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3:8, AC.218-225

8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Verse 8,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f in the garden in the air of the day; and the man and his wife hid themselves from the face of Jehovah God in the midst of the tree of the garden.

 

※ 8절 속뜻

 

이들 태고교회 네 번째 후손은 선조들의 그 찬란했던 황금시대의 영광과 퍼셉션은 거의 다 사라지고, 이제 겨우 그 흔적만 남아 자신들이 악 가운데 있음을, 즉 주님의 선과 진리가 다 떨어져 나가 벌거벗은 상태임을 지각, 두려워하며 부끄러워 숨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218.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f in the garden)내면의 소리(an internal dictate, an inner dictate, the inner call)입니다. 그들로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건데요, 이 소리는 그들이 전에 소유했던 퍼셉션(perception) 가운데 아직 남아 있던 겁니다. ‘그날 바람이 불 때(the air or breath of the day)는 그 교회가 아직 약간의 퍼셉션을 소유하던 기간을 가리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은지라(to hide themselves from the face of Jehovah God)는 그 소리를 두려워하는 것이지요, 마치 악을 의식하는 사람들한테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들이 자신들을 숨긴 곳에 있는 ‘동산 나무 사이에(the midst of the tree of the garden)자연적 선(natural good)을 의미합니다. 여기 가장 안쪽(inmost)사이에(the midst)라 하며, ‘나무(the tree)는 앞서 살핀 대로 퍼셉션을 가리킵니다만, 그러나 이제는 남아 있는 퍼셉션이 거의 없어서 마치 유일하게 남은 것인 양 나무를 단수로 말하고 있습니다. By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f in the garden” is signified an internal dictate which caused them to feel afraid, this dictate being the residue of the perception which they had possessed; by the “air” or “breath” of the “day” is denoted a period when the church still possessed some residue of perception; to “hide themselves from the face of Jehovah God” is to fear the dictate, as is wont to be the case with those who are conscious of evil; by the “midst of the tree of the garden,” in which they hid themselves, is signified natural good; that which is inmost is called the “midst”; the “tree” denotes perception as before; but because there was little perception remaining, the tree is spoken of in the singular number, as if there were only one remaining.

 

 

219.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f in the garden)는 그들이 두려워한 내면의 소리를 의미한다는 사실은 말씀에서 소리(voice)가 상징하는 걸 보면 분명한데요, 말씀에서 여호와의 소리(the voice of Jehovah)는 말씀 그 자체, 신앙의 교리, 양심이나 내적으로 주의, 경고하기, 그리고 또 그 결과 이어지는 모든 책망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되곤 합니다. 그래서 천둥소리를 여호와의 소리라고 하는데요, 요한계시록입니다. That by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f in the garden” is meant an internal dictate of which they were afraid,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voice” in the Word, where the “voice of Jehovah” is used to designate the Word itself, the doctrine of faith, conscience or a taking notice inwardly, and also every reproof thence resulting; whence it is that thunders are called the “voices of Jehovah,” as in John:

 

사자가 부르짖는 것 같이 큰 소리로 외치니 그가 외칠 때에 일곱 우레가 그 소리를 내어 말하더라 (계10:3) The angel cried with a loud voice, as a lion roareth, and when he had cried seven thunders uttered their voices, (Rev. 10:3)

 

그때 외적, 내적 둘 다인 어떤 소리가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계속해서 denoting that there was then a voice both external and internal. Again:

 

일곱째 천사가 소리 내는 날 그의 나팔을 불려고 할 때에 하나님이 그의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하나님의 그 비밀이 이루어지리라 하더라 (계10:7) In the days of the voice of the seventh angel the mystery of God shall be consummated. (Rev. 10:7)

 

시편입니다. In David:

 

32땅의 왕국들아 하나님께 노래하고 주께 찬송할지어다 33옛적 하늘들의 하늘을 타신 자에게 찬송하라 주께서 그 소리를 내시니 웅장한 소리로다 (시68:32-33) Sing unto God, sing praises unto the Lord, who rideth upon the heavens of heavens which were of old; lo, he shall send out his voice, a voice of strength. (Ps. 68:32–33)

 

옛적 하늘들의 하늘(The heavens of heavens which were of old)은 태고교회의 지혜를 말하며, ‘소리는 계시, 그리고 또한 내면의 소리를 뜻합니다. 계속해서 The “heavens of heavens which were of old,” denote the wisdom of the most ancient church; “voice,” revelation, and also an internal dictate. Again:

 

3여호와의 소리가 물 위에 있도다 영광의 하나님이 우렛소리를 내시니 여호와는 많은 물 위에 계시도다 4여호와의 소리가 힘 있음이여 여호와의 소리가 위엄차도다 5여호와의 소리가 백향목을 꺾으심이여 여호와께서 레바논 백향목을 꺾어 부수시도다, 7여호와의 소리가 화염을 가르시도다 8여호와의 소리가 광야를 진동하심이여 여호와께서 가데스 광야를 진동시키시도다 9여호와의 소리가 암사슴을 낙태하게 하시고 삼림을 말갛게 벗기시니 그의 성전에서 그의 모든 것들이 말하기를 영광이라 하도다 (시29:3-5, 7-9) The voice of Jehovah is upon the waters; the voice of Jehovah is in power; the voice of Jehovah is in glory; the voice of Jehovah breaketh the cedars; the voice of Jehovah divideth the flames of fire; the voice of Jehovah maketh the wilderness to shake; the voice of Jehovah maketh the hinds to calve and uncovereth the forests. (Ps. 29:3–5, 7–9)

 

이사야입니다. And in Isaiah:

 

30여호와께서 그의 장엄한 목소리를 듣게 하시며 혁혁한 진노로 그의 팔의 치심을 보이시되 맹렬한 화염과 폭풍과 폭우와 우박으로 하시리니 31여호와의 목소리에 앗수르가 낙담할 것이며 주께서는 막대기로 치실 것이라 (사30:30-31) Jehovah shall cause the excellency of his voice to be heard, for through the voice of Jehovah shall Asshur be beaten down. (Isa. 30:30–31)

 

 

220. 거니시는 소리(the voice going to itself)는 남아 있는 퍼셉션이 거의 없음을, 말하자면 마치 그 소리 말고는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 상태를 의미하는데요, 다음 절에 나오는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Jehovah called to the man)를 보면, 거기서도 분명한 것처럼 말입니다. By the “voice going to itself,” is meant that there was but little perception remaining, and that alone as it were by itself and unheard, as is manifest also from the following verse where it is said, “Jehovah called to the man.”  

 

※ ‘아담을 부르시며’의 ‘부르시며’는 ‘shouted’에 가까운 ‘called’입니다. 사람이 자기 본성에 깊이 잠긴 상태를 ‘깊이 잠들게 하시매’라 표현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죄를 지었으나 양심의 소리가 들리는 사람한테는 이런 소리가 천둥 번개의 소리처럼 들릴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에서 So in Isaiah:

 

 

3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6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사40:3, 6) The voice of one crying in the wilderness; the voice said, Cry. (Isa. 40:3, 6)

 

광야(The wilderness)는 신앙이라는 게 전혀 남아 있지 않은 교회를, ‘외치는 자의 소리(the voice of one crying)는 주님의 오심에 대한 수태고지(受胎告知, the annunciation of the Lord’s advent), 곧 일반적으로는 주님의 오심에 대한 모든 소식입니다. 거듭난 사람들과 그 안에 내면의 소리가 있는 사람들과 함께 말이지요. The “wilderness” is a church where there is no faith; the “voice of one crying” is the annunciation of the Lord’s advent, and in general every announcement of his coming, as with the regenerate, with whom there is an internal dictate.

 

 

221. That by the “air” or “breath” “of the day” is signified a period when the church had still somewhat of perception remaining,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day” and of “night.” The most ancient people compared the states of the church to the times of the day and of the night, to the times of the day when the church was still in light, wherefore this state is compared to the breath or air “of the day,” because there was still some remnant of perception by which they knew that they were fallen. The Lord also calls the state of faith “day,” and that of no faith “night”; as in John: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요9:4) I must work the works of him that sent me, while it is day; the night cometh when no man can work. (John 9:4)

 

The states of the regeneration of man were for the same reason called “days” in chapter 1.

 

 

222. That to “hide themselves from the face of Jehovah,” means to be afraid of the dictate, as is wont to be the case with those who are conscious of evil, is evident from their reply (verse 10): “I heard thy voice in the garden, and I was afraid because I was naked.” The “face of Jehovah,” or of the Lord, is mercy, peace, and every good, as is clearly evident from the benediction:

 

25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26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민6:25-26) Jehovah make his faces to shine upon thee, and be merciful unto thee; Jehovah lift up his faces upon thee, and give thee peace. (Num. 6:25–26)

 

And in David: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빛을 우리에게 비추사 (시67:1) God be merciful unto us, and bless us, and cause his faces to shine upon us. (Ps. 67:1)

 

여러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 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 (시4:6) There be many that say, Who will show us any good? Jehovah, lift thou up the light of thy faces upon us. (Ps. 4:6)

 

The mercy of the Lord is therefore called the “angel of faces,” in Isaiah:

 

7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자비와 그의 찬송을 말하며 그의 사랑을 따라, 그의 많은 자비를 따라 이스라엘 집에 베푸신 큰 은총을 말하리라 8그가 말씀하시되 그들은 실로 나의 백성이요 거짓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녀라 하시고 그들의 구원자가 되사 9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 자기 앞의 사자로 하여금 그들을 구원하시며 그의 사랑과 그의 자비로 그들을 구원하시고 옛적 모든 날에 그들을 드시며 안으셨으나 (사63:7-9) I will make mention of the mercies of Jehovah; he hath requited them according to his mercies, and according to the multitude of his mercies; and he became their savior. In all their affliction he was afflicted, and the angel of his faces saved them; in his love and in his pity he redeemed them. (Isa. 63:7–9)

 

 

223. As the “face of the Lord” is mercy, peace, and every good, it is evident that he regards all from mercy, and never averts his countenance from any; but that it is man, when in evil, who turns away his face, as is said by the Lord in Isaiah: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사59:2) Your iniquities have separated between you and your God, and your sins have hid his face from you; (Isa. 59:2)

 

and here, “they hid themselves from the face of Jehovah, because they were naked.

 

 

224. Mercy, peace, and every good, or the “faces of Jehovah,” are the cause of the dictate with those who have perception, and also, although in a different manner, with those who have conscience, and they always operate mercifully, but are received according to the state in which the man is. The state of this man, that is, of this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was one of natural good; and they who are in natural good are of such a character that they hide themselves through fear and shame because they are naked; while such as are destitute of natural good do not hide themselves, because they are insusceptible of shame; concerning whom, in Jeremiah 8:12–13. (See above, n. 217.)

 

12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질 자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그들을 벌할 때에 그들이 거꾸러지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3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그들을 진멸하리니 포도나무에 포도가 없을 것이며 무화과나무에 무화과가 없을 것이며 그 잎사귀가 마를 것이라 내가 그들에게 준 것이 없어지리라 하셨나니 (렘8:12-13)

 

 

225. That the “midst of the tree of the garden” signifies natural good, in which there is some perception which is called a “tree,” is also evident from the “garden” in which the celestial man dwelt; for everything good and true is called a “garden,” with a difference according to the man who cultivates it. Good is not good unless its inmost is celestial, from which, or through which, from the Lord, comes perception. This inmost is here called the “midst,” as also elsewhere in the W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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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3:7, AC.211-217

7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Verse 7, And the eyes of them both were opened, and they knew that they were naked; and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made themselves girdles.

 

※ 7절 속뜻

 

그들은 내면의 소리를 통해 자신들은 더 이상 선조들의 이노센스 대신 악 가운데 있음을, 천적 영적 선은 다 사라지고 대신 자연적 선만 남았음을 깨닫고 부끄러워하며 변명했습니다.

 

 

211. 그들의 눈이 밝아져(eyes being opened)는 그들이 어떤 내적 음성(an interior dictate)을 듣고, 자기들이 벗은(naked) 줄을 알게 되었다, , 더 이상 전처럼 자기들이 이노센스(innocence)가 아닌, 악 가운데 있음을 알게 되었고, 시인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Their “eyes being opened” signifies their knowing and acknowledging, from an interior dictate, that they were “naked,” that is, no longer in innocence, as before, but in evil.

 

 

212. 눈이 밝아져(the eyes opened)가 무슨 내적 음성을 의미한다는 것은 말씀에 나오는 유사한 표현들, 가령, 발람(Balaam)이 자신을 가리켜 말하는 구절을 보면 분명한데요, 그 구절에서 발람은 전능자의 환상을 보고 나서는 자신을 가리켜 눈을 감았던 자(the man whose eyes are opened)(24:3)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That by having the “eyes opened” is signified an interior dictate is evident from similar expressions in the Word, as from what Balaam says of himself, who in consequence of having visions calls himself the “man whose eyes are opened.” (Num. 24:3)

 

이 부분, 한글 개역개정에서는 감았던으로 번역하고 있지만, 위 영역을 보면 분명 ’, 혹은 밝아진입니다. ‘전엔 감았으나 지금은 뜬’, 차라리 이렇게 번역했더라면...

