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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6.02.16 AC.2533, 창20:7,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1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아니하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반드시 죽을 줄 알지니라 (20:7)

 

AC.2533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And now restore the man’s wife

 

이 말이 합리적 요소의 오염 없이(without taint from the rational) 교리의 영적 진리를 되돌려 놓으라는 뜻임은 아내가 영적 진리(spiritual truth)를 의미한다는 데서 분명합니다 (2507, 2510 참조). 또한 사람은 교리 그 자체(doctrine itself)를 의미합니다. 아브라함은 그 상태에서 주님을 표상하는데, 그가 사람이라 불릴 때에는 천적 기원의 교리, 곧 천적 진리(celestial truth)를 의미합니다. 내적 의미에서 사람은 지성(the intellectual)을 뜻합니다 (158, 265, 749, 915, 1007, 2517 참조). 그러므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는 것은 교리의 영적 진리를 오염 없이 되돌려 놓으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합리적 요소의 오염 없이라고 한 것은,그녀를 돌려보내야 할 아비멜렉이 합리적인 것들과 관련된 교리, 곧 교리의 합리적 요소들(the rational things of doctrine)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2510 참조). That this signifies that he should render up the spiritual truth of doctrine without taint from the rational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wife” as being spiritual truth (see n. 2507, 2510); and from the signification of the “man” as being doctrine itself; for Abraham (by whom the Lord in that state is represented), when called a “man” signifies celestial truth, which is the same as doctrine from a celestial origin; for in the internal sense a “man” is the intellectual (see n. 158, 265, 749, 915, 1007, 2517). Hence it is evident that to “restore the man’s wife” is to render up the spiritual truth of doctrine without taint. That it means without taint from the rational is because Abimelech, who was to restore her, signifies doctrine that has regard to rational things, or what is the same, the rational things of doctrine (n. 2510).

 

[2]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신앙의 교리는 그 자체로는 신적이므로 인간은 물론 천사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높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 안에서는 인간의 이해에 맞게, 합리적인 방식으로 제시되어 있습니다. 이는 마치 부모가 어린 자녀들을 가르칠 때, 자신은 더 깊고 높은 생각에서 사고하면서도 아이들의 기질과 이해 수준에 맞추어 설명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가르침이 되지 못하고, 마치 바위 위에 씨를 뿌리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저 세상에서 단순한 마음을 가진 이들을 가르치는 천사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천적이고 영적인 지혜 안에 있으나, 배우는 이들의 이해를 넘어서 말하지 않고 단순하게 말하며, 점차적으로 그들의 이해가 자라도록 이끕니다. 만일 천사적 지혜의 높이에서 그대로 말한다면, 단순한 자들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여 신앙의 진리와 선으로 인도될 수 없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말씀 안에서 인간의 이해에 맞추어 합리적인 방식으로 가르치지 않으셨다면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은 그 내적 의미 안에서 천사적 이해로까지 고양됩니다. 그리고 천사들이 가장 높은 상태에서 지각하는 그 의미조차도 신적 본질에 비하면 무한히 아래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은 그 기원과 그 자체에 있어 하늘 전체도 작은 일부조차 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무한한 것들을 내포하고 있으며, 그럼에도 문자로는 사소하고 거칠게 보일 뿐입니다. It was said above that although the doctrine of faith is in itself Divine, and therefore above all human and even angelic comprehension, it has nevertheless been dictated in the Word according to man’s comprehension, in a rational manner. The case herein is the same as it is with a parent who is teaching his little boys and girls: when he is teaching, he sets forth everything in accordance with their genius, although he himself thinks from what is more interior or higher; otherwise it would be teaching without their learning, or like casting seed upon a rock. The case is also the same with the angels who in the other life instruct the simple in heart: although these angels are in celestial and spiritual wisdom, yet they do not hold themselves above the comprehension of those whom they teach, but speak in simplicity with them, yet rising by degrees as these are instructed; for if they were to speak from angelic wisdom, the simple would comprehend nothing at all, and thus would not be led to the truths and goods of faith. The case would be the same if the Lord had not taught in the Word in accordance with man’s comprehension, in a rational manner. Nevertheless in its internal sense the Word is elevated to the angelic understanding; and yet that sense, in its highest elevation in which it is perceived by the angels, is infinitely below the Divine. It is hence manifest what the Word is in its origin, and thus in itself; and that it thus everywhere involves more things than the whole heaven is capable of comprehending, even as to a small part, although in the letter it appears so unimportant and so rude.

 

[3] 주님이 곧 말씀이심은, 말씀이 그분한테서 나오며 그분이 말씀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는 요한복음에 분명히 나타납니다. That the Lord is the Word, because the Word is from him and he is in the Word, is evident in John:

 

1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4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14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1:1, 4, 14) In the beginning was the Word, and the Word was with God, and God was the Word; in him was life, and the life was the light of men; the Word was made flesh, and dwelt among us; and we saw his glory, the glory as of the only-begotten of the Father, full of grace and truth (John 1:1, 4, 14; see also Rev. 19:11, 13, 16).

