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4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5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3-5)

 

말씀에 나오는 숫자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 겉뜻들과는 달리 어떤 속뜻들이 있는데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가령, 3이라는 숫자, 7이라는 숫자, 10이라는 숫자, 12라든지, 40이라든지, 100이라든지, 더 나아가 계시록에 나오는 1,000, 144,000 등... 1에서 9까지의 숫자들의 의미는 두 자릿수, 세 자릿수 등 복합수가 되면서 그 의미가 확장, 예를 들면, 책 한 권 분량의 의미가 어떤 큰 숫자 하나로 표현될 정도로 깊은 의미들을 지니게 됩니다. 천사들한테는 말이죠.

 

그리고 여기 우리가 사는 이 시공간의 나라와는 달리 천국은 상태와 그 상태변화의 나라이기 때문에, 천국에서는 저 숫자들 역시 어떤 상태와 그 변화를 나타내는 쓰임새를 가지며, 그래서 말씀 역시 천사들은 그렇게 이해하며 읽는데요,

 

그러니까 이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의 의미는, 아담이라는 첫 번째 태고교회에 ‘구백삼십’(930)으로 표현되는 어떤 수많은 상태와 그 변화가 있었으며, 그후 이 교회의 퍼셉션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는 의미로 읽으시면 되겠습니다. 이 퍼셉션으로 늘 주님과 연결된 상태가 살아있는 상태인데, 그러므로 교회에 이 퍼셉션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건 곧 그 교회는 죽었다, 그 교회의 쓰임새가 다했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참고로, 퍼셉션(perception)이란 천국에서 주님과 천사들 간에 있는 커뮤니케이션 방식으로, 주님으로부터 오는 어떤 내적 음성(an internal dictate)을 지각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창3:8) 같은 것이지요. 이런 방식의 커뮤니케이션이 아직까진 그래도 존재했던 시기를 태고교회(the most ancient church)라 하며,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새로운 방식이 시작된 때를 고대교회(the ancient church)라 합니다. 새로운 방식은 양심(conscience)입니다. 즉 노아의 홍수를 기점으로 그 이후 사람들은 이전 선조들이 누렸던 방식을 잃어버리고, 새로운,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저급한 방식으로 주님과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도 그 내면이 열린 사람들, 즉 삶이 받쳐주는 신앙인들은 이 퍼셉션으로 주님과 커뮤니케이션을 합니다. 그리고 주님과 커뮤니케이션을 한다는 것은, 특별히 어디 가서 누구에게 학습하지 않고도 지금 이 선과 진리가 주님으로 말미암았는지 여부를 주님으로 말미암아 안다는 것입니다. 주님 말씀하신, 내 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요10:27)처럼 말입니다.  

 

이 ‘구백삼십’을 비롯, 노아의 홍수 전까지 존재했던 태고교회 전체 기간이 실제로, 그러니까 지구 나이로 얼마만큼 존속했는지는 모릅니다. 지구의 나이가 45, 6억 년이나 되고, 그 사이 오늘날 고고학으로는 도저히 설명 불가한 소위 오파츠(Out-of-place artifacts, OOPARTS)라는 것들이 발견되는 걸 보면, 우리가 알 수 없는, 그리고 주님도 굳이 우리에게 자세히 알려주시지는 않는, 그런 어떤 장구한 세월이지 않을까 추측만 할 뿐입니다.

 

첫 번째 태고교회인 아담은 그동안 지상에 존재했던 모든 교회 중 주님이 가장 사랑하신 교회였습니다. 그러니까 천적(celestial) 교회, 천적 인간이었기 때문이지요. 창세기 2장 3절에 나오는 일곱째 날’이 바로 이 교회입니다. 반면, 창5에 쭉 나열되는,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 및 므두셀라 등 이후 노아로 연결되는 교회들은, 그러나 후대로 갈수록 점점 황폐해져서 결국 대홍수, 노아의 홍수로 표현되는 첫 번째 종말을 맞이하게 되는 교회들입니다. 교회가 황폐해진다는 건, 교회 안에 주님의 신성, 곧 주님으로 말미암은 선과 진리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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