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평하게 하는 자,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

 

 

9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0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11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마5:9-12)

 

 

진리의 확신이 속 사람과 분리된 겉 사람 안으로 내려오게 되면 맹세에 의한 확신이 되지만, 속 사람을 통해 겉 사람 안으로 내려온다면 그건 다른 것이다. 왜냐하면 속 사람 안에서 진리는 자신의 빛 가운데서 나타나지만, 속 사람과 분리된 겉 사람 안에서는 어둠 속에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내적인 천국, 또는 삼 층 천국의 가장 밝은 빛 안에 있는 천적 천사들은 진리에 대해 추론하지 않고 논쟁하지도 않으며, 단지 예, 아니오 라고만 말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주님으로부터 진리를 깨닫고 지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천국의 비밀 9166:2, 이순철 역) When the confirmation of truth descends into the external man separated from the internal, it is effected by an oath. It is otherwise when it descends into the external through the internal; for in the internal man truth appears in its own light, but in the external apart from the internal man, truth appears in darkness. From this it is that the celestial angels, who are in the inmost or third heaven, being in the highest light, do not even confirm truths by reasons, still less do they debate or reason about them, but merely say Yea, or Nay. This is because they perceive and see truths from the Lord. (AC.9166:2)

 

 

※ 다음은 이 설교의 원 저자이신, 당시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님의 에피소드입니다.

 

우리 교회의 새해 포부는 겸손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과 이웃 앞에, 또는 진리 앞에 자신을 낮추는 사람이 되는 것이죠. 그러나 일상으로 돌아가면 연초에 품었던 생각들을 지켜내는 게 쉽지 않습니다. 가끔은 다른 사람과 다투기도 하고 서로 상처를 받습니다. 저도 새해 벽두에 연말에 거래했던 가구점 주인하고 다툼이 좀 있었습니다. 아내가 나이가 들면 침대 생활을 하는 게 좋다고 해서 지난 연말에 침대를 주문했는데 사정이 생겨 취소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가구점 주인은 주문을 취소할 경우, 10% 위약금을 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전에 고지도 없이 그런 규정을 소비자에게 강요하는 게 옳으냐고 항의를 했습니다. 결국 위약금 없이 주문이 취소되긴 했는데, 그러고 나니 마음이 몹시 불편했습니다. 이런 일이 있을 때 신앙인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다투지 말고 손해를 보는 편이 옳은가요, 아니면 시비를 끝까지 가리는 게 주님 앞에 옳은 일인가요?

오늘 본문 9절입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여기 ‘화평하게 하는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새 교회에서 말하는 평화나 화평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천국의 비밀’ 1038:2번 글을 보면,

 

천국의 평화는 천사들 간의 상호적 사랑 안에만 있다. peace” signifies the kingdom of the Lord, and the kingdom of the Lord consists in mutual love, in which alone is peace.

 

고 합니다. 상호적 사랑이란 한마디로 이웃에 대한 사랑을 뜻합니다. 천국에서 이웃 사랑을 상호적 사랑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천국의 천사들은 색깔은 다르나 각자의 진리를 가지고 있고, 그 진리를 서로 존중하고 지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사들끼리는 상대방의 진리를 가지고 옳으니 그르니 다투는 일이 없고, 평화만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떻습니까? 세상에서는 같은 일을 가지고도 어떤 사람은 진리라고 하고, 다른 사람은 거짓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가족이나 친한 친구 사이에도 어떤 진리에 대해 의견이 하나 되기가 어렵습니다. 세상에 평화가 없고, 싸움이 그치지 않는 것은 그런 까닭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사정을 너무도 잘 아시면서도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되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이웃이 거짓을 말하는데도 자신의 진리를 버리고, 이웃의 생각을 따라야 할까요? 그것이 화평일까요? 그건 아닙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화평하게 하는 자’는 이웃을 사랑하되 상대의 진실만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를 판단하는 일인데, 주님께서는 겉 사람의 얕은 지식으로 진리를 추론하지 말고, 속 사람으로부터 유입되는 진리를 통해 판단하라고 하십니다. 그것에 대해 주님은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마5:37)

 

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라고 하신 것은,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진리가 아니라 겉 사람의 지식만으로 진리를 판단할 때는 자칫 자아의 욕망에 휘둘릴 수 있음을 경계하라시는 말씀입니다. 자아가 끼어들면 진리가 쉽게 왜곡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주님은 세상에 계실 때, 화평하게 하는 자의 모범이 되셨습니다. 주님이 보여 주신 몇 가지 사례를 통해 우리는 어떻게 하는 게 화평케 하는 일인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21장에는 주님께서 성전에서 돈을 바꿔주거나 비둘기를 파는 자들의 상을 엎으시고, 그들을 모두 성전 밖으로 쫓아내시는 모습이 나옵니다.

