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105.심화

 

2. 아르카나를 알게 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구약 각 선지자들도, 그리고 이천년 전 주님도, 이후 오늘날까지 수많은 성인, 심지어 스베덴보리 역시 그들이 지상에 머물던 시기, 시절마다 거의 동일한 역사요, 패턴이었는데요, 한편으론 부조리한 세상이라고도 하는, 이런 삶을 이 아르카나를 알게 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질문을 조금 냉정하게 바로잡고 시작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이 세상이 ‘언젠가는 달라질 것’이라는 기대를 중심에 두고 살아가면, 반드시 실망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말씀 전체, 곧 선지자들, 성경,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더 나아가 에마누엘 스베덴보리의 증언까지, 이 모두가 한결같이 보여주는 것은, ‘세상 자체는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반복되는 것은 실패가 아니라 구조입니다. 인간의 의지가 자기 중심에 머무는 한, 시대가 바뀌어도 패턴은 그대로 반복됩니다.

 

그래서 아르카나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삶의 방향은 ‘세상을 바로잡는 삶’이 아니라, ‘질서를 회복하는 삶’입니다. 여기서 질서는 외부 구조가 아니라, 내 안의 속 사람과 겉 사람의 질서입니다. 세상은 여전히 욕망과 거짓이 뒤섞여 돌아가더라도, 한 사람 안에서만큼은 주님으로부터 사랑에서 신앙으로, 신앙에서 지성으로 흐르는 질서가 세워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동방의 에덴동산’이며, 사람이 이 땅에 살면서 동시에 천국에 있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때 삶의 태도는 크게 세 가지로 정리됩니다. 첫째, ‘분별하되 휩쓸리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의 뉴스, 전쟁, 이념 대립을 볼 때, 그것을 단순히 옳고 그름의 싸움으로만 보지 않고, ‘의지가 어디서 나오고 있는가’를 보는 눈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면 분노나 절망에 휩쓸리기보다, 인간 상태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됩니다. 둘째, ‘자기 안에서 질서를 지키는 것’입니다. 외부의 혼란이 클수록, 사람은 쉽게 자기 정당화나 공격성으로 기울어집니다. 그러나 아르카나의 길은 반대입니다. 겉 사람이 속 사람을 섬기도록, 곧 사랑이 이해를 이끌도록, 매 순간 방향을 바로잡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실제적인 영적 싸움입니다. 셋째, ‘체어리티로 사는 것’입니다. 세상을 바꾸는 거대한 행동이 아니라, 눈앞의 사람과 상황에서 선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천적 상태는 거창한 업적이 아니라, 평화에서 나온 작은 행위들의 연속으로 드러납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부조리함에 대한 감각 자체가 이미 깨어 있음의 표시’라는 것입니다. 아무 감각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이것이 부조리하다고 느낀다면, 이미 그 안에는 더 높은 질서에 대한 빛이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다만 그 빛을 외부를 향한 판단으로만 쓰지 않고, ‘나는 어디에 서 있는가’로 돌리는 것이 핵심입니다. 이때 비로소 그 감각은 절망이 아니라 방향이 됩니다.

 

결국 이 질문에 대한 가장 실제적인 답은 이것입니다. 세상이 어떻게 흘러가든, 한 사람 안에서 ‘안식의 질서’를 이루는 것, 그리고 그 상태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같은 시대를 살지만, 내적으로는 다른 질서 안에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지자들이 살았던 방식이고, 주님이 보여주신 길이며, 스베덴보리가 끝까지 붙들었던 삶의 태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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