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창1:1)

 

AC.16

태고(太古, the most ancient time)를 ‘태초’(太初, the beginning)라고 합니다. 선지자들은 여러 곳에서 이를 ‘옛날’(the days of old, [antiquitatis])이라 부르기도 하고, 또한 ‘영원’(the days of eternity)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이 ‘태초’는 또한 사람이 거듭나기 시작하는 첫 시기를 포함하는데, 이때 그는 새로 태어나 생명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남 자체를 사람의 ‘새 창조’(a new creation)라고 합니다. 선지서 거의 모든 곳에서 ‘창조하다’(to create), ‘짓다’(to form), ‘만들다’(to make)라는 표현들은 거듭나게 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각각 그 의미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사야를 보면, The most ancient time is called “the beginning.” By the prophets it is in various places called the “days of old” [antiquitatis] and also the “days of eternity.” The “beginning” also involves the first period when man is being regenerated, for he is then born anew, and receives life. Regeneration itself is therefore called a “new creation” of man. The expressions to “create,” to “form,” to “make,” in almost all parts of the prophetic writings signify to regenerate, yet with a difference in the signification. As in Isaiah:

 

내 이름으로 불리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사43:7) Everyone that is called by my name, I have created him for my glory, I have formed him, yea, I have made him (Isa. 43:7).

 

그러므로 주님은 ‘구속자’(the Redeemer), ‘태에서부터 지으신 이’(the Former from the womb), ‘만드신 이’(the Maker), 그리고 ‘창조자’(the Creator)라고 불리시는데, 같은 선지서에서, And therefore the Lord is called the “redeemer,” the “former from the womb,” the “maker,” and also the “creator”; as in the same prophet:

 

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이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의 왕이니라 (사43:15) I am Jehovah your holy one, the creator of Israel, your king (Isa. 43:15).

 

시편에서는 In David:

 

이 일이 장래 세대를 위하여 기록되리니 창조함을 받을 백성이 여호와를 찬양하리로다 (시102:18) The people that is created shall praise Jah (Ps. 102:18).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시104:30) Thou sendest forth thy spirit, they are created, and thou renewest the faces of the ground (Ps. 104:30).

 

‘천’(heaven)은 거듭남 이전의 속 사람을, ‘지’(earth)는 겉 사람을 의미한다는 것은 뒤에 이어질 내용에서 볼 수 있습니다. That “heaven” signifies the internal man and “earth” the external man before regeneration may be seen from what follows.

 

해설

AC.16부터 스베덴보리는 창1:1의 각 표현을 본격적으로 풀기 시작합니다. 첫 표현은 ‘태초’(the beginning)입니다. 그는 먼저 ‘태초’가 태고, 곧 가장 오래된 시대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설명하고, 선지서에서는 이를 ‘옛날’(the days of old) 또는 ‘영원’(the days of eternity)이라고도 부른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곧바로 시간 개념 자체를 철학적으로 설명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AC.16에서 중요한 것은 이 ‘태초’가 문자적으로 먼 옛 시작을 가리킬 뿐 아니라, 속뜻에서는 사람이 거듭나기 시작하는 첫 시기까지 포함한다는 점입니다. 사람이 거듭남을 시작할 때 그는 ‘새로 태어나 생명을 받기’ 때문에, 그에게도 하나의 새로운 시작, 곧 영적인 ‘태초’가 열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거듭남 자체를 사람의 ‘새 창조’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앞의 AC.4에서 이미 창세기 1장이 사람의 새 창조, 곧 거듭남을 다룬다고 밝힌 것과 직접 연결됩니다. 창1:1의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은 속뜻에서 주님께서 아직 거듭나지 않은 사람을 새롭게 하시는 역사의 시작을 포함합니다. 여기서 사람이 ‘생명을 받는다’는 말도 육체적 생명을 새로 얻는다는 뜻이 아니라, 이전에는 자기 자신과 세상에 매여 있던 사람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을 수 있는 영적 생명으로 깨어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은 단순한 성격 개선이나 종교적 습관의 보완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 안에 새로운 질서를 이루어 가시는 ‘새 창조’입니다.

