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2:2, 3)

 

AC.87

 

천적 인간을 ‘안식일(the sabbath), 곧 ‘(rest)이라 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가 천적 상태가 될 때 싸움이 그치기 때문입니다. 이때에는 악한 영들이 물러가고, 선한 영들뿐 아니라 천적 천사들이 가까이 옵니다. 이들이 함께 있을 때에는, 악한 영들이 도저히 머물 수 없고 멀리 도망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싸움은 사람이 스스로 한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께서 그 사람을 위하여 하신 것이므로, 주님께서 ‘쉬셨다(rested)고 합니다. Another reason why the celestial man is the “sabbath,” or “rest,” is that combat ceases when he becomes celestial. The evil spirits retire, and good ones approach, as well as celestial angels; and when these are present, evil spirits cannot possibly remain, but flee far away. And since it was not the man himself who carried on the combat, but the Lord alone for the man, it is said that the Lord “rested.”

 

 

해설

 

이 글은 안식의 본질을 다시 한번, 그러나 이번에는 ‘영계의 질서’라는 관점에서 명확히 드러냅니다. 앞선 글들에서 안식은 신앙과 사랑의 질서가 완성된 상태로 설명되었는데, AC.87에서는 그 결과가 영적 교통의 변화로 나타납니다. 즉, 안식은 단지 인간 내부의 심리적 평온이 아니라, ‘영계와의 관계 자체가 달라진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적 인간이 안식이라 불리는 이유를 ‘싸움의 종식’에서 찾습니다. 여기서 싸움이란, 앞서 반복적으로 언급되었던 유혹과 시험, 곧 악과 거짓이 사람의 의지와 이해를 차지하려는 시도를 말합니다. 영적 단계에서는 이 싸움이 필연적이며 지속적입니다. 그러나 천적 상태에 이르면, 그 싸움은 더 이상 중심을 차지하지 않습니다. 싸움이 끝났다는 것은, 더 이상 위협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질서가 이미 세워졌다는 뜻’입니다.

 

이 변화는 영계의 움직임으로 표현됩니다. 악한 영들은 물러가고, 선한 영들과 더 나아가 천적 천사들이 가까이 옵니다. 이는 천적 상태가 단지 ‘조금 더 선한 상태’가 아니라, ‘전혀 다른 교통의 영역’에 속함을 뜻합니다. 천적 천사들이 임재할 때에는, 악한 영들이 머물 수 없습니다. 이는 힘의 대결 때문이 아니라, 성질의 불일치 때문입니다. 그곳에는 더 이상 그들이 붙들 수 있는 공명점이 없습니다.

 

이 지점에서 매우 중요한 진술이 나옵니다. 싸움은 사람이 수행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람은 싸운다고 느끼지만, 실제로는 주님께서 그 사람을 위하여 싸우셨다는 것입니다. 이는 스베덴보리 영적 인간학의 핵심 가운데 하나입니다. 유혹의 시간에 인간이 느끼는 긴장과 고통은 실제이지만, ‘결정적인 힘은 언제나 주님께 속해 있습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저항하거나 동의하지 않는 것이며, 싸움 자체의 수행은 주님께서 담당하십니다.

 

그래서 안식은 인간의 성취가 아닙니다. 사람이 모든 싸움을 잘 해냈기 때문에 오는 보상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 싸움을 끝내신 결과’입니다. 이 때문에 ‘주님이 쉬셨다’는 표현이 사용됩니다. 이는 주님께서 활동을 중단하셨다는 뜻이 아니라, 더 이상 저항할 것이 없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인간 안에서 주님의 질서가 자리를 잡았기에, 주님의 일하심이 방해받지 않게 된 상태입니다.

 

이 단락은 안식에 대한 인간 중심적 오해를 단호하게 교정합니다. 안식은 내가 편안해졌다는 느낌이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가 안정되었다는 표지’입니다. 악한 영들이 물러가고 선한 영들과 천적 천사들이 가까이 온다는 말은, 인간의 내적 상태가 이제 하늘의 질서와 직접적으로 호응하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안식은 심리 상태가 아니라, 존재 상태입니다.

 

또한 이 설명은 천적 인간의 겸손을 자연스럽게 드러냅니다. 그가 안식에 이르렀다고 해서, 자신을 싸움의 승자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는 싸움이 끝났음을 알지만, 그 싸움의 공로를 자기에게 돌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선과 생명의 근원이 자신이 아니라 주님임을 퍼셉션으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천적 인간의 내적 평화입니다.

 

AC.87은 결국 이렇게 말합니다. 안식은 악이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니라, 악이 더 이상 머물 자리를 찾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에 오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 자리는 주님으로 채워졌고, 주님의 임재가 충만할 때, 싸움은 자연스럽게 끝납니다.

 

이 지점까지 오면, 안식일은 더 이상 계명의 항목이 아니라, ‘인간이 도달하도록 창조된 궁극의 상태’임이 분명해집니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말해지는 ‘’은, 가장 깊은 생명의 활동과 모순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가장 온전한 생명이 아무런 방해 없이 흐르는 상태입니다.

 

 

 

AC.86, 창2:2-3, ‘안식일 저녁’(the eve of the sabbath)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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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2:2, 3)

 

AC.86

 

여섯째 날(the sixth day)이 된 영적 인간이 이제 천적 상태로 들어가기 시작할 때, 곧 이 상태는 여기서 처음으로 다루어지는 상태인데, 바로 ‘안식일 저녁(the eve of the sabbath)이라는 것으로, 유대교회가 전통적으로 저녁부터 거룩하게 지켜온 안식일(the sabbath)은 바로 이때를 표상하는 것입니다. 천적 인간은 곧 말씀드릴 ‘아침(the morning)입니다. When the spiritual man, who has become the “sixth day,” is beginning to be celestial, which state is here first treated of, it is the “eve of the sabbath,” represented in the Jewish church by the keeping holy of the sabbath from the evening. The celestial man is the “morning” to be spoken of presently.

 

이날은 준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되었더라 (23:54)

 

 

해설

 

이 글은 매우 짧지만, 창세기 2장의 안식 구조를 ‘시간의 흐름’ 속에서 정밀하게 나누어 보여주는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적 상태를 단번에 도달하는 완성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 시작과 성숙을 ‘저녁’과 ‘아침’이라는 두 단계로 구분합니다. AC.86은 바로 그 첫 단계, 곧 ‘안식일 저녁’을 다룹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 ‘저녁’이 여전히 어둠의 상태를 뜻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의 저녁은 혼돈이나 무지의 상태였지만, 여기서의 저녁은 전혀 다릅니다. 이는 이미 여섯째 날, 곧 영적 질서가 완성된 이후의 저녁입니다. 다시 말해, ‘빛을 충분히 경험한 뒤에 오는 저녁’이며, 안식을 향해 기울어지는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상태를 ‘영적 인간이 천적으로 되기 시작하는 때’라고 설명합니다. 아직 완전한 천적 인간은 아니지만, 중심이 이미 이동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신앙이 앞서던 질서에서, 사랑이 점점 주된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하는 전이 상태입니다. 이 시점에서는 싸움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지만, 그 성격이 달라집니다. 더 이상 무엇이 옳은지를 두고 치열하게 다투기보다는, ‘어디에 머물 것인가’가 문제 됩니다.

 

이 상태가 유대교회에서 ‘저녁부터 안식일을 지키는 것’으로 표상되었다는 설명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안식일이 아침이 아니라 저녁부터 시작된다는 점은, 안식이 인간의 활동이나 성취로 시작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안식은 먼저 내려놓음에서 시작됩니다. 하루의 일이 끝나고, 더 이상 무언가를 이루려 하지 않을 때, 안식의 문이 열립니다.

 

이 ‘저녁’은 아직 빛이 완전히 드러난 상태는 아니지만, 더 이상 어둠으로 돌아가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기대가 깃든 저녁’입니다. 주님께서 안식 안에서 무엇을 이루실지를 기다리는 상태이며, 인간이 스스로를 멈추고 주님의 일하심을 허락하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 저녁은 두려움의 시간이 아니라, 조용한 전환의 시간입니다.

