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30)

 

AC.59

 

여기서 자연적 인간의 음식으로 오직 모든 푸른 풀(vegetable and the green of the herb)만이 언급되는 이유는 이렇습니다. 거듭남의 과정에서 사람이 영적 인간이 되어 가는 동안, 그는 끊임없이 전투에 놓이게 되며, 이 때문에 주님의 교회는 전투하는 교회(militant)라 불립니다. 거듭나기 전에는 욕정들이 지배권을 가지는데, 이는 인간 전체가 욕정들과 거기에서 나온 거짓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거듭남의 과정에서 이 욕정들과 거짓들은 한순간에 제거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 전체가 파괴되고 말기 때문인데, 이는 그가 지금까지 획득해 온 유일한 생명이 바로 그런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악한 영들이 오랜 시간 동안 그 사람과 함께 있도록 허락되며, 이들은 그의 욕정들을 자극합니다. 그 결과 욕정들은 수없이 다양한 방식으로 느슨해지고, 마침내 주님에 의해 선을 향해 기울어질 수 있게 되며, 이렇게 사람이 개혁됩니다. 이 전투의 시기 동안, 사랑과 신앙, 곧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에 속한 모든 선과 진리를 극도로 미워하는 악한 영들은, 사람에게 채소와 푸른 풀에 비유되는 음식 외에는 아무 것도 남겨 주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사람에게 씨 맺는 채소열매 맺는 나무에 비유되는 음식도 주시는데, 이는 평온과 평화의 상태와 그 안에 있는 기쁨과 즐거움입니다. 이 음식은 주님께서 간헐적으로 주십니다. The reason why the “vegetable and the green of the herb” only are here described as food for the natural man is this. In the course of regeneration, when man is being made spiritual, he is continually engaged in combat, on which account the church of the Lord is called “militant”; for before regeneration cupidities have the dominion, because the whole man is composed of mere cupidities and the falsities thence derived. During regeneration these cupidities and falsities cannot be instantaneously abolished, for this would be to destroy the whole man, such being the only life which he has acquired; and therefore evil spirits are suffered to continue with him for a long time, that they may excite his cupidities, and that these may thus be loosened, in innumerable ways, even to such a degree that they can be inclined by the Lord to good, and the man be thus reformed. In the time of combat, the evil spirits, who bear the utmost hatred against all that is good and true, that is, against whatever is of love and faith toward the Lord—which things alone are good and true, because they have eternal life in them—leave the man nothing else for food but what is compared to the vegetable and the green of the herb; nevertheless the Lord gives him also a food which is compared to the herb bearing seed, and to the tree in which is fruit, which are states of tranquillity and peace, with their joys and delights; and this food the Lord gives the man at intervals.

 

[2] 주님께서 매 순간, 아니 매 순간의 가장 작은 부분까지도 사람을 보호하지 않으신다면, 그는 즉시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이는 영의 세계에는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에 속한 것들에 대해 형언할 수 없을 만큼 강렬하고 치명적인 증오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의 확실성은, 제가 지금까지 수년 동안, 비록 육신 안에 있으면서도, 저 세상의 영들, 그중에서도 가장 악한 영들과 함께 지내 온 경험을 통해 확언할 수 있습니다. 저는 때로 수천의 영들에게 둘러싸여, 그들이 독을 내뿜고 가능한 모든 방식으로 저를 괴롭히도록 허락받았으나, 주님의 보호 아래서 제 머리카락 하나도 해를 입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오랜 경험을 통해 저는 영의 세계와 그 본성, 그리고 거듭나고 있는 사람들이 영원한 생명의 행복에 이르기 위해 반드시 견뎌야 하는 전투에 대해 충분히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주제들은 일반적인 설명만으로는 누구도 의심 없는 신앙으로 믿게 만들 수 없기 때문에, 주님의 신적 자비(the Lord’s Divine mercy)에 관한 세부적인 내용들은 뒤이은 글들에서 계속 설명될 것입니다. Unless the Lord defended man every moment, yea, even the smallest part of every moment, he would instantly perish, in consequence of the indescribably intense and mortal hatred which prevails in the world of spirits against the things relating to love and faith toward the Lord. The certainty of this fact I can affirm, having been now for some years (notwithstanding my remaining in the body) associated with spirits in the other life, even with the worst of them, and I have sometimes been surrounded by thousands, to whom it was permitted to spit forth their venom, and infest me by all possible methods, yet without their being able to hurt a single hair of my head, so secure was I under the Lord’s protection. From so many years’ experience I have been thoroughly instructed concerning the world of spirits and its nature, as well as concerning the combat which those being regenerated must needs endure, in order to attain the happiness of eternal life. But as no one can be so well instructed in such subjects by a general description as to believe them with an undoubting faith, the particulars of the Lord’s Divine mercy will be related in the following pages.

