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가랴의 예언 (2)

 

 

76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가서 그 길을 준비하여 77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78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79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 80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 (눅1:76-80)

 

 

오늘 말씀드릴 내용은 누가복음 1장 76절에서 80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지난 시간에 이어 사가랴의 예언 나머지 부분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가랴는 글자의 뜻으로 보면 침례(세례) 요한(John, the Baptist)의 아버지이지만, 속뜻으로는 주님께서 새로운 말씀을 선포하시기 위해 선택한 사람을 나타냅니다. 말씀을 위해 주님께서 선택하시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예를 들면, 요한계시록을 쓴 요한 같은 사람이고요, 그리고 말씀의 내적 의미를 밝히기 위해 택하신 주님의 종 스베덴보리 같은 사람일 것입니다.

 

※ 본래 ‘침례(浸禮) 요한’이라는 표기가 맞지만, 현 신약 성경에 ‘세례(洗禮) 요한’으로 되어 있어, 혼란을 피하기 위해 이후 ‘세례 요한’으로 하겠습니다. 헬라어 원전엔 ‘밥티조’, 곧 ‘침례’가 맞습니다.

 

말씀을 세상에 내놓기 위해 주님께서 선택하시는 사람들에 대해 계시록 1장 1절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계1:1)

 

그러니까 주님으로부터 말씀의 계시를 받는 사람은 ‘요한’이라는 이름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요한’은 속뜻으로 보면 사랑의 선 안에 있는 사람들(those who are in the good of love)을 나타냅니다.

 

※ 각 이름마다 그에 상응하는 속뜻이 있는데요, 가령, ‘베드로’(Peter)는 신앙(faith)을, ‘야고보’(James)는 체어리티(charity)를, 그리고 ‘요한’(John)은 체어리티의 선이나 사랑의 선을 상응, 표상하는 식입니다.

 

※ 아래 글은 말씀에 나오는 ‘이름’ 관련, 매우 참신한 내용이라 소개합니다.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에서 인용합니다.

 

나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다윗, 그리고 사도들이 방법을 통하지 않고, 자비에 의해 천국에 들어갔는지 천사들에게 물어보았다. 천사들은 대답했다. 그들 중 한 사람도 그렇게 천국에 간 사람은 없고, 모두 이 세상에서의 삶에 의해서 천국에 들어갔다. 우리는 그 사람들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다. 그들이라고 다른 사람보다 더 존경받지 않는다. 그들이 말씀 안에 영광스럽게 기록되어 있는 것은, 그들이 내적 의미로 주님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주님의 신성과 신적 인성을 의미하고, 다윗은 주님의 신적 왕권을 의미한다. 사도들은 주의 신적 진리들을 의미한다. 사람이 말씀을 읽을 때, 천사들은 이 사람들 개인에 대해서는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 그들의 이름은 천국에 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신 그 이름을 천사들은 방금 설명한 대로의 주님으로 이해하며, 따라서 천국에 있는 말씀에는 그런 이름들이 나오지 않는다. 천국에 있는 말씀은 이 세상에 있는 성경 말씀의 내적 의미이기 때문이다. (HH.526:4, 김은경 역) //

 

새로운 말씀을 계시받는 사가랴 역시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선 안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요, 사가랴가 사랑의 선 안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은,

 

5유대 왕 헤롯 때에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 한 사람이 있었으니 이름은 사가랴요 그의 아내는 아론의 자손이니 이름은 엘리사벳이라 6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 7엘리사벳이 잉태를 못하므로 그들에게 자식이 없고 두 사람의 나이가 많더라 8마침 사가랴가 그 반열의 차례대로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의 직무를 행할새 (눅1:5-8)

 

위 본문에서 그를 의인 또는 제사장이라 한 것을 봐도 알 수 있는데요, 왜냐하면 말씀에서 의인이나 제사장은 사랑의 선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가랴가 오늘 예언하는 것은 주님에 의해 선택되어 말씀의 계시를 받은 사람이 이웃들을 가르친다는 뜻입니다.

 

지난 시간에 사가랴가 예언한 내용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세상에 오실 주님에 대한 예언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직접 세상에 오신다는 것과, 그리고 그것은 아주 오래전 태고교회 때부터 주님께서 인류에게 약속하신 일이라는 것, 그리고 주님이 오시는 목적은, 인간을 악과 거짓에서 구하시고, 그러므로 그들이 성결과 의로 주님을 섬기게 하심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계속되는 예언에서는 주님이 오시는 길을 준비할 한 선지자가 있다고 합니다. 그 선지자가 누구입니까? 사가랴가 낳은 아이 요한, 즉 새로운 말씀입니다. 본문 76절입니다.

 

76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준비하여

 

이 아이는 물론 세례 요한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가랴는 요한에 대해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했고, 그가 먼저 세상에 와서 주님의 길을 준비한다고 합니다. 말씀에서 선지자는 교리를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추상적인 의미로는 교회의 교리 자체이신 주님을 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높은 의미에서 선지자는 바로 주님이십니다. 그것에 대해 세례 요한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요한복음 1장 21절로 27절까지의 말씀입니다.

 

21또 묻되 그러면 누구냐 네가 엘리야냐 이르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22또 말하되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23이르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24그들은 바리새인들이 보낸 자라 25또 물어 이르되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세례를 베푸느냐 26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27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하더라 (요1:21-27)

 

요한은 자신에 대해 자기는 그리스도도 아니고, 선지자도 아니라고 합니다. 진정한 선지자는 주님이시며, 자신은 그저 주님의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오늘 본문에서는 요한을 가장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그가 말씀이신 주님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말씀을 표상하는 것은 그가 낙타의 털로 만든 옷을 입고, 메뚜기와 꿀을 먹었다는 성경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는데요, 말씀에서 털이나 메뚜기는 가장 낮은 차원의 진리인 글자의 뜻으로서, 말씀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털이나 피부는 사람의 가장 바깥쪽에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바깥쪽에 있는 것은 영적으로는 가장 낮은 차원의 것을 나타냅니다. 다시 말하면, 자연적이고 감각적인 것을 나타내지요. 그래서 요한은 가장 낮은 차원의 진리인 글자로 표현된 말씀을 표상합니다. 그러면 꿀은 무엇일까요? 꿀은 말씀의 진리를 배울 때 느끼는 내적 기쁨입니다. 외적인 기쁨과 내적인 기쁨이 있습니다. 외적인 기쁨은 어떤 것입니까? 진리를 이해하고, 그것을 깨달을 때 느끼는 기쁨이 외적인 기쁨입니다. 그러면 내적 기쁨은 무엇입니까? 내적인 기쁨은 진리를 삶으로 살아낼 때 느끼는 기쁨입니다. 진리를 삶으로 살아낼 때, 주님으로부터 평화가 오고, 안정감이 오고, 그리고 자유가 옵니다. 그것이 바로 내적 기쁨입니다.

 

그렇다면 말씀을 표상하는 요한이 주님의 길을 준비한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다음은 ‘천국의 비밀’ 8028번 글입니다.

 

천사들이 오려고 할 때, 먼저 한 영을 보내 길을 준비하는 것은 천국의 질서이고, 그로 말미암은 세상의 질서이다. 그는 사람들의 두려움을 자극하고 권고하며, 그렇게 해서 그들이 천사들을 정중하게 받아들이도록 만든다. (이순철 역) From this it could be seen how the case is with the order in heaven, and from this in the world; namely that when angels are about to come, a spirit is sent before to prepare the way, and that he excites fear, and gives admonition to receive the angels courteously; (AC.8028)

 

그러니까 주님께서 직접 오시거나 아니면 천사들을 통해 오실 때, 그때 어떤 영을 보내 주님을 정중하게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은 주님의 질서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왜 그런 질서를 만드셨을까요? 주님이 진리 자체이신 분이라면 천사는 주님으로부터 진리를 받아 전하는 진리의 대언자입니다. 그래서 천사나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거나 함부로 대하면, 그것은 진리에 대항하는 것이 되고, 그래서 그 사람에게는 크나큰 재앙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인간에 대한 무한한 사랑에서 나온 질서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세례 요한, 즉 말씀을 세상에 먼저 보내 당신의 길을 예비하게 하신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사람들은 주님에 대해 아무 것도 몰랐을 것이고, 그래서 주님을 함부로 대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말라기서 4장 5, 6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5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6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말4:5-6)

 

주님은 인간이 주님께로 마음을 돌리지 않는다고 해서 저주를 내리시는, 그런 악한 신이 아니십니다. 인간이 주님에 대해 악을 행함으로 스스로 저주를 자초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질서입니다. 주님은 그것을 염려하셔서 요한을 먼저 보내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요한을 가리켜 엘리야라 한 것은 엘리야가 살아 돌아온다는 그런 뜻이 아니고요, 요한과 엘리야는 모두 말씀으로서 주님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방법은 어떤 것입니까? 77절입니다.

 

77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보통 말씀에서는 ‘백성’과 ‘나라’라는 말을 함께 사용합니다. ‘백성’은 진리를, ‘나라’는 선을 뜻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그것은 진리와 선의 결합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위 구절에서는 그냥 ‘주의 백성’이라고만 말합니다. 그 이유는, ‘요한’으로 표상되는 말씀의 역할은 사람들을 거듭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 주님을 믿도록, 주님을 신앙하도록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 저는 원본의 ‘믿음’을 가급적 ‘신앙’으로 고쳐서 쓰고 있습니다. ‘오직 믿음’ 교리에 익숙하신 분들을 위해서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스베덴보리의 많은 저작들을 보아도 대부분 ‘faith’를 쓰기 때문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믿음’ 하면 왠지 ‘오직 믿음’이 생각나기 때문입니다. 물론, 문맥에 따라서는 ‘믿음’을 써야 할 때도 있는데, 그럴 땐 원본 그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요한이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마3:11)

 

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물은 신앙의 진리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요한의 세례는 말씀을 통해 인류에게 신앙을 심어주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거듭나는 삶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그 신앙 가운데로 주님이 오셔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신앙 안으로 선을 동반한 진리가 흘러 들어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불은 사랑이나 선을 뜻하기 때문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오늘 본문에서는 주의 백성과 나라라 하지 않고, 그냥 ‘주의 백성’이라고만 말한 것입니다. ‘나라’까지 말씀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주님뿐이시기 때문입니다. ‘’은 진리이지만, ‘성령과 불’은 거기에 담기는 선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들이 죄 사함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 하지 않고, 그들이 ‘죄 사함으로 말미암은 구원의 지식을 알게 한다’라고 했는데요, 이 ‘구원의 지식’(the knowledge of salvation)이라는 표현은 영어 성경에 나오는 표현입니다.

