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89, HH.154-161

 

창세기 24절입니다.

 

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2:4)

 

89. ‘하늘과 땅의 내력’ the nativities of the heavens and of the earth 은 천적 인간을 빚으심 the formation of the celestial man 입니다.

 

여기서 다루고 있는 내용이 바로 천적 인간을 빚으심이라는 것은, 다음 이어지는 모든 내용을 자세히 관찰하면 분명히 알 수 있는데요, 예를 들면, 5절에,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라든지, 7, ‘여호와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시고19,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만드시는 장면들 등입니다. 이 내용은 이미 앞장에서 다 다루었는데도 말입니다.

 

이런 정황으로 보아, ‘, 여기서는 또 다른 사람을 다루고 계시는구나!’ 하는 걸 알 수 있지요.

 

다음을 보면 더 분명해집니다.

 

먼저, 주님을 가리켜 여호와 하나님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영적 인간을 다룬 앞장에선 간단히 하나님이라고만 했지요. 그리고 또, 여기선 을 함께 언급하는데, 앞에선 만 언급되었습니다. 또 오늘 본문 구절인 이 4절에서는 하늘보다 먼저 언급되다가 나중에는 하늘보다 먼저 나옵니다. ‘은 겉사람을, ‘하늘은 속사람을 각각 상징한다는 것,

 

그리고 개혁, 개선, 다시 빚으심 reformation 이 영적 인간의 경우는 ’, 곧 겉사람 the external man 에서 시작하지만, 천적 인간은, 지금 다루는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인데요, 천적 인간의 경우에는 속사람 the internal man, 하늘에서 시작한다는 사실 등에 비추어 볼 때도 그렇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사실들, 정황들을 통해, ‘, 여기서는 천적 인간을 다루시는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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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6-88, HH.141-153

 

창세기 22절로 3절입니다.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2:2-3)

 

86. 이윽고 여섯째 날이 된 who has become the ‘sixth day’ 영적 인간이 이제 막 천적(天的)이 되려고 the spiritual man is beginning to be celestial 할 때, 바로 이 상태를 여기서 먼저 다루고 있는데요, 이때가 유대교회에서 말하는 안식일 저녁’ the ‘eve of the sabbath’입니다.

 

안식일의 거룩함은 저녁부터 지켜집니다. 천적 인간은 이제 말씀드릴 아침’ the ‘morning’입니다.

 

이날은 준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되었더라 (23:54)

 

 

87. 천적 인간을 가리켜 안식일’ the sabbath 또는 ’ rest 이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그가 천적이 될 때 전투가 그치기 combat ceases when he becomes celestial 때문입니다.

 

악한 영들은 물러가고, evil spirits retire, 선한 영들과 천적 천사들이 다가옵니다. good ones approach, as well as celestial angels. 이들이 있으면 악한 영들은 도저히 머무를 수가 없어 멀리 달아나고 맙니다.

 

전투를 치른 사람이 이 사람 본인이 아니라 홀로 주님이시기 때문에 주님이 안식하시니라하신 것입니다.

 

 

88. 영적 인간이 천적이 될 때, 그를 가리켜 하나님의 일’ the ‘work of God’ 이라 합니다. 주님 홀로 그를 위해 지금까지 싸워오셨고, has fought for him, 지금까지 그를 창조해 오셨으며, 지으시고 만들어 오셨기 has created, formed, and made him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God finished his work on the seventh day’ 하신 것이며, 한 번 더 하나님이 그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he rested from all his work’ 하신 것입니다.

 

선지자들은 사람을 가리켜 거듭 여호와의 손과 손가락으로 한 일’ the ‘work of the hands and of the fingers of Jehovah’ 이라 하였습니다. 이사야에, 거듭남의 사람을 가리켜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곧 이스라엘을 지으신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너희가 장래 일을 내게 물으며 또 내 아들들과 내 손으로 한 일에 관하여 내게 명령하려느냐 내가 땅을 만들고 그 위에 사람을 창조하였으며 내가 내 손으로 하늘을 펴고 하늘의 모든 군대에게 명령하였노라 대저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을 창조하신 이 그는 하나님이시니 그가 땅을 지으시고 그것을 만드셨으며 그것을 견고하게 하시되 혼돈하게 창조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이 거주하게 그것을 지으셨으니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 여호와가 아니냐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나니 나는 공의를 행하며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45:11-12, 18, 21)

 

이 말씀을 보면 분명히 새 창조, 거듭남은 오직 주님의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창조하다’ to ‘create’, ‘짓다’ to ‘form’, ‘만들다’ to ‘make’ 라는 표현들을 다음 두 가지 경우들과 또 창세기 본 장과 앞 장에 아주 특징적으로 사용하셨는데요,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위 구절들 중 하늘을 창조하신 이... 그가 땅을 지으시고 그것을 만드셨으며’ ‘creating the heavens, forming the earth, and making it’ 와 같은 이사야 다른 구절들, 예를 들면,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43:7)

 

하신 부분과, 또 창세기 1장과 지금 2,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he rested from all his work which God in making created.’ 하신 부분입니다.

 

속뜻을 생각할 때, 이런 용법을 만나면 늘 그 표현을 눈여겨보게 되는데요, 다음 케이스가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주님을 가리켜 창조하시는 분(creator)’, ‘빚으시는 분(former)’, ‘만드시는 분(maker)으로 표현하신 경우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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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장인어른 故 권성조 아버님, 아이들에게는 외조부이셨던 분의 6주기 기일입니다. 마침 어제는 故 변배근 아버님, 친조부의 33주기 기일이었고, 겸사 보면, 친할머니 故 남경순 어머님은 올해가 41주기, 외할머니 故 김정자 장모님의 경우, 벌써 16주기가 되는 해입니다.

 

송강 정철(1536-1594)의 시입니다.

