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천국과 천국의 기쁨에 관하여

CONTINUATION CONCERNING HEAVENAND HEAVENLY JOY

 

 

545. 저로 하여금 천국과 천국 기쁨의 본질과 퀄러티에 대해 알게 하시려고 주님은 오랫동안 종종 제가 천국 기쁨의 즐거움을 지각할 수 있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것이 어떤 것인지를 이런 실제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지만 그러나 그것을 말로, 글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But in order that I might know the nature and quality of heaven and of heavenly joy, for long and often I have been permitted by the Lord to perceive the delights of heavenly joys, so that as I know them from actual experience I can indeed know them, but can by no means describe them.

 

하지만 제가 다음과 같이라도 말씀드리면 혹시 그것이 어떤 것인지를 살짝 가늠하실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천국의 기쁨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즐거움과 기쁨을 수반하는 일종의 어펙션입니다. 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즐거움과 기쁨이 전면적으로 동시에 경험되는 하나의 기쁨인데요, 이 전면적인 기쁨, 즉, 전면적인 어펙션 안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어펙션들이 조화를 이루며 존재합니다. 이때 이것은 하나하나 뚜렷이 지각되는 게 아니고, 모호하게 지각됩니다. 퍼셉션이 매우 전면적이기 때문입니다. However, in order to give some idea of it I may say that heavenly joy is an affection of innumerable delights and joys that form one general simultaneous joy, in which general joy, that is, in which general affection, there are harmonies of innumerable affections that do not come distinctly to perception, but obscurely, because the perception is very general.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허락하심을 받아 그 안, 천국의 기쁨 안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들이 내재하고 있음을 지각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들은 말로는 도저히 어떻게 설명할 수 없는 질서로 내재해 있었는데, 바로 천국의 질서로부터 흐르는 질서였습니다. Yet I was permitted to perceive that there are things innumerable within it, in such order as can never be described, these innumerable things being such as flow from the order of heaven.

 

이런 질서는 그 어펙션 모든 가장 미세한 것에까지 존재하며, 함께 합쳐 그 전체가 하나로 보이고, 그것의 주제, 곧 그 어펙션을 느끼고 있는 그 사람의 역량에 따라 아주 전체적인 것으로 지각됩니다. Such order exists in every least thing of the affection, all of which together are presented and perceived as a very general one according to the capacity of him who is the subject of it.

 

한 마디로, 모든 전반적인 기쁨 혹은 어펙션에는 가장 온전한 형태로 조성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들이 존재하지만, 살아있지 않거나 우리 안 가장 내적인 것에까지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은 전혀 없습니다. 천국의 기쁨은 가장 내적인 것들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In a word, in every general joy or affection there are illimitable things ordinated in a most perfect form, and there is nothing that is not alive or that does not affect even the inmost things of our being, for heavenly joys proceed from inmost things.

 

저는 또 지각하기를, 그 기쁨과 상쾌함은 마치 심장에서 나와 모든 가장 미세한 섬유조직들을 통해, 그리고 그렇게 조직 다발 속으로, 즐거움의 가장 내적 감각을 가지고 자신들을 아주 부드럽게 퍼트리는 것 같았으며, 이것은 마치 기쁨과 상쾌함만 남은 섬유조직 같았고, 이런 가운데서 나온 퍼셉션과 감각의 영향권 역시 전체적으로 그 행복하게 살아있는 것이 같았습니다. I perceived also that the joy and deliciousness came as if from the heart, and very softly diffused themselves through all the inmost fibers, and so into the congregated fibers, with such an inmost sense of delight that the fiber is as it were nothing but joy and deliciousness, and the whole derivative perceptive and sensitive sphere the same, being alive with happiness.

 

이들 기쁨들을 육체적 쾌락이 주는 기쁨과 비교하자면, 전자는 맑고 부드러운 산들바람 같다면, 후자는 역겹고 퀘퀘한 먼지와도 같다 할 수 있습니다. In comparison with these joys the joy of bodily pleasures is like gross and pungent dust as compared with a pure and gentle breeze.

 

 

546. 천국에 무척 있고는 싶은데 사실 천국에 있을 수는 없는 그런 사람들의 경우는 어떻게 되는지를 저로 하여금 알게 하시려고, 한번은 제가 하늘 어느 소사이어티에 있을 때, 한 천사가 머리에는 밝게 빛나는 파란 꽃들로 엮은 화관을 쓰고, 가슴에는 다른 색 꽃들로 꾸민 화환을 두른 유아로 제게 나타났습니다. In order that I might know how the case is with those who desire to be in heaven and are not such that they can be there, once when I was in some heavenly society, an angel appeared to me as an infant with a chaplet of bright blue flowers about its head, and girded about the breast with wreaths of other colors.

 

이걸 보고, 저는 그곳이 체어리티가 있는 어느 소사이어티임을 알았습니다. By this I was given to know that I was in some society where there was charity.

 

그때 어떤 착한 영들이 제가 있던 같은 소사이어티 안으로 들어왔는데, 그들은 들어오는 순간, 들어오기 전보다 훨씬 더 총명해져서 마치 천사적 영들처럼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Some well-disposed spirits were then admitted into the same society, who the moment they entered became much more intelligent, and spoke like angelic spirits.