 

 

해설

 

이 글은 창세기 1장에서 자연적 인간에게 주어진 음식이 왜 ‘채소와 푸른 풀’로 제한되는지를, ‘거듭남의 전투라는 관점’에서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을 점진적 성장이나 도덕적 개선으로 보지 않고, 실제적인 영적 전투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교회를 ‘전투하는 교회’라고 부르며, 개인의 거듭남 역시 동일한 성격을 가진다고 말합니다.

 

거듭나기 전 인간의 상태는 매우 분명하게 규정됩니다. 인간은 욕정과 거짓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것들이 그의 삶을 지배합니다. 이 욕정들은 단순히 제거할 수 있는 껍질이 아니라, 그 사람이 지금까지 ‘살아왔다고 느끼는 방식’ 그 자체입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즉시 제거하면 인간 전체가 무너집니다. 이 점에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현실적인 인간 이해를 보여 줍니다. 주님은 인간을 급격히 바꾸지 않으시고, ‘그가 견딜 수 있는 속도로만 변화시키십니다.’

 

이 때문에 악한 영들이 오랜 기간 동안 사람과 함께 있도록 허락됩니다. 이는 놀랍게 들릴 수 있지만, 스베덴보리에게서 이것은 주님의 섭리의 일부입니다. 악한 영들은 욕정을 자극하지만, 바로 그 자극을 통해 욕정은 점점 느슨해지고, 고정된 지배력을 잃습니다. 이렇게 욕정이 풀릴 때에야 비로소 그것들은 주님에 의해 선을 향해 기울어질 수 있습니다. 즉 전투는 파괴가 아니라 ‘재배열을 위한 과정’입니다.

 

이 전투의 한가운데서, 악한 영들은 사람에게 ‘채소와 푸른 풀’에 해당하는 것만을 허락합니다. 이는 자연적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생존 양식만이 유지되는 상태를 뜻합니다. 영적 기쁨, 깊은 평화, 확신에 찬 신앙은 이 시기에는 지속적으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 대신 삶은 단조롭고, 반복적이며, 버티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것이 바로 자연적 음식만으로 살아가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이 글의 중심은 절망이 아니라 ‘주님의 보호와 간헐적 위로’에 있습니다. 주님은 전투 중인 사람에게 ‘씨 맺는 채소’와 ‘열매 맺는 나무’에 비유되는 음식도 주십니다. 이것은 평온과 평화의 상태, 그리고 그 안에 있는 기쁨과 즐거움입니다. 중요한 점은 이 음식이 ‘항상’이 아니라 ‘간헐적으로’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는 전투의 현실을 유지하면서도, 사람이 완전히 꺾이지 않도록 하는 주님의 섭리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영적 체험을 길게 언급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주님의 보호가 없으면 인간은 단 한 순간도 견딜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영의 세계에는 선과 진리에 대한 극심한 증오가 존재하며, 이것은 인간의 상상 범위를 훨씬 넘어섭니다. 그래서 주님의 보호는 일반적인 방어가 아니라, ‘순간순간의 지속적인 보존’입니다.

 

이 글의 마지막에서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체험을 근거로 삼되, 그것을 독자에게 강요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인간이 이런 일을 ‘일반적인 설명만으로는 믿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래서 이후의 글들에서 점진적으로, 구체적으로 설명하겠다고 말합니다. 이는 AC 전체의 방식이기도 합니다. 진리는 한 번에 주어지지 않고, ‘받을 수 있는 만큼만’ 주어집니다.

 

이 글은 결국 이렇게 말합니다.

 

거듭남의 길은 평온한 상승 곡선이 아니라, 전투와 보호가 교차하는 길입니다. 자연적 인간의 음식이 제한되는 이유는 인간을 괴롭히기 위함이 아니라, 그가 무너지지 않고 다시 정렬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은, 인간이 느끼지 못하는 순간까지도 주님께서 지키시기 때문에 가능해집니다.  

