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36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 37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38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39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40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41그들이 너무 기쁘므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랍게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42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니 43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눅24:36-43)

 

 

※ 이제 다음 주면 누가복음 마지막 본문인 24장 44절로 53절을 끝으로, 지난 2022년 11월 25일 금요일부터 시작한 이 누가복음 속뜻 강해 설교를 마치게 됩니다. 만 2년 2개월이 넘었는데요, 원래대로라면, 즉 매 주일에만 했더라면 만 5, 6년도 더 걸렸을 겁니다. 처음엔 매일 예배 본문으로 다루었기 때문에 훨씬 짧아진 것이지요. 주님의 사 복음서 중 한 권을 그 속뜻으로, 비록 다른 분의 설교를 원본으로 해서이지만, 여러 해 살피면서 저 개인적으로는 큰 성장, 곧 말씀의 속뜻에 관한 깊은 이해에 나름 도달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지금 하고 있는 이 창세기 번역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게 되면, 개인적으로 마태복음이나 요한복음 속뜻 강해 설교 또한 병행할 수 있었으면 하는 소원도 살짝 가져봅니다. 아울러 지금의 저는 그럼에도 여전히 미약하지만, 주님의 허락하심과 도우심으로 제 남은 노년을 이렇게 말씀의 속뜻을 강해하면서 보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네, 그럼 시작합니다.

 

먼저, 엠마오 본문 관련, 지난 두 주간 다룬 내용입니다.

 

주님이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신 후, 제자들은 실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때 새벽에 무덤을 찾았던 여인들에게서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들었고,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서둘러 주님의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지요. 그러면서 거기 있었던 사람 중 둘이 슬퍼하며 엠마오라는 마을로 돌아갑니다. 가는 도중에 어디선가 주님께서 나타나셔서 그들과 동행하시다가 해 저물어 유할 곳에 들러 식사 중 그들에게 떡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떡은 죽은 믿음을 살리는 사랑의 떡이었습니다. 그 떡을 먹고 그들의 신앙이 살아났습니다. 신앙이 살아났다는 것은 사랑 없는 믿음이 사랑 있는 신앙으로 변했다는 뜻입니다. 두 사람은 그 신앙으로 주님을 알아볼 수 있게 되었으며, 그리하여 온전히 주님의 인도를 받으며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님이 떡을 떼시기 전까지는 이들은 자기들과 동행하시는 분이 주님이신 줄 알아보지 못했거든요. 여기까지가 지난 두 주에 걸쳐 전해 드렸던 내용입니다.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인간의 얕은 지식이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거룩한 진리를 따라 생활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인간의 자아가 끊임없이 방해하기 때문인데요, 그러므로 진리에 복종하려면 실패와 좌절이 필요하고, 그렇게 해서 자아가 죽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문득 진리이신 주님이 함께하시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마치 엠마오로 가던 사람들이 주님을 만났어도 못 알아본 채 동행하다가 주님이 떡을 떼시는 순간 눈이 밝아져 비로소 주님이심을 알아본 것처럼 말이죠.

 

※ 이는 마치 아래 기술과도 같은 상황이지 싶습니다.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김은경 역) 35번 글 일부 인용인데요,

 

...가장 바깥쪽 천국에, 천국이 천사의 내면 상태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아직 모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더 높은 천사들이 있는 천국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더 높은 천국의 행복을 누릴 것이라고 믿었다. 그들은 더 높은 천사들 무리 가운데 들어가 보도록 허락을 받았는데, 수많은 무리가 거기 있었지만, 아무리 찾아도 그들 눈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이 사람들의 내면이 그곳에 있는 천사들의 단계만큼 열리지 않았기 때문에, 시각도 열리지 않았던 것이다...

 

주님을 만난 사람들의 삶은 그 후 어떻게 변했을까요? 말씀에는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고 말합니다. 엠마오로 가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이유는, 엠마오로 표상되는 진리를 이미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만난 주님이 바로 엠마오로 표상되는 진정한 진리였던 것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더 이상 엠마오로 갈 필요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는 것은 주님을 만난 후, 내면에 있는 각자의 교회로 돌아갔다는 뜻입니다. 신앙인들이라고 해서 모두 교회 안에서 생활하는 게 아닙니다. 인간의 자아에서 나오는 진리를 붙잡고, 이방인처럼 교회 밖에서 서성대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난 후로는 예루살렘, 즉 내면의 교회 안으로 돌아갑니다. 거기에는 주님이 주시는 살아있는 진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만난 사람들은 그렇게 각자의 교회 안에서 진리이신 주님의 인도를 받습니다. 그 모습을 본문 36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36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

 

내면의 교회 안에 거하는 사람은 늘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주님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축복하십니다. 평강은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신성한 인사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도 다른 사람의 집에 들어갈 때 꼭 평강을 기원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11어떤 성이나 마을에 들어가든지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가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12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13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하지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마10:11-13)

 

주님은 왜 그렇게 평강을 주시려고 하실까요? 평강은 주님과 하나가 된 사람들이 더 이상 자아의 악과 거짓으로 인해 고통받지 않아도 되는 내적인 평화이며, 안전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화 안에 있을 때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상처 주는 말을 하거나 험담하지 않습니다. 자랑하거나 세상의 유혹에 넘어가지도 않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진리의 인도를 받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오셔서 영적인 평화를 주십니다.

 

※ 저 역시도 최근 이것이 사실임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어떤 반복되는 무례함 앞에 속으로 당혹해 하면서 순간순간 몹시 언짢았으나 그때마다 얼른 주님의 시선으로 그 상황들을 보고자 힘썼더니 그 즉시 어두움이 물러가고, 주님이시라면 이렇게 대답하셨겠구나 싶은 그런 말로 평안한 대응을 할 수 있었으며, 그 결과 자칫 지옥문이 열릴 수도 있었던 상황들을 철저히 봉쇄, 오히려 주님 주시는 평안 속으로 더욱 깊이 들어가며, 그에 따른 깊은 지혜 역시 얻을 수 있었던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 만날 때, 사람들은 그분을 영으로 생각할 뿐 육신을 입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에 대해 본문 37절과 3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37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38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영으로서의 주님과 육신을 입으신 주님은 어떻게 다를까요? 영으로서의 주님은 인간의 합리성을 통해, 그러니까 이성적 이해를 통해 간접적으로 겉 사람을 변화시키는 진리입니다. 그에 비해 육신을 입으신 주님은 겉 사람 안으로 흘러들어와 겉 사람의 생각과 의지를 직접 변화시키는 진리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진리의 깊은 부분을 깨달았음에도 행동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일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영으로서의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반대로 진리의 깨달음과 함께 행동이 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육신을 입으신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인간의 겉 사람과 그 바깥에 있는 감각까지도 변화시킬 수 있는 이는 육신의 몸으로 지옥을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뿐이시기 때문입니다.

 

※ 개신교 표현 중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해’, ‘부활하신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만나야 해’ 하는 표현들이 있는데요, 아마 이런 표현들이 방금 말한 ‘육신을 입으신 주님’에 대한 개신교식 표현이 아닐까 합니다.

 

주님이 육신으로 부활하신 것에 대해 ‘천국과 지옥’ 316번 글은,

 

주께서는 영뿐 아니라 몸도 부활하셨다. 주께서 세상에 계실 때, 당신의 인성 전체를 영화롭게, 즉 신성이 되게 하셨기 때문이다. 이는 당신의 영혼은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므로 신성 자체이셨고, 당신의 몸조차도 그 영혼, 즉 아버지의 영혼과 같이 되어 신성이 되셨기 때문이다. (천국과 지옥 316, 김은경 역) The Lord rose again not as to his spirit alone but also as to his body, because when he was in the world he glorified his whole human, that is, made it Divine; for his soul which he had from the Father was of itself the very Divine, while his body became a likeness of the soul, that is, of the Father, thus also Divine. (HH.316)

 

라고 합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에 계시면서 당신의 몸을 아버지의 신성과 하나로 만드시고, 그리하여 거룩하게 만드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까닭은 인간들과 직접 만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39절과 4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9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40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주님께서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하시고, 제자들에게 손과 발을 보여 주셨습니다. 주님의 살과 뼈, 손과 발은 지극히 높은 천국으로부터 자연계의 가장 낮은 곳으로 오신 신성한 인간이신 주님을 뜻합니다. 주님이 그렇게 신성한 몸으로 부활하신 것에 대해 ‘천국의 비밀’ 10044번 글 10번 항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주님이 당신의 인성의 마지막까지 영화롭게 만드셨다는 것은 무덤에 당신의 인간에 속한 어떤 것도 남기지 않으셨다는 사실로 분명하다. (이순철 역) that the Lord glorified even the ultimates of his human is plain from his words above, and also from the fact that he left nothing of his human in the sepulchre.