 

그 후, 어떤 영들이 들어왔는데 그들은 스스로 순진무구하기를 원하던 영들이었고, 그중 저에게 표현된 한 영의 상태는 젖을 입 밖으로 토하는 유아의 모습이었습니다. Afterwards some were admitted who desired to be innocent from themselves, whose state was represented to me by an infant that vomited milk out of its mouth.

 

이것이 그들의 상태였습니다. Such is their state.

 

그때 또 어떤 영들이 들어왔는데, 그들은 스스로를 지성적이다, 총명하다 여기던 영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상태가 그들의 얼굴로 표현되었는데, 날카로워 보였으나 매우 고왔습니다. 그들은 날카로운 부분이 돌출된, 끝이 뾰족한 모자를 쓰고 있는 것 같았는데, 그런데 그들의 얼굴은 사람의 살처럼 보이지가 않았습니다. 마치 칼로 깎은 듯, 생명이 없는 듯한 얼굴이었습니다. Then some were admitted who supposed that they were intelligent from themselves, and their state was represented by their faces, which appeared sharp, but fair enough; and they seemed to wear a peaked hat from which a sharp point projected, but their faces did not appear to be of human flesh, but as if carved out and devoid of life.

 

이런 것은 스스로를 우리는 영적이다, 즉, 스스로를 우리는 신앙을 가졌다 믿는 사람들의 상태입니다. Such is the state of those who believe that they are spiritual from themselves, that is, able from themselves to have faith.

 

거기 머무를 수 없는 다른 영들이 들어왔는데, 실망들을 하며, 괴로워들을 하더니, 가버리는 것이었습니다. Other spirits were admitted who could not remain there, but were dismayed, became distressed, and fled away.

2021-07-30(D6)-매일예배(AC.545-546, 창5 C), '창5 클로징, 천국과 천국의 기쁨에 관하여(2)'.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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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3h7B2fLioX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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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천국과 천국의 기쁨에 관하여

CONTINUATION

CONCERNING HEAVEN AND HEAVENLY JOY

 

 

540. 저 세상에 들어오는 거의 모든 사람이 천국 행복과 지복(至福, bliss)의 본질에 대하여 무지합니다. 내적 기쁨의 본질과 퀄러티에 대해 모르기 때문이지요. Almost all who come into the other life are ignorant of the nature of heavenly happiness and bliss, because they know not the nature and quality of inward joy.

 

그들은 그저 육체와 세상의 기쁨과 즐거움을 가지고 좀 미루어 짐작할 뿐입니다. They form a conception of it merely from the delights and joys of the body and the world.

 

그들은 자기들이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그건 아무것도 아닌 걸로 여깁니다. 그러나 실상은, 육체적이고 세속적인 즐거움이야말로 아무것도 아닌, 아주 더러운 것입니다. What they are ignorant of they suppose to be nothing, the truth being that bodily and worldly joys are relatively non-existent and foul.

 

성품은 좋으나 천국에 대해서는 무지한 사람들로 하여금 천국의 기쁨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배우며 알 수 있도록, 그들을 모든 상상을 뛰어넘는 파라다이스들의 첫 번째 장소로 데려갑니다. (이곳에 관해서는 주님의 신적 자비, 곧 허락하심으로 나중에 밝히겠습니다. cf. 1622) 그곳에 도착하면 그들은 자기들은 지금 천국의 파라다이스에 도착했다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것은 천국의 참된 기쁨이 아니라는 것과, 다음 순서로, 허락하심을 받아 그들의 가장 깊은 내면에까지 지각되는 기쁨의 내적 상태들을 맛보게 됩니다. In order therefore that those who are well disposed may learn and may know what heavenly joy is, they are taken in the first place to paradises that surpass every conception of the imagination (concerning which, of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 and they suppose that they have arrived in the paradise of heaven; but they are taught that this is not true heavenly happiness, and are therefore permitted to experience interior states of joy which are perceptible to their inmost being.

 

그들은 평화의 상태, 심지어 가장 내적인 데까지 옮겨졌고, 거기서 그들은 고백하기를, 지금 이 상태, 이 기쁨은 그 어떤 말로도 전혀 표현할 수 없고, 그 어떤 것으로도 전혀 상상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They are then transported into a state of peace, even to their inmost being, and they confess that nothing of it is at all expressible or conceivable.

 

최종적으로, 그들은 이노센스 상태로 인도되었고, 또한 그들의 가장 내적 느낌, 곧 가장 깊은 레벨의 감각으로도 인도되었습니다. And finally they are introduced into a state of innocence, also to their inmost feeling.

 

이렇게 그들은 허락하심을 받아 참된 영적, 천적 선의 본질에 대하여 배웠습니다. In this way are they permitted to learn the nature of true spiritual and celestial good.

 

 

541. 천국 기쁨의 본질에 대해 무지했던 어떤 영들이 갑자기 사로잡혀 천국으로 옮겨졌습니다. 그들은 그전에 이렇게 천국으로 옮겨지는 것이 가능하도록 그들의 육체에 속한 것들, 곧 육체적 욕망과 상상 속에나 나올 법한 생각들, 곧 환상이 모두 잠재워진 후에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Certain spirits who were ignorant of the nature of heavenly joy were unexpectedly taken up into heaven after they had been brought into such a state as to render this possible, that is to say a state in which their bodily things and fanciful notions were lulled into quiescence.