 

12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고 13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마21:12-13)

 

주님이 그렇게 과격한 행동을 하신 것은 성경 전체에서 처음 있는 일일 것입니다. 주님이 그렇게 하신 까닭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할 교회 안에 말씀을 이용해 사리사욕을 취하는 장사꾼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보시기에 당시 유대 교회의 지도자들은 말씀을 이용해 재물을 모으거나 높은 자리에 오르려는 장사꾼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주님은 교회 안에서 진리가 바로 서야 함을 보여 주려 하신 것입니다.

 

※ 다음은 이와 관련된 배경 이야기입니다. 류모세 저, ‘열린다 성경, 성전 이야기’ 인용입니다.

 

성전 벽 남쪽의 더블 게이트를 통해 들어가면 왕의 행각 지하를 거쳐서 성전 뜰 밖으로 나오게 된다. 밖으로 나오면 바로 왼쪽에 예수님 당시 대제사장이었던 안나스와 가야바가 직영하던 부스가 있었다. 가야바는 안나스의 사위다.

 

이 상점에서 성전 제사에 필요한 물건, 즉 소, 양, 비둘기, 밀가루, 올리브 기름, 포도주, 나무 등을 팔았고, 성전세로 바칠 반 세겔을 바꾸는 환전상도 이곳에 있었다. 이 상점은 대제사장인 안나스 가문이 직영으로 운영했고, 여기서 구입한 제물만 성전 제사에 적합한 규격품으로 인정받았다. 당연히 가격은 시중가의 몇 배나 비쌌고, 이들은 엄청난 폭리를 취했다.

 

성전 뜰에서는 물건을 사고파는 행위를 할 수 없었지만, 안나스의 직영 상점은 원래의 성전 뜰인 마카베오 성전산의 바깥인 헤롯 성전산에 위치했기 때문에, 법적으로 따지면 모세의 율법을 어긴 것은 아니었다. 이렇듯 성전을 중심으로 한, 당시의 종교적 기득권층은 교묘하게 법망을 피해 가며,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채우고 있었다.

 

여호와께 드리는 제물은 자신의 수확물과 가축 가운데 흠이 없는 것을 가져와야 했지만, 안나스 가문은 자신의 상점에서 구입한 제물만 바치도록 함으로써 가장 수지맞는 이권에 개입하였다. 당시 이런 일은 유대 땅을 다스리던 로마 총독과의 결탁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제사장은 로마 총독에게 엄청난 뇌물을 리베이트로 바침으로써 대제사장직을 얻을 수 있었고, 꾸준한 뇌물공여로 자신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예수님 당시 안나스 가문은 로마에 엄청난 뇌물을 주어 대제사장직을 독차지했는데, 이처럼 극도로 타락한 종교 세력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이다.

 

당시에 제사장 그룹은 로마와 한패로 인식되었다. 66년 로마에 대항해 유대인들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예루살렘을 점령한 메나헴이 가장 먼저 제사장 가문을 학살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

 

그런가 하면 누가복음 11장에는,

 

37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한 바리새인이 자기와 함께 점심 잡수시기를 청하므로 들어가 앉으셨더니 38잡수시기 전에 손 씻지 아니하심을 그 바리새인이 보고 이상히 여기는지라 39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40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41그러나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 42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43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 44화 있을진저 너희여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느니라 45한 율법교사가 예수께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이렇게 말씀하시니 우리까지 모욕하심이니이다 46이르시되 화 있을진저 또 너희 율법교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 47화 있을진저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드는도다 그들을 죽인 자도 너희 조상들이로다 48이와 같이 그들은 죽이고 너희는 무덤을 만드니 너희가 너희 조상의 행한 일에 증인이 되어 옳게 여기는도다 49그러므로 하나님의 지혜가 일렀으되 내가 선지자와 사도들을 그들에게 보내리니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며 또 박해하리라 하였느니라 50창세 이후로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를 이 세대가 담당하되 51곧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과연 이 세대가 담당하리라 52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교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서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하시니라 53거기서 나오실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거세게 달려들어 여러 가지 일을 따져 묻고 54그 입에서 나오는 말을 책잡고자 하여 노리고 있더라 (눅11:37-끝)

 

라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주님이 미워하신 건 인간 바리새인이 아니라 그들의 위선이었습니다. 이런 말씀들에서 주님의 분노를 느낄 수 있습니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그 사랑만큼 거짓을 미워합니다. 하물며 주님은 진리 자체이신 분입니다. 그러니 진리를 대적하고 교회를 파괴하는 지옥의 악과 거짓이 얼마나 미우셨겠습니까? 그러므로 그때 주님의 분노는 속된 인간의 분노가 아니라 진리에 대한 주님의 무한한 사랑에서 비롯한 신성한 분노입니다.