 

어버이 살아실제 섬기기 다하여라

지나간 후면 애닯다 어이하리

평생에 고쳐못할일 이뿐인가 하노라

 

세상 살며 자식으로서 그 뿌리가 되시는 부모님의 기일을 생각함은 신앙인으로서 더욱 마땅한 것이며, 사후뿐 아니라 생전 공경이 더욱 주님을 기쁘시게 함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은 특별히 외조부의 기일을 맞아 지상 혈연에 대한 영적 의미를 살펴보고, 우리로 하여금 앞으로 주님의 시야로 올바른 가족 관계, 혈연관계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복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저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 (눅20:34-35)

 

이 본문은 사두개인들이 주님을 올무에 빠트리려 했을 때, 그들의 오류를 바로잡아 주신 주님의 답변이며, 이 가운데 천국의 결혼과 지상의 혈연이 천국의 무엇과 상응하는지, 즉 지상의 혈연관계가 가리키는 속뜻, 영적인 뜻이 무엇인지를 엿볼 수 있는 아주 귀한 본문이어서 오늘의 본문으로 정했습니다.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천국에도 결혼이 있습니다. 자세한 건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 40장 ‘천국 안의 결혼’과 별도 저서 ‘결혼애’라는 책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사람의 성은 사후에도 남성은 영원히 남성으로, 여성은 영원히 여성으로 이어집니다. 아무리 성전환 수술을 통해 육체에 무슨 변화를 주어도 그 영은 변하지 않습니다. 속으시면 안 됩니다.

 

천국 결혼은 두 마음의 하나됨, 곧 남편은 아내가 원하는 것을 자기도 원하고, 아내는 남편의 생각을 자기도 따르는 것, 이것이 두 마음의 하나됨입니다.

 

마음은 의지와 이성이며, 이것은 곧 선과 진리로 연결되므로 천국 결혼의 결과, 세상 결혼하고는 달리 새로운 선과 진리가 생겨납니다. 세상 결혼은 아들, 딸, 후손들이 생겨나지만 말입니다.

 

천국의 원리 중 하나는 ‘비슷하면 가깝고 다르면 멀다’는 게 있습니다. 이것은 세상에서도 어느 정도 통합니다. 이 원리에 비추어 보면, 우리가 부모-자식으로 만나는 것도 주님 보시기에 우리의 선의 종류가 같거나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지상 혈연의 관계가 천국까지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단, 지상의 부부가 지상 생활 때부터 서로 두 마음이 하나가 되어 있어 서로 영원히 함께하기를 원하면 주님이 그렇게 지내도록 허락하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거의 모든 경우, 부부 관계도, 부모-자식 관계도, 모든 지상 혈연관계는 지상으로 끝나고, 사후엔 전혀 새로운 삶이 시작됩니다. 살면서 습득한 선의 종류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지상에서 이런 혈연으로들 만나게 하셨을까요?

그것은 바로 부모님의 모습으로 내 곁에 계신 주님을, 자녀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신 주님을, 형제의 모습으로 오신 주님을 섬기게 하시려고입니다.

 

모든 인생은 지상에서 얼마나 주님을 닮았느냐, 자기 안에 주님 성품을 얼마나 담았느냐로 천국 삶이 결정되며, 그것은 오직 무슨 일, 어떤 상황, 누구에게든지 주께 하듯 함으로써만 이루어집니다. 어제 말씀드린 선친의 생전 권면으로는, ‘얘야, 세상 이렇다 저렇다, 사람 이렇다 저렇다 할 거 없다. 사람은 그저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서 자기 할 도리만 다하면 된다’가 되겠습니다.

 

부모에 대한 태도가, 남편, 아내에 대한 태도가, 형, 동생에 대한 태도가, 더 나아가 내 직장동료에 대한 태도가, 내 삶에 대한 태도가 곧 주님께 대한 태도요, 그것이 곧 내 속사람을 결정짓는 재료가 됩니다.

 

이 사실을 명심하고, 혹시라도 가족을 주님보다도 더 사랑하거나 하지는 않는지 하는 영적 시야를 꼭 붙드시는 일상 가운데 가족과 혈연, 직장 동료 등을 통해 주님 사랑에 힘쓰시는 우리 모두 되시기를 주 예수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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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228, 2월 마지막 주 주일입니다. 오늘 본문은 창세기 22절로 3절입니다.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2:2-3)

 

오늘은 이 본문과 함께 마침 꼭 기억해야 할 두어 가지가 더 있어 한 설교, 세 주제라는 좀 특별한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더라도 주께서 결국 하나의 메시지로 묶어 주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먼저 첫 번째입니다.

 

어제는 우리 교회가 지난 201391일 첫 예배를 드린 후부터 꼭 이천 번째 예배를 드린 날입니다. 주님의 일을 하면서 숫자를 세는 것은 혹시라도 주님의 공로를 가로채게 될까 봐 무척 조심스럽습니다만 저는 지금까지 다른 건 거의 금했어도 이 예배만큼은 모든 예배에 번호를 붙여가며 정성을 다했습니다. 주님의 오심이요, 함께 하심, 열납하심이었기 때문이며, 매 예배마다 다 다른, 나름의 생명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동행하심과 붙드심을 기억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본래 영혼의 근육이 거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시작은 있으나 끝을 보는 일은 거의 없었던 사람이었는데 이런 제가 신대원을 나와 목회자가 되면서 이후 달라지기 시작한 계기들이 있습니다.