 

주님의 손과 발을 보고 제자들이 ‘너무 기쁘므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랍게 여길 때’, 주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41절로 43절까지 말씀입니다.

 

41그들이 너무 기쁘므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랍게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42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니 43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진리를 믿는 사람들조차 진리의 능력을 의심할 때가 많습니다. ‘진리는 그냥 진리일 뿐, 삶의 실질적인 문제들을 해결할 수는 없어’라고 하면서 말이죠. 이를테면 그런 태도가 주님을 영으로만 알 뿐, 육신을 입은 인간으로 생각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그런 마음 상태를 아시고,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렸습니다. 여기서 생선은 말씀의 지식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구웠다는 것은 진리에 대한 애정을 뜻합니다. 따라서 구운 생선 한 토막을 주님께 드리는 건 지식적으로만 알뿐, 아직 실천하지는 못하고 있는 어떤 진리를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께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진리를 따라 살려고 하나 잘 안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특히 오늘날에는 여러 가지 중독들이 있습니다. 어떤 심리학자는 그것을 각자의 마음속에 있는 악마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것이 뭘까요? 이를테면 식탐이나 알콜 같은 것일 수 있습니다. 스마트폰, 넷플릭스나 유튜브, 또는 게임이나 웹툰, 도박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그런 것에 빠져 있는 동안은 올바른 신앙의 삶을 살기 어렵습니다. 그때 우리는 인간의 몸으로 세상의 온갖 유혹을 이기신 주님께 문제가 되는 진리를 가지고 가야 합니다. 반드시 해결하겠다는 의지와 함께 말입니다. 그것이 불에 구운 생선을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그걸 맛있게 드셨습니다. 말씀에서 먹는 것은 진리와 선을 자신의 생명으로 만드는 걸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제자들 앞에서 생선을 드시는 건 사실은 주님이 드시는 게 아니라, 제자들인 우리가 주님의 도우심을 받아 말씀의 진리와 선을 생명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진리와 선을 생명으로 만든다는 것은 진리와 선을 각자의 사랑과 의지로 만든다는 뜻입니다. 그때 우리는 거짓과 악을 혐오하게 되고, 갖가지 중독들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일은 육신으로 부활하신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참된 기독교’ 109번 글은,

 

주님이 오시기 전의 교회가 저녁이라면 주님이 오신 후의 교회는 아침과 같다. (이순철 역) in the Word the state of the church before the Lord’s coming is called evening, and the state after his coming is called morning.

 

고 합니다. 또

 

세상에 오시기 전 주님은 천사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교회와 함께 계셨으나, 세상에 오신 후에는 직접 교회와 함께 계신다. (이순철 역) Before the Lord came into the world he was present with men of the church, but only mediately, through angels who represented him; but since his coming he is present with men of the church immediately;

 

고 합니다. 이 말은 부활하신 주님의 신성한 몸에서 나오는 진리는 이전의 진리와는 비할 수 없이 밝고 강력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사야서 30장 26절은,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며 그들의 맞은 자리를 고치시는 날에는 달빛은 햇빛 같겠고 햇빛은 일곱 배가 되어 일곱 날의 빛과 같으리라

 

라고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며 그들의 맞은 자리를 고치시는 날’은 부활하신 주님에 의해 새로운 교회가 세워지는 때를 뜻합니다. 그리고 ‘달빛은 햇빛 같겠고 햇빛은 일곱 배가 되어 일곱 날의 빛과 같으리라’는 새 교회를 통해 밝혀지는 진리는 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밝고 힘 있는 진리라는 뜻입니다. 그런가 하면 ‘천국의 비밀’ 9216번 글과 9828번 글은,

 

내적인 것은 마지막의 것 안에서 흐름이 멈추고 마지막의 것들과 결합하여 그곳에 머문다.

 

고 하고, 9836번 글은,

 

그러므로 내적인 것들은 질서의 마지막의 것 안에 있을 때 힘이 있고 거룩하다.

 

고 합니다. 여기서 질서의 마지막의 것은 자연계와 그곳에 사는 인간들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세상에 오셔서 고난을 받으시고, 육신으로 부활하신 것은 지극히 존귀하신 주님이 신성하고 완전한 진리로 질서의 마지막까지 오신 것이며, 그곳에서 인간과 하나가 되어 영원히 사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바로 인류의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아 계신 주님께서 우리의 육신의 문제와 영의 문제들을 모두, 그리고 온전히 해결해 주실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모든 성도와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이웃과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3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시며 이스라엘의 반석이 내게 이르시기를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여 4그는 돋는 해의 아침 빛 같고 구름 없는 아침 같고 비 내린 후의 광선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 같으니라 하시도다 (삼하23:3-4)

 

아멘

 

2023-06-04(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5-01-26(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01-26(D1)-주일예배(2581, 눅24,36-43),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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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5-01-26(D1)-주일예배(2581, 눅24,36-43),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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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을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

 

 

25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26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27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28그들이 가는 마을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 하는 것 같이 하시니 29그들이 강권하여 이르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그들과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 30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31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32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33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34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 35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눅24:25-35)

 

 

※ 무척 당혹스럽고 혼란한 아침입니다. 간밤, 그러니까 새벽 4시쯤 서부지법 차은경 부장판사가 윤석열 대통령의 구속 영장을 발부했고, 이에 따라 구치소에서 대기 중이던 대통령은 수형복, 그러니까 죄수복으로 갈아입고 독방에 수감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이재명 같은 저 파렴치범은 버젓이 저러고 다니는데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헌법에 명시된 당연한 권리인 계엄을, 그것도 두 시간짜리, 국민에게 아무 위해도 가하지 않은 계엄을 시행했다 하여 국회를 통해 대통령 탄핵 소추되어 현재 헌재에서 심리 중, 그것도 아주 속전속결로 진행 중이고, 그와는 별도로 권한도 없는 공수처에 의해, 그리고 거기에 부화뇌동한 경찰에 의해 한남동 대통령 관저에서 체포, 결국 오늘 구속되었습니다. 아... 마음 같아선 지금이라도 집회 현장에 나가 저들과 함께해야 할 것 같은데... 아, 어쩌면 좋을까요? 멀쩡한 나라가 한순간에 송두리째 저 반국가 국가 전복 세력에 의해 두 눈 뜨고 넘어갈 것만 같습니다. 이토록 치밀하게 오랜 세월 저들은 한 나라 전 분야에 걸쳐 비밀하고 의뭉스럽게 몰래 준비해 왔군요! 내일은 미 트럼프가 두 번째로 미국 대통령에 취임하는 날인데요, 주님이 트럼프를 통해 우리 대한민국을 돕게 하실까요? 정말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저의 대에 또다시 이런 과거 3.1 운동 같은 날이 올 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만일 정말 이 나라가 그런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면 저는 미련 없이 나라를 위해 이 한 몸 던질 생각입니다. 살아서 자기의 조국을 사랑하지 못한 사람이 무슨 죽어서 새로운 조국인 천국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 그리고 또 하나, 어제는 지난날 우리 교회를 크게 도우시던 귀한 권사님의 발인이 있었습니다. 바로 지구촌교회 고 안정희 권사님이신데, 그 인연은 과거 서울침례교회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지요. 우리가 개척 후 7년 차 되던, 재정적으로 크게 어렵던 지난 2020년부터 여러 차례 그때마다 크게 우리를 재정적으로 도우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 시기를 무사히 건널 수 있도록 주님께 쓰임 받으신 분입니다. 권사님은 우리 외에도 여러 개척 교회를 물질로 돕던 분이셨습니다. 권사님의 모친 나이 사십에 태어났으나 재가하시는 바람에 어린 시절을 배다른 형제들과 보내셨고, 남편과 결혼, 자녀 넷을 두었으나 남편이 가정을 버리고 나가 두 여자 데리고 살다 죽을병 걸려 연락오더니, 중환자실 4개월 만에 별세, 남편을 용서하고 한 달을 우셨다는 권사님, 향년 82세를 일기로 그토록 소망하시던 천국으로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올라가셨습니다. 권사님, 정말 고맙고 감사합니다. 권사님이 보이신 그 사랑과 돌봄,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저희를 도우신 그 마음과 취지를 기억, 온몸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맡기신 소명 감당 후 천국에서 뵙겠습니다. 이제 천국에서 편히 쉬시며, 영원한 행복 누리시기 바랍니다.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셨다는, 지난주에 이은 두 번째 이야기입니다. 사실 주님은 벌써 나타나셔서 그들과 함께 걸어가고 계십니다. 다만 그들이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을 뿐이지요. 주님께서 그들에게 서로 주고받는 이야기가 무엇이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그들 중 하나가 이르기를, ‘우리가 선지자로 믿고 따르던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지 사흘째입니다. 아침에 무덤을 찾았던 여인들 말이 천사들이 나타나 예수가 살아나셨다고 했다는데, 우리는 아직 그를 만나지 못했습니다’라며 슬퍼합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엠마오는 영적으로 진리를 뜻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간절히 만나기를 원하는 주님 또한 진리 그 자체이신 분입니다. 따라서 두 사람이 엠마오를 향해 걸어가는 것이나, 주님을 만나지 못해 슬퍼하는 것은 모두 진리를 향한 구도의 길을 걷는 신앙인들의 모습이지요. 그들은 살아있는 진리, 즉 선이 있는 진리가 그들을 다스리길 원하지만, 자신들의 말과 행위에서 그걸 느끼지 못합니다. 오히려 자신들에게 선과 진리가 전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슬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그런 상태가 나쁜 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해 뜨기 직전 깊은 어둠과 같은 상태이고, 진리가 살아난 자리에 남은 빈 무덤 같은 상태일 수 있기 때문이지요.

