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8.심화
1. 왜 시험, 불행, 슬픔을 통해 겉 사람의 것들이 잠잠해지는가?
AC.8에는 조금 마음에 걸리는 문장이 나옵니다. ‘오늘날 이 상태는 시험, 불행, 또는 슬픔 없이 존재하는 경우가 거의 없는데, 이를 통해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 곧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잠잠해지고, 마치 죽은 것처럼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필 시험과 불행과 슬픔이어야 할까요? 그리고 실제로 주변을 보면 큰 고난을 겪지 않고도 신앙생활을 잘하고 겸손하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문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먼저 AC.8이 말하지 않는 것부터 분명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은 반드시 큰 불행을 겪어야 거듭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고난을 많이 받은 사람일수록 더 많이 거듭난다’고도 하지 않습니다. 원문 자체가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다’가 아니라 ‘없이는 존재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처음부터 예외의 가능성을 남겨 두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문장의 중심을 ‘사람에게 얼마나 큰 고난이 필요한가?’에 두기보다, 스베덴보리가 그 고난 가운데 무엇이 일어난다고 말하는가에 두는 것이 좋습니다. 그의 설명은 분명합니다. 시험과 불행과 슬픔을 통해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 곧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잠잠해지고, 마치 죽은 것처럼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 자체가 악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몸은 자연계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하고, 세상 역시 사람이 자신의 삶과 쓰임을 수행하는 자리입니다. AC.8의 관심은 몸이나 세상을 버리는 데 있지 않습니다. 거듭남의 두 번째 상태에서 ‘주님께 속한 것들과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구별되는 과정에 있습니다.
평소에는 이 구별이 쉽게 드러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람은 자연계에서 몸을 통해 느끼고 생각하며 세상의 여러 관계와 일 가운데 살아갑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 계획하는 것, 의지하는 것들이 자연스럽게 삶의 전면에 놓입니다. 그런데 시험이나 불행이나 슬픔은 사람이 의지하고 있던 자연적 조건들이 언제나 자기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경험하게 합니다.
건강하던 사람이 병들 수 있고, 계획한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수 있으며, 소중하게 여기던 것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경험 자체가 사람을 영적으로 만든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이전까지 강하게 활동하던 몸과 세상에 속한 관심들이 그러한 상황에서는 이전과 똑같은 힘으로 작용하기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그것들이 ‘잠잠해지고, 마치 죽은 것처럼 된다’고 표현하는 것은 바로 이 문맥입니다. 실제로 몸과 세상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겉 사람이 파괴되는 것도 아닙니다. ‘마치’ 죽은 것처럼 된다는 표현은 그것들의 활동이 잠잠해지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AC.8에서 이것은 목적이 아니라 과정입니다. 목적은 주님께 속한 것들과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구별되는 데 있습니다. 겉 사람에 속한 것들이 잠잠해지면서 속 사람에 속한 것들과의 구별이 나타나고, 그 속 사람 안에는 주님께서 저장해 두신 리메인스가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리메인스를 꺼내시기 위해 사람에게 고난을 보내신다’고 단순화해서는 안 됩니다. AC.8은 각각의 불행이 왜 발생했는지를 설명하는 글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병에 걸렸다면 ‘주님께서 그의 겉 사람을 꺾으려고 이 병을 주셨다’고 해석하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면 ‘리메인스를 드러내기 위해 이런 일을 당하게 하셨다’고 판단하는 것은 이 글이 말하는 범위를 넘어섭니다.
AC.8이 설명하는 것은 고난의 개별적인 원인이 아니라, 거듭남의 이 상태에서 시험과 불행과 슬픔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이 잠잠해지고, 그 결과 이전에는 잘 구별되지 않던 주님의 것과 사람 자신의 것이 구별되는 상태가 생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질문의 후반부, ‘그런 고난 없이도 잘 거듭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도 자연스럽게 답할 수 있습니다. AC.8 자체가 이미 그런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습니다. ‘거의 없다’는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예외의 이유를 굳이 만들어 낼 필요가 없습니다. ‘그 사람은 어린 시절 리메인스가 특별히 많아서 그렇다’, ‘이미 양심이 잘 형성되어 있어서 그렇다’, 또는 ‘겉으로는 몰라도 반드시 숨은 고난이 있었을 것이다’라고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AC.8은 왜 어떤 사람에게는 이 상태가 시험과 불행과 슬픔 없이도 가능한지 그 이유를 말하지 않습니다.