 

거기서 저는 어떤 사람이 저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지금 자기는 처음에는 천국 기쁨이 얼마나 엄청난지를 느꼈다고, 자기는 그동안 천국에 대해 전혀 다른, 엉뚱한 생각을 갖도록 단단히 속아왔다고, 그러나 지금은 자기 내적 존재 저 깊은 데까지 측량할 수 없는 기쁨을 지각하였는데, 이것은 자기가 몸 안에서 살 때는 결코 맛본 적 없는 즐거움이라고, 사람들은 몸 안에 살면서 그걸로 기뻐하고 그러는데, 지금 보면 그건 그냥 악취였다고 말입니다. From there I heard one saying to me that now for the first time he felt how great is the joy in heaven, and that he had been very greatly deceived in having a different idea of it, but that now he perceived in his inmost being a joy immeasurably greater than he had ever felt in any bodily pleasure such as men are delighted with in the life of the body, and which he called foul.

 

 

542. 천국의 퀄러티를 알 수 있게 하려고 천국에 사로잡혀 옮겨진 사람들은 그들의 육체적 욕망과 환상이 잠재워지거나, - 여기서 잠깐, 사전에 이런 일이 필요한 이유는, 아무도 그들이 세상에서 취한 그런 걸 가지고는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 또는 불순하거나 불일치를 일으키는 그런 것들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억누르는 영들의 아우라로 그들은 둘러싸입니다. They who are taken up into heaven in order that they may know its quality either have their bodily things and fanciful notions lulled to quiescence—for no one can enter heaven with the bodily things and fanciful notions that they take with them from this world—or else they are surrounded by a sphere of spirits who miraculously temper such things as are impure and that cause disagreement.

 

어떤 사람들은 그 내면들이 열리는데, With some the interiors are opened.

 

이런저런 방식으로 그들은 자신들의 삶과 그 삶을 통해 획득한 본성에 따라 준비됩니다. In these and other ways they are prepared, according to their lives and the nature thereby acquired.

 

 

543. 천국 기쁨의 본질 알기를 무척이나 갈망하던 어떤 영들이 있었는데, 그래서 그들은 허락을 받아 그들 본성의 가장 깊은 내면을 지각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수준으로는 도저히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최대치였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천사적 기쁨이 아니었고, 천사적 기쁨 중 기껏해야 가장 낮은 것이라고나 할까요? 이런 것이 제게 허락되어 그들의 기쁨이 어떤 것인지 지각할 수 있었습니다. Certain spirits longed to know the nature of heavenly joy, and were therefore allowed to perceive the inmost of their own, to such a degree that they could bear no more; and yet it was not angelic joy, being scarcely equal to the least angelic joy, as was given me to perceive by a communication of their joy.

 

그것은 아주 잠깐이지만 오히려 냉기마저 느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도저히 천국의 기쁨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었는데도, 그러나 그들로서는 그것이 가장 깊은 내적 기쁨이었고, 그들은 그것을 가장 깊은 내적 천국의 기쁨이라고 했습니다. It was so slight as to be as it were chilly, and yet being their inmost joy they called it most heavenly.

 

이 사실로 분명한 것은, 기쁨에는 레벨, 곧 수준 차이가 있으며, 어떤 기쁨의 가장 깊은 레벨은 다른 기쁨의 가장 바깥이나 중간에도 못 미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누가 자신의 가장 내적 기쁨을 받으면 그는 그 자신의 천국 기쁨 가운데 있는 것이며, 그 이상 무슨 내적 기쁨을 받으면 도저히 견딜 수가 없는데 그때는 그 기쁨이 그에게 고통이 되기 때문입니다. From this it was evident not only that there are degrees of joys, but also that the inmost of one scarcely approaches the outmost or middle of another, and that when anyone receives his own inmost joy, he is in his heavenly joy, and cannot endure that which is still more interior, for it becomes painful.

 

 

544. 그때 제가 여기는 첫 번째 천국이라고 들은 그런 천국의 이노센스 안으로 받아들여진 어떤 영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거기서 고백하기를, 자기들이 지금 맛보고 있는 기쁨과 반가움의 상태는 자기들이 그동안 결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Certain spirits who were admitted into the heaven of innocence of the first heaven spoke to me thence, and confessed that the state of joy and gladness was such as they never could have conceived any idea of.

 

그러나 이 역시 첫 번째 천국일 뿐이었습니다. 세 천국과 각각의 이노센스 상태들이 있으며, 그 각각이 또한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하게 펼쳐집니다. Yet this was only in the first heaven, and there are three heavens, and states of innocence in each, with their innumerable varieties.

2021-07-29(D5)-매일예배(AC.540-544, 창5 C), '창5 클로징, 천국과 천국의 기쁨에 관하여(2)'.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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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T6lKVErtS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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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과 천국의 기쁨에 관하여(2)

CONTINUATION CONCERNING HEAVEN AND HEAVENLY JOY

 

 

537. 어떤 영이 제 왼쪽에 달라붙어 제게 묻기를, 자기가 어떻게 천국에 올 수 있었는지 아십니까 하였습니다. A certain spirit attached himself to my left side, and asked me whether I knew how he could get into heaven.

