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설교 원고 및 유튜브 (성찬, 찬양 및 축도 포함)

2023-10-22(D1)-주일예배(2509, 눅13,22-30),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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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22(D1)-주일예배.축도.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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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9yUEsvBj7hE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

 

 

22예수께서 각 성 각 마을로 다니사 가르치시며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더니 23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그들에게 이르시되 24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25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26그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27그가 너희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 하리라 28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29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하리니 30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시더라 (눅13:22-30)

 

 

종교를 가진 세상 모든 민족은 십계명과 비슷한 내용의 계율을 가지고 있으며, 그러므로 종교 때문에 그 계율대로 사는 사람은 구원을 받고, 그대로 살지 않는 사람은 지옥에 떨어진다. 종교 때문에 계율대로 산 사람은 사후에 천사들에 의해 가르침을 받을 때 진리를 받아들이고, 주님을 인정한다. (삶의 교리 65)

 

 

※ 오늘 설교 원본에서는 새 교회, 곧 스베덴보리를 통하신 주님의 계시를 따르는 사람들의 교회인 새 교회가 한국 땅에 세워진 역사를 돌아보고 계시는데요, 필요할 것 같아 그대로 인용합니다.

 

※ 아, 참고로, 스베덴보리를 통하신 주님의 계시를 따르는 교회를 새 교회라 하는 이유는, 다시 오실, 정확히는 말씀의 속뜻으로 오시는 주님의 새로운 교회를 새 교회(The New Church), 새 예루살렘 교회라 하기 때문이며, 이 교회는 태고교회, 고대교회, 유대교회 및 기독교회를 거쳐 인류 다섯 번째 마지막 교회가 될 것입니다.

 

전남 광주 빛고을 새 교회 분들의 얘기에 따르면, 정인보 목사님이 처음 새 교회 진리로 예배를 드린 것은 1958년 광주 YMCA 강당에서부터라고 합니다. 그러다가 2년이 지난 1960년에 지금의 학동에 교회를 세우게 됐는데 그것이 바로 지금의 빛고을 새 교회입니다. 그러면 서울 새 교회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요? 정인보 목사님에게서 새 교회 신학을 배우신 양규대 목사님이 1986년 1월, 자택에서 처음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것이 서울 새 교회의 시작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 후 우여곡절 끝에 지난 2019년 1월 12일, 서울 녹번동에 서울 새 교회 건물을 짓고 헌당 예배를 드렸습니다. 생각해보면 헌당 예배를 드린 2019년은 광주에서 처음 새 교회가 시작된 해로부터 61년째 되는 해이고요, 양규대 목사님이 서울 새 교회를 개척한 해로부터는 33년째 되는 해입니다, 숫자가 의미하는 바가 뭔가 특별해 보입니다. 새 교회에서 6이라는 수는 내적 싸움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든 사람이든 거듭나기 위해서는 자기와의 싸움이 필요한데요, 사람마다 타고난 자아가 있는데 그것이 처음에는 진리를 잘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한국 새 교회의 지난 60년은 교회의 사람들이 새로운 신앙을 받아들이기 위해 자기를 내려놓는 긴 싸움의 기간이었다 생각됩니다.

 

※ 위 양규대 목사님은 지난 2015년 서울 새 교회 담임을 사임, 2016년 12월, 그동안 청주 새 교회 담임으로 섬기시던 이순철 목사님을 청빙,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펼쳐질 날들은 어떤 시간일까요? 단언하건대 사랑 없는 신앙이 사랑의 신앙, 체어리티(charity, 仁愛)의 신앙으로 바뀌는 시간이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진리를 처음 받아들일 때는 그냥 지식으로만 받아들이다가 진리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점점 진리에 대한 사랑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양날의 검과 같아서 사용하기에 따라 사람을 살리는 검이 되기도 하고, 사람을 죽이는 검이 되기도 하지요. 만약 우리의 진리가 지식적인 진리, 사랑 없는 진리에 계속 머물러 있다면 그것은 사람을 죽이는 진리가 될 것이지만, 그러나 진리 안에 사랑이 생기면, 그 진리는 우리 자신을 살리고 이웃을 살리는 그런 진리가 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진리만 있고 선이 없는 자, 또는 신앙은 있는데 체어리티의 삶은 없는 자의 사후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22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22예수께서 각 성 각 마을로 다니사 가르치시며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더니

 