이 점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설명하지 않은 예외의 이유를 우리가 채워 넣기 시작하면, 어느 순간 모든 사람의 고난을 영적으로 해석하는 체계를 만들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삶에서 일어나는 구체적인 사건에 주님의 섭리가 어떻게 작용하는지는 우리가 외부에서 쉽게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더구나 같은 고난을 겪는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같은 영적 결과에 이르는 것도 아닙니다. AC.8 역시 ‘시험, 불행, 슬픔 자체가 사람을 거듭나게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거듭남의 주체는 고난이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고난 그 자체를 거룩하게 여기거나 일부러 고난을 찾아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따라서 이 글을 읽으면서 ‘나는 큰 불행을 겪지 않았으니 아직 제대로 거듭나지 못한 것인가?’라고 걱정할 필요도 없고, 반대로 ‘나는 많은 고난을 겪었으니 영적으로 많이 성장했을 것이다’라고 생각할 근거도 없습니다. AC.8이 우리에게 주는 기준은 고난의 양이 아닙니다.
오히려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두 번째 상태의 본질입니다. ‘주님께 속한 것들과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서로 구별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선하고 참되다고 여기는 것이 정말 나 자신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하는지, 아니면 주님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 살아간다는 사실을 점차 알게 되는지, 이것이 거듭남의 방향과 관련됩니다.
이렇게 보면 시험과 불행과 슬픔의 의미도 조금 달라집니다. 그것들은 주님께서 사람을 괴롭히기 위해 반드시 보내셔야 하는 ‘거듭남의 필수 과정’이 아닙니다. AC.8은 ‘오늘날’ 이 두 번째 상태가 그러한 것들 없이 존재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고 관찰하면서, 그 이유를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이 그 가운데 잠잠해지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고난을 만났을 때 ‘주님께서 왜 이것을 보내셨을까?’라고 모든 원인을 해석하려 하기보다, 그 상황 가운데 ‘내가 절대적인 것으로 붙들고 있던 것은 무엇인가?’, ‘주님께 속한 것과 나 자신에게 속한 것을 나는 구별하고 있는가?’라고 자신을 돌아보는 편이 AC.8의 취지에 더 가깝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고난에 대해서는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누군가 불행을 겪는 것을 보고 ‘저 사람은 겉 사람이 너무 강해서 주님께서 꺾고 계시는 것이다’라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AC.8은 다른 사람의 불행을 해석하는 도구가 아니라, 거듭남 가운데 있는 사람 자신의 내적 질서를 이해하도록 주어진 설명으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결국 시험과 불행과 슬픔이 중요한 이유는 고통 그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AC.8의 표현대로라면, 그것들을 통해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이 잠잠해지고 마치 죽은 것처럼 되면서, 속 사람에 속한 것들과 겉 사람에 속한 것들이 구별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속 사람 안에는 주님께서 거듭남을 위하여 보존해 두신 리메인스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AC.8의 중심은 ‘고난을 받아야 한다’가 아니라 ‘구별되어야 한다’입니다. 고난은 그 구별과 관련하여 자주 나타나는 하나의 상황이며, 거듭남의 생명과 능력은 고난 자체가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주님에게서 옵니다.
AC.8, 창1 개요, '두 번째 상태'
AC.8 두 번째 상태는 주님께 속한 것들과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서로 구별되는 때입니다. 주님께 속한 것들은 말씀에서 ‘리메인스’(remains)라고 하는 건데, 여기서는 특별히 유아기부터 배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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