 

그가 예언을 전하여 말하되 브올의 아들 발람이 말하며 눈을 감았던 자가 말하며 (민24:3)

 

그리고 요나단인데요, 그는 벌집의 꿀을 조금 맛본 후, 지금 그들이 처한 상황이 악하다는 내적 음성을 듣습니다(had a dictate from within). 그리고는 이렇게 말하지요. ‘내 눈이 이렇게 밝아졌거든(his eyes saw), , 자신의 내적 시야가 열려 전엔 몰랐던 것을 지금은 보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And from Jonathan, who when he tasted of the honeycomb and had a dictate from within that it was evil, said that his “eyes saw,” that is, were enlightened, so that he saw what he knew not. (1 Sam. 14:29)

 

요나단이 이르되 내 아버지께서 이 땅을 곤란하게 하셨도다 보라 내가 이 꿀 조금을 맛보고도 내 눈이 이렇게 밝아졌거든 (삼상14:29)

 

더더욱 말씀에 보면, ‘(the eyes)은 종종 이해(the understanding)와 거기서 나오는 내적 음성(an interior dictate therefrom)을 가리키는 데 사용됩니다. 시편입니다. Moreover in the Word, the “eyes” are often used to denote the understanding, and thus an interior dictate therefrom, as in David: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시13:3) Lighten mine eyes, lest I sleep the sleep of death, (Ps. 13:3)

 

여기 (eyes)은 이해를 가리킵니다. 에스겔에서도 보면, 의도적으로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자들,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아니하는(have eyes to see, and see not)(12:2) 족속들에 대해 말씀하시는 부분입니다. where “eyes” denote the understanding. So in Ezekiel, speaking of those who are not willing to understand, who “have eyes to see, and see not.” (Ezek. 12:2)

 

인자야 네가 반역하는 족속 중에 거주하는도다 그들은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아니하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아니하나니 그들은 반역하는 족속임이라 (겔12:2)

 

이사야입니다. In Isaiah: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사6:10) Shut their eyes, lest they see with their eyes, (Isa. 6:10)

 

위 말씀은 그들로 볼 수 없게 해야지, 안 그러면 그들이 이해하게 될 거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백성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 것입니다. denotes that they should be made blind, lest they should understand. So Moses said to the people,  

 

※ 우리 생각엔 ‘어? 사람들이 깨닫는 게 더 좋은 거 아닌가? 왜 그걸 막으시는 거지?’ 하지만,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게,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은 차라리 깨닫지 못하는 게 더 그들에겐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민족적 특성상, 그들은 오히려 깨닫게 되면 나중에 반드시 돌이켜 배신할 것이기 때문이지요. 차라리 몰랐더라면 그냥 그 정도에 머무를 텐데, 알고 나서 다시 예전 상태로 돌아가게 되면, 그때는 그의 사후 상태가 정말 돌이킬 수 없게 됩니다. 이런 것이 바로 신성모독이며, 이 신성모독의 죄가 정말 무서운 이유는, 이 신성모독의 삶을 산 사람은 그 영이 오염되기 때문입니다. 이 영이 오염된다는 건 영의 상태가 계속 이랬다저랬다 영원히 반복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신29:4) Jehovah hath not given you a heart to know, and eyes to see, and ears to hear, (Deut. 29:4)

 

여기서 마음(heart)은 의지(the will), ‘(eyes)은 이해(the understanding)를 가리킵니다. 이사야에서는 주님을 가리켜,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he should open the blind eyes)(42:7)라 하십니다. where “heart” denotes the will, and “eyes” denote the understanding. In Isaiah it is said of the Lord, that “he should open the blind eyes.” (Isa. 42:7)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 (사42:7)

 

계속해서 이사야에서, ‘어둡고 캄캄한 데에서 맹인의 눈이 볼 것이며(The eyes of the blind shall see out of thick darkness and out of darkness)(29:18)라 하십니다. And in the same prophet: “The eyes of the blind shall see out of thick darkness and out of darkness.” (Isa. 29:18)

 

그날에 못 듣는 사람이 책의 말을 들을 것이며 어둡고 캄캄한 데에서 맹인의 눈이 볼 것이며 (사29:18)

 

 

213.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knowing that they were naked)는 자기들이 더 이상 전처럼 이노센스(innocence)가 아닌, 악 가운데 있음을 알게 되었고, 시인하게 되었음을 의미하는데요, 이것은 앞장 마지막 구절,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and they were both naked, the man and his wife, and were not ashamed)(2:25)를 보면 분명합니다. 이걸 그들이 벌거벗었으므로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not to be ashamed because they were naked)로 읽고는, 이노센스(to be innocent)를 의미하는 걸로 보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만 말입니다. 그들의 부끄러워함(being ashamed)의 의미는 오히려 정반대인데요, 본 절의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고는 자신들을 숨겼다(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hid themselves)는 데를 보면 말입니다. 이는 이노센스가 전혀 없는 곳에서는, 벌거벗음(nakedness)이라는 것은 일종의 스캔들이요, 창피이기 때문입니다. 저절로 악이 떠오르기(attended with a consciousness of thinking evil) 때문이지요. By “knowing that they were naked” is signified their knowing and acknowledging themselves to be no longer in innocence as before, but in evil, as is evident from the last verse of the preceding chapter, where it is said, “and they were both naked, the man and his wife, and were not ashamed,” and where it may be seen that “not to be ashamed because they were naked” signifies to be innocent. The contrary is signified by their “being ashamed,” as in this verse, where it is said that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hid themselves”; for where there is no innocence, nakedness is a scandal and disgrace, because it is attended with a consciousness of thinking evil.

 

※ 이 ‘벌거벗음(nakedness)이라는 것은 이노센스의 유무에 따라 완전 정반대의 의미를 갖는다는 말입니다.

 

이런 이유로, 말씀에서 벌거벗음(nakedness)은 어떤 수치스럽고 악한 걸로 사용되며, 전도된(顚倒, perverted) 교회를 서술할 때 사용됩니다. 에스겔입니다. For this reason “nakedness” is used in the Word as a type of disgrace and evil, and is predicated of a perverted church, as in Ezekiel:

 

네가 어렸을 때에 벌거벗은 몸이었으며 피투성이가 되어서 발짓하던 것을 (겔16:22) Thou wast naked and bare, and trampled on in thy blood. (Ezek. 16:22)

 

그들이 너를 벌거벗은 몸으로 두어서 네 벗은 몸을 드러낼 것이라 (겔23:29) They shall leave her naked and bare, and the nakedness shall be uncovered. (Ezek. 23:29)

 

계시록에서는, In John: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 (계3:18) I counsel thee to buy of me white raiment that thou mayest be clothed, and that the shame of thy nakedness do not appear. (Rev. 3:18)

 

그리고 마지막 날에 관하여는, And concerning the last day:

 

보라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계16:15) Blessed is he who watcheth, and keepeth his garments, lest he walk naked and they see his shame. (Rev. 16:15)

 

신명기에서는, In Deuteronomy:

 

사람이 그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줄 것이요 (신24:1) If a man hath found some nakedness in his wife, let him write her a bill of divorcement. (Deut. 24:1)

 

같은 이유로,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제단에 나아가 봉사할 때, 베로 속바지를 만들어 입어 하체를 가리게 하라 안 그러면 죄를 짊어진 채 죽으리라(to cover the flesh of their nakedness, lest they should bear iniquity, and die) 하시는 명령을 받은 것입니다. For the same reason Aaron and his sons were commanded to have linen breeches when they came to the altar, and to minister, to “cover the flesh of their nakedness, lest they should bear iniquity, and die.” (Exod. 28:42–43)

 

42또 그들을 위하여 베로 속바지를 만들어 허리에서부터 두 넓적다리까지 이르게 하여 하체를 가리게 하라 43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나 제단에 가까이 하여 거룩한 곳에서 섬길 때에 그것들을 입어야 죄를 짊어진 채 죽지 아니하리니 그와 그의 후손이 영원히 지킬 규례니라 (출28:42-43)

 

 

214. 그들은 자신의 본성(their own)만 남은 상태이기 때문에, ‘벌거벗겨졌다(naked)고 합니다. 본성, 즉 자기 자신(themselves)만 남은 사람들은 지성과 지혜, 혹은 신앙의 그 어떤 것도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은 상태이며, 그래서 결국 진리와 선에 대하여 벌거벗겨진(naked) 상태이고, 그 결과는 악 가운데 있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They are called “naked” because left to their own; for they who are left to their own, that is, to themselves, have no longer anything of intelligence and wisdom, or of faith, and consequently are “naked” as to truth and good, and are therefore in evil.

 

, 우리는 주님의 진리와 선이라는 옷을 입어야 천국 갈 수 있는데, 반대로 이 옷이 다 벗겨져서 악과 거짓의 알몸 상태가 되면 천국 갈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런 일은 지금도 우리가 선악과를 따먹으면일어나는 일입니다.

 

 

215. 인간의 본성(man’s own)은 악과 거짓 말고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nothing but evil and falsity) 저는 그동안 다음과 같은 사실로 분명히 알게 되었는데요, 그것은 영들이 스스로(from themselves) 하는 말, 곧 주님 말씀이 아닌, 영들 본인 생각에서 나오는 말은 그게 무슨 말이든 언제나 모두 악하고 거짓이더라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그런 식으로 말하고 있음을 제가 알게 될 때마다, 저는 듣는 즉시 그 말은 거짓이며, 심지어 그들이 자기들이 하는 말이 진리임을 자기들은 정말 철저히 확신하고 있으니 전혀 의심할 필요가 없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That man’s own is nothing but evil and falsity has been made evident to me from the fact that whatever spirits have at any time said from themselves has been so evil and false that whenever it was made known to me that they spoke from themselves I at once knew that it was false, even though while speaking they were themselves so thoroughly persuaded of the truth of what they said as to have no doubt about it.

 

※  영계는 실상을 확인할 수 있는 곳입니다. 이 세상은 그래도 몸으로 살짝 가릴 수 있어 겉과 속이 달라도 시치미 떼고 살아갈 수 있지만 영계는 몸을 벗고 가는 데라 선이든 악이든 어느 한쪽으로 겉과 속이 같아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위와 같은 영계 체험과 증언을 통해 사람의 자아, 인간 본성이라는 게 실제로는 어떤 건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 즉 자기 생각으로 말하는 사람들의 경우도 같습니다. 같은 말인데요, 어떤 사람들이 영적, 천적인 일들이나 신앙의 일들에 관하여 이성적 접근을 시작할(have begun to reason) 때마다, 저는 그들은 의심, 심지어 부인(denied)까지 하고 있음을 지각할 수 있었습니다. 신앙에 관한 걸 이성으로 접근한다는 건(to reason concerning faith) 의심하고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것이 자아, 곧 그들의 본성으로 말미암는 것이어서, 그들은 그저 거짓들 가운데로 가라앉으며, 그 결과, 짙은 어둠, 곧 거짓의 심연 속으로 가라앉습니다. 그들이 이 심연 가운데 있을 때는 아주 작은 것 하나로도 수천의 진리들을 압도할 수가 있는 것이, 마치 눈동자 표면에 내려앉은 먼지 한 조각만으로도 온 우주와 그 안에 담긴 모든것에 관해 눈을 감게 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런 사람에 관해 주님은 이사야에서 말씀하시기를, The case is the same with men who speak from themselves. And in the same way, whenever any persons have begun to reason concerning the things of spiritual and celestial life, or those of faith, I could perceive that they doubted, and even denied, for to reason concerning faith is to doubt and deny. And as it is all from self or their own, they sink into mere falsities, consequently into an abyss of thick darkness, that is, of falsities, and when they are in this abyss the smallest objection prevails over a thousand truths, just as a minute particle of dust in contact with the pupil of the eye shuts out the universe and everything it contains. Of such persons the Lord says in Isaiah: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사5:21) Woe unto those who are wise in their own eyes, and intelligent before their own faces. (Isa. 5:21)

 

10네가 네 악을 의지하고 스스로 이르기를 나를 보는 자가 없다 하나니 네 지혜와 네 지식이 너를 유혹하였음이라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나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였으므로 11재앙이 네게 임하리라 그러나 네가 그 근원을 알지 못할 것이며 손해가 네게 이르리라 그러나 이를 물리칠 능력이 없을 것이며 파멸이 홀연히 네게 임하리라 그러나 네가 알지 못할 것이니라 (사47:10-11) Thy wisdom and thy knowledge, it hath turned thee away, and thou hast said in thine heart, I, and none else besides me; and evil shall come upon thee, thou shalt not know from whence it riseth, and mischief shall fall upon thee, which thou shalt not be able to expiate, and vastation shall come upon thee suddenly, of which thou art not aware. (Isa. 47:10–11)

 

예레미야에서는, In Jeremiah:

 

사람마다 어리석고 무식하도다 금장색마다 자기가 만든 신상으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하나니 이는 그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이요 그 속에 생기가 없음이라 (렘51:17) Every man is made stupid by knowledge [scientia], every founder is confounded by the graven image, for his molten image is falsehood, neither is there breath in them. (Jer. 51:17)

 

만든 신상(A graven image)은 거짓이요, ‘부어 만든 우상(a molten image)은 악, 곧 인간의 본성 속 악입니다. A “graven image” is the falsity, and a “molten image” the evil, of man’s own.

 

 

216.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And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made themselves girdles.

 

잎을 엮어(To sew leaves together)는 자신들을 변명하는 것(to excuse themselves), ‘무화과나무(the fig tree)는 자연적 선(natural good), ‘치마로 삼았더라(to make themselves girdles)는 부끄러워했다는 것(to be affected with shame)입니다. 태고인들은 이렇게 말했고, 그들은 그 교회의 후손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이 묘사는 그들이 전에 즐거워하던 이노센스(the innocence) 대신 이제는 자연적 선만, 곧 그 안에 그들의 악이 들어 있는 그런 선만 소유하게 되었고, 그리고 그런 자연적 선 안에 있게 된 것을 그들은 부끄러워했다는 그런 묘사입니다. To “sew leaves together” is to excuse themselves; the “fig tree” is natural good; and to “make themselves girdles” is to be affected with shame. Thus spoke the most ancient people, and thus they described this posterity of the church, signifying that instead of the innocence they had formerly enjoyed, they possessed only natural good, by which their evil was concealed; and being in natural good, they were affected with shame.