 

저는 허락을 받아 그 영에게 말하기를, 천국 입국 허가는 오직 주님에게만 속한 것이며, 주님만이 어떤 사람의 퀄러티를 아십니다 대답하였습니다. I was permitted to tell him that admission into heaven belongs solely to the Lord, who alone knows what a man’s quality is.

 

천국에 오려고 나름 무슨 추구를 하는 아주 많은 사람들이, 그러나 정작 천국이 어떤 곳인지, 천국의 기쁨이 무엇인지, 천국은 서로 사랑하는 곳이며, 천국의 기쁨은 그런 사랑에서 나오는 기쁨이라는 등의 사실들을 전혀 모른 채 세상을 떠나 이곳에 오고 있습니다. Very many arrive from the world who make it their sole pursuit to get into heaven, being quite ignorant of what heaven is, and of what heavenly joy is, that heaven is mutual love, and that heavenly joy is the derivative joy.

 

그래서 이런 걸 모르고 오는 사람들을 위해 먼저 실제 경험을 통해 배우게 하고 있습니다. Therefore those who do not know this are first instructed about it by actual experience.

 

예를 들어, 세상을 떠나 막 도착한 어떤 신참 영이 있었습니다. 그 역시 같은 식, 그러니까 천국에 대한 철저한 무지 가운데서도 천국을 갈망하던 사람이었는데, 그런 그에게 천국의 본성이 어떤 것인지 직접 지각하게 하려고, 그의 내면들을 열어 천국의 기쁨 얼마를 실제 느껴볼 수 있게 했습니다. For example, there was a certain spirit, newly arrived from the world, who in like manner longed for heaven, and in order that he might perceive what the nature of heaven is, his interiors were opened so that he should feel something of heavenly joy.

 

그는 천국을 향해 열린 내면들을 통해 천국의 기운이 닿자마자 온몸을 비틀며 고통스러워하더니 제발 좀 자기를 옮겨달라고, 자기는 극심한 괴로움 때문에 도저히 살 수가 없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천국을 향해 열렸던 그의 내면들이 도로 닫혔고, 그렇게 그의 상태는 다시 원래대로 회복되었습니다. But as soon as he felt it he began to lament and to writhe, and begged to be delivered, saying that he could not live on account of the anguish; and therefore his interiors were closed toward heaven, and in this way he was restored.

 

이 사례를 통해, 우리는 천국에 대한 준비가 전혀 안 된 사람들은 아주 잠깐이라도, 양심의 격렬한 고통과 고문을 당하는 듯한 극심한 괴로움을 맛보게 된다는 것을, 즉, 단 한 순간이라도 천국 안에 발을 들여놓을 수가 없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From this instance we may see with what pangs of conscience and with what anguish those are tortured who not being prepared for it are admitted even but a little way.

 

 

538. 천국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천국에 들어가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There were some who sought admission into heaven without knowing what heaven is.

 

그들은 사랑의 신앙 안에 있지 않으면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마치 화염 속으로 들어가는 것 만큼이나 위험한 일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그걸 추구했습니다. They were told that unless they were in the faith of love, to enter heaven would be as dangerous as going into a flame; but still they sought for it.

 

그들이 첫 번째 입구 안 마당, 즉, 천사적 영들의 낮은 영역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고통에 사로잡혀 머리를 아래로 하여 거꾸로 자신을 던질 정도로 힘들어했습니다. 신앙의 어펙션들을 받을 수 있도록 먼저 주님에 의해 준비되지 않고, 무작정 천국을 향해 접근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그들은 이런 방식으로 배웠습니다. When they arrived at the first entrance court, that is to say, the lower sphere of angelic spirits, they were smitten so hard that they threw themselves headlong back, and in this way were taught how dangerous it is merely to approach heaven until prepared by the Lord to receive the affections of faith.

 

 

539. 몸 안에 있었던 생애 동안 간음과 간통의 빛 가운데 살았던 어떤 영이 간절히 원한 덕분에 천국의 첫 번째 문턱에 들어가 보도록 허락을 받았습니다. A certain spirit who during his life in the body had made light of adulteries, was in accordance with his desire admitted to the first threshold of heaven.

 

그가 거기 도착하자마자 그는 고통스러워했고, 자신에게서 죽은 사람의 악취가 나는 것을 도저히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As soon as he came there he began to suffer and to be sensible of his own cadaverous stench, until he could endure it no longer.

 

그는 내가 여기 더 머물렀다간 소멸됙겠구나 싶어 다 내던지고 더 낮은 곳으로 뛰어내렸습니다. 그는 천국 첫 문턱, 간음과 정반대되는 영역에 고작 도착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런 고통을 겪어야만 하는 사실에 격분했습니다. It seemed to him that if he went any farther he should perish, and he was therefore cast down to the lower earth, enraged that he should feel such torment at the first threshold of heaven, merely because he had arrived in a sphere that was contrary to adulteries.

 

그는 불행한 사람들과 함께, 즉, 지옥에 있습니다. He is among the unhappy.

