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유에 누이신 주님을 목격한 사람들

 

 

8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9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10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13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14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15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 하고 16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17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전하니 18듣는 자가 다 목자들이 그들에게 말한 것들을 놀랍게 여기되 19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새기어 생각하니라 20목자들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눅2:8-20)

 

 

베들레헴은 새로운 상태에서의 천적인 것에 속한 영적인 것을 뜻한다. 이 상태는 선과 진리에 대한 새로운 애정이 있는 상태이다. 왜냐하면 천적인 것에 속한 영적인 것은 선에서 비롯한 진리이고, 그러므로 선에서 비롯한 진리에 대한 애정이기 때문이다. (천국의 비밀 6247, 이순철 역) ...from the signification of “Bethlehem,” as being the spiritual of the celestial in a new state (see n. 4594), thus a state of new affection of truth and good; for the spiritual of the celestial is the truth of good, thus the affection of truth from good. (AC.6247, Clowes 역)

 

※ 윗글은 아래 창세기 48장 7절 말씀에 대한 주석 일부입니다.

 

내게 대하여는 내가 이전에 밧단에서 올 때에 라헬이 나를 따르는 도중 가나안 땅에서 죽었는데 그곳은 에브랏까지 길이 아직도 먼 곳이라 내가 거기서 그를 에브랏 길에 장사하였느니라 (에브랏은 곧 베들레헴이라) (창48:7)

 

 

※ 오늘 본문은 지난주 본문과 앞부분이 좀 겹칩니다. 원래대로라면 15절부터 새로운 본문이어야 하는데, 아마 21절까지 말이지요, 이상하게 이 부분에 대한 설교 원본을 구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득이 여러 성탄절 본문 중 여기에 근접한 것으로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새 교회의 모든 성도님과 함께 주님의 탄생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구약의 예언서에는 주님의 탄생을 예언하는 말씀이 여러 곳에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사야서 7장 14절에는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사7:14)

 

했고, 또 미가서 5장 2절에는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미5:2)

 

고 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나 미가 선지자나 주님 오시기 전, 약 700년 전의 사람들인 걸 감안하면, 메시아에 대한 믿음은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탄생하시던 날, 주님께 경배를 드린 사람은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과 멀리 시리아에서 온 동방박사들뿐이었습니다. 세상에 오신 주님을 인정하는 사람이 그렇게 없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목자들에 대한 내용입니다. 본문 8절, 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8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9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밤에 목자들이 들에서 양을 지키고 있는데 갑자기 천사들이 나타났습니다. 여기서 밤은 주님이 오실 당시 유대교회의 영적 상태를 의미합니다. 즉 교회 안에 진리도 없고, 사랑도 없는 상태입니다. 유대교회가 그렇게 된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인간의 생각을 섞어 인간의 학문으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진리 안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런 진리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어떻게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중에도 주님이 주신 사랑과 인애(仁愛, charity)를 지키고 실천하려는 사람들이 있었는데요, 본문에 자기 양 떼를 지키던 ‘목자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 태고교회부터 시작, 고대교회와 유대교회, 그리고 현 기독교회 역시 각 교회 시대의 종말마다 소위 ‘남은 자’(remnant), ‘리메인스’(remains)라 하는, 주님이 그때그때 새 교회를 일으키시기 위해 사용하신 소수의 신앙인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선 그중 일부가 바로 이 ‘목자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마치 태고교회와 고대교회를 잇는 ‘노아’라는 극소수의 사람들이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노아’는 어느 한 개인의 이름이 아닌, 그 시대 특정 신앙이나 교리, 교회를 일컫는 이름입니다. 창세기 아브라함의 등장 전까지는 그 등장인물들의 이름은 모두 이런 의미를 가집니다.

 

’은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비롯한 선을 뜻하고, ‘목자’는 그 선을 지키기 위해 힘쓰는 사람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들 앞에 주님의 천사들이 나타나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는데요, 그러자 목자들이 크게 무서워합니다.

 

10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말씀에서는 주님이 선지자나 사도들에게 나타나실 때 그들의 모습을, 떨거나 죽은 사람처럼 되거나, 또는 온몸의 기운이 빠진 걸로 기술하는데요, 가령, 다니엘 같은 경우입니다. 다니엘서 10장 4절로 12절입니다.

 

4첫째 달 이십사일에 내가 힛데겔이라 하는 큰 강가에 있었는데 5그때에 내가 눈을 들어 바라본즉 한 사람이 세마포 옷을 입었고 허리에는 우바스 순금 띠를 띠었더라 6또 그의 몸은 황옥 같고 그의 얼굴은 번갯빛 같고 그의 눈은 횃불 같고 그의 팔과 발은 빛난 놋과 같고 그의 말소리는 무리의 소리와 같더라 7이 환상을 나 다니엘이 홀로 보았고 나와 함께 한 사람들은 이 환상은 보지 못하였어도 그들이 크게 떨며 도망하여 숨었느니라 8그러므로 나만 홀로 있어서 이 큰 환상을 볼 때에 내 몸에 힘이 빠졌고 나의 아름다운 빛이 변하여 썩은 듯하였고 나의 힘이 다 없어졌으나 9내가 그의 음성을 들었는데 그의 음성을 들을 때에 내가 얼굴을 땅에 대고 깊이 잠들었느니라 10한 손이 있어 나를 어루만지기로 내가 떨었더니 그가 내 무릎과 손바닥이 땅에 닿게 일으키고 11내게 이르되 큰 은총을 받은 사람 다니엘아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깨닫고 일어서라 내가 네게 보내심을 받았느니라 하더라 그가 내게 이 말을 한 후에 내가 떨며 일어서니 12그가 내게 이르되 다니엘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깨달으려 하여 네 하나님 앞에 스스로 겸비하게 하기로 결심하던 첫날부터 네 말이 응답받았으므로 내가 네 말로 말미암아 왔느니라 (단10:4-12)

 

