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25.02.12 4. 눅1:46-56, '마리아의 찬송'
  2. 2025.02.10 3. 눅1:39-45,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 2

 

마리아의 찬송

 

 

46마리아가 이르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47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48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49능하신 이가 큰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50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51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52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53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손으로 보내셨도다 54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55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 56마리아가 석 달쯤 함께 있다가 집으로 돌아가니라 (눅1:46-56)

 

 

마태복음 10장 28절에서는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라고 말한다. 여기서 두려워하는 것은 영적으로 죽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고, 그러므로 걱정과 공포 같은 자연적인 두려움이다. 그러나 영적인 두려움은 모든 영적 사랑 안에 내재되어 있고, 또한 사랑의 질과 양에 따라 달라지는 거룩한 두려움이다. 영적인 사람은 이러한 두려움 가운데 있다. 그리고 그는 주님은 어떤 사람에게도 악을 행하시지 않으며, 그의 육신과 영혼을 파괴하여 지옥에 던지시지도 않으며,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하시고, 그들의 육신과 영혼을 천국에 있는 당신께로 들어 올리시길 원하신다는 것을 안다. 그렇기 때문에 영적인 사람의 두려움은 그가 삶의 악과 교리의 거짓으로 인해 자기 안의 신적 사랑으로부터 멀어지거나 그것에 해를 끼치지 않도록 하는 거룩한 두려움이다. (계시록 해설 696.23, 이순철 역) Jesus said, Fear not them who are able to kill the body but are not able to kill the soul; rather fear Him who is able to destroy both body and soul in Gehenna (Matt. 10:28). Here, however, “to fear” signifies to have a fear of dying spiritually, thence a natural fear, which is fearfulness and dread; but spiritual fear is a holy fear that abides within every spiritual love variously according to the quality and quantity of the love. In such a fear is the spiritual man, and he knows that the Lord does not do evil to anyone, much less does He destroy anyone as to body and soul in Gehenna, but that He does good to all and desires to raise up everyone as to body and soul into heaven to Himself. This is why the fear of the spiritual man is a holy fear lest by the evil of life and the falsity of doctrine man should turn away, and thus do harm to that Divine love in himself. (AE.696.23)

 

 

오늘은 계속해서 누가복음 1장 말씀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만나면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성경에 기록하기는,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처음 만났을 때, 엘리사벳의 복중에서 아이가 뛰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엘리사벳은 성령이 충만한 가운데 마리아에게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라고 말했습니다.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은 단순히 천사가 예언한 일들을 마리아가 확인하는 그 정도 차원의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주님의 새 교회에 새로운 말씀이 전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마리아는 주님이 이방인들을 통해 세우시는 새 교회를 표상하구요, 엘리사벳이 잉태한 아이는 새 교회에 필요한 말씀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마리아가 부르는 찬송은 주님의 새 교회에 속한 사람들이 주님께 드리는 찬송입니다.

 

주님의 은혜로 새로운 말씀을 알게 되고, 말씀을 통해 교리에 대한 이해가 점점 깊어졌을 때, 우리 성도님들은 어떤 마음이었습니까? 아마 대부분은 구원에 대한 확신이 생겼을 것이며, 또 살아계신 주님의 섭리를 느끼셨을 것입니다. 저 또한 처음 새 교회 말씀을 대했을 때, 이것이야말로 주님의 말씀이다, 이런 교회야말로 진짜 교회다라고 생각했습니다. 마리아도 아마 그런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46, 47절에서 마리아는 이렇게 주님을 찬양합니다.

 

46마리아가 이르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47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마리아는 그냥 주님을 찬양한다고 하지 않고, 영혼과 마음으로 찬양한다고 합니다. 한글 성경에는 ‘영혼’, ‘마음’으로 번역되어 있지만, 본래 표현은 ‘’, ‘’입니다. 마리아는 왜 혼과 영으로 찬송한다고 했을까요? 새 교회 가르침에서는 혼과 영에 대해 명확하게 구별해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그냥 ‘혼과 영은 사람의 영적 생명이다’라고만 말합니다. 사람 안에는 하나님의 생명을 받는 두 개의 그릇이 있습니다. 하나는 ‘의지’(will, 마음먹는 능력)라는 그릇이구요, 하나는 ‘이성’(understanding, 이해하는 능력)이라는 그릇입니다. 새 교회 교인들은 다 아시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성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진리를 담는 그릇이고, 의지는 선을 담는 그릇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의 생명은 자존심이나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혼과 영입니다. 그런데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창세기, 출애굽기 속뜻 주석) 6054번 글에는 또 이런 말도 있습니다.