2021-07-28(D4)-매일예배(AC.537-539), '창5 클로징, 천국과 천국의 기쁨에 관하여(2)'.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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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pRFsDD5WK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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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는 오백 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 And Noah was a son of five hundred years; and Noah begat Shem, Ham, and Japheth. (창5:32)

 

 

534. ‘노아’는 지금까지 말씀드린 대로, 고대교회(古代敎會, the ancient church)를 상징합니다. By “Noah,” as has been said, is signified the ancient church.

 

셈, 함, 야벳’은 ‘노아’라는 고대교회를 부모로 하는, 세 고대교회를 상징합니다. By “Shem, Ham, and Japheth” are signified three ancient churches, the parent of which was the ancient church called “Noah.

 

 

535. ‘노아’라는 교회는 홍수 전에 있었던 교회들 중 하나로 번호를 매기지는 않는다는 내용이 29절에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That the church called “Noah” is not to be numbered among the churches that were before the flood, appears from verse 29, where it is said that it should “comfort them from their work and the toil of their hands, out of the ground which Jehovah hath cursed.

 

안위하다, 위로하다’는 것은 살아남아 견디는 것입니다. The “comfort” was that it should survive and endure.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 관하여는 주님의 신적 자비, 곧 주님의 허락하심으로 나중에 다루겠습니다. But concerning Noah and his sons, of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

 

 

536. 선행 페이지들에서, 홍수 전에 존재한 교회들에게 소유되었던 퍼셉션에 관한 많은 내용을 말씀드려왔기 때문에, 그리고 오늘날은 퍼셉션에 관해 전혀 알려진 바 없어 어떤 사람들은 퍼셉션을 일종의 계시의 지속으로, 혹은 사람들 안에 심긴 어떤 것으로, 다른 사람들은 그저 상상일 뿐으로, 또 다른 사람들은 또 다른 어떤 걸로 등 이렇게 온갖 의견들이 난무하기 때문에, 그리고 퍼셉션은 주님이 사랑의 신앙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주신 천적인 것 그 자체이기 때문에, 그리고 광범위한 천국 전체의 끝없는 다양성 안에는 이 퍼셉션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등, 이런 여러 이유로, 사람들 안에 퍼셉션이 무엇인지에 대한 기본 개념들이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저는 주님의 신적 자비, 곧 주님의 허락하심을 받아 이어지는 페이지들에서 수많은 천국에 존재하는 퍼셉션의 주된 종류들을 설명하고자 합니다. As in the foregoing pages much has been said about the perception possessed by the churches that existed before the flood, and as at this day perception is a thing utterly unknown, so much so that some may imagine it to be a kind of continuous revelation, or to be something implanted in men; others that it is merely imaginary, and others other things; and as perception is the very celestial itself given by the Lord to those who are in the faith of love, and as there is perception in the universal heaven of endless variety: therefore in order that there may be among men some conception of what perception is, of the Lord’s Divine mercy I may in the following pages describe the principal kinds of perception that exist in the heavens.

2021-07-27(D3)-매일예배(AC.534-536, 창5,32), '노아, 고대교회의 시작'.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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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__WvpMMruL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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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라멕은 노아를 낳은 후 오백구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And Lamech lived after he begat Noah five hundred ninety and five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31그는 칠백칠십칠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all the days of Lamech were seven hundred seventy and seven years; and he died. (창5:30-31)

 

 

532. ‘라멕’은 앞서 말씀드린 대로, 황폐해진 교회를 상징합니다. By “Lamech,” as before said, is signified the church vastated.

 

자녀들’은 그와 같은 교회를 계속해서 잉태 및 해산하였음을 상징합니다. By “sons and daughters” are signified the conceptions and births of such a church.

 

 

533. 라멕과 관련해서는 그가 자녀들을 낳았다는 것, 곧 그런 교회의 여러 잉태와 해산이 있었다는 것 말고는 더 이상 뭐가 없으므로 라멕에 관해서는 이쯤 하겠습니다. As nothing more is related concerning Lamech than that he begat sons and daughters, which are the conceptions and births of such a church, we shall dwell no longer on the subject.

 

여러 해산, 곧 ‘자녀들’이 무엇인지는 그 교회를 보면 압니다. 그 교회의 모습이 곧 그 교회의 여러 해산, 태어남이기 때문입니다. What the births were, or the “sons and daughters,” appears from the church; for such as is the church, such are the births from it.

 

므두셀라’와 ‘라멕’이라 하던 교회들은 둘 다 홍수 직전에 끝났습니다. Both the churches called “Methuselah” and “Lamech” expired just before the flood.

2021-07-26(D2)-매일예배(AC.532-533, 창5,30-31), '므두셀라, 라멕, 홍수 직전에 끝난 교회들'.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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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ksP5VNnXg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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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을 노아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And he called his name Noah, saying, He shall comfort us from our work, and the toil of our hands, out of the ground which Jehovah hath cursed. (창5:29)

 

 

528. ‘노아’는 고대(古代, the ancient)교회를 상징합니다. By “Noah” is signified the ancient church.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라는 표현은 교리를 상징하는데, 이 교리로 말미암아 그동안 왜곡되었던 모든 것이 회복될 것입니다. By “comforting us from our work and the toil of our hands, out of the ground which Jehovah hath cursed,” is signified doctrine, whereby what had been perverted would be restored.

