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99.심화

 

3. 가장 내적인 의미, 곧 또한 보편적 의미

 

 AC.99 본문에 가장 내적인 의미, 곧 또한 보편적 의미에서는라는 표현이 나오는데요,  가장 내적인 의미 보편적 의미가 되는 건가요? 이어지는 내용인 이것은 주님의 나라, 그리고 사람이 천적 인간이 되었을 때 놓이게 되는 하늘을 의미합니다처럼 천적 인간의 올바른 질서가 곧 천국의 보편적 질서라는 말인가요?

 

 

핵심을 정확히 짚으셨습니다. 다만 한 걸음 더 분명히 하자면, 스베덴보리가 가장 내적인 의미(inmost sense)를 동시에 보편적 의미(universal sense)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 의미가 단순히 더 깊다’는 차원을 넘어 모든 것을 안에서부터 지배하고 포함하는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가장 내적인 것은 가장 좁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것을 통일하는 가장 넓은 근원입니다. 이 점이 직관과는 반대로 느껴지기 때문에 처음에는 조금 낯설게 다가옵니다.

 

사람의 구조를 예로 들면 이해가 훨씬 쉬워집니다. 몸 전체를 움직이는 것은 손발 같은 바깥 부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심장과 폐입니다. 이 심장과 폐는 위치로 보면 가장 안쪽’이지만, 기능으로 보면 온몸을 살리는 가장 보편적인 것’입니다. 손 하나, 발 하나는 부분적이지만, 심장은 모든 세포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가장 내적’인 것이 동시에 가장 보편적’인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구조를 의미의 차원에서도 동일하게 보고 있습니다.

 

말씀의 의미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자적 의미는 특정 사건, 특정 인물, 특정 상황을 다루기 때문에 겉으로 보기에는 더 넓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매우 제한적입니다. 반면 가장 내적인 의미는 주님과 그분의 나라’, 곧 사랑과 진리의 질서 자체를 다루기 때문에, 모든 사람, 모든 시대, 모든 상태에 적용됩니다. 그래서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보편적 의미’가 됩니다. 결국 내적일수록 좁다’가 아니라 내적일수록 근원적이어서 모든 것을 포함한다’가 스베덴보리의 관점입니다.

 

이제 이어지는 문장,  이것은 주님의 나라, 그리고 사람이 천적 인간이 되었을 때 놓이게 되는 하늘을 의미합니다’와의 연결을 보겠습니다. 목사님께서 이해하신 대로, 천적 인간의 올바른 질서가 곧 천국의 질서라는 이해는 매우 정확합니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 더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이것이 단순한 유사성’이 아니라 동일한 질서의 다른 표현’이라는 점입니다. 천국은 어떤 공간이기 이전에 질서’이며, 그 질서는 사랑이 주가 되고, 진리가 그 사랑을 섬기는 상태입니다. 이 질서가 그대로 사람 안에 형성되면 그 사람이 바로 천적 인간’입니다.

 

그래서 가장 내적인 의미에서 말씀은 언제나 이 하나를 말합니다. ‘주님이 어떻게 자신의 나라를 이루시는가’, 그리고 그 나라가 어떻게 사람 안에 형성되는가’입니다. 이보다 더 근원적이고 보편적인 주제는 없습니다. 역사 이야기든, 족보든, 율법이든, 전쟁 이야기든, 가장 안으로 들어가면 모두 이 한 가지 질서로 수렴됩니다. 그러니 그 의미가 보편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가장 내적인 의미’는 단순히 깊은 해석이 아니라, 모든 의미를 낳는 근원적 중심이기 때문에 보편적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 내용은 언제나 동일하게, 주님의 나라와 그 나라가 사람 안에 세워지는 질서, 곧 천적 인간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천적 인간의 올바른 질서가 곧 천국의 보편적 질서’라는 이해는 정확할 뿐 아니라, 바로 그 표현이 AC.99의 핵심을 잘 붙잡고 있다고 보셔도 됩니다.

 

 

 

AC.99, 심화 2, ‘겉 사람이 속 사람과 싸우고 있다’

AC.99.심화 2. ‘겉 사람이 속 사람과 싸우고 있다’ 위 AC.99 본문에 ‘겉 사람이 속 사람과 싸우고 있다’라는 표현이 나오는데요, 이것이 정확히 무슨 뜻인가요? 속 사람이 원하는 걸 겉 사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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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겉 사람이 속 사람과 싸우고 있다

 

 AC.99 본문에 겉 사람이 속 사람과 싸우고 있다라는 표현이 나오는데요, 이것이 정확히 무슨 뜻인가요? 속 사람이 원하는 걸 겉 사람은 원치 않는다는 말인 것 같은데, 이것하고 지성은 주님이 아닌, 자기 자신, 곧 자신의 이성과 기억 지식으로부터 나온다고 보는 것하고 서로 무슨 상관이 있나요?

 

 

AC.99에서 겉 사람이 속 사람과 싸우고 있다’는 말은 단순한 성격 충돌이나 기분의 갈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 있는 두 생명의 방향’이 서로 반대 방향으로 작용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스베덴보리의 구조로 말하면, 속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는 자리이고, 겉 사람은 세상과 감각, 기억 지식 속에서 형성된 자리입니다. 원래 질서대로라면, 속 사람이 위에서 이끌고 겉 사람이 순종해야 합니다. 그런데 거듭남 이전의 상태에서는 이 질서가 뒤집혀서, 겉 사람이 주도권을 쥐고, 속 사람의 요구를 거부하거나 왜곡합니다. 그래서 겉 사람이 속 사람과 싸운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 싸움은 실제로 매우 구체적인 형태로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속 사람은 어떤 진리를 보고 이렇게 사는 것이 옳다’는 방향을 느끼지만, 겉 사람은 그건 현실적으로 손해다’,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다’, ‘다들 이렇게 사는데 왜 나만?’ 같은 식으로 반응합니다. 혹은 말씀을 들을 때, 속에서는 이건 참이다’라는 조용한 확증이 일어나는데, 겉에서는 즉시 분석과 의심, 반론을 만들어 냅니다. 이때 겉 사람의 무기는 바로 이성’과 기억 지식’입니다. 이미 알고 있는 정보, 경험, 세상적 기준을 총동원해서 속 사람에서 오는 것을 무력화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싸움의 실제 모습입니다.