 

 

217. 말씀에서 포도나무(the vine)는 영적 선(spiritual good), ‘무화과나무(the fig tree)는 자연적 선(natural good)을 상징하기 위한 것임을 오늘날엔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말씀의 속뜻(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이 사라졌기 때문인데요, 그럼에도 이 표현들이 나오는 데들을 보면, 여전히 이런 의미를 뜻하거나 포함하고 있지요. ‘포도원(a vineyard)무화과나무와 관련, 주께서 비유들을 통해 하신 말씀들처럼 말입니다. 마태복음입니다. That the “vine” is used in the Word to signify spiritual good, and the “fig tree” natural good, is at this day utterly unknown, because 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 has been lost; nevertheless, wherever these expressions occur, they signify or involve this meaning; as also in what the Lord spoke in parables concerning a “vineyard” and a “fig tree”; as in Matthew:

 

길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것도 찾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마21:19) Jesus seeing a fig tree in the way, came to it, but found nothing thereon save leaves only, and he said unto it, Let no fruit grow on thee henceforward forever; and presently the fig tree withered away, (Matt. 21:19)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그 어떤 선도, 심지어 자연적 선조차도 땅, 곧 이 세상에서는 찾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에 나오는 포도나무무화과나무역시 유사한 의미입니다. by which is meant, that no good, not even natural good, was to be found upon the earth. Similar is the meaning of the “vine” and “fig tree” in Jeremiah:

 

12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질 자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그들을 벌할 때에 그들이 거꾸러지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3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그들을 진멸하리니 포도나무에 포도가 없을 것이며 무화과나무에 무화과가 없을 것이며 그 잎사귀가 마를 것이라 내가 그들에게 준 것이 없어지리라 하셨나니 (렘8:12-13) Were they ashamed when they had committed abomination? Nay, they were not at all ashamed, and they knew not how to blush; therefore I will surely gather them, saith Jehovah; there shall be no grapes on the vine, nor figs on the fig tree, and the leaf hath fallen, (Jer. 8:12–13)

 

이 말씀은 모든 선, 곧 영적, 자연적 선이 사라져 버렸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너무도 타락한 나머지 심지어 부끄러워하지도 않게 되었기 때문인데요, 마치 오늘날, 악 가운데 있어 자기들의 사악함에도 불구, 얼굴이 붉어지기는커녕 오히려 그걸 자랑하는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호세아입니다. by which is signified that all good, both spiritual and natural, had perished, since they were so depraved as to have lost even the sense of shame, like those at the present day who are in evil, and who, so far from blushing for their wickedness, make it their boast. In Hosea:

 

옛적에 내가 이스라엘을 만나기를 광야에서 포도를 만남같이 하였으며 너희 조상들을 보기를 무화과나무에서 처음 맺힌 첫 열매를 봄같이 하였거늘 그들이 바알브올에 가서 부끄러운 우상에게 몸을 드림으로 저희가 사랑하는 우상 같이 가증하여졌도다 (호9:10) I found Israel like grapes in the wilderness; I saw your fathers as the first ripe in the fig tree in the beginning. (Hos. 9:10)

 

요엘입니다. And in Joel:

 

들짐승들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들의 풀이 싹이 나며 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가 다 힘을 내는도다 (욜2:22) Be not afraid, ye beasts of my fields, for the tree shall bear its fruit, the fig tree and the vine shall yield their strength. (Joel 2:22)

 

여기 ‘포도나무’는 영적 선을, ‘무화과나무’는 자연적 선을 가리킵니다. The “vine” here denotes spiritual good, and the “fig tree” natural g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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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3:6, AC.207-210

6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Verse 6, And the woman saw that the tree was good for food, and that it was pleasant to the eyes, and a tree to be desired to give intelligence, and she took of the fruit thereof and did eat, and she gave also to her man [vir] with her, and he did eat.

 

※ 6절 속뜻

 

네 번째 후손, 곧 선대와 달리 사랑할 정도로 자아를 원했고, 그 결과 감각과 세상에서 배운 걸로 이해가 안 되면 비록 주님의 신성한 계시라 하더라도 완강하게 거부하던 이들 네 번째 후손에 이르자 모든 걸 거꾸로 보기 시작, 주님의 것들, 곧 선대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던 모든 주님 신앙과 그 교리들을 건강하고 균형 잡힌 시선이 아닌, 탐욕과 환상, 쾌락의 대상으로 보았고, 거기에 이들의 합리적 이성조차 동조함으로써 그만 선을 넘게 되었습니다.

 

 

207. 먹음직도 하고(Good for food)는 탐욕(cupidity), ‘보암직도 하고(pleasant to the eyes)는 환상(fantasy),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desirable to give intelligence)은 쾌락(pleasure)을 각각 의미합니다. 이것들은 다 본성(the own), 여자(woman)에게 속한 것들이며, ‘그도 먹은지라(the husband eating)는 이성의 동의(the consent of the rational)를 의미합니다. (AC.265) Good for food” signifies cupidity; “pleasant to the eyes,” fantasy; and “desirable to give intelligence,” pleasure: these are of the own, or “woman”; by the “husband eating” is signified the consent of the rational (n. 265).  

 

※ AC.265. ‘남편(the husband or man)이 합리적, 이성적 능력(the rational capacity)을 의미한다는 것이 본 장인 3장 6절에 보면 있는데요, 거기에 보면, ‘여자가 그 열매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즉, 그도 동의했음을 의미합니다. 같은 내용이 158번 글, 사람에 관한 내용을 보아도 분명한데요, 거기 보면, 사람은 지혜와 지성(understanding)을 가진 존재인데요, 하지만 여기 나오는 ‘사람(the man)은 이성적 사고를 할 수 있는 능력(the ability to reason)에 머무를 뿐입니다. 지식의 나무, 곧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음으로써 지혜와 지성이 파괴되었고, 그 결과, 더 이상 아무것도 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합리적, 이성적 능력은 지적 이해(an intelligent understanding)를 모방하는 것, 혹은 그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 AC.158. 사람(man, 아담)이 내적 인간, 같은 말이지만, 지성과 지혜의 사람을 상징한다는 것은 이사야를 보면 분명합니다.

 

내가 본즉 한 사람(vir)도 없으며 내가 물어도 그들 가운데에 한 말도 대답할 조언자가 없도다 (사41:28)

 

지혜와 지성을 가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뜻입니다.

 

※ 위 본문의 ‘사람’은 라틴어로 ‘비르(vir)입니다. 라틴어에 ‘사람’이라는 뜻의 ‘호모(homo)라는 말이 따로 있지만, 호모에 비해 비르는 지혜와 지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예레미야에도 보면은,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 (렘5:1)

 

여기 ‘정의를 행하는 자’는 지혜로운 사람을, ‘진리를 구하는 자’는 지성인을 각각 의미합니다.

 

 

208. 태고교회의 네 번째 후손 이야기인데요, 이들은 자기 사랑(self-love [amore proprio])에 빠져 유혹에 넘어갔고, 비록 계시라 할지라도 감각과 기억-지식으로 확인이 안 되면 계시 믿기를 언짢아하고 싫어했습니다. This was the fourth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who suffered themselves to be seduced by self-love [amore proprio] and were unwilling to believe what was revealed, unless they saw it confirmed by the things of sense and of memory-knowledge.  

 

※ 세상에서 경험하고 학습한 지식과 주님의 계시가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면, 후자, 곧 주님의 계시 믿기를 꺼렸다, 내켜 하지 않았다는 말인데요, 이처럼 태고교회도 그 후손으로 내려갈수록 점점 더 주님 사랑의 반대인 자기 사랑으로 경도되어 가는 걸 볼 수 있습니다.

 

 

209. 여기 사용된,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the tree was good for food, pleasant to the eyes, and desirable for giving intelligence)라는 표현은 저 태고 때 살던 사람들의 지니어스(genius)에 맞춘 표현인데, 특별히 의지(the will)와 관련해서입니다. 그들의 악이 콸콸 흘러나오기 시작한 게 바로 이 의지에서부터였기 때문입니다. 말씀에서 홍수 후를 살았던 사람들이 나오는 데를 보면, 위 표현들은 의지보다는 이해(the understanding)와 관련되어 사용되고 있는데요, 이는 태고인들은 선에서 비롯된 진리(truth from good)를 가지고 있었지만, 홍수 후를 살았던 사람들은 진리에서 비롯된 선(good from truth)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The expressions here employed, as that “the tree was good for food, pleasant to the eyes, and desirable for giving intelligence,” are such as were adapted to the genius of those who lived in that most ancient time, having especial reference to the will, because their evils streamed out from the will. Where the Word treats of the people who lived after the flood, such expressions are used as relate not so much to the will as to the understanding; for the most ancient people had truth from good, but those who lived after the flood had good from truth.  

 

※ 홍수 전 사람들은 그 DNA에 선을 타고났지만, 홍수 후 사람들은 진리에 대한 학습을 통해서만 선을 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210. 인간의 본성(man’s own)이라는 걸 이렇게도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인간 본성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그리고 주님이나 말씀을 믿는 대신 자기 자신을 믿는, 끝으로 감각과 기억-지식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 즉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없거나 세상 경험과 배움에 비춰 볼 때 도저히 말도 안 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는, 이 세 가지 태도로부터 샘처럼 솟아나는 모든 악과 거짓입니다. 이런 식으로 사람들은 그저 악과 거짓이 되며, 그 결과, 모든 걸 반대로 봅니다. 악한 걸 선으로 보며, 선한 걸 악으로 보고, 거짓된 걸 참으로 보며, 참된 걸 거짓으로 봅니다. 실제로 존재하는 걸 없다 하고, 없는 걸 그들은 모든것이라 하지요. 증오를 사랑이라, 어두움을 빛이라, 죽음을 삶이라 하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인데요, 말씀에서는, 이런 사람들을 일컬어 다리를 저는 사람들(the lame), ‘눈먼 사람들(the blind)이라고 합니다. 이런 게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 자체로 지옥이요, 저주받은 것이지요. What man’s own is may be stated in this way. Man’s own is all the evil and falsity that springs from the love of self and of the world, and from not believing in the Lord or the Word but in self, and from supposing that what cannot be apprehended sensuously and by means of memory-knowledge [sensualiter et scientifice] is nothing. In this way men become mere evil and falsity, and therefore regard all things pervertedly; things that are evil they see as good, and things that are good as evil; things that are false they see as true, and things that are true as false; things that really exist they suppose to be nothing, and things that are nothing they suppose to be everything. They call hatred love, darkness light, death life, and the converse. In the Word, such men are called the “lame” and the “blind.” Such then is the own of man, which in itself is infernal and accur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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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26(D1)-주일예배(2516, 눅14,15-24), '주님의 큰 잔치를 맛보는 사람들'.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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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26(D1)-주일예배.축도.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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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XSMx16Q-jKo

 

 

 주님의 큰 잔치를 맛보는 사람들

 

15함께 먹는 사람 중의 하나가 이 말을 듣고 이르되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하니 16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17잔치할 시각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이르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18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19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20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21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22종이 이르되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되 아직도 자리가 있나이다 23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24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눅14:15-24)

 

 

만찬에서의 떡은 사랑의 선으로서 주님을 뜻하고, 포도주는 신앙의 진리로서 주님을 뜻하며, 동시에 인간이 그것들을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 이 두 가지가 교회의 본질이며, 그러므로 예배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천국의 비밀 10149)

 

 

※ 오늘 본문 역시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본문입니다. 특히 23절 말씀,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는 말씀은 교회들, 특히 본당이 큼지막하게 있는 교회들마다 대형 세로 표어에 써서 특히 전도와 선교, 복음 전파를 강조하는 그런 말씀이기도 하지요. 오늘도 우리에게 익숙한 본문을, 그러나 여전히 그 속뜻으로 살펴보는 시간을 우리는 갖고자 합니다.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다들 너무 바빠 남의 잔치에는 관심이 없다는 뜻일까요, 아니면 이웃에게 만찬을 베풀려거든 가까운 사람을 부르지 말고, 대신 가난한 자, 몸 불편한 자를 먼저 부르라는 뜻일까요? 이 말씀에는 더 깊은 의미, 속뜻이 숨겨져 있는데요, 먼저 15절로 17절부터 보겠습니다.

 

15함께 먹는 사람 중의 하나가 이 말을 듣고 이르되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하니 16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17잔치할 시각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이르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여기서 잔치를 베푸는 집의 주인은 주님이십니다. 잔치가 열리는 곳은 주님의 교회, 또는 천국이고요. 교회와 천국은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시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함께 마시는 것은 주님에게서 진리를 배우는 것이고, 먹는 것은 진리에 따라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진리와 선을 먹고 마셔야 주님의 생명이 우리의 생명이 됩니다. 그러지 않으면 인간의 생명은 겉으로는 생명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악과 거짓일 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매일 같이 우리를 당신의 잔치에 초대하십니다. 그런데 초대를 받은 사람들이 모두 자신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잔치에 참여할 수 없다고들 합니다. 본문에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하는데요,

 

18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19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20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첫 번째 사람은 밭을 샀기 때문에 잔치에 오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이 ‘밭을 산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한글 성경에는 ‘’으로 번역되어 있지만, 영어 성경에는 ‘ground’로 되어 있습니다. ground는 밭으로도, ‘’으로도 번역할 수 있는데, 전자의 경우, 교회를 뜻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항상 교회라는 밭에 진리의 씨를 뿌리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ground는 교회가 아니라 ‘영적으로 가장 낮은 것’을 뜻하며, 그래서 밭이라고 번역하면 안 되고, 땅으로 번역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렇다면 영적으로 가장 낮은 것이란 무엇입니까? 영적으로 높은 것은 천국에 속한 것이고, 낮은 것은 세상의 물질이나 명예 같은 세속적인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이 밭을 산다는 것은 교회 안의 사람들이 영적인 것에는 뜻, 관심이 없고, 오직 세상 것만을 좇는, 세속적인 것만 추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걸 그는 잔치에 갈 수 없다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두 번째 사람은 소의 겨리를 샀기 때문에 잔치에 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소의 겨리가 뭘까요? 겨리라는 것은 소가 밭을 갈 때 사용하는 도구들인데, 예를 들면 쟁기나 멍에 같은 것들입니다. 그렇다면 멍에는 무슨 뜻일까요? 멍에는 사람들을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세상 욕망을 뜻합니다. 욕망을 좇는 일은 어찌 보면 자유롭고 행복한, 자연스러운 일인 것 같지만, 그러나 이 욕망이라는 것은 만족을 모릅니다. 그 결과, 세상의 욕망은 사람을 가두고 속박하는 감옥이며 멍에입니다. 한편, 주님이 지워주시는 진리의 멍에도 있습니다. 그것은 욕망에 매인 사람을 구원하는 멍에입니다. 그것을 멍에라고 부르는 이유는 욕망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진리로 자신을 강제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28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11:28-30)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소의 멍에를 산 사람이나 앞에서 땅을 산 사람이나 영적으로는 비슷한 사람들이지요. 즉 주님을 사랑하기보다는 세상 즐거움에 빠진 사람들입니다.