말씀에서 성이나 예루살렘은 교회의 교리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각 성과 마을, 예루살렘으로 다니시며 가르치셨다는 것은 주님은 각 사람이 이해하는 교리, 또는 말씀의 속뜻을 통해 진리를 가르치신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의 속뜻이나 교리를 모르면 말씀 안에 숨어있는 진리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어느 분에게 스베덴보리 신학 서적 한 권을 드리면서 읽어보시기를 권했습니다만 그러나 그분은 대강 훑어보고는 다 아는 내용이라며, 읽어볼 생각이 없어 보이시더군요. 그러면서 사랑을 실천하는 게 중요하지, 진리, 진리 하는 게 뭐 그리 중요하냐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진리를 모르면 이웃을 올바로 사랑하기가 어렵습니다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요, 진리가 없는 사랑은 오히려 상대를 불편하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진리가 내재된 사랑입니다. 그것은 마치 꽃향기가 문득 코끝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과 같은 은은한 사랑입니다. 머리가 아플 정도로 강렬한 향기는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진리는 우리로 하여금 서로 지혜롭게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 줍니다. 그리고 그러한 진리는 말씀의 속뜻인 교리를 통해서만 터득할 수 있는 것이며, 그래서 주님께서는 각 성과 예루살렘을 다니시며 진리를 가르쳐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23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그들에게 이르시되

 

주님이 여행을 하시는 동안, 어떤 사람이 주님께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라고 물었습니다. 영어 성경의 번역은 “주여 구원받을 자가 거의 없지 않습니까”입니다.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와 “구원받을 자가 거의 없지 않습니까”는 뉘앙스가 조금 다릅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일까요? 가끔 자기 자신이나 주변의 사람들을 돌아보며 느끼는 것이, 사람은 참으로 바뀌기가 어렵구나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곧 이어서 “세상 사람 중에 구원받을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하는 비관적인 생각을 하게 되는데요, 바로 그런 순간이 “주여 구원받을 자가 거의 없지 않습니까”라고 주님께 묻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그런 생각을 들으시고, 24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24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주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하십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어떤 걸까요? 아시는 것처럼, 우리 각 사람에게는 적어도 둘 이상의 천사와 지옥의 영들이 함께 있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하시는 것은 그중 지옥의 영은 멀리하고, 천사들의 인도를 따르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천사들을 통해 흘러들어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그 능력으로 매일 같이 순간순간 거듭남의 여정을 걸어가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할 때 도저히 바뀔 것 같지 않던 우리의 성품이나 말투, 의지가 바뀌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천사들의 진리와 선, 곧 주님이 천사들을 통해 우리에게 공급하시는 진리와 선을 받아들이려면 자아의 욕망을 밀어내야 하는데, 그것은 아주 힘든 일입니다. 왜냐하면 자아의 욕망은 마음에서 가깝고, 천사들의 진리와 선은 너무 높은 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사들의 손을 잡는 것, 곧 천사들의 인도를 따르는 것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입니다. 반대로 지옥의 영이 내미는 손을 잡는 것은 그냥 내 평소 욕심대로 하면 되는 일이기 때문에 그 길은 쉽고도 넓은 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원하나 들어가지 못하는 자가 많다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당신과 함께 깨어 기도하기를 원했으나 쏟아지는 잠을 이기지 못하고, 깊이 잠든 제자들에게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말씀하신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안타까운 심정이 고스란히 담긴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그동안 새 교회를 거쳐 갔던 수많은 교우들의 모습이 떠올라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들이 다시 돌아와 이 교회를 가득 메우기를 바랍니다. 25절에서 주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5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누구나 마음속에 있는 천국의 문, 또는 지옥의 문을 자유롭게 열거나 닫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후에는 그럴 수 없습니다. 세상에 살 때 굳게 닫힌 문은 사후 영계에 가면 다시는 열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집주인이 문을 닫은 후, 밖에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는데도 문이 열리지 않았다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주님이 열어 주시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살 때 그들이 스스로 천국의 문을 닫아 버린, 그것도 영원히 닫아 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세상에서 닫힌 문은 사후에는 영원히 열리지 않습니다. 반대로 세상에서 열린 문은 사후에도 영원히 열려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 되자 문을 두드리던 자들이 다음과 같은 하소연을 합니다.