 

이제 두 번째 질문,  지성이 주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 곧 자신의 이성과 기억 지식에서 나온다고 보는 것’과의 관계를 보면, 이 둘은 사실 같은 뿌리에서 나온 두 가지 표현입니다. 겉 사람이 속 사람과 싸울 수 있는 이유 자체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기 지성의 근원을 주님’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돌리는 순간, 그는 이미 겉 사람의 편에 서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는 더 이상 위에서 들어오는 것을 기준으로 삼지 않고, 아래에서 축적된 것, 곧 자기 경험과 지식과 논리를 최종 기준으로 삼기 때문입니다.

 

이 상태가 되면, 속 사람으로부터 무엇인가 들어와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검열하고 심판하는 구조가 됩니다. 다시 말해 주님이 이것을 주신다’는 태도가 아니라 이게 내 기준에 맞나?’를 먼저 따집니다. 이때 이미 질서가 완전히 뒤집힌 것입니다. 원래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이 기준이고, 이성과 기억 지식은 그것을 이해하고 섬기는 도구여야 합니다. 그런데 반대로 이성과 기억 지식이 왕이 되어 버리고, 위에서 오는 것은 그 앞에서 시험을 받아야 하는 것이 됩니다. 이 상태 자체가 바로 겉 사람이 속 사람과 싸우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 둘의 관계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지성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두는 순간, 겉 사람이 주도권을 잡게 되고, 그 결과 속 사람과의 싸움이 시작된다’입니다. 그리고 반대로 말하면, 사람이 내가 아는 것, 내가 이해하는 것조차도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기 시작할 때, 싸움의 양상이 달라집니다. 겉 사람은 여전히 반응하고 저항하지만, 더 이상 절대 기준이 아니게 되고, 점점 속 사람의 빛 아래로 들어오게 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스베덴보리가 이성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성을 쓰느냐’가 아니라 이성을 어디에 두느냐’입니다. 이성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받아들이고 정리하는 자리로 있을 때는 그것이 참된 지성이 됩니다. 그러나 이성이 스스로를 근원으로 삼고, 위에서 오는 것을 판단하는 자리에 서게 되면, 그것은 곧 겉 사람이 속 사람과 싸우는 도구가 됩니다. 그래서 같은 이성’이라도 한쪽에서는 빛을 받는 창이 되고, 다른 쪽에서는 빛을 막는 벽이 됩니다.

 

결국 AC.99의 이 두 표현은 서로 다른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의 상태를 안과 밖에서 설명한 것입니다. ‘겉 사람이 속 사람과 싸운다’는 것은 현상이고, ‘지성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다고 믿는다’는 것은 그 원인입니다. 그리고 거듭남의 과정은 이 질서를 다시 바로잡아, 속 사람이 이끌고 겉 사람이 따르는 상태로 회복되는 과정이라고 보시면 정확합니다.

 

 

 

AC.99, 심화 3, ‘가장 내적인 의미, 곧 또한 보편적 의미’

AC.99.심화 3. ‘가장 내적인 의미, 곧 또한 보편적 의미’ 위 AC.99 본문에 ‘가장 내적인 의미, 곧 또한 보편적 의미에서는’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요, 왜 ‘가장 내적인 의미’가 ‘보편적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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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9, 심화 1, ‘이해, 이성, 기억 지식 속으로 흘러들어오다’

AC.99.심화 1. ‘이해, 이성, 기억 지식 속으로 흘러들어오다’ 위 AC.99 본문에 나오는 ‘주님께서 신앙을 통하여 그의 이해, 이성, 기억 지식 속으로 흘러들어오신다’는 표현이 무슨 뜻인가요?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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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해, 이성, 기억 지식 속으로 흘러들어오다

 

 AC.99 본문에 나오는 주님께서 신앙을 통하여 그의 이해, 이성, 기억 지식 속으로 흘러들어오신다는 표현이 무슨 뜻인가요? 그냥 깨달아지고 납득되는 걸 이렇게 표현한 건가요?

 

 

좋은 질문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AC.99에서 말하는 주님께서 신앙을 통하여 그의 이해, 이성, 기억 지식 속으로 흘러들어오신다’는 것은 단순히 , 이해가 된다’, ‘납득이 된다’는 인지적 경험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측면이 포함될 수는 있지만, 그보다 훨씬 더 깊고 본질적인,  생명 쪽에서부터 이해가 열리는 사건’을 말합니다. 스베덴보리 식으로 표현하면 이것은 정보가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 안에서부터 질서를 잡는 것’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이해한다고 할 때, 일반적으로는 바깥에서 정보를 받아 머리로 정리하는 과정을 떠올립니다. 책을 읽고, 설명을 듣고, 비교하고 판단해서 이게 맞다’라고 결론 내리는 것이지요. 이건 기억 지식  이성  이해’로 올라가는 흐름입니다. 그런데 AC.99에서 말하는 것은 그 반대 방향입니다. 주님으로부터 먼저 어떤 생명의 흐름’, 곧 선과 진리의 감각이 들어오고, 그것이 아래로 내려오면서 이해, 이성, 기억 지식의 영역을 안에서부터 밝히고 배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같은 내용을 들어도 어떤 사람은 전혀 못 알아듣고, 어떤 사람은 이게 이거였구나 하고 열리는 일이 생깁니다.

 

여기서 신앙을 통하여’라는 표현이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신앙’은 단순히 교리를 받아들이는 지적 동의가 아니라, ‘주님과 연결되는 통로’입니다. 다시 말해 사람이 어떤 진리를 살려고 할 때’, 곧 체어리티 안에서 그것을 받아들이려 할 때, 그때 그 사람 안에 주님과 통하는 길이 열립니다. 그러면 그 통로를 따라 인플럭스(influx), 즉 주님의 생명이 흘러들어옵니다. 이 흐름이 바로 이해를 밝히는 실제 원인입니다. 그래서 어떤 진리는 머리로 백 번 설명을 들어도 닫혀 있다가, 삶이 조금 바뀌는 순간 갑자기 선명해지기도 합니다.

 

이걸 그냥 깨달아지는 것 아닌가요?’라고 느끼신 것은 아주 정확한 감각입니다. 맞습니다, 겉으로는 깨달음’처럼 나타납니다. 그런데 차이는 그 깨달음의 출처’에 있습니다. 단순한 지적 깨달음은 비교, 추론, 논증에서 나옵니다. 반면 여기서 말하는 것은 사랑에서 비롯된 빛’이 이해를 비추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천적 인간은 먼저 사랑하고, 그다음에 안다’고 하지요. 이때의 앎은 판단의 결과라기보다 퍼셉션의 확장에 가깝습니다.