 

※ 위 77절 영어 번역은, to give the knowledge of salvation to His people for the forgiveness of their sins, 입니다.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요한은 사람들에게 신앙을 심어주는 역할만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신앙의 핵심인 죄 사함과 구원의 문제는 주님 당시 유대인들에게도 매우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유대인들이 정결 예식을 중요하게 여긴 것도 그래서입니다. 그뿐 아니라 유대인들은 생활 속에서도 늘 부정한 것을 물로 씻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다 생각한 것이지요. 그래서 주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식사하려고 하자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노골적으로 제자들을 비난한 것입니다.

 

죄라는 게 물로 씻어지듯 순식간에 씻어진다고 믿는 것은 저 유대교회 유대인들뿐 아니라 오늘날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주님에 대한 신앙 고백만으로도 죄가 씻어진다고 가르칩니다. 심지어는 임종 시, 주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면 그는 죄 사함을 받고 구원받는다 가르치는데요, 그것은 저 유대인들의 생각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죄라는 것은 신앙의 고백만으로는 절대로 씻어지지 않습니다. 신앙과 그에 따른 삶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요한복음 4장 23절에서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요4:23)

 

이 말씀에서 진리는 신앙을 뜻합니다. 그리고 영은 신앙에 따른 삶을 뜻합니다. 아래는 이와 관련된, ‘천국의 비밀’ 5398번 글입니다.

 

오늘날 교회에 속한 사람들이 거듭남에 대해 거의 모르는 까닭은, 그들이 죄 사함과 의롭게 되는 것에 대해 말은 많이 하지만, 그럼에도 죄는 순간적으로 씻어진다고 믿으며, 또 어떤 사람은 물로 몸의 더러운 것이 씻어지듯 그들도 그렇게 씻어질 것이라고 믿으며, 그리고 사람은 신앙만으로, 그리고 순간의 확신으로 의롭게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죄는 어떤 방법으로도 씻기지 않으며, 사람이 주님에 의해 선 가운데 있을 때 떨어져 나가거나 거절되어 한 옆으로 밀려나게 되고, 그렇게 해서 기승을 부리지 못할 뿐이다. 계속해서 악을 내쳐야 한다. (이순철 역) At the present day they who are of the church know so little about regeneration that it is scarcely anything. They do not even know that regeneration goes on through the whole course of life of one who is being regenerated, and that it is continued in the other life; or that the arcana of regeneration are so innumerable that scarcely a ten thousandth part of them can be known by the angels, and that those they do know are what effect their intelligence and wisdom. The reason why they who are of the church at this day know so little about regeneration is that they talk so much about remission of sins and about justification, and believe that sins are remitted in a moment, and some that they are wiped away like filth from the body by water, and that man is justified by faith alone or by the confidence of a single moment. The reason why the men of the church so believe is that they do not know what sin or evil is. If they knew this, they would know that sins can by no means be wiped away from anyone, but that when the man is kept in good by the Lord they are separated or rejected to the sides so as not to rise up, and that this cannot be effected unless evil is continually cast out, and this by means which are unlimited in number, and for the most part unutterable. (AC.5398)

 

그러므로 진정한 신앙이란 이러한 것들을 알고 시인하는 것입니다. 신앙 고백만으로 순간적으로 죄가 씻어진다고 믿는 것은 참 신앙이 아닙니다. 악의 유혹을 끊임없이 거절함으로써 중심에 있던 악들이 옆으로 밀려나 다시는 기승을 부리지 못하는 상태, 그것이 죄 사함이라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한 신앙이 없다면 우리는 매일 죄를 지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나아가 ‘주님! 제가 주님을 믿습니다’라고 하면서 구원받았다고 믿을 것입니다. 그런데 진정한 신앙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78, 79절에서는 죄 사함과 구원에 대한 올바른 신앙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시는지를 말합니다.

 

78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79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

 

먼저 78절,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 죄 사함과 구원에 대해 바로 아는 것이 주님의 무한한 사랑과 자비에서 비롯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없었다면, 우리는 주님을 알 수도 없었을 것이고,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말씀을 통해 구원의 길이 어떤 것인지를 알려주셨는데요, 바로 그것이 주님의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는 그 모든 것이 ‘우리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라고 합니다. 말씀에서 해는 주님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래서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 믿는 사람들, 곧 주님을 신앙하는 사람들에게 임재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각 사람에게 오셔서 하시는 일은 어떤 일입니까?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를 일으키시고 그들의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오시기 전에는 모두가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었다’고 하십니다. 말씀에서 ‘앉아 있다’는 표현은 사람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의지의 상태, 즉 그의 생명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생명이신 주님이 각 사람의 신앙 가운데로 오시기 전에는 그의 생명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인데요, 그것을 말씀에서는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말씀을 통해 주님을 믿기 시작할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신다고 하세요. 여기서 발은 사람의 가장 아래쪽에 있기 때문에 자연적 삶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평화는 주님과 하나가 될 때 느끼는 내적 기쁨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신다는 것은, 우리의 자연적 삶 가운데 주님이 계신다는 것이고요, 그로 말미암아 천국의 기쁨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통해 주님을 믿을 때, 그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신다고 하세요. 그리고 자연적인 삶 안에서 역사하셔서 우리를 천국의 기쁨 가운데로 인도하신다고 하십니다.

 

끝으로 80절입니다.

 

80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

 

여기서 이스라엘은 영적인 사람들, 또는 영적인 교회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는 그냥 요한이 장성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진리가 그것을 받아들인 사람들 안에서 성장하는 것을 말합니다. 말씀의 진리가 성장한다는 것은, 말씀이 각자의 내면에서 신실한 신앙이 되는 것이고요, 그리고 그 신앙이 삶 가운데 뿌리를 내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오늘 말씀에서는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사람들의 내면에 교회가 세워집니다. 그러기 전에는 교회가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는 ‘아이가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말씀의 진리를 받아들인 다음, 그것을 삶으로 옮기기 전에는 아직 이스라엘, 즉 교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직은 교회가 아니라 빈 들, 그러니까 광야와 같다는 것이지요. 신앙의 지식은 있을지 모르지만, 진정한 진리는 아직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는 ‘아이가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난 시간과 오늘, 두 번에 걸쳐 사가랴의 예언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한 번은 세상에 오실 주님에 대해서, 그리고 또 한 번은 세례 요한에 대한 예언이었습니다. 주님 말씀에 의하면, 요한은 마지막 선지자였고, 오리라 한 엘리야였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엘리야와 마찬가지로 말씀이신 주님을 표상했으며, 또한 요한 이후에는 다시는 선지자가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주님께서 사람들에게 직접 오셔서 구원을 섭리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요한이 세상에 온 목적은,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길을 예비한다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말씀으로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이고요, 그렇게 해서 그들의 마음을 주님께로 돌리는 일입니다. 주님은 오래전부터 요한이 만들어 놓은 길을 통해서 세상을 구원하실 계획을 세우셨던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읽다 보면 나 자신의 영적 상태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즉 아직 요한의 가르침 아래 있는 상태인지, 아니면 본격적으로 주님의 인도를 받고 있는지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아직 요한의 가르침을 받고 있다면 아직도 신앙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거듭남의 상태로 나아가야만 합니다. 다시 말해서 진리를 아는 데만 그쳐서는 안 되며, 그것을 가지고 자기 안의 악과 거짓과 싸워 이겨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 안에서 요한의 때가 물러가고 주님의 때가 열립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우리 성도님들과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15마침내 위에서부터 영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리니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며 아름다운 밭을 숲으로 여기게 되리라 16그 때에 정의가 광야에 거하며 공의가 아름다운 밭에 거하리니 (사32:15-16)

 

아멘

 

원본

2016-07-24(D1)

청주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3-03(D6)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007. 2023-03-03(D6)-매일예배(2424, 눅1,76-80), '사가랴의 예언 (2)'.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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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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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가랴의 예언 (1)

 

 

67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예언하여 이르되 68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며 69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70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71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일이라 72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73곧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라 74우리가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받고 75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 (눅1:67-75)

 

 

사가랴는 아이가 태어난 지 팔 일째 되는 날, 아이에게 할례를 행하고, 아이의 이름을 요한이라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의 혀가 풀리면서 다시 말을 하기 시작했는데요, 여기까지가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내용입니다. 그리고 오늘은 그 이어지는 본문 67절로 75절입니다.

 

67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예언하여 이르되

 

아시는 것처럼, 사가랴는 천사를 만난 다음 한동안 말을 하지 못했는데요, 천사가 전하는 말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랬다가 아이의 할례 때, 서판에 아이의 이름을 요한이라 적은 후에야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다시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주께서 천사를 통해 하신 말씀을 온전히 믿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제 이렇게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예언을 시작합니다. 그동안 사가랴에게 일어났던 일들은 영적 의미로 어떤 뜻일까요? 그것에 대해 우리는 지난 시간에 충분히 말씀을 나눴는데요, 그동안 사가랴에게 일어났던 모든 일은 그 속뜻으로는 사가랴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모든 영적 변화들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으로부터 새로운 진리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영적 변화들인 것인데요, 이를테면, 사가랴-엘리사벳 부부에게 아이가 생겼다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새로운 말씀을 받는 것이며, 말씀을 통해 새로운 신앙이 형성되는 것을 의미하고, 그리고 해산할 기한이 차서 아들을 낳는 것은 신앙의 결실을 보는 것, 다시 말하면, 신앙으로 사는 것이며, 그렇게 해서 그의 내면에 선을 쌓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사가랴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예언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그냥 사가랴라 하지 않고, ‘그 부친 사가랴’라 하는데요, 이는 새삼스럽게 사가랴가 요한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밝히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 무엇일까요? 말씀에서 아버지는 여러 가지 의미로 쓰이는데, 여기서는 선을 뜻합니다. 아버지가 선을 뜻하는 까닭은, 선으로부터 진리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태양의 열기로부터 빛이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선이 진리보다 앞선다는 것이죠. 그래서 말씀에서는 선을 아버지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본문에서 ‘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라는 표현은, 사가랴로 표상되는 사람들에게 있는 선 가운데로 진리가 흘러들어와 충만한 상태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때 사가랴는 예언을 시작합니다.

