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od) 없는 진리, 체어리티(charity) 없는 신앙

 

 

24또 그들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25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그들을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26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27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28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29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30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31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32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33그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 34이르시되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 (눅22:24-34)

 

 

다음은 마가복음 10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35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36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37여짜오되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38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39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내가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40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41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화를 내거늘 (막10:35-41)

 

※ 다음은 새 교회 이순철 목사님의 에피소드입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얼마 전 미국 제너럴 처치 목회자 회의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났습니다. 회의 도중에 제너럴 처치의 어떤 직책을 맡을 사람을 뽑았는데, 투표 결과 아시아에서는 일본 목사님이 선출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자리에 대한 욕심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서운하다고 할까 그런 생각이 잠깐 들었습니다. 한국 목회자들도 여럿 있는데 왜 일본 목회자인가 하는 생각이었겠지요. 오늘 말씀을 읽으면서 그때 그런 생각도 어쩌면 야고보와 요한 형제에게 다른 제자들이 화를 내는 심리 같은 것이었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주님의 제자들끼리 서로 다투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것을 24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24또 그들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과 늘 함께 다니며 주님에게서 천국에 대한 말씀을 수도 없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세상 사람들처럼 서로 누가 더 크냐 하며 동료들과 다툽니다. 그들이 그러는 이유에 대해 ‘천국의 비밀’ 3417번 글 3번 항은

 

기억의 지식 안에만 있고, 인애(charity)의 삶 안에 있지 않은 사람은 남보다 우월함에서 오는 기쁨만 알고, 겸손과 섬김의 애정에서 비롯한 천국의 기쁨은 전혀 모른다. (이순철 역) Thus they who are in the memory-knowledge of knowledges, and not in the life of charity, cannot know that there is any other delight than that which results from preeminence; and because this is the only delight that is seated in their minds, and makes all their life, therefore they are utterly ignorant of the heavenly delight that results from humiliation and the affection of serving others—that is, the delight of love to the Lord and of charity toward the neighbor—consequently of the blessedness and happiness thence derived. (AC.3417.3)

 

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제자들이 남보다 높아지려 하고, 지배하기를 좋아하는 것은 진리를 알기만 하고, 행하지는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사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새 교회 진리가 너무 좋고, 참으로 구원의 진리라는 걸 확신하지만, 정작 실천하지는 못할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제자들이 다투는 모습을 보시고, 주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25절에서 27절까지 말씀입니다.

 

25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그들을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26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27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주님께서 이르시길, ‘이방인의 임금들은 그들을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라 하십니다. 말씀에서 이방인은 교회 밖 사람을 뜻합니다. 그리고 임금과 집권자는 본래는 선이 있는 진리를 뜻하는데, 여기서는 이방인의 임금과 집권자라고 했기 때문에 선 없는 진리, 또는 체어리티(charity) 없는 신앙을 뜻합니다. 그러면 은인은 누굴까요? 은인은 주님이 주시는 선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신앙인들에게 은혜가 되는 것은 진리를 많이 아는 게 아니라 실천하는 것인데, 이때 진리 실천의 힘이 진리 안에 있는 선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에서 은인은 선을 뜻합니다. 이런 의미들을 종합해 볼 때, ‘이방인의 임금들은 그들을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라는 말씀은, 교회 밖 사람들은 선 없는 진리, 체어리티 없는 신앙을 마치 구원의 진리이며 신앙인 것처럼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그런 이유로 해서 이방인들 사이에서는 행하는 것보다는 진리를 많이 아는 사람이 높임을 받는 경향이 두드러짐을 봅니다.

 