 

두어 가지인데, 하나는 제가 개척 전 부사역자로 섬기던 교회에서 교회 건축 관련 1000일 동안 진행된 천일예배 덕분입니다. 당시 교회 미디어 담당자로서 외부 광고 없이 조용히 진행된 이 천일예배 뒷바라지가 무슨 의무도, 책임도 아니었지만 이상하게도 제 안에 자원하는 심령이 생기면서 저는 누가 시키지도 않은 이 일을 1000일 동안 녹음, 녹화로, 웹서비스로, 또 모든 메시지들 딕테이션으로 정성을 다해 섬겼습니다. 이 일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하는 개인적인 기적과 함께 저는 제 안에 영혼의 근육이 생겼음을 또한 알게 되었습니다. 이 근육은 이후 개척 및 수도원 영성에 큰 이정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천일예배를 인도하신, 지금은 목사님이 되신 윤경숙 사모님과 당시 함께 했던, 지금은 사모님이 되신 권윤미 전도사님, 그리고 딕테이션팀으로 섬겼던 이십여 분의 집사님들께 오래전 기억이지만 새삼 진심 어린 감사가 생생하게 일어납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아멘, 할렐루야!

 

다른 하나는, 수도원 영성으로 부름 받아 수도사 공부를 하던 중 다음과 같은 일화를 접한 것입니다.

 

사막은 물이 없어 사막입니다. 한 수도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물을 얻을 수 있는 곳으로부터 지금으로 치면 한 10키로 쯤 떨어진 수도원에서 90년을 살았습니다. 그는 날마다 해가 지면 물동이를 들고 그 왕복 20키로의 길을 물을 길으러 다녔습니다. 그는 지쳤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 물 가까운 곳에서 지내고 싶다...’ 그때 무슨 인기척이 들렸습니다. 사막의 밤, 자기 말고 누가 있을 리 없는데 말입니다. 그 인기척은 발소리였습니다. 뒤를 돌아보니 천사가 자기를 뒤따라오고 있었습니다. 순간 엎드리며 소리칩니다. ‘주여, 어찜이신지요?’ 천사가 말합니다. ‘나는 너의 발걸음을 세고 있노라...’ 이 수도사는 크게 깨달았습니다. 이후 그는 자기가 머물던 곳으로부터 8키로를 더 깊은 사막으로 들어갔습니다...

 

이 일화는 제가 이 세상에서 주님을 사랑하여 행하는 모든 크고 작은 일들이 주님과, 그래서 당연히 천국과 연결되어 있음을 제 안에 깊이 각인시켜 준 이야기이며, 이후 결정적일 때마다 저를 다시 일으켜 주었던 참 고마운 격려의 일화입니다.

 

목회자가 예배 한 번 준비하는 일이 사실 보통 일이 아닙니다. 특히 설교를 해 본 적이 있으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것은 정말이지 영혼의 일이며, 심령을 불태우는 일입니다. 이런 일을 2000번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진실로 오직 주님의 붙드심과 힘주심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늦게 목회의 길을 걷게 된 저 같은 사람 말고 일찍 헌신하여 묵묵히 걸어오신 선배 목회자들 앞에서는 소위 명함도 못 내밀지만 말입니다. 저는 그저 이만큼이 제 역량이며, 저를 이만큼 키워주신 주님께 그저 고맙고 감사할 뿐입니다. 또한 함께 한 저희 사모와 자녀들에게도 마음속 깊이 진심으로 감사하지요. 아멘아멘,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두 번째 주제입니다.

 

오늘은 저의 선친 33주기 기일입니다. 내일은 마침 장인 6주기 기일이고요. 어떻게 양가 바깥 사돈의 기일이 하루 상간이 되었습니다 ^^

 

저희 모친의 경우는 작년이 40주기였습니다. 어느덧 40년이 지나 52녀 대부분의 자녀들이 그만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되어버렸지요. 지금은 증손까지 다 합쳐 팔십! 그렇다 보니 이제는 형제모임 한번 하기가 보통 일이 아닌 게 되어서 지난 40년 동안 모였던 친가쪽 형제모임을 작년을 끝으로 마치기로 하였습니다. 처가쪽은 이제 6주기라 여전히 모일 수 있지만 마침 코로나로 인해 작년과 올해, 이 마저 여의치 않게 되었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마다 선친 기일이 다가오면, 그리고 사실 나이를 먹어갈수록 오히려 더 늘 생각나는 생전 말씀 한 마디, ‘사람은 제 할 도리만 다 하면 된다...’ 이 말씀이 생각나는 오늘입니다.

 

사실 저희 선친께서는 어린 시절 궁핍한 삶에 배움이 없으셨습니다. 선친의 생전 삶에 관해 어린 시절 토막토막 들었던 것이 전부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를 감탄케 하셨던 선친의 생전 모습들이 생각나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부산에서 육이오 피난살이를 하던 중 동네 권사님을 통해 교회 출석을 시작하셨던 아버지... 그러나 사실은 평양 대부흥의 때인 1907년에 출생, 황해도 황주 및 해주 사시며, 젊어서 평양 갔다가 무슨 집회에 참석, 그때 무슨 시냇가에서 이미 침례를 받으셨던 아버지이십니다.

 

배움은 없으셨으나 세상 경험과 타고난 눈썰미가 남다르셔서 독일서 건너온 무슨 중장비마저 대충 보고 조립해 내실 정도였습니다.

 

생전 보시던 두꺼운 신구약 성경이 아직도 서재 한쪽에 꽂혀 있는데요, 어머니 먼저 보내시고 8년 동안 늘 소리 내어 읽으시던 성경입니다.

 

한창 혈기왕성하여 세상을 비판하며 어둡고 부정적이었던 저에게, 나지막히 타이르시며 늘 권하시던 말씀, ‘얘야, 세상 이렇다 저렇다, 사람 이렇다 저렇다 할 거 없다. 사람은 그저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서 자기 할 도리만 다하면 된다...’ 그 말씀을 듣는 청년 시절 저는 말씀 그대로 사시는 아버지 모습에 아무 대꾸도, 반박도 할 수 없었습니다.

 

목회자로서 늘 새기는 말씀이 있습니다.

 

단에 오를 땐 산 만큼만 말하고, 단에서 내려올 땐 말한 만큼 살아라...’

 

선친께서는 무슨 배움도, 아무 신학도 안 하신 분이 이런 걸 어떻게 깨우치셨을까요! 이제 육십에 접어드는 저는 여전히 한참 멀었음을 깨닫습니다.