 

마지막 문장에서 스베덴보리는 천적 인간을 ‘아침’이라고 부르겠다고 예고합니다. 이는 다음 단락들에서 본격적으로 다루어질 내용이지만, 이미 여기서 방향은 분명합니다. 저녁은 시작이고, 아침은 완성입니다. 저녁은 안식으로 들어가는 문턱이고, 아침은 안식 그 자체입니다.

 

이 구조를 통해 우리는 안식을 다시 배우게 됩니다. 안식은 단번에 주어지는 보상이 아니라, ‘천천히 밝아오는 상태’입니다. 먼저 저녁이 있고, 그다음에 아침이 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은,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으로 옮겨 가는 한 인간 안의 변화입니다.

 

AC.86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지금 나는 싸움의 한복판에 있는가, 아니면 이미 안식의 저녁에 들어서 있는가’ 그리고 그 질문 자체가, 이미 안식으로 향하고 있다는 신호일지도 모릅니다.

 

 

 

AC.87, 창2:2-3, 주님께서 ‘쉬셨다’(rested)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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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5, 창2:2-3, ‘천적 인간 = 일곱째 날 = 안식일’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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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2:2, 3)

 

AC.85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the seventh day)이며, 그러므로 일곱째 날이 거룩하게 구별되어 안식일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는 사실은, 지금까지 드러나지 않았던 아르카나(arcana)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천적 인간이 어떤 상태인지를 알지 못하였고, 영적 인간이 어떤 상태인지조차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무지로 인해, 사람들은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을 동일시하였으나, 그 둘 사이에는 사실 매우 큰 차이가 있으며, 이는 AC.81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일곱째 날에 관해서, 그리고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 또는 ‘안식일(sabbath)이라는 사실에 관해서는, 주님 자신이 안식일이시라(the Lord himself is the sabbath)는 점에서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That the celestial man is the “seventh day,” and that the seventh day was therefore hallowed, and called the sabbath, are arcana which have not hitherto been discovered. For none have been acquainted with the nature of the celestial man, and few with that of the spiritual man, whom in consequence of this ignorance they have made to be the same as the celestial man, notwithstanding the great difference that exists between them, as may be seen in n. 81. As regards the seventh day, and as regards the celestial man being the “seventh day” or “sabbath,” this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the Lord himself is the sabbath; and therefore he says: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2:28) The son of man is Lord also of the sabbath (Mark 2:27),

 

이 말씀은 주님이 곧 사람 자신(man himself)이시며, 동시에 안식일 그 자체(the sabbath itself)이심을 뜻합니다. 하늘과 땅에 있는 주님의 나라를 가리켜 안식일이라 하는데, 이 안식은 그분으로 말미암으며, 다른 말로는 영원한 평화와 쉼이라고 합니다. which words imply that the Lord is man himself, and the sabbath itself. His kingdom in the heavens and on the earth is called, from him, a sabbath, or eternal peace and rest.

 

[2] 여기서 다루고 있는 태고교회는, 그 이후에 있었던 모든 교회들 가운데서도 무엇보다 주님의 안식일이었습니다. 이후에 이어진 모든 주님의 가장 내적인 교회들 역시 안식일이며, 또한 거듭남을 거쳐 천적인 상태가 된 모든 개인 역시 안식일입니다. 이는 그가 주님의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그 이전에는 여섯 날의 싸움과 수고가 선행합니다. 이러한 것들은 유대교회에서 노동의 날들과 안식일로 대표, 즉 표상되었습니다. 그 교회에는 주님과 그의 나라를 표상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제정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같은 것이 광야에서 언약궤가 나아갈 때와 쉴 때로도 표상되었습니다. 언약궤가 광야에서 행진할 때는 싸움과 시험이, 쉴 때는 평화의 상태가 표상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언약궤가 나아갈 때에 모세는 말하기를, The most ancient church, which is here treated of, was the sabbath of the Lord above all that succeeded it. Every subsequent inmost church of the Lord is also a sabbath; and so is every regenerate person when he becomes celestial, because he is a likeness of the Lord. The six days of combat or labor precede. These things were represented in the Jewish church by the days of labor, and by the seventh day, which was the sabbath; for in that church there was nothing instituted which was not representative of the Lord and of his kingdom. The like was also represented by the ark when it went forward, and when it rested, for by its journeyings in the wilderness were represented combats and temptations, and by its rest a state of peace; and therefore, when it set forward, Moses said:

 

35궤가 떠날 때에는 모세가 말하되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가 주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 하였고 36궤가 쉴 때에는 말하되 여호와여 이스라엘 종족들에게로 돌아오소서 하였더라 (민10:35, 36) Rise up, Jehovah, and let thine enemies be scattered, and let them that hate thee flee before thy faces. And when it rested, he said, Return, Jehovah, unto the ten thousands of the thousands of Israel (Num. 10:35–36).

 

또한 언약궤에 관하여는, 그것이 여호와의 산에서 나아가 그들을 위하여 쉴 곳을 찾았다고 합니다. (10:33) It is there said of the ark that it went from the Mount of Jehovah “to search out a rest for them” (Num. 10:33).

 

그들이 여호와의 산에서 떠나 삼 일 길을 갈 때에 여호와의 언약궤가 그 삼 일 길에 앞서 가며 그들의 쉴 곳을 찾았고 (10:33)

 

[3] 천적 인간의 안식은 이사야에서 안식일로 묘사됩니다. The rest of the celestial man is described by the sabbath in Isaiah:

 

13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하지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하게 여기고 네 길로 행하지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하지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14네가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기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58:13, 14) If thou bring back thy foot from the sabbath, so that thou doest not thy desire in the day of my holiness, and callest the things of the sabbath delights to the holy of Jehovah, honorable; and shalt honor it, not doing thine own ways, nor finding thine own desire, nor speaking a word; then shalt thou be delightful to Jehovah, and I will cause thee to be borne over the lofty things of the earth, and will feed thee with the heritage of Jacob (Isa. 58:13–14).

 

이와 같이 천적 인간의 성질은 자기 자신의 욕망을 따라 행하지 않고, 주님의 선하신 기쁨을 따라 행하는 데 있으며, 그것이 곧 그의 ‘욕망(desire)입니다. 이로 인해 그는 내적인 평화와 행복을 누리는데, 이것이 여기서는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being uplifted over the lofty things of the earth)로 표현되었고, 동시에 외적인 평온과 기쁨도 누리게 되는데, ‘야곱의 기업으로 기르리라(being fed with the heritage of Jacob)라는 말의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Such is the quality of the celestial man that he acts not according to his own desire, but according to the good pleasure of the Lord, which is his “desire.” Thus he enjoys internal peace and happiness—here expressed by “being uplifted over the lofty things of the earth”—and at the same time external tranquility and delight, which is signified by “being fed with the heritage of Jacob.”

 

 

해설

 

이 글은 창세기 2장의 안식 사상이 어디까지 확장되는지를 보여 주는, 매우 밀도 높은 정리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천적 인간 = 일곱째 날 = 안식일’이라는 등식을 단순한 해석 차원이 아니라, ‘지금까지 인류에게 드러나지 않았던 아르카나’라고 선언합니다. 다시 말해, 이 내용은 새로운 교리를 덧붙이는 것이 아니라, 말씀 속에 이미 들어 있었으나 아무도 보지 못했던 구조를 드러내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가 이렇게까지 말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지금까지 교회는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을 거의 구분하지 못해 왔고, 그 결과 신앙 중심의 상태를 곧 완성 상태로 오해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AC.81에서 이미 보았듯이,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 사이에는 질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신앙이 중심인 상태와 사랑이 중심인 상태는, 겉으로 보기에는 비슷해 보일 수 있지만, 내적 질서는 전혀 다릅니다. 이 차이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안식일의 본질 역시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안식의 본질을 주님 자신에게서 찾습니다. 주님이 곧 안식일이시라는 말은, 안식이 어떤 규범이나 제도가 아니라 ‘인격적 실재’임을 뜻합니다. 주님이 안식일의 주인이시라는 말씀은, 주님이 인간의 참된 안식이시며, 동시에 참된 인간의 형상이시라는 뜻을 내포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주님이 곧 ‘사람 자신’이며 ‘안식일 그 자체’라고까지 말합니다. 안식은 주님과 분리된 어떤 상태가 아니라, 주님과의 일치 안에서만 가능한 상태입니다.