 

혼에 대해 깊이 생각하다 보면 혼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하게 된다. 그러니 혼을 사람의 영이라고 부르는 것이 좋다. (이순철 역) But lest in consequence of the conjectures and hypotheses about it, the word “soul” should give rise to the idea of the unknown, it is better to say man’s “spirit,” or if you prefer it, the “interior man,” (AC.6054.2)

 

이 말은 사람의 혼과 영을 인간의 머리로 이해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니, 혼과 영을 구별하지 않아도 무방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오늘 마리아는 혼과 영으로 주님을 찬송한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이때 혼은 믿음 또는 진리의 생명을 의미하구요, 영은 사랑 또는 선의 생명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혼으로는 주님을 찬송한다고 했고, 영으로는 주님을 기뻐한다고 말했습니다. 말씀에서 찬송하는 것과 기뻐하는 것은 다 주님을 예배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찬송한다고 할 때는 믿음으로 주님을 예배하는 것이구요, 기뻐한다는 것은 선한 삶으로 주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으로는 주님을 기뻐한다고 하고, 혼으로는 주님을 찬송한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리아가 한 말은 ‘내가 믿음과 선한 삶으로 주님을 예배합니다!’ 이런 말입니다.

 

이와 비슷한 말씀이 요한복음 4장 23절에도 있습니다. 그 말씀은 이렇습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요4:23)

 

여기서 영과 진리로 예배한다는 것은, 다르게 표현하면 혼과 영으로 예배하는 것이구요, 더 쉽게 표현하면, 진리와 선한 삶으로 예배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바로 마리아와 같은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마리아가 새 교회를 표상하는 것은 이런 까닭입니다. 사실 마리아와 같이 주님을 예배할 수 있는 사람은 비록 새 교회라 하더라도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주님을 찬양하는 것은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자기 좋을 때만 주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앞이 안 보이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기뻐하는 것은 자기 뜻대로 살지 않고, 주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자아의 애정으로가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애정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볼 때, 주님을 찬양하는 사람은 더러 있어도 주님을 기뻐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이 현실입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가 주님을 기뻐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아직 겸손하지 못해서입니다. 조금 전 본문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주님은 비천한 자를 도우시는 분이지, 결코 교만한 자를 돕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겸손하지 못하면, 주님의 도우심을 받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주님이 도와주시지 않아서가 아니라 우리가 주님의 손을 뿌리치기 때문인데, 그러므로 그런 상태, 그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해도 주님을 기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48절에서 마리아는 그가 주님을 찬양하고 기뻐할 수 있는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48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마리아는 스스로 자기는 비천한 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그가 여자로서 가장 큰 축복을 받은 이유입니다. 누구나 겉으로는 겸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면이 겸손한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 사람의 행동을 보면 압니다. 만약 우리가 습관적으로 다른 사람을 험담하는 사람들이라면, 또 일상생활에서 나만 생각하고, 다른 사람의 입장을 존중하지는 않는 사람들이라면, 그리고 또 어떤 사람이 조금만 서운하게 해도 발끈, 반드시 보복하려는 사람들이라면, 계속해서 주님의 도를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면,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빛으로 말씀을 이해하지 않고, 자기의 지성으로 이해하려는 사람들이라면, 우리는 겸손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칭 겸손하다 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으며, 주님이 보시기에 겸손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진리의 지식 속으로 주님의 능력이 흘러 들어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진심으로 주님을 찬송할 뿐만 아니라,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전에는 아무리 주님을 기뻐하려고 해도, 아무리 주야로 말씀을 기억하고, 삶에 적용하려고 해도 잘 안 됩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49절에

 

49능하신 이가 큰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한 것입니다. 겸손한 자에게 주님의 능력이 함께 하심을 위와 같이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능력이 함께하셔서 큰일을 행하시는데요, 다만 우리가 겸손할 때만 그렇습니다.

 

마리아의 찬송은 계속됩니다.

 

50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마리아는 이번에는 주님을 두려워하는 자에게 긍휼하심이 이른다고 말합니다. 주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여호와께서 시내산에 강림하실 때, 이스라엘 백성이 죽을 것 같이 두려워했던 것처럼 그렇게 두려워하는 것입니까? 그게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느끼는 두려움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으면, 재앙이나 화를 당할까 봐 주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연적인 두려움입니다. 말씀에서 말하는 두려움은 내 삶의 행위가 주님의 사랑을 배반하지는 않을까, 주님의 사랑을 욕되게 하지는 않을까 항상 스스로를 근신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을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런 두려움은 영적 두려움이며, 거룩한 두려움입니다. 그러므로 겸손한 자에게 주님의 능하심이 큰일을 행하시는 것처럼, 주님을 두려워하는 자에게 그분의 긍휼과 능력이 미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51절에서 마리아가

 

51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라고 한 것이 그 말입니다. 그것은 앞에서 주님의 능하심이 큰일을 내게 이루셨다는 고백과 같은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팔’은 곧 주님의 능력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지옥에서 오는 악과 거짓을 이길 수 없습니다. 자신의 힘을 의지하는 사람은 백번이면 백번 다 집니다. 그런데 주님의 능력이 우리와 함께 할 때는 항상 이깁니다. 그래서 사람은 겸손해야 하고, 주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때 주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흘러 들어와서 우리 앞에 있는 영적 장애물들을 하나씩 걷어냅니다.