 

조금 더 와닿게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어떤 말씀이나 아르카나 구절을 읽을 때, 평소에는 그냥 문장으로만 보이던 것이 어느 날은 이상하게 마음에 와닿고, ‘이게 이런 뜻이었구나 하면서 동시에 이건 이렇게 살아야겠구나’까지 함께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이때는 이해와 의지가 동시에 움직입니다. 단순히 맞는 말이네’가 아니라 이게 진짜다’라는 느낌이 옵니다. 바로 그때가 이해, 이성, 기억 지식 속으로 주님이 흘러들어오신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 표현은 인지 작용의 설명’이 아니라 영적 작용의 설명’입니다. 이해가 열리는 것은 결과이고, 그 원인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인플럭스입니다. 그리고 그 인플럭스는 아무 때나 임의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신앙 안에서, 곧 진리를 살려는 방향으로 자신을 둘 때 그 통로가 열립니다. 이 점이 핵심입니다.

 

정리하면, AC.99의 이 표현은 이해가 잘 된다’는 말보다 훨씬 깊은 뜻입니다.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신앙이라는 통로를 통해 들어와, 사람의 생각 구조 전체를 안에서부터 밝히고 정렬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깨달음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생명이 이해를 만들어 내는 사건’입니다.

 

 

 

AC.99, 심화 2, ‘겉 사람이 속 사람과 싸우고 있다’

AC.99.심화 2. ‘겉 사람이 속 사람과 싸우고 있다’ 위 AC.99 본문에 ‘겉 사람이 속 사람과 싸우고 있다’라는 표현이 나오는데요, 이것이 정확히 무슨 뜻인가요? 속 사람이 원하는 걸 겉 사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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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9, 창2:8, 생명의 질서에서 본 ‘에덴동산’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창2:8) AC.99 영적 인간한테 있어서의 생명, 곧 생명의 질서는 이와 같습니다. 주님께서 신앙을 통하여 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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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2:8)

 

AC.99

 

영적 인간한테 있어서의 생명, 곧 생명의 질서는 이와 같습니다. 주님께서 신앙을 통하여 그의 이해, 이성, 기억 지식 속으로 흘러들어오심에도 불구하고, 겉 사람이 속 사람과 싸우고 있기 때문에, 지성이 주님으로부터 흘러드는 것이 아니라, 마치 사람 자신으로부터, 곧 기억 지식과 이성을 통하여 나오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의 생명, 곧 생명의 질서는 이와 다릅니다. 주님께서 사랑과 사랑의 신앙을 통하여 그의 이해, 이성, 기억 지식 속으로 흘러들어오시며,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에 싸움이 없기 때문에, 그는 이것이 실제로 그러하다는 것을 퍼셉션합니다. 이와 같이, 영적 인간한테는 거꾸로 되어 있던 질서가, 이제 천적 인간한테 있어서는 회복된 것으로 묘사되며, 이 질서, 곧 이 사람을 동방의 에덴동산(garden in Eden in the east)이라 부릅니다. 최고 의미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창설하신 동산(garden planted by Jehovah God in Eden in the east)은 주님 자신을 의미합니다. 가장 내적인 의미, 곧 또한 보편적 의미에서는, 이것은 주님의 나라, 그리고 사람이 천적 인간이 되었을 때 놓이게 되는 하늘을 의미합니다. 이때 그의 상태는, 그가 하늘의 천사들과 함께 있으며, 마치 그들 가운데 하나인 것과 같습니다. 이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동안에도 동시에 하늘에 있을 수 있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상태에서는 그의 모든 생각과 생각의 관념들, 심지어 그의 말과 행동들까지도 주님으로부터 열려 있으며, 그 안에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각각의 것 안에 주님의 생명이 들어 있기 때문에, 그로 하여금 퍼셉션을 가질 수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Life, or the order of life, with the spiritual man, is such that although the Lord flows in, through faith, into the things of his understanding, reason, and memory [in ejus intellectualia, rationalia, et scientifica], yet as his external man fights against his internal man, it appears as if intelligence did not flow in from the Lord, but from the man himself, through the things of memory and reason [per scientifica et rationalia]. But the life, or order of life, of the celestial man, is such that the Lord flows in through love and the faith of love into the things of his understanding, reason, and memory, and as there is no combat between the internal and the external man, he perceives that this is really so. Thus the order which up to this point had been inverted with the spiritual man is now described as restored with the celestial man, and this order, or man, is called a “garden in Eden in the east.” In the supreme sense, the “garden planted by Jehovah God in Eden in the east” is the Lord himself. In the inmost sense, which is also the universal sense, it is the Lord’s kingdom, and the heaven in which man is placed when he has become celestial. His state then is such that he is with the angels in heaven, and is as it were one among them; for man has been so created that while living in this world he may at the same time be in heaven. In this state all his thoughts and ideas of thoughts, and even his words and actions, are open, even from the Lord, and contain within them what is celestial and spiritual; for each one [of these] has the Lord’s life within it, which enables him to have perception.

 

 

해설

 

이 글은 AC.98에서 제시된 ‘에덴동산’의 구조를, ‘생명의 질서’라는 관점에서 정밀하게 해부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차이를, 도덕성이나 경건의 정도로 설명하지 않고, 오직 ‘유입이 어떻게 인식되는가’라는 문제로 설명합니다. 이것은 매우 깊고도 실제적인 구분입니다.

 

먼저 영적 인간의 상태가 설명됩니다. 주님은 실제로 그의 이해, 이성, 기억 지식 속으로 흘러들어오십니다. 이 점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인식입니다. 겉 사람이 속 사람과 싸우고 있기 때문에, 이 유입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걸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대신, 그는 마치 자신이 기억 지식과 이성을 사용하여 스스로 생각하고 이해하는 것처럼 느낍니다. 즉, 유입은 있지만, 출처가 가려져 있습니다.

 

이 상태에서 영적 인간은 지성을 가지고 있으나, 그 지성은 항상 ‘내가 이해했다’, ‘내가 판단했다’는 감각을 동반합니다. 이는 교만의 문제라기보다, 아직 질서가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겉 사람이 여전히 주도권을 쥐고 있기 때문에, 생명의 흐름이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꾸로 된 질서’입니다.

 

이에 반해 천적 인간의 생명의 질서는 완전히 다릅니다. 주님은 사랑과 사랑의 신앙을 통하여 그의 이해, 이성, 기억 지식 속으로 흘러들어오십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때에는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에 더 이상 싸움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지성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퍼셉션합니다’. 그는 ‘, 이것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이구나’ 하고 즉각적으로 압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천적 인간은 더 많은 정보를 갖기 때문에 다른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차이는 오직 하나, ‘질서가 회복되었는가’입니다. 생명은 위에서 아래로,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거쳐 지성으로 흘러갑니다. 천적 인간은 이 흐름을 막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있는 그대로 느낍니다. 이것이 바로 ‘에덴동산’의 실체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회복된 질서, 혹은 그 사람 자체를 ‘동방의 에덴동산’이라고 부릅니다. 동쪽은 주님, 에덴은 사랑, 동산은 지성입니다. 즉,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통하여 지성으로 흘러드는 생명의 질서가 완전히 살아 있는 상태입니다. 이것은 장소가 아니라, ‘살아 있는 인간의 상태’입니다.