 

이 점을 뒷받침하기 위해 스베덴보리는 먼저 사43:7을 인용합니다. ‘내 이름으로 불리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여기서는 한 사람 또는 한 백성을 두고 ‘창조하다’, ‘짓다’, ‘만들다’라는 세 동사가 함께 사용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가져오는 직접적인 이유는 선지서의 ‘창조’ 언어가 단지 우주나 인간의 최초 창조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주님께 속하도록 새롭게 하시는 거듭남에도 사용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동시에 이 세 동사가 모두 같은 뜻으로 무의미하게 반복된 것이 아니라 각각 의미의 차이를 가진다고 밝힙니다. 다만 AC.16에서는 그 차이를 아직 자세히 풀지 않으므로, 여기서 세 동사를 임의로 세 단계에 정확히 배당하기보다는 ‘말씀은 거듭남을 여러 측면에서 창조·형성·만듦의 언어로 표현한다’는 정도로 붙드는 것이 안전합니다.

 

이어지는 사43:15의 ‘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이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의 왕이니라’는 말씀은 새 창조의 주체가 누구인가를 더욱 분명히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앞에서 주님을 ‘구속자’, ‘태에서부터 지으신 이’, ‘만드신 이’, ‘창조자’라고 부른다고 설명한 뒤 이 구절을 인용합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의 창조자’라는 호칭은 단지 이스라엘 민족이 역사적으로 존재하게 된 사실만을 말하는 것으로 읽히지 않습니다. AC.16의 문맥에서는 주님께서 사람을 구속하시고, 형성하시고, 새롭게 만드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거듭남이 ‘새 창조’라면 그 창조자는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사람은 진리를 배우고 선택하며 순종하지만, 그 안에서 생명을 주시고 실제로 거듭나게 하시는 분은 주님이라는 점이 이 인용의 핵심입니다.

 

시102:18의 ‘창조함을 받을 백성이 여호와를 찬양하리로다’는 말씀은 ‘창조’가 이미 존재하는 사람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 구절의 백성은 육체적으로 새로 만들어지는 사람들이 아니라 ‘창조함을 받을’ 백성입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에게 이 표현은 사람이나 교회가 영적으로 새롭게 되는 것을 가리키는 매우 적절한 증거가 됩니다. 이미 자연적 생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다시 ‘창조된다’고 말할 수 있다면, 말씀 안의 ‘창조’에는 최초의 물질적 창조를 넘어선 영적 의미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새롭게 된 백성이 여호와를 찬양한다는 것은 새 창조가 단순한 내면의 심리 변화가 아니라, 주님을 인정하고 그분께 향하는 새로운 삶과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네 번째 인용인 시104:30은 이 의미를 더욱 선명하게 합니다.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여기서는 ‘창조’와 ‘새롭게 하다’가 한 구절 안에서 나란히 나타납니다. 바로 이 때문에 AC.16의 ‘거듭남은 새 창조’라는 설명과 매우 잘 맞습니다. 주님의 영이 보내어질 때 그들이 ‘창조되고’, 그 결과 ‘지면’이 새로워집니다. 따라서 이 구절에서 스베덴보리가 붙드는 핵심은 주님의 생명과 역사가 사람을 새롭게 한다는 것입니다. 다만 여기서 곧바로 시104:30의 ‘주의 영’을 성령론 전체로 확대하거나 ‘지면’을 AC.16의 마지막 문장에 나오는 겉 사람과 반드시 일대일로 동일시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번호에서 이 구절이 담당하는 직접적인 역할은 ‘창조’가 곧 새롭게 함과 연결되어 사용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이 네 인용을 함께 놓고 보면 왜 스베덴보리가 ‘거듭남 자체를 사람의 새 창조라고 한다’고 말했는지가 분명해집니다. 사43:7에서는 사람이 ‘창조되고, 지어지고, 만들어지며’, 사43:15에서는 주님이 ‘창조자’라고 불리시고, 시102:18에서는 이미 존재하는 백성이 다시 ‘창조함을 받을 백성’이라고 불리며, 시104:30에서는 주님의 영으로 ‘창조됨’과 ‘새롭게 됨’이 함께 나타납니다. 따라서 이 네 구절은 따로따로 흩어진 증거가 아니라 하나의 논증을 이룹니다. 말씀의 선지적 언어에서 ‘창조’는 사람을 새롭게 하시는 주님의 거듭남의 역사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정도면 별도의 인용 구절 심화가 없어도 AC.16에서 왜 이 네 본문을 가져왔는지가 충분히 드러납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창1:1의 ‘천’(heaven)과 ‘지’(earth)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미리 예고합니다. ‘천’은 거듭남 이전의 속 사람을, ‘지’는 겉 사람을 의미하며, 그 자세한 내용은 뒤에서 밝혀질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도 너무 앞서갈 필요는 없습니다. AC.16이 아직 속 사람과 겉 사람의 모든 관계를 설명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창세기의 ‘천지창조’를 속뜻에서 읽을 때, 우주 창조의 언어가 동시에 인간의 내적·외적 존재가 주님에 의해 새롭게 질서 지어지는 거듭남의 언어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AC.16의 중심은 간결합니다. ‘태초’는 사람의 거듭남이 시작되는 첫 시기를 포함하고, 거듭남은 ‘새 창조’이며, 그 새 창조를 이루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이제 이어지는 구절들은 그 새 창조가 속 사람과 겉 사람 안에서 어떤 질서로 이루어지는지를 하나씩 보여 주게 됩니다. (AC.16 해설)

