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2:1-17
126. 17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Verse 17. But of the tree of the knowledge [scientia] of good and evil, thou shalt not eat of it; for in the day that thou eatest thereof, dying thou shalt die.
지금까지 설명된 내용과 함께 이 말씀의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곧, 주님으로 말미암은 모든 퍼셉션(perception)으로 진리와 선에 익숙해져 가는 것은 괜찮지만, 자아와 세상으로는 안 된다는 것, 즉, 우리가 신앙의 신비(the mysteries of faith)를 감각과 지식에 관한(of sense and of the memory [per sensualia et scientifica]) 것으로 탐구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랬다가는 신앙의 천적인 것(the celestial of faith)이 파괴되기 때문입니다. These words, taken together with those just explained, signify that it is allowable to become acquainted with what is true and good by means of every perception derived from the Lord, but not from self and the world; that is, we are not to inquire into the mysteries of faith by means of the things of sense and of the memory [per sensualia et scientifica], for in this case the celestial of faith is destroyed.
127. 신앙의 신비를 감각과 지식에 관한 것을 가지고 조사하고자 함, 이것이 바로 다음 장에서 다루고 있는, 태고교회 후손의 몰락의 원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모든 교회가 몰락하는 원인입니다. 여기서 거짓들뿐 아니라 삶의 악들 또한 나오기 때문입니다. A desire to investigate the mysteries of faith by means of the things of sense and of the memory was not only the cause of the fall of the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as treated of in the following chapter, but it is also the cause of the fall of every church; for hence come not only falsities, but also evils of life.
※ 목회의 성공을 교인 수와 헌금 수입으로 가늠하고자 하는 일련의 세속적 태도는 뭐 말할 것도 없고, 말씀 풀이를 비록 ‘창조’라는 표현을 덧댔지만 어쨌든 ‘과학’으로 풀려는 시도 및 원어 연구를 통해 접근하려는 일련의 노력 등도 사실은 안전하지 않은 것일 수 있습니다. 그것이 주님의 계시보다는 감각과 세상 지식을 더 의존하려는 경향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말입니다.
128. 세속적이고 육적(肉的)인(worldly and corporeal) 사람은 속으로 말하길, ‘만일 내가 신앙과 신앙 관련 모든 것에 관해, 감각적인 것(the things of sense)을 가지고, 그래서 내가 눈으로 볼 수 없거나, 그리고 지식적인 것(those of the memory [scientifica])을 가지고, 그래서 내가 이해할 수 없으면, 나는 안 믿을 거야.’라고 말이지요. 이런 사람은 자연적인 것들과 영적인 것들이 서로 반대될 리 없다는 생각으로 더욱 굳어집니다(confirms himself). The worldly and corporeal man says in his heart, If I am not instructed concerning the faith, and everything relating to it, by means of the things of sense, so that I may see, or by means of those of the memory [scientifica], so that I may understand, I will not believe; and he confirms himself in this by the consideration that natural things cannot be contrary to spiritual.
※ 사실, 이런 태도는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여러 태도 중 하나가 아닙니다. 오히려 유일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내면은 오직 1단계, 즉, 자연적인 단계만 열렸기 때문인데요, (사실, 이건 ‘열렸다’ 하기도 좀... ) 영적, 천적인 선택지가 있음을 알 수 있으려면, 2단계, 3단계가 열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이 사람은 천적이며 신적인(celestial and Divine, 天的, 神的) 것을 감각적인 걸 가지고 접근하고자 아주 간절해지는데 이것은 불가능한 것이, 이런 것은 마치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겠다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이 이런 식으로 더 지혜로워지기를 원하면 원할수록, 그는 사실은 자신을 더욱더 소경이 되게 할 뿐이며, 그는 결국에는 아무것도, 심지어 영적인 어떤 것이 존재한다, 혹은 영생의 존재까지도 믿을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Thus he is desirous of being instructed from things of sense in what is celestial and Divine, which is as impossible as it is for a camel to go through the eye of a needle; for the more he desires to grow wise by such means, the more he blinds himself, till at length he believes nothing, not even that there is anything spiritual, or that there is eternal life.
이런 건 처음에 그가 가정했던 원리들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This comes from the principle which he assumes.
이런 것이 바로 ‘선악 관련 지식의 나무를 먹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먹으면 먹을수록, 먹는 그는 죽게 됩니다. And this is to “eat of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of which the more anyone eats, the more dead he becomes.
그러나 주님으로 말미암아 지혜로워지고자 하는, 그리고 세상으로는 아닌 사람은 속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곧 말씀(the Word)에서 주님이 말씀하신(has spoken) 것들은 진리이므로 반드시 믿어야 해.’ 그리고 이걸 원리 삼아 그는 자기의 생각을 조정합니다(regulates). But he who would be wise from the Lord, and not from the world, says in his heart that the Lord must be believed, that is, the things which the Lord has spoken in the Word, because they are truths; and according to this principle he regulates his thoughts.