 

이어 스베덴보리는 의미의 층위를 한 단계씩 올립니다. 최고 의미에서는 이 동산이 주님 자신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모든 생명과 질서의 근원이 주님이라는 뜻입니다. 가장 내적인 의미, 곧 보편적 의미에서는, 이것이 주님의 나라, 그리고 사람이 천적 인간이 되었을 때 놓이게 되는 하늘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에덴동산은 개인 안에도 있고, 교회 전체 안에도 있으며, 하늘 전체 안에도 있습니다.

 

이제 놀라운 진술이 나옵니다. 천적 인간은 하늘의 천사들과 함께 있으며, 마치 그들 가운데 하나인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이는 사후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분명히 말합니다. ‘사람은 이 세상에 살면서도 동시에 하늘에 있을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고 말입니다. 이것이 인간 창조의 본래 목적입니다.

 

이 상태에서 사람의 모든 생각과 생각의 관념들, 심지어 말과 행동까지도 주님으로부터 열려 있습니다. 이는 무의식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깨어 있는 상태입니다. 그의 생각과 말과 행동 속에는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이 담겨 있습니다. 왜냐하면 각각의 것 안에 주님의 생명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문장은 이 모든 것을 하나로 묶습니다. 사람이 퍼셉션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각 생각과 말과 행동 안에 주님의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퍼셉션은 특별한 은사가 아니라, ‘생명이 올바른 질서로 흐를 때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상태’입니다.

 

AC.99는 이렇게 말합니다. 천적 인간은 더 똑똑한 사람이 아니라, 생명의 출처를 숨기지 않고 그대로 느끼는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서 있는 자리, 곧 그 질서 자체가 바로 ‘동방의 에덴동산’입니다.  

 

 

심화

 

1.이해, 이성, 기억 지식 속으로 흘러들어오다

 

 

AC.99, 심화 1, ‘이해, 이성, 기억 지식 속으로 흘러들어오다’

AC.99.심화 1. ‘이해, 이성, 기억 지식 속으로 흘러들어오다’ 위 AC.99 본문에 나오는 ‘주님께서 신앙을 통하여 그의 이해, 이성, 기억 지식 속으로 흘러들어오신다’는 표현이 무슨 뜻인가요?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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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겉 사람이 속 사람과 싸우고 있다

 

 

AC.99, 심화 2, ‘겉 사람이 속 사람과 싸우고 있다’

AC.99.심화 2. ‘겉 사람이 속 사람과 싸우고 있다’ 위 AC.99 본문에 ‘겉 사람이 속 사람과 싸우고 있다’라는 표현이 나오는데요, 이것이 정확히 무슨 뜻인가요? 속 사람이 원하는 걸 겉 사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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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가장 내적인 의미, 곧 또한 보편적 의미

 

 

AC.99, 심화 3, ‘가장 내적인 의미, 곧 또한 보편적 의미’

AC.99.심화 3. ‘가장 내적인 의미, 곧 또한 보편적 의미’ 위 AC.99 본문에 ‘가장 내적인 의미, 곧 또한 보편적 의미에서는’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요, 왜 ‘가장 내적인 의미’가 ‘보편적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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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8, 창2:8, ‘동방의 에덴동산’, 천적 인간의 지성(AC.98-101)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And Jehovah God planted a garden eastward in Eden, and there he put the man whom he had formed. (창2:8) AC.98 ‘동산’(garden)은 지성(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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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퍼셉션의 확장

 

 AC.98 해설에, 그러나 천적 인간의 지성은 사랑에서 출발합니다. 그는 먼저 기뻐하고, 그다음에 압니다. 그의 이해는 판단이 아니라 퍼셉션의 확장입니다.’라고 하는데요, 여기 그의 이해는 판단이 아니라 퍼셉션의 확장입니다라는 이 표현, 무슨 뜻인가요?

 

 

핵심을 바로 짚어 드리면, ‘그의 이해는 판단이 아니라 퍼셉션의 확장’이라는 말은 천적 인간의 앎은 ‘따져서 결론 내리는 과정이 아니라, 이미 안에서 주어진 퍼셉션이 점점 더 또렷해지고 넓어지는 과정’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영적 단계의 이해가 판단(judgment)이라면, 천적 단계의 이해는 확장(expansion)이라는 말입니다.

 

먼저 판단’이 무엇인지부터 대비해 보겠습니다. 판단은 보통 이런 구조입니다. ‘이것이 맞나?’에서 시작, 근거를 찾고, 비교하고, 결론을 내는 것이죠. 여기서는 아직 모르는 상태’에서 출발해서, 사고 과정을 통해 아는 상태’로 갑니다. 그래서 이때는 이성이 주인이고, 퍼셉션은 없거나 약한 상태입니다.

 

반면 퍼셉션의 확장’은 완전히 다른 출발점입니다. 이미 안에서 이것이 선하다’, ‘이것이 옳다’는 것이 느껴지고 보입니다.’ 이 상태에서는 맞나 틀리나 따지는 과정’이 중심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걸 더 깊이, 더 넓게 이해하는 과정’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확장’이라는 표현이 정확합니다. 처음에는 한 점처럼 보이던 것이 점점 더 또렷해지고, 더 많은 경우에 적용되고, 더 깊은 의미로 열리는 것입니다.

 

이걸 실제적인 예로 보시면 더 분명합니다. 예를 들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선하다’는 걸 생각해 보겠습니다.

영적 단계에서는 왜 사랑해야 하지? 어디까지가 사랑인가? 나도 손해 보지 않아야 하는데...’ 등, 이런 판단과 비교가 계속 일어납니다.

 

그러나 천적 상태에서는 이미 사랑하는 것은 선하다’라는 것이 안에서 분명합니다. 그래서 더 이상 그걸 판단’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이 상황에서는 어떻게 사랑하는 것이 맞을까?’, ‘이 사람에게는 어떤 방식이 가장 선한 걸까?’ 등, 이렇게 같은 선이 다양한 상황 속에서 더 풍성하게 열립니다.’

 

이것이 바로 퍼셉션의 확장’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특징은 이것입니다.

 

판단은 맞다/틀리다’를 가르지만, 퍼셉션의 확장은 더 깊다/더 넓다’로 나아갑니다.