 

심화

1. ‘창조하다’(create), ‘짓다’(form), ‘만들다’(make)

 

AC.16 심화 1, ‘창조하다’(create), ‘짓다’(form), ‘만들다’(make)

AC.16 심화1. ‘창조하다’(create), ‘짓다’(form), ‘만들다’(make) AC.16에서 스베덴보리는 ‘창조하다’(create), ‘짓다’(form), ‘만들다’(make)가 선지서 거의 모든 곳에서 거듭남을 의미한다고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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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7, 창1:2(AC.17-19), ‘혼돈과 공허, 흑암의 상태 : 거듭남 이전 인간의 실상’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And the earth was a void and emptiness, and thick darkness was upon the faces of the deep. And the spirit of God moved upon the faces of 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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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 창1, ‘주님과 아버지는 하나이시다’

AC.15천국 전체가 주님 외에 다른 아버지를 알지 못하는데, 이는 그분과 아버지가 하나이시기 때문이며, 그분 자신이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In the universal heaven they know no other father than 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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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

천국 전체가 주님 외에 다른 아버지를 알지 못하는데, 이는 그분과 아버지가 하나이시기 때문이며, 그분 자신이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In the universal heaven they know no other father than the Lord, because he and the father are one, as he himself has said:

 

6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8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9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10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11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요14:6, 8-11) I am the way, the truth, and the life. Philip saith, Show us the father Jesus saith to him, Am I so long time with you, and hast thou not known me, Philip? He that hath seen me hath seen the father how sayest thou then, Show us the father? Believest thou not that I am in the father, and the father in me? Believe me that I am in the father and the father in me. (John 14:6, 8–11)

 

해설

AC.15는 바로 앞 AC.14의 선언을 한 단계 더 깊게 합니다. AC.14에서 스베덴보리는 앞으로 ‘주님’(the Lord)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가리킬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주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AC.15는 이에 대해 천국 전체가 주님 외에 다른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고 말하며, 그 이유를 ‘그분과 아버지가 하나이시기 때문’이라고 밝힙니다. 따라서 AC.14와 AC.15는 서로 떨어진 두 선언이 아니라 하나로 이어집니다.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그 주님과 아버지는 하나이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주장을 자신의 신학적 설명만으로 제시하지 않고 요14:6, 8-11에 기록된 주님의 말씀을 직접 인용합니다. 이 긴 인용의 핵심은 빌립이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라고 요청했을 때 주님께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고 대답하신 데 있습니다. 이어 주님께서는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믿으라고 거듭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이 구절들이 AC.15에 인용된 이유는 분명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한 ‘주님과 아버지는 하나이시다’라는 선언을 주님 자신의 말씀으로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특히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는 말씀은 아버지를 주님과 떨어진 또 다른 신적 존재로 찾아서는 안 된다는 AC.15의 논지를 뒷받침합니다. 또한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다’는 말씀은 두 분이 단순히 같은 목적을 가지고 협력한다는 정도를 넘어서는 하나 됨을 나타냅니다. 다만 AC.15는 여기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관계 전체를 체계적으로 설명하려는 단락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와 주님의 신적 인성에 관한 모든 교리를 이 짧은 번호 안으로 미리 끌어오기보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직접 밝히는 핵심, 곧 천국에서는 주님 외에 다른 아버지를 알지 못하며 주님과 아버지가 하나이시라는 사실을 먼저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요14:6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는 말씀도 같은 문맥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주님은 단지 아버지께 데려다주는 외적인 통로나 중간 단계이고, 그 뒤에 주님과 별도로 만나야 할 또 다른 하나님이 계신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AC.15의 인용 흐름과 맞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은 빌립에게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하며, 아버지께서 주님 안에 계시고 주님께서 아버지 안에 계심을 밝힙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들을 함께 인용한 것은 인간의 시선을 주님 너머의 또 다른 아버지에게 돌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주님 안에서 아버지를 알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AC.15는 짧지만 이후 AC를 읽는 데 매우 중요한 기준을 세웁니다. AC.14가 ‘주님은 누구이신가?’라는 질문에 세상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답했다면, AC.15는 ‘그러면 아버지는 어디에 계시는가?’라는 질문에 주님과 아버지는 하나이시며, 아버지께서 주님 안에 계신다고 답합니다. 이것이 바로 스베덴보리가 요14:6, 8-11을 길게 인용한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이후 거듭남과 천국과 말씀의 속뜻을 읽으면서 ‘주님’을 만날 때 우리의 시선을 그분과 아버지 사이에서 둘로 나눌 필요가 없습니다. 천국 전체가 주님 외에 다른 아버지를 알지 못하는 것은, 주님 자신이 말씀하신 것처럼 그분이 아버지 안에 계시고 아버지께서 그분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AC.15 해설)