 

※ 그러니까 우리 속 사람의 상태가 주님의 능력이 흘러들어올 수 있는 상태, 들어와 머무를 수 있는 상태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하고도 연결되는데요, ‘주님, 제게도 복을 주세요’라며, 안수를 통해 복 받기를 구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주님은 복을 주시는 분이시며, 주님께 복을 구하는 것이 나쁘거나 부끄러운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안전하며, 확실하고 영원하지요. 문제는, 주님의 복은 위 주님의 능력처럼 우리 속 사람의 상태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즉 주님이 복을 허락하셔도 정작 우리 속 사람의 상태가 그 복을 받을 수 없는 상태라면, 그러니까 그 복이 우리 안에 머무를 수 없는 그런 상태라면, 그 복은 우리를 떠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 삶이 주님의 복하고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이 들면, 그 원인을 밖이 아닌, 내 안에서 찾으시기를 바랍니다. 정작 내 방 커텐을 꼭꼭 쳐서 빛이 조금도 못 들어오게 해놓고는 계속해서 ‘내 방이 어두워, 내 방이 어두워’ 하고 있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51절로 53절입니다.

 

51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52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53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손으로 보내셨도다

 

위 본문에서는 구원을 가로막는 영적 장애물들을 ‘교만한 자’, ‘권세 있는 자’, ‘부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교만한 자, 권세 있는 자, 부자는 우리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내면에도 그런 것들이 다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만한 자’, ‘권세 있는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모든 선하고 진실한 것을 오직 주님께만 돌리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 돌리는 사람입니다. 말하자면, 아주 작은 선한 일을 하면서도 내 힘으로 했다고 생각하는, 즉 나는 선하다고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 속에는 선하고 진실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주님께서 선을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아주 작은 선도 행할 수 없습니다.

 

※ 아래는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 2장, ‘주의 신성이 천국을 이룬다’, 10번 글입니다. 참고하세요.

 

세상에 살 때 자기가 행한 선과 믿어온 진리가 모두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또는 자기 것이 되었다고 확신한 영들이 있다. 선행을 자기 공로로 여기고,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모두 그런 신념이 있다. 그런 영들은 천국에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천사들은 그들을 어리석은 도둑이라 여겨 피한다. 어리석다는 이유는, 그 영들의 관심사가 신성이 아니라 자기 자신뿐이기 때문이다. 도둑이라는 이유는, 그들이 주님의 것을 가로채려 하기 때문이다. 이런 태도는 천사들 안에 있는 주의 신성이 천국을 이룬다는 천국의 신념에 반대되는 것이다. (HH.10, 김은경 역) Such spirits as have confirmed themselves during their life in the world in the belief that the good they do and the truth they believe is from themselves, or is appropriated to them as their own (which is the belief of all who place merit in good actions and claim righteousness to themselves) are not received into heaven. Angels avoid them. They look upon them as stupid and as thieves; as stupid because they continually have themselves in view and not the Divine; and as thieves because they steal from the Lord what is his. These are averse to the belief of heaven, that it is the Divine of the Lord in the angels that makes heaven. (HH.10)

 

그러면 ‘부자’는 또 누굽니까? 부자는 진리에 대해 많이 알고는 있는데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우리 안에 있는 부자입니다. 마치 주님 당시에 바리새인들과 같은 그런 사람이 우리 안에도 있는 것이죠. 그러므로 주님께서 오셔서 그런 것들을 다 몰아내셔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모두 없어진 다음, 그 빈자리를 구원에 필요한 덕목들로 채워 주셔야 합니다. 위 본문에서는 구원에 필요한 덕목들을 ‘비천한 자’, ‘주리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비천한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비천한 자는 내 안에는 악하고 거짓된 것밖에 없고, 오직 주님만이 선하시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에 의해 우리 안에 이 ‘비천한 자’가 높아져야 합니다. 그래야 진심으로 주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생기지요. 그러지 않고서는 항상 내가 잘난 줄 알고, 그래서 자신의 지혜에만 의지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짐작하시는 대로, 이런 상태로는, 즉 우리 속 사람의 상태가 이래서는 시험이 끝나지 않습니다. 이런 상태는 지옥을 닮아서 지옥의 기운들을 끌어당기기 때문이지요.

 

또 ‘주리는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말씀 배우기를 항상 갈망하고, 말씀을 통해 주님과 교통하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그런 사람을 배불리 먹이십니다. 우리가 말씀을 통해 주님과 교통하려고 할 때, 주님으로부터 온갖 선하고 진실한 것들이 우리 안으로 흘러 들어옵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이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의 주린 자가 말씀을 소유할 때, 우리 안의 주린 자가 주님으로부터 지식을 배울 때, 그 지식은 살아있는 지식이 되며, 삶을 바꾸는 지식이 됩니다. 반면에 부자의 지식은 살아있는 지식이 아니라 죽은 지식입니다. 그것은 쓰지 않는 잡다한 물건들을 창고에 쌓아놓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린 자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그런 방법으로 당신의 자녀들을 구원으로 이끄십니다.