 

 

심화

 

1.욕정, 거짓 및 악한 영들을 허락하시는 주님

 

 

AC.59, 심화 1, ‘욕정, 거짓 및 악한 영들을 허락하시는 주님’

AC.59.심화 1. ‘욕정, 거짓 및 악한 영들을 허락하시는 주님’ 위 AC.59 본문 중 ‘거듭나기 전에는 욕정들이 지배권을 가지는데, 이는 인간 전체가 욕정들과 거기에서 나온 거짓들로 이루어져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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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적용’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는 주님의 위와 같은 방법을 혹시 목회에 적용할 수 있다면...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AC.59에서 본 주님의 방식은 목회에 그대로 옮기면 이렇게 요약됩니다. ‘사람을 한 번에 바꾸려 하지 말고, 지금의 상태를 인정한 채, 그 안에서 진리와 선이 자라도록 돕고, 선택할 수 있는 공간을 지켜 주는 것’입니다. 즉, ‘제거’가 아니라 ‘전환’, ‘압박’이 아니라 ‘성장’, ‘통제’가 아니라 ‘동행’입니다.

 

먼저 가장 중요한 원리는 이것입니다. 주님은 사람의 욕정과 그에 따른 생각을 당장 없애지 않으십니다. 목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성도의 문제를 보면서 ‘이건 빨리 고쳐야 합니다’, ‘이건 틀렸습니다’라고 바로 제거하려 들면, 겉으로는 잠깐 눌릴 수 있어도, 결국 더 깊은 반발이나 위선, 혹은 무력감으로 돌아옵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이 상태가 지금 이 사람의 삶 전체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먼저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이 출발점입니다.

 

그다음 단계는 ‘진리를 심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방식이 중요합니다. 진리를 ‘강요’하면 그 사람의 기존 구조와 부딪혀 버립니다. 대신 ‘비추어 주어야’ 합니다. 즉, 그 사람이 스스로 ‘아, 이런 길도 있구나’를 보게 해야 합니다. 설교든 상담이든, 결론을 밀어붙이기보다 ‘보게 하는 것’, ‘깨닫게 하는 것’이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도 항상 그렇게 하십니다.

 

그리고 반드시 필요한 것이 ‘시간을 허락하는 것’입니다. 거듭남은 구조 자체가 바뀌는 일이기 때문에,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습니다. 목회 현장에서는 이 부분이 가장 어렵습니다. 당장 변화가 보이지 않으면 답답하고, 때로는 실망도 됩니다. 그러나 AC의 관점에서는 ‘지금 변화가 더딘 것처럼 보여도, 그 안에서 구조가 바뀌고 있는 중일 수 있다’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속도를 조절하는 사람’이 아니라 ‘과정을 지켜 주는 사람’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선택의 자리’를 남겨 두는 것입니다. 주님은 악한 영들의 자극까지도 허용하시며 사람에게 선택의 공간을 주십니다. 목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두지 않고, 모든 것을 대신 판단해 주거나 강하게 통제하면, 겉으로는 정돈된 것처럼 보여도 실제 변화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이 길이 옳습니다’라고 말하되, 동시에 ‘선택은 당신이 해야 합니다’라는 자리를 남겨 두어야 합니다.

 

이걸 아주 실제적인 목회 장면으로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어떤 성도가 반복적인 문제를 가지고 찾아옵니다. 이때 ‘왜 또 그러십니까’가 아니라, ‘그 마음이 왜 그렇게 움직이는지 함께 들여다보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리고 그 상태를 인정한 위에서, ‘이럴 때 이런 선택도 가능하다’는 진리를 제시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실제로 선택하고 경험할 수 있도록 기다립니다. 이 과정을 반복하면서, 조금씩 중심이 이동합니다. 바로 이것이 ‘주님의 방식에 가까운 목회’입니다.

 

또 하나 덧붙이면, 목회자는 ‘변화를 만들어 내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역사를 방해하지 않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주님은 이미 각 사람 안에서 일하고 계십니다. 목회자가 할 일은 그 일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이 일어날 수 있도록 환경을 지켜 주고, 때로는 방향을 비추고, 때로는 넘어지지 않도록 붙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체를 정리하면 이렇게 됩니다. 첫째, 성도의 현재 상태를 서둘러 제거하려 하지 말고 인정한다. 둘째, 진리를 강요하지 않고 비추어 준다. 셋째, 시간이 걸리는 과정을 견딘다. 넷째, 선택의 자리를 남겨 둔다. 다섯째, 주님의 일하심을 신뢰하고 그 통로가 된다.

 

한 줄로 정리하면, ‘주님의 거듭남 방식에 따른 목회는 사람을 억지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스스로 진리를 선택하며 서서히 변화될 수 있도록 동행하고 지켜 주는 것입니다.’

