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가랴'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25.02.17 7. 눅1:76-80, '사가랴의 예언 (2)' 2
  2. 2025.02.14 6. 눅1:67-75, '사가랴의 예언 (1)' 2

 

사가랴의 예언 (2)

 

 

76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가서 그 길을 준비하여 77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78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79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 80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 (눅1:76-80)

 

 

오늘 말씀드릴 내용은 누가복음 1장 76절에서 80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지난 시간에 이어 사가랴의 예언 나머지 부분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가랴는 글자의 뜻으로 보면 침례(세례) 요한(John, the Baptist)의 아버지이지만, 속뜻으로는 주님께서 새로운 말씀을 선포하시기 위해 선택한 사람을 나타냅니다. 말씀을 위해 주님께서 선택하시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예를 들면, 요한계시록을 쓴 요한 같은 사람이고요, 그리고 말씀의 내적 의미를 밝히기 위해 택하신 주님의 종 스베덴보리 같은 사람일 것입니다.

 

※ 본래 ‘침례(浸禮) 요한’이라는 표기가 맞지만, 현 신약 성경에 ‘세례(洗禮) 요한’으로 되어 있어, 혼란을 피하기 위해 이후 ‘세례 요한’으로 하겠습니다. 헬라어 원전엔 ‘밥티조’, 곧 ‘침례’가 맞습니다.

 

말씀을 세상에 내놓기 위해 주님께서 선택하시는 사람들에 대해 계시록 1장 1절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계1:1)

 

그러니까 주님으로부터 말씀의 계시를 받는 사람은 ‘요한’이라는 이름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요한’은 속뜻으로 보면 사랑의 선 안에 있는 사람들(those who are in the good of love)을 나타냅니다.

 

※ 각 이름마다 그에 상응하는 속뜻이 있는데요, 가령, ‘베드로’(Peter)는 신앙(faith)을, ‘야고보’(James)는 체어리티(charity)를, 그리고 ‘요한’(John)은 체어리티의 선이나 사랑의 선을 상응, 표상하는 식입니다.

 

※ 아래 글은 말씀에 나오는 ‘이름’ 관련, 매우 참신한 내용이라 소개합니다.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에서 인용합니다.

 

나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다윗, 그리고 사도들이 방법을 통하지 않고, 자비에 의해 천국에 들어갔는지 천사들에게 물어보았다. 천사들은 대답했다. 그들 중 한 사람도 그렇게 천국에 간 사람은 없고, 모두 이 세상에서의 삶에 의해서 천국에 들어갔다. 우리는 그 사람들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다. 그들이라고 다른 사람보다 더 존경받지 않는다. 그들이 말씀 안에 영광스럽게 기록되어 있는 것은, 그들이 내적 의미로 주님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주님의 신성과 신적 인성을 의미하고, 다윗은 주님의 신적 왕권을 의미한다. 사도들은 주의 신적 진리들을 의미한다. 사람이 말씀을 읽을 때, 천사들은 이 사람들 개인에 대해서는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 그들의 이름은 천국에 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신 그 이름을 천사들은 방금 설명한 대로의 주님으로 이해하며, 따라서 천국에 있는 말씀에는 그런 이름들이 나오지 않는다. 천국에 있는 말씀은 이 세상에 있는 성경 말씀의 내적 의미이기 때문이다. (HH.526:4, 김은경 역) //

 

새로운 말씀을 계시받는 사가랴 역시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선 안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요, 사가랴가 사랑의 선 안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은,

 

5유대 왕 헤롯 때에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 한 사람이 있었으니 이름은 사가랴요 그의 아내는 아론의 자손이니 이름은 엘리사벳이라 6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 7엘리사벳이 잉태를 못하므로 그들에게 자식이 없고 두 사람의 나이가 많더라 8마침 사가랴가 그 반열의 차례대로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의 직무를 행할새 (눅1:5-8)

 

위 본문에서 그를 의인 또는 제사장이라 한 것을 봐도 알 수 있는데요, 왜냐하면 말씀에서 의인이나 제사장은 사랑의 선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가랴가 오늘 예언하는 것은 주님에 의해 선택되어 말씀의 계시를 받은 사람이 이웃들을 가르친다는 뜻입니다.

