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의 속뜻

 

 

21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22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23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위는 헬리요 24그 위는 맛닷이요 그 위는 레위요 그 위는 멜기요 그 위는 얀나요 그 위는 요셉이요 25그 위는 맛다디아요 그 위는 아모스요 그 위는 나훔이요 그 위는 에슬리요 그 위는 낙개요 26그 위는 마앗이요 그 위는 맛다디아요 그 위는 서머인이요 그 위는 요섹이요 그 위는 요다요 27그 위는 요아난이요 그 위는 레사요 그 위는 스룹바벨이요 그 위는 스알디엘이요 그 위는 네리요 28그 위는 멜기요 그 위는 앗디요 그 위는 고삼이요 그 위는 엘마담이요 그 위는 에르요 29그 위는 예수요 그 위는 엘리에서요 그 위는 요림이요 그 위는 맛닷이요 그 위는 레위요 30그 위는 시므온이요 그 위는 유다요 그 위는 요셉이요 그 위는 요남이요 그 위는 엘리아김이요 31그 위는 멜레아요 그 위는 멘나요 그 위는 맛다다요 그 위는 나단이요 그 위는 다윗이요 32그 위는 이새요 그 위는 오벳이요 그 위는 보아스요 그 위는 살몬이요 그 위는 나손이요 33그 위는 아미나답이요 그 위는 아니요 그 위는 헤스론이요 그 위는 베레스요 그 위는 유다요 34그 위는 야곱이요 그 위는 이삭이요 그 위는 아브라함이요 그 위는 데라요 그 위는 나홀이요 35그 위는 스룩이요 그 위는 르우요 그 위는 벨렉이요 그 위는 헤버요 그 위는 살라요 36그 위는 가이난이요 그 위는 아박삿이요 그 위는 셈이요 그 위는 노아요 그 위는 레멕이요 37그 위는 므두셀라요 그 위는 에녹이요 그 위는 야렛이요 그 위는 마할랄렐이요 그 위는 가이난이요 38그 위는 에노스요 그 위는 셋이요 그 위는 아담이요 그 위는 하나님이시니라 (눅3:21-38)

 

 

주님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이유는 스스로 본보기가 되어 장래를 위해 세례의 관례를 만드시기 위함뿐 아니라 당신께서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고, 영적으로 만드시는 것처럼, 주님도 당신의 인성을 영화롭게 하시고 신성하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TCR.684, 이순철 역)

 

※ TCR(True Christian Religion, 참된 기독교) 위 684번 글에 대한 Ager 영역본은 아래와 같습니다.

 

This he did not only that he might institute baptism for the future, himself setting the example, but also because he glorified his human and made it divine, as he regenerates man and renders him spiritual. (TCR.684, Ager 역) //

 

※ 본래 ‘침례’(浸禮)라는 표기가 맞지만, 현 신약 성경에 ‘세례’(洗禮)로 되어 있어, 혼란을 피하기 위해 이후 ‘세례’로 통일하겠습니다.

 

※ 신약 성서 원어인 헬라어 원전에 의하면, ‘침례’(浸禮, baptism, 헬, βἀπτισμα)가 맞습니다. 그럼에도 한글 성경에 ‘세례’(洗禮)가 채택된 것은, 광복 전 성경 한글화 작업으로 각 교단이 모였을 때 침례교만 빠졌기 때문입니다. 침례교 대표가 연락을 받지 못했기 때문인데, 이는 당시 대부분의 교단은 효과적 선교를 위해 큰 도시 위주로 움직여 연락이 수월했던 반면, 침례교만 유독 내륙 오지나 바닷가 농어촌 선교에 힘써 그렇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이런 표기 문제 때문인지 일본어 성경은 그냥 원어를 그대로 표기합니다.

 

 

세례요한이 요단강 부근에서 세례를 베풀 때, 많은 사람은 그가 혹시 메시아인가?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요한은 그들에게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그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라며, 자기는 그리스도가 아님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속뜻으로 본다면, 요한과 주님은 모두 말씀을 표상합니다. 그러나 요한으로 표상되는 말씀과 주님으로 표상되는 말씀은 근본적으로 다른데요, 주님으로 표상되는 말씀은 외적 진리와 내적 진리를 모두 포괄하는 반면, 요한으로 표상되는 말씀은 외적 진리, 즉 겉 글자인 문자적 의미만을 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으로 표상되는 진리만으로는 거듭날 수 없습니다. 세례요한, 즉 말씀의 문자적 의미로는 주님께로 나아올 수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까지는 말씀의 문자적 의미가 나름의 역할을 할 수 있지만, 그러나 우리는 그 이상으로 더 나아가 거듭나서 구원까지 받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주님을 바라보고, 그다음은 더 나아가 악을 끊고 선을 행해야 합니다. 그런데 말씀의 지식만 가지고는 그런 능력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의 지식 속으로 진정한 진리이신 주님이 오셔야 하며, 그때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성령과 불로 악을 끊고 선을 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신다’ 하고, 또 ‘그가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 한 것입니다. 성령과 불은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선을 동반한 진리, 즉 진리뿐인 진리가 아니고요, 사랑이 있는 진리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요한의 말을 정확하게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럼에도 요한에게 너도나도 세례를 받았습니다. 사람들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다는 이것은, 교회의 마지막 때, 사람들이 새로운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통해 의식이 바뀌는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사람들이 세례를 받을 때, 주님께서도 오셔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21절입니다.