 

 

3. ‘때로 수천의 영들에게 둘러싸여 괴롭힘을 받도록 허락된 스베덴보리’

 

위 AC.59 본문 중 ‘이 사실의 확실성은, 제가 지금까지 수년 동안, 비록 육신 안에 있으면서도, 저 세상의 영들, 그중에서도 가장 악한 영들과 함께 지내 온 경험을 통해 확언할 수 있습니다. 저는 때로 수천의 영들에게 둘러싸여, 그들이 독을 내뿜고, 가능한 모든 방식으로 저를 괴롭히도록 허락받았으나, 주님의 보호 아래서 제 머리카락 하나도 해를 입지 않았습니다.’라는 부분도 정말 놀랍습니다. 저는 일상 중 약간의 어떤 영적이다 싶은 순간, 혹은 상황도 매우 놀라며 크게 두려워하는 편인데, 위 증언에 따르면 스베덴보리는 저의 천배 만배의 상황을, 그것도 오랜 기간 경험했다는 것이어서 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정말 쳐다볼 수도 없을 만큼 큰 영적 거인이지 싶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그 구절에서 우리가 받아야 할 핵심은 ‘스베덴보리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냐’가 아니라, ‘주님의 보호가 어떤 방식으로 실제로 작용하는가’입니다. 그 경험은 스베덴보리 개인의 위대함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아무리 강한 영적 영향 속에 있어도, 주님이 허락하신 범위 안에서는 결코 파괴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의 중심은 스베덴보리가 아니라 ‘주님의 보호 질서’입니다.

 

먼저 목사님께서 느끼신 놀라움과 두려움은 아주 자연스럽습니다. 사람은 조금만 ‘보이지 않는 세계’의 느낌이 와도 불안해집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평소 감각 세계에 익숙하고, 그 너머를 통제할 수 없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그 세계가 열려 있는 상태에서 오래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운 강도의 경험을 했습니다. 이 점만 보면 분명 ‘특별한 사람’이 맞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가 특별해서 견딘 것’이 아니라, ‘주님이 특별히 지키셨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본문을 잘 보시면, 스베덴보리는 계속해서 한 가지를 강조합니다. ‘허락되었으나’, ‘주님의 보호 아래서’입니다. 즉, 아무리 수천의 영들이 둘러싸고 괴롭히는 것처럼 보여도, 그것은 무제한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철저히 ‘주님의 허락과 통제 안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머리카락 하나도 해를 입지 않았다’입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이걸 우리의 상태로 연결하면 오히려 더 중요한 위로가 됩니다. 우리는 그런 극단적인 경험을 하지 않지만, 일상 속에서도 감정의 흔들림, 생각의 혼란, 설명하기 어려운 불안 같은 것들을 겪습니다. 이것도 넓게 보면 ‘영적 영향’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이 말해 주는 것은, ‘그 어떤 영향도 주님의 허락 없이 우리를 넘어설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 파괴되도록 내버려 두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이렇게 받아들이시면 좋습니다. ‘나는 약하고 두려워하는 사람인데, 스베덴보리는 강해서 견딘다’가 아니라, ‘스베덴보리도 본질적으로는 같은 인간이지만, 주님의 보호 아래 있었기 때문에 아무 해를 입지 않았다. 그렇다면 나 역시 그 보호 안에 있다’입니다. 이것이 훨씬 더 본질적인 적용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스베덴보리의 이 경험은 ‘보여 주기 위한 예외적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인류를 위해 영적 세계의 구조를 밝히는 사명을 받았기 때문에, 특별한 방식으로 보호받으며, 그 세계를 직접 경험한 것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신앙의 길은 그런 방식이 아닙니다. 오히려 ‘보지 못한 채 믿고, 느끼지 못한 채 선택하는 것’이 더 정상적인 길입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느끼시는 ‘조금만 영적인 느낌이 와도 놀라고 두려워하는 상태’는 오히려 매우 정상적인 인간의 상태입니다.

 

이걸 목회적으로도 연결해 보면, 성도들에게도 같은 균형이 필요합니다. ‘영계는 실제로 있다’는 것을 알되, 그것을 두려워하거나 집착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중심은 항상 ‘영적 경험’이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 그리고 삶의 변화’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 자신도 결국 강조하는 것은 경험 자체가 아니라, 그 경험을 통해 드러난 ‘질서’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한 문장으로 다시 정리하면 이렇게 됩니다. ‘아무리 강한 영적 영향 속에서도, 주님의 보호 아래 있는 사람은 결코 해를 입지 않으며, 그 모든 것은 주님의 허락과 한계 안에서만 일어난다’입니다.

 

목사님께 드리고 싶은 한마디로 마무리하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스베덴보리의 강함이 아니라, 그를 지키신 주님의 절대적인 보호입니다.’

 

 

 

AC.58, 창1:30,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AC.58-59)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And to every wild animal of the earth, and to every fowl of the hea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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