주님께서는 이방인들은 그렇더라도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하십니다. 주님께서 너희라고 부른 제자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선 있는 진리, 즉 선을 동반한 진리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진리를 알기만 하는 게 아니라 행하면서 가르치기까지 하는 사람들이 주님의 제자들인 것입니다. 따라서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라 하신 것은 주님의 제자들은 이방인들과는 다르다는 겁니다. 어떻게 다를까요? 그것에 대해 주님은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고 하십니다. 큰 자와 다스리는 자는 선 있는 진리, 선을 동반한 진리 안에 있는 사람을 뜻하고, 젊은 자와 같다, 섬기는 자와 같다는 것은 자신을 낮춰 이웃을 섬긴다는 뜻입니다. 선 있는 진리를 소유한 사람은 교회 밖 사람처럼 스스로 높아지려 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낮추고 이웃을 섬기려고 노력합니다. 선 있는 진리가 그렇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선 있는 진리 그 자체인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주님의 제자들은 매우 세속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이 언젠가 자기들을 모든 나라 사람 위에 높이 세우시고, 그 사람들을 다스리게 하실 거라고 믿었습니다. 유대인들 대다수가 메시아에 대해 그런 환상을 가졌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신앙이 비록 속되지만, 그러나 꺾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8, 9절입니다.

 

28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29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주님께서 당신과 함께 시험을 견딘 사람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맡기겠다고 하십니다. 사실 주님이 시험을 받으시는 동안 제자들이 한 일은 없습니다. 주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지옥과 싸우셨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제자들을 가리켜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이라 하신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얻으려는 사람은 누구나 시험을 당하는데, 그때 혼자서는 싸울 수 없고, 항상 주님과 함께 싸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시험에서 싸워 이길 때, 각 사람 안에 교회가 세워집니다. 그리고 사후에는 그 교회의 모습과 똑같은 천국의 사회로 들어갑니다. 그러므로 시험에서 이긴 사람들에게 맡겨질 하나님의 나라는 지위나 권세가 아닙니다. 거듭나는 사람 안에 세워지는 교회와 사후에 들어갈 천국을 뜻합니다. 제자들은 이 말씀을 그냥 문자적으로만 이해하고 기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이 이 말씀을 하신 까닭은, 말씀의 문자적 의미는 내적 진리로 들어가는 문과 같으며, 그러므로 언젠가 제자들이 이를 통해 내적 진리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장차 시험을 받게 될 제자 시몬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31, 2절 말씀입니다.

 

31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32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시몬은 주님의 제자 베드로를 뜻하는데, 속뜻으로는 선이 있는 진리, 또는 체어리티 있는 신앙 안에 있는 사람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시몬아! 라고 부르시는 것은 선이 있는 진리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한다는 것은 시험을 뜻합니다. 신앙인들에게 시험은 마치 농부가 키로 곡식을 까불어 알곡과 쭉정이를 가려내는 일과 같습니다. 시험을 통해 마음속에서 거짓이 제거되고 진리가 남으며, 악이 제거되고 사랑과 체어리티가 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제자들에게는 시험이 꼭 필요합니다. 그러나 시험이 너무 깊으면 신앙을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동안 새 교회에 나와 세례까지 받았던 분들이 여럿 계신데, 그중 일부는 시험을 이기지 못하시고 그만 교회를 떠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라 하십니다. 주님과 함께 혹독한 시험에서 이긴 제자들은 선 없는 진리에서 선 있는 진리로, 체어리티 없는 신앙에서 체어리티 있는 신앙으로 완전히 돌아서게 됩니다. 새 교회 교리에서는 이것을 신앙의 진리 상태에서 신앙의 선 상태로 옮겨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신앙의 진리 상태는 진리를 믿기는 하는데 아직 실천하지는 못하는 상태이고, 신앙의 선 상태는 진리가 이끄는 대로 선을 행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돌이킨 후에’는 신앙의 진리 상태에서 신앙의 선 상태로 완전히 올라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네 형제를 굳게 하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일단 신앙의 선 상태가 되면 다시는 신앙의 진리 상태로 돌아가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뜻입니다. ‘형제’는 거듭나는 사람들이 소유하는 신앙의 선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33그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베드로는 사랑이 있는 신앙을 뜻합니다. 모든 교회가 처음에는 그렇게 순수하고 뜨거운 신앙으로 출발합니다. 그리고 그때 교회에 속한 사람들은 주님을 위해서라면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베드로가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 라고 말한 것은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의 이 각오는 교회가 처음 시작될 때, 신앙인들의 처음 사랑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뜨겁던 사랑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식어가고 나중에는 신앙만 남게 됩니다. 교회의 마지막 때 사람들의 신앙을 34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34이르시되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

 