 

21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백성들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만, 그러나 주님께서 세례를 받으신다는 것은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더구나 요한은 주님께서 친히 보내신 선지자인데, 그런 그에게 주님께서 세례를 자청하신 것입니다. 다음은 이 장면에 관한 마태복음의 기록입니다.

 

13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부터 요단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시니 14요한이 말려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15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마3:13-15)

 

주님은 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고 하실까요? 그것에 대해 ‘참된 기독교’ 684번 글에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주님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이유는 스스로 본보기가 되어 장래를 위해 세례의 관례를 만드시기 위함뿐 아니라 당신께서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고, 영적으로 만드시는 것처럼, 주님도 당신의 인성을 영화롭게 하시고 신성하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주님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심으로 세례의 전통을 세우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세례와 성찬을 통해 거듭나 구원받는 것처럼, 주님 역시 자기 안에 계신 여호와의 능력으로 자신의 불완전한 인성(人性, human), 마리아를 통해 유전한 인성을 신성하게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주님도 인간이 거듭나는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인성을 거룩하게 하셨고, 그래서 여느 인간처럼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는 사실에서 주님의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사랑이 느껴집니다. 아시는 것처럼 유대 교회가 문을 닫으면서 예배와 관련된 모든 표징, 표상들이 사라졌습니다. 이를테면, 성전의 양식이라든가 기물들, 그리고 번제와 희생제물의 영적 의미들이 모두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런 가운데 주님께서는 두 가지 상징적 예전만 남기셨는데요, 하나는 세례이고, 다른 하나는 성찬입니다. 그러니까 세례식에서 이마에 물을 바르거나 침례식에서 물속에 잠기고, 성찬식에서 포도주와 무교병(떡, 빵)을 먹는 건 그냥 하는 형식적인 게 아니라는 것이지요.

 

※ 참고로, 이마에 물을 바르는, 어디서는 손에 물을 따라 머리에 붓는, 세례는 후대에 생긴 것입니다. 좀 쉽고 편하게 하자고 생긴 편법이지요. 주님이 요한에게 받으신 세례는 몸 전체를 물에 담그는 침례(浸禮)였습니다. 영어로는 뱁티즘, 원어인 헬라어로는 밥티조마라 합니다.

 

주님은 이 예전들을 통해서 인간과 하나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세례와 성찬은 새 교회에서는 대단히 중요한 예배 의식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이 두 가지 예배의 전례(典禮)를 친히 만드셨다는 사실을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하신 첫 번째 이유는, 그것이 속 사람의 개혁과 겉 사람의 거듭남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세례는 속 사람의 개혁을 의미하고요, 성찬에 참여하는 것은 겉 사람이 거듭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례와 성찬을 제정하신 두 번째 이유는, 그것이 인간이 거듭나는 것처럼 주님도 같은 방법으로 영화(榮化, Glorification)하심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의 속 사람과 겉 사람이 하나로 결합하는 것처럼, 주님의 인성과 신성이 하나로 결합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인성이 영화롭게 되신 것과 인간이 거듭나는 것은 동전의 양면처럼 떼려야 뗄 수 없는 하나입니다. 그렇게 볼 때, 주님이 당신의 인성을 영화롭게 하신 일은, 주님이 세상에 계실 때 일어났던 일회적인 일이 아니며, 모든 신앙인의 내면에서 지금도 현재 진행 중인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은 지금도 거듭나는 사람들 안에서 치욕을 당하시고 지옥을 이기시며, 계속해서 당신의 인성을 영화롭게 만드십니다.

 

※ 우리는 악을 직접 상대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악에서 물러나 영적 전투에서 이길 수 있는 이유는, 사실은 우리 안에서 주님이 대신 싸우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다음 말씀의 속뜻입니다.

