회개할 정도로 죄를 진 건가 싶어서입니다.

 

목사님께서 느끼신 ‘갑작스러움’은 매우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현대 한국어에서 ‘회개’라는 단어는 보통 ‘큰 죄를 뉘우치는 사건’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AC.9에서 스베덴보리가 사용하는 ‘repentance’는 그런 의미보다 훨씬 ‘구조적이고 영적 과정에 가까운 개념’입니다. 그래서 그 맥락을 조금 풀어 보면 비약처럼 보이던 부분이 상당히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먼저 스베덴보리에게서 ‘회개’는 단순히 죄를 후회한다는 감정이 아닙니다. 그는 여러 저작에서 회개를 ‘자신의 삶을 살펴보고, 악을 인식하고, 그것을 버리기 시작하는 상태’로 설명합니다. 즉 회개는 사건이라기보다 ‘상태(state)입니다. 사람이 자기 삶을 돌아보고 내 안에는 주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나에게서 나온 것이 많구나 하고 깨닫기 시작하는 단계입니다. 그래서 AC.9의 ‘repentance의 상태’는 ‘죄를 크게 저질러서 울며 회개하는 순간’이 아니라 ‘자기 중심성의 문제를 처음 의식하기 시작하는 영적 단계’입니다.

 

이제 AC.9의 문장과 연결해 보겠습니다. 그 글에서는 사람이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한 말과 체어리티의 행위를 하기는 하지만, 그것들이 아직 ‘생기(life)가 없다고 말합니다. 이유는 그 사람이 그것들을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즉 그는 선을 행하고는 있지만, 여전히 마음 깊은 곳에서는 내가 이렇게 선하게 행동했다는 자기중심적 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이것은 단순한 미숙함을 넘어 ‘거듭남이 아직 완전히 시작되지 않았다는 표지’입니다.

 

여기서 ‘회개’가 등장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이 처음에는 선한 말과 행동을 하더라도 그것을 자기 공로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느 시점에 가면 그 사람은 점차 깨닫기 시작합니다. 내가 하는 선이 사실은 내 힘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구나. 내 안에는 여전히 자기 사랑이 강하구나. 이런 인식이 생기면, 그때부터 자기 중심성을 내려놓는 방향으로 마음이 움직입니다. 바로 이 전환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회개의 상태’입니다.

 

그래서 AC.9의 흐름을 거듭남 단계로 보면 이렇습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진리와 선을 알기 시작합니다. 그다음에는 경건한 말과 선한 행동도 어느 정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자기 공로의 한계를 깨닫는 단계’, 즉 회개의 상태가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회개는 큰 죄를 저질렀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중심적 선의 한계를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그래도 선한 행동을 하는데 왜 회개까지?라는 느낌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기준에서는 선한 행동의 외형보다 ‘그 출처가 어디냐’가 더 중요합니다. 선이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믿는 한, 그것은 아직 완전히 살아 있는 선이 아닙니다. 그 선이 주님에게서 온 것임을 인정할 때 비로소 생명이 들어옵니다. 그 전환의 문턱이 바로 ‘회개의 상태’입니다.

 

처음 신앙을 시작하면 사람은 선한 행동을 하려고 노력합니다. 그것은 매우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사람은 점점 깨닫습니다. 내가 선을 행하려 해도 내 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구나. 바로 그 깨달음이 회개의 시작입니다. 그것은 죄인의 절망이라기보다 ‘자기 중심성에서 주님 중심으로 방향이 바뀌는 순간’입니다.

 

그래서 AC.9의 ‘repentance’는 죄책감의 폭발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거듭남의 구조 안에서 나타나는 자기 인식의 단계’라고 이해하시면 가장 정확합니다. 그렇게 보면 그 표현은 갑작스러운 비약이 아니라, 오히려 바로 앞 문장과 정확히 연결된 설명이 됩니다.