 

그래서 천적 인간의 이해는 논쟁적이지 않고’, ‘방어적이지 않으며’, ‘점점 더 조화롭게 됩니다.’ 왜냐하면 출발이 옳음을 증명하려는 마음’이 아니라 선을 사랑하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판단은 모르는 데서 시작해 결론에 이르지만, 퍼셉션의 확장은 이미 아는 데서 시작해 더 깊이 열립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천적 인간의 이해는 생각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보이고, 그 보임이 점점 넓어지는 것’입니다.

 

천적 인간은 옳음을 증명하려 하지 않습니다. 이미 안에서 보이기 때문에, 그 보임이 삶 속에서 점점 더 깊어지고 넓어질 뿐입니다.’

 

퍼셉션의 확장’은 단순한 개념이 아니라, ‘지성과 사랑의 질서가 완전히 바뀐 상태에서 일어나는 실제적인 앎의 방식’입니다.

 

 

 

AC.98, 창2:8, ‘동방의 에덴동산’, 천적 인간의 지성(AC.98-101)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And Jehovah God planted a garden eastward in Eden, and there he put the man whom he had formed. (창2:8) AC.98 ‘동산’(garden)은 지성(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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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8, 심화 1, ‘사랑을 통하여 흘러들어오는 지성’

AC.98.심화 1. ‘사랑을 통하여 흘러들어오는 지성’ 위 AC.98 본문에 ‘‘동방의 에덴동산’(garden of Eden eastward)은 사랑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흘러들어오는 천적 인간의 지성(the intelligence of the 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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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8.심화

 

1. 사랑을 통하여 흘러들어오는 지성

 

 AC.98 본문에 ‘‘동방의 에덴동산(garden of Eden eastward)은 사랑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흘러들어오는 천적 인간의 지성(the intelligence of the celestial man, which flows in from the Lord through love)을 의미합니다라고 하는데요, 여기 사랑을 통하여 흘러들어오는 지성이라는 게 뭔가요? 사랑스러운 지성이라는 건가요? 그게 뭐죠?

 

 

핵심부터 분명히 하겠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을 통하여 흘러들어오는 지성’은 사랑스러운 지성’, 그러니까 성격이 부드럽다거나 따뜻한 느낌의 지성 같은 그런 게 아니라, ‘지성의 근원이 사랑에 있는 상태’,  사랑이 먼저이고, 지성은 그 사랑으로부터 나오는 상태’를 뜻합니다. 다시 말해, ‘무엇을 아느냐’보다 무엇을 사랑하느냐’가 먼저 정해지고, 그 사랑이 지성을 형성하는 구조입니다.

 

조금 더 풀어 설명드리면 이렇습니다. 일반적인 상태에서는 사람이 먼저 생각하고 판단한 다음, 그 결과에 따라 행동합니다. 이때는 지성이 중심이고, 사랑(의지)은 그 뒤를 따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천적 상태에서는 순서가 완전히 바뀝니다. ‘먼저 사랑이 있고, 그 사랑이 무엇이 옳은지를 보게 하며, 그다음 지성이 그것을 이해하고 표현합니다.’ 그래서 이때 지성은 독립적으로 판단하는 능력이 아니라, ‘사랑이 빛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천적 인간을 설명할 때, ‘그들은 생각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통해서 본다’고 말합니다. 이게 바로 사랑을 통하여 흘러들어오는 지성’입니다. 사랑이 곧 빛이 되고, 그 빛 안에서 지성이 작동하는 것입니다.

 

이걸 실제 사례로 보시면 훨씬 분명해집니다. 어떤 사람이 이웃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상태’에 있다고 해보겠습니다. 이때 그 사람은 도와야 할까 말아야 할까’를 먼저 계산하지 않습니다. 이미 돕는 것이 선하다’는 것이 마음에서 자명합니다.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말입니다. 이때 지성은 어떻게 도와야 가장 실제적으로 도움이 될까’를 판단합니다. 즉, ‘지성은 방향을 정하는 주인이 아니라, 사랑이 정한 방향을 가장 잘 구현하는 도구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으로부터 나오는 지성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들면, 진리를 말하는 상황입니다. 일반적인 상태에서는 이 말이 맞나 틀리나’를 중심으로 판단합니다. 즉, 주로 그것만 보는 것이지요. 그러나 사랑이 중심이 된 상태에서는 이 말이 상대에게 유익한가’가 먼저 보입니다. 그래서 같은 진리라도 어떤 때는 말하고, 어떤 때는 기다리고, 어떤 때는 다른 방식으로 표현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가르치시고 인도하실 때 이렇게 하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때 지성은 논쟁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사랑에 맞게 진리를 전달하는 도구’가 됩니다.

 

사랑을 통하여 흘러들어오는 지성이란, 사랑이 먼저 보고, 지성은 그 사랑이 본 것을 이해하고 실행하는 상태입니다.’

 

이런 지성의 특징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자명함’, 즉 억지로 논증하지 않아도 이것이 선하다’는 것이 안에서 보입니다.

 

둘째, ‘겸손함’, 즉 자기 생각을 주장하기보다, 선을 이루는 데 집중합니다.

 

셋째, ‘실용성’, 즉 현실에서 실제로 선을 이루는 방향으로 작동합니다.

 

이제 동방의 에덴동산’과 연결해 보겠습니다. ‘동방’은 해가 뜨는 곳, 곧 사랑이 시작되는 곳을 의미하고, ‘동산’은 지성과 인식의 영역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동방의 에덴동산’은 사랑(동방)으로부터 빛을 받아 형성된 지성(동산)’, 곧 지금 설명드린 바로 그 상태를 가리킵니다.

 

사랑을 통해 오는 지성은, 사랑이 먼저 옳음을 보고, 지성은 그 사랑이 본 것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힘입니다.’

 

이 표현은 추상적인 미사여구가 아니라, ‘지성과 사랑의 질서가 완전히 바로 선 상태’를 가리키는 매우 구체적인 개념입니다.