 

28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11:28-30) //

 

그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불완전한 진리가 선이 있는 진리, 완전한 진리로 계속해서 바뀌어 감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셨다’ 한 것입니다. 세례와 성찬은 백성들만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주님도 함께 세례를 받으시고요, 우리가 성만찬을 할 때, 주님도 함께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거듭날 때, 주님의 인성도 우리 안에서 계속해서 영화롭게 되십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은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셨다’는 이 말씀이 아닐까 합니다. 거듭나는 모든 과정에 있어 주님이 우리와 늘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는 거듭날 수 있습니다.

 

거듭남은 우리 혼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렸다’ 하는데요, 이 말씀은 주님과 우리가 함께 세례를 받을 때, 속 사람이 열리며, 천국과 연결된다는 뜻입니다. 혼자 힘으로 거듭나려는 사람은 속 사람이 닫힙니다. 그렇게 되면 주님이 그에게 오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 거듭나고자 하는 사람의 경우는 속 사람이 열리고, 주님으로부터 생명이 흘러 들어옵니다. 그 모습을 22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합니다.

 

22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셨다’는 것은 우리가 주님과 함께 거듭날 때 속 사람이 열리고,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해 진리와 선이 흘러들어오는 모습입니다. 그것을 ‘비둘기 같다’ 표현한 까닭은, ‘비둘기’는 속뜻으로 주님으로부터 오는 믿음의 진리와 선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강림하실 때, 하늘로부터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여기서 아들은 주님의 신적 인성(神的 人性, Divine Human)을 나타냅니다. ‘신적 인성’이란 신성한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신적 인성이신 주님을 아들이라 하는 것은, 주님의 신적 인성은 존재 자체이신 여호와 하나님이 바깥으로 드러나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존재 자체이시고, 사랑 자체이신 여호와 하나님이 일차적인 주님이시라면, 그분의 바깥으로, 겉으로 드러나심인 신적 인성으로서의 주님은 이차적인 주님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일차적이신 주님, 즉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신 여호와를 우리는 아버지라 부르고요, 그분에게서 비롯한 이차적이신 주님, 즉 인간이신 예수님을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 하나님 따로, 아들 하나님 따로 계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만약 그렇게 믿는다면 대단히 안타깝고 불행한 일입니다. 우리는 한 분 하나님을 섬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 저는 소위 모태신앙으로 장로교 통합에서 유아세례 및 주일학교를, 그리고 고등학교 때 침례교회에 처음 출석, 침례교인이 되었으며, 이후 침례교 신학을 하여 침례교 목사가 되었습니다. 늦게 신학을 하여 신대원 어느 조직신학 시간에 삼위일체에 대한 시간이었는데, 그때 ‘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음 접하고, 무척 감동하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 생각하면 거 참... 하며 많이 부끄러운데요, 그러나 여전히 기독교와 개신교 거의 모든 교인은 삼위일체에 대하여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고 봅니다. 다소 좀 뿌연 생각인데요, 수년 전 무슨 금식기도를 배우러 대전 어느 대형 교회 유명 세미나를 다닌 적이 있는데, 그곳 주 강사이신 목사님도 하나님들을 따로따로 부르며 기도하시더군요...

 

그러므로 주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한 것은, 여호와께서 당신과 함께 거듭나는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는가를 말해줍니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주님께서 세례의 전례를 직접 선포하신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23절에서는

 

23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위는 헬리요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가 30세쯤이라고 합니다. 30이란 수는 5와 6을 곱한 수입니다. 그래서 내적 싸움 중에도 작은 싸움을 의미합니다. 그 이유는, 숫자 6은 내적 싸움을 의미하고, 숫자 5는 작은 것, 사소한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 말씀에 나오는 나이와 관련된 숫자들, 가령 창5에 나오는 아담,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 므두셀라, 라멕, 노아 등의 나이들은 그 이름으로 일컫던 교회들의 때와 상태들(the times and states of the church)을 의미합니다. 특히 가장 기본이 되는 1, 2, 3, 4, 5, 6, 7, 8, 9, 10 등의 수들 및 그 복합수들 역시 어떤 아르카나를 담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세례를 받으실 즈음의 주님은 이미 대부분의 시험을 이기신 상태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때 주님이 당하시는 시험들은 아주 사소한 시험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주님에게 남아 있는 큰 싸움이 있다면,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시험과 마지막 십자가의 고난 정도였을 것이라고 짐작됩니다. 본문에서는 주님의 그런 영적 상태를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라고 표현했습니다.