 

신앙생활은 이렇게 처음 진리를 받아들이게 되면, 그다음에는 진리를 바탕으로 선을 획득하는 과정이 따르고요, 그러고 나면, 다시 그 선을 통해 이번에는 진리를 획득하는 과정이 시작됩니다. 그것은 그동안 출애굽기 말씀을 공부하면서 배웠던 사실입니다.

 

※ 이순철 목사님은 2016년 당시 청주 새 교회 담임을 하시면서 격주로, 그러니까 누가복음과 출애굽기를 격주로 강해하셨는데요, 위 말씀은 이런 배경의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처음에는 진리의 시험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시험이 끝나자 곧 선의 시험이 왔고요, 그러고 나서 다시 진리의 시험이 시작됐습니다. 이렇게 진리의 시험과 선의 시험이 반복되면서, 주님으로부터 한번은 진리를 획득하고, 한번은 선을 획득하는 과정이 계속됩니다. 그런 식으로 내면에서 끊임없이 영적 변화가 일어나는 사람들, 즉 사가랴와 같은 사람들에게 주님은 성령으로 함께 하시고요, 그에게 예언을 하도록 만드십니다. 그래서 본문에는 ‘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예언했다’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사가랴의 예언은 어떤 것입니까? 사가랴의 예언은 한마디로, 성령이 사가랴의 입을 통해서 세상에 오실 주님을 증언하는 것인데요, 이제 그 증언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68절입니다.

 

68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며

 

그냥 하나님을 찬송하라 하지 않고,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라 합니다. 이 말씀은 세상에 오실 주님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인정하고, 그분을 찬송하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세상에 계실 때, 당신 자신을 한 번도 여호와라고 부르신 적이 없습니다. 만약 주님께서 그렇게 부르셨다면, 주님은 아마 세상에 오신 목적을 이루시기도 전에 유대인들로부터 큰 화를 당하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여호와라 하시지 않고, 그러한 사실을 우회적으로만 밝히셨습니다. 예를 들면, 마가복음 12장 29절인데요,

 

29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30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막12:29-30)

 

여기서 ‘’라는 표현은 주님 자신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주님에 대해 ‘’라고 한 적이 별로 없습니다. 그것은 신명기 6장 4, 5절 말씀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데요, 거기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4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5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신6:4-5)

 

앞에서 마가복음 12장 29절의 말씀은 바로 이 말씀입니다. 다만 구약의 여호와라는 표현을 주님이라고 바꾼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에 오신 주님이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것이 구원을 위한 가장 첫 번째 진리이기 때문에, 오늘 사가랴는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도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69, 70절에서 사가랴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69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70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이 말씀은 모두 세상에 오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다윗의 집’은 주님이 세우실 새 교회를 나타냅니다. 왜냐하면 다윗은 진리로 세상에 오시는 주님을 표상하기 때문인데요, ‘다윗의 집’은 주님께서 새로 세우시는 교회인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의 뿔’은 진리를 통해서만 발현되는 선의 능력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주님의 전능하심을 뜻합니다. 주님은 그 전능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고자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하신 것이지요. 사가랴는 계속해서, ‘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라고 하는데요, 그렇습니다. 주님이 세상에 오시는 것은 구약의 모든 예언서에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해 일관되게 밝히신 진리입니다. 그것은 인류가 생긴 이래로 주님께서 줄곧 계획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주님께서 오셔서 이루신 일은 어떤 것입니까?

 

71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일이라

 

주님은 유대교회가 타락해 종말로 치달을 때, 그리고 교회가 만들어내는 악과 거짓 진리가 인간의 양심을 질식시킬 때, 그 악과 거짓으로부터 인간을 구해내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말씀에서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는 바로 우리 안에 있는 악과 거짓을 말합니다. 그것으로부터 주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내십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일들은 주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자비에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72절은 주님의 사랑과 자비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72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인간을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는 모든 일은 오직 주님의 자비에서 비롯되는 일이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한순간도 인간을 미워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인간은 죄를 짓거나 할 때, 주님께서 벌을 내리시지나 않을까 두려워할 때가 많은데요, 그런데 주님은 한 번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요, 인간들처럼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성을 내시거나 미워하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시고, 언제나 가엾게 여기십니다. 주님의 마음을 모르는 인간의 무지함이 가엾고요, 악과 거짓을 상대로 늘 넘어지고, 좌절하는 모습을 측은히,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언제나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며 기억하신다 하는 것입니다. ‘천국의 비밀’ 9849번 글에서는 주님이 기억하신다는 말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주님이 기억하신다는 것은 가엽게 여기시는 것이며, 그러므로 당신의 자비로 보호하시고 구해내시는 것을 뜻한다. (이순철 역) remembering,” when said of the Lord, denotes to have compassion, and thus from mercy to preserve or deliver

 

주님은 긍휼과 자비로 그렇게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겠다 하십니다. 그러면 거룩한 언약은 어떤 것입니까? 주님과 인간이 하나가 되는 것이고요, 그렇게 해서 인간을 모두 빠짐없이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73곧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라

 

여기서 ‘우리 조상’은 인류 최초의 교회인 태고교회를 말합니다. 그 교회 이름을 아브라함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말씀에서 주님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여기서 아브라함은 천적인 것, 다시 말하면, 주님에 대한 사랑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은 태고교회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태고교회 사람들은 오직 주님만 사랑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세상에 오시는 일은 오직 주님만을 사랑했던 태고교회 이래로 줄곧 주님께서 맹세하신 일입니다. 인간이 하는 맹세는 거짓이지만, 주님께서 하시는 맹세는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리입니다. 맹세라는 것은 오직 주님만이 하실 수 있으며, 그래서 오직 주님만이 진리를 맹세하실 수 있습니다. 주님은 마태복음 5장 17, 1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7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18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마5:17-18)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주님께서 세상에 오시기 전의 주님에 관한 모든 예언은 가능성으로서의 진리라는 것입니다. 잠재적으로 가능성을 열어둔 것일 뿐, 아직 실현되지 않은 진리인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세상에 오심으로 해서 그 모든 가능성이 실현되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진리는 이렇게 자연적인 이 세상에서 실현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진리는 우리 삶 가운데서, 삶의 구체적 행위 가운데서 실현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가능성으로만 남아 있을 뿐, 우리의 생명이 되지 못합니다. 주님은 세상에 오심으로써 그것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하셨는데요, 여기서 율법은 모세가 기록한 말씀이고요, 선지자는 구약의 모든 예언서를 나타냅니다. 그러니까 율법이나 선지자는 바로 주님의 말씀 전체입니다. 주님은 그 말씀의 진리를 실현키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74우리가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받고 75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

 

원수의 손’이란 조금 전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악과 거짓의 위세를 뜻합니다. ‘원수의 손’이라고 할 때, 손은 능력을 뜻합니다. 악과 거짓에게도 능력이 있습니다. 그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영적 싸움을 해 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압니다.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능력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힘만으로 대처하고자 할 때에는 누구도 이길 수 없는 무시무시한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능력 앞에서는 마치 바람 앞에 티끌처럼, 먼지처럼, 그리고 빛 앞에 짙은 어둠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처럼, 그렇게 아무 힘도 쓸 수 없는 것이 악과 거짓입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악과 거짓이 신앙인들에게 얼마나 위력적이며, 두려운 것인가를 보여주는 대목이 있습니다. 우리가 앞에서 이미 배운 것이죠.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바닷가에 진을 치고 있을 때, 앞에는 홍해가 버티고 있고, 뒤로는 애굽의 기병과 전차가 쏜살같이 쫓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우리 신앙인들은 영적 시험 가운데서 오도 가도 못하는 위기의 상황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를 압도하는 악과 거짓의 위력 앞에서 우리는 늘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런데 ‘천국의 비밀’ 2826번 글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두려워하는 것은 주님을 신뢰하지 않거나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이순철 역) to “fear” is to distrust, or not to have faith and love.