 

이로부터 중요한 확장이 일어납니다. 주님의 나라는 ‘안식일’이라 불리며, 이는 영원한 평화와 안식을 뜻합니다. 안식은 시간의 하루가 아니라, ‘존재의 상태’입니다. 그래서 태고교회는 그 이후의 어떤 교회보다도 주님의 안식일이었다고 합니다. 이는 그들이 도덕적으로 더 완벽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삶의 중심이 사랑과 퍼셉션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후에 등장한 모든 가장 내적인 교회들, 그리고 거듭남을 거쳐 천적인 상태에 이른 각 개인 역시 이름하여 안식일이라 합니다. 이는 그가 주님의 형상, 곧 주님의 안식을 담는 그릇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안식은 갑자기 주어지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분명히 말합니다. 엿새 동안의 싸움과 수고가 선행한다고 말입니다. 이는 앞서 반복적으로 강조된 질서입니다. 영적인 단계의 싸움과 선택, 유혹과 투쟁 없이는 천적인 안식이 오지 않습니다. 안식은 싸움을 회피한 결과가 아니라, ‘싸움을 통과한 결과’입니다.

 

이 구조는 유대교회의 제도 안에 표상으로 새겨져 있었습니다. 육일 간의 노동과 안식일의 구분은 단순한 사회 질서가 아니라, 인간 내적 상태의 상응이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유대교회에 제정된 것 가운데 주님과 그의 나라를 표상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고 단언합니다. 즉, 안식일 계명은 외적 순종을 요구하기 위한 규정이 아니라, ‘인간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가리키는 표지’였습니다.

 

이 표상은 광야에서 언약궤의 움직임에서도 반복됩니다. 언약궤가 나아갈 때는 싸움과 시험이 표상되고, 쉴 때는 평화의 상태가 표상됩니다. 모세의 두 기도는 이 두 상태를 정확히 가릅니다. 나아갈 때에는 원수들이 흩어지기를 구하고, 쉴 때에는 여호와께서 백성 가운데로 돌아오시기를 구합니다. 싸움의 때와 안식의 때가 분명히 구분되어 있으며, 그 중심에는 언제나 주님의 임재가 있습니다.

 

언약궤가 ‘쉴 곳을 찾으러’ 나아갔다는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싸움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안식을 찾기 위한 여정’이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인간의 영적 여정 전체를 요약하는 말과도 같습니다. 유혹과 시험은 목적이 아니라 과정이며, 그 끝에는 반드시 쉼이 있습니다.

 

이제 스베덴보리는 이사야를 통해 천적 인간의 안식을 한층 더 내적으로 묘사합니다.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단순히 행위를 멈추는 것이 아니라, ‘자기 욕망’을 멈추는 것입니다. 자기 길, 자기 기쁨, 자기 말을 내려놓는 것이 안식의 본질입니다. 이는 금욕이나 억압이 아니라, ‘중심의 이동’입니다. 자기 자신이 중심에서 물러나고, 주님의 기쁨이 중심에 놓일 때, 비로소 안식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천적 인간은 자기 욕망을 따라 행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가 무욕(無慾)의 사람이라는 건 아닙니다. 그의 욕망 자체가 주님의 선하신 기쁨과 일치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천적 자유입니다. 그는 억지로 자기 뜻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의 뜻이 이미 주님의 뜻 안에서 형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상태에서 그는 두 가지를 동시에 누립니다. 하나는 내적 평화와 행복이며, 다른 하나는 외적 평온과 기쁨입니다. 이사야에서 말하는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는 내적 상승을, ‘야곱의 기업으로 기르리라’는 말은 외적 삶의 안정과 충만을 뜻합니다. 천적 안식은 내면과 외면을 분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둘을 하나로 엮습니다.

 

AC.85는 이렇게 해서 안식일을 도덕규범이나 종교 의무에서 해방, ‘인간 완성의 상태’로 되돌려 놓습니다. 안식은 멈춤이 아니라, 가장 깊은 일치이며, 가장 충만한 생명입니다. 그리고 그 안식은 주님 자신으로부터 오며, 주님을 닮아갈수록 인간 안에서 실제가 됩니다.

 

 

 

AC.86, 창2:2-3, ‘안식일 저녁’(the eve of the sabbath)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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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4, 창2:2-3,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AC.84-88)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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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And on the seventh day God finished his work which he had made; and he rested on the seventh day from all his work which he had made. And God blessed the seventh day, and hallowed it; because that in it he rested from all his work which God in making created. (2:2, 3)

 

AC.84

 

천적 인간은 ‘일곱째 날(the seventh day)입니다. 주님께서 엿새 동안 일하셨으므로, 그것을 ‘그가 하시던 모든 일(his work)이라 하며, 모든 싸움(combat)이 그때 그치게 되므로, 주님께서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그날에 안식하시니라’라고 하십니다. 이로 인해 일곱째 날은 거룩하게 구별되었고, ‘안식(rest)이라는 뜻의 히브리어 ‘שבת(샤바트, the sabbath)에서 유래하여 안식일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사람이 창조되고, 형성되며, 만들어졌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말씀을 보면 아주 분명합니다. The celestial man is the “seventh day,” which, as the Lord has worked during the six days, is called “his work”; and as all combat then ceases, the Lord is said to “rest from all his work.” On this account the seventh day was sanctified, and called the sabbath, from a Hebrew word meaning “rest.” And thus was man created, formed, and made. These things are very evident from the words.

 

 

해설

 

이 글은 창2:1-3에 대한 해설 가운데서도, 앞선 모든 논의를 하나의 고요한 결론으로 이끄는 자리입니다. AC.83이 ‘다 이루어짐’의 의미를 신앙과 사랑의 결합에서 설명했다면, AC.84는 그 결합이 도달하는 최종 상태를 ‘일곱째 날’이라는 이름으로 분명히 합니다. 천적 인간은 과정의 한 단계가 아니라, ‘과정이 안식으로 전환된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일곱째 날’을 천적 인간과 동일시합니다. 이는 시간의 하루가 아니라, 인간 내적 상태의 이름입니다. 엿새 동안 주님께서 ‘일하셨다’는 말은, 인간 안에서 질서가 세워지고, 진리가 밝혀지며, 싸움이 계속되던 상태를 뜻합니다. 이때의 ‘’은 창조의 수고이며, 동시에 인간 거듭남의 긴 여정입니다.

 

그러나 일곱째 날이 되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모든 싸움이 그칩니다. 여기서 싸움이란 외적 갈등이 아니라, ‘악과 거짓에 맞서 진리를 선택해야 했던 내적 투쟁’을 말합니다. 천적 상태에 이르면, 그 싸움이 더 이상 중심을 차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이미 중심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악과 거짓이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라, 더 이상 그것들이 삶의 방향을 결정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주님이 안식하셨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주님께서 활동을 멈추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의 생명과 선이 ‘방해받지 않고 사람 안에서 그대로 흘러가는 상태’를 뜻합니다. 주님이 쉬신다는 것은, 인간 안에서 주님의 질서가 더 이상 저항을 받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참된 안식입니다.

 

이로 인해 일곱째 날은 ‘거룩하게 구별’됩니다. 안식은 단순한 휴식이 아니라, ‘질서가 완성된 상태’이기 때문에 거룩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안식일의 거룩함을 규칙이나 계명에서 찾지 않고, 인간 내적 상태의 변화에서 찾습니다. 사람이 안식의 상태에 이를 때, 그날은 거룩해집니다. 거룩함은 시간에 붙어 있는 속성이 아니라, 상태에 붙어 있는 속성입니다.

 

여기서 ‘안식일’이라는 말의 어원이 ‘’을 뜻하는 히브리어 ‘שבת(샤바트, the sabbath)에서 나왔다는 설명은 단순한 어학 정보가 아닙니다. 이는 안식일의 본질이 ‘행위의 중단이 아니라 싸움의 중단’임을 분명히 하기 위함입니다. 싸움이 끝났다는 것은, 주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안정되었다는 뜻이며, 인간의 의지와 이해가 주님의 질서 안에 들어왔다는 뜻입니다.