 

주님이 악과 거짓을 상대로 늘 과격하셨던 건 아닙니다. 대제사장들과 빌라도에게 끌려가셨을 때는 몸이 찢겨나가고, 종국에는 십자가 위에서 죽을 것을 아셨음에도 당신 자신을 위해 어떤 변명도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당신의 인간 안에 있는 자아와의 싸움에서 이기는 방법이기도 했습니다. 인간의 자아는 언제나 수치와 굴욕을 두려워하고, 궁극적으로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므로 그런 일들이 닥칠 때, 할 수만 있다면 그것들로부터 달아나려 합니다. 영화롭게 되기 전 주님의 인성(human) 안에도 자아의 그런 원초적인 욕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그 모든 고난을 묵묵히 이기셨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때로는 진리를 위해 분연히 맞서 싸우셨고, 때로는 자아의 욕구를 누르시며, 고난을 견뎌내셨습니다. 그것이 세상에 화평을 주는 길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주님에게서 그와 같은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화평케 하는 자가 되라 하신 주님께서 이번에는 의를 위하여 박해받은 자는 복이 있다 하십니다. 본문 10절과 11절입니다.

 

10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11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이 말씀에서 의란 뭘까요? ‘참된 기독교’ 96번은

 

의는 하나님의 질서를 뜻하고, 의를 실천하는 것은 의로움과 진실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부터 이웃을 사랑하는 것 Divine order is righteousness. Righteousness is acquired only so far as man practices righteousness; and this he does so far as he acts towards the neighbor from a love of what is righteous and true;

 

이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의란 진리를 따라 이웃을 사랑하는 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무조건 베푸는 걸 이웃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만,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되 진리를 따라 사랑해야 합니다. 상대가 원한다고 악한 사람에게 흉기를 내어 주거나 마약 중독자에게 마약을 파는 건 의도 아니고 사랑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의를 위한 일이 박해를 받는 이유가 뭘까요? 의롭지 않은 사람에게는 의로운 사람의 행동이 눈엣가시처럼 거슬리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본 것처럼, 주님은 진실하지 않은 자들과는 타협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을 가리켜 그들의 외식을 주의하라고 하셨고, 유대 교회의 지도자들을 향해서는 강도요 삯꾼이라고 비난하셨습니다. 반대로 진리를 갈구하는 사람들과는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그들과 함께 먹고 마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위선자와 삯꾼들에 의해 박해받으셨고, 결국 죽임을 당하신 것입니다. 의를 추구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렇게 박해를 받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라고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해 주님은 화평케 하는 자, 의를 위해 박해 받는 자가 되라고 하십니다. 이 두 가지 가르침 속에 공통적으로 들어 있는 교훈은 이웃을 사랑하되 진리를 따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자기 생각이 곧 진리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보실 때는 진리가 아닐 때가 많습니다. 진리와 거짓을 어떻게 분별할 수 있습니까? 대개는 각자가 가지고 있는 지식을 바탕으로 추론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방법으로는 진리와 거짓을 올바로 판단할 수 없다고 하십니다. 그것은 겉 사람의 생각으로 속 사람에 속한 것을 판단하는 것이며, 그러므로 질서에 어긋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의 생각과 의지 안으로 진리의 빛이 흘러들어올 때, 우리는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생각이 진리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머리로 추론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방법으로 이웃의 진리를 사랑하고 그것과 연합할 때, 비로소 화평케 하는 자, 의로운 자가 됩니다. 그러다 보면 어려운 일이 많을 것입니다. 가까운 사람에게조차 때로는 ‘아니오’라고 말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화평케 하는 자, 의를 위해 박해받는 자에게 주시는 상이 새해를 맞는 모든 성도와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이웃과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마5:12)

 

아멘

 

 

2024-01-07(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5-01-05(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01-05(D1)-주일예배(2578, 마5,9-12, 신년주일예배), '화평하게 하는 자,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pdf
0.46MB
성찬.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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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5-01-05(D1)-주일예배(2578, 마5,9-12, 신년주일예배), '화평하게 하는 자,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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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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