 

저는 가끔 ‘이 말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라고 속으로 외칠 때가 있습니다. ‘저는 누구보다도 주님을 믿고 사랑합니다. 다만 저 자신을 믿지 못할 뿐입니다’라고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내면 깊은 곳을 들여다보면, 아직 주님보다는 나를 더 신뢰하고, 주님보다는 세상의 감각적인 것들을 더 사랑하는 모습이 분명히 보입니다. 그때 우리는 다시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말씀입니까?’라며 절망합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께서는 ‘네가 종신토록 내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십니다. 이 말씀을 읽는 순간 너무나도 든든하고 마음에 힘이 되었습니다. ‘성결과 의로 섬긴다’는 것은 ‘신앙과 삶으로 주님을 섬기게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말씀에서 ‘성결하다’는 것은 진리, 또는 신앙에 대해 하는 말이고요, ‘의롭다’는 말은 사랑, 또는 선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결과 의로 섬기는 것, 두려움 없이 섬기는 일은 인간의 힘으로는 될 수 없고, 오직 주님께서만 하실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 일을 하시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될까요? 자기 마음속 애정을 늘 살피면서 자아가 하려는 일을 끊임없이 포기해야 합니다. 그리고 오직 주님의 말씀만 믿고 따라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난 몇 주 동안, 사가랴가 겪은 일들은 어쩌면 주님으로부터 새로운 진리의 말씀을 받아들인 사람들이면 누구나 다 겪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진리를 믿고, 그것에 따라 사는 사람들은 사가랴와 같이 성령이 함께 하시고, 예언을 할 수 있습니다. 예언이란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주님이 주신 진리를 그대로 이웃에게 전하는 일입니다. 멀리 앞을 내다보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요, 주님께서 주신 진리를 그대로 전하는 것이 예언입니다. 그런데 진리를 전하는 것이 꼭 말로 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웃을 위해 하는 모든 일 가운데 성령이 저절로 역사하시도록 하면 됩니다. 아마 그것이 사가랴가 성령이 충만한 가운데 예언하는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성령은 주님에게서 나오는 진리의 영이며, 그러므로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진리를 전하려고 하다 실패했던 지난날 여러 경험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진리가 스스로 말하도록 하지 않고, 내가 말을 했던 것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사가랴의 입을 통해 성령이 가르치신 것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세상에 오신 주님은 곧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주님과 여호와 하나님을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로 이해하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만약 그렇게 믿는다면, 우리는 두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됩니다. 그래서 결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말씀에서 아들은 진리로 세상에 오신 주님이시며, 아버지는 주님 안에 신적 선으로 존재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두 번째 예언은, 주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아주 오래전, 아담으로 상징되는 태고교회 때부터 주님께서 약속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구원의 뿔을 다윗의 집에 일으키신 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말씀하신 것이며,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그 맹세를 지키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사가랴의 세 번째 예언은,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입니다. 그것에 대해 오늘 본문에서는 ‘원수의 손에서 건지시고, 종신토록 주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 없이 섬기게 하려함이라’라고 말합니다. 저는 이 ‘종신토록’이란 말과, ‘두려움 없이’라는 말을 참 좋아합니다. 주님을 섬기는 일이 한결같지 않고, 또 늘 두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두려움이란, 주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고요, 나의 자아가 어디로 움직일지 몰라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신다고 합니다. 각 사람에게 오셔서 타고난 자아를 천국의 자아로 바꾸어 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움 없이 주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의와 성결로 주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사가랴를 통한 성령의 은혜가 우리 성도님께도 꼭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사43:1)

 

아멘

 

 

원본

2016-07-10(D1)

청주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3-02(D5)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006. 2023-03-02(D5)-매일예배(2423, 눅1,67-75), '사가랴의 예언 (1)'.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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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판을 달라 하여 그 이름을 요한이라 쓰매

 

 

57엘리사벳이 해산할 기한이 차서 아들을 낳으니 58이웃과 친족이 주께서 그를 크게 긍휼히 여기심을 듣고 함께 즐거워하더라 59팔 일이 되매 아이를 할례 하러 와서 그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사가랴라 하고자 하더니 60그 어머니가 대답하여 이르되 아니라 요한이라 할 것이라 하매 61그들이 이르되 네 친족 중에 이 이름으로 이름한 이가 없다 하고 62그의 아버지께 몸짓하여 무엇으로 이름을 지으려 하는가 물으니 63그가 서판을 달라 하여 그 이름을 요한이라 쓰매 다 놀랍게 여기더라 64이에 그 입이 곧 열리고 혀가 풀리며 말을 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니 65그 근처에 사는 자가 다 두려워하고 이 모든 말이 온 유대 산골에 두루 퍼지매 66듣는 사람이 다 이 말을 마음에 두며 이르되 이 아이가 장차 어찌 될까 하니 이는 주의 손이 그와 함께 하심이러라 (눅1:57-66)

 

창세기 30장 1절을 보면, 야곱의 아내 라헬이 아들을 낳지 못해 남편에게,

 

라헬이 자기가 야곱에게서 아들을 낳지 못함을 보고 그의 언니를 시기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내게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 (창30:1)

 

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아시는 것처럼 야곱은 형 에서에게 팥죽 한 그릇을 주고, 장자의 축복을 빼앗았습니다. 그러자 에서는 너무 분해 야곱을 해치려고 했고, 야곱은 외삼촌 라반에게로 피신, 도망을 가야 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외삼촌의 딸들인 레아와 라헬을 차례로 아내로 맞이하였습니다. 야곱은 레아보다는 동생 라헬을 더 사랑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헬은 아이를 낳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라헬은 ‘내게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 하는 것입니다. 라헬의 고민이 얼마나 깊은지를 알 수 있습니다. 말씀에서 라헬은 ‘내적 진리에 대한 사랑’(the affection of interior truth)(AC.3782, 창29:6)을 뜻한다고 새 교회 가르침에는 나와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말씀의 내적 의미를 배우기를 좋아하고, 또 실천하려고 애쓴다면 우리 안에는 라헬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라헬이 아이가 없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아이가 없다는 것은 진리의 결실이 없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말씀의 내적 진리를 알기는 아는데, 아직 그 진리에 따라 제대로 살지는 못한다’는 뜻입니다. 진리에 대한 애정이 큰 사람일수록 그것을 제대로 살아내지 못할 때 상심이 큽니다. 그것은 새 교회 성도님들이라면 다 경험해 보신 일일 것이고, 지금도 그런 고민을 안고 계실 것입니다. 그것이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엘리사벳 역시 라헬이 그랬던 것처럼 오랫동안 아이가 없었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엘리사벳의 속뜻은 ‘주님을 많이 사랑하지만, 그러나 타락한 교회에 몸담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녀에게는 참된 진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진리를 올바로 가르치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진리에 따라 사는 것이 불가능하겠지요. 진리를 모르니까요. 따라서 믿음, 곧 신앙의 열매를 맺는 것 또한 어렵습니다. 그것을 말씀에서는 엘리사벳이 오랫동안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러므로 엘리사벳 역시 여러 가지로 고민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 사정을 모두 아시는 주님께서 이제 잘못된 교회 안에 있는 엘리사벳과 같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말씀을 주시기로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엘리사벳이 낳는 아이는 바로 ‘새 교회를 위한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57엘리사벳이 해산할 기한이 차서 아들을 낳으니

 

이 말씀의 의미는 앞에서 말씀드린 것과 같이 타락한 교회 안에 있지만, 그럼에도 진리와 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새 교회의 말씀을 주시는 것이며, 그들이 그 말씀에 따라서 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해산할 기한이 차서’는 무슨 뜻일까요? 말씀을 받아들였다고 해서 그것이 바로 그 사람의 신앙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누가 나에게 새 교회 말씀을 전한다고 해서 덥석 받아들이지는 않지 않습니까? 여러 가지로 생각하고 이해할 것이 있고, 그러므로 신앙으로 받아들이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믿는다고 해도 그것을 삶으로 살아내기까지 또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립니까? 그것이 바로 ‘해산할 기한’입니다. 그러므로 아들을 낳는 것은 비로소 그 말씀이 우리 안에서 살아있는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58이웃과 친족이 주께서 그를 크게 긍휼히 여기심을 듣고 함께 즐거워하더라

 

여기서 ‘이웃과 친족’은, ‘엘리사벳과 비슷한 종류의 선과 진리 안에 있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것이 그 속뜻입니다. 선이 비슷하다는 것은 애정이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좋아하는 일이 저마다 있듯, 교회를 섬긴다고 해도 저마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이 따로 있는데요, 그 좋아하는 비슷한 점이 바로 선이 비슷한 것입니다. 그러면 진리가 비슷하다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진리가 비슷하다는 것은, 예를 들어, 어떤 두 사람이 있는데, 교회를 섬김에 있어 하는 일이 같습니다. 그런데 같은 일을 하더라도 사람에 따라 일하는 방법이나 순서 같은 것이 다 다릅니다. 그런데 개중에 그 방법이나 질서가 같은 사람들이 있어요. 그러니까 서로 잘 맞는 것이죠. 그런 것이 진리가 비슷한 것입니다. 그러면 ‘주께서 그를 크게 긍휼히 여기심을 듣고’는 무슨 뜻일까요? 주께서 그를 크게 긍휼히 여기셨다는 것은, ‘주께서 엘리사벳에게 새로운 말씀을 주신 것’을 의미하고요, 그걸 들었다는 것은 ‘그들, 즉 엘리사벳과 비슷한 종류의 선과 진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 역시 그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뜻입니다. ‘듣고’는 순종한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즉 그들도 새로운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여 거기에 순종하는 삶을 살았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웃과 친족이 주께서 그를 크게 긍휼히 여기심을 듣고 함께 즐거워하더라’라는 이 말씀은 속뜻으로는 엘리사벳으로 표상된 사람들에게 주어진 새로운 말씀이 비슷한 선 안에 있는 사람들을 통해 점점 퍼져나간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그런 식으로 신념과 애정이 비슷한 사람들을 통해 끊임없이 퍼져나갑니다. 마치 하나의 물결이 또 다른 물결을 만들어내고, 그것이 또 새로운 물결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게 끊임없이 퍼져나갑니다. 그것이 ‘함께 즐거워하더라’의 의미입니다.

 

59팔 일이 되매 아이를 할례하러 와서 그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사가랴라 하고자 하더니

 

팔 일’은 영적으로 하나의 상태가 끝나고, 다시 새로운 상태가 시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일주일은 하나의 상태가 처음부터 끝까지 완성되는 것을 의미하고, 팔 일째는 그 일주일이 끝난 다음 첫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팔 일째가 되기 전 일주일이란 기간은 사람들이 새로운 말씀을 온전히 받아들이기까지의 기간이고요, 그리고 팔 일째 되는 날은 그들의 영적 상태가 한 단계 올라서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새로운 진리를 온전히 받아들이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동안 그가 가지고 있던 잘못된 진리들을 모두 버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새로운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을 보더라도 이 진리를 받아들이기 전에 진리라고 믿었던 것들이 많았는데요, 그러니 그걸 버리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었겠습니까?