 

24절로 37절까지는 요셉으로부터 조상들에 이르는 가문의 계보가 나옵니다. 사실 요셉은 예수님과는 상관이 없는 사람입니다. 단지 그가 마리아의 남편이라는 사실 때문에, 그리고 표면상으로 주님의 후견인이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의 아버지로 비쳤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 오늘 말씀에서는 무려 14절에 걸쳐 요셉의 가계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요셉의 가계는 주님께서 세상에 오실 때까지 존재했던 모든 교회의 기록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37절에 나오는 아담은 인류 역사상 가장 순수했던 태고교회를 상징하고요, 그다음에 나오는 노아는 고대교회를 상징합니다. 또 한참 내려가 야곱이 나오는데, 야곱 역시 고대교회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30절에 등장하는 시므온은 거듭남의 두 번째 상태를 나타내고, 유다는 거듭남의 네 번째 상태를 나타냅니다. 시므온으로 표상되는 거듭남의 두 번째 상태는 진리를 의도하기 시작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진리를 배운 다음 행동으로 옮기고자 하는 의욕이 생기는 상태입니다. 그것이 시므온으로 상징되는 교회의 상태입니다. 그러면 거듭남의 네 번째 상태, 즉 유다는 어떤 상태입니까? 거듭남의 네 번째 상태는 진리의 인도를 받지 않고, 선의 인도를 받는 상태입니다. 다시 말하면 진리가 시키는 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일어나는 애정, 또는 욕구에 따라 행동하는 상태입니다. 그렇게 해도 진리에 어긋남이 없는 상태가 거듭남의 네 번째 상태입니다. 그것을 선의 인도를 받는 상태라고 하는 것은, 선은 바로 애정과 통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나오는 요셉은 영적 교회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24절부터 34절까지에 기록된 요셉의 가계는 그동안에 있었던 모든 교회의 영적 상태를 나타냅니다.

 

23절에서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라 한 것은, 그동안 모든 교회를 다스리던 주님은 본질적으로 진리 그 자체이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아들은 진리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셉과 아무런 관계가 없어 보이는 주님을 요셉의 아들이라고 하고, 또한 요셉의 족보를 차례로 기록한 것입니다. 다만 이 말씀을 읽는 사람들이 혹시 오해를 하지는 않을까 해서, 그냥 ‘요셉의 아들’이라 하지 않고,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라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세심하신 배려가 느껴지는 부분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니케아 종교회의(AD 325, 니케아, 현 튀르키예 이즈니크) 당시에 아리우스파 같은 이단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주장했던 것은 ‘예수는 요셉의 자손’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최근에 제가 아는 어떤 분과 대화를 나누는데, 그분이 또 그러세요. 우리나라에서 서너 번째 안에 드는 교파에 소속된 어떤 교인이 주님을 요셉의 자손이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 교회의 교리가 그런 건지, 아니면 그분의 사적 견해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많이 놀랐습니다. 그런 오해를 할 수가 있기 때문에, 말씀에서는 이렇게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라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주님께서 요한에게 직접 세례를 받으신 이유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주님은 세례를 베푸시는 분이지 세례를 받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여느 사람들처럼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를 다시 말씀드리면, 첫째는 세례의 전통을 제정하시기 위해서이고, 둘째는 주님도 세상에 오셔서 인간이 거듭나는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당신의 인성을 거룩하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볼 때, 주님이 받으신 세례는 주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고, 오직 인간의 구원을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세례와 성찬에 참여하시는 것은 거듭남의 모든 과정에서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시는 일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는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 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셨다’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와 함께 싸우시고, 우리와 함께 예배를 드리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신 것처럼, 우리도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버려야 할 것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오셔서 무슨 일이든 우리와 함께하실 수 있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새 교회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시니 (요12:28)

 

아멘

 

 

원본

2017-05-14(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3-19(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019. 2023-03-19(D1)-주일예배(2436, 눅3,21-38),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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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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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가 방주에서 내리기 전 보인 일련의 행동들의 속뜻

 

 

5물이 점점 줄어들어 열째 달 곧 그달 초하룻날에 산들의 봉우리가 보였더라 6사십 일을 지나서 노아가 그 방주에 낸 창문을 열고 7까마귀를 내놓으매 까마귀가 물이 땅에서 마르기까지 날아 왕래하였더라 8그가 또 비둘기를 내놓아 지면에서 물이 줄어들었는지를 알고자 하매 9온 지면에 물이 있으므로 비둘기가 발붙일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와 그에게로 오는지라 그가 손을 내밀어 방주 안 자기에게로 받아들이고 10또 칠 일을 기다려 다시 비둘기를 방주에서 내놓으매 11저녁 때에 비둘기가 그에게로 돌아왔는데 그 입에 감람나무 새 잎사귀가 있는지라 이에 노아가 땅에 물이 줄어든 줄을 알았으며 12또 칠 일을 기다려 비둘기를 내놓으매 다시는 그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더라 (창8:5-12)

 

 

