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540

 

사후 세계로 오는 거의 모든 이들은 천국의 행복과 복이 어떤 것인지를 모르고 옵니다. 이는 내적 기쁨의 본질과 성질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천국의 기쁨을 오직 육체적 즐거움과 세상적 기쁨을 통해서만 상상합니다.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지만, 실제로는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기쁨이야말로 비교해 보면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더럽기까지 하다는 사실을 그들은 모릅니다. 그러므로 선한 성향을 지닌 이들이 천국의 기쁨이 무엇인지를 배우고 알 수 있도록, 그들은 먼저 상상으로는 도저히 이를 수 없는 낙원들로 인도됩니다. 그들은 자신이 이미 천국의 낙원에 도달했다고 생각하지만, 이것이 참된 천국의 행복은 아니라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 자신의 더 깊은 내적 존재(inmost being)에까지 느껴지는 기쁨의 상태(interior states of joy)를 체험하도록 허락받습니다. 그다음에는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까지 이르는 평화의 상태(a state of peace)로 인도되며, 그들은 그것이 전혀 말로 표현할 수도, 생각으로 그릴 수도 없다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역시 내적 감각의 가장 깊은 곳(inmost feeling)까지 이르는 순수함의 상태(a state of innocence)로 인도됩니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그들은 참된 영적 선과 천적 선이 무엇인지를 배우도록 허락받습니다. Almost all who come into the other life are ignorant of the nature of heavenly happiness and bliss, because they know not the nature and quality of inward joy. They form a conception of it merely from the delights and joys of the body and the world. What they are ignorant of they suppose to be nothing, the truth being that bodily and worldly joys are relatively non-existent and foul. In order therefore that those who are well disposed may learn and may know what heavenly joy is, they are taken in the first place to paradises that surpass every conception of the imagination (concerning which, of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 and they suppose that they have arrived in the paradise of heaven; but they are taught that this is not true heavenly happiness, and are therefore permitted to experience interior states of joy which are perceptible to their inmost being. They are then transported into a state of peace, even to their inmost being, and they confess that nothing of it is at all expressible or conceivable. And finally they are introduced into a state of innocence, also to their inmost feeling. In this way are they permitted to learn the nature of true spiritual and celestial good.

 

 

해설

 

이 글은 천국의 기쁨이 어떤 것인지 설명하려는 글이 아니라, ‘인간이 천국의 기쁨을 왜 오해할 수밖에 없는지를 보여 주는 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단호하게 말합니다. 사후 세계로 오는 거의 모든 이들은 천국의 행복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말합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그들은 내적 기쁨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아는 것으로만 상상합니다. 그래서 천국의 기쁨도 세상에서 경험한 즐거움, 곧 쾌락, 만족, 편안함, 성취감 같은 것의 연장선에서 그려 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근본적인 착각이라고 말합니다.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기쁨은 진짜 기쁨과 비교하면 거의 없는 것과 같고, 더 나아가 오염된 것이라고까지 말합니다. 이는 도덕적 비난이 아니라, ‘차원의 차이’를 말하는 표현입니다.

 

이제 스베덴보리는 주님께서 사람들을 어떻게 가르치시는지를 단계적으로 보여 줍니다. 주님은 설명으로 가르치시지 않습니다. 체험을 통해 가르치십니다. 먼저 사람들은 상상으로는 도저히 이를 수 없는 아름다운 낙원으로 인도됩니다. 이 단계에서 사람들은 거의 예외 없이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제 천국에 도착했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 단계는 아직 참된 천국의 행복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낙원은 여전히 외적 감각과 상상에 가까운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아름답고 평화롭지만, 아직 존재의 가장 깊은 곳을 채우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다음 단계로 이들을 인도하십니다. 이번에는 내적 존재 깊숙이까지 느껴지는 기쁨의 상태입니다. 이 기쁨은 감각적 즐거움이 아니라, 존재 전체가 ‘옳다’고 느끼는 기쁨입니다.