 

26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말씀에서 “주 앞에서”라고 할 때 “”는 말씀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말씀 자체이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또 먹고 마신다 했는데, 먹는 것은 이웃에게 선을 가르치는 것이고요, 마시는 건 진리를 가르치는 걸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 앞에서 먹고 마셨다는 건 말씀의 지식을 가지고 이웃에게 선과 진리를 가르쳤다는 뜻입니다. 또 주가 길거리에서 우리를 가르치셨다 했는데, 이 말은 그들이 말씀을 통해 진리를 배웠다는 뜻입니다. 길거리(street)는 진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사후 영계에서 천국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 중에는 세상 살 때 주님을 믿었던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당연히 천국에 들어간다 생각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행악하는 자라 하십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세상에 살 때 입으로만 주님을 믿는다 하고, 실제로는 주님을 믿지도, 사랑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들이 주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부부끼리 말로는 서로 사랑한다 하면서 남편은 아내의 말을, 아내는 남편의 말을 전혀 귀담아듣지 않는다면 그들이 진정으로 서로를 신뢰하고 사랑하는 사이일까요? 주님과 우리하고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말로만 주님을 믿는다 하고, 실제로는 주님 말씀대로 살지 않는 사람은 주님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27그가 너희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 하리라

 

그래서 주님은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천국에 데려다 놔도 그곳에서 살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도박꾼, 마약을 하는 사람, 난봉꾼, 사기꾼, 강도 이런 사람들을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순진한 사람들과 천국에서 함께 살라 하면 살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서로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천국과 지옥을 구별해 놓으신 것은 지옥에 속한 사람들을 벌주시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세상 살 때의 애정대로 영원히 살도록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입으로만 주님을 믿는다고 하고 행하지는 않는 사람들이 기꺼이 진리를 배우고 이웃에게 가르치는 것을 즐긴다면 그것은 주님과 이웃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단지 세상의 명예와 재물을 사랑해서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에게 나를 떠나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28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8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여기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누굴까요? 그들은 세상에 살 때, 인애, 체어리티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그들이 사후에 하나님의 나라에 있다 하십니다. 반면, 믿음만의 구원을 주장하면서, 그러나 체어리티를 실천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천국 밖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간다 했습니다. 슬피 우는 것은 그들의 악을 뜻하고요, 이를 간다는 것은 그들의 거짓을 뜻합니다.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들이 거짓말을 하며 서로 다툴 때, 천국 밖에서 그 소리를 들으면 마치 이를 가는 소리처럼 들린다고 합니다. 이는 우리 몸의 가장 바깥에 있습니다. 잇몸보다도 밖에 있으니까요. 그래서 영적으로 볼 때는 가장 낮은 차원의 진리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를 간다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 세상 논리로 진리를 비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에서 주님을 믿었고, 그러므로 마땅히 천국에 들어간다 믿었던 사람들이 사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때, 그들은 그렇게 울며 이를 간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의 악과 거짓으로부터 나오는 소리입니다.

 

주님께서 끝으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29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하리니 30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시더라

 

동쪽과 서쪽, 남쪽, 북쪽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한다고 합니다. 동쪽과 서쪽, 남쪽과 북쪽은 각각 빛의 상태, 즉 진리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빛이 가장 밝기로는 동쪽과 남쪽이겠지요. 그에 비해 서쪽은 희미한 빛이 있는 곳이고요, 북쪽은 빛이 아주 없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동쪽과 남쪽, 서쪽에서 오는 사람들은 교회에 속한 사람들을 나타내고, 북쪽에서 오는 사람은 교회의 진리에 대해 무지한 교회 밖의 이방인들이지만, 그러나 마음속에 체어리티가 있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주님께서는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가 있다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왜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가 있다 하셨을까요? 천국을 향해 가는 길은 무슨 경주를 하듯 등수가 매겨지는 일이기 때문일까요? 그런 게 아니고요,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는 비록 교회 밖 이방인이었어도 체어리티의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들은 사후, 천사들로부터 천국의 교리를 배울 때, 무슨 거부감 없이 바로 받아들인다고 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그들의 마음속에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인 체어리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는 자는 누굴까요? 이들은 교회 안에 있었던 사람들인데 다만 믿기만 하고, 체어리티의 삶을 살지는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은 나중에 천국에 못 들어갑니다. 왜냐하면 겉으로만 주님을 사랑하는 것처럼 하고, 속으로는 전혀 주님을 사랑하지 않았던, 그래서 결국은 위선의 삶을 산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체어리티가 없는, 그저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사후에 어떻게 되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말씀에는 그들이 사후에 천국 문밖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간다 했습니다. 말씀의 다른 곳에서는 그들을 등의 기름을 미리 준비하지 못한 어리석은 처녀들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그들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는 말로만 주님을 사랑한다 하고, 실제로는 전혀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천국으로 가는 삶, 즉 체어리티의 삶이란 그렇게나 힘든 일일까요? “천국과 지옥” 528번 글은, 천국으로 가는 삶은 생각만큼 그렇게 어렵지 않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도 정직하고 의로운 삶을 살아야 남으로부터 인정을 받기 때문인데, 다만 차이가 있다면 세상 사람들은 세상 재물이나 지위에 목표를 두고, 천국을 지향하는 사람은 주님과 이웃 사랑에 목표를 둘 뿐입니다. 그러므로 목표만 조금 바꾸면 주님이 원하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됩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의 내면에서 천국문은 열리고, 지옥문은 닫힙니다. 천국으로 가는 여행은 그렇게 시작이 됩니다.