주님이 나타나실 때,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고, 온몸에 기운이 빠져 죽은 자처럼 되는 이유가 뭘까요? 그것은 주님의 위엄 앞에서 그들의 자아가 완전히 굴복하는 모습입니다. 죽은 자처럼 된다는 것은 마치 자아가 없는 것처럼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영적으로 보면 지극히 경건한 모습입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주님께서 오셔서 그를 새롭게 만드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유로 성(聖) 문서에서는, 주님을 만날 때의 떨림을 거룩한 떨림, 또는 거룩한 전율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떠는 사람에게 ‘무서워하지 말라’ 하시는 것은 그 순간 주님께서 그를 영적으로 새롭게 만드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 위 ‘(聖) 문서’라는 용어는 스베덴보리가 영계 체험 이후부터 기록한, 그러니까 주님이 그의 손을 빌려 기록하신 저작들(Writings)을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자기가 천국에서 듣고 본 모든 경험과 남기는 이 모든 기록은 오직 주님의 허락으로 하는 것이며, 특히 창세기, 출애굽기 주석은 오직 주님이 친히 하시는 말씀을 자기는 성경 한 권만 가지고 받아 적었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마치 오늘날의 프린터처럼 말이지요. 그래서 그가 남긴 기록들에 대하여 ‘’(聖)이라는 글자를 붙이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절대로 안 되죠. 감히 말입니다! 이 형용은 오직 주님 한 분께만 사용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영적으로 새롭게 된 목자들에게 천사들이 전한 기쁜 소식은 무엇이었을까요? 다윗의 동네에 구주, 곧 그리스도 주님이 태어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가 곧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뜻입니다. 오늘날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 중에는 입으로는 삼위일체를 주장하면서 실제로는 아버지 하나님 따로, 아들 하나님 따로, 성령 하나님 따로, 세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문자적으로만 보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따로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셋이 아니라 한 분 주님 안에 있는 여러 성품을 나타냅니다. 즉 사람 안에 영이 있고 몸이 있으며, 영으로부터 몸을 통해 나오는 능력이나 에너지, 기운이 있는 것처럼, 주님도 그렇게 영과 몸과 영으로부터 몸을 통해 발산되는 에너지와 기운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삼위는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한 분 주님 안에 있는 세 가지 본질인 것입니다. 목자들처럼 마음속에 사랑과 체어리티가 있는 사람은 그러한 진리를 누구보다 잘 이해합니다. 사랑과 체어리티는 진리를 끌어당겨 자신과 하나로 만들려는 성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마음속에 체어리티가 없으면 진리를 배척합니다. 바리새인들이 주님을 이유 없이 미워하고 해치려 했던 것도 그들의 내면에 사랑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속에 사랑이 있는 사람은 진실을 진실이라고 하고, 거짓은 거짓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는 사람은 거짓을 진실이라 하고, 진실을 거짓이라 폄하하고 비난합니다. 인력으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질서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천사들이 목자들에게 제일 먼저 주님의 탄생을 알린 것은 그래서입니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12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그러니까 베들레헴에 가면 강보에 싸여 말구유에 누워있는 아기가 있을 것인데, 그 아기가 바로 주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말구유에서 태어나신 이유는 여관에 방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말씀에서 ‘여관’(inn)은 진리를 가르치는 곳인 교회를 뜻하고, ‘’은 교리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여관에 방이 없다는 것은 교회에 참된 교리가 없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교리 안에서 진리로 존재하십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참된 교리가 없다는 것은 유대교회 안에 주님이 계실 곳이 어디에도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불가피하게 외양간 말구유에서 태어나셔야 했습니다. 말씀에서 ‘’(horse)은 진리에 대한 이해력을 뜻합니다. 그리고 ‘구유’(manger)는 말이 먹이를 먹는 곳이므로 교리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말구유에 누워계시는 주님은 신앙인들의 지성을 먹이는, 교리라는 진리로서의 주님을 뜻합니다. 그러면 주님을 감싸고 있는 강보는 무슨 뜻일까요? ‘강보’는 주님의 신성으로부터 나오는 첫 번째 진리를 뜻합니다. 그것은 태양의 뜨거운 불에서 나오는 첫 번째 빛과 같이 순수하고 밝은 진리입니다. 태양에서 처음 나오는 빛은 우주공간과 대기권을 차례로 지나 사람들에게 도달합니다. 그러니 그 빛과 열기가 얼마나 희석되겠습니까? 주님의 진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신성에서 나오는 처음 진리는 인간이 받아들일 수 없는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그 진리는 각자의 영적 상태에 맞도록 주님에 의해 그 빛과 열기가 조절된 진리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 원형은 주님의 신성으로부터 바로 나온 진리, 즉 순진무구한 진리라는 것입니다. 그 진리가 바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 곧 주님이십니다.

 

13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14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지극히 높은 곳’은 하늘에서는 천국이요, 사람 안에서는 속 사람입니다. 또 ‘’은 지상에서는 교회이며, 사람 안에서는 겉 사람을 뜻합니다. 따라서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는 하늘과 땅에서 주님을 여호와로 인정하는 사람, 모든 선하고 진실한 것이 오직 주님에게서만 나온다고 믿는 사람들이 드리는 감사와 영광의 고백입니다. 그러면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는 무슨 뜻일까요? 여기서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은 아기로 오신 주님이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시인하는 사람,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의 것이라는 걸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지옥의 악과 거짓으로부터 지켜주십니다. 땅에 있는 사람들에게 평화란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천사들은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찬송한 것입니다.

 

15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 하고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자 목자들이 서로 말하되 베들레헴으로 가자고 합니다. 구유에 계신 주님을 직접 뵙기 위해서입니다. 목자들이 천사로부터 진리를 깨우치는 것처럼, 우리도 천사를 통해 진리를 깨닫습니다. 그러나 가끔은 이것이 천사를 통해 얻은 생각인지 인간의 생각인지 분명치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경우, 우리는 말씀의 속뜻 진리를 통해 그것을 확인해 보려고 합니다. 목자들이 구유에 계신 주님을 뵙기 위해 베들레헴으로 간다는 것은 그런 의미입니다. ‘베들레헴’은 자연적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수준의 진리인 합리적 진리와, 말씀의 문자적 뜻인 자연적 진리를 서로 연결시켜 주는 중간자적 진리, 즉 선에 속한 진리(truth of good)나 선이 있는 진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이 세상에 오실 때는 선한 진리, 선을 동반한 진리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베들레헴에 태어나신 것입니다. 선의 진리, 선에 속한 진리, 선을 동반한 진리라고 하는 이유는, 이 진리는 주님이 인간의 겉 사람 안에 심어놓으신, 체어리티라고 하는 선 안에서 자라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성 문서에서는 그것을 선이 있는 진리 또는 신앙의 진리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체어리티가 없는 사람은 자연적 진리 상태에 계속 머물러만 있을 뿐, 선의 진리, 즉 선에 속한, 선을 동반한, 참 신앙의 진리로 넘어갈 수 없습니다.