 

그래서 54, 55절에서 마리아는

 

54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55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

 

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이스라엘과 아브라함의 자손은 주님의 교회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오늘 그들을 기억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기억하신다는 말은 말 그대로 기억만 하신다, 안 잊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이 당신의 백성들을 보호하시고, 구원하시겠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인류 최초의 교회인 태고교회 이래로 주님께서 일관되게 약속하셨던 일입니다. 주님은 마리아로 상징되는 새 교회를 통해 그 약속을 이루시겠다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말씀에서 조상은 인류 최초의 교회인 태고교회와 고대교회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셨다’는 말은 그 일이 태고교회 이래로 주님께서 계속 약속하신 일이라는 뜻입니다.

 

56마리아가 석 달쯤 함께 있다가 집으로 돌아가니라

 

석 달’에서 이 ‘’(3, 셋)이라는 수는 처음부터 끝까지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완전한 상태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마리아가 엘리사벳 집에서 석 달 동안 머물렀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마리아로 표상되는 새 교회에 새로운 말씀이 완전하게 전해지는 것이구요, 그 말씀을 통해 새 교회의 교리를 완전히 이해하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섭리에 의해 새 교회의 사람들에게 말씀이 전해지는 것이구요, 그 말씀을 통해 교리를 완전하게 이해하는 기간과 과정이 바로 ‘석 달’입니다. 그리고 ‘마리아가 집으로 돌아갔다’는 말은 이제 새로운 말씀을 배우는 단계가 끝나고, 삶으로 옮기는 단계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새 교회 사람들은 말씀을 배우기만 하는 사람들이 아니고, 배운 말씀을 각자의 삶 속에서 실천해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마리아가 석 달쯤 함께 있다가 집으로 돌아가니라’의 속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마리아가 주님께 드리는 찬송은 모든 새 교회인들이 마음으로 주님께 드리는 찬송입니다. 입술만으로 믿음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과 삶으로 주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주님을 찬송한다고 했고, 또한 주님을 기뻐한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많은 반성을 했습니다. 저 자신을 돌아봐도 주님보다 더 사랑하고 기뻐하는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주님을 기뻐한다면 절대 뒤 돌아보지 말아야 하는데 뒤를 돌아본 적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마리아의 찬송을 들으면서 참으로 마음이 아픕니다. 어떻게 하면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기뻐할 수 있을까요? 오늘 말씀에서 주님께서는 겸손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주님을 두려워하는 자가 되라고 하십니다. 이제까지 네가 겸손하지 못했고, 나를 두려워하지도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우리가 주님을 두려워하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또 겸손하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뜻대로 잘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주님 앞에 다시 무릎을 꿇습니다. 이제 능력의 주님께서 오셔서 우리 안에 교만한 자와 권세 있는 자를 몰아내시고, 비천한 자를 높이소서, 주린 자를 먹이소서 이렇게 간절하게 주님께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흘렸던 눈물을 기억하시고, 이제 그 눈물을 닦아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26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겔36:26-27)

 

아멘

 

원본

2016-06-05(D1)

청주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2-28(D3)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

 

 

39이 때에 마리아가 일어나 빨리 산골로 가서 유대 한 동네에 이르러 40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니 41엘리사벳이 마리아가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42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43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가 44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 45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눅1:39-45)

 

 

오늘은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천사는 마리아에게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31절)

 

하였고, 또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36절)

 

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처녀입니다. 그리고 엘리사벳은 반대로 아기를 가지기에는 너무 늙은 나이였습니다. 그런데도 천사는 그들이 아기를 낳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마리아는 천사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 같지만, 그러나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37절)

 

는 천사의 말을 듣고는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 (37절)

 

답했습니다. 그리고 천사가 떠나가자 엘리사벳을 만나러 갑니다. 아마 엘리사벳에게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가서 확인해 보고자 하는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오늘 말씀의 배경입니다.

 

본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우리는 마리아와 엘리사벳으로 표상(表象)되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가, 그리고 그들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어떤 의미인가를 다시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미 그것에 대해서는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지만,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다시 한번 상기해 볼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은 속뜻으로는 어떤 사람들을 나타낼까요? 엘리사벳과 마리아는 모두 천적인 선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천적(天的, celestial)이다, 영적이다, 그리고 자연적이다 라는 말, 표현, 용어들은 새 교회에서는 정말 많이 사용하는 표현들인데요, 다른 곳에서는 듣기 어려울 뿐 아니라 굉장히 생소하기까지 한 용어들입니다. 이 용어들은 사랑의 단계, 정도(degree)를 나타내는 표현들인데요, 그러니까 천적이라는 표현은 주님, 즉 선(善, good)을 사랑하는 단계이구요, 영적이라는 표현은 이웃, 즉 진리를 사랑하는 단계를 말합니다.