 

그다음 단계는 더욱 인상적입니다. 존재의 가장 깊은 곳까지 이르는 평화의 상태입니다. 여기서 사람들은 공통된 고백을 합니다. 이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고, 생각으로도 그릴 수 없다고 말합니다. 즉, 언어와 개념이 도달하지 못하는 차원의 상태입니다. 이 평화는 긴장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완전히 질서 안에 놓인 상태’에서 오는 안정입니다.

 

마지막 단계는 순수함의 상태입니다. 이는 도덕적 무죄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주장하지 않는 상태, 곧 주님의 생명이 아무 저항 없이 흐를 수 있는 상태를 뜻합니다. 이 단계에서야 비로소 사람은 참된 영적 선과 천적 선이 무엇인지를 압니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이해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 상태 안에 있음으로 안다’는 뜻입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글은 천국을 가르치는 방식 자체에 대한 깊은 통찰을 줍니다. 천국은 설명으로 전달되지 않습니다. 설교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깊은 신앙의 실재는 개념으로 주입될 수 없고, 삶의 상태 속에서만 조금씩 열립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항상 외적 단계에서 내적 단계로, 기쁨에서 평화로, 평화에서 순수함으로 사람을 이끄십니다.

 

AC.540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해 줍니다. 천국의 기쁨을 상상할 수 없다고 해서, 그것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이유는, 아직 그 차원에 맞는 상태로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준비는, 주님께서 질서 있게 인도하시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이 글은 천국에 대한 환상을 무너뜨리는 동시에, 천국에 대한 가장 깊은 소망을 조용히 키워 줍니다. 설명할 수 없고, 그릴 수 없지만, ‘실재하며 점점 더 깊어지는 선과 기쁨의 길’이 있음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AC.539, 창5 뒤, ‘육신에 있을 때 간음의 죄를 가볍게 여겼던 자’

AC.539 어떤 영이 있었는데, 그는 육신에 있을 때 간음의 죄를 가볍게 여겼던 자였습니다. 그가 원해서 그는 천국의 첫 문턱(threshold)에 들어가도록 허락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곳에 이르자마

bygracetistory.tistory.com

 

Posted by bygracetistory
,

AC.539

 

어떤 영이 있었는데, 그는 육신에 있을 때 간음의 죄를 가볍게 여겼던 자였습니다. 그가 원해서 그는 천국의 첫 문턱(threshold)에 들어가도록 허락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곳에 이르자마자 고통을 느끼기 시작했고, 자기 자신에게서 나는 시체 같은 악취(cadaverous stench)를 자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정도가 되었고, 만일 조금이라도 더 나아간다면 자신이 사라질 것처럼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래 땅으로 내던져졌는데, 단지 천국의 첫 문턱에서 간음과 반대되는 영역에 들어왔다는 이유만으로 이런 고통을 느꼈다는 사실에 분노하였습니다. 그는 불행한 자들 가운데 있습니다. A certain spirit who during his life in the body had made light of adulteries, was in accordance with his desire admitted to the first threshold of heaven. As soon as he came there he began to suffer and to be sensible of his own cadaverous stench, until he could endure it no longer. It seemed to him that if he went any farther he should perish, and he was therefore cast down to the lower earth, enraged that he should feel such torment at the first threshold of heaven, merely because he had arrived in a sphere that was contrary to adulteries. He is among the unhappy.

 

 

해설

 

이 글은 앞선 두 단락보다 훨씬 더 직접적이고 생생한 방식으로, ‘상태의 불일치가 낳는 고통’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는 ‘천국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삶의 태도 자체가 천국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 충돌은 설명이나 판단 이전에, 즉각적인 감각과 고통으로 드러납니다.

