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의 속뜻

 

 

21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23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창2:21-23)

 

 

※ 오늘은 창세기 2장,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신 후, 그의 갈빗대 하나를 꺼내 여자를 만드셨다는, 우리에게 익숙한 창세기 본문을 통해, 과연 이 본문의 속뜻, 겉 글자의 뜻이 아닌, 거기 담긴 아르카나(arcana 라틴, 秘義)는 무엇인지, 특히 여기 등장하는 ‘여자’는 무엇을 말하는지, 그리고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거의 모든 결혼식이나 결혼 관련 글마다 언급되는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표현이 과연 무슨 뜻인지 등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이 본문은 사람 안의 두 자아(自我, self, own, proprium 라틴, 본성)에 대한 내용인데요, 처음 주신 자아가 본래의 기능을 못 하게 되자, 여호와 하나님은 새로운 자아를 주시는데 그것이 바로 ‘여자’라는 것입니다.

 

※ 이 자아는 ‘본성’(本性)으로도 번역할 수 있는데 초창기 영역에서는 영어 ‘own’(proprium, 라틴, 고유 본성, 자아)으로 번역했습니다. 그러나 현대 영어 역본인 NCE(New Century Edition) 역에서는 ‘a sense of self’, ‘selfhood’, ‘a sense of autonomy’, 혹은 ‘identity’ 등으로도 옮기고 있습니다.

 

새 교회에서는 자아에 대해 어떻게 가르칠까요? 새 교회의 교리는 자아는 악 그 자체라고 하고, 그러므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자아가 죽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자아는 정말 그렇게 악한 것일까요? 엄밀히 말하면, 자아는 하나가 아니라 두 가지인데, 거듭나기 전의 자아가 있고, 거듭나기 시작하면서 주님에 의해 새롭게 주어지는 자아가 있습니다. 자아를 악하다 하는 것은 거듭나기 전의 자아를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생명이 흐르지 않는 죽은 자아이기 때문입니다.

 

※ ‘’(惡, evil)이란 주님에 대한 안 좋은 태도로서, 사람이 자기 본성을 주님보다 더 깊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태도가 안 좋은 것은, 이것으로 인해 주님의 모든 창조의 질서가 헝클어지고, 훼손되기 때문입니다.

 

그에 비해 거듭나기 시작하면서 새롭게 주어지는 자아는 하나님의 생명이 흐르는 살아있는 자아입니다.

 

※ 아래는 본문 중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의 ‘만드시고’에 관한 글입니다.

 

갈빗대를 가리켜 ‘여자를 만드시고’(to be built into a woman)라고는 하시지만, 전에 거듭남을 다룰 때처럼, ‘창조하다’(created), ‘짓다’(formed), ‘만들다’(made)라고 하시지는 않습니다. 그 이유는, 이 ‘만드는 것’(to build)은 쓰러져 있는 걸 일으켜 세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에서 이 뜻으로 쓰이는 곳마다, ‘만드는 것’(to build)은 주로 악에 관한, ‘일으켜 세우는 것’(to raise up)은 거짓에 관한, 그리고 ‘새롭게 하는 것’(to renew)는 둘 다에 관한 서술일 때입니다. (AC.153, 변일국 역)

 

그렇기 때문에 보통 전자를 지옥적 자아라고 부르고, 후자를 천국적 자아라고 부릅니다. 사람이 지옥적 자아의 상태에 있을 때는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하고,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으려고 하며, 심지어 주님이 도와주시려 해도 거절합니다. 그러므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지옥적 자아를 버리고 주님으로부터 천국적 자아를 받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왜 인간에게 자아라는 것을 주셨을까요? 자아는 인간을 독립적인 존재로 만드는 일종의 자발성(voluntary)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인간을 당신에게 종속된 기계와 같은 존재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스스로 판단하여 주님을 믿고 사랑하는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독립적인 존재로서 주님과 대화하고,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다시 그것을 주님께 돌려드리는 그런 존재로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창조물 가운데 인간 말고는 그 어떤 피조물에게도 자아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무겁게 생각해야 하고, 또한 주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인간의 자아가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본문 21입니다.

 

21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아담이 깊이 잠들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잠이 들었다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고, 심지어 알려고 하지도 않는 상태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자기 이외에는 누구에게도 관심이 없는 상태인데요, 그것이 영적으로는 깊이 잠들어 있는 상태, 잠든 상태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갈비뼈를 하나 취하셨습니다. 갈비뼈는 인간의 첫 자아로, 하나님의 생명이 흐르지 않는 자아를 뜻합니다. 그것은 지독하리만치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자아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갈비뼈에 비유했습니다. 갈비뼈의 단단하면서 안으로 구부러져 있는 모양이 자아의 자기중심적인 성향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 다음은 위 말씀에 대한 속뜻 주석인 ‘천국의 비밀’ 148번 글입니다. 참고하세요.