그는 이성(reason, 합리), 지식, 감각, 그리고 본능에 관한 것을 가지고 점점 더 확신 가운데 거하며, 확신을 주지 못하는 것들을 그는 버립니다(casts aside). He confirms himself by things of reason, of knowledge, of the senses, and of nature [per rationalia, scientifica, sensualia et naturalia], and those which are not confirmatory he casts aside.
129. 사람들은 다 아는 건데요, 인간은 자기가 가정한 원리들(the principles he assumes)에 의해 다스려지며, 자기의 모든 지식과 이성(reasoning)은 이 원리들에 대해 우호적이라는 걸 말입니다. 어쩌면 이 원리들 자체가 몹시도 거짓된 것일 수 있는데도 말이죠. 인간이 이토록 어처구니없을 수 있는 이유는, 이 원리들을 지지하는 경향을 보이는 무수한 생각들(considerations)이 그의 마음에 계속되면서 그는 드디어 거짓된 것(what is false) 안에서 굳어지기 때문입니다. Everyone may know that man is governed by the principles he assumes, be they ever so false, and that all his knowledge and reasoning favor his principles; for innumerable considerations tending to support them present themselves to his mind, and thus he is confirmed in what is false.
※ 분명히 주님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6:24) 하셨고, 또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하셨으며, 또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요6:63) 등등 정말 많은 말씀을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건 먹고 사는 것이다!’ 하는 걸 보면 확실히 그렇습니다. 저런 거짓된 가정을 자신의 중심 원리로 세운 사람은 다른 모든 권면이 다 쇠귀에 경 읽기가 되고 맙니다.
이런 이유로, ‘두 눈으로 보고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니면 아무것도 믿어서는 안 된다.’라는 걸 하나의 중심 원리로 정한 사람은 결코 믿음이라는 것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영적, 천적인 것들은 결코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도, 무슨 마음속으로 상상, 그려낼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He therefore who assumes as a principle that nothing is to be believed until it is seen and understood, can never believe, because spiritual and celestial things cannot be seen with the eyes, or conceived by the imagination.
반면, 참된 질서, 올바른 순서는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즉 말씀으로부터 오는 지혜로 지혜로워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후 모든 것이 뒤를 따르며, 이 사람은 눈이 밝아지는데 심지어 이성(reason) 및 그동안 습득한 지식(memory-knowledge)의 일들에서도 그렇게 됩니다. But the true order is for man to be wise from the Lord, that is, from his Word, and then all things follow, and he is enlightened even in matters of reason and of memory-knowledge [in rationalibus et scientificis].
※ 즉, 그동안 역기능을 하며, 잘못된 쓰임새로 쓰임 받던 이성과 지식이 정상으로 회복됩니다. 사람이 세상이 아닌, 주님으로 말미암아 지혜로워지기를 선택하면 더욱 아름답고 향기로운 이성적 사고를 하게 되며, 그동안 학습하여 습득한 세상 지식 역시 그 쓰임새가 180도 달라져 주님 사랑, 이웃 사랑을 위해 쓰임 받게 됩니다.
이것은 과학을 배우는 것 금지가 결코 아닙니다. 과학은 인간의 삶에 유익하며, 아주 즐거운 것이기 때문이며, 또한 사람이 신앙 안에 있다고 해서 세상 학자들처럼 생각하고 말하는 것 금지도 아닙니다. 대신 다음의 원리, 곧 ‘주님 말씀을 믿음’이라는 원리로 해야 하는데요, 그래서 가능한 한, 자연적 진리들을 가지고 영적, 천적 진리들을 확증하되 학자들에게 친숙한 그런 용어들을 써서 해야 합니다. For it is by no means forbidden to learn the sciences, since they are useful to his life and delightful; nor is he who is in faith prohibited from thinking and speaking as do the learned of the world; but it must be from this principle—to believe the Word of the Lord, and, so far as possible, confirm spiritual and celestial truths by natural truths, in terms familiar to the learned world.
※ 주님은 세상에 계실 때, 바리새 및 사두개 등 당시 종교 엘리트들의 지독한 지적, 교리적 논쟁에서 결코 밀리지 않으셨습니다. 밀리기는커녕 오히려 매번 그들로 하여금 유구무언(有口無言, 입이 있으나 할 말이 없음) 할 수밖에 없게 만드셨습니다. 주님의 지혜, 천국 지혜는 다른 차원의 지혜이기 때문이며, 그래서 요셉도, 다니엘도 왕들과 나라들을 도울 수 있었습니다. 주님 편에 서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마시고, 오히려 어깨를 펴고 당당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식으로 그의 모든 출발점은 주님이셔야 합니다. 결코 자기 자신이 아니고요. 전자는 생명이지만, 후자는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Thus his starting point must be the Lord, and not himself; for the former is life, but the latter is death.