사람 스스로 만드는 것은 무엇이든 선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 사람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고, 그러므로 불순하고 부정한 원천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불순하고 부정한 원천으로부터는 어떤 선한 것도 나올 수 없다. 왜냐하면 사람은 언제나 자신의 공로와 의를 생각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을 자신과 비교하여 업신여기고, 그렇지 않으면 다른 방법으로 잘못을 저지른다. (천국의 비밀 874, 이순철 역) ...that they suppose they do what is good and think what is true from themselves; and because they are as yet in great obscurity, the Lord also leaves them so to imagine. But still all the good they do and all the truth they think while in such imagination is not the good and truth of faith. For whatever man produces of himself cannot be good, because it is from himself, that is, from a fountain which is impure and most unclean. From this impure and unclean fountain no good can ever go forth, for the man is always thinking of his own merit and righteousness; and some go so far as to despise others in comparison with themselves (as the Lord teaches in Luke 18:9–14),... (AC.874, Clowes 역, Potts 개정)

 

 

※ 오늘 설교는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님의, 부임(2016년 12월) 이듬해부터 시작된 성전 건축을 마치고, 새 성전에서 2019년 신년 예배로 드린 설교입니다.

 

새로 지은 성전에서 첫 예배를 드리게 되니 여러 가지로 감회가 새롭습니다. 한 해를 시작하면서 문득 노아의 방주 생각이 났습니다. 노아가 방주를 지어 홍수를 피하는 것이 새 교회의 시험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시는 것처럼 노아는 오백세 가까이 되었을 무렵에 하나님의 명을 받고 방주를 짓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백 년에 걸친 역사 끝에 방주가 완성되자 그 후 사십 일간 밤낮으로 큰비가 쏟아집니다. 이로 인하여 다음과 같이 온 세상이 물에 잠기고, 그래서 결국 모든, 육지 생물이 다 죽습니다.

 

11노아가 육백 세 되던 해 둘째 달 곧 그 달 열이렛날이라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문들이 열려 12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 17홍수가 땅에 사십 일 동안 계속된지라 물이 많아져 방주가 땅에서 떠올랐고 18물이 더 많아져 땅에 넘치매 방주가 물 위에 떠 다녔으며 19물이 땅에 더욱 넘치매 천하의 높은 산이 다 잠겼더니 20물이 불어서 십오 규빗이나 오르니 산들이 잠긴지라 21땅 위에 움직이는 생물이 다 죽었으니 곧 새와 가축과 들짐승과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이라 22육지에 있어 그 코에 생명의 기운의 숨이 있는 것은 다 죽었더라 23지면의 모든 생물을 쓸어버리시니 곧 사람과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라 이들은 땅에서 쓸어버림을 당하였으되 오직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들만 남았더라 24물이 백오십 일을 땅에 넘쳤더라 (창7:11-12, 17-24)

 

※ 주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그 자체이신 주님은 자기가 지은 생명체들을 저렇게 죽이시는 잔인한 신이 아니십니다. 아무리 그것이 악하더라도 말입니다. 주님은 심지어 지옥도 소멸시키지 않으시며, 여전히 천국 빛을 비추십니다. 물론 지옥은 필사적으로 이를 차단하고 있지만 말입니다. 이 노아의 홍수 이야기는 주님의 신성한 아르카나(arcana, 秘義), 그러니까 곧 주님을 사랑함보다 자기를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처하게 될 마지막 영원한 운명을 보여 주는, 겉뜻과 달리 그 안에 이런 신적 속뜻이 들어있는 이야기입니다. 참고로, 여기 등장하는, 사람 외의 모든 생물은 사실은 사람 안에 사람과 함께 있는 다양한 애정들을 말합니다.

 

이렇게 온 땅에 가득했던 물이 거의 말라갈 때, 노아는 방주에서 나올 준비를 합니다. 모두가 잘 아는 이 노아의 홍수 이야기는, 그러나 영적 의미로는 아담으로 상징되는 인류 최초의 교회인 태고교회의 몰락과 이어지는 새로운 교회인 고대교회의 출현을 의미합니다. 교회가 물질의 유혹에 넘어가 세속화될 때가 교회의 마지막 때입니다. 그때 주님은 새 진리를 선포하시고, 새로운 교회의 출현을 알리시지요. 그리고 그때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기존 교회의 잘못된 신앙을 거부, 새 교회로 이동합니다.

 

※ 이런 일은 인류 역사, 곧 현재까지 네 번의 교회 시대에서 시대가 바뀔 때마다 있었고, 노아의 방주에 오른 사람들은 그 첫 번째 사람들, 곧 태고교회에서 고대교회로 이동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지금은 현 기독교회 시대를 마감, 이어질 다섯 번째 교회 시대인 새 교회 시대를 앞두고 있습니다. 지난 네 번의 교회 시대는 순서대로, 태고교회, 고대교회, 유대교회 및 현 기독교회입니다.