 

※ 이 ‘이웃, 즉 진리를 사랑한다’는 게 좀 낯설 수 있어 보충 설명드립니다.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 15번 글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천국에서는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주님 개인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로부터 오는 선을 사랑하는 것이다. 선을 사랑한다는 것은 선을 의도하고 사랑으로 선을 행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도 이웃을 개인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서 나오는 진리를 사랑하는 것이다. 진리를 사랑한다는 것은 진리를 추구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김은경 역) In heaven loving the Lord does not mean loving him in respect to his person, but it means loving the good that is from him; and to love good is to will and do good from love; and to love the neighbor does not mean loving a companion in respect to his person, but loving the truth that is from the Word; and to love truth is to will and do it.

 

또 자연적이라는 말은 세상 법도나 학문 같은 것, 그 밖의 물질적인 것을 사랑하는 단계를 말합니다. 따라서 천적 선 안에 있다는 것은 주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부터 선을 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 선을 행하되 주님을 사랑해서 하는 것이지요. 주님을 사랑해서 선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엘리사벳과 마리아는 이렇게 천적 선 안에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말씀에서는 그들을 친척(天的, celestial, heavenly)이라고 부릅니다. 아마 그들은 실제로도 친척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에서 그들을 특별히 친척이라고 하는 것은 그들이 실제로 친척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게 아니라, 그들에게 있는 선의 특성이 서로 비슷한 것이 마치 친척 간 같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도 서로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어떤 점이 다를까요? 엘리사벳은, 속뜻으로는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기존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구요, 마리아 역시 속뜻으로는 이방인이라는 점입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기 때문에 오늘은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우리가 짚고 넘어갈 것은, 마리아로 표현되는 이방인은 단순히 교회 밖 사람들을 가리키는 게 아니구요, 기존 교회, 기성교회에서 가르치는 거짓 교리와 타협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들이 마리아와 같은 이방인들입니다. 예를 들면, 오직 믿음, 그러니까 믿음만으로 구원받는다거나, 말로는 삼위일체를 주장하면서 실제로는 아버지 따로, 아들 따로, 성령 따로 세 분 하나님을 믿는 그런 믿음하고는 타협하지 않는, 그런 믿음, 그런 신앙과 교리를 가까이하지 않는 사람들이 바로 ‘이방인’의 속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주님께서 왜 이방인들을 사랑하셨는지, 그리고 왜 새 교회를 이방인들과 함께 세우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 이에 관한 더욱 깊은 내용은 앞서 말씀드린 ‘천국과 지옥’을 정독(精讀)하시기 바랍니다. 이 책은 그러니까 새 교회 교리에 관한 일종의 입문서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출발은 천국에 관한 사실들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아이를 잉태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엘리사벳이 아이를 가진 것은 잘못된 신앙 안에 있으면서도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그러니까 기존의 낡은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주님을 사랑하는 선한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새로운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기존의 말씀을 가지고는 왜 안 될까요? 기존의 말씀은 교회의 지도자들이 왜곡, 뭔가를 보태서 섞었기 때문입니다. 마치 유대교회 당시에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이 말씀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 소위 장로의 전통이라는 계율을 만들어낸 것처럼 말입니다. 그들은 그것을 말씀보다 더 귀하게 여겼습니다.

 

※ 일단 이 모든 오류의 출발은 현 기독교회가 그 주된 교리를 주님의 말씀이 아닌, 사도들의 편지에서 뽑아냈기 때문입니다. 교리, 즉 신앙은 오직 주님의 말씀으로부터만 나와야 합니다. 현 66권 성경 중 주님의 말씀과 말씀 아닌 것에 관한 글은 아래 링크를 참고하세요.

 

성경 66권 중 말씀(The Word)은...’ (https://bygrace.kr/1027)

 

그러면 오늘날에는 어떻습니까? 주님께서는 선하게 살아라. 믿음의 열매를 맺으라고 기회 있을 때마다 말씀하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 교회에서는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고, 행위로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 가르칩니다. 이것이 말씀을 왜곡하는 것입니다.

