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9

 

THE INTERNAL SENSE

 

 

977. 여기서 다루는 주제가 거듭난 사람(the regenerate man)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거듭나지 않은 사람에 대해서도 조금 부언하고자 합니다. 이렇게 하면 둘 다 더 잘 이해되지 싶어서입니다. As the subject here treated of is the regenerate man, a few words shall be said about what he is relatively to the unregenerate man, for in this way both will be apprehended.

 

거듭난 사람의 경우, 선한 것과 참된 것에 관한 어떤 양심(conscience)이 있어 그는 양심으로부터 선을 행하고 진리를 생각하는데요, 그가 행하는 선은 체어리티의 선(the good of charity)이요, 그가 생각하는 진리는 신앙의 진리(the truth of faith)입니다. With the regenerate man there is a conscience of what is good and true, and he does good and thinks truth from conscience; the good which he does being the good of charity, and the truth which he thinks being the truth of faith.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양심이 없거나, 있어도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거나 신앙의 진리를 생각하는 그런 양심이 아닌, 자기 자신이나 세상에 관한 사랑에 기반한 양심이며, 그래서 겉으로만 그럴싸하거나 거짓된 양심입니다. The unregenerate man has no conscience, or if any, it is not a conscience of doing good from charity, and of thinking truth from faith, but is based on some love that regards himself or the world, wherefore it is a spurious or false conscience.

 

거듭난 사람의 경우, 그가 양심을 따라 행할 때는 즐거움이 있지만 양심에 어긋나는 걸 하거나 생각할 때는 근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경우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 중 정말 많은 사람들이 양심이 뭔지를 모르며, 심지어 양심을 따라 한다는 게 뭔지, 혹은 양심에 어긋나는 걸 한다는 게 뭔지를 모릅니다. 그들은 그저 자기들이 좋아하는 그런 것만 할 줄 알기 때문입니다. With the regenerate man there is joy when he acts according to conscience, and anxiety when he is forced to do or think contrary to it; but it is not so with the unregenerate, for very many such men do not know what conscience is, much less what it is to do anything either according or contrary to it, but only what it is to do the things that favor their loves.

 

이것이 그들을 기쁘게 하며, 만일 그들이 자기들이 좋아하는 것과 반대되는 걸 하게 되면, 그들은 근심하게 됩니다. This is what gives them joy, and when they do what is contrary to their loves, this is what gives them anxiety.

 

거듭난 사람의 경우, 그에게는 새 의지(a new will)와 새 이해(a new understanding)가 있습니다. 이 새 의지와 새 이해가 그의 양심입니다. 즉, 그의 양심 안에 이 둘이 있습니다. 주님은 이를 통해 체어리티의 선과 신앙의 진리로 하여금 일을 하게 하십니다. With the regenerate man there is a new will and a new understanding, and this new will and new understanding are his conscience, that is, they are in his conscience, and through this the Lord works the good of charity and the truth of faith.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경우, 그에게 있는 것은 의지가 아닙니다. 의지 대신 갈망(yearning)이 있으며, 그 결과 모든 악으로 기우는 어떤 경향(proneness)이 있습니다. 또 그에게 있는 것은 이해가 아니라 무슨 머리굴림(reasoning)만 있어 결과적으로 모든 거짓을 향한 구부러짐(falling away)만 있습니다. With an unregenerate man there is not will, but instead of will there is yearning, and a consequent proneness to every evil; neither is there understanding, but mere reasoning and a consequent falling away to every falsity.

 

거듭난 사람의 경우, 그에게는 천적, 영적 생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경우는 그저 육적(corporeal), 세속적 생명만 있습니다. 전자의 경우, 그가 선한 것, 참된 것을 생각하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전에 말한 리메인스를 통해 주님의 생명으로부터 나오며, 그가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것도 여기서 나오는 것입니다. With the regenerate man there is celestial and spiritual life; but with the unregenerate man there is only corporeal and worldly life, and his ability to think and understand what is good and true is from the Lord’s life through the remains before spoken of, and it is from this that he has the faculty of reflecting.

 

거듭난 사람의 경우, 속 사람은 지배적인 반면, 겉 사람은 복종적이고, 순종적입니다. 그러나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경우는, 겉 사람이 다스리고, 속 사람은 죽은 듯 조용합니다. 마치 없는 듯 말입니다. With the regenerate the internal man has the dominion, the external being obedient and submissive; but with the unregenerate the external man rules, the internal being quiescent, as if it had no existence.

 

거듭난 사람은 속 사람이 무엇인지, 겉 사람이 무엇인지를 알거나 깊이 생각할 줄 압니다. 그러나 이런 것에 관해,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거의 무지하며, 심지어 이런 걸 깊이 생각할 줄도 모릅니다. 그는 체어리티로 말미암는 신앙의 선과 진리에 대해 낯설기 때문입니다. The regenerate man knows, or has a capacity of knowing on reflection, what the internal man is, and what the external; but of these the unregenerate man is altogether ignorant, nor can he know them even if he reflects, since he is unacquainted with the good and truth of faith originating in charity.