 

세 번째, 오늘 본문입니다.

 

창세기 첫 장들은 전통적으로 실제 천지창조의 기술로 이해했습니다. 글자 그대로로, 겉뜻 그대로로 이해한 것이지요. 그러나 사람이 영과 육으로 되어 있듯 말씀 또한 그렇다는 걸 알게 되면서 말씀 또한 그렇게 이해해야 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람도 옷처럼 입고 있는 이 육보다 그 안의 영이 진짜인 것처럼, 말씀도 겉뜻인 글자, 문자의 뜻보다 그 안에 담긴 속뜻이 참 의미인 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말씀의 속뜻, 영어로는 인터널 센스 internal sense 라고 하는 이 속뜻을 가리켜 라틴어로 아케이나라 하며, 그 의미는 천계비의(天界秘義)’, ‘천국의 비밀정도가 되겠습니다.

 

아케이나로 본 창세기의 첫 장들은, 아니 성경 전체는 사실, 인간의 거듭남에 관한 내용이며, 그래서 창조 첫 육일간의 기록을 한 사람의 거듭남 전 과정을 여섯 단계로 나눈 것으로 이해합니다. 특별히 창세기 1장은 영적 인간을, 창세기 2장은 천적 인간을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선 거듭남의 관점으로 본 세 종류의 사람, 혹은 사람의 세 가지 상태 이야기를 좀 해야 하는데요, 이미 몇 번 말씀을 드려서 어느 정도 이해들을 하시겠지만 잠깐 다시 상기시켜 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죽은 사람 a dead man 입니다. 죽은 사람은 진리와 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acknowledges nothing to be true and good 사람, 대신 오직 육체와 세상 the body and the world 에 속한 것만 잘 아는 사람, 그런 걸 아주 좋아하는 adores 사람입니다.

 

다음은 영적 인간 a spiritual man 입니다. 영적 인간은 영적, 천적 진리와 선을 아는 acknowledges 사람입니다. 그런데 신앙의 원리 a principle of faith 로만 압니다. 그의 모든 행위의 기반은 이런 신앙 원리 같은 거에 있습니다. 사랑이 아니고 말입니다.

 

끝으로, 천적 인간 a celestial man 입니다. 천적 인간은 영적, 천적 진리와 선을 믿고, 지각하는 perceives 사람입니다. 이 지각한다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빛으로 깨닫는 것입니다. 천적 인간은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으로만, 행위가 뒤따르는 신앙으로만 주님을 신앙하고, 그런 신앙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또 이렇게도 구분합니다.

 

죽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오직 육체적, 세상적인 목표만 추구하는 삶입니다. 그들은 영원한 삶이 무엇인지도, 주님이 누구신지도 모릅니다. 혹시 알게 되어도 그들은 믿지 않습니다.

 

영적 인간들의 경우는 영원한 삶, 영생입니다. 영생을 추구하다 보니 그 결과, 주님을 만나는 사람들입니다.

 

천적인 사람들은 바로 처음부터 주님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여 주님을 알다 보니 그 결과, 주님의 나라와 영원한 삶, 영생을 선물로 받는 사람들입니다.

 

천적 인간들의 삶의 목표와 순서는 영적 인간들의 삶의 목표 및 순서랑 정확히 정반대입니다.

 

영적 전투라는 측면으로도 구분할 수 있습니다.

 

죽은 사람들은 삶 가운데 전투가 있을 때, 즉 선악 간 싸움이나 진리, 거짓 간 싸움으로 마음에 갈등이 일어나면 거진 다 매번 집니다. 그렇지 않을 때, 즉 전투가 없을 때는 악과 거짓이 그를 지배하며, 그래서 그는 그들의 종이 됩니다. 그의 묶임은 겉으로 드러나는데, 예를 들면, , 목숨, , 소득, 명성 등 소위 안전한 삶을 위해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을 잃을까 봐 두려워하는 그런 형태로 나타납니다.

 

아직 거듭남이 시작되지 않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여기에 해당하며, 심지어 자기는 거듭남 가운데 있다고 믿는 교회 다니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상당수가 여기에 해당되시는 것처럼 살고 있습니다. 교회를 다니며 소위 신앙생활을 한다 하면서도 사실은 위와 같은 묶임 가운데 있으시다면 한 번쯤 진지하게 고민해보셔야 합니다. ‘내가 과연 정말 거듭남의 여정 가운데 있는 건지, 내 삶에 참된 회심, 진정한 거듭남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는지...’ 말입니다.

 

영적 인간은 전투가 있어도 늘 승리합니다. 이 경우가 참된 회심 가운데, 진정한 거듭남 가운데 있으시다 할 수 있겠습니다. 영적 인간에게 있어서 묶임은 내적 묶임이며, 양심의 묶임, 속박이 있습니다.

 

천적 인간에게는 전투가 없습니다. 악과 거짓의 무슨 난폭한 공격이 있어도 그는 그것들을 경멸, 무시해 버리며, 그래서 그는 정복자, 이긴 자라 불립니다. 계시록에 나오는 이긴 자가 바로 이들입니다. 그는 정말 그 무엇도 그를 속박하지 못합니다. 그는 자유하며, 그에게 있어 굳이 속박이라 하면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 지각능력이지 싶습니다. 차원이 다른 속박이요, 묶임입니다.

 

, 이 정도의 배경이 있으면 창세기 첫 장들의 아케이나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하이라이트는 하나님이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입니다. 안식은 히브리어로 싸바스 a sabbath 이며, 그 뜻은 입니다. 곧 주님이 일곱째 날에 쉬셨다, 쉬실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슨 일이 있으셨길래 이제야 주님이 쉬실 수 있게 된 건가요?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모든 사람은 유전 악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악한 영들이 찾아옵니다. 마치 악취 나는 배설물에 똥파리 꼬이듯 말이지요. 이때 찾아오는 악한 영들은 각 개인의 악의 특성에 따라 다 다릅니다. 소위 주파수가 맞아야 하고, 코드가 맞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악한 영들은 이 사람 모르게 은밀히 활동하면서 한순간도 쉬지 않으면서 이 사람을 지옥으로 끌어당깁니다.