 

※ 천국은 시공간의 나라가 아닌 상태와 그 변화의 나라이며, 겉 사람이 아닌, 속 사람으로 가는 나라입니다. 그러니까 속 사람의 상태가 천국을 수용할 수 있어야 들어갈 수 있는 나라라는 말입니다. ‘오직 믿음’의 교리에 아무리 투철해도 정작 그 속 사람의 상태가 천국을 받을 수 없으면 들어갈 수 없는, 즉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설령, 잠깐 허락을 받아 들어간들 금방 못 견디고 스스로 뛰쳐나오는 나라가 천국입니다. 그 속 사람의 상태가 천국을 받을 수 없는 상태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개신교의 이 ‘오직 믿음’의 교리를 거짓이요, 오류라 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남긴 일기를 보면, 스베덴보리가 영계에 들어가 주님의 허락으로 많은 역사적 인물들도 만났는데, 그중에 마틴 루터도 있었답니다. 그가 루터와 이 ‘오직 믿음’ 교리에 대하여 대화하던 중 그의 대답, ‘그것은 주님으로 말미암은 게 아니라 순전히 내가 고안한 것인데, 당시 카톨릭과 교리적 어떤 선명성을 위해서 부득이하게 그런 교리를 만들 수밖에 없었소...’라고 대답하더랍니다. 참고하세요.

 

그래서 주님은 엘리사벳과 사가랴 같은 사람, 즉 기존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여전히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말씀을 주셨습니다. 새로운 말씀이란 유대교회 말기에는 신약, 즉 주님 친히 말씀하신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의 말씀이구요, 오늘날 교회 상황에서는 주님의 종 스베덴보리를 통해 밝히신 말씀의 내적 의미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주님께서 엘리사벳과 사가랴 부부에게 주시는 아기입니다. 주님께서는 이와 같이 세상의 종말, 즉 교회의 마지막 때에 인류에게 새로운 말씀을 주십니다. 그것은 낡은 교회를 폐하시고, 그 대신 세워질 새 교회를 위한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말씀이 없다면 교회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말씀이 엘리사벳이 잉태한 아이입니다.

 

그러면 마리아가 잉태한 아이는 누구일까요? 마리아의 아이는 새로운 말씀을 통해 주님을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내적 진리로 오시는 주님이십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주님께서는 말씀이 없는 곳에는 오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침례(세례) 요한으로 표상되는 말씀을 통해 당신의 교회를 세우시고, 그곳의 주인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마리아는 주님께서 지상에 세우시는 새 교회 가운데 첫 번째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천사가 마리아에게 엘리사벳의 수태를 알린 것(受胎告知, Annunciation)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면 천사는 왜 마리아에게 엘리사벳의 수태를 알렸을까요? 마리아로 상징되는 새 교회의 사람들을 새로운 말씀이 있는 곳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새로운 말씀, 새로운 진리를 처음 접했을 때를 생각해 보시죠. 어떤 분은 책을 통해서, 어떤 분은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새 진리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그런 일들이 우연히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마리아에게 천사가 나타나 엘리사벳의 수태를 알린 것처럼, 그렇게 보이지 않는 주님의 역사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주님의 인도를 통해 마리아는 이제 서둘러 엘리사벳의 집으로 출발합니다. 마리아의 그런 모습을 본문 39절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39이 때에 마리아가 일어나 빨리 산골로 가서 유대 한 동네에 이르러

 

마리아가 일어나 빨리 움직였다고 합니다. 마리아의 그런 모습은 선한 이방인이 참된 진리를 갈망하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먼저 산골로 갔습니다. 산골은 영어로는 hill country입니다. 그것을 그대로 옮기면, 작은 산이 있는 시골 마을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작은 산은 무슨 뜻일까요? 큰 산이 주님에 대한 사랑을 의미한다면, 작은 산은 이웃에 대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시골 마을은 교회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마리아가 산골로 가는 것은 그 속뜻으로는, 기존 교회 안에 이웃 사랑이 있는 사람들에게로 가는 것입니다. 왜 마리아는 그들에게 갔을까요?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주님께서 그들에게 새로운 말씀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엘리사벳과 사가랴가 그런 사람들입니다.

 

우리들의 경우를 보더라도, 사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새로운 말씀을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주님이 누구신지, 또 천국이 어떤 곳인지 알려 줘도 잘 이해하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말씀은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만족하지 못하는 분들이나, 교회에 다녔다가 그곳에서 가르치는 진리에 회의를 느껴 교회에서 멀어진 분들에게 주어집니다. 주님께서 엘리사벳과 사가랴에게 말씀을 주시고, 이제 마리아가 그들에게 달려가는 것이 그런 것입니다. 마리아가 마침내 유대의 어느 동네에 당도했다고 합니다. 유대는 천적인 것을 뜻하고, 동네는 교리를 뜻합니다. 그래서 유대의 동네란 천적인 교리를 말합니다. 천적 교리는 그 교리의 바탕에 주님에 대한 사랑이 있는 교리입니다. 그러니까 마리아는 엘리사벳과 사가랴를 통해 새로운 말씀을 알게 되고, 다시 그것을 통해 가장 깊고 순수한 교리를 만난 것입니다. 그것이 마리아가 유대의 동네에 당도한 것입니다. 마리아는 사가랴의 집에 들어가면서 엘리사벳에게 인사를 건넸습니다.

