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에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들어가신 주님
1안식일에 예수께서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떡 잡수시러 들어가시니 그들이 엿보고 있더라 2주의 앞에 수종병 든 한 사람이 있는지라 3예수께서 대답하여 율법교사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 4그들이 잠잠하거늘 예수께서 그 사람을 데려다가 고쳐 보내시고 5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 하시니 6그들이 이에 대하여 대답하지 못하니라 (눅14:1-6)
주님이 세상에 오심으로 해서 주님에 대한 표상(表象)이 끝났을 때, 안식일은 신성한 것을 가르치는 날이 되었고, 그러므로 일에서 벗어나 휴식하는 날, 구원과 영생에 대해 묵상하는 날,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날이 되었다. (참된 기독교 301)
오늘부터 누가복음 14장을 들어갑니다. 원래 11월 첫 주인 지난주부터였는데 지난주는 저의 장인, 장모 이장(移葬) 날짜가 갑자기 주일로 앞당겨 잡히는 바람에 주일예배를 이장 예배로 대신 드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장 예배는 개장(開葬), 화장(火葬) 및 납골(納骨), 이렇게 세 번의 예배로 드렸는데, 모두 교회 유튜브와 블로그에 올렸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COVID-19이 지속되던 시절, 코로나가 가져온 많은 변화 중 가장 두드러졌던 한 가지는 바로 많은 일들이 비대면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었는데요, 물건을 구입할 때도 인터넷으로, 사람들끼리의 모임도 인터넷 공간에서 말이지요. 심지어 예배도 각자의 집에서 인터넷으로 드리는 것이 자연스럽게 되었었지요. 세월이 그렇다 보니 이제 본격적으로 비대면의 시대가 오는 것이 아니냐 하고 우려하는 분들이 많이 계셨습니다. 새 교회에서는 가장 작은 천국이나 교회는 개인의 마음속에 있다 가르치는데요, 그렇다면 꼭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려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으시죠? 그러나 ‘천국의 비밀’ 3147번 글의 10번 항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외적 예배 의식에 묶어두시는 이유는 그 의식이 표상하는 내적인 것들을 통해 주님과의 교류가 끊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예배 의식이 표상하는 내적인 것들을 통해 주님과의 교류가 끊어지지 않는다고 하는데요, 그렇다면 이 내적인 것들을 표상하는 예배 의식들로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예를 들면, 주님 친히 침례 요한에게 받으셨던 침례 의식이라든가, 십자가의 마지막 시험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손수 포도주를 따라 주시고, 떡을 떼어주시면서 이 일을 오랫동안 기억하라 하신 성찬 의식 같은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외적 예배를 통해 주님과의 교류가 계속 끊어지지 않고 이어질 수 있다 하십니다. 주님은 또 마태복음 18장 20절에서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다’ 하셨는데요, 여기서 ‘두세 사람’은 사람의 숫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선과 진리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그리고 ‘내 이름으로 모인 곳’이란 사랑과 신앙으로 예배드리는 곳, 즉 교회를 뜻합니다.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끼리 정기적으로 만나 예배를 드릴 때, 영적으로 더 많은 성장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 안의 사람들을 통해 나타나는 다양한 선과 진리를 통해 서로 배우는 것이 많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주님은 밤에는 감람산에서 기도하시고, 아침이 되면 직접 사람들을 만나 말씀을 전하시고 병자들을 고치셨던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주님은 안식일에 어떤 바리새인의 집으로 가셔서 그곳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시고 병자를 고치십니다. 본문 1절에서는 그것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1안식일에 예수께서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떡 잡수시러 들어가시니 그들이 엿보고 있더라
주님께서 안식일에 어떤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을 방문하셨다고 합니다. 바리새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주님께서는 자주 바리새인들을 가리켜 외식(外飾)하는 자들이라 하셨는데요, 외식하는 자들은 겉으로는 경건하게 행동하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거짓을 말하고, 진리를 혐오하는 사람들입니다. 한마디로, 외식하는 자는 위선자입니다. 위선에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진리를 모르는 교회 밖의 사람들의 위선이 있고, 교회 안의 사람들의 위선이 있습니다. 주님 당시 바리새인이나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위선은 교회 안의 사람들의 위선입니다. 그들은 말씀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자랑하지만, 그러나 속으로는 그와는 정반대되는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교회 밖의 사람이라고 해서, 그리고 오늘날 기독교인들이라고 해서 다 위선자라는 말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중 많은 분이 진실한 삶, 말씀을 실천하는 삶을 살고 계십니다. 여기서는 그러나 그 가운데 그렇지 못한 분들, 위선의 삶을 살고 계시는 분들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새 교회인들의 위선도 있습니다. 입으로는 말씀의 내적 의미를 말하면서 정작 행하지는 않는 경우입니다. 어쩌면 본문에서 말하는 바리새인의 지도자는 바로 그런 새 교회인들을 나타내는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가장 높은 차원의 진리를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다면 위선 중에서도 아주 큰 위선이기 때문입니다.