 

 

529. ‘노아’는 고대교회 혹은 홍수 후 세 교회인 셈, 함, 야벳의 부모 교회를 상징한다는 내용이, 뒤에 이어지는 페이지들을 보시면 나오는데요, 거기 노아에 대한 내용이 정말 엄청납니다. That by “Noah” is signified the ancient church, or the parent of the three churches after the flood, will appear from the following pages, where Noah is largely treated of.

 

 

530. 본 장에 나오는 이름들은, 앞서 언급한 대로, 교회, 혹은 같은 말이지만 교리를 상징합니다. 교회는 교리를 가지고 존재하고, 또 이름하기 때문이지요. ‘노아’ 역시 그런 식으로, 고대교회를 상징하거나, 혹은 태고교회 교리들 가운데 남은 것을 상징합니다. By the names in this chapter, as we have said, are signified churches, or what is the same, doctrines; for the church exists and has its name from doctrine; thus by “Noah” is signified the ancient church, or the doctrine that remained from the most ancient church.

 

교회와 교리를 가지고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는 이미 다루어 왔는데요, 즉, 교회와 교리들은 기울어지는데, 신앙의 선과 진리가 더 이상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로까지 기울어지며, 교회가 그 상태, 그 지경에 이르는 것을 말씀에서는 황폐해졌다 합니다. How the case is with churches or doctrines has already been stated, namely, that they decline, until there no longer remains anything of the goods and truths of faith, and then the church is said in the Word to be vastated.

 

그러나 여전히 리메인스, 혹은 신앙의 선과 진리가 남아 있는 어떤 사람들은 늘 보존되고 있습니다. 신앙의 선과 진리가 이 얼마 안 되는 사람들에게서라도 보존되지 않으면 인류와 천국이 결합하는 일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But still remains are always preserved, or some with whom the good and truth of faith remain, although they are few; for unless the good and truth of faith were preserved in these few, there would be no conjunction of heaven with mankind.

 

개인적 차원에서 어떤 한 사람 안의 리메인스를 생각해 보면, 이것이 적을수록 그는 그가 가진 이성과 지식에 관한 것들이 덜 열리며, 덜 밝아집니다. 선과 진리의 빛은 리메인스로부터, 혹은 주님으로부터 리메인스를 통해서 그 사람 안으로 흘러들어 오기 때문입니다. As regards the remains that are in a man individually, the fewer they are the less can the matters of reason and knowledge that he possesses be enlightened, for the light of good and truth flows in from the remains, or through the remains, from the Lord.

 

만일 사람 안에 리메인스가 전혀 남아 있지 않으면 그는 사람이라 할 수 없고, 대신 짐승보다 훨씬 더 끔찍한 그 무엇이 될 수 있습니다. 리메인스가 적을수록 그는 사람이 아니며, 리메인스가 많을수록 그는 사람입니다. If there were no remains in a man he would not be a man, but much viler than a brute; and the fewer remains there are, the less is he a man, and the more remains there are, the more is he a man.

 

리메인스는 마치 밤하늘의 별과 같습니다. 별이 적을수록 별빛은 희미하지만, 별이 많으면, 별빛도 밝은 것처럼 말입니다. Remains are like some heavenly star, which, the smaller it is the less light it gives, and the larger, the more light.

 

태고교회로부터 겨우 남은 것들이 ‘노아’라 하는 교회를 이룬 사람들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남은 것은 퍼셉션이 아닌, 온전함에 관한 것이며, 태고교회의 퍼셉션에서 나온 교리에 관한 것입니다. 이렇게 새로운 교회가 이제 주님으로 말미암아 일어납니다. 이 교회는 이전 태고교회와는 본성적으로 완전히 다른 교회이며, 고대교회라 이름하였습니다. 고대라는 것은, 홍수 직전에 존재, 홍수 후 첫 세대 동안 있었던 데서 가져왔습니다. The few things that remained from the most ancient church were among those who constituted the church called Noah; but these were not remains of perception, but of perfection, and also of doctrine derived from the things of perception in the most ancient churches; and therefore a new church was now raised up by the Lord, which being of an entirely different native character from the most ancient churches, is to be called the ancient church—ancient from the fact that it existed at the close of the ages before the flood, and during the first period after it.

 

이 교회에 관해서는, 주님의 신적 자비, 곧 주님의 허락을 받아 나중에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Of this church, by the Divine mercy of the Lord, more will be said hereafter.

 

 

531.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라는 표현은 교리를 상징하는데, 이 교리로 말미암아 그동안 왜곡되었던 모든 것이 회복될 것이라는 이런 내용 또한 주님의 신적 자비, 곧 주님의 허락으로 이어지는 페이지들 가운데 보시게 됩니다. That by “comforting us from our work and the toil of our hands, out of the ground which Jehovah hath cursed” is signified doctrine, whereby what had been perverted would be restored, will also appear, of the Lord’s Divine mercy, in the following pages.