 

※ 여기서 잠깐, 이 ‘(善, good)이 있는 진리’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하는데요, 설명이 좀 필요할 것 같아 말씀드리면, 이 표현과 동일한 ‘선을 동반한 진리’라는 표현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진리는 진리인데 선 없는 진리, 선을 동반하지 않는 진리도 있다는 말이지요. 이걸 잠깐 설명드리자면, 하늘의 해, 태양에 비유할 수 있겠습니다. 즉 햇볕은 선, 햇빛은 진리로 말이지요. 햇볕, 즉 열은 없고, 햇빛, 즉 빛만 있으면, 아무리 그 빛이 강렬해도 마치 겨울철 햇빛과 같아 만물이 절대 생장하지 못합니다. 만물의 생장엔 햇볕, 곧 열이 있어야 하지요. 그러니까 볕 없는 빛, 곧 선 없는 진리만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사람이 거듭나려면 반드시 ‘선 있는 진리’라야만 한다는 것이고, 여기서 ‘’은 곧 주님이십니다. ‘선 없는 진리’, 즉 볕 없는 빛으로는 거듭남이 불가능한데, 당연한 말씀이지만, 그것은 알고는 있지만 실천하지는 않는 것이기 때문이며, 그것은 아무리 교리적으로 많이 알아도 주님하고는, 즉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하고는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저들 대제사장들과 당시 종교 리더십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를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 이 ‘(善, good)이 있는 진리’에 대한 더욱 깊은 설명은 제 블로그 오늘 주일설교 게시글 하단에 pdf로 첨부하겠습니다. 출애굽기 18장,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모세에게 조언하는 장면인데, 이에 대해 주님이 스베덴보리를 통해 풀어 주신 내용을 지난날 청주 새 교회 시절, 이순철 목사님이 설교하신 설교 원고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을까요? 그 이유에 대해 새 교회 가르침, 스베덴보리 저,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3863번 글 14번 항은,

 

진리를 보는 것은 진리에 대한 믿음인데, 이때 믿음은 인간의 자아에서 나오는 믿음이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믿음이다. (이순철 역) seeing,” in the internal sense, signifies faith from the Lord, for there is no other faith which is faith than that which comes from the Lord. This also enables man to “see,” that is, to believe; but faith from self, or from what is man’s own, is not faith, for it causes him to see falsities as truths, and truths as falsities; and if he sees truths as truths, still he does not see, because he does not believe, for he sees himself in them, and not the Lord.

 

라고 합니다. 밑에 영어 원문이 좀 더 정확한 이해를 돕는 것 같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믿음, 곧 주님으로 말미암는 신앙으로라야 진리를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자아에서 나오는 믿음과 주님이 주시는 신앙은 어떻게 다릅니까? 인간의 자아에서 나오는 믿음, 즉 인간의 자아 및 고유 본성 안에는 이기심과 세상, 세속적 욕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시는 신앙, 주님으로 말미암는 신앙 안에는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있지요. 한마디로 말해, 인간으로 말미암는 믿음은 주님을 믿되 자기 자신을 위해 믿는 것이고, 주님으로 말미암는 신앙은 주님과 이웃을 위해 주님을 신앙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둘은 본질적으로 서로 다릅니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그들이 왜 진리이신 주님을 보고도 알아보지 못했는지를 알 수 있는데요, 그들의 믿음 가운데 아직 인간적인 것이 있어 그들의 눈을 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 이 설교 원 저자이신 이순철 목사님은 ‘faith’와 ‘to believe’를 구분하지 않고 그냥 둘 다 ‘믿음’으로 푸시는데요, 저는 ‘오직 믿음’의 뉘앙스가 느껴져 가급적 스베덴보리 원문을 따라 귀찮지만 좀 엄격하게 구분, ‘faith’에 해당하는 부분은 ‘신앙’, ‘to believe’에 해당하는 부분은 ‘믿음’으로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이 둘의 차이는 저한테는 뭐랄까... 전자는 주님으로 말미암음을 더 분명히 하는 것 같고, 후자는 인간의 어떤 자의적 접근 같이 느껴집니다.

 

두 사람이 주님을 만나지 못해 슬퍼하는 것을 보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25절과 26절 말씀입니다.

 

25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26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주님께서 그들에게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라고 나무라십니다. 선지자는 보통 말씀을 뜻하거나 말씀을 통해 배우는 교리를 뜻하는데요, 그렇다면 선지자가 말한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다는 건 무슨 뜻일까요? 말씀에서 가르치는 진리를 머리로만 믿고, 의지를 가지고 실천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마음은 사람의 의지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처음 진리를 배울 때는 마음이 그렇게 순수하지 않습니다. 그의 마음 가운데 세상에서 오는 욕망과 그로 인한 거짓들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보통 처음에는 진리를 따라 살려는 의지는 별로 없고, 그냥 배우는 걸로 만족합니다. 스스로 양심적인 사람이라고 자부하기도 하지요. 이때가 믿음만 있고, 사랑은 없는 때입니다. 그러나 진리에 대한 배움이 깊어질수록 마음이 낮아지고, 그때 주님으로부터 조금씩 선한 마음이 흘러들어옵니다. 주님이 주시는 선한 마음이란 어떤 걸까요? 진리 그 자체를 위해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이 마음이 생길 때, 우리는 진리를 가지고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주님과 이웃의 유익을 구하게 됩니다. 그러고 나면 시험이 찾아오는데요, 시험은 진리를 삶에 적용하려 할 때 생깁니다. 그동안 우리의 삶을 주도하던 옛 주인인 자아와 새로운 주인인 진리 사이에 싸움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시험에서 이길 때마다 진리에 붙어 있던 거짓들이 하나둘씩 떨어져 나가고, 그 빈 자리로 선이 있는 진리가 흘러들어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가진 진리는 점점 순수하고 힘 있는 진리로 변합니다. 그것은 마치 주님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즉 고난을 통해서 당신의 인성을 거룩하게 만드시는 과정과도 같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신 말씀은 그리스도가 고난을 통해 거룩하게 되신 것처럼 우리에게 있는 진리도 고난을 통해 더 굳건하고 거룩한 진리로 변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주님을 위해 고난을 받아야 우리에게 있는 죽은 진리가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마치 주님이 시험을 딛고 살아나신 것처럼 말입니다.

 

주님의 일행이 엠마오에 가까이 갔을 때 날이 어두워졌습니다. 그때의 상황을 본문 28절과 29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습니다.