 

지난 시간에 사가랴가 예언한 내용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세상에 오실 주님에 대한 예언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직접 세상에 오신다는 것과, 그리고 그것은 아주 오래전 태고교회 때부터 주님께서 인류에게 약속하신 일이라는 것, 그리고 주님이 오시는 목적은, 인간을 악과 거짓에서 구하시고, 그러므로 그들이 성결과 의로 주님을 섬기게 하심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계속되는 예언에서는 주님이 오시는 길을 준비할 한 선지자가 있다고 합니다. 그 선지자가 누구입니까? 사가랴가 낳은 아이 요한, 즉 새로운 말씀입니다. 본문 76절입니다.

 

76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준비하여

 

이 아이는 물론 세례 요한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가랴는 요한에 대해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했고, 그가 먼저 세상에 와서 주님의 길을 준비한다고 합니다. 말씀에서 선지자는 교리를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추상적인 의미로는 교회의 교리 자체이신 주님을 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높은 의미에서 선지자는 바로 주님이십니다. 그것에 대해 세례 요한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요한복음 1장 21절로 27절까지의 말씀입니다.

 

21또 묻되 그러면 누구냐 네가 엘리야냐 이르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22또 말하되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23이르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24그들은 바리새인들이 보낸 자라 25또 물어 이르되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세례를 베푸느냐 26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27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하더라 (요1:21-27)

 

요한은 자신에 대해 자기는 그리스도도 아니고, 선지자도 아니라고 합니다. 진정한 선지자는 주님이시며, 자신은 그저 주님의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오늘 본문에서는 요한을 가장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그가 말씀이신 주님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말씀을 표상하는 것은 그가 낙타의 털로 만든 옷을 입고, 메뚜기와 꿀을 먹었다는 성경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는데요, 말씀에서 털이나 메뚜기는 가장 낮은 차원의 진리인 글자의 뜻으로서, 말씀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털이나 피부는 사람의 가장 바깥쪽에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바깥쪽에 있는 것은 영적으로는 가장 낮은 차원의 것을 나타냅니다. 다시 말하면, 자연적이고 감각적인 것을 나타내지요. 그래서 요한은 가장 낮은 차원의 진리인 글자로 표현된 말씀을 표상합니다. 그러면 꿀은 무엇일까요? 꿀은 말씀의 진리를 배울 때 느끼는 내적 기쁨입니다. 외적인 기쁨과 내적인 기쁨이 있습니다. 외적인 기쁨은 어떤 것입니까? 진리를 이해하고, 그것을 깨달을 때 느끼는 기쁨이 외적인 기쁨입니다. 그러면 내적 기쁨은 무엇입니까? 내적인 기쁨은 진리를 삶으로 살아낼 때 느끼는 기쁨입니다. 진리를 삶으로 살아낼 때, 주님으로부터 평화가 오고, 안정감이 오고, 그리고 자유가 옵니다. 그것이 바로 내적 기쁨입니다.

 

그렇다면 말씀을 표상하는 요한이 주님의 길을 준비한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다음은 ‘천국의 비밀’ 8028번 글입니다.

 

천사들이 오려고 할 때, 먼저 한 영을 보내 길을 준비하는 것은 천국의 질서이고, 그로 말미암은 세상의 질서이다. 그는 사람들의 두려움을 자극하고 권고하며, 그렇게 해서 그들이 천사들을 정중하게 받아들이도록 만든다. (이순철 역) From this it could be seen how the case is with the order in heaven, and from this in the world; namely that when angels are about to come, a spirit is sent before to prepare the way, and that he excites fear, and gives admonition to receive the angels courteously; (AC.8028)

 