 

주님은 사랑이십니다. 주님은 이런 실상 가운데 있는 사람을 사랑하셔서 이번에는 선한 영들과 천사들을 보내십니다. 악한 영들이 지옥으로 끌어당기는 딱 그만큼 이번에는 이들을 통해서 천국으로, 주님한테로 끌어당기십니다. 사람은 딱 그 중간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거듭남 전 과정에 영적 전투, 곧 선악 간 싸움과 진리, 거짓 간 전투가 있는 이유가 바로 이런 배경 때문입니다.

 

영적 전투는 보이지 않는 적과의 싸움이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선천적으로 싸울 능력이 없습니다. 전적으로 주님이 대신 싸워 주셔야 하며, 우리가 하는 것은 그저 늘 주님 편에 서는 것, 늘 주님을 향하여 얼굴을 돌리는 정도입니다. 다음 주님 말씀은 영적 전투에 관한 말씀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11:28)

 

이 말씀은 주님이 우리 안에서 치러지는 영적 전투를 대신 싸우시겠다는 뜻입니다. 우리 안에 덕지덕지 붙은 악을 주님이 대신 떼어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주님한테로 가는 것뿐입니다. ‘주님, 도와주세요...’ 하기만 하면, 바로 주님의 도우심을 힘입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천국 천사들도 항상 주님을 향하여 얼굴을 돌린다고 합니다. 천국 천사들도 늘 그렇다고 한다면 하물며 지상에 사는 우리는 더욱 그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거듭남의 단계가 진행될수록 처음엔 우리를 좌지우지했던 악한 영들이 점점 맥을 못 씁니다. 우리의 의지가 점점 더 주님 쪽으로 기울기 때문이며, 점점 더 주님을 사랑하여 무슨 선택을 하며, 말을 하고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거듭남이 깊어져서 더욱 성숙해져 가면 우리는 그만큼 더 주님을 사랑하게 되며, 즐겁게 선을 행할 수 있게 됩니다. 이제는 악한 영들이 무슨 말로 우리를 꾀어도 더 이상 안 통합니다. 이쯤 되면 이제 악한 영들은 우리를 포기합니다. ‘, 이 사람은 더 이상 되돌릴 가망이 없다. 이미 선을 넘었다. 괜히 헛수고 말고 그만 철수하자...’

 

할렐루야! , 이때가 바로 악한 영들이 물러가는 때이며, 이때가 바로 평생 우리를 지긋지긋하게 괴롭히던 모든 매임에서 풀려나는 때입니다. 더 이상 싸움을 거는 상대가 없어지니 이제 더 이상 싸울 일도 없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때 비로소 주님은 우리 안에서 안식하십니다. 쉬실 수 있게 되신 겁니다. 우리를 믿고 안심하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것이 안식일의 아케이나입니다. 일곱째 날의 비밀입니다. 안식일은 그래서 비밀이며, 말할 수 없는 기쁨이며 영광입니다. 맨 처음 혼돈과 공허, 흑암 가운데 있던 인생을 주님은 그 사람 일평생 포기하지 않으시고, 힘주시며, 끝없이 품으시고 격려하셔서 결국 이 안식의 상태, 일곱째 날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모든 공로는 홀로 주님의 것이며, 그래서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안식일에 대한 주님의 권면입니다.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하지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하게 여기고 네 길로 행하지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하지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네가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기업으로 기르리라... (58:13-14)

 

십계명, 십성언 중에도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20:8-11)

 

주님의 말씀입니다.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2:28)

 

안식일의 아케이나를 기억하여 먼저 힘써 우리 자신 일곱째 날, 곧 안식일 되기를 힘쓰며, 또 이 일곱째 날을 거룩히 지켜야 할 것입니다.

 

아멘아멘,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유튜브 바로가기 : youtu.be/sxrC3JliQ5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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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4-85

 

창세기 22절로 3절입니다.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2:2-3)

 

And on the seventh day God finished his work which he had made; and he rested on the seventh day from all his work which he had made. And God blessed the seventh day, and hallowed it; because that in it he rested from all his work which God in making created.

 

 

84. 천적(天的) 인간 the celestial man 일곱째 날입니다. 반면, 주께서 일하신 육일간은 그의 일입니다. 이때 모든 전투가 그치는데, 이것이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안식하시니라입니다. 이런 이유로, 이 일곱째 날은 성별(聖別)되었고 sanctified, 히브리어로는 싸바쓰 sabbath 라고 하며, 그 뜻은 안식, ’ rest 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사람은 창조되었고 created, 형성되었으며 formed, 만들어졌습니다 made. 이 모든 일들이 말씀들로부터 아주 분명합니다.

 

 

85.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이라는 사실, 그래서 일곱째 날을 거룩하게 하시고 hallowed, 안식일 the sabbath 이라 하셨다는 사실은 이때까지 한 번도 밝혀진 적이 없는 아케이나(arcana, 秘義)입니다.

 

천적 인간의 본성에 관하여 잘 아는 acquainted with 사람은 지금까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영적 인간의 경우마저 거의 없다시피 한데 그나마 있는, 영적 인간의 본성을 좀 안다는 극소수의 사람들조차 이런 만연한 무지의 결과, 자기들을 천적 인간과 같게, 곧 자기들이 천적 인간인 줄로 착각할 정도였습니다. 앞서 81번 글을 보면,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 사이에는 실제로 엄청난 차이가 존재하는데도 말이지요.