 

저 역시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는데요, 그러니까 장로교 통합 측에서 소위 모태신앙으로 출발, 고등학교 때 침례교회를 다니게 된 저는, 그러고는 결국 침례교 신학을 하고, 침례교회 목사가 된 저는 오십 대 후반까지 쌓아온 모든 신앙의 관계를 접어야 하는, 그리고 등돌림과 외면을 당해야 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심지어 형제들을 비롯한 혈육들로부터도 말이지요! 저 역시도 처음에 큰 걸림돌이었던 이슈들이 있었는데요, 그중 몇 가지만 말씀드리자면,

 

첫째, 성경 66권이 다 말씀’(The Word)이 아니고, 그 안에 속뜻이 들어있는 성경이라야 말씀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천사들은 내적 존재여서 그 안에 속뜻, 곧 아르카나(arcana, 라틴, 秘義)가 들어있는 성경만 읽을 수 있고, 그렇지 않은 성경은 읽을 수 없다는 사실과, 그래서 구약에서는 , , , , , , , 삼상, 삼하, 왕상, 왕하, , , , , , , , , , , , , , , , , , 29권만, 신약에서는 , , , , 등 총 5권만 말씀이라는 사실에 어안이 벙벙했지요. 왜냐 하면, 현 기독교의 근본 교리들은 열에 아홉, 모두 사도들, 특히 바울 사도의 서신서에서 추출한 것이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대로라면, 우리는 그동안 그 안에 주님의 아르카나가 없는, 인간의 창작물을 가지고 구원 교리의 터를 파고, 기둥을 세워 집을 지은 것인데... 이렇게 허망하고 당혹스러운 일이 또 있을까요?

 

둘째, 천국에 대해 스베덴보리가 전하는 실상이 충격적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하는 첫째 목표는 천국 가는 건데요, 그런데 사실, 우리는 천국이 어떤 곳인지 너무나 막연하고 무지한 상태이지요. 이런 사실은 스베덴보리(1688-1772, 스웨덴)를 불러 27년간 영계 체험을 하게 하신 주님의 기록, 곧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을 통해 알게 되었는데, 매우 낯선 내용들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저는 마치 스펀지가 물 빨아들이듯 쑤욱 쑥 받아들였습니다,) 그 내용이 매우 충격적이었는지, 제가 전하는 여러 사실에 사람들이 저를 이상하게 보기 시작하였습니다.

 

셋째, ‘겉 사람’, ‘속 사람의 문제였습니다. 그동안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함으로써 받는 건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고, 우리 속 사람의 상태가 천국을 수용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천국은 속 사람의 나라, 속 사람의 상태로 가는 나라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살면서 이 속 사람을 천국에 합당하게 준비시키시는 분이 바로 주님이시라는 사실! 충격적이지 않나요?

 

극히 일부에 불과한, 이런 많은, 그리고 마치 새 술은 새 부대에가 떠오르는 듯한, 이 사고의 대전환 앞에 저는 정말 여러 해 많은 안팎의 고민과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저를 제가 소화할 수 있는 페이스에 발맞춰 제 곁에서 저와 동행하시고, 끝까지, 그리고 지금도 저를 붙들어 주십니다. 지금은 그런 고민이나 고통은 없고, 밝고 환한 빛 가운데 걸어감을 생생히 느낍니다. 여전히 궁금한 것들은 몇 있지만 말입니다... ㅎㅎㅎ //

 

그 진리를 얻기까지 들어간 시간과 노력들이 아깝기도 하고, 또 그중에는 최선의 진리는 아니라도 여전히 진리처럼 생각되는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새로운 진리를 받아들이면 진리와 진리 아닌 것이 서로 섞이게 되는데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최선의 것이 나타나면 차선의 것은 모두 버리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그것을 마태복음 9장 17절에서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마9:17)

 

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창세기 17장에서는

 

너희의 대대로 모든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또는 너희 자손이 아니라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막론하고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창17:12)

 

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이전에 가지고 있던 사상 가운데는 진리 아닌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비(非) 진리, 또는 인간의 자아에서 나온 것들이 섞여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것을 씻어내라고 하세요. 그것이 모든 남자로 할례받게 하는 것이고, 낡은 가죽 부대를 버리는 일입니다. 그래야 영적으로 새로운 상태가 시작됩니다.

 

본문에서 ‘팔 일이 되매 아이를 할례하러 와서’는 바로 그런 뜻입니다. 우리가 가진 진리 안에 인간적인 것, 진리 아닌 것들이 섞여 있다면, 우리는 영적으로 한 단계 올라설 수 없습니다. 팔 일째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이죠. 그러면 아이의 이름을 지을 때, ‘그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짓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말씀에서 아버지는 대개는 주님, 또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 반대의 의미입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인간의 자아에서 나오는 악을 의미합니다. 말씀에서 아버지가 그런 뜻으로 사용된 예는 요한복음 8장 44절에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요8:44)

 

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아이의 이름을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짓는 것은 ‘그가 가지고 있는 진리 안에 자아에 속한 악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아이의 이름을 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상태는 아직 할례가 이루어진 상태가 아닙니다. 사실 진리를 처음 받아들일 때는 누구나 그의 자아를 통해 받아들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람은 자기 자신을 위해 진리를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구원을 위해 진리를 찾고 배웁니다. 그때의 진리가 아버지의 이름으로 불리는 아이입니다. 왜냐하면, 그 진리 안에는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만 있고, 이웃에 대한 사랑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순수하게 이웃을 위해 진리를 사용하기까지는 상당히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심지어는 이웃을 위해 하는 일 가운데도 자기 사랑이 들어 있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그래서 순수하게 이웃을 위해 진리를 사용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린다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할례가 필요하다고 하십니다. 할례를 통해 자아에 속한 것을 제거하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이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아이의 이름을 사가랴로 지으려고 하자 아이의 어머니 엘리사벳이 이렇게 말합니다. 60절로 63절,

 

60그 어머니가 대답하여 이르되 아니라 요한이라 할 것이라 하매 61그들이 이르되 네 친족 중에 이 이름으로 이름한 이가 없다 하고 62그의 아버지께 몸짓하여 무엇으로 이름을 지으려 하는가 물으니 63그가 서판을 달라 하여 그 이름을 요한이라 쓰매 다 놀랍게 여기더라

 

그러자 사람들이 이번에는 사가랴에게 몸짓하여 ‘무엇으로 이름을 지으려 하는가’ 묻습니다. 그러자 사가랴가 서판을 달라 하더니 거기에다 요한이라 썼습니다. 서판에다 아이의 이름을 쓴 이유는, 사가랴가 말을 하지 못했기 때문인데, 사가랴는 아이를 낳을 것이라는 천사의 말을 믿지 못했기 때문에, 천사와 만난 이후로 지금까지 줄곧 말을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말씀에서, 엘리사벳과 사가랴는 새로운 말씀을 통해 내면에 교회를 이룬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속뜻으로는 두 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입니다. 즉 엘리사벳은 교회를 이루는 진리를, 남편 사가랴는 교회를 이루는 선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60절에서는 엘리사벳이 ‘대답하여’라 했고, 63절, 사가랴에 대해서는 ‘서판을 달라 하여 쓰매’라고 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이유가 뭘까요? 말씀에서 ‘대답한다’는 것은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를 판단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진리가 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엘리사벳이 대답했다고 할 때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아이의 이름을 짓는, 그런 관례에 포함된, 자기 안에도 있는 이기적인 사랑을 보는 것이고요. 그러므로 그것이 잘못되었다 하는 것입니다. 즉 원래는 자기도 아이의 이름을 아버지의 이름으로 했으면 하는 바램이 있었던 것이며, 그러나 그것은 지금 이 상황에서는 주님의 뜻이 아닌 자신의 뜻, 곧 주님 사랑이 아닌 자기 사랑인 것이지요. 주님의 뜻은 아이의 이름을 주님 사랑에서 나오는 이웃 사랑으로 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잘못이라고 판단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하는 것, 즉 이기적인 사랑은 몰아내고, 이웃에 대한 순수한 사랑으로 채워야 합니다. 그래서 엘리사벳은 아이의 이름을 요한으로 짓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요한이란 이름은 이웃 사랑의 선(those who are in the good of love)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사가랴가 ‘서판을 달라 하여 그 이름을 요한이라 쓰매’는 무슨 뜻입니까? ‘자기의 생명 안에 그의 삶을 그대로 기록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서판’은 각 사람의 내면에 있는 영적 생명을 의미합니다. 말씀에서는 그것을 자주 생명책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서판’, 또는 ‘생명책’은 개인의 영적 생명입니다. 그 생명 안에는 그 사람의 삶의 내용이 그대로 기록됩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그의 영적 생명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 아래는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 48장, ‘두고 가는 것은 육체밖에 없다’ (461-469) 중 463번 글에 나오는, ‘생명책’ 관련 내용입니다. 참고하세요.

 

사후 사람의 행위가 드러날 때, 조사하는 일을 맡은 천사는 사람의 얼굴을 살핀다. 이어 양손의 손가락에서 시작해 전신을 살펴본다. 내가 이것을 이상하게 여겼더니, 그 이유를 알려주었다. 사고와 의지에 속한 모든 것은 뇌에 새겨져 있다. 뇌에 그 출발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전신에도 새겨지는데, 이는 사고와 의지의 모든 것은 출발점에서 시작해 몸의 모든 부분으로 퍼져나가고, 가장 말초적인 것에 종착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의지와 그에 따른 생각에서 나와 기억에 새겨진 모든 것은 단지 뇌에만 새겨지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전체에 새겨지는 것이며, 몸의 각 부분의 질서에 따라 거기 배열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확실한 것은 사람 전체가 그 자신의 의지와 사고와 똑같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악인은 그의 악이고, 선인은 그의 선인 것이다. 말씀에 나오는 사람의 생명책이 의미하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즉 사람이 행하고 생각한 모든 것은 그 사람 전체에 새겨져 있어 그 기억에서 불러일으키면 책 읽듯이 읽을 수 있고, 천국의 빛으로 그 영을 비추면 그 모든 것이 영상으로 나타난다. (HH.463, 김은경 역)

 

따라서 사가랴가 ‘서판을 달라 하여 그 이름을 요한이라 쓰매’는 그가 실천하는 진리의 성격이 그대로 그의 생명에 기록되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다시 말하면, 사가랴는 지금 새로운 진리를 잘 실천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는 서판에다 아이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썼습니다. 그가 실천하는 진리의 바탕에 이웃 사랑의 선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생명책에 진리를 기록하는 일은 선이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위 본문에서는 사가랴가 ‘서판을 달라 하여 그 이름을 요한이라 썼다’고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요한이란 이름은 ‘이웃 사랑의 선’을 뜻합니다. 그래서 엘리사벳과 사가랴는 아이의 이름을, 한 사람은 요한이라고 ‘대답’했고요, 또 한 사람은 ‘자기의 서판’에다 요한이라고 썼습니다. 엘리사벳과 사가랴의 이러한 행동을 통해 그들이 새로운 말씀을 받아들인 후에, 그 신앙을 순수하게 지키려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자 사가랴의 입이 열리고 혀가 풀리면서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찬송하기 시작했습니다.