그러니까 주님께서 직접 오시거나 아니면 천사들을 통해 오실 때, 그때 어떤 영을 보내 주님을 정중하게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은 주님의 질서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왜 그런 질서를 만드셨을까요? 주님이 진리 자체이신 분이라면 천사는 주님으로부터 진리를 받아 전하는 진리의 대언자입니다. 그래서 천사나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거나 함부로 대하면, 그것은 진리에 대항하는 것이 되고, 그래서 그 사람에게는 크나큰 재앙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인간에 대한 무한한 사랑에서 나온 질서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세례 요한, 즉 말씀을 세상에 먼저 보내 당신의 길을 예비하게 하신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사람들은 주님에 대해 아무 것도 몰랐을 것이고, 그래서 주님을 함부로 대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말라기서 4장 5, 6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5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6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말4:5-6)

 

주님은 인간이 주님께로 마음을 돌리지 않는다고 해서 저주를 내리시는, 그런 악한 신이 아니십니다. 인간이 주님에 대해 악을 행함으로 스스로 저주를 자초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질서입니다. 주님은 그것을 염려하셔서 요한을 먼저 보내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요한을 가리켜 엘리야라 한 것은 엘리야가 살아 돌아온다는 그런 뜻이 아니고요, 요한과 엘리야는 모두 말씀으로서 주님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방법은 어떤 것입니까? 77절입니다.

 

77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보통 말씀에서는 ‘백성’과 ‘나라’라는 말을 함께 사용합니다. ‘백성’은 진리를, ‘나라’는 선을 뜻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그것은 진리와 선의 결합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위 구절에서는 그냥 ‘주의 백성’이라고만 말합니다. 그 이유는, ‘요한’으로 표상되는 말씀의 역할은 사람들을 거듭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 주님을 믿도록, 주님을 신앙하도록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 저는 원본의 ‘믿음’을 가급적 ‘신앙’으로 고쳐서 쓰고 있습니다. ‘오직 믿음’ 교리에 익숙하신 분들을 위해서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스베덴보리의 많은 저작들을 보아도 대부분 ‘faith’를 쓰기 때문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믿음’ 하면 왠지 ‘오직 믿음’이 생각나기 때문입니다. 물론, 문맥에 따라서는 ‘믿음’을 써야 할 때도 있는데, 그럴 땐 원본 그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요한이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마3:11)

 

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물은 신앙의 진리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요한의 세례는 말씀을 통해 인류에게 신앙을 심어주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거듭나는 삶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그 신앙 가운데로 주님이 오셔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신앙 안으로 선을 동반한 진리가 흘러 들어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불은 사랑이나 선을 뜻하기 때문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오늘 본문에서는 주의 백성과 나라라 하지 않고, 그냥 ‘주의 백성’이라고만 말한 것입니다. ‘나라’까지 말씀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주님뿐이시기 때문입니다. ‘’은 진리이지만, ‘성령과 불’은 거기에 담기는 선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들이 죄 사함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 하지 않고, 그들이 ‘죄 사함으로 말미암은 구원의 지식을 알게 한다’라고 했는데요, 이 ‘구원의 지식’(the knowledge of salvation)이라는 표현은 영어 성경에 나오는 표현입니다.

 

※ 위 77절 영어 번역은, to give the knowledge of salvation to His people for the forgiveness of their sins, 입니다.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요한은 사람들에게 신앙을 심어주는 역할만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신앙의 핵심인 죄 사함과 구원의 문제는 주님 당시 유대인들에게도 매우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유대인들이 정결 예식을 중요하게 여긴 것도 그래서입니다. 그뿐 아니라 유대인들은 생활 속에서도 늘 부정한 것을 물로 씻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다 생각한 것이지요. 그래서 주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식사하려고 하자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노골적으로 제자들을 비난한 것입니다.

 

죄라는 게 물로 씻어지듯 순식간에 씻어진다고 믿는 것은 저 유대교회 유대인들뿐 아니라 오늘날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주님에 대한 신앙 고백만으로도 죄가 씻어진다고 가르칩니다. 심지어는 임종 시, 주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면 그는 죄 사함을 받고 구원받는다 가르치는데요, 그것은 저 유대인들의 생각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죄라는 것은 신앙의 고백만으로는 절대로 씻어지지 않습니다. 신앙과 그에 따른 삶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요한복음 4장 23절에서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요4:23)

 

이 말씀에서 진리는 신앙을 뜻합니다. 그리고 영은 신앙에 따른 삶을 뜻합니다. 아래는 이와 관련된, ‘천국의 비밀’ 5398번 글입니다.