 

 

 

AC.98, 심화 2, ‘퍼셉션의 확장’

AC.98.심화 2. ‘퍼셉션의 확장’ 위 AC.98 해설에, ‘그러나 천적 인간의 지성은 사랑에서 출발합니다. 그는 먼저 기뻐하고, 그다음에 압니다. 그의 이해는 판단이 아니라 ‘퍼셉션의 확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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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8, 창2:8, ‘동방의 에덴동산’, 천적 인간의 지성(AC.98-101)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And Jehovah God planted a garden eastward in Eden, and there he put the man whom he had formed. (창2:8) AC.98 ‘동산’(garden)은 지성(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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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And Jehovah God planted a garden eastward in Eden, and there he put the man whom he had formed. (2:8)

 

AC.98

 

동산(garden)은 지성(intelligence)을 의미하고, ‘에덴(Eden)은 사랑(love), ‘동쪽(east)은 주님(the Lord), 그 결과 동방의 에덴동산(garden of Eden eastward)은 사랑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흘러들어오는 천적 인간의 지성(the intelligence of the celestial man, which flows in from the Lord through love)을 의미합니다. By a “garden” is signified intelligence; by “Eden,” love; by the “east,” the Lord; consequently by the “garden of Eden eastward” is signified the intelligence of the celestial man, which flows in from the Lord through love.

 

 

해설

 

이 글은 창세기 2장의 공간 언어가 어디에서 시작되고 어디로 귀결되는지를 단 한 문장으로 압축해 줍니다. 지금까지 사람의 형성, 생명, 평화, 호흡을 따라왔다면, AC.98은 그 모든 것이 ‘어떤 질서로 인식과 이해로 열리는가’를 보여 줍니다. 여기서 처음으로 본격적으로 ‘지성’이라는 말이 등장하는데, 이 지성은 결코 중립적 이성이나 분석 능력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동산’을 지성으로 규정합니다. 동산은 무질서한 숲이 아니라, 돌봄과 질서가 있는 공간입니다. 이는 지성이 단순한 정보의 집합이 아니라, ‘정돈되고 살아 있는 이해의 장’임을 뜻합니다. 천적 인간의 지성은 추론을 통해 쌓아 올린 체계가 아니라, 이미 살아 있는 생명이 질서를 이루어 펼쳐진 공간입니다.

 

에덴’이 사랑을 의미한다는 설명은 결정적입니다. 지성의 근원이 사랑이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지성이 사랑과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서 천적 지성은 사랑에서 나오지 않으면 성립하지 않습니다. 에덴 없는 동산은 있을 수 없고, 사랑 없는 지성은 천적 지성이 아닙니다.

 

여기에 ‘동쪽’이 더해집니다. 동쪽은 주님을 의미합니다. 이는 빛이 떠오르는 방향이라는 상징을 넘어, ‘모든 생명과 인식의 근원’을 가리킵니다. 동쪽이 주님을 의미한다는 것은, 천적 지성이 자기 안에서 시작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언제나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그래서 ‘동방의 에덴동산’이라는 표현은 단순한 위치 설명이 아닙니다. 이는 지성의 발생 경로를 정확히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통하여, 지성으로 흘러든다는 질서입니다. 이 순서는 뒤바뀔 수 없습니다. 지성이 먼저 오고 사랑이 뒤따르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먼저이고 지성은 그 결과’입니다.

 

이 점에서 천적 인간의 지성은 영적 인간의 지성과 분명히 구별됩니다. 영적 인간의 지성은 진리에서 출발하여 사랑으로 향합니다. 그래서 그는 배우고, 분별하고, 선택해야 합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의 지성은 사랑에서 출발합니다. 그는 먼저 기뻐하고, 그다음에 압니다. 그의 이해는 판단이 아니라 ‘퍼셉션의 확장’입니다.

 

이 단락은 또한, 에덴동산이 잃어버린 과거의 장소가 아니라, ‘인간 안에서 다시 형성될 수 있는 상태’임을 분명히 합니다. 에덴은 지리적 기억이 아니라, 사랑이 주님을 향해 열릴 때마다 다시 열리는 자리입니다. 그때 지성은 억지로 밝히는 빛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빛이 됩니다.

 

AC.98은 이렇게 말합니다. 천적 인간의 지성은 스스로 만든 동산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통해 흘러들어와 형성된 에덴의 동산이라고 말입니다. 이 지성 안에서는, 아는 것이 곧 사랑하는 것이고, 사랑하는 것이 곧 보는 것이 됩니다.  

 

 

심화

 

1.사랑을 통하여 흘러들어오는 지성

 

 

AC.98, 심화 1, ‘사랑을 통하여 흘러들어오는 지성’

AC.98.심화 1. ‘사랑을 통하여 흘러들어오는 지성’ 위 AC.98 본문에 ‘‘동방의 에덴동산’(garden of Eden eastward)은 사랑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흘러들어오는 천적 인간의 지성(the intelligence of the 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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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퍼셉션의 확장

 

 

AC.98, 심화 2, ‘퍼셉션의 확장’

AC.98.심화 2. ‘퍼셉션의 확장’ 위 AC.98 해설에, ‘그러나 천적 인간의 지성은 사랑에서 출발합니다. 그는 먼저 기뻐하고, 그다음에 압니다. 그의 이해는 판단이 아니라 ‘퍼셉션의 확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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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9, 창2:8, 생명의 질서에서 본 ‘에덴동산’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창2:8) AC.99 영적 인간한테 있어서의 생명, 곧 생명의 질서는 이와 같습니다. 주님께서 신앙을 통하여 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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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7, 창2:7, '호흡 자체가 영적 상태와 직결되어 있었던 태고교회'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창2:7) AC.97 생명이 ‘숨 쉼’(breathing)과 ‘숨’(breath)으로 묘사되는 이유는, 태고교회의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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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2:7)

 

AC.97

 

생명이 숨 쉼(breathing) (breath)으로 묘사되는 이유는, 태고교회의 사람들이 사랑과 신앙의 상태들을 호흡의 상태들(states of respiration)로 퍼셉션했기 때문입니다. 이 호흡의 상태들은 그들의 후손들 가운데서 점차 변화되었습니다. 이 호흡에 관해서는, 오늘날에는 그러한 것들이 전혀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아직 아무 말도 할 수 없습니다. 태고 사람들은 이것을 잘 알고 있었고, 또한 저세상, 즉 내세에 있는 사람들도 이것을 알고 있으나, 이 땅에서는 더 이상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영, 곧 생명을 바람(wind)에 비유한 이유입니다. 주님께서도 사람의 거듭남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 요한복음에서 같은 비유를 사용하십니다.주1 The reason why life is described by “breathing” and by “breath” is also that the men of the most ancient church perceived states of love and of faith by states of respiration, which were successively changed in their posterity. Of this respiration nothing can as yet be said, because at this day such things are altogether unknown. The most ancient people were well acquainted with it, and so are those who are in the other life, but no longer anyone on this earth, and this was the reason why they likened spirit or life to “wind.” The Lord also does this when speaking of the regeneration of man, in John:1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3:8) The wind bloweth where it listeth, and thou hearest the voice thereof, and knowest not whence it cometh, or whither it goeth; so is everyone that is born of the spirit (John 3:8).