 

일곱째 날에 대하여, 그리고 천적 인간이 바로 일곱째 날혹은 안식일이라는 사실에 대하여, 이것이 분명한 것은 주님 자신이 안식일 the sabbath 이시라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2:28)

 

이 말씀이 품은 imply 의미는 주님이 바로 그 사람 man himself, 곧 천적 인간이시며, 주님이 바로 안식일 the sabbath itself 이시라는 것입니다.

 

천국과 지상에 있는 그분의 왕국을 가리켜 주님은 안식 a sabbath, 영원한 행복과 쉼이라 하십니다.

 

[2] 여기서 살펴보고 있는 태고교회는 이후 이 교회를 계승한 다른 어떤 교회들보다도 더 가장 above all that succeeded it 주님의 안식일이었습니다. 또한 향후 이어지는 주님의 가장 내적 교회들 every subsequent inmost church 역시 안식일입니다.

 

모든 거듭나는 사람도 그가 천적이 되면 becomes celestial 역시 안식일입니다. 그때 그는 주님의 모양 the likeness of the Lord 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육일간의 전투 혹은 수고가 선행합니다. combat or labor precede. 이것이 유대교회에서 in the Jewish church 육일간의 수고와 일곱째 날 안식일로 표현되었습니다. 유대교회에서는 어느 것 하나 주님과 주님의 왕국을 대표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같은 설명이 궤 ark, 여호와의 법궤로도 재현되었습니다. 궤가 나아갈 때와 궤가 쉴 때로 말이지요. 궤가 광야를 이동할 때는 전투와 시험, 유혹을, 그리고 궤가 쉴 때는 평화를 각각 표현한 것입니다. 그래서 궤가 나아갈 때, 모세는 말하기를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가 주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 하였고 궤가 쉴 때에는 말하되 여호와여 이스라엘 종족들에게로 돌아오소서... (10:35-36)

 

여호와의 산을 떠날 때에는 궤를 가리켜 그들의 쉴 곳을 찾았고하였습니다.

 

그들이 여호와의 산에서 떠나 삼 일 길을 갈 때에 여호와의 언약궤가 그 삼 일 길에 앞서 가며 그들의 쉴 곳을 찾았고 (10:33)

 

[3] 이사야에서 천적 인간의 쉼을 안식일을 가지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하지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하게 여기고 네 길로 행하지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하지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네가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기업으로 기르리라... (58:13-14)

 

이것이 천적 인간의 질, 퀄러티 quality 입니다. 그는 자기 자신의 본능적 욕구 his own desire 가 아닌, 주님의 선한 즐거움 the good pleasure of the Lord 을 따릅니다. 이것이 곧 그의 즐거움’ his desire 인 것입니다. 그 결과 그는 내적 평화와 행복 internal peace and happiness 을 누립니다. 이것이 위 말씀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being uplifted over the lofty things of the earth 의 의미이며, 동시에 그는 겉으로도 평온과 큰 기쁨 external tranquility and delight 을 누리는데, 이것이 바로 네 조상 야곱의 기업으로 기르리라’ being fed with the heritage of Jacob 로 상징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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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우안(右眼) 수술 등, 38일 만에 유튜브 주일설교를 재개하게 되었습니다. 기다려 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 오늘은 221, 2월 셋째 주 주일입니다. 오늘 본문은 마태복음 2323절입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23:23)

 

오늘 이 본문과 또 십일조 관련, 몇몇 말씀들을 가지고, 과연 십일조의 참된 영적 의미, 아케이나는 무엇일까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마침 오늘은 우리 큰애 우석이의 만 31세 생일이며, 또 큰애 결혼 100일째 되는 날입니다. 신기합니다. 앞으로 해마다 큰애는 자기 결혼기념일로부터 딱 100일째 되는 날이 자기 생일이 되었어요! ㅎㅎㅎ... ^^

 

전혀 생각지도 못한 결혼을 그것도 풍요롭게 벼락같이 하고는 또 평안하고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면서 부모로서 여전히 지금도 꿈만 같고 이 모든 게 어찌됨인가 생각하며 주님께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또 저희 이 오늘 주일예배가 지난 199391, 바로 이 자리, 바로 아파트 집 저희 거실에서 창립개척예배를 처음 드린 후, 1995번째 드리는 예배이므로 다음 주말이면 2000번째 예배를 드리게 될 것 같아 요즘 곰곰이 지난날을 회상함과 함께 우리 큰애에게 찾아온 이 큰 복을 생각하면서 마음속 떠오르는 몇 가지가 있지만 그중 특별한 한 가지, 곧 큰 아이의 헌금생활, 특별히 십일조 생활이 떠올라 오늘 그 말씀을 좀 나누고자 합니다.

 

작년 11, 큰애 결혼 즈음하여 많은 지인들께 큰애의 결혼 소식을 전하는 멘트 가운데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어리둥절함 가운데 조용히 이해되어지는 바는, 두 가지인데요, 하나는... 우석이 지난 7년 동안, 부모님이 하시는 이 아파트 집 교회를 한결같이 섬겼습니다. 박사과정 중에 조금 나오는 그걸 가지고, 거기서 또 십일조에, 엄마 생활비에, 뭐에 뭐에... 아무리 바빠도 해외출장과 늘청(늘사랑교회 청년국) 수련회 때 외에는 늘 주일예배를 지키며, 아버지와 함께 특송을 올려드렸지요...

 

, 맞습니다. 이 내용 그대로입니다. 자기 앞가림 및 자기 앞날, 장래 장가갈 비용마련 등 생각해야 할 게 많았을 텐데도 우석이는 그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주님께 맡기며, 당장 현 상황 현재의 자리에서 주님과 부모님 앞에 자기의 할 도리를 다하기로 마음을 정하고는 두 마음을 품지 않고 외길을 걸었지요.