 

이제 스베덴보리는 이 모든 내용을 한 문장으로 요약합니다. ‘이와 같이 사람이 창조되고, 형성되며, 만들어졌다’고 말합니다. 이 세 동사, create, form, make는 우연한 반복이 아닙니다. 창조는 목적의 설정이고, 형성은 질서의 구성이며, 만들어짐은 실제 삶으로의 구현입니다. 즉, 사람은 단번에 완성되지 않고, ‘목적-질서-삶이라는 단계를 거쳐 안식에 이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마지막 문장, ‘이러한 사실들은 말씀을 보면 아주 분명합니다’라는 말은, 스베덴보리의 특유의 확신을 보여 줍니다. 그는 이것을 새로운 교리를 제시한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말씀이 이미 말하고 있는 것을, 그 내적 질서에 따라 풀어 보였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는 논증으로 마무리하지 않고, ‘자명함의 선언’으로 마칩니다.

 

AC.84에 이르면, 창세기 1, 2장은 더 이상 우주의 기원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한 인간이 어떻게 ‘죽은 상태’에서 시작하여, 영적 상태를 거쳐, 마침내 천적 상태, 곧 안식의 상태에 이르는가에 대한 ‘완결된 인간학적 서사’입니다. 그리고 이 서사의 끝은 활동이 아니라, 쉼입니다. 그러나 그 쉼은 공허가 아니라, 가장 충만한 생명의 상태입니다.

 

여기까지 오면, 창세기 2장의 첫 단락은 사실상 하나의 완전한 원을 이룹니다. 시작은 ‘다 이루어짐’이었고, 끝은 ‘안식’입니다. 그리고 그 사이의 모든 설명은, 왜 이 마침이 안식일 수밖에 없는지를 보여 주었습니다.

 

 

 

AC.85, 창2:2-3, ‘천적 인간 = 일곱째 날 = 안식일’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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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3, 창2:1, ‘다 이루어지니라’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창2:1) AC.83 ‘천지와 만물’(The heavens and the earth and all the army of them)이 ‘다 이루어지니라’(to be finished)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여섯째 날’(the sixth day)이 되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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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2:1)

 

AC.83

 

천지와 만물(The heavens and the earth and all the army of them)이 ‘다 이루어지니라(to be finished)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여섯째 날(the sixth day)이 되었을 때입니다. 이는 그때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이 둘이 하나를 이룰 때는, 신앙이 아니라 사랑이, 다시 말해 영적 원리가 아니라 천적 원리가 주가 되기 시작하며, 이것이 곧 천적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The “heavens and the earth and all the army of them” are said to be “finished,” when man has become the “sixth day,” for then faith and love make a one. When they do this, love, and not faith, or in other words the celestial principle, and not the spiritual, begins to be the principal, and this is to be a celestial man.

 

 

해설

 

이 글은 창2:1의 ‘다 이루어지니라(to be finished)라는 말을, 단순한 종결이 아니라 ‘질서의 완성’으로 해석하는 결정적인 열쇠를 제공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the heavens and the earth were finished, and all the army of them.)라는 말을, 어떤 일이 끝났다는 선언으로 읽지 않습니다. 그는 그것을, 사람 안에서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았다는 상태 선언’으로 읽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사람이 ‘여섯째 날’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는 육일 창조의 마지막 단계에 도달했다는 뜻이지만, 동시에 아직 ‘일곱째 날’은 아니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여섯째 날은 완성 직전의 상태이며, ‘전환이 가능한 마지막 지점’입니다. 바로 이 시점에서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룰 수 있느냐 없느냐가 결정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마침’의 기준을 분명히 제시합니다. 그것은 지식의 충만이나 이해의 완성에 있지 않습니다. 기준은 오직 하나,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었는가’에 있습니다. 신앙이 아무리 정교해도, 사랑과 하나를 이루지 못하면 아직 ‘다 이루어진’ 상태가 아닙니다. 반대로, 신앙과 사랑이 하나가 되면, 비로소 하늘과 땅, 곧 속 사람과 겉 사람의 모든 요소들이 질서 있게 결합됩니다.

 

이 지점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이 일어납니다.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는 순간, 더 이상 신앙이 주도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사랑이 주된 원리가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매우 명확하게 말합니다. ‘신앙이 아니라 사랑이’, 다시 말해 ‘영적 원리가 아니라 천적 원리가’ 중심이 된다고 말합니다. 이는 신앙이 사라진다는 뜻이 아니라, ‘자리를 바꾼다는 뜻’입니다. 신앙은 더 이상 앞에서 끌고 가지 않고, 사랑 안에 거하게 됩니다.

 

이 전환이 바로 ‘천적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천적 인간은 신앙을 버린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신앙을 가장 온전한 자리에 둔 사람입니다. 신앙은 사랑을 설명하고 보호하며 밝히는 역할을 하고, 사랑은 삶 전체를 움직이는 중심이 됩니다. 이 질서가 세워질 때, 사람 안에서 더 이상 분열이나 긴장이 중심을 차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다 이루어지니라’라는 말을, 정지나 완결의 의미로 쓰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안식으로 들어갈 준비가 끝났다는 뜻’입니다. 여섯째 날에 모든 것이 마쳐질 때, 일곱째 날의 안식이 가능해집니다.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지 못한 상태에서는, 안식은 결코 올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는 여전히 판단과 갈등, 자기중심의 움직임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 글은 또한, 신앙 중심 신앙생활의 한계를 조용히 드러냅니다. 신앙이 주된 원리로 남아 있는 한, 사람은 여전히 ‘영적 인간’의 단계에 머뭅니다. 이는 귀하고 필수적인 단계이지만, 목적지는 아닙니다. 목적지는 사랑이 중심이 되는 상태, 곧 천적 상태입니다. AC.83은 그 목적지의 문턱을 정확히 가리킵니다.

 

여기까지의 흐름을 다시 보면, 창세기 1, 2장의 구조가 매우 선명해집니다. 창세기 1장은 신앙이 형성되고 질서 잡히는 과정, 곧 여섯째 날까지의 이야기입니다. 창세기 2장은 그 신앙 위에서 사랑이 중심이 되어 안식으로 들어가는 이야기입니다. AC.83은 이 두 장을 하나의 영적 과정으로 연결하는 ‘연결 고리’입니다.

 

그래서 이 글은 짧지만, 무게는 큽니다. ‘다 이루어지니라’라는 말 속에, 인간 거듭남의 전체 구조가 응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은 이 질문으로 수렴됩니다. 지금 내 안에서는 무엇이 주된 원리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신앙이 앞서고 있는가, 아니면 사랑이 앞서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AC.83은 판단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다만 방향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천적 인간은, 신앙이 사랑 안에서 쉬게 된 사람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 ‘천지와 만물’이 비로소 ‘다 이루어집니다.’

 

 

 

AC.84, 창2:2-3,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AC.84-88)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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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2, 창2:1,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And the heavens and the earth were finished, and all the army of them. (창2:1) AC.82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사람이 이제 영적 상태에 이르러(render) ‘여섯째 날’(the sixth day)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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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And the heavens and the earth were finished, and all the army of them. (2:1)

 

AC.82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사람이 이제 영적 상태에 이르러(render)여섯째 날(the sixth day)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 하늘, heaven)은 그의 속 사람이고, ‘(, , earth) 그의 겉 사람입니다. ‘만물(the army of them)은 사랑과 신앙, 그리고 그에 속한 지식(knowledges)으로서, 앞서 큰 광명들과 별들이 의미했던 것들입니다. 속 사람을 ‘하늘’이라 하고, 겉 사람을 ‘’이라 한다는 것은, 이미 앞 장의 인용 구절들로부터 분명하며, 그에 더해 여기 이사야의 다음 구절들도 있습니다. By these words is meant that man is now rendered so far spiritual as to have become the “sixth day”; “heaven” is his internal man, and “earth” his external; “the army of them” are love, faith, and the knowledges thereof, which were previously signified by the great luminaries and the stars. That the internal man is called “heaven,” and the external “earth,” is evident from the passages of the Word already cited in the preceding chapter, to which may be added the following from Isaiah:

 

12내가 사람을 순금보다 희소하게 하며 인생을 오빌의 금보다 희귀하게 하리로다 13그러므로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맹렬히 노하는 날에 하늘을 진동시키며 땅을 흔들어 그 자리에서 떠나게 하리니 (13:12, 13) I will make a man more rare than solid gold, even a man than the precious gold of Ophir; therefore I will smite the heavens with terror, and the earth shall be shaken out of its place (Isa. 13:12–13).