 

28그들이 가는 마을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 하는 것 같이 하시니 29그들이 강권하여 이르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그들과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

 

날이 저물어 주님이 그들과 함께 유(留, 머무르다)하셨다고 합니다. 말씀에서 날이 밝을 때는 주님이 우리의 삶을 주도하실 때입니다. 반대로 날이 저물 때는 인간의 자아가 삶을 주도할 때이며, 그러므로 시험의 때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다스리실 때는 감히 지옥이 우리를 어떻게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거듭나는 동안은 수시로 빛과 어둠이 교차합니다. 한동안 주님께 모든 걸 맡기는 것 같다가도 어느 순간 자아가 고개를 쳐듭니다. 그때 시험에 들고 실패를 경험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상황은 그것과는 다릅니다. 살아있는 진리이신 주님이 그들과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30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31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주님께서 떡을 가지고 축복하신 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 떡을 주신 이가 바로 주님이시라는 걸 알았습니다. 말씀에서 떡은 사랑과 선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떡을 떼어 나누어 주시는 것은 주님께서 사랑과 선에 대해 가르쳐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 성찬 때 사용하는 빵과 포도주의 의미 또한 이와 같습니다. 빵(우리말 번역으로는 떡)은 선과, 포도주는 진리와 상응하며, 그래서 함께 주님의 신성(神性, Divine)을 상응, 표상, 상징합니다. 천국은 주님의 신성의 나라로, 우리 안에 이 신성이 있어야 천국의 일원이 될 수 있음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진리만 있고 선은 없는 사람, 또는 믿음만 있고 삶은 없는 사람에게 주님께서 사랑과 선을 주시는 것이지요. 그때 그들에게 있는 자아에 속한 믿음이 주님이 주시는 거룩한 신앙으로 바뀌고, 그 신앙으로 참된 진리이신 주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에는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았다’고 합니다. 그런 상태에서 우리는 주님과 함께 시험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그들과 함께 시험을 이기신 후, 다시 눈앞에서 사라지셨습니다. 그러자 32절에서 두 사람이 주님과 함께 있었던 때를 생각하며 서로 이야기합니다.

 

32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진리이신 주님은 늘 우리 곁에 계시지만 매 순간 그걸 느낄 수는 없습니다. 두 사람의 말처럼 말씀을 읽을 때 특별한 깨달음으로 오시거나, 또는 이웃과의 관계에서 뜨거운 사랑으로 오십니다. 또 시험을 이겼을 때는 큰 위로와 평화로 오십니다. 그때 우리는 주님을 보고 만지며 느낄 수 있습니다.

 

끝으로 33절로 35절까지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33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34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 35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그들이 일어났다는 것은 그렇게 해서 영적으로 한 단계 올라선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과 함께 시험에서 이길 때, 우리는 영적으로 한 단계 성장합니다. 그리고 그때부터는 세상에 대한 잡다한 관심과 욕망 속에 거하지 않고, 내면에 있는 예루살렘, 즉 주님의 교회 안에 거하게 됩니다. 말씀에는 그곳에 주님의 제자들과 다른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주님의 제자들은 행동하는 진리를 뜻합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있는 자들은 선에 대한 애정들을 뜻합니다. 교회는 그 둘, 즉 진리와 선에 대한 애정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이르기를 살아나신 주님께서 시몬에게 모습을 나타내셨다고 합니다. 시몬은 베드로의 다른 이름으로 순종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진리에 순종하는 사람, 즉 의지를 가지고 진리를 행동으로 실천하는 사람에게 나타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들 내면의 교회가 전하는 메시지입니다. 그러자 두 사람이 그 말에 화답하듯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합니다. 이 말은 주님이 주시는 사랑과 선으로 그들의 믿음이 순종하는 신앙으로 변하고, 그 신앙으로 살아계신 주님을 보았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만난 살아계신 주님은 어떤 분입니까? 우리의 삶의 전반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살아있는 진리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엠마오로 가는 사람들을 통해 우리 자신의 모습을 봅니다. 우리는 언제나 자신이 아니라 진리이신 주님이 오셔서 다스리시길 원합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좀처럼 모습을 보여주시지 않았고, 그때마다 우리는 깊은 슬픔을 느꼈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주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깊은 슬픔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시는 떡을 먹은 후, 눈이 밝아져 주님을 볼 수 있게 되었고, 주님과 함께 동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밝아진 눈, 곧 그렇게 눈이 밝아지는 것이 바로 주님이 주시는 신앙입니다. 이제부터는 그 신앙을 가지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일을 할 것입니다. 그 신앙으로 이웃과 사귀고 사랑할 것입니다. 그 신앙으로 세상에서 오는 유혹들과 싸워 이길 것입니다. 그 신앙으로 살아계신 주님의 통치에 모든 걸 맡길 것입니다. 아멘!

 

주님의 그런 은혜가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과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3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5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사40:3, 5)

 

아멘

 

 

2023-05-21(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5-01-19(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01-19(D1)-주일예배(2580, 눅24,25-35), '떡을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pdf
0.45MB
2016-10-30(D1)-주일예배(이순철 목사, 출18,19-22), '이드로가 모세에게 방침을 주다'.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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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5-01-19(D1)-주일예배(2580, 눅24,25-35), '떡을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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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13그 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14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15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16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17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18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거기서 된 일을 혼자만 알지 못하느냐 19이르시되 무슨 일이냐 이르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거늘 20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 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1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일어난 지가 사흘째요 22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23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24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이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눅24:13-24)

 

 

기억의 지식이 신앙은 아니다. 신앙은 신앙에 관한 것들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 인정은 결코 외적인 것이 아니라 내적인 것이며, 사람 안에 있는 인애를 통해 주님 홀로 하시는 일이다. (천국의 비밀 1162, 이순철 역) It may be seen from this that memory-knowledge is not faith. But faith is the acknowledgment of the things which are of faith; and this acknowledgment is by no means external, but internal, and is the working of the Lord alone through the charity in a man. (AC.1162)

 

 

새 교회 가르침인 스베덴보리 저,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라틴, 天界秘義)에서는, 천국은 주님의 신성인 선(good)과 진리(truth)로 이루어지며, 종류별로는 천적(天的, celestial), 영적(靈的, spiritual), 자연적(自然的, natural)인 세 천국이 있고, 일반적으로는 천적 천국과 영적 천국이 있다고 합니다. 이 말은 천국 모든 사회는 천적 천사와 영적 천사로 이루어짐을 의미하는데요, 이때 천적 천사와 영적 천사 간 차이는, 천적 천사는 진리보다는 선을 더 사랑하는 천사이고, 영적 천사는 선보다는 상대적으로 진리를 더 사랑하는 천사라는 데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의 신성 중 선에 더 반응하는 천사는 천적 천사, 진리에 더 반응하는 천사는 영적 천사라는 것입니다. 천국이 그렇게 두 가지 성향의 천사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천국과 통하는 지상의 교회도 두 가지 성향의 사람들로 되어 있습니다. 즉 어떤 사람은 선에 대한 애정이 더 많고, 어떤 사람은 진리에 대한 애정이 더 많은 것입니다. 이 차이, 이 비밀을 잘 아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인간과 목회, 사회 전반을 이해하는 데도 말이지요.

 

주님이 부활하셨을 때, 처음 주님을 만난 사람들은 제자들이 아니라 새벽 미명에 주님의 무덤을 찾았던 여자들이었습니다. 여자들은 놀라움 반, 기쁨 반으로 제자들에게 달려가 주님의 부활을 알렸습니다. 다음은 그 관련 본문입니다.

 

1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2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보고 3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하더라 4이로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5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6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7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 8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9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에게 알리니 10(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그들과 함께 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알리니라) (눅24:1-10)

 

주님은 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지 않고 여자들에게 먼저 나타나셨을까요? 여자는 보통 진리보다는 선에 대한 애정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사람 안의 선과 진리 중, 진리가 아니라 선이나 인애(仁愛, charity) 안으로 오시는 것과 관련, ‘천국의 비밀’ 1162번 글은, ‘주님은 각 사람 안에 있는 인애 가운데로 오셔서 그의 신앙을 내적으로 만드신다’(and this acknowledgment is by no means external, but internal, and is the working of the Lord alone through the charity in a man.)고 합니다. 또 1226번 글은, ‘참된 지성과 지식은 사람의 인애를 통해 주님이 생산하는 자식이다’(Hence comes true intelligence, and hence comes true memory-knowledge, and hence comes true knowledge, which are all sons of charity, that is, sons of the Lord through charity.)라고 합니다. 이 같은 사실로부터 주님이 왜 여자들에게 먼저 나타나셨는지 알 수 있지요. 여자들은 진리를 생각하기보다 바로 행동으로 옮겼던 사람들, 즉 체어리티를 소중히 여겼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누구보다 그들에게 먼저 오셔서 그들 안의 죽은 지식 속으로 생명을 불어넣으셨습니다. 그렇게 그들 안에서 살아난 진리의 지식이 바로 무덤에서 살아나신 주님이십니다.