 

오늘날 교회에 속한 사람들이 거듭남에 대해 거의 모르는 까닭은, 그들이 죄 사함과 의롭게 되는 것에 대해 말은 많이 하지만, 그럼에도 죄는 순간적으로 씻어진다고 믿으며, 또 어떤 사람은 물로 몸의 더러운 것이 씻어지듯 그들도 그렇게 씻어질 것이라고 믿으며, 그리고 사람은 신앙만으로, 그리고 순간의 확신으로 의롭게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죄는 어떤 방법으로도 씻기지 않으며, 사람이 주님에 의해 선 가운데 있을 때 떨어져 나가거나 거절되어 한 옆으로 밀려나게 되고, 그렇게 해서 기승을 부리지 못할 뿐이다. 계속해서 악을 내쳐야 한다. (이순철 역) At the present day they who are of the church know so little about regeneration that it is scarcely anything. They do not even know that regeneration goes on through the whole course of life of one who is being regenerated, and that it is continued in the other life; or that the arcana of regeneration are so innumerable that scarcely a ten thousandth part of them can be known by the angels, and that those they do know are what effect their intelligence and wisdom. The reason why they who are of the church at this day know so little about regeneration is that they talk so much about remission of sins and about justification, and believe that sins are remitted in a moment, and some that they are wiped away like filth from the body by water, and that man is justified by faith alone or by the confidence of a single moment. The reason why the men of the church so believe is that they do not know what sin or evil is. If they knew this, they would know that sins can by no means be wiped away from anyone, but that when the man is kept in good by the Lord they are separated or rejected to the sides so as not to rise up, and that this cannot be effected unless evil is continually cast out, and this by means which are unlimited in number, and for the most part unutterable. (AC.5398)

 

그러므로 진정한 신앙이란 이러한 것들을 알고 시인하는 것입니다. 신앙 고백만으로 순간적으로 죄가 씻어진다고 믿는 것은 참 신앙이 아닙니다. 악의 유혹을 끊임없이 거절함으로써 중심에 있던 악들이 옆으로 밀려나 다시는 기승을 부리지 못하는 상태, 그것이 죄 사함이라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한 신앙이 없다면 우리는 매일 죄를 지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나아가 ‘주님! 제가 주님을 믿습니다’라고 하면서 구원받았다고 믿을 것입니다. 그런데 진정한 신앙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78, 79절에서는 죄 사함과 구원에 대한 올바른 신앙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시는지를 말합니다.

 

78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79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

 

먼저 78절,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 죄 사함과 구원에 대해 바로 아는 것이 주님의 무한한 사랑과 자비에서 비롯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없었다면, 우리는 주님을 알 수도 없었을 것이고,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말씀을 통해 구원의 길이 어떤 것인지를 알려주셨는데요, 바로 그것이 주님의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는 그 모든 것이 ‘우리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라고 합니다. 말씀에서 해는 주님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래서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 믿는 사람들, 곧 주님을 신앙하는 사람들에게 임재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각 사람에게 오셔서 하시는 일은 어떤 일입니까?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를 일으키시고 그들의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오시기 전에는 모두가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었다’고 하십니다. 말씀에서 ‘앉아 있다’는 표현은 사람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의지의 상태, 즉 그의 생명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생명이신 주님이 각 사람의 신앙 가운데로 오시기 전에는 그의 생명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인데요, 그것을 말씀에서는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말씀을 통해 주님을 믿기 시작할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신다고 하세요. 여기서 발은 사람의 가장 아래쪽에 있기 때문에 자연적 삶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평화는 주님과 하나가 될 때 느끼는 내적 기쁨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신다는 것은, 우리의 자연적 삶 가운데 주님이 계신다는 것이고요, 그로 말미암아 천국의 기쁨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통해 주님을 믿을 때, 그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신다고 하세요. 그리고 자연적인 삶 안에서 역사하셔서 우리를 천국의 기쁨 가운데로 인도하신다고 하십니다.

 

끝으로 80절입니다.