닭 울기 전은 새벽을 뜻합니다. 영적 의미로 새벽은 기존 교회의 마지막 때이며, 동시에 주님이 오셔서 새 교회를 세우시는 때입니다. 베드로가 세 번 주님을 부인 한다는 것은 기존 교회에 주님에 대한 신앙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은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교회의 마지막 때의 신앙을 뜻하고, 세 번 부인한다는 것은 주님을 완전히 부인하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신앙 안에 사랑이 없으면, 삶이 없으면 신앙 없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신앙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 부인할 것이라는 예언은 가깝게는 유대교회의 몰락을, 멀게는 유대교회 이후에 세워질 교회의 몰락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다음은 새 교회의 에피소드입니다. 비록 새 교회에 있었던 일이지만, 내용이 유익하여 그대로 인용합니다.

 

지난 주일 예배가 끝난 후, 어떤 분이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주님이 십자가 마지막 시험을 이기고 부활하셨을 때 완전한 진리가 되셨다고 했는데, 그럼 왜 1,700년이 훨씬 지난 후에야 새 교회가 세워지고, 완전한 진리인 새 교회의 교리가 선포되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다른 분들도 비슷한 의문을 가질 것 같아 답변을 드립니다. 주님이 부활하셨을 때, 완전하고 신성한 진리가 되신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증언에 따르면, 주님께서 이른바 보혜사 성령이라고 하는 완전한 진리를 보내주시기 전, 영계에서 먼저 이루실 일이 있었습니다. 그 일은 마지막 심판을 통해 영계의 질서를 회복하는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오시기 전에는 지옥의 세력이 너무 커져서 천국을 압도했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하늘에 오르셔서 지옥을 이기신 완전한 진리로 마지막 심판을 단행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천국과 지옥을 그 신성하고 완전한 진리의 질서 아래 복종시키셨습니다. 주님이 영계의 질서를 회복했다는 것은 그런 뜻입니다. 천국이 지옥의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남으로써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해 지상으로 흘러들어오는 진리 또한 완전하고 신성한 진리가 되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일이 일어난 때를 지상의 시간으로 1770년 6월 19일이라고 증언합니다.

 

※ 아래는 위 내용에 대한 원문입니다. 참고하세요.

 

After this work was finished the Lord called together his twelve disciples who followed him in the world; and the next day he sent them all forth throughout the whole spiritual world to preach the gospel that the Lord God Jesus Christ reigns, whose kingdom shall be for ages and ages, according to the prediction in Daniel (7:13, 14), and in Revelation (11:15).

 

Also that blessed are those that come to the marriage supper of the lamb (Rev. 19:9).

 

This took place on the nineteenth day of June, 1770. This is what is meant by these words of the Lord:

 

He shall send his angels and they shall gather together his elect, from the end of the heavens to the end thereof (Matt. 24:31). (TCR.791)

 

그런 이유로 해서 주님은 부활하신 후 처음 만난 마리아에게,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요20:17) 말씀하셨습니다. 인류에게 완전한 진리를 주시기 위해서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았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에서 마리아는 진리에 대한 애정을 뜻하고, 주님과 마리아가 접촉하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신성하고 완전한 진리가 흘러들어오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인간에게 왜 완전한 진리가 필요한가를 알았고, 또 완전한 진리란 신성한 인간(The Divine Human)이신 주님에게서 나오는, 선 있는 진리, 선을 수반, 동반한 진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선 없는 진리, 체어리티 없는 신앙으로는 아무리 오래 신앙생활을 해도 거듭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제자들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세상에 오셔서 지옥과 싸우셨고, 그러는 동안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으셨습니다. 완전한 능력의 진리를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새 교회의 진리가 바로 그 완전한 능력의 진리입니다. 이 진리를 붙잡고 당면한 문제들과 싸워 나간다면 아무리 어려운 일도 반드시 극복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함께 하시길 기도합니다.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눅22:32)

 

아멘

 

이순철 목사

2022-11-13(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09-22(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4-09-22(D1)-주일예배(2562, 눅22,24-34), ‘선(Good) 없는 진리, 체어리티(charity) 없는 신앙’.pdf
0.40MB
축도.2024-09-22(D1)-주일예배(2562, 눅22,24-34), ‘선(Good) 없는 진리, 체어리티(charity) 없는 신앙’.pdf
0.22MB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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