130. 세상으로 지혜로워지기를 구하는 사람은 자신의 ‘동산’을 위해 감각 및 지식과 관련된 것들을 추구합니다.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이 그에게는 ‘에덴’이며, 그에게 있어서 ‘동쪽’은 서쪽, 혹은 자기 자신입니다. 그의 ‘유브라데 강’은 그가 가진 모든 세상 지식인데, 이것은 비난을 받게 되며, 그의 ‘두 번째 강’, 거기가 ‘앗수르’인데, 거짓을 지어내느라 정신이 나간 것입니다. 그의 ‘세 번째 강’, 거기는 ‘에디오피아’인데, 이것은 여기서 나오는 악과 거짓의 원리들로서, 그가 가진 신앙 관련 지식입니다. 그의 ‘네 번째 강’은 거기서 나오는 지혜인데, 말씀에서는 이걸 ‘마술’이라 부릅니다. He who desires to be wise from the world has for his “garden” the things of sense and of memory-knowledge [sensualia et scientifica]; the love of self and the love of the world are his “Eden”; his “east” is the west, or himself; his “river Euphrates” is all his memory-knowledge, which is condemned; his “second river,” where is “Assyria” is infatuated reasoning productive of falsities; his “third river,” where is “Ethiopia” is the principles of evil and falsity thence derived, which are the knowledges of his faith; his “fourth river” is the wisdom thence derived, which in the Word is called “magic.”
그래서 ‘애굽’은, 이것은 기억-지식을 상징하며, 이 지식이 나중에 마술이 되었지요. 애굽은 이런 사람을 상징하는데, 말씀에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이런 사람은 자아(self)로 지혜로워지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And therefore “Egypt”—which signifies memory-knowledge—after the knowledge became magical, signifies such a man, because, as may be seen from the Word, he desires to be wise from self.
이와 관련, 에스겔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Of such it is written in Ezekiel:
3너는 말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애굽의 바로 왕이여 내가 너를 대적하노라 너는 자기의 강들 가운데에 누운 큰 악어라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나를 위하여 만들었다 하는도다 9애굽 땅이 사막과 황무지가 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네가 스스로 이르기를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만들었다 하도다 (겔29:3, 9) Thus hath said the Lord Jehovih, Behold, I am against thee, Pharaoh king of Egypt, the great whale that lieth in the midst of his rivers, who hath said, My river is mine own, and I have made it for myself. And the land of Egypt shall be for a solitude, and a waste, and they shall know that I am Jehovah, because he hath said, The river is mine, and I have made it. (Ezek. 29:3, 9)
이 선지자는 또한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지하에 있는 에덴의 나무들’ 이라 하는데, 같은 선지서에서 바로(Pharaoh), 혹은 애굽인이 다음과 같은 말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Such men are also called “trees of Eden in hell,” in the same prophet, where also Pharaoh, or the Egyptian, is treated of in these words:
16내가 그를 구덩이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스올에 떨어뜨리던 때에 백성들이 그 떨어지는 소리로 말미암아 진동하게 하였고 물을 마시는 에덴의 모든 나무 곧 레바논의 뛰어나고 아름다운 나무들이 지하에서 위로를 받게 하였느니라 18너의 영광과 위대함이 에덴의 나무들 중에서 어떤 것과 같은고 그러나 네가 에덴의 나무들과 함께 지하에 내려갈 것이요 거기에서 할례를 받지 못하고 칼에 죽임을 당한 자 가운데에 누우리라 이들은 바로와 그의 모든 군대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라 (겔31:16, 18) When I shall have made him descend into hell with them that descend into the pit; to whom art thou thus made like in glory and in greatness among the trees of Eden? yet shalt thou be made to descend with the trees of Eden into the lower earth, in the midst of the uncircumcised, with them that be slain by the sword. This is Pharaoh and all his crew, (Ezek. 31:16, 18)
여기 ‘에덴의 나무들’은 말씀으로 말미암는 지식을 가리키는데, 이 지식을 저들은 이성으로 모독하는(profane by reasonings) 것입니다. where the “trees of Eden” denote knowledges [scientifica et cognitiones] from the Word, which they thus profane by reasonings.
※ 이상으로, 오늘 본문 창세기 2장 17절과 그 속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본문)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속뜻)
주님의 신비는 오직 퍼셉션으로만 접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천적인 것이 파괴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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