이 새 교회 사람들의 위선 얘기가 나왔으니 잠시 제 얘기를 드리고 싶습니다. 며칠 전 밤, 아내의 부탁으로 음식물 쓰레기를 한 봉지 버리러 날이 꽤 춥지만 내려갔습니다. 우리 208동은 가장 산 쪽이라 특히나 더 바람이 불고 춥습니다. 음식물 쓰레기통을 여는데 세상에! 그 안에 커다랗고 하얀 비닐봉지가 들어있는 것입니다. 별생각 없이 꺼내는데 잘 들리질 않아요. 봤더니 아이고, 그 안에 종류별로 담아 묶은 작은 여러 봉지가 예닐곱 개 정도 들어있어 무거워서 그랬던 거지요.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툭 던져버리고 가면 어쩌라고... 어찌어찌 쏟아 큰 비닐은 꺼내 저쪽 비닐들만 넣는 통에 넣을 수 있었는데, 이 쏟아진 작은 비닐들은... 아... 어찌해야 하나, 이미 음식물에서 흘러나온 액체들로 뒤범벅이 되어 하나하나 뒤적이며 그 짜맨 걸 풀어 비닐들만 따로 버리기가 쉽지 않더군요. 옷도 가볍게 입고 나와 벌써 굉장히 춥기도 하고 말이지요... 그러다가 에이, 뭐 나중에 저쪽 검사 과정에서 걸러지겠지 하고는 내가 들고 간 것만 한쪽에 쏟아버리고는 돌아서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마음이 그렇게 찝찝합니다. ‘그래도 너는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니냐...’ 하는 양심의 소리! 그래도 애써 무시하고 그냥 들어와 버렸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이런 양심의 소리에 귀를 막음, 이런 게 한두 번 반복되다가 그만 딱딱해지고 익숙해질 텐데... 큰일났습니다. 아무도 안 보는 데서 제 일상이 이렇게 큰 구멍이 쑹쑹 나고 있어서인지 제 삶에 능력이 사라지는 걸 느낍니다. 저는 이렇게 비겁한 사람입니다. 말씀의 속뜻이니 아르카나니 하고 있지만, 실제 상황에서는 저는 이렇게 말씀의 속뜻을 모르는 사람들, 아니 교회 밖의 사람들보다도 더 비겁하고 추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의 집으로 들어가셨다고 합니다. 집은 사람의 마음을 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리새인의 집으로 들어가셨다는 것은 주님이 위선자의 마음속으로 오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떡을 잡수신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위선자에게 선한 애정을 심어주시고, 그 애정을 통해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할 수 있도록 만드시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이 주님이 위선자와 함께 떡을 드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에서 떡은 선, 또는 선한 애정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위선자는 겉과는 달리 속으로는 진리를 거부하는 사람을 말하는데요, 그럼에도 주님께서 바리새인의 집으로 들어가실 수 있었던 것은 그 사람이 본질적으로 진리를 거부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어쩌면 그는 자기가 위선자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그러므로 주님의 능력으로 위선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그의 집으로 들어가실 수가 있었고, 그와 함께 떡을 드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습을 사람들이 주시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주님을 주시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위선자의 내면에서 주님이 일하시는 것을 바라보는 시선들입니다. 우리도 가끔 그런 경험을 합니다. 시험에서 넘어져 주님, 인간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저를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라고 고백하는데 문득 주님의 손길이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어떻게 나의 문제들을 해결해 주시는지 지켜 보자.’라는 마음이 듭니다. 본문에서 주님이 일하시는 모습을 엿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2주의 앞에 수종병 든 한 사람이 있는지라