 

시편에서도 So in David: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을 그의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 (33:6) By the word of Jehovah were the heavens made, and all the army of them by the breath of his mouth (Ps. 33:6).

 

29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그들이 떨고 주께서 그들의 호흡을 거두신즉 그들은 죽어 먼지로 돌아가나이다 30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104:29, 30) Thou gatherest their breath, they expire, and return to their dust; thou sendest forth thy spirit, they are created, and thou renewest the faces of the ground (Ps. 104:29–30).

 

(breath [spiraculum])이 신앙과 사랑의 생명을 뜻하는 것은 욥기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That the “breath” [spiraculum] is used for the life of faith and of love, appears from Job:

 

그러나 사람의 속에는 영이 있고 전능자의 숨결이 사람에게 깨달음을 주시나니 (32:8) He is the spirit in man, and the breath of Shaddai giveth them understanding (Job 32:8).

 

하나님의 영이 나를 지으셨고 전능자의 기운이 나를 살리시느니라 (33:4) The spirit of God hath made me, and the breath of Shaddai hath given me life (Job 33:4).

 

 

주1, 원어 헬라어에는 바람(wind), ‘(spirit)  (breath)이 모두 같은 단어(Ψυχή  프쉬케)로 표현되어 있다. 히브리어로는 רוח 루아흐. In the original languages, “wind,” “spirit,” and “breath” are all expressed by the same word. [Reviser]

 

 

해설

 

이 글은 창세기 2 7절의 ‘’이라는 표현을, 단순한 상징 설명을 넘어 ‘태고교회 인간의 실제 삶의 방식’으로까지 끌어올립니다. AC.96에서 ‘콧구멍’이 퍼셉션과 연결되었다면, AC.97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호흡 자체가 영적 상태와 직결되어 있었다’는 매우 급진적인 진술이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 사람들이 사랑과 신앙의 상태를 ‘생각’이나 ‘판단’으로 인식한 것이 아니라, ‘호흡의 변화로 퍼셉션했다’고 말합니다. 이는 오늘날의 인간에게는 거의 상상조차 어려운 상태입니다. 우리는 감정이 바뀌면 호흡이 달라진다고 말하지만, 태고교회 사람들은 그 반대였습니다. ‘호흡 상태 자체가 곧 영적 상태의 표지’였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호흡에 대해 ‘오늘날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다’고까지 말합니다. 이는 자신이 모른다는 뜻이 아니라, 오늘날 인간의 감각과 의식 구조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 땅에서는 더 이상 그 경험의 토대 자체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세상, 곧 영계에서는 여전히 이 사실이 자명하다고 말합니다. 이 대비는 태고교회와 오늘날 인간 사이의 거리를 매우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이 맥락에서 ‘’이나 ‘생명’을 ‘바람’에 비유한 성경의 언어가 이해됩니다. 바람은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작용하고, 그 움직임은 느낄 수 있으나 통제할 수 없습니다. 이는 영적 생명의 성질과 정확히 맞아떨어집니다. 그래서 태고의 언어에서 ‘’, ‘’, ‘바람’은 서로 긴밀히 연결된 표현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요한복음에서 거듭남을 ‘바람’에 비유하신 말씀은, 이 태고교회의 언어를 직접적으로 되살리는 장면입니다. 영으로 난 사람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알 수 없다는 말씀은, 그 사람이 무질서하다는 뜻이 아니라, ‘영적 생명은 감각과 기억 지식으로 추적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거듭남은 설명의 대상이 아니라, 살아감의 상태, 사는 상태입니다.

 

다윗의 시편 인용은 이 구조를 우주적 차원으로 확장합니다. 하늘과 그 모든 군대, 곧 ‘만상’이 여호와의 ‘입 기운’으로 지어졌다는 말은, 창조의 근원이 ‘영적 생명’임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숨이 거두어지면 모든 것은 흩어지고, 다시 보내지면 새로 창조됩니다. 이는 자연의 순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유입과 거둠’이라는 영적 원리를 말합니다.

 

시편 104편에서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라는 표현은, 앞서 창세기 2장에서 말한 ‘’, 곧 겉 사람이 새로워지는 것과 정확히 호응합니다. 숨, 곧 영이 보내질 때, 겉 사람은 다시 생명을 입습니다. 이는 AC.94–95에서 말한 구조의 시편적 표현입니다.

 

마지막으로 욥기의 인용은 이 모든 논의를 인간 내부로 다시 끌어옵니다. 사람 안에 있는 영과, 전능자의 숨이 주는 깨달음과 생명은, ‘신앙과 사랑의 생명’을 가리킵니다. 깨달음은 신앙의 생명이고, 생명 자체는 사랑의 생명입니다. 이 둘은 모두 ‘’이라는 하나의 상징 아래 묶입니다.

 

AC.97은 이렇게 말합니다. 생명을 숨으로 말하는 성경의 언어는 비유가 아니라, ‘한때 실제였던 인간 경험의 흔적’이라고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것을 직접 체험하지 못하지만, 말씀은 여전히 그 구조를 보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숨은 지금도, 다른 방식으로 사람 안에 불어오고 있습니다.

 

이 단락에 이르면, ‘’은 더 이상 시적인 표현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사람에게 끊임없이 유입되는 ‘신앙과 사랑의 생명’을 가리키는, 가장 깊고 오래된 언어입니다.

 

 

 

AC.98, 창2:8, ‘동방의 에덴동산’, 천적 인간의 지성(AC.98-101)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And Jehovah God planted a garden eastward in Eden, and there he put the man whom he had formed. (창2:8) AC.98 ‘동산’(garden)은 지성(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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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6, 창2:7,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셨다’ 오해 바로잡기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창2:7) AC.96 ‘여호와 하나님이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Jehovah God breathed into his nostr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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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6.심화

 

5. 올바른 삼위일체 축도

 

저는 삼위일체에 대한 이 스베덴보리의 설명,  한 분 주님 안의 세 가지 인격적 나타나심을 알고 나서는 그동안 오랜 세월 사용해 오던 개신교 전통적 축도 표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13:13) 대신 주 여호와 하나님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제가 만든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 표현 중 성령에 대한 언급이 없어 늘 어딘가 좀 아쉬운데요, 혹시 이 스베덴보리식 삼위일체를 요약한, 더 좋은 무슨 축도 표현이 없을까요?