 

※ 물론 밭을 샀기 때문에 보러 가고, 새로 산 소 다섯 겨리를 시험하는 일이 무조건 악한 일은 아닌, 그저 일상의 일이지만, 그러나 다른 날에도 할 수 있는 이런 일을 굳이 이 큰 잔치에 특별히 초대받은 날에 하고자 하는 걸로 보아, 그리고 미리 선 초청을 한 상태로 일정 조정할 여유가 이미 충분히 있었음에도, 이들이 이러는 것은 이들은 그냥 가기가 싫었던 것이며, 이 큰 잔치를 베푼 주인과 평소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구나 짐작해 봅니다.

 

그러면 세 번째 사람은 뭐라고 했나요? 장가를 가서 잔치에 참여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장가를 가는 것은 육신의 쾌락이나 세상 즐거움하고 결혼하는 것을 의미하는데요, 이 역시 거 참 이유치고는... 하는 생각이 듭니다.

 

교회의 마지막 때 사람들은 이렇게 세상의 욕망에 빠져 삽니다. 그것에 대해 마태복음 24장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37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38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39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마24:37-39)

 

노아의 홍수는 아담교회(태고교회)가 무너지고, 새로운 교회인 노아교회(고대교회)가 세워질 때의 진통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노아 시대에 사람들이 장가들고 시집가는 것은 아담교회의 마지막 때, 사람들이 주님이 아니라 세상의 욕망과 결혼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이 모두 참여하지 못하겠다고 하자 종들이 주인에게 돌아와 그대로 고했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화를 내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21절 말씀입니다.

 

21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주님은 당신의 교회에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화를 내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주인이 화를 냈다고 표현한 것은 인간에 대한 주님의 사랑, 또는 구원의 열정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여기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은 누구일까요? 주님을 믿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이웃을 사랑하는 교회 밖 선한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그들을 몸 불편한 자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들이 행하는 선이 진리를 바탕으로 한 온전한 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결핍이 있는 것이지요. 선과 진리는 서로 균형을 이뤄야 하는데요, 선은 진리를 바탕으로 행해야 하고, 진리 또한 그 바탕에 선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온전한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주인이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한 것은 주님께서 교회 밖 선한 사람들을 데리고 새로운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믿는다고 하는 자들이 스스로 주님의 교회를 버렸기 때문입니다.

 

종들이 주인의 명에 따라 이들을 데리고 와 자리를 채웠습니다. 그런데도 아직 비어있는 곳이 있습니다. 종이 이 사실을 고하자 주인이 종에게 다시 말했습니다.

 

22종이 이르되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되 아직도 자리가 있나이다 23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앞 절에서는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저들을 데리고 오라 하더니, 여기서는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고 합니다. 이 ‘길과 산울타리 가’, 곧 길에서 만난 자들과 울타리 근처에서 만난 사람들은 어떻게 다를까요? 둘 다 진리 알기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길에서 만난 사람들은 선을 올바르게 행할 목적으로 진리를 구하는 사람들이고, 울타리 근처에서 만난 사람들은 세상 거짓과 맞서 싸울 목적으로 진리를 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울타리는 거짓과 맞서 싸우는 진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진리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이웃을 올바르게 사랑하기 위해서거나 또는 악과 거짓에 맞서 싸워 이기기 위해서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힘으로는 이웃을 사랑할 수 없고, 또한 악과 거짓과 싸워 이길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길에서 데리고 온 사람들과 울타리 근처에서 데리고 온 사람들은 모두 진리에 대한 순수한 애정을 가진 사람들을 뜻합니다. 주님은 그런 순수한 사람들을 데리고 새 교회를 세우십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시며, 절대로 진리를 강요하시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하시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 속뜻은 이렇습니다. 새 교회가 처음 세워질 때의 모습은 마치 길에 나가 진리에 대한 순수한 애정을 가진 사람들을 모으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 진리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이 극히 적고, 교세 또한 빈약합니다. 누구나 이 상태가 계속된다면 교회가 없어져 버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인간의 생각일 뿐이며, 주님께서 이 교회를 급하게 부흥시키실 때가 옵니다. 그때가 언제인지는 우리는 모르고, 오직 주님만이 아십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미약하나마 이 교회를 유지시켜야 하는 사명을 맡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들이 주인에게 자리가 아직 비어있다고 말하는 것은, 마치 우리 새 교회인들이 ‘주님, 불과 몇 평도 안 되는 이 교회에 왜 이렇게 빈자리가 많습니까...’라고 하며 안타까워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때가 되면 주님께서 급하게 사람들을 모아 이 교회를 크게 부흥시키실 것입니다. 사람들을 강권하여 잔치에 데리고 오는 것은 바로 그때를 말합니다. 24절에서 주인이 말했습니다.

 

24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전에 청하였던 사람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주님 당시에는 유대교회 사람들이고, 오늘날에는 믿음만으로 구원받는다고 하는 주류 기독교인들인데, 특별히 그 가운데 겉과 속이 다르며, 저들이 말하는 믿음과 사랑이 따로 노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모두 겉으로는 진리를 사랑하는 것처럼 하지만, 속으로는 진리를 부정하거나 파괴하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그런 자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에는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잔치에 초대받았으나 아무도 응하지를 않았다고 합니다. 주님의 잔치에 참석하는 것보다 세상의 재물과 명성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며, 외적인 것, 곧 겉에 관한 것에 너무 사로잡힌 나머지 내적인 것, 곧 속에 관한 것의 가치를 전혀 몰랐기 때문입니다. 지상의 일에는 시력이 2.0, 3.0, 4.0에 가까웠으나 천국의 일에는 아주 깜깜, 장님이었기 때문이지요. 본문에는 그들을 땅을 산 사람, 소의 겨리를 장만한 사람, 장가를 간 사람으로 묘사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사람입니까? 참된 진리를 찾기 위해 ‘시내의 거리와 골목’, ‘길과 산울타리 가’를 헤메다 주님을 만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잔치에 참여하게 된 우리는 복 있는 사람들입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주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잔치가 아직 끝난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당신의 잔치에 우리를 부르십니다. 천국의 진리와 선으로 먹이고 입히시기 위해서지요. 하지만 주님이 부르실 때 우리는 기꺼이 항상 응하고 있을까요? 그동안 우리 모습을 보면, 주님이 베푸신 밥상과 세상이 차려놓은 밥상 사이에서 갈등할 때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자아와 세상에 속한 것들이 더 달콤해 보였기 때문이지요. 이와 관련된 말씀이 계시록 3장 15절에 있습니다. 거기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계3:15)

 

차지도 뜨겁지도 않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신앙인의 상태가 천국과 지옥 사이에 있는 것이고, 그러므로 두 주인을 섬기는 상태입니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이 그런 상태에 있습니다. 믿음만으로 구원받는다 믿고, 인애, 체어리티, 이웃 사랑의 삶에는 전혀 관심이 없거나 마지못해 눈길 한번 주는 수준입니다. 우리 새 교회 교인이라고 예외는 아닙니다. 머리로는 진리를 아는데 행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지옥은 매 순간 아주 교묘한 방법으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때 자신의 힘으로 이기려 하면 안 됩니다. 우리의 그간 경험을 보면 정말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의 것은 모두 내려놓고, 오직 주님의 지혜와 능력에 기대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이 집요한, 매 순간의 시험들을 완벽하게 이길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계2:17)

 

주님의 말씀을 믿으시고 매일 같이 이기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6:35)

 

아멘

 

원본

2021-03-07(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11-26(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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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3:4-5, AC.204-206

4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Verses 4, 5, And the serpent said unto the woman, Ye shall not surely die. For God doth know that in the day ye eat thereof, then your eyes shall be opened, and ye shall be as God, knowing good and evil.

 

※ 4, 5절 속뜻

 

주님 신앙을 주님의 퍼셉션과 계시가 아닌, 감각과 자아, 세상 학문과 배움으로 들여다보고자 하는 사람은 주님 기준이 아닌 자기 기준, 사람 기준으로 참과 거짓, 선과 악을 분별하게 되어 하나님의 자리에 서게 되고, 이후 자기 맘대로 살아가려 할 것을 주님은 다 알고 계셨습니다.

 

 

204.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Their eyes being opened by eating of the fruit of the tree)는 신앙에 관한 것을 감각과 지식, 곧 자기 자신, 그러니까 자기가 알고 있는 걸 기준 삼아 신앙에 관한 것을 헤아릴 경우, 분명히 말하지만, 오히려 신앙에 관한 게 잘못되었다 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as God, knowing good and evil)은 만일 그들이 그런 짓, 곧 스스로를 기준 삼아 그런 짓을 하면, 그들은 마치 자신이 하나님인 양 스스로를 인도하려 할 것이라는, 즉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는 대신 오직 자기 힘으로만 살아가려 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Their “eyes being opened by eating of the fruit of the tree” signifies that if they were to examine the things of faith from what is of sense and knowledge [ex sensuali et scientifico], that is, from themselves, they would plainly see those things as if erroneous. And that they would be “as God, knowing good and evil,” denotes that if they did so from themselves, they would be as God, and could guide themselves.

 

 

205. 모든 구절에는 교회의 어떤 특별한 상태나 상태의 변화가 들어있습니다. 앞선 구절들에는 그들이 그렇게 기울어졌음에도 그들, 곧 그 당시 교회는 자신들의 상태가 주님 보시기에 불법이라는 걸 지각했다는 내용이 들어있는 반면, 이 구절들에는 막 시작된 의심, 곧 자신들이 볼 땐, 이들은 태고교회의 세 번째 후손들인데, 합법적이지가 않다(whether it might not be lawful for them, since they would thus see), 자신들의 감각과 세상에서 배운 걸로 봤을 땐, 자신들이 그동안 선대로부터 들어온 것들, 곧 주님과 천국, 이 세상에 관한 이야기들, 교리들이 좀 안 맞는 것 같다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되면서 자신들의 눈이 열렸다는, (사실은 정반대로 오히려 더 눈이 멀어 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 우리가 너무 교회 중심으로, 교리 중심으로만 살아왔구나. 실제 세상 지식과 감각 경험은 전혀 다른데...하는, 그리고 결국 이런 식의 자기 사랑, 이렇게 자기중심적인 태도가 깊어지면서(at length, in consequence of the ascendancy of self-love), 그들은 이 정도면 우리 스스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주님과 같아질 수 있지 않을까?여기기 시작했다는 그런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이런 게 자기 사랑의 본질인데요, 이는 주님 따르는 건 꺼리고, 대신 혼자 힘으로 살아가는(to be self-guided) 걸 더 선호하며, 믿음 관련한 일들을 감각과 기억-지식으로 컨설팅하기 위해 혼자 알아서 하는 그런 것이기 때문입니다. Every verse contains a particular state, or change of state, in the church: the preceding verses, that although thus inclined they nevertheless perceived it to be unlawful; these verses, an incipient doubt whether it might not be lawful for them, since they would thus see whether the things they had heard from their forefathers were true, and so their eyes would be opened; at length, in consequence of the ascendancy of self-love, they began to think that they could lead themselves, and thus be like the Lord; for such is the nature of the love of self that it is unwilling to submit to the Lord’s leading, and prefers to be self-guided, and being self-guided to consult the things of sense and of memory-knowledge as to what is to be believed.  

 

※ 이 글 번역은 특별히 쉽지가 않아 여러 날 걸렸고, 이해를 돕기 위해 최대한 풀어 번역했습니다.

 

 

206.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된 사람들, 그리고 자기를 사랑하고 동시에 세상 배움에 탁월한 사람들, 이 둘 중 누가 더 대단한 믿음(a stronger belief)을 가진 걸까요? 그러나 사실은 누가 더 눈이 먼 걸까요? 그들에게 단지 질문만 해도 알 수 있는 사실은, 그들은 영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기는 고사하고, 심지어 알지도 못하며, 영적, 천적 삶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정말이지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낯설어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영원한 삶을 인정하지 않는데요, 그들은 스스로를 사라질 짐승과도 같은 존재라 믿으며, 주님도 인정하지 않고, 대신 오직 자신들과 자연만 숭배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 가운데 좀 신중하게 말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이르기를, 어떤 최고의 존재(a certain supreme existence [ens])가 만물을 다스리지만, 자신들은 그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고 합니다. 그들이 감각 및 기억-지식과 관련 일들을 가지고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들을 입증할 때 사용하는 원리들(the principles)이 있는데요, 그들은 맘만 먹으면 온 우주를 앞에 놓고도 그럴 겁니다. 그들은 남에게 신(神, gods)처럼, 또는 정말 지혜로운 사람처럼 여겨지기를 간절히 원하지만, 만약 그들의 본성(their own) 가운데 없는 게 뭔지 아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대답하기를, 그런 건 없다고, 다만 자신들의 본성 전부를 잃게 되면 자신들은 아무것도 아닌 게 될 거라고 대답들을 할 겁니다. Who have a stronger belief that their eyes are open, and that as God they know what is good and evil, than those who love themselves, and at the same time excel in worldly learning? And yet who are more blind? Only question them, and it will be seen that they do not even know, much less believe in, the existence of spirit; with the nature of spiritual and celestial life they are utterly unacquainted; they do not acknowledge an eternal life; for they believe themselves to be like the brutes which perish; neither do they acknowledge the Lord, but worship only themselves and nature. Those among them who wish to be guarded in their expressions, say that a certain supreme existence [ens] of the nature of which they are ignorant rules all things. These are the principles in which they confirm themselves in many ways by things of sense and of memory-knowledge, and if they dared, they would do the same before all the universe. Although such persons desire to be regarded as gods, or as the wisest of men, if they were asked whether they know what it is not to have anything of their own, they would answer that it is to have no existence, and that if they were deprived of everything that is their own, they would be nothing.  