그런데 그때 주님 앞에 수종(水腫)병 걸린 어떤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수종병은 혈액에 문제가 생겨서 몸이 붓는 질병입니다. 속뜻으로는 말씀의 진리를 왜곡하는 질병입니다. 그러니까 바리새인의 집에서 수종병 든 사람이 나타났다는 것은 위선자에게 진리를 왜곡하는 버릇이 있었음을 뜻합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언제 진리를 왜곡할까요? 진리를 이용해 거짓된 생각을 관철하려고 할 때이거나, 또는 자아로부터 오는 악한 욕망을 정당화하려고 할 때입니다. 예를 들면, 대면 예배보다 비대면 예배를 지지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앞에서 말씀드린 성도들끼리의 만남이나 예배 의식으로 표상되는 내적인 것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고, 오히려 말씀의 다른 구절들을 왜곡, 그것으로 자신의 생각을 증명해 보이려고 합니다. 그것이 자아의 욕망을 정당화하기 위해 진리를 왜곡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참된 진리 안에 들어오기 전에 가지고 있었던 그릇된 지식이나 신념들을 버리지 못하고 계속 붙잡고 있는 경우입니다. 그럴 경우, 그 지식이나 신념에 맞지 않는 진리는 버리고 맞는 것만 받아들이며, 그렇게 해서 결과적으로 진리를 왜곡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새 술은 반드시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전에 가지고 있던 낡은 지식을 가지고는 새로운 진리를 담아낼 수 없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리를 왜곡하는 병과 바리새인의 위선은 서로 어떤 관련이 있을까요? 진리를 왜곡하는 것은 결국 진리 앞에 완전히 굴복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진리 앞에 굴복하지 않으면 시험에서 이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계속 넘어집니다. 그러다 보면 입으로는 진리를 말하면서 행동은 마치 진리를 모르는 사람처럼 행동하고 결국 위선자가 됩니다.
주님께서 병자를 고치시기 전에 율법교사와 바리새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3예수께서 대답하여 율법교사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
여기서 율법교사와 바리새인들은 누굴까요? 그들 역시 위선자의 마음속에 있는 것들인데, 이를테면 스스로 진리를 많이 안다 자부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면 주님은 왜 그들에게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물으셨을까요? 그 이유는 안식일에 대한 그들의 생각에 따라 진리 앞에 굴복하는지, 굴복하지 않는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 것이 합당합니다”라고 하면, 그는 그동안의 생각을 버리고 진리 앞에 굴복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합당치 않습니다”라고 하면 그것은 진리 앞에 굴복하지 않는 것이며, 만약 그렇다면 주님은 그의 병을 고쳐 주실 수 없습니다. 그가 진리이신 주님을 믿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병을 고쳐 주시기 전에,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 물으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믿었던 이유는, 십계명에 6일 동안은 힘써 일하되 7일째 안식일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6일 동안은 일하고 7일째 안식일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6일 동안 일하는 것은 거듭나기 전의 내적 싸움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7일째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은 거듭난 다음의 상태, 즉 내적 싸움이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거듭나기 전에는 누구나 내적 싸움을 합니다. 그 이유는 그때에는 말로는 주님을 의지한다 하면서 사실은 자기가 가진 것들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이란 신앙의 진리라든가 선한 애정 같은 것입니다. 신앙의 진리와 선은 모두 주님이 주신 것이지만, 그럼에도 거듭나기 전 사람들은 자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인간의 내면으로 들어올 때, 마치 빛이 매질을 통과할 때 굴절되는 것처럼 굴절되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거듭나기 전 선과 진리는 순수하지 않다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주님의 것이라 생각하지 않고, 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진리와 선이 순수하지 않으면 그 능력도 완전하지 않습니다. 지옥의 영들이 아직 거듭나기 전인 사람을 공격할 수 있는 것도 그런 까닭입니다. 그들의 순수하지 않은 진리와 선으로는 지옥을 압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거듭난 다음에는 사정이 전혀 다릅니다. 거듭난 사람들은 전적으로 주님을 믿고 따르기 때문에 싸움이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앞에서 인도하시는 주님을 지옥이 감히 대항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듭난 다음에는 싸움이 없고 항상 평화롭습니다.