 

이렇게 거듭난 사람의 퀄러티는 어떤지, 그리고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퀄러티는 또 어떤지를, 그리고 이들은 서로 정말 여름과 겨울처럼, 빛과 어두움처럼 완전 다르다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결론은, 거듭난 사람은 살아있는 사람이지만,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Hence may be seen what is the quality of the regenerate, and what of the unregenerate man, and that they differ from each other like summer and winter, and light and darkness; wherefore the regenerate is a living, but the unregenerate a dead man.

 

 

978. 속 사람에 대해서, 그리고 겉 사람에 대해서 오늘날 아는 사람이 거의 없고, 있어도 매우 희귀합니다. What the internal man is, and what the external, is at this day known to few, if any.

 

다들 이 둘은 하나며 같은 것이라고 여기는데, 이는 사람들이 선을 행하는 것도, 진리를 생각하는 것도 다 자기가 하는 것으로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믿는 게 사람들의 고유 본성이지요. 하지만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서로 다른 건 마치 하늘과 땅만큼 다릅니다. It is generally supposed that they are one and the same, and this chiefly because men believe that they do good, and think truth from what is their own, for it is the nature of man’s own to believe this; whereas the internal man is as distinct from the external as heaven is from earth.

 

배운 사람이든 무학자이든 이 주제에 관해 좀 생각하게 해보면, 속 사람에 관해서는, ‘생각’(thought)이라고밖에는 무슨 다르게 생각하지를 못합니다. 그건 안에(within) 있으니까요. 그리고 겉 사람에 관해서는, 그건 ‘’(body), 감각(sense)과 쾌락(pleasure)이라는 생명을 가진 몸이다, 왜냐하면, 그건 밖이니까(without) 합니다. Both the learned and the unlearned, when reflecting on the subject, have no other conception respecting the internal man than its being thought, because it is within; and of the external man that it is the body, with its life of sense and pleasure, because this is without.

 

그러나 이렇게 속 사람이라고 여겨지는 생각은 거기, 곧 속 사람에 속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속 사람 안에는 주님의 것인 선과 진리들 밖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또 속 사람 안에는 주님에 의해 이식되어 심긴 양심이 있습니다. 하지만 악인들, 심지어 가장 악한 사람들 및 양심을 외면하는 사람들 역시 생각이라는 걸 할 줄 아는 걸 보면, 사람의 생각은 속 사람에게 속한 게 아닌, 겉 사람에게 속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Thought, however, which is thus ascribed to the internal man, does not belong thereto; for in the internal man there are nothing but goods and truths which are the Lord’s, and in the interior man conscience has been implanted by the Lord; and yet the evil, and even the worst of men, have thought, and so have those who are devoid of conscience, which shows that man’s thought does not belong to the internal, but to the external man.

 

이 감각과 쾌락의 생명을 가진 몸은 겉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은 영들 역시 똑같이 일종의 겉 사람을 소유한다는 사실을 보면 분명합니다. 비록 이 세상 살 동안 가졌던 그런 몸을 영들은 이젠 갖고 있지 않은데도 말입니다. That the body, with its life of sense and pleasure, is not the external man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spirits equally possess an external man, although they have no such body as they had during their life in this world.

 

모든 사람에게는 천사의 천국(the angelic heaven)과 상응하는 어떤 천적, 영적인 것이, 그리고, 천사 같은 영들의 천국(the heaven of angelic spirits)과 상응하는 어떤 이성적인 것(a rational)이, 그리고 영들의 천국(the heaven of spirits)과 상응하는 어떤 감각적인 내면(an interior sensuous)이 있다는 사실을 알기까지는 아무도 속 사람이 무엇인지, 겉 사람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But what the internal man is, and what the external, no one can possibly know unless he knows that there is in every man a celestial and a spiritual that correspond to the angelic heaven, a rational that corresponds to the heaven of angelic spirits, and an interior sensuous that corresponds to the heaven of spirits.

 

세 천국이 있고, 사람 안에도 역시 그 수만큼의, 아주 완전히 서로 다른 뭔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양심이 있는 사람은 사후, 제일 먼저 영들의 천국에 있게 되고, 이후 주님에 의해 천사 같은 영들의 천국으로 올라갔다가 마침내 천사의 천국에 이르게 되는데, 이는 그 사람 안에 천국과 같은 수만큼의 뭔가가 있지 않으면, 그리고 천국과 상응하는 그것의 상태가 천국과 같지 않으면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For there are three heavens, and as many in man, which are most perfectly distinct from each other; and hence it is that after death the man who has conscience is first in the heaven of spirits, afterwards is elevated by the Lord into the heaven of angelic spirits, and lastly into the angelic heaven, which could not possibly take place unless there were in him as many heavens, with which and with the state of which he has the capacity of corresponding.

 

이 일로 저는 속 사람을 구성하는 게 무엇인지, 또 겉 사람을 구성하는 게 무엇인지를 배웠습니다. From this I have learned what constitutes the internal, and what the external man.