 

※ 조금이라도 영의 존재를 시인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사후 자기 영의 상태를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여기서 이런 사람에게 맨 먼저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는, 다른 모든 빛나는 성취를 이루었어도 정작 그가 자기 영에 대하여 전혀 무지하며, 관심조차 없고, 그저 철저히 세속적이며, 물질적이기만 하다면, 이 사람에겐 가장 시급한 질문이 바로 이 영, 다른 말로는 그의 본성과 관련된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본성은 타고난 자연 상태로는 악 그 자체이기 때문에, 얼른 주님의 생명에 접붙임을 받아 그 안에 주님의 생명이 흘러들어 새로운 상태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주님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게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으면, 그런 건 일종의 환상(a fantasy)이라고 생각합니다. 양심(conscience)이라는 걸 아느냐는 질문에는, 그건 그저 상상 속 산물로서, 천민들(賤民, the vulgar)을 통제하는 방법으로 써먹을 수 있는 거라고 할 겁니다. 퍼셉션(perception)이 무엇인지는 아느냐는 질문에는, 그들은 씨익 비웃으며, 그런 건 광적인 쓰레기, 곧 종교 마니아들 간 사용하는 일종의 무슨 싸인 같은 거라고 할 겁니다.If they are asked what it is to live from the Lord, they think it a fantasy. If asked whether they know what conscience is, they would say it is a mere creature of the imagination, which may be of service in keeping the vulgar under restraint. If asked whether they know what perception is, they would merely laugh at it and call it enthusiastic rubbish.

 

※ 스베덴보리 시절인 1750년대 유럽의 영적 분위기가 이랬나 봅니다. 이 하나하나의 사례가 모두 스베덴보리가 직접 겪었던 사례이지 싶은데요, 오늘날 한국 사회라고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개신교를 비롯, 거의 모든 기독교가 외적(外的, external) 사고, 즉 ‘겉의 사람’이 되었기 때문인데, 말로는 ‘영성, 영성’ 하지만 그 사고의 뿌리는 ‘겉’에 있습니다. 내적(內的, internal) 사고, 즉 ‘속’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으며, 말해도 거의 이해를 못 합니다.

 

이런 게 그들의 지혜이며, 이런 게 그들이 말하는, 소위 ‘눈이 밝아지는 것’(open eyes)입니다. 이런 게 그들이 말하는 ‘하나님’(gods)입니다. 이런 원리들, 그들 생각에는 대낮보다 더 밝은 원리들인데, 이런 원리들을 가지고 그들은 모든것의 출발점 삼으며, 이런 식으로 그들은 계속해서 신앙의 신비들에 대한 이성질(理性, reason)을 하는데요, 그 결과는 과연 어둠의 깊은 심연밖에 뭐가 더 있을까요? 무엇보다도 이런 것이 바로 세상을 꾀는 ‘뱀’(the serpents)인 것입니다만, 그러나 태고교회의 후손은 아직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되는 건 본 장 14절로 19절에서 다루게 됩니다.Such is their wisdom, such “open eyes” have they, and such “gods” are they. Principles like these, which they think clearer than the day, they make their starting point, and so continue on, and in this way reason about the mysteries of faith; and what can be the result but an abyss of darkness? These above all others are the “serpents” who seduce the world. But this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was not as yet of such a character. That which became such is treated of from verse 14 to verse 19 of this chap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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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3:2-3, AC.198-203

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Verses 2, 3, And the woman said unto the serpent, We may eat of the fruit of the tree of the garden; But of the fruit of the tree which is in the midst of the garden, God hath said, Ye shall not eat of it, neither shall ye touch it, lest ye die.

 

※ 2, 3절 속뜻

 

태고교회 선조들로부터 밝히 계시되어 내려온 주님 신앙에 관한 선과 진리에 대해, 주님으로 말미암은 퍼셉션이 아닌, 감각과 세상 학문, 지식을 가지고 들여다보려 하는 것은 주님이 금하신 바, 만일 그런 짓을 하면, 그동안 주님 주신 모든 지혜와 지성이 사라질 것입니다.

 

 

198. 동산 나무의 열매(The fruit of the tree of the garden)는 태고교회로부터 그들에게 계시(revealed), 계승된 선과 진리이며,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 그들이 먹어서는 안 되는(the fruit of the tree which is in the midst of the garden, of which they were not to eat)은 주님께 속한 신앙의 선과 진리인데, 이는 그들이 자신들한테서 배워서는 안 되는(were not to learn from themselves) 것입니다. ‘만지지도 말라(not to touch it)는 금지(a prohibition)입니다. 그들 자신이나 감각과 기억-지식(sense and memory-knowledge [sensuali et scientifico])에 속한 걸 가지고 감히 주님께 속한 신앙의 선과 진리 생각하는 행위를 금하는 것이지요.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lest ye die)는 그랬다가는 신앙, 즉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지혜와 총명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The “fruit of the tree of the garden” is the good and truth revealed to them from the most ancient church; the “fruit of the tree which is in the midst of the garden, of which they were not to eat” is the good and truth of faith, which they were not to learn from themselves; “not to touch it” is a prohibition against thinking of the good and truth of faith from themselves, or from what is of sense and memory-knowledge [sensuali et scientifico]; “lest ye die” is because thus faith, or all wisdom and intelligence, would perish.

 

 

199. 그들이 먹을 수 있는 나무의 열매(the fruit of the tree of which they might eat)가 태고교회로부터 그들에게 계시, 계승된 선과 진리, 즉 신앙에 관한 지식(the knowledges [cognitiones] of faith)을 의미한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로 분명한데요, 앞서 천적 인간, 곧 태고교회를 다루던 창2:16에서는 동산의 나무(the tree of the garden)라 한 반면, 여기서는 대신 그들이 먹을 수 있는 동산 나무의 열매(the fruit of the tree of the garden of which they might eat)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That the “fruit of the tree of which they might eat” signifies the good and truth of faith revealed to them from the most ancient church, or the knowledges [cognitiones] of faith,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it is said to be the “fruit of the tree of the garden of which they might eat,” and not the “tree of the garden,” as before when treating of the celestial man, or the most ancient church (Gen. 2: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창2:16)

 

※ 우리말 개역 개정에서는 위 창2:16 번역을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라 하여 원전에는 없는 ‘열매’를 첨가했습니다. 원전에는 ‘동산 각종 나무’인데요, 이런 속뜻을 알 길이 없었던 번역자들은 ‘나무를 먹는다고?’ 하면서 이 부분을 원전 그대로 번역하기가 굉장히 어색했을 것입니다.

 

위 창2:16 본문의 ‘동산 나무’(The tree of the garden)는 선하고 참된 것에 관한 퍼셉션(the perception of what is good and true)이며, 이 선과 진리는 퍼셉션의 산물이기 때문에(which good and truth, because they are from that source), 여기서 ‘열매’(fruit)라고 하는 것입니다. 말씀에 나오는 ‘열매’는 자주 이 선과 진리를 의미합니다. The “tree of the garden,” as it is there called, is the perception of what is good and true; which good and truth, because they are from that source, are here called “fruit,” and are also frequently signified by “fruit” in the Word.

 

 

200. 앞서 창2:9에서는 동산 중앙에(in the midst of the garden) 있는 나무는 생명나무이지 지식의 나무가 아니라고 하더니, 여기서는 지식의 나무(the tree of knowledge)라고 하는 이유는, 동산 중앙(the “midst” of the garden)이라고 하는 게 가장 내적인(the inmost), 가장 깊은 내면을 상징하기 때문인데요, 천적 인간, 즉 태고교회의 가장 깊은 내면은 이 생명나무(the tree of lives), 곧 사랑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이었던 반면, 여기 이 사람, 천적 영적 인간(a celestial spiritual man)이라고 하는, 혹은 그 후손이라고 하는 이 사람한테서는 신앙이 동산의 중앙’, 즉 가장 깊은 내면이었기 때문입니다. 태곳적 사람들의 퀄리티(quality)를 아주 제대로 묘사하는 건 불가능한데요, 왜냐하면, 오늘날은 그들에 대해서 알려진 게 전혀 없고, 그들의 지니어스(genius)는 지금까지 발견된 그 어떤 사람들보다도 정말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지니어스에 대한 어떤 걸 좀 전달, 알려드리고자 할 목적으로, 다음과 같은 사실, 곧 그들은 선을 통해 진리를 알았고, 사랑을 통해 신앙이라는 게 뭔지를 알았다는 걸 언급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 세대가 막을 내렸을 때, 그다음에 일어난 세대는 완전히 다른 지니어스를 가졌는데요, 그들은 이전 세대처럼 선을 통해 진리를 알거나, 사랑을 통해 신앙이라는 게 뭔지를 아는 대신, 선이 무엇인지를 진리를 가지고 습득하거나 신앙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사랑에 관한 걸 아는, 즉 선과 사랑을 지식으로 습득, 학습으로 아는 그런 세대였기 때문입니다. 그들 중 거의 대부분이 지식(knowledge [quod scirent])밖에는 거의 가진 게 없었습니다. 이것이 홍수 후 세상의 멸망을 막기 위한 생긴 변화였지요. The reason why the “tree of knowledge” is here spoken of as being “in the midst of the garden,” although previously (Gen. 2:9), the tree of lives was said to be in the midst of the garden, and not the tree of knowledge, is that the “midst” of the garden signifies the inmost; and the inmost of the celestial man, or of the most ancient church, was the “tree of lives,” which is love and the faith thence derived; whereas with this man, who may be called a celestial spiritual man, or with this posterity, faith was the “midst” of the garden, or the inmost. It is impossible more fully to describe the quality of the men who lived in that most ancient time, because at the present day it is utterly unknown, their genius being altogether different from what is ever found with anyone now. For the purpose however of conveying some idea of their genius, it may be mentioned that from good they knew truth, or from love they knew what is of faith. But when that generation expired, another succeeded of a totally different genius, for instead of discerning the true from the good, or what is of faith from love, they acquired the knowledge of what is good by means of truth, or what is of love from the knowledges of faith, and with very many among them there was scarcely anything but knowledge [quod scirent]. Such was the change made after the flood to prevent the destruction of the world.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2:9)

 

 

201. 이렇게 홍수 이전에 존재했던 태고인들의 이런 지니어스가 오늘날엔 발견되지도, 존재하지도 않는 이런 상황 속에서, 이 본문에 들어있는 참된 의미, 곧 속뜻을 제대로 설명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다릅니다. 천국에서는 온전한 이해가 가능한데요, 천적이라고 하는 천사들과 천사적 영들(angelic spirits)은 홍수 전에 거듭난 태고인들과 같은(same) 지니어스를 지닌 반면, 영적이라고 하는 천사들과 천사적 영들은 홍수 후 거듭난 사람들과 유사한(similar) 지니어스를 지녔기 때문입니다. 비록 두 경우 모두 무한히 다양하지만 말입니다. Seeing therefore that such a genius as that of the most ancient people anterior to the flood is not found and does not exist at the present day, it is no easy matter to explain intelligibly what the words of this passage in their genuine sense imply. They are, however, perfectly understood in heaven, for the angels and angelic spirits who are called celestial are of the same genius as the most ancient people who were regenerate before the flood; while the angels and angelic spirits who are termed spiritual are of a similar genius to the regenerate after the flood, although in both cases with indefinite variety.