 

64이에 그 입이 곧 열리고 혀가 풀리며 말을 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니

 

혀가 풀리며’는 사람의 이성이 주님을 향해 열리는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으로부터 빛이 흘러 들어오지 않겠습니까? 왜냐하면 혀는 우리의 이성, 또는 이해력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에 의해 이성이 밝아질 때, 우리는 진심으로 신앙을 고백할 수 있고, 주님을 찬송할 수 있는데요, 그것이 ‘혀가 풀리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나요? 주님을 찬송한다는 것은 신앙으로, 또는 진리로 주님을 예배하는 것이라고요. 그러니까 사가랴가 주님을 찬송하는 것은 주님이 주신 새로운 말씀을 자기의 신앙으로 온전히 삼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위 본문에서는 사가랴가 혀가 풀리고 주님을 찬송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전에는 어땠습니까? 천사로부터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 그 말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주님의 말씀을 온전히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가랴가 말을 하는 것은 신실한 신앙의 고백입니다.

 

65그 근처에 사는 자가 다 두려워하고 이 모든 말이 온 유대 산골에 두루 퍼지매

 

사가랴의 신앙 고백이 온 유대 산골에 두루 퍼졌다고 합니다. 여기서 유대는 본래 가장 순수한 교회를 뜻합니다. 새 교회 용어로 유다는 천적(天的)인 교회를 나타내고요, 이스라엘은 영적인 교회를 나타냅니다. 그래서 유다는 가장 순수한 교회를 뜻하지만, 여기서는 반대의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기존의 잘못된 교회, 무너져가는 교회를 뜻하지요. 그리고 유대 산골이라고 할 때 산골은 그 잘못된 교회 안에 남아 있는 선한 사람들, 즉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산은 지난번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큰 산이 아니라 나지막한 산, 영어로는 ‘’(hill)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이웃에 대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모든 말이 온 유대 산골에 퍼졌다는 말씀은, 주님이 주신 새로운 말씀이 기존 교회 안의 선한 사람들에게 퍼져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구절은 이렇습니다.

 

66듣는 사람이 다 이 말을 마음에 두며 이르되 이 아이가 장차 어찌 될까 하니 이는 주의 손이 그와 함께 하심이러라

 

듣는 사람들이 이 말을 모두 마음에 두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듣는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또 마음에 둔다는 것은 각자의 의지에 새기는 것입니다. 마음은 의지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듣는 사람이 다 이 말을 마음에 두며’라는 말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새로운 진리를 받아들인 사람들이 그 말씀에 따라 순종하며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이 이렇게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본래 선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들이 받아들인 말씀 가운데 주님의 능력이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는 ‘주의 손이 그와 함께 하심이러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주의 손’은 주님의 능력을 의미하고, 아이는 바로 그들이 받아들인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들이 처음 진리를 받아들일 때에는 누구나 자아를 통해 진리를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구원을 생각하고요, 또 자기의 지성으로 진리를 이해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모든 것이 사실은 주님의 섭리를 통해 이루어지는 일들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 신앙을 불완전하고 나약한 신앙에서 시작, 점차 견실하고 확고한 신앙으로 성장시켜 주십니다. 그리고 신앙이 깊어질 때, 주님께서는 ‘진리를 너희 것으로 삼지 말고, 내게로 돌리라’ 하세요. 오늘 말씀에서 ‘팔 일째 아이가 받는 할례’의 의미 가운데는 주님의 그러한 뜻과 바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자기의 진리 안에 있는 애정이 무엇인지를 살펴야 합니다. 그래서 자아의 사랑은 버리고, 대신 이웃에 대한 사랑을 채워 넣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에게 있는 진리는 나를 구원하는 진리일 뿐 아니라 이웃을 구원하는 진리가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오늘 말씀에서는 사가랴-엘리사벳 부부의 아이가 할례를 받는 것으로 표현했고요, 팔 일째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이의 이름을 아버지 이름을 따르지 않고, 요한이라 짓는 것 역시 그런 뜻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성도님들께서 자신의 진리가 어떤 모습인지를 꼭 살펴보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마음의 할례를 통해 팔 일째, 즉 새로운 상태로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우리 성도님들과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계3:5)

 

아멘

 

원본

2016-06-26(D1)

청주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3-01(D4)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005. 2023-03-01(D4)-매일예배(2422, 눅1,57-66), '서판을 달라 하여 그 이름을 요한이라 쓰매'.pdf
0.52MB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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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엊그제인 2월 2일 주일 설교를 끝으로 지난 2년간 달려온 '누가복음 속뜻 강해'를 마쳤습니다. 세어 보니 총 144편의 설교였습니다. 총 144편이면 한 3년치 설교인데 2년 걸린 건, 처음엔 매일예배 본문으로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이 설교 인용을 허락하신 원 저자, 전 청주 새 교회, 그리고 이후 서울 새 교회 담임이셨던 이순철 목사님께 깊이 감사드리며, 또한 이 전체 설교를 한 편의 pdf로 만들 필요가 생겨 고민 중, 이 전체를 다시 한번 깊이 살피라는 주님의 퍼셉션(perception) 또한 있어 순종하고 이 작업을 시작합니다. 

 

※ 누가복음 강해이면서도 맨 처음 본문인 눅1:1-17이 없는 이유는 설교 원본이 없기 때문입니다. 원 저자께도 문의드렸으나 분실하셨는지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또한 죽 가시다 보면, 한 구절이 빠졌거나 몇 구절이 통째로 빠진 부분도 있습니다. 아마 원 저자의 단순 실수이신 것 같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혹시 중간중간 설명 부호인 ''가 나오는 부분은 특별히 무슨 배경이 되는 보충 설명이 필요하겠다 싶어 제가 더한 것입니다. 전반적인 어투나 뉘앙스, 에피소드 등은 저희 교회에 맞게 다듬었다는 점, 참고하세요. 아, 그리고 원본의 '믿음'은 전부 '신앙'으로 바꾸었습니다만, 특별한 데서는, 그러니까 'believe'의 뜻을 살려야 하는 데서는 원본 그대로 인용했습니다. 

 

 

사가랴가 말을 못 하다

 

 

18사가랴가 천사에게 이르되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가 많으니이다 19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가브리엘이라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말하라고 보내심을 받았노라 20보라 이 일이 되는 날까지 네가 말 못 하는 자가 되어 능히 말을 못 하리니 이는 네가 내 말을 믿지 아니함이거니와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어지리라 하더라 21백성들이 사가랴를 기다리며 그가 성전 안에서 지체함을 이상히 여기더라 22그가 나와서 그들에게 말을 못 하니 백성들이 그가 성전 안에서 환상을 본 줄 알았더라 그가 몸짓으로 뜻을 표시하며 그냥 말 못 하는 대로 있더니 23그 직무의 날이 다 되매 집으로 돌아가니라 24이 후에 그의 아내 엘리사벳이 잉태하고 다섯 달 동안 숨어 있으며 이르되 25주께서 나를 돌보시는 날에 사람들 앞에서 내 부끄러움을 없게 하시려고 이렇게 행하심이라 하더라 (눅1:18-25)

 

 

천사가 사가랴에게 나타나서 아내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게 될 것이라고 하자 사가랴는 그 말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천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18절입니다.

 

18사가랴가 천사에게 이르되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가 많으니이다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아들을 낳는다는 것은 주님께서 사가랴로 표상되는 선한 사람에게 참된 진리, 또는 참된 말씀을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나이가 많다는 것은 그냥 아기를 낳기에 나이가 많다는 뜻이 아니구요, 주님의 때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때는 어떤 때입니까? 주님께서 참된 진리를 주시는 때이구요, 그동안 우리가 가지고 있던 거짓 진리들을 버려야 하는 때입니다. 그러므로 사가랴가 자신과 아내의 나이 많음을 걱정하는 것은 실제로 그러한 일이 자신에게 일어난다는 사실을 잘 믿지 못하는 것인데요, 말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말씀에는 항상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겨라, 주님께서 원하는 것을 다 이루어 주시리라 이렇게 말하고, 또 주님께 맡기면 시험에서 우리를 건져 주시겠다고 합니다. 우리는 그 말씀을 믿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현실로 돌아가면, 실제로는 잘 믿지를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동안의 경험을 돌아보면, 주님을 믿는다 했음에도 뜻대로 안 된 적이 참 많기 때문입니다. 시험에서 지기도 했고, 그 밖에도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이 뜻대로 잘 안됐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 주시지 않았을까요? 정말 그런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시험에서 넘어진 것도, 그리고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한 것도 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입니다. 주님은 그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 없음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정말 주님을 믿었고, 그리고 우리 삶 가운데서 내 뜻이 아니라 주님 뜻이 이루어지기를 항상 원했다면 주님은 아마 더 빨리 당신의 뜻을 이루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큰 시련을 겪지 않고, 거듭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지 않습니까? 사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나를 믿었고, 그리고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기보다 내 뜻대로 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렇게 볼 때, 그동안 겪었던 많은 시련은 주님께서 우리를 바로 세우시기 위한 사랑의 섭리입니다. 그래서 많은 시련을 겪게 되는데, 그러다가 때가 되면 주님께서 말씀을 하세요. ‘이제 너에게 진짜 진리를 주겠다. 그동안 네가 가지고 있었던 진리는 거짓 진리이든가 생명 없는 진리, 즉 지식에 불과한 것이었을 뿐이다. 그러니 이제 살아있는, 생명 있는 산 지식을 주겠다.’ 이렇게 말이지요. 그때 우리는 그 말을 믿지 못합니다. 과연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날 수 있을까? 그때가 지금이란 말인가? 하고 믿지를 못합니다.

