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예배(2023/6/27, 눅10:17-20),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시는 주님'
즐겨찾기/한결같은교회.예배 2023. 6. 27. 09:49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시는 주님
17칠십 인이 기뻐하며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18예수께서 이르시되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19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 20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눅10:17-20)
마가복음 16장 18절에서 주님은 ‘뱀을 집어 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지옥의 영들이 아무리 교활하고 악의를 가지고 덤벼도 주님이 지키시는 사람들은 해칠 수 없음을 뜻한다. (AE.581:6)
지난주에는 진리를 믿지 않고 인간의 지식을 믿는 사람들이라는 주제로 설교를 전해드리면서 최근에 문제가 되고 있는 어느 장관의 인사를 예를 들어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주중에 교인 한 분이 전화를 해 제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보수정당 당직자들의 자녀도 문제가 많은데 왜 법무장관 자녀만 가지고 비판을 하느냐, 그것은 중립적인 태도가 아니지 않는가? 라고 하셨습니다.
※ 이 설교는 지난 2019년 9월 설교로, 검색을 해보니 당시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인사로 온 나라가 떠들썩하던 때였습니다.
생각해 보니 듣는 사람에 따라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그러나 제가 그런 말씀을 드린 것은 정치적인 의도를 가지고 한 것은 아닙니다, 국민의 절반 이상이 부도덕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사법제도를 개혁하겠다고 하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교리적인 측면에서 설명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잘못이 있으면 우편에 있는 사람이나 좌편에 있는 사람이나 비판을 받아야 합니다. 내가 지지하는 쪽의 사람이라고 해서 잘못이 있는데도 잘못이 없는 것처럼 옹호하거나, 또는 다른 쪽 사람의 잘못을 파헤쳐 자기 쪽 사람의 잘못을 희석, 물타기를 하려고 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닙니다. 특히 새 교회 분들은 그러면 안 됩니다. 저는 우리 교회 분들이 모두 세상에 속한 사람이 되지 않고 천국에 속한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무슨 일이든 자아와 세상의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고 항상 진리의 시각으로 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영적인 분별력을 잃지 않습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지만, 주님으로부터 우리 마음 가운데로 끊임없이 흘러들어오는 진리의 강이 있습니다. 그 강은 처음에는 큰 물줄기로 흐르다가 점차 수많은 작은 물줄기로 바뀌고, 그렇게 해서 속 사람과 겉 사람, 기억의 미세한 부분에까지 흘러 들어갑니다. 그것은 마치 인체의 혈액이 동맥과 정맥과 미세혈관을 통해 아주 작은 세포 안에까지 흐르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은 그런 방법으로 우리 마음속 미세한 부분에까지 선과 진리를 공급하십니다. 만약 우리가 자아와 세상의 논리로 사물을 바라본다면 혈액에 때가 끼는 것처럼 마음속에 거짓이 쌓입니다. 왜냐하면 거짓을 진리로 알고 계속 받아들이기 때문인데요, 그렇게 거짓이 쌓이다 보면 그 거짓들로 인해 주님과 연결된 진리의 통로가 막혀버립니다. 어쩌면 최근에 문제가 되고 있는 사람들도 그런 사람들일지 모릅니다. 마음속을 흐르는 진리의 강이 막힌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거짓말을 하면서도 그것이 거짓인 줄을 모릅니다.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도 않습니다. 주님과 연결된 선과 진리의 흐름이 완전히 막혔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항상 진리의 시각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진리의 강이 흐릅니다. 강둑에는 나무가 푸르고 새가 날아다닙니다. 이사야서 58장 11절에서는 그런 사람들을 가리켜,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사58:11) 했습니다. 자아와 세상의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시험에 들기 쉽고, 일단 시험에 들면 벗어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진리가 없으며, 그러므로 주님의 능력이 미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에는 그런 사람들에게 달려드는 지옥의 영을 뱀과 전갈로 비유합니다. 어떻게 하면 뱀과 전갈을 피할 수 있을까요? 본문의 말씀을 통해 알아보겠습니다. 먼저 17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17칠십 인이 기뻐하며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여기서 ‘칠십 인’은 주님께서 복음을 전하라고 각처로 보내셨던 칠십 인의 제자들입니다. 즉 진리를 따라 체어리티(charity)의 삶을 사는, 교회 안의 모든 사람입니다. 그들이 세상에 나갔다 돌아오는 것은 신앙인들의 일상의 삶을 나타냅니다. 즉 세상에 나가 주님의 말씀에 따라 살기도 하고, 주님에게로 돌아와 새로운 힘을 얻기도 하는 그런 삶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기뻐하며 돌아왔다’고 합니다. 무엇이 그렇게 기뻤을까요? 진리에 따라 체어리티의 삶을 사는 것이 기쁘고, 그러한 삶을 통해 새 교회의 진리가 세상으로 퍼져나가는 것이 기뻤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때 주님이 주시는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기쁨에 대해 제자들은 좀 더 구체적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귀신은 신앙인들을 순간순간 괴롭히는 지옥의 유혹을 뜻합니다. 지옥은 신앙인의 삶 곳곳에 교활하고 악의적인 덫을 놓아 그들을 사로잡으려고 합니다. 그때 지옥의 유혹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주님의 이름에 의지하는 것뿐입니다. 주님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주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입니다. 주님은 눈에 보이시지도 않고, 귀에 들리게 말씀하시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때로는 무모해 보입니다. 두 손 놓고 주님을 믿기만 하라는 말인가 하는 회의가 들 때도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주님이 우리를 위해 싸워 결국 이기신다는 것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넘어지면 일어서고 넘어지면 다시 일어서 싸워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동안 나는 점점 더 낮아지고, 믿음은 점점 더 깊어집니다. 주님에 대한 믿음은 한 번에 생기지 않습니다.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자아가 낮아질 대로 낮아져야 그때부터 조금씩 믿음이 생깁니다. 우리가 주님을 온전히 믿을 때, 시험에서 한 번 이길 힘이 생깁니다. 그리고 한 번 이길 때, 두 번 세 번 이길 힘이 생깁니다. 그리고 그토록 우리를 괴롭히던 귀신이 마침내 물러갑니다. 그것이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의 항복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칠십 인의 제자들은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느끼는 기쁨은 지옥의 영들로부터 다시는 해를 당하지 않을 사람들이 느끼는 천국의 평화입니다.