 

16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17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전하니 18듣는 자가 다 목자들이 그들에게 말한 것들을 놀랍게 여기되 19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새기어 생각하니라

 

드디어 목자들이 베들레헴으로 가서 구유에 계신 주님을 뵙습니다. 그리고 천사들로부터 들은 진리가 사실임을 확인하고, 거기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들은 바를 전했습니다. 그러자 듣는 자들이 다 목자들이 말한 것들을 놀랍게 여겼다고 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목자들은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랑으로 진리를 행하면서 전할 때, 그들의 진리에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듣는 자가 목자들이 말한 것들을 놀랍게 여겼다는 것은 그들이 전하는 진리가 듣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였다는 뜻입니다.

 

20목자들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목자들이 봤다는 것은 진리를 깨닫는 것을 뜻하고, 들었다는 것은 진리에 순종해 행동으로 옮겼다는 뜻입니다. 신앙인들이 이렇게 한편으로는 새로운 진리를 깨우치고, 한편으로는 그것을 실천할 때, 자기도 모르게 주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이 자신의 힘으로 이룬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루신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목자들이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이 세상에 오실 때, 제일 먼저 당신의 탄생을 알린 사람들은 지위가 높거나 재물이 많은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들에서 양 떼를 지키던 목자들이었습니다. 양은 각자의 마음속에 있는 주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체어리티를 뜻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목자들은 주님이 주신 사랑과 체어리티를 지키고 실천하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제일 먼저 오십니다. 주님은 사랑 없는 믿음 안에 계시지 않고, 사랑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기 예수님이 목자들에게 오신 것처럼 주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말씀의 속뜻이라는 순수한 진리로 오셨습니다. 말씀의 속뜻 진리 안에는 문자적인 의미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선한 것이 들어있습니다. 그 선으로 우리는 마음속에 있는 양들을 지킬 수 있으며, 또한 매일 같이 새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목자들이 천사들로부터 들은 바를 세상 사람들에게 전한 것처럼 우리도 체어리티의 삶을 통해 이웃에게 진리를 전해야 합니다. 진리는 말로 전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와 결합한 선한 삶으로 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새 교회에 맡기신 사명은 이 시대의 어둠을 밝히는 등불이 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분명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자신을 돌아보면 주님 앞에 얼굴을 들지 못할 정도로 부끄러울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 또한 우리의 모습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회개하고 또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빛이 없던 각자의 등불들이 살아나고, 그로 인해 세상을 덮은 재앙의 어둠이 걷힐 것입니다. 성탄절을 맞이하여 새 교회의 모든 성도가 주님 앞에 그런 충직한 목자들로 거듭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성탄의 기쁨과 평화가 성도님들과 가정에 가득하시길 기도합니다.

 

 

이 밤은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심으로 말미암아 여호와 앞에 지킬 것이니 이는 여호와의 밤이라 이스라엘 자손이 다 대대로 지킬 것이니라 (출12:42)

 

아멘

 

원본

2020-12-20(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3-08(D4)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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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목자들에게 전하신 이유

 

 

8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9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10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13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14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눅2:8-14)

 

 

지난 시간에는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을 당시에 일어난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단순한 역사적 사건만이 아니고요, 우리 신앙인들이 거듭나는 동안 필연적으로 거쳐야 하는 과정이라는 것도 말씀드렸습니다. 내적 의미로 볼 때, 주님의 탄생은 신앙인들의 신앙 가운데로 주님이 가장 순수한 진리로 오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을 믿는다, 신앙한다고 해서 모두 신앙이 아닙니다. 신앙 안에 이웃에 대한 사랑, 곧 체어리티(charity)의 삶이 있어야, 그래야 진짜 신앙입니다. 그래서 사랑 없는 신앙은 껍질만 있고 과육은 없는 열매와 같으며, 그러므로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습니다. 사랑 없는 신앙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입니까? 진리를 믿는다고 하면서 행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또 진리를 행하더라도 진리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사사로운 목적, 개인의 사사로움을 위해서 행하는 것입니다. 많은 신앙인이 이런 신앙 가운데 있습니다. 왜 우리는 아직도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걸까요? 자기를 내려놓는 일이 힘들어서이기도 하지만, 결국 우리 안에 아직 주님이 오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주님은 어떤 사람에게 언제 오실까요? 8절입니다.

 

8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킬 때라고 합니다. 말씀에서 ‘지역’은 본래, 그러니까 그 속뜻은 이웃을 뜻합니다. 얼핏 전혀 다른 뜻이지요. 아마 사람이 어떤 지역에 사는 모습이 그 지역 이웃들과 함께 사는 모습처럼 보이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지역은 교회를 뜻합니다. 지역이 이웃을 뜻하면서, 또한 교회를 뜻하는 이유는, 우리가 가장 사랑해야 할 이웃이 바로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목자는 누구일까요? ‘목자’는 사람들을 진리로 가르치고, 선한 삶으로 이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일반적인 의미에서 목자는 성직자를 뜻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성직자나 목회자가 아니고요, 신앙인 중에 마음속에 양을 키우는 사람들입니다. ‘’은 무슨 뜻입니까? 순진함, 또는 순수한 선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양은 진리 배우기를 좋아하고, 그 진리에 따라 살고자 하는 순진한 애정을 말합니다. 따라서 본문에서 말하는 ‘그 지역에 목자들’이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진리를 사랑하는 순수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수시로 변하는 영적 상황 속에서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과 진리를 지키기 위해서 자신과 끊임없이 싸웁니다. 그것을 본문에서는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로 표현했습니다.