 

※ ‘노아’라는 이름은, 그 속뜻으로는, 자기 사랑, 세상 사랑에 완전히 침식, 그 안에 주님의 선과 진리가 전혀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던, 그 당시 종말을 앞두고 있던 태고교회 안에서 유일하게 주님 사랑, 이웃 사랑의 신앙을 가까스로 고백하던, 아주 희귀한 사람들을 일컫는 이름이었으며, 또한 이들로 말미암아 일어난 새 교회를 말합니다.

 

그러나 새 교회의 진리를 받아들였다 하더라도 바로 삶이 변하지는 않습니다. 처음에는 이성적으로만 진리를 받아들이고, 의지로는 아직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앙인들이 이런 상태에 있을 때는 시험에서 자유로울 수, 즉 시험을 이길 능력이 없는데요, 이런 것을 말씀에서는 노아의 방주가 사십 일 동안 계속된 홍수 속에서 물이 많아져 땅에서 떠올라 물 위에 이리저리 떠다니는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비가 그치고 온 땅에 가득한 물이 완전히 마르는 과정은 낡은 교회가 무너지고, 새 교회가 세워지는 진통의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 이야기는 그러므로 새 교회 또는 새 교회인들이 어떻게 본격적으로 거듭남의 길로 들어서는가를 설명하고 있는데요, 먼저 5절입니다.

 

5물이 점점 줄어들어 열째 달 곧 그달 초하룻날에 산들의 봉우리가 보였더라

 

’은 보통 진리를 뜻하지만, 여기서는 반대로 거짓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물이 점점 줄어들었다는 것은 새 교회인들의 마음속에 거짓이 점점 없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거짓이란, 한마디로 겉과 속이 다른 것입니다. 속 사람은 보통 진리에 따라 말하고 행동하기를 원하지만, 겉 사람은 그 반대입니다. 그 이유는 속 사람의 뜻대로 하면 겉 사람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지요. 예를 들면, 속 사람은 나보다 이웃의 행복을 먼저 생각합니다. 그러나 겉 사람은 이웃의 행복보다 나의 행복이 먼저라 주장하면서 속 사람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때 겉 사람이 하는 행동은 이기적이며, 거짓입니다. 그러나 시험이 계속되면 그러한 거짓들이 점점 사라집니다. 왜냐하면 시험을 거치는 동안 겉 사람이 겸손해지고, 그래서 속 사람에게 복종하기 때문이지요. 그런 식으로 우리의 삶 속에서 거짓이 사라지는 것이 물이 점점 줄어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산들의 봉우리가 보였다고 합니다. 말씀에서 ‘’은 사랑을 뜻합니다. 그래서 산들의 봉우리가 보이는 것은, 신앙인들이 비로소 인애(仁愛), 체어리티(charity)라는 삶의 가치를 인식하는 것이고, 그렇게 해서 이웃을 사랑하며 살기 시작하는 것을 뜻합니다. 거짓된 사람은 이웃을 사랑할 수 없고 진실한 사람만이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면에 거짓이 없어질수록 그만큼 우리는 체어리티의 삶을 살 수 있으며, 그러한 상태가 바로 산들의 봉우리가 보이는 것입니다.

 

6사십 일을 지나서 노아가 그 방주에 낸 창문을 열고

 

사십 일’은 시험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사십 년 광야를 헤맨 것이나, 노아 때 사십 일간 비가 쏟아진 것, 주님이 공생애 전 광야에 나아가 사십 일간 금식하시며 보내신 것은 모두 시험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본문에 ‘사십 일을 지나서’는 시험이 끝난 다음을 의미합니다. 말씀에는 그때 노아가 방주에 낸 창문을 열었다고 했습니다. ‘창문’은 진리에 대한 이해력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창이 열렸다는 것은, 시험을 겪은 다음 진리에 대한 이해력이 밝아졌다는 뜻입니다. 시험을 통해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복종할 때, 다시 말하면, 속 사람이 시키는 대로 거짓 없이 행동하고, 체어리티의 삶을 살기 시작할 때, 주님에 의해 진리에 대한 이해력이 열립니다. 진리에 대한 이해가 깊은 사람은 감각을 통해 세상을 보지 않고, 진리를 통해 봅니다. 그래서 무슨 일을 하든 올바르게 판단하고 분별합니다. 그것이 방주의 창이 열리는 것입니다.