 

가끔 몇 달 십일조 및 생활비가 안 들어와 혹시 아이가 마음이 바뀌었나 보면 나중에 한꺼번에 들어오는 겁니다. 무슨 사정으로 프로젝트 대금이 이제야 들어왔다고요. 이 사이 아이는 그날그날 식비도 마땅치 않아 그냥 빵 한 쪽에 정수기 물만 먹을 때도 있었다는 말에 부모의 마음이 찢어질 때도 있었습니다...

 

주님의 호흡은 보통이 십 년이신가 봅니다. 주님이 사람의 마음을 저울질하시는 기본 단위가 말입니다. 결심만 잘하는 사람보다는 그 결심을 실행에 옮기는 사람, 황소처럼 묵묵히 뚜벅뚜벅 걸음을 옮기는, 그것도 십 년을 한결같이 그렇게 하는 사람의 마음을 인정하시는 것 같습니다. 물론 이마저도 그 마음이 정결해야 계속 그런 삶을 살 수 있는 마음을 주님으로부터 공급받을 수 있는 것이지요.

 

하여튼 저는 육십 평생에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아직도 주님께 인정받지 못하는 삶을 우리 큰아들은 나이 삼십에 인정을 받으며, 복 받는 것을 보면서, , 요셉이 저랬겠구나! , 다니엘이 저랬겠구나 싶습니다. 주님을 찬양하오며, 형의 이런 축복의 생생한 현장을 아우 준석이도 곁에서 보면서 준석이 우리 둘째도 동일한 복 받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 이런 이유 등으로 오늘은 특별히 우리의 헌금생활 중 십일조에 대하여, 그 아케이나(arcana, 秘義, 속뜻)에 대하여 같이 나누고자 합니다.

 

구약성경에서 십일조에 관한 거의 첫 본문이라 할 수 있는 곳은 바로 창세기 14, 아브람이 살렘 왕 멜기세덱에게 드린 부분입니다.

 

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한 왕들을 쳐부수고 돌아올 때에 소돔 왕이 사웨 골짜기 곧 왕의 골짜기로 나와 그를 영접하였고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14:17-20)

 

여기 20,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에 나오는 이 십분의 일에 관하여, 창세기 주석 아케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38번 글을 보면 이렇게 풀이하고 있습니다.

 

십일조(tithes)가 리메인스(remains)를 상징한다, 가리킨다는 사실은 앞에서 여러 번 말씀드렸습니다만 다시 한번 말씀드리면, 리메인스라는 것은 사랑과 체어리티(charity, 이웃 사랑, 선행, 인애)의 모든 상태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 사랑의 모든 상태, 이웃 사랑의 모든 상태들을 말하며,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순진함(innocence)과 평화(peace)의 모든 상태, 곧 천국의 모든 상태이며, 주님은 이런 상태, 이런 리메인스를 거듭남의 과정을 걷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선물로 주십니다.

 

이 상태들이 사람에게 그 유아기 때부터 주어져 어른이 되면서 점점 줄어들지만 그러다가 거듭남이 시작되면 사람은 다시 이번에는 새로운 리메인스를 받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주님이 주시는 새 생명입니다. 사람이 진정 사람이 되는 것은 바로 이 리메인스로부터, 또는 리메인스에 의해서이며, 만약 사람에게 이 주님 사랑, 이웃 사랑의 상태가 없다면, 그래서 결국 순진함의 상태가 없다면 사람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니며, 그때는 오히려 짐승보다도 더 최악이 됩니다. 사람은 순진함이 있어 자기도 모르게 점점 더 생명의 다른 상태들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본문에서 말하는 리메인스는 시험을 이김으로써 얻는 리메인스입니다. 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싸워 이긴 후, 멜기세덱에게 바친 십일조를 가지고 이 리메인스를 표현한 것입니다. 이 리메인스는 사랑의 모든 상태, 곧 사랑의 모든 천적인 것들인데, 주님도 인성을 입고 계신 동안은 지속적인 싸움과 이김을 통해서 힘들게 습득하신 것입니다. 이것으로 주님은 끊임없이 주님의 신적 본성과 결합하셨고, 같은 방식으로 주님의 인성이 사랑, 곧 생명 그 자체, 곧 여호와가 되실 때까지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이해가 되시나요? 좀 어렵지 않으신지요... 스베덴보리의 글들은 천계(天界), 초월적 지혜의 나라의 일을 매우 제한적인 지상의 언어로 표현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는지 원문은 사실 이보다 더 간략하고 문장과 문장 사이, 글과 글 사이 무슨 배경지식이 없으면 한 번에 이해하기가 다소 좀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위 주석을 제가 이해한 바로 좀 쉽게 풀이하자면...

 

모든 사람은 거듭남의 유무와 관계없이 일단은 주님으로부터 첫 번째 리메인스라는 것을 선물로 받습니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사람은 어떻게든 결국 선 쪽으로 기울어지는데요, 물론 사람들 중에는 끝까지 주님을 거절하여 선보다는 악을, 천국보다는 지옥을 선택, 결국 멸망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말입니다. 주님의 이 첫 번째 선물로 말미암아 사람은 여러 우여곡절 끝에 거듭남의 여정을 시작하며, 일단 거듭남이 시작되면 이제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두 번째 리메인스를 또 선물로 받습니다. 이 선물로 말미암아 사람은 생명, 곧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주님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발자국을 떼는 것이지요. 사람은 주님의 선물, 주님의 호의, 주님의 돌보심 없이는 결코 거듭남의 여정을 시작도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탐욕과 거짓의 덩어리, 곧 악의 덩어리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입니다. 사람 안에 주님이 넣어 두신, 주님으로 말미암은 이 리메인스라는 것이 있다는 것, 그리고 이것이 십분의 일로 표현된,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십일조라 일컫는 것이 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무슨 이쁜 짓을 하고, 무슨 기특한 행실을 보일 수 있는 것도 다 우리 안에 넣어 두신 이 리메인스 덕분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이것으로 멜기세덱, 곧 여호와 하나님으로 나타나신 주님을 공경하였습니다. ‘주님, 이것은 주님의 것입니다. 이것으로 제가 롯을 데려올 수 있었습니다.’ 사례한 것입니다. 이것이 십일조의 아케이나입니다.