 

 

 

AC.16, 창1:1, ‘태초와 거듭남의 시작 : 사람의 새 창조’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창1:1) AC.16태고(太古, the most ancient time)를 ‘태초’(太初, the beginning)라고 합니다. 선지자들은 여러 곳에서 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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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 창1, ‘주님은 세상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시다’

AC.14이어지는 모든 글에서 ‘주님’이라는 이름은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오직 그분만을 뜻하며, 다른 이름을 덧붙이지 않고 단지 ‘주님’(the Lord)이라고만 부릅니다. 온 천국 전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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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

이어지는 모든 글에서 ‘주님’이라는 이름은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오직 그분만을 뜻하며, 다른 이름을 덧붙이지 않고 단지 ‘주님’(the Lord)이라고만 부릅니다. 온 천국 전체에서 그분만이 주님으로 인정되고 경배를 받으시는데, 이는 그분께서 하늘과 땅에서 모든 권세를 가지시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는 제자들에게도 자신을 그렇게 부르라고 명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In the following work, by the name Lord is meant the savior of the world, Jesus Christ, and him only; and he is called “the Lord” without the addition of other names. Throughout the universal heaven he it is who is acknowledged and adored as Lord, because he has all sovereign power in the heavens and on earth. He also commanded his disciples so to call him, saying,

 

너희가 나를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요13:13) Ye call me Lord, and ye say well, for I am (John 13:13).

 

그리고 그분의 부활 후에 제자들은 그분을 ‘주님’(the Lord)이라 불렀습니다. And after his resurrection his disciples called him “the Lord.”

 