 

일단 거듭나는 길에 들어서면 그동안의 잘못된 행동 양식들이 바뀌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렇게 빠르게 바뀌지는 않습니다. 아주 천천히 바뀝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조바심을 내는 분들이 있습니다. 왜 이렇게 나는 바뀌지가 않지?, 왜 이렇게 나는 실수를 많이 하고 지혜롭지 못할까? 이런 생각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비록 느리더라도 지금 현재 천국으로 가고 있다는 확신이 든다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구원은 등수를 매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느리게 가더라도 천국으로 가고 있다는 확신이 있다면, 그 상태에서 주님께 무한한 감사와 영광을 돌려야 하고, 한편으로는 자기 자신을 향해 지지를 보내야 할 것입니다.

 

※ 저 역시 여전히 잘 안 고쳐지는, 매일 밤 결심하지만, 다음 날이면 또 되풀이하고 마는 악습들이 있습니다. 가령 유튜브를 비롯, 너무 세상 뉴스에 귀를 쫑긋 세우는 바람에 많은 시간을 허비하는 그런 모습입니다. 특히나 더 이런 거에 제 마음이 힘든 이유는, 저는 좀 어서 영감이 계발되어 영안이 열렸으면 좋겠는데, 제가 계속 이 세상을 뚫어지라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영적, 천적인 것에 관해서는 희미해져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 저는 하루 5 미리 움직인 거에도 감사합니다. 비록 달팽이처럼 정말 느리고 답답하게 하루 5 미리를 움직이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날마다 계속 노력하고 또 노력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주님이 동행하시며, 천사들을 통해 저를 거들어 주시며, 격려하시는 걸 확실히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천국이 아니라 지옥을 향할 때도 있습니다. 만약 그렇게 느껴질 때는 주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고백하고, 겸손하게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주님의 손을 붙잡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가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천국을 바라보는 삶은 세상 것들을 모두 버리고, 오로지 묵상과 기도에 힘쓰는 삶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과 담쌓고 주님만 바라보고 사는 삶이 아니라 세상일과 의무를 다하고, 그렇게 해서 세상을 천국으로 만드는 일에 기여하는 삶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 그래서 저는 저희 사모와 우리 두 아들이 오히려 더 큰 상 받을 줄 믿습니다. 세 사람의 삶 가운데는 실천과 기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천국을 지향하는 삶이며, 쓰임 받는 삶입니다. 우리가 그러한 삶을 살 때, 주님께서는 수시로 세상의 기쁨을 허용하십니다. 세상 사는 동안에는 세상의 기쁨과 즐거움을 통해 천국을 지향하는 삶의 에너지를 얻을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을 지향하는 삶은 세상을 버리는 삶이 아니라 세상을 직면하는 삶이며, 그것을 통해 세상을 천국으로 바꾸는데 기여하는 삶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세상에서 주님의 나라를 준비하는 삶은 생각보다 그렇게 힘든 삶이 아닙니다. 만약 우리 자신의 모습이 5년 전 또는 10년 전의 모습에 비해 긍정적으로 변했다면 먼저 주님께 감사하고, 스스로를 격려, 칭찬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 남은 한 해에 더욱 힘을 내어 분발하시길 바랍니다. 주님의 은혜가 신앙에서 체어리티를 분리하지 않기 위해 애쓰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13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마7:13-14)

 

아멘

 

원본

2021-01-01(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10-22(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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