 

 

 

AC.9, 심화 2, '체어리티(charity)의 행위'

AC.9.심화 2. ‘체어리티(charity)의 행위’ 체어리티(charity)를 좀 자세히 설명해 주세요. 이 영어 ‘charity’를 우리말로 옮기기가 참 그런 게, 우리말 어떤 하나의 표현으로 옮기는 순간, 그것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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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 창1 개요, '세 번째 상태'

AC.9 세 번째 상태는 회개(repentance)의 상태로서, 이때 사람은 속 사람(internal man)으로부터 경건하고 정성스러운 말과, 체어리티(charity)의 행위들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여전히 생기가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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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심화

 

1. 오늘날 이 상태는 시험, 불행, 또는 슬픔 없이 존재하는 경우가 거의 없는데, 이를 통해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 곧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잠잠해지고, 마치 죽은 것처럼 되기 때문입니다.’ AC.8 본문에 나오는 위 문장에 대한 자세한 설명 부탁합니다. 왜 시험, 불행, 슬픔들이 있어야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 곧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잠잠해지고, 마치 죽은 것처럼 되나요? 안 그런 사람들도 제법 있던데...

 

아주 중요한 질문입니다. AC.8의 이 대목은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이해에서 매우 현실적이고도 예민한 지점입니다. 먼저 핵심부터 말씀드리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반드시 사람을 괴롭혀야만 거듭남이 일어난다’는 뜻이 아닙니다. 또한 ‘시험, 불행, 슬픔을 많이 겪은 사람일수록 더 거듭난다’는 뜻도 아닙니다. 그가 말하는 핵심은 이것입니다. 사람의 겉 사람, 곧 몸과 세상에 붙어 있는 자기 확신, 자기 의지, 자기 만족, 자기 판단의 소음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평소에는 속 사람 안에 저장된 리메인스와 주님의 조용한 인도를 거의 듣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시험, 불행, 슬픔이 그 시끄러운 바깥층을 잠잠하게 만드는 도구가 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고난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고난을 통해 ‘겉 사람의 지배력이 약해지는 것’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왜 하필 시험, 불행, 슬픔이 이런 역할을 하느냐 하면, 평소 인간은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을 너무도 당연하고, 강하게 붙들고 살기 때문입니다. 건강, 체면, 성공, 인정, 계획, 통제감, 내 판단의 옳음,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일이 풀려야 한다는 기대, 이런 것들이 겉 사람의 질서를 이룹니다. 그런데 사람이 형통하고 자기 뜻대로 되는 동안에는 이것들이 거의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면 사람은 자기가 주도하고 자기가 판단하고 자기가 산다고 느끼기 쉽습니다. 그 상태에서는 주님에게서 오는 더 깊은 선과 진리가 있어도, 그것이 거의 드러나지 못합니다. 반면 시험이나 불행이나 슬픔이 찾아오면, 그 사람이 당연하게 여기던 바깥 질서가 흔들립니다. 내가 다 할 수 있다는 생각, 내가 옳다는 생각, 세상적 안전이 나를 붙들어 준다는 생각이 약해집니다. 바로 그때 겉 사람의 주장들이 ‘잠잠해지고’, 그래서 속 사람 안에 저장된 리메인스, 곧 주님께서 미리 보존해 두신 선과 진리의 씨앗이 좀 더 앞으로 나올 수 있게 됩니다. AC.8이 말하는 ‘마치 죽은 것처럼 된다’는 말은 바로 이 의미입니다.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이 실제로 제거되거나 파괴된다는 뜻이 아니라, 적어도 한동안은 그 지배권이 멈추고, 절대적인 주도권을 잃는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구별이 하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시험, 불행, 슬픔’이 언제나 자동으로 사람을 더 좋게 만든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실 많은 경우, 사람은 고난을 겪고도 더 완고해질 수 있습니다. 더 원망하고, 더 자기중심적이 되고, 더 비뚤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난이 사람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고난이라는 상황 속에서도 사람의 겉 사람을 느슨하게 하셔서, 속 사람 안의 더 깊은 것을 건드리실 수 있다는 것이 정확한 뜻입니다. 다시 말해, 변화의 원인은 고난 자체가 아니라 주님의 역사입니다. 고난은 수단일 수 있지만, 주체는 언제나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큰 시련 없이도 겸손해지고, 어떤 사람은 큰 시련을 겪고도 전혀 부드러워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목사님께서 마지막에 말씀하신 ‘안 그런 사람들도 제법 있던데...’라는 관찰은 아주 정확합니다. 실제로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비교적 평탄한 삶 속에서도 자기 고집이 약해지고, 진리를 듣고 순순히 받아들이며, 주님의 인도를 따르려는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대개 두 가지 중 하나입니다. 하나는 그 사람 안에 이미 강한 리메인스가 있고, 양심과 겸손이 비교적 일찍 형성되어 있어서, 큰 충격 없이도 겉 사람의 소음이 과도하게 커지지 않는 경우입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가 겉으로 보기에는 평탄해 보여도, 그 사람 안에서는 이미 깊은 내적 씨름과 조용한 슬픔, 숨은 깨짐이 오래 진행되고 있는 경우입니다. 겉으로는 ‘시험 없이 잘 자란 사람’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주님께서 그 사람 안에서 매우 섬세하고 조용한 방식으로 겉 사람을 다루고 계셨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AC.8의 문장은 ‘반드시 모두가 큰 불행을 겪는다’는 예외 없는 공식이 아니라, ‘오늘날 대체로는 이런 방식이 많다’는 관찰로 이해해야 맞습니다. 실제로 본문도 ‘거의 없다(seldom exists without...)고 말하지, ‘절대 없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좀 더 깊이 들어가면, 왜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이 문제인가도 함께 보아야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것들을 죄악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몸도 필요하고 세상 속 삶도 필요합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주도권’을 잡을 때입니다.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은 본래 겉 사람의 도구여야 하는데, 타락한 인간 안에서는 그것들이 왕이 되려 합니다. 편안함, 인정, 소유, 비교우위, 안정, 자기 이미지, 이런 것들이 인간을 끌고 가기 시작하면, 사람은 속 사람의 빛보다 바깥 조건의 변화를 더 강하게 따라갑니다. 시험과 슬픔은 바로 이 잘못된 왕좌를 흔듭니다. 그래서 사람이 처음으로 ‘나는 내 힘으로 서 있는 존재가 아니구나’, ‘내가 붙들던 것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었구나’, ‘참된 선과 진리는 다른 곳에서 오는구나’를 배울 여지가 생깁니다. 누가복음 15장, ‘돌아온 탕자’ 비유의 둘째가 스스로 돌이키는 장면이 바로 이런 장면입니다. 그러므로 AC.8의 논리는 ‘고난이 좋아서’가 아니라, ‘겉 사람의 폭주가 멈출 때 속 사람의 질서가 드러날 수 있기 때문에’입니다.