해설

AC.14는 창세기 1장의 개별 표현을 해설하기에 앞서, 앞으로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전체를 읽는 데 필요한 중요한 용어 하나를 분명히 정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어지는 모든 글에서 ‘주님’(the Lord)이라는 이름을 사용할 때 그 이름이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오직 그분만을 뜻한다고 선언합니다. 따라서 이후 AC를 읽다가 ‘주님’이라는 표현을 만나면 누구를 가리키는지 별도로 추측할 필요가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선언에서 특히 주목할 것은 ‘오직 그분만’이라는 표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러 신적 존재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께 가장 높은 자리를 드린다는 의미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AC.14가 직접 밝히는 것은 온 천국 전체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님으로 인정되고 경배받으신다는 사실이며, 그 이유는 그분께서 하늘과 땅에서 모든 권세를 가지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부와 성령의 관계에서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곧 이어지는 AC.15와 이후 주님에 관한 가르침을 함께 보아야 더욱 분명해집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우선 ‘주님’이라는 이름이 누구를 가리키는가에 집중하는 것이 좋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설명만으로 이 명칭을 정하지 않고 주님의 말씀을 직접 인용합니다. ‘너희가 나를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요13:13)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주’라고 부르는 것을 주님 자신이 옳다고 확인하신 것입니다. 이어 스베덴보리는 부활 후 제자들이 그분을 ‘주님’이라고 불렀다는 사실도 덧붙입니다. 따라서 AC.14의 논지는 매우 단순하면서도 분명합니다. ‘주님’이라는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께 적용되며, 그 호칭은 주님 자신의 말씀과 제자들의 증언에 근거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후 AC의 속뜻을 읽을 때 매우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앞으로 인간의 거듭남, 천국, 교회, 말씀의 속뜻을 설명하면서 끊임없이 ‘주님’을 언급합니다. 그때마다 막연한 신적 원리나 이름 없는 절대자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특히 앞의 AC.7-13에서 거듭남의 여러 상태를 살펴본 직후 이 선언이 놓여 있다는 점에서, 그 모든 거듭남의 역사를 이루시는 분이 누구인지도 자연스럽게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AC.14는 짧지만 이후 전체 저작의 독법을 정해 주는 중요한 단락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신학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히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여러 중개자 가운데 한 분이 아니며, 온 천국이 인정하고 경배하는 ‘주님’이십니다. 다만 이 짧은 단락 하나에서 삼위일체와 주님의 신적 인성에 관한 모든 교리를 한꺼번에 끌어낼 필요는 없습니다. 바로 다음 AC.15에서 아버지와 주님의 하나 되심이 이어지고, 이후 관련 가르침들이 점차 펼쳐집니다. AC.14에서는 먼저 이 한 가지를 분명히 붙들면 됩니다. 앞으로 AC에서 말하는 ‘주님’은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십니다. (AC.14 해설)

 

심화

1. ‘주님’이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라면 성부와 성령은 어떻게 되는가?

 

AC.14 심화 1, ‘주님’이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라면 성부와 성령은 어떻게 되는가?

AC.14 심화1. ‘주님’이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라면 성부와 성령은 어떻게 되는가? AC.14에서 스베덴보리가 ‘주님’이라는 이름은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을 뜻한다고 말하면,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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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 창1, ‘주님과 아버지는 하나이시다’

AC.15천국 전체가 주님 외에 다른 아버지를 알지 못하는데, 이는 그분과 아버지가 하나이시기 때문이며, 그분 자신이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In the universal heaven they know no other father than 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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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 창1 개요, ‘모두가 같은 상태에 이르는 것은 아니다 : 거듭남의 현실’

AC.13거듭남 과정 중인 모든 사람이 이 상태에 이르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첫 번째 상태까지만 이르고, 어떤 이들은 두 번째 상태까지만, 또 다른 이들은 세 번째, 네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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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

거듭남 과정 중인 모든 사람이 이 상태에 이르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첫 번째 상태까지만 이르고, 어떤 이들은 두 번째 상태까지만, 또 다른 이들은 세 번째, 네 번째, 혹은 다섯 번째 상태에도 이르지만, 이렇게 여섯 번째 상태까지 이르는 이는 적고(few), 일곱 번째 상태에 이르는 이는 거의(scarcely) 없습니다. Those who are being regenerated do not all arrive at this state. The greatest part, at this day, attain only the first state; some only the second; others the third, fourth, or fifth; few the sixth; and scarcely anyone the seventh.

 