 

또 주님께서 진리를 보내 주실 때 그것을 믿지 못하는 이유는, 그동안 익숙해진 진리와 그것, 곧 주님이 새롭게 주시는 진리가 많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내적 진리는 처음에는 잘 이해하지를 못합니다. 그것이 지금 사가랴의 상태입니다. 사가랴는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지만, 거짓 진리를 가르치는 교회 안에 있지만, 참된 진리에 목말라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제 주님께서 때가 되어 참된 진리를 열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사가랴가 천사로부터 들은 기쁜 소식은 그것입니다.

 

사실 꼭 우리 새 교회가 아니더라도 다른 교회에 다니시거나 다른 종교를 가지신 분들 가운데 교리에 따라 진실하고 선하게 사시는 분들은 모두 구원을 받습니다. 다만 그 교회나 그 종교가 참된 진리를 가르치는 곳이라는 전제하에 말이지요. 왜냐하면 진리를 모르면 뭐가 진실한지, 뭐가 거짓인지를 구별 못 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그들이 옳다 믿는 수많은 진리와 선 가운데는 거짓들이 섞여 있는데, 그런 것들을 분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진리의 빛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진리가 없는 교회에 그 빛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참된 진리를 가르치는 교회나 종교가 아닌 곳에서는 거듭나기가 매우 어려우며, 그렇기 때문에 참된 진리를 찾아야만 한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잘못된 교회 안에 있던 사가랴가 이제 참된 진리를 갖게 되었습니다.  

 

※ 위 ‘꼭 우리 새 교회가 아니더라도 다른 교회에 다니시거나 다른 종교를 가지신 분들 가운데 교리에 따라 진실하고 선하게 사시는 분들은 모두 구원을 받습니다.’ 이런 기술(記述)이 사실 굉장히 예민하고 위험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그러나 이것은 진리이기에 용기를 내어 말씀하심인 줄 압니다. 이에 대해서는 아래 첨부하는, 천국과지옥.1.36.318-328.‘천국의 비기독교인들’이라는 글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19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가브리엘이라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말하라고 보내심을 받았노라

 

말씀에서 좋은 소식이라는 것은 단순히 침례(세례) 요한의 탄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구요, 궁극적으로는 주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세상을 구하신다는 진리를 말합니다. 그 소식을 전하는 천사가 바로 가브리엘입니다. 여기서 가브리엘은 가브리엘이라는 이름을 가진 어떤 천사 개인을 뜻하는 게 아닌데요, 다음은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 7장, ‘각 공동체는 보다 작은 형태의 천국이고, 각 천사는 가장 작은 형태의 천국이다’ 51번, 52번 글입니다.

 

각 공동체가 작은 형태의 천국이고, 각 천사가 가장 작은 형태의 천국인 까닭은 사랑과 신앙의 선이 천국을 이루기 때문이며, 이 선이 모든 공동체와 거기 속한 천사들 안에 있기 때문이다. 공동체마다 선이 독특하고 다양하다는 사실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서로 달라도 모두 천국적 선이다. 각 천국의 특성이 다를 뿐이다. 그래서 누가 천국의 어떤 공동체로 올려지면 천국에 들어갔다고 말하는 것이고, 거기 있는 천사들을 각자 자기 특유의 천국 안에 있다고 하는 것이다. 영계 사람들은 모두 이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천국 밖이나 아래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천사의 무리를 보면, 천국이 여기 또는 저기에 있다고 말한다. 비유하자면, 총독, 관리, 하인들이 같은 궁전 안에 사는 것과 같다. 그들이 층마다 자기 처소나 방에 따로 있지만, 여전히 같은 궁전 안에 있으면서 왕을 받드는 임무를 각자 수행하는 것이다. (HH.51, 김은경 역)

 

각 공동체가 작은 형태의 천국임은 모든 공동체가 천국 전체와 똑같은 천국 모양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로 확증할 수 있다. 천국 전체를 보면, 다른 천사보다 뛰어난 천사들이 그 중심에 있고, 가장자리로 갈수록 뛰어남이 덜한 천사들이 있다. 그래서 주님은 천국 전체를 한 명의 천사로 보시고 이끄신다. 각 공동체도 마찬가지다. 따로 천사공동체 하나가 한 명의 천사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나도 이것을 주님의 허락하심으로 본 적이 있다. 나아가, 주께서 천사들 가운데 나타나실 때, 여럿에게 둘러싸인 한 분으로 보이지 않으시고, 그 전체의 모습이 하나가 되어 천사 한 명의 형상으로 보인다. 이런 이유로, 성경에서 ‘천사’가 주님을 뜻하고, 또 천국의 한 공동체를 지칭하기도 한다. ‘미가엘’, ‘가브리엘’, ‘라파엘’은 바로 그 기능에 따라 그렇게 이름지어진 천사공동체를 말한다. (HH.52, 김은경 역)

 

이에 따라 가브리엘이라는 천사공동체가 하는 일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직접 세상에 오신다는 것과, 그때 여호와께서 입으신 인성, 즉 인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증거하는 일입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곧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증거하는 일이지요.

 

따라서 사가랴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났다고 하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가브리엘이 하나님 앞에 서 있다고 말합니다. 그 말씀은 가브리엘을 통해 전해지는 진리 안에 주님이 계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깨달을 때, 그 진리 가운데 주님이 계시지 않으면 그것은 살아있는 진리가 아닙니다. 그런 진리로는 삶을 바꿀 수 없습니다. 따라서 말씀에서 천사들이 나타날 때, 그들이 하나님 앞에 서 있다 하는 것은, 진리를 지식의 상태로 받는 것이 아니고, 그 안에 주님이 계신, 살아있는 진리로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거듭나는 데 있어 매우 의미 있는 순간입니다. 진리에 관한 지식이 아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는 진리가 우리 안으로 흘러들어오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천사가 하나님 앞에 서서 우리에게 말하는 순간입니다. 20절, 천사가 사가랴에게 말했습니다.

 

20보라 이 일이 되는 날까지 네가 말 못 하는 자가 되어 능히 말을 못 하리니 이는 네가 내 말을 믿지 아니함이거니와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어지리라 하더라

 

천사는 사가랴에게 아들이 태어날 때까지 말을 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말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이것은 주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을 믿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사가랴는 왜 주님을 믿지 못했을까요?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우리가 말씀을 통해 내적 진리를 만날 때, 처음엔 그것이 진리인지 아닌지를 잘 분간 못 합니다. 물론 개인의 영적인 상태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요. 어떤 분은 그것이 진리라는 것을 바로 아실 것이고, 어떤 분은 그것이 진리인지 전혀 모르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래서 보통은 주님께서 진리를 주실 때, 그것을 받아들이기까지는 시간이 걸리고, 때로는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습니다. 예를 들면, 마음에 갈등이 생기는 그런 건데요, 그동안 알고 있던 진리와 새로운 진리 사이에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천사가 전하는 진리를 처음에는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갸라의 이런 상태를 우리 자신의 모습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언제 사가랴와 같은 경험을 하셨습니까? 사가랴와 같이 주님을 만나는 경험을 언제 하셨습니까? 아마 아주 우연한 경로를 통해 스베덴보리의 책을 처음 접하셨을 때일 것입니다. 그 책을 읽기 시작할 때, 우리는 처음 주님을 만납니다. 그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진리가 참된 진리이니 이 진리를 가지고 새롭게 태어나거라’ 그리고 덧붙여서 ‘그동안 가지고 있던 것들은 진리가 아니니 모두 버리거라’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했습니까? 대부분 주님 말씀을 그대로 따르지 않았습니다. 대개는 새로운 진리는 그것대로 가지고 있구요, 그리고 진리 아닌 것들도 계속 가지고 있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께서 전해주시는 진리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우리 안에 있는 자아 때문입니다. 인간의 자아는 진리를 알면 그것으로 자기의 생각을 이루려고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참된 진리를 전해주실 때, 그것 전체를 받아들이지 않고, 구미에 맞는 것만 선택적으로 받아들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이전 것들을 버려야 새로운 진리가 들어설 자리가 생기는데, 그것을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를 완전히 받아들이지를 못합니다. 새 교회 안에도 그런 분들이 많습니다. 입으로는 ‘나는 새 교회 진리를 온전히 믿는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심지어 어떤 분들은 말씀의 속뜻을 주님의 말씀으로 인정하지 않는 분도 계십니다. 속뜻을 단지 말씀을 이해하는 도구 정도로만 생각하는 것인데요, 말하자면, 이런 태도가 진리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며, 진리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도님들은 말씀의 글자의 뜻과 속뜻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말씀의 글자의 뜻과 속뜻의 관계는 주님의 몸과, 몸 안에 있는 영혼과 같은 관계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사람의 몸과 혼이 하나인 것처럼 서로 나눌 수 없는 하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속뜻만 가지고도 말씀이 아니구요, 글자의 뜻만 가지고도 말씀이 아닌 것입니다. 그 둘이 함께 있어야 말씀입니다. 그래서 말씀의 속뜻을 말씀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주님을 주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은 곧 주님이시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천사가 사가랴에게 이 일이 이루어질 때까지 말을 못 할 것’이라고 한 것은 사실은 말씀 전체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고, 원하는 것만 선택적으로 받아들이는 모든 신앙인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21백성들이 사가랴를 기다리며 그가 성전 안에서 지체함을 이상히 여기더라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죠. 백성들과 사가랴는 각각 내면의 교회를 이루는 신앙과 선을 나타낸다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가랴와 백성들은 그 속뜻으로는 서로 다른 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의 내면에 있는 것들로서, 백성들은 신앙의 진리를, 그리고 사가랴는 이웃 사랑의 선을 나타냅니다. 왜냐하면 사가랴의 직분은 제사장이며, 제사장의 속뜻은 사랑이고 선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왜 성전 안에 함께 있지 않고 따로 있을까요? 그 이유는, 교회 안에 선은 있는데 아직 신앙의 진리는 없기 때문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성전 밖에 백성들이 있는 것처럼 진리가 있기는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신앙의 진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가랴의 상태입니다. 왜냐하면 백성으로 표상되는 진리는 아직 참된 진리, 내적 진리는 아니기 때문이며, 그래서 그것은 아직 신앙이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러한 사가랴에게 이제 참된 진리를 열어 주시려고 하십니다. 그런데 사가랴는 주님이 열어 주시는 이런 진리를 아직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인 것입니다.