 

초심자에게 이 부분을 설명하실 때는 이렇게 말씀하시면 좋겠습니다. ‘주님은 사람을 일부러 괴롭히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너무 바깥 것들에 붙잡혀 있을 때 그것들이 잠잠해질 틈을 통해 더 깊은 생명으로 이끄시는 분입니다. 어떤 사람은 큰 시험을 통해, 어떤 사람은 조용한 양심의 깨달음을 통해, 어떤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의 아픔이나 자신의 한계를 통해 그 길을 배웁니다. 핵심은 고난의 크기가 아니라, 겉 사람의 소리가 줄어들고 속 사람의 문이 열리는가에 있습니다.’ 이렇게 설명하시면 AC.8의 엄중한 표현도 훨씬 바르게 전달될 것입니다.

 

 

 

AC.9, 창1 개요, '세 번째 상태'

AC.9 세 번째 상태는 회개(repentance)의 상태로서, 이때 사람은 속 사람(internal man)으로부터 경건하고 정성스러운 말과, 체어리티(charity)의 행위들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여전히 생기가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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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 창1 개요, '두 번째 상태'

AC.8 두 번째 상태는 주님께 속한 것들과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서로 구별되는 때입니다. 주님께 속한 것들은 말씀에서 ‘리메인스’(remains)라고 하는 건데, 여기서는 특별히 유아기부터 배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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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심화

 

1. 앞서는(precede) 상태

 