 

13하늘을 펴고 땅의 기초를 정하고 너를 지은 자 여호와를 어찌하여 잊어버렸느냐 너를 멸하려고 준비하는 저 학대자의 분노를 어찌하여 항상 종일 두려워하느냐 학대자의 분노가 어디 있느냐, 16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고 내 손 그늘로 너를 덮었나니 이는 내가 하늘을 펴며 땅의 기초를 정하며 시온에게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말하기 위함이니라 (51:13, 16) Thou forgettest Jehovah thy maker, that stretcheth forth the heavens, and layeth the foundations of the earth; but I will put my words in thy mouth, and I will hide thee in the shadow of my hand, that I may stretch out the heaven, and lay the foundation of the earth (Isa. 51:13, 16).

 

이 말씀들로부터, ‘하늘’과 ‘’이 모두 사람에게 적용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비록 그것들이 주로 태고교회를 가리켜 언급된 것이지만, 말씀의 내적 의미는 그러한 성질(nature)을 지니고 있어서, 교회에 대해 한 말은 무엇이든 그 교회의 각 개별 지체에게도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교회가 아니라면, 결코 교회의 일부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사람이 주님의 성전이 아니라면, 성전이 의미하는 바, 곧 교회와 천국이 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태고교회를 가리켜 단수로 ‘사람(man)이라고 합니다. From these words it is evident that both “heaven” and “earth” are predicated of man; for although they refer primarily to the most ancient church, yet the interiors of the Word are of such a nature that whatever is said of the church may also be said of every individual member of it, who, unless he were a church, could not possibly be a part of the church, just as he who is not a temple of the Lord cannot be what is signified by the temple, namely, the church and heaven. It is for this reason that the most ancient church is called “man,” in the singular number.

 

 

해설

 

이 글은 창세기 2장 해설의 한 정점을 이루는 문장입니다. AC.73부터 AC.81까지 ‘천적 인간’이라는 상태를 다양한 각도에서 펼쳐 보였다면, AC.82는 그 모든 설명을 다시 ‘2:1의 언어’로 되돌려 묶어 줍니다. 즉, 이 글은 앞선 모든 논의를 정리하면서 동시에, 창세기 1장의 창조 질서와 정확히 접속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여섯째 날’이라는 표현을 다시 불러옵니다. 이는 천적 상태 그 자체가 아니라, ‘영적 상태에 완전히 이른 단계’를 가리킵니다. 사람은 이 시점에서 더 이상 ‘죽은 상태에 있는 사람’도 아니고, 막 형성 중인 불안정한 상태도 아닙니다. 그는 이제 영적 질서가 완성된 상태에 도달했습니다. 다시 말해, 진리와 선의 기본 구조가 속 사람과 겉 사람 안에 제대로 세워진 상태입니다. 이 여섯째 날 위에서만, 일곱째 날의 안식이 가능합니다.

 

이제 스베덴보리는 다시 한번 ‘하늘’과 ‘’을 사람 안의 구조로 해석합니다. ‘하늘’은 속 사람이고, ‘’은 겉 사람입니다. 이는 이미 창세기 1장에서 반복적으로 제시된 해석이지만, AC.82에서는 이 해석이 단순한 상응 설명을 넘어, ‘인간 존재 전체를 이해하는 원리’로 확장됩니다. 하늘과 땅은 우주의 공간이 아니라, 한 사람 안에 동시에 존재하는 두 차원입니다.

 

만물(the army of them)이 사랑과 신앙, 그리고 그에 속한 지식(knowledges)이라는 설명은 매우 중요합니다. 군대라는 말은 단순한 집합이 아니라, ‘질서 있게 배열된 힘들’을 뜻합니다. 사랑과 신앙, 그리고 그 지식은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는 정보나 감정이 아니라, 속 사람과 겉 사람 안에 각각 배치되어 서로 협력하는 요소들입니다. 앞서 큰 광명들과 별들로 표현되었던 것들이, 이제는 한 사람 안의 영적 구조로 명확히 자리 잡습니다.

 

이어서 스베덴보리는 이 해석이 자의적인 것이 아님을 보여 주기 위해, 이사야를 인용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사야의 이 구절들이 겉으로 보기에는 우주적 격변이나 역사적 심판을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사람 안의 변화로 읽습니다. ‘하늘을 진동시키며 땅을 흔들어’라는 말은, 한 사람 안에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의 질서가 흔들리거나 새롭게 세워지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특히 사51의 말씀에서 ‘하늘을 펴고 땅의 기초를 정하고’라는 표현은 결정적입니다. 이는 창조의 언어이면서 동시에 ‘한 사람 안에서의 재창조’, 곧 거듭남의 언어입니다. 주님께서 ‘내 말을 네 입에 두고 내 손 그늘로 너를 덮었나니’라는 표현은, 외적 보호와 내적 인도를 동시에 뜻합니다. 이 모든 것이 결국 한 사람 안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중요한 신학적 원리를 명확히 합니다. 성경에서 교회에 대해 말한 것은, 동시에 ‘각 사람에 대해 말한 것’이라는 원리입니다. 교회는 집단 이전에 상태이며, 그 상태는 반드시 개인 안에 존재해야 합니다. 사람이 교회가 아니라면, 그는 교회의 일부가 될 수 없다는 말은, 교회를 제도나 조직으로 환원하는 모든 사고를 근본에서부터 차단합니다.

 

이 비유를 설명하기 위해 스베덴보리는 ‘성전(temple)의 예를 듭니다. 사람이 주님의 성전이 아니라면, 그가 어떻게 교회와 하늘, 곧 천국을 의미하는 성전이 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는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내적 실재에 대한 선언’입니다. 천국과 교회는 외부에 있는 어떤 공간이 아니라, 주님이 거하실 수 있는 사람 안의 상태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문장이 나옵니다. 태고교회를 단수로 ‘사람’(아담)이라 한 이유입니다. 이는 특정 인물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완전한 상태로서의 인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태고교회는 여러 개인의 집합이었지만, 그 내적 상태가 하나였기 때문에 단수로 불립니다. 이는 곧, 천국의 본질이 다수가 하나 안에서 일치하는 데 있음을 암시합니다.

 

AC.82는 이렇게 해서 창세기 1, 2장의 대주제를 다시 한번 정리합니다. 창조는 우주의 기원이 아니라, 인간의 형성에 관한 이야기이며, 하늘과 땅은 멀리 있는 차원이 아니라, 한 사람 안에 동시에 존재하는 두 세계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은, 한 사람이 ‘사람’이 되어 가는 이야기입니다.

 

 

 

AC.83, 창2:1, ‘다 이루어지니라’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창2:1) AC.83 ‘천지와 만물’(The heavens and the earth and all the army of them)이 ‘다 이루어지니라’(to be finished)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여섯째 날’(the sixth day)이 되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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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1, 창2:1-17 배경, '한 인간이 거쳐 갈 수 있는 세 가지 상태'

AC.81 이 장은 ‘천적 인간’에 대해 다루고 있으며, 앞의 장은 ‘죽은 상태에 있던 사람으로부터 형성된 영적 인간’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천적 인간, 영적 인간이 무엇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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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1

 

이 장은 ‘천적 인간’에 대해 다루고 있으며, 앞의 장은 ‘죽은 상태에 있던 사람으로부터 형성된 영적 인간’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천적 인간, 영적 인간이 무엇인지, 더 나아가 죽은 상태에 있는 사람이 무엇인지조차 거의 다 모르는 상황이므로, 먼저 그 차이를 알 수 있도록 각각의 어떠함을 간략히 밝히는 것이 저에게 허락되었습니다. 첫째, 죽어 있는 사람, 즉 죽은 상태에 있는 사람, 겉으로는 살아있으나 주님과의 관계에서는 죽은 상태인 사람은 몸과 세상에 속한 것 외에는 참되고 선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으며, 바로 그것을 숭배(adore)합니다. 영적 인간은 영적이고 천적인 참과 선을 인정하지만, 그것을 사랑에서라기보다 신앙의 원리에서 인정하며, 그의 행위 역시 주로 그 신앙에서 나옵니다. 반면 천적 인간은 영적이고 천적인 참과 선을 믿고 또한 퍼셉션으로 알며,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 외에는 다른 신앙을 인정하지 않고, 그의 행위 또한 그 사랑에서 나옵니다. This chapter treats of the celestial man, as the preceding one did of the spiritual, who was formed out of a dead man. But as it is unknown at this day what the celestial man is, and scarcely what the spiritual man is, or a dead man, it is permitted me briefly to state the nature of each, that the difference may be known. First, then, a dead man acknowledges nothing to be true and good but what belongs to the body and the world, and this he adores. A spiritual man acknowledges spiritual and celestial truth and good; but he does so from a principle of faith, which is likewise the ground of his actions, and not so much from love. A celestial man believes and perceives spiritual and celestial truth and good, acknowledging no other faith than that which is from love, from which also he acts.