 

이 영은 생전에 간음을 가볍게 여겼습니다. 이는 단순히 특정 행위를 했다는 의미를 넘어서, 사랑과 결합의 질서를 내적으로 무너뜨린 상태를 말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간음은 도덕적 규범 위반을 넘어, 사랑의 질서, 곧 하늘의 질서를 왜곡하는 상태를 뜻합니다. 그러한 상태는 천국의 영역과 본질적으로 상극입니다.

 

그럼에도 이 영은 자신의 바람, 곧 자기가 원해서 천국의 첫 문턱에 들어갑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강조되는 것은, 주님께서 사람의 바람을 무시하지 않으신다는 점입니다. 원하면 가까이 가게 하시되, 그 결과를 스스로 체험하게 하십니다. 강제로 막지 않으시고, 설명으로 대신하지도 않으십니다.

 

그러나 그가 느낀 것은 환희가 아니라 극심한 고통이었습니다. 특히 주목할 표현은 ‘자기 자신의 시체 같은 악취를 느꼈다’는 대목입니다. 이는 외부에서 부여된 형벌이 아니라, ‘자기 상태가 그대로 드러난 결과’입니다. 천국의 영역에서는 거짓과 왜곡이 가려지지 않습니다. 그 안에 들어가는 순간, 자기 내면의 실상이 감각으로 체험됩니다.

 

이 악취는 실제 냄새라기보다, 사랑의 질서에 반하는 상태가 천국의 감각 안에서 어떻게 인식되는지를 보여 주는 상응 표현입니다. 천국의 순수한 사랑의 영역에 비추어질 때, 왜곡된 사랑은 생명 없는 것, 곧 ‘죽음의 냄새’로 체험됩니다. 그래서 그는 더 이상 견딜 수 없다고 느낍니다. 조금이라도 더 나아가면 ‘사라질 것 같다’는 감각은, 그 상태가 천국 안에서는 존속할 수 없음을 뜻합니다.

 

결국 그는 아래 땅으로 떨어집니다. 이 역시 처벌이라기보다, ‘존재가 견딜 수 있는 자리로 돌아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느낀 감정입니다. 그는 자신의 상태를 돌아보거나 깨닫기보다, 분노합니다. 천국의 문턱에서 이런 고통을 느꼈다는 사실 자체를 부당하다고 여깁니다. 이는 그의 내적 태도가 여전히 변화되지 않았음을 보여 줍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마지막에 짧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그는 불행한 자들 가운데 있다고 말합니다. 이 불행은 외부적 형벌의 결과가 아니라, ‘자기 상태와 질서의 불일치가 지속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천국을 향한 욕망은 있었지만, 천국의 삶을 원하지는 않았던 결과입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장면은 매우 무겁고도 정직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천국을 원하는가, 아니면 천국의 삶을 원하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어떤 죄를 가볍게 여기는 태도는, 단지 윤리적 문제를 넘어서, 우리 존재의 감각과 방향을 결정합니다. 천국은 그 방향이 맞을 때에만 안식이 됩니다.

 

AC.539는 천국을 도덕적 판결의 법정으로 그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천국은 ‘자기 자신을 피할 수 없는 거울’로 나타납니다. 그 거울 앞에서 고통을 느끼는 것은, 거울이 잔인해서가 아니라, 비추어진 것이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이 본문은, 회개와 변화가 왜 지금 여기에서 필요한지를 가장 실감 나게 보여 줍니다.

 

 

 

AC.540, 창5 뒤, ‘외적 기쁨에서 내적 기쁨으로, 기쁨에서 평화로, 평화에서 순수함으로’

AC.540 사후 세계로 오는 거의 모든 이들은 천국의 행복과 복이 어떤 것인지를 모르고 옵니다. 이는 내적 기쁨의 본질과 성질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천국의 기쁨을 오직 육체적 즐거

bygrace.kr

 

AC.538, 창5 뒤, ‘천국은 같은 상태여야만 들어갈 수 있는 곳’

AC.538 천국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천국에 들어가려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랑의 신앙 안에 있지 않다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불 속으로 들어가는 것만큼이나 위험하다고 경고를 받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