 

22그가 나와서 그들에게 말을 못 하니 백성들이 그가 성전 안에서 환상을 본 줄 알았더라 그가 몸짓으로 뜻을 표시하며 그냥 말 못 하는 대로 있더니

 

사가랴는 그가 만난 주님에 대해, 그리고 주님께서 열어 주시는 진리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그가 진리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고, 다만 진리를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몸짓으로 뜻을 표시하며 그냥 말 못 하는 대로 있더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리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진리가 오직 주님의 목적을 위해 사용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전에 진리로 믿었던 것들을 모두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리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고, 진리를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가랴는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가랴의 그런 모습을 보고 백성들은 ‘그가 성전 안에서 환상을 본 줄’ 알았습니다. 천국의 비밀 1786번에는 환상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환상이란 가장 내적인 계시이다. 그것은 각자의 영적인 상태에 따라 일어난다. 즉 내면이 닫힌 사람이 보는 환상과 내면이 열린 사람이 보는 환상이 서로 다르다. (이순철 역)

 

주님의 계시는 각자의 영적인 상태에 따라 다르게 이해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주님이 시내산에 강림하실 때의 모습은 보는 사람에 따라 다 다르게 보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본 것과 아론이 본 것이 다르구요, 그리고 아론이 본 것과 모세가 본 것이 서로 달랐습니다. 주님의 계시는 그런 것입니다. 따라서 백성들이 사가랴가 환상을 봤다고 하는 것은, 사가랴가 자기의 영적 상태에 따라 주님의 계시를 이해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사가랴의 입이 터져 백성들에게 말할 수 있을 때까지 그에게는 완전한 신앙이라는 게 없는 것입니다.

 

23직무의 날이 다 되매 집으로 돌아가니라

 

이 말씀에서 ‘직무’는 영어 성경 표현으로는 ‘섬기는 일’입니다. 섬기는 일이란 어떤 것입니까? 사랑으로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집으로 돌아갔다고 하는데, 집은 무슨 뜻일까요? 집은 각 사람의 의지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그 직무의 날이 다 되매 집으로 돌아가니라’라는 이 말씀은, 주님으로부터 참된 진리를 받는 사가랴의 의지와 삶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즉 한편으로는 섬김의 삶을 살면서, 한편으로는 자신의 의지를 살피는 모습입니다. 사가랴는 주님이 주시는 계시의 말씀을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러나 선한 의지를 가지고 끊임없이 섬김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선한 애정을 가지고 주님의 말씀, 주님의 진리를 삶으로 옮기려 할 때, 그때 비로소 진리가 신앙이라는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러기 전에는 아무리 주님께서 진리를 주셔도 그것이 신앙이 되지는 않습니다. 그것을 오늘 말씀에서는 사가랴가 ‘그 직무의 날이 다 되매 집으로 돌아가니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는 중에 엘리사벳이 아기를 잉태합니다. 그것에 대해 24절,

 

24이 후에 그의 아내 엘리사벳이 잉태하고 다섯 달 동안 숨어 있으며 이르되

 

이 후에’는 어떤 뜻일까요? 주님께서 진리를 주시고, 그것을 애정을 가지고 삶으로 옮긴 다음에라는 뜻입니다. 그때 엘리사벳이 잉태합니다. 엘리사벳이 잉태한다는 것은 사가랴와 엘리사벳으로 표현되는 교회 안에 이제 신앙의 진리가 생기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말씀에는 아기를 잉태한 엘리사벳이 다섯 달 동안 숨어 지낸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다섯 달이란 어떤 뜻입니까? 그것은 주님께서 주시는 진리가 참된 신앙이라는 열매를 맺기까지 걸리는 충분한 시간을 의미합니다. 본래 다섯은 작은 것을 나타내지만, 여기서는 참된 신앙의 열매를 맺기까지 걸리는 충분한 시간, 충분한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러면 숨어 있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렇게 진리가 신앙이라는 열매를 맺을 때까지 주님께서 보호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사실 신앙인들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진정한 신앙으로 만들기까지는 여러 가지로 어려움이 많습니다. 그 어려움은 우리 내면에 있는 악하고 거짓된 것들 때문에 생깁니다. 예를 들면, 그동안 가지고 있던 거짓된 관념들이 어떻게 해서든지 진리를 방해하려고 합니다. 그때 주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시지 않으면 진리는 우리 마음 밭에 뿌리를 내리지 못합니다. 마치 돌밭에 뿌려진 씨나, 가시덤불에 뿌려진 씨같이 죽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그것이 아이를 잉태한 엘리사벳이 다섯 달 동안 숨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계시록 12장에도 나오는 말씀인데요, 계시록 12장에는

 

1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 해를 옷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그 발아래에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두 별의 관을 썼더라 2이 여자가 아이를 배어 해산하게 되매 아파서 애를 쓰며 부르짖더라 3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니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왕관이 있는데 4그 꼬리가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더라 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 (계12:1-4)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무슨 뜻일까요? 새 교회의 진리가 신앙의 열매를 맺으려 할 때, 용, 즉 지옥이 그것을 삼키려고 버티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그 해산하는 여인을 지켜주십니다. 진리를 온전한 신앙으로 만드는 일은 그렇게나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 자신도 지금 온전한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는데요, 그래서 주님은 우리의 신앙이 열매를 맺기까지 지옥의 방해로부터 우리를 철저히 지켜주십니다. 아무 일도 안 하시는 것 같지만, 주님께서 늘 그렇게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나를 왜 이렇게 방치하실까’라며 주님을 원망할 때가 많았습니다. 너무나 힘이 드니까요. 그런데 그 모든 과정 하나하나 가운데 주님께서 지켜주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25절에서 엘리사벳은 이렇게 말합니다.

 

25주께서 나를 돌보시는 날에 사람들 앞에서 내 부끄러움을 없게 하시려고 이렇게 행하심이라 하더라

 

유대인들에게 여자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은 큰 수치였습니다. 사실 우리 조상들도 그것을 수치로 알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단순히 대를 잇지 못하는 것 때문은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렇게까지 수치를 느끼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잊힌 지식이지만 대를 잇는다는 말에는 영적 의미가 있습니다. 그 영적 의미가 고대교회로부터 전해져 우리의 DNA에 남아 있어 아이를 낳지 못할 때 수치를 느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고대교회 사람들은 여인이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을, 진리를 알고 있으면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입니까? 이렇게 귀한 진리를 알고 있으면서도 그걸 살아내지 못하고, 신앙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은 사람들 앞에서도 그렇고, 주님 앞에서는 정말로 아주 부끄러운 일입니다. 이런 이유로 유대교회 사람들은 아기를 낳지 못하는 것을 대단한 수치로 여기 것입니다. 창세기 30장에는 야곱의 아내 라헬이 아이를 갖지 못해서 화를 내고 짜증을 부리는 걸 보십시오. 그것이 바로 아이를 낳지 못해 부끄러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를 잉태한 엘리사벳은 ‘주께서 나를 돌보시는 날에 사람들 앞에서 내 부끄러움을 없게 하시려고 이렇게 행하심이라’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에서 배운 것처럼 주님으로부터 참된 진리, 또는 참된 말씀을 받는 과정은 대단히 험난한 과정입니다. 많은 분이 자신이 참된 진리를 가지고 있고, 진정한 신앙 가운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진정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사실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희귀할 정도입니다. 진정한 신앙은 이 진리가 참이라고 인정하는 것만으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내면에는 참 신앙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게 방해하는 장애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것은 어떤 것일까요? 이기심이나 불순한 욕망 같은 것이구요, 또 지적 자부심 같은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사람들은 진리 실천하는 것을 주저하고, 또 자신의 구미에 맞는 진리만 실천하려고 합니다.

 

※ 그러니까 복 받는 것과 관련된 말씀들이나 자신의 명예와 이름 높일 수 있는 것들을 구하는 것입니다. 곧 이런 것들이지요. ‘오, 주님, 제 사업을 크게 형통케 하사 제가 주님을 위해 큰일을 하게 하옵소서’라든지, ‘오, 주님, 제 목회를 크게 성공케 하사 저로 주님께 더욱 큰 영광 돌리게 하시오며, 이를 위해 제게 치유의 은사, 영 분별의 은사, 예언의 은사를 주시옵소서’ 같은 것 말입니다. 이런 건 다 주님의 영광, 주님을 찬양 운운하고 있지만 사실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사가랴도 처음에는 그랬습니다. 주님께서 진리를 주실 때, 온전히 받아들이지를 못한 것입니다. 사가랴가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은 진리를 믿지 못하는 것이고, 그러므로 주님 앞에 올바른 신앙 고백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23절에 보면, 사가랴가 섬기는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것은 순수하고 선한 애정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될 때, 주님께서는 아기를 잉태할 수 있게 해주십니다. 마침내 우리 가운데 신앙이라는 진리의 열매가 생기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그냥 ‘이것이 진리다’라고 믿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를 위해 진리 아닌 것들을 버리는 일입니다. 그리고 받은 그 새 진리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때 신앙의 열매가 우리 마음 가운데 생기기 시작합니다. 모쪼록 진리 전체를 온전히 받아들이시기를 바랍니다. 그런 은혜가 우리 교우님들과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때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때 조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이니라’ (사35:5-6)

 

아멘

 

2016-04-10(D1)

청주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3-02-24(D6)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천국과지옥.1.36.318-328.'천국의 비기독교인들'.scan.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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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 2023-02-24(D6)-매일예배(2417, 눅1,18-25), '사가랴가 말을 못하다'.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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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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