 

[2] 둘째, 죽어 있는 사람을 움직이는(influence) 목적은 오직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삶만을 향하며(regard), 그러니까 죽은 상태에 있는 사람은 무슨 일을 하든 그 목적이 오직 육체적이고 세상적일 뿐이며, 그는 영원한 생명(, life)이 무엇인지도, 주님이 누구이신지도 알지 못하고, 혹 알더라도 믿지 않습니다. 영적 인간을 움직이는 목적은 영원한 생명을 향하고, 그로 인해 주님을 향합니다. 천적 인간을 움직이는 목적은 주님을 향하며, 그로 인해 주님의 나라와 영원한 생명을 향합니다. Second: The ends which influence a dead man regard only corporeal and worldly life, nor does he know what eternal life is, or what the Lord is; or should he know, he does not believe. The ends which influence a spiritual man regard eternal life, and thereby the Lord. The ends which influence a celestial man regard the Lord, and thereby his kingdom and eternal life.

 

[3] 셋째, 죽어 있는 사람은 싸움, 그러니까 영적 전투 중에 있을 때 거의 항상 패하며, 싸움이 없을 때에도 악과 거짓이 그를 지배하여 그는 종이 됩니다. 그를 묶는 사슬은 외적인 것들로서, 곧 법에 대한 두려움, 생명과 재산, 이익, 그리고 명성을 잃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이런 것들이 아주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영적 인간은 싸움 가운데 있지만 항상 승리하며, 그를 붙드는 사슬은 내적인 것으로서, 양심의 사슬이라 불립니다. 천적 인간은 싸움 가운데 있지 않으며, 악과 거짓의 공격을 받을 때에도 그것들을 멸시하므로 정복자라 불립니다. 그는 겉으로 보기에 아무 사슬에도 묶여 있지 않으며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에게도 사슬이 있는데, 그것들은 드러나지 않는 사슬로서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입니다. Third: A dead man when in combat almost always yields, and when not in combat, evils and falsities have dominion over him, and he is a slave. His bonds are external, such as the fear of the law, of the loss of life, of wealth, of gain, and of the reputation which he values for their sake. The spiritual man is in combat, but is always victorious; the bonds by which he is restrained are internal, and are called the bonds of conscience. The celestial man is not in combat, and when assaulted by evils and falsities, he despises them, and is therefore called a conqueror. He is apparently restrained by no bonds, but is free. His bonds, which are not apparent, are perceptions of good and truth.

 

 

해설

 

이 단락은 창세기 2장의 해설 가운데서도, 가장 교육적이면서 동시에 가장 급진적인 문장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상징을 풀지 않고, 은유를 쓰지 않으며, 곧바로 사람의 상태를 세 가지로 나누어 제시합니다. ‘죽은 상태에 있는 사람(A dead man), ‘영적 인간(The spiritual man), ‘천적 인간(The celestial man)입니다. 이는 인류를 세 부류로 나누기 위한 분류표가 아니라, ‘한 인간이 거쳐 갈 수 있는 세 가지 상태’를 질서 있게 드러내기 위한 설명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설명을 굳이 덧붙이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는 이미 이 시대에는 ‘천적 인간’이 무엇인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으며, ‘영적 인간’조차도 제대로 이해되지 않고 있다고 말합니다. 더 나아가,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사실상 ‘죽은 상태’에 있다는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하고 있음을 전제합니다. 그러므로 이 단락은 설명이 아니라, ‘인식의 눈을 열기 위한 조정’에 가깝습니다.

 

첫 번째 구분은 ‘무엇을 참과 선으로 인정하는가’의 문제입니다. 죽은 상태에 있는 사람은 몸과 세상에 속한 것만을 참과 선으로 인정합니다. 여기에는 악의 의도가 전제되지 않습니다. 그는 단지 감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 세상에서 유용한 것만을 실제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는 그것을 ‘숭배’한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그것이 그의 삶의 중심이 됩니다.

 

영적 인간은 여기서 분명히 달라집니다. 그는 영적이고 천적인 참과 선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 인정의 출발점은 ‘사랑’이 아니라 ‘신앙’입니다. 그는 이것이 옳다고 믿고, 그래서 그것을 따릅니다. 그의 행위는 신앙에 의해 유지됩니다. 이는 매우 귀하고 중요한 단계이지만, 여전히 중간 단계입니다.

 

천적 인간은 이 둘과 질적으로 다릅니다. 그는 영적이고 천적인 참과 선을 믿을 뿐 아니라, 그것을 퍼셉션합니다. 다시 말해, 그는 그것을 보듯이 압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 외에 다른 신앙이 없습니다. 믿음이 사랑을 앞서지 않고, 사랑 안에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행위는 의무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흐름입니다.

 

두 번째 구분은 ‘삶을 움직이는 목적’의 문제입니다. 죽은 상태에 있는 사람의 목적은 오직 현세적 삶에 있습니다. 그는 영원한 생명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거나, 알더라도 그것을 실제로 여기지 않습니다. 주님 역시 개념으로는 알 수 있지만, 삶의 중심은 아닙니다.

 

영적 인간은 목적이 분명히 바뀝니다. 그는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고, 그로 인해 주님을 바라봅니다. 그러나 목적의 최종점이 여전히 ‘영원한 생명’이라는 결과에 머무르는 경향이 있습니다. 반면 천적 인간은 목적 자체가 주님입니다. 그는 결과를 위해 주님을 향하지 않고, 주님을 향하기 때문에 결과가 따라옵니다. 그래서 그의 목적은 곧 주님의 나라이며, 영원한 생명은 그 자연스러운 열매입니다.

 

세 번째 구분은 가장 실제적이고도 날카롭습니다. ‘싸움과 자유’의 문제입니다. 죽은 상태에 있는 사람은 싸움에서 거의 항상 패합니다. 설령 외적으로는 질서를 유지하는 것처럼 보여도, 내적으로는 악과 거짓이 그를 지배합니다. 그를 붙잡는 것은 법, 처벌, 손해, 체면 같은 외적 사슬입니다. 그는 자유로워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은 가장 많은 것에 매여 있습니다.

 

영적 인간은 싸움 가운데 있습니다. 그는 유혹과 갈등을 겪지만, 싸움 끝에 승리합니다. 그를 붙잡는 사슬은 더 이상 외적인 것이 아니라, 양심이라는 내적인 사슬입니다. 그는 자유롭지만, 동시에 책임을 집니다.

 

천적 인간은 여기서 다시 한 단계 올라섭니다. 그는 싸움 가운데 있지 않습니다. 악과 거짓이 다가오지만, 그것을 심각하게 상대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것들을 멸시합니다. 이는 무관심이 아니라, ‘이미 중심이 너무 분명하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그는 ‘정복자’라 불립니다.

 

겉으로 보면, 천적 인간은 아무 사슬에도 묶여 있지 않은 완전한 자유인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마지막에 매우 중요한 말을 덧붙입니다. 그에게도 사슬은 있습니다. 다만 그것은 드러나지 않는 사슬입니다. 그것은 법이나 두려움이 아니라,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입니다. 그는 선을 떠올리기 때문에 악을 의도하지 않고, 진리를 보기 때문에 거짓을 택하지 않습니다. 그의 자유는 방임이 아니라, ‘가장 깊은 질서 안에 있는 자유’입니다.