 

※ 그러니까 신앙 지식을 갖고만 있던 우리가 드디어 실천에 옮기고, 이후 실천하는 신앙인, 선을 행하는 신앙인으로 사는 모습, 이것이 바로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모습이며, 이것이 바로 부활의 능력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엠마오로 가는 사람들은, 제자들은 그들 내면의, 생명 없는 진리들이 살아나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입니다. 히브리어로 엠마오는 샘(spring)이라는 뜻이고, 샘의 영적 의미는 참된 진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생명 없는 진리란 어떤 걸까요? 진리를 입으로만 말하고, 행동하지는 않는, 그걸 실천하지는 않는, 실행에 옮기지는 않는 진리를 말합니다. 진리를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겁니다. 진리로 자신을 포장하기를 즐기는 사람, 즉 박학다식하고 달변 및 글재주도 있어 청중의 마음과 귀를 즐겁게는 하지만 정작 본인은 그 속 사람이, 정작 본인은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진리를 행하려 해도 뜻대로 잘 안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경우는 후자입니다. 그들에 대해 본문 13절과 14절입니다.

 

13그 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14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한글 성경에는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를 걸어갔다고 번역했는데, 영어 성경에는 three score, 즉 이십 리를 세 번 갔다고 되어 있습니다. 스코어(score)는 스물, 이십이라는 뜻도 있는데요, 여기 이 숫자 2는 진리와 선의 결합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십 리를 세 번 걸어 엠마오로 가는 건 신앙인들이 한편으로는 진리를 배우고 한편으로는 실천하려고 애쓰면서 점차 진정한 지혜에 이르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왜냐하면 엠마오는 참된 진리를 뜻하고, 숫자 3은 완성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15절과 16절에는,

 

15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16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앞 절의 말씀에서 짐작하셨을 터이지만 엠마오로 가는 두 사람은 문자적으로는 두 사람이지만, 내적으로는 신앙인에게 있는 두 가지 생명, 즉 이해하는 능력(understanding)과 의지(will)를 의미합니다. 사실 이 둘은 신앙인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있지요. 거듭나는 동안 이 이해하는 능력과 의지는 끊임없이 서로 대화하고 협력하면서 우리로 하여금 주님께로 나아가도록 만듭니다.

 

우리 주변에도 여인들과 같이 진리를 배우기보다 행하는 데 열심인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경우 살아있는 진리의 인도를 받습니다. 반면에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만약 후자의 사람이 우리라면 우리는 얼마나 답답하고 슬프겠습니까? 나름 노력한다고 하는데 왜 나는 변하지 않는가? 진정한 지혜는 언제쯤 얻을 수 있을까 하고 한탄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스스로 지혜 없음을 인정하고 진정한 지혜를 갈구할 때 어느 날 불쑥 지혜의 근원이신 주님께서 오셔서 함께 걸어가십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잘 느끼지 못합니다. 그것에 대해 본문에는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이라고 말합니다. 신앙인의 눈을 가리어 주님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 뭘까요? 자기도 모르는 열등감이나 교만, 분노 같은 것일 수 있습니다. 생활고나 질병의 고통 같은 것일 수도 있겠지요. 그런 것들이 우리를 짓누르고 있을 때, 주님이 동행하신다는 것을 좀처럼 느끼지 못합니다.

 

※ 서두에 세 천국이 있다 말씀드렸습니다. 이 세 천국은 그 지혜와 영광 등 모든 것에 있어 서로 아주 큰 차이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지혜입니다. 즉 천적 천국은 영적 천국에 비해 그 지혜가 수천수만 배 뛰어나고, 영적 천국은 자연적 천국에 비해 또한 그렇습니다. 그래서 가령 예를 들면, 자연적 천국에 있는 천사가 마음에 원해서 영적 천국을 가보고 싶어 하면 주님의 허락으로 잠시 가볼 수 있게 되는데, 정작 가보면 이상한 게, 분명 거기엔 말할 수 없이 놀라운 것들과 사람들, 곧 천사들이 가득함에도 정작 본인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본인의 내면이 영적 천국을 볼 수 있게 열리지를 않았기 때문이지요. 이런 비슷한 게 아닐까, 정작 이 엠마오 두 제자의 내면이 곁에 계신 주님을 볼 수 없는 그런 상태였던 게 아닐까 합니다.

 

그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17절 말씀입니다.

 

17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말씀에서 ‘걷는 것’은 진리에 따라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슬퍼하는 것’은 자기 안에 진리와 선이 없음을 느끼는 것입니다. 거듭남이 진행될수록 우리는 자기에게 진정한 지혜가 없음을 절감합니다. 그때 우리는 깊은 공허함과 슬픔에 빠집니다. 그것은 그동안 옳다고 믿었던 생각이나 자존심, 오랜 습관 같은 것, 마치 분신과 같은 것을 떠나보내야 하는 슬픔입니다. 그런가 하면 한편으로는 그것을 떠나보낸 자리에 지혜의 근원이신 주님이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슬픔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라고 물으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생각이나 마음을 몰라서 그렇게 물으시는 게 아닙니다. 스스로 지혜 없음을 깨닫고 슬퍼하는 게 바로 지혜를 향한 출발점이라는 걸 가르쳐 주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여전히 주님의 말씀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슬퍼하며 대답합니다. 18절로 24절입니다.

 

18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거기서 된 일을 혼자만 알지 못하느냐 19이르시되 무슨 일이냐 이르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거늘 20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 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1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일어난 지가 사흘째요 22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23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24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이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두 사람 중 글로바라 하는 사람이 ‘당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거기서 된 일을 혼자만 알지 못하느냐’라고 운을 뗀 후 고민을 털어놓습니다. 글로바는, 요즘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엄청난 일, 곧 나사렛 예수,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 자기들은 이분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분으로 알았는데, 이분을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주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일, 그리고 자기들과 함께한 여자들이 새벽에 무덤에 가보았더니 천사들이 나타나 주님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 하더라는 것, 그리고 그 말을 듣고 자기들 중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보았더니 과연 여자들이 말한 바와 같으나 다시 살아나셨다는 그 예수는 못 보았다는, 그런 말들이었습니다. 글로바가 하는 말은 엠마오로 가는 모든 신앙인의 고백이라고 볼 수 있는데요, 그가 한 말을 그 속뜻으로 풀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그동안 믿었던 예수는 그 본질에 있어서는 선이 있는 진리이며, 그러므로 능력 있는 진리입니다. 그런데 내 속에 있는 악과 거짓들이 한창 자라나고 있는 그 진리를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불완전한 진리가 죽고 완전한 진리로 다시 살아나는 것과 그때 영원한 구원이 있음을 믿습니다. 이제 그 진리가 죽은 지 사흘이 되어 살아날 때가 되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아직 내 안에서 진리이신 그 예수를 볼 수 없습니다...

 

즉, 본문에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은 우리 안에서 진리를 대적하는 악과 거짓을 뜻하고, 주님이 죽은 지 사흘이 되었다는 것은 구원자이며 지혜 그 자체이신 주님이 나타나실 때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늘 자신이 진실하지도 선하지도 않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리고 언제쯤이면 지혜로워질 수 있을지 그날만을 고대합니다. 주님이 이루시는 일에는 때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지요. 오늘 말씀을 읽으면서 주님은 어쩌면 지금 우리 가까이 계실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만 눈이 가리어져 주님을 볼 수 없을 뿐입니다.

 

※ 이 엠마오 두 제자 에피소드는 35절까지 이어집니다. 이 뒷이야기는 다음 주에 이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류의 역사 속에서 많은 교회들이 명멸했듯이 우리 안에서도 그동안 많은 교회가 생겼다 사라졌습니다. 새 교회의 진리를 처음 알았을 때는 태고교회처럼 순진한 교회가 내 안에 있었습니다. 그 후에는 고대교회와 같이 진리에 밝은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 점점 싸움이 치열해졌습니다. 싸움에서 넘어져 일어설 힘이 없을 때는 주님을 죽인 유대의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웃고 있었습니다. 그때 우리 안에 있는 악과 거짓이 얼마나 뿌리 깊은 것인지를 깨닫고 절망했습니다. 이제 죽었다 다시 살아나신 주님께서 신성한 진리로 우리 안에 마지막 새 교회를 세우십니다. 이 교회는 다시는 넘어지지 않는 교회이며, 슬픔에 눈물짓지 않는 교회입니다.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지혜가 충만한 교회입니다. 이제 마지막 새 교회를 세우시는 주님의 역사에 호산나를 부르며 동참하시지 않겠습니까?