 

80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

 

여기서 이스라엘은 영적인 사람들, 또는 영적인 교회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는 그냥 요한이 장성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진리가 그것을 받아들인 사람들 안에서 성장하는 것을 말합니다. 말씀의 진리가 성장한다는 것은, 말씀이 각자의 내면에서 신실한 신앙이 되는 것이고요, 그리고 그 신앙이 삶 가운데 뿌리를 내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오늘 말씀에서는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사람들의 내면에 교회가 세워집니다. 그러기 전에는 교회가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는 ‘아이가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말씀의 진리를 받아들인 다음, 그것을 삶으로 옮기기 전에는 아직 이스라엘, 즉 교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직은 교회가 아니라 빈 들, 그러니까 광야와 같다는 것이지요. 신앙의 지식은 있을지 모르지만, 진정한 진리는 아직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는 ‘아이가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난 시간과 오늘, 두 번에 걸쳐 사가랴의 예언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한 번은 세상에 오실 주님에 대해서, 그리고 또 한 번은 세례 요한에 대한 예언이었습니다. 주님 말씀에 의하면, 요한은 마지막 선지자였고, 오리라 한 엘리야였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엘리야와 마찬가지로 말씀이신 주님을 표상했으며, 또한 요한 이후에는 다시는 선지자가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주님께서 사람들에게 직접 오셔서 구원을 섭리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요한이 세상에 온 목적은,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길을 예비한다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말씀으로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이고요, 그렇게 해서 그들의 마음을 주님께로 돌리는 일입니다. 주님은 오래전부터 요한이 만들어 놓은 길을 통해서 세상을 구원하실 계획을 세우셨던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읽다 보면 나 자신의 영적 상태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즉 아직 요한의 가르침 아래 있는 상태인지, 아니면 본격적으로 주님의 인도를 받고 있는지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아직 요한의 가르침을 받고 있다면 아직도 신앙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거듭남의 상태로 나아가야만 합니다. 다시 말해서 진리를 아는 데만 그쳐서는 안 되며, 그것을 가지고 자기 안의 악과 거짓과 싸워 이겨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 안에서 요한의 때가 물러가고 주님의 때가 열립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우리 성도님들과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15마침내 위에서부터 영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리니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며 아름다운 밭을 숲으로 여기게 되리라 16그 때에 정의가 광야에 거하며 공의가 아름다운 밭에 거하리니 (사32:15-16)

 

아멘

 

원본

2016-07-24(D1)

청주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3-03(D6)

한결같은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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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가랴의 예언 (1)

 

 

67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예언하여 이르되 68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며 69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70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71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일이라 72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73곧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라 74우리가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받고 75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 (눅1:67-75)

 

 

사가랴는 아이가 태어난 지 팔 일째 되는 날, 아이에게 할례를 행하고, 아이의 이름을 요한이라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의 혀가 풀리면서 다시 말을 하기 시작했는데요, 여기까지가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내용입니다. 그리고 오늘은 그 이어지는 본문 67절로 75절입니다.

 

67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예언하여 이르되

 

아시는 것처럼, 사가랴는 천사를 만난 다음 한동안 말을 하지 못했는데요, 천사가 전하는 말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랬다가 아이의 할례 때, 서판에 아이의 이름을 요한이라 적은 후에야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다시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주께서 천사를 통해 하신 말씀을 온전히 믿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제 이렇게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예언을 시작합니다. 그동안 사가랴에게 일어났던 일들은 영적 의미로 어떤 뜻일까요? 그것에 대해 우리는 지난 시간에 충분히 말씀을 나눴는데요, 그동안 사가랴에게 일어났던 모든 일은 그 속뜻으로는 사가랴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모든 영적 변화들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으로부터 새로운 진리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영적 변화들인 것인데요, 이를테면, 사가랴-엘리사벳 부부에게 아이가 생겼다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새로운 말씀을 받는 것이며, 말씀을 통해 새로운 신앙이 형성되는 것을 의미하고, 그리고 해산할 기한이 차서 아들을 낳는 것은 신앙의 결실을 보는 것, 다시 말하면, 신앙으로 사는 것이며, 그렇게 해서 그의 내면에 선을 쌓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사가랴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예언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그냥 사가랴라 하지 않고, ‘그 부친 사가랴’라 하는데요, 이는 새삼스럽게 사가랴가 요한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밝히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 무엇일까요? 말씀에서 아버지는 여러 가지 의미로 쓰이는데, 여기서는 선을 뜻합니다. 아버지가 선을 뜻하는 까닭은, 선으로부터 진리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태양의 열기로부터 빛이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선이 진리보다 앞선다는 것이죠. 그래서 말씀에서는 선을 아버지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본문에서 ‘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라는 표현은, 사가랴로 표상되는 사람들에게 있는 선 가운데로 진리가 흘러들어와 충만한 상태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때 사가랴는 예언을 시작합니다.