 

속 사람은 천적, 영적인 것으로, 내면(interior) 혹은 중간(intermediate)은 이성적인 것(what is rational)으로, 그리고 겉 사람은 감각적인 것(what is sensuous), 그런데 몸에 속한 대신 몸과 관련된 것들로 각각 형성됩니다. 이상의 내용은 사람뿐 아니라 영들도 마찬가지입니다. The internal man is formed of what is celestial and spiritual; the interior or intermediate man, of what is rational; and the external man of what is sensuous, not belonging to the body, but derived from bodily things; and this is the case not only with man, but also with spirits.

 

지식인들처럼 표현하자면, 세 가지, 속, 내면 및 겉 사람은 마치 목적, 원인 및 결과와 같습니다. 그리고 다들 잘 알고 있듯 원인 없는 결과 없고, 목적 없는 원인 없습니다. To speak in the language of the learned, these three, the internal, the interior, and the external man, are like end, cause, and effect; and it is well known that there can be no effect without a cause, and no cause without an end.

 

결과, 원인 및 목적은 외면과 내면, 그리고 가장 안쪽처럼 서로 구별됩니다. Effect, cause, and end, are as distinct from each other as are what is exterior, what is interior, and what is inmost.

 

엄밀히 말씀드리자면, 감각적인 사람은, 이 감각적인 사람은 그 사고가 감각적인 것들을 기반으로 하는 사람인데요, 이 사람이 겉 사람입니다. 영적, 천적인 사람은 속 사람, 그리고 이성적인 사람은 이 둘 사이 중간 사람으로, 속과 겉 간 커뮤니케이션을 가능하게 해주는 사람입니다. Strictly speaking, the sensuous man—or he whose thought is grounded in sensuous things—is the external man, and the spiritual and celestial man is the internal man, and the rational man is intermediate between the two, being that by which the communication of the internal and the external man is effected.

 

저는 이런 말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음을 알았습니다. 사람들은 겉의 것들 가운데 살고 있으며, 겉의 것들을 가지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I am aware that few will apprehend these statements, because men live in external things, and think from them.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을 짐승과 다를 바 없다 여기며, 몸이 죽을 때, 자신들도 함께 죽는다 믿고 있습니다. 오히려 그때 그들은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하는데도 말입니다. Hence it is that some regard themselves as being like the brutes, and believe that on the death of the body they will die altogether, although they then first begin to live.

 

선한 사람들은 사후, 가장 먼저 영들의 세계 혹은 영들의 천국에서 어떤 감각의 삶을 삽니다. 그러다가 천사 같은 영들의 천국에서는 내면적 감각의 삶을 살고, 그리고 드디어 천사의 천국에서 가장 내적 감각의 삶을 삽니다. 이 속 사람의 삶은 그 삶과 관련된 그 어떤 것도 사람은 거의 이해할 수 없다고 하는 천사의 삶입니다. After death, those who are good, at first live a sensuous life in the world or heaven of spirits, afterwards an interior sensuous life in the heaven of angelic spirits, and lastly an inmost sensuous life in the angelic heaven, this angelic life being the life of the internal man, and concerning which scarcely anything can be said that is comprehensible by man.

 

거듭난 사람은 선과 진리 및 영적 전쟁의 본성을 깊이 생각해봄으로써 그런 삶이 있음을 알 수도 있지 싶습니다. 주님이 속 사람을 통해서 체어리티의 선과 신앙의 진리가 겉 사람 안에 있게 하신 이후부터는 그것이 사람 안에 있는 주님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The regenerate may know that there is such a life by reflecting on the nature of the good and the true, and of spiritual warfare, for it is the life of the Lord in man, since the Lord—through the internal man—works the good of charity and the truth of faith in his external man.

 

그때 그의 사고와 어펙션(affection, 애정)에 지각되는 것은 어떤 일반적인 것인데, 그 안에는 속 사람한테서 나오는 셀 수 없는 것들이 들어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천사의 천국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절대 지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What is thence perceived in his thought and affection is a certain general which contains innumerable things that come from the internal man, and which the man cannot possibly perceive until he enters the angelic heaven.

 

(이 일반적인 것과 그 경험에서 나오는 본성에 관하여는 위 AC.545 참조) (Concerning this general and its nature, see above, n. 545, from experience.)

 

여기서 말씀드린 속 사람에 관한 내용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지만 그렇다고 구원받기 위해 이런 걸 꼭 알아야 하는 건 아닙니다. The things here said about the internal man, being above the apprehension of very many, are not necessary to salvation.

 

속 사람과 겉 사람이라는 게 있으며,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믿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It is sufficient to know that there is an internal and an external man, and to acknowledge and believe that all good and truth are from the Lord.

 

 

979. 거듭난 사람에 관한, 그리고 겉 사람에게로 흐르는 속 사람의 인플럭스에 관한 이런 관찰을 먼저 좀 하는 이유는, 본 장이 거듭난 사람과, 겉 사람에 대해 우위를 점하는 속 사람 및 겉 사람의 복종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These observations on the state of the regenerate man, and on the influx of the internal man into the external, have been premised because this chapter treats of the regenerate man, of the dominion of the internal man over the external, and of the submission of the external man.

AC.978, 창9, '창9, 속뜻'.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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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TQ-YzN7ER8w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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