 

※ 여기서 잠깐, 본문 중 ‘밖에서’라는 표현 관련, 매우 흥미로운 글이 있어 소개합니다. 류모세 저, ‘열린다 성경, 절기 이야기’ 15장, ‘예수님은 언제 태어나셨을까?’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성경에는 과연 크리스마스를 유추해 낼 수 있는 근거가 있을까? 다행히 직접적인 언급은 아니지만 크리스마스를 유추해 낼 수 있는 가장 설득력 있는 말씀이 누가복음에 나온다.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눅2:8)

 

베들레헴에서 아기 예수가 탄생했을 때 이 소식을 가장 먼저 들은 사람은 밤에도 성실하게 양들을 돌보던 목자들이었다. 예수님 탄생 당시에 목자들은 농사를 지으며 정착생활을 하는 농경 문화의 주류 사회에 들지 못하고, 그때까지도 양과 염소에게 먹일 풀밭을 찾아 떠돌아다니는 유목민으로서 최하류 계층이었다.

 

예수님 탄생 당시 유대 땅은 헤롯 왕이 통치하고 있었다.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마2:1)

 

우리에게 헤롯은 악한 왕의 대명사로 통하지만, 역사적으로 그의 통치기간 동안 이스라엘은 유럽과 아시아 그리고 아프리카를 잇는 유대 땅의 지정학적 이점을 잘 살려 상업이 발달하고 인구가 증가했다.

 

집 지을 땅과 농사지을 농경지가 점점 부족해지자 목자들은 황량한 광야로 밀려나야 했다. 비록 돌과 바위가 많은 광야라지만 비가 오는 6개월의 우기 동안에는 작은 풀들이 돋아나 그런대로 양과 염소에게 풀을 뜯길 수 있었다. 하지만 비가 오지 않는 나머지 6개월간의 건기는 어떻게 버틸 것인가, 그것이 문제였다.

 

그러나 가축들과 함께 광야로 쫓겨난 목자들에게도 죽으란 법은 없었다. 건기가 시작되는 유월절부터 7주 동안만 잘 버티면, 이후 목자들이 가축들과 함께 농경지로 들어가는 것이 허락되었던 것이다. 보리 추수기인 유월절과 그로부터 7주 후인 칠칠절은 밀 추수기였다. 밀 추수가 끝난 칠칠절 이후부터 다음 해 농경 사이클이 시작되어 쟁기질을 해야 하는 초막절 전후까지는 농경지가 목자들에게 오픈되었던 것이다.

 

목자들은 칠칠절 이후 가축들을 데리고 농경지에 들어갔고, 그곳에는 밀 추수가 끝난 후 남아 있는 밀 밑동이 있었다. 이것을 가축들에게 먹이며, 목자들은 밀밭 사이에서 난 뽕나무를 배양해 주어 밀밭 주인에게 상응하는 보답을 했다. 성서 시대 목자들의 라이프 사이클을 이해할 때 자신을 ‘목자요 뽕나무를 재배하는 자’로 소개한 아모스 선지자의 알쏭달쏭한 직업이 이해된다.

 

아모스가 아마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라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재배하는 자로서 (암7:14)

 

누가복음은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탄생할 당시에 목자들이 밖에서 양들을 지키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눅2:8)

 

아기 예수 탄생과 관련된 크리스마스 시즌의 비밀은 바로 ‘밖에서’란 단어에 있다. 과연 ‘밖에서’라는 말은 뭘까? 집 바깥을 말하는 걸까? 양들을 집 안에서 칠 수 없으므로, 단순히 바깥(outside)을 의미한다고 볼 수 없다.

 

우리말 성경에 ‘밖에서’로 번역된 헬라어 원어는 ‘아그라울레오’(ἀγραυλέω)인데, 이는 단순한 바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농경지의 들판’(agricultural field)을 의미한다. 즉 아기 예수가 탄생할 때 목자들은 황량한 광야가 아니라 농경지에서 가축을 돌보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당시 목자들의 라이프 스타일을 감안하면, 크리스마스 시즌의 윤곽이 어느 정도 드러난다. 목자들이 가축을 데리고 농경지로 들어갈 수 있는 기간, 측 칠칠절(6월경) 이후부터 초막절(10월경) 사이의 기간이 되는 것이다.

 

(중략)

 

레위기 23장에 나오는 ‘절기’들이 단지 유대인들의 명절이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제정하신 ‘여호와의 절기’이고, 그 안에 하나님의 인류 구속의 계획들이 암호화되어 있다면, 예수님의 탄생일인 크리스마스는 분명 레위기 23장에 나오는 7개의 절기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칠칠절 이후부터 초막절 사이에 들어가는 절기는 단지 두 개뿐이다. 바로 신년(나팔절)과 대 속죄일이다. 그러면 두 절기 가운데 크리스마스와 가장 부합하는 절기는 무엇일까? 바로 신년일 것이다. 신년은 영광의 나팔을 불며 새로운 해의 시작을 알리는 절기다. 나팔을 불며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신년! 이 신년이야말로 영원 전에 계신 하나님이 이 땅에 아기의 몸으로 탄생함으로써 인류 구속의 역사를 위한 새로운 시대가 열렸음을 알리는 영광의 나팔을 불기에 가장 합당한 날이 아니겠는가! 바로 그날 하늘의 천군 천사들이 영광의 팡파르를 울리며 하나님을 찬송한 것이다. //

 

하루 중에도 낮이 있고, 밤이 있지 않습니까? 그것처럼 우리의 영적 상태도 수시로 변합니다. 늘 같지가 않은 것이죠. 낮은 어떤 때입니까? ‘’은 진리의 빛 안에 있는 때입니다. 진리의 빛 안에 있기 때문에, 말씀을 읽으면 이해가 잘 됩니다. 그뿐 아니라 자기가 이해한 진리로 늘 자신을 비춰볼 수 있습니다. 그때가 낮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은 빛이 없는 때입니다. 그래서 그때는 말씀을 읽어도 무슨 뜻인지 잘 이해가 안 되고, 또 진리가 없기 때문에 자신을 비춰볼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를 객관적으로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때가 밤입니다. 그래서 밤을 다른 말로는 시험의 기간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런 시험 가운데서도 주님이 주신 선과 진리를 잃지 않기 위해 사력을 다해 자신과 싸우는 신앙인들이 있습니다. 바로 그들이 밤에 자기 양을 지키기 위해 깨어 있는 목자들입니다. 이런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고 있는데 갑자기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9절입니다.