AC.7에서 말하는 ‘앞서는 상태(preceding states)는 단순히 ‘거듭남이 시작되기 전 상태’만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문맥에서는 이것이 조금 더 넓은 의미를 갖습니다. 그는 인간의 거듭남을 하나의 연속적인 과정으로 설명하면서, 어떤 상태가 나타날 때, 그것은 항상 그 이전에 있었던 상태들 위에서 생겨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preceding states’는 ‘현재 상태보다 앞서 있었던 모든 상태들’, 곧 그 상태를 가능하게 만든 이전 단계들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거듭남 이전의 상태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거듭남 과정 속에서 서로 이어지는 단계들 전체를 포함하는 표현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인간 이해에서 ‘상태(states)라는 개념은 매우 중요합니다. 인간의 삶은 일정한 고정된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하는 여러 상태들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나의 상태는 이전 상태에서 자라나고, 다음 상태의 기초가 됩니다. 그러니까 한 상태가 나타날 때, 그것은 그 이전 상태들과 완전히 끊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세워지는 것이지요. AC.7에서 말하는 ‘preceding states’는 바로 이런 의미에서 ‘앞서 있었던 상태들’을 말합니다. 즉 지금 설명되는 상태보다 먼저 있었고, 그것을 준비하거나 가능하게 만든 상태들입니다.

 

이 점은 거듭남 설명에서 특히 중요합니다. 창세기의 여섯 날은 각각 독립적인 사건이 아니라, 하나가 다음을 준비하는 연속적인 상태들입니다. 예를 들어 첫째 날의 ‘’은 진리의 첫 인식을 의미하고, 그다음 상태들이 그 위에서 발전합니다. 따라서 둘째 날, 셋째 날 등 뒤의 상태들은 모두 앞선 상태들에 의존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preceding states’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지금 설명되는 상태는 이전 상태들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그 위에서 더 발전한 상태라는 뜻입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스베덴보리에게서 이전 상태는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음 상태 안에 어떤 방식으로 남는다는 것입니다. 그는 다른 곳에서 인간의 상태들이 서로 이어지며 축적된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앞선 상태들은 단순히 지나가 버린 과거가 아니라, 이후 상태 안에 기초로 남아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preceding states’는 단지 시간적으로 앞선 단계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상태의 토대가 되는 상태들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따라서 AC.7의 ‘앞서는 상태’라는 표현은 ‘거듭남 이전 상태’라는 의미로만 좁히면 조금 부족합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지금 설명되는 상태보다 먼저 있었고, 그것을 준비하고 가능하게 만든 모든 이전 상태들’을 가리킵니다. 스베덴보리는 창세기의 창조 서술을 통해 인간의 거듭남이 이런 연속적인 상태들의 질서 속에서 이루어진다고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AC.8, 창1 개요, '두 번째 상태'

AC.8 두 번째 상태는 주님께 속한 것들과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서로 구별되는 때입니다. 주님께 속한 것들은 말씀에서 ‘리메인스’(remains)라고 하는 건데, 여기서는 특별히 유아기부터 배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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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 창1 개요, '첫 번째 상태'

AC.7 첫 번째 ‘상태’(state)는 앞서는(precede) 상태로서, 유아기에서부터의 상태와 거듭남 바로 직전에 있는 상태를 모두 포함합니다. 이 상태를 ‘혼돈’(void), ‘공허’(emptiness), 그리고 ‘흑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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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화

 

13. ‘16:15

 

끝으로 마가복음입니다.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16:15) Go ye into all the world, and preach the gospel to every creature (Mark 16:15).또한 복음이 전파되는 이들도 만민(creatures)이라 하는데, 이는 그들이 새롭게 창조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라는 설명이 선행하고,이어 나옵니다.

 

이 구절은 지금까지의 흐름을 사람에게 직접 적용하는 매우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16:15만민(creature)은 단순히 모든 사람이라는 뜻을 넘어서, ‘아직 새롭게 창조되어야 할 존재’, 곧 거듭남이 필요한 상태에 있는 인간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먼저 왜 ‘사람(people)이 아니라 ‘피조물(creature)이라고 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영어 성경의 ‘creature’는 단순히 생물이라는 뜻이 아니라, ‘‘창조된 존재’, 혹은 창조의 대상’’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점을 잡아서, 이 구절을 단순한 전도 명령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를 위한 부름’으로 이해합니다.