 

7까마귀를 내놓으매 까마귀가 물이 땅에서 마르기까지 날아 왕래하였더라

 

말씀에서 ‘’는 진리를 표상하거나, 또는 거짓을 표상합니다. 비둘기같이 깨끗하고 순결한 새는 진리를 뜻하고, 올빼미나 까마귀같이 추한 새는 거짓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까마귀를 내놓으매 날아 왕래하였더라’는 표현은, 진리에 대한 이해력은 열렸지만, 여전히 삶 가운데 거짓이 많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진리를 통해 사물을 보기 시작은 했지만, 아직도 거짓된 말이나 행동을 많이 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진리는 일반적인 진리가 있고, 그 각각의 일반적인 것을 구성하는 수많은 개별적인 진리들이 또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일반적인 진리가 있고, 그것을 위해 삶의 각종 상황에서 적용해야 할 개별적인 진리들이 따로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웃을 사랑하는 방법이 모든 상황에서 똑같지 않은 것이지요. 때로는 따뜻하고 부드러워야 하지만, 때로는 엄하고 냉정해야 할 때도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영적 지성이 완전히 열리기 전에는, 지금은 진리라 믿고 행동하는 일들이 시간이 흘러 보면 사실은 진리가 아니고 까마귀로 판명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 저 개인적으로도 2025년 현 윤석열 대통령 탄핵 시국 관련, 생각나는 정말 부끄러운 일 중 하나는, 과거 박근혜 대통령 탄핵 때, 저는 적극적이지는 않았지만, 레거시 신문과 방송, 특히 중앙일보와 JTBC에서 떠드는 내용들을 고스란히 받아들여 박근혜 대통령 탄핵에 대해 찬성하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너무 믿고 지지했던 터라 그랬는지 그에 비례하여 굉장히 분노했지요.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조작으로 판명난 지금은... 정말 부끄럽고 미안하고 죄송하고... 아, 나이를 헛먹었구나 싶습니다. 생각하면 참 귀가 얇았었지요. 그래서 더더욱 이번에는 정말 실수하지 말아야지 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감각이 아닌, 주님의 진리로 세상을 보아야 한다는 위 말씀이 깊이 가슴에 와닿습니다.

 

본문에 ‘까마귀를 내놓으매 날아 왕래하였더라’는 그런 경우를 말하는 것입니다.

 

8그가 또 비둘기를 내놓아 지면에서 물이 줄어들었는지를 알고자 하매 9온 지면에 물이 있으므로 비둘기가 발붙일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와 그에게로 오는지라 그가 손을 내밀어 방주 안 자기에게로 받아들이고

 

까마귀가 거짓을 뜻한다면 ‘비둘기’는 신앙의 진리를 뜻합니다. 신앙의 진리란, 신앙인들이 삶의 원리로서 받아들인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방주 밖으로 비둘기를 내놓는 것은 신앙인들이 진리를 따라 체어리티의 삶을 사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비둘기가 발붙일 곳을 찾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진리가 의지 안에 아직 완전히 뿌리를 내리지 못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머리로만 이해하던 진리가 가슴으로 내려오기는 했는데, 가슴에 아직 완전히 정착하지는 못한 상태입니다. 그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진리를 따라 선을 행하기는 하는데, 제힘으로 한다 생각하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선을 행하는 그 공로를 주님께 돌리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 돌리는 것이지요. 그것이 비둘기가 방주로 돌아오는 것이고, 그때 노아가 손을 내밀어 비둘기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여기서 ‘’은 인간의 능력을 뜻합니다. 이와 같이 거듭나기 시작하는 단계에서는 진리에 따라 선을 행하기는 하는데, 자칫 제힘으로 행한다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건, 인간의 힘으로는 선을 행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주님께서 선한 마음을 주셔야 합니다. 그래야 겸손하게 선을 행할 수 있습니다.

 

※ 주님은 그런 걸 다 아시면서도 그냥 허락하십니다. 사람이 거듭남의 초기 단계에서는 저 정도가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요, 전부이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마치 어린 손주들이 무슨 짓을 해도 다 이쁜 짓으로 여겨 받아주는 것처럼 말입니다. 아직 어린 손주들에게 무슨 성숙한 태도를 기대하는 자체가 좀 이상하지 않겠습니까?

 

10또 칠 일을 기다려 다시 비둘기를 방주에서 내놓으매 11저녁 때에 비둘기가 그에게로 돌아왔는데 그 입에 감람나무 새 잎사귀가 있는지라 이에 노아가 땅에 물이 줄어든 줄을 알았으며

 