 

9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말씀에서 ‘주의 사자’(the angel of the Lord), 곧 천사는 진리를 뜻합니다. 천사가 왜 진리를 뜻할까요?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진리를 받을 뿐 아니라 그것을 삶으로 온전히 표현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천사는 자기 생각을 말하지 않고 오직 주님이 주시는 말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에서 천사는 진리를 뜻하며, 가장 높은 의미로는 진리 자체이신 주님을 뜻합니다.

 

※ 아래는 위 ‘그들, 즉 천사들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라는 문장에 대한 보충 설명입니다. ‘천국과 지옥’(김은경 역) 35장, ‘천국과 지옥은 인류로 말미암는다’(Heaven and Hell Are from the Human Race, 311-317) 311번 글입니다.

 

기독교계에서는 천국과 지옥이 인류로 구성되어 있음을 전혀 모르고 있다. 처음부터 천사는 천사로 창조되어 천국을 이루고 있었다고, 마귀 또는 사탄도 빛의 천사였다가 반역하여 그 일당과 함께 내쫓겨 지옥을 형성했다고들 믿기 때문이다. 기독교계에서 그렇게 믿고 있다는 것에 천사들은 무척 놀라고, 천국이야말로 교회 교리의 근본임에도 불구하고 교회에서 천국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다는 데 더욱 경악한다. 그러나 또한 그런 무지가 만연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 주님의 뜻에 따라 천국과 지옥에 대한 많은 사실이 기독교 사회의 사람들에게 밝혀지게 되었고, 기독교가 종말을 맞아 어둠이 나날이 증가하고 있는데, 이 계시로 인해 그 어둠이 가능한 한 많이 걷히게 되었다고 천사들은 진심으로 기뻐한다. In the Christian world it is wholly unknown that heaven and hell are from the human race, for it is believed that in the beginning angels were created and heaven was thus formed; also that the devil or satan was an angel of light, but having rebelled he was cast down with his crew, and thus hell was formed. The angels never cease to wonder at such a belief in the Christian world, and still more that nothing is really known about heaven, when in fact that is the primary principle of all doctrine in the church. But since such ignorance prevails they rejoice in heart that it has pleased the Lord to reveal to mankind at this time many things about heaven and about hell, thereby dispelling as far as possible the darkness that has been daily increasing because the church has come to its end.

 

[2] 그래서 천사들은 내가 그들의 다음 말을 증언해 주기를 원했다. ‘천국 전체에 처음부터 천사로 창조된 천사는 단 한 명도 없다. 지옥에도 빛의 천사로 창조되었다가 쫓겨난 악마는 없다. 천국이나 지옥이나 전부 인류가 가서 이룬다. 천국은 세상에서 천국의 사랑과 신앙으로 산 사람들로, 지옥은 지옥적 사랑과 신조로 산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 또 마귀나 사탄은 지옥을 통칭하는 말이다. 마귀는 악마들이 모여 사는 뒤쪽 지옥을, 사탄은 악령들이 모여 사는 앞쪽 지옥을 말한다. 각 지옥의 속성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룰 것이다. They wish for this reason that I should declare from their lips that in the entire heaven there is not a single angel who was created such from the beginning, nor in hell any devil who was created an angel of light and cast down; but that all, both in heaven and in hell, are from the human race; in heaven those who lived in the world in heavenly love and belief, in hell those who lived in infernal love and belief, also that it is hell taken as a whole that is called the devil and satan—the name devil being given to the hell that is behind, where those are that are called evil genii, and the name satan being given to the hell that is in front, where those are that are called evil spirits. The character of these hells will be described in the following pages.

 

[3] 천사들은 이렇게 말했다. ‘기독교 사회가 천국과 지옥의 구성에 대해 잘못 믿는 것은, 해당 구절들을 오로지 글자 그대로 이해했을 뿐, 말씀에서 이끌어 낸 참된 교리로 깨우침이나 설명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말씀의 문자 상의 의미는 참된 교리로 설명되지 않으면, 사람의 마음을 오도하고, 이것이 무지한 견해와 이설과 오류를 낳는 것이다.’ The angels said that the Christian world had gathered such a belief about those in heaven and those in hell from some passages in the Word understood according to the mere sense of the letter not illustrated and explained by genuine doctrine from the Word; yet the sense of the letter of the Word until illuminated by genuine doctrine, draws the mind in different directions, and this begets ignorance, heresies, and errors. (HH.311) //

 