 

40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니

 

인사를 하는 것은 우리 신앙인들의 의무입니다. 주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이웃의 집을 방문할 때는 인사하라, 평화를 빌라 가르치시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그것은 우리들의 의무입니다. 그런데 가끔 우리는 오랜만에 만나는 이웃들에게 인사를 하지 않고 지나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상대가 인사를 받지 않으면 어쩌나 하고 걱정할 때도 있지요. 그런데 그럴 필요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12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13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하지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마10:12-13)

 

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마리아가 엘리사벳에게 한 인사는 마리아에게 있는 주님의 평화가 엘리사벳과 그 아기에게 전해지는 것이구요, 그래서 주님 안에서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를 받았을 때 복중(腹中)에서 아이가 뛰었습니다.

 

41엘리사벳이 마리아가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복중의 아이는 누구입니까? 주님이 주시는 새로운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아이가 주님의 말씀을 듣고 뛰었다는 것은, 말씀이신 주님이 당신의 교회인 마리아와 하나 되고자 하시는 열정을 나타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마리아는 주님이 세우실 새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엘리사벳과 마리아의 만남은 주님께서 당신의 새 교회에 새로운 말씀을 주신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그 새로운 말씀을 통해 주님은 내적 진리로 당신의 교회에 오시려는 것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기존의 교회에는 주님이 계실 곳이 없는데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처음 오실 때 마구간으로 오시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주님은 새로운 말씀으로 다시 오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42절에서는 엘리사벳이 성령이 충만한 상태에서 마리아에게 말합니다.

 

42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엘리사벳이 성령이 충만한 상태로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엘리사벳이 축복한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마리아를 축복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엘리사벳이 큰 소리로 말했다고 했는데, 그것 역시 주님의 거룩한 열성을 나타냅니다. 그런 점에서 엘리사벳이 큰 소리로 말했다는 것과 앞에서 아기가 복중에서 뛰어놀았다는 것은 서로 연관이 있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둘 다 주님의 거룩한 열성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아기가 복중에 뛰는 것은 말씀이신 주님이 당신의 교회와 하나 되고자 하시는 열성이구요, 엘리사벳이 큰 소리로 마리아를 축복한 것은 주님의 열성이 당신의 교회를 축복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엘리사벳을 통해서 마리아에게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도다’라고 축복했습니다. 이 말씀은 단순한 축복의 말이 아닙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창세기 3장 16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하와에게 하신 말씀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말씀은 이렇습니다.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창3:16)

 

많은 분들이 이 말씀을 여호와 하나님이 하와를 저주하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하와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해서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인간을 저주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 말씀은 어떤 말씀일까요? 인간들이 감당해야 할 숙명에 대해 주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여기서 여자란 인간의 자아 위에 세워진 교회를 나타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주님께서 인류에게 주시는 교회는 인간의 자아 위에 세워질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러면 임신하는 고통과 자식을 낳는 수고는 무슨 뜻일까요? 교회가 진정한 진리를 얻기까지 견디고 이겨야 할 내적 싸움과 온갖 걱정을 나타냅니다. 그것이 아기를 낳는 수고와 임신의 고통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출애굽기 말씀을 통해 진정한 진리가 어떤 것인지를 배웠습니다.

 

※ 이 누가복음 속뜻 강해가 진행될 동안 사실은 출애굽기 속뜻 강해 역시 병행하셨습니다.

 

거기서는 진정한 진리를 ‘만나’로 표현합니다. 만나는 책에서 배우거나 설교를 통해 듣는 그런 진리가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일까요? 말씀을 통해 내적 진리로 오시는 주님이 바로 진정한 진리입니다. 그래서 그 진리 안에는 선한 것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진리는 그냥 머리로 이해하는 진리가 아닙니다. 그것을 얻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타고난 자아를 부단히 깎아 내고, 깎아 내고, 잘라내고, 잘라내는 그런 고통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교회가 온전히 서기 위해서는 부단한 내적 싸움과 인고(忍苦)의 과정이 필요하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하와에게 징계처럼 내리신 이 말씀은 교회의 험난한 역사를 예고하는 말씀입니다.

 

※ 주님에 대한 호칭 변화에 주목해 보세요. 창세기 1장은 ‘하나님’만 나오지만, 창세기 2장부터는 ‘여호와 하나님’이 나옵니다. 그러다 다시 ‘여호와’만 나오고, 또 ‘하나님’만 나옵니다. 다음은 주님의 여러 호칭에 관해 짧게 요약해 본 글입니다.

 

주님의 신성(The Divine)은 선과 진리로 되어 있으며, 그래서 주님의 호칭들은 이와 관련이 있습니다. 즉 주님의 신성 호칭 중 선에 대한 호칭은 ‘여호와’, 진리에 대한 호칭은 ‘하나님’이시며, 주님의 신적 인성(The Divine Human) 호칭 중 선에 대한 호칭은 ‘예수’, 진리에 대한 호칭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이에 대한 더욱 깊은 내용은 아래 제 블로그 글을 참고하세요.