 

AC.81은 그래서 창세기 2장의 모든 내용을 하나의 인간 이해로 묶어 줍니다. 에덴동산, 생명나무, 네 강, 금지 명령, 안식일은 모두 ‘천적 인간’이라는 한 상태를 설명하기 위한 서로 다른 얼굴들입니다. 그리고 이 상태는 신화 속 인간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이 본래 지향하도록 창조된 상태’입니다.

 

이 글을 읽고 나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묻게 됩니다. 나는 지금 어느 상태에 서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판단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는 단지, 길의 구조를 보여 줍니다.

 

 

 

AC.80, 창2:1-17 개요,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은 오직 퍼셉션으로만' (16-17절)

16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2:16,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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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2:16, 17)

 

AC.80

 

그는 또한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퍼셉션을 통하여 무엇이 선하고 참된지를 아는 지식 얻는 것은 허락됩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얻어서는 안 되며,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the things of sense and memory-knowledge [sensualia et scientifica])을 통하여 신앙의 신비들을 탐구해서도 안 됩니다. 그렇게 할 경우, 그의 천적 본성은 죽게 될 것입니다. (16-17) He is also permitted to acquire a knowledge of what is good and true by means of every perception from the Lord, but he must not do so from himself and the world, nor search into the mysteries of faith by means memory-knowledge [sensualia et scientifica]; which would cause the death of his celestial nature (verses 16–17).

 

 

해설

 

이 글은 에덴동산 이야기에서 가장 섬세하면서도 결정적인 경계선을 그어 줍니다. AC.79에서 천적 인간은 동산을 누리되 소유하지 않는다고 언급되었습니다. AC.80은 그 누림의 방식이 어디까지 허용되고, 어디서부터 무너지는지를 분명히 밝힙니다. 즉, 문제는 ‘아는 것’ 자체가 아니라, ‘어디, 그러니까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퍼셉션을 통하여 아는 건지, 아니면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 아는 건지’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적 인간이 선과 진리를 아는 지식 얻는 것 자체를 금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허락된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러나 그 허락에는 단 하나의 조건이 붙습니다. 그 지식은 반드시 ‘주님으로부터 오는 퍼셉션을 통해서’ 얻어져야 한다는 조건입니다. 다시 말해, 천적 인간의 앎은 추론의 결과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주어지는 인식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선과 진리를 만들어 내지 않고, ‘받아 인식합니다’.

 

여기서 ‘퍼셉션’이라는 말이 다시 핵심으로 떠오릅니다. 퍼셉션은 자기 내부에서 조합해 낸 결론이 아니라, 선과 진리가 이미 살아 있는 상태에서 ‘직접적으로 인식되는 것’입니다. 천적 인간은 ‘이것이 옳은가’를 따져 묻지 않고, ‘이것이 선하다’는 것을 봅니다. 그의 앎은 판단 이전의 앎이며, 논증 이전의 확신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곧바로 경고합니다. 이 지식이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얻어질 때,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고 말입니다. 자기 자신과 세상은 곧 겉 사람의 출발점입니다. 거기에서 시작되는 앎은 필연적으로 ‘자기중심적 기준’을 낳습니다. 이때 선과 진리는 더 이상 주님의 것이 아니라, 판단의 대상이 되고, 평가의 대상이 됩니다.

 

이 경고는 더 구체적으로 이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적 인간이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the things of sense and memory-knowledge [sensualia et scientifica])을 통해 신앙의 신비를 탐구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감각적인 것들은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외적 경험의 세계이고, 기억-지식은 그 경험을 축적한 정보의 창고입니다. 이것들은 본래 삶을 지탱하는 데 필요한 것들이지만, ‘신앙의 신비를 판단하는 도구로 사용될 때는 치명적’이 됩니다.

 

왜냐하면 신앙의 신비는 감각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은 보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살도록 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런데 감각과 기억-지식으로 신비를 재단하려는 순간, 인간은 주님 위에 서서 신앙을 해부하려 들게 됩니다. 이때 순서는 완전히 뒤집힙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빛이 아니라, 인간의 빛으로 주님을 비추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강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렇게 할 경우 ‘그의 천적 본성은 죽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는 도덕적 처벌을 뜻하는 말이 아닙니다. 천적 본성은 ‘관계의 상태’이기 때문에, 그 관계의 질서가 무너지면 자연스럽게 사라집니다. 사랑에서 나오는 앎이 아니라, 앎으로 사랑을 통제하려는 순간, 천적 상태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습니다.

 

이 글은 창2:16-17의 금지 명령을 전혀 다른 차원에서 이해하게 만듭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말은, 지식을 얻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출발점을 바꾸지 말라’는 뜻입니다. 선과 진리를 자기중심의 판단으로 다루기 시작하는 순간, 인간은 천적 상태에서 떨어져 나옵니다. 이는 한 번의 행동이 아니라, 앎의 방식이 바뀌는 사건입니다.

 

여기까지 오면, 에덴동산 이야기는 더 이상 도덕적 시험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 인식의 질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천적 인간은 모든 것을 알 수 있지만, 모든 방식으로 알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자유롭지만, 그 자유는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질서 안에 있을 때만 자유’입니다.

 

AC.80은 그래서 아주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말합니다. 신앙의 신비는 파헤쳐질 대상이 아니라, ‘그렇게 살아야 할 대상’이라고 말입니다. 감각과 기억-지식이 제자리를 지킬 때, 그것들은 삶을 돕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왕좌에 앉는 순간, 천적인 생명은 숨을 쉬지 못하게 됩니다.

 

 

 

AC.81, 창2:1-17 배경, '한 인간이 거쳐 갈 수 있는 세 가지 상태'

AC.81 이 장은 ‘천적 인간’에 대해 다루고 있으며, 앞의 장은 ‘죽은 상태에 있던 사람으로부터 형성된 영적 인간’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천적 인간, 영적 인간이 무엇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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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9, 창2:1-17 개요, '동산은 주님의 것' (15절)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창2:15) AC.79 천적 인간은 이러한 동산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 동산은 주님의 것이므로, 이 사람은 이 모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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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2:15)

 

AC.79

 

천적 인간은 이러한 동산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 동산은 주님의 것이므로, 이 사람은 이 모든 것을 누리는 것은 허락되지만, 그것들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습니다. (15) The celestial man is such a garden. But as the garden is the Lord’s, it is permitted this man to enjoy all these things, and yet not to possess them as his own (verse 15).

 

 

해설

 

이 글은 지금까지 전개된 에덴동산의 모든 이미지와 구조를 하나의 핵심 원리로 수렴시키는 매우 중요한 문장입니다. AC.77AC.78에서 천적 인간의 지성과 지혜가 얼마나 풍성하고 질서 있게 묘사되었는지를 생각해 보면, AC.79는 그 풍성함이 어디까지 허용되는지를 정확히 짚어 줍니다. 천적 인간은 동산과 같지만, 그는 그 동산의 주인이 아닙니다. 바로 이 지점이 천적 상태의 본질을 결정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적 인간을 ‘동산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고, ‘동산과 같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그 사람의 내적 상태 자체가 에덴의 질서와 일치해 있음을 뜻합니다. 그의 지성은 동산처럼 살아 있고, 그의 지혜는 강처럼 흐르며, 그의 지식과 이성은 질서 있게 자라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그의 공로나 성취의 결과가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마련하신 동산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의 결과입니다.

 

여기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말은 ‘그러나 그 동산은 주님의 것이다’라는 선언입니다. 이 문장은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을 가르는 가장 미세하면서도 본질적인 경계선에 해당합니다. 영적 인간은 진리를 알고, 선을 행하면서도 여전히 그것들을 ‘내가 선택했고, 내가 지켰고, 내가 이루었다’고 느끼기 쉽습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은 그렇게 느끼지 않습니다. 그는 모든 것이 주님께로부터 왔으며, 지금도 주님께 속해 있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인식하는 상태’에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정교한 표현을 씁니다. ‘누리는 것은 허락되지만, 소유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천적 인간은 지혜를 누립니다. 그는 선과 진리 안에서 살며, 그 안에서 깊은 기쁨과 자유를 경험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이 차이는 겉으로 보면 미묘해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하늘과 땅만큼 큽니다.