 

사람의 고유 본성(man’s own), 실제로 그가 무척 소중히 여기는 본성을 가슴에 속한 뼈인 ‘갈빗대’(a rib)라 하는 이유는, 태고인들 사이에서 가슴은 체어리티(charity)와 상응했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 심장과 폐가 들어있기 때문이지요. 뼈(bones)라는 건 아주 꺼림칙한 걸 의미했는데, 그 안에 생기라고는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살(flesh)은 생기 있는 걸 가리켰지요. 이런 상응들은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알려진 가장 깊은 아르카나 중 일부인데, 이 아르카나는 주님의 신적 자비(the Lord’s Divine mercy)에 속한 것입니다. (AC.148, 변일국 역)

 

주님께서 갈빗대 하나를 들어내시고, 그 자리를 살로 채우셨습니다. 살은 사람이 거듭나기 시작할 때, 주님이 새롭게 주시는 자아를 말합니다. 즉 하나님의 생명이 흐르는 살아 있는 자아인 것이지요. 살아있는 자아이기 때문에 그것을 뼈가 아니라 부드러운 살로 표현했습니다. 살아있는 자아란, 세상의 중심은 내가 아니라 주님이시며,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과 함께 세상을 천국으로 만드신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이해하는 자아입니다. 그러니 살아 있는 자아를 소유한 사람은 절대로 자기를 높이면서 다른 사람은 가볍게 여길 수 없으며, 모든 사람과 화합합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자아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갈빗대 일부가 살로 채워졌다는 것은 생명 없는 죽은 자아가 생명이 흐르는 살아있는 자아로 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아가 바뀌게 되면 사람도 따라 바뀝니다. 전에는 무슨 일을 하든지 자기 생각대로만 하려고 하고, 자신의 이익만 좇던 사람이 점차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살피면서 그에 따라 행동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새로운 자아가 생긴다는 것은, 잠들어 있던 사람이 깨어나는 것과 같다 하겠습니다.

 

22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여호와께서 아담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갈빗대’는 거듭나기 전부터 가지고 있던 자아, 즉 지옥적 자아를 뜻합니다. 그리고 ‘여자’는 거듭나는 사람에게 주님이 새로 주시는 천국적 자아를 뜻합니다. 따라서 갈빗대로 여자를 만들었다는 것은 인간의 겉 사람 안에 있는 자아가 지옥적 자아에서 천국적 자아로 바뀌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 여자를 데리고 오시는 것은, 주님께서 인간에게 새로운 자아인 천국적 자아를 주시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왜 처음부터 천국적인 자아를 주시지 않고, 지옥적 자아를 주시고 나서 천국적 자아를 주셨을까요? 그 이유는, 거듭나기 전의 사람에게 천국적 자아를 주시는 것은 그의 자유를 해치는 일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이기적인 사람에게 억지로 이웃 사랑을 강요하는 것과 같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거듭나기 전에는 그의 애정에 맞는 자아, 즉 지옥적 자아를 허락하시고, 거듭나려고 애쓰기 시작할 때, 비로소 천국적인 자아를 주십니다.

 

※ 다음은 ‘천국과 지옥’ 456번 글 3번 항 인용입니다. 역시 같은 질문, 즉 ‘왜 주님은 처음부터 보여주거나 알려주지 않으시는가?’에 대한 대답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떠나는 사람들 거의 모두가 자기들이 살아있으며, 전과 하나도 다름없이 보고 듣고 말하고 몸의 모든 촉감이 살아있는 똑같은 사람임을 발견하고 크게 놀란다. 그들은 자신에 대해 놀라고 난 다음에는 이 세상에 산 모든 사람이 저 세상에서 사람으로 살고 있는데도 교회가 사람의 이러한 사후 상태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고, 따라서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도 전혀 모른다는 사실에 놀란다. 또 그들은 교회의 신앙에 있어 이토록 핵심적인 사실을 왜 사람들에게 환상으로라도 보여 주지 않았는지 의아하게 생각한다. 그러면 천국에서 이런 대답을 들려준다. 주께서 하고자 하시면 그보다 쉬운 일은 없으므로 그렇게 할 수 있었겠지만, 반대되는 거짓을 확고히 한 사람들은 그들의 눈으로 본다고 해도 믿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사람이 거짓 안에 있을 때, 환상으로 무엇을 확신시키는 일은 위험하다. 그렇게 하면 그들은 처음에는 믿겠지만, 나중에 부인하게 되고, 그것은 진리 자체를 모독하는 것이 된다. 믿다가 나중에 부인하는 것이 모독이기 때문이다. 진리를 모독한 사람들은 모든 지옥 중에서도 가장 낮은 무서운 지옥에 가게 된다. (HH.456:3, 김은경 역)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 여자를 데려가셨을 때 아담이 한 말입니다.