 

11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그것을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13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16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 (19:11, 13, 16)

 

주님이 말씀이시므로 그분은 또한 교리이십니다. 그 자체로 신적인 교리는 오직 그분뿐이기 때문입니다. And as the Lord is the Word, he is also doctrine; for there is no other doctrine which is itself Divine.

 

 

해설

 

이 구절은 창세기 20장의 중심에서 울리는 하나의 영적 명령입니다.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라는 말은 단순히 한 여인을 원래 남편에게 돌려보내라는 역사적 사건의 정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교리의 질서를 바로 세우라는 명령이며, 진리와 합리성의 관계를 재정립하라는 하늘의 선언입니다. 여기서 사라는 ‘영적 진리’를 의미하고, 아브라함은 ‘천적 기원의 교리’, 곧 주님으로부터 직접 나오는 교리를 의미합니다. 아비멜렉은 ‘합리적 단계의 교리’, 즉 인간의 이해와 사유를 통하여 형성되는 교리적 체계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 장면은 진리가 합리성에 의해 소유되거나 지배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결론은 분명합니다. 합리성은 진리를 소유할 수 없으며, 다만 봉사해야 합니다.

 

오염 없이 돌려보내라’라는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합리성은 본래 악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에게 주어진 귀한 능력입니다. 그러나 합리성은 스스로를 기준으로 삼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해되지 않는 것은 받아들이지 않으려 하고, 스스로 납득한 것만을 진리로 인정하려 합니다. 이때 교리는 인간의 사고 구조에 맞추어 재구성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진리는 점점 인간 중심적으로 변형됩니다. 이것이 바로 ‘합리적 요소의 오염’입니다. 오염이란 반드시 거짓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진리가 인간의 자아와 결합되어 순수성을 잃는 것을 뜻합니다. 진리가 자기 사랑이나 명예욕, 혹은 지적 우월감과 결합될 때, 그것은 이미 순수한 교리의 상태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매우 깊은 신학적 원리를 제시합니다. 신앙의 교리는 그 자체로는 신적입니다. 그것은 인간은 물론 천사조차 완전히 파악할 수 없을 만큼 무한합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그 교리를 인간의 이해에 맞게, 합리적인 형식으로 내려주십니다. 이것은 교리가 본래 합리적이어서가 아니라, 인간이 합리적 단계를 거쳐야만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말씀은 놀라운 겸손을 보여 줍니다. 무한하신 주님께서 유한한 인간의 이해에 맞추어 자신을 낮추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육신의 원리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말씀은 문자라는 옷을 입고, 인간의 사고 틀 안으로 들어옵니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본질은 여전히 신적이며 무한합니다.

 

여기서 부모가 어린 자녀를 가르치는 비유가 등장합니다. 부모는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깊이를 그대로 드러내지 않습니다. 아이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설명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가르침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부모의 사고 수준이 아이의 수준으로 낮아진 것은 아닙니다. 단지 표현이 조정된 것뿐입니다. 천사들이 단순한 자들을 가르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천적, 영적 지혜 안에 있지만, 배우는 이의 상태에 맞추어 단순하게 말합니다. 이 점은 목회 사역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설교자는 깊은 진리를 알고 있다 해도, 그것을 듣는 이들의 상태에 맞추어 전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진리를 변질시켜서는 안 됩니다. 낮추되, 왜곡하지 않는 것, 이것이 질서입니다.

 

이 구절은 말씀의 구조 자체를 보여 줍니다. 말씀은 문자적 의미에서는 단순하고 때로는 거칠게 보입니다. 그러나 그 내적 의미는 천사적 이해로까지 고양됩니다. 그리고 그 천사적 이해조차 신적 본질에 비하면 무한히 아래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은 겉으로는 작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늘 전체가 다 헤아릴 수 없는 깊이를 품고 있습니다. 이것은 말씀을 대하는 태도를 결정합니다. 문자만 보고 판단하면 얕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적 의미를 인식하면, 그 안에 무한한 질서와 조화가 펼쳐집니다.

 

마지막으로 이 글은 ‘주님은 곧 말씀이시며, 동시에 교리이시다’라는 선언으로 절정에 이릅니다. 이는 단순한 신학적 명제가 아닙니다. 교리는 어떤 학파나 신학 체계의 산물이 아닙니다. 교리는 주님 자신에게서 나오며, 주님 자신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리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곧 주님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교리를 왜곡하면, 주님에 대한 인식도 왜곡됩니다. 이 점에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라는 명령은 매우 엄중합니다. 교리의 영적 진리를 인간의 합리성 속에 가두지 말고, 본래의 주인께 돌려드리라는 명령입니다.

 

결국 이 구절은 우리 각자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진리를 이해의 틀 안에 가두려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이해를 진리 아래 두고 있습니까? 합리성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도자가 아니라 도구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교리의 영적 진리가 먼저이며, 합리성은 그 진리를 섬겨야 합니다. 이것이 질서이며, 이것이 거듭남의 길입니다.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라는 이 명령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내면에서 반복되어야 할 영적 행위입니다.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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