 

주님의 그런 놀라운 은혜가 주님의 새 교회를 사랑하고 사모하는 모든 성도와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과 함께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므로 나의 종 야곱아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이스라엘아 놀라지 말라 내가 너를 먼 곳으로부터 구원하고 네 자손을 잡혀가 있는 땅에서 구원하리니 야곱이 돌아와서 태평과 안락을 누릴 것이며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라 (렘30:10)

 

아멘

 

2023-05-07(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5-01-12(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01-12(D1)-주일예배(2579, 눅24,13-24),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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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5-01-12(D1)-주일예배(2579, 눅24,13-24),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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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말과 불 병거(왕하6:8-23)로 대통령 관저를 둘러 주시옵소서

 

 

오, 주님, 지금 한남동 대통령 관저를 진입, 윤석열 대통령을 체포하고자 저 불의한 수많은 무리가 모여 모의하고 있고, 그에 비하면 소수인, 그리고 이럴 때 당연히 대통령을 지켜야 할 경찰도, 군도, 법원도, 심지어 대통령실과 정부 행정 관료들조차 대통령을 향해 등을 돌리거나 딴청을 부리는 등 대통령 경호처 몇을 제외하고는 아무 외부 도움을 받을 수 없는, 고립무원 가운데 있는 이때...

 

8그 때에 아람 왕이 이스라엘과 더불어 싸우며 그의 신복들과 의논하여 이르기를 우리가 아무데 아무데 진을 치리라 하였더니 9하나님의 사람이 이스라엘 왕에게 보내 이르되 왕은 삼가 아무 곳으로 지나가지 마소서 아람 사람이 그 곳으로 나오나이다 하는지라 10이스라엘 왕이 하나님의 사람이 자기에게 말하여 경계한 곳으로 사람을 보내 방비하기가 한두 번이 아닌지라 11이러므로 아람 왕의 마음이 불안하여 그 신복들을 불러 이르되 우리 중에 누가 이스라엘 왕과 내통하는 것을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하니 12그 신복 중의 한 사람이 이르되 우리 주 왕이여 아니로소이다 오직 이스라엘 선지자 엘리사가 왕이 침실에서 하신 말씀을 이스라엘의 왕에게 고하나이다 하는지라 13왕이 이르되 너희는 가서 엘리사가 어디 있나 보라 내가 사람을 보내어 그를 잡으리라 왕에게 아뢰어 이르되 보라 그가 도단에 있도다 하나이다 14왕이 이에 말과 병거와 많은 군사를 보내매 그들이 밤에 가서 그 성읍을 에워쌌더라 15하나님의 사람의 사환이 일찍이 일어나서 나가보니 군사와 말과 병거가 성읍을 에워쌌는지라 그의 사환이 엘리사에게 말하되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하니 16대답하되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 하고 17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시매 그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18아람 사람이 엘리사에게 내려오매 엘리사가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원하건대 저 무리의 눈을 어둡게 하옵소서 하매 엘리사의 말대로 그들의 눈을 어둡게 하신지라 19엘리사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는 그 길이 아니요 이는 그 성읍도 아니니 나를 따라 오라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가 찾는 사람에게로 나아가리라 하고 그들을 인도하여 사마리아에 이르니라 20사마리아에 들어갈 때에 엘리사가 이르되 여호와여 이 무리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들의 눈을 여시매 그들이 보니 자기들이 사마리아 가운데에 있더라 21이스라엘 왕이 그들을 보고 엘리사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내가 치리이까 내가 치리이까 하니 22대답하되 치지 마소서 칼과 활로 사로잡은 자인들 어찌 치리이까 떡과 물을 그들 앞에 두어 먹고 마시게 하고 그들의 주인에게로 돌려보내소서 하는지라 23왕이 위하여 음식을 많이 베풀고 그들이 먹고 마시매 놓아보내니 그들이 그들의 주인에게로 돌아가니라 이로부터 아람 군사의 부대가 다시는 이스라엘 땅에 들어오지 못하니라 (왕하6:8-23)

 

저 엘리사의 때에 일어난 일이 지금 대통령 관저에도 일어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리고 의로움과 올바름으로 분연히 일어나 주께 속한 모든 주의 자녀들에게 천사들에게 입혀 주시는 얇은 보호막을 입혀 주셔서, 이 강추위와 더불어 모든 지옥의 기운들로부터 영육간 어디 상하지 않도록 지켜주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받들어 간절히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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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고 (엡4:26) (2025/1/8)

 

간밤 한남동 관저 앞 도로변 상황을 박완석 라이브로 계속 보다가 저분들은 이 강추위 한복판에 아랑곳없이 저렇게 애들을 쓰시는데 나는 따뜻한 방에서 이 무슨... 하는 맘에 마치 죄를 짓는 것 같아 드러눕지도 못하고 앉아 기도하며 자다 깨다를 반복, 토막잠 자던 중 새벽 5시, 얼른 유튜브를 켜니 아이고...

 

어떤 분은 그 추운 아스팔트 바닥에 호일을 돌돌, 마치 김밥처럼 말아 주무시고 계신 분, 그 시간에 청년들이 애들을 쓰며, 누구는 연사로, 누구는 자원봉사로... 그리고 저만치 열 대가 넘어 보이는 대형 버스의 엔진 소리, 보니 애국 후원자들께서 보내주신 ‘난방 버스’, 아... 세상에! 어르신들, 이곳에서 몸 녹이시라고... 아이고, 주님, 순간 울컥...

 

요 며칠 계속 이 급변 정국으로 스트레스를 받아 마음의 애를 써서인가 오늘은 제법 몸에 무리가 오고, 두통이 있습니다. 곰곰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마음에 원망과 분노, 저주의 기운을 받아들여 깜빡, 제 안에 벌어진 틈을 따라 지옥이 들어온 것입니다. 아... 서둘러 수습,

 

오, 주님, 주님도 때로는 노를 발하셨지만, 그러나 주님의 분노는 거룩한 분노여서 주님은 죄를 짓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정말 이 시대 저 이재명과 그의 무리들, 그리고 온 나라 전반에 퍼져 있는 이 독버섯 같은, 암세포 같은 불의한 자들로 정말 화가 많이 나지만, 그러나 참으로 주님 안에서 분노하고 싶습니다. 오, 주님, 저를 붙들어 주셔서 제가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않는, 분을 내다가 지옥문이 열리는 우를 범치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기도합니다. 그리고 또 기도하기를,

 

오, 주님, 다니엘이 사자굴에 들어가서도, 그리고 그의 세 친구가 풀무불에 던져졌어도 전혀 몸이 상하지 않았던 것처럼, 지금 주님의 선, 곧 주님의 올바름을 사랑하는 저분들을 지켜주시고, 역시 일체 몸 상하지 않도록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주님 안에서 안전하게 나라를 사랑하여 지옥의 기운으로부터 보호받게 하여 주시옵소서!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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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살 동안 다음과 같은 믿음, 곧 자신들이 행하는 선과 자신들이 믿는 진리는 모두 자신들한테서 나오는 것이라고, 즉 자신들의 본성, 그러니까 능력상 그게 맞다 믿으며 살아온 영들은 천국 안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이런 믿음은 선행을 자기 공로로 여기고, 스스로를 의롭다 여기는 사람이라면 누구한테서나 볼 수 있는 믿음인데요, 하지만 천사들은 그런 영들을 피합니다. 천사들은 그들을 어리석다 하며, 도둑들로 보기 때문인데요, 어리석다 하는 이유는, 그들이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아니고 말입니다. 도둑들로 보는 이유는, 그들이 주님이 공급하시는 걸로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주님의 것을 훔치기 때문입니다. 이런 태도는 천국 천사들의 믿음, 곧 천사 자신들 안에 있는 주님의 것, 주님의 신성이 천국을 이룬다는 믿음을 역행하는 것입니다. Such spirits as have confirmed themselves during their life in the world in the belief that the good they do and the truth they believe is from themselves, or is appropriated to them as their own (which is the belief of all who place merit in good actions and claim righteousness to themselves) are not received into heaven. Angels avoid them. They look upon them as stupid and as thieves; as stupid because they continually have themselves in view and not the Divine; and as thieves because they steal from the Lord what is his. These are averse to the belief of heaven, that it is the Divine of the Lord in the angels that makes heaven. (HH.10)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2장, '천국을 이루는 것은 주님의 신성이다'(It Is the Divine of the Lord That Makes Heaven, HH.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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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평하게 하는 자,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