 

이 ‘소유하지 않음’은 결핍이나 박탈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천적 인간은 소유하지 않기 때문에 자유롭습니다. 만약 그것을 자기 것이라고 붙잡는 순간, 그는 그 동산을 지키기 위해 애써야 하고, 잃을까 두려워해야 하며, 스스로를 중심에 두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주님의 것임을 아는 순간, 그는 돌보는 자로서 살게 되고, 주님께서 돌보신다는 평안 안에 머무르게 됩니다. 이것이 곧 ‘일곱째 날의 안식’입니다.

 

이 글은 인간의 자아 개념을 근본에서부터 재정의합니다. 우리는 흔히 ‘내 믿음’, ‘내 신앙’, ‘내 이해’, ‘내 깨달음’이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사용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그 말들은 아직 영적 단계의 언어입니다. 천적 단계에서는 그런 언어 자체가 점점 사라집니다. 왜냐하면 모든 선과 진리, 지혜와 생명이 ‘주님께 속해 있음이 너무나 자명해지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글은 창2:15의 ‘동산을 경작하며 지킨다’는 말씀을 이해하는 열쇠를 제공합니다. 경작하고 지킨다는 것은 소유권을 행사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맡겨진 것을 사랑으로 돌본다는 뜻입니다. 천적 인간은 동산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 애쓰지 않습니다. 그는 주님께서 주신 질서 안에 머무르기 때문에, 그 질서 자체가 동산을 지켜 줍니다. 그의 역할은 지배가 아니라 ‘동참’입니다.

 

이 지점에서 AC.79는 우리에게 매우 실제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주신 것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그것이 지식이든, 이해이든, 신앙이든, 혹은 어떤 영적 통찰이든, 우리는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질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적 상태란,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아무것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는 상태’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 글은 에덴의 평화로운 풍경 속에, 아주 조용하지만 결정적인 원리를 심어 둡니다. 주님의 것을 주님의 것으로 둘 때, 인간은 비로소 가장 풍성하게 누릴 수 있다는 원리입니다. 소유하려는 순간 줄어들고, 맡길 때 충만해지는 이 역설이 바로 천적인 삶의 비밀입니다.

 

 

 

AC.80, 창2:1-17 개요,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은 오직 퍼셉션으로만' (16-17절)

16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2:16,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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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8, 창2:1-17 개요, '네 강' (10-14절)

10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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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13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을 둘렀고 14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2:10-14)

 

AC.78

 

지혜(Wisdom)는 동산 가운데 있는 강으로 의미됩니다. 그로부터 네 강이 나뉘어 나오는데, 첫째는 선과 진리(good and truth)입니다. 둘째는 모든 선과 진리, 곧 사랑과 신앙에 관한 지식(knowledge [cognitio])입니다. 이것들은 속 사람에 속합니다. 셋째는 이성(reason)이며, 넷째는 기억-지식(memory-knowledge [scientia])으로서, 이것들은 겉 사람에 속합니다. 이 모든 것은 지혜로부터 나오며, 이 지혜는 주님에 대한 사랑과 신앙으로부터 옵니다. (10-14) Wisdom is meant by the river in the garden. From thence were four rivers, the first of which is good and truth; the second is the knowledge [cognitio] of all things of good and truth, or of love and faith. These are of the internal man. The third is reason, and the fourth is memory-knowledge [scientia], which are of the external man. All are from wisdom, and this is from love and faith in the Lord (verses 10–14).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에덴동산의 중심에서 흘러나오는 ‘’을 통해, 천적 인간의 지성이 ‘어떻게 삶 전체로 확장되는가’를 보여 줍니다. AC.77이 동산 자체를 지성의 형상으로 제시했다면, AC.78은 그 지성이 정체된 공간이 아니라, ‘흘러나가고 분화되는 생명’임을 밝힙니다. 지혜는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흐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는 강으로 표현됩니다.

 

지혜가 동산 가운데에 있다는 말은, 지혜가 지성의 중심이자 출발점임을 뜻합니다. 그러나 이 지혜는 추상적 사유의 산물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분명히 말합니다. 이 지혜는 ‘주님에 대한 사랑과 신앙으로부터’ 옵니다. 다시 말해, 지혜의 근원은 사고가 아니라 ‘관계’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신앙 안에 머무를 때, 지혜는 자연스럽게 솟아납니다. 이 점에서 지혜는 획득물이 아니라 ‘유출물’입니다.

 

이 강은 하나로 시작하지만, 곧 네 갈래로 나뉩니다. 이는 지혜가 하나의 단일한 형태로만 작동하지 않고, 인간의 내적, 외적 삶 전반으로 ‘질서 있게 분화’된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네 강을 임의로 나열하지 않습니다. 그는 분명한 위계와 방향을 가지고 설명합니다. 먼저 속 사람에 속한 두 강이 나오고, 그다음에 겉 사람에 속한 두 강이 나옵니다. 이는 지혜의 흐름이 항상 안에서 밖으로 나아간다는 원리를 보여 줍니다.

 

첫째 강이 ‘선과 진리’라는 설명은 매우 압축적이면서도 깊습니다. 이는 선과 진리가 분리되지 않은 상태, 곧 천적 상태의 핵심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선은 의지의 선이며, 진리는 이해의 진리입니다. 이 둘이 하나로 흐를 때, 지혜는 가장 순수한 형태로 작동합니다. 이것이 첫째 강이라는 사실은, ‘모든 지혜의 기초가 선과 진리의 결합’임을 뜻합니다.

 

둘째 강은 ‘모든 선과 진리, 곧 사랑과 신앙에 관한 지식’입니다. 여기서 지식(knowledge [cognitio])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살아 있는 이해입니다. 첫째 강이 결합 자체라면, 둘째 강은 그 결합에 대한 ‘자각과 인식’입니다. 이 두 강은 모두 속 사람에 속합니다. 즉, 천적 인간의 지혜는 먼저 그의 내적 삶에서 형성되고, 그곳에서 충분히 질서 잡힙니다.

 

이제 셋째와 넷째 강에서 흐름은 겉 사람으로 나아갑니다. 셋째 강은 이성입니다. 이성은 지혜를 외적 삶 속에서 분별하고 적용하는 능력입니다. 천적 인간에게 이성은 주인을 자처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속 사람에서 흘러온 지혜를 ‘해석하고 전달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이성은 셋째 자리에 놓입니다.

 

넷째 강은 기억-지식(memory-knowledge [scientia])입니다. 이는 경험, 학습, 언어, 문화 속에 축적된 모든 외적 지식입니다. 이것 역시 지혜의 흐름 안에 포함되지만, 가장 바깥 자리에 놓입니다. 천적 인간에게 기억-지식은 중심이 아니라, ‘마지막에 도달하는 도구’입니다. 그러나 이 도구 역시 지혜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그 자체로는 혼란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오히려 삶을 실제로 지탱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 네 강의 구조는 인간 전체를 하나의 유기체로 보여 줍니다. 속 사람의 선과 진리, 그리고 그에 대한 인식이 먼저 있고, 그다음에 이성과 기억-지식이 따라옵니다. 이 순서가 유지될 때, 인간의 삶은 통합됩니다. 그러나 이 순서가 뒤집히면, 곧바로 혼란이 시작됩니다. 기억-지식이나 이성이 중심이 되면, 지혜는 더 이상 위에서 흘러오지 않고, 아래에서 만들어지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단락의 끝에서 다시 한번 근원을 분명히 합니다. ‘이 모든 것은 지혜로부터 나오며, 이 지혜는 주님에 대한 사랑과 신앙으로부터 온다’고 말입니다. 이는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구조 전체를 묶는 결론입니다. 네 강이 아무리 다양해 보여도, 그 근원은 하나이며, 그 하나의 근원은 ‘주님과의 관계’입니다.

 

AC.78은 결국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 것처럼 들립니다. 우리의 삶에는 어떤 강들이 흐르고 있는가, 그리고 그 강들의 근원은 어디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선과 진리에서 시작하여 이성과 기억-지식으로 흘러가고 있는가, 아니면 기억-지식과 이성에서 시작하여 거꾸로 의미를 만들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에덴의 강들을 통해, 인간 지성의 가장 건강한 질서를 조용히 제시합니다.

 

 

 

AC.77, 창2:1-17 개요, '에덴동산과 네 종류 나무의 속뜻' (8-9절)

8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9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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