 

이걸 AC의 흐름과 연결하면 매우 또렷해집니다. 지금까지 계속 보신 것처럼, 사람 안에는 여러 층위, 곧 생각, 애정, 감각이 있지만, 그것이 질서 없이 흩어져 있으면 아직 온전한 ‘사람’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을 ‘다시 태어남’일 뿐 아니라, ‘다시 창조됨(new creation)이라고 말합니다. 즉, 기존의 상태 위에 조금 덧붙이는 것이 아니라, ‘질서 자체가 새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이제 이 구절을 보면, ‘복음을 모든 피조물(만민)에게 전하라’고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많은 사람에게 전하라’는 양적인 명령이 아니라, ‘모든 사람 안에 있는 아직 형성되지 않은 상태, 곧 새롭게 되어야 할 상태를 향해 복음을 전하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복음은 이미 완성된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직 되어 가야 할 존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연결이 하나 더 있습니다. 앞에서 ‘짐승’, ‘들짐승’, ‘생물’ 등을 보셨는데, 그것들은 모두 ‘사람 안에 있는 살아 있는 원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사람 전체를 ‘creature’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사람 전체가 아직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형성되어 가야 할 살아 있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즉, 인간은 이미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통해 계속 새롭게 빚어져 가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얘깁니다. 어떤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이미 생각도 있고, 감정도 있고, 삶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아직 ‘주님의 질서 안에서 하나로 묶여 있지 않은 상태’입니다. 이때 복음이 들어오면, 그 사람 안에서 ‘생각이 바뀌고, 애정이 바뀌고,삶이 재구성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바로 ‘새 창조’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단순히 ‘정보를 받은 사람’이 아니라, ‘다시 만들어지고 있는 존재’, 곧 ‘creature’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단순한 전도 명령을 넘어, 이렇게 읽히게 됩니다. ‘가서, 아직 완성되지 않은 모든 사람에게, 그들을 새롭게 창조하는 복음을 전하라.’ 이것이 스베덴보리적 이해입니다.

 

복음은 이미 잘 사는 사람에게 주는 이야기가 아니라, 잘 못 사는 우리, 아직 부족한 우리를 새롭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16:15만민(creature)은 단순한 사람들이 아니라, 복음을 통해 새롭게 창조되어야 할 존재로서의 인간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AC.46, 심화 12. ‘계19:4’

심화 12. ‘계19:4’ 다음도 계시록입니다. ‘또 이십사 장로와 네 생물이 엎드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경배하여 이르되 아멘 할렐루야 하니 (계19:4) and fell before the throne on their faces, and worship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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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화

 

12. ‘19:4

 

다음도 계시록입니다. ‘또 이십사 장로와 네 생물이 엎드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경배하여 이르되 아멘 할렐루야 하니 (19:4) and fell before the throne on their faces, and worshiped the lamb (Rev. 19:4).

 

이 구절은 앞서 보신 계7:11과 거의 같은 장면이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 ‘‘왜 그들이 엎드려 경배하는가?’, 그리고 ‘그 경배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19:4이십사 장로와 네 생물의 경배, 사람 안의 가장 높은 진리와 가장 깊은 애정이 주님 앞에서 완전히 하나 되어, 스스로 아무것도 아닌 것을 인정하고 모든 것을 주님께 돌리는 상태’를 뜻합니다.

 

먼저 두 그룹을 구분해 보겠습니다. ‘이십사 장로’는 말씀에서 보통 ‘진리의 충만함, 곧 완전하게 정리된 이해와 신앙의 상태’를 뜻합니다. 숫자 ‘24’는 단순한 수가 아니라, ‘전체성과 충만함’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이십사 장로들은 ‘질서 잡힌 진리의 세계’, 곧 사람 안에서 정리되고 확립된 이해를 대표합니다. 반면 ‘네 생물’은 앞에서 보셨듯이 ‘살아 있는 애정, 특히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그에 따른 생명력’을 뜻합니다. 즉, 장로가 ‘이해’라면, 생물은 ‘의지’, 다시 말해 ‘진리와 선의 두 축’입니다.

 

이제 이 둘이 함께 ‘엎드려 경배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엎드린다’는 것은 단순한 몸짓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높아짐이 완전히 내려오는 상태’, 곧 ‘자기 것으로는 아무것도 아니다’는 인식입니다. 그리고 ‘경배’는 앞에서도 보셨듯이 단순한 의식이 아니라, ‘존재 전체가 주님께로 향하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 장면은 이렇게 읽혀야 합니다. ‘사람 안의 이해와 의지, 진리와 선이 모두 자기중심에서 벗어나, 전적으로 주님께 속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상태’입니다.