 

 

9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0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11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마5:9-12)

 

 

진리의 확신이 속 사람과 분리된 겉 사람 안으로 내려오게 되면 맹세에 의한 확신이 되지만, 속 사람을 통해 겉 사람 안으로 내려온다면 그건 다른 것이다. 왜냐하면 속 사람 안에서 진리는 자신의 빛 가운데서 나타나지만, 속 사람과 분리된 겉 사람 안에서는 어둠 속에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내적인 천국, 또는 삼 층 천국의 가장 밝은 빛 안에 있는 천적 천사들은 진리에 대해 추론하지 않고 논쟁하지도 않으며, 단지 예, 아니오 라고만 말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주님으로부터 진리를 깨닫고 지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천국의 비밀 9166:2, 이순철 역) When the confirmation of truth descends into the external man separated from the internal, it is effected by an oath. It is otherwise when it descends into the external through the internal; for in the internal man truth appears in its own light, but in the external apart from the internal man, truth appears in darkness. From this it is that the celestial angels, who are in the inmost or third heaven, being in the highest light, do not even confirm truths by reasons, still less do they debate or reason about them, but merely say Yea, or Nay. This is because they perceive and see truths from the Lord. (AC.9166:2)

 

 

※ 다음은 이 설교의 원 저자이신, 당시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님의 에피소드입니다.

 

우리 교회의 새해 포부는 겸손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과 이웃 앞에, 또는 진리 앞에 자신을 낮추는 사람이 되는 것이죠. 그러나 일상으로 돌아가면 연초에 품었던 생각들을 지켜내는 게 쉽지 않습니다. 가끔은 다른 사람과 다투기도 하고 서로 상처를 받습니다. 저도 새해 벽두에 연말에 거래했던 가구점 주인하고 다툼이 좀 있었습니다. 아내가 나이가 들면 침대 생활을 하는 게 좋다고 해서 지난 연말에 침대를 주문했는데 사정이 생겨 취소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가구점 주인은 주문을 취소할 경우, 10% 위약금을 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전에 고지도 없이 그런 규정을 소비자에게 강요하는 게 옳으냐고 항의를 했습니다. 결국 위약금 없이 주문이 취소되긴 했는데, 그러고 나니 마음이 몹시 불편했습니다. 이런 일이 있을 때 신앙인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다투지 말고 손해를 보는 편이 옳은가요, 아니면 시비를 끝까지 가리는 게 주님 앞에 옳은 일인가요?

오늘 본문 9절입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여기 ‘화평하게 하는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새 교회에서 말하는 평화나 화평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천국의 비밀’ 1038:2번 글을 보면,

 

천국의 평화는 천사들 간의 상호적 사랑 안에만 있다. peace” signifies the kingdom of the Lord, and the kingdom of the Lord consists in mutual love, in which alone is peace.

 

고 합니다. 상호적 사랑이란 한마디로 이웃에 대한 사랑을 뜻합니다. 천국에서 이웃 사랑을 상호적 사랑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천국의 천사들은 색깔은 다르나 각자의 진리를 가지고 있고, 그 진리를 서로 존중하고 지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사들끼리는 상대방의 진리를 가지고 옳으니 그르니 다투는 일이 없고, 평화만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떻습니까? 세상에서는 같은 일을 가지고도 어떤 사람은 진리라고 하고, 다른 사람은 거짓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가족이나 친한 친구 사이에도 어떤 진리에 대해 의견이 하나 되기가 어렵습니다. 세상에 평화가 없고, 싸움이 그치지 않는 것은 그런 까닭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사정을 너무도 잘 아시면서도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되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이웃이 거짓을 말하는데도 자신의 진리를 버리고, 이웃의 생각을 따라야 할까요? 그것이 화평일까요? 그건 아닙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화평하게 하는 자’는 이웃을 사랑하되 상대의 진실만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를 판단하는 일인데, 주님께서는 겉 사람의 얕은 지식으로 진리를 추론하지 말고, 속 사람으로부터 유입되는 진리를 통해 판단하라고 하십니다. 그것에 대해 주님은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마5:37)

 

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라고 하신 것은,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진리가 아니라 겉 사람의 지식만으로 진리를 판단할 때는 자칫 자아의 욕망에 휘둘릴 수 있음을 경계하라시는 말씀입니다. 자아가 끼어들면 진리가 쉽게 왜곡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주님은 세상에 계실 때, 화평하게 하는 자의 모범이 되셨습니다. 주님이 보여 주신 몇 가지 사례를 통해 우리는 어떻게 하는 게 화평케 하는 일인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21장에는 주님께서 성전에서 돈을 바꿔주거나 비둘기를 파는 자들의 상을 엎으시고, 그들을 모두 성전 밖으로 쫓아내시는 모습이 나옵니다.

 

12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고 13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마21:12-13)

 

주님이 그렇게 과격한 행동을 하신 것은 성경 전체에서 처음 있는 일일 것입니다. 주님이 그렇게 하신 까닭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할 교회 안에 말씀을 이용해 사리사욕을 취하는 장사꾼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보시기에 당시 유대 교회의 지도자들은 말씀을 이용해 재물을 모으거나 높은 자리에 오르려는 장사꾼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주님은 교회 안에서 진리가 바로 서야 함을 보여 주려 하신 것입니다.

 

※ 다음은 이와 관련된 배경 이야기입니다. 류모세 저, ‘열린다 성경, 성전 이야기’ 인용입니다.

 

성전 벽 남쪽의 더블 게이트를 통해 들어가면 왕의 행각 지하를 거쳐서 성전 뜰 밖으로 나오게 된다. 밖으로 나오면 바로 왼쪽에 예수님 당시 대제사장이었던 안나스와 가야바가 직영하던 부스가 있었다. 가야바는 안나스의 사위다.

 

이 상점에서 성전 제사에 필요한 물건, 즉 소, 양, 비둘기, 밀가루, 올리브 기름, 포도주, 나무 등을 팔았고, 성전세로 바칠 반 세겔을 바꾸는 환전상도 이곳에 있었다. 이 상점은 대제사장인 안나스 가문이 직영으로 운영했고, 여기서 구입한 제물만 성전 제사에 적합한 규격품으로 인정받았다. 당연히 가격은 시중가의 몇 배나 비쌌고, 이들은 엄청난 폭리를 취했다.

 

성전 뜰에서는 물건을 사고파는 행위를 할 수 없었지만, 안나스의 직영 상점은 원래의 성전 뜰인 마카베오 성전산의 바깥인 헤롯 성전산에 위치했기 때문에, 법적으로 따지면 모세의 율법을 어긴 것은 아니었다. 이렇듯 성전을 중심으로 한, 당시의 종교적 기득권층은 교묘하게 법망을 피해 가며,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채우고 있었다.

 

여호와께 드리는 제물은 자신의 수확물과 가축 가운데 흠이 없는 것을 가져와야 했지만, 안나스 가문은 자신의 상점에서 구입한 제물만 바치도록 함으로써 가장 수지맞는 이권에 개입하였다. 당시 이런 일은 유대 땅을 다스리던 로마 총독과의 결탁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제사장은 로마 총독에게 엄청난 뇌물을 리베이트로 바침으로써 대제사장직을 얻을 수 있었고, 꾸준한 뇌물공여로 자신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예수님 당시 안나스 가문은 로마에 엄청난 뇌물을 주어 대제사장직을 독차지했는데, 이처럼 극도로 타락한 종교 세력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이다.