 

’이 상징하는 바는, 무엇이 진리인지를 그들은 고통에 가까운 수고를 하지 않고는 지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By “work” is signified that they could not perceive what is true except with labor and distress.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라는 표현이 상징하는 것은, 그들은 선을 전혀 행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By the “toil of the hands out of the ground which Jehovah hath cursed” is signified that they could do nothing good.

 

그래서 ‘라멕’을 가리켜 황폐해진 교회라고 합니다. Thus is described “Lamech,” that is, the vastated church.

 

사람이 참(what is true)을, 진리, 진실을 추구하는 것도, 그리고 선을 행하는 것도 ‘일과 손의 수고’가 되는 때는 바로 스스로의 힘으로, 혹은 자신의 것으로 할 때입니다. There is “work and labor of the hands” when, from themselves or from their own, men must seek out what is true and do what is good.

 

이런 사실에서 나오는 것이 바로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곧, 거짓된 것과 악한 것 말고는 아무것도 나오는 게 없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저주하심’의 의미는 위 245번 글을 보시기 바랍니다.) That which comes of this is the “ground which Jehovah hath cursed,” that is, nothing comes of it but what is false and evil. (But what is signified by “Jehovah cursing,” may be seen above, n. 245.)

 

위로하다’라는 표현은 ‘아들’ 혹은 노아와 관련되는데, 새로운 거듭남, 즉, 새로운 교회, 고대교회를 상징합니다. To “comfort” has reference to the “son,” or Noah, whereby is signified a new regeneration, thus a new church, which is the ancient church.

 

이 교회, ‘노아’는 그래서 쉼과, 그리고 쉼에서 오는 위로를 상징하는데, 이 쉼은 태고교회 때, 주님이 쉬셨던 바로 그 일곱 번째 날의 쉼입니다. (참조, 84 - 88번 글) By this church, or “Noah,” is therefore likewise signified rest, and comfort that comes from rest, just as it was said of the most ancient church that it was the seventh day, in which the Lord rested. (See n. 84–88.)

2021-07-25(D1)-주일예배(AC.528-531, 창5,29), '노아, 태고교회의 리메인스'.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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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qxL-qEF-v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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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25(D1)-제9권30호통413호.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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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멕은 백팔십이 세에 아들을 낳고 And Lamech lived a hundred eighty and two years, and begat a son; (창5:28)

 

 

526. 여기 ‘라멕’은 아홉 번째 교회를 상징합니다. 이 교회의 퍼셉션, 곧 주님의 신성, 선과 진리에 대한 지각 능력은 너무나 그저 그렇고, 흐릿해서 더 이상 그 다음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곧, 교회가 황폐해진 것이지요. By “Lamech” is here signified a ninth church, wherein the perception of truth and good was so general and obscure that it was next to none, so that the church was vastated.

 

아들’은 어떤 새 교회가 일어남을 상징합니다. By the “son” is signified the rise of a new church.

 

 

527. ‘라멕’에 관한 위의 내용, 곧, 라멕이라는 교회는 진리와 선에 관한 퍼셉션 능력이 그 이전 교회들보다 더 그저 그렇고, 흐릿해서 더 이상 그 다음이 없을 정도로 황폐한 교회였다라는 사실은 앞장에서 이미 언급했고, 또 이어지는 다음 구절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That by “Lamech” is signified a church wherein the perception of truth and good was so general and obscure as to be next to none, consequently a church vastated, appears from what was said in the preceding chapter, and from what follows in the next verse.

 

앞장에서 ‘라멕’은 여기 라멕과 거의 똑같은 걸 상징하는데요, 바로 황폐함입니다. (창4:18-19, 23-24 참조) 그리고 그를 낳은 자 역시 거의 비슷한 이름인 ‘므두사엘’인데요, 이런 걸 보면, 이 이름들이 거의 동일한 것들을 상징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Lamech” in the preceding chapter has nearly the same signification as in this, namely, vastation (concerning which see Gen. 4:18, 19, 23, 24); and he who begat him is also called by nearly the same name, “Methusael,” so that the things signified by the names are nearly the same.

 

18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19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23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24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창4:18-19, 23-24)

 

므두사엘’과 ‘므두셀라’는 곧 죽게 될 무언가를 상징하며, ‘라멕’은 무엇인가 파괴, 파멸된 것을 상징합니다. By “Methusael” and “Methuselah” is signified something that is about to die; and by “Lamech” what is destroyed.

2021-07-23(D6)-매일예배(AC.526-527, 창5,28), '라멕, 파괴, 파멸, 황폐(vastation)'.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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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2krmAdGWZU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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므두셀라는 백팔십칠 세에 라멕을 낳았고 And Methuselah lived a hundred eighty and seven years, and begat Lamech. (창5:25)

 

 

523. ‘므두셀라’는 여덟 번째 교회를, ‘라멕’은 아홉 번째 교회를 각각 상징합니다. By “Methuselah” is signified an eighth church, and by “Lamech” a ninth.

 

 

524. 이 교회의 퀄러티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언급할 게 없습니다. 다만 그 퍼셉션 역량에 관해 굳이 언급하자면... 그건 그저 그랬다는 것, 곧, 그저 일반적이고 흐릿했다는 사실이며, 이것은 ‘노아’라는 교회에 관한 설명을 보시면 분명히 아실 수 있습니다. 즉, 완전함이라는 게 감소하여 허술해졌는데, 특히 지혜와 지성에서 그랬습니다. Nothing is mentioned concerning the quality of this church; but that its perceptive faculty was general and obscure, is evident from the description of the church called “Noah”; so that perfection decreased, and with perfection wisdom and intelligence.