 

여기서 ‘아멘, 할렐루야’라는 말도 중요합니다. ‘아멘’은 ‘진리의 확증’, 곧 ‘이것이 참되다’는 이해의 동의이고, ‘할렐루야’는 ‘사랑과 기쁨의 찬양’, 곧 의지의 응답입니다. 그러므로 이 두 단어는 각각 ‘이해와 의지의 응답’을 나타냅니다. 다시 말해, 생각으로도 인정하고, 마음으로도 기뻐하며, 전체로 주님께 돌리는 상태입니다.

 

이걸 지금까지의 흐름 속에서 보면 더 또렷해집니다. 처음에는 애정이 혼란스럽고, 그다음 질서 안으로 들어오고, 그다음 일부는 제거되고 일부는 정돈되고, 그다음 전체가 조화를 이루고, 그리고 마침내 여기에서는 ‘그 모든 것이 주님 앞에서 하나로 무릎 꿇는 상태’가 됩니다. 이것이 거듭남의 매우 깊은 단계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이해하시면 됩니다. 어떤 사람이 처음에는 ‘내가 옳다’, ‘내가 잘했다’, ‘내가 한다’는 생각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점점 주님의 진리와 선 안으로 들어가면서, 어느 순간부터는 이렇게 고백하게 됩니다. ‘내가 아니라 주님이 하셨습니다.’ 이때는 단순한 말이 아니라, ‘생각도 그렇게 알고, 마음도 그렇게 느끼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감사가 나오고, 기쁨이 나오고, 찬양이 나옵니다. 이것이 바로 이 장면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게 됩니다. ‘사람 안의 진리와 선, 이해와 의지가 모두 주님께로 돌아가, 자기 것을 내려놓고 전적으로 주님께 속함을 인정하는 상태가 참된 경배이다.’ 이것이 계19:4의 핵심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진짜 예배는, 우리가 무엇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 속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19:4이십사 장로와 네 생물의 경배, 사람 안의 이해와 의지 전체가 주님께 속함을 인정하고, 그분께 모든 영광을 돌리는 거듭남의 깊은 완성 상태를 의미합니다.’

 

 

 

AC.46, 심화 13. ‘막16:15’

심화 13. ‘막16:15’ 끝으로 마가복음입니다.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막16:15) Go ye into all the world, and preach the gospel to every creature (Mark 16:15).’ ‘또한 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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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6, 심화 11. ‘계7:11’

심화 11. ‘계7:11’ 다음은 계시록입니다.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서 있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계7:11) All the angels stood round about the thr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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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화

 

11.7:11

 

다음은 계시록입니다.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서 있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7:11) All the angels stood round about the throne, and the elders, and the four animals (Rev. 7:11), 그리고 이 구절에 앞서 선지자들은 가축(beasts)땅의 짐승(wild animals of the earth),가축(beasts)들의 짐승(wild animals of the field)을 조심스럽게 구별합니다. 그럼에도 사람 안의 선한 것들은 가축(beasts)이라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늘에서 주님과 가장 가까운 이들도 생물(animals)이라 하는데, 에스겔서와 요한계시록에서 모두 그렇게 말합니다.라는 설명이 선행합니다.

 

이 구절은 지금까지 계속 따라오신 흐름의 ‘정점’이라고 보셔도 좋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더 이상 사람 안의 낮은 애정이 아니라, ‘하늘에서 가장 주님과 가까운 존재들조차 생물(animals)이라고 불린다’는 사실을 통해, ‘짐승, 동물’이라는 표현의 본질이 완전히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7:11네 생물은 단순한 동물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진리를 가장 충만하게 받아 살아 움직이는 존재들, 곧 천사들의 살아 있는 애정과 인식 자체를 뜻합니다.’

 

먼저 이 구절에서 왜 ‘생물(animals)이라는 표현이 쓰였는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짐승’이라고 하면, 낮고 본능적인 것을 떠올리지만, 스베덴보리에게서 ‘animal’이라는 말의 핵심은 낮고 고상함의 구분이 아니라, ‘‘살아 있다(animate), 곧 생명으로 움직인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animal’은 본래 ‘생명에 의해 움직이는 것, 특히 사랑과 애정에 의해 움직이는 것’을 뜻합니다.