 

23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아담이 여자를 가리켜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하는 것은, 주님께서 인간의 겉 사람 안으로 새로운 자아를 보내 주실 때의 자아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즉, 겉 사람 안에 천국적 자아와 지옥적 자아가 함께 있는 것을 의미하지요. 왜냐하면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뼈 중의 뼈는 겉 사람 안에 본래부터 있던 지옥적 자아를 말하고, 살 중의 살은 주님께서 속 사람을 통해 새로 주시는 천국적 자아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거듭나는 동안, 겉 사람 안에 선과 악이 공존하는 것처럼, 자아도 천국적 자아와 지옥적 자아가 공존합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 때는 지옥적 자아가 천국적 자아를 누르고 올라서고, 어느 때는 천국적 자아가 지옥적 자아를 누르고 올라섭니다. 그런 과정들을 거쳐 천국적 자아가 지옥적 자아를 완전히 누를 때, 인간은 비로소 거듭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본문에 아담이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말하는 것은 사람이 천국적 자아를 통해 거듭난 상태를 뜻합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이것’은 거듭나고자 힘쓰는 사람에게 주시는 새로운 자아인 천국적 자아를 뜻하고, ‘남자’는 속 사람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한글 성경에는 ‘여자’라고 되어 있는데 사실은 잘못된 번역이고, ‘아내’(wife)가 맞습니다. 그리고 본문 원전에 여자라고 하지 않고, 아내라고 한 것은 완전히 거듭난 사람의 겉 사람 안에 있는 자아는 아내가 남편을 섬기는 것처럼 속 사람에게 완전히 복종하는 자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겉 사람의 자아를 아내라고 부를 때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완전하게 결합한 상태, 즉 완전히 거듭난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상의 말씀을 통해 인간이 거듭나는 데 있어서 자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이며,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알았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자아란 누구의 강요 없이 스스로의 판단으로 주님께 복종하도록 하는 자발성, 또는 자유의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 76번 글 2번 항은, ‘자아가 없다면 아무도 주님으로부터 믿음과 인애에 관한 모든 것을 받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섭리 76:2, 이순철 역) As good and truth so appear, so do all things of the church and of heaven, and all things of love and wisdom, and all things of charity and faith; yet none of them is man’s. No one can receive them from the Lord unless it seems to him that he perceives them for himself. (DP.76:2)

 

※ 위 문장은 스베덴보리 저, ‘하나님의 섭리’(Divine Providence) 5장, ‘사람이 이성으로 자유롭게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 법칙 중 하나다’(It Is a Law of Divine Providence That Man Shall Act from Freedom According to Reason)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자아가 없는 인간은 살아있는 존재라고 볼 수 없습니다. 주님은 인간에게 두 가지 자아를 주셨습니다. 하나는 거듭나기 전의 자아로 지옥적 자아이고, 또 하나는 거듭나기 시작하면서 주시는 천국적 자아입니다. 새 교회 가르침에서는 주님이 말씀하시는 진정한 자아는 천국적 자아이며, 그 전의 자아는 자아의 외관(appearance of proprium)일 뿐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천국적 자아가 생기기 전의 자아는 진정한 자아가 아니고, 자아처럼 보이는 어떤 것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천국적 자아에는 주님의 생명이 있고, 인간의 자아에는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생명이 있는 것이 진정한 자아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매 순간 스스로의 생각과 의지로 지옥적 자아를 딛고, 천국적 자아를 선택하기를 원하십니다. 세상 사는 동안 주님이 주신 자유를 선용하여 부단히 천국적 자아를 획득해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과 하나 되어 영원히 사는 일이며, 영원한 자유와 평화를 얻는 길입니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겔37:5)

 

아멘

 

 

2021-11-07(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5-02-16(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02-16(D1)-주일예배(2584, 창2,21-23),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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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5-02-16(D1)-주일예배(2584, 창2,21-23),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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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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