 

 

202. 천적 인간이었던 태고교회는 지식의 나무를 먹는 것(eating of the tree of knowledge), 즉 신앙에 속한 걸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을 가지고 배우는 일을 삼가야(to abstain from learning) 할 뿐 아니라, 그 나무를 만지는 것조차, 즉 신앙에 관한 걸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을 가지고 생각하는(not even allowed to think) 것조차 허용될 수 없었던 그런 캐릭터였는데요, 안 그러면, 그들은 천적 삶에서 영적 삶으로, 그리고 계속해서 아래로 가라앉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천적 천사들의 삶 또한 그런데요, 그들이 더욱 내적, 더욱 천적일수록, 신앙이라고 이름하는 경험도, 영적인 걸 약간 접해보는 경험도 그들에게는 일절 불허됩니다. 이 신앙이라는 말을 남들을 통해 들을 경우, 그들에게는 신앙 대신 사랑의 퍼셉션이 있는데요, 이게 어떻게 다른 건지는 오직 그들만 알지요. 이렇게 무엇이든 신앙에 속한 것을 그들은 사랑과 체어리티로부터 기원(derive from), 시작합니다. 그들은 신앙에 관한 그 어떤 이성질하는 말(理性질, any reasoning about faith) 정말 굉장히 못 견뎌 하며, 그와 관련된 그 어떤 기억-지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인데요,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사랑으로 퍼셉션, 곧 선하고 참된 것에 관한, 주님으로 말미암는 퍼셉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 퍼셉션으로 어떤 일이 과연 그런지 안 그런지를 즉시 압니다. 그런 까닭에, 어떤 신앙에 관한 말을 듣게 되면, 그들은 그저 단순히 그렇다, 아니다로 대답하는데요, 그들은 주님으로 말미암아 그걸 지각, 즉시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마태복음에서 주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의미, 이유입니다. The most ancient church, which was a celestial man, was of such a character as not only to abstain from “eating of the tree of knowledge,” that is, from learning what belongs to faith from sensuous things and memory-knowledges, but was not even allowed to touch that tree, that is, to think of anything that is a matter of faith from sensuous things and memory-knowledges, lest they should sink down from celestial life into spiritual life, and so on downward. Such also is the life of the celestial angels, the more interiorly celestial of whom do not even suffer faith to be named, nor anything whatever that partakes of what is spiritual; and if it is spoken of by others, instead of faith they have a perception of love, with a difference known only to themselves; thus whatever is of faith they derive from love and charity. Still less can they endure listening to any reasoning about faith, and least of all to anything of memory-knowledge respecting it; for, through love, they have a perception from the Lord of what is good and true; and from this perception they know instantly whether a thing is so, or is not so. Therefore when anything is said about faith, they answer simply that it is so, or that it is not so, because they perceive it from the Lord. This is what is signified by the Lord’s words in Matthew: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마5:37) Let your communication be Yea, yea; nay, nay; for whatsoever is more than these cometh of evil. (Matt. 5:37)

 

이것이 그들로 하여금 지식의 나무 열매를 만지지 못하게 하셨다는 말의 의미, 속뜻입니다. 그들이 그걸 만지면, 그들은 악 가운데 있게 될, 즉 결과적으로 그들은 죽게(die) 될 것이기 때문이지요. 이런 특별한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천적 천사들은 다양한 주제에 관해 다른 천사들처럼 서로 대화합니다. 다만 천적 언어(天的, a celestial language)로 하지요. 이 언어는 사랑으로 되어 있고, 사랑에서 나오며, 영적 천사들의 언어보다 더욱 형용, 형언할 수 없는 언어입니다. This then is what was meant by their not being allowed to touch the fruit of the tree of knowledge; for if they touched it, they would be in evil, that is, they would in consequence “die.” Nevertheless the celestial angels converse together on various subjects like the other angels, but in a celestial language, which is formed and derived from love, and is more ineffable than that of the spiritual angels.

 

 

203. 영적 천사들도 신앙에 관한 대화를 하는데요, 이들은 신앙에 관한 것들을 심지어 지성과 이성, 그리고 많이 배운 사람들의 언어로 확실히 보여 주지만, 그러나 그들은 신앙과 관련된 일들에 이런 걸로 무슨 자기들만의 결론을 내리는 짓은 절대로 안 합니다. 그런 짓을 하는 자는 악 가운데 있기 때문이지요. 이들은 또한 신앙에 관한 모든 진리의 퍼셉션을 주님으로부터 부여받는데요, 비록 천적 천사들의 것과 같은 그런 퍼셉션은 아닐지라도 말입니다. 영적 천사들의 퍼셉션은 일종의 양심(conscience) 같은 건데요, 이것은 주님으로 말미암아 생명력을 갖는, 마치 천적 퍼셉션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건 아니고, 단지 영적 퍼셉션일 뿐인 그런 겁니다. The spiritual angels, however, converse about faith, and even confirm the things of faith by those of the intellect, of the reason, and of the memory, but they never form their conclusions concerning matters of faith on such grounds: those who do this are in evil. They are also endowed by the Lord with a perception of all the truths of faith, although not with such a perception as is that of the celestial angels. The perception of the spiritual angels is a kind of conscience which is vivified by the Lord and which indeed appears like celestial perception, yet is not so, but is only spiritual perce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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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3:1, AC.194-197

1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Verse 1, And the serpent was more subtle than any wild animal of the field which Jehovah God had made; and he said unto the woman, Yea, hath God said, Ye shall not eat of every tree of the garden?

 

※ 1절 속뜻

 

태고교회 세 번째 후손에 이르러서는 이들은 선조들에게는 당연했던 주님의 계시들을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주님의 계시들일지라도 자기들의 감각과 세상 학문, 철학 등으로 확인, 검증을 하고자 했습니다.

 

 

194. 여기 (the serpent)은 인간이 신뢰하고 있는 감각 파트(the sensuous part of man in which he trusts)를 말합니다. 여기 들짐승(the wild animal of the field)은 앞에서처럼 겉 사람의 모든 애정(every affection of the external man), ‘여자(the woman)는 인간의 본성(man’s own)을 말하며, 뱀이 하고 있는 말,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Yea, hath God said, Ye shall not eat of every tree?)는 그들이 의심하기 시작했다(began to doubt)는 말입니다. 여기서 다루고 있는 주제는 태고교회의 세 번째 후손으로서, 그들은 계시된 것들(things revealed)에 관하여 그것이 과연 그런지를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볼 수 있어야만(unless they saw and felt that they were so) 믿기 시작했습니다. 본 절과 다음 절은 그들의 첫 번째 상태, 즉 의심의 상태에 대한 설명입니다. By the “serpent” is here meant the sensuous part of man in which he trusts; by the “wild animal of the field” here, as before, every affection of the external man; by the “woman,” man’s own; by the serpent’s saying, “Yea, hath God said, Ye shall not eat of every tree?” that they began to doubt. The subject here treated of is the third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which began not to believe in things revealed unless they saw and felt that they were so. Their first state, that it was one of doubt, is described in this and in the next following verse.

 

 

195. 태고인들(The most ancient people)은 인간의 모든것(all things in man)을 짐승과 새에 비유하는(compare to) 대신 실제로 그렇게 명명하였으며(denominated), 이런 식으로 말하는 그들의 스피킹은 홍수 후 고대교회(the ancient church after the flood)에까지도 이어져, 이후 선지자들한테까지 전해졌습니다. 사람 안의 감각적인 것(The sensuous things in man)을 그들은 (serpents)이라고 했는데, 그 이유는 뱀이 땅에 가까이 붙어 지내는 것처럼, 감각적인 것들(sensuous things) 역시 몸하고 그렇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신앙의 신비(the mysteries of faith)에 관한, 감각적 증거에 기초한 이성 활동(reasonings founded on the evidence of the senses), 즉 신앙의 신비를 감각을 가지고 이해하려는 일련의 이성적 활동을 뱀의 독(the poison of a serpent)이라 하였고, 그런 짓을 하는 사람들(the reasoners themselves)이라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많은 걸 감각, 즉 보이는 걸(visible things) 가지고 하기 때문에, 이르기를 뱀은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the serpent was more subtle than any wild animal of the field) 하는 것입니다. 이 보인다는 것은 땅에 속한 거, 육적인 거, 일상적인 거, 자연적인 거(things terrestrial, corporeal, mundane, and natural)를 말합니다. The most ancient people did not compare all things in man to beasts and birds, but so denominated them; and this their customary manner of speaking remained even in the ancient church after the flood, and was preserved among the prophets. The sensuous things in man they called “serpents,” because as serpents live close to the earth, so sensuous things are those next the body. Hence also reasonings concerning the mysteries of faith, founded on the evidence of the senses, were called by them the “poison of a serpent,” and the reasoners themselves “serpents”; and because such persons reason much from sensuous, that is, from visible things (such as are things terrestrial, corporeal, mundane, and natural), it is said that “the serpent was more subtle than any wild animal of the field.”

 

[2] 그리고 또 시편에 보면, 이성 놀이(reasonings)를 통해 사람을 유혹하는 자들에 대해 이르기를, And so in David, speaking of those who seduce man by reasonings:

 

뱀 같이 그 혀를 날카롭게 하니 그 입술 아래에는 독사의 독이 있나이다 (시140:3) They sharpen their tongue like a serpent; the poison of the asp is under their lips. (Ps. 140:3)

 

3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 4그들의 독은 뱀의 독 같으며 그들은 귀를 막은 귀머거리 독사 같으니 5술사의 홀리는 소리도 듣지 않고 능숙한 술객의 요술(주1)도 따르지 아니하는 독사로다 (시58:3-5) They go astray from the womb, speaking a lie. Their poison is like the poison of a serpent, like the deaf poisonous asp that stoppeth her ear, that she may not hear the voice of the mutterers, of a wise one that charmeth charms [sociantis sodalitia]1. (Ps. 58:3–5)

 

현자(賢者)가 하는 말이나 현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조차 하지 않으려는 그런 캐릭터를 가진 사람들의 이성 놀이, 이성질(Reasonings)을 가리켜 여기서는 뱀의 독(the poison of a serpent)이라 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고대인들 사이에서 뱀이 귀를 막는다(The serpent stoppeth the ear)는 말이 하나의 속담이 되었지요. 아모스입니다. Reasonings that are of such a character that the men will not even hear what a wise one says, or the voice of the wise, are here called the “poison of a serpent.” Hence it became a proverb among the ancients, that “The serpent stoppeth the ear.” In Amos:

 

19마치 사람이 사자를 피하다가 곰을 만나거나 혹은 집에 들어가서 손을 벽에 대었다가 뱀에게 물림 같도다 20여호와의 날은 빛 없는 어둠이 아니며 빛남 없는 캄캄함이 아니냐 (암5:19-20) As if a man came into a house, and leaned his hand on the wall, and a serpent bit him. Shall not the day of Jehovah be darkness and not light? even thick darkness, and no brightness in it? (Amos 5:19–20)

 

손을 벽에 대는 것(The hand on the wall)은 자기가 힘의 근원(self-derived power)이라는 것, 그리고 감각적인 것들을 신뢰한다는 의미이며, 여기에 나오는 실명(失明, the blindness)이 이런 태도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The “hand on the wall” means self-derived power, and trust in sensuous things, whence comes the blindness which is here described.

 

[3] 예레미야입니다. In Jeremiah:

 

22애굽의 소리가 뱀의 소리 같으리니 이는 그들의 군대가 벌목하는 자 같이 도끼를 가지고 올 것임이라 23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이 황충보다 많아서 셀 수 없으므로 조사할 수 없는 그의 수풀을 찍을 것이라 24딸 애굽이 수치를 당하여 북쪽 백성의 손에 붙임을 당하리로다 (렘46:22-24) The voice of Egypt shall go like a serpent, for they shall go in strength, and shall come to her with axes as hewers of wood. They shall cut down her forest, saith Jehovah, because it will not be searched; for they are multiplied more than the locust, and are innumerable. The daughter of Egypt is put to shame; she shall be delivered into the hand of the people of the north. (Jer. 46:22–24)

 

애굽(Egypt)은 신성한 것(Divine things), 주님께 속한 일을 감각적인 것과 기억-지식, 곧 세상에서 학습한 지식으로 헤아리는 것(reasoning)을 말합니다. 그런 짓(reasonings)을 가리켜 뱀의 소리(the voice of a serpent)라 하며, 그로 인해 야기된 실명(the blindness)북쪽 백성(the people of the north)이라고 한 것입니다. 욥기입니다. Egypt” denotes reasoning about Divine things from sensuous things and memory-knowledges. Such reasonings are called the “voice of a serpent”; and the blindness thereby occasioned, the “people of the north.” In Job:

 

16그는 독사의 독을 빨며 뱀의 혀에 죽을 것이라 17그는 강 곧 꿀과 엉긴 젖이 흐르는 강을 보지 못할 것이요 (욥20:16-17) He shall suck the poison of asps; the viper’s tongue shall slay him. he shall not see the brooks, the flowing rivers of honey and butter. (Job 20:16–17)

 

꿀과 엉긴 젖이 흐르는 강(Rivers of honey and butter)은 영적, 천적인 것들(things spiritual and celestial)인데, 이는 단지 이성적이기만 한 사람들은(by mere reasoners) 볼 수 없는 것들입니다. 위 본문에서는 이성적이기만 한 것(reasonings)을 일컬어 독사의 독(the poison of the asp), ‘뱀의 혀(the viper’s tongue)라고 합니다. 뱀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14, 15절에서 보시기 바랍니다. Rivers of honey and butter” are things spiritual and celestial, which cannot be seen by mere reasoners; reasonings are called the “poison of the asp” and the “viper’s tongue.” See more respecting the serpent below, at verses 14 and 15.

 

 

196. 고대에는 계시된 것들에서보다 감각적인 것들에서 더 확신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serpents)이라고 했습니다. 오늘날은 사정이 더욱 안 좋은데요, 지금 사람들은 자기들이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see and feel) 수 없는 것은 무엇이든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고대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과학 지식이라는 걸 가지고 더욱 자신들을 그런 불신 가운데 있게 하기 때문이며, 그 결과 스스로를 더욱 더 깊이 눈먼 상태 가운데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저들이 스스로를 어떻게 눈멀게 하는지, 그 결과 나중에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게 하는지, 이 사람들은 천국에 관한 일들(heavenly matters)을 감각과 기억-지식, 그리고 철학에 관한 걸(the things of sense, of memory-knowledge, and of philosophy)로 자신들의 결론을 내리며, 그리고 말씀에서 자주 귀머거리 뱀(deaf serpents)이요, ‘날아다니는 뱀(the flying serpents)으로 언급되는 사람들인데, 이 경우가 훨씬 더 치명적이지요, 이런 게 사람들에게 알려지도록 우리는 영에 대해 그들이 믿는 게 뭔지 한 가지 예를 들고자 합니다. In ancient times those were called “serpents” who had more confidence in sensuous things than in revealed ones. But it is still worse at the present day, for now there are persons who not only disbelieve everything they cannot see and feel, but who also confirm themselves in such incredulity by knowledges [scientifica] unknown to the ancients, and thus occasion in themselves a far greater degree of blindness. In order that it may be known how those blind themselves, so as afterwards to see and hear nothing, who form their conclusions concerning heavenly matters from the things of sense, of memory-knowledge, and of philosophy, and who are not only “deaf serpents,” but also the “flying serpents” frequently spoken of in the Word, which are much more pernicious, we will take as an example what they believe about the spirit.