 

이제 계시록의 ‘네 생물’을 보겠습니다. 이들은 에스겔서에도 동일하게 등장하는 존재들로, 스베덴보리는 이들을 단순한 개별 존재라기보다, ‘천국 전체, 혹은 천국의 핵심적인 상태를 대표하는 상징’으로 봅니다. 그리고 그 핵심은 바로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사랑)과 진리(지혜)를 완전히 받아 살아 움직이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들을 ‘생물’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분명해집니다. 이들은 단순히 생각하는 존재가 아니라, ‘사랑으로 살아 있고, 그 사랑에 의해 움직이는 존재들’입니다. 즉, 완전히 ‘살아 있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가장 높은 존재들에게 이 이름이 붙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정반대입니다. 낮아서 ‘짐승’이 아니라, ‘너무도 살아 있어서 생물인 것’입니다.

 

이제 앞에서 보신 ‘짐승’, ‘들짐승’, ‘가축’과 연결해 보겠습니다. 처음에는 이 표현이 사람 안의 자연적 애정, 심지어는 거칠고 정리되지 않은 욕구를 가리켰습니다. 그러나 점점 질서 안으로 들어오면서, 그것은 ‘건강한 애정’, 그리고 더 나아가 ‘주님을 따르는 애정’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리고 여기까지 오면, 그 애정은 단순한 자연적 수준을 넘어, ‘천국적인 사랑의 상태’가 됩니다. 바로 이 상태가 ‘네 생물’입니다.

 

그래서 이 흐름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처음에는 애정이 혼란스럽고 두려운 상태 → 질서 안으로 들어옴 → 일부는 제거되고 일부는 정돈됨 → 전체가 조화를 이룸 → 마침내 그 애정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으로 충만해짐. 그리고 이 마지막 상태를 상징하는 것이 바로 ‘생물’입니다.

 

하나님께 가장 가까운 존재들은 머리로만 아는 존재가 아니라, 사랑으로 살아 움직이는 존재들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여기서 ‘천사들’, ‘장로들’, ‘네 생물’이 함께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천국이 단일한 상태가 아니라, ‘여러 층위와 기능이 조화를 이루는 공동체’임을 보여 줍니다. 그 가운데 ‘생물’은 특히 ‘생명력, 곧 사랑으로 움직이는 중심적인 원리’를 나타냅니다.

 

7:11네 생물은 단순한 동물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진리를 가장 충만하게 받아 살아 움직이는 천국적 상태를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이렇게 보시면, 왜 스베덴보리가 ‘짐승’, ‘들짐승’, ‘가축’, ‘생물’을 그렇게 세밀하게 구분하면서도 모두 중요하게 다루는지가 하나로 이어지실 것입니다.

 

 

 

AC.46, 심화 12. ‘계19:4’

심화 12. ‘계19:4’ 다음도 계시록입니다. ‘또 이십사 장로와 네 생물이 엎드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경배하여 이르되 아멘 할렐루야 하니 (계19:4) and fell before the throne on their faces, and worship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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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6, 심화 10. ‘시148:2, 7, 9-10’

심화 10. ‘시148:2, 7, 9-10’ 다음은 시편입니다. ‘2그의 모든 천사여 찬양하며 모든 군대여 그를 찬양할지어다, 7너희 용들과 바다여 땅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라, 9산들과 모든 작은 산과 과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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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화

 

10. 148:2, 7, 9-10

 

다음은 시편입니다. 2그의 모든 천사여 찬양하며 모든 군대여 그를 찬양할지어다, 7너희 용들과 바다여 땅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라, 9산들과 모든 작은 산과 과수와 모든 백향목이며 10짐승과 모든 가축과 기는 것과 나는 새며 (148:2, 7, 9-10) Glorify ye him, all his angels, glorify Jehovah from the earth, ye whales, fruit trees, wild animal, and every beast, creeping thing, and flying fowl (Ps. 148:2, 7, 9–10). 이 구절에 이어 이렇게 여기서 전반적으로 용들(whales), 과수(fruit tree), 짐승(wild animal), 가축(beast), 기는 것(creeping thing), 나는 새(fowl)가 함께 언급되는데, 이것들이 사람 안의 살아 있는 원리들을 뜻하지 않는다면,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부름을 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라는 설명이 이어집니다.