 

이 멜기세덱 본문을 보다 더 온전히 이해하려면 그돌라오멜, 소돔왕, 그리고 롯과 아브람의 속뜻, 아케이나가 무엇이며, 그들 간 전쟁과 그 결과, 그리고 멜기세덱과 그가 들고 온 떡과 포도주의 아케이나가 무엇인지 등을 알아야 하지만 그것은 내용이 깊어지므로 다음에 기회 있을 때 정식으로(?) 다루기로 하고요, 여기서는 간략히만 말씀드리면...

 

주님도 인성을 입고 오셔서 처음에는 외견상의 선과 진리(apparent good and truth), 겉으로 보기엔 선이요, 진리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닌 것, 가짜인 것들과 끊임없이 싸우셨습니다. 그것이 아브람과 그돌라오멜 간 전쟁입니다. 아브람은 주님의 합리성(合理性, rationality), 그돌라오멜은 외견상 진리를, 롯은 주님의 겉사람을 각각 가리킵니다. 겉사람과 합리성은 같이 있어야 하는데 겉사람이 합리성을 떠나 가짜 진리에게 사로잡힌 것을 롯이 아브람을 떠나 소돔에 있다가 그돌라오멜에게 사로잡힌 것으로 본문은 말씀하고 있는 것이며, 주님이 이 가짜들과 싸워 이기신 후, 주님의 겉사람이 속사람이신 여호와 하나님께로 온전히 인도된 것을 아브람이 롯을 데리고 멜기세덱을 만난 것과 그의 떡과 포도주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 여기서는 이 정도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렇게 간략하게라도 소개를 하고 넘어가는 것은, 말씀(the Word)은 정말 철저하게 상응(相應, correspondence)으로 기록되었다는 것과 그래서 정말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깊은 아케이나로 기록되었다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신명기 1428, 29절입니다.

 

매 삼 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의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 중에 거류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14:28-29)

 

십분의 일을 가지고 주님이 무슨 일을 하시는지를 말씀하시는 본문입니다. 주님은 이 십분의 일을 가지고 레위인과 객, 고아와 과부들을 돌보십니다. 이들은 겉뜻으로도 그렇지만 속뜻으로도 영적 결핍을 뜻합니다. 주님은 거듭남을 시작한 사람들이 주님이 주시는 두 번째 리메인스를 가지고 이런 영적 결핍을 해결하기를 원하십니다. 거듭남의 여정 가운데 있는 우리는 정말 그래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우리와 우리의 이웃들에게 있는 이 영적 결핍들을 돌아보고 채워주는 일에 이 두 번째 리메인스를 열심히 사용해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 아브라함의 십일조 본문을 통해, 그리고 오늘 주님 말씀 마태복음 본문을 통해 우리가 확인하는 사실들이 있습니다.

 

먼저, 십일조를 드린다, 십일조 헌금을 한다는 것은 단순한 헌금행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주님이 넣어주신 선한 능력, 리메인스를 잘, 그리고 열심히 사용하여 더욱 주님으로부터 더욱더 많은 리메인스가 우리 속사람 안에 공급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 드리는 개념이 아닌, 주님의 것이 우리 안에 쌓이는 개념입니다.

 

말라기 말씀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3:10)

 

여기 시험하여증명하여’(prove, verify)라는 뜻입니다.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 자신의 믿음을 입증하라, 증명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온전한 십일조를 드릴 때, 주님은 우리 안에 더욱 더 넘치게 주님의 리메인스를 공급하십니다. 그리고 이런 넘치는 리메인스로 우리는 더욱 더 쉽게 거듭남의 여정, 곧 영적 싸움을 싸울 수 있습니다.

 

또 하나, 내 것을 드리는 게 아니라 사실은 주님의 것을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리메인스라는 것을 우리는 두 번 다 거저 받았습니다. 우리가 악을 이겨 낼 근본 능력을 우리도 모르게 주님께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주신 것으로 살며, 영적 전투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은 사실은 모두 주님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이 사실을 시인하며 사는 삶은 복된 삶이며, 그럴수록 우리는 더욱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게 되며, 우리가 드리는 것이 사실은 우리 안에 리메인스로 쌓이게 되는 것입니다. 아멘, 할렐루야!

 

오늘 본문, 주님 말씀입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23:23)

 

박하와 회향, 근채의 십일조는 외적인 십일조입니다. 정의와 긍휼, 믿음의 십일조는 내적인 십일조입니다. 이 둘은 같이 갑니다. 외적 십일조는 내적 십일조가 겉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십일조를 하지 않는 사람의 신앙이 온전할 수 없고, 반대로 온전한 신앙의 사람이 십일조 헌금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부디 주님 말씀처럼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않는그런 온전한 신앙생활들을 하시기를, 그래서 주님 약속하신 저 놀라운 말씀들이 우리 큰아들처럼 생생히 이루어지는 성도들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할렐루야!

 

 

알려드릴 말씀이 하나 있습니다.

 

제가 그동안 수년간 힘쓰던 유튜브에서의 활동을 무슨 사정으로 앞으로는 저의 개인 블로그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유튜브를 아주 닫는 건 아니지만 여기 유튜브에는 주일설교나 아주 특별한 것만 올리고, 대부분의 컨텐츠는 이렇게 비디오나 오디오 형태가 아닌 주로 글과 문서의 형태로 저의 블로그에 올리고자 합니다.

 

많은 양해 바라며, 아래 제 블로그 주소가 있으니 찾아와 둘러보시고 여전히 도움들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http://bygrace.kr/

 

byGrace's Tistory Blog

 

bygrace.kr

아래는 위 설교 유튜브 주소입니다.

 

youtu.be/cZRid5lCT0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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