 

 

26라멕을 낳은 후 칠백팔십이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And Methuselah lived after he begat Lamech seven hundred eighty and two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27그는 구백육십구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all the days of Methuselah were nine hundred sixty and nine years; and he died. (창5:26-27)

 

 

525. 이 표현들도 같은 의미입니다. These words have a like signification.

2021-07-22(D5)-매일예배(AC.523-525, 창5,25-27), '므두셀라, 점점 더 희미해진 교회'.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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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8tZBBdli7s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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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And all the days of Enoch were three hundred sixty and five years. 24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And Enoch walked with God, and he was no more, for God took him. (창5:23-24)

 

 

520.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라는 표현은 그들의 수가 아주 적었다는 뜻입니다. By “all the days of Enoch being three hundred sixty and five years” is signified that they were few.

 

그의 ‘하나님과 동행’이라는 표현은 위에서처럼, 신앙 관련 교리를 의미합니다. By his “walking with God” is signified, as above, doctrine concerning faith.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는 표현은 후손들의 사용을 위해 이 교리를 보존하신다는 뜻입니다. By “he was no more, for God took him” is signified the preservation of that doctrine for the use of posterity.

 

 

521.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는 표현이 후손들의 사용을 위해 이 교리를 보존하심을 뜻한다는 것에 관하여, 에녹의 경우는, 이미 말씀드린 대로, 다음과 같습니다. 그는 태고교회에서는 퍼셉션의 일이었던 것을 교리라는 형태로 하향 재탄생케 하였는데, 이것은 그 교회 시대에는 허용될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퍼셉션으로 아는 것은, 교리로 배우는 것하고는 아주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As to the words “he was no more, for God took him” signifying the preservation of that doctrine for the use of posterity, the case with Enoch, as already said, is that he reduced to doctrine what in the most ancient church had been a matter of perception, and which in the time of that church was not allowable; for to know by perception is a very different thing from learning by doctrine.

 

퍼셉션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교리 형태로 정리해서 굳이 따로 배울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은 이미 다 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They who are in perception have no need to learn by formulated doctrine that which they know already.

 

예를 들어, 잘 생각하는 법을 이미 아는 사람은 생각하는 법을 예술 수준으로까지 올린 무슨 규칙들을 가지고 배울 필요는 없습니다. 이렇게 하면 오히려 그의 잘 생각하는 타고난 재능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건 마치 스콜라 철학의 먼지를 스틱으로 빠르게 찌르고 있는 사람들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For example: he who knows how to think well, has no occasion to be taught to think by any rules of art, for in this way his faculty of thinking well would be impaired, as is the case with those who stick fast in scholastic dust.

 

퍼셉션으로 배우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무엇이 선이요, 진리인지를 내적 방식과 경로로 알게 하십니다. 그러나, 교리로 배우는 사람들은, 지식이라는 것을 외적 방식, 혹은 육체적 감각으로 얻게 되는데, 이 둘의 차이는 마치 빛과 어두움 간 차이와도 같습니다. To those who learn by perception, the Lord grants to know what is good and true by an inward way; but to those who learn from doctrine, knowledge is given by an external way, or that of the bodily senses; and the difference is like that between light and darkness.

 

또한 천적 인간의 퍼셉션은 도무지 어떻게 설명을 할 수가 없다는 점도 고려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가장 작고 특별한 것들 속으로 상태들과 환경들, 상황들을 따라 온갖 다양성을 가지고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Consider also that the perceptions of the celestial man are such as to admit of no description, for they enter into the most minute and particular things, with all variety according to states and circumstances.

 

그러나 태고교회의 퍼셉션 능력이 사라지고 난 후, 인류는 무엇이 진리요, 선인지를 교리로 배우게 되며, 곧, 어두움을 겪고 나서 빛으로 나아오게 될 것을 미리 아시고, 여기 이르시기를,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셨다’, 즉, 후손들이 사용하도록 그 교리를 보존하셨다 하신 것입니다. But as it was foreseen that the perceptive facul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would perish, and that afterwards mankind would learn by doctrines what is true and good, or by darkness would come to light, it is here said that “God took him,” that is, preserved the doctrine for the use of posterity.

 

 

522. 또한 ‘에녹’이라 하는 사람들이 가진 퍼셉션의 상태와 퀄러티가 제게 경험된 적이 있었는데요, The state and quality of the perception with those who were called “Enoch” have also been made known to me.

 

그것은 일종의 무슨 차이점 없는 일반적인 뿌연 퍼셉션이었습니다. 이런 경우, 마음은 자기 밖 희미한 뷰를 교리적인 것으로 결정합니다. It was a kind of general obscure perception without any distinctness; for in such a case the mind determines its view outside of itself into the doctrinal things.

2021-07-21(D4)-매일예배(AC.520-522, 창5,23-24), '에녹,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셨다'.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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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YdVSLTJ7wg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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