4그들이 잠잠하거늘 예수께서 그 사람을 데려다가 고쳐 보내시고
주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과연 합당하냐 물으시자 본문에는 그들이 아주 잠잠했다고 말합니다. 잠잠하다는 것은 한글 성경 번역이고요, 영어 성경에는 그들이 계속해서 평화의 상태에 있었다고 말합니다. 평화는 속뜻으로는 순진함(이노센스, innocence)에서 오는 기쁨을 뜻합니다. 그러면 순진함은 뭘까요? 어린아이와 같이 전적으로 주님을 믿고 따르는 마음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잠잠했다는 것은 그 위선자가 자신의 생각을 모두 내려놓고 주님만을 믿고 따르기로 마음을 먹었다는 뜻입니다. 신앙인들이 순진하게 주님을 믿고 따를 때 마음의 평화가 있습니다. 마침내 주님께서 수종병 든 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5절에서 주님께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5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 하시니
이 말씀을 영어 성경의 번역으로 옮기면 ‘너희 중에 누가 나귀나 소가 구덩이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끌어내지 않겠느냐’입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아들이라 하지 않고 나귀라고 했고요, 우물이라 하지 않고 구덩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말씀에서 나귀는 겉 사람의 진리를 뜻하고, 소는 겉 사람의 선을 뜻합니다. 겉 사람의 진리는 신앙인들이 일상에서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겉 사람의 선은 그러한 말과 행동의 바탕에 깔려 있는 선한 애정입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나귀와 소가 구덩이에 빠졌다 했습니다. 구덩이에 빠지는 것은 진리와 선이 왜곡되거나 더럽혀지는 것을 말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신앙인들이 자아의 욕망에 빠져있을 때는 진리를 왜곡하기도 하고, 진리에 반하는 행위를 함으로써 진리를 더럽히기도 합니다. 그것이 자기의 나귀와 소를 구덩이에 빠뜨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귀와 소를 구덩이에서 끌어내는 것은 왜곡되거나 더럽혀진 진리와 선을 주님께서 회복시키시는 것을 의미하며, 그 일을 안식일에 하시는 것은 안식일은 완전한 진리와 선을 통해 주님과 인간이 하나가 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태복음 12장 8절에서 주님은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성한 진리를 통해서만 인간은 주님과 하나가 될 수 있으며 완전히 거듭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인자는 신성한 진리를 뜻하고, 안식일은 주님과 인간이 하나 되는 상태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새 교회 교인들은 모두 주님의 진리를 통해서만 구원을 받는다 믿습니다. 그러나 머리로는 그렇게 믿으면서 실제로는 자신의 생각을 믿을 때가 많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우월감을 가지기도 하고, 자아와 세상의 유혹들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신앙인들이 시험에서 넘어지는 것은 바로 그러한 생각들 때문입니다. 시험에서 그렇게 자주 넘어지고 실패가 반복될 때, 그는 점점 위선자가 됩니다. 입으로는 진리를 말하면서 속으로는 거짓말을 하고 악을 행하게 되는 것이지요. 주님께서 안식일에 찾아가신 바리새인의 지도자는 어쩌면 시험을 극복하지 못하고 열등감과 우월감 사이를 왕래하는 위선적인 새 교회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새 교회인들은 누구보다 높은 차원의 진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행동으로 옮기는 데는 여러모로 서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바리새인의 위선이 영적인 수종병에서 온다 진단을 하시고 그의 병을 고쳐 주시려고 합니다. 영적 수종병이란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좋을 대로 진리를 왜곡하는 병입니다. 어떤 것은 받아들이고, 어떤 것은 밀어내며, 또 어떤 것은 자신의 생각대로 고치면서 그렇게 진리를 받아들이는 병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자아와 세상에 속한 욕망들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불순한 욕망들을 버리고 마음의 병을 고칠 수 있을까요? 안식일의 주인인 나를 믿느냐 하고 주님께서 물으실 때 “네, 주님만이 안식일의 주인이십니다”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우리의 고백에 진정성이 담길 때, 주님은 우리의 영적 수종병을 고쳐 주시고요, 나아가서 위선의 병으로부터 우리를 구해 주십니다. 늘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시면서 나는 어느 때 주님을 믿지 않는지, 어느 때 주님 앞에 꼿꼿이 머리를 드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자신의 병을 아는 것이 치유의 시작입니다. 수종병과 위선을 치유하시는 주님의 은혜가 새 교회의 모든 성도와 또한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이웃과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또 내가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알게 하려고 내 안식일을 주어 그들과 나 사이에 표징을 삼았노라 (겔20:12)
아멘
원본
2021-02-07(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11-12(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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