※ 그리고 하나 더, 여기 목자들이 천사들을 본 걸로 나오는데, 과연 자연계, 물질계의 존재가 영계의 존재를 육안(肉眼)으로 볼 수 있는지, 이런 궁금점에 관한 아랫글을 참고하세요.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사람은 육신의 눈으로는 천사를 볼 수 없고, 사람 안에 있는 영의 눈으로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영은 영계에 있고, 육신은 물질계에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자기와 동질의 것 밖에는 볼 수 없다. 게다가 잘 알려진 대로, 눈이라는 신체 기관은 조야(粗野)해서 확대경 없이는 물질계의 미세한 것들도 볼 수 없다. 하물며 물질의 영역을 초월한 영계를 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육안에서 떠나 그 영안이 열리면 영계를 볼 수 있다. 주님이 영계를 보여주시고자 하면 언제든지 즉시 보게 된다. 그러나 그때 사람은 자기 육안(肉眼)으로 보고 있다고 여긴다. 아브라함, 롯, 마노아(삿13, 삼손의 아비) 등 선지자들이 천사를 봤을 때도 그랬고,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봤을 때나 내가 천사들을 본 것도 마찬가지다. 선지자들이 이런 식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들을 ‘보는 사람들’(seers)이라 하고, ‘그들의 눈이 열렸다’(to have their eyes opened)고 했으며(삼상9:9, 민24:3), 또 이렇게 영계를 보게 하시는 것을 ‘그 눈을 여신다’(opening their eyes)라고 표현한 것이다. 엘리사의 사환에 대한 기록이 그 예이다. But it must be remembered that a man cannot see angels with his bodily eyes, but only with the eyes of the spirit within him, because his spirit is in the spiritual world, and all things of the body are in the natural world. Like sees like from being like. Moreover, as the bodily organ of sight, which is the eye, is too gross, as everyone knows, to see even the smaller things of nature except through magnifying glasses, still less can it see what is above the sphere of nature, as all things in the spiritual world are. Nevertheless these things can be seen by man when he has been withdrawn from the sight of the body, and the sight of his spirit has been opened; and this can be effected instantly whenever it is the pleasure of the Lord that man should see these things; and in that case man does not know but what he is seeing them with his bodily eyes. Thus were angels seen by Abraham, Lot, Manoah, and the prophets; and thus, too, the Lord was seen by the disciples after the resurrection; and in the same way angels have been seen by me. Because the prophets saw in this way they were called “seers,” and were said “to have their eyes opened” (1 Sam. 9:9; Num. 24:3); and enabling them to see thus was called “opening their eyes,” as with Elisha’s servant, of whom we read: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시매 그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왕하6:17) Elisha prayed and said, Jehovah, I pray Thee open his eyes that he may see; and Jehovah opened the eyes of the young man and he saw, and behold the mountain was full of horses and chariots of fire round about Elisha (2 Kings 6:17). (HH.76, 김은경 역) //

 

또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라고 했는데 그것은 주님의 임재를 뜻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임재하실 때,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성한 진리가 마치 밝은 영광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천사가 빛과 함께 목자들에게 나타난 것은 그 속뜻으로는, 진리이신 주님이 선한 신앙인들에게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목자들이 크게 무서워했습니다. 말씀에는 주님을 만나는 사람들이 두려워 떠는 모습이 여러 곳에 나옵니다. 예를 들면, 다니엘이 그랬고요, 사가랴도, 마리아도 주님을 만날 때, 그러니까 주님이 보내신 천사 가브리엘을 만날 때에 그랬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신성이 사람의 내면으로 흘러 들어올 때에는 누구나 마음이 크게 동요되고요, 심지어 전율 같은 것을 느낀다고 합니다.

 

※ 저는 아직 이 정도의 체험은 아니지만, 나름 충격적인 영적 체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정원 목사의 저서, ‘대적기도’를 읽고, 잠자리에 누워 ‘귀신아!’ 따라 해 보다가 내 안에 숨어든 악령을 어렴풋이 보게 된 체험이었습니다. 지난 2013년 12월 15일 주일 밤에 있었던 일인데, 다음은 그날의 일지에 적힌 내용입니다.

 

자정 즈음, 다시 치통 시작, 잠결에 ‘귀신아!’ 하였더니 갑자기 온몸에 전율이 오래도록 지속, 정원 목사님이 대적기도 책에서 기술한 그대로의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직감, 내 안에 뭔가가 숨어 있다가 들켜 어쩔 줄 몰라 하는 듯한 느낌 받음,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나가라’ 하는데 혀가 꼬여서 발음이 잘 안됨, 아내, 내가 잠꼬대를 하는 줄 알고 대적기도 중인 나를 계속 흔들어 댐... 전율이 잦아들 즈음, 치통도 사라짐, 책의 내용 그대로여서 너무 신기, 아내에게 자초지종 설명

 

제 안에서 몰래 활동하던 악한 영이 그만 갑자기 들키는 바람에 저쪽 주방 정수기 쪽으로 황급히 숨는 무슨 다급함이었지요. 형체는 그냥 검은 그림자 모습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비춰보면 좀 창피한(?) 체험이긴 한데, 이 일로 수년 후, 스베덴보리의 ‘천국과 지옥’에서 아랫글을 읽었을 때, 덕분에 별 어려움 없이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각 사람에게는 선한 영들과 악한 영들이 와있다. 선한 영들을 통해서는 사람은 천국과 결합되고, 악한 영들을 통해서는 지옥과 결합된다. 이 영들은 천국과 지옥 사이에 놓여 있는 중간 영계에 있다. 이곳에 대해서는 앞으로 특별히 다룰 것이다. 이 영들이 사람에게 오면 사람의 기억 전체 안으로 들어가고, 그렇게 해서 생각 전체에 들어간다. 이때 악한 영은 사람의 악한 기억과 생각 속으로, 선한 영은 선한 기억과 생각 속으로 들어간다. 이 영들은 자기들이 사람과 같이 있다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 그들이 사람과 같이 있을 때, 그 사람의 모든 기억과 생각이 자기 것인 줄 안다. 또 그들에게는 그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우리 태양계 내의 것은 아무 것도 그들 시각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주께서는 영들이 자기가 사람과 같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도록 각별히 배려하신다. 만일 그들이 알아차리면 사람에게 말을 걸 것이고, 그렇게 되면 악한 영의 경우, 사람을 파괴하려 들기 때문이다. 악한 영들은 지옥과 결합되어 있으므로, 그들이 가장 바라는 것은 바로 사람의 영혼을, 즉 그의 신앙과 사랑을 파괴하고, 사람의 몸까지도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들이 사람과 대화를 하지 않으면 그런 일이 없다. 이 경우, 그들은 자기의 말과 생각이 사람에게서 온 것임을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서로 나누는 말도 사람에게서 온 것인데도 그들은 자기가 하는 생각과 말이 자기 것인 줄 믿는다. 그리고 누구나 자기 것은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영들은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도록 그들이 모르는 제재를 받는다. 나는 여러 해 동안 계속되는 경험의 결과로 사람과 영들과의 이러한 결합에 대해 너무도 잘 알게 되었다. 내가 이보다 더 잘 아는 것이 없을 정도이다. (HH.292, 김은경 역) With every individual there are good spirits and evil spirits. Through good spirits man has conjunction with heaven, and through evil spirits with hell. These spirits are in the world of spirits, which lies midway between heaven and hell. This world will be described particularly hereafter. When these spirits come to a man they enter into his entire memory, and thus into his entire thought, evil spirits into the evil things of his memory and thought, and good spirits into the good things of his memory and thought. These spirits have no knowledge whatever that they are with man; but when they are with him they believe that all things of his memory and thought are their own; neither do they see the man, because nothing that is in our solar world falls into their sight. The Lord exercises the greatest care that spirits may not know that they are with man; for if they knew it they would talk with him, and in that case evil spirits would destroy him; for evil spirits, being joined with hell, desire nothing so much as to destroy man, not alone his soul, that is, his faith and love, but also his body. It is otherwise when spirits do not talk with man, in which case they are not aware that what they are thinking and also what they are saying among themselves is from man; for although it is from man that they talk with one another, they believe that what they are thinking and saying is their own, and everyone esteems and loves what is his own. In this way spirits are constrained to love and esteem man, although they do not know it. That such is the conjunction of spirits with man has become so well known to me from a continual experience of many years that nothing is better known to me. (HH.292) //