말씀에서 ‘칠 일’은 거룩한 것을 뜻하고, 거룩한 것이란 이웃 사랑의 삶을 말합니다. 따라서 칠 일을 기다려 다시 비둘기를 방주에서 내놓았다는 것 역시 계속 이웃 사랑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녁에 비둘기가 돌아왔습니다. 비둘기는 돌아오지 말아야 합니다. 비둘기가 돌아오는 것은 이웃을 위해 한 일을 주님께 돌리지 않고, 자기 공으로 돌리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이때 비둘기 입에 감람나무 잎이 물려 있습니다. ‘감람나무’는 체어리티의 삶을 뜻하고, ‘’은 진리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비둘기가 감람나무 잎을 물고 왔다는 것은 체어리티의 삶을 통해 새로운 진리를 깨닫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이 상태는, 노아가 단순히 손을 뻗쳐 비둘기를 받아들이는 것보다는 좀 더 거듭난, 좀 더 성숙한 상태입니다. 그럼에도 비둘기가 돌아왔다는 것은 그가 여전히 선한 일을 하고 그 공을 완전히 주님께 돌리지는 않고 있는 것입니다. 거듭나는 사람이라고 해서 항상 겸손할 수는 없습니다. 때로는 자신을 내세울 때가 있지요. 그런 때를 말씀에서는 ‘’이라고 합니다. 밤은 마음에 사랑이 없는 때입니다. 그래서 그때는 주님이나 이웃 앞에서 겸손하지 못하며, 그래서 본문에는 비둘기가 저녁때 돌아왔다고 한 것입니다.

 

12또 칠 일을 기다려 비둘기를 내놓으매 다시는 그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더라

 

노아는 칠 일을 기다려 다시 비둘기를 날려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칠 일을 기다려 비둘기를 날려 보내는 것은 계속해서 거룩한 체어리티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비둘기가 돌아오지 않는 것은, 자기가 한 모든 선한 일의 공을 이제는 온전히 주님께 돌리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렇게 해서 노아는 방주 밖으로 나오게 됩니다. 방주 밖에는 더 이상 물이 없습니다. 그것은 거듭나는 사람의 말과 행동에 거짓이 없는 것을 뜻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모진 시험을 겪은 다음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노아의 이야기를 말씀드렸습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주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시는 과정이 나오는데, 하나의 과정이 끝날 때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새로운 ‘아침’을 맞으려면 반드시 ‘저녁’이라는 상태가 선행된다는 말입니다. ‘저녁’은 자기 본성의 상태, ‘아침’은 주님의 상태, 곧 자기 본성을 떠나 주님으로 충만한 상태를 말하지요. 그동안 새 예배당을 지으면서 우리도 이런 수많은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는 우상향 상태를 반복했습니다. 새해를 맞으면서 이제 그 끝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말씀에서 ‘’은 시험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 시험을 허락하시는 목적은 겉 사람을 낮추기 위해서입니다. 겉 사람이 낮아지지 않으면 속 사람에게 복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험이 끝나더라도 바로 사람이 바뀌지는 않습니다. 홍수 후 땅이 서서히 마르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도 서서히 변합니다. 시험이 끝난 후, 변화의 첫 단계를 말씀에서는 산봉우리가 보이고 방주의 창이 열리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그것은 자기만 알던 사람이 이웃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고, 이웃을 사랑하는 만큼 진리에 대한 이해력이 깊어지는 것을 나타냅니다. 변화의 두 번째 단계는 까마귀가 날아다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리에 따라 비로소 체어리티의 삶을 살기 시작했지만, 겉과 속이 아직 같지는 않은 것입니다. 그것이 까마귀가 날아다니는 모습입니다. 변화의 세 번째 단계는 방주 밖으로 날려 보낸 비둘기가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비둘기가 돌아오는 것은 진리에 따라 계속 체어리티의 삶을 살면서, 그러나 동시에 그 공을 주님께 돌리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 돌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진정한 선이 아닙니다. 변화의 마지막은 비둘기가 돌아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든 선의 공로를 이제는 온전히 주님께 돌리는 상태를 의미하지요. 그때 비로소 노아는 방주 밖으로 나와 땅을 밟습니다. 그것은 신앙인들의 겉 사람 안에 진정한 교회가 세워지는 것을 뜻합니다. ‘’은 겉 사람, 또는 교회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작년 한 해 동안 우리에게도 많은 시련이 있었습니다. 그 모든 일들을 잘 견디고 이기신 성도님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어려운 가운데서도 낙심하지 않게 하시고, 아름다운 성전을 허락하신 주님께 모든 영광을 돌립니다. 새해에는 노아가 방주에서 나오는 것처럼 우리 교회가 매일 새로워지기를 바랍니다. 성도들님들의 가정에도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가득하시길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창1:5)

 

아멘

 

2019-01-06(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5-03-09(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03-09(D1)-주일예배(2588, 창8,5-12), '노아가 방주에서 내리기 전 보인 일련의 행동들의 속뜻'.pdf
0.45MB
축도2025-03-09(D1)-주일예배(2588, 창8,5-12), '노아가 방주에서 내리기 전 보인 일련의 행동들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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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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