 

신앙생활은 이렇게 처음 진리를 받아들이게 되면, 그다음에는 진리를 바탕으로 선을 획득하는 과정이 따르고요, 그러고 나면, 다시 그 선을 통해 이번에는 진리를 획득하는 과정이 시작됩니다. 그것은 그동안 출애굽기 말씀을 공부하면서 배웠던 사실입니다.

 

※ 이순철 목사님은 2016년 당시 청주 새 교회 담임을 하시면서 격주로, 그러니까 누가복음과 출애굽기를 격주로 강해하셨는데요, 위 말씀은 이런 배경의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처음에는 진리의 시험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시험이 끝나자 곧 선의 시험이 왔고요, 그러고 나서 다시 진리의 시험이 시작됐습니다. 이렇게 진리의 시험과 선의 시험이 반복되면서, 주님으로부터 한번은 진리를 획득하고, 한번은 선을 획득하는 과정이 계속됩니다. 그런 식으로 내면에서 끊임없이 영적 변화가 일어나는 사람들, 즉 사가랴와 같은 사람들에게 주님은 성령으로 함께 하시고요, 그에게 예언을 하도록 만드십니다. 그래서 본문에는 ‘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예언했다’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사가랴의 예언은 어떤 것입니까? 사가랴의 예언은 한마디로, 성령이 사가랴의 입을 통해서 세상에 오실 주님을 증언하는 것인데요, 이제 그 증언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68절입니다.

 

68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며

 

그냥 하나님을 찬송하라 하지 않고,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라 합니다. 이 말씀은 세상에 오실 주님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인정하고, 그분을 찬송하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세상에 계실 때, 당신 자신을 한 번도 여호와라고 부르신 적이 없습니다. 만약 주님께서 그렇게 부르셨다면, 주님은 아마 세상에 오신 목적을 이루시기도 전에 유대인들로부터 큰 화를 당하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여호와라 하시지 않고, 그러한 사실을 우회적으로만 밝히셨습니다. 예를 들면, 마가복음 12장 29절인데요,

 

29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30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막12:29-30)

 

여기서 ‘’라는 표현은 주님 자신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주님에 대해 ‘’라고 한 적이 별로 없습니다. 그것은 신명기 6장 4, 5절 말씀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데요, 거기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4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5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신6:4-5)

 

앞에서 마가복음 12장 29절의 말씀은 바로 이 말씀입니다. 다만 구약의 여호와라는 표현을 주님이라고 바꾼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에 오신 주님이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것이 구원을 위한 가장 첫 번째 진리이기 때문에, 오늘 사가랴는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도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69, 70절에서 사가랴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69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70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이 말씀은 모두 세상에 오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다윗의 집’은 주님이 세우실 새 교회를 나타냅니다. 왜냐하면 다윗은 진리로 세상에 오시는 주님을 표상하기 때문인데요, ‘다윗의 집’은 주님께서 새로 세우시는 교회인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의 뿔’은 진리를 통해서만 발현되는 선의 능력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주님의 전능하심을 뜻합니다. 주님은 그 전능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고자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하신 것이지요. 사가랴는 계속해서, ‘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라고 하는데요, 그렇습니다. 주님이 세상에 오시는 것은 구약의 모든 예언서에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해 일관되게 밝히신 진리입니다. 그것은 인류가 생긴 이래로 주님께서 줄곧 계획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주님께서 오셔서 이루신 일은 어떤 것입니까?