18예수께서 이르시되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신앙인들을 끈질기게 괴롭히던 지옥의 귀신들도 때가 되면 지체하지 않고 물러납니다. 그 모습을 18절에서는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으로 표현 했습니다. 여기서 ‘하늘’은 사탄이 괴롭히는 주님의 교회이며, 또는 내면에 교회가 있는 신앙인들을 뜻합니다. 그래서 19절에서 주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9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
말씀에서 ‘뱀’은 지옥의 영들의 교활함과 악의적인 모습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전갈’은 신앙인들의 이성을 마비시키는 거짓 논리와 그 능력을 뜻합니다. 전갈의 독에 쏘이면 사람의 몸이 마비되어 꼼짝을 못 한다고 합니다. 그만큼 전갈의 독은 치명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전갈은 진리를 왜곡하는 거짓 논리와 그 능력을 뜻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당신의 제자들에게 주시겠다고 합니다. ‘뱀과 전갈을 밟는 능력’은 뭘까요? 지옥의 악의적인 도발과 거짓 논리에 넘어가지 않는 것입니다. 또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은 지옥의 영들에 의해 더 이상 해를 입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온전한 믿음으로 체어리티의 삶을 사는 사람들은 세상의 어떤 유혹이나 거짓 진리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20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주님께서는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이름이 하늘에 기록될 때 참된 평화가 있다는 뜻입니다. ‘기쁨’은 주님이 주시는 평화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귀신이 항복하는 영적 상태’와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는 영적 상태’는 어떻게 다를까요? 대개는 같지만, 그러나 언제나 같은 것은 아닙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온전한 믿음을 갖지 않은 사람에게도 귀신이 항복하는 경우가 간혹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주님께서는 온전한 믿음을 갖지 않은 사람, 즉 믿음만 있고 체어리티의 삶을 살지는 않는 사람들에게도 때로는 진리를 전하는 일을 맡기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음 마태복음 7장 말씀은 주님의 일을 하면서도 회개하지 않는 사람에 대한 말씀입니다.
22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7:22-23)
때로는 체어리티의 삶을 살지 않는 사람들도 다른 사람에게 진리를 가르칠 수 있습니다. 귀신을 쫓아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들이 주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그런 신앙인들에게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라 하시고, ‘내게서 떠나가라’ 하십니다. 참으로 두려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귀신들이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신 것입니다.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는 것’은 우리의 믿음과 사랑이 각자의 생명책인 의지에 기록되는 것입니다. 의지는 곧 사람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믿음과 사랑이 의지에 새겨질 때, 우리는 비로소 믿음에 따라 기쁨으로 이웃 사랑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에서 주님이 택하셔서 복음을 전하게 하신 칠십 인의 제자들은 우리와 같은 평범한 신앙인들입니다. 그렇지만 각자의 믿음의 상태가 모두 같지는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진리에 따라 체어리티의 삶을 살고, 어떤 사람은 사랑으로부터 체어리티의 삶을 삽니다. 새 교회에서는 전자의 사람을 영적인 사람이라고 하고, 후자의 사람을 천적인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또 어떤 경우는 믿음만 있고 체어리티의 삶을 살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각자 믿음의 분량에 따라 진리를 전하는 사명을 그들에게 맡기십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세상에 내보내시면서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10:16) 하셨습니다. 그만큼 진리를 대적하는 거짓 논리가 세상에 만연하다는 뜻입니다. 거짓 논리는 전갈의 독과 같아서 잘못 쏘이면 이성이 마비되고 분별력을 잃습니다. 그러므로 자아와 세상의 논리에 휩쓸리지 말고 언제나 진리의 시선으로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내적인 믿음으로 이름을 하늘에 기록하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이 메시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길 축원합니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출20:7)
아멘
원본
2019-09-22(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6-27(D3)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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