 

말씀에서는 그 전율을 두려움이라고 표현합니다. 왜 그런 식으로 표현할까요? 그것에 대해서 ‘계시록 해설’ 677번 글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임재 시에 느끼는 공포는 지옥에서 오는 악과 거짓 때문에 내면의 영적 사람이 느끼는 두려움이다. 즉 악과 거짓들로 인해 그가 사랑하는 선과 진리를 잃을까 두려워하는 것이다. (이순철 역) Again, “terror” signifies in the spiritual sense terror on account of evils and falsities that are from hell, for these terrify the spiritual man, because they are the opposites of the goods and truths, which the spiritual man loves and the loss of which he fears. (AE.677)

 

※ 위 내용은 아래 계시록 말씀에 대한 주석이며, 영역은 Ager 역입니다.

 

그때에 큰 지진이 나서 성 십 분의 일이 무너지고 지진에 죽은 사람이 칠천이라 그 남은 자들이 두려워하여 영광을 하늘의 하나님께 돌리더라 (계11:13) //

 

그냥 주님을 만났기 때문에 두려워 떠는 것이 아니고요, 우리 내면의 속 사람이 자기도 모르게 떠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의 실체는 우리 속에 있는 악과 거짓들이 주님이 주시는 선과 진리를 행여 더럽힐까? 하는 두려움이라는 것입니다. 성도님들이 모두 아시는 것처럼 사람의 내면에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속 사람이 겉 사람을 믿지 못하는 것이지요. 왜 그럴까요? 겉 사람이 얼마나 세상의 유혹에 잘 넘어갈 수 있는지를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가장 순수한 진리로 오실 때 행여 주님을 더럽히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을 자기도 모르게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거룩한 두려움이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10절에서 천사가 말했습니다.

 

10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천사가 목자들에게 ‘무서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사실은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이제 내가 너희를 지켜줄 터이니 더 이상 겁내지 말라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서워하지 말라’는 말씀은 죽었던 생명의 소생을 의미합니다. 영적 의미로 생명의 소생은 어떤 것입니까? 그동안 세상 유혹에 자주 넘어지던 사람이 이제는 주님을 의지해서 다시는 넘어지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죽었던 생명이 다시 사는 것입니다. 주님이 오셨다고 해서 한순간에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계시록 속뜻’ 56번 글에는 주님이 우리에게 오실 때 일어나는 변화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거룩한 공포가 사람을 덮을 때 주님은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생명의 소생을 알리신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사람의 자아의 생명의 자리로 들어올 때, 거룩한 공포를 느끼는데, 그것은 가끔 마음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거룩한 전율이나 소름과 합쳐진다. 사람의 자아의 생명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주님을 바라보지만,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주님을 바라보는데, 그러나 마치 자기 자신으로부터 그렇게 하는 것처럼 한다. 사람이 후자의 생명 안에 있을 때 그는 자기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요 오직 주님이 전부시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계시록 속뜻 56, 이순철 역) And as a holy fear seized him, the Lord said, on his being resuscitated, “Fear not.” Holy fear, which sometimes is joined with a sacred tremor of the interiors of the mind, and sometimes with horripilation, supervenes, when life enters from the Lord in place of one’s own life. One’s own life is to look from one’s self to the Lord, but life from the Lord is to look from the Lord to the Lord and yet as if from himself. When man is in this latter life, he sees that he himself is not anything, but the Lord only. (AR.56)

 

※ 위 스베덴보리 저, ‘계시록 속뜻’(Apocalypse Revealed) 56번 글은 아래 계시록 1장 17절 말씀,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계1:17)

 

에 대한 주석이며, 영역은 Whitehead 역입니다. 참고하세요. //

 

주님이 오실 때 비로소 우리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주님을 바라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기 자신으로부터 주님을 바라보는 것과 주님으로부터 주님을 바라보는 것은 서로 어떻게 다를까요? 자기 자신으로부터 주님을 바라보는 것은 자기 사랑으로 주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다 그렇지요. 신앙생활 하는 것도 자기를 위해서 하고, 교회에 오는 것도 자기를 위해서 옵니다. 그런데 주님이 오시면 주님으로부터 주님을 바라봅니다. 그때는 자기는 온데간데없고, 오직 주님에 대한 사랑으로 주님을 향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될 때 어떤 시련도 우리를 넘어뜨릴 수 없습니다. 그러니 죽었던 생명이 다시 사는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래서 주님은 무서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천사는 또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말했습니다. 말씀에서 ‘좋은 소식’이란 주님이 오셔서 당신을 믿는 사람을 구원하신다는 진리를 말합니다. 이것은 성경 전체가 일관되게 주장하는 진리입니다. 따라서 천사가 좋은 소식을 전하는 것은 진리가 자기 스스로를 증거하는 모습입니다. 진리는 자기 스스로를 증거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저는 직업상 진리를 전하는 일을 하고는 있지만, 가끔 말로 진리를 증거하는 것에 대해 회의를 느낄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잘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 그럴까요? 사람이 말하는 진리는 진리가 아닌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가급적이면 진리가 스스로 증거하도록 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진리가 스스로 증거하게 할 수 있을까요? 진리를 말함과 함께 그에 따라 살면 됩니다. 그때 각자의 삶을 통해 진리가 스스로를 증거합니다. 그리고 그때 진리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사람들은 말이 아니라 진리에 따라 사는 모습을 볼 때 감동합니다. 왜 그럴까요? 진리의 능력이 전해지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주님은 진리 자체이신 분이기 때문에 전혀 다릅니다. 주님의 말씀 자체에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자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라고 하셨는데요,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진리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진리가 스스로 증거하는 모습입니다. 이제 ‘천사가 좋은 소식을 전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짐작하실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오실 때, 비로소 주님의 임재와 구원의 확신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계신 주님께서 스스로 증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오시기 전에는 어떻습니까? 주님이 오신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인정했지만 확신하지는 못했습니다. 주님이 과연 우리에게 오실까? 주님이 완고한 나의 성품을 바꾸어 주실까?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오실 때 그러한 확신이 생깁니다. 안 되는 것이 되기 시작하니까요.