 

AC.14 설명, 주님의 ‘호칭’ 관련’ (https://bygrace.kr/2637)

 

그런데 오늘 성령은 마리아에게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도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씀은 이제까지 교회가 겪었던 모든 싸움과 수고의 결실을 이제 맺게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하와에게 하신 말씀이 교회의 넘어짐과 일어섬의 반복을 예고하는 그런 말씀이라면, 이제 마리아에게 하신 말씀은 교회의 그 모든 흥망성쇠의 결실을 너를 통해 맺게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말할 수 없는 축복의 말씀입니다. 얼마나 감동적인 말씀입니까? 왜냐하면 마리아로 상징되는 교회는 주님께서 인류에게 주시는 마지막 교회이구요, 다시는 무너지지 않을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 교회에 내적 진리로 오실 것을 예언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성령은 마리아에게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도다’라고 말하고, 바로 이어서 ‘네 태중의 아이가 복이 있도다’라고 말했습니다. 마리아는 조금 전에 말씀하신 것처럼 주님께서 세우시는 새 교회입니다. 그리고 태중의 아이는 그 교회에 내적 진리로 오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복이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43절에서 엘리사벳이 마리아에게 또 말했습니다.

 

43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가

 

여기서 말하는 어머니 역시 교회를 의미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엘리사벳이 ‘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가’라고 하는 것은, 참된 말씀을 아는 엘리사벳 같은 사람들이 이제 낡고 병든 교회를 떠나는 것이구요. 그러므로 내적 진리가 있는 새 교회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엘리사벳의 입장에서 본 마리아와의 만남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두 사람의 만남의 의미를 우리들의 얕은 믿음으로 어떻게 완전하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새 교회 가르침에서는 그 의미에 대해서 소상하게 밝히지 않습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글자로 된 말씀이 없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곳에 오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만난 것은 마리아의 입장에서는 엘리사벳이 잉태한 아기, 즉 새로운 말씀이 마리아에게 전해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을 사랑하는 이방인들에게 말씀이 전해진다는 그런 뜻입니다. 주님은 그런 식으로 당신의 새 교회를 세우십니다. 우리 주변에는 주님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그럼에도 선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주님은 물론 그들에게도 진리를 주십니다. 어떤 식으로 주실까요?. 다양한 종교의 교리나 세상의 상식들을 통해 주십니다. 그러나 그런 진리들은 진정한 진리들은 아닙니다. 그래서 그것만 가지고는 온전한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물론 그러한 진리를 가지고도 선하게 살면 자기 자신은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구원하지는 못합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에게 교회로서의 사명을 기대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각자의 삶을 통해 이웃들에게 주님의 진리를 전하기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런 방식으로 인류를 모두 구원하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의 그런 뜻을 무겁게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마리아는 선을 그 자체로 사랑하는 순수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내적 의미로 보면 이방인이었습니다. 물론 말씀의 글자의 뜻으로 보면 유대인입니다. 그러나 내적 의미로 보면 이방인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그를 엘리사벳에게로 인도하시고, 그를 통해 참된 진리의 말씀을 받도록 섭리하셨습니다. 그것이 마리아의 입장에서 본 엘리사벳과의 만남입니다.

 

반면에 엘리사벳과 사가랴 부부는 참된 말씀을 주님으로부터 받았지만, 여전히 기존의 교회에 머물러 있는 사람입니다. 기존 교회에 머무는 것은 기존의 교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새로운 진리 전체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주신 진리 중에서 자기가 원하는 것만을 받아들이는 것이죠. 그러므로 그것은 참된 진리와 그동안 자기가 갖고 있던 진리를 함께 섞는 일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진리들이 어떻게 될까요? 진리 아닌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런 것이, 말하자면 기존의 교회에 아직 머물러 있는 상태입니다. 그렇게 볼 때, 엘리사벳의 입장에서 마리아를 만나는 것은, 낡은 교회를 떠나 순수한 교회로 나아가는 것이며, 또한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는 주님의 권고를 따르는 일입니다. 그래서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보고 주님의 어머니가 나에게 나아왔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새 교회가 나에게 왔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엘리사벳은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45절 말씀입니다.

 

45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이것은 주님이 세우신 새 교회를 진심으로 축복하는 말입니다. 이 교회를 통해 주께서 이루시고자 하는 일을 믿는 자에게 복이 있도다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새 진리를 받았으면서도 진리에 따라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분들이 주변에는 많습니다. 아직 놓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새 진리를 위해 모두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진리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오로지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의 새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새 교회는 에덴동산 이래 인류가 감당했던 모든 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교회입니다. 주님께서 내적 진리로 함께 하시는 교회입니다. 이 교회로 인도된 모든 성도님들께 주님의 영광이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 (사2:2)

 

아멘

 

원본

2016-05-22(D1)

청주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2-27(D2)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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