 

[2] 감각적인 사람, 즉 오직 감각의 증거(the evidence of his senses)만을 믿는 사람은 영의 존재(the existence of the spirit)를 부인합니다. 그가 영을 볼 수 없기 때문인데요, ‘그건 아무것도 아닌 게, 내가 그걸 느낄 수 없으니까 당연한 거 아냐? 만약 내가 그걸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다면, 그땐 당연히 존재하는 거지. 그걸 내가 왜 모르겠어?(It is nothing because I do not feel it: that which I see and touch I know exists.)라고 말하면서 말이지요. 기억-지식의 사람, 곧 과학적 지식을 가지고 결론을 내리는 사람은 말하기를, ‘영이라는 게, 말하자면 눈앞에서 허공 중에 사라지는 수증기나 열기, 혹은 그 밖의 무슨 과학적 실체가 아니면, 영이라는 게 도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동물에게도 일종의 몸, 감각 및 이성과 유사한 뭔가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동물은 죽지만, 인간의 영은 산다고들 하네요.이런 식으로 그들은 영의 존재를 부인합니다. The sensuous man, or he who only believes on the evidence of his senses, denies the existence of the spirit because he cannot see it, saying, “It is nothing because I do not feel it: that which I see and touch I know exists.” The man of memory-knowledge [scientificus], or he who forms his conclusions from memory-knowledges says, What is the spirit, except perhaps vapor or heat, or some other entity of his science, that presently vanishes into thin air? Have not the animals also a body, senses, and something analogous to reason, and yet it is asserted that these will die, while the spirit of man will live. Thus they deny the existence of the spirit.

 

[3]철학자들의 경우입니다. 인류의 대부분보다 훨씬 예리한 이들 철학자들도 영에 대해 말할 때는 결과적으로 자신들도 이해할 수 없는 말로 말하는데요, 이들은 서로 논쟁하기를, 물질이나 유기물, 혹은 그 밖의 것들에 관한 그 어떤 하나의 표현으로도 이 영을 설명할 수 없다고 하면서 다투기 때문이며, 그래서 이들은 영에 대해 머리를 쥐어짜 너무 추상화한 나머지(so abstract it from their ideas that) 영에 대한 장황한 설명이라는 게 결국은 그냥 사라져 버리고,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그중에서 좀 나은 사람은 영은 생각(thought)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생각에 대한 그들의 소위 이성적이라는 주장을 보면, 생각에서 모든 실재(substantiality), 알맹이를 다 분리하는 것이었고, 그러다 보니 그들은 결국 몸이 끝나면 영도 사라져야 하는 결론에 도달하지요. 결국 감각에 속한, 기억-지식에 속한, 그리고 철학에 속한 걸 가지고 이성적 사고를 한다 하는 사람들은 모두 영의 존재를 부인하며, 영과 영적인 것들에 관하여 하는 모든 말을 전혀 믿지 않지요. 마음이 단순한 사람들(the simple in heart)은 그렇지 않은데요, 그들은 영이 존재하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대답하기를, 자기들은 그게 존재한다는 걸 안다고 해요. 주님 말씀하시기를, 자기들은 사후에도 살 것이라 하셨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그들은 자신들의 이성을 소멸시키는 대신, 주님의 말씀으로 그것을 생생하게 하지요. Philosophers also, who would be more acute than the rest of mankind, speak of the spirit in terms which they themselves do not understand, for they dispute about them, contending that not a single expression is applicable to the spirit which derives anything from what is material, organic, or extended; thus they so abstract it from their ideas that it vanishes from them, and becomes nothing. The more sane however assert that the spirit is thought; but in their reasonings about thought, in consequence of separating from it all substantiality, they at last conclude that it must vanish away when the body expires. Thus all who reason from the things of sense, of memory-knowledge, and of philosophy, deny the existence of the spirit, and therefore believe nothing of what is said about the spirit and spiritual things. Not so the simple in heart: if these are questioned about the existence of spirit, they say they know it exists, because the Lord has said that they will live after death; thus instead of extinguishing their rational, they vivify it by the Word of the Lord.

 

 

197. 태고인들, 천적 인간들(celestial men)이었지요, 이런 태고인들 가운데서 은 세심함, 신중함(circumspection)을 의미했으며, 또한 감각 파트(the sensuous part) 의미했지요. 이를 통해 그들은 신중함을 훈련, 부상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었습니다. ‘에 관한 이러한 의미는 제자들에게 하신 주님 말씀으로도 알 수 있는데요, Among the most ancient people, who were celestial men, by the “serpent” was signified circumspection, and also the sensuous part through which they exercised circumspection so as to be secure from injury. This signification of a “serpent” is evident from the Lord’s words to his disciples: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마10:16) Behold, I send you forth as sheep into the midst of wolves; be ye therefore prudent as serpents, and simple as doves. (Matt. 10:16)

 

그런가 하면 또 광야에 세워진 놋뱀(the brazen serpent)을 통해서도 알 수 있지요. 놋뱀은 주님의 감각 파트를 상징하는데요, 주님만이 홀로 천적 인간이시며, 홀로 모두를 돌보시고, 그들의 필요를 공급하시는 분이시지요. 그래서 이 놋뱀을 쳐다본 모두가 산 것입니다. And also from the “brazen serpent” that was set up in the wilderness, by which was signified the sensuous part in the Lord, who alone is the celestial man, and alone takes care of and provides for all; wherefore all who looked upon it were preserved.  

 

※ 놋뱀 에피소드는 아래 민수기 본문에 나옵니다.

 

4백성이 호르 산에서 출발하여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려 하였다가 길로 말미암아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5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 6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7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말하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8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9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민2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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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3:1-13, AC.190-193

 

1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And the serpent was more subtle than any wild animal of the field which Jehovah God had made; and he said unto the woman, Yea, hath God said, Ye shall not eat of every tree of the garden? 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And the woman said unto the serpent, We may eat of the fruit of the tree of the garden;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But of the fruit of the tree which is in the midst of the garden, God hath said, Ye shall not eat of it, neither shall ye touch it, lest ye die. 4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And the serpent said unto the woman, Ye shall not surely die. 5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For God doth know that in the day ye eat thereof, then your eyes shall be opened, and ye shall be as God, knowing good and evil. 6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And the woman saw that the tree was good for food, and that it was pleasant to the eyes, and a tree to be desired to give intelligence, and she took of the fruit thereof and did eat, and she gave also to her man [vir] with her, and he did eat. 7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And the eyes of them both were opened, and they knew that they were naked; and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made themselves girdles. 8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f in the garden in the air of the day; and the man and his wife hid themselves from the face of Jehovah God in the midst of the tree of the garden. 9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And Jehovah God cried unto the man [homo], and said unto him, Where art thou? 10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And he said, I heard thy voice in the garden, and I was afraid, because I was naked; and I hid myself. 11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And he said, Who told thee that thou wast naked? Hast thou eaten of the tree whereof I commanded thee that thou shouldest not eat? 12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And the man said, The woman whom thou gavest to be with me, she gave me of the tree, and I did eat. 13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And Jehovah God said unto the woman, Why hast thou donethis? And the woman said, The serpent beguiled me, and I did eat.

 

 

속뜻 개요

 

190. 태고교회(the most ancient church)의 세 번째 상태를 다루는데요, 이 상태는 자신의 본성을 사랑할 정도로 원하던(so desired its own as to love it) 상태입니다. The third state of the most ancient church is treated of, which so desired its own as to love it.

 

 

191. 자기 사랑, 즉 자신의 본성을 향한 사랑(the love of self, that is, their own love)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자신들의 감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것들은 아무것도 안 믿기 시작했으며, 그래서 본문에서는 감각적인 건(the sensuous part)(the serpent)으로, 자기 사랑, 즉 자신의 본성을 향한 사랑은 여자(the woman), 그리고 이성적, 합리적인 건(the rational)남자(the man)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Because from the love of self, that is, their own love, they began to believe nothing that they did not apprehend by the senses, the sensuous part is represented by the “serpent”; the love of self, or their own love, by the “woman”; and the rational by the “man.”

 

 

192. 이런 배경 가운데 ’, 곧 감각 파트가 여자를 설득, 주님 신앙에 관한 것들(matters pertaining to faith in the Lord)이 과연 그런지를 알아보게 하였는데, 이것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는 것(eating of the tree of knowledge)으로, 사람의 이성이 동의한 것은 그도 먹은지라(the man that he did eat)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1-6) Hence the “serpent,” or sensuous part, persuaded the woman to inquire into matters pertaining to faith in the Lord in order to see whether they are really so, which is signified by “eating of the tree of knowledge”; and that the rational of man consented is signified by “the man that he did eat.” (verses 1–6)

 

 

193.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악 가운데 있음을 지각했는데요, 그들의 눈이 밝아져(eyes being opened)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hearing the voice of Jehovah)(7-8)라는 표현을 보면, 그들에게 아직 퍼셉션이 남아 있음(which remnant of perception),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만들고(7), 부끄러워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을(8-9) 뿐 아니라, 자신들이 저지른 짓을 시인하고 고백하는(10-13) 모습들을 볼 때, 아직 자연적 선(natural goodness)도 남아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But they perceived that they were in evil; from which remnant of perception, signified by their “eyes being opened,” and by their “hearing the voice of Jehovah” (verses 7–8), and from the fig-leaves of which they made themselves girdles (verse 7), and from their shame or hiding in the midst of the tree of the garden (verses 8–9), as well as from their acknowledgment and confession (verses 10–13), it is evident that natural goodness still remained in th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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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19(D1)-주일예배(2515, 눅14,7-14),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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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19(D1)-주일예배.축도.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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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JJ4ABNVwJLA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

 

 

7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 택함을 보시고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8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9너와 그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라 하리니 그때에 네가 부끄러워 끝자리로 가게 되리라 10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앉으라 하리니 그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이 있으리라 11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12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노라 13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14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시더라 (눅14:7-14)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 또 그런 이유로 선을 행하는 것은 보상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공로를 일에 돌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고, 하나님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행하고 또한 생각하기 때문이다. (참된 기독교 440)

 

 

본문을 보면 주님께서 어떤 집에 초대를 받으셨는데 초대를 받은 다른 사람들이 서로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합니다. 주님께서 그 모습을 보시고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본문 7절로 9절의 말씀입니다.

 

7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 택함을 보시고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8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9너와 그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라 하리니 그때에 네가 부끄러워 끝자리로 가게 되리라

 

이 말씀에서 혼인 잔치의 속뜻은 선과 결합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왜냐하면 속뜻, 곧 영적인 의미로 남녀의 혼인은 선과 진리의 결합, 또는 신앙과 신앙에 따른 삶의 결합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 속에서 혼인 잔치가 열리는 곳은 어디일까요? 첫 번째는 교회입니다. 교회는 말씀을 통해 진리를 배우고, 그것에 따라 인애(仁愛), 이웃 사랑인 체어리티(charity)를 실천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직장입니다. 새 교회에서는 직장에서 맡은 일을 공정하고 정직하게 하는 것이 가장 큰 체어리티의 실천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거나 병든 사람을 보살피는 것, 교회와 자선단체에 큰돈을 기부하는 것도 체어리티입니다. 그러나 새 교회 교리에 의하면 그것은 체어리티의 첫 번째가 아니라 두 번째입니다. 다시 말하면 가난한 이웃을 열심히 구제하면서도 직업과 관련된 일을 정직하고 성실하게 하지 않으면 체어리티를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렇게 보면 우리는 매일 같이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느 곳에 있든지 주님께서는 항상 진리에 따라 체어리티의 삶을 살도록 권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혼인 잔치 집에서 스스로 높은 자리에 앉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이를테면 어디서나 자기가 중심이 되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궂은일, 힘든 일, 표 안 나는 일은 다른 사람에게 미루고, 자기는 편한 일, 돋보이는 일만 하려는 사람입니다. 일 자체에는 뜻이 없고, 오직 대우만 바라는 사람,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늘 의식하는 사람입니다. 분수를 모르고, 콧대만 높은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며, 그러다 보면 중요한 일에서 제외되고 계속 사소한 일만 합니다. 집주인에 의해 끝자리로 보내진다는 것은 그런 의미입니다. 말씀에는 청한 사람에 의해 결국 끝자리로 보내졌다고 하지만, 그러나 사실은 자기 스스로 기회를 계속 놓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바로 다음 10절, 11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10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앉으라 하리니 그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이 있으리라 11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는 일을 통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진리를 선으로 만들어야 할 책무가 있습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우리를 혼인 잔치에 초대하신 이유입니다. 혼인 잔치에 참석한 사람은 자기와 다른 사람을 비교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어디 앉았는지 무슨 음식을 먹는지 알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주어진 자리에 앉아 차려진 음식을 맛있게 먹으면 됩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나 직장에서도 남들과 비교하지 않고 맡겨진 일을 성실히 하면 됩니다. 궂은일이나 단순한 일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하면 됩니다. 그것이 끝자리에 앉아 체어리티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다음은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담임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몇 년 전에 지하실 식당에 습기가 많아 의자에 온통 곰팡이가 핀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교우 한 분이 평일에 교회에 오셔서 집사람과 함께 그것을 닦았던 일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곰팡이 입자들이 많이 날아다녔을 것입니다. 또 곰팡이 제거액 때문에 약품 냄새도 독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개의치 않고 의자들을 모두 닦고 깨끗이 말렸습니다. 나중에 제습기를 비치해서 곰팡이가 모두 사라졌지만, 그때 기억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 저도 비슷한 일이 하나 생각나 나눕니다. 전에 섬기던 교회에서 있었던 일인데, 당시 제게 맡겨진 여러 사역 중 하나가 미디어여서 그날도, 그날은 평일이었는데, 오전에 이쪽 주일학교 교육관 건물, 마침 3층에 있던 때였습니다. 무심코 창밖을 보니 오전이었는데, 어느 할머니께서 호미를 하나 들고 오시더니 도로변 화단에 들어가 흙을 깊이 긁어 뒤집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시력도 좀 그렇고, 거리도 좀 되어 뉘신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으나 제법 긴 그 화단을 꾸역꾸역 다 마치 소 쟁기질하듯 그렇게 뒤엎으시고는 조용히 떠나시는 것이었습니다. 마침 교회 마당에 인적도 거의 없어 아마도 그걸 본 사람은 제가 유일하지 싶습니다. 봄이 시작되어 겨우내 얼어 단단해졌던 화단 흙을 그렇게 부드럽게 하신 건데, 저는 보는 내내 마음이 참 좋아 마침 들고 있던 캠코더로 그걸 조금 담아놓았습니다. 아마 하늘의 하나님도 지상을 두루 감찰하실 때, 마음이 그러시겠다 싶습니다. 지금도 그 교회 미디어실 자료를 찾아보면 아마 그 영상이 어디 있을 겁니다.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 스스로 끝자리에 앉는 것은 어쩌면 그런 모습일 수 있습니다. 남들이 하지 않는 일을 대가 없이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낮은 자리에 앉아 묵묵히 맡은 일을 하고 있을 때, 주님께서 어느 날 오셔서 벗이여 올라와 앉으라고 하십니다. 그때 그는 모든 사람 앞에 영광된 사람이 됩니다. 주님은 스스로 낮은 자리에 앉은 사람을 때가 되면 높이 들어 쓰십니다. 그래서 본문에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12절과 13절에서 주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2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노라 13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이웃을 초대해 점심이나 저녁을 베풀 때는 벗이나 형제,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초대하지 말고, 차라리 가난한 자들, 몸 불편한 자들, 저는 자들, 맹인들을 초대하라고 하십니다. 점심이나 저녁을 베푸는 것은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벗이나 형제,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은 누굴까요? 요한복음 15장에서 주님은 내 명령대로 행하는 사람이 곧 친구라고 하셨습니다.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14절)