해설

AC.13은 앞에서 설명한 거듭남의 여러 상태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정도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짧게 덧붙입니다. 여기서 ‘이 상태’는 바로 앞 AC.12에서 설명한 여섯 번째 상태를 가리킵니다. 곧 사람이 신앙으로, 그리고 그 신앙에서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하며, 신앙과 사랑으로부터 함께 행동하기 시작하는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여섯 번째 상태에 이르는 사람은 적고, 일곱 번째 상태에 이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앞의 여섯 상태를 모든 사람이 자동적으로 차례차례 통과하여 마침내 같은 지점에 도달하는 고정된 프로그램처럼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 구절을 사람들의 영적 수준을 판정하는 서열표처럼 사용해서도 안 됩니다. 예를 들어 ‘나는 다섯 번째 상태이고 저 사람은 두 번째 상태다’라고 외적인 모습만으로 판단하는 것은 AC.13의 목적이 아닙니다. 앞선 AC.7-12에서 살펴본 상태들은 인간 안에서 이루어지는 거듭남의 질서를 보여 주는 것이지, 우리가 다른 사람의 내적 상태를 분류하기 위한 기준표가 아닙니다. 특히 외적으로 경건하게 말하거나 선을 행하는 모습만으로 그 사람의 내적 상태를 알 수는 없습니다. AC.9에서도 이미 사람은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게 말하고 체어리티의 일과 같은 선을 행하지만, 그것을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아직 생명이 없는 상태가 있을 수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외적인 행동의 모양만이 아니라 그 행동이 어떤 내적 원리에서 나오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AC.13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일곱 번째 상태’입니다. 그러나 AC.13 자체는 이 일곱 번째 상태가 무엇인지 여기서 다시 설명하지 않습니다. 앞의 흐름과 AC.12 마지막에서 사랑이 지배권을 얻고 사람이 천적 인간이 된다고 한 내용, 그리고 이어지는 창조의 일곱째 날과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지만, 이 짧은 문장만을 근거로 일곱 번째 상태를 여러 영적 개념과 곧바로 동일시하여 상세하게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거듭남의 상태가 깊어질수록 실제로 그 상태에 이르는 사람이 적다고 말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왜 뒤의 상태로 갈수록 사람이 줄어드는지를 AC.13이 설명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인간이 인내하지 못해서인지, 시험이 어려워서인지, 혹은 다른 이유 때문인지를 이 번호만으로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AC.13은 이유를 분석하기보다 단지 실제 상태의 차이를 짧게 알려 줍니다.

 

또한 스베덴보리는 ‘오늘날’(at this day)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따라서 ‘대부분은 첫 번째 상태에 있고, 어떤 사람들은 두 번째, 어떤 사람들은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상태에 있으며, 여섯 번째 상태에 이르는 사람은 적고 일곱 번째 상태에 이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말을 모든 시대의 모든 인간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통계적 법칙처럼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대부분’, ‘적은 이들’, ‘거의 아무도 없음’이라는 표현 역시 정확한 비율을 제시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대부분이 첫 번째 상태에 있다’는 말을 곧바로 ‘대부분의 신앙인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속에 있으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식으로 확대하는 것도 AC.13이 직접 말하는 범위를 넘어갈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스베덴보리가 자신이 말하는 거듭남의 여러 상태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실현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는 정도로 읽는 것이 안전합니다.

 

따라서 AC.13은 매우 짧지만 앞의 AC.7-12를 읽는 방식에 중요한 균형을 잡아 줍니다. 창조의 날들이 거듭남의 질서를 보여 준다고 해서 그것을 모든 사람이 반드시 같은 속도와 같은 깊이로 통과하는 일률적인 단계표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거듭남으로 이끄시는 질서는 분명하지만, 실제 사람들의 상태는 서로 다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읽을 때 우리의 관심은 다른 사람이 어느 단계에 있는지를 판단하는 데 있지 않고, 주님께서 지금 내 안에서 무엇을 질서 있게 하고 계시는지를 살피는 데 있어야 합니다. AC.13은 거듭남의 높은 상태를 자랑하거나 다른 사람과 비교하도록 주어진 말씀이 아니라, 거듭남이 얼마나 깊고 실제적인 주님의 역사인지를 겸손하게 바라보게 하는 짧은 경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AC.13 해설)

 

심화

1. ‘일곱 번째 상태’와 수도원 전통의 ‘완덕’, ‘합일’의 비교

 

AC.13, 심화 1, ‘일곱 번째 상태’와 수도원 전통의 ‘완덕’, ‘합일’의 비교

AC.13.심화1. ‘일곱 번째 상태’와 수도원 전통의 ‘완덕’, ‘합일’의 비교 수도원 전통에서 말해 온 ‘완덕’이나 ‘합일’과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일곱 번째 상태’ 사이에는 분명 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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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 창1, ‘주님은 세상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시다’

AC.14이어지는 모든 글에서 ‘주님’이라는 이름은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오직 그분만을 뜻하며, 다른 이름을 덧붙이지 않고 단지 ‘주님’(the Lord)이라고만 부릅니다. 온 천국 전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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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2, 창1 개요, ‘신앙과 사랑이 함께 움직이는 영적 인간의 여섯 번째 상태’

AC.12여섯 번째 상태는 사람이 신앙으로, 그리고 그 신앙에서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하는 때입니다. 이때 그에게서 나오는 것들을 ‘생물’(living soul)과 ‘짐승’(beast)이라 합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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