 

11절과 12절에서는 천사가 전하는 좋은 소식을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기술합니다.

 

11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말씀에서 ‘다윗’은 주님을 나타냅니다. 주님이 다윗의 고향 베들레헴에 태어나신 것은 그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베들레헴’의 속뜻은 무엇일까요? 베들레헴은 새로운 진리, 즉 선을 동반한 진리가 태어나는 곳입니다. 이전에 가지고 있던 진리가 선 없는 진리였다면 베들레헴에 태어나는 진리는 선을 동반한 진리라는 것이죠. 그 새로운 진리가 강보에 쌓여 누워계신 주님이세요. 지난 시간에도 설명드린 것처럼, ‘강보’는 순진무구의 진리를 나타냅니다. 즉 선과 하나가 된 진리 그 자체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베들레헴, 즉 다윗의 동네는 그 속뜻으로는 세상의 어떤 지역이 아니라 거듭나는 사람들의 내면에 있는 어떤 곳입니다. 베들레헴이 사람의 내면 어디쯤에 있는지는 천국의 비밀 4592번 글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거기서는 베냐민에 대해 설명을 하고 있는데, 베냐민이 태어난 곳 베들레헴이 영적 사람과 천적 사람의 중간쯤에 있다고 말합니다. 사람의 내면에는 보통 자연적 사람이라고 하는 겉 사람이 있고요, 영적 사람이라고 불리는 속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안쪽 더 깊은 곳에 천적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거듭난다는 것은 이 세 가지 내면의 의식, 천적 의식과 영적 의식, 그리고 자연적 의식이 서로 연결되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왜 그것이 거듭나는 것이냐 하면, 그래야 주님의 생명인 선과 진리가 사람의 내면 가장 깊은 곳으로부터 가장 바깥쪽인 삶으로, 일상생활로 흘러나오고, 거기서 구체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천적 사람과 영적 사람, 자연적 사람이 서로 소통하여 하나 되어야 합니다. 결론을 말하면, 베들레헴은 영적 사람과 천적 사람의 중간에 있으며, 그곳에 주님께서 선을 동반한 진리로 오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곳으로 오셔야 영적 사람과 천적 사람 사이에 비로소 소통이 이루어지기 때문이지요. 그 전 상태는 어떻습니까? 영적 사람과 자연적 사람 간 연결만 되어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제 천적, 영적, 자연적 사람이 모두 통하기 시작하는데요, 이것이 바로 주님이 오셨을 때에 일어나는 변화들입니다.

 

※ 위 4592번 글은 아래 창세기 말씀에 대한 주석이며, 관련 영역은 Clowes 역입니다.

 

그가 죽게 되어 그의 혼이 떠나려 할 때에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의 아버지는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 (창35:18)

 

All men whatever are born natural, with the power of becoming either celestial or spiritual; but the Lord alone was born spiritual celestial, and for this reason he was born at Bethlehem, where is the boundary of the land of Benjamin, for by “Bethlehem” is signified the spiritual of the celestial, and by Benjamin is represented the spiritual of the celestial. The reason why the Lord alone was born spiritual celestial is that the Divine was in him. (AC.4592)

 

그러면 그 변화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입니까? 사람마다 고질병처럼 해결되지 않는 영적 문제들이 있는데 그것이 해결됩니다. 그리고 전에는 그냥 지적 기쁨을 위해서 진리를 추구했다면, 이제는 지혜를 얻기 위해 진리를 추구합니다. 삶의 목적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우리의 삶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우리가 자신에게 나타나는 그러한 변화를 느낄 때, 주님이 우리 내면에 오신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천사는 다윗의 동네에 강보에 쌓인 아기를 보았을 때 그것이 주님이 오신 표적이니라 말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을 믿는 것은 말할 수 없는 축복입니다. 그렇지만 주님을 믿기 때문에 당하는 시련이 너무 많습니다. 시험 가운데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거나, 또 진리를 알게 된 것을 후회한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이해하니, 그러한 모든 시험이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너무나 고마운 과정이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러한 과정이 없다면 우리는 주님을 진실한 마음으로 찬송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당신 자신을 위해서 찬송 받기를 원하지 않으세요. 인간을 위해 찬송 받길 원하십니다. 주님을 찬송한다는 것은, 우리 자아에서 나온 것은 모두 악이며, 오직 주님만 선하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찬송을 주님께 드리기 위해서는 시험에 맞서 싸우다 넘어지고, 또 일어나 싸우는 그런 혹독한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냥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말씀의 목자들은 그러한 시험들을 꿋꿋하게 버틴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가장 순수한 진리로 오십니다. 그때 우리 내면에 하늘이 열리고, 하늘과 땅이 비로소 하나 됩니다. 그리고 진정한 평화가 찾아옵니다. 평화가 무엇입니까? 시험에서 이길 때 자연히 찾아오는 상태, 그것이 평화입니다. 그래서

 

13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14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한 것입니다. 우리 교회 모든 분께 주님의 그런 은혜가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14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눅2:14)

 

아멘

 

 

원본

2016-09-04(D1)

청주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3-05(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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