 

또 누가복음 8장 21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이 내 어머니요 형제라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 하시니라

 

한 마디로, 친구와 형제는 주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사람이며, 그렇기 때문에 누구나 좋아할 만한 성품의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함께 있는 것 자체가 즐겁습니다. 그들의 말투나 행동, 그리고 물질적으로 서로 주고받는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친구나 형제에게 선을 베푸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 저는 자들, 맹인들과 사귀는 것은 다릅니다. 속뜻으로 가난한 자들, 몸 불편한 자들, 저는 자들, 맹인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진리와 선이 무엇인지 모르는 교회 밖의 사람들이며, 그럼에도 진리를 알기 원하는 진실하고 선한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그런 사람들이 주변에 있을 때, 그들에게 먼저 사랑을 베풀고, 그들이 원하는 진리를 가르쳐 주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 저는 자들과 맹인들에게 점심과 저녁을 베푸는 일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를 14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14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시더라

 

그동안 다른 교회에 다니는 분들과 새 교회 교리에 대해 몇 번 대화를 나눈 적이 있는데 그때마다 친절하게 대하지를 못했습니다. 그랬던 이유는 진리를 배우려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편견을 버려야 하는데 그분들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결국 각자 믿고 싶은 대로 믿으면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만났던 분들, 즉 진리를 모르면서도 안다고 논쟁을 걸어왔던 분들이 사실은 가난한 자요 몸이 불편한 자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 점에서 그분들에게 친절하게 대하지 못한 것을 반성합니다.

 

※ 위 사례는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님 사례이지만, 제게도 남의 얘기가 아닌 듯하여 그대로 옮겼습니다.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진리를 전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우선 상대가 진리를 원해야 하고, 또 배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최선을 다해 친절하게 대해야 합니다. 그것이 보상을 바라지 않고, 맹인과 저는 자에게 인애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렇게 할 때 복이 있다 하시고, 의인의 부활 시에 갚음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의인이란 세상 살 때 이웃에게 체어리티의 선을 행했던 사람입니다. 그들은 사후에 주님 앞에 나갈 때 주님으로부터 상을 받습니다. 그 상은 어떤 것입니까? 진리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영적 총명함, 그리고 지혜입니다. 그리고 그 지혜와 총명함에서 나오는 천국의 기쁨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지혜와 그 지혜에서 비롯한 기쁨이 어떤 것인지는 세상 살 때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세상 그 어떤 재물이나 명예 따위와는 전혀 비교할 수 없이 고귀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에서는 스스로 높은 자리에 앉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며 스스로 낮아지고자 하는 자는 때가 되면 주님께서 높이시고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되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또 이웃에게 선을 베풀 때는 보상을 바라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할 때 의인의 부활 시에 받을 상이 크다고 하십니다. 누구나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근거 없는 자부심이나 교만 같은 것이 있습니다. 사람을 사귀어도 힘 있는 사람, 아는 게 많은 사람, 부유한 사람하고만 사귀려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거듭나기 전에는 누구나 그렇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가 도와줄 테니 그 모든 것을 이겨내라 하십니다. 교만함과 보상을 바라는 마음, 육신의 정욕과 복수심이 없어지려면 죽을 것 같은 영혼의 고통과 십자가 시험이 있어야 합니다. 그 시험 가운데서 우리의 자아가 마치 죽은 자처럼 되어야 합니다. 그때 주님은 우리를 의인의 부활로 거듭나게 하십니다. 그것에 대해 주님은 요한복음 12장 24절에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

 

하셨습니다. 또 요한복음 5장 21절에서는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요5:21)

 

라고 하셨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는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그 열매란 어떤 것입니까? 교만한 마음, 보상을 바라는 마음을 버리는 것이며, 온갖 정욕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가장 낮은 자리에서 이웃을 섬기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죽은 자처럼 되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며, 주님께서 함께하셔야만 합니다. 스스로 낮은 자리를 택해 앉으며, 보상을 바라지 않고 이웃을 사랑하는 은혜가 서울 새 교회와 한결같은 교회의 모든 성도, 그리고 진리를 사랑하는 이웃들과 함께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눅6:35)

 

아멘

 

 

원본

2021-02-21(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11-19(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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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3, AC.182-189

 

죽음에서 일으켜져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기 (계속)

CONTINUATION

CONCERNING THE ENTRANCE INTO ETERNAL LIFE OF 

THOSE WHO ARE RAISED FROM DEATH

 

 

182. 어떤 소생한 사람과 함께 있을 때, 천적 천사들은 그를 떠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그 영혼이 천적 천사들과 함께할 수 없는, 즉 천적 천사들하고는 맞지 않는 그런 캐릭터(such a character that he can no longer be in the company of the celestial angels)일 경우, 그 영혼은 그들로부터 떠나기를 간절히 원하는(is eager to)데요, 그럴 경우, 이번에는 영적 천사들이 옵니다. 영적 천사들은 와서 그가 빛을 사용할 수 있게 해줍니다. 그전까지는 그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어요. 그저 생각만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When the celestial angels are with a resuscitated person, they do not leave him, for they love everyone; but when the soul is of such a character that he can no longer be in the company of the celestial angels, he is eager to depart from them; and when this takes place the spiritual angels arrive, and give him the use of light, for previously he had seen nothing, but had only thought.  

 

※ 보통 천사들, 특히 천적 천사들하고 있으면 누구나 다 ‘와!!!’ 하고 좋아할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천적 천사들은 삼층천 천사로 이해하셔도 되는데요, 이런 천사들조차 자기 곁에 있으면 굉장히 불편한 그런 사람들, 그런 영혼들이 있는 이유는, 그들의 지상에서의 삶이 기본적으로 악하고 거짓되었기 때문이지요. 빛과 어둠이 공존할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 선인이든 악인이든 사후 일단 중간 영계에서 눈을 뜨는데요, 중간 영계란 천국도, 지옥도 아닌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 기독교인들, 특히 개신교인들은 죽었다가 눈 뜨면 그곳이 바로 천국이거나 지옥인 줄 아는데요, 그러나 그것은 모든 걸 너무 단순화한 것이고요, 일단은 아직 천국도, 지옥도 아닌, 임종 시 상태 그대로 중간 영계에서 눈을 뜹니다. 그 이유는, 천국이든 지옥이든 100% 선하든지, 100% 악해야만 들어갈 수 있는 곳, 상태이기 때문이지요. 중간 영계에서 이 100% 상태가 된 후, 천국으로 올라가거나 지옥으로 떨어지며, 그 걸리는 기간은 개인마다 다 다릅니다.

 

※ 선인이든 악인이든 천사들은 이렇게 중간 영계에서 깨어나는 모든 영에게 자기들이 할 수 있는 풀 서비스를 제공하는데요, 그 모습은 마치 지상 산부인과 신생아실 모습 같기도 합니다. 눈부터 뜨게 하는 것 역시 비슷하고요. 천사들은 무슨 일에 쓰임 받든 이렇게 사랑하고 섬기며, 돌보고 시중드는 일을 가장 즐거워합니다.

 

 

183. 저는 이 일, 곧 이 영적 천사들이 이 사람의 눈을 어떻게 뜨게 하는지 보았는데요, 그들은 마치 왼쪽 눈꺼풀을 코의 중격(中隔, 구조들을 분리하는 막이나 근육, septum) 쪽으로 마는(roll off the coat of the left eye toward the septum of the nose)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비로소 눈을 떠 빛을 사용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지요. 그 사람한테는 그게 진짜로 일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사실은 외관(外觀, an appearance), 즉 그렇게 보일 뿐인 것입니다. I was shown how these angels work. They seemed to as it were roll off the coat of the left eye toward the septum of the nose, in order that the eye might be opened and the use of light be granted. To the man it appears as if this were really done, but it is only an appearance.

 

 

184. 이 얇은 막이 이렇게 마치 돌돌 말린 것처럼 보인 후에, 드디어 빛이 조금 보이는데요, 하지만 아직은 희미합니다. 마치 사람이 막 잠에서 깼을 때 눈꺼풀을 통해 보는 것처럼 말이지요. 그리고 이 소생 중인 사람은 이때 어떤 고요한 상태(a tranquil state) 가운데 있는데요, 이때까지도 여전히 천적 천사들의 가이드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런 다음, 작은 별과 함께 일종의 하늘색 그림자가 나타나는데요, 그런데 저는 이것은 사람마다 다양하다는 걸 알았습니다(perceived). After this little membrane has been thus in appearance rolled off, some light is visible, but dim, such as a man sees through his eyelids when he first awakes out of sleep; and he who is being resuscitated is in a tranquil state, being still guarded by the celestial angels. There then appears a kind of shadow of an azure color, with a little star, but I perceived that this takes place with variety.

 

 

185. 그 후 얼굴에서 무언가 부드럽게 벗겨지는 것 같으면서 퍼셉션이 그에게 전달되는데요, 이때 천사들은 그에게서 어떤 부드럽고 상냥한, 사랑에 속한 것들(such as is of a soft and tender nature, as of love)이 아닌, 다른 생각들이 나오지 못하도록 막기 위해 특히 조심합니다. 천사들은 그에게 그가 이제 영이 되었음(he is a spirit)을 알려줍니다. Afterwards there seems to be something gently unrolled from the face, and perception is communicated to him, the angels being especially cautious to prevent any idea coming from him but such as is of a soft and tender nature, as of love; and it is now given him to know that he is a spirit.

 

 

186. 그런 다음 그는 자신의 삶을 시작하는데요, 처음에는 행복하고 기쁘지요. 왜냐하면 그는 자기가 영생에 들어온 것 같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것이 나중에 아름다운 황금빛 기운을 띠게 되는, 밝고 환한 빛(a bright white light that becomes of a beautiful golden tinge)으로 표현되는데요, 영적, 천적인 그의 첫 번째 삶은 이렇게 멋지게(to wit) 상징됩니다(by which is signified his first life, to wit, that it is celestial as well as spiritual). He then commences his life. This at first is happy and glad, for he seems to himself to have come into eternal life, which is represented by a bright white light that becomes of a beautiful golden tinge, by which is signified his first life, to wit, that it is celestial as well as spiritual.

 

 

187. 다음으로 그를 선한 영들의 공동체(the society of good spirits)로 데려가는 것이 표현되는데요, 그것은 말 위에 앉아 있는, 그리고 지옥을 향하고 있는, 그러나 이 말은 한 걸음도 못 움직이는, 그런 어떤 젊은이로 표현됩니다. 그는 청년으로 표현되는데요, 그 이유는 그가 처음 영생에 들어갈 때, 그가 천사들 가운데 있기 때문이며, 그래서 그에게는 이런 게 마치 자기가 젊음의 꽃(the flower of youth) 가운데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His being next taken into the society of good spirits is represented by a young man sitting on a horse and directing it toward hell, but the horse cannot move a step. He is represented as a youth because when he first enters upon eternal life he is among angels, and therefore appears to himself to be in the flower of youth.

 

 

188. 계속해서 그의 삶은 이번에는 말에서 내려 걸어가는 걸로 표현되는데요, 이는 그가 말을 그 자리에서 가게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암시하는 바는 그는 먼저 참되고 선한 것에 관한 지식(the knowledges of what is true and good)부터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His subsequent life is represented by his dismounting from the horse and walking on foot, because he cannot make the horse move from the place; and it is insinuated to him that he must be instructed in the knowledges of what is true and good.

 

 

189. 그 후 완만하니 위로 경사진 길이 보였는데, 이는 참되고 선한 것에 관한 지식과 진정성 있는 인정(self-acknowledgment)을 가지고 천국을 향해 단계적으로 인도되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러한 진정성 있는 인정과 참되고 선한 것에 관한 지식 없이는 아무도 그곳으로 인도될 수 없기 때문이지요. 이 주제에 관한 내용은 이 장의 끝부분에서 계속됩니다. Afterwards pathways were seen sloping gently upward, which signify that by the knowledges of what is true and good, and by self-acknowledgment, he should be led by degrees toward heaven; for no one can be conducted thither without such self-acknowledgment, and the knowledges of what is true and good. A continuation of this subject may be seen at the end of this chap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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