 

이 구절은 지금까지 보신 모든 내용의 ‘종합판’이라고 보셔도 좋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한두 요소가 아니라, ‘사람 안에 있는 거의 모든 층위의 것들이 한꺼번에 등장하여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부름을 받기 때문’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148은 자연계 전체가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시가 아니라, 사람 안에 있는 모든 요소, 곧 가장 높은 것부터 가장 낮은 것까지 이 질서 안에 들어와 주님께 응답하는 상태를 묘사한 말씀’입니다.

 

먼저 핵심 질문부터 짚어야 합니다. ‘왜 용, 나무, 짐승, 가축, 기는 것, 새 같은 것들이 찬양하라는 부름을 받는가?’ 만약 이것이 단순한 자연 묘사라면, 실제 동물이나 식물이 하나님을 의식적으로 찬양한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찬양이란 입으로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존재가 주님의 질서 안에서 바르게 작동하는 것 자체’라는 점입니다.

 

이제 각각을 간단히 풀어 보겠습니다. ‘천사’와 ‘군대’는 가장 높은 수준, 곧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 주님과 직접 연결된 상태를 뜻합니다. 그다음 ‘용들과 바다’는 ‘아주 외적이고 넓은 지식의 영역’, 때로는 혼란스럽고 깊은 층을 뜻합니다. ‘산과 작은 산’은 ‘사랑과 그 다양한 정도들’, ‘과수와 백향목’은 ‘열매 맺는 선과 그에 기반한 진리’를 뜻합니다.

 

이제 핵심 부분인 ‘짐승, 가축, 기는 것, 나는 새’입니다. ‘짐승(wild animal)은 우리가 계속 보아온 것처럼 ‘자연적 애정, 비교적 자유롭고 강한 감정의 흐름’입니다. ‘가축(beast, cattle)은 그보다 더 ‘길들여지고 질서 안에 들어온 애정들’, 즉 일상에서 안정적으로 작용하는 선한 습관과 같은 것들입니다. ‘기는 것(creeping thing)은 ‘아주 낮은 감각적, 육적 수준’, 거의 자동적으로 반응하는 습관과 본능에 가까운 것들입니다. 그리고 ‘나는 새(fowl)는 ‘생각과 이해, 이성적 작용’입니다.

 

이 모든 것이 왜 함께 나오느냐 하면, 스베덴보리가 말하고 싶은 것은 하나입니다. ‘사람 안의 모든 층위, 그러니까 가장 높은 영적 상태부터, 가장 낮은 감각적 습관까지 전부 주님의 질서 안에 들어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전체가 ‘찬양’이 됩니다. 즉, 생각만 하나님을 향하고, 마음은 따로 놀고, 습관은 또 따로 움직이는 상태가 아니라, ‘전체가 하나로 정렬되는 상태’입니다.

 

정리하면 이런 얘깁니다. 어떤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생각으로는 하나님을 믿지만, 감정은 여전히 불안하고, 습관은 옛 습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이 상태는 아직 ‘부분적인 찬양’입니다. 그러나 점점 변화가 일어나면, 생각뿐 아니라 감정도 안정되고, 습관도 바뀌고, 삶 전체가 하나의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의 삶 전체가 ‘하나의 찬양이 됩니다.’ 말이 아니라 ‘존재 전체로 드리는 찬양’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가 덧붙인 해설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들이 사람 안의 살아 있는 원리들을 뜻하지 않는다면,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부름을 받을 수 없다.’ 즉, 이 모든 것은 바깥 자연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안의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앞선 흐름과 연결해 보면 더 분명해집니다. 처음에는 애정이 두려운 대상이었고, 그다음에는 질서 안으로 들어왔고, 그다음에는 일부는 멈추고 일부는 살아났고, 이제 여기서는 ‘그 모든 것이 하나로 묶여 주님께 응답하는 상태’가 됩니다. 이것이 하나의 완성된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일부만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 감정, 습관, 삶 전체가 다 하나님을 향하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148 모든 피조물이 찬양한다는 것은, 사람 안의 모든 층위의 요소들이 주님의 질서 안에 들어와 하나로 정렬되어, 삶 전체가 하나님께 응답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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