 

71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일이라

 

주님은 유대교회가 타락해 종말로 치달을 때, 그리고 교회가 만들어내는 악과 거짓 진리가 인간의 양심을 질식시킬 때, 그 악과 거짓으로부터 인간을 구해내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말씀에서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는 바로 우리 안에 있는 악과 거짓을 말합니다. 그것으로부터 주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내십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일들은 주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자비에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72절은 주님의 사랑과 자비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72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인간을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는 모든 일은 오직 주님의 자비에서 비롯되는 일이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한순간도 인간을 미워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인간은 죄를 짓거나 할 때, 주님께서 벌을 내리시지나 않을까 두려워할 때가 많은데요, 그런데 주님은 한 번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요, 인간들처럼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성을 내시거나 미워하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시고, 언제나 가엾게 여기십니다. 주님의 마음을 모르는 인간의 무지함이 가엾고요, 악과 거짓을 상대로 늘 넘어지고, 좌절하는 모습을 측은히,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언제나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며 기억하신다 하는 것입니다. ‘천국의 비밀’ 9849번 글에서는 주님이 기억하신다는 말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주님이 기억하신다는 것은 가엽게 여기시는 것이며, 그러므로 당신의 자비로 보호하시고 구해내시는 것을 뜻한다. (이순철 역) remembering,” when said of the Lord, denotes to have compassion, and thus from mercy to preserve or deliver

 

주님은 긍휼과 자비로 그렇게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겠다 하십니다. 그러면 거룩한 언약은 어떤 것입니까? 주님과 인간이 하나가 되는 것이고요, 그렇게 해서 인간을 모두 빠짐없이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73곧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라

 

여기서 ‘우리 조상’은 인류 최초의 교회인 태고교회를 말합니다. 그 교회 이름을 아브라함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말씀에서 주님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여기서 아브라함은 천적인 것, 다시 말하면, 주님에 대한 사랑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은 태고교회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태고교회 사람들은 오직 주님만 사랑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세상에 오시는 일은 오직 주님만을 사랑했던 태고교회 이래로 줄곧 주님께서 맹세하신 일입니다. 인간이 하는 맹세는 거짓이지만, 주님께서 하시는 맹세는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리입니다. 맹세라는 것은 오직 주님만이 하실 수 있으며, 그래서 오직 주님만이 진리를 맹세하실 수 있습니다. 주님은 마태복음 5장 17, 1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7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18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마5:17-18)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주님께서 세상에 오시기 전의 주님에 관한 모든 예언은 가능성으로서의 진리라는 것입니다. 잠재적으로 가능성을 열어둔 것일 뿐, 아직 실현되지 않은 진리인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세상에 오심으로 해서 그 모든 가능성이 실현되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진리는 이렇게 자연적인 이 세상에서 실현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진리는 우리 삶 가운데서, 삶의 구체적 행위 가운데서 실현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가능성으로만 남아 있을 뿐, 우리의 생명이 되지 못합니다. 주님은 세상에 오심으로써 그것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하셨는데요, 여기서 율법은 모세가 기록한 말씀이고요, 선지자는 구약의 모든 예언서를 나타냅니다. 그러니까 율법이나 선지자는 바로 주님의 말씀 전체입니다. 주님은 그 말씀의 진리를 실현키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74우리가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받고 75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

 

원수의 손’이란 조금 전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악과 거짓의 위세를 뜻합니다. ‘원수의 손’이라고 할 때, 손은 능력을 뜻합니다. 악과 거짓에게도 능력이 있습니다. 그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영적 싸움을 해 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압니다.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능력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힘만으로 대처하고자 할 때에는 누구도 이길 수 없는 무시무시한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능력 앞에서는 마치 바람 앞에 티끌처럼, 먼지처럼, 그리고 빛 앞에 짙은 어둠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처럼, 그렇게 아무 힘도 쓸 수 없는 것이 악과 거짓입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악과 거짓이 신앙인들에게 얼마나 위력적이며, 두려운 것인가를 보여주는 대목이 있습니다. 우리가 앞에서 이미 배운 것이죠.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바닷가에 진을 치고 있을 때, 앞에는 홍해가 버티고 있고, 뒤로는 애굽의 기병과 전차가 쏜살같이 쫓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우리 신앙인들은 영적 시험 가운데서 오도 가도 못하는 위기의 상황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를 압도하는 악과 거짓의 위력 앞에서 우리는 늘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런데 ‘천국의 비밀’ 2826번 글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두려워하는 것은 주님을 신뢰하지 않거나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이순철 역) to “fear” is to distrust, or not to have faith and love.