 

당시에 제사장 그룹은 로마와 한패로 인식되었다. 66년 로마에 대항해 유대인들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예루살렘을 점령한 메나헴이 가장 먼저 제사장 가문을 학살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

 

그런가 하면 누가복음 11장에는,

 

37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한 바리새인이 자기와 함께 점심 잡수시기를 청하므로 들어가 앉으셨더니 38잡수시기 전에 손 씻지 아니하심을 그 바리새인이 보고 이상히 여기는지라 39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40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41그러나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 42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43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 44화 있을진저 너희여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느니라 45한 율법교사가 예수께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이렇게 말씀하시니 우리까지 모욕하심이니이다 46이르시되 화 있을진저 또 너희 율법교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 47화 있을진저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드는도다 그들을 죽인 자도 너희 조상들이로다 48이와 같이 그들은 죽이고 너희는 무덤을 만드니 너희가 너희 조상의 행한 일에 증인이 되어 옳게 여기는도다 49그러므로 하나님의 지혜가 일렀으되 내가 선지자와 사도들을 그들에게 보내리니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며 또 박해하리라 하였느니라 50창세 이후로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를 이 세대가 담당하되 51곧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과연 이 세대가 담당하리라 52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교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서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하시니라 53거기서 나오실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거세게 달려들어 여러 가지 일을 따져 묻고 54그 입에서 나오는 말을 책잡고자 하여 노리고 있더라 (눅11:37-끝)

 

라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주님이 미워하신 건 인간 바리새인이 아니라 그들의 위선이었습니다. 이런 말씀들에서 주님의 분노를 느낄 수 있습니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그 사랑만큼 거짓을 미워합니다. 하물며 주님은 진리 자체이신 분입니다. 그러니 진리를 대적하고 교회를 파괴하는 지옥의 악과 거짓이 얼마나 미우셨겠습니까? 그러므로 그때 주님의 분노는 속된 인간의 분노가 아니라 진리에 대한 주님의 무한한 사랑에서 비롯한 신성한 분노입니다.

 

주님이 악과 거짓을 상대로 늘 과격하셨던 건 아닙니다. 대제사장들과 빌라도에게 끌려가셨을 때는 몸이 찢겨나가고, 종국에는 십자가 위에서 죽을 것을 아셨음에도 당신 자신을 위해 어떤 변명도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당신의 인간 안에 있는 자아와의 싸움에서 이기는 방법이기도 했습니다. 인간의 자아는 언제나 수치와 굴욕을 두려워하고, 궁극적으로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므로 그런 일들이 닥칠 때, 할 수만 있다면 그것들로부터 달아나려 합니다. 영화롭게 되기 전 주님의 인성(human) 안에도 자아의 그런 원초적인 욕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그 모든 고난을 묵묵히 이기셨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때로는 진리를 위해 분연히 맞서 싸우셨고, 때로는 자아의 욕구를 누르시며, 고난을 견뎌내셨습니다. 그것이 세상에 화평을 주는 길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주님에게서 그와 같은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화평케 하는 자가 되라 하신 주님께서 이번에는 의를 위하여 박해받은 자는 복이 있다 하십니다. 본문 10절과 11절입니다.

 

10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11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이 말씀에서 의란 뭘까요? ‘참된 기독교’ 96번은

 

의는 하나님의 질서를 뜻하고, 의를 실천하는 것은 의로움과 진실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부터 이웃을 사랑하는 것 Divine order is righteousness. Righteousness is acquired only so far as man practices righteousness; and this he does so far as he acts towards the neighbor from a love of what is righteous and true;

 

이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의란 진리를 따라 이웃을 사랑하는 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무조건 베푸는 걸 이웃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만,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되 진리를 따라 사랑해야 합니다. 상대가 원한다고 악한 사람에게 흉기를 내어 주거나 마약 중독자에게 마약을 파는 건 의도 아니고 사랑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의를 위한 일이 박해를 받는 이유가 뭘까요? 의롭지 않은 사람에게는 의로운 사람의 행동이 눈엣가시처럼 거슬리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본 것처럼, 주님은 진실하지 않은 자들과는 타협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을 가리켜 그들의 외식을 주의하라고 하셨고, 유대 교회의 지도자들을 향해서는 강도요 삯꾼이라고 비난하셨습니다. 반대로 진리를 갈구하는 사람들과는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그들과 함께 먹고 마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위선자와 삯꾼들에 의해 박해받으셨고, 결국 죽임을 당하신 것입니다. 의를 추구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렇게 박해를 받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라고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해 주님은 화평케 하는 자, 의를 위해 박해 받는 자가 되라고 하십니다. 이 두 가지 가르침 속에 공통적으로 들어 있는 교훈은 이웃을 사랑하되 진리를 따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자기 생각이 곧 진리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보실 때는 진리가 아닐 때가 많습니다. 진리와 거짓을 어떻게 분별할 수 있습니까? 대개는 각자가 가지고 있는 지식을 바탕으로 추론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방법으로는 진리와 거짓을 올바로 판단할 수 없다고 하십니다. 그것은 겉 사람의 생각으로 속 사람에 속한 것을 판단하는 것이며, 그러므로 질서에 어긋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의 생각과 의지 안으로 진리의 빛이 흘러들어올 때, 우리는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생각이 진리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머리로 추론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방법으로 이웃의 진리를 사랑하고 그것과 연합할 때, 비로소 화평케 하는 자, 의로운 자가 됩니다. 그러다 보면 어려운 일이 많을 것입니다. 가까운 사람에게조차 때로는 ‘아니오’라고 말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화평케 하는 자, 의를 위해 박해받는 자에게 주시는 상이 새해를 맞는 모든 성도와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이웃과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마5:12)

 

아멘

 

 

2024-01-07(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5-01-05(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01-05(D1)-주일예배(2578, 마5,9-12, 신년주일예배), '화평하게 하는 자,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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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찬.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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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5-01-05(D1)-주일예배(2578, 마5,9-12, 신년주일예배), '화평하게 하는 자,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pdf
0.25M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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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 천사들은 시인하기를, 모든 선은 주님으로 말미암으며, 자신들로부터 말미암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그리고 주님은 자기들 안에 있는 주님의 것 안에 계시지, 자기들의 것 안에는 계시지 않는다고 한다. The angels of heaven acknowledge all good to be from the Lord, and nothing from themselves, and the Lord dwells in them in His own and not in their own. (HH.8)

 

또 그들은 말하기를, 이 유일한 생명의 원천으로부터, 이 원천은 주님이신데, 나오는 것은 오직 신적 선과 신적 진리밖에 없다고, 그리고 각 사람은 이것, 곧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이  신적 선과 신적 진리를 얼마나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한다. 즉 선과 진리를 신앙과 생활(생명) 안에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그 안에 있는 천국을 발견하지만, 거부하거나 질식시키는 사람은 그것을 지옥으로 만든다고 한다. Again, they say that from this one fountain of life, which is the Lord, nothing goes forth except Divine good and Divine truth, and that each one is affected by these in accordance with his reception of them—those who receive them in faith and life find heaven in them while those who reject them or stifle them change them into hell; (HH.9:2)

 

이것이 천사들의 믿음이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의 선행에 대한 감사를 전부 거절하고, 만일 누군가가 선을 그들, 곧 천사들의 공로로 돌리는 사람들이 있으면 화를 내고 물러선다. 그들은 사람들이 내가 이렇게 지혜로운 건 오직 내가 열심히 해서야라거나, 나는 내 힘으로 이렇게 선행을 하는 거야라고 믿는다는 사실에 놀란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선을 행하는 것을 그들은 선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건 자아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선 자체를 목적으로 선을 행하는 것은 신성으로 말미암은 선이라고 한다. 천사들은 말하기를, 이것이 바로 천국을 이루는 선이라고, 이 선이 곧 주님이시라고 그들은 말한다. This being the belief of the angels they refuse all thanks for the good they do, and are displeased and withdraw if anyone attributes good to them. They wonder how anyone can believe that he is wise from himself or does anything good from himself. Doing good for one’s own sake they do not call good, because it is done from self. But doing good for the sake of good they call good from the Divine; and this they say is the good that makes heaven, because this good is the Lord. (HH.9:3)

 

주님으로 말미암는 선은 그 안에 내적으로 주님이 계시지만, 사람으로 말미암는 선은 그렇지 않다. Good from the Lord has the Lord inwardly in it, but good from one’s own has not. (HH.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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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진함은 신앙의 진리와 사랑의 선을 받는 그릇이기 때문에 천국의 모든 것이 심기는 바탕이 된다. and in innocence all things of heaven can be implanted, for it is a receptacle of the truth of faith and of the good of love. (HH.330)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김은경 역), 37장, ‘천국의 어린이들’(Little Children in Heaven)

 

이번 신정 연휴를 3세, 0세 손주들과 보내면서 더더욱 위 기술(記述)을 깊이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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