 

 

지금 사용하고 계신 주 여호와 하나님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표현은 이미 핵심을 잘 잡고 계신 것입니다. 다만 목사님께서 느끼신 것처럼, 거기에 성령의 역사’에 해당하는 부분, 곧 주님의 실제 작용과 임재가 언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아쉬움이 남는 것도 매우 자연스럽습니다. 그래서 방향은 하나입니다. ‘‘성령을 별도의 위격처럼 다시 넣는 것이 아니라, 한 분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생명, 진리, 역사하심을 표현 속에 자연스럽게 녹여내는 것’입니다.

 

먼저 원리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즉, ‘아버지-아들-성령’이라는 구조를 주님(한 분)-그분의 사랑-그분의 진리와 역사하심’으로 풀어내는 것이지요.

 

이 원리에 따라 실제로 사용하실 수 있는 축도 표현을 몇 가지 제안드리겠습니다. (모두 한 분 주님 중심으로 구성했습니다.)

 

첫째, 가장 균형 잡힌 형태입니다.

 

주 여호와 하나님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지혜와 생명의 역사하심이 여러분과 함께하시기를 원합니다.’

 

이 표현에는 사랑’(아버지), ‘지혜, 진리’(아들), ‘생명의 역사’(성령)가 자연스럽게 포함됩니다.

 

둘째, 조금 더 성경적 어감을 살린 형태입니다.

 

주 여호와 하나님 곧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사랑과 신적 진리와 그 거룩한 역사하심이 여러분과 함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 표현은 신적 사랑-신적 진리-거룩한 역사’로 구조가 또렷합니다.

 

셋째, ‘성령’의 뉘앙스를 가장 직접적으로 살린 표현입니다.

 

주 여호와 하나님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진리와 그 생명의 숨결이 여러분과 함께하시기를 원합니다.’

 

여기서 생명의 숨결’은 AC.96에서 보신 콧김, , 성령 개념을 그대로 살린 표현입니다.

 

넷째, 조금 더 간결하고, 설교 현장에서 쓰기 좋은 형태입니다.

 

주 여호와 하나님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진리와 그 살아 있는 임재가 여러분과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

 

여기 임재’라는 표현으로 성령의 실제 체험적 측면을 담았습니다.

 

다섯째, 목사님 스타일에 가장 가까운 확장형입니다.

 

주 여호와 하나님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과 그 거룩한 역사하심이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존 은혜-사랑-성령 구조를 유지하면서, ‘성령’을 거룩한 역사하심’으로 풀어낸 형태입니다.

 

이 중에서 신학적으로 가장 안정적인 구조는 사랑-진리-역사하심’, 또는 사랑-지혜-생명’, 이 두 가지 축입니다.

 

성령을 빼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살아 있는 역사로 풀어 넣는 것이 스베덴보리식 표현입니다.’

 

 

 

AC.96, 창2:7,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셨다’ 오해 바로잡기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창2:7) AC.96 ‘여호와 하나님이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Jehovah God breathed into his nostr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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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6, 심화 4, ‘제3위격’

AC.96.심화 4. ‘제3위격’ 위 심화 3 설명 중 ‘제3위격’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요, 이에 대한 설명 좀 부탁합니다. 특히 ‘위격’이라는 게 뭔가요? ‘삼위일체’ 할 때, 그 ‘위’ 같은 거죠?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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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6.심화

 

4. 3위격

 

위 심화 3 설명 중 3위격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요, 이에 대한 설명 좀 부탁합니다. 특히 위격이라는 게 뭔가요? 삼위일체 할 때,   같은 거죠?

 

 

네, 정확히 보신 것처럼 3위격’의 위격’은 삼위일체’에서 말하는 그 (位)’와 같은 개념입니다. 다만 이 용어가 일상 언어가 아니라 신학적 번역어이다 보니, 정확히 풀어 이해해 두시면 이후 논의가 훨씬 또렷해집니다.

 

먼저 위격(位格)’이라는 말의 원어는 라틴어 persona’이고, 영어로도 그대로 person’이라고 번역됩니다. 그런데 여기서의 person’은 우리가 일상에서 말하는 한 사람, 한 개인’이라는 뜻과는 조금 다릅니다. 신학에서의 위격’은 스스로 인식하고 관계할 수 있는 주체’, 또는 독립된 인격적 중심’을 의미합니다. 쉽게 말하면 생각하고, 의지, 의도하고, 관계 맺는 주체성’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래서 전통적인 삼위일체 교리에서 말하는 세 위격’은 이렇게 설명됩니다.

 

 아버지’: 신성의 근원적 위격

 아들’: 성육신하신 위격(예수 그리스도)

 성령’: 역사하시는 위격

 

이 셋이 각각 위격’이며, 동시에 본질(신성)은 하나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삼위일체(三位一體)’라는 표현이 나온 것입니다. ‘세 위격이지만 한 본질’이라는 뜻입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입니다.  위격’이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그림이 됩니다. 만약 이것을 우리가 일상적으로 이해하는 세 사람’처럼 받아들이면, 사실상 세 하나님’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도 많은 신학자들이 이 부분을 설명하기 위해 매우 고심해 왔습니다. ‘셋이지만 하나’라는 표현 자체가 인간 언어로는 완전히 풀기 어려운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다른 설명을 제시합니다. 그는 세 위격’이라는 개념을 유지하기보다, 그것을 한 분 주님 안의 세 측면으로 재정리합니다. 곧,

 

 아버지’ = 보이지 않는 신성(존재 자체)

 아들’ = 보이는 신성(성육신하신 주님)

 성령’ = 그 한 분 주님에게서 나와 역사하는 신적 작용

 

이렇게 이해합니다. 그래서 세 위격’이 아니라, ‘한 분 주님의 세 측면 또는 세 가지 방식으로 나타나심’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 차이를 아주 단순하게 비교하면 이렇습니다. 전통 설명으로는 한 하나님 안에 세 위격이 있다’이지만, 스베덴보리 설명으로는 한 주님이 세 방식으로 나타나고 역사하신다’라고 말이지요.

 

여기서 다시 목사님 질문으로 돌아오면, ‘제3위격’이라는 말은 전통 신학에서는 성령 하나님’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곧, ‘삼위일체 가운데 세 번째 위격’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위격’이라는 말 자체는 그냥 자리 하나’가 아니라, ‘하나의 인격적 주체’를 뜻합니다. 그래서 제3위격’이라고 하면, 단순히 순서가 세 번째라는 의미를 넘어서, ‘세 번째 인격적 주체’라는 의미까지 포함하고 있는 표현입니다.

 

위격이란 하나님 안에서 누구처럼 말해지고 관계되는 인격적 모습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래서 삼위일체는 하나님이 세 분이라는 뜻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이 세 가지 인격적 방식으로 나타나신다는 것을 설명하려는 표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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