 

저는 가끔 ‘이 말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라고 속으로 외칠 때가 있습니다. ‘저는 누구보다도 주님을 믿고 사랑합니다. 다만 저 자신을 믿지 못할 뿐입니다’라고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내면 깊은 곳을 들여다보면, 아직 주님보다는 나를 더 신뢰하고, 주님보다는 세상의 감각적인 것들을 더 사랑하는 모습이 분명히 보입니다. 그때 우리는 다시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말씀입니까?’라며 절망합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께서는 ‘네가 종신토록 내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십니다. 이 말씀을 읽는 순간 너무나도 든든하고 마음에 힘이 되었습니다. ‘성결과 의로 섬긴다’는 것은 ‘신앙과 삶으로 주님을 섬기게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말씀에서 ‘성결하다’는 것은 진리, 또는 신앙에 대해 하는 말이고요, ‘의롭다’는 말은 사랑, 또는 선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결과 의로 섬기는 것, 두려움 없이 섬기는 일은 인간의 힘으로는 될 수 없고, 오직 주님께서만 하실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 일을 하시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될까요? 자기 마음속 애정을 늘 살피면서 자아가 하려는 일을 끊임없이 포기해야 합니다. 그리고 오직 주님의 말씀만 믿고 따라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난 몇 주 동안, 사가랴가 겪은 일들은 어쩌면 주님으로부터 새로운 진리의 말씀을 받아들인 사람들이면 누구나 다 겪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진리를 믿고, 그것에 따라 사는 사람들은 사가랴와 같이 성령이 함께 하시고, 예언을 할 수 있습니다. 예언이란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주님이 주신 진리를 그대로 이웃에게 전하는 일입니다. 멀리 앞을 내다보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요, 주님께서 주신 진리를 그대로 전하는 것이 예언입니다. 그런데 진리를 전하는 것이 꼭 말로 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웃을 위해 하는 모든 일 가운데 성령이 저절로 역사하시도록 하면 됩니다. 아마 그것이 사가랴가 성령이 충만한 가운데 예언하는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성령은 주님에게서 나오는 진리의 영이며, 그러므로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진리를 전하려고 하다 실패했던 지난날 여러 경험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진리가 스스로 말하도록 하지 않고, 내가 말을 했던 것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사가랴의 입을 통해 성령이 가르치신 것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세상에 오신 주님은 곧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주님과 여호와 하나님을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로 이해하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만약 그렇게 믿는다면, 우리는 두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됩니다. 그래서 결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말씀에서 아들은 진리로 세상에 오신 주님이시며, 아버지는 주님 안에 신적 선으로 존재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두 번째 예언은, 주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아주 오래전, 아담으로 상징되는 태고교회 때부터 주님께서 약속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구원의 뿔을 다윗의 집에 일으키신 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말씀하신 것이며,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그 맹세를 지키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사가랴의 세 번째 예언은,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입니다. 그것에 대해 오늘 본문에서는 ‘원수의 손에서 건지시고, 종신토록 주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 없이 섬기게 하려함이라’라고 말합니다. 저는 이 ‘종신토록’이란 말과, ‘두려움 없이’라는 말을 참 좋아합니다. 주님을 섬기는 일이 한결같지 않고, 또 늘 두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두려움이란, 주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고요, 나의 자아가 어디로 움직일지 몰라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신다고 합니다. 각 사람에게 오셔서 타고난 자아를 천국의 자아로 바꾸어 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움 없이 주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의와 성결로 주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사가랴를 통한 성령의 은혜가 우리 성도님께도 꼭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사43:1)

 

아멘

 

 

원본

2016-07-10(D1)

청주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3-02(D5)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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